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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없다(無) (3/49)

2장 없다(無)

빗질하는 어린 나인의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고요한 방 안에서 입을 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고된 하루였다.

아침 일찍 일어나 자경전에 들어, 오전 내내 황후와 시간을 보낸 기하는 수라를 같이 들자는 그녀의 말을 한사코 거절하여 겨우 처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몸이 무거웠다. 신열이 일어나는 듯 눈가가 뜨거웠다. 며칠간 잠도 이루지 못할 만큼 기하는 내내 앓았다.

황궁 안은 그 어디보다 소문이 빠른 곳이었다. 보름을 달려온 북성의 총아가 황제께 어떠한 대접을 받았는지는 진작 황궁 담장을 넘어섰을 것이다.

화려하진 않아도 단정하고 기품이 넘쳐흐르는 태화당을 둘러보면서 기하는 지친 마음을 다잡았다. 아직 머리가 무거웠다. 제게 일어난 일이 아득한 꿈인 것만 같아 쉽게 와 닿는 것이 없었다.

“아―.”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마마.”

어린 나인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작고 마른 몸이 바닥에 납작 엎드리자, 기하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제국을 둘러싸고 있는 다섯 개의 제후국 중, 북성은 가장 척박한 땅이었다. 특히 살아있는 모든 것을 얼려 버린다는 맹추위는 건장한 사내도 오래 버티기 어려웠기에, 북성에는 여인이 많지 않았다.

성의 주인인 서연은 몹시 검소한 자로, 사치는커녕 겨우 입에 풀칠하는 것도 감사하게 여기는 이였다. 그런 북성에 이렇게 어린 계집종이 있을 리가 없었고, 왕자의 신분이라 할지라도 이리 오랜 시간 몸치장을 해본 적도 없었다. 하여 그런 것이다, 어색하고 낯설어서.

그런 기하의 마음을 알 턱 없는 어린 나인은 바들바들 떨며 몸을 납작 엎드렸다.

“괜찮다.”

바들바들 떠는 아이는 작고 말랐으나, 피부가 매끄럽고 혈색이 좋았다. 제국의 모든 사람이 그랬다. 추위와 배고픔에 허덕이며 해마다 죽어 나가는 백성을 떠올리던 기하는 점점 무거워지는 마음을 다잡았다.

“마마, 소인이 하겠사옵니다. 너는 비켜서거라.”

앞으로 곁에서 수족이 되겠다, 고한 현 상궁이 기하의 뒤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빗질을 시작했다. 가늘고 힘없는 사내의 머리카락에 괜한 수고를 들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기하는 그것을 그만두라 하지 않았다. 당장에라도 자리에 눕고 싶었으나, 그 대신 고요히 눈을 감고 숨을 고루 내쉬었다.

“황후마마께서 좋은 차와 탕약을 보내 오셨습니다.”

“탕약?”

“예. 상처에 좋은 것이라 하니, 아이들을 물리시면 소인이 직접…….”

“되었네.”

공연히 낯이 뜨거웠다. 이들이 오로지 수발을 들기 위해 존재하는 것임을 알면서도 그랬다. 자신의 눈과 귀와 손과 발이 되어줄 이들, 하나 아직은 마음을 주지 못한 이들이기도 했다.

“궁의를 부를까요.”

“되었대도.”

약을 바르고 진맥 받는 것보다는 그저 누워 쉬고 싶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는데도 지난밤의 기억은 너무도 생생했다. 육신이 찢기는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가슴은 뛰었다. 온기, 온기 때문이었다. 그분이 지나치게 뜨겁고, 그래서…….

“마마?”

아아, 이래서는 종일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겠다.

“훈육 상궁의 말로, 나는 더 이상 검을 잡으면 안 된다 하던데.”

“황실의 법도가 그렇사옵니다만, 폐하께서 윤허하여 주신다면 괜찮을지도 모릅니다.”

“그래? 그러면 수련 정도는 할 수 있는 것인가?”

“예. 영빈마마께옵서도 이따금 폐하와 함께 사냥을 즐기곤 하시니까요.”

영빈이라 함은 어제의 그이를 말하는 것인가. 황제 폐하의 유일한 자첩(子妾 : 남자 후궁)이라는 그는 미색이 화려하고, 다소 사나워 보이는 인상이었다. 황후께서 계시는데도 스스럼없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 모습은 무척 익숙해 보였고.

“마마.”

빗질하던 현 상궁의 손이 멈췄다. 황실 안에 믿을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적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지금 이리 빗질을 해주는 이가 언제 칼을 뽑아 들고 등을 찌를지도 모를 일이라 했다. 형님께선 며칠을 그리 말씀하시며, 마음을 돌리라 하셨다. 제게 딱히 다른 선택지가 없음을 아시면서도.

“마마.”

“듣고 있네.”

“송구하오나, 소인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해 보아.”

“마마께옵서는 살기 위해 입궁하신 것이지요?”

그녀의 음성은 떨리지도 가라앉지도 않았다. 진심인지 거짓인지 아직은 알 수 없는 목소리를 들으며, 기하는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면경에 보인 초라한 얼굴은 핏기마저 가셔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이것이 나의 얼굴이란 말인가. 절로 실소가 터졌다.

“자네의 눈에는 내 여기 죽으러 온 것 같은가?”

웃음기 서린 기하의 얼굴에 현 상궁은 잠시 손을 멈췄다. 처음 본 인상 그대로였다. 그는 단아하고 강직했다. 그의 아버지인 제후 서연처럼 어질고 심성이 곧아 보였다.

빈의 자리에 어울리는, 더할 나위 없이 청렴한 성품이라는 것을 깨달은 현 상궁의 근심이 더욱 깊어졌다. 차라리 철없이 패악이나 부릴 이였더라면.

누군가의 입속에 혀처럼 굴 재간도 없어 보였다. 영락없이 자신은 죽은 목숨이라는 생각이 들자, 손끝이 절로 덜덜 떨렸다.

“내가 계속 이리하면 쉬이 죽을 것이란 말이군그래.”

“송구하옵니다.”

“하면―.”

나풀거리는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렸다. 답답한 것이 싫어 활짝 열어놓은 문밖에서 짙은 가을비 냄새가 났다. 사박사박 떨어지는 낙엽 밟는 소리에 기하는 그저 빙긋이 웃으며, 떨고 있는 현 상궁의 손을 붙잡았다.

“말해 보아라. 내 어찌해야 좋을지를.”

어찌해야, 그분을 오래도록 모실 수 있는지를.

“그것은…….”

“자네 말을 따르겠네. 그리하여야 자네도 살고, 나도 살지 않겠는가.”

그리해야 오래오래, 그분을 바라볼 수 있지 않겠는가.

* * *

밤이 늦었다. 금룡(金龍)전의 불빛이 더욱 환하게 빛났다. 상소문을 훑어보던 황제의 눈썹이 가늘게 찌푸려졌다.

화려한 미형의 황제는 밤낮없이 정사에 매진했다. 때문에 그를 모시는 내관이나 최측근 인사들은 연일 퇴궐을 하지 못해 황궁에 머무르는 날이 많았다.

그나마도 이렇게 고요한 날은 양반이었다. 어찌 저리 몇 년 사이에 성정(性情 : 타고난 본성)이 변하신 것인지, 탄일(誕日) 이후 한시도 떨어짐이 없던 내관조차 성심(聖心)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수환(秀奐) 제국의 31대 황제 시영(施領)제. 본디 선황과 황후 사이에 태어난 삼황자로, 성정이 곧고 총명하며 무예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던 그는 황좌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그의 바람은 오직, 옥체 미령하셨던 어머니의 건강과 장차 황위를 이을 형님을 올바르게 보필하는 것뿐이었다.

“전부 치워라.”

“처벌은 내리지 않으십니까?”

“일단 흔적을 지워.”

“하나, 교지(矯旨 : 왕의 명령이라고 거짓으로 꾸며 내리던 가짜 명령)는 그 자체만으로 참수감입니다.”

“하니 그냥 두어라.”

싸늘한 얼굴로 일갈하는 황제의 앞에 몸을 조아린 금룡대장 임승지는 황제의 다음 명을 기다리며 고요히 숨을 멈췄다.

“하면, 북성의 움직임은…….”

“일단은 그것이 이곳에 있으니 쉬이 움직이지는 못할 테지. 당분간은 내버려 두어도 좋아.”

“예, 폐하.”

선황 치세 이래, 제국은 더할 나위 없는 태평성대를 이어가고 있었다. 오랜 시간 전장을 누빈 탓에 급속도로 성후(聖侯 : 왕의 신체 안위)가 쇠약해진 선황을 대신하여 황태자인 신이 통치하게 된 것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모든 것은 그렇게 평온하게 흘렀다. 너무도 평온하여 감히 그것이 깨부수어 지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할 만큼.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을 땐, 모든 것을 잃은 후였다. 전장을 누비다 비보를 듣고 속히 귀환하였을 때, 그를 맞은 것은 차디찬 육신이었다. 그 누구보다 다정하였던 형님은 그렇게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 열흘도 지나지 않아 싸늘한 주검이 되었다.

장차 제국을 이끌 황태자의 죽음은 너무도 초라했다. 병이 깊어진 선황과 그 틈을 타고 흔들리는 수많은 이들, 그들을 피해 비겁하게 도망쳤다. 살기 위해, 살기 위해서.

그리고 알았다. 어머니께서 왜 돌아가셔야 했는지. 강녕하시던 형님께서 어찌 그리 허망하게 떠나셨는지. 태산 같았던 아바마마의 병환이 어찌 갑작스럽게 깊어졌는지 또한.

사악한 무리를 처벌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들은 미련하였고, 또 그만큼 잔혹하기도 했다. 비옥한 남(南)성 출신의 혜비는 황태후의 자리에 오른 지 닷새 만에 참혹한 죽음을 맞이했다. 모든 것은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그리고 다시 찾은 황궁은 진한 피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폐하.”

원해서 얻은 자리가 아니었다.

“자시(子時 : 밤 11시에서 새벽 1시 사이)가 지났습니다. 이제 그만 침소로 드시지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밤바람이 좋구나.”

“따뜻한 차라도 올리라 하겠사옵니다.”

“그것은 어찌하고 있다더냐?”

갑작스럽게 날아든 황제의 물음에 금룡대장 임승지는 가볍게 머리를 들었다. 반듯하게 허리를 펴자, 무료한 낯으로 턱을 괴고 기대어 있는 황제의 느긋한 표정이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몹시 지루한 얼굴로 승지의 답을 기다렸다. 그것은 마치 먹잇감을 눈앞에 둔 배부른 맹수 같은 얼굴이었다.

“금일은 자경전에 들어 시간을 보낸 후에, 태화당 내에서만 머물렀다 합니다. 아직 드나드는 이들은 없습니다.”

“언제 꺼질지 모를 불구덩이 속으로 부러 찾아갈 것들은 없을 테지.”

어쩐지 묘한 기색을 띠는 황제를 바라보던 승지가 다시 몸을 낮췄다. 문 바깥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을 상선이 떠올랐다. 이제나저제나 황제께서 편히 침수 드시기만을 바라는 상선의 한숨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아서, 말을 꺼낼 때를 재는 중이었다.

“한데―.”

“하문하시옵소서.”

“그것의 얼굴이 낯설지가 않아.”

“예?”

“아니다.”

분명히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얼굴이라고 생각하던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빼어난 미색을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단정한 얼굴이었다. 흔하디흔한 것이라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일 테지.

황제의 그림자에 여덟 개의 문이 차례로 열렸다. 성큼성큼 걸어 나가던 그는, 스물한 개의 패가 놓인 원쳡(쟁반)을 들고 서 있는 태감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지긋지긋한 것들 같으니라고.

“폐하.”

황제는 넓적한 원쳡을 내미는 태감을 내려다보았다. 이름이 쓰인 스물한 개의 패. 어느 하나 삐뚤어짐 없이 단정하게 나열된 것 중에 하나를 집었다.

무(無)빈, 서기하(徐期昰)

“태화당으로 드시지요, 폐하.”

오늘도 제 일을 충실히 해냈다는 기쁨에 태감은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번들번들한 얼굴에 야욕을 가득 숨긴 주제에, 웃고 있는 꼴이 고약스러웠다. 황제는 물끄러미 패를 들여다보다 그것을 태감의 발치에 휙 집어 던졌다.

“폐, 폐하.”

어찌 또 이러시나. 황제의 오른쪽에 서서 그림자처럼 따르던 승지의 눈썹이 꿈틀했다. 놀란 태감이 승지의 신호에 오체 불복하며 바싹 엎드렸다. “넙치 같은 놈이 행동 하나는 빠르구나.” 싸늘한 황제의 음성에 넙치를 닮은 태감은 벌벌 떨었다.

“누구의 허락을 받고 이것의 이름을 올렸느냐.”

“예? 저, 그것이…….”

누구의 허락이랄 것이 무엇인가. 북성의 왕자에게 직접 첩지를 내린 것이 황제시거늘. 지난밤 초야를 치른 후에 호를 하사하신 것도 황제셨다. 하니 응당 올라야 할 이름이 아닌가.

한낮 답응(答應 : 성은(聖恩)을 입은 상궁, 궁녀에게 내리는 직위)도 아닌 빈(嬪)이다. 비록 자첩이기는 하나, 제후국 왕자인 그를 이리 망신 주어서는 아니 되지 않는가.

“폐하, 연호당(演湖堂)으로 드시지요. 영빈께서 기다리고 계시옵니다.”

상선은 때를 놓치지 않고 황제께 예를 갖추었다. 황제는 제 발밑에서 벌벌 떨고 있는 태감을 검집으로 툭 치며 곁을 지났다. 그의 뒤를 따르던 상선이 빠르게 아랫것들을 향해 눈짓했다.

그제야 벌벌 떨던 태감은 바닥에 떨어진 무빈의 패를 주워 제 옷 속에 숨겼다. 요란하게 뛰는 가슴은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 * *

기하는 흔들리는 촛불을 바라보다 이내 붓을 들었다. 황제께서는 조금 전 영빈의 처소인 연호당으로 걸음 하셨다 하였다.

황실의 후궁은 황제께서 침수에 드시기 전에는 자리에 눕지 않는다. 그것은 황제의 총비나, 그의 기억 속에서 까맣게 잊힌 이라 하더라도 모두 같다.

기하는 긴 시간 서책을 읽다 먹을 갈았다. 제후 서연의 차남, 북성의 총아, 무빈 서기하.

형님. 제국은 아직 따뜻한 바람이 붑니다. 백성들은 모두 황제 폐하의 은덕을 노래합니다. 모두가 부(富)를 지고 사는 것은 아니나, 곤궁한 자 또한 없는 듯합니다. 북성의 백성들도 이처럼 배를 곯지 않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기하는 빼곡하게 써 내려간 글자를 바라보다 결국 붓을 내려 두었다. 무릎을 구부려 몸을 동그랗게 말자, 아직 아물지 않은 하초(下焦)의 상처가 욱신거렸다. 절로 붉어지는 얼굴을 손끝으로 문지르던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아직도 그날을 생각하면 가슴이 뛰었다.

만개한 꽃잎이 휘날리던 찬란한 태양 아래에 서 있던 그는, 어느 순간 형형한 눈빛을 빛내며 야차처럼 달려들었다. 주위는 삽시간에 붉게 변했다.

단단한 검집으로 목을 누르던 그의 손등을 저도 모르게 쓰다듬었었지. 다정한 말도, 온기도 없었다. 그저 행위에만 몰두하며 거친 숨 한 번 내쉬지 않던 그의 얼굴은 무감각하기 그지없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그래, 오롯이 이해할 수는 없지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처음부터 이리 될 줄 알고 받은 첩지였다. 그리 살아도 좋으냐고 물으시던 아버님께 어찌 대답했는지 잊어서는 안 된다.

“마마.”

문밖에의 현 상궁의 목소리가 들렸다. 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직 밖을 지키고 있었다. 기하는 갑작스러운 그녀의 음성에 화들짝 놀라 웅크린 몸을 바로 세웠다. 길게 녹아내린 촛농이 촛대를 타고 뚝 떨어졌다.

“시각이 늦었사옵니다. 이제 그만 침수 드시지요.”

어찌 살아야 하느냐는 물음에 현 상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충직한 성품이었으나, 겁이 많았다. 평생을 황실에서 보내야 하는 운명이니 가늘고 길게 살아야만 딸린 식솔들이 배를 곯지 않는다는 말에, 기하는 어떤 대답도 해줄 수 없었다.

자신의 편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그녀는 거절했다. 그러나 원망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모든 것은 아버님께서 예측한 그대로였다.

하나 그녀는 정에 약하고, 자신의 도리는 충직하게 하는 이였다. 쓸데없는 말을 전하지도 않았고, 기하의 건강과 안위를 걱정했다. 비록 자신의 삶과 연계된 일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이어지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현 상궁.”

문이 열렸다. 아침의 화창함과는 거리가 먼, 우직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기하는 가볍게 미소했다.

“형님께 드릴 서찰을 쓰고 있었네.”

“아… 그러하셨습니다. 하나, 너무 늦었사옵니다. 그만 침수 드시고, 내일 일어나시면 소인이 다시 먹을 갈겠습니다.”

이부자리는 누운 흔적이 없었다. 혹시나 준비해 두었던 화려한 금침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기하가 다시 미소했다. 단정하게 빗어 내린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흐트러졌다. 아직은 어린 열여덟, 영문도 모르고 짓밟히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이였다.

“북성에 서찰을 보낼 수 있을까?”

“보름에 한 번, 폐하께서 각 성에 교지를 내리십니다. 그 편에 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 그렇구나. 기억이 나네.”

혹여 괜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먹을 가는 내내 이 서찰을 보낼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물어볼 이도, 답을 알고 있는 이도 없을 줄 알았다.

혹여 안 된다 하면, 그나마 이 황궁에서 가장 친절하신 황후마마께 간청할 생각이었다.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무탈하게 잘 지내고 있노라는 서찰을 직접 띄우고 싶다고.

“방법은 소인이 알아보겠나이다. 침수 드시어요.”

“응, 그래. 조금 곤하네.”

기하는 작게 하품하며, 서찰을 한쪽에 내려놓았다. 가까이 다가온 현 상궁은 지필묵을 직접 거두었다.

아직 찬바람이 불지 않는 날씨였지만, 금침은 두껍고 따뜻하였다. 응당 초야에 그분과 나란히 누웠어야 할 자리였지.

침상은 지나치게 넓었다. 금침 또한 마찬가지였다. 텅 빈 옆자리를 바라보다 반듯하게 누워 있던 몸을 모로 뉘었다.

금사로 수놓인 이부자리를 가볍게 쓰다듬자, 봉황의 머리가 손끝에 걸렸다. 그것을 빙빙 만지며 눈을 감았다. 쉬이 잠이 들 수 없는 긴 밤, 기하는 다시 그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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