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 외로움을 견디는 법
“지난번 뵈었을 때보다 혈색이 훨씬 좋아지셨습니다.”
“그렇습니까.”
“말씀을 낮추시라니까요.”
“생명의 은인께 그럴 수는 없지요.”
기하는 태의를 향해 내밀었던 손을 거두며 제 곁에 시무룩하게 앉아 있는 황자를 다시 품에 안았다. 저녁 수라를 엉망으로 만들어 따끔하게 야단치고 그대로 물린 탓에 내내 울다 겨우 울음을 그친 상태라, 평소처럼 살갑게 품 안으로 파고들지도 않는다.
“금일은 손등에 침을 좀 놓겠습니다.”
“몇 개나 맞습니까?”
“글쎄요. 혈을 보고 놓을 것이라―.”
“안 하면 아니 됩니까? 혈색도 좋아졌는데요.”
“하는 것이 더 좋지요. 얼른 완쾌하실 마음이 있긴 하십니까, 마마?”
그대로 두자니 내내 울던 것이 마음에 걸리고, 또 받아주자니 도무지 개선의 여지가 보이지 않아 머리가 아팠다. 요즘 기하는 황자 때문에 고민이 컸다.
다행히 황궁 안에서 정연군을 크게 신경 쓰는 인물은 없었고, 황후께서 청을 들어주시면서 한동안은 태화당에 머물라 하셨으니 당장 앞에 닥칠 걱정거리는 날렸는데, 아이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저하, 마마께 침을 놓아야 하니 잠시 내려앉으시겠습니까?”
온화한 태의의 목소리에 시선을 든 황자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팩 고개를 돌렸다. 그 심술궂은 모습에서 문득 황제의 모습이 보인 것 같아, 기하는 가볍게 미소하며 황자의 동그란 어깨를 다독였다.
“크게 움직이시면 아니 됩니다.”
한 팔로 황자를 끌어안고 남은 한쪽 손을 내밀자, 태의는 혈을 짚어 긴 침을 하나씩 꽂았다. 차마 아이 앞에서 소란을 떨 수 없었기에 날카로운 침이 손등에 꽂힐 때마다 움찔움찔하며 숨을 참은 기하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황자의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이 작은 아이의 온기가 제게는 위안이 되었다. 정말로 이상한 일이지.
“마마, 배고파.”
침묵이 내려앉은 짧은 순간을 견디지 못한 황자가 고개를 빠끔 들었다.
“어이쿠, 저하. 그리 움직이시면 아니 된다니까요.”
꾸지람도 뭣도 아닌 태의의 말에 노여움을 타는지 시무룩한 아이의 얼굴에 금세 눈물이 서렸다. 뽀얀 웃음이 예쁜 아이는 마음이 심하게 유약했다.
입술을 삐죽거리며 태의를 돌아보다 기하의 손등에 꽂힌 무시무시한 침을 보고는 기어이 와앙, 울음을 터트렸다. 말도 통하지 않고 막무가내인 황자에게 이미 지친 현 상궁이 가까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지만, 아이는 그럴수록 기하의 품만 파고들었다. 아마 제게 유일하게 한없이 따뜻하고 다정한 기하가 마음에 든 탓이리라.
“저하, 저하께 뭐라 한 것이 아닙니다.”
제 손주뻘 되는 황자 앞에서 쩔쩔매는 태의를 향해 미소 지은 기하는 요란하게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를 참을성 있게 다독였다.
어릴 땐 다 그렇다. 뭐가 그리 서러웠는지 저 자신도 툭하면 눈물 바람이었지. 그때마다 아버님께 왕자가 체통을 잊고 유난을 떤다면서 더더욱 혼이 났었다. 그때 필요했던 것은 그저 따뜻한 손길이었는데. 그것만이 필요했을 뿐인데.
“황자, 배고프지요? 그리 울면 더 허기진답니다. 요기할 것을 내오라 할 테니 이제 그만 눈물을 거두세요. 황자를 나무란 것이 아니니 괜찮습니다.”
훌쩍거리며 기하를 올려다보는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런 표정을 마주할 때마다 기하는 안쓰러움에 아이를 꼭 끌어안았는데, 그것이 좋은 것인지 황자는 눈물을 닦으며 품에 안겨 이내 잠들었다.
“그리 계시니 황자 저하께서 꼭 마마의 아드님 같으십니다.”
너털웃음을 지으며 물끄러미 기하를 바라보던 태의는 어디선가 들어오는 바람에 슬쩍 고개를 돌리다가 화들짝 놀라 그대로 몸을 숙여 예를 표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어두운 그림자에 가려졌던 황제의 표정은 흉흉했다. 문 앞에 서서 물끄러미 기하와 태의를 바라보던 황제가 저벅저벅 걸어 안으로 들어왔다. 기하의 얼굴이 낭패감으로 얼룩졌다. 정무에 바쁜 그가 다시 태화당을 찾을 것이라곤 생각지 못한 탓이었다.
“치료는 다 끝났느냐.”
“예, 폐하. 잠시 후에 침만 제거하면 되옵니다.”
“하면 그대는 물러가라.”
“예, 폐하. 소신은 이만 물러가겠나이다.”
가벼이 읍하며 뒤로 물러선 태의가 침소를 빠져나가기도 전에, 황제는 무심한 눈으로 아이를 품에 안은 기하를 내려다봤다. 그 표정이 어찌나 서늘하던지, 제 아들을 바라보는 표정으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뭐냐.”
“다 아시면서 어찌 물으십니까. 폐하의 아드님이시지요.”
“네가 그것을 왜 그리 끼고 있는지 묻는 것이다.”
“황후마마께 윤허 받아…….”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온 황제의 심드렁한 눈이 황자의 등을 향했다. 아직 잠든 것은 아닌 모양인데 저리 품에 딱 달라붙어 고개도 돌리지 않는 모습에 기가 찼다.
천지 분간도 제대로 못 하는 짐승이나 다를 바 없는 우매한 것. 겁이 많고 유약하며 먹성만 좋아 수발드는 상궁들이 매번 난감해 한다지. 툭하면 울고 실금하고 학문은커녕 말도 느린 것이 황자라니. 전장에서 돌아온 후, 처음 보았던 그때가 아직도 눈에 선했다.
“천지 분간 못 하는 것은 스라소니 놈들이나 저것이나 진배없다만, 네 멋대로 그리 움직이면 곤란하다.”
“영빈이 폐하께도 청을 올렸나 봅니다.”
“게서 영빈 얘기가 왜 나오느냐?”
“총애하는 후궁의 청이라 무작정 들어 주시려는 것이옵니까? 폐하께서 그리 편협한 분이신지는 미처 몰랐사옵니다.”
“앞뒤 말 잘라먹는 버릇은 누구에게 배웠어? 영빈이 예서 왜 나오느냐고 묻지 않아?”
황제가 호통칠 때마다 아이는 기하의 품에서 바르작거렸다. 훌쩍거리면서도 숨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듣자 하니 처음 황제께 예를 올리던 날에 야단맞자 그대로 울음을 터트리며 실금했다지. 그 모습에 황제께서는 더더욱 화를 내셨고.
“영빈의 청 때문에 오신 것이 아닙니까?”
“쓸데없는 소리 말고, 그것이나 동복궁으로 보내라. 수발하는 상궁 나인이 몇인데, 몸도 성치 않은 네가 그 짐승 같은 것을 품에 안고 있어?”
“폐하, 짐승이라니요. 황자가 다 듣습니다.”
“말 못 하고 먹고 싸는 것밖에 할 줄 모르면 짐승이나 진배없다. 뭐해? 내가 끌어내랴?”
왜 황제께서 피도 눈물도 없다는 말이 도는지 이제 알 것 같다. 말투는 사나워도 성정은 따뜻하시어 이것저것 섬세하게 신경 써 주시는 것이 본모습인 줄 알았더니. 어찌 제 자식 앞에서 그런 말을 함부로 하신단 말인가.
“폐하께서는 황자가 가엾지도 않으십니까?”
“이 황궁 안에 가엾지 않은 이가 있더냐?”
막 다음 말을 이으려던 기하가 입을 다물었다. 몇 번이나 입술을 열다가 이내 혀를 물었다. 황궁 안에 가엾지 않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가여운 사람뿐이었다. 몇 번을 곱씹자, 가슴이 싸하게 내려앉았다.
“페하께서 신경 쓰시지 않도록…….”
“그 꼴로 있는데 어찌 신경을 안 써? 못난 것들이 딱 달라붙어서는, 꼴이 그게 뭐냐?”
날카로운 말은 비수가 되어 가슴을 찔렀다. 저도 모르게 시무룩해진 기하는 슬그머니 아이의 귀를 막았다. 제 가슴에 대고 있는 얼굴의 반대편을 손바닥으로 가리자, 축축한 물기가 손에 닿았다. 울고 있구나, 또.
태의가 남기고 간 침구 통을 무심히 내려다보던 황제가 침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나운 얼굴에 근심이 보였다. 물끄러미 황제를 바라보던 기하는 슬그머니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꼬물꼬물한 손가락이 손등에 닿자 눈가를 찌푸린 황제가 고개를 들었다.
“뭐냐.”
“폐하.”
“뭐냐고.”
“저…….”
이것이 어디 애를 안고 수작질인가 싶어 눈을 가늘게 뜨고 있으려니, 끝이 뭉툭한 손가락이 슬쩍 손등을 문지른다.
“뭐냐니…….”
“침 좀 빼주십시오. 아픕니다.”
그럼 그렇지. 이 우매한 것이 그럴 리가 없지. 잠시나마 은근한 손길에 뭔가를 떠올리던 황제의 얼굴은 이전보다 한층 더 딱딱해졌다.
울다 지쳐 잠든 아이 등을 연신 다독이는 기하의 손길을 못마땅한 얼굴로 바라보던 황제는 가만히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겼다. 그의 말대로 영빈이 청을 넣은 것은 맞으나, 딱히 그것을 들어주기 위해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어미가 다른 세 아들은 황제의 골칫거리였다. 전장을 돌다 취한 여인에게서 얻은, 올해 여덟 살이 된 일황자는 욕심이 많고 아이답지 않은 구석이 있었다. 제위에 올라 후궁에게서 얻은 이황자는 어미를 닮아 몸이 약해 바깥출입도 제대로 못 하는 실정이니 그렇다 치고, 날 때부터 어미를 잃고 천둥벌거숭이가 된 삼황자를 보면 속이 터졌다.
아무리 애정 없는 아이라지만, 황자의 신분으로 맨발로 뛰어다니며 손으로 음식을 주워 먹는다니 이런 수치가 없었다. 야단치고 호통치고 타일러도 고쳐지지 않으니, 필시 어디가 모자란 놈이지 싶다. 더는 후궁들에게 자식을 볼 생각 따윈 없었다. 자식이 많아 봤자, 황궁에 피바람만 일으킬 뿐이다.
“폐하.”
아직 완쾌한 것도 아닌 것이 저렇게 커다란 애를 줄곧 안고 있으니 팔이 저릴 테지. 고개를 들어 기하를 바라보던 황제는 피곤해서 뻑뻑해진 눈을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밤이 깊었다. 타박하는 것도 날이 밝을 때 하는 것이 낫겠다 싶어 그대로 돌아서려는데, 뭔가가 불쑥 옷자락을 붙잡았다.
“또 뭐냐.”
“예서 침수 드시지 않으시고 가시려고요?”
“그 꼴을 하고 있는데 예서 자라고?”
황후를 비롯한 열아홉의 후궁을 전부 보살피지는 못해도 대신들의 성토를 듣지 않으려면 적어도 돌아보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 마음이 동하지 않는 여인과 정사를 나눠야 할 때도 있었지만, 이렇게 머물렀다 돌아오는 날이 더 많았다. 홀로 생각해야 할 일도 많은데 한가하게 여인과 어울릴 시간은 없었다.
“그리 쳐다봐도 해줄 말 없으니 놔라.”
“침상이 저리 넓은데…….”
“내 지금 너랑 예서 말장난할 기분이 아니다, 무빈.”
“하지만 일주일 만에 오시지 않으셨습니까. 도통 찾아주시지도 않으시면서, 기껏 오셔서 이대로 가시는 것은…….”
“나불나불 떠드는 것을 보니 이제 살 만한가 보구나.”
기력 없이 고꾸라지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만, 어째 저렇게 대거리하는 것을 보니 슬쩍 못된 마음이 솟으려고 한다.
“그러지 마시고 침수 들고 가십시오. 황자도 잠들었으니 이제 조용할 것입니다. 소인은 그냥 폐하만 보고 있겠습니다.”
언제 들어도 애틋하고 열렬한 고백이었다. 같은 사내라 해도 영빈은 교태 섞인 미소만 지을 줄 알지, 저렇게 제 마음을 홀라당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신기했고, 조금씩 익숙해지다가 사그라진 마음은 이제는 흥미를 넘어선 즐거움으로 변하고 있었다. 물론 그럴수록 더 심술궂게 돌아서게 되지만.
“얌전히 잠들 것이면 수신전이 낫다. 너랑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면 짐이 예서 잠드는 것이 다 무슨 소용이냐?”
“예?”
“뭘 못 알아듣는 척해? 달랑 잠만 자고 갈 것이면 굳이 후궁 처소에 들겠느냐?”
“그것은…, 그러니까, 저기…….”
깊이 잠들어 소록소록 숨소리를 내는 황자를 조심스럽게 침상 위에 눕히고 기수를 덮어준 기하는 얼른 황제에게 다가섰다. 붉게 열이 올라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났다.
이제 갓 시집온 열여섯 처녀도 아니고, 어찌 저리 부끄럼을 탄단 말인가. 누가 보면 손 한 번 잡아본 적 없는 사이인 줄 알겠다. 아무리 황제와 후궁 사이라고는 하나, 엄연히 부부가 아니던가.
“아, 아직 얘기가 끝나지 않았사온데 왜 또 가시려고요?”
다시 용포 자락을 붙잡는 기하의 손길이 억지나 거센지 자칫 넘어질 뻔한 황제가 얼굴을 왈칵 구겼다. 다른 후궁들 같으면 그 모습에 질려 눈물을 펑펑 쏟아낼 텐데, 붉은 얼굴로 덜덜 떨면서도 손을 물리지 않는다. 눈빛이 아롱아롱 흔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입술은 반쯤 벌어져서 마치…….
“너 지금 뭐 하느냐.”
“예?”
“지금 짐을 앞에 두고 무슨 상상을 하는 것이야?”
“아…….”
그 상태로 히죽 웃으며 부끄러움에 슬쩍 몸을 돌리는 기하를 황제는 어이없이 바라봤다. 저것이 혹 영리한 머리로 일부러 저런 짓을 하는 것은 아닐까. 참신함이 나쁘지는 않다만, 마음이 끌리지 전에 울화통이 터질 것 같다.
“아니, 꼭, 뭔가 상상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니까, 그것이…….”
더듬더듬 말을 잇는 기하의 턱을 쥐고 들어 올린 황제는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따끈따끈한 열에 목덜미까지 붉게 변한 얼굴은 눈 뜨고 못 볼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 영빈을 비롯한 몇몇 후궁들처럼 화사한 맛은 없었으나 충분히 선이 고우면서도 잘생긴 얼굴이었다. 특히 연지를 바른 것 같은 붉은 입술 모양이 좋았다.
“그대가 이리 색을 밝히는 줄은 내 미처 몰랐다만?”
“그저, 폐하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아득해져서 그럽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입술을 달싹이는 기하를 내려다보던 황제가 턱을 쥔 손을 놓았다. 멀어지는 손길에 아쉬움 가득한 눈빛을 빛내며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 황제는 저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 올라갔다.
“그것이나 한쪽으로 치워.”
“침수 들고 가시는 것이지요?”
“또 지난번처럼 짐을 발길질하면 그 발모가지를 댕강 부러뜨릴 테니 그리 알아.”
“그때는 정말 무서운 꿈을 꾸어 그랬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단번에 풀이 죽는 걸 보니 제 잘못은 아는 모양이지.
금세 생글생글 웃으며 현 상궁을 불러 자리를 보게 하고 직접 황제의 의대를 받아 든 기하는 무언가를 잔뜩 기대하는 듯 눈을 빛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가장 안쪽에 반듯하게 누워 눈을 감은 황제가 한동안 꿈쩍하지 않자, 한숨을 푹 내쉬고는 그 옆에 누워 한참을 뒤척거린다. 또 저렇게 몇 시간을 뜬 눈으로 보내다 새벽녘이 되어야 겨우 잠들겠지. 그것이 별로 달갑지 않아 굳이 머물지 않으려 한 것인데, 쓸데없이 호기롭기는.
“폐하. 기침(起枕)하셨사옵니까.”
겨우 해가 뜬 새벽, 황제의 기척에 지밀상궁이 문밖에서 나지막이 고했다. 어슴푸레하게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간밤에 몇 번이나 자리에서 일어난 탓에 온몸이 뻐근하고 뒷골이 당겼다.
눈을 뜰 때마다 두 놈 모두 어찌나 기괴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던지. 당장 일어나 수신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이를 아득바득 간 황제는 저고리가 올라가 배가 드러난 기하와 아예 거꾸로 누워 잠든 황자의 모습에 눈을 질끈 감았다. 이것은 흉몽이다. 지나친 흉몽이다.
“소세물 준비하겠사옵니다. 초조반은 어찌할까요.”
“좀 더 자게 그냥 두어라. 수신전으로 가겠다.”
“예, 폐하.”
본디 황제가 기침하시기 전에 먼저 일어나 단정하게 채비하고 기다리는 것이 후궁의 도리였다. 지밀상궁은 기괴한 자세로 태평하게 잠들어 있는 기하를 슬쩍 곁눈질하며 빙긋이 미소했다.
“새벽이라 쌀쌀하다. 여름까지는 침상 아래에 불을 넣으라고 해. 몸이 따뜻해야 병이 잘 낫는다.”
“예, 폐하. 그리하라 이르겠사옵니다.”
간단히 옷매무새만 정돈하고 태화당을 나선 황제는 머리 위에 떠 있는 새벽달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발을 돌렸다. 어젯밤 내내, 흐린 목소리로 잠꼬대하던 기하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어지러웠다.
이렇게 조금씩 정을 주어도 되는 것일까. 애초에 잘라 내었더라면 이리 마음이 복잡하지 않을 것을. 아직 늦지 않았다. 지금쯤 멈추어도 충분한 일이다. 한데 어찌 이리 비겁한 마음이 든단 말인가.
* * *
“안 됩니다.”
수라상이 들어오자마자 달려들어 기미를 보기도 전에 덥석 생선을 움켜쥔 황자의 손을, 기하는 찰싹 소리 나게 때렸다. 분명 조금 전까지 제 무릎에 앉아 있더니 상 앞으로 달려드는 힘이 어찌나 센지, 아차 하는 순간이었다.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먹을 것을 보고 그리 달려들면 아니 됩니다. 황자는 예서 얌전히 기다리고, 상궁이 기미 본 후에 수저를 들 것이라고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어요?”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식사 예절에, 황자는 몇 번이나 울음을 터트려야 했다. 아무리 먹으면서 설명하려 애써도 눈 깜짝할 사이에 일이 벌어졌다.
아침 수라를 받을 때만 해도 얌전히 기다린다 생각했는데, 결국엔 음식을 양손에 쥐고 허겁지겁 입으로 쑤셔 넣는 아이를 멈추게 할 수 없었다.
혹여 먹고 있는데 큰 소리를 내다 체기가 들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이었는데, 그 때문에 모두 황자의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고 했다.
“마마, 맘마. 맘마.”
“맘마가 아니라 밥, 수라를 드는 것입니다. 알아들었습니까?”
“응.”
“예, 해야지요.”
“예.”
하나하나 차근차근 가르치면 그래도 곧잘 따라 했다. 누군가의 말대로 반편이도 아니고, 말귀를 못 알아듣지도 않는다. 단지 지나치게 성미가 급하고, 말보단 행동이 빠른 것뿐이었다.
“마마, 기미 보겠사옵니다.”
음식 하나하나를 기미 볼 때마다, 기하의 다리 위에 앉아 있던 황자가 움찔거렸다. 혹여 제 음식을 모두 빼앗아 먹을까 봐 잔뜩 날 선 짐승처럼 긴장하며,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황자의 모습이 그저 가여웠다.
“황자가 먹기엔 양이 지나치게 많네. 남기는 법을 배우지 못했으니 애초에 덜 담아오도록 하게.”
“하지만 그것이 법도에 어긋나는지라…….”
“그대가 보기엔 황자의 이런 행동은 법도에 맞는 것인가? 상관없으니 황자 나이에 먹을 만한 양으로만 내오도록 하게.”
“예, 마마.”
“황자, 이제 수저를 드세요. 밥을 한 번 입에 넣으면 열 번씩만 씹는 것입니다. 찬은 밥 한 번에 딱 한 번만 먹을 수 있어요. 잘할 수 있지요? 오늘 잘해야 계속 여기서 나와 함께 지낼 수 있습니다.”
“응!”
밥을 보고 기분이 좋아진 황자는 씩씩하게 대답하며 웃었다. 웃는 얼굴이 어찌나 귀엽던지, 다시는 울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 위해선 최대한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 황제나 후궁들, 혹은 다른 황자들이 관심을 두지 않거나 또는 괴롭힌다 해서 계속 이 상태로 있을 수는 없었다. 뛰어난 사내는 아니더라도, 그저 제 할 도리는 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나.
“옳지, 옳지. 잘하고 있어요.”
“마마, 꼬기. 꼬기.”
“자, 천천히 오래오래 씹는 겁니다.”
누군가를 보살필 여력이 제게 없음을 기하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혹여 이 아이에게 있는 대로 정을 준다 한들, 아이의 미래에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음도 안다.
어느 날 갑자기 죽어버리면, 오히려 아이에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줄지도 모를 일이다. 설령 죽지 않더라도 황자의 신분을 가진 아이와 이렇게 지내는 것이 결코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할 일임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찬도 먹어야지요.”
점점 먹는 속도가 빨라지는 황자의 손을 잡자, 아이는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기하를 올려다보았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금세 볼이 빵빵해지도록 음식을 입에 넣는 황자는, 제대로 씹지도 못하고 그것을 제 입안으로 숨겼다. 기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타박대신 아이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맛있습니까?”
“응. 마마, 아.”
서툰 수저질로 커다랗게 밥을 푼 황자가 배시시 웃었다. 생전 먹을 것을 남에게 나누어주는 법이 없던 아이의 작은 변화에 기하는 기꺼이 웃으며 입을 벌렸다. 따뜻한 밥이었다. 제가 주는 것을 스스럼없이 받아먹는 기하를 바라보던 황자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그에게 덥석 안겼다.
“왜 그럽니까?”
“마마.”
입술을 빵긋거리던 아이가 작게 흐느꼈다. 무엇이 이 작은 아이를 이토록 괴롭게 하는 것일까. 황궁 안에서 외롭지 않은 이는 아무도 없다는 황제의 말은 그날 이후 내내 가슴을 짓눌렀다. 아마 그것 때문이려나. 이리 작은 아이조차, 그것 때문에 이토록 큰 고통을 받으며 사는 것일까.
“밥을 먹다 말고 우는 아이가 어디 있습니까? 잘 먹고 잘 자야 튼튼하게 자라지요. 얼른 얼른 자라서 아바마마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지요?”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황자 때문에 기하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지간히 겁을 먹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애틋한 막내아들인데, 품에 한 번 안아주시지. 오죽하면 이 어린아이가 아바마마란 소리에 달달 떨까.
“얼른 먹고 나가서 좀 걸읍시다. 방 안에만 있으면 답답하지요? 오늘은 잘하였으니 오후에 현 상궁더러 우리 황자가 좋아하는 당과를 만들어 달라고 합시다. 어때, 좋습니까?”
“응! 당…….”
“당과.”
“응! 당, 가.”
“과.”
“과.”
“옳지, 잘했습니다. 우리 황자가 아주 영민합니다.”
해사한 기하의 미소에, 물끄러미 그 얼굴을 바라보던 황자가 배시시 따라 웃었다. 눈에는 눈물 자국이 그대로인데 행복하게 웃는 아이를 바라보니 가슴이 지끈거렸다. 이렇게 사는 아이가 안타깝고, 애정을 갈구하는 모습이 꼭 어릴 적 제 모습 같아, 한동안 잊고 지냈던 북성이 다시 떠올랐다. 차라리 아주 잊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마마. 맘마, 아.”
“또 주려고요?”
“응. 또 줘. 아.”
조금 더뎌도 괜찮겠지. 아무도 보는 이 없으니, 이렇게 가끔 울고 웃어도 괜찮은 거겠지. 이 또한 나쁘지 않으니 살다 보면 익숙해지고, 언젠가는 폐하 말씀처럼 북성을 잊을 날도 오겠지. 그래, 그리 살자. 천천히, 조금씩. 그렇게 살아가자.
“우, 우우…….”
기하의 다리 뒤에 숨은 황자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멀찌감치 떨어진 영과 달은 한가로이 풀 위에 엎드려 낮잠을 즐기는 중이었다. 또 밤새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지 털이 시커멓게 변했지만, 기하의 명에 현 상궁은 녀석들을 야단치지도 못하고 사나운 눈만 빛내는 중이었다.
하루하루가 현 상궁에는 끔찍한 나날이었다. 도대체가 자신의 몸도 성치 않으면서 말도 안 듣는 짐승 두 마리를 계속 거두고 있는 것도 못마땅한데, 어찌 도움 될 것 하나 없는 황자까지 거두시려는지.
듣자 하니 아무런 세가 없는 황자는 황실의 수치라 여겨져 황후께서도 종종 잊으신다고 했다. 더욱이 일황자가 어린 아우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며 괴롭히고 못살게 굴어도, 그것을 나무라는 이는 아무도 없다 했다. 어린 황자께서 큰형님을 볼 때마다 실금하고 발작하듯 우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마마, 무셔.”
“괜찮습니다. 함께 가봅시다. 친해지면 금방 익숙해질 것입니다. 물지 않아요.”
영이 달이 놈들이 물지 않는 것은 기하뿐이었다. 뒤로는 온갖 못된 짓을 다 하고 기하의 앞에서만 달달 떨며 애교를 부려대는 놈들의 가증스러움에 이미 손을 든 현 상궁은 그의 뒤를 따르면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도대체가 태화당 안에는 도움 되는 인간이 하나 없었다. 그래도 모두 착한 사람들이라 늘 기하의 안위를 걱정하는데, 만날 입으로만 떠들지 뭘 제대로 하지 않는다. 새로 온 서 중랑도 허우대만 멀쩡하고 한량처럼 떠돌며 밥만 축내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단 말이지.
“영아, 이리 온.”
영과 달은 한 몸처럼 붙어 다니기는 해도, 엄연히 성격이나 행동이 달랐다. 똑같은 사고뭉치였으나, 달이 조금 더 생각 없이 날뛰었다. 무모한 사고는 죄다 달의 짓이었다.
얼마 전에는 다른 처소 나인에게 달려들어 치맛자락을 찢어놓았다지. 물론 서 중랑의 증언으로는 그 나인들이 태화당을 지나면서 기하와 식솔들을 험담하였다는데, 말 못 하는 짐승이 무슨 재주로 그것을 알아들었단 말인가. 이러나저러나 기하가 나서 일을 무마했고, 현 상궁은 달이 놈 엉덩이를 팡팡 두드리면서도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이제는 얼굴이 익지? 정연군이다. 절대로 물거나 공격해서는 안 돼. 황자, 이 아이가 영입니다. 저기 자는 녀석이 달이고요. 발은 함부로 만지면 안 됩니다. 얼굴도 마찬가지예요. 등만 다독여줘야 합니다. 친해지기 전에 무턱대고 만지면 금세 발톱을 드러냅니다.”
통통한 뺨을 부풀리며 황자가 활짝 웃었다. 조금 전까지는 겁에 잔뜩 질려 있더니, 금세 신기한 눈으로 제 앞으로 다가온 영의 털을 슬쩍슬쩍 쓰다듬었다.
영은 잠이 오는지 하품을 쩍 하며 아이의 손길을 받으며 기지개를 켰다. 이내 털썩 주저앉아 고롱고롱 코를 골며 잠이 든 영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간 황자는 웃으며 침을 질질 흘렸다.
“영이, 예쁘다.”
소매 끝으로 황자의 입술을 문질러 침을 닦아주자, 아이는 아예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미처 말릴 새도 없이 주저앉은 황자는 이번에는 영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영아, 영아. 놀자.”
“무섭지 않습니까?”
“응. 영이 코 잔다. 멍멍.”
“멍멍이가 아니라 스라소니요.”
“스? 야옹?”
“스라소니. 황자에겐 아직 어려우니 그냥 영이라고 합시다.”
“응. 스… 영이.”
아이의 조그만 손이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었다. 그것이 신기했던지, 아이는 연신 웃으며 또다시 침을 질질 흘렸다.
현 상궁과 서엽은 아예 멀찌감치 떨어져 따뜻한 햇볕을 쬐었다. 아무래도 기하와 황자의 바깥나들이가 점점 길어질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저들 사이에 영과 달까지 끼어든다고 생각하니, 두 눈이 아찔해지면서 앞일이 막막했다.
* * *
탁. 타악. 탁.
일정한 속도로 들리는 소리에 슬그머니 하품하던 승지가 머리를 긁적였다. 편전 회의를 마친 이후부터 황제는 줄곧 저 상태였다.
황제의 말을 빌리자면, 꼴 보기 싫은 것을 넘어 말소리도 듣기 싫은 태사가 진상한 진주 목걸이는 이미 줄이 끊어져 그의 손바닥 안에서 굴려지고 있었다.
탁. 또다시 진주알 하나를 손가락으로 튕긴 황제가 낮은 숨을 내쉬었다. 저것이 저래 봬도 유림국에서 어마어마한 값에 사들인 것이라던데, 황제께는 길가의 돌멩이만도 못한가 보다.
“그 발칙한 것이…….”
“태사께서 좋은 뜻으로 올린 것인데 굳이 그리 대하실 것이 무엇입니까?”
“뭐야?”
휙. 멀리 날아간 진주알이 탁, 소리를 내며 나무 기둥 중앙에 박혔다. 공력도 세신 분께서 어찌 저리 무모한 일을 하시는지. 저러다가 혹여 누가 지나가다 맞기라도 하면 큰일이 아니던가.
“태사 영감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옵니까?”
“그 영감은 뭐 하러 생각하고 있어? 정신 사나우니 썩 꺼져라.”
“소장이 뭘 했다고 또 구박이십니까? 폐하께서 뭔가 잊고 계시온데, 소장은 폐하의 그림자이옵니다. 한시라도 폐하의 곁을 떠나서는 아니 된단 말씀입니다.”
“그림자 같은 소릴 하고 있어. 허구한 날 나돌아 다니는 것이 제가 아쉬울 때만 그림자 노릇이냐? 필요 없으니 꺼져. 너 따위 없어도 상관없다.”
“또 무슨 언짢은 일이 떠오르셔서 이리 심술이십니까?”
“뭐, 이놈아?”
버럭 성질을 부리는 황제를 태연히 바라보던 승지는 오전 편전 회의를 떠올렸다. 건강이 좋지 못해 오래도록 휴가를 떠나 있던 태사가 환궁하여 황제께 올린 진주는 무척 귀한 것이었다.
딱히 그의 심기를 거슬릴 주청도 나오지 않았고, 뱀 같은 대신들은 요즘 유난히 고분고분하여 황제의 성정을 건드리지 않았다.
오랜 염원이시던 황후마마의 회임 (아직 공식화하진 않았으나) 또한 경사스러운 일이었고, 후궁들도 잠잠했다. 그렇다면 역시나, 한 가지뿐이었다.
“삼황자 저하는 언제까지 태화당에 머물게 하실 참이십니까?”
“그걸 왜 내게 물어.”
“폐하의 아드님이시니 당연히 폐하께서 거처를 바로잡아주셔야지요.”
승지가 삼황자를 본 것은 딱 두 번이었다. 그마저도 가까이서 보거나 말을 섞은 것은 아니었는데, 멀리서 지켜본 바로 삼황자는 아무에게도 관심 받지 못한, 작고 연약한 아이일 뿐이었다. 지나치게 몸이 약해 늘 병석에 누워 있는 이황자께서는 그나마 저를 위해 밤낮없이 간호하며 기도하는 어미라도 있지.
“사람은 제대로 들였더냐.”
“폐하께서 너무 오래 황궁을 비우셨습니다. 그나마 믿을 만한 이들은 지밀상궁 휘하에 있거나 황후마마를 따르는 이들뿐입니다. 대체 영빈은 어디서 재물을 그리 끌어오는 것입니까? 황궁에 영빈마마 재물을 받지 아니한 이들이 없습니다. 그것도 계속 두고 보실 것입니까?”
“빼앗는 것도 아니고 나눠준다는데 무슨 수로 탓을 해? 그건 내버려두고 무영(武領)이나 영빈 손이 닿지 않았던 이들을 찾아. 계속 그리 구박받다가는 그 돼지 같은 것이 정신까지 나갈까 저어된다.”
“황자께서 좀 통통하시기는 하지만 돼지가 뭡니까, 돼지가.”
“그 꼴을 보고 그런 말이 나오지 않는 게 비정상이다. 그것이 밥 먹는 꼴을 보고 있으니 속이 터져. 주둥이 나불댈 시간 있으면 추국장에 가서 박 상궁부터 문초해. 죄를 고하지 않으면 없는 죄라도 만들어내란 말이다.”
감찰사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빼 온 박 상궁과 그의 휘하 궁녀들의 문초를 지시한 황제는 태평한 시간을 보냈다. 모질게 고문하다가 상처를 보게 하고, 또 그것이 아물 만하면 다시 고문을 명했다. 고문의 강도가 아무리 심해도 도통 제 죄를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은 그녀가 금룡대 추국장에 갇힌 지 딱 열흘이 지났다.
“총관에게 명해 두었습니다. 하면, 오늘이라도 당장 황자 저하를 동복궁으로 모셔 올까요?”
“그것을 왜 네가 걱정하느냐?”
“뭐, 걱정이라기보다는 괜한 소문이 돌지 않습니까. 일황자 저하와 영빈마마 사이가 유난히 각별하니, 그것을 투기한 무빈께서 폐하의 관심을 끌려고 애꿎은 삼황자 저하를 끌어들였다면서―.”
“어디 속없는 것들이 그딴 헛소리를 지껄이느냐? 무빈 그것이 그럴 그릇이라도 돼? 제 앞가림도 못 하는 것이 온갖 것들은 다 거둬 먹이려 드니 속만 터지지.”
“소문이 그렇다는 말씀을 올리는 것입니다. 또한, 법도에도 맞지 않습니다. 세상에 어제는 종일 후원을 뛰어다니며 궁술이며, 검술까지 직접 가르치셨다지 않습니까? 밤이면 글공부에, 수라 때마다 식사 예절을 가르치시느라 태화당엔 수라상이 여러 번 나뉘어 들어간다고 어찌나 말들이 많은지.”
떠벌떠벌 잘도 떠드는 승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황제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저것은 도대체가 누굴 멍청이로 아는지, 저렇게 늘 태화당 소식을 전하면서 은근히 제 관심을 되돌린단 말이지. 혹여 저놈이 무빈 그것을 위하는 마음이 지나친 것은 아닌가?
“어찌 소장을 그리 보십니까?”
“네 얼굴을 보니 갑자기 불쾌한 마음이 싹 가셨다.”
행여 그렇다 해도 무빈 그것이 저 낯짝에 호감을 느낄 리는 없겠다. 그것은 확신에 확신을 거듭할 수 있었다.
“폐하도 참. 소장을 너무 좋아하시는 것 아니십니까?”
“시끄러우니 넌 여기 그대로 있어.”
“예? 어딜 가시는데 소장을 떼어놓고…….”
“알 것 없고, 점심이나 잘 처먹고 있어라. 오후 강론은 알아서 잘 하라고 전해.”
“예? 폐하, 폐하!”
황제의 명을 거역할 수 없어 차마 움직이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던 승지는 그의 뒤를 따르는 그림자 무리에게 짧게 눈짓했다. 보나 마나 또 태화당에 가시는 것이겠지. 요즘 부쩍 그 주위를 지나치시다 후원을 슬쩍 엿보고 나오시는 것을 얼른 무빈마마께 따로 전해드려야 하는데, 이렇게 발을 꽁꽁 묶어놓으시다니. 통탄스럽다. 금일은 꼭 폐하의 오묘한 표정 변화를 직접 보고 싶었거늘!
생글생글 웃으며 맞아줄 줄 알았더니, 어찌 된 영문인지 똥 씹은 얼굴이다. 막 수라상을 받은 것인지 기미 보고 있던 현 상궁이 벌떡 일어서려는 것을 계속하라고 명하자, 이번에는 겁에 질린 황자 놈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어찌 기별도 없이 걸음 하셨습니까?”
“짐이 일일이 네 허락받고 와야 하냐?”
“그런 것이 아니오라…….”
슬쩍 아이 눈치를 살피던 기하가 다시 생긋 웃었다. 이제는 완전히 돌아온 혈색에 점점 제 모습을 찾는 것이 다행이다 싶은 마음이 들던 찰나, 꼭 야수를 피해 어미 등 뒤에 숨는 어린 짐승 같은 황자를 보니 속에서 열불이 치밀어 올랐다.
저것은 대체 어디서 솟아났나. 아무리 떠올려도 황궁 핏줄엔 저런 놈이 없었다. 생기다 만 얼굴 하며, 피둥피둥 찐 살 하며, 말도 어눌하고 겁은 많아서 툭하면 울고 지린다지. 저런 갱생의 예후가 없는 것을 어찌 어여쁘다고 끼고 돌 수 있는지. 새삼 기하의 인내심에 박수를 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현 상궁, 어서 폐하의 수라를 준비하시게.”
“예, 마마.”
털썩 상 앞에 앉은 황제가 얼굴을 찌푸렸다. 이 허접스러운 찬은 또 무엇인가. 누가 먹다 만 밥을 내놓은 것도 아니고.
“밥상이 이게 뭐냐?”
“황자를 가르치던 참입니다. 눈앞에 음식이 많으면 쉬이 흥분하여…….”
“그러니 돼지 새끼와 다를 바가 무엇이야.”
“폐하, 황자가 듣습니다.”
“들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냐? 예서 지내니 아주 신세가 늘어졌구나. 그새 더 살이 올랐어?”
“골고루 먹고 잘 뛰노니 얼굴빛이 좋아진 것뿐입니다. 자꾸 그러지 마십시오. 말귀도 다 알아듣고, 아이라도 상처는 받습니다. 아버지란 분이 어찌 그리 냉정하십니까.”
저것이 대체 누구 편을 드는지. 피도 섞이지 않은 다른 여인의 자식을 언제부터 제 새끼처럼 키웠다고 발칙하게 눈에 쌍심지를 켜, 켜길?
“어디 한번 해봐라.”
그렇다고 똑같이 응대하면 또 아득바득 말대답이나 하겠지. 어쨌거나 지금은 황자의 상태를 묵과할 수 없으니,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어디, 그 말대로 얼마나 잘 배웠는지 봐야지.
“얼마나 잘 가르쳤는지 보여다오.”
밥상에서 한 발 물러선 황제는 느긋하게 침상으로 올라가 앉으며 흥미로운 눈을 빛냈다. 그제까지 오들오들 떨고 있던 황자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이전과는 달리 호통치지도 않고, 얼굴을 찡그리지도 않는 황제가 신기한 듯 물끄러미 제 아비를 바라보던 황자가 배시시 웃으며 밥상 앞에 앉았다.
“마마, 밥.”
황자의 밥그릇에 찬을 올려주자 커다란 숟가락이 입으로 쑥 들어간다. 보기에도 많아 보이는 것을 한입에 삼켰지만, 이전처럼 음식을 손으로 집거나 허겁지겁 달려들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의 식사보다 확연히 속도는 빨라도, 여러 번 씹고 제가 좋아하는 음식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하는 등 이전보다는 분명 효과를 보였다.
“마마, 꼬기.”
“이번엔 나물을 먹을 차롑니다.”
“꼬기…….”
“나물도 먹어야 아바마마처럼 키가 큰다 했지요?”
“응? 응… 예…….”
슬쩍 황제를 힐끔거리던 황자가 해사하게 웃었다. 입안에 든 음식이나 제대로 삼키고 웃을 것이지, 웃고 있으니 영락없이 못났다. 그래도 예전보다 밥도 잘 먹고, 잘 웃으니 또 그럭저럭 볼썽사납진 않았다.
“자, 천천히 씹어야지요. 이것도 먹어야 아바마마처럼 멋있는 사내가 됩니다. 아.”
“그리 나물만 먹어서 어디 키가 제대로 크겠느냐?”
불쑥 튀어나온 황제의 말에 기하는 잠시 젓가락질을 멈췄다. 일부러 황자의 상태를 고려하여 육류의 비율을 낮춘 것인데, 아무래도 찬이 신통치 않았던 모양이다.
처음에 황자 또한 고기가 거의 없는 밥상에 왈칵 울음부터 터트렸었지. 편식이 지나쳐 고기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입맛의 유전이었던 것인가.
“골고루 먹는 것도 좋으나 입에 맞아야 먹지. 이리 풀만 있어서 그대는 뭘 먹어?”
“소인은 괜찮…….”
“잘 먹으라는 태의 말을 벌써 잊은 것이냐? 그대부터도 그리 말을 듣지 않으면서 대체 누굴 가르친다는 것이야?”
금세 시무룩해지는 얼굴을 보니 영락없이 애다. 혀를 끌끌 차며 타박을 늘어놓으려던 황제는 저를 말똥말똥한 눈으로 바라보는 황자의 눈빛에 입을 다물었다. 겁에 질려 오줌이나 줄줄 누던 망아지 같은 놈이 이제는 제법 황자 태가 났다.
“넌 먹질 않고 뭘 그리 빤히 보고 있어?”
“아바마마, 바바.”
“뭐?”
낑낑대며 밥을 푼 황자가 그것을 덥석 황제에게 내밀었다. 제가 먹던 숟가락을 감히 누구 입에 넣으려고…….
“마시쪄?”
“황자, 그러면 아니 됩니다. 아바마마께 예를 지켜서…….”
“오냐, 맛있다.”
“히이.”
상 옆에 내려놓은 휘건(揮巾 : 식사할 때 앞에 두르는 수건의 하나. 냅킨.)으로 직접 황자의 입을 문질러 닦아주는 황제의 표정이 한층 누그러졌다. 웃고 있진 않아도 손길이 제법 다정했다.
그 놀라운 변화에 초연한 것은 황자뿐이었다. 워낙에 겁이 많아 그렇지, 얼굴을 익히면 금세 이렇게 안기며 잘 웃는 성정은 밝고 어여뻤다.
요즘은 부쩍 칭찬을 많이 하였더니 자신감이 붙은 것인지, 큰소리를 내지 않으면 줄곧 제 생각대로 하는 것이 그제야 그 나이 또래 아이 같았다.
“마시찌?”
이번에는 콩조림을 푹 떠서 먹으라고 보채는 황자의 통통한 손을 붙잡은 황제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이가 들기에는 크고 무거운 숟가락을 받아 들자, 제 것을 빼앗는 거라 착각하여 금세 울상을 짓는다.
“내꼰데.”
“안 뺏어 먹는다.”
“아.”
먹여 달라는 것인가. 빼앗지 않는다는 말에 천진하게 입을 벌리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황제가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단 한 번도 안아주지 않았던 아이. 자신의 핏줄이라는 생각보다는 정치적인 희생양이 될까 싶어 관심을 두지 않았던 아이.
“이리 와 봐라.”
제게 내밀어 진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황자가 고개를 돌려 기하를 응시했다. 기대감과 두려움이 섞인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 모습이 측은했다. 기하는 그저 입술을 열어 ‘괜찮다.’고 속삭였다. 그제야 아이는 슬그머니 일어나 무릎으로 기어 황제 앞으로 다가갔다.
“오늘부터는 다시 동복궁으로 돌아가는 거다.”
양쪽 팔을 붙잡고 아이가 움직이지 못하게 결박한 황제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에 놀란 기하가 미처 황제께 대꾸하기도 전, 아이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마마.”
뒤를 돌아볼 수도 없을 만큼 몸이 얼어붙어 옴짝달싹 못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꼭 어미와 아이를 생이별시키는 것 같아 입맛이 썼다.
“이곳은 네 처소가 아니지 않으냐. 이제 네 처소로 돌아가야지.”
“거기는 시른데…….”
“싫습니다.”
“싫습니당.”
축 처진 어깨를 바로 세웠다. 앉아 있는 자신보다 눈높이가 낮은 조그만 아이. 토실토실한 뺨을 가볍게 문지르자, 아이는 금세 붉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아마 우는 것을 참는 법 또한 배운 탓이리라.
“다른 상궁들이 너를 돌볼 것이다. 이전처럼 무섭게 대하지 않을 것이야. 아비와 약속했다.”
“바바…….”
“너는 제국의 황자가 아니냐. 좀 더 외로움을 견디는 법을 배우도록 해.”
“바바…….”
훌쩍훌쩍 우는 아이의 등을 바라보며 기하는 점점 안절부절못했다. 혹여 황자의 울음에 황제가 노여워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비록 지금은 관대하고 자애로운 아버지의 모습이라지만, 언제 다시 성심이 변하실지 모르는 것이 아닌가.
더욱이 이렇게 갑자기 떨어지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이제 겨우 아이가 정을 붙이려 하고 있는데.
“네가 궁을 비우면 사람들은 네 존재를 잊는다. 동북궁은 네 궁이다. 네 집이야. 하니 네가 지켜야지. 알아듣겠느냐?”
고개를 젓는 황자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던 황제가 다시 아이의 뺨을 쓸었다. 이번에는 조금 더 다정하게, 따뜻하게, 슬그머니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침수는 동복궁에서 드는 게다. 초조반과 아침 수라도 게서 들어. 대신 낮것과 저녁 수라는 예서 먹어도 된다. 하던 대로 글공부도 하고 뛰놀기도 해.”
“폐하, 너무 갑작스럽습니다. 아직 황자가 마음의 준비를…….”
“예서 동복궁까지 천 리 길이라도 된다더냐. 준비는 무슨 준비, 날 때부터 지내던 곳이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어.”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너무 갑작스러웠다. 처음 아이를 들이던 순간부터, 단 한 번도 아이를 먼저 보내야 한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아이의 곁에서 멀어지는 것은 저 자신이었다.
기하는 갑작스러운 황제의 명에 기운을 빼앗긴 듯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렸다. 울컥 눈물이 나올 것도 같았다.
“잘할 수 있겠지?”
“잘할 수 이떠…요.”
“그래. 그래야지.”
“폐하, 수라 들이겠사옵니다.”
“잠시 두어라.”
지밀상궁의 말을 물리며, 황제는 다시 수저질을 시작하는 황자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처연한 얼굴로 연신 제게 시선을 던지는 기하의 눈빛도 외면하고 그저 아이만 바라봤다.
아직은 물러서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이 완벽해질 때까지. 그 누구도 쉬이 희생되지 않을 때까지. 더는 누군가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대가 황자를 이용하려 든다는 소문이 황궁에 파다하다.”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그대를 잘 아는 이는 그리 말하겠지. 하나, 황궁엔 그렇지 않은 것들이 훨씬 더 많아. 그럴 의도가 없더라도 소문이란 없던 것도 있게 만들지 않더냐.”
“그런 것에 겁먹고 싶지 않습니다.”
“겁먹을 필요는 없다만, 마냥 두었다간 언제 네 목을 조를지도 모른다.”
황제는 가만히 손을 내밀어 황자의 동그란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최대한 속도를 늦추며 음식을 씹어 삼키는 아이가 대견해, 기하는 저도 모르게 살그머니 황자의 곁으로 다가가 귀여운 얼굴을 들여다봤다. 밥풀 하나를 볼에 붙이고 입을 오물거리는 것을 보니, 애틋한 마음에 눈시울이 뜨뜻해졌다.
“꼭 네가 원우 어미라도 된 듯하다.”
황제의 입에서 툭 튀어나온 이름에 기하는 비로소 고개를 들어 황제를 바라봤다. 원우. 동그란 얼굴, 동그란 눈 코 입과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원우. 원우.
“예쁩니다.”
술에 취한 사람처럼 중얼거리는 기하의 목소리에 황제는 아이를 쓰다듬던 손을 멈췄다. 밥그릇을 비워갈수록 아이는 수저를 내려놓기 싫은지 음식을 깨작거렸다. 아쉬움이 물씬 묻어나는 모습에 기하는 슬쩍 미소를 흩뿌렸다.
“원우야.”
“응?”
누군가가 그 이름을 불러주진 않았지만, 제 이름은 잘 외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예, 해야지.”
“예, 마마.”
황제의 엄한 목소리에도 이제는 그다지 주눅 들지 않은 아이는 방긋거리기만 했다. 기특하고 어여쁘면서도 안쓰럽고 애틋한 마음이 공존했다. 겨우 품을 내주었는데, 이제 겨우 온기를 조금 나누었는데. 이 드넓은 황궁에는 마음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 한없이 쓸쓸해졌다.
“왜 또 그런 얼굴이냐.”
“예?”
“다 죽어가는 얼굴 하지 말란 말이다.”
자신을 나무라는 황제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하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저도 모르게 내밀어진 손을 거둘 새도 없이, 황제는 허공에 떠 있는 손을 그대로 붙잡았다. 서늘한 황제의 체온에 기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잡아달라는 것이 아니냐?”
“폐하.”
“왜.”
“아, 아닙니다.”
그래도 이렇게 손을 잡아주신다. 조금은 걱정하는 마음을 내비치시고, 또 다정하고 따뜻하게 편들어주신다. 그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알고 계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