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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조우(遭遇) (12/49)

11장 조우(遭遇)

따뜻한 밥과 국이 내어졌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것을 다 드셔야 한다는 현 상궁의 단호한 말에 기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평소보다 양이 많은데, 아침부터 이것을 무슨 수로 다 먹는담. 예전 같으면 앉은 자리에서 뚝딱 비워냈을 테지만, 이제는 그 반의반도 제대로 뜨기 힘들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

활짝 열어놓은 창문 아래에선 영과 달이 벌써 음식 냄새를 맡고 낑낑거리며 울고 있었다.

“기미 보았습니다. 어서 젓수시지요.”

“오늘 무슨 날인가? 평소보다 찬이 과한데.”

생긋 웃으며 수저를 들어 따끈한 국물을 호로록 넘겼다. 맛이 좋았다. 한동안 제대로 느끼지 못했던 음식의 풍부한 맛을 느끼며 수저를 움직였다.

“맛있네. 고소하고 부드러워. 한데 너무 많아. 전부 먹지는 못하겠어.”

“그래도 많이 드십시오. 얼마 만에 이리 맛있게 드시는 것인지 아시옵니까?”

어째 눈가가 축축해진 현 상궁을 바라보며 기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랬던가. 사실 기억이 드문드문하여 생각이 나지는 않는데, 이리 앉아 아침상을 받는 것이 퍽 오랜만인 것 같기는 하다.

“내 요즘 너무 게을러져서 자네 마음을 어렵게 했나 보네. 앞으로는 일찍 일어나 초조반부터 잘 뜰 테니 그리 심란한 얼굴 하지 마시게.”

“그런 것이 아니옵니다. 어서 드십시오. 천천히 꼭꼭 씹어 많이 드십시오, 마마.”

“응. 맛이 좋으니 많이 먹겠네.”

빙긋이 웃으며 수저질을 하는 기하의 모습에 현 상궁은 슬쩍 몸을 돌렸다. 뿌연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슬쩍 닦아내고 평소처럼 딱딱하게 얼굴을 굳히고 바라보니, 예전처럼 복스럽게 잘도 드신다.

“폐하께서 저녁 수라를 같이 들자 하십니다.”

“폐하께서? 바쁘실 터인데.”

그날 이후 황제께서는 이따금 현 상궁을 통해 제 안부를 묻는다 하셨다. 워낙에 정무가 바쁘셔서 제대로 뵌 적은 없으나, 깊은 밤 잠시 들렀다 가셨다는 얘기를 두 번이나 들었다.

저녁 수라를 들고 현 상궁이 내어준 약을 마시면 얼마 안 가 깊은 잠에 빠졌다. 잠을 깨치려 아무리 애를 써도 어느 순간 잠들어서 눈을 뜨면 해가 중천이었다. 초조반도 거르고 겨우 아침상을 받은 후에 정신을 차리고 나면 또 어느새 한낮이었다. 그런 일이 며칠이나 반복되었다.

“이제는 저녁 탕약은 드시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하지만 늦게 침수 드시는 것은 아니 됩니다. 아셨지요?”

“그 약만 먹으면 잠이 와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였는데, 다행이야.”

“예. 대신에 조금씩 산책도 하시고, 예전처럼 검술 연습도 하십시오. 갑자기 무리하시면 아니 되시니, 시간을 차차 늘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면 오늘은 영과 달이를 데리고 산책하러 나가야겠네.”

저 말썽꾸러기 녀석들을 데리고 나가시려면 힘이 달리실 터인데. 아니 일단은 그것보다…….

“미시(未時)에 귀한 손님이 오신다 하셨으니, 너무 멀리 가시면 아니 됩니다.”

“손님? 무슨 손님?”

“자세히는 모르오나, 황후마마께서 그리 말씀 전하라 하셨사옵니다. 황후마마께서 직접 오시려 하시었으나 미령하시어 당분간은 마주하시기 어려우시다 합니다.”

“황후마마께서 미령(靡寧) 하시다고? 어디가? 얼마나?”

“가벼운 고뿔이신 듯합니다. 생선 살을 바를까요?”

“…응.”

직접 생선 살을 발라주는 현 상궁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하는 다시 수저질을 시작했다. 어쩐지 그녀가 예전보다 한층 부드러워진 것 같다는 생각에 슬그머니 피어오른 미소를 감추고 음식을 씹자, 고소한 식감이 입안에 번졌다.

“찬도 골고루 드셔야지요. 나물도 좀 드십시오.”

“나물은 싫은데.”

“싫어도 드셔야지요. 나물이 몸에 좋습니다. 마마께서는 너무 고기만 좋아하셔요.”

“고기가 맛있단 말이네.”

“나물도 오래 씹으면 맛이 좋습니다. 쓰지 않으니 조금씩 드십시오.”

찬 투정을 하는 것은 처음 입궁하였던 열여덟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그 모습마저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현 상궁은 부지런히 젓가락을 움직였다. 싫다는 기색이 역력한데도 직접 찬을 올려주자 군말 않고 입으로 나르는 모습이 퍽 다행이었다. 정말로 다행이었다.

짐승들은 한바탕 후원을 뛰었다. 을씨년스럽기만 했던 후원은 현 상궁과 나인들이 몇 년간 애쓴 덕에 정갈한 그림같이 변했다.

“마마, 그러다 다치십니다.”

“이놈들! 얌전히 있지 못하니? 마마, 그냥 두셔요. 그러다 넘어지십니다.”

초조한 표정으로 자꾸만 소리치는 소현과 연금에게 괜찮다고 손짓하던 순간이었다. 혹시나 녀석들이 멀리 도망칠까 싶어 단단하게 매단 목줄을 팽팽하게 당겼다.

아무리 귀엽다 예쁘다 품에 안고 키웠어도, 녀석들은 야생 짐승이었다. 더군다나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기하는 보통 여인 정도로 기력이 달리니, 녀석들의 힘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마마!”

공중으로 폴짝 뛰어오른 놈들을 제대로 붙잡지 못한 기하가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놀라서 뛰어오는 아이들 보기가 어찌나 창피하던지, 얼굴을 제대로 들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것을 아이들은 또 오해한 듯 눈물까지 매달고 마마, 마마, 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노예 신분인지라 감히 짐승들에게 손찌검하지도 못하고 바르르 떨고 있는 아이들에게 괜찮다고 말을 해야 하는데 입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 못된 놈들! 현 상궁 마마께 고하여 네놈들 혼내줄 것이다!”

“마마, 괜찮으시옵니까? 다치시지 않으셨습니까?”

노비란 상전의 몸에 손을 댈 수 없는 것이 황궁의 법도였기에, 괜찮으냐는 말만 앵무새처럼 종알거리는 아이들을 바라보자 왈칵 울음을 터트린다.

혹여 제가 잘못되기라도 하였더라면 크게 매를 맞았을 것이다. 괜찮다고 말해주어야 하는데, 사실은 괜찮지 않은 것 같다. 무릎도 쑤시고, 팔도 아프고, 겨우 한 번 넘어진 것치고는 타격이 컸다.

‘끼이잉.’

가까이 다가온 영과 달이 구슬프게 울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 녀석들이야말로 아무런 잘못이 없거늘. 현 상궁 말대로 어서 잘 먹고 열심히 수련하여 기력을 되찾아야겠다. 괜히 이러다 여러 사람 잡을라.

“괜찮다. 놀랄 것 없어. 그냥 넘어진 것뿐이다.”

“큰 소리가 났습니다. 정말로 다치시지 않으셨습니까?”

“괜찮대도. 부러진 것도 아닌 것을. 현 상궁에게는 비밀이다?”

누구보다 비밀에 부치고 싶은 것은 소현과 연금이었다. 기하가 아무리 괜찮다 말한들, 상전을 제대로 모시지 못했다는 이유로 아이들은 벌을 받을 것이다. 그것이 안쓰럽고 안타까워도, 황실의 법도가 그러하니 무어라 말을 할 수 없었다.

“어서 대답해야지, 응?”

“노비들도 그리하고 싶으나…….”

“응?”

“그것이… 마마님의 의복이 상하여서…….”

하필 흰 옷을 입고 나왔구나. 넘어지면서 풀물이 들어 옷감이 상하였다. 슬그머니 들어가 옷을 벗어 놓는다 해도, 현 상궁의 귀신같은 눈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욱이 넘어지면서 잘못된 것인지 손목이 욱신거리고, 다리가 쑤셨다. 엉덩이도 아픈 것 같고.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노비들이 마마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하였습니다. 노비들이 벌을 받을 것입니다.”

“내 현 상궁에게 딱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할 것이니 너무 두려워 마라.”

“마마…….”

어린아이들은 별것도 아닌 일에 감동하곤 했다. 지켜준다 하여놓고 제대로 지켜준 적이 몇 번이나 있었을까. 그래도 아이들은 매번 저를 향해 눈을 빛내며 충성을 맹세했다. 아직도 어리기만 한 아이들일 뿐인데, 그 순수한 마음이 어여뻐서 그저 웃고 말았다.

“누가 옵니다.”

조그맣고 말간 얼굴의 연금이 기하에게 속삭였다. 멀리서 이쪽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오는 발걸음에 아이들은 금세 겁을 집어먹었다.

곁에 있던 영과 달이 하릴없이 으르렁거렸다. 낯선 자를 향한 본능적인 방어였다. 그것이 귀엽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해서 기하는 잠시 낯선 이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짐승들의 머리를 차례대로 쓰다듬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날씨가 화창했다. 바람은 따뜻하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청명한 푸른색이었다. 적당히 뜨거운 태양 빛에 몸이 따뜻하게 달아올라 오랜만에 상쾌한 기분이었다.

제국의 하늘은 무척 아름다웠다. 북성에서는 한여름에나 볼 수 있을 법한 햇볕은 눈가가 시큰해질 정도로 기분을 좋게 했다.

큰 그림자였다. 햇볕을 집어삼킨 듯한 호젓한 웃음에 기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혹시나 했던 마음이 역시나 하고 변했다. 금세 차오르는 기쁨 어린 마음을 추스르기가 버거워 손이 벌벌 떨렸다.

“…서엽?”

“북성의 아들, 서(徐)가 홍의 장자 엽. 무빈마마를 뵈옵니다.”

“정말 그대, 형님이 맞습니까?”

“마마, 그간 강녕하시었습니까?”

그가 맞다. 오랜 친우이자, 사촌이기도 한 서엽. 날 때부터 함께였던, 그가.

“어찌…….”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그가.

“황후마마의 부름을 받았사옵니다. 금일부터 마마의 곁에서, 마마의 호위를 맡을 것이옵니다. 절을…….”

그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기하는 한달음에 달려가 서엽을 품에 안았다. 헤어질 때만 해도 키가 같았는데. 어느새 훌쩍 자라 늠름한 장수가 된 친우를 품에 안자 맥없이 눈물이 흘렀다. 두 번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그를. 미처 마지막 인사조차 할 수 없어, 간신히 서신으로 안녕을 고하였던 오랜 친우를 이리 다시 보다니.

“마마, 이리하시면 아니 되십니다.”

난처하게 웃는 모습도 그대로다.

“한 번도, 어찌 한 번도 서찰을 보내지 않았어요?”

“마마, 일단 고정하십시오.”

“마지막 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어. 형님에게 할 말이 많았는데, 묻고 싶은 것도 많았는데. 어찌 그리 매정하게 연락을 하지 않을 수가 있어요? 형님도 내가 죽은 줄 알았습니까? 혼인하자마자 죽었을 거라 생각했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감히 그런 생각은 하지도 않았습니다. 한데, 마마. 이러시면…….”

난처하게 웃으며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는 서엽에게 끈질기게 달라붙은 기하는 그대로 울음을 터트렸다. 어린 시절부터 곧잘 이리 울곤 했었지. 내기에서 지면 지는 대로, 대련에서 지면 또 그 나름대로. 억울하고 분하다며 바닥을 구르며 울다, 왕세자께 들켜 혼이 나기도 했었다.

그대로시구나. 변하신 것은 아무것도 없구나. 명을 받고 달려오면서도 혹여나 하는 마음에 내내 조바심이 났었던 것을. 이리 하나도 변하지 않으신 줄 알았더라면, 진즉 달려올 것을. 이리 강녕하신 것을 조금이라도 일찍 알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추한 소문이 돕니다. 어찌 아랫것들 앞에서 이리 우십니까.”

“형님이 나쁩니다. 분하여 그럽니다. 형님은 친우 자격도 없어! 어찌 이리 매정합니까! 어찌요.”

“알겠습니다. 다 듣겠습니다. 전부 들을 것이니 일단 처소로 가시지요.”

축축해진 얼굴을 얼른 손등으로 쓰다듬으며 사납게 눈을 빛내는 그를 마주하니, 이제야 비로소 예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다. 하나뿐인 벗, 늘 함께했던 피를 나눈 형제, 서기하.

단정하게 절을 올린 서엽은 무릎을 꿇은 채로 기하의 말을 기다렸다. 흉흉한 기세로 서엽과 함께 들어온 기하의 모습에 차마 의복이 왜 그러느냐는 물음을 건넬 수 없었던 현 상궁은 답답한 얼굴로 노비들을 째려봤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침상에 걸터앉아 숨을 고르기만 하던 기하가 입을 열 때까지, 서엽은 푹 숙인 고개를 들지 않았다.

“호위를 맡게 되었다고?”

“예, 마마. 황후마마께서 직접 부르셨습니다.”

“북성…에서는…….”

목이 메는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기하에게 다가간 현 상궁이 따뜻한 차를 건넸다. 향긋하고 달콤한 꿀차로 입을 축이자, 잔뜩 긴장하고 있던 몸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마마께서 북성을 떠나시기 전, 소장은 이미 동남성으로 파병을 나갔습니다.”

“동남성? 파병이라니? 그런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예. 서찰을 띄우지 못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감히 소장이 먼저 마마께 서찰을 보낼 수는 없었습니다.”

“줄곧 동남성에서 머물렀단 말입니까?”

“처음에는 왕께서 명을 내리시어 파병을 나갔었으나, 얼마 안 가 명이 거두어졌습니다. 북성으로 돌아가려던 중 동남성에 작은 난이 일었고, 그것에 발이 묶여 지내던 중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리 시간이 오래될 줄은 소장 또한 미처 몰랐습니다.”

그래, 아마도 그랬을 테다. 미리 알았더라면 충심 강한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북성으로 먼저 돌아갔을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고부터는 쉽게 움직이지 못하였겠지. 한데, 어찌 전쟁이 끝난 후에 황후마마의 부름을 받고 제국으로 왔단 말인가.

“소장은 북성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돌아가지 못하다니?”

“소장은 너무도 오랜 시간 북성을 떠나 있었습니다. 돌아가려 하였을 때는, 왕께서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여 계속 동남성에 머무르던 중에 황후마마의 명을 받았습니다.”

왕께서 원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너무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덕분에 마마를 모시게 되었지 않습니까. 어찌나 신이 나던지 닷새를 쉬지 않고 달렸습니다.”

털털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이는 서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하가 아랫입술을 물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알 수 없는 물음이 온통 가슴을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무엇일까. 이것은 그저 답답함일까, 아니면 괴로움일까.

“마마께서도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십시오. 마마께서는, 이미 제국에 적(籍)을 두고 계시지 않습니까.”

“곤하겠습니다, 그리 달려왔으니.”

“소장의 장기라곤 무식한 체력밖에 없지 않습니까? 하하하하.”

“웃기는. 현 상궁이 처소를 안내해 줄 것입니다. 금일은 곤할 테니 쉬도록 하고, 남은 얘기는 천천히 나눕시다.”

“예. 예, 마마.”

꾸벅 절을 올리는 서엽을 바라보는 기하의 눈이 그리움으로 젖어들었다. 늘 함께했던 이가 눈앞에 있는데도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다. 너무도 많이 변해버린, 더 이상 제가 알고 있던 북성이 아니었기에. 물을 것도 없고, 물어서도 아니 될 것 같았다. 이제는 정말 제국의 사람이 되어야 하나 보다.

서엽과 나누고 싶은 얘기가 많았으나, 후궁의 몸은 여러 가지 제약이 따랐다. 아무리 피를 나눈 사촌 간이고 자신이 거처하는 처소였으나, 내명부의 법도를 어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서엽은 쉽게 생각하라 했지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충신으로 이름난 서엽을 아무 이유 없이 물리시다니. 아버님께서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것일까.

“마마, 폐하께서 납신다고 합니다.”

“응?”

“폐하께서 행차하십니다. 어서 일어나 맞을 준비를 하시어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더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기울었다. 그 여느 때보다 환하게 불을 밝힌 처소를 둘러보다 문득 허전함을 느낀 기하는 제 옷깃을 매만지는 현 상궁을 붙잡았다.

“영과 달이는?”

“광에 가두어 두었습니다.”

“뭐? 광에?”

“하다 하다 이제는 마마께 올릴 음식에 입을 대지 뭡니까. 흠씬 두들겨서 가두었습니다. 내일 아침까지 꺼내주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마께서 너무 오냐오냐하시었습니다. 어서 나오셔요, 폐하께서 곧 오십니다.”

단호한 현 상궁의 말을 물릴 수는 없었다. 현 상궁, 무서워. 또 영이 달이 엉덩이에 불났겠다. 아까 서엽과 함께 있느라 망가진 옷에 대해서 별다른 말이 없어서 괜찮을 줄 알았더니, 언제 또 사고를 쳤누.

“황제 폐하 납시오.”

황제께서 미리 기별하시고 태화당에 납신 것은 처음이었다. 어쩐지 초조하기도 하고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연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기하는, 멀리서부터 들리는 황제의 행차를 알리는 우렁찬 소리에 현 상궁에게 배운 대로 나붓이 절을 올렸다.

“아직 몸도 성치 않을 것인데 어찌 나와 있느냐.”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쯧, 얼굴은 또 왜 그 모양이야?”

“예?”

“눈이 퉁퉁 부었지 않으냐. 열이 난 것이냐?”

퉁명스러운 황제의 물음에 제대로 된 대답을 찾으려던 기하가 입술을 다물었다. 투박한 손이 이마를 푹 눌러 덮었다. 저보다 낮은 체온에 흠칫 놀라기 전, 다시 한 번 혀를 끌끌 찬 황제가 이번에는 기하의 턱을 붙잡고 고개를 들게 했다.

“열이 높은 것은 아닌데 혹 다른 곳이 불편하더냐?”

“아니, 아니옵니다.”

“일단 들어가자. 당분간은 이리 나올 것 없어. 쉬이 돌아다니지도 못하는 것이, 그러다 넘어지면 다친다.”

다정하시다. 너무도 다정하시어 이분이 정녕 황제 폐하가 맞나 싶다. 직접 손까지 잡아 주시고 걸으시니, 뒤를 따르는 나인들의 발소리가 잦아들었다.

침소로 들어와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줄줄이 상이 들어왔다. 화려하고 종류가 많은, 평소보다 큰 상에 가득 차려진 음식을 물끄러미 보고 있노라니 절로 시장기가 돌았다. 배가 고프다는 생각도 오랜만이었던지라 괜히 볼을 긁적였다.

기미가 끝나고 물러서는 상궁에게 손짓한 황제께서 먼저 수저를 드셨다. 감히 황제 폐하와 겸상하는 것은 법도가 아니라 배웠는데, 이리 마주 보고 앉아 있으니 이것이 꿈인지 생신지 모르겠다.

“어찌 그리 넋을 놓고 있어, 먹지 않고.”

“아…….”

“입맛이 없어도 잘 먹어야 한다지 않아.”

“예, 폐하.”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쌀밥에, 북성에선 좀체 먹을 수 없었던 미역국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하는 단정하게 수라를 드는 황제에게 시선을 돌렸다.

“도저히 못 먹겠느냐?”

“먹어본 적이 없는 것이 많아 잘 모르겠습니다.”

생긋 웃더니 얼른 밥을 떠 입에 넣는 기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던 황제는 도통 국에 손을 대지 않는 그의 손등을 툭 건드렸다.

“맛이 좋다. 뜨거우니 후후 불어 먹어 봐.”

하얀 쌀밥, 고기가 풍성하게 들어간 잘 끓인 미역국, 화려한 찬, 황후마마께서 선물이라고 내려주신 서엽, 직접 태화당에 걸음 하시어 함께 수라를 드시는 황제 폐하.

“어찌 또 그래?”

“아닙니다.”

아버님께서는 엄한 분이셨다. 하지만 그만큼 자애로우셔서, 그저 자신이 잘 자라주기만을 바란다 하셨다. 다정하신 형님께서 유일하게 울적해 하시던 날은 기하의 탄일이었다. 얼굴 한 번 뵙지 못한 어머님이 돌아가신 날이기도 했다.

곤궁한 북성에서는 왕자의 생일을 성대히 치를 수 없었다. 아버지께서는 그저 정성을 다해 어머님께 제를 올리셨다. 하루가 저물었고, 그렇게 또 아무렇지 않게 시간이 흘렀다. 따뜻한 미역국, 뜨거운 쌀밥. 제후국의 왕자로 나고 자랐으나, 이렇게 따뜻한 상은 처음이었다.

“우느냐?”

“아닙니다. 울지 않습니다.”

붉어진 눈으로 뻔한 거짓말을 잘도 한다. 그럴 것이면 메인 목이나 잘 추스를 것이지. 거짓말도 서툴고, 감정을 속이지도 못한다. 그래도 명색이 적통 왕자란 것이 어찌 그리 맹한지. 웃기만 잘하고, 그저 칼질이나 조금 한다고 그리 칭송이 자자했던 것인가. 아니면 고향과 가족을 떠난 후에 어린애가 되었나.

“내일은 종일 바쁠 것이다. 하여 오늘 이리 시간을 낸 것이니 서운해 하지 마라.”

“그리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 하면 어서 먹어. 먹어야 또 기운 내서 생글생글 웃을 것 아니냐?”

“예?”

“먹으래도.”

붉어진 눈을 끔뻑거리던 기하가 천천히 입을 벌렸다. 한 김 식은 밥을 크게 떠서 씹다 사레가 들렸는지 캑캑 기침을 해대는 통에 또 한참 소란을 피웠다. 곁에 두면 지루하진 않겠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것이 기운이 빠졌다 한들, 요조숙녀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니.

황제는 꾸역꾸역 밥을 씹어 삼키는 기하를 모르는 척하며 뜨거운 음식을 입에 넣었다. 자꾸만 눈물이 나는지 연신 훌쩍이는 것을 못 본 척하니, 다람쥐처럼 볼이 부풀 정도로 음식을 밀어 넣는다. 미련하긴, 그러다 체하면 어쩌려고.

턱 끝까지 차오른 말을 꿀꺽 삼키며 찬을 밀어주자, 동그란 눈이 움찔 놀란다. 못난 것. 예법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천둥벌거숭이 같은 것. 겨우 이깟 수라 한 번에 눈물까지 꾸역꾸역 삼키는 어리석은 것.

내 너를 어찌해야 할까. 곁에 둘 수도, 밀어낼 수도 없는 너를.

황제의 탄식이 시름처럼 깊어졌다.

상을 물리자 어색함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자꾸만 시선을 돌리던 기하는 습관처럼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검을 잡고 수련한 것이 오래되었는지, 손가락 끝까지 살이 제법 희었다.

“어지럽진 않으냐?”

“예. 잘 먹고 잘 자고 있습니다. 잠이 늘어 큰일입니다.”

예전 사냥터에서 본 바로, 먹성도 좋고 아무 데서나 잘 자는 건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기력이 달려 그럴 것인데, 그 말을 하면서도 부끄럼을 타는지 얼굴을 붉히는 것이 우스웠다.

“살이 조금 더 붙어야겠다. 바싹 말라 보기 좋지 않아.”

“예, 열심히 먹어 찌우겠습니다.”

“그렇다고 그리 미련하게 죄 먹지 않아도 돼.”

아랫것들이 탄일연을 대신하는 것이라 여겨 나름 신경 써서 올린 것 같은데, 보기에도 많아 보이는 밥을 꾸역꾸역 남기지 않고 먹어 치운 것이 신경 쓰였다. 워낙에 잘 먹는다 하였으니, 그런 것인가 싶지마는.

“그럴 것을 그랬습니다.”

“뭐라고?”

“체한 것 같습니다.”

웃기는. 그래, 그럴 줄 알았다. 먹는 것을 보아하니 체하고도 남음이었다.

“침이라도 맞을 테냐?”

“침은 싫습니다. 폐하께서 가신 후에 후원을 조금 거닐면 되지 않을까요?”

“뭐?”

“보는 이가 없으니 살짝 뛰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생글거리는 낯짝은 천하태평이었다. 기껏 바쁜 시간을 쪼개어 침수 들러 왔더니, 뭐가 어쩌고 어째?

“너 지금, 짐더러 다른 처소에서 침수 들라는 것이냐?”

“예?”

“네 말이 그렇지 않으냐.”

“아… 그러니까… 그것이…….”

“잘 알았다. 기껏 생각해서 와 주었더니, 발칙한 것.”

부러 혀를 끌끌 차며 언짢은 표정을 지어 보였더니, 움찔 놀라며 어쩔 줄 몰라 한다. 생긴 것은 말갛고, 하는 짓은 철없는 아이 같은 것이, 꼭 이럴 때만 새색시 흉내를 내는 것이 아주 고약스러웠다.

그저 안쓰럽고 짠한 마음이 들었던 것뿐인데. 이따금 드러내는 순수한 애정이 아직은 마음에 걸림돌로 남는다.

“이만 가마.”

“폐하!”

저도 모르게 용포 자락을 붙잡고서 화들짝 놀라는 꼴에 다시 혀를 끌끌 찼다. 금세 울먹이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슬그머니 용포를 잡는 것에 황당한 시선을 주니,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입술만 연신 달싹거린다. 환하게 밝혀 두었던 등 하나가 밤바람에 훅 꺼졌다.

“뭐냐.”

“그것이…….”

“빨리빨리 답하지 못해? 느려 터진 것은 질색이다. 짐이 그리 한가해 보이느냐? 아니면 참을성이 깊어 보여? 응?”

“그런 것이 아니옵고…….”

“놓아라.”

“폐하! 저기…….”

주름이 가도록 꽉 붙잡은 용포 자락 때문에 발을 뗄 수 없어진 황제가 눈살을 찌푸렸다. 저렇게 맹한 모습은 딱 질색이었다.

누구든 그랬다. 느려 터지고, 속이 무른 사람은 본디 좋아하지 않는다. 마음 같아서야 대충 손을 뿌리치고 싶었지만, 그래도 아직 병색이 남아 있는 후궁인지라 매몰차게 내치기는 찝찝했다. 더군다나 내일은 그의 탄일이기도 하니.

“가지 마십시오. 예서 침수 드십시오.”

“일없다.”

“폐하…….”

“일없다지 않아.”

그러다 금세 울겠다. 아무리 살이 내렸어도 보통 여인보다 키도 크고 뼈대도 잘 다듬어진 사내놈이 주저앉아 있는 꼴이라니.

“애초에 그러시려고 오시지 않으셨습니까? 탄일인데, 그것도 못 들어주십니까? 폐하께 시집와서 처음 챙겨주시는 탄일인데, 너무하십니다.”

이것이 밥을 잘 먹고, 또 슬그머니 살아났나 보다. 예전처럼 또박또박 말대꾸하는 모습에 기가 차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런 주제에 용포 자락은 손에서 놓질 않으니, 확 밀어서 넘어뜨릴 수도 없고.

“기껏 생각해서 수라까지 같이 들었더니, 헛소리냐?”

“소인에게만 특별히 내려주신 은혜도 아니지 않습니까.”

기어이 입을 삐죽하게 내밀고 부루퉁한 소리를 내는 이 뻔뻔한 후궁을 어찌한단 말인가. 작은 여인이 그리하면 귀엽게라도 볼 것인데, 시커먼 사내놈이 도무지 귀엽지 않은 표정으로 그리하니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가십시오.”

입이나 좀 집어넣고 말해라. 보기 흉하다.

“곤하여 침수 들 것입니다.”

“너 지금 짐에게 수작 거는 것이냐?”

“예?”

“그렇지 않으냐? 어디 꽃다운 처자 희롱하는 것처럼, 이랬다저랬다. 오호라, 북성의 총아라 하더니 계집질로 뛰어났더냐?”

“어찌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십니까?”

“이것이 누구한테 소리를 지르는 것이야!”

버럭 성을 내자, 또 금세 풀이 죽어 입을 다무는 꼴이 가관이었다. 쯧쯧, 이런 것을 깊이 생각하여 마음 쓰고 울적함을 달래주려 한 내가 등신이지.

“살펴 가십시오.”

“이제는 아예 대놓고 쫓아내는 것이냐?”

“가신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잘 한다. 그러다 흉하게 울겠다. 고얀 것.

굳세게 잡고 있던 용포도 미련 없이 내려놓고 고집스럽게 입술을 꾹 닫고 앉아 있는 모습은, 후궁이라기보다는 철없는 왕자의 모습이었다. 혼인한 지 다섯 해가 지났거늘, 아직도 철없이 구는 꼴이라니.

“갈 때 가더라도, 청은 하나 들어줄 것이니 말해 보아라.”

저것 보라지. 또 금세 얼굴색이 변한다.

“아무것이나 들어주시는 것입니까?”

“일단 말해 보라 하지 않느냐.”

“약조하시는 것입니까?”

“말이 왜 이리 길어?”

“들어 주신다고 약조하시면 어려운 청을 할 것이고, 들어보고 결정하시겠다 하시면 다른 청을 드리려고요.”

“머리는 그럴 때만 쓰려고?”

아예 둔치는 아니었던 모양이지. 어디 무슨 말을 하나 들어나 보자는 생각을 하면서 황제는 슬그머니 웃음을 거뒀다.

곁에 두면 확실히 아주 무료하지는 않았다. 검은 속내도 없고, 누구에게 쉬이 물들지도 않고. 비록 망아지처럼 세상 물정 모르고 날뛴다 하나, 성정은 바르고 착하니, 서연 그자가 홀로 제 자식은 곧게 키웠구나.

“말해 봐.”

“호위무사로 임명하신 서 중랑(中郞) 말입니다.”

“그자가 왜.”

“소인은 바깥출입도 잦지 않고 그저 태화당에 머물다 자경전에 문후 여쭈러 가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까.”

“웬 사설이 그리 길어. 요점만 말해라.”

“비록 후궁이기는 하나, 그는 소인의 오랜 친우이자 사촌이니 늘 곁에 두게 윤허하여 주십시오.”

“한 침상에서 침수라도 들겠다는 것이냐?”

삐뚤어진 마음이 쉽게 되받아쳤다. 그런 말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나, 찬찬히 들어보니 괘씸하기 그지없었다.

침수 들러 온 지아비는 단칼에 내쫓으면서, 오랜 벗인지 뭔지 알 길 없는 시커먼 사내놈은 늘 곁에 두고 싶다? 저놈이 진정 발간 얼굴로 연정을 고하던 이가 맞나?

“아니 되면 아니 된다고 하십시오. 소인을 그리 욕되게 하고 싶으십니까?”

“내가 내 빈을 욕되게 하여서 뭘 하려고? 너야말로 말도 안 되는 고집으로 짐을 욕되게 하지 마라. 어디 황제의 후궁이 사내와 구별 없이 어울린단 말이냐?”

“그런 것이 아니오라…….”

“뭐.”

“처소에만 있으려니 너무 답답합니다. 달리 할 일도 없고, 몸이 나으면 현 상궁은 당장 수나 놓자 할 것입니다. 종일이 아니더라도 가끔 서 중랑과 장기도 두고, 말벗도 하고, 술도 한 잔씩 나누면서―.”

“미쳤구나, 네가.”

잘도 떠들던 입이 꾹 다물렸다. 억울한 듯 바르르 떠는 입술을 바라보며, 황제는 불쾌한 심기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네가 아직도 북성의 왕자냐? 누구와 술잔을 기울여? 대낮부터 빈이라는 자가 중랑과 술잔을 기울여? 아니면 시커먼 밤에 둘이 마주 앉아 취하겠단 말이냐?”

“소인이 잘못했습니다.”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너는 제국의 사람이다. 황제의 후궁이고, 나의 빈이다.”

황궁이 얼마나 흉흉한 곳인지 몇 년을 살았음에도 아직도 깨닫지 못하다니. 죽어가는 것을 겨우 살려 놓았는데도, 제가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는 천치 같으니라고. 너를 어찌해야 한단 말이냐.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짓은 하지 마라.”

“예. 잘못했습니다, 폐하.”

“잘못인 줄 아는 놈이!”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잘못을 구하며 엎드리는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황제는 거친 숨을 내쉬었다. 어찌 이리 머리가 지끈거리고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지, 별것 아닌 일에 저도 모르게 화부터 냈다는 자각이 든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였다.

좋게 타일러도 됐을 것을.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납작 엎드린 몸을 바로 세우지 못하는 마른 등을 내려다보며, 황제는 아주 짧게 후회의 빛을 비쳤다.

“그만 일어나라.”

못난 것이 요령을 피우지도 못한다. 한참 말려 올라간 마른 팔목을 쥐자, 그제야 놀라 몸을 일으키는 얼굴이 창백했다. 체기가 있다 하였었는데, 엎드려 있는 동안 그것이 심해진 것인지 얼굴이 백지장처럼 희게 질렸다.

“잘못하였습니다. 용서하여 주세요.”

“손 내밀어 봐.”

시무룩한 얼굴로 망설이는 듯하던 기하가 손을 내밀었다. 손끝이 찼다. 손바닥 가운데를 꾹 누르다 엄지손가락 아랫부분을 마저 눌러주자, 움찔움찔하면서도 물러서지는 않는다. 어째 얌전히 있다 싶어서 얼굴을 보니 입술을 달달 떨며 터지는 신음을 참고 있었다.

“아프냐?”

“읏, 예…….”

“미련은 혼자 다 떤다. 얼마나 단단히 체했으면 손이 이리 차? 안 되겠다. 이러다 크게 탈 날 것 같으니 궁의를 부르마.”

“침은 싫습니다!”

“아직 덜 아픈 것이냐?”

“하지만…….”

애도 아니고.

“너 솔직히 말해라. 선봉에 섰다는 것도 모두 거짓이지?”

“예?”

“침도 발발 떠는 놈이 전장에선 무서워 어찌 지냈느냐?”

“그것은 엄연히 다릅니다.”

“다르긴. 칼에, 창에, 활에. 돌도 집어 던지는 전장도 견딘 놈이 그깟 침이 무섭단 말이냐?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해? 내 탓하지 않을 것이니 다 얘기해 보아라.”

“아닙니다! 선봉에 선 것 맞습니다. 칼에도 찔려 보고, 활도 맞아 보고 돌에 맞아 기절한 적도 있습니다. 여기, 여기, 여기도 모두 그때 생긴 상처입니다.”

누구 하나 잡겠다. 어찌나 씩씩하게 옷을 헤치며 상처를 보여주는지. 빤히 얼굴을 쳐다보고 있는데도 아직 뭐가 잘못된 것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활에 맞은 것도 보여드릴까요?’ 하고 묻는다. 어깨를 훤히 드러낸 것도 모자라서 완전히 옷고름을 풀어 헤치려다가 그제야 아차, 하는 얼굴로 변해 다시 손을 벌벌 떤다.

“계속해 봐라.”

침상 끄트머리에 느긋하게 팔을 기대고 앉은 황제는 흥미로운 얼굴로 턱을 추어올렸다. 사나운 황제의 눈매에 기하는 금세 쪼그라들어 어쩔 줄 몰라 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옷고름 풀어 헤친 것이야 잘 잡고 있다 쳐도, 종아리며 허벅지며 죄다 보인 것이 창피해 당장 혀를 물고 싶은 심정이었다.

“우리 빈께선 어찌 그리 음전하신지, 고매(高邁)하기 이를 데 없소.”

“폐하…….”

“기가 막혀 말문이 닫히는구나. 풀어 헤친 옷은 왜 다시 붙잡고 있느냐?”

“폐하께서 자꾸 놀리시니 저도 모르게 그만…….”

“쯧. 네가 빈이 아니라 왕자였다 한들 지금 이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아무리 철날 무렵부터 무지렁이처럼 전장을 누비고 평민처럼 살았다지만, 이것은 보면 볼수록 끝이 없었다. 애초에 버릇을 잘못 들였어. 너무 방치한 탓이다. 이 넓은 처소에 믿을 사람이라고는 고작 상궁 하나가 전부이니. 황궁에 예의를 가르치며 혼낼 어른이 따로 계시는 것도 아니고.

“폐하…….”

“침수 들 것이니 자리 보라 해라.”

“예.”

다 죽어가는 얼굴로 끙끙대는 것을 차마 외면할 수 없어 딱 한 번만 봐주는 것이다. 고얀 것. 발칙한 것. 미련한 것.

저 산골에서 무지렁이를 데려다 놔도 이것보단 낫겠다. 말도 안 되는 청을 하질 않나, 어려운 줄 모르고 대거리나 해대질 않나, 관심을 뚝 끓고 홀로 두었더니 다 죽어가질 않나. 이것 보여도 근심, 안 보이면 더 큰 근심이라.

“폐하, 자리 보겠사옵니다.”

조용히 들어와 의대와 자리를 보려던 현 상궁과 지밀상궁, 서너 명의 나인들이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자리를 보는 이들의 손길이 유난히 빨랐다.

높게 틀어 올렸던 머리를 내리고,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용포를 벗어 던지자 몸이 한결 가벼웠다. 황제는 그제야 다 풀어 헤친 옷을 제대로 추스르지도 않고 생글생글 웃는 기하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저것이 정말.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자, 고개를 푹 숙인 이들의 손이 더더욱 빨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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