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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연(緣) (7/49)

6장 연(緣)

잠이 덜 깬 기하의 의대를 매만지던 현 상궁은 의문 섞인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이제는 제법 기운을 차려 예전과 같이 오전엔 검술로 시간을 보내고, 오후에는 서책을 읽거나 수를 놓으며 시간을 보내는 기하에게 채비하라는 명이 떨어진 것은 어젯밤이었다.

덕분에 부랴부랴 준비하였으나, 춥고 외진 황실 사냥터에서 하룻밤 보내기에 그것은 퍽 허술한 모양새였다. 황제께서 워낙 사냥을 좋아하시어 기존에 있던 황실 사냥터를 확장하였기에 예전보다 더 험하다는 얘기를 전해 들은 현 상궁은 저녁 내내 잠을 설쳐야 했다.

“하늘을 보니 눈도 올 것 같사온데, 정녕 괜찮으시겠습니까?”

“응?”

“산과 호수가 인접해 있는 곳이라 바람도 찰 것이고, 일정도 고될 것입니다.”

“아아, 괜찮아. 사냥은 나도 좋아하니까. 더군다나 폐하와 이틀이나 함께할 수 있지 않나?”

“마마께서는 그리도 폐하가 좋으십니까.”

“응! 아차, 너무 대놓고 생글거리면 채신머리없다 하시었는데…….”

“예?”

“으응, 아니야. 준비는 다 되었나?”

“예.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연호당 나인들에게 물어 대강은 하였으나…….”

“그럼 되었어. 이만 나가야겠어. 폐하께서 기다리시면 아니 되지 않겠나?”

생긋 웃으며 먼저 처소를 나서는 기하의 뒤를 따르면서도 현 상궁은 찝찝한 마음을 버리지 못했다. 황실 사냥터의 특성상, 황제의 행렬을 따르는 것은 금룡대와 일부 환관뿐이었다.

두어 번 남짓 영빈이 동행하였던 적은 있으나, 그것은 봄이나 가을 즈음이었다. 왜 하필 눈까지 내리는 겨울 산을 함께 가려 하시는지. 그럼에도 좋다고 웃으시니 뭐라 더는 드릴 말씀도 없지만 말이다.

“위험한 곳은 절대로 가지 마십시오.”

“걱정 안 해도 된다니까 그러네.”

“혹여나 미열이 나시면 참지 마시고 꼭 임 대장에게 말씀하셔야 합니다.”

“알았대도.”

오늘따라 현 상궁의 걱정이 지나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기하는 기분 좋은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뭉근하게 붙었던 잠이 겨울바람에 완전히 가셨다. 가슴이 뛰고 설레어 도무지 잠을 이루지 못한 탓이었다.

오랜만에 말을 타는 것도 신났고, 사냥 또한 즐거웠지만 무엇보다 이틀이나 황제와 가까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뻥 하고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마마.”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하는 눈을 맞고 서 있던 임승지가 반갑게 다가왔다. 황제의 처소인 수신전 앞에서 모이기로 한 탓에, 웅장한 정원이 배웅 나온 이들로 북적였다.

“내 늦은 것은 아니지요?”

“아직 폐하께서 나오시지 않으셨습니다. 한데, 어찌 이리 얇게 입고 나오셨습니까. 사냥터는 황궁보다 훨씬 춥습니다. 이러다 고뿔이라도 걸리시면…….”

“추위를 잘 타지 않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혹여 추우시면 소장에게 말씀하십시오. 여벌을 준비했으니 그것이라도 괜찮으시다면…….”

“그래요, 그럽시다.”

“마마께서 타실 말은 이 녀석입니다. 풍(風)이라 부르시면 됩니다. 아직 어리고 순한 녀석입니다.”

“사냥하기에는 그리 적합한 아이가 아닌데?”

“사냥이라고 해도 마마들께서는 사슴이나 고라니 정도를 잡으실 테니까요.”

마마들이라는 말에 기하의 고개가 갸웃했다. 마마들? 마마들이라 한다면―.

“내가 많이 늦었소?”

경쾌한 음성에 기하의 고개가 돌아갔다. 평소와 달리 씩씩한 걸음걸이로 수신전 앞마당으로 들어오는 영빈의 얼굴 가득 해사한 웃음이 걸렸다.

늘 풍성하게 늘어뜨리던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어 틀어 올리니 희고 작은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단정하고 곧은 눈썹, 크고 영롱한 눈에 오뚝한 콧날, 붉은 입술은 여느 여인들보다 아름다웠다.

기하는 가까이 다가오는 영빈을 보자마자 입술을 다물었다. 그가 함께 갈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탓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마마.”

“임 대장, 그대 얼굴 보기가 어찌 이리 힘듭니까?”

“송구하옵니다. 마마께서 소장을 그리 생각하시는 줄은 몰랐사옵니다.”

웃는 것도 아니고 찡그리는 것도 아닌 오묘한 표정을 짓는 승지를 향해 그린 듯한 미소를 짓던 영빈은 한바탕 떠들고 나서야 기하를 발견한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빈, 그런 차림으로 출발하시려 하오? 그러다 고뿔이라도 걸리면 폐하께 폐가 될 텐데.”

“추위에 강해서요. 걱정은 고맙습니다.”

“혹시나 하여 무빈도 이번 사냥을 함께 가는 것이 어떨까 폐하께 청을 드려 허락은 하시었소만, 내 괜한 짓을 한 건 아닌지 걱정되오. 아직 그대, 말도 제대로 길들이지 않았을 터인데, 괜찮겠소?”

영악하게도 웃는다. 기하는 물끄러미 영빈을 바라보다 그에게 등을 돌렸다. 어차피 같은 품계에 그리 애틋한 사이도 아니니, 길게 말을 섞고 싶지 않은 까닭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저 치와 함께 이틀을 보내야 하는 끔찍한 기분에 당장에라도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리된다면 두 사람의 애틋한 시간만 내어주는 꼴이겠지. 이제 와 안 간다고 할 명분 또한 없고.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황제를 배웅하기 위해 나온 후궁들은 어느새 영빈을 에워싸고 그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황실의 수많은 여인 중에서도 영빈은 단연 눈에 띄는 외모였다.

그래도 어디 가서 못났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않았었는데 절로 제 얼굴이 못나 보인다는 생각이 들 만큼,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그러니 폐하께서도 그리 총애하시는 것이겠지.

“황제 폐하 납시오.”

길게 늘어서 있던 인파가 한순간에 머리를 숙였다. 평소와 달리 짙은 남색의 무복 차림에 단단한 갑옷을 걸친 황제는 거대한 야수처럼 날쌔게 몸을 움직였다.

늠름하고 잘생긴 흑마 위로 거의 날아오르듯 자리 잡은 그를 넋 놓고 바라보던 기하는 손수 말을 끌고 온 승지에게서 고삐를 받았다. 백마는 혈통이 좋아 보이고 늠름하였으나, 아직 어린 것 같았다.

전장은커녕 황실 여인이나 등에 태우고 나들이 떠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기하는 한숨을 내쉬며 갈기를 부드럽게 손등으로 쓸었다. 어푸푸 소리를 내며 제자리걸음을 하는 풍의 등을 다독이고 가까이 다가선 기하가 짐승의 눈 사이를 쓰다듬으며 가만히 얼굴을 가져다 대고 눈을 감았다.

많은 사람 사이에서 당황하여 놀란 말이 진정하도록 연신 목덜미를 쓸어주자, 그제야 움직이지 않고서 바로 섰다.

“잘 부탁한다.”

다정한 기하의 음성에 힘을 얻은 듯 어린 말은 요란하지 않은 울음소리를 냈다. 황제의 곁에 서 있던 영빈의 곁으로 갈색 말이 다가왔다. 스스로 몸을 낮춘 금군의 무릎을 밟고 말 위에 앉은 영빈은 허리를 지나치게 꼿꼿하게 세우고, 경직된 얼굴로 고삐를 틀어쥐었다. 벌써 저리 고삐를 틀어쥐면 말이 긴장할 터인데.

“이제 오르시지요.”

승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기하는 가볍게 몸을 띄웠다. 안장 위쪽으로 손을 짚고 그 반동으로 가볍게 말 위에 오르자, 승지의 얼굴에 여유 만만한 웃음이 매달렸다.

“역시 몸이 가벼우십니다.”

“몸만 가벼운 것이 아니고, 활도 잘 쏘는데.”

“이야, 마마의 실력이 궁금하여 소장 벌써 몸이 달아오릅니다?”

“내기라도 할까요?”

“금룡대장 체면이 있지요.”

“그런가? 하면 그대는 두 마리에 나는 세 놈으로 하지요. 그리하면 공평합니까?”

“예? 하하하하, 마마도 참.”

승지의 웃음소리가 수신전 안에 가득 울렸다. 주위를 둘러보며 막 출발하려 선두에 서려던 황제의 사나운 눈총에, 그는 간신히 웃음을 거두고는 이따 뵙자는 말로 기하의 곁을 지나쳤다.

황제의 오른쪽에 자리를 잡으면서도 터지는 웃음을 완전히 감춘 것은 아니었기에, 그의 얼굴 근육이 이상스럽게 뒤틀렸다.

“정신이 나갔구나?”

“송구… 크흡, 합니다.”

“미친놈. 출발하자.”

황제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뿔나팔 소리가 길게 퍼졌다. 늘어서 있던 후궁들과 상궁 나인이 황제를 향해 절을 올렸다. 그의 뒤를 따르는 수십의 금룡대는 길게 열을 만들어 황제와 기하, 영빈을 에워쌌다.

머리 손질을 제대로 하지 않아 바람에 휘날리는 기하의 긴 머리카락이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꼬박 두 시진을 넘게 달린 끝에 도착한 사냥터 입구에는 아담한 처소 두 채가 보였다. 황제께서 쓰시기에는 지나치게 작았으나, 추위를 피하기에는 그만인 곳이라 뻣뻣해진 몸을 풀기에 바빴다.

그 와중에도 영빈은 꽤 영악해 보이는 나인까지 대동해 그녀에게 매무새를 직접 손질하게 했다.

“몸 좀 녹이십시오.”

다른 이들에게 뒤처지지 않고 열심히 달려와 준 풍의 갈기를 쓰다듬고 있으려니, 다가온 승지가 따끈한 차를 내밀었다. 고맙다는 말 대신 미소를 지으며 고삐를 잡느라 꽁꽁 언 손을 녹이자, 승지는 할 말이 있는 것처럼 기하의 주위를 뱅뱅 맴돌았다.

“마마께서는 궁 안에 계실 때보다 지금이 훨씬 좋아 보이십니다.”

“그래요?”

몇 달 만에 말을 탄 것이니 실로 답답함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았다. 찬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달릴 때면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만 같아서 온갖 상념을 모두 날려버릴 수 있었다.

물론 조금 전까지는 황제의 곁에서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앉아 달리는 영빈이 신경 쓰여 마음을 풀지 못했지만, 찬바람을 쐬고 나니 그래도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았다.

“예, 훨씬 보기 좋습니다. 앞으로는 자주 나오시지요. 마마의 궁술은 이미 정평이 나 있으니, 금일은 소장 또한 한 수 배우겠습니다.”

입바른 소리라 해도 그런 인사치레는 상대의 기분을 돋워주는 것이었기에 기하는 가감 없이 미소 지었다. 바람 때문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자꾸만 눈을 가려, 이제는 이것을 어떻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반쯤 마신 찻잔을 승지에게 내미는 순간 가까이 다가온 그림자만 아니었다면 분명 그리했을 테다.

“꼴이 이게 뭐냐.”

“춥지 않습니다.”

“얼굴이 그리 붉은 주제에 헛소리는. 태화당은 대체 살림을 어찌 꾸리기에 뭐든 이리 곤궁해?”

“소인이 필요치 않다 여겨 준비하지 않은 것입니다.”

“너 말이다.”

“예, 폐하.”

“데려와 달라 그리 애원을 하더니, 어찌 또 뭣 씹은 얼굴이냐?”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기하는 그것을 얌전히 집어삼켰다.

“아닙니다.”

쯧. 혀를 차는 소리가 어찌나 크게 들리던지 절로 어깨가 웅크려졌다. 다시 총총히 나타난 영빈이 황제의 팔을 기세 좋게 잡아끌며 어디론가 가려 하자, 기하는 먼저 등을 돌려 말 위로 뛰어올랐다.

승지가 특별히 잘 관리하였다면서 건넨 활을 받아 들고 옆구리에 하사받은 검을 차자, 삼삼오오 모여 있던 금룡대의 시선이 느껴졌다. 손바닥에 완벽하게 잡히는 매임을 어루만지며 살을 메겨 활등을 잡아당기자, 어디선가 미약한 탄성이 터졌다.

휘이익, 탕! 살촉이 박히는 소리와 함께 희미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직 사냥터 초입이라 예까지 내려온 짐승이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하였기에 금룡대는 순간 술렁였다.

“벌써 시작하시는 것입니까?”

“법도에 어긋납니까?”

“아닙니다. 폐하께서도 괘념치 않으실 것입니다.”

늘 방긋거리던 기하의 얼굴이 일순간 차가워졌다. 감정이 담겨 있지 않은 눈이 푸르게 빛난다. 동공이 너무 크고 검어 흰자위에 푸른빛이 도는 것만 같았다.

여인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사내치고는 단아하다고 느꼈던 그의 모습이 오늘따라 북풍한설과 같이 느껴졌다. 얇은 입술 끝에 늘 걸려 있던 미소가 사라진 것에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승지는 쉬이 연유를 묻지 못했다.

날렵한 콧날이 가리키는 곳을 함께 바라보니 깃발을 흔들며 화살 맞은 짐승의 상태를 알리는 몰이꾼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제법 덩치가 큰 토끼로, 등 가운데에 구멍이 뚫려 피가 퐁퐁 쏟아졌다. 명중이었다.

“완벽하십니다.”

손뼉을 치며 제 일처럼 기뻐하는 승지를 바라보던 기하는 고삐를 틀어잡았다. 멀리, 나란히 서 있는 황제와 영빈의 시선이 느껴졌다.

둥. 둥. 둥. 북이 울렸다. 뿔나팔 소리도 길게 울렸다. 어느새 말에 올라탄 황제의 주위로 금룡대가 몰려들었다. 몰이꾼이 한데 모여 여러 길로 흩어지자, 한 손으로 능숙하게 고삐를 틀어쥔 황제가 말의 옆구리를 찼다.

땅이 울렸다. 일순 쏟아져 나가는 이들이 일으킨 먼지바람에 눈을 감으며 그들이 멀어지기를 기다리던 기하 역시 말의 옆구리를 가볍게 찼다.

고삐를 바짝 잡은 기하는 말 등에 상체를 바짝 붙였다. 몰이꾼이 붙는 것은 북성의 사냥 방식이 아니라서 의도적으로 그들을 떨어뜨리고 나니, 이번에는 금룡대 두엇이 호위를 한답시고 줄곧 곁을 맴돈다.

퉁, 타악. 비명도 내지르지 못한 고라니 한 마리가 그대로 풀썩 쓰러졌다. 단번에 숨이 끊어지지는 않았는지 허공을 향해 연신 헛발질을 하는 것이 안쓰러웠다. 말에서 풀썩 뛰어내린 기하가 숨을 헐떡이는 고라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낑낑거리는 소리를 내는 눈망울이 뿌옇게 흐려졌다.

“사냥터에는 이런 녀석들뿐인가?”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멧돼지나 여우 같은 놈들도 있고, 손이 닿지 않은 곳에는 맹수도 있으니 주의하셔야 합니다.”

열다섯이 되던 해부터 북성을 떠나 전장을 누볐다. 수많은 적을 베었고,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어린 짐승의 숨을 끊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따뜻한 곳에서 배부르게 지내면서 유흥거리 삼아 짐승을 죽이는 것은 제가 배운 사냥이 아니었다. 멧돼지나 이리 혹은 곰 따위의 짐승을 찾는 것도 아니고, 고작 새끼 고라니나 토끼라니.

“그만 돌아가자.”

두 시진이 넘도록 기하가 잡은 것은 총 열세 마리 짐승으로, 종류와 크기가 갖가지였다. 몰이꾼을 따로 두지 않은 그가 자신의 힘만으로 사냥한 것을 금룡대는 몹시 신기해하면서도 대단하다 생각하고 있었기에, 갑자기 활을 넘기는 것을 기이하게 쳐다봤다.

“그대들은 더 즐기고 싶으면 그렇게 하도록 해. 돌아가는 길은 대충 알 것 같으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대장님께서 마마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말라 명령하셨습니다.”

“그래.”

피식 웃으며 다시 말 위로 뛰어오르는 기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두 사람은 완전히 숨을 거둔 고라니를 말 등에 실었다.

“가자.”

한 손으로 말고삐를 쥔 기하는 가볍게 풍을 재촉했다. 바람에 나풀거리는 까만 머리카락은 처음 제국에 입성하였을 때보다는 훨씬 풍성하고 윤기가 흘렀다.

아무리 먼 거리에서도 단 한 발로 짐승의 목을 꿰뚫는 기하의 모습을 내내 동경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던 금룡대는 복면 안에 감춘 붉은 얼굴로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벌써 끝내신 것입니까?”

“많이 잡았습니까?”

숨을 헐떡이며 말에서 내린 승지에게선 비릿한 피 냄새가 났다. 불을 피우고 그 앞에 앉아 있던 기하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

먼저 함께 사냥을 마친 이들은 익숙하게 짐승의 가죽을 벗기고, 오늘 밤 요기할 것을 손질하는 중이었다. 탁탁 소리를 내며 나무가 타들어 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니 무기력한 기분이 들었다.

“소장은 열다섯 마리를 잡았습니다.”

“그대가 이겼습니다.”

벌써 한참 전에 사냥하다 그냥 돌아왔다는 부하의 보고를 떠올린 승지는 하릴없이 타오르는 불꽃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기하의 곁에 슬그머니 앉았다.

몇 번 사냥을 함께 나왔던 영빈은 내내 황제의 곁에 그림자처럼 붙어 온갖 민폐를 떨어대다가, 저녁 무렵이면 여기저기 아프다며 칭얼거리기만 해서 금룡대의 눈총을 사기 일쑤였다.

황제께서도 아무렇지 않게 드시는 음식을 제대로 입에 대지 못해서, 늦은 밤 한 식경(食頃 : 밥을 먹을 동안이라는 뜻으로, 잠깐을 이르는 말. 약 30분.)이나 달려야 하는 마을까지 부하들을 보내 먹을 것을 구해오는 일도 늘 있는 것이었고.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십니까?”

“응?”

“내내 기분이 좋아 보이셨는데, 지금은 안색이 어두우십니다. 혹여 부하들이 무례를 저지르기라도 하였습니까?”

“아니, 그런 일 없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대만큼이나 충직한 사람들이었으니까.”

“하면 어찌 그리 어두운 표정을 하십니까.”

“북성엔 고라니 같은 짐승들은 없습니다.”

“추위 때문입니까?”

“먹을 것이 없으니까, 그런 짐승은 살아날 수가 없지요. 사냥은 배를 곯지 않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전장에 나가 있었던 것은 겨우 3년 남짓이었지만, 그곳에서 알았습니다. 가난이 얼마나 서러운 것인지.”

꽁꽁 얼어붙은 풀을 뜯었다. 생명력이 넘실거리는 제국을 둘러볼수록 무기력함을 느꼈다. 같은 나라의 백성이거늘, 사는 것이 너무도 달랐다.

서글프고 안타까워 때때로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러나 잠시뿐이다. 이대로 환궁하고 나면 또 얼마간은 까맣게 잊은 채 그리 살겠지.

“제국과 북성은 참 많이 다르다고 생각하니, 조금 우울해졌습니다.”

빙긋이 미소하며 타오르는 불길에 나뭇잎을 던진 기하는 무릎을 조금 더 바짝 끌어안았다. 따뜻한 온기에 노곤함이 밀려왔다. 이제는 제법 말랑말랑해진 손바닥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마마께서는 제국의 사람이십니다. 북성의 백성을 생각하시는 마음은 어쩔 수 없지만, 이제는 제국민을 더 품으셔야 합니다.”

“응, 알고 있습니다. 내 설마 그런 다짐도 없이 이 나라에 시집왔겠습니까?”

입술에 걸린 웃음은 당장에라도 사그라질 것만 같았다. 바람에 나풀거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기하는 또 금세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참으로 다채로운 표정을 지닌 분이라 생각하며 승지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폐하께선 워낙에 감정 표현이 서툰 분이십니다. 때때로 마음에 없는 말씀을 하시니 마마께서 부디 잘 헤아려 주십시오.”

“그렇지만, 그것이 진심인지 아닌지는 나도 알 수가 없지 않습니까.”

“예, 그렇지요.”

“부군께서 하시는 말씀은 무조건 믿고 따라야 한다지만… 물론 나 또한 그리할 것이지만… 나는 가끔 폐하가 무섭습니다.”

“예?”

“뭘 그리 놀라십니까?”

“마마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좀 의외라서 말입니다.”

크게 불을 피운 이들이 손질한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폐하께서 가장 먼저 잡으셨다는 멧돼지를 통으로 불에 올리는 이들의 얼굴엔 기대감이 가득했다.

“이따금 감춰둔 표정이 드러나실 때가 있지요. 분노나, 미움이나, 절망과 같은.”

“마마, 그것은…….”

“처음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나 같아도 당장 찢어 죽이고 싶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뜨거운 불길은 지나치게 크게 타올랐다. 이대로 있다가는 화상을 입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승지는 벌떡 일어나 기하를 불렀다. 제 무릎에 얼굴을 묻고 꿈쩍하지 않은 기하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댈 수는 없었기에 부하들을 시켜 장작을 몇 개 빼라 하였더니, 그것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의복 끝자락에 그을음을 묻혔다.

“마마, 괜찮으십니까? 이 미련한 놈아, 그 뜨거운 것을 맨손으로 잡으려 했더냐?”

“마음이 급하였습니다. 송구하옵니다, 대장. 용서하여주십시오, 마마.”

“옷에 재 좀 묻은 게 뭐 그리 대수라고.”

높낮이가 없는 기하의 음성이 조곤조곤 번졌다. 잠이 들려는 것인지 다시 눈을 감는 기하를 바라보던 승지는 부하들을 향해 사나운 시선을 던졌다.

“곤하시면 처소로 들어가시지요.”

오랜만에 근육을 움직인 탓에 쉬이 피로감이 느껴졌다. 고작 짐승 몇 마리 잡은 것치고는 과한 통증이었다. 처음 며칠간은 수련 못 한 몸이 무거워져 신경이 날카롭게 변했었는데, 어느새 쉬는 것에 익숙해진 것인지 몸도 무겁고 마음은 더 무거웠다.

“잠시 눈만 감고 있을 테니 폐하께서 오시면 일러주세요.”

어깨 위로 무언가가 덮이는 것이 느껴졌다. 등이 시렸었는데 금세 따뜻한 온기가 느껴져서 닫힌 눈꺼풀을 제때에 들어 올릴 수나 있을지 염려되었다.

“폐하.”

말에서 내리는 황제의 활을 받아든 승지는 잔뜩 지친 얼굴로 몸을 축 늘어뜨리는 영빈을 보이지 않게 비웃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여우까지 잡으신 것입니까?”

“날이 어찌 이리 궂어, 해도 빨리 지고.”

“겨울 산이야 늘 그렇지 않습니까. 금일은 눈이 오려고 평소보다 어두운 듯합니다.”

푸드덕거리며 김을 뱉는 말 등을 다독이며 수고했다고 중얼거린 황제가 발을 돌렸다. 쉬지 않고 말을 타는 것은 제아무리 장수라 하여도 많은 체력이 요하는 것이었다. 지친 숨을 내쉬고 무거운 갑옷을 벗어 넘기자 한기가 느껴졌다.

“한데―.”

출발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신이 나서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던 녀석이 보이지 않았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은 아닐 테고.

“폐하.”

등 뒤에서 들리는 음성에 황제가 뒤를 돌아봤다. 평소보다 낮은 음색이 어쩐지 잔뜩 지친 것만 같아서, 제대로 따르지도 못할 곳엔 왜 왔느냐며 한바탕 타박이라도 늘어놓으려 했던 황제가 입을 다물었다.

웃거나 찡그리거나 심술이 나 있던 얼굴에 아무것도 담기지 않으니, 그것이 몹시 생경했다. 과히 좋아 보이지도 않았고.

“낯빛이 왜 그러느냐. 탈이라도 난 것이냐?”

“아닙니다. 곤하여 잠시 졸았습니다.”

그럼 그렇지. 괜한 걱정을 했다는 생각에 혀를 차는데도 웃지 않는다. 잔뜩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는 것을 바라보자, 훤히 드러난 목덜미가 신경 쓰였다. 사내놈이 사슴처럼 모가지가 길어서 감싸지도 않고 있다니.

“폐하께서 잡으신 멧돼지가 잘 익었사옵니다. 수라 준비도 마쳤으니 얼른 자리하시지요.”

괜히 마음에도 없는 뾰족한 말을 쏟아낼 것만 같은 황제의 표정에, 승지는 적당히 그의 말을 가로채며 기하의 앞을 막아섰다.

여우 같은 영빈이었더라면 그것을 꼬투리 잡아 승지를 따라다니며 괴롭혔을 테지만, 기하는 그것을 별로 신경 쓰지 않은 눈치로 슬쩍 자리를 피해 금룡대가 모여 있는 곳으로 발을 옮겼다.

서른 명 남짓한 이들이 한데 모이자, 황제는 잔을 채우라 명했다. 넘치게 취해 있을 수는 없지만, 적당히 회포 풀 정도로 먹고 마시라 명한 황제가 먼저 잘 구워진 멧돼지 구이를 손에 쥐었다.

본디 황제는 열 살 무렵부터 근 10여 년간 크고 작은 전장의 선봉에 서서 혁혁한 공을 세운 무인답게, 제위에 오른 지금도 황궁만 벗어나면 딱히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황제라 하여 따로 상을 받는다거나, 아랫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 일 따위도 없었다. 황제의 그림자라 불리는 금룡대가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절대적인 지지를 보이는 것은 무엇보다 그의 그런 성정 때문이었다.

“마마, 술도 잘 드십니까?”

“너무 많이 마시면 아니 되지요? 물론 이 정도엔 끄떡없지만요.”

황제께서 직접 채워주신 잔을 이미 말끔하게 비워낸 기하는 여느 금군처럼 한 손엔 고깃덩어리를 들었다. 황제의 곁에 찰싹 달라붙어 노비의 시중을 받으며 익은 고기 몇 점을 젓가락질하고 있는 영빈과는 판이한 모습에 금룡대의 시선이 슬쩍슬쩍 오갔다.

기름기가 적어 살이 퍽퍽하기만 한 멧돼지 구이는 뛰어난 음식이 아님에도, 기하는 다른 말 없이 그것을 퍽 맛있게 먹는다.

“맛있으십니까?”

“멧돼지 고기가 다 거기서 거기지요. 그래도 배가 고파 그런지 예전에 먹었던 것보다는 훨씬 맛이 좋습니다. 잘 구워서 그런가.”

스스럼없는 기하의 칭찬에 곁에 앉아 있던 금군 하나가 쑥스럽게 웃었다. 퍽퍽한 살을 꼭꼭 씹어 삼키던 기하는 슬그머니 술잔을 내려놓았다.

마음 같아서야 술이라도 벌컥벌컥 마시고 싶지만, 이따금 저를 잡아먹을 듯 바라보는 황제의 시선 때문에 슬슬 자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전까지 황제의 곁에 바싹 붙어 있던 영빈마저 사라진 걸 보니, 이제 슬슬 처소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 관례인 것 같다. 한데 처소는 어떻게 써야 하며, 이런 것들을 누구에게 물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줄곧 주변을 뱅뱅 맴돌던 임승지는 기분이 좋은지 화통하게 웃으며 부하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다른 이들은 말을 제대로 나눠본 적도 없었다. 물론 아까 낮에 함께했던 금군 또한 얼굴을 가리고 있었던 탓에 식별이 쉽지 않고.

괜히 왔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말을 타고 달리거나 바람을 쐬는 일은 무척 즐거웠지만, 그저 유흥으로 하는 사냥이 이런 느낌일 줄은 미처 몰랐다. 보란 듯이 붙어 있는 황제와 영빈을 보는 것 또한 괴로웠다.

처음부터 그랬지. 황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제가 있을 자리는 없었다. 그 누구도 반역자의 집안에서 시집온 자신을 온전하게 맞아주지는 않았다. 벼랑 끝에 내몰린 목숨이라 언제 어느 순간에 죽어도 아무렇지 않을 것이다. 초야를 치르기도 전에 죽임을 당할 것이라 모두가 생각했으니 말이다.

“무슨 생각을 그리 멍하게 하고 있어.”

분명히 멀찍이 떨어져 있던 황제가 어느 순간 곁에 다가와 있었다. 그는 서늘한 시선으로 기하를 내려다보다 불쑥 술잔을 내밀었다. 찰랑거리는 술이 황제의 손등을 적셨다. 저도 모르게 제 옷자락으로 황제의 손등을 닦던 기하는 머쓱한 기분에 뺨을 문지르며 부스스 웃었다.

“빈이란 것이 체통도 없이 맨바닥에 주저앉아서는. 그리 몸가짐이 어설퍼서야 저것들의 놀림이나 살 것이다.”

“송구하옵니다.”

퉁명스러운 황제의 음성에 저도 모르게 기가 잔뜩 죽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입술을 다물자, 쯧쯧 하는 소리가 자연스럽게 따라붙었다.

“바닥이 차다.”

“이제 그만 들어가 있어야 합니까?”

“뭐?”

“영빈도 자리를 비운 것 같아서요. 혹, 그리해야만 하는지…….”

“고작 고깃덩어리 하나도 제대로 뜯지 않고 어딜 간다는 것이냐. 왜, 너도 멧돼지는 입에 맞지 않아 다른 요기를 하고 싶으냐?”

“아닙니다. 저는 이것으로도 충분합니다.”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기분이 조금 나아진 것인지, 커다란 고깃덩어리를 손으로 찢어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 것이 꼭 철부지 아이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긴, 금룡대 모두 약관을 넘긴 사내를 뽑고 있음이니 이중에서 가장 어린 것은 맞구나.

“머리는 어찌 그리 풀어 헤치고 다니느냐. 그 꼴로 잘도 활을 쏘았구나.”

“폐하께서 늘어뜨린 머리를 좋아하신다기에 이리한 것인데, 현 상궁 말을 들을 것을 그랬습니다. 거추장스럽고 불편하기만 하던데……. 혹, 보기 언짢으십니까?”

“사냥하는 데 방해된다. 내일은 묶도록 해.”

“예.”

고기는 오래 구울수록 질겼다. 어느새 커다란 덩어리 하나를 모두 먹은 기하는 단검으로 뒷다리 살을 발랐다. 아직 불씨가 사그라지지 않아 뜨거울 텐데도 손을 호호 불어가며 살을 바르는 모습을 보다 못한 승지가 다가오려다 발을 멈췄다.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황제의 얼굴에 일순간 흥미로움이 번졌다.

“폐하께서도 드시렵니까?”

“되었다.”

그냥 먹기에도 많아 보이는 것을 들고 자리로 돌아온 기하는 망설임 없이 철퍼덕 주저앉았다. 아무리 불을 피워 놓았다지만, 바닥의 찬기가 올라와 추울 텐데.

멀찍이 떨어져서 저희끼리 이야기를 주고받던 금룡대의 시선이 슬쩍슬쩍 와 닿는다. 후궁이라는 자가 저러고 있으니 신기한 것이겠지.

“잘 먹는구나.”

“드릴까요?”

“되었대도.”

기름기가 거의 없어 질긴 것을 이로 물어뜯는 기하의 모습에 혀를 끌끌 차면서 황제는 술로 목을 축였다.

“뒷다리는 질겨. 다른 부위를 먹어라.”

“아주 못 먹을 정도는 아닙니다.”

“맛있지도 않은 부위지.”

완전히 술잔을 비우고 입술을 닦은 황제가 술병을 다시 기울였다. 타닥타닥, 나무 타는 냄새가 코를 맵게 했다.

“이곳은 북성이 아니야. 네가 그걸 먹지 않아도 아랫것들이 먹을 것은 충분하다.”

“…습관이 되어 그럽니다. 한데, 어찌 아셨습니까?”

“잊었느냐? 네 아비와 선황께서 막역한 사이셨다는 것을. 나 또한 아버님께 그리 배웠으니까.”

“아…….”

입술을 다물고 입꼬리를 올려 웃는 기하를 곁눈질하던 황제는 연신 술을 넘겼다. 밤하늘도 좋고, 공기도 차고, 오랜만에 사냥을 해서 그런지 기분도 좋았다. 늘 열락에 빠진 듯한 눈으로 바라보던 녀석 또한 오늘은 얌전하니 기분 상할 일도 없고.

“일어나시옵니까?”

“새벽부터 나갈 것이니 일찍 쉬어야지.”

황제를 따라 벌떡 일어난 기하는 손에 들고 있던 고기를 슬쩍 내려놓았다. 아직도 입안에 든 것을 제대로 삼키지 못하는 미련함에 혀를 차자, 부하들과 어울리던 승지가 얼른 다가온다.

“폐하, 벌써 들어가십니까?”

“작작들 마시고 쉬어라.”

“예, 적당히 하라 이르겠습니다. 그럼 들어가십시오.”

승지의 인사를 받으며 처소 쪽으로 몸을 돌리던 황제가 발을 멈췄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얼굴로 어정쩡하게 서 있다가 급기야 제 손가락만 꼬물거리고 있는 기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뭐 저런 맹한 놈이 다 있나 싶다.

“넌 거기서 뭘 하고 서 있는 것이냐?”

“예?”

“뭘 해? 따라 들어오지 않고.”

“저도 말입니까?”

“하면, 후궁이란 것이 시커먼 아랫것들이랑 함께 어울려서 뭘 하겠다는 거냐?”

기어이 혀를 차며 성을 내는 황제를 바라보던 기하는 승지를 슬쩍 바라봤다. 당장 그를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저 안에는 영빈이 있을 텐데 어찌 들어간단 말인가.

“무빈.”

“하지만, 처소에는 영빈도 있고…….”

“네가 이리 있는 것은 법도에 맞는 일이고?”

“그렇지만…….”

“것 참, 시끄럽게.”

급기야 기하의 손목을 붙잡은 황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의 팔을 당겼다. 힘으로는 도저히 황제를 거스를 수 없었기에 허겁지겁 뒤를 따르면서도, 마냥 웃을 수가 없었다. 단정하게 머리를 숙이는 승지를 향해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냈으나, 그는 의미 모를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폐하, 벌써 들어오시는 것…….”

해사하게 웃으며 황제를 반기는 영빈의 목소리가 청아하게 울렸다. 점점 굳어지는 그의 얼굴을 마주하고서야 황제는 기하의 손목을 내려놓았다.

처소의 규모는 작았지만, 적당히 화려하고 기품 있었다. 이런 곳에 있을 법하지 않은, 지나치게 넓고 화려한 침상이 절반이나 차지하고 있어 답답해 보였지만.

영빈은 이미 무복을 벗어 던지고 하늘하늘한 침의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어깨가 훤히 드러난 영빈의 모습에 괜히 고개를 돌린 기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겉옷을 훌훌 벗어 던지는 황제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뭘 그리 멀뚱히 서 있어?”

퉁명스러운 말투도 무표정한 얼굴도 변함없이 보아오던 것인데, 오늘은 어쩐지 저런 황제의 심술궂은 모습이 밉다. 미워도 어쩔 수 없으니 서글플 따름이다.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어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그것은 황제의 왼쪽에 누운 영빈 또한 마찬가지인 듯했다.

새벽달이 희미해질 무렵, 침상에서 일어난 기하는 뻑뻑한 눈가를 문지르며 숨을 골랐다. 잠이 부족한 탓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는 고요하게 잠들었다. 숨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라서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대충 훑었다.

침상 아래에 놓아둔 온돌이 식어 잠들기 전보다 추웠던지 영빈은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얄미운 사내였지만, 그래도 저보다 약해 보이는 이가 혹여 고뿔이라도 걸려 고생할까 싶어 제 몫의 기수를 두 사람의 위로 한 겹 더 올리는 순간이었다.

“아.”

단단하게 붙잡힌 손목의 반동에 기하는 움찔 놀라 숨을 멈췄다. 조금 전까지 고요하게 잠들어 있던 황제는 형형한 눈을 빛내며 손목을 붙잡은 손에 악력을 더했다. 아마도 본능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던지, 기하가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자 시선이 한층 누그러졌다.

“폐하.”

“뭘 하는 거냐.”

“온돌이 식어 침상이 춥습니다.”

아침이라 탁하게 가라앉은 황제의 음성은 평소보다 거칠었다. 아무리 난방을 하여도 황궁 처소만큼은 따뜻하지 않았기에 평소보다 껴입은 상태라, 그도 깊이 잠들지는 못한 것 같았다.

“아직 이른 시각입니다. 조금 더 침수 드시지요.”

대답 대신 완전히 몸을 일으킨 황제는 자리끼로 목을 축이고 습관처럼 검을 붙잡았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하가 빙긋이 미소했다.

셋이서 함께한 저녁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던 영빈은 제 예상과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다. 마치 잔뜩 겁을 집어먹은 듯 황제의 곁에 쉬이 다가서지 못하면서도, 올곧게 바라보는 눈빛만은 애정이 듬뿍 묻어 있었다.

살갑게 다가설 수도 없을 만큼 냉정한 황제가 익숙한 듯 영빈은 그저 그림자처럼 조용히 황제의 곁을 지켰다. 황제 또한 그에게 특별하게 다정함을 보이지 않았고.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목에 걸린 가시처럼 불편할 줄만 알았던 저녁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못나고 어리석은 마음이었다.

“폐하.”

황제의 수려함에 넋을 놓기는 너무 일렀다. 막 잠에서 깬 사람답지 않게 정갈하면서도 단정한 황제를 마주한 기하는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그의 이마를 문질렀다.

“한우(汗雨)가 보입니다. 혹, 어디 미령하십니까?”

“잠은 다 깬 것이냐?”

“예.”

손을 밀어내지도, 뭐 하는 짓이냐고 다그치지도 않으신다. 제 소매로 황제의 이마를 꼼꼼하게 닦아낸 기하가 다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그를 마주했다. 황궁 안이었다면 감히 꿈도 꾸지 못할 거리였다.

“해가 뜨기 전에 잠깐 돌고 올 테니 따르도록 해.”

“그래도 되는 것입니까?”

“너는 꼭 같은 말을 두 번씩 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어. 짐의 말이 그리 못 미덥더냐?”

배시시 웃으며 일어난 기하가 멀찍이 내려두었던 활과 검을 챙겨 들었다. 멀리까지는 나가지 않을 테지만, 어쨌거나 부족한 실력으로 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옷부터 주워 입을 것이지, 그건 뭐 하러 챙겨.”

“이대로 나가도 괜찮습니다.”

싱긋 웃는 기하를 바라보던 황제는 스스로 의대를 정제(整齊)하고 검을 집었다. 굳게 닫혀있던 처소의 문을 열자마자, 사나운 새벽바람이 몰아쳤다.

문 앞을 지키던 금룡대 두엇이 화들짝 놀라 자세를 바로 하자, 그들을 향해 조용히 따르라는 신호만 내린 황제가 먼저 말에 올랐다.

사위는 어두웠다. 바람은 찼고, 어제 종일 뛰어다니던 산은 검은 괴수처럼 거대한 입을 벌리고 있었다. 황제를 따라 말 위에 오른 기하는 유난히 차가운 바람에 잠시 어깨를 움츠렸다.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일어나자마자 말에 오른 황제가 걱정되어 연신 그를 곁눈질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랴.”

황제의 흑마는 단번에 발을 굴렀다. 울음소리도 제대로 내지 않은 힘찬 발돋움에 놀란 기하가 급하게 말의 옆구리를 찼다.

그들은 한동안 숨을 제대로 고르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말을 몰았다. 아직 새벽달만 떠 있는 눈 쌓인 길을 달리던 황제는 천천히 고삐를 잡아당기며 허리를 반듯하게 폈다.

어스름한 새벽 공기는 물을 만나 더더욱 차고 깊게 변했다. 희미한 달빛이 잔잔한 물 위에 비쳤다. 호수인지 강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물가에 다다르자, 흑마는 익숙하게 발을 멈추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 이국적인 경치는 말 그대로 절경이었다.

멀리 깎아지른 듯한 바위 위로 달이 떠 있는 것이 보여 이곳의 방향을 어림짐작한 기하는 단단히 쥐고 있던 고삐를 그제야 천천히 풀었다. 이곳은 황실에서도 황가의 직계만이 다다를 수 있는 곳이었다. 황실의 직계가 아닌 이는 본디 발을 들이지 못하는 것이 법도로 정해져 있었다.

“폐하, 이곳은…….”

“용성(龍聖)이다.”

감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황제만의 공간이었다.

“그리 놀랄 것 없어. 이곳에 들어온 자, 그대가 처음은 아니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껏 부풀었던 기대감이 단박에 쪼그라들었다. 물끄러미 황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기하는 그제야 뒤를 따르던 금룡대가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저, 폐하…….”

황제는 아득히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안개가 뿌옇게 차오른 계곡과 이어진 거대한 호수에는 제국의 신화처럼 당장에라도 용이 모습을 드러낼 것만 같았다.

“금룡대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리 계시면…….”

“짐은 늘 흉몽을 꾼다.”

뒤를 돌아보지 않는 황제의 목소리가 안개가 갇혔다. 오랜 시간 쉬지 않고 달렸음에도 불구하고 나란히 서 있는 흑마와 풍은 갈증 난 목을 달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얌전히 물러난 상태였다.

“악귀 같은 것들을 모두 베었는데도, 아직 그대로지.”

바람이 차가웠다. 북성의 추위에 익숙해진 기하마저 몸을 떨 만큼 용성의 한기는 실로 대단했다. 그 와중에도 황제는 어깨를 움츠리거나, 사나운 기세를 숨기지 않았다. 안개에 휩싸인 차갑고 무거운 공기를 온몸으로 맞으며, 검은 물을 흔들림 없이 바라본다.

“짐은 네가 싫지 않다.”

툭 터진 음성은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기하는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그의 목소리에 문득 머리를 들었다. 저만치 떨어져 있던 황제가 어느 순간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그대는 영민하고, 진실 되고, 겁이 없지.”

황제의 손이 기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바람에 날려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주는 황제의 손에 기하는 저도 모르게 부끄러움을 느꼈다.

“황궁에 발을 들인 순간, 죽임을 당할 것을 알면서도 망설이지 않았어.”

가깝다. 너무도 가까워,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다.

“두려움에 떠는 것 같으면서도, 절대로 물러서지는 않지. 연정을 내보이면서도 마음을 강요하지 않고.”

“그리 보이십니까?”

“무엇이 너를 그리하게 하는지, 궁금했던 순간도 물론 있었다.”

죽이기엔 아까운 이들이 더러 있다. 곁에 두어 수족으로 쓰면 어떨까. 조금 더 살려두고 한 번 더 기회를 주면 어떠할까.

하나 망설임은 독이 된다. 황제는 그것을 이미 뼈저리게 느꼈다.

“너는 잘못이 없지. 너는 또한, 내게 살려 달라 했었다.”

어리석었던 그녀는, 그 말조차 하지 않았어. 그저 어서 죽이라고 제 목을 내밀었지. 삶이 지긋지긋하다는 얼굴로, 어마마마와 형님과 아바마마까지 모두 잡아먹은 그 악귀 같은 얼굴로 말이다.

“소인은 혜비가 아닙니다.”

“그래. 그랬다면 널 이리 살려두지도 않았을 테니, 그것은 당연한 말이다.”

황제의 검이 되고 싶었다. 제국의 충실한 신하가 되고 싶었다.

“폐하. 소인은 그저…….”

“너는 거짓을 고하고 있다, 무빈.”

어느 순간 황제의 손이 머리카락을 쓸어주고, 양쪽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크고 단단한 손길에 기하는 잠시 입을 멈추고 눈만 들어 황제를 바라봤다. 존재만으로 빛이 나는 그가 너무도 가까워, 제대로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나는 네게 기회를 더 줄 셈이야. 네 바람대로 당분간 너를 죽이진 않을 것이다. 북성에도 해를 가하지 않겠다. 네 아비 또한 마찬가지야.”

그것은 어떤 의미일까. 아무리 생각하고 되뇌어도 황제의 의중을 파악할 도리가 없어, 그저 머리를 숙였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는 단지 시간을 벌고 싶었을 뿐이었다. 아무리 해도 운명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쌍생은 불길하다. 그것은 어머님의 운명을 통해서도 충분히 보았으니, 제 운명 또한 다르지 않으리라.

“북성을 버리고 아비를 버려. 하면, 네 목숨은 살려주마.”

“설마, 진심이십니까?”

“그저 네게 기회를 주는 것뿐이다.”

천천히 해가 떠오른다. 어느새 새벽달은 찬란한 태양의 기운에 완전히 짓눌려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그것이 못내 서글프다는 생각을 하며, 기하는 곰곰이 황제의 말을 곱씹었다. 기회. 아버지. 목숨. 북성. 그리고 가슴에 남은, 연정.

“폐하.”

“그대가 조금만 덜 영민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무슨 명령을 내리셔도 폐하의 뜻에 따르겠나이다.”

물끄러미 기하를 바라보던 황제의 손이 멀어진다. 그는 망설임 없이 시선을 거두고 가볍게 흑마에게 손짓했다.

그가 말 위에 오르는 모습을 응시하던 기하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얼음처럼 차가운 바람에 마음이 얼어버린 것처럼 차고 아픈 기온에 서러움이 울컥 밀려왔다.

“마마.”

고삐를 금군에게 넘기자, 먼저 황제를 알현하고 나온 승지가 특유의 너털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숙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두 분이 오붓한 시간 보내셨습니까?”

“바람이 좋았어요.”

비록 차고 매웠으나, 용성의 바람은 잊지 못할 것 같다. 아마 다시는 그곳에 발을 디딜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기하는 어두운 표정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승지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딱히 그것에 대한 말을 나누기는 곤란하여 내내 시선을 피해야만 했다.

“또 폐하께서 마음 상하실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니시지요?”

“아닙니다.”

황제는 속이 검은 사내가 아니었다. 지나치게 솔직했고, 감정을 숨기지도 않았다. 기회를 준다는 말을 차마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자신의 어리석음이었다.

어떻게 버티다 보면 폐하의 심기도 편안해지실 날이 오지 않을까. 언젠가는 북성과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사그라질지도 모른다 여겼다. 물론 그것은 지나치게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폐하께서 그래도 마마를 기꺼워하시는 듯합니다. 본래 폐하께선 늘 흉몽에 시달리시어, 항상 오전 내내 기분이 좋지 않으시거든요.”

“그, 흉몽이란 것은…….”

“아직 혜비의 그림자가 온전히 황궁에서 씻겨 나간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간자도 남아 있고, 밝혀지지 않은 일도 몇 가지 있으니 불안하신 것이지요. 천하의 주인이시라지만, 폐하 또한 약관을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으신 사내가 아니십니까.”

천천히 눈을 끔벅거리는 기하의 얼굴에 승지가 파안대소했다.

“소장이 너무 솔직하였습니까?”

유쾌한 그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기하는 조그맣게 웃었다. 그제야 웃음을 거둔 승지는 그의 곁에 나란히 서서 제 머리를 긁적였다.

안개가 뿌옇게 서린 사냥터에는 어제보다 많은 수의 금룡대가 바쁘게 오가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인지 지나치게 소란스럽다는 생각에 주위를 둘러보려는 순간, 황제의 처소 문이 벌컥 열렸다.

자신도 모르게 움찔 놀라며 어깨를 굳히던 기하는 문을 열고 나오는 이가 다름 아닌 영빈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천천히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영빈께서 아침 내내 단단히 골을 부리셨습니다.”

“나 때문에요?”

“대놓고 투기를 부릴 수는 없음이니, 다른 이유를 대시긴 하시었지요.”

어째 곁을 지나치면서도 찬바람이 쌩하니 분다.

“한데, 뭘 잡았기에 저리 소란스러운 것입니까?”

“간밤에 스라소니가 아래로 내려왔다 잡힌 모양입니다. 아직 숨이 붙어있긴 한데, 무슨 속인지는 모르겠사오나 영빈께서 그것을 꼭 살려야 한다며 저리 저놈들을 괴롭히는 중이지요.”

스라소니? 야행성인 스라소니가 어찌 여기까지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그것은 포악한 사냥꾼이었다. 주로 작은 짐승을 잡아먹는 종이었으나, 이빨과 발톱은 날카롭고 사나운 공격성을 가졌다. 한데 그런 짐승을 살려주는 이유가 무엇일까.

‘끼이익.’

괴상한 소리를 내는 스라소니는 얼굴 무늬가 호랑이처럼 선명했다. 꽤 부드러워 보이는 털이 숨을 내쉴 때마다 가볍게 움직였다.

“먹을 것을 주면 괜찮지 않을까?”

“아마 제대로 넘기지 못할 것입니다.”

영빈의 말에 칼같이 대꾸하는 금군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어찌나 내내 시달렸는지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해서 기하는 슬그머니 웃음을 삼키고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섰다. 순간 들리는 작은 소리에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어찌 그러십니까?”

“새끼가 있나?”

“예. 저놈이 어미인 것 같은데 아직 어린 새끼와 함께 움직였나 봅니다. 경계심이 많아 제 어미 주위에서 저렇게 오도 가도 못 하고 있습니다.”

축축한 눈 위는 짐승의 피로 흠뻑 젖은 상태였다. 아직 어린 새끼가 몸을 동그랗게 말고 제 어미 주위를 뱅뱅 돌았다. 제법 몸집이 큰 짐승은 곧 숨이 넘어갈 것처럼 껄떡거렸다.

짐승에게서 조금 떨어진 영빈은 초조하게 발을 구르며 어떻게든 그것을 살리라며 금군을 닦달했다. 보기에는 그저 부드러운 털과 조금 큰 고양이 같다는 생각을 들게 하는 스라소니는 본디 영악하고 사나운 짐승이었다.

“그리 오래 살진 못할 것입니다.”

“그래. 그럴 것 같네.”

혹여나 짐승이 영빈에게 달려들까 봐, 그의 앞을 막아선 금군의 무뚝뚝한 얼굴이 가까이 보였다. 기하는 숨을 헐떡이는 짐승의 앞으로 조용히 다가갔다.

자연스럽게 곁을 지키던 승지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을 뻗어 기하의 앞을 막아섰다. 딱 거기까지였다. 금군의 시선이 부드럽게 기하를 향하자, 그것에 괜히 기분이 상한 영빈은 사납게 눈을 빛내다가 금세 표정을 바꿨다.

“무빈, 이것 좀 보세요. 어린 짐승이 너무 가엾지 않습니까? 아직 새끼도 있는데 말입니다.”

“마마, 가까이 가시면 아니 됩니다.”

한사코 앞을 막아서는 금군 때문에 짐승에게 손을 더 뻗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만은 영빈의 진심이었다. 혹여 이 짐승이 죽으면 쓸 털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직접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을 숨기며 인자한 미소를 짓던 영빈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무빈, 지금 뭐 하는 짓……!”

차마 말을 맺기도 전에 짐승을 향해 활을 겨눈 기하는 망설임 없이 활시위를 당겼다. 타앙! 강렬한 소리와 함께 살이 꿰뚫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숨을 헐떡이던 짐승이 단번에 몸을 축 늘어뜨리며 혀를 길게 뺐다. 낑낑거리며 울던 어린 짐승의 울음소리가 애처롭게 들렸다.

“뭐 하는 짓이야!”

“어차피 살 수 없으니까요.”

겨우겨우 붙은 숨을 헐떡이면서도 짐승은 오롯이 제 몸을 꾹꾹 누르는 새끼를 응시했다.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것은 얼마나 끔찍하고 아픈 일이던가.

“어찌 이리 사람이 잔혹하단 말인가? 그대는 피도 눈물도 없는 것이오? 어린 새끼 앞에서 어찌 이리도 잔인할 수 있는가!”

“편히 보내주는 것이 짐승을 도와주는 일이오.”

비록 제대로 눈을 감을 수는 없겠지만, 그것은 언제 죽임을 당하더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마음대로 그리 활을 겨눈 것이오? 그대 어찌 이렇게!”

“무빈의 말이 옳다.”

“폐하.”

영빈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금군이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그 사이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온 황제는 더는 고통스러운 숨을 내쉬지 않는 스라소니 앞에 서서 물끄러미 그것을 내려다봤다. 유난히 털이 노랗고 검은 무늬가 선명한 새끼 세 마리가 연신 끙끙거렸다.

“살지 못할 바엔 제대로 죽는 것이 낫다.”

“살 수도 있었습니다. 무빈이 그리 냉정하게 활을 쏘지만 않았더라면…….”

“아니. 이것은 죽었을 것이다. 이미 폐에 구멍이 난 소리를 냈어.”

황제를 바라보지 않은 기하는 그저 머리를 숙인 채 눈도 제대로 감지 못하고 죽은 스라소니를 응시했다. 자식을 남겨놓고 죽는다는 것은 아마 저런 것이겠지. 제대로 눈을 감지도 못하고, 죽는 것이 서럽고 원통해서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말 거다.

기하는 가만히 무릎을 구부렸다. 낑낑거리고 울기 시작한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새끼 한 마리를 붙잡자, 곁에 있던 금군이 일제히 놀라는 기색이 느껴졌다. 아직 어려도 날카로운 이를 스스럼없이 드러낸 새끼를 품에 안은 기하는 비로소 황제를 향해 몸을 돌렸다.

“이 녀석들을 데리고 환궁하고 싶습니다.”

“무슨 가당치도 않은 소린가? 엄연히 황실의 법도가 있거늘. 어찌 혈통도 모르는 짐승을 마음대로 들여?”

보다 못한 영빈이 싸늘한 목소리로 기하를 꾸짖었다. 아무리 같은 빈의 첩지를 받은 몸이라 할지라도, 먼저 입궁하였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자신이 윗사람 노릇을 하려 들었다. 그것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기하가 무심하게 영빈을 바라봤다.

“그래서 폐하께 허락을 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대는 생각이 그리 없어서…….”

“뭣들 하는 거냐, 지금.”

싸늘한 황제의 일갈에,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한바탕 퍼부어 주려던 영빈이 먼저 입을 다물고 표정을 수습했다. 기하는 아직도 웃음기 없는 무뚝뚝한 얼굴이었다. 용성에서 돌아오는 길부터 내내 마음이 무거웠던 탓이었다.

“오시(午時)까지 정리하고 환궁한다. 어서 정리하고 움직이도록 해.”

황제의 명에도 기하는 쉬이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제 품에서 낑낑거리는 짐승이 급기야 손가락을 물었다. 따끔한 것에 놀랄 새도 없이, 금세 피가 퐁퐁 솟는 것이 보였다. 차라리 이렇게 아프면 아프다고 피라도 내었으면 좋을 텐데.

“빈.”

피 냄새를 맡았는지 손을 할짝거리는 짐승을 품에 고쳐 안았다. 자리를 뜨지 못하고 황제의 뒤쪽에서 머뭇거리던 영빈의 표정이 확 구겨지는 것이 재밌으니, 기하는 아마 자신도 그리 훌륭한 인격을 가진 사람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머리가 헝클어졌다.”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온 황제에게서는 희미한 바람 냄새가 났다. 줄곧 함께 달렸는데도 자신과는 다른 냄새에, 기하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러자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리고 곧,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송구…합니다.”

단단한 그의 손이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아주 능숙한 솜씨였다. 머리카락을 한데 묶어 어디선가 꺼낸 긴 천으로 단단히 매듭짓자, 더는 요란하게 바람에 나부끼지 않게 되었다.

이토록 다정하시면서, 이토록 따뜻하시면서. 어찌 그리 무서운 말씀을 아무렇지 않게 하시었나. 도저히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면서, 어째서 그런 잔혹한 말을 하시어 가슴에 못을 박으시나. 이제는 다시, 무엇을 기다리며 버텨야 할까.

뿔나팔 소리가 길게 울렸다. 황제의 환궁을 알리는 소리에 미리 마중 나와 있던 이들이 머리를 숙였다. 말발굽 소리가 잦아들었다. 길게 울음을 내뱉은 말들이 일제히 숨을 내쉬었다.

“내려라.”

황제의 가슴에 기대고 있던 영빈은 퉁퉁 부은 눈을 들어 그를 바라봤다. 차고 냉랭한 얼굴을 마주하자, 다시 가슴이 졸아붙는 것 같았다.

영빈은 일부러 끙끙거리며 금군의 부축을 받아 발을 내디뎠다. 미리 나와 있던 아랫것들은 몸이 불편해 보이는 영빈을 보자마자 화들짝 놀라며 소란을 떨었다.

“마마! 어찌 된 일입니까?”

“괜찮아.”

긴 속눈썹을 아래로 내리깔며 가련한 표정을 짓는 영빈을 바라보는 승지의 얼굴이 사납게 구겨졌다. 저 장단에 그대로 놀아나는 것들도 모두 한패가 분명했다.

“의원을 불러 치료하게 해라. 상처는 깊지 않으니 소란 떨 것 없다.”

황제의 일갈에 상궁 나인이 입을 다물었다. 소란이라면 이미 사냥터에서 충분히 떨고도 남았다. 화살촉이 그대로 와서 박힌 것도 아니고, 어깨에 스친 것에 어찌나 악을 쓰고 울던지. 근방에 있던 짐승들이 그 소리에 놀라 모두 도망을 친 것에 승지는 여러 번 이를 갈았다.

상처가 그리 깊지 않아 약만 잘 바르면 나을 것인데, 죽을병에 걸린 것처럼 울어대는 것이 진절머리 나도록 듣기 싫었다.

꼴에 후궁이라고 그 몸을 다른 이에게 보이지도 못하게 하니, 황제께서 직접 상처를 보시고 말에 태워 환궁하시는 동안엔 그러면 아니 되는 줄 알면서도 멀찌감치 떨어져서 달린 승지였다. 아마 이 일은 후에 분명 추궁을 받을 테다.

“영빈, 정말 미안합니다. 상처에 바르는 효험 좋은 약이 있으니 그것을 보내겠습니다.”

“되었어요. 내 그것이 무슨 약인 줄 알고 함부로 바른단 말입니까? 행여 그 약을 바른다고 해도 이미 생긴 상처가 없어지는 것도 아닌 것을요.”

쌀쌀한 영빈의 말투에 기하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구겼다. 그것은 지극히 사소한 실수였고, 사고였다. 굳이 잘잘못을 따지자면, 혼자서 어물쩍거리고 서 있던 영빈의 잘못이 분명했다.

더욱이 그는, 기하가 활시위를 당기는 것을 보고 여우가 달아난 쪽으로 몸을 틀지 않았던가. 마치 일부러 화살에 맞으려던 사람처럼 말이다.

연호당 궁녀들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기하는 군말 없이 그것을 마주하며 그녀들의 시선을 탓하지 않았다.

“폐하, 신첩은 먼저 물러나겠사옵니다.”

어쩐지 처연하게 들리는 영빈의 음성에 황제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호들갑을 떨어대는 상궁 나인의 부축을 받으며 비틀거리는 걸음을 내딛는 영빈의 뒷모습에 승지는 다시 한 번 코웃음을 쳤다.

기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오랜 시간 고생한 풍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푸드덕거리는 풍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자 상처 난 손바닥이 따끔거렸다.

“태화당에선 어찌 상전의 마중도 나오지 않은 것입니까?”

수신전 앞에는 황제의 사람이 전부였다. 예정보다 늦어진 환궁에 평소라면 으레 나왔을 황후와 다른 후궁들조차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에, 영빈 일행이 자리를 뜨자 넓은 뜰이 다소 썰렁해 보이기까지 했다.

기하를 탓할 의도로 말한 것이 아니었더라도 막 처소로 걸음을 옮기던 황제까지 뒤돌아보게 되었기에, 승지는 민망함에 연신 헛기침을 해댔다.

“소장은 그저… 송구하옵니다, 마마. 소장이 너무 주제넘었습니다.”

물끄러미 승지를 바라보던 기하는 그저 미소하며 그를 향해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황제께서 별일 아니라는 듯 다시 등을 돌리시니, 더는 수신전에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짐을 챙겨 든 금군 두엇이 기하의 뒤를 따랐다. 내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던 황제의 음성도, 경악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영빈의 모습도, 차마 눈을 제대로 감지도 못하고 죽어버린 스라소니의 텅 빈 동공까지도. 어느 것 하나 평안하고 기쁜 것이 없었다.

그것이 앞으로 살아 나가야 할 자신의 삶이라도 되는 것처럼, 무겁고 서럽고 잔인무도한 마음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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