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나쁜 피(血)
흐린 달이 떠오른 밤, 황제는 자시(子時)가 넘어서야 정무를 마치고 태화당으로 향했다. 적막감에 휩싸인 태화당은 독한 약초 냄새만 가득했다.
본격적인 치료에 들어가면서부터, 기하는 이틀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줄곧 곁에서 침을 놓고 뜸을 뜨고 향을 피우던 태의는 퇴궐도 하지 못하고 그의 상태를 살피는 중이었다.
“어떠냐.”
“신열(身熱)은 잡혔으나, 워낙 오랜 시간 독이 쌓여 혈이 엉켜 있는 것 같사옵니다. 꾸준히 치료하여야 효험을 볼 수 있으니 너무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침상 아래에는 피 묻은 천이 가득했다. 침을 놓고 검은 피를 빼는 것이 치료의 방법이라고는 하나 그것이 과히 좋아 보이지는 않아, 황제는 얼굴을 찌푸리며 침상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확실히 이틀 전보다는 얼굴색이 좋아진 것 같은데, 도통 눈을 뜰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금일은 그만 퇴궐하라. 그대 나이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겠다.”
“그렇잖아도 이제 슬슬 한계에 달하는 모양입니다, 허허허. 조금 후에 침만 거두고 물러나겠사옵니다.”
“내 직접 할 테니 그만 돌아가.”
간단하게 혈 자리를 찾아 침을 놓는 것 정도는 황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니, 놓은 침을 제거하는 것 정도는 수고스럽지도 않은 일이었다. 물론 그것을 받는 이가 제정신을 가지고 있다면 황송함에 안달이 나겠지마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태의를 물리며, 황제는 물끄러미 기하를 내려다봤다. 침상 한가운데에 반듯하게 누워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입궁하기 전부터 사람 속을 발칵 뒤집어 놓더니.
“정신이 드는 것이면 어서 눈을 떠.”
눈꺼풀이 바르르 떨리는 것을 놓치지 않은 황제가 중얼거렸다. 얇은 눈꺼풀 아래로 눈동자가 움직이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의 이마를 찌르고 있는 침을 빼낸 황제는 혹시나 하는 생각이 푸석하게 늘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어 두피를 어루만졌다.
“음…….”
탁하고 메마른 음성은 병색이 완연했다. 그 작은 움직임에 황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약한 사람은 질색이었다. 특히나 제 몸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할 정도로 약한 사람은 곁에 두고 지켜줄 가치도 느끼지 못했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 발가벗겨진 채 야생에 던져두어도 살아남을 자, 그런 사람이 아니라면 필요 없다.
“폐…하?”
“반편이가 된 것은 아니구나. 물 주랴.”
혼란스러워 보이는 얼굴을 외면하고 침상 위에 놓인 사발을 직접 가져온 황제는 반쯤 담긴 미지근한 물을 내밀었다. 천천히 눈을 깜박이면서 주위를 둘러보는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다 손을 내밀자, 망설임 없이 맞잡아 온다. 그래도 아예 눈치가 없는 것은 아닌 듯하니 다행이었다.
“치료를 받는 중이다. 당분간 더 받아야 해.”
“소인이… 병에 든 것입니까?”
“그래, 그렇다고 할 수 있지. 태의가 널 돌볼 것이다.”
“예? 어찌…….”
“네 병이 깊어 그런 것이니 그가 시키는 대로 잘 따르도록 해.”
“하지만…….”
“또 그리 불만 가득한 얼굴로 말대답하려 드는구나. 그럴 기운이 아직도 남았느냐?”
퉁명스럽지만 어쩐지 다정한 것 같은 음색에 기하는 고개를 푹 숙였다. 황제께서 직접 내려주신 물로 입을 축이자, 그제야 제 꼴이 엉망이고 지금 이 상황이 말도 안 되는 것이라는 자각이 일었다. 주위 사람을 모두 물리고 직접 곁을 지켜주시는 황제라니, 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저… 폐하.”
등이 결리고 아팠다. 처음 전장에 나갔을 때 말에서 떨어져 거의 죽을 뻔했던 날에도 정신을 차리니 온몸이 쑤시고 죽을 만치 아팠었다. 마치 그때처럼 등이 아프고, 몸이 무거웠다. 정신은 아직도 개운하지 못했다. 잠에 취한 것도 같았고, 이것이 환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가, 혹시나 이것은 그저 환상일 뿐이던가.
“소인은 곧 죽습니까?”
“네가 죽긴 왜 죽어.”
“하면, 이미 죽은 것일까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누워라.”
“그것도 아니면, 혹 꿈일지도 모르겠네요. 폐하께서 이리 다정하게 곁을 지켜주시니.”
씁쓸한, 그리고 쓸쓸한 미소였다. 뿌옇게 흐려진 얼굴빛이 좋지 못했기에, 황제는 손을 내밀어 기하의 어깨를 붙잡았다. 병이 든 것은 몸만이 아니었다. 몸보다 마음, 그것이 더욱 깊게 병들었다.
“누워. 조금 더 자는 것이 좋겠다.”
“눈을 감으면 자꾸 꿈을 꿉니다. 그래서 잠들기 싫어요.”
약한 사람 따위는 질색이다.
“머리도 자꾸 아프고, 가끔은 숨도 잘 쉬어지지 않습니다.”
“이제 괜찮다.”
“죽기 전에 꼭 폐하를 가까이 뵙고 싶었습니다.”
“죽지 않아. 그러니…….”
“외로웠습니다. 괴로웠어요. 폐하께서 잘 지내고 있으라 하셔서, 잘 지내고 싶었는데……. 그리되지 않았습니다.”
나약한 사람 따위는, 정말로 질색이다.
“용서하지 않으시면 어쩌나. 용서해 주시기 전에, 용서를 구하기도 전에 그리 죽으면 어쩌나.”
황제는 점점 느려지는 말을 제대로 잇지도 못하고 풀썩 쓰러지려는 기하를 품에 안았다. 이미 정신을 잃은 것인지 고요한 숨소리만 내며 잠든 그를 침상 위로 눕히고도 한참 동안 바라봤다.
씩씩하게 웃던 얼굴이, 연정의 눈으로 바라보던 그 미소가 어쩌면 영영 사라질 뻔했다는 것을 깨닫자, 가슴이 싸하게 내려앉았다.
* * *
며칠 동안 대신들의 각론이 이어졌다. 제국을 둘러싼 오성의 경계를 새로이 분할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각 제후국의 원조를 받으며 자리를 이어가고 있는 황제파 이외의 인물들은 조금이라도 더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유난히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나 서남성과 사성의 든든한 원조를 받는 사도와 사공은 전례에 볼 수 없을 만큼 거세게 제 의견을 피력하였는데, 덕분에 황제마저 며칠째 금룡전을 떠나지 못할 정도였다.
“대체 사도와 사공은 제국의 신하인지, 제후국의 왕인지 모르겠습니다.”
“그걸 굳이 구분 지어 뭣하게.”
“애초에 토지 개편은 왜 하시겠다고 하셨습니까? 지금쯤 입이 찢어지게 웃고 있을 서남성왕을 생각하면 소장은 잠도 안 옵니다.”
들고 있던 검을 움켜쥐며 바르르 떠는 승지를 힐끗 쳐다본 황제가 미소했다. 저 불같은 성미를 어찌 다스려야 할지, 전장에서 뛰고 나면 괜찮을 줄 알았더니 환궁한 뒤로는 더더욱 심해졌다. 이러다가 조만간 무슨 사달이 날까 싶어 황제는 가만히 머리를 굴렸다. 혹, 저놈이 어디 마음에 둔 처자라도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어디 마음에 둔 사람이라도 생긴 것이냐?”
“예?”
펄쩍 뛰는 것을 보니 그것이 정답인가 보다. 전장에서 어느 계집과 눈이라도 맞은 것이었던가.
“더 나이 들기 전에 좋은 짝 만나서 얼른 장가라도 가라.”
“꽃 같은 처자 앞길 망칠 일 있습니까? 언제 어떻게 살다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짓 하고 싶지 않습니다. 대를 이을 것도 아니고, 아버님 어머님께서도 포기하셨습니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놈이 또 있구나.”
봄바람이 잔잔하게 불었다. 꽃이 만개한 후원은 절로 웃음이 날 만큼 아름다웠다. 이런 평화로운 기분을 느끼는 것은 무척 오래간만이었다.
황좌에 오른 후 1년여 간은 주변 경치를 볼 생각도 하지 못하였고, 그 후로는 내내 궁을 비웠으니 어린 시절 보아오던 풍경이 새삼 낯설었다.
“이래 봬도 저는 꽤 순정남입니다. 우리 대단하신 폐하께서야 스물한 분의 처첩을 거느리시며 다사다난하게 사신다지만…….”
“이놈이 툭하면.”
정략(政略)으로 혼인하여 많은 후궁을 둔 것이 늘 불만이라는 승지에게 발끈하던 황제가 사납게 눈을 흘겼다. 그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또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지마는, 그렇다고 해서 이미 들인 후궁을 다시 내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 외롭게 지내실 것이면 정말 마음에 드는 여인 하나쯤 곁에 두셔도 되실 것을. 어찌 그리 칼로 쓰일 이들만 두시려 하십니까?”
“정은 줘서 무엇하겠느냐. 정에 배신당하면 돌이킬 수도 없는 것을.”
“폐하.”
“내겐 지켜야 할 것이 있다. 원하지 않은 자리에 오른 짐 때문에 삶이 고달파진 황후를 위해서라도 그리해서는 아니 되지.”
“부부가 도리만 하고 산다고 다 부부랍니까?”
“머리도 제대로 안 튼 놈이 할 말은 아닌 것 같다만.”
황제는 정이 많고 다정하면서도 쾌활한 사내였다. 황좌에 오르지 않았더라면 자유로이 전장을 누비며 황제를 위해 충성을 다하고 바람처럼 살아갔어야 할 운명이었다.
운명에 빗겨나간 지금은, 지키지 못했던 것을 다시 찾기 위해, 버려진 것들을 다시 재건하기 위해 애쓰는 강인하면서도 나약한 황제일 뿐이었다.
“태화당으로 가십니까?”
“무빈은 차도를 보인다더냐?”
“수라도 드시고 잘 주무신다고 합니다. 바깥출입은 아직 어려운 것 같습니다.”
조용히 뒤를 따르던 지밀상궁의 말에 황제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태의가 치료에 전념할 수 있도록 태화당 출입을 하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황제가 걸음 할수록 지켜보는 눈이 많아지고, 그의 총애가 깊다는 와전된 소문이라도 난다면 온 황궁 사람들이 태화당을 주시할 것이다. 그것은 무빈을 도와주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좀 들여다보십시오.”
방향을 바꾸는 황제의 앞을 무엄하게 막아선 승지의 표정은 꽤 절박해 보였다. 승지가 측은한 마음으로 그를 아끼고 있는 것을 알고 있기는 했으나, 이것은 또 은근히 마음을 흔들리게 했다.
“인간적인 도리 아닙니까.”
굳이 그 말 때문에 흔들린 것은 아니었다. 외로웠고, 괴로웠다는 그 밤의 음성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외로움, 그것은 스스로 쉬이 극복해낼 수 없는 악귀다.
멀리서 다가오는 황제 일행에 문 앞을 지키던 나인들이 오체불복(五體不服)하며 예를 올렸다. 머리를 제대로 들지 못하는 그녀들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문이 벌컥 열렸다. 대야에 물을 받아 나오던 현 상궁은 저도 모르게 움찔 놀라며 급히 예를 올리려 했다. 손을 들어 그녀를 저지하던 황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무엇이냐.”
물은 물론이거니와, 현 상궁이 손에 쥐고 있는 하얀 영견에도 핏물이 흥건했다. 차마 그것을 숨길 수도 없는 처지라 꾸물거리고 있자, 황제 뒤에 서 있던 지밀상궁의 노한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당장 고하지 못하겠는가.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입을 닫는 것이야.”
싸늘한 지밀상궁의 음성에 현 상궁은 아랫입술을 질끈 물었다. 아무리 직접 명하신 일이라 한들, 각혈(咯血)하는 후궁을 그대로 황궁 안에 두지는 않으실 것이다.
“무빈이 그런 것이냐?”
“폐, 폐하.”
“안에 태의 있느냐.”
“예. 예, 폐하. 태의께서 내리신 약을 달여 올렸사온데, 조금 전부터 갑자기…….”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차오른 현 상궁의 곁을 지나치는 황제는 딱딱하게 표정을 굳혔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 차례대로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비릿한 피 냄새에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사납게 들리는 기침 소리와 함께 그를 독려하는 태의의 인자한 목소리가 묘하게 어우러졌다.
“잘하고 계십니다, 마마.”
차마 후궁에게 손을 댈 수는 없었기에 멀찌감치 떨어져 앉은 태의는 몸을 잔뜩 구부리고 거칠게 기침을 토하는 기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한참을 콜록거리던 기하가 기침을 멈춘 것은 그즈음이었다.
거의 앞으로 고꾸라지다시피 한 몸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고 고르지 못한 숨을 내쉬는 마른 등을 바라보던 태의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기하에게로 다가가 그가 쥐고 있던 피에 젖은 영견을 추스르다 황제를 발견하고는 몸을 낮췄다.
“마마께서 잘 버텨주고 계시옵니다.”
“독인가.”
“정도를 보니 이미 많이 희석되었사옵니다. 이제 곧 쾌차하실 것입니다.”
“그대의 노고가 컸다.”
“체력이 약해지시긴 하셨으나, 마마께서 평소 건강하셔서 다행이었지요. 보통 여인이었더라면 아마 버텨내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오늘은 이쯤 하는 것이 좋겠다.”
아직 의식이 남아있음에도 기하는 쉬이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앉은 채로 고꾸라진 탓에, 계절에 맞지 않는 두텁고 폭신한 이불에도 핏자국이 가득했다. 따뜻한 물을 받아온 현 상궁이 초조하게 그를 바라봤다.
태의는 혹시라도 기하가 다시 각혈을 시작한다면 그것을 충분히 뱉어내고, 피부에 닿을 시에는 얼른 씻어내야 한다고 주의를 주며 물러났다.
“마마, 마마.”
늘어져 있던 기하가 몸을 움찔 떨었다. 가까스로 눈을 뜨는 그를 일으킨 현 상궁은 연신 황제의 눈치를 살피며 뜨거운 물에 영견을 적셨다.
손등과 입가, 목덜미까지 피가 튄 자국을 꼼꼼하게 닦으려는데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한 그는 자꾸만 현 상궁의 손을 밀어내며 몸을 휘청거렸다. 이채가 가신 눈은 이미 반쯤 감겨 있었다.
‘소인은 곧 죽습니까?’
왜 그 말이 떠올랐을까.
‘미안합니다, 황자. 어미가 끝까지 곁에 있어 주지 못할 것 같아요.’
어째서 그 순간이 떠올랐을까.
‘외로웠습니다. 괴로웠어요.’
‘폐하, 폐하…….’
‘형님과 누이를 부탁합니다. …부탁한다, 륜아.’
“폐하?”
낯선 음성에 정신을 차린 황제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축 늘어진 기하를 추스르며 현 상궁은 놀란 눈으로 황제를 응시했다.
“두고 나가라. 짐이 하겠다.”
“예? 아니 되옵니다, 폐하.”
“괜찮다. 무빈에게 할 말도 있으니 물러나 있어.”
한 걸음, 다가갔다. 아직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인지 저보다 작은 상궁의 어깨에 기댄 그는 엉망인 채로 몸을 떨었다.
피에 젖은 영견을 추스르며 머리를 숙인 현 상궁이 뒤로 물러났다. 그녀에게서 기하를 받아 안은 황제는 간헐적으로 헐떡이며 몸을 축 늘어뜨린 그의 손을 붙잡았다. 따뜻한 김이 가신 영견으로 피가 튄 손가락 사이사이를 문지르자 움찔 몸을 떤다.
“…폐하.”
“정신이 나간 줄 알았더니 그래도 용케 알아보는구나.”
자꾸만 움찔거리는 몸을 조금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처음 품에 안았을 때엔 싱그러운 풀 냄새가 나는 것 같았는데, 약초와 피 냄새에 가려져 고유의 체향이 사라진 듯했다. 그것이 딱히 불쾌하다는 생각보다는, 문득 그 냄새가 떠올랐다.
“기대고 있어도 괜찮으니 자꾸 움직이지 마라.”
아직 목덜미며 턱 끝에 튄 피가 지워지지 않았다. 독성이 있는 것이니 아무리 제 몸에서 나왔다 한들 딱히 좋을 것 같지는 않아 찬 영견을 가져다 대자, 이번에는 가만히 숨을 고른다.
“잘 견뎠어.”
“배가 아픕니다.”
“그래. 조금 더 아플지도 모르겠다. 이번에도 잘 견뎌야 한다.”
“…예.”
“머리는 괜찮으냐?”
“조금, 아픕니다.”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 것이다. 자, 이제 누워라.”
땀이 났다 식은 것인지 체온이 낮은 것 같다. 아무래도 침상에 불을 피워 넣으라고 명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옷깃을 잡아 오는 손길에 고개를 들었다. 가물가물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마른 시선을 마주하니, 흐린 눈이 느리게 깜박인다.
“왜, 할 말이라도 있느냐?”
“…가실 것입니까?”
“그래. 가야지.”
“조금… 더.”
“잠시 머리를 식히러 나온 길이었다. 자고 있으면 저녁에 오마.”
“저녁…에요?
“그래. 오늘은 좋은 꿈을 꾸고 있어. 금세 다녀오마.”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이처럼 배시시 웃는 기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면서, 황제는 천천히 그를 침상 위로 눕혔다. 그제야 완전히 눈을 감고 기절한 것처럼 잠들어 버리는 모습에 간신히 시선을 거두고 어색하게 제 눈썹을 긁었다.
애초에 이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를 죽이지 않고 황궁에 들인 일부터, 줄곧 살려 두면서 북성에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은 것이. 차라리 버리면 수월할 것을, 이리 오래 내버려 두다니.
어째서 그 순간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을까. 어째서 덜컥, 그런 약조를 하였을까. 모든 것은 어렵고 괴로운 마음뿐이던가.
긴 한숨이 늘어졌다. 소록소록 숨소리를 내며 잠든 기하를 다시 돌아보던 황제가 잠시 발을 멈췄다.
“다녀오마.”
황제의 낮은 목소리가 태화당 안에 잔잔히 녹아드는 그 순간, 기하는 처음으로 아득하고 아름다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저녁달이 구름에 가려 밤하늘은 을씨년스러웠다. 불을 환하게 밝히지 않은 태화당에 들어서자, 조금 전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는 기하의 모습이 보였다. 침상에 기대 앉아 있는 그의 옆얼굴은 퍽 지쳐 보였다.
“뭘 좀 들었느냐.”
갑작스러운 자신의 음성에 놀란 듯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키려는 기하를 손을 들어 저지한 황제가 저벅저벅 걸어 안으로 다가왔다. 침상 근처에 있는 작은 창을 열어둔 탓에 어두운 달빛이 쏟아졌다.
“…폐하.”
“입맛을 잃었어도 뭘 좀 들어야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바라보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살이 내려 더 커진 눈을 거북이처럼 끔뻑끔뻑한다. 다 죽어가는 얼굴임에도 눈동자에 이채가 도니 이제야 제법 사람다웠다.
“무빈이 먹기 수월한 것을 내와라.”
“예, 폐하.”
기하의 곁을 지키고 있던 현 상궁이 조용히 읍(揖)하고 나가자, 황제는 자연스럽게 침상으로 다가가 몸을 낮춰 손을 내밀었다. 커다란 손을 내밀어 이마를 한참 짚고 있던 황제가 흐음, 하고 낮은 숨을 내쉬었다. 보기엔 괜찮은 것 같더니 미열이 남아 있었다. 아직 남아있는 독이 끈질기게도 괴롭히는구나.
“푹 자고 일어났느냐?”
여전히 눈을 깜빡거리고 있던 얼굴에 의문이 차올랐다. 혹시나 하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는 기하를 바라보다 황제는 이내 피식 웃고 말았다. 온 마음을 이리 얼굴에 드러내다니, 알기 쉬운 것 같으니라고.
“꿈이 아니다.”
“하면…….”
“다녀온다고 하지 않았더냐.”
작게 입을 벌리고 멍한 눈을 들어 황제를 바라보던 기하가 제 눈을 비볐다. 혹여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지나치게 현실감이 없는 탓이기도 했다.
“지금 이것도 마찬가지다. 그리 놀란 얼굴 할 것 없어.”
고개를 푹 숙인 기하를 바라보던 황제는 가볍게 주위를 둘러봤다. 여전히 지나치게 넓기만 하고, 아무것도 갖춰진 것이 없는 처소였다. 처음 입궁했을 때는 혹여나 살림이 곤궁하여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애초에 그런 욕심이 없는 듯 보였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명색이 수환제국의 빈이라는 자의 처소치고는 지나치게 소박했다.
“사람 사는 곳 같지 않구나.”
“예?”
“당장 짐을 꾸려 떠난다 해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겠다.”
화려한 것은 지나치게 큰 침상 하나뿐이었다. 그것은 보통 침상의 두 배쯤 되었기에, 장정 서넛이 누워도 충분해 보였다. 그 한가운데에 오롯이 누워 있는 기하를 바라보던 황제가 다시 손을 내밀어 이번에는 그의 뺨을 쓸었다.
“얼굴에 열이 다시 오르는구나.”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나직이 숨을 내쉬는 황제의 손끝을 붙잡은 기하가 초조하게 입술을 씹었다. 감히 그리해도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제 피부에 와 닿은 손을 꼭 한번 잡아보고 싶었다. 심장이 저릴 정도로 다정한 얼굴을 거두고 당장 불호령을 내리신다 해도 상관없었다.
“어찌 그런 얼굴이야.”
커다란 황제의 손, 아니 두 번째 손가락을 꼭 쥐고 고개를 숙인 기하는 방망이질하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어찌나 심장이 요란하게 뛰던지, 무엇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빈.”
“…예, 폐하.”
“이제 괜찮을 것이다.”
한없이 다정한, 그리하여 가슴 떨리는 목소리였다. 단 한 번도 제대로 바란 적 없는, 감히 닿을 수 없던 분이었다. 그대로 잊혀 영영 다시 곁에서 볼 수 없다 해도 좋을 만큼, 처연한 꿈으로 덧씌워진 분이었다. 그런 분이 괜찮다 하신다.
“이제 아프지 않을 것이다. 기억이 잘리는 것도 없을 것이고. 무기력하지도 않을 것이다.”
“성은이, 망극…….”
“그러기 위해서는 싫어도 잘 먹고, 잘 자고, 그리해야 한다.”
“예, 폐하.”
“예전에는 곧잘 웃더니 아파서 그런지 통 표정이 없구나.”
처음 보았던 여덟, 그리고 다시 만났던 열여덟의 그는 지나치게 해사하고 밝았다.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처럼, 씩씩하게 팔딱팔딱 뛰었다. 또다시 다섯 해가 지난 지금의 그는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약해져, 도저히 손을 내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는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얼른 건강해져라.”
“이제 괜찮습니다.”
“면경을 보여주랴? 다 죽어가는 얼굴로 괜찮다 하기는.”
입꼬리를 올려 피식 웃은 황제가 노곤한 숨을 내쉬었다. 전장에서 돌아온 후에도 밤낮없이 정사에 매진하는 황제를 걱정하는 소리가 황궁 안에 자자했다. 그런데도 흔들리지 않는 표정의 황제가 가엾고 안타까웠다. 감히 이런 마음을 품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마는.
“뭘 가져왔느냐?”
“잣죽입니다.”
“이리 다오.”
현 상궁이 가져온 다리가 짧은 소반(小盤)을 직접 받아 든 황제는 그것을 기하의 앞에 내려놓았다. 김이 폴폴 솟아오르는 죽에선 고소한 냄새가 났지만, 딱히 입맛이 돌지 않는 탓에 그저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는 것조차 곤욕스러웠다.
“가져온 성의가 있으니 조금이라도 떠라. 그리 계속 빈속으로 있으면 속 버린다.”
“예.”
“기운이 없어 그러냐?”
“아닙니다.”
“하면 어서 들어. 낯간지럽게 먹여달라는 청은 아니 된다.”
황제의 담담한 음성에 기하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그렸다. 이렇게 마주 보고 있는 것이 자꾸만 믿기질 않아서 얼떨떨한 얼굴로 바라보게 된다. 꿈이 아니라 하셨는데도 자꾸만, 자꾸만.
“애도 아니고 어찌 이리 칠칠치 못해.”
손에 힘이 없어서 숟가락 드는 것조차 기운이 달렸다. 뜨거운 죽을 억지로 입에 넣으려니 혓바닥부터 목구멍까지 여간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것을 꾸역꾸역 입에 넣었다.
황제는 직접 영견을 들어 죽이 흐른 입술을 닦아주더니, 이내 숟가락을 빼앗았다. 혹여나 칠칠치 못하다며 노한 얼굴로 바라보시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고개조차 제대로 들지 못하고 데인 혀를 둥글게 말고 있던 기하는 제 앞으로 내밀어진 숟가락에 놀라 움찔 어깨를 떨었다.
“미련하기는. 그 뜨거운 것을 식히지도 않고 입으로 넣어 어쩌자는 것이냐.”
“송구합니다.”
“내게 송구할 것 없다, 네 입이 뜨거운 것이니. 자, 입 벌려라.”
숟가락에 반쯤 뜬 죽에선 아직 김이 올랐지만, 기하는 망설이지 않고 입을 벌렸다. 적당히 불어 식힌 죽이 이미 데여 벗겨진 입안에 닿자 쓰리고 아팠다.
“물부터 마셔.”
이번에는 직접 물을 주시는 것을 받아먹으니, 쓰리고 따끔거리는 입안에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이러니 자꾸 황제께서 미련하다고 하시는 것이겠지. 제가 생각해도 정말로 미련했다.
“어린 아들들도 이리 직접 먹여준 적이 없거늘. 광영(光榮)으로 알아라.”
투덜대시면서도 숟가락질을 멈추지 않으신다. 과하지 않을 정도로 죽을 떠서 후후 불어 한 김 식히고 내미시는 것을 얌전히 받아먹으면, 얼굴엔 잠시 해사한 미소가 서린다.
그것이 좋아 홀린 듯 바라보고 있으려니, 또 정신을 놓고 있느냐며 타박을 하신다. 그것도 좋았다. 그저 이리 바라보고 있는 것이, 죽어버린 심장을 다시 뛰게 하는 것 같아서.
“더 못 먹겠느냐?”
“예?”
지나치게 정신을 놓고 있었던 탓인지, 기하는 제가 입에 담긴 것을 제대로 씹지도 않고 꿀떡꿀떡 넘기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제야 민망함에 얼굴이 확 붉어지려 하자, 황제는 미련 없이 소반을 침상 아래로 내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행히 아무도 없다. 물론 가장 부끄럽게 생각되는 분이 눈앞에 계시지마는.
“건강을 찾는 것은 중한 일이나, 미련하게 애쓸 필요는 없어.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하면 된다.”
“예, 폐하.”
이곳은 지나치게 고요했다. 달빛이 흘러 들어옴에도 그것의 아름다움이 느껴지지 않을 만치 어둡고 서늘했다. 외롭다 했던가. 하여 괴롭다고도 하였지.
‘끼이잉.’
기하를 향해 막 입을 열던 황제가 눈을 돌렸다. 분명 어디선가 짐승 소리가 들렸다.
‘끼이잉.’
“폐하?”
“들짐승이 흘러 들어오기라도 한 모양이다.”
항상 몸에 지니고 있는 검을 뽑아 든 황제가 성큼성큼 창가로 향했다. 순간 손을 내밀어 황제의 용포 자락을 붙잡은 기하가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손가락이 희게 질릴 정도로 세게 붙잡은 탓에, 황제는 자연스럽게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왜. 어디가 아픈 것이냐?”
“들짐승이 아닙니다. 소인이 데리고 있는 아이들입니다. 검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대가?”
“예. 해를 가할 아이들이 아닙니다. 소인이 줄곧 데리고 있었사온데, 며칠 제대로 돌보지 못하여 저리 우는 것입니다.”
황제의 검이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표정 변화 없이 검을 집어넣은 황제의 눈이 무심하게 빛났다. 초조한 표정의 기하를 바라보니, 그것이 또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해하지 않을 것이니 그리 떨 것 없어.”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한데 짐승이라니. 개라도 키우는 것이냐?”
“스라소니입니다. 일전에 폐하를 따라 황실 사냥터에서 데리고 왔던…….”
“그것들이 아직도 있단 말이냐?”
“법도에 어긋나는 일입니까?”
딱히 그런 법도는 없었다. 어쨌거나 그것은 자신이 직접 허한 일이기도 하니, 딱히 법도에 어긋날 일도 아니었다.
“야생의 피가 있어 길들이기가 쉽지 않을 것인데.”
“젖먹이 때부터 직접 키웠더니 떨어지려 하지 않습니다.”
“많이 자랐겠구나.”
“궁금하시면 직접 보시겠습니까?”
말 못 하는 짐승이나 어린아이는 질색이었다. 적당히 손을 들어 그를 저지하려던 황제는 들뜬 얼굴을 숨기지 못하는 기하를 바라보다 입을 다물었다. 저리 좋아하는데 그것 잠깐 못 볼 이유는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다 죽어가는 얼굴이더니, 그깟 짐승 얘기로 이렇게 웃는 거냐. 나이를 거꾸로 먹은 것인지, 천연덕스러운 얼굴 또한 그대로였다.
“들여라.”
침상에 털썩 주저앉아 검집에 손을 올려 턱을 괸 황제는 무심한 얼굴로 문을 바라봤다.
“상궁을 부르면 되느냐.”
“아닙니다. 부르면 올 것입니다.”
“부르면 오다니.”
“영, 달. 이리 오너라.”
속삭이는 듯하던 기하의 음성이 힘 있게 변했다. 의아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던 황제의 눈살이 작게 찌푸려졌다. 그가 명하는 순간, 활짝 열린 창문으로 뭔가가 튀어 들어왔다.
거의 반사적으로 기하의 앞을 막아서던 황제는 단박에 침상 위로 뛰어오르는 짐승을 사나운 눈으로 쳐다봤다. 이것이 어찌 그저 귀여워 기르는 짐승이란 말인가. 야생성을 버렸다더니, 형형한 눈은 당장에라도 이나 발톱을 드러낼 것 같다.
“이것이―.”
“온순하고 영민합니다. 이 아이가 영이고, 이 아이가 달입니다.”
‘크르릉.’
사나운 짐승 소리가 침소 안에 울렸다. 노오란 눈을 빛내는 짐승의 사나운 숨소리에 황제는 눈을 찌푸렸다. 짐승은 생각보다 덩치가 컸고, 날카로운 발톱과 이를 서슴없이 드러냈다. 무엇보다 전혀 온순해 보이지 않았다, 전혀.
“폐하께 공손히 굴어야 해. 너희를 살려주신 분이다.”
탄탄한 머리통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기하의 손길에 짐승들은 그제야 경계 태세를 무너뜨렸다. 얌전히 몸을 낮추고 눈까지 감은 채 그의 손길을 받아들이는 짐승은 갸르릉, 하며 혀를 날름거렸다.
보기에도 거칠어 보이는 긴 혀를 내밀어 손등을 핥고, 손가락을 오물거리는 꼴을 보고 있으려니 기가 찼다. 저러다가 금세 돌변하여 이라도 드러낸다면 영락없이 손이 잘릴 것이다.
“밤에 함부로 다니면 위험하니 얌전히 있어야 한다?”
‘끼이잉.’
애처로운 눈으로 기하의 손길을 받던 짐승들은 연신 얼굴을 그의 손바닥에 비볐다. 그 모습이 꼭 어미를 그리는 어린 짐승 같아서 퍽 애처로워 보였지만, 황제는 곧 그 마음을 거두고 찌푸려진 얼굴을 펴지 않았다.
“침상 아래로 내려가 얌전히 자야 해.”
그나마 침상에서 함께 침수 들려 하지 않는다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혀를 끌끌 차는 황제를 향해 의문스러운 시선을 돌린 기하가 민망함에 생긋 웃었다.
아이들을 너무 오랜만에 본 탓에, 잠시 눈앞에 있는 황제조차 잊고 말았다. 물론 평소 같았으면 현 상궁이 잔소리할 때까지 품에 안고 있었겠지.
“그 손이나 닦아라.”
“예?”
“짐승 놈들이 물고 빨고 한 손이나 제대로 닦으라고.”
“아…….”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맡에 놓인 물에 적신 영견으로 손을 닦는 기하를 물끄러미 바라보니, 침상 아래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찹찹찹, 하는 소리와 함께 식기가 달그락거리자 무심히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던 황제의 얼굴이 사납게 구겨졌다.
“어찌 그러십……, 이 녀석들!”
커다란 머리를 서로 맞댄 채 먹다 남긴 죽 그릇에 얼굴을 처박고 있는 놈들 때문에 민망함에 얼굴이 달아오른 기하는 급하게 손을 내밀어 영과 달을 말리려 했지만, 황제의 손이 조금 더 빨랐다.
사실 이런 것이 한두 번은 아니었는데, 현 상궁이 아무리 화를 내고 경을 쳐도 식탐 많은 짐승을 막을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아마 이 모습을 현 상궁이 보았더라면, 분명 저 녀석들의 궁둥이에 불이 붙도록 매타작이 이어졌을 것이다.
“송구합니다, 폐하. 교육을 잘 한다고 하였는데…….”
“살림이 그리 곤궁하냐.”
“…예?”
“야생 짐승이 죽 그릇이나 탐하고 있는 꼴을 보니 기가 차서 하는 말이다.”
“…먹성이 좋아 배부르게 주지는 않습니다. 배가 부르면 기운이 펄펄 나 온갖 사고를 치고 다니는 통에…….”
거짓을 고할 수 없어 사실대로 말하면서도, 기하는 드문드문 말을 멈췄다. 혹여나 크게 노한 황제께서 저것들을 당장 황궁 밖으로 갖다 버리라 하시면, 명을 거역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었다.
“일단 저것들 좀 치워라. 꼴을 보고 있으니 머리가 다 아프다.”
깨끗하게 비운 죽 그릇은 바닥으로 떨어져 엎어졌다. 호랑이처럼 늠름한 표정을 하고선 볼에 뭍은 죽을 날름거리는 꼴이 기가 막혔다. 그런 주제에 황제를 보고 발칙하게 이를 드러낸 놈들을 더는 곁에 두고 싶지 않았다.
딱딱한 황제의 표정에 기하는 조그맣게 현 상궁을 불렀다. 조금 전까지는 생글거리던 주제에 의기소침해진 얼굴로 바깥에는 들리지도 않게 중얼거리는 기하를 보고 와락 얼굴을 구긴 황제가 큰 소리로 명하자 문이 벌컥 열렸다.
“이것들 좀 치워라. 침상 아래도 정리하고.”
화들짝 놀란 현 상궁이 후다닥 안으로 들어와 짐승의 목덜미를 부여잡았다. 요란하게 울며 뒤집히면서도 그녀를 공격하지 않는 짐승들이 기하를 향해 낑낑거렸다. 애처로운 울음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그녀가 기세 좋게 짐승을 질질 끌고 나갔다.
이미 이런 것이 한두 번은 아니었던 듯, 기하는 애처롭고 안타까운 마음에 입술만 빵긋거렸다. 현 상궁이 버티기 시작하는 짐승의 궁둥이를 팡팡 때리자, 요란한 울음소리가 어지럽게 흩어졌다. 뒤이어 들어온 나인들이 바닥을 모두 정리하고서야 그곳엔 평온함이 깃들었다.
“…송구, 합니다.”
어째 황제를 뵐 면목이 없었다. 괜스레 볼을 긁적거리며 눈을 아래로 내리깐 기하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더더욱 고개를 숙였다.
“곤하다.”
“예?”
“곤해. 하도 신경을 썼더니 머리가 다 지끈거린다.”
깊게 숨을 내쉰 황제의 얼굴엔 피로감이 역력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여태껏 눈치 없이 짐승 얘기나 하고 있었으니. 기하는 민망함에 달아오른 얼굴을 어쩌지 못하고 쩔쩔맸다. 그런데도, 고요히 눈을 감으며 이마를 짚은 황제의 모습이 몹시 수려하여 가슴이 몹시 뛰었다.
“침수, 드시겠습니까?”
긴 숨을 내쉬고, 간신히 눈을 뜬 황제를 마주 보며 기하는 볼을 붉혔다. 동침을 처음 하는 것도 아니었고, 이것은 아무런 의미 없는 말이었는데도 어쩐지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더욱이 황제께서는 단 한 번도 태화당에서 머물고 가신 적이 없으셨다. 동침이라고 해봤자 아득히 정신이 나가 있었던 초야와 사냥터에서의 잠 못 이루던 밤뿐이었고.
“불편하지 않겠느냐.”
“괜찮…괜찮습니다. 폐하께서 불편하시면 소인이 다른 곳에서 침수 들면…….”
“되었다. 침상도 넓은데 굳이 그럴 필요 없어.”
제아무리 강인한 체력이라 하나, 한계치를 벗어나게 되면 그대로 고꾸라지기 마련이었다. 어젯밤 짧게 눈을 붙이고도 흉몽을 꾸느라 편히 쉬지 못한 탓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 말간 얼굴을 계속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느슨해지기도 하였고.
“하면, 잠자리를 보라 이르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의대 정리는 홀로도 족하다.”
그대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황제는 나른한 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스스로 의대를 풀어 헤치는 손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기하는 눈 둘 곳을 찾아 애써 고개를 돌렸다. 사박사박. 벗은 의복을 아무렇게나 툭툭 던져두는 손길에 귀 끝까지 붉게 물들이다가, 더는 참지 못하고 침상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깜빡깜빡 눈을 감았다가 떠도 황제는 그대로였다. 그 모습이 몹시 설레어 기하는 수줍게 웃었다. 며칠간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자고 일어나서인지 예전보다 몸이 가볍고 정신이 맑았다.
이런 와중에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침수 드신 황제라니. 이제는 까맣게 지워진 줄 알았던 감정이 소록소록 차올랐다. 철모르는 소녀도 아니고 이것이 무슨 추태란 말인가.
“잠이 오지 않느냐.”
“송구합니다.”
“잠이 오지 않느냐 물은 것뿐인데 어찌 대답이 그래.”
반듯하게 누운 황제가 입술을 달싹였다. 길게 풀어 헤친 머리카락이 단정하게 늘어졌다. 여느 여인보다 윤기 있고 찰랑거리는 흑단 같은 머리카락에서는 좋은 향기가 났다.
숨소리를 죽이고 그의 모습을 말없이 훔쳐봤다. 어둠에 가려 잘은 보이지 않았지만, 오뚝한 콧날이라든지, 단정한 입매라든지, 잘 빚어놓은 것 같은 턱선이라든지.
“잠이 오지 않으면 억지로 잠들 필요 없다. 줄곧 자다 일어났으니 그럴 만도 하지.”
일일이 대꾸해주지 않으셔도 되는데. 낮게 가라앉은 황제의 목소리는 노곤함이 가득했다. 겨우 몇 시간 침수 드시는 것이 전부인 그의 단잠을 방해한 것만 같아서 기하는 애먼 손톱을 뜯었다.
“북성은 예전보다 기후가 따뜻해졌다 하더구나.”
갑작스러운 황제의 말에 기하는 퍼뜩 눈을 들었다. 꿈을 꾸는 것처럼 그는 느리게 입술을 달싹였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물끄러미 바라보자, 달빛이 스며들어 황제의 얼굴을 은은하게 비췄다.
“서남성의 영토가 북성으로 제법 흘러들었어. 도를 넘지 않은 정도라 내버려 두었더니, 그간 애를 쓴 모양이더구나. 덕분에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토지가 늘어, 지난겨울엔 백성들이 제법 잘 버텼다.”
그렇구나. 그랬구나. 그렇게 모두, 잘 지내고 계시는구나.
“하지만 더는 두고 보지 않을 것이다. 이미 북성의 서연은 반역자의 이름을 달았다. 대신들의 눈이 곱지 않아. 다른 제후들도 마찬가지다. 그를 혼자 살려둔 것에 내심 불만을 표하고 있거든.”
시간이 아무리 많이 흘렀어도 그것은 변하지 않는다. 사실은 면죄 받은 그 후, 바로 제후의 자리를 내려놓음이 마땅했다. 그것이 법도는 아니었으나, 그것만이 북성도 살고 백성도 사는 길이었다.
수많은 백성이 북성을 떠났다. 그들은 모두 북성에서 나고 자란 북성의 백성이었으나, 그 전에 황제께 충성을 맹세한 황제의 백성이었다. 황제를 배신한 왕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도 아버지께서는 하야(下野 : 관직이나 정계에서 물러남)하지 않으셨다. 기꺼이 저를 후궁으로 내어 주셨다. 황제 폐하를 믿지 말라 하셨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었다.
“너를 탓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는 왜 그러셨을까. 왜, 폐하를 믿지 말라고 하셨을까. 폐하께서는 이리도 다정한 분이신데. 죽지 말고, 북성을 버리고서라도 살라고 명하셨는데.
“나는 네가 미웠으나, 너는 잘못이 없음을 안다. 돌아가신 형님께서도, 하나뿐인 누이도, 그리고 나 또한 잘못이 없듯이. 너도 그저, 어른들의 운명에 얽힌 것뿐이겠지.”
북성을 버리는 것이 맞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으니 그리하는 것이 맞다. 폐하께서 은혜를 내리시어, 이리 받아주시었으니 그것이 옳은 도리다.
“빈.”
하지만 나 또한 북성의 사람이다. 혹여, 아버님께서 살라고 보내신 것이라도, 어찌 나 홀로 살 수 있단 말인가. 나 또한 북성의 사람인 것을. 나 또한, 죄인인 것을.
“이제 그대를 탓하지 않으마.”
내게는, 나쁜 피가 흐른다.
“그대의 죄를 묻지 않으마.”
그것을 어찌 갚아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