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기억(記憶)
태화당은 지나치게 넓었다. 또한, 적막하고 쓸쓸했다. 이곳은 꼭 북성 같았다. 어둡고 공허했다. 하여 외로운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았다.
그래도 빈의 처소라고 운치가 있고, 절경이었다. 아직 저녁 별을 본 적은 없지만, 그 이름대로 후원에서 올려다보는 가을밤은 무척 아름답다고 현 상궁은 설명했다.
철이 일찍 들어 어리광 한 번 부려보지 못한 기하였으나, 그는 정이 많은 사내였다. 늘 전장에 나가 계시던 아버지와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한 이는 일곱 살 터울의 형님뿐이셨지만.
나붓하게 절을 올리는 어린 나인을 바라보던 그의 입가에 미소가 서렸다. 초야 이후, 긴장감과 여독에 며칠을 내리 앓고 일어난 터라, 바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지 못했다.
현 상궁 이외의 사람을 보는 것도 실로 오래간만이었다. 사람의 체온이 그리웠다. 가져본 적은 없지만, 귀여운 여동생을 보는 듯한 기분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이름이 무엇이냐?”
“노비는 소현입니다.”
“노비는 연금입니다.”
나인이라 들었는데 노비였던 것인가. 의아함이 가득한 눈으로 곁에 서 있는 현 상궁을 바라보자, 그녀는 굳은 얼굴로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현 상궁.”
“하문하시옵소서.”
노비라 이른 아이 둘은 지나치게 작고 말랐다.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 보았던,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어린 나인보다 훨씬, 열 살, 혹은 그보다 더 어려 보였다.
“이 아이들은…….”
황후께서 보내 주시겠다고 약조하신 것은 열 명의 나인이었다. 분명 영민하고 몸가짐이 반듯한 아이들로 직접 골라 주시겠다고 하시었는데, 혹 마음이 변하신 것일까.
“어찌 된 영문인지 소인도 잘 모르겠사옵니다. 내시감께서 그리 지시하셨다는 말만 들었습니다. 연유를 알아볼까요.”
노비는 전각을 벗어날 수 없다. 살아있되 살아있지 않은 자들로, 그저 처소의 부속물일 뿐이다. 훈육 상궁에게 들은 법도를 떠올리며, 기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넓디넓은 태화당엔 현 상궁과 어린 노비 둘뿐이었다.
황제께 총애 받지 못하는 후궁의 삶은 비참했다. 첩지를 받을 때 하사받은 전각이 전부였다. 수발들 나인은 물론이거니와, 허드렛일을 할 노비조차 부족했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모두 누추했다. 이렇게 잊히다 쓸쓸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황제께서 북성에서 들여온 물건을 모두 버리라 명하셨기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방이 지나치게 넓어 보이는 까닭은 그 때문이었다.
“법도에 어긋나는 것이나, 마마께서 직접 이 아이들에게 수발을 받으셔야 하옵니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현 상궁의 표정이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기하는 그저 빙긋이 미소했다. 법도에 어긋나는 짓을 해서는 아니 된다던 훈육 상궁의 말이 떠올랐다.
아직 신열이 남아 있는 무거운 몸을 바로 했다. 지엄한 황궁의 법도를 온몸으로 깨달은 어린 노비들의 눈에 두려움이 숨어들었다. 어미 아비의 얼굴조차 본 적 없을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하는 시선을 거뒀다.
“되었으니 이 아이들은 법도대로 두게.”
“하지만, 마마. 부릴 아이들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어쩐지 지나치게 고요하다 생각했다.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이구나. 기하는 처음 발을 디딜 때에 보이던 예닐곱의 나인을 떠올리다, 이내 생각을 거두고 지필묵을 차례대로 펼쳤다. 형님께 보내야 할 서찰은 아직 끝을 맺지 못하였다.
“이 조그만 아이들이 무슨 수발을 든다고. 전각 청소나 시키시게. 내 알아서 잘 지내볼 터이니.”
아마 황제께서는 두 번 다시 이곳을 찾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니 따로 단장할 필요는 없다. 그저 단정하게, 북성에 누가 되지 않을 정도로만 지내면 되겠지. 현 상궁이 조금 고되겠구나. 그래도 나인 하나 정도는 남겨주실 것이지.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먹을 갈기 시작하는 기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현 상궁이 노비에게 눈짓했다. 호기 있게 제 이름을 말하던 어린 노비는 그제야 덜덜 떨며 뒤로 물러났다. 어찌나 납작 엎드려 있었던지 손바닥의 땀자국이 바닥에 찍혀 보일 지경이었다.
노비가 물러난 방 안은 다시 고요했다. 어린 것들이 배나 제대로 채울 수 있을까. 척박한 북성에서도 배는 곯지 않고 살았었지. 전장 중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차치하더라도, 그때는 그래도 그럭저럭 따뜻한 삶을 보냈구나.
“마마.”
“어찌 그러나.”
“소인이 황후마마를 찾아뵙겠사옵니다. 마마께옵서는 아직 미령하시니 소인이 그리하겠사옵니다.”
“현 상궁.”
“하문하시옵소서.”
“찾아뵌다 한들 무엇이 달라지겠나. 달라질 일이었으면 애초에 이리 되지도 않았겠지.”
기하는 천천히, 오래도록 먹을 갈았다. 반쯤 숙인 허리를 바로 하며 마른 붓을 들었다.
“자네가 해야 할 일이 많아지겠네. 수고하여 주어. 내 자네의 고마움은 잊지 않을 것이네.”
지나치게 담담했다. 겨우 열여덟인 사내가 아니던가. 북성이 곤궁하다 하더니, 철이 일찍 든 탓인가. 제후국의 왕자답지 않은 소탈하고 의젓한 모습에 현 상궁은 그저 머리를 조아렸다.
출세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가늘고 길게, 오래오래. 그에게 고한 그대로 살면 그뿐이었다. 목숨을 거는 일도, 죽음을 불사하지도 않을 것이라 고했다. 폐가 되지는 않을 것이나, 혹여 험한 상황에 부닥친다 하더라도 지켜주지 못할 것이라 일렀다.
당장에 내쳐지고도 남을 언행이었으나, 그는 담담히 수긍했다. 자신의 처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듯하여 마음이 무겁기까지 했다.
하나 현 상궁은 그 모든 것을 금세 떨쳤다. 상전의 걱정이라니, 그것은 지나친 사치였다.
“배는 곯지 않겠지?”
잘 갈린 먹을 찍던 기하의 손이 멈췄다. 고개를 갸웃하고 중얼거린 그의 음성에 현 상궁은 ‘예?’ 하고 다시 반문하였다. 당장에 경을 칠 일이었으나, 그는 해사하게 웃으며 또박또박 다시 말했다.
“배는 곯지 않고 살 수 있겠지?”
열여덟, 그제야 무뚝뚝하게 가라앉았던 얼굴이 제 나이로 보였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마마께서는 황제 폐하의 후궁이십니다. 황도에 배를 곯고 사는 이들은 없습니다. 거리의 부랑아들조차…….”
아차, 그것은 실언이었다. 감히 어찌 제국의 빈을 거리의 부랑아와 비교한단 말인가. 하나 이번에도 기하는 그저 빙긋이 웃을 뿐이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단정하게 글자를 써 내려갔다. 수려한 필체였다.
“그러면 다행이네. 저 아이들 너무도 작고 말랐어. 그래도 전에 나인들은 제법 얼굴빛이 좋았지 않은가. 비록 가지고 온 재물은 없으나, 녹봉을 받으면 그것을 아껴 쓰면 될 것이야.”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시옵소서. 그것은 소인이 알아서 잘 하겠나이다.”
맡은 바 임무는 충실히 수행하겠다고 약조했다. 그는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욕심이 없어 보이기도 했고,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보이기도 했다.
“그리 서 있지 않아도 돼. 바쁠 터이니 그대 하고픈 일을 하도록 하게.”
시선을 건네지 않는 기하를 향해 나붓이 절을 올린 현 상궁이 조용히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그제야 고개를 든 기하가 미소했다. 그래, 나쁘지 않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황실은 무서운 곳이라더니,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폐하께서 내려주신 처소는 꼭 북성과 같습니다. 별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형님과 함께 전장에서 바라보던 하늘이 떠올랐습니다. 황후마마께서는 손수 고른 노비까지 하사하시었습니다. 다정하시고 따뜻하신 분이라 힘이 됩니다. 형님은 잘 지내시지요? 아버님의 건강은 어떠신지 걱정됩니다.
* * *
볕이 좋았다. 아침저녁으론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어왔으나, 한낮은 태양이 뜨거웠다. 한 식경쯤 후원을 거닐었다. 땀을 흘리며 수련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날씨건만, 애석하게도 검을 쓸 수 있게 윤허 받지 못했다. 하늘을 보아야 별을 딴다고 하였지. 혼자서 괜히 키득거리던 기하는 나풀거리는 머리카락을 긁적였다.
고요한 태화당의 분위기 탓인지, 새로 온 노비들은 제대로 말을 하는 법이 없었다. 상전의 물음이 있기 전에는 절대로 먼저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얼마나 혹독하게 받았던지, 종알종알 떠들고 싶을 나이임에도 묵묵히 제 할 일만 찾아 했다.
비록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서툰 바느질과 드넓은 태화당을 쓸고 닦는 것뿐이었지만, 어쨌거나 어린아이 둘에게는 힘겨워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현 상궁은 태화당의 살림을 혼자서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시간마다 수라를 직접 받아와야 했고, 노비들이 발을 들일 수 없는 침전은 직접 쓸고 닦았다. 기하의 소소한 부름에 오가는 것만 해도 하루 수번이었다.
나인 두엇만 있어도 훨씬 수월할 것을. 상궁의 신분으로 직접 세답방(洗踏房 : 궁중(宮中)에서 빨래하는 일을 맡아 하던 부서(部署))에 다녀오겠다고 고하던 현 상궁을 떠올리며 기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힘이 없는 상전은 이리 부끄러운 것이구나. 뺨에 열이 오르는 것만 같았다.
바람이 불어왔다. 황자의 몸으로 늘 전장을 직접 누비시던 황제께서는, 제위에 오른 후부터는 사냥을 즐기신다고 하였다.
지난밤 침수 들기 전, 현 상궁은 황제께서 사냥을 나가셨으니 금일은 늦게까지 기다리지 말고 일찍 침수에 들라 말했다.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었는데, 그녀는 너무도 당연한 듯 기다리지 말라 했다.
두 번 다시는 저를 찾지 않으실 것이라 그리 생각하면서도 내심 그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허튼 꿈이 단번에 깨지며, 온몸으로 북풍한설을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마마.”
침묵을 깬 것은 현 상궁의 음성이었다. 사람의 목소리가 그리웠던가. 반사적으로 불쑥 고개를 돌리자, 멀찍이 서 있던 그녀가 조금 놀란 듯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벌써 다녀왔나?”
“서두른다고 하였는데도 늦었사옵니다. 수라 준비를 하였습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어쩐지 조급해 보이는 현 상궁의 모습에 기하는 아쉬운 듯 후원을 한 번 더 돌아봤다. 수라를 받은 후에 다시 나와도 괜찮겠지. 따뜻한 볕을 쬐면 먹지 않아도 배가 불러 노곤해졌다.
아쉬움을 뒤로 하며 천천히 안으로 들어가자, 따뜻하고 정갈해 보이는 상이 놓여 있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더 가짓수가 많아 보였다. 찬도 화려하고.
“궁의의 말이 전보다 기력이 쇠하시어 좋은 음식을 많이 드셔야 한다고 합니다. 잘 아는 숙수(熟手)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지어 올린 상이니 약이다 생각하시고 드시지요.”
황후의 초대로 자경전에서 받은 상처럼 화려하고 풍성했다. 고소한 냄새에 절로 식욕이 일었다. 제아무리 황제의 빈으로 음전(말이나 행동이 곱고 우아함. 또는 얌전하고 점잖음)을 떨고 있는 처지이나 기하 역시 전장을 누비던 사내다. 타고난 무골은 아닐지라도 활동량이 많아 잘 먹고, 잘 뛰었다.
스승님이나 형님께서도 잘 먹어야 한다 하셨기에 아무것이나 주는 대로 먹고, 딱 보통의 사내처럼 자랐다. 허약한 체질도 아니었다. 외려 건강한 축에 속하였지.
현 상궁이 걱정하는 바는 잘 알고 있었다. 사실 그녀의 말대로 입궁한 뒤부터는 좀체 기운을 내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무거운 현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첫째로 매일 하던 수련을 할 수 없어 몸이 무거웠고, 둘째로는 음식 탓이었다.
제국의 음식은 지나치게 기름지고 자극적인 맛이었다. 입에 맞지 않는 부분도 물론 있었지만, 그것들이 식욕을 더 당기게 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현 상궁과 아이들은 제가 물린 상을 받는다. 곤궁한 형편은 아니었으나, 다른 처소처럼 물자가 풍성한 것도 아니었다. 그 생각만 하면 절로 식욕이 뚝 떨어져 점점 먹는 양이 줄어들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힘이 빠졌고.
“이리할 것 없어. 괜찮다 하지 않았나.”
“이것이 소인의 일인데 어찌 하지 말라 하십니까. 어서 드시지요. 천천히 꼭꼭 씹으며 맛을 보십시오. 북성의 음식보다는 다소 향도 맛도 강하나 익숙해지셔야 합니다.”
아마도 현 상궁은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자꾸 상을 물린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사실은 허기가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도 수저를 놓는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일 테지. 허기쯤은 물만 마셔도 가실 수 있다. 아주 못 먹는 것 또한 아니었으니 그것을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다만 여러 가지 변화가 한꺼번에 몰아닥치니, 답지 않게 기운을 잃었을 뿐이다. 현 상궁이 그것을 내내 신경 쓰고 있는 줄 알았더라면, 기운을 차려볼 것을.
“폐하께서는 아직 사냥 중이신가?”
“금일엔 돌아오실 것입니다.”
황실의 사냥터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들었다. 거대한 산과 평야로 이루어진 곳이라 절경이 빼어나다고 현 상궁은 일렀지만, 기하는 그것을 그저 한 귀로 흘려들었다. 사냥터의 절경 따위가 다 무엇이란 말인가. 사냥터에서 필요한 것은 단단한 검과 잘 닦인 활뿐이다.
“사냥을 정말 좋아하시나 보네.”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기하는 쓰게 웃었다. 그날도 사냥을 하고 오셨다 했지. 새카만 짐승의 피를 뒤집어쓴 모습이 눈에 선했다. 어찌 그런 모습이셨을까. 내내 궁금하였지만, 차마 물을 수 없었다.
“황후마마께서 직접 탕제를 내리시었습니다.”
따끈한 국물을 입에 넣던 기하가 문득 손을 멈췄다. 다른 후궁들과 달리, 황후께서는 내명부의 수장으로서 무척 바쁘시다고 들었다. 다정하고 사려 깊으신 성정 덕에 매일 자경전 앞은 인파로 북적인다고도 하였고.
때문에 마음이 있다 하여도 쉬이 찾아뵐 수는 없는 분이었다. 안팎으로 곪아 있는 내명부를 통솔하는 일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니까.
“언제?”
“입궁하시던 날에 직접 명하시었는데, 사정은 잘 모르오나 전달이 늦었다고 하옵니다. 오늘 탕제를 받아 왔으니 소인이 직접 올리겠사옵니다.”
황후께서 직접 내리신 탕제라.
“그것은 안심하고 먹어도 되는가?”
태평한 기하의 음성에 현 상궁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어디 듣는 귀가 있을 턱이 만무하건만,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목소리를 낮췄다.
“어찌 그런 말씀을 입에 올리십니까.”
“나는 아직 황후마마를 잘 모르겠네.”
“그것은 불충이옵니다. 혹여 누가 듣기라도 하면 경을 칠 일입니다.”
“하긴, 마마께서 내게 해를 가하여 얻는 것은 뭐가 있겠나.”
고슬고슬한 밥을 입에 넣었다. 현 상궁이 손수 발라준 굴비를 얹으니 밥이 술술 들어갔다. 불편한 얼굴을 하고 앉아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기하는 물색없이 웃었다.
보이는 대로 믿어서는 아니 되며, 진실이 그 너머에 있음을 간과하지 마라. 아버님의 말씀이 때로는 틀릴 수도 있는 것일까.
“한데, 현 상궁.”
“예, 마마.”
“혹시 그 탕제, 많이 쓸까?”
“예?”
“단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쓴 것은 싫거든.”
단정하게 음식을 씹어 삼키며 기하는 빙긋이 웃었다. 그 웃음이 어찌나 천진난만하던지, 하마터면 저도 모르게 소리를 높일 뻔한 현 상궁이 입술을 뻐금거렸다.
“…탕약이 쓴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독(毒) 중에는 단 것도 있네.”
“마마.”
“그리 들었어, 먹어보지는 못하였지만.”
선황께서는 제 아들을 황위에 올리려 욕심낸 혜비에게 독살당하셨다. 오래도록 병석에 누워 계시던 황제를 대신해 섭정(攝政)을 시작한 황태자 신 또한 같은 독에 당하였다.
하나 아무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깨달은 순간은 이미 걷잡을 수 없는 피바람이 불어닥친 뒤였다.
“함부로 독을 입에 올리지 마시옵소서. 마마께옵서는 지금도 충분히…….”
“충분히?”
현 상궁은 말을 아끼는 대신 고개를 조아렸다. 이미 수저를 내려놓은 기하의 얼굴엔 웃음기가 걷혔다. 초야를 치른 그 밤처럼, 아무 감정 없는 목각 인형처럼 앉아 고요히 숨만 내쉬고 있었다.
“송구하옵니다, 마마.”
“남(南)성은 본디 독초가 많아. 따뜻하고 풍요로워, 비옥하고 기름지지. 배가 부르면 인간은 무릇 게을러진다네. 욕심도 많아지지. 먹고사는 것에 감사하던 마음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욕심이 크면 화를 부르는 법이라 하였어. 아버님께서도 늘 걱정하시던 바였지.”
달콤한 독은 더더욱 치명적이라 했다. 중독되는 것을 알면서도 쉬이 끊을 수 없다 했지. 해독제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은 것이라, 깨달았을 때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것이라 했다.
“나의 이모님 되시는 그분, 딱 한 번 뵌 적이 있어. 기품 있고, 아름다우셨지. 현 상궁도 들은 적 있나? 쌍생은 불길하다는…….”
몇몇 제후국에서는 쌍생을 불길하게 여겼다. 하여, 한날한시에 두 아이가 태어나면 반드시 한 아이는 죽임을 당했다.
“어머님은 뵌 적이 없네. 하여, 혜비께서 북성을 둘러보신다는 말에 며칠 밤을 지새웠어. 어머님과 닮은 얼굴을 한 번이라도 뵙고 싶었어. 기분이 이상하더군. 초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어머님이 살아 오신 것만 같았지. 하나, 아니었어. 그분이 내 어머니가 될 수는 없었지.”
“마마, 입에 올리지 마시옵소서. 입에 올리시면 아니 되시옵니다.”
“쌍생은 불길하다. 혜비가 일으킨 역모가 그리 말해주었어. 어머님께서 일찍 돌아가신 것이… 다행이야.”
황태자와 황제를 독살하고 제 아들을 황제로 봉해 스스로 황태후의 자리에 오른 혜비 신 씨는 역모로 참수되었다. 사지가 잘리고, 그 목은 황성 밖에 걸어두어 까마귀밥이 되었다.
구족을 멸하라는 황제의 명에 남(南)성은 초토화되었다. 황제의 사람으로 제후가 바뀌고서야 비로소 남성의 울음소리가 걷혔다.
불행은 아주 미약하게 비켜갔다. 오래전의 연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한 북성의 서연은, 충성의 맹세로 혼인을 올리지 않은 아들을 황제께 바쳤다. 그것이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이야기의 전부였다.
* * *
‘살려줘. 살려…다오. 살려…….’
“허억.”
괴이한 비명에 놀라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것은 캄캄한 어둠이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며 숨을 몰아쉬었다. 딱딱한 검집이 손에 잡히자, 그제야 마음의 안정이 찾아왔다.
“폐하?”
잠에서 깬 영빈이 황제의 팔을 붙잡았다. 탁. 사납게 내쳐진 손에 민망함을 느낄 새도 없이, 황제는 완전히 몸을 일으켰다. 길게 풀어 헤친 검은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황제를 따라 침상 아래로 내려가던 영빈이 일순간 비틀거렸다. 황제의 정을 받고 잠든 지 겨우 두어 식경이 지난 참이었다.
“폐하, 한우(汗雨)가…….”
“치워라.”
서릿발 같은 음성에 저도 모르게 손을 물린 영빈이 머리를 숙였다. 처연하고 애틋한 표정으로 입술을 두어 번 달싹이던 그는 얌전히 황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황제는 잘 벼른 검과 같은 사내였다. 지나치게 아름다워 손을 뻗으면 영락없이 날을 세워 상처를 입히는. 가까이 다가갈 수도, 그렇다고 그저 바라볼 수만도 없는 남자. 오직 살아남기 위해 그를 제 것으로 만들려 했는데 어느덧 연정을 품어버렸구나.
영빈은 물끄러미 황제를 바라보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악몽을 꾸고 난 후의 황제는 평소보다 더 차가웠다. 조금이라도 곁을 준다 싶으면 늘 이런 식이었다.
초조하게 입술을 씹으며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황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영빈은 고요히 허리를 굽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서는 황제의 어깨에 주의(周衣 : 왕의 편복(便服), 웃옷)가 둘렸다.
스무 명 남짓한 이들이 황제의 뒤를 따랐다. 어슴푸레하게 날이 밝아오는 시각이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풀거렸다. 끔찍한 악몽 뒤엔 흉포하게 날뛰는 심장을 좀체 진정할 수가 없었다.
살려달라고 우는 이가 누구인지는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아바마마, 혹은 어마마마, 형님일 수도 있다. 그때의 황제는 너무도 나약했다. 아무 힘도 없었다.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이던가.
힘을 키우라는 형님의 충고를 가슴에 새겼더라면,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후회해봤자 늦은 일이건만, 황제는 매번 이렇게 가슴을 치며 후회했다.
“폐하.”
“태화당으로 가겠다.”
공연한 분풀이는 사내를 치졸하게 한다. 공연한 것이 아니라면 상관없겠지.
“마마, 마마.”
초조한 듯 목소리를 높이는 현 상궁의 부름에도 기하는 쉬이 눈을 뜨지 못했다. 늘 일찍 일어나 수련하고 잠을 자는 시간을 아껴가며 배움에 정진하였으나, 그는 어릴 적부터 잠이 유달리 많았다. 때문에 아침 수련이 끝나면 낮것을 들기 전까지 꾸벅꾸벅 졸기 일쑤라, 아버님이나 스승님께 야단을 맞곤 했다.
입궁하기 전부터는 아침 수련을 하지 않았기에, 평소보다 조금 더 잘 수 있었다. 단잠의 효과는 컸기에, 이토록 현 상궁이 직접 흔들어 깨워야 할 정도로 깊게 잠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마마, 일어나시어요. 어서 일어나셔야 합니다.”
목에 칼이 겨누어진 것처럼 현 상궁은 다시 초조하게 기하를 불렀다. 그제야 무거운 눈을 겨우 들어 올린 그는 대답 대신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한눈에 보아도 아직 수마에 취한 사람 같았다.
“폐하께서 오십니다. 곧 당도하실 것입니다. 어서 일어나시어 몸가짐을 바로…….”
“황제 폐하 납시오!”
“히익!”
쩌렁쩌렁 울리는 음성에 몸을 굳히기도 전, 벌컥 문이 열렸다. 아직 자리에서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한 기하는 붕어가 입을 뻐금거리듯 눈을 깜박였다. 화들짝 놀란 현 상궁이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황제를 맞았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만세, 만세…….”
손을 휙 젓는 황제에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침상에 누워 있는 기하를 불안한 듯 곁눈질하자, 황제의 시선이 그녀를 따랐다. 숨이 막혀 그대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이었다.
머릿속으로 온갖 구차한 변명을 생각할 즈음, 죽은 듯이 누워 있던 기하가 귀신처럼 일어났다. 도저히 변명이 통할 것 같지 않을 만큼 자연스러운 몸짓이었다.
황제의 입가에 비죽한 미소가 서렸다. 휙. 다시 한 번 황제가 손짓했다. 현 상궁은 눈을 질끈 감고는 숨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고개를 조아렸다. 그대로 방을 나서면서도 눈은 자꾸만 침상으로 향했다.
“가관이로구나.”
현 상궁이 나가자마자 문이 닫혔다. 지나치게 넓은 방 안은 들여놓은 것이 없어 단출했다. 화려한 것이라고는 침상 위의 금침뿐이었으나, 우두커니 앉아 있는 그림자에 가려 그저 그런 모습이었다.
“이대로 죽어도 네가 왜 죽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도 깨닫지 못하겠지.”
그런 것은 재미가 없었다. 적어도 염한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는 맛이라도 봐야 속이 뚫릴 것 같았다. 죽는 순간까지 패악을 떨며 발버둥 치던 악녀가 떠올라 황제는 짐짓 눈살을 찌푸렸다.
멍한 눈으로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눈은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다만 울부짖던 그것과 지나치게 닮아 있었다.
“…폐하?”
고개를 갸웃하던 기하는 제 눈을 비볐다. 몽롱한 시야 너머로 흐릿한 형체가 보인다 싶더니, 이내 또렷하게 눈이 뜨였다.
짙은 남색의 침의 자락이 그의 숨소리를 따라 한들한들 흔들렸다. 어깨 아래로 풀어 헤친 머리카락 또한 마찬가지였다. 황제는 엄색한 표정으로 기하를 내려다봤다. 그의 손에 들린 검이 힘에 바르르 떨렸다.
기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침상에서 완전히 몸을 일으켰다. 어서 잘못을 빌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앞서 그만, 볼썽사납게 바닥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우당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나자빠진 기하가 끙, 하고 신음을 뱉었다. 바닥에 제대로 부딪친 어깨에 저릿저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쯧. 혀를 차는 소리에 얼굴이 확 붉어졌다.
“정말 가지가지 하는구나. 미련한 줄 알았더니, 멍청하군. 네 아비는 사리 분별도 제대로 못 하는 너를 어찌 감히 내게 들이밀었단 말이냐. 아무리 제 목숨이 아까워도 그렇지, 이런 것을 후궁으로 삼게 하다니. 서연의 충심은 바람 앞에 등불이로다.”
“송구…하옵니다. 폐하께서 오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내가 못 올 곳에라도 왔더냐?”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영빈의 처소로 걸음 하셨다 들었기에…….”
“꼴에 후궁이라고 짐이 어디 머무는 것까지 파악하려 들다니.”
독살스러운 혀는 쉬이 멈추지 않을 것 같다. 기하는 초조하게 숨을 골랐다. 황제께서 오셨다. 황제께 추한 모습을 보이고 만 것 같아 혀를 깨물고 싶었다. 저도 모르게 붉게 달아오른 얼굴에 점점 숨이 가빠지는 것 같다.
몸이 무거웠다. 부딪친 어깨가 욱신거렸지만, 가슴이 뛰는 통에 아픔을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다시는 뵐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이대로 영영 이곳에 갇혀 죽는 순간에나 그를 그려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무빈.”
“예, 폐하.”
“내가 너를 왜 무빈이라 했는지 아느냐?”
고개를 조아린 기하는 잠시 숨을 골랐다. 대답해야 좋을지, 아니면 얌전히 입을 다물어야 할지 모르겠다. 무엇이라 해야 그렇다고 해주실까.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살라는 의미로…….”
“아니, 아니지. 있는 듯 없는 듯이 아니다.”
고개를 들었다. 몇 번을 망설이다 올려다본 그는 찬란하게 빛났다. 침의를 입으시면 이런 모습이시구나. 예전처럼 웃어 주시지는 않으시나, 그 생김은 여전히 빛나고 아름다우셨다. 어찌 장성하셨을까 늘 궁금하였지. 초야 때는 겁에 질려 우느라 미처 바라볼 용기조차 내지 못 했다.
“하면, 소인은…….”
“너는 없어질 것이다. 너의 존재는 아무도 모를 것이야. 죽은 사람처럼 살다 어느 날 그리 되겠지. 하나, 아직은 죽지 마라. 내 아직, 네 아비에게 돌려받을 것이 있으니.”
황제의 검집이 기하의 툭 어깨를 쳤다. 찌르르한 통증에 입술을 다문 기하가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저는… 살 방법이 없습니까?”
살고 싶었다. 하고 싶은 일이 많았다.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그를 다시 만나는 것이었고, 두 번째로 하고 싶었던 것은 예전처럼 그와 함께 후원을 거닐어 보는 것이었다. 그가 말했던 것처럼, 황실의 아름다운 후원에서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웃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러다가 그의 곁에서, 그와 함께 전장을 누비며 영광된 죽음을 맞이하고 싶었다.
너무 큰 바람이라, 이루어질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이미 한 가지는 얻었고, 남은 한 가지는 영원히 얻을 수 없을 테지.
살고 싶었다. 그의 곁에 설 수는 없을지라도 가능한 한 오래오래, 멀리서라도 그를 바라보면서 살고 싶었다.
“살고 싶으냐?”
“예. 살고 싶습니다.”
“이를 어찌할까. 짐은 너를 살려줄 마음이 없는데.”
“소인은 폐하께 누를 끼친 적이 없습니다.”
빙긋이 미소 짓는 황제는 황홀하도록 아름다웠다. 허리를 반쯤 구부린 그가 다정하게 기하의 뺨을 쓸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 기하는 입술을 질끈 물었다.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으나, 그가 만져주는 얼굴이 너무 뜨거워 고통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래. 너는 아무 잘못이 없다.”
“폐하께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겠다 하였습니다. 제국에 보탬이 되는 이로 자라겠다 했습니다. 폐하의 충실한 신하가 되어…….”
“네가 나의 신하가 될 수는 없지. 내 정(精)을 받은 것을 잊었더냐?”
황제는 화르르 붉어진 기하의 얼굴을 농밀하게 쓰다듬으며 황홀한 미소를 건넸다. 그것에 홀린 듯 기하는 천천히 눈을 맞추며 다가오는 황제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네 눈에 연정이 가득하구나.”
검집이 기하의 턱을 툭 건드렸다. 귀까지 붉어진 얼굴을 숨길 수가 없어서 시선을 피하자, 황제의 눈이 집요하게 좇아왔다.
“너 설마, 짐을 연모(戀慕)하느냐?”
황제가 파안대소했다. 무엇이 그리 재밌는지 곱게 눈을 휘며 웃는 그를 바라보며, 기하는 초조하게 입술을 물었다.
“네 아비란 자, 대단하지 않으냐? 어찌 그런 생각을 다 하였을까.”
“그런 것이 아니옵니다.”
황제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드러난 연정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
“황자 시절, 북성에 오시었을 때 폐하를 뵈었습니다. 폐하께서는 다정하시고, 아름다우시어…….”
기하는 더듬더듬 말을 잇다 입을 다물었다. 마음속에 고이고이 담아두었던 연정을 꺼내는 순간, 그것은 푸석하게 말라 비틀어져 공기 중에 산화하였다. 흥미로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황제의 시선에 낯이 뜨거워졌다. 말하지 말 것을, 후회해봤자 이미 늦은 일이었다.
“그래. 기억나는 듯도 하다. 짐보다 어린 씩씩한 사내아이가 있었지.”
“기억…하시는 것입니까?”
“그래. 아무 의미 없어 잊고 있었던 것이나, 네가 말하니 기억나는구나. 어째 본 듯하다 했더니, 그래 그랬어.”
일순 기하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서렸다. 기억하시는구나.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으시는 줄 알았는데, 기억해주시는구나. 가슴이 부풀어 이대로 터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거지?”
황제의 일갈에 기하는 웃고 있던 입매를 누그러뜨렸다. 웃음기를 거둔 황제의 얼굴은 지나치게 싸늘하여,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심장을 벌벌 떨게 한다 했다. 물론 기하는 다른 의미로 떨리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것이…….”
“한 번만 더 그리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있으면 쓸데없는 혀를 잘라주마.”
기하는 눈을 감았다. 캄캄한 어둠에 온몸이 벌벌 떨렸다. 다시 눈을 떴다. 고압적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그의 시선을 마주하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역시 눈을 감는 것보다 뜨고 있는 것이 좋을 듯했다. 말라버린 마음에 불이 붙으니 이제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연정이 커져, 그가 아무리 모진 말을 한다 해도 웃을 수 있을 것 같다.
“하면… 죽기 전까지는 계속 폐하를 뵐 수 있습니까?”
어이가 없다는 듯 웃어버린 황제가 커다란 눈을 찌푸렸다. 느리게 눈을 깜박이는 얼굴은 여느 후궁보다 평범했다.
전장에서 실컷 구르다 왔으니, 그 또래의 보통 사내처럼 뼈마디가 굵고 피부색 또한 어두웠다. 어느 것 하나 어여쁜 구석이 없는 사내놈이라니. 그 서연의 아들이라니.
“발정이라도 난 것이냐?”
강렬한 눈썹을 찡그리는 황제의 시선에도 기하는 꼿꼿하게 그의 눈을 바라봤다.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비겁하게 살 바에야, 뜻있는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대장부라고 스승님께서는 말씀하시었다.
“폐하께 충성을 바치고 싶었나이다. 폐하의 검이 되고 싶었나이다. 연정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오나, 폐하께서 그렇다 하시면 그럴 것입니다.”
살고 싶었다. 뜻있는 죽음 따위가 무슨 의미란 말인가. 명예로운 죽음 따위 다 무엇이란 말인가. 죽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살아야만 어떤 것이든 할 수 있지 않은가.
쿵. 황제의 검이 바닥을 울렸다. 미처 놀랄 틈도 없이 검은 그림자 하나가 어디선가 튀어나왔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은 복면을 휘감은 그의 왼쪽 어깨에 화려하게 수놓인 금(金) 자가 반짝였다. 황제의 그림자라 불리는 금룡대(金龍隊)였다.
“네놈은 참 재미있는 표정을 하는구나. 당장 그 멀건 얼굴을 도륙(屠戮 : 사람이나 짐승을 함부로 참혹하게 마구 죽임)하고 싶은 욕구를 흔들리게 하는군.”
저 머리를 베어 서연에게 보낼 참이었다. 사지를 찢어 들짐승의 밥이 되게 하려 했다. 악귀처럼 자신을 붙들던 피에 젖은 손과 끔찍하게 흐느끼던 울음소리에 아직도 온몸이 저릿했다.
황제는 물끄러미 기하를 내려다보다, 곁에 서 있는 그림자의 손에 들린 검을 뽑았다. 챙,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적막을 갈랐다. 황제는 천천히 무릎을 굽히며 앉아 창백한 시선과 마주했다.
“기회를 주마.”
감정의 고조가 없는 황제의 차분한 음성에 기하는 무릎 위에 올려놓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기회라는 단어가 주는 희망이 가슴을 뛰게 했다.
황제는 잘 벼른 검을 그의 앞에 툭 던졌다. 날아오른 검을 반사적으로 붙잡자, 그의 입꼬리에 흥미로운 미소가 걸렸다.
“이것은 나를 지키는 검이다.”
황제의 그림자에게만 주어지는 검 역시 금(金) 자가 반짝였다.
“지금부터 그것은 너를 지키는 검이다.”
황제가 천천히 일어섰다. 저도 모르게 힘을 주어 검날을 붙잡은 까닭에 기하의 손바닥 사이로 혈(血)이 주르르 흘렀다.
“그리고 또한, 너 스스로 죽을 검이다.”
더러운 피를 손에 묻히지는 않겠다. 아무리 뜨거운 피를 뒤집어써도 원한이 풀리지 않는다면, 가장 잔인하고 지독한 방법으로 그 죽음을 마주하리라.
“살 수 있을 때까지는 살아 보아라. 그래도 명색이 초야까지 치른 나의 신부인데, 그 정도 부탁은 들어주어야겠지.”
“소인이 검을 쓰는 것을 허락해 주시는 것이옵니까?”
“하면, 쳐다보고 있으라고 그것을 내렸을까.”
쯧. 가볍게 혀를 차는 황제를 향해 기하는 고요하게 미소했다. 이미 손목을 타고 흐르는 피가 소매 끝을 붉게 적셨지만, 그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황제께 처음 하사받은 것이다. 황제의 검이다. 황제를, 그리고 제 목숨을 지킬 수 있는 검이다. 연정을 품은 마음도 탓하지 않으셨다.
“폐하, 성은이 망극…….”
인사도 제대로 받지 않고 황제는 뒤를 돌았다. 그의 입가에 아직 지워내지 않은 미소의 잔상이 남아 있었다. 천방지축으로 날뛰어 서연의 골치를 썩이던 어린 왕자를 떠올리자, 그제야 모든 것이 또렷해졌다.
그러나,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