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장 환몽(幻夢)
욱신거리는 몸을 겨우 일으키자 뒤통수에 격렬한 통증이 일었다. 온몸이 축축했다. 팔다리가 저리고 몸이 무거웠다. 간신히 일어나 앉아 주위를 둘러본 기하는 타는 갈증에 입맛을 다셨다. 텅 비어 있는 방 안엔 도움 청할 이 하나 없었다.
너무 오래 잔 탓인지 행색이 초라한 것만 같았다. 일단 씻어야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침상 아래로 발을 내려놓으려던 기하가 고개를 들었다.
“정신이 들었느냐?”
문이 벌컥 열리면서 들린 음성에 기하는 배시시 웃었다. 그것은 순전히 민망함 때문이었다. 슬그머니 몸을 일으키려다 순간 밀려오는 어지러움에 휘청거렸다. 또 추한 꼴을 보일 것만 같다.
“어…….”
그대로 침상 아래로 볼품없이 나자빠진다 생각하고 눈을 꼭 감았던 기하는 등을 단단하게 받쳐오는 손길에 숨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다친다. 어찌 함부로 움직이려 들어?”
역정을 내면서도 그다지 노기 띤 음색이 아닌 황제의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웠다. 허리를 받쳐 그대로 기하를 끌어안은 황제가 천천히 몸을 낮췄다. 걱정 가득한 얼굴은 익숙하지 않아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그를 바라보니 길고 무거운 한숨이 새어 나온다.
“무작정 이리 움직이면 어째, 그대로 나자빠졌다가 또 어디 부딪치려고.”
“송구……, 켁.”
목이 탔다. 가뭄에 마른 논처럼 쩍쩍 갈라진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황제는 기하를 끌어안은 팔을 풀지도 않고, 소리를 높여 임승지의 이름을 불렀다.
“예, 폐하. 불러 계시옵니……, 마마!”
꼴이 말이 아니었다. 더더욱 황제의 품에 안긴 채로 맞은 승지의 얼굴이 너무도 초췌해서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했다. 제대로 다듬지 못한 수염이 삐죽삐죽 올라와 있고, 눈 밑이 퀭한 것이 며칠 잠을 못 이룬 사람 같았다. 그런 와중에도 어찌나 반갑게 저를 부르던지, 고마움에 가슴이 찌르르 울었다.
“마마, 정신이 드시옵니까? 완전히 깨어나신 것입니까?”
“정신 사납다. 가서 물 좀 가져와.”
“예, 폐하.”
승지가 얼른 바깥으로 나가 물을 가져왔다. 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황제의 가슴에 몸을 기대고 있던 기하가 채 숨을 고르기도 전에 다시 들어온 그는 초조한 얼굴로 사발을 내밀었다.
“태의 영감을 부를까요?”
“그래. 바로 오게 해.”
“지금쯤이면 식사를 끝냈을 것입니다.”
후다닥 밖으로 나가는 승지를 보고 있으려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꽤 무엄한 자세인 것 같은데 황제는 도통 기하에게 손을 떼지 않았다.
“저기, 폐하.”
“왜, 어디 불편하냐.”
“그것이 아니오라, 바로 일어서겠으니…….”
“태의가 곧 온다. 그대로 있어. 진맥을 받아야지.”
“하지만…….”
“마마, 정신이 드셨습니까?”
오랜만에 마주한 태의는 전보다 수척해진 얼굴로 허둥지둥 안으로 뛰어들어 왔다. 아무래도 산채 사람들에게 신분을 속이기 위함인지, 관복도 벗어 던진 그는 허름한 옷에 걸맞은 표정을 하고는 공손히 무릎을 꿇었다.
“맥을 보겠사옵니다.”
정말 이대로 있어도 괜찮은 걸까. 황제에게 붙잡혀 태의에게 내밀어진 손은 한동안 허공에서 머물렀다. 여전히 황제에게 반쯤 기대 누운 채로 태의에게 진맥을 받고 있으려니 이것은 꿈인지 생신지 도무지 분간되지 않았다.
생각보다 저 자신이 크게 다쳤던 것인지, 혹여 사경을 헤매거나 반병신이 되는 것은 아닌지 따위를 고민하던 기하는 진맥을 본 후 기쁜 얼굴로 변한 태의를 보고 작게나마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맥이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제는 상처 부위만 잘 치료하시고, 원기 보충하시면 쾌차하실 것입니다.”
“그래, 수고하였다.”
“탕약을 올릴 것입니다. 꾸준히 복용하시면 효험을 보실 것이니, 당분간은 끼니마다 거르지 말고 드시옵소서.”
“하면 어서 달여 올려라. 일단 요기부터 하게 할 테니.”
“예, 폐하.”
“그대의 노고가 많았다. 환궁하면 상을 내리마.”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깊이 머리를 숙여 절을 올린 태의가 물러났다. 그때까지 멀뚱멀뚱한 눈으로 멀어지는 그를 바라보던 기하가 고개를 쳐들었다. 그제야 황제의 얼굴이 거꾸로 보였다. 조금 전과는 분명히 달라졌으나,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나흘이나 앓았다. 열이 높아 헛소리까지 하였고.”
“심려를 끼쳤사옵니다.”
“공연히 이곳에서 병을 키운 것은 아닐까 하여 태의를 불렀다.”
“혹… 폐하께서 미령하신 것은…….”
“그가 너를 돌보았으니 부른 것이다. 환궁한 후에도 당분간은 태의에게 진맥을 받도록 해.”
“하지만, 그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옵고…….”
“짐이 하라면 해. 쓸데없는 고집은 당분간 부리지 마라.”
단호한 황제의 음성에 입을 다물었다. 뒷목이 뻐근하게 아팠다. 축축하고 비린 냄새도 나는 것 같고, 땀을 흘려 옷도 눅눅했다.
태의나 승지의 모습이 후줄근한 것도 제 탓인 것만 같았다. 그들이 그렇다면 지금 제 꼴도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런 중에 황제께 기대 누워 있다니. 창피함에 얼굴이 금세 붉게 물들었다.
“왜 또 얼굴이 붉어지느냐. 열이 나느냐?”
커다란 손이 이마를 짚었다. 크고 단단한 손은 그대로 눈까지 뒤덮어 절로 눈이 감겼다. 편안하고 따뜻한 안도감이 가슴을 채운다. 이전까지는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던 마음이었다.
“짐이 괜한 짓을 한 것은 아닌가, 내내 후회하였다.”
“…예?”
“너를 이곳에 데리고 온 것 말이다.”
“폐하, 그것은…….”
그가 어떤 호의로 자신을 이곳에 데리고 왔는지 알고 있다. 그런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사고는 오로지 자신의 책임이었다. 사소한 문제로 그의 마음이 뒤틀어지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그것은 소, 아니 신첩의 불찰이옵니다. 신첩이 미련하여 그랬습니다. 폐하께 심려를 끼치고, 일정까지 엉망으로 만들어 송구…….”
“그대를 탓하는 것이 아니다.”
화가 나거나 언짢은 음성이 아니었다. 천천히 눈을 깜박이던 기하는 제 뺨을 쓸어주는 커다란 손의 온기를 가만히 느꼈다.
“네가 그대로 죽는 줄 알았다.”
“…….”
“짐 때문에.”
“아닙니다. 어찌 폐하 탓이라고 하십니까.”
“…….”
“그리 생각하지 마십시오. 신첩은 그리 허망하게 죽지 않을 것입니다.”
뺨을 훑는 손이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온기 틈으로 새어 나온 두려움은 생각보다 거대했다. 단단한 손가락을 맞잡은 기하가 뿌연 미소를 지었다.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 때문이었다.
“폐하. 아무리 해도 이것은 좀…….”
난처한 기색을 표하는 기하를 바라보던 황제는 스스럼없이 옷을 훌훌 벗었다. 뜨거운 김이 펄펄 솟는 목욕통에서는 온갖 약재가 섞인 진한 냄새가 났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린 기하는 귀 끝까지 붉게 물들이고 숨을 골랐다. 겨우 죽을 삼키고 씻고 싶다고 했을 때, 황제는 어째서인지 한참 동안 고심하는 얼굴을 보였다. 몇 번이나 졸라 투정 섞인 청을 올리자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짓더니, 오히려 지금은 아주 담담한 얼굴이었다.
“뭐 하고 있어, 벗지 않고.”
분명 이곳은 황궁의 온탕처럼 넓지도, 화려하지 않았다. 이런 깊은 산채에 커다란 목욕통이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었다.
장정 서넛이 들어갈 정도로 큰 통 가득 받아진 물은 그나마 한약재 때문에 안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것은 조금 불편했다. 아니, 많이 거북스러웠다.
“벗겨주랴?”
“아닙니다!”
피식 웃은 황제가 마지막 남은 고의까지 훌훌 벗는 것이 보여, 기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미 몇 년 전 볼 것은 서로 다 본 부부 사이임에도, 몹시 부끄러워 열이 올랐다.
찰박거리는 물소리에 간신히 고개를 들자, 황제는 이미 욕탕 안에 들어가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드넓은 어깨라든가, 탄탄해 보이는 가슴 근육 따위를 슬쩍 쳐다보던 기하는 무언가 결심이라도 한 듯 입술을 물었다.
그래, 어차피 같은 사내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 않은가. 그래도 혹시나, 너무 부끄러울지도 모르니까 마지막은 그냥 남겨두기로 하자.
“뜸 들이다 물 다 식는다.”
슬쩍 발을 담그던 기하는 갑작스러운 황제의 목소리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휘청거렸다. 한쪽 손과 허리를 붙잡는 황제가 아니었더라면, 또다시 볼품없이 목욕통 바닥에 처박혔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살려 주어 감사하다는 인사를 미처 하지 못했다.
“어지러우냐?”
평소였다면 칠칠하지 못하게 넘어지기나 한다며 야단을 맞았을 터인데. 아픈 것이 가끔은 편리하고 좋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면서 입가에 미소 띤 기하는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잠깐만 담가라. 네가 하도 청해서 씻으라 이른 것인데 태의는 아니 된다 했어. 머리는 짐이 감겨줄 것이니 너무 깊이 담그진 마라.”
“아닙니다. 신첩이 잘할 수 있습니다. 어찌 감히…….”
“널 돌봐줄 이 하나 없는 산속인데, 몸도 편치 않은 그대를 보고만 있으란 말이냐? 짐이 그리 매정한 군주로 보여?”
“그런 것이 아니오라…….”
“쓸데없는 소리를 또 했다간 볼기를 두드려 줄 것이야. 잔소리 말고 얼굴이나 박박 문질러 닦아라. 온욕을 하고 나면 오늘 밤을 푹 자겠지. 내일 하루 더 쉬고 환궁할 것이다. 마차로 쉬엄쉬엄 갈 것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물이 뜨거웠다. 얼굴이 붉어지는 것은 그 때문이리라. 쓸데없는 희망은 싹을 틔워 무럭무럭 자라기 전에 잘라내야 한다. 이미 넘치게 커버린 마음을 추스르지도 못할 지경인데, 새로운 싹을 틔울 수는 없다.
그런데도 가슴은 뛰었다. 퉁명스러운 말투도, 따뜻한 손길도, 걱정 가득한 눈빛도, 모두 제 것이 된 것만 같았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서 내내 마른 숨을 몰래몰래 내쉬어야 했다.
이것이 꿈이 아니라면 좋겠다. 만약 꿈이라면, 영원히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
온욕을 너무 오래 한 탓에 기어이 현기증으로 쓰러진 기하는 한동안 침상에서 생활해야 했다. 끼니때마다 내어주는 식사와 탕약을 먹고 까무룩 잠들었다 깨어나길 며칠, 이제는 슬슬 몸이 견딜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무엇보다 어서 빨리 환궁하고 싶었다. 황자도 보고 싶었고, 영과 달도 걱정되었다.
그러면서도 지금 이 순간이 멈추기를 바랐다. 황제의 다정한 손길이 온통 제게만 향해 있어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는 다정함에 가슴이 설레어서.
* * *
“일어났느냐?”
이른 아침이었다. 달게 자고 일어난 기하는 평소와 달리 딱딱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황제와 눈을 맞췄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그리 조심한다고 하였는데, 또 겁 없이 황제께 발길질한 것은 아닐까 염려되어 눈치를 살피니, 갈아입을 옷이 툭 떨어졌다.
“채비하라.”
“환궁하는 것입니까?”
“그래. 며칠 더 쉬다 가려 하였더니, 전서구가 날아들었어.”
전서구까지 띄웠다니, 황궁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아니면 중요한 일이 있다거나.
“말을 탈 수 있겠느냐?”
“예, 괜찮습니다.”
“혹 어지럽거든 말해라. 짐이 붙잡아 주마.”
“예, 폐하.”
깨끗하게 다림질된 무복으로 갈아입던 기하는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언제부터 저리 빤히 자신을 보고 있었는지, 마주친 황제의 눈빛에 순간적으로 얼어붙어 버렸다.
“왜.”
“아, 아닙니다.”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는 듯 황제는 곧 몸을 돌렸다. 저벅저벅 걸어 방 밖으로 나가는 그의 뒷모습에 귀 끝까지 붉게 물들인 기하는 괜히 제 얼굴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의식하지 않으려고 그리 애쓰는데도 이따금 정신을 놓고 있다 보면, 황제의 시선이나 손길에 몸이 얼어붙는다.
며칠간 한 이불을 덮고 잠들어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겉으로 보기에만 멀쩡한 부부 사이라는 것을 자각한 순간부터 끊임없이 저 자신을 괴롭히는 것은 몰염치한 정염(情炎 : 불같이 타오르는 욕정)이었다.
어차피 황제께서는 자신을 그저 한낮 사내로밖에 생각지 않으신다. 초야를 치른 것이 기적일 정도로, 아무런 관심을 두시지 않았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내내 기분이 울적했다. 이렇게 넘치는 보살핌을 받으면서도, 과분한 손길 속에서도.
“도련님, 얼른 쾌차하시고 또 오시오.”
“고마웠습니다.”
“거, 예쁘장한 얼굴이 반쪽이 됐소. 이건 내가 아주 귀하게 여기는 것인데, 몸이 허할 때 한 잔씩 꺼내 마시면 아주 좋소이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귀한 것을 이리 제게 내어 주셔도 됩니까?”
“뱀술이오. 이게 그냥 남자한텐 이거라니까!”
엄지손가락을 척 하고 드는 두령에게서 뒷걸음질 치는 기하의 표정에 산채 사람들이 와하하,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왼쪽 귀 바로 옆쪽으로 제법 큰 상처가 난 탓에 머리를 제대로 묶지 못한 기하는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을 추스르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어서 말에 오르시오. 내 다음에는 꼭 곰 한 마리 잡아 놓을 터이니, 여름 가기 전에 들르시오. 나리가 바쁘시면 도련님 혼자 오셔도 되오.”
“이놈들아, 네놈들 뭘 믿고 이 아일 혼자 보내?”
“어따, 나리도 참! 어째 사람을 못 믿고 그러오?”
“시끄럽다 이놈들아, 갈 길 바쁘니 썩 물러나.”
“그럼 조심히 가시오. 또 보오.”
“오냐.”
먼저 등을 돌리는 황제의 뒤로 금룡대가 따라붙었다. 제 옆에 바싹 붙은 서엽에게 술병을 건넨 기하가 말 위로 뛰어올랐다.
산채 식구들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고, 말 옆구리를 차며 고삐를 잡으니 한결 시원한 바람이 느껴졌다. 자유로운 바람. 아마 한동안은 다시 느낄 수 없을 달콤한 시간을 뒤로하며, 기하는 서둘러 황제의 뒤를 따랐다.
“잠시 쉬었다 가자.”
그다지 먼 시간을 달린 것도 아닌데 황제는 짧게 명령했다. 산에서 내려와 드넓은 초원을 달리니 어느덧 한낮이었다. 쉬지 않고 빠르게 달려야 오늘 안에 환궁할 것인데, 애초에 그럴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여유로운 황제의 태도에 기하는 조용히 임승지를 불렀다.
“궁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아, 아닙니다. 마마께선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쩐지 부자연스러운 승지의 태도에 기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내내 유쾌하게 떠들고 달려야 할 승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며칠간 임승지와 서엽이 제법 친해진 것 같기는 했지만, 서엽은 금룡대 소속이 아니니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빈.”
“예, 폐하.”
“이쪽으로 와 앉아라.”
커다란 나무 아래 자리를 잡은 황제가 손짓했다. 수통을 황제께 바친 금룡대가 기하를 향해 머리를 숙이며 뒤로 물러났다. 가까운 곳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들렸다. 평화로운 풍경에 잠시 눈을 빼앗겼던 기하는 줄줄이 말을 이끌고 가 물을 먹이는 사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곳은 고원이라고 한다.”
“가는 길에는 못 보던 곳입니다.”
“그때는 급히 움직이느라 험한 산세를 질렀다.”
어째 가도 가도 처음 보는 길이라 의아했었다. 황제가 넘겨주는 수통을 받아 들고 목을 축이니, 느끼지 못했었던 갈증이 새삼 밀려들었다. 천천히 물을 넘기면서 끝이 보이지 않는 드넓은 초원을 바라봤다.
“또 북성 생각이냐?”
“예?”
“너 말이다. 북성을 떠올릴 때면 늘 그런 표정이다.”
“아… 송구합니다. 소인은 단지…….”
“되었다. 탓하려는 것이 아니니.”
북성을 떠올리는 것이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황제의 앞에서 자제하려 했던 까닭은, 그곳을 떠올리는 자신으로 하여 그의 아픈 과거 또한 자연스럽게 생각나는 것 같아서였다. 늘 잊으라 하셨지만, 생각해 보니 강요는 아니었다.
“머리는 울리지 않느냐.”
“예, 괜찮습니다.”
“무리해서 좋을 것은 없지. 환궁하거든 다시 진맥 받고 조금 더 쉬도록 해.”
“그다지 큰 상처는 아니어서…….”
“네가 의원이라도 되느냐. 하라면 하란 대로 해.”
퉁명스러운 말투도, 찌푸린 얼굴도 이제는 다 알고 있다. 그것은 절대로 저를 탓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을. 묽게 웃은 기하가 황제를 바라봤다.
“조금 더 가면 객잔이 나올 테니 배가 고파도 참아.”
“예.”
화려하지 않은 무복을 걸쳤을 뿐인데도, 황제는 그 자체로 빛이 났다. 기하는 탄탄하면서도 날렵한 몸으로 말 위로 뛰어오른 그를 바라보며 열이 오르려는 뺨을 문질렀다. 요즘 들어 자꾸만 그를 보고 있으면 열이 났다.
“마마, 무리하시는 것 아닙니까?”
“괜찮아.”
걱정스러운 듯 서엽이 다가와 물었다. 기하에게 손을 내민 서엽은 그가 말 위로 올라가기 수월하도록 붙잡아준 후에, 몸을 날려 자세를 잡았다.
잔잔한 미풍이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들었다. 따뜻한 봄바람, 북성에서는 느껴본 적 없는 평화로운 기분에 서엽은 괜히 마음이 울적해졌다.
“북성에도 이런 드넓은 초원이 있었더라면, 겨울 동안 그리 많은 수가 굶어 죽지는 않았을 터인데 말입니다.”
“응.”
먹을 것이 부족한 북성의 유일한 강점은 군사력과 무역에 적합한 지리적 요충지라는 것이었다. 그마저도 겨울이면 강이 얼어붙고 바람이 거세 배를 띄울 수 없어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지만, 길을 내어주고 그것을 호위하는 등의 수단으로 나라 전체가 근근이 먹고살 수 있었다.
때문에 많은 수의 군사들이 다른 나라의 용병으로 차출되었는데,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가족의 끼니를 잇게 할 수 있었다. 그마저도 급사하면 겨우 한 해 분량의 곡식을 받을 뿐이어서, 나날이 인구가 줄어가는 추세였다.
“좀 웃으십시오.”
“응?”
“얼굴이 잔뜩 굳어 있으십니다.”
“그랬습니까.”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냥, 이런저런. 빨리 환궁하고 싶습니다.”
“황자 저하 때문이시지요?”
“응. 영과 달이도 걱정되고. 또 무슨 말썽을 부려 현 상궁을 괴롭히고 있을까, 그런 생각도 들고.”
“마마께서는 이제 제국 사람이 다 되셨나 봅니다.”
빠르지 않은 속도로 황제를 뒤따르던 기하는 서엽의 말에 희미하게 웃었다. 제국 사람이라. 혀끝에 아물지 않을 상처가 돋아나는 기분이었다.
“좋은 일 아닙니까. 어쨌든 정붙이고 살 이들이 생겼다는 것이니까요.”
“글쎄, 잘 모르겠어요.”
“웃으십시오. 마마께서 웃으셔야 그나마 황제 폐하의 심기가 덜 불편해 보이십니다.”
“응?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모르셨습니까? 마마께서 조금이라도 힘든 내색을 보이시면 폐하께서 어찌나 화를 내시던지. 산채에 있는 동안 소장은 물론이고, 금룡대는 내내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습니다. 하니, 좀 웃으시란 말입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서엽의 말에 기하는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폐하께서는 아직도 끔찍한 옛일을 가슴에 담고 계시는 것이겠지. 그래서 이런 사소한 일에도 내내 마음 쓰시는 것일 터이다. 이것은 오롯이 저에 대한 걱정은 아니다. 책임감 혹은, 벗어나지 못한 죄책감일 것이다.
“고원성에는 저자가 볼 만하다고 합니다. 임 대장님께 들으니 마침 머물 객잔이 저자 한가운데 있다 하던데, 슬슬 구경이라도 하시죠?”
“그래? 아, 형님 전낭 좀 채워 왔습니까?”
“혹시나 해서 챙겨 왔습니다. 사시고 싶으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그냥, 형님 말대로 구경 좀 하고 싶어서요.”
서엽은 그제야 생긋거리는 기하의 얼굴에 안심하며 힘차게 말 옆구리를 찼다. 푸드득거리며 숨을 몰아쉬던 말이 앞으로 치고 나가자, 기하도 단단하게 고삐를 움켜쥐었다.
입을 반쯤 내민 기하는 도통 음식에 손을 대지 않았다. 일찍부터 서둘렀는데도 중간중간 쉬고 온 탓에 시각이 많이 지체되었다.
하는 수 없이 오늘 밤은 이곳에서 머물고, 내일 새벽에 떠나자고 결정한 황제는 저자 구경만큼은 허락하지 않았다. 할 일도 없는데 굳이 일찌감치 방으로 들어가 잠이나 자라는 것이었다.
“너 정말 안 먹을 것이냐?”
“생각이 없습니다.”
생각이 없기는. 아무리 입맛을 잃어도 꼬박꼬박 식사하던 습관이 어디 갔으려고. 음식 앞에서는 체면을 차린 적 없을 정도로 아무거나 잘 주워 먹던 것이, 출발하기 전에 받은 아침상이 전부인데도, 저렇게 입만 내밀고 있었다.
“도련님, 그러지 마시고 조금이라도 드십시오. 이 만두 맛이 아주 끝내줍니다.”
김이 모락모락 솟는 만두와 찐빵 따위를 기하 앞으로 내민 승지는 슬그머니 황제의 표정을 살폈다. 이미 재빠르게 식사를 마친 부하 놈들은 탁자 양옆에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황제의 명령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되었습니다. 정말 생각이 없어 그럽니다.”
시무룩한 기하의 음성에 금룡대가 일순 어깨를 떨었다. 사납게 치켜 올라간 황제의 눈썹이 꿈틀대는 것을 힐끔거리며, 승지는 태연히 만두를 먹고 있는 서엽을 쿡 찔렀다.
어떻게 좀 해보라는 뜻이었는데 태평한 얼굴을 마주하니 속이 턱 막혔다. 북성 출신은 자고로 성미가 급하며 괴팍하다고 하였는데 저들은 어찌 저렇게 느긋한지. 그래도 귀족은 귀족인 모양이라고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도, 승지는 다시 한 번 서엽의 허벅지를 찔러댔다.
“도련님, 그러지 마시옵고…….”
“되었다지 않느냐. 그쯤 하고 상 물리라 해.”
“예? 그, 하지만…….”
승지는 칼날 같은 황제의 일갈에 지나가는 점소이를 불러 목을 축일 차를 내오게 했다. 싸늘한 바람이 쌩쌩 부는 겨울 한복판에 발가벗고 서 있는 듯한 기분은, 승지를 비롯한 금룡대 모두가 느끼는 것이었다. 그제까지 세상 다 산 얼굴로 바닥만 내려다보던 기하를 힐끗 쳐다본 황제는 따뜻한 김이 오르는 찻잔을 저만치 밀어내며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차도 마시지 않을 셈이면 그만 올라가.”
“예.”
어찌 저렇게 냉랭하시단 말인가. 승지는 저도 모르게 혀를 차려다가 눈을 부릅뜨는 황제에게 움찔 놀라 고개를 돌렸다. 금세 자리에서 일어나는 기하를 따르는 서엽에게 연신 눈짓을 해도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아 속이 탔다.
“어찌 이러십니까?”
“내가 뭘.”
“어차피 예서 묵기로 하신 거면 아이들 몇 붙여 저자 구경도 하시게 하시지. 해도 아직 안 떨어졌습니다.”
“쓸데없는 짓이다. 애도 아니고 저자 구경은.”
“나리께서도 좋아하시지 않으십니까.”
사람이란 무릇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고 늘 말씀하시던 것이 누구시던가. 특히나 봄철의 고원 저자는 규모가 수도성과 맞먹게 컸다. 아니 오히려 더 크고 화려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풍부한 곡식을 비롯한 먹을거리, 화려한 비단, 갖가지 장신구를 비롯하여 밤이 되면 온갖 신기한 구경거리가 가득했다. 하여 일부러 이 시기를 맞춰 먼 곳에서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도 부지기수 아닌가. 덕분에 오늘도 웃돈까지 얹어 주고 겨우겨우 객잔을 잡은 것이고.
“괜히 나돌아 다니다 사달 나지. 몸도 성치 않은 것이 채신머리없게 어딜 빨빨대고 돌아다니려 해.”
“기왕 마음 풀어주시기로 하신 김에, 조금 더 너그러워지시면 오죽 좋습니까?”
“뭐야, 이놈아?”
“그렇잖습니까. 답답한 황궁 생활에, 기껏 내켜 하지도 않으시던 분 예까지 모시고 오셨으면, 하고 싶은 거 하나 정도는 들어주셔도 되지 않습니까.”
“허튼 바람이나 들지.”
“도련님이 어디 그러실 분이십니까?”
아니 대체, 저깟 게 뭘 그리 잘 안다고 계속 떠드는 것이야? 도련님이 그러실 분이 아니라고? 무빈이 그럴 이가 맞고 아니고를 제가 뭐로 판단하는 것인데?
“너 언제부터 그리 저 아이에 대해 잘 알게 됐느냐?”
“뭐가 언제부텁니까? 영빈처럼 속내 시커먼 분도 아니신데, 척 하면 척이지요. 몸도 성치 않으신 분이 끼니도 거르시고, 어깨 축 늘어진 것 보십시오. 나리께서는 도련님이 가엾지도 않으십니까?”
가만 듣고 있으려니 부아가 치밀었다. 도대체가 이놈은 누구를 위해 사는 것인지 말끝마다 도련님이, 도련님이. 뭐 그리 애틋한 사이라고 자꾸 도련님 타령이야?
“어디 가십니까?”
“네놈 얼굴 보고 있으려니 짜증이 나서 올라가련다.”
옷깃을 탁 치며 일어선 황제의 서늘한 표정에 후다닥 몸을 일으킨 금룡대가 그의 뒤를 따랐다. 인파로 북적이는 1층을 가로질러 조용히 쉴 수 있는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밟고 올라서는 황제의 뒷모습에, 승지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어째 우리 폐하께선 날이 갈수록 이상하게 변하시는 것 같단 말이지. 불쌍하신 무빈마마, 솔직하지 못하신 폐하 때문에 고생이 참 많으십니다.
기하는 침상 위에 올라앉아 무릎을 구부린 채로 몸을 웅크리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아직 날이 저물지 않아 환한 바깥의 창문을 열어 놓으니, 왁자지껄한 사람들 소리가 섞여 들어왔다. 황제는 무심한 얼굴로 창가로 걸어가 겹겹으로 되어 있는 창문을 모두 닫았다.
“어찌 벌써 들어오십니까?”
“왜. 내가 들어와서 싫으냐?”
“아닙니다. 곤하십니까?”
“신경 쓸 것 없다.”
“예…….”
금세 시무룩해지는 얼굴로 다시 몸을 웅크리는 기하를 보니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사내놈이 그깟 저자 구경하지 말랬다고 식사도 거르고 꽁해서 앉아 있다니. 꼴에 사내에게 시집왔다고 계집 노릇을 하다 보니, 정녕 계집이 된 것인지 뭔지.
“내일 일찍 출발할 테니 적당히 쉬어.”
“예.”
초원에서 숨을 돌리며 서 중랑과 시시덕거릴 때는 방긋거리며 잘도 웃더니, 이제는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만 한다. 저것이 가만 보면 사람 기분을 아주 늘어뜨렸다 잡아당겼다, 제멋대로 구는 구석이 있다. 일부러 빨리 달리지도 않고 고원까지 빙 돌아오는 일정에 감사는 못 할망정.
“흐음…….”
한숨 소리가 길기도 하다. 우두커니 앉아 침상 끄트머리만 쳐다보며 깊은숨을 내쉬는 기하의 머리카락이 축 늘어졌다. 상처 부위가 간지러운지 자꾸만 손을 올려 만지려 드는 것을 바라보던 황제가 기하를 불렀다.
“예?”
“가려워도 만지면 아니 된다.”
“아… 예. 저도 모르게 그만.”
“어디 좀 보자.”
태의를 먼저 수도로 돌려보낸 후, 기하의 상처는 서엽이 살피고 있었다. 다행히 찢어진 부위가 잘 아물어 크게 덧나지만 않으면 괜찮을 거라는데도, 황제는 기하가 상처를 치료할 때마다 얼굴을 찌푸렸다. 출발하기 전에 분명 상처를 보게 하였는데, 어느덧 하얀 천이 불그스름하게 변해 있었다.
“이 꼴을 하고 가긴 어딜 가.”
기하는 말이 없었다. 타박할 때마다 일부러 더 대들고 말대꾸하는 그의 습관을 알고 있어서 황제는 삐죽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런데도 도통 고개를 들 생각도 하지 않고 입을 열지도 않는다.
“내 말 듣고 있는 것이냐?”
“예.”
“한데 왜 말이 없어?”
“말대꾸하는 거 싫어하시지 않습니까.”
기운 없는 기하의 음성에 황제는 입을 다물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밥을 안 먹고 기운이 없어 그런지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는 꼴이, 꼭 크게 야단맞아 풀죽은 어린 황자와 같았다.
“그리 가고 싶으냐?”
“어딜 말입니까?”
“저자 말이다. 그리 가고 싶으냐고.”
“아… 아닙니다. 이런 곳은 처음이라 궁금하였사온데, 폐하께서 하지 말라시면 당연히 그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더는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말은 그럴싸하게 하고 표정은 가관이구나. 여우 같은 것.”
“예?”
“일어나라. 어두워지기 전에 잠깐 돌아보고 오도록 해.”
“참말이십니까?”
금세 화색이 도는 얼굴을 보니 더더욱 기가 막혔다. 조금 전까지 다 죽어가는 얼굴이더니만. 어린 것, 철딱서니 없는 것.
“너 혼자는 안 돼.”
“당연합니다. 서 중랑과 함께 갈 것입니다.”
“짐도 함께 간다.”
“예? 폐하께서도 함께요?”
“왜, 아니 되느냐?”
“아니, 그것은 아니지만. 폐하께서 가시면 금룡대도 줄줄이 붙을 것이고…….”
“그것은 네가 신경 쓸 것 없으니 일어나. 잠시 돌아보는 거다. 쓸데없는 짓 하면 바로 들어올 것이야. 알았느냐?”
“예.”
방긋 웃는 얼굴을 보니 헛웃음이 터진다. 그래, 아무리 그래도 기운 없이 웅크리고 있는 것보다야 낫겠지. 승지 말대로 몸도 성치 않은 것, 마음까지 뿌옇게 흐릴 필요가 뭐가 있을까.
“얼른 가십시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지나치게 밝아진 얼굴을 마주하려니 은근슬쩍 부아가 치밀어 오르려 한다. 이쯤 해야지. 저자의 밤은 오랜만이니. 그래, 그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생글생글 웃으며 저자를 활보하는 기하의 뒤에서 걷던 황제가 한숨을 내쉬었다. 저것이 대체 채신머리없이 어찌 저렇게 비 맞은 똥개처럼 뛰어다닌단 말인가.
“이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노루, 요것은 꿩, 이건 닭, 저기 그건 돼지요. 취향대로 골라 자시면 되오.”
노릇노릇 구워지는 꼬치구이를 보자 식욕이 도는지, 입안에 고인 침을 꿀꺽 삼킨 기하가 슬그머니 뒤를 돌아봤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황제 일행이 그의 뒤에 서자, 주인장은 활기차게 인사하며 습관처럼 손바닥을 비볐다.
“가장 많이 팔리는 게 뭐요?”
“오늘은 특히 노루가 맛 좋습니다. 어린놈으로 잡아서 살이 부드럽고 담백하지요. 하나씩 드셔 보시렵니까?”
저, 저, 눈에 띄게 움찔거리는 걸 봐라. 어디 며칠 굶은 것처럼 침을 꿀떡꿀떡 삼키고 있으니 창피해서 원.
“집어 봐.”
보다 못해 슬쩍 턱짓하며 중얼거리자, 눈이 반짝거린다. 입맛 없다며 밥상을 그대로 물린 것이 얼마나 지났다고. 저것이 대체 언제 철이 들려는지.
“우와, 정말 맛있습니다. 나리, 드셔 보시겠습니까?”
“됐다.”
“왜요, 한 번 드셔 보십시오.”
기다란 꼬치를 덥석 내미는 기하의 얼굴은 지나치게 천진했다. 만약 궁에서 날카로운 꼬챙이를 제게 내밀었다면 크게 경을 쳤을 텐데, 마음이 눈에 보이니 모르는 척 눈감아 주기로 했다.
“아, 하십시오.”
소금을 뿌려 짭짤한 고기가 금세 입안으로 들어온다. 담백한 맛이 제법 좋아 천천히 씹으니, 저도 얼른 하나를 입에 넣고 또 먹으라며 채근이다. 워낙 살살 맞은 성격이었던 것 같은데, 오랜만에 저렇게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니 측은한 마음이 든다. 이게 뭐라고. 고작 꼬치구이 하나에 저리 웃어.
“다른 것도 먹어 봐라.”
“그래도 됩니까?”
“저녁도 거르지 않았느냐. 다른 곳도 돌아봐야 하니 적당히 맛보고 가자.”
“예.”
이번에는 부드러운 닭고기 꼬치를 집어 얼른 맛을 보고는 눈을 크게 뜬다. 솔직한 반응에 웃음이 나려는 걸 달게 삼키며 주위를 둘러보자, 곁을 지키고 있던 그림자 넷이 얼른 표정을 갈무리한다.
“뭘 실실 쪼개고 있어?”
“송구하옵니다.”
황제의 따끔한 음성에 얼굴을 굳힌 그림자에게 기하가 불쑥 다가갔다.
“이 교위도 이것 한 번 맛보게.”
“아, 아닙니다. 소인은 되었습니다, 도련님.”
“자네 닭고기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나? 얼른, 맛이 좋다니까.”
손까지 저어가며 한사코 거절하는 이 교위의 얼굴이 점점 굳어지는데도, 기하는 굳이 그의 입술 앞으로 꼬치를 내밀었다. 이제는 슬슬 날이 어두워지려 하자, 거리의 크고 작은 주점에서 형형색색의 불을 밝힌다.
“어때, 맛있지?”
덜덜 떨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이 교위의 눈은 어김없이 황제를 향했다. 저렇게 무섭게 쳐다보실 것은 다 뭐람. 인제 나는 죽은 목숨이다 싶어 눈을 질끈 감은 이 교위는 불편한 얼굴로 시선을 돌리는 황제를 피해 뻘뻘 나는 땀을 닦았다.
“그쯤 먹었으면 다른 곳도 가 봐.”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어딜 갈까 물색하는 기하의 뒤로 승지가 슬그머니 다가갔다. 꼬치 값을 치르고 주인장의 인사에 답하며 배시시 웃는 그는 무척 행복한 듯 연신 미소 지었다.
여전히 한 손에는 커다란 꼬치를 들고 어딜 갈까 고민하는 모습은 어린 황자도 드러내지 않는 천진함이었기에, 승지의 속은 점점 까맣게 탔다.
연신 옆구리며 어깨를 쳐도 목석같은 서엽은 말귀를 알아먹지도 못하고, 그나마 기분 좋게 나오셨던 황제의 표정은 점점 딱딱해져만 갔다. 저 쓸데없이 우직한 그림자 놈들은 왜 거기 서 있어서 꼬치까지 받아 처먹고 있느냔 말이다!
“이것은 뭡니까?”
“꽃사탕이라는 겁니다. 꽃사탕을 모르시니 여기 분은 아니신가 봅니다.”
수수한 차림의 주인장은 인심 좋은 얼굴로 기하에게 납작하고 딱딱한 덩어리를 내밀었다. 그것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기하는 코끝을 누르는 향긋하고 달콤한 냄새에 침을 꿀꺽 삼키고는 얼른 입을 벌렸다.
달다. 달콤했다. 입안에 착 달라붙는 달콤함에 어깨가 부르르 떨릴 지경이었다. 모양도 예쁜 것이, 맛도 이리 좋다니. 당과와 비슷한 느낌인데, 그것보다 훨씬 달콤하고 과일 향도 나는 것이 자꾸 침이 돌았다.
“우와, 정말 맛있습니다.”
“그렇습죠? 서역에서 들여온 기술로 소인이 직접 만든 것입니다.”
“맛이 다 다릅니까?”
“예. 과일과 식용 꽃잎으로 색을 낸 거라 맛이 전부 다릅니다. 한 봉지 드릴까요?”
색이 예뻤다. 무엇보다 맛이 좋았다. 단걸 좋아하는 정연군에게 하나씩 주면 정말 좋아할 것 같은데.
“그럼 여기 이것들 전부 하나씩…, 아니 두 개씩 담아주시오.”
정연군 혼자만 먹게 할 순 없으니까, 사이좋게 나눠 먹어야지. 현 상궁도 마음에 걸리는데. 현 상궁이 단것을 좋아했던가. 당과 같은 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은 것 같았는데. 하지만 이건 색다른 맛이니까 하나씩 맛보게 해도 좋을 것 같다. 아직 어린 소현이, 연금이도 좋아할 테고. 황후마마께서는 이런 음식을 입에 대지 않으시니 그냥 두더라도…….
“저, 이거랑 이거랑 이거는 다섯 개씩 담아주시오.”
“예, 도련님.”
“뭘 그리 많이 사느냐.”
“골고루 나눠 먹으려고요.”
“단걸 많이 먹으면 이가 상한다지 않아? 뭐 좋은 것이라고 그리 사?”
“아껴 먹을 것입니다.”
사지 말라는 말을 저렇게 돌려 말씀하시는 폐하나, 그걸 아주 못 들은 척 자기 고집만 피우시는 마마나, 어찌 두 분이 궁 밖에선 저렇게 다른 모습이신지. 혹, 산채에서 머무실 때 무슨 일이 있으셨던가.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승지는 주머니에서 전낭을 꺼내며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것은 내가 직접 살 겁니다.”
“예? 도련님께서 어찌……. 전낭 주머니도 가져오지 않으시고…….”
“서엽에게 있습니다. 서엽, 얼른 계산해.”
주인이 부르는 대로 값을 치르는 서엽은 흥정의 히읗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이렇게나 많이 샀는데도 깎아 달라거나, 덤을 더 달라는 말도 하지 않는 그를 한심하게 쳐다보던 승지가 주인장을 툭 건드렸다.
“덤은 없소?”
“다른 가게보다 월등히 싸게 파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리 많이 샀지 않소. 저 친구는 전낭 주머니가 텅텅 빌 지경이오.”
“한철 겨우 벌어 먹고사는 장사치에게 너무들 하십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꽃사탕 몇 개를 더 담아주는 주인장의 표정이 좋았다. 덕분에 입이 귀에 걸리는 기하를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인 승지는, 뻔뻔한 얼굴로 황제를 향해 다가가다가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왜 또 저렇게 무서운 얼굴을 하신단 말인가.
“주인장이 마음씨가 좋습니다. 이렇게나 많이 줬습니다.”
단내가 폴폴 풍기는 것을 직접 들고 다가온 기하의 웃는 얼굴에도 황제는 굳은 얼굴을 풀 줄 몰랐다. 화려한 무늬의 꽃사탕을 입안 이리저리 굴리던 기하는 그런 황제에게 가장 빛깔이 좋은 것을 찾아내 내밀었다.
“드십시오.”
“됐다.”
“달고 맛있습니다.”
“단 건 너나 좋아하지, 애처럼.”
말투가 퉁명스러운 것이야 하루 이틀 겪는 일도 아니지만, 어째 황제의 표정이 지나치게 딱딱하고 싸늘했다. 혹시 제가 무슨 잘못한 일이 있나 싶어 곰곰이 생각해 봐도, 그 잠깐 사이에 뭔가를 한 것 같진 않은데. 너무 시간을 오래 지체했던 건가. 아니면 채신머리없이 행동해서 역정이 나신 것인가.
“그만 들어갈까요?”
저자 구경은커녕 겨우 꼬치로 요기하고, 꽃사탕 산 게 전부인 기하의 얼굴에선 아쉬움이 진득하니 묻어났다.
아랫것들한테 웃음이나 실실 흘리고 직접 먹여주기까지 하다니, 도대체가 제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아무리 천둥벌거숭이로 자랐다 해도 그래도 명색이 제국의 빈이 아니던가.
“이만 들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저자 구경은 이만하면 충분합니다. 황자에게 줄 선물도 샀고요.”
귀한 보물이라도 되는 양 사탕 봉지를 품에 꼭 끌어안은 꼴을 보니 속이 터질 것 같다. 값비싼 폐물(幣物)이나 금은보화도 아니거늘. 고작 사탕 하나에 뭐가 저리 들떠서는.
게다가 거짓말을 하려거든, 좀 더 그럴싸한 표정으로 해야지. 도살장 끌려가는 소 같은 표정을 하고 가자 하면, 아랫것들 앞에서 체면이 뭐가 되느냐는 말이다.
“왜, 더 둘러보지 않고.”
“괜찮습니다. 내일 일찍 출발한다고 하셨으니 다들 쉬어야지요.”
전등에 비친 기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황제가 먼저 등을 돌렸다. 아마 달이 높게 떠오르면 불꽃놀이가 시작될 것이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빈번히 사고가 발생하니, 그보다는 객잔으로 돌아가 창문을 열어놓고 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어차피 불꽃놀이 같은 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테니, 저자 구경 대신 그것이나 시켜주자는 생각을 하며 황제는 걸음을 빨리했다. 그 순간이었다.
“아이쿠, 거 앞 좀 똑바로 보고 다니쇼!”
“멀쩡히 가는 사람 치고 지나간 게 누군데 큰소립니까?”
그것은 꽤 억울한 목소리였다. 괄괄한 사내의 음성에 황제가 반사적으로 몸을 틀었을 때는, 이미 승지와 서엽이 넘어진 기하를 일으키고 있었다.
“이 양반이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이보시오, 도련님. 잘 가는 이는 나였고, 제대로 앞도 안 보고 온 게 누구요? 응? 보아하니 외부인 같은데, 바쁜 사람한테 시비 걸지 말고 썩 저리 꺼지시오. 에잇, 재수 없어.”
손을 탈탈 털며 침을 탁 뱉은 사내가 다시 돌아서기 전, 그의 어깨를 잡아챈 기하는 공중으로 가볍게 뛰어올라 그의 배를 걷어차고 널브러진 어깨를 지그시 발로 눌렀다.
“아이쿠, 아이쿠 나 죽네!”
“사람을 쳤으면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하는 것이 첫 번째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이라면 나도 이리하진 않아.”
“이보시오! 귀족이면 다요? 왜 무턱대고 사람을 치고 난리요! 아이고, 나 죽네, 아이고 나 죽네!”
뒹굴뒹굴 땅을 구르며 울부짖는 사내의 행동에 기하의 표정이 일순 더 구겨졌다. 점점 주위로 모여드는 인파의 수군거림이 느껴지자 긴 한숨을 내쉰 기하가 다시 입을 열려 할 때였다.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은데, 엄살 그만 피우고 일어나지 그러나.”
다가온 황제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차분하고 고요했다. 순간적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은 황제는 고고한 표정으로 바닥을 뒹구는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억울함이 가득한 표정이나 눈물을 찍어 바른 얼굴이 가관도 아니었다.
“나리! 소인은 너무 억울합니다! 저 치가 분명 먼저 시비를 걸었사온데, 다짜고짜 소인을 걷어찼습니다. 아이고, 아이고 다리야, 허리야. 어디가 똑 부러진 것 같네, 아이고. 아이고!”
“내 보기엔 내 처가 그리 세게 걷어찬 것 같지는 않은데.”
“예? 처…요?”
“이 아이가 어릴 때 시집와 바깥구경을 자주 못 하여서 철이 없다. 그 부분은 내 사과하도록 하지.”
붉으락푸르락 얼굴이 변하는 것은 사내나 기하나 마찬가지였다.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어 저러시나.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모여든 곳에서 얼마나 더한 창피를 주시려고.
“한데, 내 처가 그리 품행이 방정치 못한 이는 아니라서 말이다. 혹, 내 처에게 흑심을 품고 일부러 부딪친 것은 아니냐?”
“예? 천부당만부당한 일입니다! 소인은 절대로 그런 짓을…….”
“분명 일부러 와서 어깨를 부딪쳤습니다. 사람들이 모여든 틈을 타서 전낭 주머니까지 털려고 하는 것을 내 분명 보았는데 어디서 발뺌이냐?”
급기야 바락 소리를 지른 기하의 말에 서엽은 그제야 텅 빈 제 전낭 주머니를 뒤적이며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멀쩡히 가는 사내의 배를 걷어차는 순간부터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거늘.
“그렇다는데?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고요한 황제의 음성에 사내가 움찔 떨며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저자는 하루에도 무수히 많은 사람이 오가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시비를 걸어와 돈을 뜯거나, 전낭 주머니를 털어 가는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그제야 주변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던지며 사내를 에워쌌다. 작년에 내 전낭 주머니를 털어 간 것도 네놈 짓이냐는 둥, 어쩐지 아까부터 이 주위를 뱅뱅 맴돌면서 보는 게 기분이 나빴다는 둥, 사내를 붙잡아 이리저리 흔들며 주먹질하는 인파를 바라보던 황제가 기하를 불렀다.
“그만 가자.”
“…예.”
객잔으로 돌아가면 분명 화를 내실 거다. 한데 그보다, 이미 흙먼지를 뒤집어쓴 꽃사탕이 눈에 밟혀 발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분명 정연군이 좋아했을 텐데.
서엽도 전낭 주머니가 털려 이제는 정말 한 푼도 남아있지 않을 것인데, 어쩐다. 선물을 사 가겠다고 황자에게 서찰까지 남겨 놓았건만, 거짓말을 하게 되었구나. 이번 사냥에는 변변하게 잡은 것 하나 없는데, 이를 어쩐다.
“왜 또 시든 얼굴이냐?”
“소란을 피워 송구합니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니 되었다. 그것보다 빨리빨리 걸어라. 이러다 늦겠다.”
“예? 늦다니요?”
“해가 저물지 않았느냐. 빨리 걸어.”
“예…….”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아이들과 화려한 저자 풍경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려 제대로 걷지 못해 기하는 사람들에게 치여 이리저리 휘청거렸다. 서엽이 그 옆을 지키고 있다고는 하나, 워낙에 인파가 많아 그마저 쉽지 않았다. 더욱이 모두 무슨 재미난 구경거리라도 있는지 모두 한 방향으로 움직이니, 그 사이를 헤치는 것이 퍽 버거웠다.
“걸음도 제대로 못 걷느냐.”
퉁명스러운 음성과 달리 따뜻한 체온이었다. 기하의 손목을 단단히 붙든 황제가 어깨를 안고 요령껏 사람들 사이를 헤쳐 갔다. 갑작스러운 황제의 배려에 그저 눈만 깜빡거리던 기하는 점점 가까워지는 체온에 순간적으로 몸을 뻣뻣하게 굳히다가 몇 번이나 넘어질 뻔하였다.
“편히 쉬십시오.”
문밖을 단단히 지키는 금룡대의 인사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온 기하는 그제야 긴 한숨을 내쉬며 뜨끈뜨끈한 얼굴을 문질렀다.
저자로 향하기 전에는 꽉 차 있던 객잔이 어쩐 일인지 텅텅 비어 있어 수월하게 움직일 수 있었는데도, 황제는 방 안으로 들어오기 전까지 기하의 손을 놓지 않았다.
“이쪽으로 와라.”
기하는 가볍게 손짓하는 황제를 홀린 듯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니 아까도 놀림조였지만 분명히 처라고 하시었고, 잘못이 있다면 대신 사과한다는 말씀까지 하셨다. 물론 잘못이 없다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에 찬 표정이 먼저 보였지만.
“뭐 해, 오라니까.”
“예.”
혹여 이제 잘못을 타박하시려나 싶어 쭈뼛거리며 앞으로 다가가니, 두 겹으로 된 창문이 차례로 열렸다.
“우와…….”
그곳에선 저자의 풍경이 한눈에 보였다. 알록달록한 천막 아래로 늘어선 상점과 부지런히 오가는 인파, 뛰어노는 아이들이 그림처럼 행복해 보였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하는 갑자기 등 뒤로 팔을 둘러 제 두 귀를 직접 막아주는 황제의 커다란 손에 고개를 돌렸다.
“폐하?”
대답 대신 가볍게 턱짓한 황제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팡, 팡.
커다란 소리와 함께 하늘 위를 예쁘게 물들이는 불꽃을 바라보며 기하는 입을 쩍 벌렸다. 말로만 들어 보았던 불꽃이었다.
“터지는 소리가 크다.”
슬쩍 귀를 막은 손을 떼어내는 황제의 목소리가 가까웠다. 그의 말처럼 귀를 막았을 때보다 훨씬 큰 소리에, 기하는 불꽃이 그려질 때마다 움찔움찔 놀라면서도 눈을 떼지 못했다.
“예쁩니다…….”
“신기하냐?”
“예. 말로만 들었었는데…….”
사람들이 환호하며 박수 치는 소리가 환상처럼 느껴졌다. 제가 지금 서 있는 이곳이, 가슴 충만하게 느껴지는 따뜻함이 무엇 때문인지 이제야 비로소 알 것만 같았다.
새로운 풍경을 보아서도, 자유를 만끽해서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이 모든 것을 연모(戀慕)하는 이와 함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지난 며칠간, 함께해준 황제의 체온이 이제는 익숙해져 버릴까 봐 두려웠다. 다시 혼자가 되었을 때, 더는 견디지 못할까 봐, 그게 가장 두려웠다.
“가장 유명한 것은 저자의 불꽃이다. 이것을 보려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이야.”
“신기합니다. 하늘에 그림이 그려지는 것이요. 색깔도 예쁘고, 별이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얼굴까지 붉게 물들이며 중얼거리는 기하를 바라보면서 황제는 미소했다. 때론 지나치게 당돌하고 솔직하여 사람을 당황하게 하더니, 이럴 때는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한 아이 같은 얼굴로 다가온다.
처음에는 익숙지 않았고, 차츰 바라보며 어느 것이 진실 된 얼굴인지 궁금해졌고, 지금은 아무런 의심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폐하.”
대답 대신 바라보는 황제의 시선을 가만히 응시하며 기하는 연신 입술을 달싹였다.
“내일이면 환궁하게 되니, 아마 이런 일은 또 없겠지요?”
아마, 그럴 것이다. 이렇게 황제를 오롯이 독차지하는 일 같은 건, 한낮의 꿈처럼 달면서도 너무도 짧아 허무한 것이리라.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뭐냐.”
“전에, 불러주셨잖아요.”
“뭘.”
“이름, 말입니다.”
펑. 펑.
이번에는 더더욱 화려한 오색 불꽃이 하늘에 긴 그림자를 만들었다. 별의 눈물처럼 사그라져 가는 풍경이 꼭 제 마음 같다. 가장 아름답게 꽃 피웠다가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할.
“한 번만 더, 불러주시면 아니 됩니까?”
“너는 참.”
“딱, 한 번만요.”
“그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황제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폐…….”
“기하야.”
빙긋이 웃는다. 만개한 수선화처럼, 뿌옇게 차오른 눈물을 애써 감추며 활짝 웃는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해 보였다. 그 때문이었다.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간 황제가 기하의 어깨를 살며시 끌어안았다.
“불렀으면 대답을 해야지.”
“…….”
“기하야.”
“…예, 폐하.”
그것은 어떤 꿈이었나. 깨어나면 모두 부질없어질 환몽이었나. 아니면, 내내 돌이켜 보며 곱씹을 때마다 웃게 할 따뜻한 바람이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