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입맞춤(接吻)
“금룡대장 임승지, 마마께 인사 올립니다.”
절도 있는 음성에, 눈을 느리게 깜박이던 기하는 들고 있던 숟가락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묽게 쑨 미음은 따뜻했지만,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 드신 후에 고할 것을 그랬습니다. 송구합니다.”
“다 먹었으니 괜찮소. 이만 물리게.”
눈을 뜬 순간부터 내내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 낯선 얼굴의 상궁에게 상을 물리라 명하자, 그녀는 스스로 몸을 움직였다. 단단히 무장하고 나타난 임승지는 민망함에 얼굴을 붉혔다. 연신 입술을 달싹이며 기하의 눈치를 살피는 모습은 황실 최고의 검사라는 별칭이 아까울 정도였다.
“폐하께서는 편전(便殿)에서 밀린 정무를 보고 계시옵니다.”
“한데, 그대는 무슨 일로…….”
“그 밤에는 소장이 큰 결례를 범하였사옵니다. 마마께서 그리 계시는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사옵니다.”
이틀을 내리 앓다 겨우 정신을 차린 것은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였다. 일어나 탕약을 마시고, 낯선 상궁의 수발을 받아 미음을 몇 숟가락 넘겼다. 오른팔의 상처가 욱신거렸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어찌 된 일인지 궁금했다. 어째서 현 상궁이 아니라 이름 모를 사람들이 이곳을 지키고 있는 것인지, 그날 밤 찬물 속에 처박힌 후에 어찌 되었는지.
“마마께서 잘못되시는 줄 알고 소장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모르옵니다. 당연히 금세 물 위로 올라오실 줄 알았사온데…….”
“어릴 적에 물에 빠진 적이 있어 물을 무서워합니다.”
어쩐지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기하는 제 뺨을 문질렀다. 추한 꼴을 보였구나. 어쩌다 보니 운이 나빴을 뿐이지, 그 밤에 벌어진 일은 그의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황제의 충복으로 당연한 일을 한 그가 이리 사죄를 하는 것에 마음이 편치 않아 기하는 가볍게 손을 저었다.
“송구하옵니다, 마마. 자칫 큰일이 일어날 뻔하였습니다. 다시 한 번 소장의 무례를 사죄드립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대는 그대의 소임을 다한 것뿐인데 어찌 용서를 구하는 것이오? 폐하를 지키는 일은 당연한 그대의 소임이니 괘념치 마세요.”
“마마의 자비로움은 소장 마음에 잘 새겨 두겠사옵니다.”
한쪽 무릎을 세워 꿇은 상태로 기하를 올려다보던 승지는 그제야 빙긋이 미소하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을 받았다. 오랜 시간, 죽은 사람처럼 도통 정신을 차리지 못해 한 차례 궁이 발칵 뒤집혔다는 것은 알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듣자니 천성이 밝고 다정한 사내라 하였지.
“폐하께서도 걱정을 많이 하셨습니다.”
“…내 걱정을?”
“폐하께서 오시면 꼭 감사의 인사를 올리셔야 하옵니다.”
“응? 그건 무슨 말이오?”
“못 들으셨사옵니까? 폐하께서 친히 마마께 숨을 불어넣으셨사옵니다. 소장이 마마를 모시려 했사온데, 굳이 직접 안으시고 이곳까지 오셨지요. 걸음이 어찌나 빠르시던지, 뒤따르던 상궁 나인들이 나자빠질 정도였사옵니다.”
기하는 가감 없는 표정으로 유쾌하게 웃고 떠드는 승지를 멍하게 바라보다 얼굴을 붉혔다. 그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커서 바깥에 있는 이들에게 모두 들릴 것 같았지만, 무엇보다 가슴이 두근거려 도무지 진정할 수가 없었다.
“폐하께서 직접?”
“모르셨사옵니까? 밤새 마마를 지키신 것도 폐하이십니다. 뜬눈으로 곁을 지키시곤 조강에 바로 참석하시었지요. 어제는 내내 마마의 안부를 챙기셨사옵니다.”
“아…….”
발그레 뺨을 물들이는 기하의 얼굴에 승지는 활짝 웃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잔뜩 기죽은 강아지처럼 축 늘어져 있던 얼굴이 밝아지니, 마치 먼 유학길에 올라 있는 제 아우 같다는 불경한 생각이 들었다.
“환부에 약도 잘 바르시고, 탕약도 잘 드셔야 합니다. 얼른 자리를 털고 일어나십시오.”
“고맙소.”
“하면, 소장은 이만 가보겠사옵니다.”
“바쁠 터인데 이리 직접 와준 것 또한…….”
“황제 폐하 납시오.”
두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지게 웃던 기하의 표정이 삽시간에 변했다. 꿈을 꾸는 사람처럼 몽롱해진 얼굴이 더할 나위 없이 붉어졌다.
아직 기력이 없는 탓에 제대로 움직이지 않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크게 휘청거렸다. 순간적으로 기하를 향해 손을 뻗던 임승지가 움찔 놀랄 때, 문이 벌컥 열렸다.
성큼성큼 들어오던 황제의 발이 멈춘 것도 그즈음이었다. 그는 물끄러미 두 사람을 바라보다 왼쪽 입꼬리를 비죽하게 끌어 올렸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던 승지가 황제를 향해 몸을 낮추었다.
“그 꼴은 뭐냐.”
“신, 금룡대장 임승지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둘이 언제 그리 가까워졌더냐?”
스스럼없이 침상 앞까지 걸어온 황제를 향해 기하가 막 절을 올리려 할 때였다. 그는 손을 가볍게 휘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다 죽어가는 꼴로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꼴이 마뜩잖았다.
“마마께서 급히 일어나시다 빈혈을 일으키신 것 같아 그만…….”
“쓸데없는 짓거리 하지 말고 가만히 누워, 주는 것이나 잘 받아먹어라.”
쯧쯧, 혀를 차는 것 또한 잊지 않고 퉁명스럽게 내뱉는 황제의 말에도 기하는 말갛게 미소했다. 비록 예전처럼 다정한 말을 해주시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 성정은 변하지 않으신 것 같다는 생각에 가슴 한쪽이 뜨듯해졌다.
“하면, 소장은 나가 있겠사옵니다.”
흐뭇하게 웃으며 예를 올리는 승지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던 황제는 싸늘하게 굳어진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저 미친놈은 왜 저렇게 실실대는 것이냐?”
“예?”
정신을 놓고 있기는 이놈이나 저놈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열이 오른 얼굴로 멍하게 눈을 깜박이는 기하를 쳐다보던 황제가 가볍게 혀를 차며 침상에 걸터앉았다.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 기껏 시간을 내어 찾아왔더니, 아직도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멍청한 얼굴로 옷고름을 붙잡고 있는 꼴이라니.
“저… 폐하.”
“뭐냐.”
“소인의 목숨을 살려주셨다 들었사옵니다.”
이건 또 무슨 헛소린가. 살려주긴 뭘 살려줘?
“밤새 소인의 곁에 있어 주시었다는 것도 들었사옵니다.”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서 아예 몸을 틀어 쳐다보자, 천을 배배 꼬면서 얼굴을 붉히는 꼴이 황당했다. 대체 북성에는 죄 머리가 없는 천치들만 있단 말인가. 이런 순진해 빠진 얼굴로 제멋대로 지껄이는 놈을 총아라 칭하다니. 머저리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면, 서연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칭송을 늘어놓는 간사한 것들뿐이리라.
“소인은 폐하의 그런 깊은 성심을 헤아리지 못하고, 잠시나마 폐하께서 소인을 못마땅히 여기신다는 생각에 밤낮없이 괴로웠나이다.”
“금룡대장이 뭐라 이르더냐.”
“폐하께서 소인을 친히 구하여 주셨다고……. 아니옵니까?”
아닌 것도 같고 맞는 것도 같다. 별생각 없이 행했던 일에 지나치게 의미 부여를 하는 것은 맞으나, 의도가 어찌 되었건 그리한 것은 맞다.
하여 별달리 해명하지 않으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의미 깊은 미소를 짓는다. 두 눈을 새치름하게 내리깔고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볼을 붉게 물들이는 것이 그다지 못나 보이지는 않았기에, 황제는 대답 대신 기하의 팔을 붙잡았다. 환부에 아무리 약을 발라도 쉬이 아물지 않아 그 때문에 몇 번이나 신열이 일었던 것이 떠올랐다.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고 상처나 잘 돌봐라.”
“예, 폐하.”
“혹, 금룡대장이 와서 무슨 말을 해도 죄다 헛소리니 귀담아듣지 말고.”
“조금 전에는 헛소리가 아니었지 않습니까? 그는 폐하께 충심이 강해 보였습니다. 쉬이 허튼소리를 하여 폐하께 누가 되는 일은 하지 않을 것…….”
“그놈을 언제 봤다고 편을 들고 나서?”
보나 마나 쓸데없는 소리를 잔뜩 지껄이고 사라졌을 승지의 웃는 얼굴을 떠올리며, 황제는 주먹을 바르르 떨었다. 당장에 불러다 곤죽을 만들어 놓을까 생각하다가 머리가 무거워지는 탓에 고개를 휘휘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가시옵니까?”
“하면, 내 여기 종일 뭉개고 있으란 말이냐?”
“그런 것은 아니옵고, 그래도 차라도 한잔…….”
“일없다.”
금세 시무룩해지는 기하의 얼굴을 외면하고 돌아서던 황제가 문득 발을 멈췄다.
“몸도 성치 않은 이가 있는 곳이 어찌 이리 추우냐. 이러다 없던 병도 생기겠다.”
“방이 너무 더워 숨이 막혀 온도를 좀 내리라 하였습니다.”
“네가 의원이냐? 얌전히 해주는 대로 있어. 괜히 쓸데없이 병이나 키우지 말고.”
어차피 사소한 것이니 지금 당장 물어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겠지. 다 죽어가는 얼굴로 볼을 붉히는 꼴을 더는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발을 돌린 황제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기하의 침전을 빠져나왔다.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승지의 웃는 얼굴을 보자마자 그의 정강이를 힘껏 걷어차니, 소리도 내지 못하고 펄펄 뛰는 꼴이 꽁지에 불붙은 개 같았다.
“한 번만 더 허튼소릴 지껄이고 다닌다면 아예 그 주둥이를 뭉개주마.”
“폐하, 어찌 이러십니까. 소장이 뭘 잘못했습니까?”
“아직도 나불거릴 힘이 남아 있어?”
“너무하십니다.”
“시끄러우니 그 입 다물고 따라. 계속 떠들면 흠씬 두들겨 황실 사냥터에 묶어둘 터이니.”
입이 댓 발이나 나온 승지를 외면하며 걸어 나가는 황제의 뒤로 상궁 나인이 줄줄이 따랐다. 점점이 멀어져 가는 황제의 행렬을 멀찍이서 바라보는 누군가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빛났다.
* * *
종일 보이지 않던 현 상궁은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창백해진 낯빛은 중병을 얻은 이처럼 파리했다. 그것은 어린 노비 또한 마찬가지였다. 낯선 나인에게 소현과 연금을 불러오라 명하자, 아이들은 잔뜩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어대면서 고개를 조아렸다.
그제야 기하는 자신이 황제의 성은에 행복해하고 있을 때, 현 상궁과 어린 노비들은 상전을 제대로 모시지 못 했다는 이유로 문초를 당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불어 그녀들 외에 태화당을 오가는 이들이 부쩍 많아졌다는 것 또한.
“젓수시기 수월할 정도로 식었사옵니다. 천천히 드시지요.”
현 상궁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기하 또한 마찬가지였다. 더는 물을 말도, 내릴 명도 없었다. 자신의 부주의로 아랫사람들이 문초를 당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수행을 게을리하거나, 학업에 정진하지 않고 꾀를 부릴 때면 저 대신 노비가 매를 맞고는 했다.
미안함을 느꼈으나 죄책감까지는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그들이 부여받은 삶이라 생각했으니까.
사발을 내밀고 입을 헹구자, 보기만 해도 달 것 같은 당과가 내어졌다. 조그마한 당과 하나를 입에 넣고 오물거리자, 현 상궁 곁에 서 있던 나인이 그릇을 내갔다.
수발을 드는 이들이 늘었다. 못 보던 물건 또한 늘어났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전보다 더 고요하고 적막한 기분이 들었다.
“누우시겠습니까?”
“되었네. 내 알아서 할 테니 자네 할 일을 하게.”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나붓이 절을 올렸다. 조용히 물러서는 그녀의 발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하는 무릎 위에 놓인 서책을 펼치지도 못하고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며칠 누워 있었더니 몸이 무거웠다. 별것도 아닌데 의원은 상처가 남을지도 모른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가 아침저녁으로 찾아와 연고를 바르고 약을 지어 올리는 통에 중병이라도 걸린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것보다 더 큰 상처도 몸에 남아 있거늘, 아마 그런 말을 하면 더 큰 소란을 떨 것 같아 도저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하긴, 후궁의 몸에 이런 상처가 남아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큰일이었다. 애초에 그런 상처를 가진 자는 후궁의 자리조차 오르지 못하는 것이 법도가 아니던가.
“마마, 금룡대장 들었사옵니다.”
“안으로 모시게.”
금룡대장 임승지는 그 일 이후, 두 번이나 태화당을 방문했다. 본디 황제의 호위를 담당하는 금룡대장이 후궁의 처소에 걸음 하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하나 그런 것에 무딘 것인지 아니면 특별히 법도에 제재받지 않는 사람인지 누구도 막아서는 법이 없으니, 기하에게는 퍽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소장 임승지, 마마께 문안 올립니다.”
“어서 오세요.”
이제는 제법 친숙해진 얼굴이라 기하는 무릎 위에 올려두었던 서책을 내려놓으며 빙긋이 미소했다. 걱정을 너무 많이 하여 아직 침상을 벗어나지 못하였기에, 임승지를 따라 들어온 나인이 기하의 어깨 위로 포(袍)를 둘렀다.
“금일은 모처럼 해가 쨍쨍하여 날이 아주 따뜻하옵니다. 차도는 좀 있으십니까?”
“병을 얻은 것도 아닌 것을요. 이 정도 상처는 아무것도 아닌데 다들 괜한 걱정입니다. 날이 따뜻하다 하니 후원에라도 나가 보고 싶습니다.”
“아직은 아니 됩니다. 의원의 말로는 미약하나마 고뿔 증상이 있다 하였습니다. 꾸준히 탕약을 드시고 조금 답답하시더라도 찬바람은 쐬지 마십시오.”
호탕한 미소를 짓는 임승지는 유쾌한 사내였다. 가감 없이 제 생각을 주장하고, 황제 폐하께도 겁 없이 달려드는 것으로 유명한 그는 남녀노소 불문하고 황실 사람들에게 인기가 무척 높았다. 특히 나이 어린 궁녀들에게 은근한 추파를 연달아 받을 만큼.
“폐하께서는 삼환국에서 온 사자(使者)의 알현을 받고 계십니다.”
“삼환국이요?”
삼환국이라면 북성에서도 한참 떨어진 약소국이었다. 병력도 약하고 땅조차 기름지지 못하지만, 소금 광산과 지하 광물이 풍부해 그것을 업으로 여기는 작은 나라였다.
어마어마한 양의 소금과 광물을 제국에 바치며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을 때마다 북성에 도움을 청하곤 하였기에, 기하도 몇 번 가본 적 있는 곳이었다.
“폐하께서 모두 물리시어 무슨 목적인지는 알 수 없사옵니다. 근 20여 일을 달려왔다더니 사자의 꼴이 볼 만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삼환국의 왕자가 직접 왔사온데…….”
슬그머니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승지가 한 걸음 더 가까이 기하를 향해 다가왔다. 그는 품을 뒤적거리다 자그마한 함을 보이며 슬며시 웃었다.
“무엇입니까?”
“사신 중 한 사람이 마마께 갚을 은혜가 있다며 소장에게 이것을 전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직접 뵙지 못하는 것을 몹시 안타까워하며, 혼례 축하 선물이라고 하였사온데…….”
상자만 해도 상당히 값어치가 나가 보였다. 온갖 화려한 광물로 장식되어 있는 함을 받아 든 기하는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들에게 딱히 개인적으로 도움을 준 일은 없는데 이것이 어찌 된 일인지.
“이야, 이것이 다 보석입니까?”
반짝이는 단검은 오색 광물이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가볍지도 않고 손에 쥐기도 어려운 것을 보니 그저 장식용인 것 같아서, 기하는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검을 꺼냈다.
“이런 정밀한 세공은 소장 처음 봅니다.”
“나 또한 마찬가지요. 한데, 이런 귀한 것을 받아도 될지…….”
“받을 만하시니 올리는 것이겠지요. 말이 나왔으니 한 말씀 더 올리겠습니다. 본래 이 태화당이 넘치도록 축하 선물이 가득 차는 것이 맞사온데, 어찌 대신들이나 다른 후궁전에서는 소식이 없습니까? 기껏 황후마마께서 내리신 재물과 노비 또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을 폐하께서 아시고 몹시 언짢아하셨습니다. 물론 폐하께서도 딱히 마마께 하사품을 내리시진 않으셨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하실 말씀은 없으시지요.”
“재물이 있다 한들 달리 쓸데도 없습니다. 딱히 그것을 서운하게 생각하지도 않고요.”
고요히 중얼거리면서도 검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기하는 승지의 끈질긴 시선에 배시시 웃음을 흘렸다.
“이리 말해야 어질고 현명하다 칭찬받을 거라 하시었는데…….”
“예?”
“형수님께서요. 그리해야 아랫사람에게 존경받고, 부군께 귀한 대접받는다고요. 그렇지만 역시, 이 검은 아름답습니다. 그대로 돌려주기는 조금 아까운걸요.”
심술궂은 표정을 지으며 한참 웃던 기하는 가만히 검집을 만지다가, 그것을 조심스럽게 함 안에 넣었다. 뚜껑이 무겁게 닫히고 나서야 기하와 눈을 마주친 승지는 그제야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수습했다.
“어찌…….”
“이유를 모르고 이런 귀한 것을 받을 수는 없지요. 세상에 의미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받고 싶지 않습니다.”
“마마, 하지만…….”
“그대가 곤란하다면 현 상궁을 통해 돌려보낼 테니, 혹 연유를 물으면 너무 과한 것이라 받을 수 없다고 전해주세요.”
“분명 과한 것은 맞사오나 마마께 과함은 아닙니다. 마마께서 이 정도 폐물(幣物 : 선사하는 물건)을 과하다 여기시다니요.”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듯 단호하게 말하는 승지를 향해 기하는 그저 빙긋이 미소했다.
“마음만은 따뜻하게 받겠다고, 전해주시겠소?”
그 미소가 퍽 따뜻했다. 만개한 꽃과 같은, 그윽한 향내가 폴폴 날 것 같은 기하의 표정에 임승지는 끝끝내 고개를 끄덕이고야 말았다.
“참으로 이상한 분이란 말이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무릎 위로 턱을 괸 승지가 중얼거리자, 함께 번을 서고 있던 부하가 머리를 내밀었다.
“뭐가 말입니까?”
“솔직하신 것 같으면서도 다시 생각하면 지나치게 배포가 큰 것 같고, 양갓집 규수 같으면서도 사내대장부 같으니…….”
“대장.”
“엉?”
“혹시 지난밤에 자신 술이 덜 깨신 것입니까?”
“뭐야, 이놈아?”
“자꾸 그리 술만 드시면 폐하께서 경을 치신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얼른 냉수라도 드시고 술 좀 깨십시오. 그러다가 또 폐하께 야단맞으십니다.”
복면 속에 숨겨진 얼굴로 천연덕스럽게 중얼거리는 부하 놈에게 냅다 발길질하던 승지는 안에 들어가 있던 상시(常侍) 영감의 기척에 꼿꼿하게 허리를 세웠다.
뱀 같은 늙은이가 또 무슨 말로 황제의 속을 뒤집어 놨을지 빤했다. 몇 달간 자리보전하고 누웠기에 이번에야말로 그대로 세상 뜨는 것이 아닌가 하였더니, 또 뻘뻘대며 돌아다니는 꼴이 잔뜩 독이 오른 독사 같다.
“승지, 자네 오래간만이구먼.”
“예, 영감. 한 계절이 다 갔지요.”
“폐하께서 찾으시니 어서 들어가 보시게. 안부는 차차 나눔세.”
소리 내지 않고 웃으며 돌아서는 상선을 쳐다보던 승지가 휙 하고 고개를 돌렸다. 기분 나쁜 늙은이 같으니.
“폐하, 찾아계시옵니까.”
“밀정(密偵) 나가 있는 이들에게 앞으로는 이틀마다 보고하라 일러.”
“예, 폐하. 한데 삼환국 사신들은 언제까지 황궁에 머무는 것이옵니까?”
“다시 먼 길을 떠나야 하니 여독은 풀어야 할 터, 하루 이틀 더 보내게 될 거다. 어찌 그러느냐.”
“아니 뭐, 다른 것은 아니옵고. 그리 안 봤는데 삼환국 사람들이 은혜를 깊이 새기는 듯합니다. 하기야 그 먼 곳에서도 나라의 중차대한 일이 있을 때마다 꼬박꼬박 사신을 보내고, 폐하께도 귀한 물건을 진상하지 않았습니까? 특히 올해는 삼환에서 난 광물이 그리 좋다 하던데…….”
“탐나는 것이라도 있더냐.”
피식 웃으며 교지를 뒤집은 황제가 비스듬하게 몸을 뉘었다. 상시 영감과 한 식경이 넘도록 말을 나누었더니 눈가가 뻑뻑하고 뒷목이 저릿했다. 교활한 늙은 여우 같으니. 입에 독을 바른 것처럼 어찌나 나불대던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아내느라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소장에게 그런 패물(佩物)이 뭐가 필요하겠습니다. 다만 품질 좋은 것이 있으면 괜히 고(庫)에 집어넣어 두지 마시고, 선물도 좀 하시고 그러시옵소서.”
“선물? 무슨 선물.”
“혼례를 올리셨으면 가락지라도 끼워 주셔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폐하께서야 이번이 몇 번째인지도 모를 혼례를 올리신 것이나, 무빈께서는 열여덟에 이 먼 제국까지 사내의 몸으로 시집오신 것이 아니십니까.”
“네놈이 하다 하다 이젠 약을 처먹은 게냐?”
“폐하, 옛말에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했습니다. 하물며 그 죄는 무빈께서 직접 지으신 것도 아니시거늘 어찌 그리 냉정하게 구십니까? 무빈께서는 폐하만 뵈면 금세 얼굴이 붉어지시어 연정에 빠진 처자처럼…….”
“시끄럽다 하지 않았어!”
기어이 들고 있던 교지를 바닥으로 내팽개친 황제가 싸늘하게 일갈했다.
“어디서 그딴 말 같지도 않은 소릴 지껄여?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마라? 그것이 미워한다는 말로 가려질 수 있더냐? 역모의 죄를 짓고도 선황께 받은 약조의 징표를 빌미 삼아 교묘하게 빠져나간 것들이다. 언제 다시 내 뒤통수를 칠지 모르는 서연 그자가 어떻게 돌변하여 제 아들놈에게 사주할지, 네 정녕 몰라서 그딴 소리를 지껄여?”
“그런 분으로는 보이지 않았사옵니다. 폐하께서도 아시지 않으십니까.”
황제는 대답 대신 켜켜이 쌓인 상소문 중 하나를 펼쳤다. 물끄러미 자신을 올려다보는 승지의 시선 따위는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치부하면서.
이놈이나 저놈이나 대체 왜 이리 무빈, 무빈. 조금 전까지 내내 자신을 괴롭히던 상시 영감 또한 무빈의 처우에 대한 것을 사사건건 간섭하려 들지 않았던가. 그 노망난 영감은 분명 서연과 긴밀한 사이임이 틀림없으리라.
“폐하께 해를 끼칠 분이 아니옵니다.”
“제 아비를 배신할 놈도 아니지.”
바라보면 애틋한 기분에 휩싸이는 것은 사실이었다. 희미하긴 하지만, 어릴 적 단 한 번 방문하였던 북성이 좋은 느낌으로 남아 있는 것 또한 그 아이 때문이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제게 충성을 맹세하였던 앳된 얼굴이 너무도 천진하여, 그곳에 머무는 내내 곁에 두었었지. 또래 아이들보다 작고 어려 보여, 체온을 나누듯 내내 품에 안고 다녔던 기억만은 선명했다. 이미 걷어내 버린, 아무 힘도 없는 추억일 뿐이지만.
“무빈의 서찰에선 별다른 것이 없더냐.”
“예. 그저 북왕과 세자의 안부를 묻는 것뿐입니다. 더불어…….”
황제의 의문스러운 시선에 승지는 멀건 표정으로 제 볼을 긁적였다. 황제의 커다란 눈이 사납게 찌푸려졌다. 아무래도 상시 영감과 너무 오래 말씀을 나누시어 기분이 나빠진 것이라 생각한 승지는 크흠 하고 작게 헛기침을 뱉었다.
“대부분은 폐하의 은혜에 대한 찬양이옵니다. 아마 북왕이 그 말을 전부 믿는다면 황후마마보다 더한 호사를 누린다고 기꺼워할 것 같사옵니다.”
“서연이 심어둔 밀정이 누구인지, 뒤를 캐라.”
“예, 폐하.”
황제의 무거운 음성이 금룡전을 울렸다.
* * *
생각해 보면 괴이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황좌에 오르기 전부터 그는 자신의 감정을 까맣게 태웠다. 그것은 필수 불가결한 일이었다.
원해서 얻은 자리가 아니었기에 지키는 것이 더욱 고되었다. 아직도 매일 밤 살려달라고 손짓하는 이들의 울음소리에 편히 잠들지 못하고 있으니, 삶의 무게 또한 만만치 않았다.
만인지상의 자리의 올랐으나 기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감정의 부유물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데, 저 눈만 보고 있으면 괜한 짜증이 솟았다.
“뭘 그리 쳐다보느냐?”
황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얼른 고개를 돌린 기하는 붉어진 제 뺨을 문지르며 배시시 미소했다. 일찌감치 상을 물렸다기에 차를 내오라 일렀더니, 어디서 궁녀들도 먹지 않을 싸구려 찻잎을 우린 것인지 쓰고 떫은맛에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반 토막 난 찻잔을 치우고 어디론가 부리나케 달려간 지밀상궁이 다시 내어온 찻잔으로 겨우 목을 축이려니, 이번에는 이놈의 끈질긴 시선 때문에 부아가 치밀었다.
“아니옵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맹꽁이 같은 얼굴로 뭘 그리 훔쳐봐? 사내놈이 기백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보려야 볼 수가 없으니, 내 너만 보면 속에서 천불이 난다.”
웃고 있던 기하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그렇잖아도 종일 방 안에 처박혀서 뒹굴거리느라 통통하게 살이 차오른 얼굴은 이전보다 조금 더 어려 보였다.
손을 꼼지락거리는 꼴을 보니 장수는 무슨, 마음이 더없이 싸늘하게 식었다. 저 꼴을 보고 있으면 칼을 휘두르던 놈들도 어이가 없어 혀를 차며 놓아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또 왜 그리 얼굴을 찌푸려?”
“아무리 소인이 미우셔도 어찌 맹꽁이라 하십니까. 맹꽁이가 얼마나 못났는데요.”
“내 설마 맹꽁이가 어찌 생겼는지도 모르고 네게 맹꽁이라 했을까. 시끄럽다. 또박또박 대거리하는 꼴하고는.”
잔뜩 기가 죽어 어깨를 축 늘어뜨리다가 반쯤 식은 찻잔을 들어 목을 축이던 기하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혀를 내밀었다. 뜨겁지는 않은 것 같은데 또 어찌 저렇게 오두방정인가 싶어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니, 약차 특유의 씁쓸한 맛이 싫었던지 다른 것을 입에 넣을까 하다 눈이 마주쳤다.
“싸구려 찻잎은 아무렇지도 않게 잘도 마시더니, 어찌 귀한 건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해?”
“하지만, 이것은 지나치게 씁니다. 아무리 몸에 좋은 것이라고 해도 입에 맞지 않으면…….”
“또, 또, 말대답. 법도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이 말대답하는 것만 배웠더냐? 북성의 계집들은 다 너 같으냐?”
“소인은 계집이 아니지 않사옵니까. 또한, 북성의 낭군들은 제 여인에게 이리 박대하진 않습니다.”
입은 뚱하니 내밀고 눈은 세모꼴로 뜬 채로 제 할 말을 다 하고는, 그제야 움츠리는 꼴이 화를 불러일으킨다. 저것이 약을 처먹었나, 어찌 이리 방자하게 구나 싶어 다시 입을 열려던 황제는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다시 입을 열어봤자 또 대거리나 하려 들겠지.
“폐하.”
괜히 쓸데없이 예까지 왔다. 승지 그놈 말대로 그대로 명색이 빈의 첩지를 내리고 아무것도 하사하지 않았던 것이 마음 쓰여 하사품을 내리려 직접 걸음 하였건만.
아무리 궁금한 것이 있어도 먼저 입을 떼는 법이 없는 황실 여인들과 다른 방자한 태도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초야에 그리 험한 꼴을 당하고서도 끈끈한 눈빛을 거두지 않았을 때부터 알아보았지.
“폐하.”
“시끄럽다.”
“다음 사냥에는 소인도 데려가 주시면 아니 됩니까?”
“아무나 들락거리는 곳이 아니다.”
“영빈은 데려가신다고 하던데. 소인도 활은 잘 쏩니다.”
이것은 방자한 것인가, 미련한 것인가. 도무지 그 속을 알 수 없어서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금세 또 얼굴을 붉히며 눈을 피한다.
낮은 한숨을 내쉬던 황제가 손을 뻗었다. 단정하게 굽히고 있던 무릎을 붙잡아 쓱 끌어당기자 별다른 저항 없이 딸려오는 몸뚱이에서는 흔한 분 냄새조차 나지 않았다.
“북성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이냐.”
“예?”
“귀까지 먹었느냐.”
“그, 그야 당연히 먹을 것입니다. 농작물의 반절은 항상 얼어 죽으니까요.”
“쌀과 보리, 수수와 기장, 조를 섞어 5000석을 보내마.”
“예? 5000… 5000석이면…….”
5000석이면 북성의 백성들이 석 달은 굶지 않고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양이었다. 겨울이면 어린아이와 노인들이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얼어 죽는 일이 태반이라, 북성의 백성들은 한겨울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집 안에 틀어박혀 추위를 피해야 했다.
“폐하, 성은이 망극…….”
“혼례에 대한 답례품이니 그리 놀랄 필요 없다. 너도, 나도 마음의 짐이 있는 채로 이리 지내는 것은 옳지 않은 일 아니냐.”
줄 것은 주어야, 받을 것을 제대로 받을 수 있음이니.
발그레 얼굴을 붉히며 해사하게 웃은 기하가 슬그머니 상체를 숙였다. 천천히 손을 내밀어 조심스럽게 황제의 두 손을 붙잡고 손등에 입을 맞추는 어깨가 발발 떨렸다.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그것을 관망하던 황제가 기하의 턱을 손끝에 쥐고 고개를 들게 했다.
“폐하?”
“답례는 늘 확실하게 해야 한단다.”
뜨끈하게 열이 오른 양쪽 뺨을 붙잡은 커다란 손이 망설임 없이 그를 끌어당겼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뜨겁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불쑥 들어왔다. 심장이 어찌나 빨리 뛰는지 그대로 얼어붙은 손끝이 발발 떨렸다.
섬세한 손끝이 기하의 뺨을 더듬었다. 눈도 제대로 감지 못하고 숨을 참던 기하의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훑으며 황제는 농밀하게 혀를 휘감았다. 미지근한 타액이 섞였다. 단맛이 나는 것 같기도 했고, 신맛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으, 흐음…….”
목울대가 떨렸다. 갸르릉, 하는 소리를 내는 기하는 꼭 어미 잃은 어린 짐승처럼 애처롭게 몸을 떨었다. 황제는 기하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씹었다. 아픔과 쾌락의 모호한 경계 속에서 그는 무기력하게 신음하며 황제의 어깨를 붙잡았다. 미련한 손끝이었다.
유순하게 떨리는 속눈썹을 손가락 끝으로 쓰다듬자, 힘없는 몸뚱이가 서서히 허물어졌다. 황제는 기하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제대로 여물지 않은 어린 몸뚱이는 계집의 낭창낭창함과는 거리가 멀어도 적당히 흥을 돋웠다.
“폐, 흣…….”
아무것도 모르고 허둥거리는 꼴이 우스웠다. 그런데도 불쾌하지는 않았다. 색이 진하지는 않은, 얇은 입술이 번들거렸다.
황제의 입가에 스치듯 미소가 드리웠다.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침상에 납죽 엎드려 있는 기하를 바라보는 현 상궁의 얼굴에 걱정이 스며들었다. 어쩐 일로 태화당을 찾으신 황제께서 또 모진 구박이라도 하신 것일 테지.
절로 터지는 한숨을 참으며, 어깨 위로 기수를 둘둘 감고 있는 기하를 현 상궁은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린 왕자님께서 그나마 밝은 성정이시라 다행이지.
“마마.”
“응?”
“요기하실 다른 걸 좀 내올까요?”
“아니, 아니. 괜찮네. 난 신경 쓸 것 없으니 자네는 그냥 자네 일 보면 돼.”
손을 휘휘 저으면서 얼굴은 보여주지 않는 기하의 머리꼭지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현 상궁이 이내 몸을 돌렸다. 지나친 감정은 여러모로 좋지 않으니, 그만 신경을 끄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면, 소인은 이만 물러나 있겠사옵니다. 하명하실 일이 있으시면 부르시옵소서.”
“응.”
현 상궁의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게 되자, 기하는 그제야 몸을 바로 일으켰다. 뒤집어쓰고 있던 기수를 툭 떨어트리니 서늘한 공기가 어깨에 내려앉는다.
뭉툭하고 거친 손가락을 들어 입술을 더듬었다. 아직도 적당히 부풀어 있는 곳을 누르자, 예민해진 감각에 목 뒤가 찌르르 울렸다. 두근두근 심장 뛰는 소리가 제 귀에까지 들릴 것만 같다.
달콤한 살덩이가 입안을 마구 헤집어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어 끙끙 앓는 소리를 냈었지. 번들거리는 타액을 손가락으로 문질러 닦아주며 빙긋이 웃던 황제의 얼굴을 떠올리며 기하는 다시금 침상 위로 몸을 엎드렸다.
“아… 이것 참.”
너무도 황홀하고 뜨거운 시간의 끝에는 지나친 민망함이 따랐다. 다리가 절로 풀려 휘청거리자 능숙하게 품에 안아주시던 황제께서는 은근히 열이 몰린 가랑이 사이를 무릎으로 꾹꾹 누르셨으니, 분명 그건 비웃음이었던 것 같다. 창피해. 색을 밝히는 것으로 오해하시면 아니 되는데.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것은 초야 때도 하지 않았던 접문(接吻 : 입맞춤)이 아니던가. 폐하께서 무슨 생각으로 친히 다정하게 입을 맞춰주셨는지는 모르나, 어설프고 허둥지둥하는 꼴에 실망하셨음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접문을 끝내시자마자 그리 냉랭한 표정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실 리는 없으니.
하면, 연습해야 하는 것인가? 그런 것은 도대체 어찌 할 수 있는 것일까. 아마 폐하께서는 수많은 여인을 품에 안고 계시니 그리 능숙하신 것일 테지만……. 아, 괜히 생각하였다. 금세 우울해졌어.
“현 상궁.”
풀이 죽은 기하가 현 상궁을 찾았다. 대답 대신 재빨리 안으로 들어온 그녀는 시들시들 말라가는 기하의 얼굴에 놀라, 시키지도 않았는데 가까이 다가왔다.
“어디 미령하십니까? 또 신열이 나시는 것입니까? 의원을 부를까요?”
“일찍 침수 들어야겠어.”
“이제 막 술시(戌時 : 오후 7시부터 9시 사이)가 지났사옵니다.”
“곤하여 그래.”
“온욕이라도 하시겠사옵니까?”
“아니. 그냥 자려네.”
지나치게 쾌활하여 웃음이 끊이지 않던 기하는 취영루(取榮樓) 아래로 떨어진 이후, 무표정하게 앉아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다. 의원의 말로는 별다른 내상은 없어 보인다는데 먹는 것도 시원찮고, 자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새로 배정받은 나인들에게 명하여 침수들 자리를 보게 하자, 그는 그대로 기수 위에 몸을 웅크렸다. 이전보다 훨씬 몸에 좋은 것들만 진상해 얼굴빛은 좋아지면서, 몸은 점점 말라가는 것이 뭔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히 쉬십시오.”
“응. 내일 보세.”
방 안의 불을 모두 끄자, 주위는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기하는 고운 비단에 화려한 수가 놓인 따뜻한 기수를 어깨 위까지 끌어 올렸다. 지금쯤 폐하께서는 또 어느 전으로 가시어 누구와 함께 계실까.
여인들에게는 다정하시려나. 못났다 타박하시지도 않으시겠지. 어차피 모실 시부모님이 계신 것도 아니고, 아들도 낳지 못하는 불모지의 몸이니 다른 것이라도 잘 지켜야 할 텐데.
칠거지악(七去之惡) 중에서도 투기(妬忌)는 반드시 품어서는 안 될 마음이라 형수님께서도 몇 번이나 신신당부하셨건만. 괴롭다. 사모하는 마음은 이리도 괴로운 것이구나. 그리 달콤하게 입을 맞춰 주시었거늘. 이제는 또 혼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