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장 적(敵)
활촉을 다듬던 서엽의 손이 멈췄다. 이따금 그는 하던 일을 멈추고 먼 산을 바라보았는데, 기하가 그때마다 말을 걸어도 정신을 빼놓고 알아듣지 못했다.
“오후에 잠시 궁 밖에 다녀와도 됩니까?”
“응? 바깥? 어딜?”
“살 것이 있습니다. 해야 할 일도 있고요.”
“하늘이 흐려 금방 비가 쏟아질 것 같은데, 꼭 오늘 나가야 합니까?”
“예, 너무 늦지는 않을 겁니다.”
답지 않게 덤덤히 제 말만 하는 서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하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촉을 손질하고 오후에 비가 오지 않으면 황자에게 궁술을 가르치려 하였는데. 서엽이 곁에 있지 않으면 잔걱정 많은 현 상궁이 따라붙을 테니 그것은 잠시 뒤로 미뤄야겠다.
“황자 저하께서 오실 시각 아닙니까?”
“응. 수업이 곧 끝날 겁니다.”
황자는 사흘 전부터 오전 시간엔 강론을 듣기로 약조했다. 아직 글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황자였지만, 마냥 노는 데 시간을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행히 황자는 예전처럼 허겁지겁 음식을 먹거나, 흙바닥에 뒹굴며 말도 없이 사라지는 요행은 부리지 않았다.
새로 온 동복궁 상궁 나인들도 모두 입이 무겁고 충성스러운 자들이라고 하니 그것이 퍽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기하는 내내 잠을 설쳤다. 그 조그마한 아이도 온기라고, 있다가 없으니 밤마다 무척 적적했다.
“어제도 제대로 침수 못 드시었습니까?”
“응?”
“잠도 많으신 분이 어찌 요즘은 그리 못 주무십니까?”
“날이 더워 그런가.”
“아직 더울 날씨는 아니지요. 수면 향이라도 피우고 침수 드십시오. 제대로 못 주무시면 큰일 나시는 분이.”
그랬던가. 하긴, 전장에서 남들 다 바짝 얼어붙어 있을 때도 줄곧 졸아 형님께 크게 야단맞았었지. 특히 아침잠이 많아 초조반은 입에 대 본 일이 까마득했다. 아무리 야단을 맞고 꾸지람을 들어도 도무지 고쳐지지 않는 습관에 아버님께서도 결국 두 손을 들고 마셨던 기억이 떠오르자 슬그머니 웃음이 서렸다.
“마마!”
어디선가 씩씩한 황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하는 금세 무릎을 펴고 일어나 제게 달려오는 황자를 번쩍 안아 들었다. 요즘 들어 웃음이 많아진 아이 뒤를 따르던 상궁들이 기하를 향해 예를 갖추며 인사를 올렸다.
“그리 뛰어다니면 넘어집니다.”
“마마, 보고 시퍼쪄.”
“그래요. 나도 우리 황자 보고 싶었습니다.”
화사한 개나리색 옷을 입은 아이는 전보다 얼굴이 밝아졌다. 아이의 곁을 지키는 상궁 말로는 몸을 바삐 움직인 탓에 잠투정도 없이 곧잘 잠든다고 했다.
씩씩하게 변해가는 아이를 보는 것은 좋은데, 금세 제 품에서 달아나는 것이 서운한 이중적인 마음에 기하는 제 콧잔등을 슥슥 문질렀다.
“마마, 모해?”
“후원에 가서 활 쏘는 것을 가르쳐주려 했는데, 날이 궂어서 안 되겠습니다.”
“할! 조아!”
“내일 합시다. 대신에 오후에는 장기를 가르쳐 줄게요.”
“저, 마마.”
곧장 처소 안으로 들어가려던 기하를 불러 세운 이는 이번에 새로 황자의 보모상궁 자리에 오른 권 상궁이었다. 따뜻하고 온화한 표정의 여인을 마주하고 서자, 황자는 팔을 붕붕 휘저으며 상궁에게 아는 체를 했다.
“저하께서는 자경전에서 낮것을 드시기로 되어 있습니다.”
“자경전에서?”
“예. 어젯밤 자경전에서 연통이 왔사옵니다. 황자 저하께서 잠깐이라도 마마를 뵙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아, 자경전으로 가는 길에 서둘러 온 것입니다.”
“아…….”
말똥말똥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황자의 뺨을 쓰다듬으며 기하는 슬그머니 아랫입술을 물었다. 오늘은 특히나 날이 궂어 황자가 좋아하는 당과를 잔뜩 먹이려 준비해 두었는데.
아마 낮것만 들고 바로 올 것 같지는 않으니 오후 일정은 전부 취소해야겠다. 어차피 저와 둘이서 하는 일이니 달리 취소랄 것도 없지.
“응, 그랬나. 예까지 오느라 괜히 자네들까지 번거롭게 하였네.”
“아니옵니다. 마마께서 기다리고 계실 것 같아 저하께서도 서두르셨습니다.”
“지금 바로 가야 하나?”
“조급하진 않으나, 그리 긴 여유는 없습니다.”
“그럼 내 배웅하겠네.”
자경전까지 황자를 바래다줄 수는 없더라도, 음울한 하늘 아래 서서 아이를 홀로 돌려보내고 싶진 않았다.
“황자.”
“응?”
“황후마마를 뵈러 가서도 예의 바르게 잘 하고 와야 합니다?”
“예!”
“천천히 조금씩 먹고.”
“예.”
“황후마마께서 물으시는 것도 대답 잘 하고?”
“마마는 안 가?”
“권 상궁이 함께 갈 것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황후마마께선 다정하시고 좋으신 분이랍니다.”
“마마도 가.”
“이따 시간이 나면 태화당에 들르세요. 우리 황자가 좋아하는 당과를 잔뜩 만들어 놓겠습니다.”
“당가? 응? 많이?”
“그래요.”
기하는 손뼉을 짝짝 치며 좋아하는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작은 등을 가볍게 다독였다. 취영루 다리만 건너면 얼마 안 가 자경전이었다. 이쯤에서 돌아서는 것이 쓸데없는 말을 막기 위해서라도 좋을 테지.
“즐겁게 보내고 오세요.”
“마마, 가치이.”
옷자락을 붙잡고 보채는 아이를 내려다보며 기하는 슬쩍 권 상궁에게 눈짓했다.
“저하, 자경전으로 가셨다가 오시면 됩니다. 무빈마마께서 오래 기다리시지 않으시도록 얼른 다녀오시지요.”
“흥…….”
조그마한 입술을 삐죽거리는 아이는 몹시 귀여웠다. 저도 모르게 무릎을 굽히고 황자와 마주 본 기하는 제 소매로 아이의 입 주위를 꼼꼼하게 닦았다.
“얼른 다녀오세요, 황자.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예. 다녀오게쯥니다.”
꾸벅 머리를 숙이는 황자를 따라 다시 일어선 기하의 미소가 일순 멈췄다. 황자의 손을 붙잡은 권 상궁이 건너편에서 다가오는 일행을 향해 머리를 숙였고, 그제까지 해사하게 웃고 있던 아이는 금세 울음기 가득한 얼굴이 되어 기하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무빈, 오랜만이네?”
못 본 새에 영빈은 더더욱 화사해졌다. 봄을 맞은 꽃처럼 활짝 피어난 그를 향해 가볍게 눈인사를 건넨 기하는 영빈의 곁에 서 있는 사나운 얼굴을 향해 미소 지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무영군.”
“예, 그렇습니다.”
올해로 여덟 살이 된 일황자 무영은 아이답지 않게 사나운 눈을 빛내며 기하를 향해 머리 숙였다. 자경전에서 몇 번인가 함께 수라를 든 것밖에는 딱히 접점이 없었으나, 영빈과는 막역한 사이로 세가 약한 무영군의 뒤를 봐주는 것은 서남성이라는 말이 황궁 안에 파다했다.
무영은 황제께서 황자 시절 전장을 도시다 우연히 취하신 여인에게서 본 아들로, 네 살이 될 때까지 존재를 알리지 않고 서남성에서 보호받고 자란 탓에 제 어미보다 영빈과 더 애틋한 모습을 자주 보였다.
“정연, 네놈은 형님을 보고도 인사 올리지 않는 것이냐?”
아이답지 않은 무영군의 표독스러움에 정연군은 금세 울음을 터트릴 요량으로 벌벌 떨었다. 늘 이런 식으로 대했던 것인가. 딱히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눈에 가득한 짜증을 보고 있자니 절로 숨이 막혔다.
“현니임.”
“아직도 형님 소리도 제대로 못 해? 넌 대체 언제 사람 구실을 제대로 할 거냐? 너 때문에 괜히 고생한 박 상궁만 문초를 받지 않았어! 그리 사람 구실 하고 살라 일렀거늘, 너 같은 놈과 형제간이라니 내가 낯이 뜨거울 지경이다.”
정연이 고개를 푹 숙였다. 사나운 폭언도, 싸늘한 눈빛도 모두 꼿꼿하게 받아낸다. 독설을 퍼붓는 무영의 곁에서 그저 뾰족한 미소를 짓고 있던 영빈이 일황자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무영군, 그리 언성을 높일 필요 없습니다. 아우를 생각하는 무영군 마음은 잘 알고 있으나, 그리 말해도 정연군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요. 괜히 열 낼 필요 없답니다. 정연군도 어찌 살아보겠다고 무빈의 처소를 들락거리나 본데, 아마 조금 크면 알게 되겠지요. 끈 떨어진 연끼리 붙잡고 있어 봐야, 바닥에 처박히기밖에 더하겠습니까?”
유쾌한 듯한 영빈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기하는 무릎을 구부려 정연의 얼굴을 바로 보았다. 동그란 얼굴에 수심이 깊었다.
어찌나 벌벌 떨고 있던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통통한 엉덩이 부분을 손으로 뒤척였지만, 다행히 실수는 하지 않은 것 같다. 대견하고, 기특했다. 이렇게 아이는 하루하루 몰라보게 달라지고 있었다.
“밥만 축내는 짐승만도 못한 것 같으니라고.”
“황자,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무빈께서는 끼어들지 마십시오.”
“아직 어린 아우가 아닙니까.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마마께서 상관하실 일이 아닙니다. 정연군이 마마의 소생이라도 됩니까?”
황제와 판박이인 이목구비에 서슬 퍼런 눈빛이나 싸늘한 말투까지 더해지니 영락없이 그의 축소판이었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적어도 황제께서는 저렇게 악의 가득한 표정이나 말투를 쓰시지는 않는다. 조금 차가우셔서 그렇지, 진심으로 남을 해하려는 마음은 없으시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지 않은가.
“아바마마께서 널 불쌍히 여기신다 하여 까불지 마라. 네놈은 어차피 그렇게 평생 밥버러지로 살 테니까. 동복궁에 처박혀 나오지도 말란 말이다!”
“황자.”
“무빈은 끼어들지 말라 하였어!”
기어이 울음을 터트린 원우를 품에 안고 일어선 기하는 씩씩거리는 일황자를 서늘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독살스러운 혀를 놀리는 것에 잠시 잊었다. 이 역시 어린아이일 뿐이라는 것을. 그래, 그렇지. 이제 여덟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일 뿐이다.
그런데도 자꾸만 속이 부글부글 끓어서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독한 말을 해서는 아니 되는데, 그래서는 아니 되는 것인데. 제 어깨에 얼굴을 묻고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우는 정연을 보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내게 예를 갖추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더는 정연군에게 그리 대하지 마세요. 말귀가 어두워도 다 알아듣습니다. 황자와 마찬가지로, 정연군 또한 폐하의 아드님이시지요. 무영군이 그리 막대할 천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뭐야? 이, 이…….”
“내게 하대하는 것은, 태자에 오르거든 하시오. 나도 더는 참지 않을 것이니.”
“참지 않는다고? 네깟 게 감히 무엇인데? 아바마마께 총애도 받지 못하는, 반역자의 피가 흐르는 주제에! 너 같은 것은 당장에라도 황궁에서 쫓아낼 수 있다! 내가 못할 것 같으냐?”
“그래? 그것참, 아주 기대되는데.”
입꼬리만 올려 웃으며 자신을 응시하는 기하의 싸늘한 눈빛에도 무영은 물러서지 않았다. 죽 늘어서 있는 아랫것들은 머리를 숙여 일촉즉발의 순간이 어서 빨리 지나가기를 바랐다.
“감히, 감히, 네가―.”
부들부들 떠는 무영군을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던 기하가 먼저 몸을 돌렸다. 아무래도 황자를 먼저 자경전으로 보내야 할 것 같다. 쓸데없이 시간을 지체했다가, 괜히 황후께서 이 일을 아시면 마음 쓰실라.
싫다고 버티는 아이를 권 상궁 품에 넘겨주며 그녀에게 눈짓하자 빠르게 몸을 돌려 자경전 쪽으로 향하는 것에, 무영군이 바락 성질을 부렸다.
“죽고 싶으냐? 감히 네 멋대로 저 빌어먹을 놈을 빼돌려?”
“황자,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당장 데려와라. 당장 내 눈앞에 데려와!”
사납게 팔을 붙드는 무영의 힘이 제법 거셌다. 마음만 먹으면 이깟 어린아이쯤은 충분히 뿌리칠 수도 있지만, 멀어지는 정연군을 보고 있으려니 기운이 쪽 빠졌다.
이제는 눈앞에 없으니 달리 모욕이라고 느낄 법한 얘기를 들어도 상관없지 않은가. 태화당 식솔들이 함께 오지 않아 다행이었다. 요즘 부쩍 욱하는 성미가 번져 현 상궁을 비롯한 아이들 모두가 작은 말에도 발끈하고 나서서 분란을 왕왕 일으켰다. 그들이 있었다면 아마 일황자의 저런 태도를 보고 가만있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황자, 진정하세요.”
“제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영빈께서도 보셨지 않으셨습니까? 버러지 같은 정연군이나 무빈이나, 둘이 나란히 소자를 무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소자가 참아야 합니까?”
다정하게 일황자의 팔을 붙잡은 영빈은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말로는 진정하라고 나긋하게 토닥이면서, 그저 웃으며 관망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우를 훈계하는 것은 소자 소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눈앞에서 정연을 빼돌리다니요?”
“정연군은 자경전에서 낮것을 들기로 선약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대의 훈계를 듣느라 황후마마를 기다리시게 하는 것이 법도에 맞습니까?”
“어디서 감히 내게 법도를 운운하는 것이냐? 네가 황실 사람이라도 되느냐?”
“황자. 계속 그리 무례하게 굴면, 나 또한 더는 참지 않을 것입니다.”
“하, 참지 않아? 네가 참지 않으면 어쩔 것인데? 어쩔 것이냐고!”
순간 영빈이 황자의 앞을 막아섰다. 머리끝까지 열이 오른 황자는 단박에 기하를 향해 달려들 것 같았다. 끝까지 못 본 척 서 있을 줄 알았더니.
“황자, 날이 궂습니다. 금방 비라도 퍼부을 것 같으니 이만 돌아가십시다. 열을 식힌 후에 잘못을 물어도 됩니다.”
잘못? 도대체 잘못한 이가 누구란 말인가?
연신 일황자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이며 씨근덕대는 일황자를 달랜 영빈이 웃으며 등을 돌렸다. 그 뒤를 줄줄이 따르는 수많은 상궁 나인의 딱딱한 얼굴에 기하는 터지는 탄식을 가까스로 막았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정연은 줄곧, 저런 폭언을 홀로 맞섰구나. 울음을 터트리고 실금하는 것이 무리도 아니겠다. 악을 쓰고 달려드는 무영군은 제가 맞서도 이렇게 진이 빠지는데, 아이는 그동안 얼마나 힘들고 아팠을까. 어깨가 축 늘어졌다. 눈앞이 가물가물했다. 곧, 비가 쏟아질 것 같다.
처소로 돌아와 줄곧 침상에 누워 있으니, 눈치 빠른 현 상궁이 온돌을 가져와 아래에 두었다. 따뜻한 온기에 까무룩 잠들었다가 겨우 눈을 뜬 기하는 반쯤 열린 창문 사이로 빗소리가 흘러 들어오는 것을 들으며 느린 숨을 내쉬었다.
“마마, 진정 수라를 아니 드십니까?”
“생각 없네.”
“한술이라도 뜨셔야지요. 하면, 떡이라도 젓수시렵니까?”
“되었어. 동복궁에선 아직 소식이 없나?”
“한참 전에 낮것을 드시고 얘기를 나누시다, 조금 전에 막 자경전에서 오수 드셨다 합니다.”
“그래, 그럴 시간이긴 하네. 황후마마께서 다정하시니 겁을 내진 않은 모양이지.”
“예, 그런 것 같습니다. 조금 전 권 상궁이 다녀갔사옵니다.”
“깨우지 그랬나.”
“다시 다니러 오겠다고 했습니다. 저하께서 오수 드셨으니 기다리지 마시라고요.”
겨우 몸을 일으킨 기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봤다. 빗줄기가 제법 거셌다. 아직 그리 늦은 시각이 아닌데, 하늘이 흐린 탓에 사방이 캄캄했다.
“서 중랑이 늦어지나 보네. 우산은 챙겨 갔나?”
“예. 연금이가 우장과 우산 모두 챙겨 드렸다 합니다.”
“그래, 연금이가 제법 눈치가 있어.”
“고것이 말이 많아서 마마께서 수라도 아니 드시고 주무신다며 내내 걱정하였습니다.”
“밤에 잠을 좀 설쳤거든. 곤해서 그런 것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런 것치고는 지나치게 기운이 없어 보였지만, 현 상궁은 그것이 황자의 부재 탓이라고만 생각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티가 난다더니, 며칠 머물렀던 황자가 동복궁으로 돌아가니, 웃음소리도 전과 같지 않고 어쩐지 썰렁한 기분이 들었다.
저희도 이리 느끼는데 황자를 내내 품에 안고 계시던 상전의 마음이 얼마나 쓸쓸할지 감히 예측하기도 어려워 모두가 눈치를 살피는 중이다.
“저녁에는 황자 저하께서 오시겠지요? 비도 오니 따끈따끈한 빈자떡을 부쳐 올릴까요?”
“응, 그래. 넉넉하게 준비해서 서 중랑과 자네들도 먹을 수 있도록 해.”
“예, 마마.”
“영이, 달이는?”
“비가 와서 그런지 오늘은 잠잠합니다. 낮에 실컷 밥을 먹고 지금은 잠들었습니다.”
“그래. 그 아이들도 매일 이렇게 갇혀 지내면 답답할 텐데.”
흐려지는 기하의 음성에 현 상궁은 물끄러미 그를 바라봤다. 홀로 터덜터덜 처소 안으로 들어올 때부터 뭔가 싸했는데, 아무래도 제가 없는 사이 무슨 일이 벌어지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단순히 황자의 빈자리 때문에 이렇게 기운이 빠지시진 않으셨을 터.
“마마.”
“응?”
“무슨 일 있으시지요?”
“일은 무슨.”
“하면, 어디가 미령하십니까? 의원을 부를까요?”
“그냥 좀, 적적하여 그래. 비까지 오니 괜히 마음이 더 그러네. 물 좀 데워 주겠나? 온욕이라도 하면 나을 것 같아.”
“예, 얼른 탕으로 나르라 하겠습니다.”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는 현 상궁을 바라보며 가볍게 미소한 기하는 제 무릎 위에 팔을 괴었다. 몸이 무거웠다. 마음은 더 무거웠다. 가여운 마음과 안쓰러운 마음이 더해졌는데도 화가 났다.
기하는 끙, 소리를 내며 제 얼굴을 가리고 눈을 감았다. 정연을 지키기 위해선 조금이라도 힘을 기르는 것이 맞는 일인데, 그럴 힘이 제게 있을까. 그럴 수 있을까.
해가 저물었다. 술시(戌時)에 막 들어섰음에도 바깥은 한밤중처럼 캄캄했다. 줄곧 비가 내리고 있는 탓이었다.
“마마, 이제 그만 수라 올리겠사옵니다.”
“응, 그래.”
늦게까지 오수를 즐긴 황자는 아예 저녁 수라까지 들고 올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대로 침수 들러 갔거나. 겁에 질려 그리 떨었으니 마음이 편치 못해 그러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이 썼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져 처소 안에는 빗소리만 가득했다.
“입맛이 없으셔도 드십시오. 낮것도 거르시고, 이러다 또 기력을 잃으시면 어찌합니까.”
혼자 먹으니 밥맛도 없었다. 밥을 반쯤 덜어 국에 말자 현 상궁 얼굴이 굳어졌다. 오늘따라 정연이 좋아하는 찬이 많았다. 평소라면 맛있게 먹었을 찬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상전을 향해 그녀는 슬그머니 머리를 디밀었다
“동복궁에 연금이를 보냈으니 곧 기별이 올 것입니다.”
“쓸데없는 짓을 했네, 비가 이리 쏟아지는데. 서 중랑은?”
“조금 전에 돌아왔습니다. 비에 흠뻑 젖으셔서 바로는 인사 못 올린다 하시어…….”
“응. 고뿔 걸리지 않게 따끈한 것 좀 내주게.”
“예, 마마.”
이럴 줄 알았으면 기다렸다가 서엽과 함께 수라를 받을 것을. 홀로 밥을 먹으려니 입안이 까슬까슬해 모래를 씹는 것 같다. 이제는 이것에 다시 익숙해져야 하는데, 좋은 것은 금방 몸에 익고, 싫은 것은 도통 붙지 않는다.
“현 상궁.”
“예, 마마.”
“못 먹겠네.”
“예? 겨우 두 숟가락 드시고 못 드십니까? 열이 나십니까?”
“도저히 안 넘어가. 당과 주게. 그것이라도 먹게.”
“수라도 아니 드시고 당과를 달라고 하시니, 황자 저하와 마마께서는 어찌 그리 똑같으십니까?”
핀잔을 늘어놓으면서도 상을 물리고 나인을 시켜 당과를 가져오라 이른 현 상궁이 슬그머니 기하의 손을 붙잡았다. 오늘은 손끝이 제법 차다. 비가 내려 한기가 든 탓인지 안색도 좋지 않고.
“꿀떡도 있습니다. 차와 함께 내올 것이니 그것이라도 드십시오.”
“응.”
단것을 좋아하시니 그것이라면 드실 테지.
물끄러미 기하를 바라보던 현 상궁은 연신 초조한 얼굴로 연금을 기다렸다. 빗속이라 늦나, 나간 지 한참 되었는데.
하릴없이 문을 쳐다보며 기하의 안색을 살피던 현 상궁은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에 놀라 몸을 일으켰다. 차와 떡을 내올 나인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문 여는 소리가 거칠어 눈을 돌리니,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오는 황제의 발소리가 사납고 매서웠다.
“기별도 없이…….”
“매번 그리 같은 말을 반복하면 질리지도 않느냐?”
왜 또 심술이 잔뜩 난 표정이실까.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쉰 기하는 황제를 따라 자리를 잡고 눈짓으로 현 상궁을 물리려 했다.
“바깥에 들여오려던 것, 가져와.”
“예, 폐하.”
현 상궁이 뒤로 물러나자마자 문이 열리면서 조그마한 상이 들어왔다. 따끈한 차와 떡, 당과 따위가 놓여 있는 소박한 상차림에 황제는 잘생긴 눈썹을 사납게 뒤틀었다.
“수라는 들고 이따위 것을 입에 대는 거냐?”
“예. 좀 전에 상을 물렸습니다. 폐하께서는 수라 젓수시었습니까?”
“일찍도 물어본다.”
물끄러미 황제를 바라보던 기하는 투박한 손짓으로 차를 우렸다. 새콤달콤한 유자청에서 우러난 차향이 방 안에 진동했다.
“정연과 함께 낮것 들었다.”
“그러셨습니까?”
“며칠 새 제법 의젓해졌더구나. 황후 앞에서 낯도 가리지 않고.”
줄곧 굳어 있던 얼굴이 황자의 말이 꺼내지기 무섭게 변한다. 가벼운 미소가 걸린 기하의 얼굴을 바라보던 황제는 긴 숨을 내쉬었다. 저녁 내내 헛소리를 들었더니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그댄 어째 만날 일만 만들고 다녀?”
“예?”
찻잔에 차를 따르던 기하의 손이 멈췄다. 콸콸 쏟아지던 뜨거운 찻물이 튀었다. 저도 모르게 움찔 떨며 물러나자 여지없이 쯧쯧, 하는 황제의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힌 기하를 향해 손을 내민 황제가 손, 하고 사납게 중얼거렸다. 찻주전자를 내려놓고 손을 내미니, 이리저리 살피는 시선이 무감각해 보인다.
“제대로 하는 것이 하나도 없군. 그간 뭘 배웠느냐?”
“송구합니다.”
“손이 왜 이리 차.”
“온욕을 너무 오래 하였나 봅니다.”
“머리도 제대로 말리지 않고 그 꼴이 다 뭐냐. 아랫것들이 수발도 제대로 들지 않느냐?”
“아닙니다. 번거롭고 귀찮아서.”
오늘따라 집요하게도 물으신다. 사실 만사가 다 귀찮고 머리도 아파서 푹 쉬고 싶은데, 갑자기 찾아오셔서 빤히 바라보시기나 하시고. 분명 좋지 않은 일로 타박하러 오신 것 같은데. 혹여 낮의 일을 벌써 들으셨나.
“게으르기는. 이것도 귀찮고 저것도 귀찮아서 제대로 살겠느냐?”
“꾸중하러 오셨습니까?”
“뭐야?”
“하명하십시오. 다 듣겠습니다.”
기하는 향긋한 향이 번지는 찻잔을 어루만지다가 손을 멈췄다. 저를 빤히 바라보는 황제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탓이었다.
“갑자기 비가 와서 날이 차지니 아이가 곤하였던 모양이다. 오는 길에 보니 잠들어 제 처소로 가더구나.”
“예.”
“투기를 하려거든 좀 그럴싸하게 해라. 어린아이 앞세워 그게 뭐 하는 짓이냐? 꼴사납게.”
“연호당에서 오시는 길이십니까?”
“그건 또 왜 물어?”
“영빈 말만 들으시고 타박하실 것이라면 잘 알겠으니, 금일은 그냥 가십시오.”
“뭐야? 이것이 또―.”
“어찌 한쪽 말만 듣고 이러십니까? 폐하께서는 정녕 그리 편협한 분이셨습니까?”
“너야말로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댕강 잘라먹는 버릇은 누구한테 배웠느냐?”
무슨 말을 어떻게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은 마냥 타박 당하고 싶지 않았다. 잘못이 전혀 없다고 생각지는 않지만, 일일이 설명하기도 힘들고.
내일 웃는 낯으로 황자를 보려면 기운을 내야 하는데, 오늘 밤은 또 얼마나 길지 벌써 눈앞이 캄캄했다. 얼른 끝내고 황제께서 처소로 돌아가시면 서엽을 불러 술잔이나 기울여야겠다.
“후궁이란 것이 툭하면 가라 마라 하느냐? 이곳에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가란 소리가 나와? 너, 내게 관심 받고 싶어 그러는 것이냐?”
“관심이야 당연히 받고 싶으나, 그 때문에 그런 말씀을 올린 것은 아닙니다. 곤합니다. 어서 가십시오.”
아예 돌아앉으려는 기하의 무릎을 붙잡은 황제는 움찔 놀라 허우적거리는 그의 발목을 쑥 끌어당겼다. 그간 살이 내리긴 하였어도 사내인지라 제법 무게가 나가 가볍게 딸려 오지는 않는다.
“어찌 이러십니까?”
“오냐오냐 봐주었더니 끝도 없이 기어오르느냐?”
“폐하.”
“겨우 여덟 살 먹은 어린아이와 대적해서 뭐에 쓰려고?”
“무슨 말을 어찌 듣고 오신지는 모르겠사오나…….”
“듣긴 뭘 들어. 그것들이 지껄이는 소릴 곧이곧대로 듣고 네게 이런다고 생각하느냐?”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기하의 눈동자를 응시하던 황제가 신경질적으로 주먹을 그러쥐었다. 도대체가 하나부터 열까지 죄다 마음에 드는 것들이 없었다.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또 저렇고, 매사 불평불만을 일삼으며 징징거리기나 하는 것들에 둘러싸여 있으니, 늘 화가 나고 머리가 아프고 짜증이 휘몰아쳤다.
“영빈과는 마주치지 않도록 해.”
“오는데 피하란 말씀이십니까?”
“계속 토라져서 꽁해 있을 게냐?”
“계집도 아닌데 토라지는 건 무엇입니까? 폐하께서 총애하시는 후궁이니 소인은 그저 입 다물고 있겠습니다. 그러면 되지요?”
“총애고 뭐고 네 멋대로 생각해도 좋다. 다만, 그 영민하지 못한 것에게 휩쓸릴 필요는 없단 말이다. 그리 겪고도 아직 모르느냐?”
제대로 상대가 되었어야 겪어 보지. 기껏해야 다섯 해 전, 사냥을 함께 나갔다 온 것이 전부가 아니던가. 그때도 사사건건 옆에서 시비 걸던 그를 애써 무시했는데, 결국엔 제 잘못으로 다친 것에 호들갑을 떨어대며 눈물까지 쏟았었지. 황제께선 그때…….
“뭐냐, 그 표정은.”
“아닙니다.”
덜덜 떨며 우는 영빈을 품에 안고 직접 말을 모시던 기억이 선명한데, 굳이 이리 찾아와 면박 주지 않으셔도 충분히 알고 있단 말이다. 영빈과 저의 차이를, 가여운 정연과 일황자의 위치 또한.
“무영의 성정은 불같다. 내게 잘 보이려 애쓰면 애쓸수록 다른 것에 분풀이하는 것을 알고 있어. 정연과 잘 지내라고 넌지시 얘기한 것에 화가 났겠지. 생전 입에 올린 적 없는 아우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이 불안했던 거다.”
“이해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 네게 그것까지 이해하라고는 안 한다. 분명 금일은 무영이 잘못하였다. 궁 안에 소문이 더 커지면 무영을 불러 이실직고하게 할 테니, 그대는 그냥 있으면 된다.”
“하지만…….”
“그대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 괜히 움직였다가 더 시끄러워질 수도 있어. 그것은 짐이 원치 않는다.”
황제는 지쳐 보였다. 늘 사나운 표정으로 모든 이를 아래로 내려다보던 그의 지친 표정에 기하는 입술을 다물었다. 하면, 다 알고 계셨던 것인가. 책망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당부하러 오신 것이던가.
“소인이…….”
“신첩. 그리 말했는데도 또 잊었느냐? 대체 몇 번을 알려주어야 이 머리통에 새길 거냐?”
이마를 톡톡 건드리는 황제의 손가락을 날름 붙잡은 기하는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쥐었다. 제 체온이 낮아진 탓에 평소보다는 차지 않은 황제의 손은 여전히 강건하고 아름다우며, 따뜻했다.
“요즘 그대와 정연 때문에 짐이 머리가 아프다.”
“송구하옵니다.”
“어서 몸이나 건강해지라고 했더니 쓸데없는 짓만 하고 돌아다니니, 원.”
“송구…….”
“됐다. 그놈의 송구는 그만 찾고, 차 식는다.”
“예, 폐하.”
기하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황제의 앞에 찻잔을 내밀었다. 동그랗게 빚은 꿀떡은 윤기가 반지르르해 먹음직스러웠다.
“아니 드십니까?”
“생각 없어.”
“맛이라도…….”
“안 좋아한다.”
“그래도 좀 드셔 보십시오. 맛이 좋습니다.”
“되었대도.”
“아, 하십시오.”
굳이 입술 앞까지 떡을 내미는 기하를 바라보던 황제가 마지못해 입을 벌렸다. 쏙 들어오는 동그란 꿀떡은 달고 부드러웠다. 쫄깃한 식감을 느끼며 천천히 씹는데, 생긋 웃으며 멀어지는 기하의 얼굴에 아쉽다는 생각이 일었다.
“황자가 없으니 쓸쓸합니다.”
“며칠이나 데리고 있었다고.”
“사람이 난 자리는 표가 난다는데, 아이가 있다가 없으니 궁이 텅 빈 것 같습니다.”
“오후 내내 같이 있지 않으냐.”
“그거야 그렇지만요. 돌아가고 나면 더 쓸쓸합니다.”
“네가 지나치게 정이 많은 탓이다.”
“폐하께서도 마찬가지시잖아요.”
빛깔이 고운 떡을 하나 더 내미는 기하를 향해 고개를 젓자, 금세 입술을 내민다. 얼른 그것을 제 입속으로 넣고 씹는 얼굴이 예전과는 조금 다르게 보인다. 전에는 그저 생긋생긋 웃기만 하더니 이제는 제법 다른 감정도 보일 줄 알고. 궁을 비웠던 그 긴 시간 동안 홀로 켜켜이 쌓아둔 외로운 그림자가 아직도 곁에 덩그러니 보인다.
“폐하께서도 인정이 넘치십니다. 다정하시고, 따뜻하시고.”
“입바른 소리 할 것 없다.”
“진심입니다.”
“황궁 안에서 누가 짐을 다정하고 따뜻하다고 해? 약이라도 먹은 게냐?”
“정말인데…….”
말끝을 흐리며 자세를 흐트러트린 기하는 슬쩍 무릎을 세웠다. 등이 좀 추운 것 같아 몸을 웅크렸다. 덜 마른 머리카락 때문에 옷이 젖은 탓에 한기가 들었다.
“정이 많으시니 신첩도 이리 살려주셨지요.”
“널 죽이려 들었으면 애당초 황궁에 발 들이기 전에 그리했을 게다.”
“꼭 그렇게 무서운 말씀을 아무렇지 않게 하십니다.”
기하는 떡을 씹으며 당과를 집어 황제에게 내밀었다. 색이 곱게 입혀진 당과는 꿀을 발라 반짝였다. 달큼한 냄새에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단것은 싫다.”
“맛있습니다.”
“그대나 먹어라.”
조그마한 당과를 입에 넣고 씹다가 제 손가락도 쪽쪽 핥는 철부지 후궁을 바라보며 황제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어린 황자를 데리고 있을 때는 제법 반듯한 어른 태가 나더니만, 이렇게 보면 누가 애고 누가 어른인지 모를 노릇이었다.
“폐하.”
“왜.”
“오늘은 예서 침수 드실 것이지요?”
“싫다.”
“어쩌서입니까? 저녁에 걸음 하시는 것은 침수 들러 오시는 것 아닙니까?”
“수신전에 가서 침수 들 것이야.”
“연호당에 가실 것입니까?”
“어허, 그놈의 연호당 타령은. 수신전으로 간다 하지 않았더냐?”
“그냥 예서 주무시면 아니 됩니까?”
황제가 후궁의 처소에 드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상식적인 선에서는 도저히 생각 못 하는 것 같은 어리석은 기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려니, 두통이 더 깊어졌다. 얌전히 잠이나 잘 것이지 이리 뒹굴, 저리 뒹굴다가 손을 퍽퍽 올리질 않나, 다리를 감싸질 않나. 시정잡배들이나 할 것 같은 사나운 잠버릇에 뜬눈으로 밤을 새우던 일이 대체 몇 번인 줄은 아는지.
“네가 양심이 있으면 그런 말은 하지 못할 터.”
“신첩 처소에서 침수 들고 가시라는 말이 양심 운운하실 일입니까?”
“그렇다.”
“음흉하십니다.”
“뭐라?”
이것이 대체 뭘 잘했다고 눈을 흘겨, 흘기길? 그리 흘겨보면 특출 나게 어여삐 보이는 것도 아닌 것이, 어디서 배워온 것은 있어서.
“좋습니다. 신첩도 신첩의 도리를 다할 테니, 예서 침수 드십시오.”
“하, 떡 먹다가 목구멍 막히는 소리 집어치우고 비켜라. 누가 예서 침수 든다 했어?”
툭하면 입이나 내밀 줄 알고, 대들기나 할 줄 알지. 이것은 어디 다소곳한 맛도 없고, 색기라곤 눈 씻고 보려야 볼 수 없으니.
“뭘 그리 보느냐?”
“알겠습니다. 연호당으로 가십시오.”
“누가 연호당으로 간다 했어?”
속이 터진다, 터져. 이것은 툭하면 영빈이나 들먹거리고 연호당을 지껄이니, 도대체가 사람 속을 어찌 이리 긁어대는지. 일부러 저러는 것인가? 일부러라면 저것이 어디서 배워먹은 수작질이던가.
“한 번만 더 그 입에 영빈이나 연호당을 올리면 경을 칠 것이다.”
“외로워서 그럽니다.”
툭 내뱉어진 진심에 황제는 잔뜩 찡그렸던 얼굴을 폈다. 빗소리가 더욱 거세졌다. 비릿한 비 냄새가 그다지 기분 좋은 아니었으나, 밤중에 듣는 빗소리는 늦은 봄의 정취에 흠뻑 젖게 했다.
그 때문인가. 유난히 울적해 보이는 기하의 얼굴을 애써 모른 척하던 황제는 기어이 울먹이는 그를 조금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외로운 것과 연호당이 무슨 상관있다고.”
“폐하께서 연호당에서 침수 드시면…….”
“아니 간다 하지 않아.”
“영빈이 어여쁜 것은 압니다. 여인처럼, 아니 황궁 어느 여인과 견주어도 어여쁘고, 폐하께 상냥하고, 애교 있고, 그만한 후궁도 없다고 칭찬이 자자합니다. 가진 것이 많아 아랫사람들에게도 인심이 후하다지요.”
“너 지금 투기하는 거냐?”
“어찌 감히 영빈과 비교하겠습니까? 폐하께서 영빈을 자주 찾으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폐하께서 연호당에 가실 때마다 신첩은 그저 보고만 있어야 합니까? 싫은 것을 싫다고 말씀도 못 올립니까?”
이것이 차가 아니라 술을 먹은 게다. 분명히 그럴 것이다. 연호당에 아니 간다고 그리 말했는데도 제가 하고 싶은 말만 실컷 떠들어대니, 이제는 말리는 것도 의미가 없었다. 그래, 어디까지 떠드는지 한 번 보자.
“그냥 좀 외롭고 쓸쓸해서 그럽니다. 홀로 누워 있으면 너무나 적막하고, 또…….”
“그만 떠들어라. 나불나불, 지치지도 않느냐.”
금세 입을 다무는 기하에게서 시선을 돌린 황제가 지밀상궁을 불렀다.
“예서 침수 들 것이다. 자리 보아라.”
“예, 폐하.”
“쌀쌀하다. 온돌을 두둑이 넣어.”
“예.”
분주히 움직이는 상궁 나인들을 바라보며 기하는 생긋 웃었다. 조금 전까지 다 죽어가는 얼굴이더니 금세 방싯거리는 모습에 기가 막혀 보니, 제가 직접 수발을 들겠다며 나선다.
손을 휘휘 저어 물리고 용포를 벗은 황제는 나른한 얼굴로 침상에 기대앉아 연죽(煙竹 : 담뱃대)을 입에 물고 끝에 불을 붙였다. 금세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자, 기하는 슬그머니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바람 들어온다, 문 닫아.”
“연기가 맵습니다. 침소에 냄새라도 배면 어찌합니까? 황자에게 이로울 것이 없는데요.”
“연기 조금 마신다고 안 죽는다. 와서 얼른 누워 자라.”
“벌써요? 아직 해시(亥時 : 밤 9시부터 11시 사이)도 되지 않았습니다.”
“누우라면 누워.”
입술을 방끗거릴 때마다 황제의 입에서 긴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하는 그의 말대로 침상 가운데에 반듯이 누웠다가 슬그머니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가만히 천장을 올려다보니 오던 잠도 달아날 것 같다. 긴긴밤이니 좋은 얘기나 해주시지, 무조건 자라고 하시면서 연죽이나 물고 계시다니. 폐하는 역시 야속한 분이다. 다정하고 따뜻하다고 했던 말은 모두 취소다.
“사냥을 갈 것이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창문 쪽으로 몸을 튼 황제는 긴 다리를 뻗어 한쪽에 침상에 대충 걸치고 거의 드러눕다시피 한 자세로 연죽만 피워댔다.
“신첩도…….”
“이번엔 절대 아무거나 주워 오지 않겠다고 약조해라.”
“그럼 황자도 데리고 갑니까?”
“황자? 정연 말이냐? 그 어린것을 어딜 데리고 가?”
“하지만…….”
“아서. 걸음도 엉망으로 걷는 것을.”
“하면 신첩은…….”
“오늘 보니 황후와 곧잘 지내더라. 그리 죽을상 하고 있지 말고, 가서 바람이나 쐬다 와.”
황자가 걱정되긴 했지만, 황궁 밖에 나가 보는 것이 얼마 만인지 마음이 금세 들떴다. 미소를 감추고 황제를 힐끔거리니, 긴 연기를 내뱉던 그가 손에서 연죽을 내려놓으며 일어섰다.
“주무십니까?”
“곤하다.”
“일찍 기침하실 것이지요?”
“신경 쓸 것 없어, 알아서 나갈 터이니.”
“내일은 신첩도 꼭 일찍 일어나겠습니다.”
의지가 엿보이는 얼굴이었지만, 어려울 것을 알고 있다. 딱히 기대하는 바도 없었다. 함께 조강을 하러 갈 것도 아닌데 굳이 새벽부터 일어나 긴 하루를 맞을 필요는 없지.
“이리 오너라.”
“예?”
“잔소리 말고 이리 와. 또 밤새 뒤척여 잠 못 이루게 할 거냐?”
“아니, 그것이…….”
그렇다 해도 이것은 너무 갑작스러웠다. 대뜸 팔을 벌리며 안기라니. 얼굴이 화끈거려 말끝을 흐리니, 손가락을 까닥거리는 황제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후궁이란 것이 기수는 다 걷어차고, 배는 뒤집어 내놓고. 남세스러워 어디 가서 말도 못 했다.”
슬그머니 곁으로 다가오는 기하의 허리를 쭉 끌어당긴 황제가 도톰한 기수를 가슴까지 덮었다.
“폐하, 답답합니다.”
“나는 이리 자는 것이 좋다. 답답해도 참아.”
“폐하…….”
“또 한 번 짐을 걷어차면 그때는 침상 아래로 던져줄 것이다.”
단호한 음성에도 쉬이 대답하지 못한 이유는 심장이 지나치게 빨리 뛰기 때문이었다. 얼굴에 열이 올라 화끈거리는 것을 손 쓸 새도 없이, 황제의 커다란 손이 기하를 끌어안았다.
“아…….”
가깝다. 너무 가까워서 숨도 크게 못 쉬겠다.
숨소리가 깊다. 옴짝달싹 못 하게 팔을 붙잡고 잠든 황제를 한없이 바라보던 기하는 슬그머니 손을 뻗었다. 몇 번이나 움직이다 구박을 받은 터라, 이번에는 꽤 오랜 시간 한 자세로 숨죽여 있어야 했다.
겨우 손가락 끝으로 황제의 옷자락 위를 더듬었다. 따뜻한 피부, 아름답고 단정한 얼굴, 단단한 가슴. 모든 것을 눈에 담고 싶었다.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온 웃음을 얼른 감추다, 나른하게 숨을 내쉬며 금세 돌아누우려는 황제의 손을 붙잡았다. 컸다, 제 손이 작은 것도 아닌데. 유난히 크고 단단한 손을 붙잡아 슬쩍 잡아당기니, 촘촘하게 솟은 속눈썹이 바르르 떨렸다.
두근두근. 가슴이 요란하게 뛰었다. 긴 시간 동안 연정이 모두 사그라진 줄 알았는데. 그저, 사람에 대한 그리움만 남은 줄 알았었는데. 아직도 이리 가슴이 뛰는구나.
“폐하, 편히 주무십시오.”
고요한 기하의 음성이 방 안을 울렸다. 스르르 눈을 감고 이내 곧 소록소록 숨소리를 내며 기하는 황제의 품을 조금 더 파고들었다.
그 순간 눈을 뜬 황제는 잠에 취한 눈으로 제 품에 안긴 동그란 머리통을 바라보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오랜만에 참으로 달고 평온한 꿈을 꿀 것만 같았다.
“벌써 기침하셨습니까?”
푹 잠긴 기하의 음성에 자리끼로 목을 축이던 황제가 뒤를 돌아봤다. 새벽녘부터 연신 이불을 걷어차고, 몇 번이나 배를 걷어 올리던 기하를 떠올리며 황제는 자연스럽게 눈썹을 찌푸렸다.
“어찌 그리 보십니까?”
“잠버릇은 대체 언제 고칠 것이냐?”
웃기는. 대답도 하지 않고 배시시 웃는 꼴이 어이가 없었다. 감히 황제 앞에서 가만히 누워 있는 것도 기가 막힐 지경인데, 표정을 보아하니 또 말대꾸를 하려는 모양이다.
“군영에 있을 때는 밧줄로 꽁꽁 묶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모양이란 말이냐?”
“어제는 조용히 자지 않았습니까?”
대답 없이 혀만 차는 황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하는 조용히 일어나 앉으며 제 무릎을 모았다. 가만 보면 이따금 저런 자세로 웅크리는데, 다 큰 사내가 하기에는 뭔가 좀 어색하고 이상한 모양새였다. 얼굴이 말갛고 선해 보인다고 해도 어쨌거나 보통의, 조금 날래 보이는 정도의 사내가 아니던가.
“하품 참지 말고 곤하면 더 자라.”
“조강에 참석하셔야지요?”
“그래.”
“초조반 들고 가십시오.”
“일없으니 조금 더 자라.”
흠, 하고 긴 숨을 내쉬는 기하는 사실 반쯤 잠에 취한 상태였다. 어떻게 눈을 뜨고 일어나 앉아 있긴 한데, 온몸에 피가 통하지 않는 것처럼 무겁고 머리도 개운하지 않았다.
늘 억지로 눈을 뜰 때면 머리가 아파, 종일 기분이 나아지지 않는다. 그래서 가능한 몸이 제대로 움직여질 때까지 누워 있는 것뿐인데, 사람들은 늘 게으르다고 타박이었다. 물론, 보통 사람들보다 오래 자는 것은 맞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늦게 잠들기 때문이란 말이다.
“옷이나 좀 추슬러라, 꼴사나워.”
“예?”
어깨는 훤히 다 드러내놓고 앉아 잠이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으면 뭘 어쩌라는 거냐. 그냥 누워 자라는데도 부득불 고집을 부리면서 도통 움직일 생각도 없어 보이니, 저 꼴을 하고 있는데 지밀을 부르기도 뭣했다.
“대체 언제 철이 들 거냐.”
가까이 다가가 어깨가 드러난 옷을 끌어 올리자, 그제야 얼굴을 확 붉힌다. 못난 것이 그리 뽀얗게 얼굴을 물들이면 어여뻐 보이는 줄 아는지.
“잠 다 깼으면 일어나라. 초조반 들이라 할 테니.”
“예, 알겠……, 아아.”
침상 아래로 발을 내딛던 기하가 크게 휘청거렸다. 그대로 얼굴부터 처박힐 뻔한 것을 간신히 붙잡은 황제는, 기우뚱한 몸을 꽉 끌어안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미련한 것이!
“뭐 하느냐?”
“송구하옵니다.”
“대체 너는!!”
“침수 들었다 일어나면 피가 제대로 돌지 않아서 그러는 것이라고, 의원이…….”
“가지가지 한다.”
혀를 끌끌 차며 침상 끄트머리에 걸터앉은 황제는 사나운 눈으로 기하를 책망했다. 민망함과 어색함에 고개를 숙인 기하는 다음부터는 절대로 이리 먼저 나서지 않을 것이라 속으로 다짐에 다짐했다. 어쨌거나 다음 기회란 것이 주어져야 가능한 것이지마는.
“다리 저리느냐?”
“예? 아… 늘 아침엔 그래서…….”
“이리 뻗어 봐.”
“아닙니다. 어찌…….”
“더 험한 꼴도 보았으니 괜찮다. 뻗어 봐. 좀 주무르면 낫다.”
험한 꼴은 험한 꼴이고, 그건 조금 많이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다른 곳도 아니고 감히 황제 폐하께 맨다리를 뻗어 보일 만큼 어리석진 않았다. 여인의 어여쁜 다리도 아니고, 투박하고 상처투성이인 비루한 몸뚱이인데.
“너는 꼭 한 번 말을 하면 듣질 않아.”
언제 이렇게 가까이 오셨담.
낭패감 어린 기하의 얼굴을 외면하며, 황제는 능숙하게 발목을 붙잡아 다리를 펴게 하고 천천히 주무르기 시작했다.
적당히 힘을 가해 근육을 풀어주자, 저릿한 쾌감에 저도 모르게 입술을 바르르 떨던 기하는 기어이 제 입을 틀어막았다. 다리는 시원한데 몸에 힘은 빠지고 이상한 소리가 나오려고 해서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저기, 폐하, 저기…….”
“어마마마께서도 아침은 늘 힘들어 하셨다. 그래도 너처럼 침상에서 굴러떨어지시진 않으셨어.”
“그것은…….”
아프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서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내자, 무릎까지 꾹꾹 주물러주던 황제가 피식 웃었다. 기하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다 다시 얼굴을 붉히며 흐트러진 매무시를 만졌다.
그러고 보니 제 꼴이 엉망일 테다. 머리카락도 흐트러졌을 테고, 어디 침이라도 흘리진 않았을지 창피하고 부끄러워 얼굴을 가리자 황제의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부끄러운 것은 아느냐?”
“아픕니다.”
“반대쪽도 내어라.”
아픈 만큼 시원했다. 정신이 퍼뜩 깨는 것도 같고, 평소의 불쾌함도 없고, 무거웠던 몸이 조금씩 느슨해지는 것 같아서 얼른 반대쪽 다리를 내밀었다.
“딱 한 번뿐이다.”
“예. 대신에 신첩도 폐하의 어깨를 주물러 드리겠습니다.”
“일없다.”
“신첩의 손힘이 세어 잘 주무른다는 소리는 여러 번 들었습니다.”
“잘한다, 후궁이란 것이.”
“그것은 혼례 올리기 전의 일입니다.”
탁, 소리 나게 기하의 종아리를 치고 물린 황제는 다시 일어나 기척을 냈다. 순간, 스르르 열린 문 사이로 궁녀들이 차례대로 들어왔다. 기하는 조그맣게 몸을 구부리고 물끄러미 황제를 바라봤다.
대세수(손을 씻다) 하시고, 수부수(양치질을 하다) 하시고, 소세(梳洗 : 세수하다)까지 듭시니 잘나신 얼굴이 더욱 반짝거린다. 물기를 탈탈 터는 황제를 향해 공손히 영견을 바친 궁녀가 물러나자, 이번에는 지밀상궁이 새 용포를 가지고 다가왔다.
“마마, 소세부터 하시겠사옵니까.”
“빈은 조금 더 자게 할 것이니 그냥 두어라.”
“예. 하면 초조반은 수신전에 준비하라 이를까요.”
“예서 먹고 가마.”
“초조반 들이겠사옵니다.”
고소한 전복죽 냄새가 났다. 황제는 반듯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 수저를 들다 말고 기하를 힐끔 바라봤다.
“먹어볼 테냐?”
“아닙니다.”
“빤히 쳐다보지 마라.”
“예.”
단정하게 앉아 수저질하는 황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하는 슬그머니 눈을 감았다. 오늘부터는 정말로 일찍 일어나 함께 초조반을 들고 바른 생활을 하려 하였는데, 갑작스러운 변화에 몸이 더 버티지 못하는 것 같다.
지난밤, 폐하를 너무 오랜 시간 바라보고 있었던 탓일까. 졸음을 감추려 해도 자꾸만 잠이 온다. 이러면 또 방자하다고 호통을 들을 것인데, 어쩌지.
“마…….”
“그냥 둬.”
당황한 지밀상궁의 표정에도 황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천천히 죽을 삼켰다. 조금이라도 먹고 자라고 할 것을 그랬나. 이대로 두면 아침 수라 받을 즈음에나 겨우 눈을 뜬다지.
혹여나 그간 습관이 들었을까 염려하였던 정연은 외려 동복궁에서 홀로 잘 일어나 초조반을 들고, 수업도 착실하게 따른다고 했다.
그러게, 누가 그렇게 늦게까지 자는 사람 빤히 쳐다보라 하였나. 고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