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한낱 꿈(夢)
둥. 둥. 둥.
북이 울렸다. 황후를 비롯한 스무 명의 후궁, 수많은 조정 대신들과 황궁 사람들이 무릎 꿇고 황제를 맞았다. 겨우 수백의 군사만을 이끌고 환궁한 황제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여기저기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근 넉 달 만의 황제는 볕에 그을린 건강한 얼굴로 전보다 늠름하게 말에서 내렸다. 황후와 스무 명의 후궁이 그 자리에서 절을 올렸고, 수도 초입부터 이어지던 백성들의 만세 소리는 황실 담을 넘나들었다.
황제는 배부른 짐승처럼 느리게 움직이며 눈으로 행렬을 훑었다. 백성들의 만세 소리를 들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이, 관복을 입고 엎드려 있는 위인들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배알이 뒤틀렸다. 그간 어찌나 잘 먹고 잘 지냈는지, 얼굴들에 살이 올라 뒤룩뒤룩한 돼지들 같았다.
“그대들은 얼굴이 아주 좋아 보여.”
“신들은 그저 폐하의 무운을 빌며 밤낮없이 정사에 매진하였사옵니다.”
“그래? 그런 것치고는 빛이 아주 좋은데 말이야. 술독에 빠져 계집질이나 해댔을 줄 알았더니, 밤낮없이 정사에 매진하였다?”
“폐하께서 전장의 선봉에서 뛰어다니시는데 신들이 어찌 그리 파렴치한 일을 벌이겠나이까. 폐하,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하면, 어찌하여 그간 내게 올린 상소문이 그 꼴인지에 대해 당장 이야기를 해보자고.”
대신 중 가장 선봉에 서 있던 대사농(大司農)을 향해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인 황제가 먼저 등을 돌렸다. 그의 어깨 아래로 휘날리는 붉은 망토가 바람을 타고 펄럭이자 뜨거운 피 냄새가 끼쳐 왔다. 그것을 견디지 못한 몇몇 후궁들이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기하는 고요히 조아리던 머리를 들었다. 제대로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지마는, 그의 늠름한 음성을 들으니 참고 있던 그리움이 울컥 치밀어 올라왔다. 그것은 자신조차 깨닫지 못한 진득한 감정이었다.
* * *
“마마.”
현 상궁의 부름에 멍하게 시선을 놓고 있던 기하가 고개를 돌렸다. 황제께서 환궁하신 이후로 그는 줄곧 저런 상태였다. 제대로 된 일정을 수행하기는커녕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멍하게 앉아 하루를 보내는 기하를 염려한 현 상궁이 직접 의원까지 청할 정도였으니, 상황은 꽤 심각했다.
며칠째 그의 곁을 맴돌며 애교 아닌 애교를 부리는 영과 달의 낑낑거리는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마마.”
다시 한 번 기하를 부르자, 이번에는 제대로 눈을 맞추다가 수척해진 뺨을 문지른다. 꼭 열병에 걸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생기 잃은 그가 걱정되었으나, 혹여나 흉흉한 소문이 돌까 봐 아랫것들 입단속을 단단히 시킨 그녀는 답답한 마음에 하루에도 몇 번씩 제 가슴을 쳤다.
혹여 황제께서 전장에서 끌고 온 삿된 원혼이 쓰이기라도 한 것은 아닐까. 별의별 생각을 다 하면서도 걱정을 덜어내지 못해서 더더욱 애가 탔다.
어쨌거나 자신들의 목숨 줄을 틀어쥐고 있는 상전의 안위가 달린 문제다. 지금이야 황제 폐하의 귀환으로 연일 황궁이 시끌시끌해서 다행이지, 만일 황후께서 부르시기라도 하면 이 노릇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타락죽을 쑤었습니다. 한술 뜨시지요.”
“그리 귀한 것을 어찌 구했나?”
“그런 것은 묻지 마시고 한술이라도 뜨세요. 이러다가 옥체 상하십니다.”
“입맛이 없는데. 귀한 것이니 식기 전에 그대라도 요기해.”
“초조반부터 아무것도 들지 않으셨지 않습니까. 하면, 당과라도 올릴까요?”
어린아이처럼 다디단 당과나 타래과를 좋아하던 기하는 단번에 입맛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그마저도 싫다고 고개를 저었다. 먹지 않으니 생기가 없었고, 그러니 이렇게 멍하니 있다 잠들기 일쑤였다. 벌써 엿새째 같은 생활의 반복이었다.
“폐하의 환우는 차도가 있다던가?”
“애초에 큰 상처는 아니었던 듯합니다. 폐하께서 워낙에 타고난 무골이시지 않습니까. 듣기로는 화살이 어깨를 깨끗하게 관통하여 천만다행이라 하던데, 무엇이 다행인 것인지는 소인은 잘 모르겠사옵니다.”
“박혀 있는 것보다 관통하는 것이 치료하기가 수월하지.”
덤덤한 음성으로 중얼거린 기하는 물끄러미 허공을 바라보며 무릎을 구부려 몸을 웅크렸다.
“요즘은 어찌 검술 연습도 하지 않으십니까?”
“그냥.”
“그래도 두어 시간 그리 움직이시면 밥맛도 돌고 좋으실 것인데. 볕이 좋으니 산책이라도 나가 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응, 나중에.”
도통 침상 밖으로 나오려 들지 않는 기하가 걱정된 까닭에 은근슬쩍 이런저런 것을 권해 봐도, 그는 말간 얼굴로 입술만 달싹였다.
“마마, 황제 폐하께서 찾아 계시옵니다.”
잔뜩 긴장한 얼굴로 고한 어린 나인은 연신 뻣뻣하게 허리를 굽혔다. 몸을 둥글게 말아 웅크리고 있던 기하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은 어느새 허리까지 길어 치렁치렁하게 흩날렸다.
“폐하께서?”
“예, 수신전으로 모시라고 합니다. 어서 채비하셔요.”
채비랄 게 무어 있나. 다른 여인들이라면 단장이라도 할 테지만, 그런 것도 아니니 곧장 움직여도 무방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응?”
“식사도 아니 드시고, 기운도 없어 보이십니다.”
“응, 괜찮네. 나 어떤가? 피죽도 못 얻어먹은 아귀(餓鬼) 같지는 않지?”
“어찌 그런 흉한 말씀을 하시옵니까. 아귀라니요. 당치도 않으십니다. 이리 고운…….”
말을 하다 멈춘 현 상궁의 음성에 기하는 그제야 배시시 웃었다. 으챠, 하며 무릎을 펴자 침상 아래에서 잔뜩 기가 죽어 있던 영과 달이 기어 나와 그를 향해 폴짝폴짝 뛰었다. 기하는 무릎을 굽혀 녀석들의 등과 머리를 차례대로 쓸어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영아, 달아. 말썽부리지 말고 잘 있어야 한다?”
복슬복슬한 털을 쓸어주고 다시 허리를 반듯하게 편 기하가 빙긋이 미소했다. 가세. 짧은 외침은 평소보다 훨씬 유쾌하고 산뜻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이마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깊이 머리를 숙여 절을 올린 기하는 무릎을 꿇은 채로 앉아 허리를 반듯하게 폈다. 황제의 처소인 수신전은 다른 궁보다 천장이 높고 웅장한 느낌이었다. 그 한가운데에 앉아 있으려니 저도 모르게 주눅이 들어 시선을 떨어뜨린 채 황제의 하문을 기다렸다.
“잘 지내고 있으라 하였더니 어째 피죽도 못 얻어먹은 얼굴이냐?”
“아… 그것이…….”
“설마 짐이 걱정되어 그랬다는 입바른 말은 듣기 싫으니 바른대로 고해.”
“이런저런 생각도 많아지고, 걱정할 것도 있고, 또…….”
“또.”
“폐하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도 무겁고…….”
느릿느릿하지만 분명하게 말을 잇는 기하의 음성에, 황제는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몇 달 새에 어찌 이리 애처럼 맹한 얼굴이 된 것인지.
“말 같지도 않은 서찰로 전장에 나가 있는 지아비 마음은 뒤집어 놓고서 뻔뻔한 얼굴이구나.”
“예?”
지아비. 저도 모르게 큰 목소리로 반문한 기하가 손끝을 바르르 떨었다. 지아비, 어쩐지 수줍고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네 정녕 짐의 무운을 빈 것이 맞더냐?”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소인이 불충한 마음이라도 품었단 말씀이시옵니까?”
“서찰 가득 짐의 안위보다는 죽어가는 적국의 백성들만 걱정했지 않느냐.”
“그것은…….”
“되었다. 네 마음 잘 알았다.”
“폐하, 그런 것이 아니오라…….”
“고얀 것.”
혀를 쯧, 차는 황제를 향해 황망한 표정을 지어 보인 기하는 얼떨떨한 얼굴로 제 볼을 긁적였다.
“네놈이 짐의 검이 되었다면 필시 전장에서도 어린 것들이나 힘없는 백성을 보살피느라 등을 돌렸을 것이다.”
“아닙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폐하께서 약간의 자비심을 베풀어 주십사 하는 생각에 드린…….”
“시끄럽다지 않아.”
기하는 투박한 황제의 말투에 입술을 꾹 다물었다. 정말로 그런 것이 아닌데 억울한 기분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폐하. 소인의 뜻을 곡해(曲解)하지 마시옵소서. 소인은 그저…….”
“신첩.”
“…예?”
“소인이 아니라 신첩이다.”
“아… 송구하옵니다.”
“말대답하는 것도 모자라 제가 내키는 대로 행하니, 너 같은 놈이 황실에 어디 있더냐?”
“하지만…….”
“예법도 모르는 바보 천치더냐? 혼인한 지 얼마나 되었는데 아직도 소인이냐?”
“송구합니다.”
송구하다는 놈이 입 내민 것을 보라지. 저런 것을 빈이라고 앉혀놨으니.
“하지만 폐하께서도 툭하면 소… 아니, 신첩에게 이놈 저놈 하시지 않으십니까.”
“뭐가 어째?”
“다른 후궁들에게는 아니 그러시면서.”
삐죽하게 내밀어 진 입술을 거둘 생각도 하지 않고 어깨마저 축 늘어뜨린 기하를 바라보던 황제는 어이가 없어 하, 하고 짧은 숨을 내쉬었다. 이제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한 황자 놈도 저리 못나게 굴지는 않을 것인데. 계집도 아닌 것이 샘은 많아서는.
“본래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했습니다. 폐하께서는 신첩만 보시면 역정을 내시고, 툭하면 북성을 잊으라 하시고.”
“그래서 뭐. 그래서 너도 똑같이 하겠다는 것이냐?”
“그저 조금만! 다정하게 대해주시면… 아니 되느냐는 말씀이지요.”
또 금세 풀 죽은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속이 터지는 것 같았다. 시시때때로 표정이 변하는 것은, 늘 인형처럼 같은 표정으로 저를 대하는 다른 이들보다는 백배 나아 보였으나, 환궁하는 순간부터 내내 저 얼굴이라니.
물론 궁을 비웠던 넉 달 동안 웬만해선 바깥 걸음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보고를 받고서 뒤늦게 부른 것이지마는.
“죽을 날 받아놓은 것처럼 굴지 마라. 그런 얼굴은 지긋지긋해.”
“주에 한 번, 북성으로 서찰을 보냈사온데…….”
날카로운 황제의 시선에 기하는 움찔 놀라 어깨를 떨었다.
“그것이… 잘 지내는지 궁금하였던지라……. 송구합니다, 폐하.”
“살고 싶으면 버리라 하였더니, 도저히 안 되겠더냐?”
“하지만 그곳은 소인의 고향이고, 피붙이가 사는 곳이고, 아버지와 형님께서는…….”
“생각이 깊어 제 앞가림은 제대로 할 줄 알겠다 싶었는데, 너도 결국 어쩔 수 없는 어린아이구나.”
“폐하.”
기하의 목소리가 푹 가라앉았다. 따끈따끈하게 열이 오른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익숙한 외로움과 생경한 서러움이 울컥 치밀어 올라 입술을 다물었다가 가볍게 숨을 고르자, 코앞에 와 닿는 황제의 시선이 느껴졌다.
“황궁은 너무 외롭지 않습니까? 이곳은 아는 이 하나 없고, 제게 다정히 대해주는 이조차 없습니다. 그나마 황후마마께서 보살펴 주시나, 마마께서는 내명부의 수장이시니 바쁘신 것이 당연하고. 폐하께서는 전장에 나가시었고. 얼마간의 말미를 줄 테니 사는 날까지 명을 잡고 있으라 하시었는데, 무슨 낙으로 어찌 잘 지내고 있을 수가 있었겠사옵니까?”
울지 않는다. 그것은 어릴 적부터 아버님과 형님과 한 약속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울지 않는다. 다른 이의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사내는 그리 사는 것이라 하셨다.
“가족들은 연통이 닿지 않습니다. 아버님께선 딱 한 번 서찰을 보내셨을 뿐이고, 그마저도 이제 없습니다. 하면 소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폐하께서 하명하신 대로 북성을 버려야 합니까? 아니면 폐하의 명으로 삶이 다하는 날까지 죽은 듯이 살아야 합니까?”
“빈.”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하고도 울음을 참아내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황제는 미소했다. 그래, 이런 강단을 원했다. 목에 칼을 들이밀어도 제 할 말은 꼿꼿하게 하는 기백 있던 아이였으니.
“짐은 북성을 살렸다. 네 아비의 죄는 선황 폐하께서 남기신 약조의 인장으로 사하여졌어. 하나, 짐은 그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지켜보고 또 볼 것이야.”
“…….”
“나는 두 번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 하니, 더는 이 같은 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짐은 네게 기회를 줬어. 죄 없는 네가 제대로 살 기회를. 네겐 선택권이 없다. 그냥 시키는 대로 하면 돼.”
“평생… 폐하를 원망하며 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 정도 자유는 주마.”
“어째서요? 어째서 소인에게 이리 잔인하게 구시는 것입니까? 하면 소인은 어찌 살라고요? 평생 가족을 그리워하고, 폐하를 미워하고, 원망하고. 어찌 사람이 그리 삽니까?”
터벅터벅 걸어온 황제가 가볍게 몸을 낮췄다. 물기가 가득한 두 눈을 응시하던 그는 기하의 턱 끝에 손가락을 대어 얼굴을 들게 했다. 원망도 분노도 아닌 모호한 감정 덩어리로 범벅된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싸하게 내려앉았다.
이 아이는 평생 누구를 미워하거나, 원망해 본 적이 없다. 미련하게, 어린 시절의 자신을 지나치게 많이 닮아 있었다.
“폐하를 원망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 그때는 너무 어렸다. 어른 흉내를 내면서 전장을 뛰어다닌다 하여도, 결국 한낮 어린 사내일 뿐이었다.
“아직은… 연정만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마음이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폐하께서도 아시잖아요.”
“시끄럽다.”
“폐하께서도, 가족이라는 것이… 피붙이라는 것이 얼마나 애틋한지. 그런 이들과 헤어져 산다는 것이…….”
“시끄럽다지 않아!”
움찔 놀란 기하가 입을 다물었다. 감정의 과잉이 불러온 참극이었다. 덜덜 떨리는 손끝을 숨기며 울음을 삼켰다. 감히 제 입으로 어찌 그런 말을 내뱉었단 말인가.
아무리 죄가 사하여졌다 한들, 자신은 몰살당해 마땅한 황가의 적일 뿐이었다. 정의로운 죽음을 맞아 하늘 아래 사라져야 함이 맞거늘.
“송구합니다, 폐하. 소인이 실언하였습니다.”
바닥에 납작 엎드린 기하의 등을 내려다보는 황제의 시선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래, 저 아이의 말이 맞다. 모두 맞다. 그리 살 수는 없음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는 겪어봐서 알고 있으니까.
허울 좋은 구실로 여우 사냥에 쓸 미끼를 떠올렸던 것뿐이다. 그래, 그것뿐이다. 이제 와서 이리 흔들릴 이유 따위는 없다.
“빈.”
기하의 마른 어깨가 움찔 떨렸다.
“고개를 들어.”
그제야 얼굴을 다시 보인 기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황제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이유 없는 헛된 죽음을 택하지 마라.”
“…….”
“네 아비도 그런 것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버님께서 하신 말씀은 단 하나였다. 그를 믿지 말라는. 이리 다정하게 손 내밀어 주시는 분을 믿지 말라는 한마디.
“그것은 짐 또한 마찬가지다.”
“폐하.”
“이유 없이 죽지 마라. 사는 것엔 다 의미가 있는 법이니.”
“폐하, 소인은…….”
“그만 돌아가. 돌아가서, 이제는 마음껏 짐을 원망하고 미워해라. 그럴 이유는 충분할 터이니.”
그의 목소리가 서러웠다. 그래서였다. 숨을 죽인 채 무디고 무거운 시간을 보낸 까닭은.
차마 발을 뗄 수 없어 오롯이 고개를 웅크리고 있던 기하는 제 손목을 붙잡은 황제의 완력에 크게 휘청거렸다. 그대로 자신을 끌어내려는 참인지 막무가내로 팔을 당기는 힘 때문에 어깨가 빠질 것 같았다.
“폐하, 폐하. 잠시, 잠시만요.”
한사코 버티며 밀려나지 않기 위에 온몸에 힘을 주는데도, 황제의 힘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폐하. 폐…….”
“어린아이처럼 보채지 마라.”
차갑고 냉정했다. 팔을 붙잡은 손도, 서늘한 시선도, 무감각한 음성까지도. 서러움이 왈칵 치솟았다.
기하는 애써 그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렇게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물러나면, 다시는 그를 제대로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폐하, 연진 공주께서 드셨사옵니다.”
상선(尙膳)의 고요한 음성에 황제는 반사적으로 등을 돌렸다. 기하는 자신의 손목을 붙잡은 황제의 서늘한 체온에 잠시 안도의 숨을 몰아쉬었다.
“들라 해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여덟 개의 문이 차례대로 열렸다. 황제는 무심한 얼굴로 기하를 붙잡고 있던 손을 단박에 밀어냈다.
그의 체온이 떨어지자마자 밀려드는 아쉬움과 저릿함에 기하가 초조한 얼굴로 그에게 다가설 즈음이었다. 해사하게 웃으며 사뿐사뿐 걸어 들어오던 여인이 고개를 갸웃하며 발을 멈췄다.
“오라버니.”
“어찌 예까지 왔어.”
다정한 음성이었다.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듯했는데 어느새 따뜻한 봄이 온 것처럼, 사려 깊고 부드러운 음색에 절로 고개가 들렸다.
황제와 똑 닮은 그의 누이동생은 아직 열두 살이었으나, 타고난 미모가 수려해 한 떨기 꽃과 같았다. 사르르 미소하며 팔을 붙잡는 어린 공주의 애교에 황제는 그제까지 보여주지 않았던 따뜻한 얼굴로 답하며 누이의 손을 보듬었다.
몸이 약한 그녀는 따뜻한 동남성이나 서남성에서 주로 겨울을 보낸다고 했다. 봄이 오면 바로 환궁을 하곤 하였다는데, 이번에는 그 시기가 늦어져 그녀를 이렇게 마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정무에 바쁘셔서 도통 시간을 못 내어 주시잖아요. 금일은 일찍이 수신전에 드셨다기에 부리나케 뛰어왔답니다.”
생글생글 웃는 그녀는 종달새처럼 어여뻤다. 여인이라고는 저를 키워준 유모나 몇 달간 함께 지낸 현 상궁 정도밖에 접하지 않았기에, 기하는 어색한 표정으로 공주를 곁눈질했다.
인사도 없이 불쑥 이곳을 나가는 것은 분명 예의가 아닌데,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 틈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분명 들어오면서 자신을 보았을 공주가, 아니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자신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그녀가 이렇게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고 있다는 것부터가 이미 지금의 상황을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바빠도 네가 원하면 시간을 낼 것이니, 다음부터는 괜히 헛걸음하지 말고 연통을 넣거라. 알았느냐?”
“어찌 황제 폐하의 존귀한 시간을 함부로 빼앗을 수 있단 말입니까?”
“괜찮대도. 아무렴 정이 너보다 중한 이가 있다더냐.”
뽀얀 뺨을 톡톡 건드리며 웃는 황제의 음성에 그녀는 까르르 소리를 내며 팔에 몸을 기댔다. 어릴 적 낙마를 하여 한쪽 다리가 불편한 누이가 신경 쓰인 황제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폭신한 의자로 직접 안내했다.
“혹, 중한 말씀을 나누고 계시었습니까?”
“아니다.”
“하면 이제 저 북성의 사내는 그만 물려주세요, 오라버니.”
조금 전까지 생긋거리던 얼굴이 싸늘해졌다. 황제는 가볍게 눈을 돌려 기하를 응시하면서도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절박하게 굳어졌던 얼굴이 떠오른 탓이었다.
“북성의 사내가 아니라 무빈이다, 정아.”
“출신은 북성이 맞지요. 서연 그자의 아들이 아닙니까? 악귀 같은 혜비가 저자의 이모라지요? 오라버니께서는 어찌 저런 자를 후궁으로 들이신 것입니까? 아니, 설령 들이셨다 한들 여태 살려 두시다니요?”
“정아.”
“저런 자에게 관대함을 베풀지 마세요. 그럴 자격도 없는 자가 아닙니까? 황후마마께서도 저자에게 지나치게 관대하십니다.”
잔뜩 토라진 아이처럼 구는 공주의 투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며 황제는 가볍게 미소했다. 별다른 대꾸도 없이 머리를 쓰다듬는 황제의 손길에, 공주는 표독스럽던 표정을 느슨하게 풀었다. 아무래도 저 어린 공주에게는 자신의 오라비가 만병통치인 것 같다.
“소녀는 저자가 싫습니다. 아무리 아바마마의 전언(傳言)이 있었다고는 하나, 그들은 역모를 일으킨 일족이 아닙니까.”
“다 끝난 일이다. 정이 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일이고.”
“하지만…….”
“공주, 그 일은 짐이 알아서 하마. 너는 더 나서지 마라.”
“…소녀와 함께 저녁 수라 드시어요.”
민망함에 떼를 쓰거나 울음을 터트릴 것이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공주는 얌전히 제 감정을 숨기고 황제께 청을 올렸다. 그제야 순진한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짓는 공주가 가엽고 애틋했던지, 황제는 머리를 끄덕이며 그녀를 마주하고 웃었다.
“황후와 함께 들자. 네가 좋아하는 것으로 준비하라 하겠다.”
“예, 오라버니. 하면, 소녀는 먼저 자경전으로 들겠나이다.”
“그래, 조금 이따 보자.”
직접 손을 내밀어 그녀를 일으켜주자, 문밖에 있던 상궁이 들어와 공주의 왼쪽에 섰다. 빠르지 않은 걸음을 옮기며 기하의 옆을 지나친 공주는 자신보다 큰 상궁에게 기대지 않고 똑바로 걸으려 애를 썼다. 그 작은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황제의 눈가에 근심이 일었다.
문이 닫히기 전, 기하는 그녀를 향해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날카로운 그녀의 적의보다 사무치는 것은, 다정하게 서로를 위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리 매번 잊으라 하시는데도 때때로 떠오르는 북성의 추억은 모질고 질기게도 기하를 괴롭혔다.
“어린아이 말이니 신경 쓰지 마라. 너는 그저 내가 명한 대로만 하고 살면 돼.”
“공주마마께서 틀린 말씀을 하신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너, 우느냐?”
겨우겨우 참고 있던 눈물이 황제의 물음에 툭 떨어졌다. 기하는 급히 몸을 돌리며 소매 끝으로 눈을 문질렀다.
추한 모습을 보였다고 역정을 내시면 어쩌나 싶어 숨을 참아 죽일수록, 폐가 빵빵하게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더는 견딜 수 없을 지경까지 이르렀을 때에야, 기하는 제 얼굴이 눈물에 젖어 엉망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더는 서러운 감정을 감출 수 없다는 것 또한.
“흡…….”
“고작 열두 살 먹은 공주도 이리 울지 않겠다. 다 큰 사내놈이 눈물이 그리 헤퍼서야.”
그런 주제에 소리도 내지 못하고 저리 끅끅거리기나 하다니.
“뭐가 그리 서러워.”
“흑… 흐윽. 아버지가… 형님이… 흑…….”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죄인의 몸이다. 목숨은 건졌으나 영원히 죄인으로 살아갈지어다. 백성들의 존경도, 신망(信望)도, 모두 한낮 꿈처럼 사그라졌다. 남은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다. 그런 가족들이, 그런 아버지와 형님이 그리울 뿐이다.
아마, 영원히 이리 그리워만 하다 가겠지.
허리를 바로 펴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몸을 구부리고 울음을 삼키는 모습은, 그저 열여덟 먹은 어린아이와 같았다. 아비의 애정을 기억하고, 가족의 품을 그리워하는 그저 어린아이일 뿐.
기하를 향해 손을 뻗던 황제의 손은 허공을 맴돌다 어깨에 닿지도 못하고 이내 거두어졌다. 서러운 울음소리만이 수신전 안을 오래도록 울렸다.
<화양연화>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