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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장 각(覺) (22/49)

21장 각(覺)

탕.

멀리 날아간 화살은 과녁의 동그란 부분을 한참 빗겨 나갔다. 파르르 떨리는 화살 끝을 확인한 황자는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기하를 올려다봤다.

“정말 잘하였습니다.”

활짝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기하의 손길에도, 아이는 시무룩한 얼굴을 지우지 못했다. 기하나 서엽은 훨씬 먼 거리에 있는 과녁도 명중하는데, 겨우 끄트머리에 걸린 화살이 야속했다.

“이야, 저하의 실력이 정말 출중하십니다. 정말 처음 배우신 것이 맞으십니까?”

답지 않게 칭찬을 늘어놓은 서 중랑은 황자가 쏜 화살을 거두고, 시무룩한 아이를 마주 보기 위해 무릎을 굽혔다.

마냥 순하고 수줍음 많은 아이로만 생각했던 황자는 생각보다 승리욕이 강했다. 몸이 둔해 바깥 활동은 도통 하지 않으려 했다는 상궁의 말이 무색하게, 금방 지치기는 하였으나 곧잘 뛰고 하라는 것도 척척 해내었다.

“응. 안 해봐써.”

“그런데도 이렇게 과녁을 척척 맞히신다고요? 소장은 여섯 살에 겨우 활을 잡았사온데, 화살을 잘못 날려 노비의 허벅다리를 쏘았습니다. 그것도 너무 이르다는 형님 말씀에 몰래 쏘았던 것이라, 아버님께 회초리를 스무 대나 맞았습니다.”

“진짜? 아팠겠다.”

“노비가 더 아팠지요. 자칫 평생 다리를 못 쓸 뻔했습니까. 저하께서도 활을 만지실 때는 언제나 주위를 잘 살피셔야 합니다.”

“응. 그럼 나 잘한 고야?”

“예, 그럼요.”

“히히.”

그제야 활짝 웃으며 기하를 향해 팔을 뻗은 황자가 통통한 팔을 버둥거렸다. 오랜 시간 햇볕 아래 서 있던 탓에 더위에 지친 기하는 으쌰, 하고 황자를 품에 안았다. 볼이 조금 홀쭉해서 살이 빠졌나 했는데 무게는 그대로인지, 이제는 황자를 번쩍번쩍 안기가 버거웠다.

“마마, 소자 잘해써요?”

“잘했습니다. 조금 더 연습하면 명중할 것입니다. 조금 더 크면 폐하와 사냥을 가도 되겠습니다.”

“사냥?”

“예.”

순간 겁에 질린 아이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이 왈칵 구겨지더니, 금세 입술을 삐죽이며 눈물을 쏟아낼 것 같다.

“사냥 시러요. 사냥 안 해요. 영이 친구, 안 돼요.”

이제는 제법 황자와 친해진 영이 주위를 뱅뱅 도는 것을 내려다보며, 아이는 눈물을 글썽였다. 아……, 그제야 짧게 탄식하듯 숨을 내쉬며 기하는 제 목에 매달린 아이를 품 안 가득 끌어안았다.

한 번의 실수는 있을 수 있으나,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아이의 모습에 마음이 놓였다. 비록 홀로 방치되어 외롭게 자랐으나, 아이는 마음이 따뜻하고 성품이 곧았다. 그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기하는 몇 번이나 황자의 등을 다독였다. 아직은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시리고 아픈 달이 생각나, 절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황자가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됩니다.”

“…응. 마마, 나 영이랑―.”

끙끙거리며 연신 서 중랑의 옷자락을 물고 늘어지는 영이 어지간히 심심해 보였는지, 황자는 짐승을 향해 조그마한 손을 팔딱였다. 폴짝폴짝 뛰는 짐승을 향해 손을 뻗으며 방긋거리는 황자를 내려놓자, 까르르 웃으며 뛰기 시작하는 모습이 마냥 어여뻤다. 늘 이렇게 평화로웠으면 좋겠다. 태어나 처음 맛본 평온함이 깨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알아보라 하였던 것은―.”

“동남성에 있는 친우에게 서찰을 보냈사옵니다. 아마 조만간 답신이 올 것입니다.”

“마음이 조급해집니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설마 왕께서 정말로 황제 폐하께 반기를 드셨겠습니까. 누구보다 제국을 향한 충심이 높으신 왕이 아니십니까.”

“지금의 폐하께도 같은 마음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선황 폐하께는 분명 충성의 맹세를 하셨지만…….”

“정 불안하시면, 소장이 북성을 한 번 다녀올까요.”

어둠으로 늘어졌던 기하의 얼굴을 바라보며, 서엽은 목소리를 낮췄다. 아무리 태화당 식구들이 기하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하나, 그들은 모두 황제의 사람들이었다. 지금은 황제가 기하를 아낀다지만, 북성과의 상황이 악화된다면 일이 어찌 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지 않은가.

“아니. 그건 됐어요.”

“북성에서 그리 일방적으로 마마께 연락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왕께서야 워낙에 철두철미하신 분이시니 그렇다 치더라도, 왕세자께서 마마께 그리하실 리가 없습니다.”

그것은 서엽의 말이 옳았다. 언제나 자신을 자식처럼 돌보아 주셨던 형님께서 소식을 뚝 끊으신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서엽뿐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리 제게 다정한 형님이라도, 아버님의 명이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아버님께서는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걸까. 어찌 소식을 끊으셨고, 이리 무모한 결정을 내리셨단 말인가. 반역이라니, 반역이라니.

“마마.”

“날이 너무 덥습니다.”

“예. 제국의 여름은 정말 견디기가 버겁습니다. 한여름이 되면 어떨지 생각만으로 끔찍합니다.”

“응. 뼈까지 흐물흐물 녹을 것 같아요.”

빙긋이 미소하며 이마를 쓸어 올린 기하는 멀리서 뛰노는 황자와 영을 바라봤다. 나인들 사이를 이리저리 뛰는 영을 잡으려는 황자의 웃음소리가 유쾌하게 퍼져 나간다.

“잠시 그늘에서 열을 좀 식히십시오. 너무 오래 서 계셨습니다.”

“형님마저 나를 여인 취급 하는 겁니까?”

“소장보다 튼튼하신 마마를 어찌 그리 생각하겠습니까. 다만 유난히 더위에 취약하시니 혹여 탈이 나실까 저어됩니다.”

“더위에 약해도 형님보단 강합니다. 잔말 말고 나인들 시켜 시원한 것이나 내오게 하세요.”

“예.”

마냥 얼굴을 구긴 채로 우울한 감성에 빠져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기하의 성품을 알고는 있지만, 어쩐지 서엽은 평소와 같은 그가 걱정되었다. 비록 마음을 나눌 정인이 곁에 계시다고는 하나, 그분은 제국의 주인이시니 모든 것을 드러내실 수는 없으실 것이다.

커다란 나무가 만든 그늘로 걸어가는 기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서엽은 착잡한 마음이 드러난 표정을 재빨리 갈무리하고, 안뜰로 저벅저벅 걸었다.

황제가 아무리 기하를 총애한다고는 해도, 늘 함께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나마 저녁 수라를 든 후부터 침수 들기 전까지 겨우 몇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그날은 제법 여유로운 편이었다.

보통은 늦은 시간까지 밀린 정무를 처리한 후 깊은 밤이 되어서야 겨우 침수를 위해 태화당까지 걸음 하는 황제였기에, 기하는 그때까지 잠자리에 들지도 못하고 단정하게 단장한 채로 앉아 꾸벅꾸벅 졸 때가 많았다.

아직 완쾌되지 않은 황자는 밤이 되면 미열이 돌았다. 동복궁에 가기 싫다는 황자를 이틀에 한 번 품에 안아 재운 것이 벌써 세 번째이니, 근 일주일이 흘렀다.

“폐하께서는?”

“아직 금룡전에 계시는 것으로 아옵니다.”

“오늘따라 늦으시네. 수신전에서 침수 드시려나.”

새근새근 잠든 황자를 내려다보던 기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쯤 열어둔 창문 앞에는 벌레를 쫓는 향이 피워져 있어 가까이 갈수록 메케한 냄새가 났다.

“평소보다 많이 늦으시는 것 같습니다. 벌써 자시(子時 : 밤 11시부터 새벽 1시 사이)가 다 되었습니다.”

보통 이 시각까지 기별이 없었던 적이 있었던가. 하긴, 처음 마음이 닿았던 그날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제 처소에서 침수를 드셨으니, 슬슬 다른 후궁들을 돌아보셔야 할 때가 온 것도 같다.

아무리 저를 어여삐 여기신다지만, 황제께서는 응당 돌보셔야 할 사람들이 있고, 자신의 소임 또한 하셔야 한다.

자식은 많을수록 좋다 했지. 어차피 저는 자식을 볼 수 없는 불모의 몸이고, 황제께는 저를 포함해 무려 열아홉 명의 후궁이 있다. 욕심도 많으시지. 더욱이 모두 한결같이 어여쁘고 정숙한 여인들이 아니던가. 비록 개중에는 얄미운 영빈 같은 이들도 있지만.

“오늘은 아니 오실 모양이야. 불을 끄고 모두 물리게.”

“소인이 금룡전에 다녀올까요?”

“아니, 오늘은 다른 곳에서 침수 드실 모양이시네. 곤하여 이만 자야겠어.”

창가에 서 있다 돌아서는 기하의 얼굴은 어쩐지 쓸쓸함이 가득했다. 저도 모르게 애틋한 마음이 들어 그를 향해 애써 웃은 현 상궁은 속으로 이를 바드득 갈았다.

폐하께서도 정말 너무하신다. 뜨거운 연정을 내보이신 지 열흘이 지났나, 한 달이 지났나. 겨우 일주일 아니던가. 그 일주일도 아프신 황자 저하 때문에 살과 뼈가 녹아내릴 밤도 보내지 못하셨거늘. 설마 다른 후궁을 찾으시어 욕정을 푸시는 것은!

“현 상궁?”

“예?”

“자리 보라니까. 무슨 생각을 하길래 표정이 그래?”

“아닙니다. 아닙니다, 마마. 자리 보겠습니다.”

불쌍하신 우리 마마님을 이리 홀로 두시다니. 사내란 허리 아래로는 전부 짐승이라 하더니! 그래도 정인과의 약조는 잘 지켜주시는 분이라 여겼거늘. 황제 폐하의 후궁은 본래 외로운 법이라지만, 폐하를 믿었거늘.

“어……, 폐하?”

잠이 가득한 얼굴로 막 자리에 누우려던 기하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입을 열었다. 비단 기수를 쫙쫙 펴면서 속으로 황제를 향한 원망을 잔뜩 늘어놓던 현 상궁은 기하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활짝 웃으며 나붓이 절을 올렸다.

“벌써 침수 들려 했더냐?”

행차할 때마다 일일이 고하지 말라 이른 탓에 황제는 소리도 없이 처소로 들이닥치기 일쑤였다. 기하야 별다른 문제 없이 그저 황제를 기쁘게 맞았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었다. 기별도 없이 불쑥 들이닥쳐 문을 벌컥벌컥 여는 황제 때문에 심장이 떨어져 나갈 뻔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닌 탓이었다.

“늦으셨습니다.”

“기다렸더냐?”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기하에게 손짓하며 그대로 앉아있으라 명한 황제는 입고 온 침의 차림 그대로 다가오다, 깊이 잠들어 있는 황자를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저것은 어찌 허구한 날 데리고 자?”

“낮에 너무 뛰논 탓에 열이 나서요. 어찌 이리 늦으셨습니까? 곤하시지요?”

제 앞으로 다가온 황제는 불쑥 고개를 내밀어 자신의 입술을 찾아들었다. 겨우 입술만 닿은 짧은 입맞춤에 자리를 보던 상궁 나인들이 납죽 하게 몸을 낮췄다.

“보고 싶었다.”

얼굴을 들이민 채로 빙긋이 웃는 황제를 황홀한 듯 바라보던 기하는 스스럼없이 그를 향해 팔을 뻗었다. 목을 끌어안으며 몸을 일으키는 그를 가볍게 안아 들자, 아이처럼 치근대는 체온에 절로 웃음이 터졌다.

“짐의 품이 그리웠더냐?”

“오늘은 안 오시는 줄 알았습니다.”

“처리할 일이 많았어. 수라는 잘 챙겨 먹었느냐? 요놈이 또 속을 상하게 하지는 않았고?”

“예. 잘 먹고, 종일 잘 지냈습니다. 폐하께서 혹, 다른 전각에 걸음 하시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조금 우울했던 것 빼고는 괜찮았습니다.”

황제는 기쁘게 웃었다. 다른 누구보다 솔직하게 닿아오는 마음이, 뜨거운 시선이 좋았다. 거짓을 모르는 아이가 온통 저를 향한 마음을 내보이는 것이 즐거웠다.

사람의 체온이 이리 좋은 것이었던가. 종일 불쾌했던 마음과 지끈거리던 두통이 씻은 듯 사라지는 것이 신기하기만 해서, 품 안 가득 매달려 오는 기하를 끌어안으며 황제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먹물을 뿌린 듯 검게 흐렸던 마음이 이제야 조금씩 환하게 닦이는 것 같다.

긴 다리를 뻗어 그 위로 팔을 걸친 황제는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쪼르르, 맑은 소리가 나도록 술잔을 채우자 한입에 그것을 털어 넣은 황제의 그윽한 시선에, 기하는 괜스레 손을 꼼지락거렸다. 덥다. 얼굴에 열이 홧홧하게 돌아, 자꾸 입이 말랐다.

“그대도 한잔해.”

“괜찮습니다.”

“왜, 술은 할 줄 알지 않느냐?”

“술버릇이 고약해서요.”

“술버릇이 어때서?”

“잘 모릅니다. 군영에 있을 때는 곧잘 마셨는데, 주변에서 하도 말려 그 후론 거의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지난번 서 중랑과 함께 대작했을 때는, 겨우 몇 잔에 정신이 아득했습니다.”

담담히 말하며 잔을 채워주는 기하의 흰 손목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황제가 단숨에 술잔을 비우고 탁 소리 나게 탁자 위에 올렸다.

“어찌 그러십니까?”

“다들 말릴 정도로 술버릇이 고약한 줄 알면서, 서 중랑과는 무슨 대작이냐?”

“그야 서 중랑은 오랜 친우이고…….”

“그놈의 친우 소리는!”

난데없이 화를 내는 황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하는 느리게 눈을 끔벅거렸다. 왜 또 갑자기 역정을 내신담.

“폐하께서는 서 중랑이 마음에 드시지 않으십니까?”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면 어쩌려고?”

“예?”

“뭘 되물어?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내칠 것이냐?”

“폐하, 서엽은 황궁에서 유일한 소인의 친우입니다. 소인의 사촌이고, 어릴 때부터…….”

“그만.”

손을 휘휘 저으며 말을 막는 황제의 심기가 불편해 보여 기하는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조금 전까지 기분 좋게 술잔까지 기울이셔놓고, 갑자기 왜 저러시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입술을 꾹 다물고 눈치만 살피는 기하를 곁눈질하며 황제는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웃음을 삼켰다. 순진하기는. 한소리 했다고 금세 기가 죽어 꼬리 쳐진 짐승처럼 구는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주십시오.”

“뭘.”

“술이요.”

기하는 본디 술을 좋아했다. 술자리 특유의 왁자지껄한 분위기도 좋았고, 흥에 겨운 사람들의 웃음소리도 좋았다. 무엇보다, 술에 취하면 모두가 솔직해졌다.

“자.”

무릎을 꿇고 앉아 공손히 두 손을 내미니, 반쯤 드러눕다시피 한 황제가 손을 내밀어 잔을 채워주었다. 달고 좋은 향기가 났다. 황궁에서는 본디 가장 좋고 귀한 것만 먹고 마시니, 술맛도 꿀맛이었다.

그간 마음이 쓸쓸할 때면 홀로 마시던 술을 서엽과 함께 마실 수 있게 되었을 때도 얼마나 좋았던가. 물론 서엽은 딱 석 잔만 마시게 하고는 절대로 잔을 내어주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황제와 나란히 앉아 술잔을 기울이게 된 것이 꿈만 같았다. 비록 지금 그의 심기가 다소 언짢은 듯 보이더라도 말이다.

곁에 있다. 이렇게 마주 보고 있다. 얼마나 꿈같은 일인가. 꿈이라면 영영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 황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하는 해사하게 미소했다. 화를 내셔도 좋다. 뭐라 하셔도 좋다.

“마셔 봐.”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술맛이 어찌나 달고 맛 좋은지 절로 눈이 감겼다. 이리 맛있으니 나눠 마시려고 하셨던 것이구나.

“맛있습니다.”

“맛이 좋은 만큼 독하지.”

연죽(담배)을 물고 불을 붙이는 황제를 한 번, 깊게 잠든 황자를 한 번,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던 기하는 조용히 현 상궁을 불렀다. 활짝 열린 창문 사이로 무거운 바람 냄새가 눅눅하게 번졌다.

“불러계시옵니까, 마마.”

“황자가 깊이 잠들었으니 옆방에 데려다가 뉘이게.”

“예, 마마.”

민첩하게 움직여 황자를 품에 안은 현 상궁의 뒤로 동복궁 상궁들이 따랐다. 활짝 열렸던 문이 닫힐 때 어렴풋이 마주한 현 상궁의 얼굴이 유난히 밝은 것이 이상했다. 좋은 일이 있나, 왜 저렇게 웃고 있담.

“비가 올 것 같……, 어찌 그러십니까?”

“여우 같은 것.”

“예?”

황제가 입을 열 때마다 연죽 사이로 연기가 푸들푸들 피어올랐다. 다른 건 다 좋은데, 진짜 정말 좋은데, 연죽을 물고 있는 황제의 모습은 그리 좋지 않았다. 메케한 연기도 싫고, 늘 근엄하게 연죽을 물고 있던 누군가가 떠올라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것은 그리움일까, 아니면 지나친 괴로움일까.

“가까이 와.”

술상을 옆으로 밀어내고 손짓하는 황제를 향해 무릎걸음으로 다가간 기하는 뻐끔뻐끔 연기를 내뱉는 그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잔을 채웠다. 향긋한 냄새가 마치 꽃밭에 와 있는 것만 같다. 푸르스름한 연기만 아니었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기하야.”

“예.”

맛이 좋지만 독하다는 황제의 말이 그른 것은 아닌 듯했다. 입에서는 달다 하는데, 목구멍에서부터 뜨거운 열기가 올라온다. 눈가가 뜨끈해져 달아오른 뺨을 문지르자, 손을 붙잡는 황제의 서늘한 손이 유난히 시원하게 느껴졌다.

“둔해 빠진 곰인 줄 알았더니, 이리 예쁜 짓도 하고.”

코가 맵다. 이제 연죽 좀 치우시면 아니 되겠느냐고 말씀드리면 화내시려나. 자주는 아니더라도 한 번 물기 시작하면 한참을 연달아 태우시던데. 옥체에 좋지 않으니 말씀 올려도 될까. 한데, 연죽 하나 물고 계실 뿐인데도 참 아름다우시다. 어찌 이리 찬란히 빛나실까.

“짐이 너를 얼마나 어여삐 여기는지 알고 있지?”

“예.”

“그래, 알고 있으면 되었다. 실은 종일 네 곁에 있고 싶은 걸 참고 있느니라. 네가 해달라는 것도 다 해주고 싶고, 갖고 싶은 것도 전부 주고 싶은데 너는 욕심도 없고, 짐에게 바라는 것도 없으니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소인은 그저, 폐하께서 마음을 내어주신 것이면 족합니다.”

“그래, 너는 본디 물욕이 없지. 하나, 이제는 아니다. 너는 짐의 하나뿐인 총비가 아니냐. 원하는 것을 말해 보아.”

황제가 손을 붙잡아 올 때마다 기하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것은 수줍음이 반이었고, 걱정이 반이었다. 연모하는 이의 체온이 닿는다면 그저 따뜻하고 좋을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막상 그렇게 되니 걱정이 더했다.

제 손은 거칠고, 몸은 여기저기 낫지 않을 상처들이 가득한, 그저 수수하기만 한 사내였다. 이런 몸을 보시고 혹, 마음이 차게 식으시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자, 하루하루가 고역이었다.

“한 잔 더 마시겠느냐?”

“예.”

“내 따라주마.”

발끈 화를 내셨던 마음이 금세 또 달라지시다니, 황제께서는 어지간히 변덕쟁이시다. 사내 마음이 이리저리 뒤집히면 아니 된다고 스승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은 기하는 황제가 연유를 캐어물을까 싶어 얼른 술을 받아 마시고는 손등으로 입술을 문질렀다.

“황궁 생활이 몇 년인데, 아직도 이리 천둥벌거숭이 같아. 조신하지 못하게 그게 무어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입가에 덜 닦인 술을 직접 문질러주는 손길이 다정하다. 슬그머니 기하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제 앞으로 끌어당긴 황제는 그의 손에 깍지를 단단하게 끼고 고개를 들었다.

술이 올라오는지 달아오른 얼굴이 어찌나 귀여운지, 당장에라도 달려들어 입을 맞추고 싶을 지경이었다. 눈치도 없이 내내 황자를 덩그러니 침상 가운데에 두더니, 오늘은 일찌감치 재워 옆방으로 데리고 가라니. 이 얼마나 깜찍한 총비란 말인가.

“폐하, 연죽 연기가 맵습니다.”

“그러냐? 내 빈이 싫다니 이것은 저리 치워두마.”

그 말이 듣기 좋았는지 활짝 웃는 얼굴에 따끈한 열이 오른다. 슬쩍 눈을 내리까는 모습이 어여뻐 조금씩 다가가니 수줍게 입술을 달싹이는 것에 더는 못 견디겠다. 혹여 이 아이가 일부러 피하고 있는 것이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섣불리 손을 대지 못했던 어리석은 나날을 돌이켜보니 후회가 막심했다.

초야가 조금 과격하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너무도 오래된 일이 아닌가. 다른 여인 같았다면 서럽고 수치스럽다 여기며 제 처소에서 두문불출하며 그림자처럼 살았을 테지만, 배짱 좋은 이 아이는 그것도 아니었다. 그 후에도 변하지 않는 열기로 가득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지 않았던가. 그래, 그것은 괜한 기우였다.

“폐하께서는 정말로 다정하십니다.”

“네게만 그래.”

웃기는. 웃는 것이 이토록 화사하고 어여뻤던가. 전에는 웃고 있어도 마냥 아이 같더니. 붉은 얼굴 하며 침의 자락 사이로 슬쩍슬쩍 비추는 속살이 정염(情炎 : 불같이 타오르는 욕정)을 끓게 한다.

“한 잔 더 마시겠느냐?”

“그래도 됩니까?”

“아니 될 건 하나도 없다.”

술잔을 채워주기가 무섭게 잔을 비우는 기하의 허리를 쓰다듬자, 나른한 웃음이 쏟아진다. 살이 내려 말랐다고는 하나 어엿한 사내대장부로 태어난 그의 단단한 어깨를 쓰다듬자, 자연스럽게 침의 자락이 흐트러졌다.

“얼굴이 벌겋다.”

“열이 납니다.”

“독하다 하지 않았어. 천천히 마셔야지.”

“그렇긴 한데, 맛이 좋습니다. 폐하께선 아니 드십니까?”

“나는 그것보다 다른 걸 맛보고 싶은데.”

몸을 반쯤 일으킨 황제는 따끈하게 열 오른 기하의 뺨에 입을 맞췄다. 촉, 촉. 물기를 머금은 입술이 피부를 따라 입을 맞추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은 기하의 손에서 잔을 뺏어 든 황제는 말랑말랑한 그의 귓불을 입에 넣고 핥으며 목덜미를 따라 내려갔다.

“폐하…….”

“륜(錀)이다.”

스스로 입에 올리는 것이 낯설었다. 태어나 처음 받은 이름. 그 옛날 아바마마, 어마마마, 형님께서 불러주시던 이름.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서면서부터, 다시 태어난 그 순간부터 기억 속에 가둬두고 꺼내지 않았던 이름.

“불러도 좋다.”

“하지만…….”

감히 황제의 이름을 입에 올릴 수 있는 자는 세상에 없다.

“짐이 허락하였으니 괜찮아. 우리 둘이 있을 땐 그리 불러. 네가 그리 불러 주는 걸 듣고 싶으니까.”

느리게 눈을 깜박이기만 하는 발칙한 정인을 어찌 벌줘야 할까. 빙긋이 미소하며 기하를 품 안으로 끌어당겨 안은 황제는 술에 젖은 그의 입술을 단숨에 집어삼켰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달콤한 냄새가 난다. 술맛 같기도 하고, 꿀맛 같기도 하다. 사내의 입술이 이렇게 달 수 있단 말인가. 누군가와 입을 맞추는 것은 그저 욕정을 푸는 것에 지나지 않는, 의미를 부여하기도 뭣한 일이 아니었던가. 단 한 번도 이리 꿀맛 같다 느낀 적은 없었거늘.

“짐이 입을 맞추면 어찌하라고 하였지?”

“숨을 코로 쉬고…….”

“그리고?”

“입은 벌려서…….”

아무리 열여덟에 제게 시집와서 줄곧 혼자 지냈다고는 하나, 기하는 지나치게 색에 약했다. 하루에 두어 번은 꼭 입을 맞추는데도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뒤로 넘어갈 때까지 참질 않나. 같이 침수 든 아침이면 자연스럽게 발기한 황제의 옥경(玉莖)을 보고 도망을 치질 않나.

처음에는 같은 사내끼리 웬 내숭인가 싶었으나, 너무도 무지한 상태에서 과한 상상만 하다 보면 그럴 수 있다는 승지의 조언에 생각을 달리한 참이었다. 그 쓸모없는 승지 놈이 가끔 맞는 말을 할 때가 있단 말이지.

하긴, 척박한 북성에서 처박혀 살다 겨우 3년 남짓 제 형을 따라 전장을 돌아다닌 것뿐이니, 누굴 제대로 품어본 적도 없을 테지.

생각해보니 그랬다. 품긴 누굴 품는단 말인가. 처음 본 순간부터 제게 반해, 제 아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제게 시집온 저 서기하가.

딱 거기까지 생각하자,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기하가 더할 나위 없이 애틋했다. 그런 마음을 품고 시집온 후에 줄곧 혼자 두었다. 특히나 정에 굶주린 아이를 이 외로운 궁에 처박아두고 찾아보지도 않았으니, 마음이 어떠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더욱이 홀로 있는 시간에는 못된 술수에 걸려들어 몸까지 상하였고……. 그 모든 것은 순전히 제 탓이었다. 참담했던 초야 이후, 황궁 안에 파다하게 퍼진 소문을 모르는 체했으니 벌레가 들러붙을 수밖에.

“이리 온.”

완전히 몸을 일으켜 팔을 벌리자, 망설임 없이 품으로 뛰어든다. 잘 길든, 충성스러운 짐승처럼 단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는다. 그 모습이 어여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여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끌어안으면, 숨이 막힌다며 칭얼거리면서도 절대로 품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폐하…….”

“어찌 그리 애타는 음성이냐?”

슬그머니 기하의 옷자락 사이로 손을 밀어 넣으며 황제는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뜨거운 입김이 귓구멍에 그대로 들어가자 오싹함을 느꼈는지, 순식간에 달아오른 예민한 몸뚱이가 힘없이 허물어졌다.

“폐하, 간지럽습니다.”

황제의 단단한 허벅다리 위에 올라앉은 기하는 제 허리를 끌어안고 도통 놓아주려 하지 않는 손을 밀어내지도 못하고, 초조하게 입술만 물었다. 술기운 때문인가. 머리가 아찔하고 숨이 턱턱 막히는 것이, 몸이 자꾸 배배 꼬였다.

황제의 축축한 혀가 귓불을 핥는다. 귓바퀴에 혀가 감겨들 때마다 몸이 뒤틀려 눈을 질끈 감자, 목덜미가 따끔하다. 눈을 감으면 안 된다는 뜻인가?

“기하야.”

황제의 숨소리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나른한 숨소리에 뒤섞인 제 이름을 듣는 순간에, 기하는 그의 품에 덥석 안겨 들었다. 황제가 풀어 헤쳐 놓은 옷깃 사이로 바람이 들어, 뜨겁게 달아오른 몸이 일순간 시원해졌다.

“폐하, 폐하.”

몸이 지나치게 뜨거워 머리가 무거웠다. 눈을 질끈 감고 황제의 목을 끌어안으며, 그의 어깨에 뺨을 문질렀다. 순식간에 화염에 뒤덮인 것처럼 울고만 싶어졌다. 허벅지 안쪽을 더듬는 황제의 손이 시원해서, 뜨거운 몸 여기저기를 매만져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폐하.”

“보채지 마. 그러다 큰일 난다.”

“덥습니다. 몸이 뜨겁습니다.”

“괜찮다, 원래 그런 것이야.”

“이상합니다. 머리가 어지럽습니다.”

“이상하지 않아. 술이 들어가 더한 것뿐이다.”

옷깃을 풀어 헤치는 황제의 손길에 완전히 드러난 허벅지를 그의 옆구리에 문질렀다. 부드러우면서도 까칠까칠한 옷자락이 피부에 닿자 시원한 기분이 들어, 절로 웃음이 났다.

“폐하께 좋은 냄새가 납니다.”

“네게도 좋은 냄새가 난다.”

“아닙니다. 폐하께 정말 좋은 냄새가 납니다.”

목덜미를 어찌나 꽉 끌어안았는지 도무지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는 기하를 그대로 침상에 눕힌 황제는 폭신한 감촉에 눈을 말똥말똥 뜨고 저를 올려다보는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붉은 얼굴을 보니 확실히 술에 반쯤 취한 것 같아, 고약한 생각이 들었다.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밤은 보내고 싶지 않은데.”

“폐하, 숨 막힙니다.”

“내겐 더 참을 여력이 없는데,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느냐?”

“폐하, 아픕니다.”

너무 힘껏 누르고 있던 탓인지, 잡고 있던 기하의 손목이 벌겠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단단하게 누르고 있던 허벅지와 양쪽 손목을 번갈아 바라보던 황제가 그대로 기하의 입술에 스치듯 입을 맞췄다.

“흐…….”

앓는 듯한 소리가 힘없이 번진다. 황제는 연신 입을 맞추며 기하의 옷고름을 풀었다. 훤히 드러난 속살은 계집의 것처럼 희었다.

여기저기 희미한 흉터가 있었지만, 보기 흉하지 않았다. 오히려 안쓰러운 마음에 피부를 더듬으니, 바짝 안겨있던 몸뚱이가 힘없이 기대 온다.

왼쪽 어깨, 빗장뼈 끄트머리의 유난히 큰 상처를 쓰다듬으며 황제는 연신 기하의 이름을 불렀다. 술에 취한 것인지 손길에 취한 것인지, 자꾸만 눈을 감으려 드는 발칙한 정인을 추스르며 단단히 그의 등을 받쳤다.

“또 이대로 내뺀다면 이번엔 짐이 무척 화가 날 것 같다만?”

“뭘 하실 것인데요?”

영민한 것이 이럴 때만 맹하게 굴지. 하지만 황제 또한 알고 있었다. 머리가 좋고, 눈치 빠르고, 솔직한 자신의 총비는 결정적인 순간에 뒤로 빠지는 기막힌 재주가 있다는 것을.

“사내란 본디 색(色)에 약해.”

“색 말입니까?”

“그래.”

“하긴… 그러니 후궁도 많으시고 또…….”

“너 지금, 내 고약한 성질을 건드려 좋을 것이 없을 텐데?”

“후궁 많으시잖아요.”

이것이 정녕 취해서 취기에 하는 소린가. 저 찌푸려진 얼굴은 대체 무슨 뜻이던가. 어차피 제가 들인 후궁이야 황위에 오르면서 오성의 왕, 그 휘하 귀족들과의 결속을 위해서 들인 이들이 아니던가.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아는 것이 어찌 이리 중요한 순간에 쓸데없는 말을 꺼내는 것인지.

“그 얘기는 차차 하도록 하고.”

“싫습니다.”

“뭐가 싫어.”

“초야 때처럼, 그러실 것이지요? 싫습니다, 싫어요.”

이것이 대체 무슨 소린가. 뭐가 싫어? 옷은 홀라당 다 벗어 던지곤 제게 매달려 치근덕거린 주제에, 싫긴 뭐가 싫어? 낮도깨비에게 홀렸나. 겨우 술 몇 잔 마시고 취해서 헛소릴 해대는 것인가? 눈을 보아하니 적당히 취한 것 같기는 하나, 어디서 감히 싫다는 소리가 넙죽 나와?

“싫습니다. 하지 마세요.”

아예 옷깃을 추스르며 뒤로 물러나는 기하의 발목을 붙잡은 황제가 사납게 얼굴을 찌푸렸다. 이것이 지금 다 된 밥상을 발로 차도 유분수지.

“초야 때는 짐이 잘못하였다.”

잘 기억나진 않지만, 뭔가 크게 잘못한 것 같기는 하다. 어린아이를 너무 홀대하였지. 아무리 사내 녀석이라고는 하나 그래도 명색이 제 빈인데, 시집온 첫날에 사냥에서 돌아온 그대로 겁간하듯 안고 돌아섰으니. 물론 모진 말을 퍼부었던 건 덤이다.

“그때는, 그러니까…….”

원망이 가득한 두 눈에 금세 눈물이 차오른다. 조금 전까지도 멀쩡하던 눈이 축축하게 젖어드는 것을 보며 황제는 팔짝 뛰고 싶은 심정이었다.

“왜, 왜 또 울려고 해. 짐이 뭐라고 했다고.”

차라리 말을 할 것이지, 금세 붉어진 두 눈에 가득 찬 눈물을 보니 답답하기만 했다. 그러니까, 저 눈에 담긴 것이 어떻게 보아도 원망 같은데.

“기하야.”

원망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기하에게 손을 뻗으려던 황제는 재빨리 몸을 뒤로 내빼며 돌아서는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주 오래된, 단단하게 잘못 묶인 매듭에 걸려 넘어진 것만 같은 기분에 타오르던 정염이 싸늘하게 식었다.

차라리 제대로 울기나 했으면. 두 눈 가득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는 모습이 어찌나 처연한지, 황제는 가만히 손을 들어 기하의 눈꼬리를 문질렀다. 미지근한 눈물이 손가락 사이사이 스며들자 화들짝 놀라며 제 눈가를 문지르는 모습은, 겁에 질린 어린 짐승 같았다.

“짐이 잘못하였다. 그러니…….”

다정하게 기하의 얼굴을 쓰다듬던 황제의 손이 축축하게 젖었다. 마음이 상하였다면 몇 번이고 용서를 구할 수 있다. 혹여 상처를 입었다면 잘 닦아줄 수도 있다. 미처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던 자신의 무지함을 탓하며, 황제는 천천히 기하의 어깨를 끌어안고 몸을 반쯤 일으켰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엔 언제나 황제의 검이 있었다. 검집을 손에 쥔 황제가 바닥을 쳤다.

탕.

묵직한 울림이 채 사라지기도 전, 바람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어디선가 검은 인영이 휙 날아들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단단하게 무장한 황제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가라.”

“폐하.”

“앞으로 빈과 있을 때는 아무도 들이지 마.”

황제의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하는, 금룡대 중에서도 최정예인 그림자는 그가 황좌에 오른 이후로 단 한시도 떨어진 적 없었다. 그것은 황제가 다른 후궁이나 황후와 잠자리를 함께할 때도 마찬가지였기에, 그들은 그의 이러한 태도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물론 황제는 타고난 무인으로, 감히 그와 호각(互角)을 다룰 만한 이는 황궁 내에 존재하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쉽게 물러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서 나가라.”

다 풀어 헤친 기하의 옷깃을 추스른 황제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니 괘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무리 제 그림자라고는 하나, 감히 빈의 벗은 몸을 거리낌 없이 보고 있질 않은가.

게다가 요즘에는 날마다 태화당에서 침수 드는데, 저것들이 돌아가면서 곤히 잠든 기하의 얼굴을 밤새 쳐다보고 있었을 것이란 사실을 떠올리자, 불현듯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소리 없이 사라지는 그림자가 완전히 기척을 지우고 나서야, 황제는 숨이 막히도록 끌어안고 있던 기하를 품에서 내려놓았다. 자꾸만 버둥거리며 가슴을 밀어내는 발칙한 후궁의 표정이 노곤하게 변했다.

“왜.”

“덥습니다.”

낑낑거리며 다시 옷을 벗으려는 기하의 눈이 몽롱하게 풀렸다. 조금 전까지 눈물을 매달고 있던 탓에 유난히 반짝거리는 눈꼬리를 따라 촘촘하게 입을 맞춘 황제는 열이 오른 몸을 추스르며 옷깃을 반쯤 열었다.

대체 얼마나 전장에서 굴렀으면 왕자의 몸에 이리 많은 상처가 났단 말인가. 매끄러운 피부 여기저기에 난 상처를 손끝으로 쓰다듬으며, 황제는 기하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었다.

“…초야가, 그리 고통스러웠더냐?”

기억이 나지 않으니 물을 수밖에 없었다. 잘못이 있다면 제대로 알고 용서를 구해야 함이 옳았다. 그래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테고, 진심으로 사과할 수 있을 테니까.

“많이 아팠더냐?”

“아픈 것은 괜찮습니다.”

“응?”

“사내는 그런 고통쯤은 전부 견뎌야 한다고…….”

말끝을 흐리면서 눈을 느리게 깜박이는 기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황제는 조금 더 깊이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누가 그런 허튼소릴 해. 앞으로 아픈 건 하지 마라.”

“정말입니까?”

“그래. 네가 좋아하는 것만 하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먹고 싶은 것만 먹고.”

“그럼…….”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 가만히 눈동자를 굴리다가 혼자서 배시시 웃는 얼굴은 처음 제국으로 오던 그날과 같았다. 통통하던 볼살은 빠졌으나, 그때와 같은 깊은 눈매와 단정한 얼굴에 아이 같은 미소가 번지니 꼭 그날로 되돌아간 것만 같다. 겁에 질려 덜덜 떨면서도, 좋다고 웃었지.

“뭘 생각하는데 혼자 웃어?”

“바늘로 날마다 찔리니까, 수는 놓기 싫습니다.”

날마다 현 상궁에게 구박을 받으면서도 좀체 늘지 않았던 그 수 말이구나.

“그깟 수는 뭐 하러 놓아. 수방(繡房)에 궁녀가 부족하다더냐?”

“하지 않아도 됩니까?”

“하지 말래도. 네가 좋아하는 것만 하라지 않았어.”

“소인이 좋아하는 것은, 폐하뿐인걸요.”

깜빡깜빡 눈꺼풀이 달싹인다.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가물거리는 눈을 겨우 뜨면서 달싹이는 입술에선, 꿀에 바른 듯한 달콤한 말이 번진다. 수많은 후궁에게 들었던 넘실거리는 유혹의 말과 다른, 담백하면서도 열렬한 고백에 황제는 기꺼이 웃으며 기하의 뺨과 입술에 연신 입을 맞췄다.

“폐하, 눈이 무겁습니다.”

“륜이라고 하라니까, 끝까지 말을 안 듣는구나.”

“륜?”

“그래.”

“륜…….”

몇 번이고 곱씹듯 중얼거리는 이름에 황제가 미소했다. 천천히 허물어지는 몸을 끌어안고 침상 위로 누워 팔을 내어주니, 방긋 웃는 얼굴에 따뜻한 웃음이 걸린다.

그래, 이리 웃으면 되었지. 이제 겨우 발을 떼었으니, 앞으로 함께할 날이 많지 않은가. 그걸로 됐다. 밤은 길고, 함께할 날은 내내 찬란하게 빛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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