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장 출정(出征) (8/49)

7장 출정(出征)

황궁은 요즘 크게 소란스러웠다. 머지않아 동남성의 경계에 있는 환인국과 연호국이 함께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정찰단의 보고가 날아들었다.

동남성은 본디 기후가 따뜻하고 토지가 비옥함에도, 그리 풍요로운 지대는 아니었다. 또한 병력이 약해 늘 주변 제후국의 비호를 받는 처지였는데, 선황께서 붕(崩)하신 이후 국경의 약탈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아직 황권이 단단하지 않은 시기인지라, 대신들은 이 문제를 제국에서 직접 처리하는 것이 옳다는 데에 의견을 모았다.

더욱이 황제는 제후국 간의 끈이 탄탄해지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제후국에서 충성을 다짐해야 할 곳은 오직 제국뿐이다. 그들이 둘 이상 붙어있을 때는 반드시 어떠한 일이 생긴다.

“폐하, 생각을 달리하여 주십시오.”

승지의 간절한 청에도 황제는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매끈한 턱을 쓰다듬는 크고 단단한 손가락이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황좌에 앉아 무심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던 황제의 입술이 벌어졌다.

“시끄럽다.”

“폐하께서 굳이 나서실 이유가 없습니다.”

“시끄럽다지 않아.”

“궁이 너무 답답하시거든, 열흘에 한 번 사냥을 나가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국경에선 백성들이 죽네 사네 하는 마당에 황제라는 자는 한가로이 활질이나 하라는 거냐.”

“그런 것이 아니옵고―.”

“시끄러워. 너는 대체 언제부터 그리 말이 많아졌느냐?”

함께 전장을 누비는 순간순간 늘 그렇게 말씀하셔놓고 또 잊어버리신 것인지, 수려한 미안을 찌푸리는 황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승지가 머리를 조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일은 찜찜하기 그지없었다.

“혹, 국구(國舅 : 임금의 장인) 어른이 걱정되어 이러시는 것이라면…….”

황제의 서늘한 시선에 승지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하기야, 특별한 애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정치적으로 크게 쓸 데가 있는 것도 아닌 동남성의 제후이자, 황후의 부친인 윤성열을 위해 황제께서 친히 움직이시지는 않을 터.

“준비하라 이른 것은―.”

“예. 두세 마리 정도를 손질했더니 제법 그럴싸한 양이 나왔사옵니다.”

“쓸데없는 말은 붙이지 말고, 네 직접 태화당으로 가서 무빈에게 전해라.”

“예?”

“목소리가 어찌 그리 커. 못 알아들었느냐?”

“아니, 그것이 아니오라 연호당에 내리실 것이 아닙니까?”

“챙겨주지 않아도 잘만 껴입고 다니던 것 못 봤느냐.”

“아닙니다. 소장도 충분히 잘 보았습니다. 원래 영빈께서야 그 씀씀이가 헤프시지 않습니까. 사치가 심하시지요. 본래 서남성 출신들이 그렇습니다.”

“후궁이란 것이 여염집 아낙보다 못한 꼴을 하고 다니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황제는 나른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기하를 사냥에 데리고 간 것은 순간의 심술이었다. 지켜본 바로, 그는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북성의 서연과는 판이하게 다른 자였다.

물욕이 없는 것은 아비와 같았으나 지나치게 밝은 성정과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은, 제후국의 왕자로서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러니 제 아랫것들에게 구박을 당하는 것도 아무렇지 않게 견디는 것이겠지.

“무빈께서는 참으로 검소하시지 않습니까?”

“제 아비에게 보고 배운 것이겠지.”

“그렇다 하더라도 후궁의 자리가 아닙니까. 일전에도 느꼈지마는, 사냥터에서 가까이 뵙고 나니 성품도 강건하신 것 같습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죽어가는 스라소니에 활을 쏘신 것 또한 인정을 베푸신 것 아닙니까? 뭣 모르는 영빈은 잔인하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지마는…….”

“태화당에서 뇌물이라도 받아 처먹었느냐?”

“폐하께서는 어찌 소장의 바른 뜻을 그리 곡해하십니까? 폐하께서 이러실 때마다 소장은 억울해서 잠이 안 옵니다.”

가슴을 치며 한탄을 늘어놓는 승지를 바라보는 황제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나, 하는 표정을 서슴없이 드러내는 황제를 향해 다시 활짝 웃은 임승지는 슬그머니 몸을 일으키며 바깥으로 나갈 순간을 재고 있었다.

“내게 가져와.”

“예? 뭘 말씀입니까?”

“태화당에 보내라 한 것 말이다. 다시 내게 가져와라. 널 보니 줄 마음이 사라졌다.”

“폐하, 어찌 성심에 없는 말씀을 하십니까? 괜히 민망하시다고 심술부리시지 마시옵고, 소장이 알아서 잘…….”

“그 입은 당장 찢어버리는 게 낫겠다. 네놈은 어차피 그 손모가지만 멀쩡하면 그만일 터, 가까이 오너라. 내 오늘은 친히 네 입을 찢어주마.”

“아이쿠, 벌써 시간이 이리 되었나. 금일은 어머니께서 급한 용무가 있으니 꼭 제시간에 퇴궐하라 이르셨는데, 소장이 폐하께 충성하느라 이리 불효를 저지르고 살고 있습니다.”

저놈의 시끄러운 주둥이가 도대체 언제 닫히나 싶어 가만히 쳐다보고 있노라니, 이제는 알아서 도망칠 자리 정도는 알아본다. 애당초 저놈 실력만 믿고 금룡대장 자리에 앉히는 것이 아니었거늘.

“하면, 폐하 소장은 이만 퇴궐하겠나이다.”

“가긴 어딜 가?”

살금살금 뒷걸음질 치던 승지의 발이 딱 멈췄다. 형형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선 황제가 용포를 휘날리며 성큼성큼 걸어올 때마다, 승지의 무릎이 후들거렸다.

* * *

뜨거운 탕에 몸을 담그고 있으려니 손바닥의 상처가 따끔거렸다. 벌써 나흘이나 지났음에도 상처는 쉬이 낫지 않았다. 그리 깊어 보이지 않아 딱히 현 상궁에게 이르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었는지, 물에 닿을 때마다 미간이 찌푸려질 정도로 통증이 느껴졌다.

활시위를 당기는 순간 영빈을 발견하고서 방향을 잘못 튼 것이 화근이었다. 아마 그리하지 않았더라면 영빈의 어깨가 아닌 심장에 화살이 박혔을 테지.

그가 어떤 마음으로 그런 무모한 일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마는, 사냥터에서의 사소한 실수는 죽음과 결부된다. 철모르는 어린아이도 아닌 자가 어찌 그런 기본적인 것도 몰랐을까. 황제께 상처를 보이며 크게 울던 영빈이 떠올라 기하는 머리를 휘휘 흔들었다.

“마마.”

문밖에서 들리는 현 상궁의 음성에 기하는 고개를 들었다. 오랜 시간 홀로 온욕하는 것을 현 상궁은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이유를 물은 적은 없으나, 아마 험한 황궁 생활에 혹여 잘못된 마음을 품을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인 듯싶다.

적당히 식은 물에서 나오자 한기가 느껴졌다. 미리 준비해 두었던 커다란 영견으로 몸을 닦으니 긴 머리카락이 등에 찰싹 달라붙었다.

응당 현 상궁과 나인들에게 수발을 받아야 함이 마땅했지만, 그런 일은 초야 이후로 일어나지 않았다. 여기저기 상처투성이인 비루한 몸을 보이고 싶지도 않았고, 어린 여인들에게 수발을 받을 만큼 얼굴이 두껍지 못한 탓이었다.

“마마.”

“지금 나가네.”

몸의 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가벼운 침의를 걸쳐 입고 젖은 머리를 늘어뜨린 기하는 밀려오는 한기에 어깨를 말았다.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현 상궁은 물기를 뚝뚝 떨어뜨리는 그를 보자마자 들고 있던 영견으로 머리카락을 감쌌다.

“침상을 따뜻하게 데워 놓았습니다.”

“응.”

자신보다 작은 현 상궁의 비호를 받고 걷는 것이 어쩐지 우습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기하는 입을 열지 않았다. 사냥터를 다녀온 이후, 그는 부쩍 말수가 줄어들었다. 자신의 운명은 예상을 크게 빗겨나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최대한, 사는 날까지는 조용히 지내고 싶었다. 이미 꺼내볼 추억은 충분했다. 황제께서 베푸신 은혜 또한 생각했던 것보다 깊었다. 아버지께서는 제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테니, 그저 사는 날까지 건강히 지내라고만 하셨다. 그제야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을 절감하게 되었다. 제힘으로 바꿀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수라도 제대로 드시지 않으셔서 타래과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따끈한 차와 함께 드시고 침수 드셔요.”

“타래과?”

“가끔 단것을 찾으셔서 준비했사온데, 다른 것을 내어올까요?”

“아니, 북성에선 귀한 음식이라서 특별한 날이 아니면 먹을 일이 없었거든. 유모한테 먹고 싶다고 떼쓰다가 형님께 혼난 적도 있다네.”

생긋 웃는 얼굴이 해사했다. 근심이라곤 찾을 수 없는 천진한 아이 같은 미소에 현 상궁은 그저 표정을 굳혔다. 정을 주지 않고 제 할 일만 한다는 것은 퍽 괴로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닌 것을요. 어서 가시어요, 바람이 찹니다.”

“응.”

축축하게 젖은 기하의 등을 바라보던 그녀는 보이지 않을 미소를 지으며 주위를 살폈다.

“바람이 좋네.”

“처소가 답답하십니까?”

“아니. 음… 사실은 조금.”

“온욕을 오래 하시어 고뿔 드시기 십상입니다. 몸을 따뜻하게 하셔야지요.”

“나는 여인이 아닌데?”

개구진 음성이 그리 반문했다. 이러다 정말 고뿔이 들까 봐 잔뜩 조바심이 난 현 상궁은 연신 기하를 재촉하며 주위를 살폈다.

밤이 깊어 고요해야 할 처소 주변이 어쩐지 소란스럽다는 생각을 하던 그녀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저들은 분명 황제의 처소인 수신전 상궁 나인이었다.

지밀인 한 상궁이 먼저 기하를 알아보고 나붓이 절을 올렸다. 상전의 단정치 못한 차림에 금세 얼굴이 붉어진 현 상궁은 초조하게 그를 올려다봤다. 본래 온탕에서부터 완벽한 차림으로 나와야 하는 것이 황실의 법도였다.

“마마, 폐하께서 납셔 계시옵니다.”

한 상궁의 단정한 음성에 기하는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로 어깨가 흥건하게 젖은 제 모습을 내려다봤다. 분명히 이리 나타나면 이 꼴이 다 뭐냐고 면박을 주실 테지.

이제 와 어쩔 도리가 없으니 크게 꾸지람 듣겠다는 생각에 머리를 긁적이다가 젖은 영견을 현 상궁에게 내밀었다. 그러고는 난처한 듯 머리를 조아리는 그녀를 향해 미소 지었다. 당장 꾸지람을 듣는다고 해도, 황제께서 기별도 없이 걸음 하셨다는 사실이 기뻐 머뭇거릴 틈이 없었다.

황제는 침상 끄트머리에 앉아 기하가 펼쳐놓은 서책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하도 경건하여 발을 들이다 말고 멈춘 기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입술만 깨물었다.

“바람 들어온다.”

제대로 고개를 들지 않은 황제의 음성에 얼른 남은 몸을 안으로 들이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닫혔다. 그런데도 한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탓에 황제가 고개를 들었다가 이내 쯧, 하고 혀 차는 소리를 냈다.

“아무리 튼튼한 사내도 한겨울에 그리 다니다가는 고뿔에 걸린다.”

“송구합니다.”

“가까이.”

가벼운 손짓 하나에도 기품이 묻어나는 황제는 조용히 서책을 덮었다. 쭈뼛거리며 그의 앞으로 다가가 머리를 숙인 기하는 황제가 검집으로 바닥을 치는 쿵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어디선가 소리 없이 나타난 황제의 그림자에,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예전 같으면 반사적으로 방어 자세를 취했을 텐데, 몸이 무뎌진 것인지 마음이 그러한 것인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스라소니 새끼는 예서 키운다지?”

“예. 한 마리는 날 때부터 약했던 탓에……. 숨이 떨어지기 전 금룡대장에게 부탁해서 황실 밖에 잘 묻어두라 했습니다. 나머지 아이들은 무척 건강하여 잘 먹고 잘 잡니다.”

“그래. 그대가 적적하지 않겠구나.”

“예, 폐하. 폐하의 크신 은혜, 감사드립니다.”

“여우 털이다.”

침상 위에 툭 떨어진 것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던 기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여우 털…….

“어찌 쓸지는 그대가 알아서 하도록 해.”

“소인은 이런 것이…….”

“다른 계집들은 좋다고 받을 것은 밀어내고, 기껏 검이나 던져줘야 기쁘게 받을 것이냐?”

“그런 것이 아니오라, 소인은 본디 추위를 크게 타지 않고…….”

“그래서 그 꼴로 그리 다니는 것이야?”

“송구합니다.”

“네가 쓰고 싶은 곳에 쓰도록 해. 귀하게 여겨 주는 것은 아니니.”

노곤한 음성이 귓가를 어지럽혔다. 기하는 물끄러미 황제를 바라보다 나른하게 번지는 웃음에 얼굴을 붉혔다. 배가 부른 맹수처럼, 입맛을 다시는 황제의 모습에 덜컥 겁이 났다.

“곧 출정할 것이다.”

“예?”

“네 살 날이 늘어난다는 소리다.”

“전장에 나가십니까? 폐하께서요? 다른 장수들은 어쩌고 폐하께서 직접…….”

“그리 절절하게 이를 것 없어. 걱정은 충분히 다른 이들에게도 들었으니.”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듯 얼굴을 찌푸린 기하를 향해 황제는 손을 뻗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청아한 얼굴에 울음이 번지는 것만 같아서 슬그머니 웃음이 나려 했다.

걱정이 많구나. 감정이 지나친 탓이겠지. 제 앞가림도 제대로 못 하는 놈이, 제 명을 쥐고 있는 사내의 안위를 걱정하다니. 이 얼마나 모순된 삶이란 말인가.

“폐하…….”

“너는 예서 사는 게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그리 있으면 돼.”

“폐하.”

“그때까지 너에 대한 생각은 거두어 두겠다. 하니, 잘 지내고 있어라.”

빙긋이 웃는 황제를 마주 보면서 기하는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 축축하게 젖은 손가락이 그의 뺨 위에 올라앉았다.

황제는 이번에도 그 손을 물리지 않았다. 그저 가볍게 눈을 감았다가 뜨며, 이전처럼 동그란 어깨를 가만히 쓰다듬어 줄 뿐이었다.

* * *

제국의 겨울은 생각보다 따뜻했고, 잔잔했으며, 평화로웠다. 때문에 기하는 때때로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정처 없이 시간을 보냈다. 죽음을 기다리며 산다는 것은 퍽 고된 일이었으나, 그마저도 익숙해지고 나니 시간을 즐길 줄도 알게 되었다.

황제께서는 그날 밤 남기신 말씀대로 얼마 안 가 동남성 국경으로 출정하시었다. 황제 편에 선 대신들의 반발이 매우 컸으나, 그 뜻을 굽히지 않으신 까닭에 조정은 한바탕 난리를 치러야 했다.

수많은 후궁이 매일 밤 황제 폐하의 무운(武運)을 빌었다. 예정했던 것보다 그것은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고 따뜻한 봄이 올 때까지, 그 누구도 환궁하지 아니했다.

“엄 재인(才人)이 회임을 했다 하네.”

“아…….”

“무빈께서는 왕래가 없어 잘 모르시겠지? 남(南)성에서 온지라 딱히 다른 이들과 교류는 없지마는, 심성이 곱고 순한 여인이라네.”

황후는 기쁘게 미소하며 황실의 경사를 알렸다. 아직 적통인 황후의 소생은 없었으나, 황제께는 이미 두 분의 아드님이 계셨다.

3년 전 태어난 일황자에게 태자의 칭호를 내리지 않은 것에, 대신들은 아무런 불만을 야기하지 않았다. 황제 또한 삼황자였으나 엄연히 적통이었다. 혈(血)의 난을 겪고 오른 자리이기에 황제께서는 더더욱 잡음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정말로 기쁜 일입니다.”

“응, 그렇지. 벌써 넉 달째라고 하니, 엄 재인이 무디긴 한가 보아. 언제 셋이서 함께 다과라도 들까 하는데.”

“예, 그렇게 하세요.”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황후의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내면서 기하는 찻잔을 들었다. 황후께서 내어주시는 차 맛은 무척 좋았다. 평생 이리 달고 맛있는 차는 처음이었다.

아마 오래도록 이 맛을 잊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다가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생각의 끝은 늘 마지막을 향했다.

어찌 된 일인지 북성의 답신이 끊겼다. 주에 한 번, 서찰은 빠짐없이 전달하였는데 봄이 오면서부터는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황후께 청을 올려 북성을 정찰차 나갔었던 사자를 대면하였을 때는 모두 무탈하고 평온하다는 말만 들었을 뿐이었다.

정확히는 황제께서 내리신 많은 양의 곡식을 보낸 후부터였다. 그때부터 미묘하게 달라진 분위기에 생각하는 것을 멈추었다. 마지막 서찰은 형수님께 온 것이었다. 그저 무탈하게, 잘 지내면 된다는 짧은 인사. 수려한 필체를 떠올리자 다시 가슴이 먹먹해졌다.

“무빈?”

“예, 마마.”

“그대 안색이 좋지 못한데, 무슨 일이 있는 거요?”

“아닙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여……. 송구하옵니다, 마마.”

“스라소니는 잘 자라고 있는 것이오?”

“예. 두 녀석이 장난기가 심해 현 상궁이 아주 골치 아파하고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황후는 반듯하게 허리를 폈다.

“그대 그리 웃는 것을 보니, 마음이 놓이네.”

“…….”

“황궁은 외로운 곳이라오. 그대 또한 잘 알고 있겠지마는, 스물 남짓한 이들이 한 분의 지아비만을 바라보고 사는 것은 외롭고, 괴로운 일이지. 폐하께서 그리 살갑고 다정한 분이 아니시니, 더더욱.”

차와 함께 나온 떡을 기하에게 내민 황후는 마른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이마를 매만졌다. 언제나 다정하고 인자하게 웃어주던 여인의 약한 표정을 마주한 기하는 어색함에 시선을 돌리지도 못하고 입술만 그저 방끗거렸다.

“짐승이든, 그 무엇이든, 그대도 마음을 잡을 무언가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했었거든. 다른 여인들이야 연이 닿으면 아이라도 가질 수가 있지 않나. 어차피 이곳엔 그저 버티는 것이 오래 살아남는 길이라는 것을 그대 또한 알 테니. 너무 외로워도 하지 말고, 괴로워도 하지 말고, 이제는 북성이 아니라 제국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지 않겠나.”

황후의 다정하고 사려 깊은 목소리에 기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괜한 걱정이라는 입에 발린 말 같은 것은 쉽게 할 수 없었다.

어차피 황실 안에 있는 대다수의 여인은 같은 처지다. 특별히 애정을 받거나 세를 키우는 여인들은 없었고, 황제는 그들을 모두 같은 수준으로 대했다. 그나마 황자 시절 빈으로 맞이한 황후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그저 후궁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뒤집어쓴 볼모나 다름없었다.

“폐하께서 약조하시지 않았나. 그대와 북왕, 세자 또한 무탈할 것이야.”

“하지만…….”

“선황 폐하의 증표는 아무리 폐하라 할지라도 함부로 바꿀 수 없다네.”

황후의 말을 반박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잠식당하는 중이었다. 황제를 향한 애틋했던 그리움이 해갈되고 나니 밀려드는 허탈함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꿈꾸었던 그의 모습은 자신이 만들어낸 환영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러서려던 것은 아니었다. 다시 조우한 황제께서는 가슴 뛰도록 아름답고 훌륭한 장수로 성장하셨으니까.

“무빈.”

“예, 마마.”

“폐하의 사람이 되시게.”

“예?”

“다 잊고, 폐하의 사람이 되어. 그것만이 그대가 살길이네.”

“마마, 소인은…….”

“그리해야, 그대가 편히 살아. 다른 걱정일랑 하지 말고 그리하시게.”

자애로운 미소를 짓는 황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하는 그대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모두가 그리 말한다. 다 잊고 살라고. 그리하면 살 수 있다고.

그것이 옳은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살면 행복할 수 있는지도 말하지 않았다. 그뿐이었다. 사는 것, 죽지 않는 것. 오직 그것뿐.

* * *

침상 밑에 웅크리고 있던 스라소니 두 놈이 낑낑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운 기하를 찾는 것이었다. 아직 작고 약한 짐승들은 마치 기하가 제 어미라도 되는 양, 도통 그의 곁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그가 잠시라도 자리를 비울라치면 옷자락을 잡고 늘어지다가, 떼어놓기 무섭게 온갖 사고를 치기 바빴다. 그마저도 지치면 침상 아래로 기어들어 가 낑낑거리며 울고 도통 나오려 하지 않았다.

현 상궁은 한숨을 푹 내쉬며 기하의 침상 위를 손수 정리했다. 황후께서 다시 보내주신 나인 여섯은 상전과 함께 자경전에 보냈기 때문에 태화당은 텅 빈 상태였다.

노비인 연금과 소현 또한 심부름을 보낸 터라, 짐승의 울음소리가 더욱 처량하게 들렸다. 저렇게 내내 울고 있다가 기하만 나타나면 그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드는 발칙한 놈들 때문에 그녀는 내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지금이야 작은 짐승에 불과한 것이지마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크는 것들을 어찌해야 할지 막막했다. 완전히 정이 든 다음에 저것들을 떼어 내려면 더 힘들 터인데.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저것들을 황궁 밖으로 쫓아내야겠다고 다짐하며 그녀는 팔을 길게 뻗었다.

“이것들아, 이리 좀 오란 말이다.”

아무리 보는 이들이 없다 한들, 체면을 잊고 침상 밑으로 기어들어 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매일 쓸고 닦는데도 팔이 닿지 않는 곳에 먼지가 쌓여 옷이 금세 더러워졌다.

낑낑거리며 팔을 밀어 넣던 현 상궁은 미리 구해놓은 기다란 나무 막대로 침상 안을 휘둘렀다. 그럴수록 작은 짐승은 사악하게 그르렁거리며 현 상궁을 향해 이와 발톱을 드러냈다.

기하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유순한 표정을 짓는 것들이 그가 자리만 비우면 이런 식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들을 계속 궁 안에 두었다가는 괜히 기하가 곤란한 일을 당할 것 같다.

“이리, 이리 좀…….”

“자네, 게서 뭐 하는가?”

난데없는 음성에 놀란 현 상궁이 그 상태로 머리를 들다 침상에 정수리를 들이받았다.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끙끙 앓는 그녀에게 바투 다가선 기하가 손을 내밀었다.

“괜찮은가?”

“예, 예……. 괜찮…….”

‘끼이잉.’

조금 전까지는 침상 구석 저 멀리에 들어가 있던 짐승들이 어느새 튀어나와 기하를 향해 낑낑거리고 울기 시작했다. 논바닥을 구르는 똥개도 이 정도로 애교를 부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현 상궁은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이를 바드득 갈았다. 저 순진한 눈동자와 세차게 흔들리는 꼬리를 보고 있자니 배알이 뒤틀렸다.

“이 녀석들, 또 현 상궁을 괴롭혔구나.”

‘끼이이잉.’

젖먹이 강아지가 우는 소리를 흉내 내는 사악한 짐승을 바라보며, 현 상궁은 부들부들 떨리는 입매를 가다듬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닌 모양이다.

“목욕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검댕이 묻었어? 자꾸 이러면 목줄을 채워 놓는다고 했지?”

작은 콧잔등을 톡톡 누르며 웃는 기하의 품에 안겨드는 짐승은 사나운 눈매에 어울리지 않게 애교를 부려댔다. 이럴수록 맛있는 것을 배불리 먹고, 따뜻한 곳에서 잠잘 수 있음을 아는 것이겠지. 기하는 이 조그마한 녀석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퍽 너그럽게 구는 중이었다.

“마마께서 너무 너그러우십니다.”

“조금만 봐주게. 아직 어린 녀석들이지 않나.”

조금 전까지 이를 드러내며 그르렁거리던 녀석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순한 양이 되어 기하의 하얀 옷에 마음껏 검댕을 묻혔다. 이러니 속이 터지지.

“한데, 황후마마께서 숙제를 내주셨어.”

“예?”

“다른 후궁들 모두 폐하의 무운을 비는 수를 직접 놓아 진상한다 하니, 이번엔 나 또한 빠지지 말고 하라시네.”

“하면 소인이 준비하겠습니다.”

“하여 나는 못 한다 말씀드렸네.”

“예?”

“어차피 금세 들통날 거짓말을 해서 뭐하게. 애초에 자네 바느질 솜씨는 황궁 내에서도 정평이 나 있다면서. 좋은 스승을 두고도 제대로 임하지 않는 것은 나의 불찰이라 하셨어. 하여 매일 폐하께 올릴 서찰을 써야 해. 그동안은 자네가 이 녀석들을 좀 데리고 있어 주게.”

한숨을 푹 내쉬면서 침상에 걸터앉은 기하는 기분 좋게 바닥을 구르는 영과 달의 등을 쓰다듬었다. 이제 제법 이와 발톱이 날카로워져서, 이따금 장난을 친답시고 이것저것 물어뜯어 놓는 통에 살림이 남아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런 놈들을 무슨 수로 잘 잡고 있는단 말인가.

“수는 놓지 않으셔도 된다고 합니까?”

“응.”

“하면 잘된 일이 아닙니까? 매일 서찰을 쓰라고 하시었다니, 폐하께 직접 그것을 올릴 수도 있는 것이고요.”

“딱히 말씀 드릴 일도 없는데 무슨 말을 쓴단 말인가. 적어도 보름은 더 걸리신다는데.”

마음이 고되었다. 황제가 궁을 비운 지금, 가장 평온해야 할 시기임에도 기하는 서늘하게 말라가는 중이었다. 황제에 대한 연정 또한 자신의 마음처럼 말라가서, 어쩌면 이제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겨우 몇 달, 부질없이 말라버릴 마음일 줄이야.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없을 따름인 이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 그 마음이 혹여 드러난다면, 그분은 뭐라고 하실까. 시간이 지나면 복잡하고 어지러운 지금 이 마음이 모두 사라지려나. 모르겠다. 정말로 모르겠다.

“마마.”

“서찰을 써야겠다. 내일 이른 시각에 황군이 움직인다 하니, 얼른 채비해야겠어.”

차라리 직접 칼을 들고 싸우면 좋겠다. 그렇다면 적어도 사는 것이 이토록 부질없이 느껴지지는 않을 것인데. 나날이 마음은 무거워지고, 가슴은 답답하고, 생각은 어지럽다. 사는 것이… 그 이유가… 달갑지가 않다. 행복하지가 않다.

* * *

피는 사람을 미치게 한다. 철이 들기 전부터 전장을 누비던 황제와 금룡대는 더더욱 그러했다. 황제 즉위 이후 그의 그림자 부대였던 제3대가 금룡대의 자리에 오른 후, 그들은 줄곧 수도의 황실에서 머물러야 했다.

늘 흙바닥을 구르고 말을 타고 달리던 이들이 느닷없이 황제의 그림자가 되니, 좀이 쑤시다 못해 울화병이 생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폐하, 긴급하게 처리하셔야 할 문건들입니다.”

덕분에 오랜만에 황제를 따라 전장에 뛰어든 금룡대는 일당백의 몫을 해내며 혁혁한 공을 세우는 중이었다. 특히나 선봉에 선 임승지는 얼굴에 웃음꽃이 만개하였다. 혈귀(血鬼)라 불리던 소싯적 모습 그대로였다.

“미친놈처럼 웃고 다니지 말라 하지 않았더냐.”

“어차피 폐하께서 저더러 늘 미친놈이라 부르셔서 진정으로 제가 미친 거라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웃고 다니려거든 뒤집어쓴 피나 어떻게 할 것이지.

“생김도 괴이한 놈이 그리 피를 뒤집어쓰고 웃고 다니니 적군인지 아군인지 모두 헷갈리지 않아?”

황제의 핀잔에도 승지는 콧잔등을 긁으며 해죽거렸다. 혀를 끌끌 차는 황제에게 사자가 전해온 함을 내민 그는 금세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곁눈질했다.

“황후마마를 비롯한 후궁들께서 폐하의 무운을 빌며 한 땀 한 땀 수를 놓으셨다고 합니다. 생각보다 일정이 너무 길어지니 모두 서방님의 무사 귀환을 바라시며 눈물 젖은 수를…….”

“치워라.”

“마마님들의 정성이 갸륵하지도 않으십니까? 이렇게 북풍한설이신 폐하를 가슴에 품은 꽃 같은 여인들의 마음이 얼마나 어여쁩니까. 부끄러워하지 마시고 어서 열어 보십시오. 내일 출정하실 때는 그중 가장 잘 된 놈을 부적 삼아…….”

“시끄럽다지 않아.”

싸늘한 황제의 일갈에도 승지는 생글생글 웃으며 은근슬쩍 손을 뻗었다.

‘어차피 제대로 잠겨 있지도 않고, 황제께서는 이대로 처박아 두고 열어 보지도 않으실 테니, 후에 황후마마를 비롯한 다른 후궁들께서 그것을 아신다면 모두 가슴 아파하실 테지. 욕심 많은 폐하께서는 어여쁜 처첩을 스물한 분이나 곁에 두시면서도 눈길 한 번 제대로 주지 않으시니, 이것은 호강에 겨워서 요강을…….’

“임승지.”

“예, 폐하.”

“욕은 속으로 하는 것이다, 이 망할 놈아. 어디 겁대가리 없이 황제 면전에 욕지거리야? 네놈이 정녕 정신이 나간 것이냐?”

“소장의 주둥이가 또 제멋대로 나불거린 것입니까?”

사납게 쳐다봐도, 죽이겠다고 검을 쥐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승지를 향해 이를 바드득 간 황제는 그 웃는 낯이 보기 싫어 기어이 상자를 열었다. 화려한 비단에 저마다 수려하게 수놓인 머리띠를 대충 휘젓다가 대충 밀었다.

“황후 것을 찾아.”

“이번에도 황후마마를 택하시다니. 역시나 사내란 조강지처를 버리지 못하나 봅니다. 소장도 얼른 꽃 같은 색시한테 장가들어 굳은 절개를 지켜야 할 텐데 말이지요.”

굳은 절개라는 말에 힘을 주며 중얼거린 승지는 가장 위에 놓인 화려한 용무늬 머리띠를 들어 보이다가, 상자의 가장 안쪽에 놓인 서찰을 꺼냈다.

“황후마마께서 서찰도 함께 보내셨나 봅니다.”

“읽어.”

“소장이 말입니까?”

“이놈이나 저놈이나 어찌 매번 똑같은 말을 두 번씩 하게 하는지, 아주 지긋지긋해지려 한다.”

“그런 겁대가리 상실한 놈이 또 있단 말입니까? 누굽니까? 우리 폐하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것은 귀염둥이 승지… 컥……, 살려주십시오, 폐하.”

기어이 자리에서 일어선 황제가 검집으로 승지의 목덜미를 내리눌렀다. 끽소리도 하지 못하고 숨을 깔딱거리던 그는 눈물까지 찔끔 매달고서 처량한 얼굴로 훌쩍이기 시작했다.

그 꼴은 더더욱 보기 싫어 이번에는 정강이를 확 걷어차 주고선 손에 들린 머리띠와 서찰을 빼앗은 황제의 표정이 사납게 구겨졌다. 아예 저놈을 이 전장에 묻어두고 가든지, 아니면 당장에라도 환궁해야 할 성싶다.

무지한 백성은 죄가 없습니다. 그들 또한 폐하의 백성으로 태어났더라면, 그리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폐하의 앞에는 늘 승리가 가득할지니, 선한 아량을 베푸시어 그들 또한 편안하게 눈을 감기를. 폐하와 제국군의 무운을 빕니다.

물끄러미 눈동자를 굴리던 황제의 입에서 낮은 숨이 흘렀다.

“이야, 무빈께서는 어찌 이리 선하신지. 죽어가는 적국의 백성 안위까지 챙기시다니.”

“내게 달리 할 말이 없어서겠지.”

“그것도 딱히 그른 말은 아니긴 합니다만, 어쨌거나 황후마마 버금가는 훌륭한 인품을 지니시지 않으셨습니까? 우리 폐하는 복도 많으시지. 그리 현명하시고 다정하신 분을 첩으로 들이시다니……. 왜 또 그리 보십니까?”

저놈이 전장에서 뜻밖의 오랜 시간을 보내다 보니 맛이 갔나 보다. 아니면 분명, 서연 그자에게 뇌물을 받아 처먹은 것이 분명했다.

“또 소장을 그리 의심 가득한 눈으로 보십니까?”

“그만 치워라.”

손에 쥐고 있던 서찰을 상자 위로 던지자, 승지는 그것이 혹여 바닥에 떨어질까 싶어 몸을 날리면서까지 받아 들었다. 필시 저놈 속에 뭔가가 들어가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황제는 불쾌한 기분을 잔뜩 드러냈다.

“이제 슬슬 이곳도 정리하시고 그만 환궁하셔야지요.”

황제가 이끄는 제국군은 가는 곳곳마다 승전기를 꽂았다. 덕분에 환인국과 연국은 자칫 역사의 뒤안길로 사그라질 위기에 처해 있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황제는 마치 피에 굶주린 야차처럼 굴었다. 한없이 남으로 내려가면서 조금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추운 겨울이 어느덧 따뜻한 봄이 되었건만, 그는 좀처럼 결단을 내리지 아니했다.

“폐하, 남은 일은 대장군에게 맡기십시오.”

“환궁하기 싫다.”

불쑥 튀어나온 황제의 진심을 승지는 애써 못 들은 척했다. 그가 얼마나 황궁의 높은 담을 지긋지긋해 하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폐하.”

“나가자. 벌써 해가 중천이다.”

막사를 저벅저벅 걸어 나가는 황제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승지는 상자 위에 놓여 있던 서찰을 곱게 접어 그 안에 넣어두고는 황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 찬란한 태양이 눈 부셨다.

* * *

폐하와 제국군의 승전고(勝戰鼓)가 연일 울린다고 들었습니다. 하나, 그것이 마냥 따뜻하고 평온한 꽃길이 아니라는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지난밤에는 폐하께서 무탈하게 환궁하시는 꿈을 꿨나이다. 신첩을 비롯한 모든 이들의 바람이 폐하께 전달되기를. 폐하와 제국군의 무운을 빕니다.

서찰 끄트머리는 손에 묻은 피로 얼룩졌다. 무심한 눈으로 그것을 쳐다보던 황제는 막사 안으로 들어오는 승지의 인기척에 잠시 눈을 거뒀다. 승지의 뒤를 따라 들어온 거기장군(車騎將軍)은 당장에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얼굴로 무릎을 꿇었다.

“폐하, 속히 환궁하시지요. 이곳은 소장이 정리하겠사옵니다.”

들고 있던 서찰을 아무렇게나 내던진 황제가 수려한 미안을 찌푸렸다. 애초에 이것은 호랑이를 상대하는 토끼의 얄팍한 수에 지나지 않았다. 토기가 아무리 잔꾀가 있고 민첩하다 한들, 날카로운 이와 발톱을 지닌 호랑이를 이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데 그것들이 몰려다니며 제법 여기저기에 토끼 굴을 파놓았더랬다. 덕분에 몇 번이나 발을 헛디뎠지. 물론 덩치 큰 호랑이가 조그마한 토끼 굴에 갇히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폐하.”

“어찌 이리 돌아가면서 호들갑을 떨어. 그대 눈엔 내가 이깟 상처로 어찌 될 듯싶은가?”

“그런 것이 아니오라, 옥체 상하실까 저어됩니다. 이곳은 소장이 책임지겠나이다. 반드시 폐하께서 명하신 기일 내에 토끼 굴을 무너뜨려 바치겠나이다.”

왼쪽 가슴을 주먹으로 탕탕 치며 맹세를 표한 거기장군이 다시 한 번 황제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이것은 그저 토끼 굴을 지나다가 발이 빠진 것에 불과하다.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는, 그저 자그마한 흔적으로도 기억되지 않을 일이었다.

황좌에 오르기 전, 수없이 많은 전장을 누빌 때는 정말로 죽을 뻔했던 날들도 많았다. 그런 것에 비하려니 어쩐지 간지러운 기분마저 들어, 황제는 연신 환궁을 거부하는 중이었다.

“벌써 넉 달째가 아닙니까. 수도를 너무 오래 비우시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보다 못한 승지가 한마디 끼어들었지만, 황제는 그것을 귓등으로도 들은 척하지 않았다.

이곳은 전장이다. 크고 작은 상처 즈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목숨이 붙어 있다면 언제라도 칼을 들고 뛰어나가야 한다. 물론 그들의 말대로 굳이 직접 선봉에 서야 하는 중차대한 문제는 아니었지마는.

“보름이다.”

“…….”

“정확히 보름이야. 더는 시일을 넘겨서는 아니 될 것이다.”

“예, 폐하. 보름 후에는 제국의 지도가 더 크게 변할 것입니다.”

거기장군의 오만할 정도로 당당한 음성에 황제가 빙긋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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