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돌아보다(顧)
황궁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 보름 안에 토끼 굴을 바치기로 약조하였던 거기장군은 싸늘한 주검이 되어 황실 성문 앞에 버려졌다.
이것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한 황제는 크게 진노하였고, 수도에 상주하고 있던 군대가 긴급하게 편성되었다. 많은 대신이 만류하였으나, 황제께서는 굳이 선봉대에 오르셨다.
오합지졸의 발버둥이라 여겼던 환인국과 연국은 포악하기로 유명한 탄두르족을 등에 업었다. 그들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제국군과 맞섰다.
많은 수의 백성이 희생되었고, 늘 평온하고 별다른 침략을 겪지 않아 오성 중 가장 허술한 남쪽 군대는 황제에게 아무런 힘을 실어주지 못했다.
그들은 꼬박 4년 반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셀 수 없는 제국의 백성이 죽어 나갔다. 탄두르족에 월인족까지 합세한 최고의 궁수 부대와 기마 부대에 온몸으로 맞서며, 황제는 조금씩 승리에 가까이 다가갔다.
3만의 병사 중, 1만 8000을 잃고서야 황제가 이끈 제국군은 완벽한 승리를 거머쥐었다.
시영(施領)제 7년. 수환제국의 지도가 다시 한 번 크게 바뀌었다.
* * *
봄꽃이 만개했다. 푸른 잎이 돋아난 황궁은 오랜만에 봄다운 봄을 맞이했다. 보름 전에 환궁하신 황제께서는 성대한 연회를 열어야 한다는 대신들의 주청을 묵살하고, 평온한 나날을 보내시는 중이었다. 고요하기만 했던 황궁에 웃음꽃이 피었다.
“마마, 이것 좀 보십시오.”
“쉿. 조용히 해, 이것아. 마마께서 이리 계실 때는 소란 떨지 말라고 했잖아.”
무릎 위에서 까무룩 잠들었던 영과 달이 사나운 소리를 냈다. 부쩍 무거워진 녀석들이 차지한 다리가 저려도 기하는 짐승들을 쉬이 밀어내지 않았다.
본디 야행성이라 이리 볕이 좋은 날에는 꾸벅꾸벅 조는 것이 일상이었다. 토실토실 살이 오른 보드라운 엉덩이를 통통 두드리면, 까끌까끌한 혀를 내밀어 손등을 핥는 것으로 애정을 표한다.
“어찌 그래.”
“소주방(燒廚房 : 궁에서 음식을 만드는 곳) 박 나인이 마마께 이것을 전해 올리라고 하였습니다.”
동그란 바구니 안에 담긴 것은 향과 모양이 좋은 타래과였다. 달콤한 향기가 어찌나 깊은지 잠들어 있던 영과 달이 코를 벌름거리며 일어날 정도였다.
기하는 물끄러미 그것을 내려다보다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소주방 박 나인은 또 누구던가.
“에이, 마마 또 기억 못 하신다. 지난겨울 장독을 나르다가 미끄러져 큰일 날 뻔하였던 박 나인 말입니다. 키가 크고 주근깨가 있는 분이요.”
“얘, 마마께 고할 때는 ‘주근깨가 있는 이’라고 하는 거야. 넌 마마께서 그리 가르쳐 주셨는데도 아직도 예법을 못 익혔니?”
카랑카랑한 소현의 목소리에 연금은 입술을 삐죽 내밀다가, 기하를 보고는 헤헤 웃고 만다. 둘이 입궐할 때부터 늘 붙어 다녔다 하는데 어찌 이리 성미가 다른지. 하나는 지나치게 느긋했고, 다른 하나는 눈치와 행동이 빨랐다. 때문에 늘 불만을 야기하는 것은 급한 성미의 소현이었다.
“그래, 기억나는구나. 한데 이것은 내게 왜?”
“마마께서 좋아하신다 하였더니 박 나인이 꼭 상에 올리라 하였습니다. 차와 함께 올릴까요?”
조그마한 바구니에 담긴 것은 혼자 먹기에는 다소 많은 양이었다. 그중 적당한 크기의 타래과를 하나 꺼낸 기하가 빙긋이 웃었다.
“나머지는 나눠 먹으렴.”
“예? 이 귀한 것을요?”
“나는 이거면 된다.”
“하지만…….”
“급하게 먹다 체하지 말고 하나씩 나눠서 맛보아.”
얼굴을 발그레 물들이는 연금에게서 시선을 거둬낸 기하는 달콤한 타래과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입술에 닿자마자 느껴지는 단맛에 혀가 절여지는 것 같다.
예전에는 이것도 무척 좋아하였던 것 같은데, 입맛을 잃은 후로는 무얼 먹어도 그리 맛있다고 느끼지 못했다. 영영 미각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아니 돼. 너희는 이것을 먹으면 또 금세 배앓이를 할 것이야.”
야생 짐승에게 황궁은 지나치게 답답한 곳이었다. 특히나 잠시만 눈을 떼어도 사고 치기 일쑤인 영과 달은 이따금 심술을 부리다 배앓이를 하거나 털이 한 주먹씩 빠져 기하의 근심을 샀다.
그나마 이곳에서 유일하게 웃을 수 있게 해주는 아이들이라 태화당에 배정된 의원은 기하의 건강보다는 영과 달의 상태를 보는 일이 더 잦았다.
무엇보다 기하가 걱정하는 것은 이 녀석들의 숨겨진 야생 본능이 되살아나, 언젠가처럼 황궁을 누비며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까 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제 앞에서 순한 양이 된다 한들, 이 아이들은 한낮 짐승에 불과했다. 산을 뛰어다니고 나무를 타며 저보다 약한 짐승을 잡아먹는 것들이니, 이따금 몰래 태화당을 벗어나 문제를 일으킬 때면 눈앞이 까맣게 변하곤 했다.
그나마 황후께서 아량을 베푸시어 문제를 해결하곤 했으나, 언제까지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른 처소에서도 슬슬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었으니까.
“배가 고파 그래?”
달콤한 타래과를 입안에서 굴리며 기하는 빙긋이 미소했다. 거친 듯하면서도 부드러운 영과 달의 털을 차례대로 쓰다듬고 시간을 헤아렸다.
날이 갈수록 어마어마하게 먹어대는 통에, 태화당은 남아나는 음식이 없었다. 스라소니에게 풀이나 곡식을 먹일 수도 없는 노릇이라 더더욱 그랬다.
황제께서 특별히 키우시는 짐승도 아니라 올라오는 음식의 종류는 한정적이었다. 총애를 받지 못하는 후궁에게 호사 따위를 누릴 여유는 없었다.
“배가 이리 볼록한데 또 식탐이야. 그러다 걷지도 못하겠다, 이 녀석아.”
유독 식탐이 많은 영의 콧잔등을 문지르자, 겁 없이 이를 드러내며 기하의 손가락을 콱 물었다. 턱에 힘을 가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워낙에 이가 날카로워 금세 피가 송골송골 맺혔다. 아마 현 상궁이 보면 또 몽둥이를 찾아대겠지. 슬그머니 핏방울을 문질러 닦으며 점점 무거워지는 눈두덩을 문질렀다.
“마마, 오수(午睡 : 낮잠) 드실 시각이옵니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현 상궁 그림자에 기하는 슬그머니 제 손을 감추었다. 중반을 들고 나면 잠시 소화를 시킨 후에, 의원이 처방한 약을 먹고 오수에 드는 것이 요즘 일과였다.
그래 봤자 겨우 침상에 누워 영과 달의 체온을 맞대고 있는 것뿐이었는데, 의원은 굳이 잠들지 않아도 그것으로 족하다며 극구 안정을 권했다.
그저 주는 밥을 먹고, 가만히 앉아 서책을 보고, 답답하면 산책하러 나가는 것이 전부인 일상임에도 그는 빛을 잃은 탁한 그림자처럼 하루하루 말라 갔다. 말도 줄었고, 웃음 또한 잃었다. 나른한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든 태화당은 기하의 표정만큼이나 쓸쓸하고 고요했다. 시끌벅적한 황궁에서 오직 이곳만이 그랬다.
“황후마마께서는 금일도 처소에 계시다던가?”
“예, 마마. 오전에는 연진 공주께서 다녀가시었고, 낮것은 황제 폐하와 함께 젓수셨다 합니다.”
“그래.”
황제가 전장으로 자리를 비운 틈을 비집고 일어서려는 세력을 견제하기에, 황후는 가진 것이 없었다. 그녀는 이따금 혼절하는 등의 이상 증세를 보이곤 하였는데, 워낙에 몸이 약하여 기하가 입궁하기 전 이미 두 번이나 유산을 했더랬다.
내명부의 수장인 그녀가 짊어진 삶의 무게 또한 만만치 않았겠지. 지난 5년을 반추하며 머리를 가볍게 흔든 그는 현 상궁의 바람대로 따끈하게 데워진 침상에 몸을 뉘었다.
“이제는 불을 넣지 않아도 돼.”
“그래도 따뜻한 것을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응. 한데, 괜찮아. 자네도 수고스럽고.”
북성의 추위를 어찌 견뎠을까 싶을 정도로 이번 겨울은 혹독했다. 유난히 그가 느끼는 겨울이 그러했다. 긴 전쟁의 끄트머리에 서서 황제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일까.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처럼 기하는 몇 번이나 크게 앓아누워 태화당 사람들의 애간장을 녹였다.
‘끼잉. 끼이잉.’
서로 기하의 품을 조금 더 깊이 차지하려고 투닥거리던 영과 달은 기어이 이를 드러내고 그르렁거리다가, 사이좋게 엉덩이를 두드려 맞았다. 그럴 때마다 이렇게 다 죽어가는 시늉을 하는 것이 귀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해서, 그 후로 기하는 몇 번이나 짐승들의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었다.
잠이 들고 싶지는 않았다. 눈을 감으면 이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겨우 다섯 해가 지났을 뿐인데, 북성의 깃발조차 이제는 흐릿했다.
기억을 좀먹는 병이라도 걸린 것은 아닐까. 이러다가 아버님과 형님의 얼굴마저 잊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두려움에 벌벌 떨다 겨우 눈을 뜨면, 보이는 것은 까만 어둠뿐이었다.
꿈에서 깨어나고 또다시 깨어나도 발밑에는 아무것도 없고,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아 악을 쓰다 겨우겨우 제자리로 돌아온다.
모든 것은 그렇게 변해버렸다.
* * *
황후의 부름에 오랜만에 자경전에 들른 기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처음 보는 궁의였다. 황후께 예를 올리고 그녀가 시키는 대로 얌전히 앉아 궁의에게 진맥을 받자, 자경전 안은 삽시간에 무거운 침묵이 맴돌았다.
“어떤가?”
“맥이 보통 사람보다 약하시긴 하나, 큰 이상은 없으십니다. 입맛이 없으시더라도 잘 드시고 침수 드셔야 하는데, 아마 그것이 원인인 듯싶습니다.”
“하면, 몸을 보하거나 입맛을 돌게 하는 약재가 있는 것인가?”
“탕약도 너무 자주 드시면 좋지 않사옵니다. 일단 의식적으로라도 식사를 꾸준히 잘 하시어야지요.”
궁의의 단조로운 말에 황후는 몇 번이나 그를 재촉했다. 그들 사이에서 기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평소 자신을 신경 쓰는 황후의 마음은 잘 알고 있었으나, 그녀의 지나친 관심은 이따금 부담스럽기만 했다.
물론 다른 후궁들에게도 살뜰하게 대해주시니 혼자만의 혜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마는, 어쨌거나 지금 이런 상황은 마음을 무겁게 했다. 딱히 좋은 일도 아니고.
“알았네. 수고하였어.”
예를 올리고 자경전 밖으로 나가는 궁의에게서 시선을 거둔 황후는 기하를 바라보며 잠시 숨을 골랐다. 처음 입궁할 때만 해도 잘 웃고 씩씩하던 그를 떠올리며 근심 어린 표정을 짓자, 보다 못한 기하가 먼저 빙긋이 미소했다.
“매번 이리 걱정만 끼쳐 송구합니다.”
“자네가 어서 기운을 차렸으면 좋겠네.”
황후는 유난히 기하를 애틋하게 생각하고 아꼈다. 마치 친동기간처럼 좋은 것은 무조건 나누려 했고, 바쁜 일정을 쪼개 안부를 묻는 것은 이제 일상이 되어 버렸다. 그녀가 그럴수록 더더욱 아무것도 드릴 것이 없었기에, 기하는 마음에 추를 매단 것처럼 무겁게 처소로 돌아와야 했다.
“그래야 탄일 선물도 기쁘게 받을 수 있지 않겠나.”
“예?”
“얼마 후면 그대 탄일이지 않나? 폐하께서 오랜 기간 궁을 비우신 탓에 입궁하고 제대로 된 연회 한 번 열어주지 못한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네.”
“전장 중에 그럴 수가 있습니까. 소인은 괜찮습니다.”
“이번엔 내 선물이 무척 마음에 들 터인데?”
기하는 자애롭게 미소하는 황후의 얼굴을 의문 섞인 눈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평소 조용한 성정의 황후는 이런 식으로 웃는 여인이 아니었다. 기하는 무언가 즐거운 일을 목전에 둔 사람처럼 생기 가득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그것이 황제의 환궁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황제께서 환궁하신 후, 유난히 황후께 애틋하게 대하신다더니. 연정을 받는 여인의 얼굴이란 이리도 빛나는 것이던가.
“기대할 만할 것이야. 바쁘지 않으면 다과를 들다 저녁 수라까지 같이 들고 가는 것이 어떤가?”
“아닙니다. 소인은 이만 물러나겠사옵니다.”
고요하게 몸을 일으킨 기하는 황후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황궁은 보는 눈과 듣는 귀가 많다. 아무것도 아닌 일들에 제멋대로 의미를 부여해서 떠돌다 보면, 형체를 알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짐승처럼 변해 무섭게 돌아오곤 하는 곳이다.
같은 지아비를 섬기는 황후와 후궁의 사이라고는 하나, 기하는 엄연히 사내의 몸이었다. 너무 자주, 오랜 시간 자경전에 머무르는 것은 여러 사람이 보기에 좋지 않았다.
황후께서는 그저 남동생 대하듯이 자신을 신경 써 주셨지마는, 철없는 행동으로 그녀를 곤란케 하고 싶지는 않았다. 지난여름에도 함께 산책하다 밤바람을 쐰 것이 화근이 되어 흉흉한 소문이 돌지 않았던가.
“괜한 걱정이라니까 그러네.”
황후께서는 의외로 강단이 있으셔서 그런 소문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으셨으나, 어쨌거나 기하는 그것이 몹시 불편했다. 제아무리 이러저러한 이유로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내고 산다 하더라도, 쓸데없이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 것은 싫었다.
“하면, 소인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아쉬운 표정을 짓는 황후께 예를 올린 기하가 먼저 발을 돌렸다. 오늘은 한층 바쁘게 움직이는 현 상궁을 두고 나인 둘만 데리고 움직인 탓에 발이 가벼웠다.
지난 몇 년간 자신을 수발하면서도 사사로이 말 한 번 섞지 않았던 나인들을 힐끗 돌아보던 기하는 방향을 바꿔 걸음을 옮겼다.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볕이 뜨겁지 않았기에 노곤한 얼굴로 교량 위에 올라서다, 제 뒤를 따르는 나인들을 바라보며 빙긋이 미소했다.
“왜 그리 겁먹은 얼굴이더냐?”
“저… 송구하오나, 현 상궁 마마님이 자경전에서 나오시면 바로 처소로 모셔 오라고 몇 번이나 신신당부하셨사온데…….”
“현 상궁이?”
“예. 오늘은 특히 마마께서 옥체가 미령하신 것 같으니 각별히 신경 쓰라고 몇 번이나 이르셨습니다.”
부러 정을 주지 않으려 그리 애를 쓰더니, 사람이란 무릇 곁에 있으면 그리되나 보다. 그것이 애틋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서 기하는 말을 아꼈다. 찰박찰박 소리를 내며 물을 휘젓는 화려한 물고기를 내려다보자, 나인 아이들의 얼굴에 깊은 초조함이 일었다.
“아무렇지 않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안색이 너무 창백하십니다. 낮것도 거의 드시지 않으셨지요?”
이름도 한 번 제대로 불러준 적 없는 나인이 슬그머니 걱정을 보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기하는 부러 마음을 주지 않으려 작정한 사람처럼 냉담히 고개를 돌렸다. 유유자적 헤엄치는 잉어를 바라보고만 있자, 더는 말을 잇지 못하며 그녀들은 발만 동동 굴렀다.
“히, 히익.”
“어찌 그러느냐?”
“저, 저, 폐하, 폐하께서 오십니다.”
사색이 되어 경기를 일으키는 나인을 바라보던 기하가 고개를 돌렸다. 멀리 황제의 행렬이 보였다. 금룡전에서 정무를 보시고, 자경전으로 향하시는 것 같았다.
기하는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보다 문득 고개를 돌린 황제께 머리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꽤 먼 거리였으니 아마 그대로 지나치리라는 생각을 하며 다른 생각에 잠길 즈음이었다.
“어째 볼 때마다 다 죽어가는 얼굴이냐?”
“…폐하를 뵙습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묻는 말에나 제대로 대답해.”
“예? 아…….”
“피죽도 못 얻어먹은 꼴로 서 있다가 또 예서 자빠지기라도 하려고?”
기하는 황제의 뒤로 길게 늘어서 있는 이들을 향해 눈을 돌리다가 머쓱함에 제 머리를 긁적였다. 이리 마주 보고 선 것이 근 몇 년 만인 것을 아시기나 하실는지.
어색하고 애틋한 것은 자신만의 감정인 듯, 그는 예전과 다름없는 얼굴이었다. 반가움일까, 아니면 그리움이려나.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뒤범벅되어 엉망인 채로 하루를 보내던 나날도 분명히 있었지. 이제는 너무 오래되어 희미해진, 기억조차 흐릿한 나날일 뿐이지만.
“어딜 가는 것이냐. 이쪽은 네 처소도 아닌데.”
“잠시 산책하던 길이었습니다.”
“하면 똑바로 걷기나 할 것이지, 물은 왜 들여다보고 있어?”
“물고기를 보고 있었습니다. 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비단잉어가 보여서요.”
전해에도, 전전해에도 잉어는 있었을지 모른다. 뿌옇게 흐려진 기억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뿐이다. 이상했다. 머릿속을 누가 문질러 지운 것처럼 몇 개월 전의 일도 제대로 떠오르지 않았다.
“늦었지만, 승전을 감축드립니다.”
“일찍도 말하는구나. 다른 후궁들은 모두 수신전에 인사를 왔었다.”
“그랬습니까? 소인은 그런 법도를 익히지 못하여… 송구합니다, 폐하.”
어물어물 말을 잇는 기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디선가 향긋한 꽃 냄새가 났다. 바람을 타고 흩날리는 향기에 절로 눈이 감길 것만 같아서 연신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이따금 이렇게 정신을 놓고 나면, 기억이 잘린 것처럼 며칠이 뿌옇게 사라졌다. 처음에는 겁이 났고, 이제는 그것이 익숙해졌다.
“너.”
단단한 손이 기하의 손목을 붙들었다. 그는 물끄러미 황제를 바라봤다. 날카롭게 올라간 눈썹, 크고 아름다운 까만 눈동자, 날렵한 콧날과 선이 분명한 입술, 적당하게 그을린 피부에 큰 키. 모든 것을 한없이 바라보며 그림을 덧그리듯 황제를 눈으로 훑던 기하가 천천히 눈꺼풀을 당겼다.
“빈.”
“예… 폐하.”
“어디 아픈 것이냐?”
“아닙니다, 폐하.”
느릿한 말투가 뭉그러졌다. 흐릿한 눈이 하염없이 흔들린다. 자신도 모르게 비틀거리는 팔을 붙잡자, 그것을 밀어낼 생각도 하지 못하는 기하를 바라보던 황제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빈, 나를 봐라.”
“예… 폐하.”
“내가 누구냐?”
“황제 폐하이십니다.”
어깨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면서 황제는 고개를 돌렸다. 곁에 서 있던 지밀에게 시선을 건네자, 그녀가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이번에는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태화당 나인들을 바라보자, 고양이 앞에 쥐처럼 바들바들 떨어대기만 했다. 급기야 제 쪽으로 툭 넘어지려는 기하를 품으로 잡아당긴 황제가 천천히 무릎을 낮췄다.
진맥을 짚는 궁의의 표정이 자못 심각했다. 꽤 오랜 시간 맥을 짚고 있었음에도, 그는 딱히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것이 처음도 아니었다. 현 상궁의 간절한 청에 몇 번이나 기하의 맥을 짚었지마는 특별한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그저 같은 말만 되풀이한 것이 벌써 두 해가 지났다. 평소라면 진즉 기를 보하는 탕약을 지어 올리라 명하고는 자리를 떴을 테지만, 이번에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뭘 그렇게 꾸물대고 있어?”
보다 못한 황제가 버럭 역정을 냈다. 사나운 그의 음성에 놀란 궁의가 머리를 조아렸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벌벌 떨고 있음에도, 황제의 노기는 쉬이 사그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입이 붙었느냐? 언제까지 맥만 짚고 있을 것이냐?”
“소, 소, 송구합니다,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의원이란 놈이 맥 하나 제대로 짚지도 못하는 주제에 무슨 말이 그리 많아? 이런 주제에 녹봉을 그리 받아 처먹었단 말이냐?”
“소, 송구… 죽여주십시오, 폐하!”
기어이 바닥에 엎드린 궁의가 죽을힘을 다해 외쳤다. 죽여 달라 청하면 그 자리에서 검을 빼 들 황제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럴 때일수록 바짝 엎드리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익히 들은 탓이었다.
온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식은땀을 흘리는 궁의를 한심하게 쳐다보던 황제가 혀를 끌끌 찼다.
“태의원(太醫院)에 연통을 넣어 태의(太醫)를 불러라.”
“폐하, 태의께서는 오직 폐하와 황후마마의…….”
“하면, 빈을 그냥 이대로 둘 것이냐?”
황제의 물음에 차마 답을 할 수 없었기에, 지밀상궁은 조용히 몸을 움직여 무리의 맨 끝에 서 있던 내관에게 명을 내렸다.
그녀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황제는 초조한 얼굴로 침상 끄트머리에서 떨고 있는 현 상궁을 가까이 불렀다. 그녀는 황제의 부름에 단박에 다가와 무릎을 꿇으면서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연신 기하를 곁눈질했다. 숨이라도 제대로 쉬고 있는지 모를 만큼 창백하게 질린 얼굴은 핏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언제부터였나.”
“기력을 잃으신 것은 세 해 정도 되시었고, 지금처럼 이런 일이 잦아진 것은 두 해 즈음 됩니다.”
“증상이 어떠냐.”
“수라를 제대로 들지 못하시고, 침수도 편히 들지 못하십니다.”
“그것뿐이냐?”
“이따금, 기억이 단절되시는 것 같습니다.”
현 상궁은 잠시 입을 멈추고 생각을 골랐다. 무엇이 기하를 위하는 길인지, 어디까지 고해야 그가 제대로 살 수 있을지를.
“사실대로 남김없이 고하라.”
병든 후궁은 황궁에서 살아갈 수 없다. 어쩌면 이 황궁을 벗어나는 것이 그를 위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는 차마 사실대로 고할 수 없었다.
어차피 황궁을 벗어난다 해도, 그는 이제 북성으로 돌아갈 수 없다. 병을 고치는 것이 먼저였다. 하지만 황제를 믿어도 되는 것일까.
“네 주인, 계속 저리 둘 것이냐.”
“드문드문 기억하지 못하십니다. 1년 전이 될 때도 있고, 바로 어제 일을 기억하지 못하실 때도 있습니다. 완전히 잊으시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드문드문 얘기도 하시고, 전에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시던 것들도 다시 떠올리십니다.”
“다른 것은.”
“딱히 다른 문제는 없습니다. 예전보다 몸이 둔해지시어 자주 움직이려 들지 않으시는데, 드시는 것이 없으니 기력이 달려 그런 것이라고 합니다. 궁의가 매주 찾아오고 있고, 황후마마께서도 몇 번이나 의원을 보내셨습니다. 금일은 자경전에서 직접 진맥도 받으셨다 합니다. 의원들은 모두 같은 말만 합니다.”
황제의 표정이 변했다. 현 상궁은 그저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설령 황제께서 상전의 수발을 제대로 들지 못했다는 죄를 물으신다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자신의 상전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총명하고 다정하며 정이 깊던 사람이 이리 변해가는 것이 그저 안타깝고 서러워, 누구라도 그것을 알아주기만 바랐다.
“폐하. 이년, 감히 청하옵니다. 저희 마마께서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실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태의는 아직 멀었더냐.”
숨소리가 약했다. 곧 도착할 것이라는 지밀상궁의 말을 들으면서도 황제는 고요히 누워 있는 기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전장에 나가 있을 때도 때때로 떠올랐던 얼굴이 전보다 많이 야위었다. 이렇게 망가져야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어야 했다.
“폐하, 태의 영감 들었습니다.”
“잠시 다녀올 곳이 있으니 진맥하고 반드시 원인을 찾아내라 해. 곧 돌아올 것이다.”
“예, 폐하. 그리 이르겠습니다.”
지밀상궁의 고요한 음성에 황제는 화려한 미안을 찌푸렸다.
* * *
피 냄새가 진동하는 추국장을 횃불이 밝혔다.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살이 타들어 가는 냄새가 역하게 퍼졌지만, 누구 하나 먼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살려, 살려주십, 크흑!”
“그것을 사주한 자가 누구인지 고하라.”
피가 튄 얼굴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은 승지는 가볍게 쥐고 있던 칼을 돌렸다. 서슬 퍼런 날이 당장에라도 날아들어 목을 벨 것만 같아, 형틀에 묶인 죄수는 누런 오줌을 질질 지렸다.
“소인은 모르옵니다! 정녕 모르옵니다! 한 번도 직접 본 적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폐하!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폐하!”
“그리 흉악한 짓을 하고 어찌 살기를 바라느냐? 낯짝도 두껍지.”
혀를 끌끌 차며 다시 허벅지 위에 인두를 올려둔 승지가 등을 돌렸다. 가장 높은 곳에 앉아 있던 황제가 무료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지독한 문초에도 홀로 죄를 뒤집어쓴 태의감 의원은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입을 열지 않기로 작정하였거나, 아니면 진실로 모른다는 뜻이었다.
“한데―.”
황제의 나른한 음성이 피처럼 붉게 번졌다. 지독한 비명을 지르며 거의 혼절 직전까지 이른 의원에게 찬물을 뒤집어씌웠다.
“다른 두 귀인은 그 지경까지는 아닌데, 어찌 무빈만 그리 심한 후유증이 왔단 말이냐.”
“그것은 소인도 모릅니다! 정말입니다, 폐하!”
흐느끼며 비명을 지르는 의원을 무심히 바라보던 황제는 가만히 턱을 괴었다. 창백한 낯으로 품 안에 쓰러지던 얼굴이 내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무슨 조화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기분이 한없이 나빠 머리가 지끈거렸다.
“혹, 죽은 엄 재인도 연관이 있더냐?”
멀쩡하던 엄 재인은 시름시름 앓더니 여덟 달 만에 황자를 낳다 유명을 달리했다. 팔삭둥이로 태어난 황자는 어미의 품에 제대로 한 번 안겨보지도 못하고 외롭게 자랐다. 물론 황후가 살뜰히 보살펴 주기는 하였으나, 그것으로 부족했는지 황자는 자주 앓았고, 그만큼 약했다.
“말하라. 네가 고한 귀인 둘과 무빈, 그리고 황자의 어미인 엄 재인이 그 대상이었느냐?”
“소, 소, 소인, 소인은…….”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겠다. 배후가 누구냐.”
“폐, 폐하.”
“승지.”
“예, 폐하.”
“저것의 사지를 찢어 짐승의 밥으로 던져줘라.”
괴이한 비명이 터졌다. 더는 그곳에 머무를 이유 따윈 없었기에 자리에서 일어난 황제는 피가 튄 용포를 손에 쥐고 구겼다.
* * *
“첫째로, 향독입니다.”
태의는 허옇게 변한 수염을 습관처럼 만지다, 황제의 싸늘한 눈빛에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내렸다. 형형한 기세로 다그치는 황제의 모습이란 퍽 오랜만에 보는 것이어서, 저도 모르게 그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만행을 저지른 탓이었다.
“제대로 설명하라.”
“폐하께서도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수면 향에 미세한 독이 섞여 있습니다. 인체에 치명적인 것은 아니나, 불면을 일으키고 무기력증을 오게 합니다.”
“기억력 장애는.”
“그런 후유증은 없사옵니다. 문제는 두 분 마마의 출신 지역에 있습니다.”
“무슨 소리냐.”
“본디 남성에서는 아이가 태어나 열 살이 될 때까지 염(琰)독을 씁니다. 염독은 태인수라는 꽃에서 나온 독이온데, 잔병치레를 이기고 건강하게 자라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남성 출신인 재인 마마나, 모친이 남성 출신인 무빈께서는 응당 염독에 대한 내성이 쌓였을 것입니다. 이것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사온데…….”
태의는 기하를 지그시 바라보다 그의 손등에 꽂힌 커다란 침을 조금 더 깊게 눌렀다. 멀찌감치 서 있던 승지가 그 모습에 얼굴을 찌푸려도, 태의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커다란 뜸에 불을 붙였다.
“몸에 열이 많아지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 탕제는 지나치게 열기를 끌어 올리는 약재로만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일부러 그런 것이란 말인가. 그것을 모두 알고?”
“의도까지야 알 수 없으나, 아마 그렇게까지 파악하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염독 자체도 알고 있는 이들이 얼마 없습니다. 남성의 귀족들도 이제는 잘 모르는 부분이지요.”
설명이 지나치게 길었다. 답답함이 이루 말할 수 없어 보다 못한 승지가 입을 열었다. 황제는 딱딱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으니 제가 나설 수밖에.
“그래서 이제 어찌해야 합니까?”
“어찌하긴 이 사람아. 독을 중화시키고 사람을 살려야지.”
“그것이 가능합니까?”
“깨끗하게 모두 거둬낼 수는 없을 테지만, 시간을 두고 치료에 전념하면 괜찮을 것입니다.”
홀가분해 보이는 태의의 얼굴에도 승지는 표정을 풀지 못했다. 평온하게 눈을 감고 있는 그가 자칫했으면 영문도 모른 채 서서히 죽어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그럼 그대가 전념해서 치료해. 반드시 치료해서 제대로 돌려놔. 승지, 너는 긴밀하게 움직여 증거를 잡아라. 하나도 남김없이, 찾아서 가져와라.”
황제는 입술만 달싹이며 기하를 응시했다. 하얀 김이 피어오르는 커다란 뜸을 올려놓은 손등이 움찔거리다 이내 잠잠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