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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장 1: 다른 세상 (14/18)

종장 1: 다른 세상

국경 근처에는 파란 꽃이 폈다. 마지막으로 헤어진 날 밤, 사마계는 그 사람에 대한 기억밖에 없었다. 후에 누군가가 그가 지나온 국경 근처에 파란 꽃이 핀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그랬던가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날 밤, 절대로 잊지 못할 그날 밤.

“……응?”

―마지막 기억은 고통이었다. 손발이 차갑게 식고 목이 아파 피를 토하는 걸 참을 수 없었던 때.

“일어나셨습니까?”

목구멍 속에서 서늘한 기운이 북받치는 걸 느끼며 눈을 뜨자 보이는 건 낯선 천장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낯선 수레의 지붕이었다. 귀에 들리는 목소리는 옥구슬이 굴러가는 것처럼 고왔다. 향 역시,

“너, 너는……?”

화사하고 향긋했다. 인생에서 단 하루, 제대로 안아 보지도 못하고 멀어지는 것만 느껴야 했던 바로 그 향이었다.

“걱정 마세요. 황후 사마계는 죽었으니까.”

정말로 자신과 똑 닮아 있었다. 언젠가 이 애가 황상 앞에 나타나 자신의 출신을 속였던 게 말이 되지 않을 정도로 닮았다. 사마계는 회순이 자신을 생각해 이 아이를 봐주었던 것이라고, 지금에서야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곧 납사(沙蠟)국의 국경에 도착합니다.”

“…….”

“오른쪽 주머니에 당분간 요기할 것이 있고, 왼쪽 주머니에 약간의 패물이 들어 있습니다. 호신이 필요하다면 채찍을 쓰세요.”

채찍이라는 말에 몸을 움직이자 가슴 위에 얹혀 있던 것이 툭 굴러떨어졌다. 팔찌처럼 돌돌 말려 있던 구리 채찍이었다. 해산. 사마계는 눈앞의 아이를 대신하듯, 아니, 자신의 죄책감에서 도망치듯 한결같이 아끼고 애틋하게 여겼던 아이를 떠올렸다.

“……나를 원망하니?”

쓸 줄도 모르는 구리 채찍을 주워 어루만지며 자그맣게 읊조렸다. 수레를 모는 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안하구나.”

할 말이라고는 이것밖에 없었다. 나 역시 절박했다고, 나 역시 미련이 남아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조차 할 수 없었다. 나 역시 너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고.

그리고 한참 동안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미려가 수레를 모는 삐거덕거리는 소리만이 주변에 들리는 소음의 전부였다. 그러다가 사마계가 노곤함에 까무룩 잠이 들기 직전 미려가 입을 열었다.

“아니요. 전혀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전 지금 생활에 매우 만족하고 있으니까요. ……약간은 감사하고 있습니다.”

사마계가 살짝 몸을 일으켜 수레를 모는 등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들이 다 해국 사람이라 그런지 월국인들에 비해 유달리 호리호리해 보이는 몸이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미려가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보았다. 사마계는 자신과 닮았던 얼굴이 지금 보니 제법 다르게 생겼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저렇게 당당하고 행복한 표정을 지은 적이 없었다.

“그러니 당신은 더 이상 제게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전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게 살고 있으니까요. 아니, 오히려 저를 욕하세요. 아버지인 당신 생각 따위 전혀 안 한다고.”

“……그래도 돼.”

“아니. 그러면 안 돼요. 나는 지금 이 순간까지 당신이 눈을 뜨지 않아도 전혀 상관없었어요. 당신이 죽으면 당신을 묻고 그대로 돌아갈 셈이었다구요.”

“……괜찮아.”

언제부터인지 사마계는 울고 있었다. 미려는 수레를 멈추고 사마계를 멀거니 바라보다가 다시 앞으로 몸을 돌렸다.

“말이 안 통하네.”

한숨 같은 말에 약간의 떨림이 있었다. 천하의 정미려도 저를 보며 괜찮다고 우는 이의 앞에서 완전히 침착할 순 없는 모양이었다. 두 부자는 그렇게 또다시 말없이 길을 떠났다. 사마계는 수레에 앉아 무릎을 안고 뒤쪽을 바라보며 점점 멀어지는 푸른 꽃밭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기르는 이 없는데도 만개한 꽃밭이었다. 비가 드문 국경 부근에만 피는 앉은뱅이 꽃들.

“내리세요.”

그리고 월국의 서북쪽 국경과 닿아 있는 납사국, 어조원 야독월의 고향이기도 한 곳의 국경에서 미려가 수레를 세웠다. 사마계는 생전 처음 보는 풍경에 조금 주춤거리면서 미려가 제게 남겨 준 보따리들을 챙겼다. 미려는 사마계가 수레에서 내리지 못하고 어물거리자 마부석에서 내려 사마계가 내리는 것을 도왔다. 사실 사마계는 혼자서 수레에서 타고 내려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럼 이만.”

그런 후에 미려는 정말 남을 대하듯 서슴없이 뒤로 돌아섰다. 사마계의 손이 저도 모르게 슬그머니 올라갔다. 문득 진해가 안아 보고 싶지 않느냐고 했던 물음이 생각났다. 한 번만 안아 보면 얼마나 좋을까. 그 작던 몸도 안아 보지 못했었는데. 사마계는 진심으로 그렇게 소망했지만 감히 미려에게 안아 보게 해 달라 청할 염치가 없었다.

그러던 그때, 또다시 미려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걸어와 자신과 꼭 닮았지만 성격은 전혀 다른 음인을 꽉 끌어안았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원망하지 않으니 잘 사세요. 이젠 아무것도 당신을 얽매지 않으니, 마음대로 살라구요.”

“흐읏…….”

사마계가 들고 있던 것을 모두 놓고 자신도 미려를 꼭 끌어안았다. 줄곧 응어리져 있던 것이 스르륵 녹아내리는 듯했다. 어느새 미려도 조금 울고 있었다. 사마계처럼 줄줄 울지는 않았지만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방울져 흐르고 있었다. 다만, 이것은 사마계에게 부자의 정을 느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사마계라는 한 사람의 음인에 대한 안타까움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러던 그때, 어디선가 말들이 한꺼번에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어깨를 움찔거리는 사마계를 대신해 미려가 고개를 들어 앞을 확인했다. 납사국 쪽에서 말을 탄 한 무리가 오고 있었다. 그 무리의 선두에 선 것은 미려의 얼굴 중 일부분을 닮은 서해 옥가의 가주, 옥길합이었다. 옥길합의 옆에서 청려가 함께 오고 있었다.

말이 멈추자 미려가 안고 있던 사마계를 떼어 억지로 뒤로 돌게 했다. 뒤로 돈 사마계의 눈앞에 말에서 내려 멍하니 이쪽을 보는 이가 보였다.

“아, 아아…….”

잊지 못할 그날이 떠올랐다. 모든 걸 버리겠다고, 너만 있으면 다 버릴 수 있다고 애걸하던 사내의 모습이 겹쳐졌다. 덜컥 이대로 괜찮은지 불안함이 엄습했다. 자신은 죄를 지었는데 이대로 살아 있어도 괜찮은지, 아이들에게 해를 끼치는 건 아닌지. 그러나 등 뒤에 제발 그의 뜻대로 살라고 아무것도 그를 얽매지 않는다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서 있었다. 미려는 신음만 흘리는 사마계의 등을 살짝 밀었다, 사마계가 달리기 시작했다.

“합, 합!!”

옥길합도 사마계가 달리기 시작하자 사마계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둘은 발을 뗄 때마다 젊어져 두 사람이 미래를 약조했던 때로 돌아가는 듯했다. 세월이 흐르고 몸이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무뎌지지 않았다. 사무친 그리움이 두 사람을 가파르게 끌어당겼다. 두 사람은 주변을 개의치 않고 한참 동안 끌어안고 있었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뜨거운 눈물을 납사국의 건조한 대지에 떨어뜨리며 다시는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끌어안았다.

“소가주, 이거.”

“뭐지?”

“진해 형님이 보내신 겁니다.”

다소 감동적인 분위기 속에 청려가 미려 쪽으로 다가와 슬그머니 서신을 건넸다. 내용을 미리 읽어 본 건지 봉인이 뜯겨 있었다. 서신을 찬찬히 읽은 미려가 그것을 곱게 접어 소매 속에 넣었다.

“너 타고 온 말 나 줘.”

“하…….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전 그럼 저거 끌고 월국으로 가구요?”

“어차피 해국으로는 안 돌아갈 거잖아? 여해루를 맡길 테니까 잘 써 봐. 거기서 뭘 어떻게 할 건지는 너 하기에 달렸지.”

서신에는 해산과 진해가 여각에서 아마도 회임했을 삼랑을 잡지 못하고 놓쳐서 추적 중이라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미려는 만약 아이가 태어나면 할아버님과 아버님들이 얼마나 좋아하실지 상상했다. 자신은 착하고 귀여운 사위이니 집안 어른들이 좋아하시는 일을 해야 했다. 거기다 삼랑, 이 건방진 놈이 형아가 씨를 뿌려 줬으면 감사히 여기며 몸을 보중할 것이지 어딜 감히 도망을 친단 말인가.

“소가주, 아버님들한테 그래도 인사는―”

“이랴!!”

미려는 청려가 타고 온 검은 말 위에 올라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사막의 건조한 바람이 불어 미려의 매끄럽고 긴 머리채를 흩날렸다. 말이 땅을 박찰 때마다 국경 부근의 푸른 꽃잎이 흩어졌다. 가볍게 날아오른 꽃잎이 검은 머리칼 사이로 헤엄치듯 지나갔다. 국경에서 헤어졌던 만남이 다시 이어졌다. 끊어졌던 연이 다시 이어졌다. 달리는 미려의 얼굴은 어느새 미소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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