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장 너를 내게 (20/49)

19장 너를 내게

밤이 깊었다. 수라도 제대로 들지 않은 황제는 수신전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커다란 의자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앉아 물끄러미 허공을 응시하는 그는, 벌써 몇 시간째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폐하, 밤이 깊었사옵니다.”

보다 못한 상선이 여러 번 그를 불렀지만, 이렇다 할 대답조차 없었다. 종일 정무로 바쁘게 보낸 황제의 유일한 휴식 시간을 이렇게 허투루 보내게 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황제가 타고난 체력이 강하고 혈기 왕성할 시기이기는 하나, 요즘 그는 지나치게 자신을 혹사했다.

“폐하, 소신 상시(常侍)이옵니다.”

황제는 문밖에서 들리는 노인의 음성에 무거운 몸을 겨우 일으켰다. 그가 황손이었던 시절부터 상선의 자리에 있던 상시 영감은 건강이 좋지 않아 업무를 잠시 내려놓은 상태였다. 볕이 좋은 날에나 간간이 나와 바람을 쐰다던 그가 어쩐 일로 이 늦은 시각까지 퇴궐하지 않았던가.

“들어오라.”

병을 앓고 있다고는 하나 여전히 풍채가 좋은 상시 영감이 황제를 향해 절을 올렸다.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보던 황제는 방 안을 조금 더 환하게 밝히라 명하고 남은 이들을 모두 물렸다.

“앉으라.”

“예, 폐하. 황은이 망극하나이다.”

황제가 손짓한 자리에 앉은 상시는 향긋한 차를 내어온 상궁들이 문을 나설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그의 고집스러운 모습에 황제는 수려한 미안을 찌푸렸다.

아주 오랜 시간 황가에 충성하며 권력을 잡고 있던 그가 황제는 어쩐지 불편했다. 더욱이 그는 남성 출신으로, 폐비 신 씨가 선황에게 시집올 때 가장 크게 힘을 쓴 자이기도 했다.

“건강은 어떤가.”

“당장 내일 아침에 일어나지 못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나이지요.”

태연하게 제 죽음을 이야기하는 늙은 여우 같은 태도에도 황제는 쉬이 휩쓸리지 않았다. 무감각한 얼굴로 찻잔을 기울이는 황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상시는 검버섯이 피어오른 자신의 손등으로 시선을 내렸다.

“소신은 너무 늙어 이제 운신조차 어렵습니다, 폐하. 부디 청하옵니다. 여생을 고향에서 편히 보낼 수 있게 황은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그대의 고향이라고 해봤자 이미 이리저리 다 찢겨 그 시절은 찾아볼 수도 없음인데, 무슨 의미가 있나.”

“사람에겐 누구나 존재만으로 의미 있는 것이 있지요. 소신에게는 고향이 그렇습니다. 비록 옛 모습은 찾기 어려우나, 그렇다고 마음에서까지 지운 것은 아니랍니다.”

고약한 늙은이. 항상 저렇게 웃는 얼굴로 사람을 꿰뚫어 보듯이 말하지.

“늙고 병들어 갈 곳 없는 이를 무조건 내칠 수야 없지. 그대는 할바마마께서 특별히 총애하셨지 않은가.”

“더는 이 황궁에서 소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황제의 눈썹이 꿈틀했다. 늘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온갖 일을 자행해 온 자다. 정승도 부럽지 않을 세를 가지고 천하를 손에 쥐고 흔들려 했던 욕심을 누가 모를까.

“그대 같은 충신이 할 말은 아니지.”

“허허허허, 소신 같은 무뢰배를 어찌 충신이라 하시나이까.”

가래 낀 목소리는 탁하고 무거웠다. 이제는 눈과 귀가 어두워져 사리 분별조차 흐릿한 노인을 한사코 궁에 두는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더는 그에게 휘둘리지 않기 위함이었다. 아직도 제국 곳곳에 간자를 심어두고 제 욕망을 서슴없이 드러내는 그를 섣불리 죽일 수도 없었다.

“폐하.”

촉망받는 미래를 저버리고 스스로 거세하여 환관이 된 그가 무슨 목적으로 황궁에 흘러들었는지 따위는 궁금하지 않았다.

머리가 하얗게 센 후에도, 겨우 일으켜 세운 자신의 가문이 몰락하는 것을 두 눈 뜨고 바라보는 순간에도 그는 태연하게 웃었다. 적인지 아군인지, 사실은 쉬이 구분되지 않았다. 할바마마께서는 그를 더없이 믿으셨고, 아바마마께서는 그를 쓸 만한 말로 여기면서도 경계를 놓지 않으셨다.

“소신은 폐하께서 황좌에 오르신 것이 참으로 좋습니다.”

“그대가 늙긴 했나 보군, 쓸데없는 말을 다 하고.”

“그릇된 욕심으로 희생은 컸으나, 제국은 폐하의 통치 아래 찬란하게 빛날 것입니다.”

“거두절미하고 하고 싶은 말이나 하라.”

“북성을 버리실 때가 왔습니다.”

그제까지 흐릿하게 빛나던 상시의 표정이 서늘하게 변했다. 막 찻잔을 기울이던 황제는 입속으로 밀려들어 오는 쌉싸래한 맛에 입맛을 다시며 뭉툭하게 손을 놀렸다. 맑지 않은 소리를 내며 넘어진 찻물이 아름답게 수놓아진 비단 보를 적셨다.

“그대 눈엔 짐이 북성을 끌어안고 있는 것 같나?”

“품에 안진 않으셨으나, 내치지도 않으셨지요.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들이 남은 사성에 간자를 심어두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요.”

“그대의 정보력이 거기까지 미치는 줄은 몰랐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상시 자리가 아니라 다른 벼슬을 내릴 것을 그랬어. 어떤가? 지금이라도 옮겨볼 생각이 있나?”

웃음기 가득한 황제의 음성이 싸늘하게 빛났다. 노인은 전혀 주눅 들지 않은 얼굴로 가만히 그의 눈을 응시했다. 주름이 깊게 팬 두 눈이 세월의 흔적에 축 늘어졌다.

“서연은 간악한 자가 아닙니다.”

“그래. 그대와 막역한 사이였으니 누구보다 잘 알겠군.”

“그런 북왕과 가장 많이 닮은 이가 바로 무빈마마십니다.”

태연한 그의 음성에 황제는 가만히 주먹을 그러쥐었다. 손가락 끝의 핏기가 사라질 때까지 움켜쥔 주먹을 떨자, 스산한 기분이 몰아쳤다.

“가엾은 분이시지요. 어질고 현명하고, 구김살 하나 없으시어 보고 있기만 해도 흐뭇한 웃음이 날 정도로 어여쁜 분이셨지요.”

“쓸데없이 입을 놀리지 마라.”

“소신이 퍼트린 소문의 끝은 폐하께서 찍으셔야지요.”

“그대였나.”

짙고 굵은 눈썹을 꿈틀하는 황제의 억눌린 음성에 그는 고요히 미소했다. 아직 혈기 왕성하신 황제께서는 이따금 이렇게 서슴없이 감정을 드러내곤 하셨다.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르지. 천하의 주인이라지만, 정작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은 얼마 없다는 것을 황제께서는 너무도 잘 알고 계시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그대가 싫어. 항상 태연한 얼굴로 내 머리 꼭대기에 올라가 있는 듯이 구니 말이야.”

“인정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인정하고 말고 할 게 뭐가 있다는 거지? 그대가 꾸민 계략에 휘둘리는 모습이 우스운가?”

“언젠가 북성을 완전히 버리실 때, 폐하께서 사사로운 감정으로 일을 멈추시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서연 휘하(麾下)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부디 뜻을 굽히지 마시옵소서.”

“내가 지금 그 아이 때문에 망설이고 있다는 것이냐.”

“무빈께서는 이제 제국의 사람이십니다. 폐하의 사람이시지요. 망설이실 이유는 없습니다.”

상시가 내민 두툼한 서찰을 내려다보며 황제는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

피는 피를 부른다.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 원망은 원망으로 갚고, 미움은 더 큰 미움을 가져온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폐하께서 옳은 일을 하신다 하여 마마께서 돌아서시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두려워 마십시오.”

“그대, 지금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어. 내가 고작 무빈 때문에―.”

“예, 물론 폐하께서는 흔들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옳은 일이라면 응당 하시겠지요. 망설이시는 일은 없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내, 후회하시겠지요.”

“…….”

“사람 마음이란 것이 물 흐르는 대로 흘러가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후회, 후회라…….

“소신은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폐하. 밤이 늦었으니 어서 침수 드시지요.”

고요히 일어서는 상시의 그림자가 멀어진다. 축축하게 젖은 비단 보를 손끝으로 어루만지던 황제는 단정하게 놓인 서찰을 집어 들었다. 빼곡하게 쓰인 것은 북성의 움직임에 대한 정찰 보고였다. 이런 주제에 이제 손을 놓고 물러서겠다고? 내내 수수께끼 하듯 중얼거리던 상시의 말을 곱씹으며 황제는 깊게 눈을 감았다.

* * *

입덧 탓에 통 수라를 들지 못하는 황후를 찾은 것은 그로부터 나흘이 지난 후였다. 때를 놓친 터라 간단하게 다과상을 받고 나니, 머잖아 연진이 찾아들었다. 오랜만에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황제 내외를 다정하게 바라보던 공주는 표정이 굳어 있는 그를 향해 걱정 어린 시선을 건넸다.

“오라버니, 용안이 어두우십니다.”

“곤하여 그런다.”

“요즘 정무(政務)가 너무 바쁘신 것 아닙니까? 수라도 제때에 받지 못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여름이 와 그런지 입맛이 없어 그래.”

웃고 있는 얼굴이 이전처럼 따뜻하지 않았다. 물끄러미 황제를 바라보던 연진은 힘든 기색이 역력한 황후의 손을 다정하게 잡았다.

“마마께서 얼른 입덧이 멎으셔야 오라버니께서도 함께 맛난 것을 드실 텐데요.”

“맛난 것이 먹고 싶으냐?”

“에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소녀는 그저 폐하와 황후마마의 강녕만을 바랍니다.”

곱게 눈웃음 짓는 누이를 바라보던 황제는 며칠 전부터 계속되는 두통에 가만히 눈을 감았다.

“폐하, 이제 슬슬 연진 공주의 혼처를 알아보셔야지요.”

“생각하고 있소.”

“홀로 생각만 하지 마시옵고, 공주의 의중도 여쭤보셔요. 혹, 마음에 두신 훌륭한 분이 계실지 누가 아옵니까?”

“그래, 내 미처 그 생각은 하지 못하였다. 정아, 마음에 둔 자가 있거든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라비에게 말해 보아라.”

갑작스러운 황제의 말에 얼굴을 확 붉힌 공주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귀 끝까지 붉게 물들인 모습을 보아하니 황후의 짐작대로 마음에 둔 자가 있는 듯도 한데, 쉬이 입을 열 것 같지 않아 황제는 가볍게 웃음을 삼켰다.

“짐에게 말하기 곤란하다면 네가 편한 상대에게 전하라고 해. 황후도 좋고, 유모도 좋다.”

“그런 것이 아니옵니다. 소녀는 아직 혼인하고 싶지 않습니다.”

“당장 혼인하라는 것이 아니다. 좋은 이를 만나 함께한다면 너 또한 기쁠 것이니 차근차근 생각해 보아라.”

“오라버니 같으신 분이 또 계시면 얼른 시집가겠습니다.”

가볍게 웃음을 터트린 황후를 따라 웃으며 연진은 곱게 눈을 휘었다. 볼우물이 들어간 뽀얀 피부와 반듯한 눈썹부터 단아한 콧날, 붉은 입술까지 어디 한 곳 빠지는 구석이 없는 누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황제가 다시 찻잔을 기울였다. 반쯤 식은 차가 목으로 들어오니 알싸한 맛에 혀끝이 썼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마마. 신첩도 잘 찾아보겠습니다.”

“그런 것은 신경 쓰지 마시고 얼른 몸이나 잘 추스르세요. 마마께서 강녕하셔야, 우리 조카님도 건강하게 빛을 보지 않겠습니까? 오라버니께서도 마마께 더욱 신경 쓰시고요.”

“잔소리쟁이가 따로 없구나.”

황제의 핀잔에도 해사하게 웃은 연진은 문득 떠오르는 얼굴에 금세 다시 얼굴을 붉혔다.

“폐하, 요즘에는 태화당에 통 들르지 않으신다 들었습니다.”

온화한 황후의 음성에 황제는 눈을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태화당. 그녀의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온 말에 무거웠던 머리가 더없이 지끈거렸다.

“아직 무빈이 완치된 것은 아니라 하던데요. 도통 태화당 밖으론 나오지 않는 사람이니 폐하께서 이따금 찾아 주셔요.”

“황후마마께선 그런 것까지 신경 쓰지 마셔요. 복중 아기씨만 생각하셔야지요.”

“가끔 무빈과 다과를 들고 좋은 얘기를 나누었는데, 요즘 그 사람 본 지 너무 오래된 듯합니다. 엊그제 기별을 넣었더니 사냥터에서 얻은 상처에 염증이 나서 한바탕 고열에 시달렸다지 뭡니까.”

조곤조곤한 음성에 황제가 눈살을 찌푸린 것은 그즈음이었다. 찰나의 변화에 연진은 짧게 얼굴을 찌푸리다가 이내 방긋 미소를 지었다. 겨우겨우 멀어진 황제의 관심이 측은지심으로 흔들리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제 오라비는 본디 다정하고, 정이 많은 사내다. 차갑게 무장하고 곁을 주려 하지 않는 것은 상처가 깊기 때문이었다. 상처의 원인이었던 자가, 그 틈을 비집고 파헤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그를 볼 때마다 자꾸만 먼저 떠난 가족들이 떠오르니까.

“그자에게 마음 쓰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공주, 무빈은 좋은 사람입니다. 당장 그가 정연군에게 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폐하께서도 특별히 아끼시는 것이고요.”

“그 피가 어디 간답니까? 애초에 볼모로 잡혀 온 이가 아닙니까. 그자의 아비는 당장에라도 반역을 도모할 만한 자입니다.”

“그것은 네가 입에 올릴 일이 아니다, 정아.”

“오라버니, 어찌 그리 말씀하시옵니까? 오라버니께서는 벌써 잊으신 것입니까?”

“그만.”

단호한 황제의 음성에 억울한 듯 입을 빵긋거리던 공주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고운 두 눈에 금세 눈물이 차올랐지만, 황제는 그것을 못 본 척했다.

“이만 일어나야겠소.”

“소녀가 물러나겠으니 예서 침수 들고 가십시오. 곧 날이 저물 것입니다.”

황제를 따라 일어선 연진 공주는 반듯하게 허리를 폈다. 익숙하게 제 곁으로 다가오는 보모상궁의 손을 물리기도 전, 황제의 다정한 손길이 그녀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네가 무얼 걱정하는지는 알고 있다. 하나, 네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오라버니.”

“상처가 많은 아이다. 마음이 깊어 그것을 다 표현하지 않으나, 심성이 곧은 자다. 너무도 곧아 그대로 꺾일까 두려울 정도야. 하니, 더는 그를 괴롭게 하지 마라.”

가볍게 어깨를 다독여주고 돌아서는 황제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멀어지는 황제를 향해 나붓이 절을 올리고 일어난 황후가 공주에게 손을 뻗었다.

그렁그렁 차오른 눈물이 맥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모든 것이 틀렸다는 듯, 고집스럽게 닫힌 그녀의 입술 사이로 서러운 흐느낌이 번졌다.

자경전에서 태화당으로 향하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다. 여름의 초입이라 해가 길어진 탓에, 하늘은 아직 붉고 푸르렀다. 며칠간 찾지 않던 태화당 마당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하릴없이 그 앞을 서성이는 짐승이었다.

이전처럼 이리저리 활발하게 뛰어다니지도 않고, 터벅터벅 걸어오다 행렬을 발견하고 몸을 굳히는 모습이 퍽 안쓰러웠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다 옴짝달싹 못 하는 짐승에게 다가가자, 금세 몸을 낮추고 낑낑 운다.

멀리서 행렬을 발견한 현 상궁이 급하게 뛰어오는 것을 힐끗 쳐다본 황제가 짐승을 향해 손을 뻗었다.

“폐하.”

“어찌 이리 고요하냐. 무빈은 벌써 침수 들었느냐?”

태연한 얼굴로 영을 품에 안고 몸을 일으킨 황제를 향해, 현 상궁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고 머리를 숙였다. 몇 번인가 입을 열려다가 멈추는 그녀를 돌아보자, 눈을 질끈 감고는 숨을 고른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고하라.”

“마마께오서는, 이곳에 계시지 않사옵니다.”

걸음을 멈춘 황제가 고개를 돌렸다. 이곳에 없다? 이곳에 없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이던가.

“어딜 갔기에. 한데, 그대는 상전을 따라나서지 않고 왜 홀로 여기 있느냐.”

“그것이…….”

“어서 고하시게.”

보다 못한 지밀상궁이 나서자, 현 상궁은 눈을 꼭 감은 채로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그간 마마께서 수라는커녕, 침수조차 제대로 드시지 못하시어 바람이라도 쐬고 오시면 조금 나아지실까 싶어 소인이 청을 올렸습니다.”

천천히 영의 털을 쓰다듬던 황제의 손이 멈췄다.

“그래서, 어딜 갔다는 것이냐.”

“술시(戌時) 전에는 반드시 환궁하시겠다고…….”

“허락도 없이, 멋대로 궁을 나갔단 말이냐?”

“폐하, 소인이 죄인이옵니다. 마마께서 너무도 울적해하셔서 말을 타고 좀 달리시면 나아지실까 싶어…….”

“홀로 나가지는 않았을 테고.”

“소인이 서 중랑에게 부탁하였습니다. 서 중랑도 아니 된다 하였으나, 저대로 마마를 두고 뵈옵기가 너무도 안타까워…….”

싸늘해진 황제의 표정에 길게 늘어서 있던 궁인들이 숨을 참았다. 끼잉. 영의 칭얼거림에 현 상궁은 가슴을 덜덜 떨었다. 도통 발걸음 하지 않으셨던 황제께서 어찌 갑자기 들이닥치셨단 말인가. 더욱이 금일은 자경전에서 공주마마와 함께 저녁 수라를 받으셨다 하셨는데.

“모두 자리로 돌아가 각자 할 일을 해라. 무빈이 돌아오거든 짐이 와 있단 것을 알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폐하…….”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는 현 상궁을 지나치며 황제는 태화당에 발을 들였다. 차례차례 열리는 문 안으로 들어갈수록 익숙한 향기가 밀려들었다.

바르르 떨리는 주먹을 그러쥐며 품에 안은 짐승을 다시 한 번 쓰다듬자, 소박하고 정갈한 침상이 보였다. 침상 아래에 영을 내려둔 황제가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앉았다. 눈치 빠른 지밀이 들어와 방 안 곳곳에 불을 밝혔다.

황제는 가슴 위로 팔짱을 끼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이렇게 제멋대로 구는 후궁을 향한 것은 분노보다는 짜증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누이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 또한 내내 생각하고 있지 않나. 하루에도 몇 번씩, 또 몇 번씩. 그를 이해하고 용서하고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과 그리해서는 아니 된다는 마음이 수십 번씩 교차한다.

화가 났었고, 미워하기도 했다. 한데 어찌 이리되었을까. 책임지지도 못할 마음이 언제 이렇게 커졌던가.

바람이 분다. 스산한 나뭇잎 부딪치는 소리가 반쯤 열린 창문 새로 흘러들었다. 바람처럼 흔들리는 마음은 이내 갈 곳을 잃고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뿌옇게 흐려진 마음에 앞이 보이질 않는다.

현 상궁은 고단한 표정으로 말에서 내리는 기하에게 다가가 머리를 조아렸다. 희미하게 웃으며 그녀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간 그에게서 푸릇푸릇한 풀 냄새가 났다.

“다녀왔네.”

“늦으셨습니다.”

“응, 오다가 길을 잘못 들어서.”

기하의 말고삐를 잡은 서엽은 현 상궁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반나절 중 겨우 두어 시간 남짓을 달렸고, 내내 땅 아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혹여 바깥바람을 쐬시면 기분이 조금 나아지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기하의 표정은 출궁할 때와 별다른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별일은 없었고?”

“예.”

환하게 불을 밝힌 태화당 마당에 들어서니, 평소와 다름없었다. 혹여 황자가 찾거들랑 적당한 핑계를 대며 돌려보내라 일렀더니 정말 그렇게 한 것인지, 아니면 아예 찾지 않은 것인지 그림자가 어둑하게 내려앉은 처소는 오늘따라 지나치게 고요했다.

“비가 올 것 같아.”

“예, 하늘을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머리카락을 하나로 올려 묶고 가벼운 무복 차림으로 종일 달렸더니 온몸에 먼지를 뒤집어쓴 듯했다. 온욕을 하는 것이 좋을까. 이제는 날이 더워 냉수로 씻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자잘한 고민을 흘리며 처소 안으로 들어가려던 기하가 문득 발을 멈추고 현 상궁을 돌아봤다.

“무슨 일이 있나?”

“아닙니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영이는?”

“잠들었나 봅니다. 종일 뛰어놀다 지쳤는지 일찌감치 들어갔습니다. 수라는 젓수시었습니까?”

“생각이 없어서. 서 중랑이 시장할 거야. 요기할 거리를 내어줘.”

“마마께서도 드셔야지요.”

“난 되었네. 어서 씻고 자야겠어. 오랜만에 말을 탔더니 지치는 것 같아.”

피곤이 가득한 음성엔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 기하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현 상궁은 초조하게 혀끝을 씹으며 두려움에 손을 덜덜 떨었다.

“현 상궁?”

침소 안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문이 열렸다. 창을 열어두었던 것인가. 은은한 밤바람이 불어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던 기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커다란 그림자가 쏟아지는 달빛을 등진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

그것은 탄식이었다.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인영에 놀란 마음이 움찔거렸다. 자연스럽게 뒤를 돌아보자, 현 상궁은 어찌할 바 모르는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늦었구나.”

오래도록 침묵하고 있던 탓에 탁하게 잠긴 황제의 음성이 침소를 울렸다. 휘이잉. 포근하게만 느껴지던 밤바람이 스산한 소리를 낸다. 기하는 지그시 아랫입술을 물고 고개를 숙이며 숨을 골랐다. 며칠 만에 마주한 그에게 하필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평범한 무복에 먼지를 뒤집어쓴 제 모습이 초라하다고 생각되어, 자꾸만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그대는 그만 나가보도록 해.”

“예, 폐하.”

안타까움이 점점이 묻어나는 시선이 기하에게서 멀어졌다. 괜찮다는 듯 그녀를 향해 웃어 보인 그는 물끄러미 저를 바라보는 황제의 눈빛을 애써 피했다. 화가 나신 것인지, 그것을 애써 꾹꾹 눌러 참고 있는 듯한 표정에 가슴이 욱신거렸다.

“어딜 다녀왔느냐.”

“잘못했습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알고 있고?”

“멋대로, 궁을 나가…….”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당장에라도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저, 그를 마주하니 지금껏 참아왔던 설움이 터질 것만 같았다. 서럽다. 아프다.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후궁이라는 것이―.”

“…….”

나지막한 한숨이 황제의 입에서 터졌다. 마주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를.

“다른 이는 잘못이 없습니다.”

“잘못이 없어?”

“모두 신첩의 불찰입니다. 너무 답답하여, 나가겠다고 떼를 썼습니다. 벌을 하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저벅저벅 걸어오는 황제의 발소리에도 기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저 눈을 꾹 감고 그를 보지 않기 위해 애썼다. 벌을 받는 것 따윈 두렵지 않았다. 매질을 당하거나, 전각에 갇힌다 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런 것쯤은 각오하고 벌인 일이었다.

“그리 못 견딜 정도더냐? 그리 숨이 막혀 도망치고 싶었어? 기껏 나갔는데 왜 벌써 들어와? 아예 영영 북성으로 가지 그랬느냐!”

“그런 생각한 적 없습니다.”

기하는 눈물이 가득 찬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다가 사납게 입술을 물었다. 두 눈에 가득 고인 눈물은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황제가 얼굴을 구겼지만, 두렵지 않은지 물러설 생각도 없어 보였다. 얌전히 머리를 숙이면 그냥 지나갈 수도 있는 일이거늘, 어리석은 것이 이럴 때만 눈을 부릅뜨고 달려든다.

“…북성을 잊으라 하명(嘏命 : 어명(御命), 임금의 명령)하시고선, 이제는 신첩더러 북성으로 가라고 하십니까?”

“도망친 것이 누군데.”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저…….”

말끝을 흐리다 기어이 고개를 돌리는 기하의 옷자락이 나풀거린다. 열린 문틈 사이로 추적추적 비 내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달게 잠들었던 영이 침상 아래서 기어 나와 끼잉, 하고 울었다. 제 주위를 뱅뱅 맴돌기 시작한 영이 혹여 황제의 노여움을 살까, 기하는 얼른 짐승을 품에 안고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잠깐 나가 있거라.”

문을 열어 영을 내려놓자 다시 자신의 품으로 달려드는 것을 현 상궁이 막아섰다. 스스로 문을 닫고 긴 숨을 내쉰 기하는 천천히 황제를 향해 돌아섰다.

“벌을 내리십시오.”

“그 입 다물어.”

낮게 읊조리는 황제의 음성이 형형했다. 차디찬 눈빛에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울음을 참으려 드니, 목구멍에 커다란 가시가 걸린 것 같았다. 못된 말을 하고 돌아선 것은 자신이었다. 견딜 수가 없어서, 캄캄한 미래가 너무도 아득해서, 이대로 살다가 혹여 다시 혼자가 된다면 그때는 정말 죽을 것만 같아서.

다짐하고 또 다짐하고 다시 한 번 다짐했지만, 눈앞에 선 황제를 보니 마음이 그대로 무너진다. 어찌해야 할까. 어찌해야 살아질까. 이대로는 제대로 살 수 없을 것만 같다. 진작 물러설 것을, 더는 바라지 말 것을.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은 커졌는데, 이제 이 일을 어쩐다.

“너는 대체 짐을 뭐로 생각하는 거냐.”

울지 말아야지. 사내가 우는 모습 같은 거, 좋아하지 않으실 테니. 마지막까지, 호연하게 웃는 모습만 보여드려야지.

“너 때문에 머리가 아파 죽겠다.”

“벌을…….”

“입 다물라고 하지 않아!”

콰쾅!

빛이 번쩍하며 번개가 내리쳤다. 사납게 쏟아지기 시작한 빗줄기에 기하는 잠시 제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함부로 입 열지 마라. 네가 쓸데없이 고집을 피울 때마다 아랫것들을 잡아다 사지를 찢을 것이니.”

“폐하!”

“입 열지 말라 했어!”

쾅!

번개가 쳤다. 하늘이 쉼 없이 번쩍거렸다. 쏟아지는 빗줄기에 바깥이 소란해졌다. 태화당 곳곳에 숨어 있던 수신전 상궁 나인들이 비를 피해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네 아비가 반기(叛起)를 들었다.”

가까이 다가온 황제의 손이 기하의 양쪽 팔을 붙들었다. 믿을 수 없는 소리에 놀란 그는 반쯤 벌어진 입술을 연신 빠끔거렸다.

괴로움으로 일그러진 황제의 얼굴을 바로 볼 수 없어서 가빠져 오는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돌리자, 우악스럽게 붙잡힌 어깨에 뻐근한 악력이 가해졌다.

“네 아비에게 충성하는 백성을 모두 칠 것이다. 덫을 놓고, 하나도 남김없이 서서히 목을 조를 것이야.”

“…흣.”

“네 아비도, 네 형제도, 모두 죽일 거다.”

“폐하…….”

괴로워 보였다, 그리 말하는 그가. 누군가가 자신의 목을 사납게 짓누르는 것처럼, 꺽꺽거리며 숨을 몰아쉬는 것처럼. 찡그려진 얼굴엔 분노와 미움이 뒤범벅되었다.

두려웠다. 그런 그를 마주 보는 것이. 아버지가, 형님이, 백성들이 걱정되었지만, 지금 제 눈에는 관용을 배신당한 그의 상처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를 원망해도 좋아.”

감히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가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감히 어찌 그럴 수 있을까, 감히 어찌…….

“나를 미워해도 좋다.”

미워할 수도, 원망할 수도 없음을 정녕 몰라주시는 것인가.

“폐하, 소인은…….”

“…내 곁에서 멀어지지만 마라.”

어깨를 붙잡던 손이 다정하게 뺨을 쓸었다. 먼지가 묻은 얼굴이 창피해 고개를 돌리기도 전, 안타까움과 애틋함으로 물든 얼굴에 미소가 서렸다.

방금, 무어라 하시었나.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몇 번이나 도리질하는 기하에게 가까이 다가간 황제의 손이 투박한 그의 손을 붙잡았다.

“지켜주겠다. 외롭게 하지 않겠다. 네 아비가, 네 형제가, 용서를 구하면 그것도 듣겠다. 그러니, 기하야―.”

물끄러미 황제를 바라보던 기하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울지 않겠다고 했는데. 절대로,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너를 내게 다오.”

뺨을 쓸어주는 황제의 손을 물리며 기하는 그대로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애틋하게 바라보는 시선도,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주는 음성도, 따뜻한 손길도 모두 꿈인 것만 같아서. 그대로 두면 전부 없어질 환상과 같아서. 끌어안고, 마주 보고, 깊이 밀려오는 체향을 맡으며 그대로 눈을 감았다.

“폐하, 폐하, 폐하…….”

꿈은 아니겠지. 제가 만들어낸 환영은 아니겠지. 꿈에서도 이리 다정하게 웃어주시지는 않으셨는데. 가장 행복한 순간에 절벽으로 밀어뜨리실 잔인한 분은 아니시니, 지금 이 말 있는 그대로 믿어도 되는 것이겠지.

“폐하…….”

“다시는 걸음 하지 말라던 것은, 네 본심이 아니었구나.”

웃음기 가득한 황제의 음성이 빗소리에 가려졌다. 등을 다독이는 손길이 머리부터 뒷목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축축하게 젖은 얼굴을 자꾸만 숨기는 기하를 꽉 끌어안자, 금세 도리질하며 물러서려는 그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폐하.”

“울지 마라. 그리 울다 못난 얼굴 더 미워지면 어쩌려고.”

기어이 울음을 터트린 기하를 품에 바싹 끌어안은 황제는 무거운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그래, 그리하면 되겠다. 이렇게 인정하면 그만일 마음, 뭐가 그리 답답하여 고민하고 또 고민했던가. 나약하면 지켜주면 되고, 외로워하면 안아주면 되고, 마음 아파하면 다독여주면 된다. 누구에게도 내어주지 않고, 내 사람이라 하면 된다.

“흐윽……. 미워지면, 흑, 이제 안 보시렵니까?”

“그럴 리가 있느냐. 못난 너를 누가 봐줘. 천지 분간도 못 하는 망아지 같은 후궁을.”

이렇게 안고 있으니, 이제 좀 살 것 같다.

“쉬잇, 그만 울래도.”

“예.”

“착하다.”

착해. 그래, 너는 이렇게 그냥 있으면 된다. 잠깐만 눈을 감고 있어. 머지않아 곧 끝날 것이다. 하니, 기하야. 아프더라도 울지 말아야 한다. 절대로, 도망쳐서는 안 돼.

“자꾸 쳐다보지 마십시오.”

틈만 나면 붉어진 얼굴로 빤히 쳐다보는 것이 누구던가. 뜨거운 김이 폴폴 나는 욕탕 안에 들어가 몸을 잔뜩 웅크리는 기하를 향해 혀를 끌끌 찬 황제가 조용히 지밀을 불러들였다.

“비가 와 날이 꿉꿉하니 침소 안을 정리해. 간단하게 요기할 것도 준비하고. 무빈의 수발은 따로 들 것 없으니 영견이나 넉넉하게 내놓아라.”

“예, 폐하.”

“내일 조강은 참석하지 않겠다.”

“예.”

손짓으로 지밀을 물리며 나른하게 몸을 기대앉은 황제가 그윽한 눈으로 기하를 바라봤다. 기하는 한시도 제게서 떨어지지 않은 시선에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홧홧하게 열이 오른 얼굴에 연신 물을 끼얹었다.

“언제까지 거기 있을 것이냐?”

“먼지를 뒤집어썼다고 씻으라 하신 것은 폐하십니다.”

“눈은 퉁퉁 부어서는. 그러다가 몸도 다 불겠다. 그만하고 나와.”

“조금만 더 하고요.”

한여름에도 뜨거운 물로 목욕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황제의 열정적인 시선을 받아내는 것이 더 고역이었다. 한바탕 울고 난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제 손목을 잡고 직접 욕탕까지 들어온 황제를 물리칠 방법이 달리 떠오르지 않아 멍청히 서 있던 것이 화근이었다.

“현 상궁을 비롯한 태화당 상궁 나인들에게 회초리 스무 대씩을 내릴 것이다.”

“예?”

“웃전이 바른길로 가지 않음을 묵과하는 것은 대역죄니라.”

“폐하, 그들은 죄가 없습니다. 그것은 소인의 잘못이고……”

“너는 다른 벌을 받을 것이니 그리 알아.”

“소인이 벌 받는 것은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마음 같아선 주리를 틀고 싶지만, 그리하면 네가 화를 낼 것 같으니 이쯤 하는 것이다. 네 잘못으로 아랫것들이 매질 당하는 것을 봐야, 너도 앞으로 허튼 생각하지 않을 것 아니냐?”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어찌 되었건 보고도 올리지 않고 제멋대로 궁을 나간 것은 큰 죄였다. 고작 회초리 스무 대로 끝나는 것이 편협하다는 말이 나올 수도 있었다.

“그대 벌은 조금 더 생각해 볼 것이야. 그러니 안심하지 마라.”

“예…….”

“그리 기죽지도 마. 말만 하면 꼬랑지 내리고 축 처지는 거 보기 싫다.”

기하를 향해 영견을 툭 던지자, 물에 젖기도 전에 손을 내어 받는다. 아직 반사 신경이 둔해진 것은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황제는 젖은 어깨부터 차례대로 닦기 시작하는 기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계속 그리 보고 계실 것입니까?”

“왜, 아니 되느냐?”

“민망합니다. 돌아서 계십시오.”

마음 같아서는 짓궂게 놀리며 싫다고 하고 싶었지만, 붉어진 얼굴이 찡그려질 것 같아 마지못해 등을 반쯤 돌렸다. 그러다 불쑥, 제 후궁을 마음대로 볼 수도 없다는 것이 못내 억울해서 슬쩍 눈을 돌리니, 등을 돌리고 일어나 젖은 몸을 닦고 있는 기하의 뒷모습이 보였다.

사내치고는 하얀 피부엔 여기저기 흐릿한 상처가 있었지만, 보기 사나운 것은 아니었다. 제법 단단해 보이는 어깨, 근육이 소실된 팔과 얇은 허리, 거기에 아주 볼품없어 보이지는 않는 엉덩이가―.

“돌아서 계시라 하지 않았습니까?”

것 참, 등에 눈이라도 달렸나. 어찌 그리 귀신같이 돌아보며 도끼눈을 하는지. 생전 부끄러움이라고는 모를 것 같던 것이 목덜미까지 붉어지는 것이 귀여워 알았다고 손을 휘휘 젓자, 미심쩍은 눈으로 흘겨본다. 그 와중에 영견으로 하초(下焦)를 가리는 치밀함까지 보인 기하는 얼른 욕탕 밖으로 나와 미리 걸어두었던 긴 자리옷(잠옷)을 마르지도 않은 몸에 걸쳤다.

“그리 있으면 고뿔 걸린다.”

“신첩이 병약한 여인인 줄 아십니까.”

“왜 또 토라졌어.”

“보지 않으신다고 하시고선, 몰래 보시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돌아서 있겠다고 한 것은 맞으나, 몰래 보진 않았다. 짐이 뭐가 아쉬워 네 그 비루한 몸을 몰래 훔쳐봐?”

뾰족해진 눈을 다시 아래로 내리깔면서 입술을 씰룩거리는 것을 지켜보니, 몇 번이나 벌어지려던 입을 겨우 다문다.

“채비하였으면 침소로 가자.”

먼저 벌떡 일어나 돌아서는 황제를 따르며, 기하는 젖은 발끝을 슬쩍 들었다. 이대로 물길을 만들어 놓으면 치우는 아이들이 고될 터인데. 머리에서부터 뚝뚝 떨어지는 물기가 어깨를 그대로 흠뻑 적셨다. 오늘따라 유난히 얇은 자리옷이 금세 젖은 탓에 한기가 들어 어깨를 움츠리려는데, 앞서 걷던 황제가 걸음을 늦춘다.

“그러게 제대로 닦으라니까.”

짐짓 나무라는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황제는 굳이 기하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이리하면 용포가 다 젖을 텐데. 걱정이 되면서도 그의 손길이 따뜻하고 좋아서 밀어낼 수가 없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많은 상궁 나인들이 침소 앞에 늘어서 있었다. 그중 가장 안쪽에 서 있던 현 상궁은, 근래에 보기 드문 밝은 얼굴로 황제와 기하를 맞았다.

“마마, 어찌 이리 젖으셨사옵니까. 허락하신다면 소인이 수발을 들겠사옵니다.”

“짐이 할 것이니 이만 모두 물러가라.”

“예, 폐하.”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라 예상했던 긴 밤의 끝은, 직접 보고도 믿기 어려운 광경의 시작이었다. 울음소리가 들린다 싶어 노심초사하며 발을 구르던 현 상궁은, 기하의 어깨를 다정하게 끌어안은 황제가 욕탕에 뜨거운 물을 채우라 하셨을 때만 해도, 이것은 새로운 물고문인가 싶어 눈앞이 아찔해졌었다.

나란히 욕탕에 들어가시어 다정하게 이것저것 묻고 챙기시는 황제의 모습을 한참 동안 보고 나서야 아둔한 머리를 정으로 얻어맞은 것만 같은 충격에 할 말을 잃은 현 상궁은, 조금 전부터는 미친 사람처럼 터지는 웃음을 애써 참느라 입술을 힘 있게 물어야 했다.

“편히 쉬십시오.”

직접 문을 닫아주며 기하를 향해 함박웃음을 지은 현 상궁이 얼른 머리를 조아렸다. 그제야 민망함에 달아오른 뺨을 식히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기하는, 혀를 끌끌 차는 황제를 못 본 척하며 그에게 등을 돌렸다.

축축해진 자리옷이 몸에 달라붙어 불편했다. 머리카락에선 아직도 물이 뚝뚝 떨어지고, 펑펑 울었던 탓에 눈이며 머리가 지끈거렸다. 평소보다 오래 온욕을 한 탓인지 고단함에 몸이 축 늘어졌다.

“어찌 그래. 어디 불편한 것이냐?”

“온욕을 너무 오래 하였나 봅니다.”

“그리 길게는 하지 않았는데?”

“앓고 난 이후부터 온욕을 조금만 길게 해도 어지럽습니다.”

“태의 말로는 이제 괜찮을 것이라 하던데, 아직도 불편한 것이냐?”

“평소에는 괜찮습니다.”

어느새 제 등 뒤로 다가와 머리카락을 직접 닦아주는 황제의 손길에 기하는 기분 좋게 웃었다. 이렇게 가벼운 마음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물론, 황제가 한 말 중엔 결코 가볍게 들을 수 없는 것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을 굳이 꺼내고 싶지 않았다.

“후유증이 남을지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말은 짐에게 하지 않았는데.”

“굳이 말씀드릴 필요가 없었던 탓이지요. 그리 심각한 일도 아니고요.”

등을 적시던 물기가 잦아들었다. 황제의 손에 들린 영견이 어느덧 흠뻑 젖었다. 이제 더는 물방울이 떨어지지 않는 머리카락을 보기 좋게 쓸어 넘긴 황제는 제게 등을 보이는 기하의 무릎을 잡아당겨 몸을 빙그르르 돌렸다.

놀라움으로 커진 두 눈과 또다시 붉어지는 얼굴이 무척 귀엽다고 생각되어 뺨을 쓰다듬자, 사냥꾼 앞에 놓인 작은 짐승 같은 표정으로 이리저리 눈을 굴린다.

“씩씩한 줄로만 알았더니 새색시처럼 부끄러움도 타는구나.”

“놀리지 마십시오.”

“귀여워 그런다.”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어찌…….”

“내가 내 빈을 귀여워한다는데, 뭐가 말이 되지 않는단 말이냐. 바르르 떨긴.”

볼을 톡톡 건드리는 황제의 손가락을 그대로 붙잡은 기하는 물끄러미 황제를 바라보다 먼저 그의 품으로 안겨 들었다. 서늘한 바람 냄새가 났다. 푸른 풀잎 냄새 같기도 했다. 차마 가까이 다가갈 수 없어, 이따금 의도치 않게 나란히 설 때면 늘 나던 그의 향기에, 단단하게 성벽을 쳤던 마음은 이내 허물어지곤 했다.

“꿈만 같습니다.”

“또 그 소리냐?”

“이렇게 있다가 눈을 뜨면, 폐하께서 안 계실 것 같습니다.”

“오늘도 배 드러내고, 이리저리 발길질하면 당장 수신전으로 돌아갈 것이야.”

“얌전히 잘 것입니다. 폐하께서 이전처럼 꼭 안아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발칙한 것이 또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웃는다. 고얀 것. 저것이 대체 어디에 여우 꼬리를 숨겼을꼬.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눈물을 뚝뚝 흘리더니.

아니, 그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궁이 외롭다느니 허튼소리를 지껄이며 도망치려 한 주제에.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것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였다. 호되게 가르쳐서 다시는 그런 못된 짓을 하지 못하게 해야지.

“폐하?”

고개를 갸웃하고 바라보는 기하의 발간 얼굴을 바라보며 황제가 해사하게 웃었다.

“어, 어찌 그리 웃으십니까?”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는 기하의 발목을 단단하게 움켜쥔 황제가 나른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불현듯 갈증이 났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에, 촉촉하게 젖은 기하의 모습이란 몹시 입맛을 돋우는 것이었다. 눈과 귀가 즐거웠다. 잔잔하게 내리는 빗소리에 맞춰 제 품에서 운다면 아마 오늘 밤, 내내 갈증이 가실 것 같지가 않다.

“그, 손 좀, 치워주시면…….”

“짐이 뭘 하는지 알고 있으면서 그런 소릴 하느냐?”

“뭐, 뭘 하신다고 이러십니까? 갑자기 거기는 왜, 히익!”

발목을 부드럽게 쓰다듬던 황제의 손이 조금씩 위로 올라갔다. 사내치고는 제법 매끈한 종아리를 쓰다듬자, 바짝 얼어붙은 얼굴이 활활 타오른다.

“너는 여길 만져주는 것을 좋아했던 것 같은데.”

단번에 허벅지 안쪽으로 들어가는 황제의 손을 기하는 덥석 붙잡았다. 눈꼬리가 보기 좋게 올라간 커다란 눈이 바르르 떨리는 것은 천하에 없을 절경이었다.

“폐하, 그, 갑자기 이러시면…….”

“하면, 일일이 네게 예고하고 하랴?”

“그런 것이 아니오라…….”

황제의 손은 크고 두터웠다. 수려한 손가락 사이사이, 오래 검을 잡은 자 특유의 굳은살이 투박하게 기하의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그것은 명백한 욕구가 담긴 손길이었다. 저도 모르게 허리를 늘어뜨린 기하는 덜덜 떨리는 두 손을 어쩌지 못하고 반쯤 벌린 입술 새로 흐린 신음을 내뱉었다.

“흐으…….”

“얼굴 가리지 마라.”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기하의 손목을 붙잡은 황제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조금 더 가까이, 다시 발목을 붙잡아 떨고 있는 기하를 쭉 끌어당겨 벌어진 다리 사이로 들어간 황제는 천천히 그의 턱을 쓰다듬었다. 열기에 촉촉해진 기하의 눈이 반짝였다.

황제는 그 순간 먼저 입을 맞춰오는 기하의 젖은 등을 안으며, 단단히 그의 허리를 붙잡고 일으켜 제 무릎 위로 끌어당겼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뜨거운 혀가 파고들었다. 수분기 없이 바싹 말라 있던 입술은 오랜 온욕으로 인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한입에 입술을 머금고 혀를 밀어 넣어 입안을 휘젓자, 숨도 제대로 내뱉지 못하면서 점점 자신에게 기대 오는 기하는 수줍게 떨기 시작했다. 깊이 감은 두 눈 또한 바르르 떨렸다. 그 떨림은 입술까지 이어져, 입천장을 핥고 혀뿌리를 건드릴 때마다 움찔움찔 놀라며 허공에 둔 손을 어찌하지 못했다.

쪽, 쪼옥. 일부러 요란하게 소리 내며 입술을 핥고 빨자, 꼭 감겨 있던 기하의 눈가가 가볍게 찌푸려졌다. 겨우 접문(接吻) 한 번에 이리 온몸의 힘을 잃고 바들거리는 모습이 귀여워,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붙잡았던 얼굴을 슬그머니 놓아주며 목을 쓰다듬자, 삼키지 못한 타액이 입가를 축축하게 적신다.

“흐……, 폐…하.”

“응?”

쪽, 입술에 한 번. 쪽, 입술을 조금 빗겨난 입꼬리에 한 번. 쪽, 이번에는 조금 더 지나서 왼쪽 뺨에. 쪽, 그리고 다시 턱 아래에.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자 겨우 제 모습을 드러내는 울대뼈에 입을 맞추니, 축 늘어져 있던 어깨에 조그만 긴장감이 감돈다.

“저, 그만…….”

“아직 그만 소릴 하기엔 이른데?”

흐트러진 자리옷이 반쯤 벌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을까. 제 허벅지 위에 올라앉아 다리를 활짝 열고 있으면서. 게다가 온통 붉어진 얼굴에 열락이 가득한 주제에 어딜 그만이라는 소리가 나와?

본디 사내란 욕망에 충실한 종족이다. 얼마나 다행인가. 서로가 충실할 수 있으니, 긴긴밤 오래오래 진득하게 풀어도 거칠 것 없으니.

“부끄러워하지 마라. 창피한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익숙하지 않을 뿐이야. 천천히 배우면 된다.”

다정하게 미소하며 다시 뺨에 입을 맞추자, 물끄러미 황제를 바라보는 기하의 두 눈에 열기가 피어난다. 매끈한 얼굴을 쓰다듬자 스스럼없이 품에 안겨드는 단단한 몸이 마음에 든다.

“짐이 너를 어여삐 여기고, 너 또한 짐을 연모하니, 이것은 당연한 본능이다.”

황제는 곧게 뻗은 척추를 따라 천천히 손을 움직여 기하의 마른 허리를 쓰다듬었다. 빈약하지 않은 엉덩이를 토닥이자 움찔하며 놀라더니, 파르르 떨리는 숨을 내쉬면서도 제 어깨를 쓰다듬는 기하의 손이 만족스러워 황제는 소리 내지 않고 웃었다.

“빈.”

“예, 폐하.”

“매일매일 아껴줄 것이다. 외롭게 하지 않을 것이야. 하니, 행여나 짐이 네게 섭섭하게 굴거든 마음에 담지 말고 바로바로 말해라.”

“말씀 올리면 전부 들어주실 것입니까?”

“그대는 가끔 지나치게 발칙하단 말이야.”

동그랗게 눈을 뜨고 저를 바라보는 기하를 차마 미워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눈을 가늘게 뜨며 코를 잡아 비틀자, 아프다면서 금세 울상 하는 그를 다시 끌어안았다.

훤히 드러난 다리를 슬그머니 허리에 감는 것은 능숙한 요부나 할 법한 것인데, 내려다본 얼굴이 천연덕스러워 뭐라 제대로 말을 할 수도 없다. 말만 하면 금세 표정을 바꾸고 슬그머니 내빼려 할 테니까.

“남아일언중천금(男兒一言重千金)이라 하였습니다.”

“짐에게만 부합하는 말이더냐?”

“소인은 약조한 것은 반드시 지킵니다.”

“그 말, 꼭 기억하마.”

“못 믿으시는 듯합니다.”

“그럴 리가. 그리 구박하고 외롭게 하였는데도 마음을 꺾지 않은 그대를, 내 어찌 의심하겠느냐.”

다정한 미소였다. 감히 상상해 본 적도 없는, 따뜻한 마음이었다. 진심 어린 연심에 불현듯 눈물이 날 것만 같아서, 기하는 얼른 다시 황제를 끌어안았다.

“어허, 또 눈물 바람이냐?”

“좋아서 그럽니다.”

“아무리 좋아도 울지 마. 운다고 봐주지 않을 거니까.”

무슨 말인가 싶어 고개를 든 기하의 턱을 붙잡은 황제가 악당처럼 미소했다. 날카로운 황제의 눈매가 가느다랗게 변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마치 당장 그에게 잡아먹힐 것만 같다는 생각을 할 즈음이었다. 가까이 다가오는 황제의 입술에 그대로 눈을 감은 기하의 손이 그의 목을 끌어안은 순간―,

“폐하.”

망설임을 담은 낮은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렸다. 혹여 비에 섞인 바람 소리인가 싶을 정도로 희미한 음성은 지밀상궁의 것이었다.

이미 반쯤 풀어 헤친 기하의 옷깃 사이로 막 손을 집어넣으려던 황제의 얼굴이 일순간 싸늘하게 변했다. 황제의 정사(情事)는 수많은 이들이 물러서지 않고 지켜보는 것이 관례였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것이기에, 태어날 때부터 늘 누군가를 그림자로 붙이고 살아온 황제에게 그것은 매우 익숙한 일이었다.

모두 물러나라 했지만, 천장 어딘가에 숨어든 그의 그림자는 지금 이 모습마저 낱낱이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너무도 당연하여 차마 생각하지 못했던 일에 황제의 안색이 바뀌었다.

“폐하?”

흐트러진 기하의 옷깃을 여미는 그의 손길이 거칠었다. 지밀은 현명한 여인이었다. 세상 누구보다 황제의 심기를 잘 헤아렸다. 그런 그녀가 물러나라는 명에도 불구하고 존재를 드러내는 일은 쉬이 묵과할 것이 아니었다.

“고(告)하라.”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기하에게 빙긋이 미소하며 그의 다리 위로 기수를 덮은 황제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지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동복궁에서 급한 전갈이 왔사옵니다. 정연군 저하께옵서 오후 늦은 시각부터 신열이 끓어 차도를 보이시지 않고 있사온데, 내내 무빈마마를 찾으신다고 하옵니다.”

“황자가?”

지밀의 말에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기하였다. 놀란 그는 미처 황제가 붙잡을 새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까지 단숨에 뛰어 내려갔다. 활짝 열린 문 앞에는 지밀을 비롯한 현 상궁과 여러 나인이 늘어서 있었다.

“어찌 된 일이야? 황자가 신열이라니?”

슬쩍 황제의 눈치를 살핀 현 상궁이 머리를 조아렸다. 잔뜩 흐트러진 차림의 기하가 당장에라도 동복궁으로 뛰어갈까 노심초사하는 그녀는, 황제가 역정을 내며 돌아서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 아직 완전히 총애를 얻은 것도 아니고, 더욱이 오늘은 고대하고 고대하던 진정한 의미의 초야가 아니던가.

비록 황자께서 앓아누우신 것은 안타까운 일이나, 날이 날인지라 밀려오는 서러움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런 제 속도 모르고, 그 한마디에 벌컥 문을 여는 상전을 어찌할까. 이것은 정말, 앞길이 구만리 같다.

“오전부터 미열이 있으시다 하였는데, 그것이 점점 심해지신 모양입니다. 도통 열이 떨어지지 않으시어 내내 마마를 찾으신다고 합니다.”

“그런 일이 있었으면 진작 알려야 할 것 아닌가! 내 당장 동복궁으로 가겠네.”

“가긴 어딜 간다는 것이야.”

지금 그 차림 그대로 어딜 가느냐는 말이다. 뒷말을 꿀꺽 삼킨 황제가 흉흉한 눈으로 문밖의 것들을 쏘아봤다. 겨우 그깟 일로 지금 문을 열게 한 것이냐는 질책 어린 시선에 지밀은 머리를 깊이 숙였다. 현 상궁은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안타까움에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채비하고 갈 것입니다.”

“태의를 보내라.”

“황자가 소인을 찾고 있다지 않습니까.”

“병은 의원이 고치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종종 열이 난다. 열이 나니 어미를 찾듯 너를 부른 것이 아니냐. 괜한 소란 떨 것 없어.”

“어찌 그리 매정하십니까. 아픈 것도 서러울 텐데, 지척에 있으면서 품에 안아주지도 못하게 하십니까? 폐하께선 어찌 이리 무정하십니까?”

‘무정하신 것은 폐하가 아니옵고 마마이십니다.’ 차마 이 말을 할 수는 없었기에 혀를 몇 번이나 씹으며, 현 상궁은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했다.

권 상궁, 그년은 대체 우리 마마님께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하필 지금 이 시점에 찾아왔단 말인가. 제 상전이 앓아누우셨으면 한시도 떨어지지 말고 시중이나 잘 들 것이지. 우리 마마님께서 찾아가신들, 가슴 아파 우시면서 밤이나 꼴딱 새우실 것이 자명한데!

“네가 가서 할 일이 없다지 않아.”

“할 일이 왜 없습니까? 땀도 닦아주고, 손도 잡아주고, 혹여 황자가 정신이 들면 품에 안아도 줄 것입니다. 탕약도 먹이고, 가슴도 도닥여 줄 것입니다. 황자가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얼마나 서러우면 내내 소인만 찾겠습니까? 어미도 없는 아이가 가엾지도 않으십니까?”

어미가 있으나 없으나, 황궁 사람들은 모두 다 가엾다 하지 않았어. 모두 외롭고, 모두 쓸쓸하다. 차마 마음속에 있는 말을 꺼낼 수가 없어 가만히 기하를 끌어안자, 강경하던 표정이 이내 누그러진다.

“폐하께선 곤하시면 잠시 계십시오. 금세 다녀오겠습니다.”

“네가 퍽이나 금세 오겠다.”

“하면, 같이 가시는 것은… 아니 됩니까? 폐하께서도 함께 가시오면 황자가 무척 좋아할 것입니다.”

“…그런 표정 하고 웃지 마라.”

더듬더듬 말을 꺼내는 표정이 어찌 그리 뽀얗게 피어나. 그런 얼굴로 청하는데 무슨 수로 거절할 수가 있단 말이냐.

“폐하.”

“그 꼴로 가면 황자가 기함하겠다. 채비해.”

“예. 예, 폐하.”

웃을 새도 없이 쪼르르 안으로 들어가는 기하를 따라 현 상궁은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깊은 한숨을 내쉬는 황제를 힐끗 돌아본 그녀는 자신과 똑같은 표정이 짓는 그를 향한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 굴렀다.

가마를 타자는 황제의 말에도 기하는 꿋꿋하게 일산(日傘 : 우산)만을 쓰고 바삐 걸었다. 동복궁으로 향하는 길이 어찌 이리 먼지, 밤이 깊고 비가 온 탓에 발이 죄다 젖었음에도 기하는 잠시도 멈추려고 하지 않았다.

“황자는? 황자는 어찌 하고 있나?”

“숨 좀 돌려라.”

“태의 영감이 뭐라던가?”

지금 제 말을 제대로 듣기는 한 것인가.

먼저 돌아가 있던 권 상궁이 황제와 기하를 맞으며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절을 올렸다. 그런 그녀의 손을 붙잡으며 처소 안으로 들어서는 기하의 뒷모습에 황제는 허탈한 숨만 연신 씩씩거렸다.

그러니까 저것은, 말로만 연정이 어쩌고저쩌고하더니 고작 신열이 끓는다는 황자 앞에서 마음이 어느 쪽으로 더 기울었는지 들키고 만 것이다.

하긴, 외롭다고 눈물 바람 할 때도 제게는 다시 걸음 하지 말라더니, 황자는 이따금 만나겠다고 엄포를 놓았었지. 제게는 그리 모질게 말하고서 날마다 황자를 기다리며 겨우 수라를 들었던 것을 모를 줄 알았던가.

“어찌 된 것입니까? 정연군은 어떻습니까? 차도가 보입니까?”

“저하께선 비장(脾臟)이 약하시어, 젓수시는 것을 주의하셔야 합니다. 한동안 폭식을 하지 않으셨다 하시더니, 근래에 제어를 못 하신 듯합니다. 약해진 비장이 성을 내는 것입니다. 약을 쓰고 쉬시면 될 것이니,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리 열이 나는데도 괜찮단 말입니까?”

“예. 침을 놓고 약을 썼으니 괜찮으실 것입니다. 당분간 드시는 것은 조심하셔야 합니다. 많이 드시면 아니 되고, 소화가 잘 되는 음식만 드시는 것이 좋습니다.”

태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쯧, 하고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저도 모르게 사납게 얼굴을 찌푸리고 돌아보던 기하는 흉흉한 기세로 가까이 다가오는 황제의 모습에 입을 다물었다.

아이를 내려다보니 열 때문에 붉은 얼굴이 푹 젖어 있었다. 어찌 이리 땀을 많이 흘렸는지 머리카락이 축축하게 젖어 끙끙대는 모습이 가여워 눈시울이 뜨끈해졌다.

“황자가 그리 먹어댈 동안, 너희는 대체 뭘 하고 있었느냐? 짐승처럼 먹으면 먹는 대로 그냥 보고만 있었느냐?”

“송구하옵니다, 폐하. 소인들의 불충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얼마나 닥치는 대로 먹어댔으면 비장에 탈이 나? 저것이 사람인지 짐승인지. 뭘 잘했다고 빈까지 부르느냐? 일은 다 저질러놓고 뭘 어찌하라고? 꼴 보기 싫으니 다들 꺼져라.”

단단히 화가 난 황제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동복궁 나인들은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우수수 물러났다.

그녀들의 소란함에 덩달아 움직이려던 태의는 갑자기 제 옷깃을 붙잡는 기하의 손길에 놀라 어깨를 움찔 떨었다. 이를 바득바득 갈며 당장에라도 불호령을 내릴 것 같은 황제의 곁에서 아랑곳하지 않는 것은 오직 기하뿐이었다. 황제는 그런 기하를 탓할 생각도 없어 보이고.

“아이가 먹고 싶다는데 먹지 말라 할 수도 없는 것 아닙니까.”

“저하를 위하신다면 당분간은 단호하게 말리시는 것이 좋습니다. 한동안 자제를 잘하셨다는데, 근래에 저하께서 마음 상하시는 일이 있으셨던가 봅니다.”

“제깟 게 마음 쓸 일이 어디 있어? 괜한 핑계지.”

퉁명스러운 황제의 음성에 기하는 단박에 얼굴을 찌푸렸다.

“폐하, 그리 말씀하지 마십시오. 황자가 얼마나 마음이 고되었으면 먹는 것으로 그것을 풀겠습니까.”

“자꾸 받아주지 말란 말이다. 다 죽어가는 줄 알았더니 많이 먹어 탈이 난 것이라니. 남세스러워 이걸 누구에게 말할 수나 있겠느냐?”

“뭐가 남세스럽단 말씀이십니까? 아이가 열이 끓어 앓아누운 것이 걱정되지도 않으십니까? 땀 좀 보십시오. 하얗게 질려서…….”

“백돼지 같다.”

“폐하.”

웃으면 아니 되는데. 포동포동 살이 오른 뺨이 열 때문에 불그스름하게 변한 것이, 말씀대로 꼭…….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리려던 태의는 서늘한 기하의 시선에 얼른 고개를 숙이고는 그대로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하면, 소신은 이만 물러가서 탕제를 올리겠나이다.”

물러나는 태의를 한 번 더 붙잡으려던 기하는 덥석 제 손을 잡는 황제 때문에 말을 건넬 시기를 놓치고서 붕어처럼 입술만 방긋거렸다.

하나도 남김없이 주위를 물린 황제가 황자의 발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열에 들떠 내내 기하를 찾았다더니, 고롱고롱 숨을 내쉬며 잠든 얼굴엔 눈물 자국이 길게 나 있다.

“나쁜 말씀은 잘도 하십니다.”

“뿔내지 마라. 역정 내고 싶은 걸 참고 있으니.”

“정연이 주워온 자식이라도 되십니까? 아버지가 어찌 이리 무정하십니까? 아프면 서럽습니다. 더욱이 아직 어린아이가 아닙니까.”

“돌봐주는 사람이 없어, 치료해 주는 의원이 없어? 서럽기는 뭐가 서러워?”

“아무리 돌봐주는 수족이 있다 한들, 피붙이만 하겠습니까? 유모는 어미가 될 수 없습니다. 태의는 아비가 될 수 없습니다. 늘 함께한다고 해서 상궁 나인들이 형제자매가 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아픈 것은 서럽다. 아픈 것보다, 그럴 때 제 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 더더욱 서럽다. 제국에 발을 들인 후, 이따금 앓아누울 때면 아픈 것보다 외로움에 가슴이 쓰라렸다. 그것은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은 감정이었다.

아주 어릴 적, 지금은 기억조차 흐릿한 그 옛날. 황자만 하였을까, 아니면 더 어렸을까. 아이처럼 이렇게 홀로 앓아누웠던 적이 있었다. 비가 많이 오는, 스산한 가을밤이었다.

한 번도 뵌 적 없었던 어머니께서 꿈에 나와 다독여주셨을 때 얼마나 많이 울었던가. 너무 아파서, 너무 그리워서, 너무 따뜻해서.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한데, 어찌 이 어린아이를 외면할 수 있단 말인가.

“좋은 아버지가 되어 주십시오, 폐하.”

“별걸 다 바란다.”

“따뜻한 아버지가 되어 주십시오.”

“그만. 또 울려 해?”

“황자를, 외롭게 하지 마십시오.”

“알았다, 알았으니―.”

기하를 끌어안은 황제가 다정하게 그의 등을 다독였다. 금세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을 보고 있기란 여간 곤욕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말간 얼굴로 말해도 들어줄 것인데, 습기가 가득한 표정을 보고 있으려니 가슴 한쪽이 뭔가로 꾹꾹 누르는 것만 같은 생경한 감정이 차올랐다.

“그대에게 좋은 사내가 되겠다. 황자에게도 좋은 아비가 되마.”

하니, 기하야. 그리 애달프게 울지 마라. 아직은 내가 너를 마음껏 달래줄 수가 없다. 그러니, 그러니 조금만 더 웃어보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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