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관심(關心)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이제 겨울의 초입이라는 제국의 날씨는 그저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부는 정도였다. 온화한 기후 탓에 제국민은 그마저도 못 견뎌 하는 것 같았지만.
때문에 해가 뜨기 전 후원으로 나가 검술 연습을 하려던 기하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현 상궁은 무척 엄했고, 어쩐지 그녀 앞에만 서면 어린아이가 되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검술 연습은 낮것을 들기 전, 해가 쨍쨍 내리쬘 때만 가능했다. 가능한 한 식사 후 소화도 시킬 겸 오후 내내 뛰고 싶었지만, 현 상궁은 밀린 일정이 많다는 이유로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다. 밀린 일정이라고 해봤자 그녀와 마주 보고 앉아 서책을 읽거나 수놓기 연습을 하는 것뿐이었는데도.
“마마.”
한창 연습할 시간에는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머리를 질끈 묶고 둔해진 몸을 움직이는 순간 날아든 목소리에 기하는 흐트러진 기운을 바로 했다. 역시나 몸이 너무 무거워져 칼끝이 둔탁했다.
“무슨, 헉, 일이지?”
“황후마마께서 곧 당도하실 것입니다.”
“황후께서? 이곳에?”
“함께 수라를 드시자 하십니다.”
기하는 엄중한 얼굴로 조아리는 현 상궁에게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얼굴을 찌푸렸다. 어쩐 일이시지. 입궁한 다음 날 이후로 아예 관심을 끊으신 줄 알았던 황후께서. 그것도 수라를 같이 들자 하시니, 거절할 명분도 없었다. 개운치 못한 감정을 추스르며 마주 볼 용기가 아직은 없거늘.
“마마.”
“알겠다고 고해.”
“채비하셔야지요.”
“무슨 채비 말인가?”
“그리 땀범벅이 되셔서 황후마마를 맞으실 것이옵니까? 어서 오시지요. 씻으실 물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정말로 귀찮은 일이다. 마주 앉아 수라를 드는 것 또한 그렇지만, 그것을 위해 다시 단장해야 한다니. 이럴 줄 알았더라면 애초에 수련을 미룰 것을. 괜히 씻을 물을 데우느라 현 상궁과 아이들이 식전에 기운을 뺐겠구나.
“어찌 그러십니까?”
“아니야.”
“서두르십시오.”
현 상궁이 내미는 영견(領絹 : 수건)을 받아 식은땀을 닦으면서도 검만은 손에 쥐고 있었다. 그날 이후 한시도 몸에서 검을 떨어뜨린 적이 없었다.
아버지께 하사받은 검은 북성에 그대로 두고 왔기에, 황제께서 내리신 이것과 한 몸처럼 움직이기 위해서는 더 많은 수련이 필요했다. 아니, 사실 그것은 그럴싸한 이유이고, 황제께서 내리신 검이라 떼어놓기 싫을 뿐이었다.
태화당은 규모가 큰 만큼 여러 곳에 자잘한 손이 갔다. 욕탕만 해도 그랬다. 본디 제국의 사람들은 온욕을 즐겼기에, 웬만큼 산다 하면 집 안에 욕탕 하나쯤은 가지고 있었다.
북성이야 워낙에 척박한 곳이라 그런 문화가 없다지만, 제국은 욕탕의 규모로 그 집안의 부를 측정한다는 소리가 나올 만큼 남의 시선을 신경 쓰는 부분이었다.
덕분에 기하가 사용하는 이 욕탕도 지나치게 컸다. 다른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몸을 담가야 하는 탕이 깊고 넓어, 더운물을 끓여 나르는 것도 버거운 일이었다.
다른 궁의 사정은 어떨는지 모르겠지만, 현 상궁과 어린아이 둘이 채우기에 힘에 부치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굳이 온욕까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어젯밤에도 했지 않아?”
“어서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뿌옇게 수증기가 서린 탕 안으로 기하를 밀어 넣은 현 상궁의 표정은 근엄해 보이기까지 했다. 기왕 물을 데워 날랐으니 그 노력을 헛되게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겉옷을 훌훌 벗어 그녀에게 내밀자, 이제는 익숙하게 뒤를 돌아 나간다. 처음에는 혼자서라도 굳이 목욕 시중을 들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현 상궁 때문에 어찌나 난감했던지.
틀어 올린 머리를 풀어 내리며 탕 안으로 들어가자, 뜨끈한 기운이 몸을 노곤하게 풀었다. 오늘은 특별히 꽃향기가 났다. 처음 며칠간은 냄새를 맡기도 싫은 지독한 한약재를 푼 물에 오랜 시간 온욕을 하느라 무척 고되었었지.
황후마마라……. 그분은 또 어떤 낯으로 대해야 한단 말인가.
* * *
차례대로 들어오는 수라상은 화려하고 정갈했다. 황후께서 직접 수라간 숙수에 명하여 좋고 귀한 음식을 내오라 하셨다더니, 현 상궁이 신경 썼다던 며칠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치 화려했다. 상궁의 기미(氣味)가 끝나자마자, 황후께서 단정하게 수저를 드셨다. 처음 보는 음식을 직접 설명해주시며 맛을 보라 권하는 얼굴이 마치 단정한 누이 같다는 생각을 하다 기하는 머리를 내저었다.
“진즉 시간을 내어보려 하였으나, 여러 가지 일로 바빴다네. 나의 무심함을 용서하시게.”
“용서라니요. 말씀 거두어 주십시오.”
“먼 곳에서 시집온 이들의 마음이야 다 같지 않겠나. 나 또한, 처음 폐하께 시집오던 날부터 몇 개월은 내내 그리움에 허덕이며 밤마다 울었다네. 그때는 폐하께서 황자의 신분으로 거의 전장에서 보내실 때라 더더욱 그러했지. 혼례를 올린 지 1년도 되지 않아 선황께서 붕어(崩御)하시어 앞이 캄캄했다네.”
따뜻한 국물 맛이 좋았다. 맑은 탕의 정체를 알 수는 없었지만, 기하는 그녀가 권하는 대로 음식을 꼭꼭 씹어 삼켰다. 평소라면 열심히 수련한 끝에 먹는 중반이라 체면도 잊고 배를 채웠을 텐데, 어쩐지 입이 썼다.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동남성 사람이네. 폐하께서 황위에 오르시기 전 간택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 2000년 제국 역사 중, 오성에서 황후가 배출된 일은 없었지. 하여,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무리가 많아. 더욱이 아직 후사를 잇지 못하였으니 그 죄가 크지.”
그녀는 먼저 수저를 내려놓았다. 아직 반도 뜨지 않은 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하 역시 그녀를 따라 수저를 손에서 내렸다. 겨우겨우 먹던 것이 얹히는 기분이라 쉬이 입을 열 수도 없었다.
“폐하께선 좋으신 분이네. 비록 내게 성심을 내려주신 적은 없으나, 대신들의 주청에도 나의 폐위는 허하지 않으시니까. 이유가 어찌 되었든, 폐하께 힘이 되어 드리지는 못하는 마음은 그대나 나나 같을 거라고 생각하네.”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어떤 마음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여인의 마음이야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으나, 담담하게 풀어놓는 말이 애틋하고 안타까워 그저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내게는 힘이 없어. 그대도 알고 있겠지? 내명부 수장이라고는 하나, 상궁 나인조차 내 마음대로 부리지 못하네. 그대에게 미안해.”
넓은 방을 둘러보며 황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창백해 보이는 얼굴에 기하는 물끄러미 그녀를 응시했다. 황후의 손짓에 상이 차례대로 물려졌다.
차를 내오라는 명을 내리고서, 그녀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빈혈이라도 일어난 것인지 감은 눈을 파르르 떠는 것에, 그제야 그녀의 상태가 과히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리 되었다는 말을 듣고 놀라 다른 일정을 파하였어. 괜한 짓을 하여 그대를 곤란하게 했네. 내 말이 통할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지. 현명하지 못하여 그것을 제대로 판별하지 못하였네. 오늘은 그대에게 용서를 구하고자 이리 온 것이니 마음이 상했었다면 이해해 주시게.”
“실은…….”
모든 것은 어렵다. 이렇게 상대에게 진심을 보이는 것도, 자신을 낮추는 것도, 잘못을 인정하는 것도. 그 어려운 것을 모두 보이고 있는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 괜찮지 않으니 괜찮다 말할 수 없고, 오롯이 진심이라 믿을 수 없으니 그것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마마께서 내려주신 은혜를 의심하였습니다. 하나, 그것은 제게 용서를 구하실 일이 아니옵니다. 비록 진실로 그리 하셨다 한들, 어찌 웃전께서 하시는 일에 원망하는 마음을 갖겠습니까. 악한 마음으로 마마의 은혜를 의심하였으니, 그것은 소인의 불충입니다.”
“그대는 듣던 것처럼, 솔직하고 당차군.”
빙긋이 웃음을 머금은 황후를 바라보던 기하가 다시 머리를 숙였다. 조금씩 엿보게 된 마음을, 그 따뜻함을 감싸 안지는 않았다. 언제고 다시 차디찬 칼날이 되어 제게 날아올지 모르니, 그것은 최후의 방어였다. 제게는 아무 힘이 없다는 것을 기하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제아무리 굶주렸다 한들, 먹을 것을 주며 유인하는 이에게 선뜻 다가갈 수는 없었다.
“그대 걱정은 따로 하지 않아도 되겠어. 내 괜한 걱정으로 그대의 마음을 무겁게 한 것은 아닌지 염려되네.”
“마마의 따뜻한 배려는 잊지 않겠사옵니다.”
“그대와 종종 이렇게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으나 그것은 폐하께서 원치 않으실 테니, 이따금 생각나면 다른 이들과 함께하는 자리를 갖도록 하겠네. 폐하께 다시 청을 드릴 테니, 그동안은 불편하더라도 조금만 참아주게. 내, 현 상궁에게는 따로 불러 명을 내림세.”
“수발들 이들이 많이 필요치는 않습니다. 다만 현 상궁이 홀로 너무 고군분투하는 것이 마음이 쓰입니다.”
“그래, 그럴 테지.”
따뜻한 차가 들어왔다. 향긋한 꽃 냄새가 금세 방 안에 퍼졌다. 직접 찻물을 내려주는 황후를 바라보며, 기하는 오늘 그녀와 마주 보고 처음으로 제대로 미소했다.
모든 것이 좋지는 않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나쁘지만도 않았다. 그러니 되었다. 이만하면 충분했다.
* * *
현 상궁의 한숨에 기하는 고개를 숙였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가 들고 있는 천을 당장에라도 빼앗고 싶을 정도로 뺨이 달아올랐다. 붉은 비단 천은 넝마처럼 흔들렸다. 그녀는 그것을 얌전히 바닥에 내려놓고, 새로운 천을 수틀에 끼웠다. 이번에는 홍국(紅國)에서 진상 올린 짙은 남색 비단이었다.
“저기…….”
“하문하시지요.”
“나 이거 안 하면 안 되나?”
하지 않으면 안 되느냐는 물음을 아마 스무 번쯤 했을 것이다. 하기 싫다고 등을 돌려도 그녀는 꿋꿋했다. 매번 이 시간이 되면 몸이 근질거리고, 손가락은 따끔거리고, 결과물 또한 참혹한데도 그녀는 끈질기게 수틀을 내밀었다.
오늘도 벌써 한 시진(時辰)이 넘도록 마주 보고 앉아 바느질 중이었다. 벌써 해는 졌고, 바람에 등불이 휘청거렸다. 울고 싶다. 정말로 울고 싶었다.
“아니 되실 말씀을 어찌 매번 그리 하십니까.”
“이건 비단 낭비야. 대체 이런 걸 어디에 쓴단 말인가?”
“그러니 어디에라도 쓰일 수 있도록 마마께서 잘하시면 되지 않사옵니까. 그렇잖아도 물자가 적어 마마께 지어 올릴 옷감도 많지 않으니, 이번에는 정성 들여 잘하십시오.”
“그러니까, 이건 정성으로 되는 문제가 아니라니까? 내 손 좀 보게. 바늘에 찔려 엉망진창이라고.”
“바늘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신 것은 마마십니다.”
“그것은!”
그래, 처음 바늘을 잡았을 때 분명 기하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것은 같잖은 사내의 자존심이었다. 그렇다고 바늘에 찔려 따끔한 것에 겁먹고 무작정 못 하겠다고 집어던지거나, 아프다고 칭얼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황실의 여인들은 모두 수를 놓습니다.”
“나는 여인이 아니야.”
“예, 마마께서는 황제 폐하의 빈이시지요. 영빈께서 수를 얼마나 잘 놓으시는지는 아십니까?”
“알게 뭐야? 영빈인지 뭔지 그치는, 날 때부터 황가에 들어오기 위해 준비했다며? 그런 자와 내가 어찌 같을 수 있단 말인가?”
“마마.”
“그치가 바늘을 들고 수를 놓을 동안, 나는 전장을 누비며 국경을 지켰어. 땅굴을 파고 잠이 들었다고.”
“마마께서도 영빈께서도, 지금은 모두 황제 폐하의 후궁이시지요. 지나간 세월이 뭐 그리 중요합니까? 전장을 누비며 국경을 지키신 일이요? 잘하셨습니다. 하나 지금은 수를 잘 놓으시는 것이 더 중한 일입니다. 어서 시작하세요.”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현 상궁의 말에 기하는 아랫입술을 물었다. 분하다. 분하고 분했다. 목숨을 걸고 전장을 누비는 것보다 이깟 바느질이 중하다고? 황제 폐하의 후궁이라서? 아무리 그분을 연모한다지만, 어찌 이깟 수놓는 일이 변방을 지키는 것보다 중하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사람은 본디, 자신의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이 있는 법입니다. 장병들은 나라를 지키고, 아낙들은 아이를 잘 키워야 하죠. 아이들은 부모의 애정을 받으며 건강하고 무탈하게 잘 자라 나라의 근간이 됩니다. 모두 맡은 바 임무가 있는 것이지요. 소인은 마마의 수족이고, 마마께옵서는―.”
“삐뚤삐뚤 수를 놓으면 되는 것이지.”
겨우 수틀을 붙잡은 기하가 바늘에 실을 꿰었다. 뾰로통한 표정은 지우지 않았으나, 더는 싫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찌 그리 삐뚤삐뚤 놓으십니까.”
“난 아직 하수에 불과해. 현 상궁처럼 수려하게 놓으려면 적어도 몇 년……, 앗.”
피가 퐁퐁 솟아나는 손가락을 얼른 입에 넣자, 따끔한 아픔이 느껴졌다.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고 울상을 하자, 그녀는 물을 적신 영견을 내밀었다.
“얼른 닦으시고 마저 하십시오.”
“현 상궁은 내 걱정도 안 되나? 이렇게 하루에도 수십 번 바늘에 찔리는데.”
“전장을 누비면서 국경을 지키신 사내대장부께서 어찌 겨우 바늘 하나에 그리 엄살이십니까?”
“과거는 과거고, 이제 나는 폐하의 후궁이잖아.”
문득 바느질을 멈춘 현 상궁의 시선에 기하는 빙긋이 웃으며 수틀을 그녀에게 다시 내밀었다. 오늘은 정말 고된 하루였다. 평소보다 더 많은 시간을 수련에 정진하였고, 현 상궁이 구해온 과녁판을 직접 손질까지 했다. 자주 해본 것은 아니었지만, 활 정도는 충분히 만들 수 있다. 최상품은 아니라도 그저 몸 푸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테지.
“폐하께서는 아직 금룡전에 계시나?”
“어디 계시는지 알아보라 이를까요.”
“아니야. 어차피 여기에는 오시지 않을 테니, 어디 계신들 상관없지.”
어쩐지 쓸쓸하게 들리는 기하의 음성에 현 상궁은 잠시 바느질을 멈췄다. 또다시 시작된 삐뚤삐뚤한 기하의 바느질에 절로 한숨이 터졌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 저렇게 엉망진창으로 수를 놓을 수 있는 것인지. 이번에도 용이 아니라 개미만도 못한 작품이 나올 것 같다.
“폐하의 총비는 역시 영빈인가.”
“폐하께서 가장 존중해 주시는 분이라면 단연 황후마마시고, 비빈 중 가장 높은 권력을 가지고 계신 분 또한 황후마마이십니다. 절대적인 세가 없을 뿐, 폐하께서는 늘 황후마마를 먼저 생각하시지요.”
“그렇다면 영빈은?”
“폐하께서 여러모로 절륜(絶倫)하시기 때문이지요. 황후마마께서 황자를 생산하시기 전에 다른 후궁이 회임하는 것은 삼가라 하셨습니다. 배다른 형제는 불운의 씨앗이라 생각하시니까요.”
불운의 씨앗이라, 그런 것인가. 하긴, 혜비의 유일한 아들이자 기하의 사촌이기도 한 황자 환은 그를 따르는 다섯 황자와 함께 반역을 도모했다.
그들 모두 출신 성분이 낮은 후궁 소생으로 환의 꾐에 넘어간 것이라 자백하였으나, 황제는 가장 먼저 그들의 목을 베었다. 입에 달다 하여 그것이 독인 줄도 모르고 삼킨 이들의 최후는 비참했다.
“현 상궁.”
“예, 마마.”
“오늘은 정말 그만하고 싶은데……. 형님께 보낼 서찰을 마저 써야겠어. 식사는 되었으니 그대와 아이들, 가서 배를 채우도록 해.”
“한술이라도 뜨셔야 합니다.”
“낮것을 과하게 먹었으니 괜찮아. 이제 이것 좀 치우고 불을 조금 더 밝혀주게.”
황후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막강한 권력일까, 아니면 폐하께 힘이 되어 드릴 든든한 배경일까. 그것도 아니면 그녀 또한 연모의 정을 원하는 것인가.
그녀는 평온해 보였으나 위태로웠고, 고요해 보였으나 불안해했다. 모든 것을 손에 쥔 듯했으나,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것도 같았다.
“금일은 밤바람이 찹니다. 비가 내릴 것 같으니 오늘 밤은 후원에 나가지 마십시오.”
“별걸 다 신경 쓰네. 밤바람 좀 쐰다 하여 고뿔에 걸리지는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그댄 그만 물러나.”
“예, 마마.”
펼쳐두었던 옷감과 바느질거리를 모두 챙긴 현 상궁이 몸을 일으켰다. 천천히 먹을 갈기 시작하던 기하는 그녀가 완전히 문 밖으로 사라지자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황후께서는 분명 좋은 분이시다. 다정하고, 사려 깊고, 마음씨 또한 고우셔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고 계시다. 그러니 폐하께서도 아껴주시는 것이겠지.
황후마마의 태를 빌어 낳은 황자에게 제국을 물려주고 싶으신 걸까. 그렇게 애틋하고 다정한 사이일까. 한 번도 같이 계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으니, 어떤 모습으로 황후마마를 대하시는지 모르겠다.
그것을 떠올리니 괜히 가슴이 지끈거리는 것 같다. 다정하게 웃어주시려나. 따뜻하게 불러주시려나. 품에 안아주실 때도 한없이 자애로우시겠지.
속절없는 일이다.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마음이다. 은혜를 저버리고 불온(不穩)한 마음을 품고 있구나. 어리석다. 너무도 어리석어 벌을 받아 마땅하다.
* * *
손가락에 약을 발라주는 현 상궁의 얼굴에 걱정이 스쳤다. 그녀가 이따금 그런 표정을 지을 때면 기하는 귀신같이 알아채 농을 걸어오곤 했다. 현 상궁은 이렇듯 나를 걱정한다느니, 현 상궁을 보고 있으면 꼭 어머니 같다느니, 당치도 않은 말을 하며 개구지게 미소했다.
아마 지금도 응당 그런 얼굴일 거라 생각하며 고개를 든 현 상궁은, 무표정한 얼굴로 멍하니 한곳만 바라보고 있는 기하의 얼굴에 놀라 그의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아.”
“송구하옵니다.”
상처 난 부위를 움켜쥐었으니 아플 법도 한데, 그는 천이 감긴 손가락을 거둘 뿐이었다. 왼쪽 네 번째 손가락을 베여 피가 철철 난 것을 발견한 것 또한 현 상궁이었다. 희미하게 쌓인 눈 위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기에 알아봤던 것이다.
“환부에 연고를 바르겠사옵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그대는 신경 쓰지 말게.”
“소인이 하겠사옵니다.”
“괜찮대도. 그보다 아이들을 불러줘.”
눈발이 날리다 만 후원엔 바람 부는 소리가 싸늘하게 울렸다. 이 정도 추위쯤은 기하에겐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황실 사람들은 몸을 제대로 펴지 못할 정도로 종일 떨었다. 특히나 남쪽 출신에게 겨울은 끔찍하다고 했다.
그 때문에 황도는 고요했다. 황실 사람들 또한 쓸데없이 바깥을 누비고 다니지 않았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꽁꽁 언 몸으로 종종거리며 다가오는 어린 노비는 가련하게 어깨를 떨었다. 살림이 곤궁하여 아이들의 의복이 저 지경인가 생각하던 기하는 그들 앞으로 서책 한 권씩을 던졌다.
“금일부터는 하루 두어 시간 거기 앉아서 이것을 필사하도록 해.”
“마마, 노비는 글을 알지 못하옵니다. 저 아이들에게 필사를 시키시어 무엇을 하시려고요.”
“이유는 묻지 말고 그렇게 하게 해. 글은 몰라도 좋다. 그림은 그려본 적 있지 않으냐? 황실 사람이 붓도 제대로 못 든다면 부끄러운 일이다. 해보아라, 재미있을 것이다.”
아이들은 동그랗게 눈을 뜨고 그저 입술을 빠끔거렸다. 무서운 표정을 하고 서 있는 현 상궁 때문이었다. 기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가볍게 소리 내어 웃었다. 웃으면 고울 사람이 꼭 저렇게 무뚝뚝하게 군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따뜻한 차를 올릴까요?”
“그리 춥지 않아. 자네도 거기 앉아서 뭐라도 하게.”
“소인은 달리 시키실 일이 없으시면 자리를 지키겠사옵니다.”
“거기 앉아 있으래도.”
줄곧 보고 있던 서찰로 시선을 다시 돌린 기하는 천천히 글자를 쓰다듬었다. 걱정 가득한 형님의 답신에 기분이 내내 울적하였다. 잘 지내고 있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음에도, 형님께서는 믿지 못하시는 것 같다.
잠시 북성을 비우고 계신 아버님의 안부와 지난해 혼례를 올리셨던 형수님의 회임, 성 안팎으로 편안하다는 전언에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까닭은 형님의 걱정이 지나쳤기 때문이었다.
물론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잘 지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곳엔 그분이 계시지 않나. 비록, 마음껏 뵐 수조차 없는 임이지만.
“곤하십니까?”
“머리가 아파.”
“고뿔이 오는 것이 아닐까요? 궁의를 부르겠사옵니다.”
“되었어. 어차피 제대로 봐줄 것이 아니라면 괜한 걸음 하게 할 게 뭐 있나.”
주춤거리던 현 상궁은 슬쩍 기하의 눈치를 보다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가 지금 원하는 건 편안한 침묵이었다. 이마를 손으로 괴고, 두 눈을 감고 있는 기하의 눈꺼풀이 바르르 떨렸다.
그녀는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며 연신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는 노비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의 붉은 뺨에 미소가 맴돌았다. 따뜻한 방 안 온도처럼 포근한 웃음이었다.
현 상궁이 처소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는 날이면, 아직 어린아이 둘이 나란히 앉아 방 밖을 지켰다. 그러지 말라 일러도 그것이 법도라 어쩔 수 없다고 말하며 현 상궁은 고집을 부렸다. 오늘 밤은 몹시 추웠다. 적어도 제국민이 느끼기엔 그럴 것이다.
서책 보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자, 소현과 연금은 마주 보고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이제 여덟 살이 되었다는 아이 둘은 처음 붓을 잡던 날, 덜덜 떨어가며 글씨를 써 내려갔다. 글씨라고도 할 수 없는, 흡사 지렁이 같은 필체였다.
그것에 그저 잘했다고 칭찬해주니 얼굴까지 붉히며 기뻐했다. 물론 그 후에는 현 상궁에게 불려 나가 모진 구박을 들어야 했다. 노비가 상전의 앞에서 이를 드러내며 웃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 했다.
슬그머니 몸을 일으킨 기하는 제 어깨에 두르고 있던 모포를 늘어뜨렸다. 소리가 나지 않을 정도로 걸었는데도 예민한 아이 둘은 금세 움찔거렸다.
아무리 천대받는 노비라 할지라도 어린아이들은 보호되는 곳이 황실이었다. 이 나이에 밤을 꼬박 지새우며 웃전의 자리를 지키는 노비는 황궁에 더는 없다.
이것이 다 저의 부족함 때문임을 기하는 알고 있었다. 미안함과 함께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아이들의 어깨에 모포를 둘러주자, 색색 고른 숨을 내쉬며 잠에 빠진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슬그머니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오니, 제법 찬 공기에 잠이 확 달아났다.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여느 처소와 달리 뒤를 돌아본 태화당은 어둡고 음산해 보였다.
이따금 이렇게 늦은 밤 홀로 후원을 산책하는 것을 알게 된 현 상궁의 눈을 피해 기하는 무작정 걸었다. 찬바람이 어깨 위로 내려앉아 한기가 느껴졌으나, 무거운 머리를 식히기에는 그 만한 것도 없었다.
절대로 그를 믿지 마라.
서찰의 말미에 쓰인 필체는 분명 아버님의 것이었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어째서 다른 말씀은 아무것도 없으셨을까.
터벅터벅 걷던 기하의 발이 멈췄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그리 많이 걸은 것 같지는 않은데 이런 곳이 있었다니.
하늘에서 쏟아지는 별빛이 그대로 반사되어 반짝인다. 교량 끄트머리에 서자, 푸르고 맑은 물에 얼굴이 비쳤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안을 들여다봤지만, 물고기는 보이지 않았다. 물이 제법 깊어 보였다. 달이 물 위에서 희미한 빛을 냈다.
기하는 긴 한숨을 내쉬며 무릎을 굽혔다. 조금만 더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가는 그대로 까마득한 물속에 처박힐 것만 같아, 단단하게 자라난 나뭇가지를 붙잡고 주위를 살폈다.
어릴 적,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이후로 깊은 물은 꼭 저승같이 느껴졌다. 기하는 당장에라도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 발목을 붙잡을 것만 같은 느낌에 오소소 돋아난 소름을 문지르며 턱을 괴었다.
이곳은 상념에 잠기기 그리 좋지 않았다. 달이 이리도 밝은데 너무도 을씨년스러웠다. 무엇보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만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괴이한 기분을 추스르며, 무릎을 막 펴고 일어설 즈음이었다.
“폐하, 밤이 늦었사옵니다. 이만 처소로 돌아가시지요.”
“그 입 좀 다물라 하지 않더냐.”
“어찌 예까지 걸음 하십니까.”
“시끄럽다.”
낮고 힘 있는 음성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렸다. 캄캄하던 주위가 순식간에 환하게 밝혀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하는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씹었다.
애타게 기다려도 도통 뵐 수 없던 분을 이리 마주할 수 있다니. 기쁨이 넘실거려 미소가 지어지려던 것도 잠시, 볼품없는 제 모습에 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이를 어쩐다. 하필 장옷도 걸치지 않은 침의 차림이었다.
“서남성의 움직임은 어떠하냐.”
“아직 별다른 움직임은 없사옵니다. 연태진은 욕심은 많으나 배포가 작은 위인입니다. 폐하께서 신경 쓰실 만한 문제를 만들지는 못할 것입니다.”
“쓸모없다던 아들놈보다 못하구나.”
“물론 영빈 쪽에서 먼저 손을 뻗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지는 것이지만…….”
발을 내딛던 그림자가 먼저 말을 멈췄다. 쉬이익, 요란한 바람 소리와 함께 거대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미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이들은 허리를 반쯤 굽힌 채 숨소리도 크게 내지 않고 있었다. 쉬이익. 바람이 다시 불었다. 천천히 주위를 살피던 임승지가 품 안에서 날카로운 표창을 꺼냈다.
“어찌 그러냐.”
“도둑고양이가 한 마리 있는 것 같사옵니다.”
지척에서 들리는 사내의 음성에 기하는 두 눈을 꼭 감았다. 일부러 들으려 한 것은 아니었으나 어쩐지 들어서는 안 될 것을 엿들은 모양새라 선뜻 고개를 들고 나서기가 민망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이렇게 숨어 있을 수만도 없으니 진퇴양난이었다.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조금이라도 현명하게, 그분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이 순간을 넘길 수 있을까.
탕.
겨우 붙잡고 있던 나무에 날카로운 표창이 날아와 박혔다. 손가락을 조금이라도 움직였더라면 그대로 잘려버렸을 만큼 날카로운 표창은 나무 깊숙이 박혔다. 기하는 바르르 떨리는 진동에 어깨를 움츠리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
탕.
피하지 않았더라면 이번 표적은 분명 손등이었다. 움찔 놀라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은 기하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사내대장부가 이렇게 시시하게 피하고 도망치기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잘못은 깨끗하게 시인하고, 벌을 내리신다면 달게 받는다. 그것이 아버님의 가르침이자, 스승님께 가장 처음 배운 것이었다.
“너답지 않게 뜸을 들이는구나. 그러다 놓친다.”
비죽한 비웃음을 매단 황제의 음성이 조금 더 선명하게 들렸다. 어차피 물러설 곳이 없다면, 시간을 끄는 유치한 짓도 하지 않을 것이다. 몰래 숨어든 것은 아니니, 그 점은 용서해 주시겠지.
기하는 굽혔던 다리를 펴고 단숨에 일어섰다. 하얀 침의 자락 끄트머리에 지저분한 흙이 묻었다. 아마 현 상궁이 보면 내내 잔소리하며 다시는 밤중에 산책하러 나가지 못하게 할 것이라는 생각 따위를 할 즈음이었다.
휘이익.
“어, 조심!”
자연스럽게 남은 표창을 날리던 임승지는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기하를 확인하고서 검을 뽑아 들었다. 빠르게 회전하며 날아드는 표창을 밀어내기엔 그의 검이 너무 느렸다.
“마마!”
낯선 사내의 외침이 채 맺어지기도 전에 기하는 반사적으로 몸을 틀었다. 탕. 요란한 소리를 내며 스친 날카로운 표창은 그대로 나무에 박혀 지이잉 하고 울었다.
팔이 따끔했다. 고개를 들어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두 사람의 시선을 받아냈다. 주춤. 기하는 저도 모르게 발을 움직여 뒷걸음질 쳤다. 냉랭한 황제의 두 눈이 꼿꼿하게 기하를 향했다. 어떤 감정도 깃들지 않는 서늘한 표정에 울컥 서러움이 차올랐다.
“도둑고양이라더니 어찌 된 일이냐.”
“송구하옵니다.”
임승지는 단번에 무릎을 꿇고 황제께 조아렸다. 애초에 겁을 주며 사지로 모는 것이 승지의 방법이라고는 하나, 이런 일은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었다. 늦은 밤 홀로 나무 뒤에 몸을 숨긴 후궁이라.
“네 그 어쭙잖은 실력을 보니 잠이 다 깨는구나. 쥐새끼 하나 제대로 잡지 못하는 네게 어찌 나의 그림자를 맡기랴. 저것은 살린 것도 아니고, 죽인 것도 아니지 않느냐.”
칼날 같은 음성은 밤바람보다 찼다. 뜨끈하게 열이 오르는 오른쪽 팔을 붙잡으며 기하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는 어떤 말도 건네지 않았다. 괜찮으냐는 걱정까지는 아니더라도 어찌 이곳에 숨어들었느냐고 타박이라도 할 줄 알았으나, 아무 표정 없이 등을 돌렸다. 기하는 그것이 서럽고 안타까워 스르르 눈을 감았다.
“소인은,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옵고…….”
“뭘 하고 있어. 저것을 당장 추국장으로 끌고 가지 않고.”
“예?”
“헛손질을 하더니 귀까지 먹었더냐. 감히 황제 뒤를 밟아 삿된 일을 벌이려는 간자를 잡는 것은 네 일이 아니더냐?”
승지는 황제의 하문에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이유를 막론하고 지금 이 같은 행동은 국법으로 엄히 다스려야 하는 일임이 분명하다. 하나, 입궁한 지 겨우 두어 달 남짓한 어린 빈께서 무작정 그런 무모한 짓을 벌일 리는 없지 않은가.
“소인은 간자가 아니옵니다.”
“그 입 다물어라.”
“어찌 소인의 말은 들어보지도 않으시고 그리 역정을 내십니까?”
“시끄럽다 하지 않았나.”
“소인은 그저 밤바람을 쐬러 나온 것뿐입니다. 지리가 낯설어 어찌 이곳까지 왔는지는 모릅니다. 폐하께서 하시는 말씀 또한 제대로 듣지 못하였습니다. 간자가 아니옵니다. 도둑고양이도 아니고, 쥐새끼도 아닙니다.”
팔을 감싸 안은 손바닥에서 뜨끈한 피가 흘렀다. 서러움이 울컥 터져 나와 제멋대로 입술을 달싹이던 기하는 물끄러미 자신을 내려다보는 황제의 형형한 시선에 겨우 숨을 참았다.
“짐더러 지금, 그 말을 믿으란 것이냐?”
조소와 힐난뿐이었지만, 밤바람에 감싸인 그는 황홀하도록 아름다웠다. 가슴이 지끈거려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연모의 정에 눈이 멀어버린 것은 아닐까.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뵐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뭘 하고 있어? 저것을 붙잡지 않고.”
난감한 얼굴로 주춤거리던 임승지가 황제의 앞으로 나아갔다. 뽑아 든 검을 바로 잡은 그에게 시선을 돌리자, 뒤쪽으로 늘어서 있는 황제의 행렬이 그제야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뚜벅뚜벅 걸어오는 임승지의 걸음이 빨라진다는 생각에 기하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이대로 그에게 끌려갈 수도, 그렇다고 이렇게 멍청하게 서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억울한 것은 둘째 치더라도 서러운 마음이 치솟아서.
“마마, 조심하십…….”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던 기하의 다리가 교량 끄트머리에 부딪혔다. 황제의 표정이 의문스럽게 굳어진 것도 그즈음이었다. 팔을 축축하게 적신 피가 뚝뚝 떨어져 천을 붉게 물들였다.
순식간에 몰아친 한기에 어깨를 움츠리며 다시 한 번 발을 떼는 순간, 몸이 기우뚱하며 오른쪽으로 휘청거렸다. 평소의 상태였더라면 공력을 끌어올려 난간이라도 붙잡았을 텐데. 황제의 두 눈이 찌푸려지는 것에 절로 웃음이 났다. 또 무엇 때문에 역정을 내려 하시나.
“마마!”
임승지는 단번에 교량으로 달려갔다.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아랫것들마저 놀라 사방이 일순 술렁였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황제의 눈이 차게 가라앉았다.
“뭐 하는 것이냐.”
“교량 아래로는 수심이 깊사옵니다.”
“이 정도는 충분히 나온다. 괜히 소란 떨 것 없어.”
“하지만―.”
아직 어려 특출나게 이름을 떨친 장수는 아니었으나, 북성의 총아라 일컬어지는 서기하는 문무에 능했다. 그가 선봉에 선 몇 개의 북방 전투에서 귀신같은 활 솜씨로 적장의 두 눈을 꿰어버린 일화도 유명하지 않던가.
검술은 몰라도 공력을 실은 궁술은 북방에서 단연 최고라 했다. 공력을 행하는 자에게 이깟 일은 아무것도 아니지. 한데―.
“폐하.”
임승지는 초조한 얼굴로 황제를 바라봤다. 가까이 다가온 내관(內官)들이 교량 아래로 횃불을 비추었다. 순간적으로 낙하하여 못 아래까지 내려갔다 하더라도, 다시 올라오려면 분명 물보라가 일어나야 하는 것을.
“폐하.”
“꺼내 오너라.”
황제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주저 없이 물속으로 뛰어든 임승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축 늘어진 인영을 품에 안고 밖으로 튀어 올랐다.
단번에 교량 위를 밟고 내려온 승지는 이미 정신을 잃은 기하를 천천히 바닥으로 뉘었다. 좀처럼 소란을 떨지 않은 아랫것들의 시선이 한데 모이자, 황제는 더할 나위 없이 싸늘하게 얼굴을 구겼다. 가지가지 하는구나. 쯧.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으신 것 같습니다.”
파리하게 질린 얼굴은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제대로 숨을 쉬고 있는 것 같지 않았기에, 횃불을 들고 서 있던 내관은 연신 승지에게 눈짓했다.
“일단 숨을 좀 돌리시게 하겠습니다.”
황제는 말이 없었다. 그저 물끄러미 누워 있는 기하를 바라보다, 그의 코를 붙잡고 상체를 숙이려 드는 승지의 어깨를 검집으로 툭 밀었다.
“폐하,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마마의 숨을 돌리게 하여―.”
“비켜라.”
“폐하.”
“아무리 사내놈이라 하나 나의 빈이다. 비켜.”
스스럼없이 무릎을 굽힌 황제가 한 손으로 기하의 코를 움켜쥐고 천천히 입술을 맞대었다. 맞닿은 입술은 소름이 끼칠 만큼 차가워서 연거푸 숨을 불어넣으면서도 과연 이것의 숨이 다시 붙을까를 생각했다.
미련한 것. 아니라 하면 그만일 것을 어찌 이리 미련을 떨어.
“크흡, 콜록콜록, 켁.”
반쯤 일으켜진 몸에 숨이 도는 것이 느껴졌다. 희미하던 맥이 다시 뛰었다. 황제는 기침을 쏟아내는 기하의 몸을 일으켜 그의 등을 가볍게 쳤다. 혈 자리를 짚어 손가락을 퉁기자, 기하의 입에서 울컥 비린 물이 쏟아졌다. 덕분에 용포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지만, 마른기침을 전부 쏟아낼 때까지 그는 우두커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의 눈동자엔 아직 이채가 돌지 않았다. 벌어진 팔의 상처에선 끊임없이 피가 흘렀다. 생각보다 상처가 깊은 탓에 곁에 서 있던 승지는 안절부절못했다.
“처소로 옮겨라. 궁의를 불러 치료하게 해.”
살았으니 됐다. 단지 그 생각만 하며 몸을 일으키려는데 옷깃을 붙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황제는 물끄러미 제 용포를 붙잡은 손을 내려다봤다. 이슬이 내려 축축한 바닥에 몸을 축 늘어뜨린 그는 푸른 입술을 달달 떨었다.
“…폐하.”
눈동자의 이채는 여전히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마른 눈이 바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상처투성이의 마른 손가락을 밀어냈다. 힘없이 바닥으로 툭 떨어진 손끝이 이번에는 젖은 풀을 잡는다. 폐하―. 다시 한 번 그의 입에서 텁텁한 음성이 쏟아졌다.
“뭣들 하고 있어.”
폐하―.
씨근덕대는 소리에 승지가 먼저 일어나 축 늘어진 기하를 품에 안았다. 아직 약관(弱冠 : 스무 살)도 지나지 않았다고는 하나, 보통의 여인들에 비하면 확실히 무거운 몸이었다. 게다가 황제의 후궁이니 제대로 품에 안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 꼴로 가다간 다시 물속으로 빈을 처박겠다.”
“송구하옵니다.”
쯧쯧. 저도 모르게 혀를 차며 미간을 구긴 황제가 손을 내밀었다.
“이리 내.”
“아… 하지만…….”
“칼 쓰는 것만 하지 말고 근력부터 길러라. 금룡대장 자리를 내어놓던가.”
있는 대로 면박을 늘어놓으며 기하를 품으로 받아 든 황제는 다시 혀를 찼다. 전장에서 몇 년을 굴렀다는 놈의 몸이 어찌 이리 형편없이 말랐느냐는 생각을 하면서 품 안으로 끌어안자, 늘어서 있던 아랫것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발을 동동 구르는 것이 보였다.
“태화당으로 간다.”
축 늘어져 있던 기하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희미하게 뜬 눈을 몇 번이나 깜박이다가 품에 얼굴을 묻고 옷깃을 붙잡는다. 거의 뛰는 듯한 속도로 뒤를 따르는 행렬이 귀찮다는 생각을 하면서, 황제는 벌벌 떠는 몸을 조금 더 깊이 끌어안았다. 이 와중에 꿈이라도 꾸는지 희미하게 올라간 입가를 바라보는 눈동자에 서늘한 호기심이 내려앉았다.
깊은 잠에 빠졌던 태화당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발이 빠른 내관 하나가 기별을 넣으러 갔음에도, 어린 노비 둘만이 깊이 잠들어 있던 곳은 썰렁하다 못해 을씨년스러웠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현 상궁이 달려왔을 때는, 이미 황제 일행이 자리를 잡고 난 후였다. 번을 서고 있던 궁의가 달려와 진맥하는 것을 탐탁지 않은 눈으로 쳐다보던 황제는, 지밀상궁(至密尙宮)이 직접 가져온 의복으로 갈아입은 후에도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상처가 깊으니 아물 때까지는 특별히 신경을 쓰셔야 합니다. 환부에 약을 잘 바르셔야 덧나지 않고, 상흔도 남지 않습니다. 한기가 드신 듯하니 침상에 불을 더 넣는 것이 좋겠습니다. 기력을 보하는 탕약을 지어 올리겠나이다.”
궁의의 말을 차분히 듣고 있던 현 상궁이 머리를 조아렸다. 황제의 곁에 서 있던 내관의 눈짓에 그가 물러나자, 방 안은 다시 침묵에 휩싸였다. 세상모르고 잠들어있던 어린 노비 둘은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방문 너머에서 납작 엎드려 있었다.
“이곳은 황실 법도가 통하지 않는 곳이더냐.”
현 상궁은 초조하게 황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파란을 겪은 황제께서는 혼이 바뀌기라도 한 것처럼 차게 변하셨다. 호탕하고 쾌활하며 자애로우셨던 황자 시절을 떠올리면서, 그녀는 죽은 듯 누워 있는 기하를 곁눈질했다.
“후궁이란 것은 체면도 잊은 듯 밤마실을 다니고, 노비란 것들이 상전의 침소에서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지? 상궁이란 것 또한 마찬가지니, 이것은 대체 어느 나라의 법도냐?”
“송구하옵니다, 폐하. 이년을 죽여주시옵소서.”
“네년을 죽인다 해서 달라질 게 뭐냐.”
납작 엎드린 현 상궁이 두려움이 덜덜 떠는 것을 보면서도 황제는 비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이 큰 궁에 부리는 것이 고작 저 셋이라니,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났다. 저 망아지 같은 놈의 성정은 그렇다 치더라도, 지켜보는 눈이 적으니 이런 사달이 날 수밖에.
“저년을 끌고 가 제 본분을 깨닫게 해줘라. 버릇없이 상전의 침소에 기어들어 온 노비 또한 마찬가지다.”
“예, 폐하.”
울음을 삼키며 끌려 나가는 현 상궁을 바라보던 황제는 아직 고르지 못한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는 기하를 내려다봤다. 미련한 것이 이런 상황에서 잘도 버텼구나. 그래도 명색이 오성 중 하나인 북성의 왕자가 아니던가. 상궁 하나에 노비 둘이라.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구나 싶다.
“누구의 짓이더냐.”
한 걸음 뒤로 물러서 있던 승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제의 곁을 지키던 지밀상궁이 난처한 눈짓을 했다.
내명부는 황후의 관할이다. 단순한 투기라고 하기는 뭔가 석연치 않았다. 제국의 국모는 그리 속 좁은 여인이 아니었다. 아랫사람을 다정하게 품을 줄 아는 현명함으로 칭송이 자자한 그녀가 이런 모략을 꾸미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 상궁의 말로는 내시감의 지시가 있었다고 합니다.”
내시감 김춘섭이라면 물욕에 약하고 귀가 얇은 위인이었다. 선대 때부터 내시감 자리에 올라 온갖 탐욕스러운 짓을 서슴지 않았다. 다행히 선황께 충성을 다하였기에 그의 허물을 알고 있으면서도 덮어주며 적당히 말로 쓸 때를 기다리고 있었건만.
“그치는 이번에 또 누구한테 붙었다더냐.”
“최근 연호당으로 자주 걸음 한다 합니다.”
연호당이라면 영빈이던가.
“영빈, 그것은 제 아비를 닮아 미련하기 그지없구나. 쯧, 이래서 멍청한 것들은 곁에 두고 싶지 않단 말이다.”
“어찌할까요.”
끙끙 앓는 소리를 내는 기하를 잠시 바라보던 지밀상궁이 황제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황제께서 직접 명을 내리신다면, 내시감이야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을 바꿀 것이다. 혹여나 황제의 총애가 영빈에서 무빈으로 향하는 것이 아닌가 하여 태화당 문지방이 닳도록 들락거릴지도 모를 일이고.
“그냥 두어라.”
“폐하, 이것은 전례에 없는 일이옵니다. 태화당의 규모가 작은 것도 아니고, 분명 금일에 벌어진 일 또한 수발드는 이들이 없어서가 아닙니까. 어린 노비들이 이리 침전에서 잠들어 있는 것 또한, 무빈께서 정신을 차리시면 하문하시는 것이 바른 줄로 아옵니다.”
“소장 또한 그리 생각하옵니다, 폐하.”
“오늘따라 말들이 참 많구나.”
비죽하게 올라간 황제의 입꼬리를 바라보던 지밀상궁과 임승지가 머리를 조아렸다. 우두커니 앉아 있던 황제가 고개를 돌렸다. 앓기 시작한 기하의 이마는 식은땀으로 금세 젖어 들었다. 입술을 뻐금거리면서 속눈썹을 바르르 떠는 창백한 얼굴은 곧 죽을 사람처럼 핏기 하나 없었다.
어찌 물에 빠진 순간 나오지 않았던가. 적어도 발버둥이라도 쳤다면 그리 깊게 들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생각보다 깊이 들어간 그를 건져 내려 할 적엔 이미 정신을 잃었다 하니, 떨어진 충격이 강했던 것일까.
전장에서 몇 년을 굴렀다는 놈이 어지간히도 심약하다 싶어 절로 혀가 차였다. 서연 그자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정도로 독한 맹수거늘.
“폐하, 시각이 늦었사옵니다. 이만 침수 드시지요. 자리를 보게 하겠사옵니다.”
“누가 예서 침수 든다더냐.”
막 발을 떼려던 지밀상궁의 무표정한 얼굴에 난처한 빛이 흘렀다. 그녀는 다시 한 번 곁에 서 있는 임승지를 향해 눈짓했다. 이미 밤이 깊었다. 어서 자리를 보고 침수에 드셔야 익일 일정을 소화하실 수 있으실 터인데.
“하면 수신전에 자리를 보라 이르겠사옵니다.”
“물러가 있어.”
“폐하.”
선대 때부터 지밀의 자리에 앉은 그녀는 입이 무겁고 충성심이 높았다. 다만 한 가지 흠이 있다면, 걱정이 지나쳤다. 만약 다른 이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왔더라면 당장 끌고 나가라 명을 내렸을 거다.
더는 그녀의 입에서 귀찮은 말이 나오는 게 듣기 싫어 막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황제는 문밖에서 들리는 고요한 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폐하, 영빈께서 드셔 계시옵니다.”
순간 지밀상궁과 임승지의 얼굴이 동시에 찌푸려지는 것을 본 황제는 굳이 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제 심복들은 어찌 그리 같은 생각을 하는지, 천지를 분간하지 못하고 방자하게 날뛰는 영빈을 고깝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황제는 대답 대신 느긋하게 침상에 기대는 것을 택했다. 식은땀을 흘리며 끙끙 앓는 기하의 이마를 문지르자, 손가락이 금세 축축해졌다.
“폐하, 이런 법도는 없사옵니다. 어찌 이 늦은 시각에 폐하께서 왕림하여 계시는 후궁의 처소에 기별도 없이 들이닥친단 말입니까.”
“한 상궁, 그대 영빈을 미워하는 것이 너무 티가 나.”
“그런 것이 아니옵니다. 폐하께서는 어찌 관망하고만 계십니까. 이는 법도에…….”
“저 모자란 것이 하는 짓이 재밌지 않으냐?”
정말로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매단 황제가 조금 더 상체를 낮췄다. 이번에는 손바닥으로 기하의 뺨을 문지르자 뜨끈한 열이 느껴졌다. 볼이 발그레해진 것은 과연 열 때문이었구나.
“들라 해라.”
황제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문이 열렸다. 열린 문 사이로 찬바람이 불었다.
“들어오려면 들어오고, 아니면 그대로 나가라.”
도톰한 기수를 기하의 목 끝까지 끌어 올린 황제가 뒤척이는 그의 가슴을 다독였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던 영빈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오며 허리를 굽혔다.
과연 서남성 최고 미인이라는 별칭이 아깝지 않을 만큼 자태가 고운 영빈은 약관의 나이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살결이 희고 눈 코 입 어느 하나 빠지지 않을 만큼 미색이 고왔다. 타고난 색기 또한 대단해서 절륜한 황제의 정을 남김없이 받아낼 정도였다.
현 황제의 총비가 누구냐 물으면, 황실 사람 모두가 주저하지 않고 영빈을 꼽을 것이다.
“어쩐 일이냐.”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고 들어 걱정된 마음에 그만…….”
같은 사내라도 영빈의 목소리는 듣기에 퍽 고왔다.
“그렇다고는 하나, 이 늦은 시각에 다른 이의 처소까지 찾아오는 것은 도리가 아니지.”
심드렁한 황제의 음성에 영빈은 붉게 칠한 아랫입술을 질끈 물었다. 손끝이 저리고 달달 떨렸으나, 그것을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몇 번을 고민하다가 한달음에 달려온 참이었다. 적어도 아직 침수 드신 것은 아니니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송구하옵니다. 신첩은 다만, 여러 상황이 너무 걱정되어서…….”
“그래, 어여쁜 마음이구나. 네가 그리 무빈을 걱정하는 줄은 몰랐는데.”
황제의 손길에 기하는 잠시 얼굴을 찌푸렸다. 무슨 지독한 꿈을 꾸기에 저리 미간을 찌푸리는 것인지. 저라면 황제께서 저리 옆에 계시는데 태평하게 눈을 감고 있는 무례는 범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며, 영빈은 푸들푸들 떨었다.
“무빈은 괜찮다. 잠시 사고가 있었지. 한데, 그대는 그것을 어찌 알았지?”
“예?”
“분명 그 자리에는 나를 따르는 이들뿐이었다. 내 답답하여 승지와 잠시 산책하던 길이었거든.”
“아… 신첩은 그저…….”
“영빈.”
“예. 예, 폐하.”
“나는 미련한 이는 좋아하지 않는다. 또한, 쓸모없는 말은 키우지 않아.”
“폐하, 신첩은…….”
“그만 돌아가라. 곤하구나. 이제 침수 들어야겠어.”
용포도 벗지 않은 채 황제는 완전히 침상에 몸을 뉘었다. 이리저리 뒤척거리는 기하의 가슴을 다독이는 손길이 퍽 다정해 보였다. 그 모습에 바르르 떨던 영빈은 평소처럼 교태 어린 웃음을 지으며 해사하게 웃었다.
“어찌 이런 누추한 곳에서 침수에 들려 하십니까. 더욱이 무빈은 환우(患憂)가 들어 폐하를 모실 수 없는 몸이 아닙니까.”
“되었어. 금일 밤은 짐이 이 아이를 돌볼 테니까.”
옅은 숨소리를 들으며 황제는 중얼거렸다. 그럴 마음이라곤 눈곱만치도 없었던 것이 바뀌었다. 어린 강아지처럼 끙끙 앓으며 땀을 흘리는 모습이 측은하게 여겨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창백한 얼굴로 누워있는 그를 보니 단번에 누군가가 떠올랐다. 참혹할 만큼 미워했던, 그리하여 더더욱 아름다웠던 여인이.
“다들 물러나.”
땀에 젖어 축축해진 손끝으로 제 옷깃을 다시 붙잡는 희멀건 얼굴을 보며 눈을 감았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추억에 대롱대롱 매달린 그 시절이 떠올랐다. 그리움과 잔혹함, 양날의 검처럼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그것이 손끝에서 아스라이 번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