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해후(邂逅)
곱게 빗어 넘긴 머리카락은 찬바람에 볼품없이 흩날렸다. 아름다운 금사로 수놓아진 혼례복을 두르자, 주름진 유모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기하는 면경 너머로 그녀를 바라보며 빙긋이 미소했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머니 대신 열여덟 해 동안 자신을 키워준 그녀는 연신 눈물을 찍으며 그의 옷깃을 어루만졌다.
“제국(帝國)은 북(北)성보다 훨씬 따뜻하답니다. 한겨울에 잠시 눈이 내린다곤 하지만, 먹을 것이 떨어질 일도 없지요. 황제 폐하의 은덕에 제국의 백성들은 모두 겨울에도 배불리 먹고 지낸다고 하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주름진 그녀의 손이 기하의 어깨를 다정하게 다독였다. 이제 곧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그리 백성을 잘 보살펴 주시는 폐하이시니, 분명히 우리 왕자님께도 다정하게 대해주실 것입니다.”
기하는 대답 대신 허리를 굽혀 그녀를 어깨를 끌어안았다. 곱게 단장한 그의 옷깃에 주름이 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기꺼이 마지막 인사를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내 걱정은 하지 마.”
유모는 자신보다 한참 큰 기하의 등을 다독이며 새어 나오는 흐느낌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마마, 서두르셔야 합니다.”
딱딱하고 엄격한 목소리는 먼 길을 직접 마중 온 상궁의 것이었다. 그녀는 제국 황실의 훈육 상궁으로 근 석 달 동안 북성에 머물며, 기하에게 예의와 규범에 대해 엄격하게 가르쳤다. 웃는 얼굴을 한 번도 본 적 없을 만큼 칼같이 매서운 여인이었다.
수환제국(秀奐帝國) 31대 황제인 시영(施領)의 유모이기도 한 그녀는, 벌써 몇 번째 기하를 닦달하며 채비를 서두르게 했다.
“왕자님.”
“아버지와 형님을 부탁해.”
“걱정하지 마십시오. 부디, 무탈하시기를.”
문이 열렸다. 엄격한 얼굴의 그녀가 머리를 조아렸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나풀거리는 의복과 코끝을 찌르는 분 향은 아직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다.
‘아버님.’
이미 작별 인사를 나누었던 북성의 왕 서연은 천천히 머리를 숙였다. 아들을 향한 마지막 인사가 아닌, 제국의 주인인 황제의 후궁에게 처음 올리는 절이었다.
‘형님.’
서연의 곁을 지키던 서진하 역시,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머리를 숙였다. 기하는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서 입술을 다물었다. 고운 연지가 발린 축축한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좋은 날엔 눈물을 보여서는 아니 된다.’ 아버님께선 늘 그렇게 말씀하셨다.
‘좋은 날.’ 눈부시게 아름다운 날이라 일렀지만, 북성의 그 누구도 이 혼례를 축복하지 못했다.
‘부디, 안녕히.’
어쩌면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른다. 그래, 그럴지도 모른다.
‘강녕하시길.’
말 대신 가마에 오르는, 빛나도록 어여쁜 북성의 총아(寵兒 : 특별한 사랑을 받는 사람), 서기하의 안녕을 그저 온 마음으로 바랄 뿐이다.
* * *
제후국인 북성에서 수환제국까지는 마차로 꼬박 보름이 걸렸다. 말을 타고 쉬지 않고 달려도 일주일이 걸리는 아득한 거리였다.
꼿꼿하게 허리를 세운 채 마차로 달리기를 열흘. 아무리 타고난 체력을 가진 사내라 한들, 몸이 결리고 쑤신 것은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직도 닷새가 더 남았다.
제국의 의복은 지나치게 화려하고 무거웠다. 익숙하지 않은 여성의 혼례복이라 더 그런 것일 테지만,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있는 것은 전장을 뒤흔들고 다니던 자신이라도 버거웠다.
기하는 고개를 들고 맞은편에 앉아 있는 훈육 상궁을 바라봤다. 그녀는 미동도 없이 한결같은 자세로 기하를 향해 고요한 시선을 건넸다. 그뿐이었다.
그녀는 열흘이 넘는 시간 동안, 필요한 말 외에는 제대로 입을 열지 않았다. 아마 어머니께서 살아 계셨더라면 그녀의 연배 즈음이 되셨을 테지.
고된 여정에서도 흐트러짐 없는 그녀를 바라보며 기하는 더욱이 자세를 바르게 했다. 그것이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황제께서 다섯 성의 제후국에 후궁 첩지를 내리신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황제의 자리에 오르신 지 어느덧 1년. 피의 숙청을 끝낸 후에 가장 먼저 한 일이 후궁 간택이었다.
명백한 의도가 보이는 그것에 북왕 서연은 내내 기하의 황실행을 반대했다. 이미 황실의 사람이 되었거나, 뻔히 눈에 보이는 의도를 삼키고 받아들인 네 성의 제후와는 다른 결정이었다.
그것이 북성과 제후인 아버지께 얼마나 크나큰 독이 될지는 불 보듯 뻔하였다. 그래서 간다 하였다. 제국으로 가, 황제의 사람이 되겠다고 했다.
아마 그분께서는 기억조차 하지 못하실 테지만, 그날의 맹세를 지키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가슴 깊이 묻어둔 기하의 진심이었다.
“무료하신 듯하니 일전에 배운 황실 계보를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그것이라면 이미 다 외웠습니다.”
습관처럼 다정한 미소를 짓는 기하에게 훈육 상궁은 무표정한 얼굴로 응대했다. 그녀의 딱딱한 표정이 익숙해질 만도 하련만, 몇 달간 보았음에도 북풍한설 같은 반응은 낯설기만 했다.
그녀가 입을 닫았다. 이럴 때는 긴장하지 말고 외운 것을 또박또박 내뱉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명부의 수장이신 황후마마께서는 동남성왕의 장녀이시며, 온화하고 인덕이 높으십니다. 황후마마의 아래로 비빈 세 분을 포함한 열아홉의 후궁이 폐하를 모십니다. 저는 황제 폐하의 스무 번째 후궁이자 네 번째 빈으로, 호(號 : 본명이나 자(字 : 본이름 대신 부르는 이름) 외에 쓰는 이름)는 아직 하사받지 못하였습니다.”
“잘하셨습니다. 나머지 부분은 말씀하지 않으셔도 잘 외우신 것 같습니다.”
보기 드물게 칭찬을 하는 훈육 상궁을 향해 기하는 그제야 빙긋이 웃었다. 긴장이 풀려 노곤한 몸에 수마가 찾아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마차가 빨라져 덜컹거림이 심했지만, 그것에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는 않았다.
북성은 전쟁이 잦은 곳이었다. 하여 제후의 아들이라 할지라도 성에 숨어 편히 살 수만은 없었다. 아버지와 형님께서 그러하셨듯이, 기하 또한 검을 들 수 있는 나이가 되면서부터는 크고 작은 전장의 선봉에 섰다.
이런 고운 옷을 입고 그분 곁으로 가는 날이 올 줄 알았더라면,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될 곳엔 참전하지 않았을 것을. 면경에 비친 초라한 몰골에 그런 못된 생각을 했다.
지금도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국경을 호시탐탐 노리는 외적들을 토벌하며, 밤낮없이 칼을 휘두르고 있을 군사들이 수만이다. 그런 그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 아버님과 형님께서 어떤 마음으로 이 혼인을 받아들이셨다는 것을 알면서 어찌 그런 마음을 품었을까. 어리석다. 어리석고, 어리석다.
“금일부터 이틀간은 쉬지 않고 달릴 것입니다. 이곳은 산세가 험하고 묵을 만한 곳이 없습니다. 이틀 후에는 머무실 곳을 정해 두었으니, 불편하시더라도 참으십시오.”
“그리하면 뒤따르는 이들이 힘에 부치지 않습니까? 묵을 곳은 상관없습니다. 군영에 있을 때는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달릴 때도 있었습니다.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서 잠든 적도 많습니다. 하니, 저는…….”
“황제 폐하의 후궁이 되실 분이시지요. 호를 받지 않으셨으나 이미 빈의 자리에 오르셨습니다. 그런 말씀을 입에 올리시면 황제 폐하께 누가 됩니다.”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 긴 침묵이 맴돌았다. 제 생각이 짧았다. 황제께 진상 올릴 물자를 실은 거대한 수레, 그것을 호위하며 밤낮없이 달리는 이들을 위해서라는 변명을 떠올리다 이내 입을 다물었다.
사소한 것 하나가 황제께 누가 된다. 아득히 먼 곳에 있어 차마 닿을 수도 없었던 분께. 두려움이 눈앞을 가로막았다.
하나, 그것보다는 두근거림이 먼저였다. 꿈에도 잊을 수 없었던, 늘 먼발치에서 겨우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분을 향한 그리움. 단지 그것이었다.
* * *
황도에 들어서기 전 마차를 갈아탔다. 지금까지 타고 온 것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화려한 것이었으나, 지나치게 크고 무거워 황도로 들어서는 북문의 비탈진 거리에서는 몇 번이나 가다 멈추기를 반복해야 했다.
황실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 주위로 백성들이 모여들었다. 선대에서부터 이어져 오던 태평성대는 절정으로 치달아, 어느 곳을 둘러봐도 갓 제위에 오르신 황제를 향한 칭송이 이어졌다.
다행이었다.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겨 가까스로 얻은 자리에 쏟아지는 찬란한 외침. 마치 애초에 그 자리는 그분의 것이었다는 듯, 무지한 백성들은 칭송의 노래로 황제를 향한 마음을 내비쳤다.
“어찌 그러십니까?”
“예?”
“안색이 어두우십니다. 혹, 미령하신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닙니다. 그저,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어…….”
“무엇이 말입니까?”
“황도에 들어서니 저도 모르게 긴장이 되었나 봅니다.”
기하는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빠끔히 열린 문틈 사이로 온화한 제국민의 표정이 보였다. 모두가 평온하고 따뜻한 얼굴이었다. 늘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북성의 백성들과는 다른 얼굴. 가슴이 시큰거렸다.
“반나절 후에 황궁에 도착합니다. 몸가짐을 바로 하신 후에 정식으로 첩지를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곤하시더라도 초야(初夜)까지는 견디셔야 합니다.”
초야(初夜).
저도 모르게 귓가가 달아올랐다.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초야(初夜), 그분과의…….
“마마?”
“예?”
“정말로 괜찮으십니까? 열이 오르시는 듯합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기하는 가까이 다가오려는 그녀에게 손사래를 치며 열이 오른 뺨을 어루만졌다. 뭉툭하고 굳은살이 밴 손, 검을 잡았던 투박한 손끝. 황실의 여인들은 눈앞의 훈육 상궁처럼 단아하고 기품이 넘치겠지. 이런 못난 손을 가진 사내는, 아마 황궁에 없을 터였다.
기하는 훈육 상궁의 의문스러운 시선을 외면했다. 조그마한 틈으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북성은 추위가 한창인데, 이곳은 아직 포근하고 따뜻했다. 활기가 넘치는 저자는 생기 넘치는 이들로 가득했다.
북문의 초입부터 황실에서 나온 황제의 근위대가 마차를 에워쌌다. 백성들의 기쁨이 넘실거렸다. 그분은 이런 곳에 계시는구나. 비록 참담한 나날을 겪으셨다지만, 이토록 아름답게, 찬란하게.
“황도는 활기가 넘칩니다.”
“모두가 잘 먹고 잘 사는 탓이지요. 선황 폐하께서 이루어 놓으신 은덕입니다. 황제 폐하께서도 그것을 잘 알고 계시지요.”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잠시 눈을 붙이시지요. 고단한 여정이 되실 것이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딱딱하고 무거웠다. 고되고 오랜 여정은 여인의 몸으로 쉬이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닐 터였다. 황궁을 떠나온 지 100일이 지났다. 일순간 그녀의 얼굴에 애틋한 그리움이 번지는 것 같아, 기하는 슬그머니 미소를 감추었다.
* * *
“제후 북성의 왕, 서가 연의 차남 기하를 빈(嬪)으로 봉한다. 처소는 태화당(台華堂)으로 하며―.”
우렁차게 교지를 읽어 내려가던 종사(從事)가 말끝을 흐렸다.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던 황후 윤자경은 의문스러운 얼굴로 종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느낀 그가 허리를 조아렸다.
“어찌 말을 잇다 마는 것인가.”
“황공하옵니다, 마마. 그것이…….”
황후는 단아하고 기품이 넘쳤다. 어진 성품에 현명하다는 칭송은 북성까지도 자자했다.
“어서 말하라.”
다정했던 그녀의 음성이 돌연 차가워졌다. 과연, 제국의 황후였다. 직접 보지 않고 있음에도 느껴지는 그녀의 근엄한 기운에 종사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무거운 가채를 함께 틀어 올린 머리가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차라리 말을 타고 칼을 들어 적을 베는 것이 훨씬 수월할 것이라 생각하면서, 기하는 쉬이 고개를 들지 못했다.
“폐하께서 아직 호(號)를 내리지 않으시어…….”
“그럼 그대는 그것을 제대로 확인조차 하지 않고 교지를 받았단 말인가?”
“황공하옵니다, 마마. 폐하께 여러 번 주청을 드렸으나…….”
“어찌 이런 실수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빈께서 처음 황실의 일원이 된 날이 아니더냐. 한데, 어찌 이리 무례를 범할 수 있는가.”
서릿발 같은 황후의 음성에 종사는 머리를 납작 엎드렸다. 길게 늘어서 있던 후궁들조차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한가운데에 무릎을 굽힌 채로 앉아 있던 기하가 황후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빈, 내명부의 수장으로 그대에게 결례를 범한 것을 사과하오.”
“아니옵니다, 마마. 말씀 거두어 주시옵소서.”
다시 머리를 숙이는 순간 들리는 낮은 웃음소리에, 다정하게 웃던 황후의 얼굴빛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경박한 웃음을 흘리는지, 그녀의 곁에 서 있던 상궁이 서릿발 같은 표정으로 주위를 살폈다.
“영빈, 그대는 어찌 그리 웃는가.”
“황후마마께서는 늘 지나치게 너그러우신 것 같사옵니다.”
봄을 닮은 화사한 미소였다. 끝없이 늘어선 수많은 이들 중에서도 단연 빛나는 미모를 가진 이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황후를 응시했다.
“폐하께서 정사를 돌보시느라 지나치게 바쁘시어 빈의 호조차 제대로 하사하지 못하시니, 마마께옵서는 더욱이 폐하의 안위를 걱정하실 때가 아닐는지요. 신첩(臣妾)은 밤낮없이 정사에 매진하시는 폐하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옵니다. 청하옵건대, 마마께서도 이런 사소한 문제보다는―.”
“사소하다니. 영빈은 말을 삼가라. 이 어찌 사소한 문제란 말인가. 이는 법도가 아니다. 또한, 내명부의 수장인 나의 책임이기도 하다.”
고요하기만 했던 자경전(姿景殿)에 일순 싸늘한 바람이 부는 듯했다. 열아홉의 후궁이 길게 늘어선 그곳은… 무거웠다. 단지 그뿐이었다. 조아린 머리를 제대로 들기도 어려울 만치 무겁고 무거운 곳.
“내 빈에게 따로 할 말이 있으니, 그대들은 모두 물러가시오.”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까지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기하는 가까이 다가오는 발소리에 더더욱 머리를 아래로 향했다.
무릇 사람은 항상 겸손해야 한다. 나설 곳과 아닌 곳을 구분해야 한다. 경거망동하지 않아야 한다. 아버님께서 하시던 말씀이 가슴을 울렸다.
“빈, 그만 일어나세요.”
기하는 제게 내밀어진 자그마한 손을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손을 붙잡기에는 무디고 단정치 못한 제 손이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향긋한 분 냄새가 났다. 단아하고 그윽한 향이었다.
“먼 길 오시느라 고단하겠습니다. 불편한 점은 없었소?”
“예, 마마.”
“그대의 얘기는 내 오래전부터 자주 들어 왔소. 북성의 총아라 칭송이 자자하다지.”
“과찬의 말씀이시옵니다.”
그녀의 손은 따뜻하고 다정했다, 이렇게 마주 잡고 있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다정하신 분이시구나. 그분의 곁에 계시는 분이니, 응당 그럴 수밖에.
“영빈의 말은 마음에 담지 마세요. 지나치게 솔직하여 마음에 담아 두질 못하는 것뿐, 악의가 있는 자는 아니오.”
“예, 마마.”
“폐하께서도 해가 지기 전에는 당도하실 게야. 본래는 직접 맞아주셔야 하거늘, 워낙 사냥을 좋아하시어…….”
겸연쩍은 얼굴이었다. 그녀는 난처한 것이 분명했다. 이리도 아름다운 여인의 난처한 얼굴은 보고 싶지 않았다. 기하는 슬그머니 그녀의 손을 놓으며 단정하게 머리를 숙였다.
“소인, 아니… 신첩은 마음 쓰지 않습니다. 마마께서도 괘념치 마시옵소서.”
“마음이 곱구려. 이해해 주니 고맙소. 서운한 마음은 차차 풀어 나가면 되겠지.”
“예, 마마.”
“빈.”
“예.”
“우리 잘 지내봅시다.”
여인의 손은 이리 따뜻한 것이구나. 그분의 온기가 묻어 있기 때문인가.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기하는 훈육 상궁에게 며칠간 혹독하게 배운 절을 올렸다. 다정하게 맞이해 주던 그 모습 그대로, 그녀의 배웅을 받았다. 그런데도, 무거웠던 마음은 쉬이 편해지지 않았다.
* * *
아무리 수발을 드는 나인이라고는 하나, 비슷한 연배의 여인들에게 온몸이 구석구석 씻기는 것은 혀를 빼어 물고 싶을 만큼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왕족이라고는 하나 다른 성과 달리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었기에, 그런 호사는 일찍이 누려본 적이 없던 탓이었다.
망설이는 기하를 탕 안에 밀어 넣은 그녀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은 없었다. 민망함과 어색함에 저도 모르게 몸부림치다 몸집이 작은 나인을 밀어 넘어뜨려 다치게 한 뒤에야, 기하는 이를 악물고 겨우 그 손길을 받아낼 수 있었다.
“초야의 법도는 정 상궁에게 이미 배워 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혹, 이런 생활을 내내 해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 다음부터는 스스로 할 수 있게 미리 언질을 줘야겠다.
“마마.”
“아, 미안하네. 내 잠시 다른 생각을 하여―.”
“폐하께서 환궁하셨다 합니다. 채비를 서두르셔야 합니다.”
가슴이 뛰었다. 겨우 환궁이라는 말 한마디뿐이었는데.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혹여 방 안에 있는 아이들에게 들릴까 싶어 기하는 괜스레 뺨을 문질렀다. 뽀얗게 분칠한 제 얼굴이 무척 낯설었다.
“폐하께서 취하시는 것은 그 어떤 것이든 거부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절대로 소리를 내지 마시옵소서. 또한 싫다는 말을 입에 올리셔도 아니 되며, 눈물을 보이셔도 아니 되십니다.”
그녀의 품계가 어찌 되는지, 어떻게 대하고 지내야 할 사이인지에 대한 고민은 이미 머릿속에서 날아가고 없었다.
그녀는 모두 하지 말라는 말뿐이었다. 거부하지 말고, 소리를 내어서는 안 되며, 싫다는 말 또한 마찬가지. 절대로 눈물을 보이지 마라. 어찌 이리 이해가 되지 않는 말뿐이란 말인가.
“폐하께서 오십니다.”
바깥이 소란하다 싶더니, 머리를 만져 주던 상궁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그녀에게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은 대로 고요하게 일어나 문을 바라보고 섰다.
쿵. 쿵. 쿵. 쿵.
가슴이 요란하게 뛰었다. 열 번의 해가 바뀌었다. 그분은 과연 그날을 기억해 주실까.
“황제 폐하 납시오.”
방 안에 늘어서 있던 이들이 모두 그 자리에 엎드렸다. 기이하고도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아…….”
기하는 저도 모르게 입을 먼저 열고 말았다. 그런 기하를 탓하듯 상궁의 사나운 눈초리가 날아들었다. 그녀의 떨떠름한 시선을 받으며 입술을 물었다. 한낱 상궁에게 저런 눈빛을 받는다라……. 그래 그런 것이구나.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는 장신의 사내가 보였다. 고혹한 그림자를 뒤집어쓴 남자는 붉디붉었다.
“다들 나가라.”
낮고 힘 있는 목소리.
“폐하, 금일은 초야이옵니다. 부디 옥체를…….”
“혀를 도려낼까? 어찌 말이 그리 길어.”
싸늘한 일갈에 나뭇잎이 떨어지듯 우수수 흩어지는 이들을 바라봤다. 겨우 눈동자만 돌린 참이었다. 숨이 막혀 혀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머릿속이 까맣게 변한다. 예의를, 격식을…….
“북성의 총아라더니, 기본도 안 된 무지렁이구나.”
코끝을 타고 들어오는 비릿한 냄새보다 앞선 것은 턱 끝에 와 닿는 딱딱한 검집이었다. 차고 딱딱한 그것에서 진득한 피가 뚝뚝 흘러내려 새하얀 침의를 적셨다. 지독한 냄새였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것처럼, 그는 형형한 짐승의 눈을 하고 비죽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쓸 만한 것을 보내라 했더니, 어디 이런 것을 데려다 놓고 빈으로 맞으라는 것이냐.”
기하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의 검집에서 떨어진 피는 이미 침의를 흥건하게 적셨다. 그가 밟고 들어온 방 안 곳곳에 긴 핏자국이 따랐다. 짐승의 피라도 뒤집어쓴 것일까. 피에 절은 인영은 차가운 시선을 건넸다.
“남(南)성의 피가 흐른다더니, 그 생김이 꼭 그렇구나.”
해사하게 웃어주던 그의 얼굴은 조금 더 강인해졌다. 세월의 흐름에 뿌옇게 흐려지던 얼굴이 이제야 환하게 불을 밝힌 듯 선명해졌다.
그것은 기쁨이었을지도 모른다. 가슴에 묻어야만 했던 세월을 모두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헛된 꿈을 꿨다. 그러나 모두 부질없는 일이었다.
“네 어미는 너를 낳으며 죽었다지.”
“…예, 폐하.”
“차라리 잘됐구나. 네 어미가 살아 있었더라면 내 친히 그 사지를 찢어주었을 텐데.”
힐난도 조롱도 아니었다. 그것은 분노, 오직 그뿐이었다.
“어미를 잡아먹고 태어났다니. 그래, 그랬구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나. 어찌 이리 잔혹하게 구시나. 어째서, 어째서 이런…….
“잘하였다.”
“…무슨, 말씀이시온지…….”
“잘하였다 하였어. 어미 숨을 잡고 태어난 것 말이다. 나의 번거로움을 덜어주었지 않느냐. 상을 내려줘야겠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절대로 폐하께 되물어서는 아니 되십니다.’
엄한 얼굴로 가르치던 상궁의 말은 이미 잊었다.
“어찌 그런, 잔인한 말씀을 하시옵니까. 어머니께선… 어머니께서 대체 무엇을 그리 잘못하시었기에…….”
“설마 그것을 몰라 묻는 것은 아니겠지?”
툭. 단단한 검집이 고개를 들게 했다. 찬란하게 빛났던 영롱한 두 눈엔 싸늘한 분노만이 가득했다. 이리 장성하신 모습을 눈에 담을 수 있다니, 그저 꿈만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저도 모르게 뿌옇게 차오른 눈물에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긴 시간은 보내지 않아도 되겠지.”
성큼성큼 다가온 황제의 손에 어깨가 붙잡혔다. 오랜 시간 전장에서 구르다시피 하였던 기하는 제대로 힘조차 쓰지 못하고 그대로 고꾸라졌다.
황제의 숨소리가 밀려들었다. 피비린내, 기하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려 몸을 둥글게 말았다. 본능적으로 나온 생존의 몸부림이었으나, 그것은 황제의 힘에 의해 가볍게 저지되었다. 조금만 건드려도 흐트러진 침의가 나약하게 찢겼다.
“폐, 폐하…….”
“쉿. 짐은 말이 많은 것을 좋아하지 않아.”
거대한 공포가 밀려들었다. 몇 발자국만 떼면 침상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그 작은 움직임도 허하지 않았다. 두려움에 떠는 기하를 그대로 자빠뜨려 등을 보이게 했다. 목 앞으로 단단한 검집이 둘러졌다. 혹여나 도망치려 한다면 당장에 목울대를 짓눌러 숨이 멎게 할 것만 같았다.
“흣.”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불규칙한 숨을 간신히 내쉴 때, 황제의 커다란 손이 기하의 등을 짓눌렀다. 순간 입술을 다물고 숨을 멈추자, 꿈결 같은 향기가 밀려들었다.
“준비를 끝내라고 분명히 일렀거늘.”
황제는 몹시도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기하의 옷을 들췄다. 수 시간 동안 상궁 나인이 치장한 제 모습조차 수치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하는 슬쩍 고개를 돌려 황제를 바라봤다. 그는 아무 감흥 없는 표정으로 붉은 입술을 짓씹었다. 고아한 미간 사이가 사정없이 찌푸려지자, 어쩐지 서러운 기분이 들었다.
“움직이지 마라.”
얇은 침의는 흥분한 기색도, 색(色)을 기대하는 표정조차 없는 황제의 손에 의해 사정없이 찢겼다.
기억하지 못하신다고 하셔도 상관없었다. 기꺼워하며 반겨주지 않으셔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찬란한 미래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부질없는 욕심에 어쩐지 조금은 서러워졌다.
훤히 드러난 살결을 어루만지는 손길엔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민망함을 넘어선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졌으나, 황제의 눈은 무감각했다.
“분명 제대로 준비하라 일렀거늘.”
눈살을 찌푸리는 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기하는 달아오른 얼굴을 어쩌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하의가 완전히 벗겨져 고스란히 드러난 치부를 가릴 생각 같은 것은 감히 할 수도 없었다.
“폐, 하. 소인은…….”
“말귀를 못 알아듣나?”
황제는 나른하게 웃었다. 짐승의 피가 튄 의복을 대충 걸친 그가 지그시 눈을 내리깔자, 심장이 거세게 두근거렸다. 기하는 그제야 황제를 제대로 바라봤다. 늘 마음 한구석에 품고 있던 그 모습은, 지금껏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늠름하고 아름다웠다. 제가 감히 꿈도 꿀 수 없을 만큼, 고결하고 눈부셨다.
“입을 열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경고는 한 번으로 족해. 사내의 불붙은 색욕은 이성을 짓누르기 충분하다만, 나는 역겨운 건 아주 질색이거든.”
의문으로 차오른 기하의 눈동자가 바르르 떨렸다. 황제는 비죽하게 입술을 끌어올려 웃으며, 그제까지 기하를 위협하던 검집을 툭 내려놓고 스스로 하의를 풀었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그 모습을 쳐다보던 기하는 스스럼없이 드러난 황제의 남성에 눈에 띄게 경직되었다. 발기되지 않은 옥경(玉莖)을 스스로의 손에 쥔 그는 귀찮음이 가득한 얼굴로 손가락을 까딱했다.
“눈치라고는 뭐에 쓰려고 해도 없구나.”
냉랭한 음성이 상처가 되진 않을 거다. 절대로 쉬운 길은 아닐 것이라고 예감했으니까. 그분은 더 큰 상처를 받으셨다. 평생 거대한 짐을 어깨에 짊어져야 할 그에게 자신은 그저 죄인일 뿐이었다.
“빨아 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느리게 깜박이는 순진한 눈을 바라보며 황제는 짧게 코웃음을 쳤다. 과연 간악한 서연의 아들다웠다. 악귀 같은 혜비와 같은 피를 타고났으니 저런 표정이 가능한 것이겠지.
“두 번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하였던 걸 벌써 잊었더냐.”
훤히 드러난 피부는 사내치고는 희었다. 겉보기와 달리 잔 근육이 붙은 허벅지나 탄탄해 보이는 엉덩이가 움찔했다. 황제는 그저 비죽하게 웃었다.
“이것 대신 다른 걸 그 몸으로 받고 싶으면 계속 그리 있어도 좋아.”
황제의 눈이 검집으로 향했다. 기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무릎으로 두어 걸음 움직였다. 허벅지를 절반 정도 덮어준 침의를 조금 더 아래로 끌어내리는 손이 형편없이 떨렸으나, 표정만은 침착했다. 황제의 입꼬리가 조금 더 위로 올라갔다.
기하는 얌전히 무릎을 꿇고 양손으로 황제의 옥경을 쥐었다. 열이 바짝 올라온 뺨이 붉어지는 것이 부끄러웠다. 조심스럽게 입을 벌려 아무런 힘이 들어가지 않은 살덩이를 머금었다. 단 한 번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스스로의 모습이 열없어, 당장에라도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지루하다.”
입술로 물고 그대로 혀를 움직여도 그것은 반응이 없었다. 비릿한 피비린내와 함께 밀려드는 사내의 냄새는 그다지 유쾌하지도 않았다. 눈을 깊게 감자 사나운 시선이 겨우 가려졌다. 천천히 혀를 내밀어 기둥을 핥고 입술을 오므리는 순간, 어마어마한 악력이 기하의 머리카락을 잡아챘다.
“흐읏.”
하마터면 그대로 이를 세울 뻔하였다. 끔찍한 상상과 함께 밀려드는 고통에 겨우 눈을 뜨자, 그가 다시 보였다.
“짐의 인내심이 한계에 닿기 전에 어서 뭐라도 하는 것이 좋을 게다. 해가 뜨기도 전에 네 아비에게 목 없이 돌아가기 싫다면.”
“흐… 아, 폐…….”
“쉬잇― 입을 열지 마. 한 번 더 입을 열면 그대로 발가벗겨 금룡대에게 돌릴 테니.”
어깨를 밀어내는 힘 때문에 그대로 뒤로 쓰러진 기하를 올라탄 황제는 제 손으로 늘어진 성기를 짧게 훑었다. 겁에 질려 파닥거리는, 죽어가는 물고기를 해치울 시간이었다.
“흐, 아, 아앗…….”
“짐의 말이 농으로 들리더냐?”
귓가에 흩어지는 황제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낮고 음산했다. 어느덧 반쯤 발기한 옥경이 마른 비문(秘門)에 닿았다.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보인 적 없는 곳이 타인에게 벌려지자, 상상했던 것보다 더 큰 수치심에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죽은 듯이 가만히 있어. 네 다른 곳에는 볼일 없으니까.”
벌어진 허벅지 사이로 황제의 다리가 들어왔다. 건조한 곳에서 일어나는 마찰열에 눈앞이 희게 변했다. 기하는 천천히 그의 말을 되새김질했다.
‘말하지 마라. 죽은 듯이 가만히 있어라.’
다정한 입맞춤을 기대하진 않았다. 그래도, 적어도 한 번쯤은 손이라도 잡아주실 줄 알았다. 그것은 너무 큰 바람이었나. 지나친 욕심이었던가.
“흡, 읏.”
이를 악물어도 밀려오는 고통은 쉬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건조한 비문을 밀고 들어오는 열기는 지나치게 고통스러웠다. 아팠다. 그것 외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툭, 뒤가 터지는 느낌에도 기하는 이를 악물었다. 입술에서 피 맛이 날 때까지 숨을 참으니, 낮은 숨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뜨거움 속에서 그가 느껴졌다. 이상하게도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황제는 거침없이 움직였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뒤는 더 찢어져 마찰열이 크게 일었다. 감정이란 것을 느낄 여유는 없었다. 그저 숨을 죽이고, 눈을 감았다.
그의 손이 기하의 허리를 붙잡았다. 완전히 벌어진 다리 사이로 피가 뚝뚝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침소 안에 가득 번지는 냄새가 짐승의 피인지, 아니면 자신의 것인지 가늠할 겨를도 없었다.
점점 아래로 무너지는 기하의 허리를 바짝 붙잡은 황제가 깊이 추삽질을 하기 시작했다. 살과 살이 마찰하는 적나라한 소리에 가슴이 벌벌 떨렸다.
아프다, 아니다. 괴롭다, 아니다. 도망치고 싶다, 아니다.
기하의 얼굴이 바닥에 처박혔다. 황제의 힘에 엉덩이만 허공에 높이 들어 올린 제 모습이 수치스럽다고 느낄 여력도 이제는 남지 않았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대로 눈을 감으면 끝나는 것일까. 어쩌면 죽음을 자각하지도 못하고 모든 것이 끝날지도 모르겠다.
“읏.”
황제의 팔이 기하의 허리를 휘감았다. 숨이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기하를 끌어안은 황제가 그의 귓불을 사납게 씹었다. 날카로운 송곳니의 느낌보다는 귓가에 흩어지는 그의 숨소리가 먼저였다. 그것은 아득하게 멀어지는 정신을 붙잡아 주기에 충분했다.
긴 숨을 내쉬며 황제가 파정(破精)했다. 제 몸 안에 퍼지는 뜨거움을 느끼며, 기하는 그제야 밀어냈던 숨을 쉬며 간헐적으로 몸을 떨었다. 여전히 아프고, 여전히 뜨겁고, 이제는 완전히 조각나 찢어진 마음은 피를 줄줄 내었다.
“계집이 아니니 회임할 일은 없어 다행이지 않느냐?”
가슴을 난도질한다 해도 상처받지 않을 거다.
“만약 그랬다면 내 손으로 직접 그 씨를 없애야 했을 텐데.”
그것은 상처로 얼룩진 분의 분노일 뿐이니.
“아무리 더러운 피라도 기분은 좋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황제의 체온이 멀어져 갔다. 사라져 갔다. 기하는 가물거리는 시선 너머로 그를 가만히 올려다봤다. 숨을 크게 쉴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언제 이렇게 땀을 흘린 것인지, 피를 뒤집어쓴 몸이 덜덜 떨렸다.
‘저하.’
한 번쯤은 불러보고 싶었다. 그러면 그때처럼 웃어 주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기하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내 부를 수 없는 그 말을 속으로 삼키며 희미하게 웃었다. 수년간 가슴에 묻었던 연심이 조각나 찢겼다. 그런데도, 그가 너무 가엾고 아파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드러난 치부를 가리자, 황제의 얼굴 가득 비웃음이 걸렸다. 기하는 머릿속으로 제 꼴이 얼마나 보기 흉할지를 떠올리며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잔뜩 부어오른 비문 사이로 피가 흐르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황제가 허공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흐린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몸을 반쯤 세운 기하가 몸을 조각내는 통증에 숨을 몰아쉴 즈음, 소리 없이 다가온 궁인들이 황제의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아직도 꼿꼿이 서 있는 황제의 옥경과 그 주변을 젖은 천으로 닦았다.
“네 아비는 대체 뭘 믿고 널 보낸 거냐?”
그는 가까웠고, 또한 지나치게 멀었다.
“그런 눈으로 볼 것 없다. 너 같은 것은 거리의 창부로도 못 쓰일 것 같으니.”
비죽한 웃음이 시야 가득 들어왔다. 빼곡히 찌르는 그의 말을 되새김질하며 간신히 몸을 추슬러 허리를 세우자, 미소조차 지운 싸늘한 얼굴이 보였다. 어찌나 입술을 깊게 물고 있었던지 여린 피부가 너덜거리는 것만 같았다. 쓰고 비린 맛에 절로 눈이 감겼다.
“초야도 치렀으니 호를 내려야겠구나.”
기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화려하게 꾸며진 신방은 진득한 핏자국, 발자국으로 더럽혀졌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찢어진 침의를 추스르던 손끝이 덜덜 떨렸다. 울음이 터져 나오려 했지만, 목구멍을 불쏘시개로 쑤신 것 같아 그저 숨을 참았다.
“여봐라.”
“예, 폐하.”
“북왕 서가 연의 아들 기하를 무(無)빈이라 하겠다. 북성에서 진상한 것들은 전부 백성들에게 풀어라. 북성의 것은 황궁 안에 단 하나라도 남겨 놓아서는 안 될 것이다.”
“예, 폐하. 분부대로 거행하겠나이다.”
“무빈을 잘 감시해라. 혹여 버러지 같은 제 삶이 기구하다 혀라도 깨문다면 북성을 잿더미로 만들 터이니, 내 명이 있기까진 아무 일도 없어야 할 것이다.”
툭. 툭. 뺨을 다독이는 손길은 투박하고 거칠었다. 가차 없이 등을 돌리는 황제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먼저 문을 열고 나서는 그의 뒤로 긴 행렬이 따랐다.
기하는 우두커니 앉아 그의 모습을 끝까지 바라보았다. 놀란 상궁 나인들이 뛰어 들어와 손을 내밀며 부축하려 들었으나, 그녀들의 고운 손을 밀어냈다. 그제야 뚝 떨어진 눈물이 투박하고 못난 손등을 적셨다.
긴,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