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장 속(束)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황제의 곁을 지키는 것은 퍽 고된 일이었다. 종일 입을 다물고 눈치를 살피며 혹여 누구 하나 실수할까 전전긍긍하였기에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고, 숨조차 크게 내쉴 수가 없었다. 이제 드디어 제게도 꽃 피는 봄이 오나 했더니, 북풍한설이 따로 없었다.
“북성에선 어찌 아직 소식이 없어.”
“곧 전서구가 날아들 것입니다. 경비가 워낙 삼엄하여 쉬이 움직이다간 덜미가 잡히기 일쑤라.”
“그런 재주도 없으면 땅 파고 누우라 해라. 돈과 시간이 남아돈다더냐?”
“최대한 서두르고 있다 합니다. 북왕이 워낙 철두철미한 자인지라, 사병 하나하나의 사소한 기록까지 관리하도록 한답니다.”
“그런 자가 제 아들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관심도 없단 말이냐.”
눈썹을 잔뜩 찌푸린 황제는 임승지를 향해 혀까지 끌끌 차며 매끈한 턱을 문질렀다.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다.
“폐하, 슬슬 동복궁으로 걸음 하시지요. 무빈마마께서 어젯밤부터 꼬박 쉬지도 못하셨습니다.”
“그것이 어디 내 말을 듣더냐.”
사나운 황제의 표정에 승지는 딱딱한 얼굴로 억지 미소를 지어냈다. 그것에 가장 속이 터지는 것이 바로 태화당 나인들과 금룡대였다.
생전 처음 누군가를 마음에 담으신 황제께서 애틋함을 표하시기도 전, 무 잘라내듯 슥 잘라내고 돌아서는 기하 때문에 금룡대는 딱 죽을 맛이었다.
종일 있는 대로 짜증을 부리는 황제를 감당하기란 몹시 어려운 일로, 바쁜 시간을 쪼개 동복궁까지 직접 가서 낮것을 함께 들려 했던 것을 기하가 거절하자마자, 고충은 배가 되었다.
속이 상하는 것은 현 상궁을 비롯한 태화당 나인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황제께서 이리 직접 애틋하게 대하여 주시는 것도 마다하고 한시도 쉬지 않고 황자의 간호에만 열을 올리는 기하에게 뭐라 고할 수도 없는 처지였기에, 그녀들은 이러다가 황제께서 크게 노하시어 웃전이 도로 찬밥 신세가 되면 어쩌나 걱정이 태산이었다.
“마마께서 황자 저하를 특별히 아끼시니 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마마께서는 정말 인정이 넘치시는 분이십니다. 물론 저하께서 폐하의 아드님이시니 더더욱 그러실 테지요. 황자 저하가 어디 보통 아드님이십니까? 비록 연치 어리시나 순수함이 이루 말할 데가 없으시고, 총명하심 역시 이루 말할 데 없음이니 황실의 큰 기쁨입니다.”
“먹는 것에만 열을 올리는 미련한 것이니라. 일어나서 기운만 차려 보라지, 당장에 경을 칠 것이다. 아비의 속도 모르는 불효막심한 놈 같으니라고.”
바드득 이를 가는 황제의 서슬 퍼런 얼굴에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려던 승지는, 용포를 바람처럼 날리며 일어서는 그의 기척에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허공을 응시했다.
“뭘 멍청히 서 있어. 동복궁으로 간다.”
“예, 폐하.”
동복궁 쪽으로는 눈도 돌리기 싫다는 듯 잔뜩 구겨진 얼굴로 말하는 황제의 뒤를 따르며, 승지는 어서 빨리 황자가 쾌차하기만을 바라고 또 바랐다. 황제의 기분이 적당히 좋아지기를 기다려 그동안 미루고 미루었던 휴가를 다녀올 셈이었는데, 이러다가는 올해도 휴가는커녕 편히 발 뻗고 잠잘 새도 없이 다 지나가고 말리라.
“정연은 아직이라더냐?”
“맥은 정상으로 돌아오셨다 합니다. 크게 앓으신 후라 쉬이 정신을 차리시지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살만 뒤룩뒤룩 쪘으니 몸이 성할 리가 있어? 정연이 일어나거든 날마다 무예 훈련을 하게 해라. 절대 봐주지 말고 혹독하게 가르쳐. 내 두고 볼 것이다.”
불쌍하신 황자 저하. 어찌 하필 이럴 때 앓아누우시어 폐하의 미움을 독차지하시는 것인지. 통통한 황자의 웃는 얼굴을 떠올린 승지는 황제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한숨을 내쉬었다.
“빈은 어쩌고 있다더냐.”
“저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신답니다.”
그 얘기는 오전에도 들은 것이었다. 밤을 꼴딱 새우고서 수라도 물리고 종일 곁만 지키고 있다니, 미련한 것 같으니라고. 그런다고 아픈 아이가 벌떡 일어나기라도 한단 말인가. 미련을 떨고 있는 꼴이 보기 싫어 기어이 역정을 내고 나온 때가 언젠데, 아직도 그러고 있다니.
“빈이 잘 먹는 것으로 상을 차리라 해.”
“예, 폐하. 그리 이르겠사옵니다.”
황제의 빠른 걸음에, 숨소리를 낮추고 따라붙은 그림자마저 기척을 완전히 지워내지 못할 정도였다. 그들의 뒤를 따르는 상궁 나인들은 아무리 해도 자꾸만 걸음이 처져 기어이 뛰기 시작하다, 지밀의 싸늘한 눈초리를 받은 터였다.
오늘따라 동복궁이 어찌나 멀던지, 그 잠깐 새에 다리가 딱딱하게 굳은 그녀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턱밑까지 밀려오는 숨을 간신히 집어삼켰다.
혹여 또 울상을 하고 있거나 눈물 바람이면 어쩌나 걱정했던 우려와는 달리, 기하는 단정하게 앉아 서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핏기 가신 얼굴이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처럼 피곤해 보여 일어나려는 그의 어깨를 붙잡은 황제는 방 안에 늘어서 있는 상궁 나인들을 험한 눈으로 쳐다봤다.
“정무는 다 보신 것입니까?”
“별 탈 없이 끝났다.”
분명 낮에 큰 소리 치고 나간 것은 자신임에도, 황제는 미안한 기색 하나 없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식은땀에 젖은 황자의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어루만지며 펼쳐놓은 서책을 얌전히 덮은 기하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우는 낯도 아니었고, 그럴 기색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황제는 그제야 눈앞에 있는 이가 얼마나 강단이 센 사내인지를 깨달았다. 마음이 따뜻하고 여린 것은 맞으나, 그 또한 엄연히 사내였다. 사소한 것으로 쉬이 눈물 바람하지 않는.
“무얼 하고 있었느냐.”
“혹여 황자에게 도움이 될까 하여 의학에 관한 서책을 보고 있었습니다. 한데 도통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빙긋이 웃는 얼굴이 처연했다. 제대로 쉬지 못한 눈이 피곤함에 절어 느리게 깜박였다. 색색,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든 황자보다 그가 더 병자 같았다.
“아무나 보고 이해하면 세상 모두가 의원 하겠다. 뭘 좀 먹었더냐?”
“예. 황자는 내내 열이 끓어 홀로 우는데, 입맛은 없어도 배는 고팠습니다. 말로만 황자를 아끼는 것도 아닌데 배도 고프고 자꾸 눈도 감기고, 그렇습니다.”
“종일 굶고, 밤새 한숨도 못 잤으니 당연하다. 그런 표정 할 것 없어. 배 좀 채우고, 눈도 좀 붙이자. 황자가 일어나면 바로 고하라 하면 된다.”
물끄러미 황제를 바라보던 기하가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넘어진 아이가 어미에게 손을 뻗듯 웃으며 손을 내미는 기하를 힘 있게 끌어당긴 황제는, 휘청거리는 그를 품에 안으며 가만히 등을 다독였다.
“소인 때문에 수라도 아니 들고 가시어 송구했습니다.”
“일찍도 말한다.”
“다시는 쓸데없이 고집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쓸데없는 고집이라는 것을 알긴 아느냐?”
“바쁘신 폐하께서 시간 내어 오시었는데…….”
“알면 되었다.”
순순히 제 잘못을 말하고 안겨 오는 마음이 기특했다. 지나치게 솔직한 성격이라 화를 돋우기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한 걸음 물러서고 보니 마냥 어여쁘기만 했다.
“한데, 자경전에는 들렀다가 오시는 것이옵니까?”
“자경전엔 왜.”
“어제도 아니 가셨지 않사옵니까. 황후마마께서 기다리실 터인데…….”
“너 지금, 짐더러 황후에게 가라는 것이냐?”
“가시라는 것이 아니오라, 가셨다가 다시 오시면…….”
제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지 금세 웃으며 딴청 하는 턱 끝을 붙잡아 고개를 들게 했다. 황후와 사이가 좋고 유난히 서로 애틋하게 생각하는 것은 어찌 보면 좋은 일이나, 다르게 보면 마음이 상하기도 했다.
저 자신이 얼마나 소유욕이 짙은 사내인지를 너무도 잘 아는 황제는 흐트러진 기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물끄러미 그를 바라봤다. 유난히 까만 눈동자가 저를 빤히 바라보는 순간이 애틋하여 좋았다.
“아이를 가진 여인들은 특히 예민하다고 합니다. 다른 이도 아니고, 황후마마께서는 신첩이 처음 황궁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다정하고 사려 깊게 보살펴 주셨사옵니다.”
점점 구겨지는 황제의 얼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하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 이내 활짝 웃기까지 했다. 참으로 발칙한 후궁이 아닌가. 사내의 몸으로 다른 여인을 입에 올리며 그리 웃다니.
“폐하께서 그리 바라보시니 이상합니다.”
“뭐야?”
“황후마마께서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 잘 알고 있으나, 그래도 아주 가시라는 말씀을 드리지 못하니 이 역시 소인이 부족한 탓입니다. 자애로우신 마마께서는 폐하의 아기씨를 품기까지 하셨는데 말입니다.”
“어찌 말을 뱅뱅 돌리는 버릇을 들였어?”
비죽한 미소를 매단 황제를 바라보며, 기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종일 황자만 바라보고 있었더니 눈이 따가웠다. 끙끙 앓는 아이를 간호하는 것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솔직히 기하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정해진 시간에 찾아온 태의가 진맥을 볼 때면 이것저것 묻기 바빴지만, 어쨌거나 아이의 시중은 오롯이 상궁들의 몫이었다. 기하는 자신의 서툰 손길에 아이가 혹시라도 불편해할까 봐, 그녀들의 등 너머에 서 있다가 자리를 지키는 것이 전부였다.
“할 줄 아는 것이 없어 민망합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수라나 들자. 시장하다.”
“예, 폐하.”
차마 앓고 있는 아이 앞에서 수라를 받을 수 없었기에 황자의 침소를 나온 두 사람은 나란히 수신전으로 향했다. 황제의 처소인 수신전은 후궁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발을 들일 수 없는 곳이었으나, 피곤함에 푹 절은 기하에게 별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그는 아예 자신의 손목을 붙들고 걷는 황제에게 이끌려 반쯤 감긴 눈을 억지로 뜨고 이리저리 휘청거리며 발을 옮겼다. 종일 찌푸려졌던 황제의 얼굴이 펴진 것은 그즈음이었다.
어찌어찌 처소로 들어와 자리를 잡자, 차례대로 들어오는 수라상은 보통의 것보다 조금 더 화려하고 정갈해 보였다.
“한술 뜨고 푹 쉬는 것이 낫겠다.”
“예.”
기미를 끝낸 상궁이 물러나자, 먼저 수저를 든 황제가 기하의 밥그릇 위에 찬을 올렸다. 황제의 명령에 무릎이 닿을 정도로 그와 가깝게 붙어 앉은 기하는 민망함에 달아오른 얼굴을 제대로 들지도 못했다.
이따금 이렇게 부끄러움에 파닥거리는 모습이 못내 귀엽다고 생각하면서도, 황제는 신통치 않게 수저질하는 그를 못마땅하게 바라봤다.
“팍팍 먹어라.”
“폐하께서도 어서 드십시오.”
“너나 어서 먹어. 자, 굴비도 먹어 보아라. 너는 육식만 좋아하고 생선은 통 먹질 않는다 하던데.”
“비린 것은 입에 맞지 않습니다.”
“몸에 좋고, 맛도 좋다. 비리지 않으니 먹어 봐.”
기하는 숟가락 위에 살을 바른 굴비를 올려주는 황제의 다정함에 감동할 새도 없이 자꾸만 감기는 제 눈을 원망하며 밥을 입안 가득 넣었다. 과연 황제의 말대로 비리지도 않고 맛도 좋은데 씹는 것은 느려지고, 맛도 무뎌지는 것 같다.
“기하야.”
“예, 폐하.”
“자느냐?”
“아니 옵…니다.”
꾸벅꾸벅 조는 얼굴이 우스웠다. 평소 잠이 많은 것은 알았으나, 고작 하루 새었다고 이리 밥상 앞에서 졸기까지 하는 기하의 모습에 황제는 슬그머니 상을 옆으로 밀고 그의 다리를 잡아당겼다. 별다른 저항 없이 묵직하게 딸려오는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그제야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리려 하는 기하에게 쉿, 하고 신호하자 천천히 눈을 깜박인다.
황제는 요령 좋게 기하를 제 옆으로 당겨 그의 머리를 어깨에 기대게 했다. 아직 제대로 씹지 않은 밥은 입안에 그대로였고, 그 와중에도 놓치지 않은 숟가락을 잡은 손이 몇 번인가 꼼지락거렸다.
“폐하…….”
“오냐.”
“조금만…, 이대로.”
“오냐.”
스르르 어깨에 기대어진 머리를 추슬러 올리고, 어깨에 팔을 둘러 안은 황제가 천천히 등을 기댔다. 눈짓으로 상을 물리라 명하자,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한 상궁들이 조용히 상을 물렸다.
“빈이 일어나면 먹을 수 있도록 따로 준비해둬라.”
“예, 폐하.”
고얀 것. 어제 소박을 놓은 것도 모자라서 낮것도 물리고, 이제는 아예 저를 곁에 두고 잠이 들다니. 세상에 이렇게 방자하고 발칙한 후궁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황제의 손끝이 나긋하게 변했다. 어느새 깊게 잠든 기하를 내려다보는 황제의 입가에 빙긋이 미소가 서렸다.
* * *
황자는 이틀 뒤에 겨우 깨어나자마자 제 곁을 지키고 있는 기하를 보며 다짜고짜 울음을 터트렸다. 혹여 아이가 어디 잘못되었나 싶어 혼비백산한 기하는 금룡대에게 죄인처럼 끌려온 태의를 닦달하다, 울음의 원인이 저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기어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황제가 그 모습을 보고 황자를 야단친 탓에 아이는 더 서럽게 울어야만 했다.
“이 미련한 놈아, 대체 얼마나 먹어댔으면 비장에 탈이 나느냔 말이다. 또 그리 돼지처럼 먹어댈 것이냐? 지금 찐 살이 부족해서 그래?”
“폐하.”
우는 아이를 품에 안고 자신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는 기하 때문에 부아가 치민 황제는 당장에라도 저 돼지 같은 아들놈을 궁 구석에 처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속이 뭉그러지다 못해 터질 지경이었다.
“황자, 이제 괜찮습니까?”
“…예.”
“배는 아프지 않습니까?”
“예, 쪼금 아픕니다.”
“침 놓는다 할 때는 아니라고 하더니, 너 혹 꾀병 아니냐?”
“아닙니다. 아픕니다.”
조그마한 손이 제 배를 문지른다.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가엾기도 해서, 기하는 얼른 황자를 다시 품에 안았다. 뜨끈뜨끈하던 열이 내려 축축한 황자가 혹여 한기라도 들까 부드러운 비단보를 등에 두르니 찰싹 달라붙는다.
“마마.”
“응?”
슬쩍 황제의 눈치를 보던 아이는 이내 결심한 듯 제 입을 가리고서 기하의 귓가에 다정하게 뭐라 속삭였다. 소리가 어찌나 작은지 바로 앞에 있음에도 전혀 들리지 않은 것에 짜증이 난 황제는, 당장에라도 황자를 잡아다가 처박을 것만 같은 흉흉한 눈을 빛냈다.
“뭘 속닥거려?”
금세 기하의 품에 얼굴을 묻는 황자의 뚱뚱한 뒤통수를 노려보던 황제가 이를 갈았다. 저 발칙한 조그만 놈이 감히 짐을 능멸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당장 묻는 말에 제대로 대답해야 함이 옳거늘.
“아바마마, 잘못했쯥니다. 마마를 못 보니 배가 고프고… 배가 고파서 계속 먹었는데… 근데 배가 아파서…….”
“차근차근 똑바로 말해라.”
“마마가 소자를 만나주시지 않고… 마마가 화가 나서……. 그래서 소자가 밥을 먹었는데…….”
“그만, 그만. 되었다.”
저것이 며칠 앓더니 머리가 어찌 된 것이 아닌가. 전에는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말하지는 않았는데. 쯧, 저도 모르게 혀를 차며 한마디 더 쏘아붙이려던 황제는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른 기하를 보고서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하마터면 제멋대로 움직였을 혀를 가볍게 씹자, 얼른 눈물을 닦아내며 웃는 기하를 향해 황자가 방긋거린다.
“미안합니다, 황자.”
“잘못해쯥니다, 마마. 마마가 너무 보고 시퍼서 배가 아팠어요. 천천히 꼭꼭 씹어서 먹을라구 했는데, 마마가 어디 갈까 봐…….”
옷깃을 붙잡는 황자의 손끝에 빡빡한 힘이 들어갔다. 이따금 황자나 보고 살자 다짐했다. 그러면서도 차마 아이를 내내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마음을 추스를 동안엔 만나지 않겠다고 전했다. 적당히 둘러대면 괜찮을 거라는 것은 순전히 잘못된 판단이었다.
자신의 외면에 아이는 마음의 상처를 받고 두려움에 떨며, 그것을 폭식으로 다스리려 했다. 아이가 내내 자신을 기다릴 동안, 또다시 혼자가 되었다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졌을 때에도, 기하는 온통 스스로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마마, 어디 안 가요?”
“응, 안 갑니다. 황자 곁에 있을 것입니다. 황자랑 아바마마랑 늘 함께할 것입니다.”
“헤에.”
“미안합니다, 황자.”
“아닙니다. 마마는 미안하지 않습니다. 소자가 잘못해쯥니다. 그렇지요, 아바마마?”
빼꼼히 고개를 든 황자는 그제야 황제를 돌아보았다. 무표정한 황제의 얼굴을 마주 보는 것도 겁내던 황자는 제 딴에 큰 용기를 낸 것이었기에, 그리 물으면서도 손끝을 부르르 떨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니 이제 그만 되었다.”
“히이.”
너그러운 황제의 태도에 아이는 스스럼없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평소에는 못나 보이던 살이 내린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황제는 투박한 손길로 황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웃지도 않고 그저 손만 내밀어 슥슥 다독이는 손길에, 아이는 마냥 좋은지 입까지 벌리며 헤실헤실 웃었다.
“정연.”
“예, 아바마마.”
“빈을 울리는 것은 오늘뿐이다. 알았느냐?”
고개를 갸웃하는 아이는, 아비가 한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물끄러미 바라보며 눈만 깜박였다. 그러다 이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얼른 기하의 목을 끌어안았다.
눈에서 불꽃이 인 황제가 그리 끌어안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말을 덧붙이기 전에, 기하는 아이를 마주 안으며 눈을 감았다.
* * *
잘 다듬어진 손톱을 연신 물어뜯으며 후원을 서성이던 연진 공주는 빠른 걸음으로 제게 다가오는 상궁을 향해 손짓했다. 주위를 휘휘 둘러보며 그녀에게 다가간 상궁이 귀엣말을 하자, 금세 시무룩해진 얼굴이 태양 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어찌 하시겠사옵니까?”
“일단 자경전으로 가세.”
“예, 공주마마.”
공주의 고운 손이 상궁의 팔에 걸쳐졌다. 익숙하게 그녀를 부축한 상궁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가마에 오르는 공주의 곁에 섰다. 일말의 희망도 없이 날아가 버린 그녀의 마음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정연군은 어떻다던가?”
“어제 정신이 드신 후로는 신열도 가라앉고, 괜찮아지셨다고 합니다.”
“그래, 다행이네.”
“그리 걱정되시면 동복궁에 잠시 들렀다가 가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됐어. 무빈도 있을 텐데, 그치 얼굴 보기 싫거든.”
고운 입술을 삐죽거린 공주는 금세 심드렁한 표정으로 멀리 보이는 자경전을 응시했다. 하나뿐인 오라비가 한낱 볼모에 불과한 원수에게 빠져드는 것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감히 황제인 오라비가 하는 일에 왈가왈부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닌지라, 불편한 마음을 안고서도 쉽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원치 않은 자리에 올라 자신이 꿈꾸던 삶과 정반대로 살아가고 있는 오라비를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그가 얼마나 자유를 갈망했는지, 갑갑한 황궁을 얼마나 싫어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쾌활하기만 하던 그가 점점 웃음을 잃어가며 사납고 독기 어린 표정이 굳어져 갈 때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오라비가 이제는 웃는다.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운 무빈이라 할지라도, 그의 시커먼 속내를 감히 헤아릴 수 없을지라도, 지금은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공주마마, 조심히 내리십시오.”
“응.”
상궁의 손을 붙잡고 발을 내딛자, 때마침 후원을 거닐고 있던 황후가 멀리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를 향해 허리를 굽혀 절을 올린 연진 공주는 환하게 미소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황후마마를 뵙습니다.”
“오셨습니까.”
“어찌 나와 계셔요? 이리 나와 계셔도 괜찮으십니까?”
“갑갑하여 잠시 나왔습니다. 이제는 슬슬 걸어 다녀도 괜찮다 하여 바람도 쐬고, 볕도 보는 중입니다.”
“햇볕이 강합니다.”
어느덧 성큼 다가온 여름 날씨는 여인들의 옷차림이 대담해지는 시기였다. 황후는 빙긋이 미소하며 제 손을 붙잡아 오는 연진과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대로 햇빛이 조금 강하기는 하였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너무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슬슬 움직이는 것이 복중 태아에게도 좋다고 하였으니, 매일 잠깐이라도 나와 걸을 참이었다.
“오라버니께서는 다녀가시었습니까?”
“예, 어제저녁에 잠깐 뵈었습니다. 정연군이 크게 앓았답니다. 폐하께서 상심하셨어요.”
“어디 그것이 정연군 때문이랍니까?”
톡 쏘아붙이는 공주를 빤히 바라보던 황후가 빙긋이 미소했다. 이미 황궁 담을 넘은 기가 막힌 소문을 황후 또한 알고 있음이라.
그 어떤 후궁들보다 소문에 상심한 이는 연진이었다. 그녀 또한 가슴 가득 북성에 대한 반감을 켜켜이 쌓아가며 자랐기에, 미움을 한순간에 떨쳐내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황후가 아무리 기하에 대해 좋은 말을 건네도 내내 듣고 싶어 하지 않았으니까.
“공주께서도 폐하의 용안을 보시었지 않습니까? 요즘 폐하께서 얼마나 기분이 좋으신지 아십니까?”
“그야, 마마께서 이리 회임도 하시고…….”
“모두 그 사람 덕입니다.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고집을 부리던 정연군 또한, 나쁜 버릇을 모두 고쳤지 않습니까?”
“삿된 마음으로 술수라도 부리는지 어찌 알겠어요.”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공주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는 따뜻하고 좋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폐하께서도 마음을 여셨겠지요.”
“마마께서는 분하지도 않으십니까?”
아주 오래전,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해진 사람을 떠올릴 때면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분하기도 했다. 그리 싫다고 도망치던 황궁의 삶이, 제 운명이 기구하여 밤새 울었던 나날도 분명 있었다.
이리 살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그때 그 마음을 받아들일 것을,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살다 함께 갈 것을. 내내 후회해도 변하는 건 없었다.
하여, 바라는 것도 없었다. 감히 다른 이를 마음에 품고 사는 어리석은 여인을 기꺼이 받아주신 분을, 어찌 바라고 원망한단 말인가.
“제게는 그럴 자격이 없지요.”
연진 또한 그것을 알고 있었다. 부부의 연을 맺고 묵묵히 제 오라비의 곁에 머물면서 모든 것을 품어주는 그녀의 관대함은, 홀연히 먼저 떠난 그녀의 정인과 똑 닮아 있었다.
“마마께서는 충분히 잘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제국의 여인으로, 황실의 안주인으로. 오라버니께서 아니 계신 긴 시간 동안 흔들림 없이 내명부를 지키셨어요.”
“그것만이 폐하께 받은 은혜를 갚을 방법이니까요.”
아직 솟지 않은 평평한 배를 쓰다듬으며 그녀는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내내 웃으며 다정하게 속삭이는 그녀의 얼굴에는, 오래된 긴장이 마른 찌꺼기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누구에게나 다정하고 친절하며 사려 깊은 여인이었으나, 아마 그녀 자신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을 것이라 연진은 확신했다. 그런 그녀가 가여웠고, 그럴 때마다 먼저 떠난 오라비가 생각났다.
만약 황태자였던 오라버니가 그리 허망하게 떠나지 않았더라면. 만약 아바마마께서 그리 쉽게 붕(崩) 하지 않으셨더라면. 만약 어마마마께서 독에 당하시지만 않으셨더라면. 그랬더라면, 그런 몹쓸 여인이 황궁에 흘러 들어오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악귀 같은 그 여인이 제 가족을 갈가리 찢어놓진 않았을 테지.
“폐하께서도 늘 그러셨지요. 미우나 미워할 수 없고, 외면하면 할수록 눈이 간다고요.”
“오라버니께서는 귀신에 홀리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폐비 그 악녀도, 처음에는 소녀에게도 무척 다정했지요. 소녀는 기억도 나지 않는 어마마마 대신, 악귀 같은 그 여자에게 어리광을 부리며 자랐습니다. 그 못된 여인이 어머니를 해한 것은 까맣게 몰랐어요.”
그것이 그의 잘못은 아니다. 하지만 그를 용서할 수 없다. 그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를 받아들일 수도 없다. 그를 보면 자꾸만 떠오르는 추악한 기억은 너무도 고통스럽고 아픈 것뿐이라, 쉽게 잊을 수도 외면할 수도 없다.
“그가 미우시면, 폐하를 생각하세요. 폐하께서 그리 편안하게 웃으시는 것을, 신첩은 혼인한 이래 처음 보았습니다.”
“…….”
“원치 않던 짐을 어깨에 짊어진 것은 우리 모두 같지 않습니까? 그것은 그 사람 또한 마찬가지랍니다. 하지만 우리와는 달리 폐하께서는 잠시도 쉴 틈 없이 스스로를 내던지셨습니다. 어쩌면, 평생 그리 사셔야겠지요. 그러니, 조금은 폐하께서 편해지실 수 있게 도와주세요.”
잔잔한 황후의 목소리에 공주는 기어이 눈물을 터트렸다. 받아들일 수 없는 마음과 반대로 흐르는 현실은 아직 어린 그녀에게 너무도 가혹한 일이었다.
연신 기하의 눈치를 살피며 삐뚤삐뚤 글씨를 써 내려가던 황자는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오는 현 상궁과 눈이 마주치자 생긋 웃었다.
처음에는 호랑이처럼 무서운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뚝뚝하게 서 있기만 하던 현 상궁은 달곰한 당과나 황자가 특히 좋아하는 과일, 떡과 같은 주전부리를 아낌없이 내왔다.
다른 살림은 곤궁하게 지낼망정 먹는 것에는 아끼지 말자는 것이 태화당 식구들이 바라고 추구하는 바였기에, 황자는 제 처소에서 눈치 보느라 마음껏 먹지 못했던 간식을 늘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오늘은 또 무슨 맛난 주전부리를 내왔을지, 잔뜩 기대에 부푼 얼굴로 현 상궁을 바라보던 황자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먹을 것 대신 색색의 고운 비단 실을 들고 들어온 그녀는, 정신을 놓고 앉아 있는 기하에게 슬그머니 다가왔다.
“마마.”
“응?”
“무슨 생각을 그리 깊이 하십니까?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십니까?”
“어, 아니.”
황자와 함께 태화당으로 오기 전에 황후께 인사를 드리러 자경전으로 향했던 기하는 그곳에 발을 들이지도 못하고 한동안 멍하니 서 있다 금세 돌아왔다. 평소 유난히 사이가 좋은 황후와 연진 공주가 함께 있는 모습이야 익숙하게 보아 오던 것인데, 자신에게 독설을 퍼붓는 공주를 거리낌 없이 대하던 기하가 주춤거리는 모습은 퍽 낯설었다. 혹여 자신이 알지 못한 무슨 일이 있었나 싶어 면밀하게 그를 관찰해도, 특별한 점은 없어 보였다.
“새 실을 가져왔습니다. 이번 실은 지난번 것보다 훨씬 곱습니다.”
“응.”
싫다는 말도 없이 무작정 실을 집어 든 기하가 수틀을 제 앞에 놓는 모습도 평소와는 달랐다. 수놓기라면 이를 갈 정도로 지긋지긋해 하지 않았던가.
뭔가 이상하다는 얼굴로 황자를 바라보던 현 상궁은 입을 코만큼 내밀고 삐뚤삐뚤 필사하고 있는 아이의 표정에 고개를 갸웃했다.
“저하, 어디 불편하신 곳이 있으십니까?”
“아니.”
“황자, 표정이 어찌 그래요?”
그제야 제 앞에 앉은 황자의 입이 조그마한 코보다 높이 튀어나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기하가 가만히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아직 바깥에 나가 뛰놀기는 이르고, 그렇다고 마냥 누워만 있으라기엔 답답해하는 것 같아 글씨 연습도 할 겸 필사를 하라 일렀더니 것위(지렁이)가 따로 없었다.
“어디가 불편합니까?”
“아니요.”
“한데 어찌 표정이 그리 어둡지?”
“배가…….”
“배가 또 아픕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황자의 손에 들린 붓 끝에서 먹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직 붓 잡는 것도 서툰 황자는 유난히 공부하기를 어려워하고 싫어한다고 했다.
그래도 시키는 것은 곧잘 하여 이따금 칭찬도 받았다는데, 지금 보니 아직은 너무 어린 것이 아닌가 하는 도 넘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요즘은 사대부가의 자제들도 말을 배우면서 글공부를 같이 시작한다지.
그러니 제국의 황자, 황제 폐하의 아드님께서 뒤처질 수야 없다. 이제 얼마 안 있어 황자와 비슷한 또래의 예동을 들일 텐데, 그 아이들보다 실력이 형편없다면 황제께 면이 서지 않을 것 같다.
“하면 어찌 그래요.”
“배도 고프고… 이고, 그만하고 시퍼요.”
“수라 물린 지 얼마나 되었다고. 물리자마자 시작한 것이 아닙니까? 차분히 앉아 천천히 해보세요. 글씨는 조금 더 크게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 무작정 쓰지 말고 모르는 글자는 물어가며 쓰는 겁니다.”
대답도 하지 않고 입술을 꾹 닫은 황자는 하기 싫은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그 모습이 귀엽기야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기하는 웃음을 뚝 지우고 현 상궁이 내미는 수틀을 받아 들었다.
황자가 공부하기 싫어하는 것만큼, 자신 역시 수놓기는 끔찍했다. 어린 황자 앞에서 수놓기 싫다고 떼를 쓸 수도 없어, 입이 내밀어 지려는 것을 제자리에 넣고 바늘을 찌르니 현 상궁 얼굴만 흐뭇하게 변한다.
“저하, 그거 다 하시면 소인이 맛난 서과 화차를 내오겠사옵니다.”
“서과(수박)가 모야?”
“크고 달고 맛 좋은 과일 있지 않습니까? 사각사각 씹으면 단물이 나오는 붉은 과실 말입니다.”
“아! 먹으면 쉬 많이 마려운고!”
“예.”
“그거 조아! 그거 마시쪄.”
“그러니 천천히 차근차근 하십시오. 시원한 물에 지금 가서 넣어두고 오겠사옵니다.”
“응!”
그제야 댓 발 나왔던 입을 집어넣고 아직 제대로 나지도 않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은 황자를 바라보던 기하는 못 말리겠다는 듯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먹을 것이 저리도 좋을까.
“흐음.”
어깨가 아팠다. 목도 아프고, 손목도 뻐근하고, 온몸이 찌뿌드드했다. 활짝 열어놓은 문 사이로 바람이 도통 들어오지 않아서 끈적끈적한 땀이 나는 것도 같았다.
아직은 제대로 된 여름이 시작되지 않았다고 했는데 어찌 이리 더운지, 연신 숨을 내쉬며 손을 멈춘 기하는 뻐근한 목을 주무르려 고개를 돌리다 깜짝 놀라, 들고 있던 수틀을 내던졌다.
“어, 언제 오시었습니까?”
“뭘 하느라 둘 다 그리 정신을 놓고 있어?”
황제의 음성에 놀란 황자가 들고 있던 붓을 떨어트렸다. 시커먼 먹물이 그대로 쏟아져 기껏 열심히 쓴 서책 위를 뒤덮자, 황자는 발까지 동동 구르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힝…….”
“사내놈이 어찌 그리 칭얼거려. 너는 아비를 보고도 인사도 안 하느냐?”
“아바…….”
“됐다, 이놈아. 엎드려 절 받기도 하루 이틀이지. 아직도 골골대느냐? 또 배가 아파?”
“아닙니다…….”
넓은 침상 위에 나란히 마주 보고 앉아 있던 기하와 황자는 각자 하고 있던 것을 슬그머니 뒤로 밀었다. 새카맣게 변한 서책을 보고 황제가 야단칠까 두려웠던 황자는, 호시탐탐 기하의 품으로 안겨들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 물론 기하 또한 제가 놓은 자수를 보고 황제가 타박하거나 혀를 찰까 민망하여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사내놈이 맹해 빠져서는.”
혀까지 쯧쯧 차며 황자를 나무라던 황제는 기하의 옆에 앉으며 다정한 얼굴로 그의 손을 붙잡았다. 어린 아들이 빤히 쳐다보고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찌나 그윽하게 바라보는지, 제가 다 낯이 뜨거울 지경이었다.
“폐하, 저기…….”
“수를 놓고 있었느냐?”
“아, 저… 그것이…….”
“어디 좀 보자.”
“예? 아, 아니, 아니 됩니다.”
“아니 돼?”
황제의 잘생긴 눈썹이 순간 사납게 꿈틀거렸다. 그 순간 말문이 막힌 기하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입술을 붕어처럼 빠끔거렸다.
감히 황제께 안 되는 일은 없다. 그런 말 자체가 불경한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아는 기하는 금세 시무룩한 얼굴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황제의 의미심장한 얼굴이 기하의 등 뒤에 놓인 수틀로 향했다.
“이리 내 봐.”
“그것이…….”
어차피 변명이 통하지 않을 얼굴이다. 더욱이 지금은 어린 황자도 눈앞에 있다. 황제께서 명하신 일에 토를 달고 행하지 않는 불경한 모습을 황자에게 보여주는 것은 교육상 좋은 일도 아니었다.
심란한 마음을 겨우 추스른 기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너무도 엉망진창이라 감히 시선 둘 곳이 없는 수틀을 내밀었다. 차라리 이대로 졸도하는 것이 낫겠다.
점점 이상하게 변하는 황제의 용안을 바라볼 엄두가 나지 않아 눈을 질끈 감으니 핏, 하는 웃음소리가 너무도 크게 들린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황자도 있는데 그리 웃으실 게 무어람.
“설마 이 것위 같은 것은…….”
“용입니다.”
뻔뻔하게 제 입으로 용이라 이르니, 굳이 그것을 것위라 칭한 황제가 원망스러웠다.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언젠가 황제께 진상할 것이라 얼마나 정성 들여 놓고 있었는데. 것위가 무엇인가, 것위가. 이무기도 아니고.
“금실로 놓으면 전부 용이더냐? 너, 내게 진상할 것을 이리 엉망으로―.”
차마 황자 앞이라 더는 말을 잇지 않은 황제는 매끈한 턱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기하와 아이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하나는 글씨가 것위 같고, 하나는 수가 그것과 같다. 삐뚤삐뚤, 마음이 삐뚤어진 것도 아닌 것들이 어찌 이리 솜씨가 없단 말인가.
“정연.”
“예?”
“너는 글씨가 이게 무어냐. 졸며 썼느냐?”
“아닙니다.”
“못났다 못났다 했더니, 글씨까지 못나?”
“자꾸 못났다 하지 마십시오. 황자가 어디 못났습니까?”
슬그머니 다가와서 하는 것이 말대꾸라니. 사납게 눈을 흘기자 금세 꼬리를 내린 기하는 얼른 고개를 돌리며 딴청 하더니, 꼬물거리며 손장난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이라 그럽니다. 두고 보십시오. 머잖아 황자도 수려하게 글을 쓸 것입니다. 그렇지요, 황자?”
“예! 그럴 것입니다. 히히.”
“오호라, 그럼 그대 수놓는 솜씨도 수려해지겠구나? 기대하고 있으마.”
“예?”
“네 직접 베갯잇에 수를 놓으려 함이 아니더냐?”
“그것이…….”
“내 빈이 짐을 위해 정성 들여 놓은 수를 잘 간직하며 매일 베고 잘 것이다. 기대하마.”
다정하게 어깨를 다독여주는 황제의 손길에 가슴 떨려 할 시간도 없었다. 눈앞이 뿌옇다 못해 캄캄했다. 폐하께서는 대체, 왜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것일까.
“마마, 다과이옵니다.”
“들이게.”
차례대로 들어오는 세 개의 상에는 빛깔이 고운 서과 화차와 꿀떡, 따뜻한 차가 함께 어우러져 있었다. 기대감에 부푼 황자는 당장에라도 상에 달려들 듯하다가, 황제의 매서운 눈길에 침만 꼴깍꼴깍 삼키며 손을 벌벌 떨었다.
“다음부터는 빈과 내 것은 함께 내와라.”
“예?”
“곁에서 함께 먹을 것인데 굳이 따로 내올 필요 없다. 수라도 마찬가지다.”
“하나, 그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감히 폐하와 겸상할 수 있는 이는…….”
“내가 내 빈과 마주 앉아 수라를 들겠다는데, 법도 따져가며 참아야 하느냐?”
“폐하, 그것은…….”
“당장 이것부터 물려.”
난처한 기색이 역력한 현 상궁이 어찌할 바 모르는 틈을 타, 지밀상궁이 먼저 움직였다. 그녀는 재빠르게 기하의 앞에 놓인 상을 물리며, 그의 몫으로 내온 다과를 황제의 앞에 놓인 상에 옮겼다. 그것이 어찌나 고요하고 민첩한지, 황자는 눈을 끔벅거리며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오직 황제만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기하의 손등 위로 제 손을 포개어 잡았다.
그릇에 코를 처박고 허겁지겁 화차를 씹어 삼키는 황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하는 보다 못해 휘건(揮巾)을 들어 아이의 입가를 문질러 닦았다. 하얀 휘건에 붉은 서과 물이 곱게 들었다. 황자가 빙긋이 웃다가 또 슬그머니 황제의 눈치를 보며 눈을 내리깔자, 기하는 직접 꿀떡을 집어 아이에게 내밀었다.
“자, 떡도 좋아하지요?”
먹는 것을 좋아하는 황자는 맛난 것을 입에 넣으며 웃을 때가 가장 예뻤다. 동그란 뺨을 쓰다듬으며 그런 황자를 몇 번이나 품에 안고 싶었지만, 혹여나 황제가 아이를 버릇없이 가르친다고 타박이라도 할까 봐, 몇 번이나 움찔거리며 손을 거둬야 했다.
“너 그리 먹다 밤에 어쩌려고 그래?”
“어찌 먹는 데 그러십니까. 황자, 괜찮습니다. 천천히 많이 드세요.”
서과로 가득 찬 황자의 통통한 뺨이 움찔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기하의 말대로 천천히 많이 먹고 싶었으나, 흉흉한 황제의 표정에 금세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배부릅니다.”
슬그머니 시저(匙箸 : 수저)를 내려놓으며 풀이 죽은 황자를 보다 못한 기하가 얼른 아이를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허벅지 위에 아이를 앉히고 예쁘게 빚어진 떡을 하나 더 입에 넣어주니, 황자는 웃으며 조그마한 입을 오물거렸다.
“필사를 오래 하여 힘들었지요?”
쪽, 쪽. 너무도 자연스럽게 황자의 뺨에 입을 맞추며 등을 다독이고 손을 잡아주는 기하는 제 옆에서 흉흉한 눈으로 바라보는 황제 쪽으로는 아예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도대체가―.”
소만 한 놈을 힘들게 뭣 하러 안고 있어? 툭하면 안아주고, 먹여주고, 게다가 입까지 맞춰주는 것은 그렇다 치자. 제가 곁에 있는데도 아이에게만 시선이 팔린 모습에 부아가 치민 황제가 이를 바드득 갈았다. 그제야 슬쩍 저를 돌아본 기하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잠시만 기다리라는 듯 눈짓을 한다.
“찬 것을 너무 많이 먹으면 배탈이 난답니다. 아바마마께서는 황자가 걱정되어 그러시는 것이니,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단것만 먹으면 저녁 수라를 들지 못합니다.”
“예.”
“착합니다. 탕약도 잘 먹고, 필사도 잘하고.”
“마마, 영이랑 놀아도 됩니까?”
“조금 있으면 해가 질 텐데요?”
“영이 혼자 밖에서 외롭습니다.”
“황자는 아직 다 낫지 않았으니 무리하게 뛰면 아니 됩니다? 조금만 놀다 오세요.”
“예, 히히. 아바마마, 소자…….”
“나가 보아라.”
“예.”
보모상궁의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걷는 황자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기하는 지밀상궁과 현 상궁마저 자리에서 물러나자, 그제야 황제를 향해 돌아앉았다.
“폐하, 금일은 자경전에…….”
“너 정녕 내게 이럴 것이냐?”
“예?”
“뭘 모르는 척 물어? 이리 짐을 홀대해도 되느냐 물었다.”
“신첩이 언제 폐하를 홀대하였습니까?”
“송아지만 한 놈은 품에 안고 어여뻐 하면서, 내게는 등을 돌리지 않았느냐? 너 솔직히 말해라. 짐이 더 좋으냐, 정연 저놈이 더 좋으냐?”
입을 반쯤 벌리고 눈을 깜박이는 기하의 황당하다는 표정에도 황제는 자신의 말을 물리지 않았다. 그야 곰곰이 생각해보면 부끄러운 것을 넘어서 사내로써 수치스러운 말임이 분명하지만, 어차피 이곳엔 듣는 이도 없고, 저것은 말을 돌리면 도무지 못 알아먹는 재주를 지녔으니 제대로 얘기하는 것이 나았다.
“그것이 무슨…….”
“그런 표정 짓지 말고 묻는 말에나 답해. 전에는 짐을 못 봐서 안달하더니, 이제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 취급하지 않아?”
“신첩은 그런 적 없습니다. 다만…….”
“다만?”
“황자는 아직 어리고, 또 크게 앓았고…….”
“그래서, 안아주고 먹여주고 입까지 맞춰주면서 짐에게는 그리 딱딱하게 굴어?”
난처함으로 가득한 기하의 얼굴이 금세 찌푸려지면서 쉬이 입을 열지 못한다. 그렇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테지. 이번을 기회 삼아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엄히 당부하고 약조를 받아내어…….
“이리 오십시오.”
“뭐?”
저를 향해 팔을 쭉 벌리며 태연하게 중얼거리는 기하의 얼굴엔 웃음이나 장난기가 없었다. 몹시도 진중한 그의 얼굴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황제는 진중한 기하의 표정에 헛, 하는 탄식을 뱉어냈다. 어찌 단 한 번도 예상과 맞아떨어지는 법이 없다.
“황자가 그리 부러우셨습니까? 그러시면 진작 말씀을 하시지요. 황자도 없으니 꼭 안아드리겠습니다.”
“…….”
“아이참.”
어이가 없어 마냥 바라보고만 있었더니, 제 옷자락을 들치고 무릎으로 걸어온 기하가 해사하게 미소하며 자신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제대로 허리를 굽히지 않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안아주면서 등까지 다독이는 손길은, 마치 어린 황자를 달래는 것과 같지 않은가.
“가만 보면 폐하께서는 황자보다 귀여우십니다.”
“뭐야?”
“아차, 마음에 있는 말을 전부 하면 아니 된다 하였는데……. 역정 내지 마십시오. 나쁜 뜻으로 그리 말씀드린 것은 아닙니다.”
생글생글 웃으면서 잘도 말한다. 저것은 대체 머릿속에 무얼 담고 산단 말인가. 기껏 돌려 말하지 않고 뜨거운 연정을 퍼부었더니, 돌아오는 것이라곤 등을 다독이는 손길이라니. 뭐? 황자보다 귀여워?
“머리가 나쁘면 눈치라도 있어야지. 말귀도 못 알아먹는 것이 어찌 이리 둔해?”
“예? 그게 무슨, 으악!”
날쌔게 기하의 허리를 감싸 안은 황제는 놀라 버둥거리는 그를 갈퀴처럼 붙잡았다. 매에게 붙잡힌 어린 짐승처럼 파닥거리던 기하는 황제의 형형한 시선에 그제야 겁에 질린 눈으로 작게 떨었다.
“폐, 폐하…….”
“나는 내 것을 그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다.”
“아픕니다.”
“황자를 어여삐 여기는 것을 탓하진 않으마. 네게도 마음 붙일 곳이 필요했을 테고, 특히나 정연을 애틋하게 생각하는 마음은 어여삐 여기마.”
단번에 손을 내리자 그대로 황제의 무릎 위로 드러눕다시피 한 기하는,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잘생긴 그를 올려다봤다.
이 사람은 자신을 해하지 않는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왜 그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마음이 천천히 풀어지자, 덩달아 표정이 편안해졌다.
“하나 명심해야 할 것이다. 너는 내 것이야. 내게서 등을 돌리지도, 눈을 돌리지도 마라.”
“신첩이 폐하의 것이면, 폐하는요?”
“뭐?”
“폐하는, 누구의 것입니까?”
제국의 주인인 황제가 누구의 것이냐니. 당돌하고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저도 모르게 핏, 터지는 웃음을 삼키며 황제는 입술 끝을 삐뚜름하게 올렸다.
“물론 폐하께서는 제국의 주인이시고, 신첩은 폐하의 후궁이니 당연히 신첩이 폐하의 것은 맞으나, 폐하께서는 언제 다시 등을 돌리실지 모르고, 총애란 것은 물 흐르듯 흐른다 하였습니다.”
“너,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아느냐?”
“신첩이 그리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다만, 폐하께서 신첩에게 내려주신 마음을 언젠가 다시 걷어 가신다면… 그때는 정말,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사람의 마음은 늘 변한다. 연정이란 특히나 그렇지.”
담담한 황제의 음성에 기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마음이 닿았다고 느끼게 된 순간부터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사람의 마음은 늘 변한다. 한순간에 뒤바뀌는 것이 연정이다.
황제의 곁에는 수많은 미인이 애정을 갈구하고 있다. 작은 호기심에, 혹은 어떠한 연유로 잠시 제게 마음이 머물렀다 한들 그것이 어찌 영원하겠는가.
“그러니 변치 않을 것이라곤 약조하지 않을 거다. 이런 마음은 짐 또한 처음이라, 언제 어찌 변할지 나도 모르겠으니까.”
“…….”
“네게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고 싶지 않다.”
부드러운 손길이 기하의 뺨을 훑었다. 마음 한쪽이 지끈거려 눈을 감고 있던 기하는 그제야 시선을 들었다. 덤덤하게 굳어 있을 줄로만 알았던 황제의 얼굴에 따뜻한 미소가 가득했다.
“하지만, 기하야.”
“…예, 폐하.”
“무슨 일이 있어도 평생 너를 외롭게 하지는 않겠다. 그것만은 약속하마.”
“신첩은….”
“그러니 그런 표정은 짓지 않아도 돼.”
입술 위로 내려앉은 온기는 마음마저 따뜻하게 했다. 다정한 눈빛이나, 뜨거운 손길이나, 포근한 말투 때문만은 아니었다. 마주 보고 있으니 그저 행복하고, 언제 돌아설지 모르나 지금 이 순간이 마냥 좋았다.
그러면 된 것 아닐까. 혹여 언젠가, 이 마음이 모두 식어 다시 혼자가 된다고 해도. 그때는 버티고 살아갈 추억이 남아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