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장 외출(外出)
황자는 무릎을 꿇고 앉아 잘못을 빌었다. 삐죽거리는 입매와 눈에 그렁그렁한 눈물에 잠시 마음이 약해졌던 기하는 엄하게 표정을 바꾸고 아이를 바라봤다.
“잘못해쯥니다.”
뚝 떨어진 눈물이 정연의 조그마한 손등을 적셨다.
“뭘 잘못했습니까?”
“장난이었는데. 재밌는 거라고…….”
“그것은 누가 시킨 것입니까?”
“잘못…….”
“똑바로 말해요, 황자. 누가 영과 달에게 돌을 던지고 활을 쏘라 했습니까?”
눈물을 뚝뚝 흘리던 아이는 당장 기하의 품에 안기려 했다. 그러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그를 바라보고는, 금세 제 손등으로 눈물을 문질러 닦았다.
“황자는 두 가지 잘못을 했습니다. 첫째로, 말 못 하는 짐승에게 돌을 던지고 활을 쏘았어요. 영이는 눈을 다쳤습니다. 이제는 한쪽 눈밖에 쓰지 못할 겁니다.”
날카로운 짐승의 울음소리에 달려 나갔을 땐, 이미 일이 벌어진 뒤였다. 먼저 뛰쳐나간 서엽이 황자를 감싸 안았기에 망정이지, 자칫했으면 화가 난 짐승들에게 크게 변을 당할 뻔한 아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나마 둘 중에서 순한 영은 황자가 던진 돌에 맞아 한쪽 눈에서 피를 흘리며 낑낑거리고 울부짖었다. 사납게 날뛰는 달이를 겨우 진정시키고 황자를 안으로 끌고 들어왔을 때에, 아이는 놀라 벌벌 떨면서도 무엇을 잘못했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아마 서 중랑이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달이가 달려들어 황자 또한 크게 다쳤을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압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아이를 바라보고 있자니 더는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분명 그것이 잘못인 줄 아는 얼굴로 어찌 그런 무시무시한 일을 벌였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었다.
“현님이, 재미있다고……. 괴물 무찌르면, 계속 같이 놀아준다고…….”
“됐습니다. 알았으니, 황자는 그만 동복궁으로 돌아가세요.”
“마마. 잘못해쪄요. 이제 안 할게요. 현님이 시켜도 안 할게요. 영이, 달이, 안 때릴게요.”
제게 다가오는 권 상궁의 손을 뿌리치며, 황자는 기하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서럽게 흐르는 눈물을 연신 닦아내며 품 안으로 파고드는 정연을 바라보던 기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린아이의 선택이란 그런 것이지. 요 며칠간 유난히 일황자와 어울린다는 얘길 전해 듣고, 잘된 일이라 생각했는데.
“권 상궁, 황자 저하 모셔가게.”
“마마, 마마.”
마음이 아파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잘못을 고하는 아이에게 책망 어린 마음이 들까 싶어, 그것을 참아내지도 못했다. 어리석고 조악한 마음이었다.
괴로운 신음을 토해내며 울부짖던 영이도 자꾸 생각나고, 사납게 짖어대던 달이도 걱정되고. 무엇보다 제가 무슨 짓을 벌였는지 뒤늦게 깨닫고 우는 아이 또한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아서, 그저 괴로웠다.
“정연.”
“마마.”
“어찌 그랬습니까.”
“현님이…….”
“그래도 그래서는 아니 되지. 영과 달도 정연의 친구인데, 응?”
“응……. 잘못… 흑, 흐윽.”
“괜찮다, 괜찮아. 이제 아니 그러면 된다.”
서럽게 울기 시작하는 정연군을 결국엔 끌어안았다. 아이는 그저 무섭게 화를 내던 기하가 품을 내어 줬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얻으며 잘못을 고했다.
마음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이 아이를, 제 식구들을, 그 모든 것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연신 한숨을 내쉬는 기하를 현 상궁은 걱정 어린 얼굴로 바라봤다. 서엽이 데려온 궁의는 짐승을 잘 치료한다고 했다. 사납게 날뛰던 달이를 겨우 진정시키고 피가 줄줄 흐르는 영을 치료할 때, 슬쩍 고개를 돌리며 눈물을 훔쳐내는 기하를 모두가 모르는 체했다.
“마마, 일찍 침수 드셔야지요. 새벽에 출발하신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현 상궁.”
“예, 마마.”
“아무래도 안 되겠어. 폐하께 말씀 올리고 이번에는 가지 않는 것이 좋겠네.”
“예? 아니 됩니다. 당장 몇 시간 후에 출발하셔야 합니다. 폐하께서 특별히 마마를 생각하신 일이 아닙니까.”
“마음이 내키지 않아.”
약에 취해 잠든 영이는 이따금 낑낑거렸다. 무서운 꿈이라도 꾸는지, 아니면 잠들었음에도 아픔이 느껴지는 것인지. 영이가 칭얼댈 때마다 움찔거리는 달이를 토닥이며 기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를 탓하지도 못하겠고, 그래서 마음은 더 괴로웠다. 실컷 울다 지쳐 잠든 정연을 동복궁으로 돌려보낸 후에야 영과 달을 처소 안으로 들이고, 치료하는 것을 지켜봤다.
조그마한 아이가 했다기에는 너무도 잔인했다. 그런 크고 날카로운 돌을 어디서 구했는지, 평소 황자에게 살갑게 구는 영이가 가까이 있어 상처가 더 깊은 것이라는 궁의의 설명에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황자도 걱정되고, 달이 상태도 좋지 않으니 내가 옆에 있어 주는 게 좋을 것 같아.”
“마마.”
“혹여 아나? 정성 들여 치료하면 영이 눈도 조금 더 빨리 나을지.”
“한쪽 눈은 무사하다 했습니다. 사냥하러 다니는 아이들도 아니니 괜찮을 것입니다. 앞으로 소인이 더 잘 돌보겠습니다.”
“현 상궁 말을 들을 걸 그랬어. 애초에 저 아이들, 황궁에서 기를 수 없는 아이들인데. 내가 괜한 욕심을 부린 것 같아.”
“몇 번이나 돌려보내려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때마다 졸졸 따르고 우는 것들을 어찌 버리고 온단 말입니까. 마마 잘못이 아닙니다. 황자께서도 일황자 저하의 꾐에 넘어가신 것 아닙니까? 저놈들이 오죽 사나워야 말이지요. 신기해서 그러셨을 겁니다. 그뿐입니다.”
제 손으로 저 아이들의 어미를 쏴 죽였다. 금방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짐승이었으나, 새끼를 두고 차마 떠나지 못하는 눈을 보면서도 활을 당겼다. 왜 자꾸만 그날이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며칠이나 궁을 비우는 것은…….”
“마마.”
현 상궁이 단호한 음성으로 기하를 부르며 그의 손을 붙잡았다. 정신이 다른 데 빠져 있는 듯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이전처럼 금세 눈앞에서 쓰러질 것만 같아 측은한 마음이 앞섰다. 지나치게 잔정이 많아 자신보다는 다른 것을 더 생각하는 상전의 마음을, 어리석게 너무도 늦게 알아챘다.
“다 괜찮습니다. 영과 달도, 황자 저하도, 모두 괜찮습니다.”
“하지만…….”
“지금 가장 중한 것은 마마의 건강입니다. 이제 조금 나아지셨을 뿐이지, 완쾌되신 것이 아닙니다. 이리 걱정만 달고 사시면 금세 다시 나빠지신다 하지 않았습니까. 바람 쐬고 오셔요. 맛난 것도 드시고, 좋은 것도 보시고, 이곳 걱정은 덜어 두십시오. 말 타고 활 쏘는 거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이번엔 서 중랑도 함께 가니, 소인은 마마 걱정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손등을 토닥이는 현 상궁을 바라보다 기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억지로 짜낸 웃음이 서글프게만 보여서, 그녀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기하의 어깨 위로 따뜻한 기수를 둘렀다.
“영이도 잠들었으니 눈 좀 붙이십시오. 이러시다 내일 말 위에서 조시겠습니다.”
따뜻했다. 어깨 위에 두른, 현 상궁의 마음이. 이제는 완전히 제 사람이 되어버린 듯, 발로 뛰고 말을 건네고 마음을 보인다. 그것에 익숙해지는 것은 그저 기쁘고, 고마울 뿐이었다.
“이번엔 꼭 여우를 잡아다가 자네에게 주겠네.”
“우리 마마 활 솜씨는 귀신도 못 따라간다고 하니, 소인 기대하고 있겠사옵니다.”
“너무 오랜만이라 손이 무뎌졌을 것이야. 그래도 애써 보겠네.”
“무리는 하지 마시옵소서. 폐하께도 조금 더 나긋나긋 대하시고요.”
“영빈처럼?”
“영빈마마야 지나치시지요. 소인이 보았을 때, 폐하께서는 영빈마마처럼 너무 알랑거리는 건 싫어하십니다. 그저 사람은 늘 진심입니다. 진심은 언젠가는 다 통합니다.”
차분히 머리를 빗겨주며 연신 말을 잇는 현 상궁의 음성을 자장가 삼아 들으며, 기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무거운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듯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정연군에게 미리 언질이라도 해놓을 것을. 한동안 바쁘게 움직이느라 도통 태화당에 들르지 못했기에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는데. 내일부터 며칠간 궁을 비울 것이라는 말을 하지 못한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마마, 이제 침수 드시어요.”
“응. 오늘은 영이와 함께 잘 것이니 불 넣지 말게.”
“예. 하면 저쪽 창가 등을 켜두겠습니다.”
보드라운 털을 쓰다듬으며 기하는 그대로 몸을 뉘었다. 등 뒤에서 낑낑 우는 달을 한 번 돌아보자, 금세 벌떡 일어나 헛발질을 한다. 거리가 멀어 차마 쓰다듬어 주지 못하는 것에 아쉬워하며, 기하는 다정하게 달에게 밤 인사를 건넸다.
금세 무거운 수마가 기하를 덮쳤다. 그날 밤은 오랜만에, 그리운 형님의 꿈을 꾸었다.
* * *
이른 새벽, 고요한 배웅을 받으며 출발한 이들은 황궁 근처 사냥터가 아닌 조금 더 먼 황제의 사유지로 향했다. 제위에 오르시기 전, 선황께 물려받으셨다는 그곳은 아름답고 산세가 깊어 외부와는 단절된 곳이라고 했다.
소소하게 마을을 이루고 있는 백성들이 전부인 땅에 발을 들이며, 기하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황궁에서 이토록 멀리 나온 것은 제국에 온 이후 처음이었다.
“마마, 지루하시지요?”
슬그머니 곁으로 다가온 승지는 터벅터벅 걷는 말고삐를 한 손으로 유유히 움켜쥐며 앞서가는 황제를 바라봤다. 기껏 바쁜 일정을 쪼개 특별히 명을 내리신 분께서 어찌 저리 앞만 보고 가시는지. 자고로 이렇게 한가하게 거닐 때 곁에서 다정한 말이라도 건네주시면 어디가 어때서.
“이제 곧 마을입니다. 마을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거처가 나올 것입니다. 이곳이 폐하의 사유지라는 것은 백성들도 모르고 있으니, 그들 앞에선 호칭에 주의하셔야 합니다.”
“하면, 폐하께는…….”
“무역하는 상단으로 알려졌으니, 나리라고 하시면 됩니다. 마마께는 도련님이라 하겠습니다.”
도련님이라는 호칭이 낯설어 기하는 방긋 웃었다. 이따금 신분을 숨기고 형님과 함께 저자에 나갈 때면 따르는 이들이 도련님, 하고 불렀었지. 그다지 자주는 아니었지만, 성 밖으로 나간다는 것 자체가 무척 신나는 일이었다.
“여기서 사냥을 할 수는 있습니까?”
“거처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짐승이 많습니다. 이곳이야말로 진정한 사냥터지요. 야생 짐승이 많으니 특별히 조심하셔야 합니다. 어두울 때는 절대로 나가시면 아니 됩니다. 멧돼지고 곰이고, 정처 없이 돌아다닌다 합니다.”
“여기 사는 백성들은 위험하겠습니다.”
“그들 모두 사냥 기술이 탁월하다고 합니다. 사실 소장이 은밀하게 지켜보는 이들이 몇 있사온데, 마마께서도 이번 기회에 같이 살펴봐 주십시오.”
“내가 보면 아나요.”
질끈 묶은 기하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풀거렸다. 황실에서 나온 값비싼 비단이 아닌, 저자에서 가져온 수수한 것을 입어도 워낙 귀태가 나서 귀족 가문의 도련님으로 보이는 기하를 멍하니 바라보던 승지는 다시 한 번 황제를 힐끔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저리 딱딱하시니, 도대체가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자네는 원래 그리 말이 없나?”
줄곧 기하의 왼쪽에 서서 말을 몰던 서엽이 고개를 힐끔 돌렸다. 싱글거리는 승지와 눈을 맞춘 그는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어이없는 듯한 기하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통 말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굴던 서엽은 처연한 얼굴로 말갈기를 갈무리하기 바빴다.
마을 사람들이 보였다. 그다지 길지 않는 황제의 행렬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이들은 대부분 우락부락한 사내들이었다. 아이도, 여인도 보이지 않은 삭막한 광경에 기하는 잠시 당황하며 슬그머니 승지를 불렀다. 누가 보아도 저들은 백성이라기보단 산적 떼에 가깝지 않은가. 시커먼 얼굴 하며 어깨에 멘 도낏자루, 서슬 퍼런 눈빛을 보니 점점 확신이 들었다.
“어찌 그러십니까, 도련님?”
“저들 말입니다.”
“어이쿠, 김 두령이 직접 나오셨나?”
멀찌감치 서 있는 거구의 사내를 향해 손을 흔들던 승지가 기하를 보며 눈을 찡긋했다. 대장이라니, 설마 그렇다면…….
“온다고 한 지가 언젠데 이제 도착이오? 굼벵이를 삶아 자셨나. 이리 느려 터져서 밥이나 빌어먹고 살겠소?”
사내의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귀가 먹먹할 정도였다. 얼굴에는 듬성듬성 칼자국이 있고, 덥수룩한 수염이 입을 다 가린 그는 구릿빛 피부를 죄 드러내며 헐벗은 상태였다.
“새벽부터 서둘러도 도착하면 이렇다니까. 그간 잘 계셨나?”
“코빼기도 비치지 않기에 칼 맞고 뒈진 줄 알았수다.”
“어허, 이 사람 참. 우리 나리께서 타고난 명이 얼마나 기신데 그런 쓸데없는 소릴 하시나?”
“오랜만에 뵙겠수다.”
유유히 말을 멈춘 황제를 향해 다가간 사내는 꾸벅 머리를 숙였다. 절대로 남에게 머리를 숙일 것 같지 않은 사내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던 기하는, 자신을 향해 하나둘씩 날아드는 시선에 얼굴을 붉혔다.
“거, 반반한 도련님은 처음 뵙소?”
“신경 꺼라, 이놈아.”
“오호라, 보아하니 나리 이거요?”
새끼손가락을 까딱까딱하는 사내의 말에 얼굴을 찌푸리기는커녕 픽 하고 웃음을 흘린 황제가 말에서 풀쩍 뛰어내렸다.
“아 것 참. 먼 길 오시면서 정인(情人)까지 대동하셨소? 그간 꽃 같은 정인 품에 안겨서 감감무소식이셨구먼?”
“어째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말이 많아? 계집이 귀하다더니 네놈이 계집 노릇을 하는 것이냐?”
“뭔 헛소리요? 잔말 말고 어서 안으로 드쇼. 점심은 자셨소? 식어빠진 토끼탕이 좀 남았는데, 시장하면 그거라도 드리리다.”
말은 그리 해도 내내 기다리며 식사 준비까지 살뜰하게 했을 사내라는 것을 안다. 제각기 서슬 퍼런 무기를 짊어진 이들이 사내를 따라 움직였다. 그들은 아직 말에서 내리지 않은 기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황제에게 시선을 돌렸다.
“잡아라.”
“혼자 내려갈 수 있습니다.”
정인이 어쩌고저쩌고 떠드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흘려들을 수는 없었다. 보통 이들도 아니고, 사람 놀리기를 우습게 아는 산적들이 아니던가. 그런 이들 앞에서 약하게 보일 이유도 없고, 또한 지금은 보는 이들이 지나치게 많았다.
“잡으라면 잡아.”
생전 안 하시던 짓을 왜 갑자기 하시는지는 모르겠으나, 황제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기하는 고삐를 내려놓으며 그대로 손을 내밀었다. 그저 슬쩍 잡는 시늉만 하는 줄 알았더니, 여인들에게 하듯 내려오는 허리를 잡아 품에 안는다.
“폐…….”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제 입을 막은 기하가 도르르 눈을 굴렸다. 실수였다. 혹여 들었으면 어쩌지. 사내들의 눈빛이 순식간에 달라졌는데.
“눈꼴시어서 원. 설마 내내 그리 붙어 계시려오?”
“이 아이가 낯을 가려. 네놈들 무시무시한 꼴을 보고 놀라지 않을 사람이 있더냐?”
“우리 꼴이 뭐가 어때서! 계집을 자주 못 봐 그렇지, 우리도 나리처럼 치장하면 열 계집이라고 따르지 않을 것 같소?”
“이보게, 내가 아무리 잘 봐도 그건 아닌 것 같네.”
승지의 진심 어린 표정에 사내의 얼굴이 단박에 굳었다. 어느덧 그 옆에 선 서엽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통감하는 표정을 짓자, 사내를 비롯한 이들은 흉흉한 눈빛을 빛내며 슬그머니 무기를 집어 들었다.
“시장하니 먹을 것이나 내와.”
여전히 기하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황제가 일갈했다. 팽팽한 사내들의 시선을 아무렇지 않게 물리치고, 황제는 기하를 향해 다시 손을 내밀었다. 이분이 대체 왜 이러시나. 평소와 지나치게 다르시니, 좋기보단 뭔가 찝찝하고 무서운 마음이 든다.
“나리, 저 혼자…….”
“몸도 약한 네가 혹여 무슨 일이 있을까 봐 그런다. 저들의 눈은 신경 쓰지 말고 들어가자꾸나.”
다정한 미소와 따뜻한 음색의 황제가 낯설었다. 낯설어도 너무 낯설었다. 늘 못났다 미련하다 타박이나 하시던 황제께서는 어디로 가셨나. 혹시 산의 정기가 황제 폐하의 시야를 어둡게 한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예를 들면 저를 다른 이로 착각하신다거나.
“멍하게 쳐다보지 말고 웃어라. 저들 눈치가 백 단이라 네가 그러고 있으면 금세 눈치챈다.”
그럼 그렇지. 황제 폐하가 어디 가셨나 했다. 그런데 그 말을 굳이 귓가에 대고 다정하게 속삭이실 필요가 있나. 따뜻한 입김이 귓가에 흩어지자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 떤 기하는 괜스레 얼굴을 붉혔다.
“이쪽으로 들어오소.”
보통 마을과 달리 집과 집이 연결된 구조를 신기하게 둘러보며, 기하는 곳곳에 놓인 짐승 가죽을 눈에 담았다. 이곳이야말로 진정한 사냥터라는 임승지의 말이 허튼소리는 아니었던 듯하다. 곰부터 시작해서 호랑이까지, 없는 것이 없었다.
“이야, 뭘 이렇게 많이 차렸나?”
“봄 아니오. 겨울에 온다 했으면 쫄쫄 굶겼겠지만, 짐승들도 나오고 먹고살 만하오.”
“곡식하고 채소 좀 실어 왔네. 닭도 몇 마리 가져왔는데.”
“날짐승이 금세 와서 잡아먹으니, 아예 오늘 밤 해치웁시다.”
와하하, 웃는 사내를 힐끔 쳐다본 황제는 너그럽게 웃으며 상석에 자리를 잡았다. 그때까지 꼭 붙들고 있던 기하의 손을 내려놓으며 옆자리를 탁탁 두드린 황제가 밥상을 빤히 바라봤다.
“입에 맞을 만한 것이 있느냐?”
“사람 먹는 음식은 다 똑같지 않습니까. 귀한 것을 내어준 듯한데, 고맙습니다.”
“하하하. 거 예쁜 도령께선 마음씨도 고운가 보오? 나리께선 무슨 복이오?”
“부자에 잘생긴 얼굴에 똑똑하기까지 하니, 당연한 것 아니냐?”
“여전히 재수 없으시구먼.”
밥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술잔부터 채우는 사내의 과감한 말에도 황제께선 눈살 한 번 찌푸리지 않으셨다. 황궁에선 이렇게 웃지도 않으셨는데, 이리 편안해 보이시지도 않으셨는데.
“도련님은 술 좀 할 줄 아오?”
“대낮부터 술이냐? 내 분명 사냥하러 온다지 않았어.”
“좀 있으면 해도 지는데, 사냥은 얼어 죽을. 사냥한다고 설치다 뒈지는 수가 있수다. 일찍 자고 내일 일찍 일어나 하면 누가 뭐라 하오? 오늘은 좀 마십시다. 도련님, 술 마실 줄 아오?”
“잘은 못 마십니다.”
“저희 도련님께서 약간의 주사가 있으시니 적당히 주십시오.”
불쑥 튀어나온 서엽의 말에 기하는 얼굴을 찌푸리며 그의 어깨를 퍽 쳤다. 도대체가 언제까지 그 얘길 하고 놀릴 생각인지, 벌써 몇 해나 지났는데 아직도 잊지 않았나 보다. 그 후론 취할 때까지 술을 마시는 법도 없거늘.
“술에 취하면 다 그런 법이지.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양반 여기 또 있구먼. 자자, 한잔씩 합시다. 이것들아, 고기 내오지 않고 뭐 하느냐?”
우렁찬 사내의 음성에 누군가가 촐랑거리며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푸짐하게 삶은 고기부터 잡곡 섞인 밥에 갖가지 나물이 먹음직했다. 기하는 까맣게 잊고 있던 시장기가 돌아 배를 문지르며 황제의 눈치를 살폈다.
가능한 술은 마시고 싶지 않은데. 술이란 것이 신기하게도 어떨 때는 말 그대로 술술 넘어가는데, 또 어느 날은 한 잔만 마셔도 금세 취하고 만다.
“속이 비었으니 마시지 마라.”
“예.”
슬그머니 잔을 내려놓으려니 아쉬움이 일었다. 유난히 향기가 좋은 술을 보니, 절로 입맛이 다셔진 까닭이었다. 술잔 대신 수북이 퍼 온 밥그릇을 제 앞으로 끌어온 기하가, 잘 익은 고기 한 점을 황제에게 내밀었다.
“시장하시지요?”
됐다, 싫다, 늘 거절만 하던 황제가 순순히 입을 열었다. 먹음직스러운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어주자, 술로 목을 축이고는 두령을 향해 잔을 내민 황제는 천천히 술병을 기울였다. 어주도 몰라보고 불평불만 가득한 얼굴로 황제를 쳐다보던 두령은 단번에 잔을 비우고 크흠, 하고 헛기침까지 했다.
“어서 먹어. 끼니 거르지 말라 했다.”
“예.”
“의원이 지어준 약은 챙겨 왔느냐?”
“소인이 챙겼습니다, 나리.”
천연덕스럽게 나리 소리를 붙이는 서엽은 입에 술은 대지 않고, 음식으로 허기를 때웠다. 서엽을 비롯한 금룡대 또한 마찬가지였다. 술을 즐기는 것은 황제와 승지뿐이었다. 기하는 이따금 황제의 입에 고기를 넣어주며, 연신 뛰는 가슴을 진정하려 애썼다.
“어디 우리 도련님 같은 분 또 없나. 딱 한 분만 계시면 당장에 장가들 터인데.”
임승지의 탄식에 기하는 그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한때는 제국에도 동성혼이 유행처럼 번졌다지만, 그것은 실상 양반가에서나 이따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본처를 두고 유희를 즐기며 함께 지내다가, 의(義)를 저버리지 못하면 후처로 들이기도 했으나 아닌 경우도 많았다. 그마저도 지금은 잠잠해져, 사내를 남첩으로 두는 것도 근래엔 보기 드문 일이었다.
“그러네. 도련님만 같으면 열 여인 부럽지 않겠수다.”
“우리 도련님께선 성품도 곧으시고, 나리께서 복 받으신 게지.”
“놀리지 마십시오.”
“놀리다니요? 소인이 어디 감히 도련님을 두고 그런 농을 합니까? 소인의 진정을 의심하시는 것입니까?”
저렇게 천연덕스러우니 오히려 더 의심 가는 것이다. 슬쩍 웃음을 지운 기하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술잔을 기울이던 황제가 돌아보는 것이 느껴졌다.
바람을 쐬며 말을 타고 달리는 동안, 이렇게 웃고 즐기는 순간에도 마음은 내내 무거웠다. 정신을 황궁에 내려놓고 온 것처럼, 종일 따라다니는 아이들 걱정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찌 그러냐.”
“저, 나리…….”
“말해.”
“곤하여 그러한데, 먼저 들어가서 쉬면 아니 됩니까?”
“곤해? 말을 너무 오래 탔더냐. 어디 아픈 것은 아니고?”
다정한 말 때문이던가. 무엄하게 대답 대신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기하는 저의 부주의함을 탓하며 입술을 물었다. 그 모습이 퍽 처연해 보여, 술을 들이켠 두령은 멍한 눈으로 기하를 바라봤다.
“쉬고 나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럼 그러자꾸나.”
주저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황제를 의문스럽게 바라보던 기하가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어찌 일어나십니까?”
“이 시커먼 놈들이 우글거리는 곳에 널 혼자 어찌 둬. 당연히 내가 함께 있어야지.”
“아니, 그게, 소인은…….”
“내가 묵을 곳이 어디냐?”
“우리가 도련님 잡아먹소?”
“내가 떨어지기 싫어 그런다. 어디냐, 안내해라.”
혀를 끌끌 차며 처소를 안내하라 이른 두령은 수염이 젖도록 술잔을 기울였다. 낄낄거리며 잔을 부딪치는 승지의 얼굴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황제를 따라 일어선 기하의 뒤로 금룡대 둘이 따라붙었다. 최소한의 호위다. 황제께서, 이들은 믿을 수 있는 자들이라 단언하신 것이다.
“한잠 자고 일어날 터이니 적당히 마셔. 저녁이 머지않았으니까.”
“정인 치마폭, 아니 품에 안기실 분은 저리 가십시오, 훠이.”
두령을 향해 가볍게 눈인사를 건넨 기하가 황제의 손을 잡았다. 어깨를 감싸거나, 허리를 끌어안기는 것보다 이것이 훨씬 나았다. 어차피 두령의 처소를 지나 사람들 눈이 닿지 않으면 금세 제자리로 돌아갈 테고.
“폐…….”
“보이지 않는 자들이 있으니 언행에 신경 써.”
“예, 알겠습니다.”
“얼굴이 어둡다.”
“…예.”
“정연과 다친 짐승이 걱정되는 것이냐.”
“알고… 계셨습니까?”
“알다마다. 두 녀석을 불러다 직접 회초리까지 휘둘렀거늘.”
“예?”
“쉿. 목소리가 너무 크지 않느냐.”
앞서 걷던 이가 방문을 열었다. 두령의 처소만큼이나 크고 화려한 방 안으로 들어간 기하는, 문이 닫히자마자 황제에게 달려들 듯 다가갔다.
“회초리라니요? 황자를 말입니까? 그 어린것을요?”
“말귀 다 알아먹고, 제 잘못까지 인정한 놈에게 무얼 못 해. 잘못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황자도 놀랐습니다. 그리 될 줄 알았다면 그런 짓을 했겠습니까?
“하면, 잘못한 것을 알고도 그냥 내버려 두란 소리냐? 그리 가르치고 싶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어제 충분히 알아듣게 얘기했습니다. 어린것이 울다 지쳐 겨우 잠들었사온데, 언제 또 가셔서 매질하셨습니까?”
“가긴 어딜 가느냐? 발칙한 것들을 불러들였지.”
이분이 정녕 왜 이러시나. 누가 그런 말장난을 듣자고……. 아니, 아니다. 이건 지금 말로 풀어서는 아니 될 문제였다.
“폐하.”
“황자들에겐 죄가 없다.”
“죄가 없다 하시면서 어찌 매질하셨습니까.”
“황자로서 죄는 없으나, 사람이기에 그랬다. 사람답게는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죄 없는 짐승에게 한낮 유희 삼아 돌을 던지는 아이들은 무지한 백성을 품에 안을 수 없을 테니까.”
아무것도 몰랐다고 하기엔 상처가 너무 컸다. 어쩌면 한쪽 눈만을 잃어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힘없는 짐승을 죽이는 것쯤은 아마 아무것도 아니리라 생각했을 테지.
“못된 것은 빨리 물드는 법이다.”
“정연이 요 며칠, 무척 좋아했습니다. 늘 냉랭하던 무영군이 살갑게 다가오는 것이 그저 좋았던 모양입니다. 태화당에도 들르지 않을 만큼 즐겁게 어울렸습니다.”
“무영은 그리 호락호락한 아이가 아니다. 그 아이를 가까이하지 마. 더한 짓을 할 수도 있는 아이니.”
“지켜보기만 하실 것입니까?”
“그럴 리가, 미워도 내 자식인 것을. 적어도 세상 빛을 보게 하였으면 책임이란 것을 져야지. 방법이 어떻건 간에 그것은 짐이 하겠다. 그러니 그대는 쓸데없이 나서서 상처받지 마.”
이분의 어깨에는 얼마나 많은 짐이 쌓여 있는 것일까.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생각하고, 얘기하다 보면 하루는 금세 저물 것이다. 쉬이 웃지 못하는 곳, 편히 쉬지도 못하는 곳, 늘 걱정과 불안과 고민만 가득한 곳. 그곳에서 잠시 고개를 돌렸을 뿐인데도 이리 편하게 웃으시는 것을.
“송구합니다, 폐하.”
“네 잘못이 아니지 않으냐.”
“사흘간은 황궁을 떠올리지 않으렵니다. 그러니, 폐하께서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잊는다고 잊히더냐. 괜한 소리 했다. 곤하다며, 눈 좀 붙여라.”
“예.”
거대한 짐승의 털이 폭신하게 깔린 침상 위에 눕자, 약초 냄새가 진동했다. 기하는 무거운 머리가 은근하게 맑아지는 느낌에 고요히 숨을 내쉬다가, 오래지 않아 소록소록 숨소리를 내며 깊은 잠에 빠졌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졌는지 사방이 어둑어둑했다. 호롱불 하나가 전부인 방 안을 둘러보다 침상 한쪽에 자리 잡고 앉아 활을 손질하던 황제와 눈이 마주쳤다.
“줄곧 여기 계셨습니까?”
“일어났느냐.”
“너무 오래 잔 것 같습니다. 깨우시지요.”
“바쁜 일 없다. 채비해라. 저녁상 보고 기다리는 모양이야.”
주인이야 차려놓은 것에 만족하여 실컷 먹고 마시고 있을 테지만, 금룡대는 눈치만 보며 음식에 입도 대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철없는 승지는 아랫사람은 나 몰라라 하며 두령과 하하 호호 떠들고 있을 테고.
“머리가 죄다 헝클어졌다.”
“아…….”
잠이 덜 깼는지 몽롱한 얼굴로 헛손질하던 기하는 난처한 표정으로 황제를 바라봤다.
“서 중랑을 부르겠습니다.”
“그자는 왜.”
“머리가…….”
“쯧, 머리 하나 네 손으로 손질하지 못한단 말이냐?”
손재주가 없는지라 제가 하면 금세 흘러내리거나 한쪽으로 치우치기 일쑤였다. 서엽을 여기까지 데리고 온 것도, 호위뿐만 아니라 자잘한 수발을 들게 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그것은 기하 혼자만의 계획이었지만.
“서 중랑이 그래 보여도 손재주가 좋습니다. 또한, 소인의 오래된 벗이고.”
“시끄럽다. 말 같지 않은 소리 하지 말고 이리 돌아앉아.”
“예?”
“어디 다른 사내에게 머리를 빗겨 달라 해? 네가 정신이 있는 것이냐?”
“아니 되는 것입니까?”
“아니 되다마다. 네가 가끔 잊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이다. 내가 누구냐?”
“황제 폐하이십니다.”
“그것 말고.”
“음…….”
도통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입술만 빠끔거리는 기하를 향해 황제는 왈칵 얼굴을 찌푸렸다. 저 백치 같은 것이 알고도 저러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모르는 것인지. 울화가 치밀고 속이 터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해라.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것이지?”
“예?”
“짐의 속 터지게 하는 것 말이다.”
“신첩 때문에, 속 터지십니까?”
“됐다. 다시 물으마. 네가 짐의 무엇이냐?”
“그야 폐하의… 정인이 되고 싶은 후궁입니다.”
“말장난하지 마라, 이 철딱서니 없는 것아.”
“소인의 진심을 어찌 말장난이라 하십니까?”
“소인이 아니라 신첩이다.”
빤히 바라보면 볼수록 얼굴을 붉히는 기하에게서 시선을 거둔 황제는 손을 까딱까딱하며 그를 뒤돌게 했다.
“너같이 말 안 듣는 것을 정인으로 두었다간 내 속이 썩어 문드러질 것이다.”
“그런 기대는 하지도 않습니다.”
“너 지금 짐을 놀리느냐?”
예전보다 훨씬 풍성해진 검은 머리카락을 한 손에 잡은 황제는 빗도 없이 손가락으로 훌훌 훑으며 기하의 동그란 뒤통수를 노려봤다. 말대꾸하는 만큼만 해도 뭐든 잘한다고 칭찬해 줄 터인데.
“소인, 아니 신첩은 그저, 폐하께서 신첩을 미워하지 않으시는 것만으로도 족합니다.”
겨우 그런 말을 하면서 왜 귀까지 붉어지고 그러느냐.
“혹, 이리 다정하신데 마음속으로는 신첩을 미워하시는 것은 아니시지요?”
“머리 흐트러진다, 얌전히 있어.”
“예.”
어깨뼈 아래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하나로 틀어 올려 눈에 보이는 긴 장신구를 푹 찔러 넣으니, 그럭저럭 어색하지 않은 모양새가 되었다. 머리를 올린 것은 처음이었던지 연신 얼굴을 문지르며 눈치를 살피던 기하가 조용히 일어났다.
“어찌 그래.”
“폐하께서는 못 하시는 것이 없습니다.”
열에 들뜬 눈이다.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며 눈을 빛내는 기하를 바라보던 황제가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렸다.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해도, 저렇게 열정적인 눈빛을 보고 있으려니 뒷목이 간질거렸다.
그나저나 사내놈이 웬 목이 저렇게 길단 말인가. 머리를 틀어 올리니 전부 드러난 흰 목덜미에 절로 눈이 간다. 시커먼 사내놈들만 가득한 곳에 저 꼴로 데리고 나가려니 기분이 영 찜찜했다. 후궁이란 것이 어쩌면 저렇게 몸가짐이 바르지 못하단 말인가.
“옷은 그것뿐이냐?”
“지저분합니까?”
“좀 더 두꺼운 옷 없느냐? 목도 감싸지 않고.”
“밖이 춥습니까? 깊은 산중이라 날씨가 다른가 봅니다.”
하긴, 사내치고 얼굴이 조금 반반하다기로서니 설마 저 망아지 같은 놈을 누가 어여쁘다 할까. 눈 코 입이 조금 반듯하고 잘났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단정한 느낌일 뿐이다. 같은 사내가 동할 정도는 아니란 말이지.
“되었다. 가자.”
“그냥 가도 됩니까?”
“그래.”
벌떡 일어나 걸어오는 모습이 제법 씩씩하다. 그래, 그래야지.
황제의 굳은 얼굴은 내내 펴질 줄 몰랐다. 술도 약하다면서 주는 대로 족족 받아 마시는 기하를 어이없이 바라보는데, 이제는 아예 열이 오른 얼굴에 미소까지 방긋거린다.
“우리 도련님이 보기와는 다르게 성격이 아주 시원시원하오?”
“다 마셨습니다.”
머리 위로 술잔을 탈탈 터는 것은 대체 누구에게 배운 것이야? 저것이 그냥, 아주 정신을 내려놓았구나.
“이제 그만 마시지 그러느냐.”
이를 악문 황제를 힐끗 바라보던 기하가 해사하게 웃으며 그에게 팔을 뻗었다. 술에 취한 탓에 기우뚱하는 기하를 밀어낼 순간을 놓친 황제는 제 팔에 매달려 해죽거리는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지금 보니 우리 나리가 도련님을 무척 아끼시나 보오? 눈에서 불 나오겠수다.”
두령의 우렁찬 음성에 함께 어울려 낄낄거리던 승지는 황제의 서슬 퍼런 표정에 슬그머니 꽁지를 내리고는 시선을 피했다.
바람 좀 쐬어 주려 기껏 데리고 나왔더니 하는 꼴이 가관이었다. 왁자하게 떠들며 성적인 농담을 서슴없이 지껄이는데, 저 말이 뭔지나 알고 저리 멍청하게 앉아 웃기만 하는 것인가?
“자, 나도 한 잔 주시오.”
두령의 옆에 있던 짧은 머리의 사내가 기하를 향해 손 내밀었다. 햇볕에 탄 얼굴색이 거무죽죽한데도 훤칠한 얼굴은 이런 곳에 있을 이가 아닌 것 같아 그를 유심히 지켜보던 황제는 술병을 기울이는 기하의 마른 손목을 힐끔거렸다. 설마 아직도 후유증이 남은 것인가. 사내놈 팔목이 뭐가 저리 희끄무레해.
“도련님 피부가 뽀얀 것이 꼭 계집 같소.”
이가 누런 늙은 사내가 킬킬대며 웃었다. 술병을 기울이던 것을 멈춘 기하의 표정이 일순 굳는 듯했으나, 그는 금세 해사하게 웃으며 황제를 향해 몸을 돌렸다.
“거 웬만한 계집보다 낫구먼.”
“네놈 마누라보다는 곱긴 하다야.”
“가만히 잘 있는 남의 마누라는 왜 끌어들여? 그런 너는 등 문질러 줄 마누라나 있냐?”
“못난 여편네 얻고 사느니 혼자 사는 게 낫다. 내가 소싯적에 동남성에서 가장 큰 기루를 책임지는 몸이었다, 이거야. 게 있는 사내들은 웬만한 계집보다 낯짝 반반하고 밤 기술 좋고, 빼는 법 없고.”
“하긴 사내 맛을 한 번 보면 헤어 나오지 못한다잖여. 거, 나 나고 자란 윤 대감 어르신네 큰 도련님도 기방 사내랑 눈이 맞아서 대감마님께 두드려 맞아도 도통 집에 안 들어와서 난리난리 그런 난리가 없었다니께.”
“사내 맛이 그렇다니까. 근데 도령께서는 어디 출신이오? 우리 나리 눈에는 어찌 들었소?”
다들 얼큰하게 취해 붉은 얼굴로 시시덕거리는 것뿐이다. 그리 생각하면 아무렇지 않아야 할 것인데, 찝찝함이 뭉텅뭉텅 솟구친다.
“자자, 다들 많이 취한 것 같으니 그만들 일어납시다. 배부르게 먹고 마셨으면 이제 자야지. 그래야 내일 일찍 일어나 사냥 준비할 것 아니오?”
황제의 불편한 심기를 눈치챈 승지가 요령 좋게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그 자리가 딱 가시방석이었던 금룡대가 승지의 눈빛에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주변을 정리하려는데, 오랜만에 맛 좋은 술로 목을 축인 산채 사람들은 도통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초저녁인데 벌써 자려 하오? 아직 술도 많이 남았소.”
“그려요, 일단 먹고 마십시다.”
“술이 과하면 우리 도련님께선 거기 딱 앉아만 계쇼. 보고만 있어도 술이 술술 넘어가는구먼.”
승지를 따라 몸을 일으키려던 기하는 제 손목을 덥석 잡는 사내의 투박한 손길에 몸을 뒤로 뺐다. 거칠거칠한 손길이 딱히 기분 나쁜 것은 아니었으나, 난처했다.
이런 곳에 사는 사람들이 거친 것이야 두말할 나위 없고, 신분을 무기 삼을 마음 같은 건 없었다. 더욱이 황제가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오랜 시간 관계를 쌓아 왔을 정도이니, 쉽게 감정을 드러낼 수도 없었다.
“아이고 참, 안 잡아먹수. 그냥 좀 앉아 계시라니까 그러네. 아따, 도련님 손이 비단이네, 비단.”
“어허, 이 사람들이. 취했나? 어디 함부로 우리 도련님 손목을 턱턱 잡고 그러시나?”
줄곧 넉살 좋게 웃던 승지가 기하의 앞을 막아서며 단박에 얼굴을 구겼다. 얼른 그 손 놓아라 이놈아, 하고 입술을 빵긋거려도 술에 취해 보이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이성이 상실된 것인지 사내들은 꿈쩍하지 않았다.
“뭘 하고 섰어, 이리 오지 않고.”
황제가 손을 내밀었다. 무표정한 얼굴은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잔뜩 찌푸려졌으나, 딱히 화를 내진 않으시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까스로 사내의 손을 밀어낸 기하가 황제를 향해 돌아섰다. 괜히 따라왔나. 역시 궁에 남아 있을 것 그랬다.
“나리, 좋은 밤 보내십시오?”
누군가의 낄낄대는 음성에 사내들이 와하하 하고 웃는다. 거침없이 기하의 어깨를 끌어안은 황제가 반듯하고 진한 눈썹을 꿈틀했다.
“오냐. 네놈들 바람대로 뜨거운 밤 보내마.”
여기저기서 환호하며 휘파람까지 부는 사내들에게서 등을 돌린 황제가 먼저 성큼성큼 걸었다. 그의 걸음에 맞춰 발을 옮기던 기하는 술기운에 저도 모르게 비틀거리며 눈을 감았다.
“왜.”
“아닙니다.”
“취기 도느냐?”
“…예.”
쯧쯧. 혀를 차는 황제의 무심한 얼굴은 보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푹 숙이며 그를 따라 걷던 기하는 어깨를 늘어트렸다. 분위기를 맞춰보려 아무리 애를 써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는다. 저를 두고 농을 거는 사람들 말이야 못 들은 척하면 그만이고, 남들이 뭐라 생각하건 상관없지만.
“표정이 왜 그래.”
“저 때문에 괜한 소리를 들으신 것 같아…….”
“술 취한 놈들이 지껄이는 소리 마음에 담지 마라.”
“마음 쓰지 않습니다. 다만 공연히…….”
“되었다지 않아.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고 여기 있는 동안엔 푹 쉬다 가는 게다. 나 또한 그리할 것이니.”
맞닿은 체온이 따뜻했다. 어깨에 두른 팔이 무겁다고 느낄 새도 없었다. 방 안으로 들어오는 시간이 어찌나 짧던지, 아쉬운 마음에 한숨을 삼킨 기하는 푹신하지 않은 침상에 걸터앉은 황제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마음을 정리하려 몇 번이나 다짐했다. 닿을 수 없는 인연을 억지로 맺은 것이니 더는 바라지 말자고 스스로 채찍질해도, 돌아보면 늘 곁에 계신다. 서럽고 안타까운 마음은 이미 삭아 없어졌다.
감히 바라서는 안 될 마음임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림자처럼 살다 이따금 바라보기만 해도 좋겠다는 마음이 굳어진 것이었다. 바라지 말자, 더는 바라지 말자. 그렇게 주문을 걸었다.
그런데도 몹쓸 마음이 또 새싹을 틔우고, 꽃으로 자란다. 그리움마저 사그라진 밤부터 새벽까지.
탕. 타앙.
흔들림 없는 눈으로 화살 끝을 보던 황제가 유유히 팔을 내렸다. 천천히 말을 몰아 사냥감에게 다가가자, 화살에 목이 뚫린 사슴이 눈도 감지 못하고 죽어 있었다. 황제는 비릿한 피 냄새를 맡으며 불어오는 바람을 느꼈다. 줄곧 제 곁을 따르는 기하의 나른한 얼굴을 곁눈질하자, 금세 배시시 웃는 얼굴에선 알 수 없는 감정이 묻어났다.
“왜 집중을 못 해.”
“예?”
“그간 수련을 게을리 한 탓이냐. 도통 감을 못 잡는 것 같은데.”
“활 쏘는 법을 잊었나 봅니다.”
아예 그럴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고? 톡 쏘아붙이려던 황제가 입을 다물었다. 어젯밤 잠들기 전부터 내내 저런 얼굴로 주위를 맴도는 기하를 못 본 척했다. 어찌 그렇게 제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것인지. 칠칠치 못한 것 같으니라고.
“여기가 황궁 사냥터인 줄 아느냐.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짐승에게 습격당하고 만다.”
“예. 정신 차리겠습니다.”
말고삐를 잡아 멈추게 한 황제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바람 소리와는 다른 바스락거림에 방향을 가늠하던 황제가 일순 눈을 떴다.
터억, 탕.
그저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던 기하가 입을 벌렸다. 어디선가 날아든 커다란 여우 가슴에 화살을 박은 황제는 다시 한 번 신중하게 활시위를 당겼다.
탕.
명쾌한 소리와 함께 여우가 그대로 풀썩 쓰러졌다. 기하는 파르르 떨리는 줄의 움직임을 눈으로 훑으며 천천히 말을 몰았다. 제법 덩치가 큰 여우를 거두러 다가간 금룡대를 내려다보다 황제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 마주쳐 온다.
“그리 봐도 네게 주진 않을 것이다.”
황제의 퉁명스러운 음성에 기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무 생각 없이 정신을 놓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하십니다.”
사실은 그냥 해본 말이었다. 언젠가 황제께서 내려주신 여우 털도 뭔가를 만들기도 아깝고 신기하기까지 해서, 잘 누벼 놓고 이따금 꺼내볼 뿐이었다.
염치없이 이것을 또 바라지는 않는다. 다만 무슨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또 숨겨둔 진심을 꺼내서 그의 심기를 어지럽힐지도 모르니까.
“너무하긴 뭐가 너무해?”
“영빈에게 주실 것입니까?”
“또 쓸데없는 소릴 한다. 시끄러우니 입 다물고 사냥이나 실컷 해라. 내년까진 아무것도 하지 않을 테니 오늘 내일이 마지막이다.”
“그리 사냥을 좋아하시면서 어찌―.”
“적자가 태어날 때까진 살생을 금하는 것이 좋겠지.”
아직 황후의 회임이 공식화된 것은 아니었는데도, 황제는 완전히 확신하는 표정이었다. 적자라… 그랬던가.
스물 남짓의 처첩을 거느리고도 겨우 셋뿐인 황자를 두고, 황실 안팎으로는 흉흉한 소문까지 돌고 있었다. 황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지만, 후궁들은 애가 탔다. 황자들 중 막내인 정연군이 벌써 네 살이니, 말이 돌고도 남음직한 시기였다.
“황후마마께서는…….”
연모하는 분의 정인, 그 생각만으로 가슴이 따끔거렸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을 이어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음은 아직 정리되지 않았고, 머리는 복잡했다.
감히 제 주제에 황후를 투기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분명 따뜻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얼음장 같은 분도 봄처럼 따뜻하게 녹이실 수 있으셨던 거겠지.
“불쌍한 여인이다. 사모하지도 않은 사내에게 시집와, 덜컥 황후 자리에 올라 궁에 갇혔으니.”
“…예?”
“좋은 여인임은 분명하다. 내게는 과분한 여인이지.”
“폐하께 과분하다니요. 황후마마께서 훌륭한 여인임은 분명하시나…….”
“가문이 조금 더 좋았더라면 형님의 여인이 되었을 거다. 물론 그마저도 답답한 궁이 싫다며 거절했지마는. 내게 바라는 것은 혼인 후, 황궁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서 평범하게 사는 것이었다. 단 하나뿐인 소원이었는데 끝내 들어주지 못했으니 미안할 따름이지.”
터벅터벅, 말발굽 소리가 크다. 어느새 저만치 떨어진 금룡대를 돌아보던 기하는 슬그머니 고삐를 놓았다. 서로 위하고 다정하시다 생각했지만, 사사로이 함께 계시는 모습을 보진 못했었다. 그랬구나. 그랬던 것이구나.
“왜 또 정신을 빼놓고 있어? 짐승이 우글거린다 하지 않았느냐?”
이리 기뻐하면 아니 되는데, 황제께서 그걸 바라고 하신 말씀은 아니실 텐데. 못났다. 못된 마음이다. 그런데도 마음 한구석에서 솟아나는 기쁨을 쉬이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럴 일은 없을 테지만… 혹시라도, 아주 만약에라도 제게도 기회가 온다면, 그렇다면 그때는 분명히―.
키하양!
“마마!”
“마마!”
타앙.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빛나는 무언가가 제 앞을 덮치는 순간, 화살이 날아왔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공중에서 툭 떨어지는 짐승의 발을 언뜻 본 것 같기도 하다.
미처 대비할 틈도 없이 기울어진 몸, 요란하게 앞발을 들고 날뛰는 말의 갈기를 붙잡으려는 손이 허공에서 휘저어졌다.
히이이잉!
이대로 떨어지는 건가. 떨어진다면 어디가 부러지지만은 않았으면 좋겠다. 갈기를 잡으려던 기하가 손을 쫙 폈다. 어정쩡하게 매달리느니 제대로 떨어지는 것이 훨씬 나으리라.
쿵, 터억.
사정없이 자신을 바닥에 패대기친 말이 길게 운다.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통증에 눈을 감은 기하는 터져 나오는 숨을 간신히 참았다. 찌르르한 통증과 저릿하게 아파오는 머리에 정신이 아득해져 간다.
“마마!”
“빈, 빈! 정신 차려라.”
축 늘어진 몸을 누군가가 끌어안았다. 축축한 흙냄새와 비릿한 피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이마 위로 뜨끈한 피가 주르륵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몇 번이나 눈꺼풀을 깜박거리다가 가까스로 눈을 뜨자, 보이는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
“괜찮으냐? 내가 보이느냐?”
“…폐…….”
입술을 빵긋거렸다. 눈꺼풀 위로 피가 흘러내려 눈이 따끔거렸다. 몇 번이나 숨을 내쉬려 해도 혀가 굳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커다란 손에 제 얼굴을 쓰다듬었다.
“대체 정신을 어디에 두고 있는 것이야!”
버럭 고함치는 황제의 얼굴을 바라봤다. 자꾸만 눈이 감기려고 해서, 몸이 아래로 가라앉는 것만 같아서 맥없이 눈물이 흐르는 것만 같다. 캄캄한 어둠은 싫다. 이대로 눈을 감고 싶지 않았다.
“폐하… 아픕…….”
“당장 마을로 내려가 의원을 데려와라, 당장.”
“예, 폐하.”
“빈, 일어날 수 있겠느냐? 아직 눈 감지 마라. 정신을 놓으면 안 돼.”
침착하게 숨을 내쉰 황제가 천천히 기하를 끌어안았다. 축 늘어지는 몸을 안아 들고 말에 오르자, 옷을 축축하게 적실만큼 피가 떨어졌다. 말에서 떨어지며 나무에 머리를 부딪친 것이 화근이었다. 악착같이 갈기라도 붙잡을 것이지, 어째서 손을 놔!
“정신 놓으면 안 된다. 눈을 떠. 내 말 들리느냐?”
“…예.”
“곧 의원이 온다. 조금만 참아봐라. 부러진 곳은 없는 것 같으니 괜찮을 것이다. 놀라서 그럴 게다.”
“예…….”
“빈, 정신 차려라. 기하야. 기하야, 눈 감지 마라.”
다정하시다. 따뜻하시다. 저리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 주시다니, 이것은 필시 꿈일 것이다.
칠흑 같은 어둠은 무서웠다. 혼자이고 싶지 않았다. 두려움에 덜덜 떨며, 캄캄한 어둠 속을 더듬거리며 걸었다. 까마득한 공간 안에 혼자 남겨졌다.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아 손끝이 덜덜 떨렸다.
하염없이 걷고 또 걸으며 누군가를 애타게 찾았다. 아버지, 형님, 형수님, 현 상궁, 서엽, 영이, 달이, 정연 그리고…….
“어찌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게야?”
그리고…….
“너, 의원이 맞기는 한 것이냐? 돌팔이가 아니냔 말이다.”
“소인은 정식으로 잡과를 치른 의원이외다. 나리 신분이 어떤지는 모르오나, 너무 무례하신 것 아니오?”
“네놈이 정녕 제대로 된 의원이라면 이 아이에게 어떤 일도 일어나서는 아니 된다. 혹여나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네놈과 식솔들이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 이 양반들이! 사람을 살려놨더니 무슨 막말이오? 에잇, 퉤. 더러워서 못 해먹겠소이다. 비키시오, 내 당장 여길 내려갈 터이니. 비키라지 않소!”
“시끄러우니 저놈 주둥이부터 닫게 해. 환자 앞에서 무슨 추태냐? 이러다가……, 눈을 뜬 게냐? 정신이 든 게야?”
아아… 뿌연 눈앞에 보인 것이 환영은 아니었던가.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손가락을 꿈틀하자, 걱정 가득한 얼굴이 불쑥 다가왔다.
“폐…….”
“그래, 나다.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느냐?”
“폐하…….”
“그래, 잘했다. 짐이다. 정신이 제대로 들었구나. 어디, 불편한 곳은 없느냐? 부러진 곳은 없다 하는데, 혹 특별히 아픈 곳이라도 있느냐?”
무서운 꿈이었다. 긴 어둠을 따라 걸으며 하나씩, 하나씩 누군가를 떠올렸다. 그러다가 끝내 떠오르지 않은 이를 생각해내려 애썼다. 아무리 걸어도 빛은 보이지 않았다. 춥고, 외롭고, 무서웠다.
“의원.”
“예? 예, 예, 예에……, 폐, 폐…….”
“떨 것 없다. 다시 한 번 빈을 진맥하라. 불편한 곳은 없는지 상세히 묻고 치료해.”
“예…예에, 폐하. 추, 충심으로 모, 모시겠나이다.”
바닥에 납작 엎드린 의원은 조금 전 패기 넘치게 왁왁하던 얼굴을 단번에 지우고 온몸을 덜덜 떨었다. 저 손으로는 침 하나도 제대로 놓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 그를 빤히 쳐다보던 황제가 얼굴을 찌푸렸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창백한 얼굴의 기하는 눈을 감으려 했다. 천운으로 어딘가가 크게 부러지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떨어지는 순간을 떠올리면 눈앞이 아찔해졌다.
사냥터에서 낙마 사고로 하나뿐인 형님을 잃었다. 장차 황좌에 올랐어야 할, 응당 이 자리에서 빛나고 있어야 할 형님을 잃고서 얼마나 많은 것이 바뀌었던가.
“맥을 다시 보겠나이다.”
고개를 조아린 의원이 기하의 손목 위로 손가락을 짚었다. 피를 많이 쏟은 까닭에 그대로 숨이 끊어지는 줄로만 알았다. 며칠 원기를 회복하면 된다 하니 다행인데, 창백하게 질린 낯을 보고 있으려니 도무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맥이 약합니다. 너, 너무 놀라시어 그러신 듯하니 타, 탕제를 지어 올리겠나이다. 사, 상처는 곪지 않도록 약을 다시 바르겠사옵니다.”
“빈.”
잠시 깜박이던 눈이 스르르 감겼다. 가까이 다가가 어깨를 붙잡고 흔들자, 길게 드리워진 속눈썹이 천천히 움직인다.
“기하야.”
황제의 낮은 음성이 방 안을 울렸다. 조아린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덜덜 떨고 있는 의원을 붙잡은 금룡대가 그를 바깥으로 안내하려 했다.
“말을 타거나 움직일 수 있겠느냐.”
“저, 아,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그, 그것은 너무 무리 되시는 일인지라……. 다, 당분간은 푹 쉬시면서 안정을…….”
“승지를 불러오라.”
“예, 폐하.”
오들오들 떠는 의원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하마터면 대역죄를 짓고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해진 까닭이었다. 희미하게 눈을 뜨고 고르지 못한 숨소리를 내는 기하를 힐끔거리던 의원은 다시 한 번 머리를 바짝 조아렸다.
“폐하, 찾아계시었습니까.”
“당장 전서구를 띄워 태의를 이곳으로 불러라. 아무도 모르게 해야 한다. 지밀에게 조용히 지시하도록 해.”
“예, 폐하.”
“의원은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어라. 너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니 그리 떨 것 없어. 나가 봐라.”
“서, 성은이, 마, 망극하나이다.”
모두가 물러난 방 안은 고요한 적막이 흘렀다. 딱딱한 침상 가운데에 몸을 누이고 있던 기하가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정신은 있는 것인지, 지금 제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고는 있는지.
“머리가 아프진 않으냐.”
“…조금, 아픕니다.”
“다른 곳은.”
대답 대신 그저 눈을 깜박이는 기하를 내려다보던 황제가 물에 젖은 영견을 들었다. 식은땀을 흘리는 이마를 툭툭 닦아주자, 흐릿한 핏물이 묻어나온다.
황제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어 넘겨주며, 기하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바닥으로 고꾸라진 그 순간 뛰어가, 축 늘어진 몸을 끌어안았을 때의 느낌이 아직도 선연했다.
“추우냐?”
“예…….”
피를 너무 많이 흘려 그럴 것이다. 등이 흠뻑 젖을 정도로 피를 흘리고 정신을 잃은 그의 숨이 약해지는 것에 눈앞이 아찔했다.
품에 안던 순간 웃던 얼굴이, 아프다고 찡그리다 이내 흔들리던 입매가, 나풀거리던 피에 젖은 머리칼과 점점 차게 식어가던 체온이. 그 모든 것이 아직도 꿈인 듯 가슴을 매섭게 때렸다.
“한숨 더 자련?”
“무섭습니다.”
낮게 갈라진 음성이 띄엄띄엄 말한다. 뭐가 그리 무서운지 얼굴을 잔뜩 찡그린다. 황제는 기하의 마른 손가락을 슬쩍 감쌌다. 그제야 온기를 찾은 어린 짐승처럼, 덜덜 떨어대며 옷깃을 붙잡는다.
“…눈, 뜨지 못할 것… 같아서.”
“쉿, 그런 소린 하면 안 돼. 괜찮다, 괜찮다고 했다.”
또르르, 눈물이 흘러내린다. 천천히, 눈꼬리를 따라 손가락을 문지르며 덧그리자, 미지근한 눈물이 스며든다.
“짐이 옆에 있을 것이다. 곧 태의가 올 것이니 조금 더 머물다가 궁으로 가자.”
“곁에…….”
“곁에 있겠다. 그리하마. 그러니 안심하고 조금 더 자거라.”
창백한 뺨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더듬거리며 손가락을 붙잡아 오는 마른 손을 붙잡았다. 체온이 낮다. 부들부들 떠는 몸이 안타까워 연신 뺨을 더듬었다.
모든 것이 꼭 제 탓인 것만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혹, 형님처럼 이 아이를 잃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불현듯 눈앞이 캄캄해졌었다.
그것은 어떤 감정이었을까. 고작 한낮 후궁일 뿐인데. 언젠가 칼이 되어 제 목을 조를지도 모를 아이인데. 마음을 나누지 않으려 했거늘.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했었거늘. 지나간 추억이야 모두 지우려 했거늘.
시간은 더디 갔다. 밤이 깊어 짐승의 울음소리가 크게 들린다. 괴로운 꿈을 꾸는 듯, 이따금 숨을 몰아쉬는 기하의 손을 붙잡으며, 황제는 내내 태의를 기다렸다. 정처 없이 떠도는 마음은 잠시 접어두기로 하고서.
<화양연화> 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