22장 반추(反芻)
“정녕 기억을 못 하신단 말씀입니까?”
뜨악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쩍 벌린 승지의 몰골이 어찌나 기괴하던지, 황제는 기하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며 들었던 초조반이 얹히는 느낌에 가슴을 탕탕 쳤다.
조강도 대충 하다 물리고, 아침잠이 많은 기하가 일어나기 전에 다시 태화당으로 가려 하였거늘. 기어코 옷자락을 붙들며 독대를 청한 승지의 흉흉한 기세에 못 이기는 척 따라와, 밤새 궁금하였던 것을 물으니 저 표정이다.
“시끄럽다, 이놈아. 웬 목청이 이리 커?”
“소장이 지금 흥분 안 하게 생겼습니까? 어제는 갑자기 그림자를 물리시더니, 5년 전 일을 지금에 와서 뭘 어쩌시려고 물으십니까? 그것보다, 기억이 안 나신다니요?”
“웬 사족이 이리 길어? 묻는 말에나 답해라.”
사납게 얼굴을 찡그리는 황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승지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말인즉슨, 무빈과의 초야 때 그것을 지켜본 그림자가 있었는지에 대한 것이었는데…….
“아마 여섯 즈음 있었을 것입니다.”
“네놈도 봤느냐?”
“본래는 그것이 법도지요. 하나, 아시잖습니까. 폐하를 가장 가까이서 모셔야 하는 것이 소장의 임무이나,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차마 그것은…….”
스물하나의 비빈을 고루 품어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 황제는 강건한 사내였다. 물론 그것은 일종의 정해진 규율과도 같은 것이었다. 누구 하나 부족함이 없게, 그러나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고루고루 밤을 보내야만 시끄러운 말이 돌지 않았다.
제 자식을 볼모나 다름없는 처지로 황제에게 시집보낸 후, 매일 눈과 귀에 불을 켜고 촉각을 곤두세우며 견제하는 오왕과 귀족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무언가도 필요했다.
물론 그것은 모두 황제가 전장에 나가기 전의 일로, 후궁 중 절반은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었다.
“좋지도 않은 일을 지금 와서 뭐 하러 들추십니까? 벌써 그것이 몇 해 전입니까. 다시 꺼내 봐야 무빈께서도 기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어째서.”
“암만 강단 있는 사내라도 엄연히 초야입니다. 게다가 아직 약관도 치르시지 않은 어린 나이셨지 않습니까? 빈곤하다고는 하나, 북성의 왕자이십니다. 한데 얼마나 초라한 혼인이었습니까. 실컷 사냥하시고, 일부러 짐승 피까지 뒤집어쓰시고는―.”
“됐다.”
손을 휘휘 저으며 황제는 승지의 입을 막았다. 빌어먹을, 모두 다 기억나고 말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그날의 기억 전부.
“폐하, 그림자를 물리시는 것은 절대로 아니 될 일입니다.”
“시끄럽다.”
“그들은 말 그대로 폐하의 그림자가 아닙니까. 괜히 한 번 의식하시면…….”
“그림자건 뭐건, 절대로 그 아이를 보일 생각 없으니 전각 밖에서 대기하라 해.”
“그것은 너무 위험한 일입니다.”
“뭐라?”
특유의 능글거리는 미소를 지운 승지는 딱딱한 얼굴로 황제를 응시했다. 그는 황궁 안, 아니 세상 그 누구보다도 충직한 황제의 신하였다.
“똑바로 얘기해. 뭐가 위험하다는 거냐.”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북성은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아직 공론화되지 않았어. 한데?”
“무빈께서 기력이 쇠하셨다고는 하나, 무예에 능하신 분이십니다.”
“닥쳐라.”
“신 또한, 그런 일이 절대로 일어나서는 아니 된다 생각합니다. 아니,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폐하…….”
“그만.”
승지의 말이 옳았다. 어떤 것이든 함부로 속단하고 결정짓지 않기로 늘 다짐하고 있지 않나. 작은 틈이 둑을 무너뜨리듯, 사소한 것이 나라를 뒤흔들 수 있다.
뼈아픈 경험으로 익히 깨달은 것들을 늘 가슴에 새기고자 하였건만, 인간이란 이렇게도 무지하다. 하지만, 그 아이는…….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고 싶어서입니다. 만에 하나, 삿된 무리로 인해 폐하와 마마께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 그것을 막아내기 위함입니다. 무빈마마께서도 이해하실 것입니다.”
“그래, 그렇겠지. 그 아인, 짐을 위해서라면 불 속에라도 기꺼이 뛰어들 테니까.”
그 눈이 그렇게 말한다. 오랜 시간, 변하지 않은 표정이 말한다. 설령, 그 모든 것이 원망으로 뒤덮인 날카로운 복수의 칼날이라 하더라도 이제는 막아설 도리가 없다. 이미 마음이 온통 그 아이로 젖었으니, 멈추고 싶다 한들 멈춰지지 않으리라.
“빈이 기다리겠다. 그만 가자.”
“폐하.”
“북성에 전서응을 보내라.”
“북왕은 폐하께서 긴밀히 보내신 사자의 손목을 잘라 보냈습니다. 그것으로도 답이 부족하십니까?”
“원하는 답이 올 때까지다. 얼굴 펴라. 그 아이, 은근히 눈치가 빠르거든.”
빙긋이 미소하는 황제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승지는 주먹을 바르르 쥐었다.
왜 하필 지금인가. 어째서, 지금인가. 저렇게 웃으시는 모습이 얼마 만인데. 난생처음 누군가를 가슴에 담아 어찌할 바를 모르시는 행복한 모습 또한 처음인데. 어깨에 드리운 짐, 조금이라도 가벼워지면 어때서. 왜, 왜 하필 지금 이 순간을 부수려 하는가.
제 무릎을 베고 누운 기하가 손가락을 붙잡아 온다. 현 상궁이 내어 온 차가운 꿀물을 겨우 들이켜고도 머리가 아프다며 끙끙거리는 몸을 눕게 하니, 잠이 오는지 자꾸만 눈을 감으려 든다.
“수라는 들고 자야지.”
“머리도 아프고, 눈도 따끔거립니다.”
아마 아직 면경(面鏡)을 보지 않아 퉁퉁 부은 눈을 발견하지 못했으니, 어찌 눈과 머리가 아픈지 모르겠지. 잠이 들 무렵 다정하게 품에 안아 다독여 주었더니 불현듯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던 기하는, 열이 올라 벌건 몸뚱이로 제 가슴을 치대며 서럽게도 울었다.
차라리 소리를 내고 말이라도 하면 속이 시원할 텐데. 말없이 눈물만 뚝뚝 흘리는 것이 답답해 참지 못하고 말 한마디 했다가, 본전도 못 찾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시피 해야 했다.
“찬 영견을 내오라 했어. 곧 가져올 것이다.”
“해가 중천인데 이리 누워 있으니, 게으른 후궁이라고 손가락질할 겁니다.”
“감히 누가 네게 손가락질한단 말이냐. 그랬다간 당장 손모가지를 자를 테니 안심해.”
“무서운 말씀 하지 마십시오.”
정말로 황제가 마음만 먹으면 당장에라도 그럴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터라, 기하는 괜히 유난을 떨며 손사래 쳤다. 게으르고 못난 후궁이라 손가락질 받아도 상관없다.
어질고 현명한 후궁이라면, 황제께서 얼른 초조반 젓수시고 금룡전으로 걸음 하시어 정사에 매진하시도록 힘써야 하겠지만, 부족한 것뿐인 마음이 그것을 원치 않는다. 그저, 오래오래 제 곁에 머물러 주셨으면 좋겠다.
“술을 괜히 마셨습니다. 달고 맛이 좋아 연달아 마셔서…….”
“짐이 먹으라 권하지 않았느냐. 괜찮다.”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황제는 너그럽게 웃었다. 큰 소리 내지 않을 것이다. 역정도 내지 않을 것이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고, 온 마음을 다해 아껴줄 것이다. 부족함이 없도록, 외롭지 않도록, 지난날의 원망도 모두 씻어낼 수 있도록.
“폐하? 어찌 그리 보십니까?”
“아니다.”
문득 떠오른 기하와의 초야는 생각보다 훨씬 참혹했다. 가슴속에 남아 있던 분노를 모두 불식하기 위해, 이 아이를 제물로 삼으려 했다. 처음엔 짐승처럼 범하고 난 후, 그대로 목을 잘라 서연에게 보낼 셈이었다. 물론 중간에 마음이 바뀌어 오래도록 괴롭히는 것이 낫겠다는 것으로 생각을 고쳤지만. 지금은 그 마음조차 죄스러웠다.
“어제 혹, 폐하께 주정을 하진 않았습니까?”
“곤히 잘만 잤다.”
눈에 보이게 안도하는 기하의 뺨에 연신 입을 맞춘 황제는 상궁이 내어 온 차가운 물에 적신 영견을 접어 그의 눈 위에 올렸다. 뭐가 그리 서러웠을까. 어찌 그리 내내 울었을까.
옷깃을 조심스럽게 붙잡아 오는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깍지를 걸자, 기다렸다는 듯이 품으로 안겨드는 어깨를 다독였다. 어젯밤보다 한결 낮아진 체온을 마주하자, 초야의 환영이 눈앞을 어지럽힌다.
“기하야.”
“예?”
“한잠 달게 자고 일어나서, 낮것은 후원에 나가서 들자.”
“후원 말입니까?”
“정연도 데리고 가도 좋다.”
“진심이십니까?”
“네가 원하면 짐승도 데려가도 좋아.”
입꼬리가 반듯하게 올라간다. 얼른 제 허리춤을 붙잡고 더더욱 바짝 안겨 드는 기하를 바라보는 황제의 표정이 애틋하게 변했다.
털썩, 제 옆으로 주저앉는 승지를 힐끗 쳐다보던 서엽은 손에 쥐고 있던 풀잎을 휙 던졌다. 처음 입궁하였을 때만 해도 종일 기하의 말동무를 하면서 사내의 손이 필요한 태화당의 여기저기를 고치는 일까지 맡아 무척 바쁘게 지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제게 도움 청하는 이 하나 없는 하루는 지나치게 무료했다.
종일 곁에서 떨어지지 말고 기하를 지키라는 황후의 명령이 무색해진 것은 어느 순간부터였다. 사실 굳이 제가 나서지 않더라도 기하는 검을 잘 쓰고, 특히 궁술이 출중했다. 비록 심신이 쇠약해져 예전 실력이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그가 제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더욱이 보이지 않는 곳곳에 배치된 금룡대만도 꽤 많은 수이니, 자연스레 서엽이 할 일이 사라진 것이다. 그나마 소일거리 삼던 태화당 일 또한 어느 순간 늘어난 노비며 궁인들이 척척 해내니, 이것은 꼭 불편한 자리에 어정쩡하게 끼어 앉은 객이 된 기분이었다. 지금도 황제께서 납셔 계시니 할 일이 없어, 쓸데없이 풀이나 뜯고 있지 않은가.
“자네나 나나, 완전히 갈 곳 잃은 처량한 신세구만.”
“소신이 감히 대장님께 비할 바 있겠습니까.”
무뚝뚝한 서엽의 음성에도 승지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아무리 북성이 의심스럽고 서연이 간악한 자라고는 하나, 그는 기하의 진심을 믿었다. 처음 본 순간부터 유난히 그에게 마음이 갔던 까닭은 아마 진실 된 눈빛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서엽 또한 마찬가지였다. 비록 순수하게 제 마음을 드러내진 않더라도, 서엽은 우직하고 진솔한 사내였다. 과거가 어찌 되었건, 그는 기하의 수족이었다. 그가 변하지 않는다면 서엽 또한 변하지 않을 것이다.
“자네도 고생이 많지 않은가? 귀하게 자라신 도련님들은 그것이 문제라니까. 순 고집불통에 제멋대로시지 않나?”
“마마께서는 어릴 적부터 순하기 그지없는 분이셨습니다. 물론, 고집은 좀 부리셨죠.”
“역시 그렇구먼?”
“순하기만 한 아이가 어찌나 고집이 센지, 가끔 고집을 부리시면 당해낼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자네와 함께 자랐다고 했던가?”
“젖형제나 다름없지요. 연유는 모르오나 마마께서도 소신의 젖어미에게 자랐으니까요.”
덤덤하게 과거를 헤아리면서도, 서엽은 마냥 유쾌한 기억은 아닌지 얼굴을 찌푸렸다. 덥고 습한 바람이 불어 파릇하게 돋아난 수풀을 에워쌌다.
“북성은 여인이 귀하다 하였던가? 유모도 구하기 힘들었나 보네. 왕이 지나치게 검소하고 관대하였다지?”
“지나치게 검소하셨던 것은 살림이 궁핍하여 그러셨던 것이고, 관대하신 것은 모르겠습니다.”
“모른다?”
“백성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성군이셨지만, 글쎄요. 마마께 좋은 아버지가 아니셨던 것은 분명하지요.”
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자란 서엽이 기억하는 왕은 언제나 무서운 얼굴로 제 아비를 다그쳤다. 그들이 하는 말이 너무도 어려워서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했지만, 왕은 사나운 표정으로 아비에게 화를 내거나 저보다도 어린 왕자를 야단치기 일쑤였다.
궁핍한 처지에도 늘 백성들의 두터운 신망을 얻었던 자애로운 왕은, 성안에선 언제나 차고 시린 바람이 쌩쌩 불었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다정하게 변할 때가 있었으니, 자신의 장자이자 북성의 다음 왕이 될 서진하 앞에서였다. 그런 아버지의 등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던 기하의 울먹이던 얼굴이 문득 떠오르자, 서엽은 밀려드는 불쾌감에 머리를 휘휘 저었다.
“왜 그러나?”
“아닙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왕을 바라보던 기하는 늘 애정에 목말라 있었다. 그런 그가 바싹 마른 나뭇잎처럼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의 기분이란.
“아무래도 자네가 알고 있는 것과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상이한 것 같은데.”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북성에 궁금한 게 뭐가 있겠나. 상전을 올곧게 모시는 데 필요한 숨겨둔 이야기지.”
점점 찌푸려지는 서엽의 표정을 보아하니, 숨겨둔 이야기가 한둘이 아닌 것 같다.
“폐하께서 무빈마마를 어찌나 아끼시는지, 마마께서 미령하시다는 소식에 오늘은 조강도 물리치시고 다시 걸음 하신 것이 아닌가.”
“그리 애틋하셨으면 진작 좀 잘해 주시지 그러셨답니까.”
“어허, 사람 참. 목소리를 낮추시게.”
“없는 말을 지어서 하는 것도 아닌데, 왜 목소리를 낮추라 하십니까?”
“황궁엔 벽에도 귀가 달려 있다는 것을 모르나?”
그제야 슬쩍 입을 다물면서도, 도통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얼굴을 잔뜩 구긴 서엽을 향해 승지는 혀를 끌끌 찼다. 주인을 닮아 지나치게 우직했다. 그래 봐야 칼날 위에 위태로이 서 있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어찌 모른단 말인가.
아무래도 오늘은 이 사내를 살살 긁어 비밀스러운 이야기나 실컷 쟁여둬야겠다. 우리 폐하께서는 이런 임승지의 충정(忠情) 어린 마음을 아시려나 모르겠다.
북왕 서연은 자애로운 인품에 뛰어난 전술을 지닌, 오성의 왕 중 가장 성군으로 칭송받는 자였다. 또한 제국을 향한 그의 깊은 충심은 나라 안팎에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선황께서 가장 아끼시던 수하이기도 했다.
유년 시절, 제국 황실에서 유학 생활을 하며 선황의 막역한 친우로 자라던 서연은 예기치 못한 사온국의 침략에 부모를 잃고, 홀로 북성으로 돌아가 제 몫이 아니던 왕좌에 올라야 했다.
쑥대밭이 된 북성을 그대로 버리고 제국으로 귀환하라는 선황의 명에도 서연은 꼼짝하지 않았다. 모두가 버려진 땅이라 했지만, 그는 그 땅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아무리 뒤를 캐도 모르겠단 말이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승지의 음성에 멍하니 풀을 뜯던 서엽의 표정이 단박에 변했다. 황후의 청에 기꺼이 기하의 곁에 남기로 했어도, 북성엔 여전히 그의 가족이 있다. 비록, 다시는 집을 찾지 말라는 아버님의 명이 있었으나, 언제든 돌아만 간다면 어머니께서는 자신을 받아주실 거다.
“무슨 뒤를 캐신단 말씀입니까?”
“당연히 북왕을 말하는 것이지. 자네 표정이 어찌 그런가?”
“아무리 소신이 제국에 적을 두고 있다고는 하나, 엄연히 북성 출신입니다. 한데 어찌 그리 담담하게 북왕의 뒤를 캔단 말씀을 하십니까? 북왕께서는 한때나마 소신의 왕이시었고, 사사로이는 백부님이십니다.”
“사사로운 것으로 치자면, 폐하 또한 만만치 않음이야.”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네가 무빈마마의 사촌이니, 여염집이었다면 폐하께서 자네의 매제(妹弟)가 되시는 것 아닌가?”
갖다 붙이기는. 매제가 무언가, 매제가. 썩어 들어가는 서엽의 얼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승지는 미처 몰랐던 사실을 발견한 것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자네 또한 폐하와 아주 가까운 사이라는 것일세. 그러니…….”
“암만 소신께 이러셔도 달리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아버님께 내쳐지다, 겨우 이곳에 발을 붙인 몸뚱입니다.”
“이 답답한 사람아, 내가 지금 자네한테 모략질이나 하라고 이러는 줄 아나?”
그런 것이 아녔냐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서엽을 보니, 답답해서 울화가 치밀었다. 도대체가, 어찌 이리 느리고 곰 같단 말인가! 눈치라고는 엿을 바꿔 먹었는지, 무뚝뚝한 얼굴엔 감정 하나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거, 됐고. 마마께서 좋아하시는 것이나 줄줄 읊어보게.”
“뭘 말입니까?”
“좋아하시는 거! 좋아하시는 것 전부! 드시는 거, 입으시는 거, 좋아하시는 색이나, 특별히 아끼시는 것이라든가! 뭐 그런 거!”
머리를 벅벅 긁적이며 굵은 눈썹을 꿈틀거리는 모습에 속에서 천불이 일었다. 아이고 답답해라. 저였기에 이 정도로 참는 것이지, 만약 성질 급하신 폐하께서 이 모습을 보셨다가는 진작 뭐가 날아들었을 것이다.
“워낙에 육식을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아이처럼 단 음식도 좋아하시고요. 의복이야 주는 대로 그냥 잘 입으셨던 것 같은데, 정확하게는 모르겠습니다.”
“이 사람아, 그건 나도 아네.”
“알면서 어찌 물으십니까?”
“뭔가 특별한 게 한 가지라도 있을 것 아닌가?”
“특별한 걸 소신이 어찌 압니까. 무슨 일만 있으면 그냥 입 꾹 다물고 속에 있는 얘기도 안 하시는 분인데요.”
“응?”
입을 국 다물고 얘기를 안 하신다? 마마께서 그러셨던가? 늘 지나치게 솔직하고 가감 없이 말씀하시어, 상대를 당황하게 만드시는 분이 아니라?
“잘 웃고 떠드시는 것은 그저 눈속임입니다. 어릴 때부터 눈치가 어찌나 빠르시던지, 회초리를 맞아도 금세 울음을 그치고 생글생글 웃는 아이였습니다.”
“회초리를 맞아? 북성은 왕족도 그리 호되게 교육을 받나?”
“아닐 겁니다. 소신도 철나기 전까지는 노비들이 대신 벌을 받았으니까요.”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야, 귀족들만 하더라도 제 피를 탄 자식들에게 쉬이 손찌검하지 않는다. 하물며 그는 왕족이었다. 그것도 적통 왕자가 아니던가.
“북왕께서, 드러내놓고 마마를 미워하셨나?”
“드러내놓고 미워하진 않으셨지요.”
북왕은 약관이 한참 지난 다소 늦은 나이에 혼례를 올린 후, 여인이라고는 평생 왕비 하나만을 곁에 두었다. 후궁 하나 없는 텅 빈 내명부를 걱정하는 신하들의 간곡한 청에도 불구하고, 그는 제 뜻을 굽히지 않았다. 왕비를 향한 그의 애틋한 연정은 제국까지 파다하게 소문이 나, 희대의 사랑꾼으로 여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기까지 했다.
아무리 자식이 귀하다고는 하나, 평생을 그리워한 여인의 목숨과 바꾼 아이니 마음속에 숨겨둔 미움이 때때로 드러날 수는 있다. 아버지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아주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마마께서 무얼 하시든 눈길조차 주지 않으셨지요. 정이 고픈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
“북성의 총아라는 별칭은 마마의 피눈물 나는 노력의 결실입니다. 자랑하고 으스대며 칭송받으려 한 것이 아니었단 말입니다.”
퉁명스러운 서엽의 말에 임승지는 미소를 거두고 그를 빤히 바라봤다. 괴로운 기억을 반추하듯, 서엽은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그들 사이에 녹아들어 천천히 부식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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