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9)

18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아, 이리 온.”

햇볕이 좋은 날이면 영은 오후 내내 달의 무덤가를 맴돌았다. 한쪽 눈으로 생활하는 것이 익숙지 않은 탓에 여기저기 부딪히다 보면 금세 하루가 저물어, 녀석은 늘 먼지를 뒤집어쓴 채였다.

혼자인 것이 익숙지 않은지 내내 무기력한 모습으로 달의 무덤 위에 올라앉아 끙끙거리는 녀석을 안고 데려온 것이 벌써 몇 번째였다.

“영아.”

봉긋하게 솟은 달의 무덤에 앉아 있던 영이, 기하의 부름에 풀쩍 아래로 뛰어 내려왔다. 손을 내밀자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문지르는 영을 품에 안으면, 현 상궁이 기함하며 달려왔다.

다 큰 짐승을 어찌 그리 안고 돌아다니시느냐는 현 상궁의 말에도, 기하는 그저 말갛게 웃었다. 보이지 않게 된 한쪽 눈 때문이 아니었다. 단지 형제를 잃고 홀로 남은 영이 외로워하지 않기만을 바랐다.

“현 상궁, 생고기 좀 내오게.”

“예, 마마.”

겉으로는 투박한 그녀였지만, 현 상궁 또한 누구보다 짐승들과 정이 들었기에 달을 묻는 날엔 체면을 불사하고 펑펑 울었다. 제 형제를 땅속에 묻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영이 하룻밤 내내 울 때도 그녀는 짐승의 곁을 지켰다.

이제는 완전히 예전으로 돌아가 일부러 더 영에게 잔소리하고, 말썽을 피울 때마다 구박하려 달려드는 그녀의 마음을 잘 아는데도, 지금은 이렇게 녀석에게 온기를 전하고 싶었다.

“마마도 수라 젓수셔야지요.”

“응.”

“폐하께서 오늘은 어느 처소에서 수라를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수신전에 연금이를 보내 볼까요?”

“되었어. 바쁘신데 자주 오실 수야 없지.”

이삼 일에 한 번꼴로 태화당에 드시어 말없이 수라를 들고 가시는 황제께서는, 요즘 빡빡한 일정으로 새벽달이 밝을 즈음에야 겨우 침수에 드신다 했다.

황후의 회임 소식을 공론화한 후, 나라 안팎으로 큰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밀려드는 조공과 이 틈을 비집고 찾아든 사신단 행렬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계시면서도 황제께서는 꼬박꼬박 태화당에 드시었다.

듣기로는 매일 자경전에 드시어 황후의 건강 상태를 보시는 것 외에 다른 후궁전엔 걸음 하지 않으신다고 하니, 황제 폐하의 총애가 무빈에게로 흘러들었다는 소문이 황실 내에 자자했다.

“요즘 수라간에서 마마의 수라를 더욱 신경을 쓰는 듯합니다.”

“그런가.”

“예, 그러니 잘 좀 드십시오. 이제 곧 여름입니다. 가뜩이나 여름엔 입맛을 잃고 기력을 차리지 못하시는 분이 벌써 이러시면 어찌합니까.”

제국의 여름은 더웠다. 아무리 다섯 번의 여름을 보낸 후라 해도, 도무지 적응되지 않는 날씨였다. 겨울에도 그리 혹독하게 추운 것은 아니니, 여름이 더운 것은 당연했다.

북성의 여름은 며칠 반짝 더위가 몰려들었다가 아침저녁이면 온화한 봄날 같았다. 때문에 푹푹 찌는 듯한 더위에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아무리 해도 적응되지 않아 그러네.”

“이번엔 보약이라도 한 재 드셔야 합니다. 머리 상처가 잘 아물긴 하였으나, 흉터가 남을 거랍니다.”

“어차피 보이지도 않는 곳이잖나.”

큰 고깃덩어리를 영에게 내밀자, 무기력하게 그것을 씹어 삼키는 짐승은 들뜬 기색조차 없었다. 예전이라면 달과 함께 서로 코를 처박고 한 점이라도 더 먹으려 달려들었을 텐데. 또다시 지어지는 쓴웃음에 나른한 한숨이 내쉬어졌다.

“슬슬 황자 저하께서 오실 시각인데…….”

현 상궁이 활짝 열린 창문 너머로 황자의 그림자를 찾으며 일어났다. 그래도 기하가 황자 앞에서는 줄곧 밝은 척하며 맛있게 잘 먹고 웃기도 해서 종일 아이를 기다리게 되었다.

“영아, 조금 더 먹어야지.”

고기의 반도 입에 대지 않고 고개를 돌린 영은 풀이 죽은 채 기하의 다리에 얼굴을 처박았다. 반짝반짝 윤이 나는 영의 등을 쓰다듬자, 그래도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눈을 감는다. 외로운 탓이겠지, 뭘 해도 즐겁지 않은 것은. 누구보다 긴 외로움을 먼저 겪어본 기하는 도롱 도롱 숨소리를 내며 잠든 영을 다독이며 측은한 눈을 빛냈다.

“저녁 수라 젓수시기 전에 자수라도 놓으시겠습니까?”

현 상궁의 제안에 기하는 그저 얼굴을 찡그렸다. 도무지 적응되지 않은 것 중 하나는 바로 저놈의 자수였다. 현 상궁은 어째서 이렇게 자수에 집착하는 것일까. 본디 황실 여인이라면 누구나 훌륭하게 자수를 놓을 줄 알아야 하는 것은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무릇 자신의 몫으로 재주를 타고난다. 그리고 기하가 타고난 재주 중에 자수는 어디에도 없었다.

“제발 현 상궁…….”

“자꾸 하셔야 늘지요.”

“자네가 잘하니 되었어. 재능 없는 것에 시간 낭비할 필요가 무어 있나?”

그럴싸한 변명도 현 상궁에겐 통하지 않았다. 그녀의 흉흉한 기세에 기하는 금세 입을 다물었다. 차라리 영이를 데리고 후원이나 한 바퀴 돌 것을.

“서 중랑은 아직인가?”

“또 금세 딴청이십니다.”

“아침에 나갔던 이가 아직 돌아오지 않으니 걱정되어 그러네.”

“조금 전에 당도하였는데, 어찌 된 일인지 의복이 흠뻑 젖어 처소로 가셨습니다.”

“옷이? 왜?”

“물벼락이라도 맞으셨나 보지요. 냇가에 빠지셨거나요.”

아무리 그가 속없이 허허 웃기만 하는 사람이라도 그렇게 맹한 이는 아닌데. 오늘은 해도 쨍쨍했는데 무슨 일이지. 영의 털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긴 기하를 부른 현 상궁은 그에게 수틀을 불쑥 내밀었다.

“현 상궁…….”

“오늘부턴 용을 놓을 것입니다. 자꾸 연습하시면 분명히 느실 것입니다. 멋있게 만드셔서 폐하께 진상 올리시는 겁니다.”

“어차피 폐하께서는, 이깟 삐뚤삐뚤한 용 자수는 눈에 차지도 않으실 거야.”

“그러니 잘하셔야지요.”

대체 자수가 다 무어라고. 굳이 그것을 선물로 올려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단 말이다.

“마마께서 올린 베갯잇을 베고 주무시면, 폐하께서 마마를 오래오래 총애하실 것입니다.”

“그런 미신을 믿는단 말인가?”

“아무렴요. 황궁에선 미신이 아니랍니다.”

“되었어. 어차피 지금도 없는 총애가 오래는 무슨. 그런 거라면 안 하겠네.”

“폐하의 강녕(康寧 :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함)을 기원하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폐하의 여인은 초야를 치른 후에 용을 수놓아 진상하는 것이 황실의 법도입니다. 폐하의 강녕과 제국의 번영을 기원하는 뜻이지요.”

단호한 현 상궁의 말에 수틀을 물리려던 기하의 손이 멈추었다. 현 상궁을 한 번, 내던지려던 수틀을 한 번 쳐다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폐하의 강녕과 제국의 번영이라. 그렇다곤 해도 초야 이후라면 자그마치 다섯 해가 지났는데, 이제 와 이러는 것도 우습잖은가.

“그래도 예전보다는 한결 솜씨가 나아지시지 않으셨습니까?”

“하지만…….”

“늦었다고 생각하지 마셔요. 분명 전에 말씀 올렸으니 처음 들으셨단 표정도 하지 마십시오.”

금세 엄하게 변한 현 상궁을 보고 있으려니, 이제는 정말 울고 싶어졌다. 뾰족한 바늘은 천이 아니라 금세 제 손을 찌르겠지. 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현 상궁의 채근에 막 수를 놓기 시작하던 기하는 황자가 곧 당도할 것이라는 말에 슬그머니 수틀을 내려놓았다. 현 상궁의 무시무시한 시선이 날아들었지만, 기하는 제 무릎을 베고 누워 소록소록 숨소리를 내며 잠든 영의 털을 쓰다듬으며 그녀를 못 본 척했다.

그렇게 연신 눈치를 살피고 있으려니, 결국 체념해 버린 그녀가 물러나며 수라를 올리겠다고 알렸다. 그제야 슬그머니 웃은 기하는 상처가 남은 영의 눈을 가벼이 어루만졌다.

“마마, 정연군 저하와 연진 공주님 드시었습니다.”

아스라이 걸쳐 있던 기하의 웃음이 뚝 멎었다. 생전 이곳을 찾는 법 없던 공주께서 어쩐 일이실까. 불안한 마음에 어서 모시라고 명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자, 차례대로 문이 열리며 황자의 손을 잡은 공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오십시오, 공주마마.”

황제를 지나치게 빼닮은 연진 공주는 아름답고 기품 넘치는 여인으로 자랐다. 비록, 어릴 적 낙마 사고로 한쪽 다리를 절었으나, 정숙하고 현명한 그녀는 황제의 큰 기쁨이자 황실의 자랑이었다.

밀려드는 혼처에도 아직 정혼자가 없는 까닭은, 그런 공주를 너무도 아끼시는 황제 폐하의 애틋한 마음 때문이라고 했다. 또한 하나뿐인 누이만큼은 정략에 의함이 아닌, 누구보다 그녀를 아껴줄 훌륭한 사내와 맺어 주리라는 다짐 때문이기도 했다.

“마마.”

방긋 웃는 황자의 얼굴에 기하는 무릎을 굽혀 아이와 시선을 맞췄다. 공주의 손을 꼭 잡고 들어온 황자는 금세 기하에게 달려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기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황자를 단단하게 받쳐 안고 일어나며, 다정한 음성으로 일과를 물었다. 이제는 너무도 자연스러워, 마치 황자가 태어날 적부터 그러했던 것처럼 익숙한 풍경이었다.

“함께 수라 들자고 하였더니 굳이 이곳에 와야 한다고 떼를 부려 함께 왔습니다.”

다소 냉랭한 공주의 음성에 기하는 겸연쩍은 얼굴로 웃었다. 여인은 어려웠다. 늘 제 곁에서 돌봐주는 현 상궁을 비롯한 수발 나인들과 오랜 시간을 함께한 기하였지만, 공주는 달랐다. 무엇보다, 어렵고 불편한 관계였다.

“그러셨습니까. 앉으세요. 차를 내오라 하겠습니다.”

“됐습니다.”

커다란 눈과 오뚝한 코, 붉은 입술은 황제와 판박이였다. 오누이가 어찌 이리 닮았는지, 황제의 수려한 얼굴을 떠올린 기하는 그녀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만 미소했다.

제 품에서 꼼지락거리며 방긋방긋 웃는 황자를 무릎 위에 앉히자, 조그마한 손은 습관처럼 기하의 가슴과 어깨, 뺨을 쓰다듬었다.

“마마. 낮에 꼬기 반찬 먹어쪄요. 그리고 고모님이 당과랑 떡도 주셨는데에, 유모가 다 먹으면 배 아야 한다고 해서…….”

제 배를 슥슥 문지르는 작은 손을 붙잡은 기하는 흐트러진 황자의 옷깃을 매만지며 통통한 뺨을 쓰다듬었다.

“그래서 서운하였습니까?”

“응! 내가 그래서 마마랑 먹을라고 아껴뒀는데에. 달려오다가 넘어져써요. 나 인제 달리기 잘하는데.”

“다치진 않았고요?”

“예. 근데 떡이 터져써요. 그래서 울어쪄요.”

“저런, 자꾸 울면 아니 된다 했는데?”

“헤에…….”

배시시 웃는 얼굴을 보니 뭐라 꾸중도 못 하겠다. 겨우 떡 때문에 울었다는 얘기를 눈을 반짝이며 설명하는 황자의 모습에, 기하는 연신 웃음을 지었다. 황제의 앞에선 바짝 얼어 또박또박 말도 잘하는 아이가 제 앞에만 오면 혀 짧은 소리를 내는 것도 귀엽고, 응석을 잔뜩 부리는 모습 또한 애틋했다.

“정연은 무빈이 생모라도 되는 줄 아나 봅니다.”

쌀쌀맞은 공주의 음성에, 웃고 있던 기하는 금세 미소를 걷어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녀와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것에 몹시 머쓱해졌다.

“설마 그럴 리가 있습니까.”

“너무도 애틋하게 구니, 마치 친모자간이라도 되는 줄 알았지 뭡니까. 본디 정연군이 정에 약한 것은 황실 사람 누구라도 다 아는 사실이니까요.”

모두가 황자를 등한시할 때도 공주만큼은 이따금 조카를 부르거나 불편한 몸으로도 직접 찾아가 함께 시간을 보냈다고 들었다.

언젠가 황자가 예전에는 고모님이 가장 좋았고, 지금은 마마가 가장 좋다고 흘리듯 말했었다. 아이의 솔직한 발언에 마냥 기쁘게만 웃고 넘겼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그 ‘고모님’이라는 이는 세상 사람들 다 품에 안아도 북성이라면 이를 간다는 연진 공주가 아니던가.

“제게 딱히 하실 말씀이라도…….”

“요즘 황실을 떠돌고 있는 소문 때문에 머리가 아픕니다.”

딱딱한 얼굴로 중얼거리던 공주는 다정하게 황자의 손을 붙잡았다. 막 잠에서 깨어나 황자를 보고 반기려다가, 공주의 존재에 놀라 침상 아래로 몸을 숨긴 영을 안타까이 바라보던 기하는 초조하게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그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그대가 싫어.”

그녀의 냉랭한 음성에 대답 대신, 침상 아래로 몸을 굽히려 드는 황자를 붙잡았다. 숨어버린 영이 걱정되는지 발까지 동동 구르는 모습은 그저 귀엽고 대견했지만, 그것을 미처 표현할 새가 없었다.

“황후께서는 어질고 인정이 많은 분이시지. 날 때부터 어머니를 잃은 정연은 애정에 목말라 있고. 욕심이 많지만, 무영군은 심성이 나쁜 아이가 아니오. 영빈 또한 마찬가지고.”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황제 폐하의 총애가 잠시 그대에게 기울어진다 하여, 그대의 죄가 씻기는 것은 아니야.”

“무슨 죄를 말씀하십니까?”

“그걸 지금 몰라서 내게 묻는 것인가?”

“신첩은 북성에서 태어났습니다. 5년 전, 황명으로 폐하와 혼인하여 제국으로 왔습니다. 신첩이 아직도 북성의 왕자입니까? 아버님과 형님이 어찌 살아 계시는지도 모릅니다. 그 누구도 신첩에게 그것을 말해주지 않습니다. 도대체, 제게 무슨 죄가 있다는 것입니까? 도대체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신첩은 제국 사람이 되는 것입니까?”

나는 그 무엇도 아니다. 문득 깨달았다. 나는 더 이상 북성의 사람이 아님을. 내 발로 그곳을 떠나오던 순간, 이미 그렇게 되었음을. 그러나 나는 제국의 사람 또한 아니다. 그 누구도 나를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대가 죽었으면 좋겠다. 같잖은 계략으로 오라버니의 혜안을 흩트리지 마. 그대의 피는 아바마마와 어마마마, 황태자셨던 큰오라버니와 폐하의 운명까지 바꾸었어. 내 다리가 왜 이리됐는지 알아? 네 그 잘난 이모 때문이다. 그런 네가, 멀쩡하게 살아서 오라버니의 후궁이 되었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그런 그대가, 친애하는 나의 조카님을 품에 안고 있다는 것이 진정 말이 된다 생각해?”

원색적인 비난에 기하는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가슴을 찔러오는 날카로운 말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알고 있다. 씻을 수 없는 죄로 인한 자신의 한계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심이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해지고 싶었다.

그녀는 아버지를 잃었다. 자애로운 어머니를 잃었다. 든든한 오라버니를 잃었고, 자신의 다리를 잃었다. 남은 것은 자유를 잃은 피붙이와 고장 난 몸뿐이었다. 그녀의 나이, 고작 열한 살 때였다.

“공주마마.”

“그대가 좋은 사람이건, 천하의 둘도 없는 나쁜 사람이건 상관없어. 어차피 내게는 악당일 뿐이잖아. 오라버니를 흔들지 마. 저 불쌍한 황자를 이용하지 마. 죽을 수 없다면, 그냥 죽은 듯이 살아. 그래야 하는 거잖아.”

“그것이 어찌, 사람 마음대로 된다 하더이까.”

살고 싶고, 행복해지고 싶고, 뜨거운 애정을 받고 싶은 것이 사람이거늘. 자유롭게 뛰고, 좋은 공기를 마시고, 맛있는 것을 먹으면서 달게 잠드는 것. 모두, 그리 살고 싶은 것이 아닙니까.

“싫습니다.”

“그대 참, 뻔뻔한 사람이네.”

“원래 사람은 제 손바닥의 가시가 가장 아픈 법이라 합니다. 저도 제 상처가 가장 아픕니다. 황궁은 외로운 곳입니다. 더는 외롭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 황자에게 해가 되지 않겠습니다. 폐하께 못된 후궁이 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저를 그냥 내버려 두세요.”

공주는 그에게 쪼르르 달려와 품 안에 덥석 안기며 웃는 황자의 모습에 가까스로 말을 멈췄다.

“마마, 영이 코 잡니다.”

“응, 그래요.”

“배고픕니다.”

“그래, 시장하지요. 얼른 수라 들이라 하겠습니다.”

“꼬기 먹습니까?”

“낮에도 먹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꼬기…….”

기하는 아쉬운 얼굴로 칭얼대는 황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희미하게 웃고는, 현 상궁을 불러 수라를 내오라 명했다.

“함께 수라 드시겠습니까.”

“됐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두 번 제안하지 않는 기하를 힐끗 바라보던 공주는 초조하게 손을 떨었다. 독한 말을 실컷 퍼부어 주리라 작정하고 찾아왔지만, 어린 황자 앞에서 함부로 말을 꺼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욱이 그녀는 타고난 성정 또한 그리 악독하지 못했다. 미움이 넘실거려 차디찬 분노가 쌓였으나, 그녀 또한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이 그 때문은 아니라는 것을.

“황제 폐하 납시오.”

우렁찬 음성이 사그라지기도 전에 벌컥 문이 열렸다. 방긋거리며 수라를 기다리던 황자가 황제 폐하라는 소리에 놀라 기하의 무릎 위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셨습니까, 폐하.”

저벅저벅 안으로 들어오던 황제는 나란히 서 있는 기하와 황자, 연진 공주를 보고선 눈썹을 슬쩍 움직였다. 아무리 봐도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더욱이 공주가 이 먼 곳까지 직접 찾아와 있는 것을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네가 예까지 어쩐 일이냐, 정아.”

“오라버니.”

“벌써 날이 어둑한데.”

“자경전에서 나오던 길에 황자가 홀로 걷는 것을 보고 함께 걸었습니다.”

“그랬구나.”

“하면, 소녀는 이만 물러나겠사옵니다.”

“함께 수라라도 들지 않고, 어찌 벌써 가.”

“아닙니다. 지금 막 돌아가려던 참이었습니다.”

누이를 향해 흐뭇한 미소를 짓던 황제는 손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싸 안았다. 황제는 어릴 적부터 유난히 누이를 애틋하게 여겼다. 혼기가 꽉 찬 여인이 되었음에도, 아직 그의 눈에는 열한 살 아이로만 보였다.

“무빈이 차 한잔도 대접하지 않더냐.”

퉁명스러운 황제의 음성에 공주가 미소했다.

“아닙니다. 소녀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차는 종일 마시는 것을요.”

“그렇다고는 하나, 손님을 이리 홀대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니라. 더욱이 너는 내 하나뿐인 누이지 않느냐. 황실의 유일한 공주이고.”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오라버니. 아무도 소녀를 홀대하지 않습니다.”

황제는 애잔한 눈으로 누이를 바라보며 돌아서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어릴 적 다리를 다친 것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난 후에도, 그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전장을 돌며 혜비에게 맞설 만한 세력을 키우면서도 쉬이 움직일 수 없었던 이유는 황실에 홀로 남은 누이 때문이었다. 갓 열한 살의 공주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오라비가 직접 바래다 주랴?”

“그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서 수라 드시어요.”

“내일은 함께 수라 들자꾸나. 내 직접 가마.”

“시간이 나시거든 자경전에나 한 번 더 들르셔요. 황후께서 말씀은 아니 하시지만, 내내 불안해하십니다.”

“그래. 그럼 함께 수라 드는 것도 좋겠구나.”

“예, 오라버니. 하면, 소녀는 이만 물러나겠사옵니다.”

힐끗, 황제의 어깨 뒤로 기하를 바라보던 공주는 별다른 인사도 건네지 않고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어릴 때부터 줄곧 돌보아 준 보모상궁에게 의지한 채로 절뚝거리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황제는 주먹을 그러쥐었다. 조금만 더 빨리 치료했더라면, 저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텐데. 깊은 한숨을 내쉬며 뒤돌아본 황제는 무겁게 가라앉은 기하의 표정에 가볍게 혀를 찼다.

“그대는 또 왜 입이 나왔느냐.”

“소인이…….”

“신첩.”

“…신첩이 어찌 공주마마를 홀대할 수 있습니까.”

“그것 때문에 마음 상한 것이냐?”

“아무것도 모르시면서.”

“모르긴 또 뭘 몰라.”

차례대로 들어오는 수라상을 보고도 기하는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겨우겨우 참고 있던 마음이 황제의 말 한마디에 툭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아무리 둘러봐도 황궁엔 모두 저를 미워하는 사람들뿐이었다. 대체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어찌 이리 하나같이 모질게만 군단 말인가.

“황자, 바르게 앉아라. 그렇게 앉아 수라 받을 것이냐?”

“예…….”

자연스럽게 기하의 무릎 위에 올라 앉아 있던 황자는 금세 풀이 죽어 그의 옆으로 내려앉았다. 괜히 불쑥 나타나시어 황자와 오붓한 시간을 방해하신다.

“너 꼭, 짐더러 어서 가라는 표정이다.”

“들켰습니까?”

“뭐가 틀어져서 그놈의 입이 나와 있어? 짐더러 정녕 가라는 것이냐?”

“수라 드십시오.”

기미를 막 끝낸 지밀상궁이 뒤로 물러나자마자, 기하는 젓가락을 들었다. 아예 자신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연신 황자에게 올려줄 반찬을 고르는 기하의 모습에 황제는 으드득 이를 갈았다. 기껏 생각해서 바쁜 시간 쪼개 왔더니, 홀대도 이런 홀대가 따로 없다.

“닥치고 밥이나 먹으라는 것이냐?”

“폐하, 황자가 듣습니다. 어찌 그리 막말하십니까?”

“그대나 꼬장꼬장하게 굴지 말고 똑바로 해라. 네가 그리 나를 홀대하면 황자가 참 잘 보고 배우겠다.”

“신첩이 언제 폐하를 홀대했다 하십니까? 우길 걸 우기십시오.”

“뭐야?”

황자의 양쪽 귀를 단단히 틀어막고 조용히 중얼거리는 기하의 모습에, 황제는 기어이 들고 있던 숟가락을 탁 내려놓았다. 당장에 이놈의 밥상을 엎어버릴까 하다가, 끔뻑끔뻑 눈을 감았다 뜨는 어린 아들놈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칙한 후궁을 향해 콧김만 씩씩 내뿜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아닌 밤중의 홍두깨로, 멀쩡히 자다가 물벼락을 맞은 꼴이었다.

“마마, 밥…….”

울상을 하며 칭얼대던 황자는 황제의 싸늘한 눈에 금세 입을 다물고 고개를 푹 숙였다.

“자꾸 그러지 마십시오. 아버지란 분이 아들 기나 죽이시고…….”

“내 아들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네가 대체 무슨 상관―.”

저것이 어디 감히 황제에게 도끼눈을 하고 달려들어? 누가 또 저것에게 독약이라도 먹인 것인가? 그래서 눈에 뵈는 것이 없는가?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저리 가시 돋친 것처럼 구느냔 말이다.

“뭐 하는 짓이냐?”

기어이 젓가락을 내려놓는 기하의 담담한 얼굴에, 황제는 눈썹을 찡그렸다.

“잘 알겠습니다. 이제 신첩은 폐하와 폐하의 아드님께 신경 쓰지 않을 테니 그리 아십시오. 더는 폐하께서도 신첩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니, 이제 발걸음 하지 마세요.”

“뭐야?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말이 안 되는 말씀을 하시는 것은 폐하가 아니십니까? 무슨 상관이냐고요? 그리 자신 있으셔서 그간 황자를 방치하셨습니까? 폐하께서는 뭐든 다 알고 계시면서, 안 된다, 하지 마라, 그 말씀밖에 하지 않으시잖습니까?”

눈치를 살피던 황자가 기어이 두 눈에 눈물을 매단다. 황제가 두려워 차마 소리도 내지 못하고 눈물을 삼키던 아이는, 급기야 오래된 버릇처럼 누런 오줌으로 옷을 적셨다. 화들짝 놀라 엉거주춤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황자의 모습을 이상하게 여긴 보모상궁이 먼저 아이를 달래기 시작했고, 그제까지 서슬 퍼런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던 황제와 기하의 시선이 잦아들었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저하께서 놀라시어…….”

“데려가 씻겨라.”

“예, 폐하. 저하, 소인이 안아드리겠사옵니다.”

바닥을 흠뻑 적실 정도는 아니었으나, 뒷정리를 시작하는 상궁들의 손이 바빴다. 울먹이며 보모상궁 품에 안긴 황자가 자리를 비우자, 오롯이 남겨진 황제와 기하는 쉬이 입을 열지 않았다. 무겁고 갑갑한 적막이 두 사람을 가로막았다.

황제는 자신에게 시선을 건네지 않는 기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이가 무슨 말을 하여 속이 상했던 모양이구나.”

툭 터져 나온 황제의 음성에도 기하는 꿈쩍하지 않았다. 그쯤 하면 자신이 퍽 많이 참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고개를 돌린 채로 쳐다보지도 않는 모습이 어찌나 꼿꼿하던지 간신히 삭은 화가 절절 끓었다.

“악의는 없는 아이다. 너도 알지 않느냐. 단지 마음의 상처가 너무 커서―.”

“마음의 상처가 크면, 아무렇지 않게 타인에게 똑같이 상처를 줘도 되는 것입니까?”

“어찌 그리 생각해.”

“이제 오지 마십시오.”

“쓸데없는 소리 한다.”

“폐하께서 너무 자주 오시니 생전 제게 관심 없던 연진 공주까지 태화당에 걸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 그만두십시오. 신첩은 그냥, 여기서 제 사람들과 살 것입니다. 이따금 황자나 만나면서 죽은 듯이 살겠습니다.”

많은 것을 바란 적은 없었다. 가장 소망하는 것은 너무도 큰 것이라 감히 품어본 적도 없었다. 한때는 그리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지마는, 그것은 한낱 부질없는 꿈임을 알고 있다. 영원히 제 것이 될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저 품에 안고만 살 것이라 생각했다.

살아지는 대로 살아가고, 더는 아무것도 잃지 않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러니 이제는 부디…, 더는 마음을 헤집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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