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권 완결-7부 예비 정군 오진해 (2) (13/18)

환태자사건

8권 완결

차 례

* * *

7부 예비 정군 오진해 (2)

종장 1: 다른 세상

종장 2: 소문들

7부 예비 정군 오진해 (2)

‘미쳤어. 다들 미쳤다고. 어떻게 형제끼리 그런 짓을. 아니, 그런 것보다도 애는 대체 왜 낳은 거야? 씨발, 설마 원귀비에게 말도 안 되는 죄를 뒤집어씌운 게 다 이것 때문이었어? 말도 안 돼. 어떻게 자기 허물을 덮기 위해 나라를 구한 사람을 그 지경으로. 아, 혹시?’

생각에 잠긴 진해의 머릿속에 번뜩 뭔가가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유일청의 전 담당이었던 소족자 내관이 했던 말이었다. 그는 원귀비 연광과 지순이 절친한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지순이 죽기 전 큰 다툼을 벌였다고 했고 그로 인해 지순이 매우 상심했다고 했었다. 후에 화석정군은 그 다툼을 증거로 삼아 원귀비가 지순을 저주했다고 상소를 올렸고.

‘……둘이 붙어먹었다고 욕한 걸 덮어씌우려면 저주만큼 좋은 것도 없지. 저놈이 저런 험한 말을 했다고 입을 털면 다들 그러려니 할 테니까. 설마 둘이 잔 걸 눈치채더 라도 원귀비가 몰락한 걸 보면 살기 위해 입을 다물었을 거야. 시키지 않아도 도성 밖으로 도망가는 자도 많겠지. 좆 같은 하늘은 하필 그때 역병을 돌게 해서 일을 쉽게 만들었고.’

황제와 지순 황태공의 차마 입으로도 담기 힘든 행태를 떠올리던 진해는 곧 우울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귓가에 미친 듯이 웃던 월산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지순 황태공이 월산을 낳고 자결했던 일, 월산이 지순 황태공의 유부를 만난 뒤 자결 기도를 했던 일. 그 일은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지순 황태공은 산후의 우울증 때문인지, 그렇지 않으면 그제야 천륜을 거스른 게 두려워졌는지 아이를 낳고 자결했고 월산은 자신의 출생을 알게 되었다.

‘―주부군.’

신들린 듯이 웃다가 거의 실신하듯 정신을 놓은 월산을 눕혀 둔 두가 진해를 불렀었다.

‘저는 제 조부가 저지른 죄업을 목숨으로 갚을 셈입니다. 아니, 그런 것보다 저는 이분을 혼자 둘 수 없습니다. 세상천지에 이런 사람이 또 없으리란 보장은 없지만 그 사람은 황손이 아니지요. 그 사람은 후사를 낳아 저주받은 핏줄을 이어야 할 책무가 없습니다. 나는 이 사람이 불쌍해요. 더럽고 비참한 일을 하다 죽을지언정 저는 천륜을 어기고 태어난 이분보다는 깨끗할 것입니다. 예, 적어도 저는 그리 생각합니다.’

말하는 두의 얼굴은 평온한 듯했으나 진해는 그 얼굴 뒤쪽에 숨겨진 참담함을 읽을 수 있었다. 두와 그리 깊은 사이가 아닐 텐데 오히려 얄미워 죽을 지경인데 진해는 그 순간만큼은 두의 애틋하고 절절한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남들은 이 사람이 악마라고. 차갑고 비정한 이라고 하지만 정말로 사특하고 냉정한 이라면 저렇게 굴까요? 저렇게 상처받을까요? 저분이 얼마나 많은 지옥을 건너왔는지 아무도 모를 겁니다.’

두는 말을 하다 말고 제 옷을 걷어 올렸다. 두의 배에는 차마 보기도 힘들 만큼 커다란 흉이 나 있었다. 측근인 두가 이런 정도면 월산은 말할 것도 없을 터였다. 어깨를 움찔거리는 진해를 보며 두가 옷자락을 여몄다.

‘이제 와서 이런 말 하면 우습겠지만, 저는 적어도 당신만큼이라도 저분의 손을 잡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성월공 마마는 강하면서도 한없이 약한 분이시니까요.’

엷게 웃는 얼굴을 마주 보며 진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었다.

그리고 그 상황이 이어진 것이 바로 지금이었다. 진해는 혼사가 어쩌고저쩌고하는 와중에도 어떠한 의견도 낼 수 없었다. 팔짝팔짝 뛰려다가도 저도 모르게 몸이 멈칫거렸다. 만약 자신이 월산을 거부하게 되면 월산이, 소월이 어떤 상처를 받게 될지 더럭 겁이 났다.

만약 진해 자신이 저 상황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월산의 가장 깊은 비밀을 알게 되자 천진하던 소월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출가한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처음 사귄 친구와 정인이 되었다. 귀한 몸이 몰래 밖으로 빠져나올 정도로 진심이었다. 아마 그때까지만 해도 소월은 적통 황자를 제치고 황위에 오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죽은 아버지의 유부가 찾아와 아버지는 사실 자신을 낳고 자결한 것이라 이야기했다. 왜냐면 자신은 이 세상에서 태어나서는 안 될 인륜에 어긋난 아이라 낳자마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자신의 진짜 아버지는 황제인 백부라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이야말로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지껄였다. 월국의 황통이 희박해진 지금 적통 황자들의 피를 이어받은 그야말로 진정한 월국의 후사라고, 해국의 피가 섞인 삿된 것을 몰아내고 꼭 황제가 되셔야 한다고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그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행동할 수 있을까. 소월은 황족 입장에서 보면 천출인 진해에게도 진심인, 상냥한 아이였고 자신으로 인해 그리워하던 우부가 죽고 좌부도 도성 밖으로 출가했다는 진실에, 자신이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될 오점이라는 사실에 크게 충격받았다.

그리하여 충동적으로 자결하기로 했다. 온갖 원망과 온갖 미안함과 온갖 비참함을 어린 몸에 끌어안고 자결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머릿속에 자신과 각인한 양인이 떠올랐다. 자신이 죽으면 각인은 자연스레 해소될 것이다. 그러면 그는 새 짝을 찾고 자신을 잊어버릴 것이다. 그건 싫었다. 아무리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될 자신이지만, 적어도 그만큼은 자신을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그런데 어쩌지? 자신은 이제 그에게 좋은 기억을 줄 자신도 기력도 없는데 어떻게 그가 자신을 기억하게 하지? 어차피 죽게 될 거, 그와 함께 죽을까? 하지만 그는 어린 동생이 소중하다고 했는데, 아직 우부가 돌아오길 기다린다고 했는데.

어두운 방 안에서 필사적으로 구한 독약 병을 들고 어린 음인이 킥킥 웃음 지었다. 양 뺨은 눈물로 축축해지고 손바닥은 온통 식은땀 범벅이었다.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린아이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업이었다. 그리하여 반쯤 정신이 나간 황자는 하늘을 저주하며, 제 짝의 운명을 하늘에게 맡겨 버렸다. 파각의 후유증을 못 이겨 함께 죽는다면 저승에서 그와 해로할 것이고, 그가 살아남는다면 자신은 상처로 그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을 터였다.

이것이 바로 소월이라는 소년이 비정하고 냉혹한 성월공 안월산으로 거듭나게 된 과정이었다.

‘황상……, 한때는 정말로 내 좌부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개자식이었을 줄이야.’

진해는 가슴 깊은 곳에서 뜨끈하게 저리는 감각을 느끼며 이 일의 장본인 중 하나를 욕했다. 애초에 황제와 지순 황태공 두 사람이 붙어먹지만 않았다면 월산이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이고 자신도 그와 이렇게 뒤틀릴 일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월산이 진해에게 상처를 준 일이 사라지진 않았다. 진해가 그로 인해 입은 피해가 너무 막심했다. 심지어 다시 만나서도 목을 졸랐다.

“씨발! 차라리 몰랐으면 몰라 알고 나서 어떻게 욕을 해!”

진해는 며칠 동안 계속 도돌이표를 찍는 상념에 머리가 복잡해 꽥 소리를 질렀다. 진해가 소리를 지르자 바깥에서 지키던 호위가 슬쩍 들여다보았으나 단지 그뿐이었다. 걱정하는 것보다는 심드렁한 표정이었는데 진해가 그간 저 소리를 몇 번이나 반복했기 때문이었다.

“뭘 봐!”

그리고 괜히 그에게 짜증을 내는 것도 똑같은 순서였다. 호위는 다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방 밖으로 사라졌다.

정말 차라리 몰랐으면 좋을 뻔했다. 다 알아서 좋을 것 없다는 것, 월산과 진해의 사이에 그것만큼 사무치게 느껴지는 말이 없었다. 월산도 모르고 진해도 몰랐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진해의 머릿속에서 천진하고 밝게 웃는 소월은 과연 어떻게 자랐을까. 진해는 무엇보다도 그것이 궁금했다.

“……그래도 이대로 있을 수는 없지.”

하지만 집사의 말대로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야 했다. 진해가 그를 내치기가 망설여진다고 해서, 그의 처지를 진심으로 동정한다고 해서 그와 혼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왜냐면 진해는 자신과 몸과 마음이 맞는 이와 혼인하고 싶었으니까. 우부를 기다린다는 해묵은 그리움에서 벗어난 진해는 이제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고 싶었으니까.

“아버지한테 부탁해서 수를 써 놨으니까 괜찮겠지. 그런 것보다도 아직 해결 못 한 일을 처리해야지. 화석정군, 그 작자가 대체 왜 아이를 바꿨는지 그걸 알아내야 우리 해산 도련님이 제자리에 떳떳이 돌아올 거 아니야.”

마침내 며칠간의 생각을 갈무리한 진해가 손을 뻗어 탁자에 놓여 있던 월병을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집사가 강절곤이 보냈다며 가져온 것이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진해의 입맛에 딱 맞는 절묘한 월병이었다. 월병을 입안에 욱여넣는 동시에 진해는 근처에 놓여 있던 종을 흔들었다. 시종을 부르는 종이었는데 진해가 흔들면 문밖의 호위가 들어오게 되어 있었다.

“성월공 마마께 오늘 뵙자고 전해. 마음을 정했다고.”

월병을 양 볼 가득 밀어 넣고 입가에는 부스러기를 잔뜩 묻힌 채 진해가 호위에게 말했다. 겉보기는 참으로 별로였으나 진해가 마음을 정했다는 말에 호위는 반색했다. 그는 진해에게 고개를 숙이더니 곧 밖으로 나갔고 일각이 지나기 전에 돌아와 오늘 밤 처소로 오라는 전갈을 전했다.

* * *

월산의 침소에 들어선 진해는 지독한 술 냄새를 맡았다. 진해는 자신이 이 궁에 온 이후부터 월산에게서 종종 술내를 맡을 수 있었다. 자신도 이런데 그와 자주 마주치는 이들은 더할 것이다. 진해는 유일이라는 말이, 또는 운명이라는 말이 얼마나 큰 무게를 지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별일이구나. 소해, 네가 날 먼저 보자고 할 줄이야. 안 됐지만 창명후 집에 가고 싶다는 청이라면 들어줄 수 없어. 근친(覲親)이라면 몰라도 그 이외는 불허다.”

오늘내일하는 강백서가 죽더라도.

“나도 알고 있거든? 흥, 그리고 그 집이랑 나랑 무슨 상관이야! 후견인 창명후가 쪼그라들면 곤란해지는 건 너 아니었어~?”

진해가 비뚜름하게 웃으며 비꼬자 월산이 픽 웃었다.

“그래, 그렇겠지. 나는 이래 봬도 창명후를 제법 소중히 여기고 있으니 말이다. 응, 황제도 그리 생각하고 있겠지. 텅 빈 아버지 자리에 그럴듯한 노인네를 붙여 놓았다고.”

“…….”

“네가 말하지 않으면 스무고개라도 해 볼까? 네가 이기면 들어주고, 내가 이기면 네가 들어주고.”

“술 마셨어?”

냄새만 맡으면 술독에 빠졌다 들어온 냄새였지만 얼굴만은 참말로 멀쩡해 보였다. 그러나 진해는 어느 때보다도 월산이 취한 것을 확신할 수 있었는데 월산이 제 손으로 술을 부으며 피식피식 웃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첫 번째, 혹시 도성 밖으로 나가고 싶다고 그러는 거 아니냐?”

“뭐 툭하면 나가고 싶냐고 물어보네. 내가 나갔으면 좋겠어?”

“하하, 아니지, 아니지. 여는 지금 무슨 수를 써서든, 너를 잡아야 하는데, 네가 내게 원하는 것이 없어도, 뭐든 만들어 붙들어야 하는데, 전혀 아니지.”

“…….”

“흠, 그럼 뭘까. 이젠 전부 다 가진 소해가 원하는 게 뭘까.”

졸졸 따르는 소리와 함께 월산의 혼자 하는 스무고개는 계속되었다. 달팽이가 기어가는 것처럼 꿀렁꿀렁 미끄러지며 이어지던 수수께끼는 어느덧 중반에 이르고 있었다. 그쯤 되자 진해도 슬슬 월산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혀가 꼬이다 못해 몸을 가누기 힘들어하고 있었던 것이다.

“좋, 아. 그럼 열 번째. 도성의 다른 정인들을 만나게 해 달라, 맞지?”

“도성 밖에 있는 예쁜이들 빼고 다 정리했거든?! 다른 사람 앞에서 그런 소리 하지 마, 진짜 큰일 나니까!”

“뭐, 어떠냐. 여는 숨기지만 않으면 못 본 척해 주마. 아이도, 장강 강씨를 물려주고 싶다면 그렇게 하거라.”

“……응?”

“너는 어차피 여와 자고 싶지 않을 거 아니냐. 나도 다 안다. 이해하고말고. 여 같은 더러운 종자에게 씨를 뿌리기가 얼마나 힘들지를.”

진해는 엄청나게 파격적인 조건에 순간 혹했으나 이어지는 말에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 되었다. 아득히 멀어지는 정신을 부여잡으며 가까스로 월산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자신의 향은 어디론가 숨겨 버리고 술내만을 풍기고 있는 자그마한 음인을.

“누, 누가 그런 소리를 해!”

“그럼 너는 내가 네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에게 너를 아비라고 부르게 할 것이냐.”

“왜 못해! 내 애라며!”

“그 애는 저주받은 억겁을 물려받게 되는 것이다. 너는 여와 자는 것만으로도 더럽혀지는 것이야.”

“소월이, 너! 못 본 새에 어디서 이상한 소리만 배워서!”

진해는 자기 애라는 소리에 발끈했다. 아니, 어떤 놈이 감히 자신의 아기 예쁜이가 더럽다고 손가락질한단 말인가. 물론 태어난 것도 아니고 월산과는 아기 만들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자기 애한테 욕을 한다고?! 내 예쁜이들한테 뭔 말을 한다고?!

“세상에 나쁜 예쁜이들은 없어! 이 세상의 예쁜이들은 다 착하고, 다 예뻐! 예쁜이들이 얼마나 예쁜지 알아? 해산 도련님은 풍성한 멋이 있고, 미려는 말하면 입 아프고, 삼랑이는 새침한 멋이 있지! 월산이 너는 생긴 건 진짜 앙증맞아 가지고 말이야, 어?! 가끔 또라이 같은 짓을 해서 깨는데 그래도 예쁘긴 해! 그런데 말이야, 그런 예쁜이들이 내 애를 낳아 준다고 해 봐. 예뻐, 안 예뻐? 안 예뻐~? 안 예뻐, 어떤 새끼야, 당장 데려와! 머리통을 다 깨 버린다! 내 예쁜이들이 낳은 작은 예쁜이들이 왜 안 예뻐! 그 어리고 사랑스러운 것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그래! 죄~? 죄 같은 소리 하네, 에라이 염~ 병~! 죄는 자기들이 지은 거겠지, 캬악, 퉤! 애초에 자기들이 그 짓거리를 안 했으면 그 죄라는 게 생길 이유가 있겠냐고!”

진해는 누구에게 향하는지 모를 욕을 폭포수처럼 쏟아 냈다. 끼어들려던 월산이 멈칫할 정도로 격정적이고 장황한 욕설가(歌)였다. 한참을 씩씩대던 진해는 목이 말라 멍한 표정을 지은 월산의 손에서 잔을 뺏어 한 번에 들이켰다.

“케헥!”

독한 술이었는지 마시자마자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진해는 화끈화끈한 목구멍을 달래기 위해 급히 물 주전자를 찾기 시작했다.

“죄가 없다고……? 여에게, 진 이 멍에가 넌, 아무것도 아니라고?”

“아이고, 죽는 줄 알았네. 아니, 뭐. 그렇잖아. 네가 그렇게 나고 싶다고 고른 것도 아니고 또 골랐다고 해도 그건 네 아버지들이 붙어먹은 거지 네가 그런 것도 아니고, 네가 설령 그렇다고 해도……, 네가 평생 불행하게 살아야 할 이유는 없어! 연애도 하고 혼인도 하고, 아기도 낳고, 너 닮은 못된 아기한테 좀 시달려도 보고. 그렇게 살면 되는 거 아냐?”

물로 목을 씻어 낸 진해는 이젠 아예 월산의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월산이 젓가락 한번 대지 않은 안주들을 월산이 쓰던 젓가락으로 마구 집어 먹었다. 월산은 어찌 생각할지 몰라도 진해는 이 집 밥만은 마음에 들었다. 요리를 누가 정하고, 재료를 누가 들여오는지는 몰라도 고기반찬이 아주 수준급이었다. 높으신 분들의 밥상에는 뼈대 붙은 고기가 올라오는 법이 없었는데 월산의 밥상에는 때때로 갈비뼈가 그대로 붙은 것이 올라오곤 했다. 어쩌면 북방에서 전래한 요리일지도 몰랐다. 그곳에서 월산이 맛있게 먹던 걸 기억한 누군가가 만들어 올리게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 내가 그러지 못할 이유는 없지. 일단 보위에 오르고 나면 누구도 내게 위해를 가하지 못해. 그 누구도.”

“이거 간이 심심한 거 같은데 고기가 좋아서 그런지 술술 넘어간단 말이지. 전에 생선 삭힌 거랑 같은 곳에서 온 요리야? 냄새는 별론데 감칠맛이 제법이야. 입맛 없을 때 먹으면 딱이겠어.”

“너.”

“응?”

“여에게 청이 있다 그러지 않았더냐. 해 보거라. 친가를 못 가게 했으니 그거라도 들어줘야지. 단, 과거의 정인과 만나거나 해서는 아니 된다.”

“아니 왜 말이 바뀌어?!”

월산은 진해와 얼굴을 마주 보는 듯했으나 시선이 진해의 저편 허공을 보고 있었다.

“불경한 소문이 나면 곤란하잖느냐.”

“괜찮은데!”

“너만 괜찮겠지. 청이 없으면 그만 침소에 들거라. 아니면 오늘 여의 처소에 머물려느냐? 베개를 가져오라고―”

“영찰어사 일을 마저 마무리하게 해 주세욧!”

월산과 좀 깊은 말을 나눈다고 해서 월산과 자고 싶은 건 아니었다. 얼굴만 보면 귀여우니 못 잘 것도 없겠지만 자면서 목을 졸리는 건 백만 번 사양이었다! 물론 합의하에 진해가 목을 물어 주거나 살짝 조여 주는 건 백만 번 환영이었지만.

“영찰어사 일을 마무리하게 해 달라고?”

“그래. 지금 내가 일을 마무리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어? 그리고 나도 나름 영찰어사직에 애착이 있다고. 내 생에 처음으로, 내 힘으로 이만큼이나 높게 올라온 자리인걸. 사실 너도 내가 관직에서 쫓겨나는 것보다는 잘 마무리하는 편이 좋지 않아? 네 정군이 중도 퇴직한 것보다는 명예롭게~ 내려오는 거지. 캬! 얼마나 멋져!”

“황족과 혼인하여 황적에 오르는 것보다 명예로운 일이 어딨다고.”

“싫음 관두쇼. 어차피 볼 장 다 본 마당에.”

진해가 흥 토라지며 고개를 돌리자 월산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끔찍한 상흔에 금 간 유리창처럼 조각조각 나 있던 그의 머릿속에 아련하게 어린 시절의 소해가 떠올랐다. 그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가장 경멸당하기 두려웠던 존재가 자신을 긍정하고 아무런 죄가 없다 해 주었다.

하지만 안월산은 자신이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출생 이후에 월산은 자신에게 씌워진 굴레를 벗어 버리기 위해 온갖 더럽고 비열하고, 잔혹한 수도 마다하지 않고 제 손을 피로 물들였다. 북벌의 군공? 그건 월산이 행한 일 중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 월산은 손가락 하나만으로도 월국을 혼돈의 도가니에 빠뜨릴 수 있었다. 월산은 자신에게 죄를 지운 이 나라를 미워하고 증오하여 당장이라도 없어지길 원했었으니까.

그래서 황제가 되어, 자신이 이 가증스러운 죄의 요람을 부숴 버리고 싶었으니까.

“그래. 이제 와서 더 이상 뭐가 더 달라지겠느냐. 네가 함부로 입을 놀리고 다니지만 않는다면 그래도 좋다.”

“진짜?”

“두를 데리고 다닌다는 조건으로.”

“에이 씨. 알았어, 금붕어 똥처럼 달고 다닐게! 똥도 닦아 주게 해도 되나?”

하지만 이상하게 진해의 앞에만 서면 자신이 이 증오스러운 나라에서, 저주받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감각이 살아났다. 파각과 연이은 자결 기도 이후로 월산은 자신의 오감이 모두 죽어 버린 줄 알았다. 뭘 먹어도 맛있는 줄 몰랐고, 뭘 봐도 즐거운 줄 몰랐으며, 온갖 꽃의 화려한 색채도 바래 보였기 때문이었다.

“맘대로 하렴. 네가 진정으로 명한다면 군말 없이 따를 게다.”

그런데 진해만 보면, 자신이 상처 입히고 부서뜨린 이 양인의 앞에만 서면―

“농이야! 내 예쁜이들한테도 안 보인 똥꼬의 순결을 두한테 내줄 순 없지. 골려 먹긴 할 거지만, 크크크.”

월산은 킬킬대며 갈빗대를 물어뜯는 진해를 바라보며 어느덧 제 속에 회오리치던 검은 어둠이 사그라진 걸 느낄 수 있었다. 창명후가 와병을 핑계로 방문을 거부하던 것도 그리 거슬리지 않게 여겨졌다. 진해 같은 손자라면 좀 더 튕겨도 봐줄 수밖에 없다. 해산과 미려와 삼랑이 들으면 고개를 끄덕일 생각을 하며 월산은 처음으로 술잔 대신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이리저리 젓가락질을 하다 나중에는 진해처럼 갈빗대를 들고 고기를 뜯어 먹었다.

있는 줄도 몰랐던 요리는 북방에서 그럭저럭 먹을 만했던 요리의 맛을 꼭 닮아 있었다. 그때는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랐던 감각의 이름을 지금의 월산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 * *

“길을 비키거라~! 어사 대인 납신다~!”

“어허, 더 크게!”

“후……. 사품 영찰어사 대인 오진해 납시오!!”

“그렇지, 그 정도는 해야 사람들이 듣지.”

아무도 없는 회랑에서 큰 소리로 외치는 두의 인상이 험악했다. 진해는 월산이 자신의 외출을 허락하자마자 두를 앞세워 가는 곳마다 이렇게 자신의 행차를 알리게 시키고 있었다.

다행히 혈월대의 의장이 아닌 평범한 호위의 차림을 한지라 덜 수상해 보였지만 문제는 이런 일이 익숙하지 않은 두의 수치심이었다. 두는 자신이 외칠 때마다 사람들이 저를 보며 킥킥 웃거나 풉 하고 웃음을 뿜어 대자 전장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강한 압박감을 느끼며 당황했으나,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두를 보고 웃는 것이 아니었다. 두가 외칠 때마다 뒤에서 우스꽝스럽게 그를 따라 하는 진해를 보며 웃는 것이었다. 정말로 슬프게도 두만은 그 사실을 몰랐지만.

“오, 오 대인! 어서 오십시오, 오래간만에 뵈니 얼굴에 광채가 자르르 도는 것이!”

“그래, 그래. 잘들 있었지? 전에 다른 곳으로 옮기고 싶다고 했던가.”

“예, 예! 잊지 않으셨군요!”

“나는 받은 성의는 잊지 않아. 그래서 내가 굳이! 이렇게 심리를 마무리 지으러 온 거 아냐. 알지? 내 소식.”

“아, 알다마다요. 아, 이놈 정신 좀 봐! 감축드립니다, 오 대인! 아니 부군마마!”

“하하, 이 사람도 원. 그런데 안에 죄인은 별 이상 없겠지? 심리가 마무리되지 않았으니 아직은 황후거든. 일부러 괴롭힌다든 가, 식사를 빼돌린다든 가, 응?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야. 책임자인 내 체면을 위해서라도 말이야. 알아듣지?”

“아무렴요! 대인께서 저희를 위해 친히 발걸음 하셨는데 고작 그 정도를 못 지키겠습니까.”

“그래, 그래.”

진해가 황궁에 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황후궁이었다. 어조원에 고산홍패를 맡겨 두었다는 게 떠올랐지만 어조원 내관이 알아서 처리했겠거니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진해는 이미 우부와 좌부를 찾았다. 고산홍패는 그들과의 연을 증명하는 소중한 것이었지만 아버지들의 억울한 사정보다는 중요한 물건이 아니었다.

“야, 두. 너 글은 잘 쓰냐?”

“그럭저럭 쓸 줄은 압니다만.”

“그럼 지금부터 네가 서기를 해.”

“예?”

“에잉, 이 녀석 정말 허우대만 멀쩡해 가지고! 나는 영찰어사야! 그리고 여기에는 죄인을 심문하러 왔어! 근데 너 보고 서기를 하라네?”

“아.”

하루 종일 놀림을 당한, 혹은 놀림을 당했다고 생각한 두는 평소보다 예리함이 덜해 있었다. 진해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고, 조금만 더 하면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있다는 걸 확신했다.

“어험, 국혼 전에 황후의 자백을 받을 거야. 호적 정리를 말끔히 할 작정이라고.”

혈월대의 차가운 대장이며 월산의 오른팔인 두라면 진해가 이렇게 순순히 혼인 준비를 할 리 없으리라는 걸 간파했을 것이다.

“그, 렇군요?”

그러나 지금의 두는 완전히 진해의 손 위에 올라와 있었다. 진해와 월산이 사이좋게 둘만의 연회를 즐겼다는 사실 역시 두를 방심하게 했다. 진해는 월산의 출생을 알고서도 한 치의 변함 없이 월산을 대했던 것이다. 아니면 오히려 그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월산을 내치지 못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일을 월산에게 유리하게 돌려놓는 동시에 자신의 정인이었던 해원공도 본래 자리로 돌려놓으려고 오지랖을 부리는 걸지도 모른다. 두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황후마마.”

그리하여 두는 진해가 시키는 대로 엉거주춤하게 붓과 종이를 든 채로 그의 뒤를 따랐다. 황후에게 인사를 올리는 모양이 익숙한 것이 제법 황궁 물을 먹은 티가 났다. 부군의 의장을 갖추면 훨씬 그럴듯해질지도.

“……그래요, 오랜만입니다.”

황후는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그 아름다운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었다. 미려와 똑 닮은 얼굴이 반쪽이 된 걸 보자 진해는 따끔한 고통에 제 가슴을 움켜잡고 바닥에 반 바퀴 정도 구르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이제 슬슬 사건을 마무리 지으려 합니다. 황후마마께서 자백도 하셨겠다. 진술서를 남겨서 그걸 증거로 삼아 해원공 마마와 폐비 연씨를 복권시켜 황실을 안정되게 만들 겁니다.”

“그렇게 하세요.”

“그럼 진술을 시작하도록 하지요. 아, 마마께서 잘 모르실 거 같아 말씀드리는 건데 원래 이런 대사건에는 죄인이 자신의 출생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사서(史書)에 남겨야 하거든요.”

“영찰어사, 여 같은 것의 이야기가 뭐가 중요한가요. 그냥 여의 진술을 받아 가세요.”

“아니 그러니까 이게 진술의 과정이라니까요. 제가 괜히 급히 서기를 구해 왔겠습니까?”

황후 사마계는 진해의 말에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지만 이 일의 책임자인 진해가 그렇다 하니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애초부터 그는 심리적인 부담이 몸의 부담으로 이어질 만큼 심약하고 유약한 성정이었다. 그리고 진해는 몇 번 만나 보지 않아도 그런 황후의 성정을 잘 꿰뚫어 보았고 그 점을 십분 이용해 사기를 치고 있었다. 백성이 많은 만큼 사건이 많은 월국에서 누가 시시콜콜한 죄인의 과거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겠는가?

“……여는 해국의 왕이신 사마천과 궁인 선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여의 우부 되는 자는 여가 일곱이 되던 해 투기를 심하게 부려 강등되었고, 그 후에 궁 안 어디선가 죽었다고만 알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는 왕의 측비였던 덕비의 손에 자랐고 키워 주신 은혜를 갚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했습니다.”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얀 옷을 입은 채 시선을 아래로 깐 사마계의 속눈썹이 느릿하게 깜박였다. 그가 눈을 깜박이는 동안 사방이 조용해지고 어느덧 사마계는 오랜 세월을 거슬러 지금으로부터 이십 년도 더 전의 과거로 되돌아갔다.

―것은 얼굴밖에 쓸모가 없으니 누구의 측실로 들어가도 감지덕지일 것이다.

오랜만에 덕비의 부름을 받은 궁주 사마계는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덕비는 사마계를 볼 때마다 영 못마땅한 눈치였다. 자신과 시선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꼴을 보자 꼬였던 심사가 풀렸던지 피식 웃긴 했지만 사마계는 그래도 여전히 덕비가 무서웠다. 아니, 덕비뿐만이 아니라 궁의 모든 것이 무서웠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해국에서 음인의 지위란 양인 어린아이만도 못하고, 어떨 때는 진귀한 짐승보다도 못한 것이라 음인이면서 제대로 된 가문을 외가로 두지 못한 사마계는 누가 불면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촛불과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아비인 해국 왕은 사마계 외에도 두 손이 넘치도록 많은 자식이 있어 별다른 재주가 없는 사마계는 아비의 도움조차 함부로 바랄 수 없는 터였다.

“내 얼굴. 이 얼굴만 아니면 차라리 쉽게 궁을 나갈 수 있었을 텐데.”

그리하여 사마계는 제 소유의 자그마한 손거울을 바라보며 언제나 자유를 갈망하게 되었다. 제 아비와 닮았다는, 그러나 제 아비보다 더 볼만하다는 얼굴을 바라보며 몰래 눈시울을 적시고는 했다.

“그대, 왜 울고 있는 거지?”

하지만 사마계에게도 인생에 하나쯤 좋은 일은 있었다.

“악! 외간 양인이!”

언제나처럼 침울하게 층계에 앉아 있던 사마계의 손목을 누군가 거침없이 낚아챘던 것이었다. 사마계의 손목을 잡은 건 사마계를 끌고 가는 유부나 덕비궁의 궁인들밖에 없었다. 이렇게 뜨겁고 거친 손이 사마계의 손목에 감긴 것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궁의 음인은 외간 양인과 통정하면 교형에 처해졌다. 사마계가 기겁하는 것도 당연했다.

“아, 이런.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그러나 사마계를 놀라게 했던 손의 주인은 뜨거운 체온만큼이나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이였다. 그는 사마계의 손을 놓고 다섯 걸음 정도 뒤로 물러나 사마계에게 양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사마계는 소매로 얼굴을 가린 채 그제야 제게 말을 건 이를 볼 수 있었다.

“미안하게 되었소. 곤란하게 하려는 것은 아니었는데 그대처럼 아름다운 이가 눈시울을 붉히니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

“대가를 바라거나 해를 끼치지 않을 테니 내게 그대의 고민을 해결할 행운을 주면 안 될까?”

왕궁에서 마음대로 나다닐 수 있는 양인. 왕족이거나 혹은 고급 관리라는 말이었다. 저렇게 젊은데도 당당하니 분명 굉장한 가문의 자제일 것이다, 라고 사마계는 생각했다. 괜히 얽혀서는 곤란해질 것이라고도.

“……양인과 말을 섞는 것 자체가 내게는 크나큰 죄입니다.”

“아. 그러면 안 되는데. 듣자 하니 궁에서는 말 안 듣는 궁인이 있으면 발바닥을 친다면서? 그대의 몸에 상처가 나면 크나큰 손실이야.”

“손실?”

“뭐……. 그대가 신경 쓰이기 시작한 내가 곤란해질 거라는, 그런 말?”

사마계는 눈앞의 사내가 말하는 바를 몰라 저도 모르게 소매를 살짝 내리고 사내를 어리둥절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는 동시에 자신과 눈이 마주친 사내의 눈 속에서 꽃이 피는 것을 바라보았다. 사내의 눈동자가 그의 체온만큼이나 따뜻하고 화사한 색으로 피고 있었다. 사마계가 난생처음 보는 그런 눈이었다. 사마계 자신도 저도 모르게 빠져들 만큼 따뜻한 눈.

“그럼, 하나만 묻겠는데. 그대, 혹시 왕의 음인은 아니지?”

“…….”

“아니라는 거로 알겠어. 사실 그래도 상관없지만 혹여나 그대에게 해가 갈 수도 있잖아. 그나저나 아직도 뭐 때문에 울었는지 이야기해 주지 않을 건가? 나는 아직 미력하지만 그래도 그대의 작은 골칫거리 정도는 해결해 줄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리고 우습게도 사내는 사마계의 앞에서 꽤 당황하고 있는 듯했다. 처음에는 당당했던 모습이 사마계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볼수록 점차 흐트러지고 있었던 것이다. 몸이 가려운지 옷을 탁탁 털기도 했고, 머리를 긁적이기도 하고 손바닥에 땀이 고이는지 슬그머니 엉덩이 쪽에 문지르기도 했다. 사마계는 어쩐지 그 모습이 배다른 동생을 닮은 듯해 저도 모르게 빙긋 웃음 짓게 되었다.

“와…….”

그러자 사내의 얼굴이 더욱 우습게 변했다. 사마계는 저도 모르게 소리 내 웃었다.

“하지만 그 사내는 제 예상보다 더욱 굉장한 가문의 자제였습니다. 단순히 자제라고 부르기가 민망할 정도였지요. 그는 서해 옥가의 적자면서 후계 전쟁에서도 당당히 승리한 서해 옥가의 후사였습니다. 명실상부 차기 가주였지요. 그런 그가……, 가진 것이라곤 우미한 낯짝밖에 없는 제게 구혼한 것입니다.”

덕비궁에 쌓이는 혼수의 양이 엄청나 궁인들도 감히 입을 다물지 못했었다. 덕비는 화를 내는지, 웃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사마계 역시 엄청난 구혼 행렬에 겁을 먹었다. 새삼 자신이 얼마나 굉장한 양인의 눈에 띈 것인지 실감이 됐다. 자신은 그저 여기서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었다.

얼굴도 희미한 아버지가 처음으로 자신만을 위해 찾아와 치하했다. 네 덕분에 서해 옥가의 직계에 왕실의 피가 섞이게 되었다고 무조건 아이를 많이 낳으라 했다. 왕실과 서해 옥가의 사이는 오로지 너 하는 양에 달렸다고.

다른 이들도 모두 사마계가 당황할 정도로 사마계에게 잘해 줬다. 사마계를 괴롭히던 왕자나 궁주들도 사마계에게 상냥하게 대해 줬고, 궁인들도 스스로 사마계의 시중을 들려고 했다. 누군가는 사마계에게 자신을 서해 옥가에 데려가 달라고도 했다. 그간의 인생을 생각하면 참으로 구역질 날 정도의 태세 전환이었지만 사마계는 점차 그런 것들을 개의치 않게 되었다. 왜냐면 사마계 역시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준 사내를 더할 나위 없이 사랑하게 되었던 것이다.

“계. 이것은 내가 맨 처음으로 썼던 채찍이야. 이것을 계에게 줄게. 언제나 계를 지켜 줄 거야.”

서해 옥가의 차기 가주인 옥길합은 자신이 맨 처음 무술을 배울 때 썼던 구리 채찍을 신중한 태도로 사마계의 손목에 감아 주었었다. 사마계는 해국에서 가장 강한 이 남자의 곁에 있으면 누구도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지 못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가 제 손을 만지는 게 좋아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원래 외간 양인과 함부로 만날 수 없는 게 해국의 음인이었지만 옥길합과 사마계가 약혼했다는 사실과 옥길합의 들불 같은 성정을 달래기 위한다는 이유로 자주 만날 수 있었다.

“……합, 혹시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줘도, 화낼 건가요?”

“뭐? 다른 사람에게 준다고?”

사마계의 머릿속에는 어느덧 궁을 떠나기만 하면 좋다는 생각이 싹 사라져 있었다.

“네. 우리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애가 처음 무술을 배울 때 이것을 주고 싶어요.”

“그대…….”

“아이의 아이에게 이어지면 아이들도 우리를 영원히 기억하겠지요?”

사마계는 오로지 이 사내와만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마계 주제에 감히, 이 귀한 사내와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사건이 있었습니다. 덕비께서 저를 꾸짖으시는 걸 합이 보게 된 것이지요. 그는 그것을 참지 못했습니다. 제가 애걸해 어찌 넘어가는가 싶었는데…… 실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합은……, 제 머리에 관을 씌워 주고 싶다는 허튼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너를 왕비로 만들어 줄게. 옥길합이 자신을 보러 오지 않던 며칠간 사마계는 그가 자신을 버릴 것이라 생각했지만 옥길합은 그를 버리기는커녕 사마계가 창백해질 정도로 터무니없는 계획을 세워 돌아왔다. 놀랍게도 그는 자신이 왕이 된 뒤 사마계를 왕비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러지 마세요, 제발 부왕과 다른 형제들을 해치지 마세요. 저는 이대로도 괜찮아요. 당신만 내 곁에 있으면……!”

“당연하지. 그대는 앞으로도 내 곁에 있을 거고 나는 그대의 혈육을 해치지 않을 거야. 그대는 가뜩이나 눈물이 많은데 가족들이 죽으면 밤새도록 울겠지? 그럴 일은 없어. 다만 내가 좀 더 큰물에서 놀아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뿐이야.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 해국도.”

처음에는 반역하겠다는 생각인 줄 알았는데 옥길합은 아예 해국의 지위 자체를 높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황제의 자리를 차지한 뒤 자신은 상으로 봉국을 받아 독립하겠다는 것이 옥길합의 계획이었다.

“그러면 아무도 그대를 함부로 건드리지 못해. 나의 왕비가 되면 그대는 한 나라의 우부. 황제라도 그대를 대놓고 핍박하지 못하지. 하물며 한낱 측비임에야.”

“안 돼요. 너무 위험해. 그냥 앞으로 내가 조심할게요. 제발 멀리 가지 말아요.”

“걱정 마. 난 성공할 거야. 이미 진을 완성했는걸. 이걸 완성한다고 며칠 밤을 꼬박 새웠어. 실은 벌써 아버지한테 보여 드리고 전하께도 보여 드리고 오는 참이야. 물론 시험도 해 봤지.”

사마계는 그가 자신의 곁을 떠난다는 사실에 겁에 질렸으나 옥길합은 그저 웃기만 했다. 사마계는 빙긋 웃는 그의 옷자락에서 그제야 지울 수 없는 진한 피비린내를 맡았다. 놀랍게도 월국와 해국의 사이를 완전히 박살 내 버린 전쟁은 아름답지만 보잘것없는 음인이었던 사마계로부터 기인한 것이었다.

“…….”

사마계의 뺨에는 어느덧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진해는 제 동생을 꼭 닮은 얼굴이 말없이 울기 시작하자 마음이 영 좋지 않았다. 괜히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저 어쩌다 이런 대담한 일을 벌이게 된 것인지 그게 알고 싶어 친 사기였는데, 그런데 진해의 눈앞에 있는 건 평생 자신의 의지대로 살지 못하고 그런 생에 처음으로 함께하고 싶은 이와 헤어진 가련한 음인이었다.

가련한 연상, 음인!

“야.”

진해는 사마계가 마음을 추스를 동안 두에게 다가가 두가 쓴 것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악필이라고 트집을 잡으려 했는데 형부의 서기가 물귀신, 아니 동료 삼고 싶어 할 정도로 정자체로 또박또박 잘 써 놓았다.

“어험. 너 생각보다 잘 쓰네?”

“성월공 마마를 보필하기 위해서는 당연하지요.”

“그래? 근데 이걸 어쩌냐.”

“왜, 그러시는지요?”

“종이가 틀렸어.”

“종이요?”

“이 종이가 아니고 다른 종이에 써야 되는데 심문이 오랜만이라 깜박해 버렸네!”

이건 반은 진실, 반은 거짓이었다. 형부에서는 진술서를 받을 때 종이의 규격을 정해 놓고 있었다. 종이의 종류도 맞추면 좋겠지만 닥나무의 작황에 따라 종이 질이 달라지기 때문에 그건 굳이 걸고넘어지지 않는 편이었다.

“하, 하지만―”

“내가 갈까, 네가 갈래?”

말은 물음이었지만 뜻은 명령이었다. 두는 무척이나 심란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형부 쪽으로 향했다. 도중에 몇 번 뒤돌아보았는데 과연 자신이 지금 제대로 하고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 모양이었다. 뭐, 이제 와서 진해가 황후가 아이를 바꾼 진상을 알아 무엇하겠는가. 이미 국혼이 발표된 것을. 두는 떨떠름했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을 합리화했다.

“여기 손수건이요.”

“……고맙네.”

진해는 두가 사라지자 사마계에게 다가가 갖고 다니던 손수건을 내밀었다. 아기를 양육해 본 적 있는 진해는 손수건이 얼마나 유용한 물건인지 작업할 때 얼마나 유용한지 알고 있었고 저도 모르게 작업할 때처럼 사마계의 손에 손수건을 올려 주는 척하다가 자신의 직접 그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아차! 내 취향이라 나도 모르게 그만!’

진해의 내면에서 그나마 이성적인 진해들이 진해의 본능을 붙잡고 마구 따귀를 쳤다. 그리고 그중의 가장 이성적인 진해가 미려가 진해와 제법 오래갔던 상대와 일대일로 일방적인 결투를 벌인 기억을 꺼내 들었다. 상대도 미려의 명성을 알아 나름 진지하게 응했지만 결과는…….

미려가 뺨에 튄 피가 꽃잎처럼 보일 정도로 화사하게 웃는 장면은 진해 인생에서 무서운 광경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무서웠다. 본능의 진해가 스스로 제 뺨을 갈긴 뒤 정좌를 했다. 이성과 본능이 합치된 진해의 마음은 마치 명경지수와 같이 맑고 고요했다.

‘이 사람은 아버님, 미려의 아버님, 옥 가주 놈의 정인, 무섭, 어여쁜 미려의 아버님, 즉 내 아버님과도 같도다.’

“그대는 상냥하구나.”

“당신은 제게 큰 고통을 안기기도 했지만, 동시에 제게 가장 큰 기쁨을 안겨 주기도 했으니까요. 아는지 모르겠지만 미려는 제가 키웠습니다. 그러니까, 옥정려요.”

“아…….”

“뭐, 사실대로 말하면 그 때문에 나는 당신에게 정식 절차도 아닌 말도 안 되는 엉터리 심문을 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 강아지의 우부가 어째서 말도 안 되는 일에 끼어들었는가, 그것이 알고 싶어서요.”

사마계는 진해가 미려를 길렀다는 말에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진해는 그를 바라보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비파는 일곱 살 때부터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목소리가 원체 좋아 제가 노래해 달라고 자주 졸랐는데 그걸 비파 선생이 좋게 들었지요. 비파만 구해 오면 수업료는 받지 않겠다고 해서 제법 무리를 했어요. 내심 안 그런 척해도 어찌나 좋아하던지 밤새워 뒤척이더라구요. 어릴 적 미려가 얼마나 귀여웠는지 알아요? 머리를 이렇게 양 갈래로 묶은 다음 결이 상하지 않게 천으로 감아 줬는데 그게 꼭 만두 두 덩이가 앉아 춤을 추는 것 같았지요.”

진해는 갓난아기인 미려가 배냇짓을 하던 이야기부터 비파를 배우던 이야기, 은근히 골목에서 유명한 개구쟁이인 이야기, 비파 선생이 미려를 양자로 삼고 싶어 진해를 졸랐다는 이야기까지. 미려가 잠춘동에서 겪었던 좋은 추억이란 추억은 다 끄집어냈다. 황후는 붉어진 눈가로 그 이야기를 들었고, 가끔씩 눈가를 찍어 냈다.

“미려는 예쁘고 착하고, 바르게 자랐습니다. 고집이 좀 세긴 한데 미려의 짝은 그것도 좋게 여기니 앞으로도 행복할 거예요. 그런데 그런 미려한테 우부가 사람에게 누명의 씌워 살인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할 건가요? 미려는……, 이미 자기가 누구인지 알고 있어요.”

“……읏.”

“만나 보고 싶지 않아요? 정말, 단 한 번이라도 안아 보고 싶지 않아요? 다 큰 미려를, 옥정려를.”

진해의 말이 끝나자 눈가를 찍어 내던 손길이 멈췄다. 그것이 이제 소용없는 행동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사마계의 눈에서 폭포수처럼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가끔 콧물을 훌쩍였는데 미인이 그러니 하나도 밉지 않고 가엽기만 했다.

“……보고 싶어.”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짓씹어 붉어진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한 번만이라도, 그 애가, 잘 지내는 걸, 보고 싶어……. 나는, 이때까지, 그것을 위해…….”

가련하게 우는 얼굴에 그간의 고통이 남김없이 여실히 드러났다.

“한 번이라도 품에, 안아 보고 싶어…….”

“그럼 이야기하세요. 당신이 아는 진실을. 대월률은 지엄하고, 공정해요. 당신에게 마땅한 사정이 있다면 분명히 길은 열릴 거예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럼 그땐 뭐 대월률 밖의 일로 해결해야죠. 그건 당신이 생각 안 해도 됩니다.”

둑처럼 터진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사마계는 한참 동안 흐느꼈다. 진해는 그 흐느낌에서 자신과 우부를 비춰 봤다. 우물에 갇힌 우부는 그 긴 세월 동안 자신을, 자신은 우부를, 그렇게 서로를 그리워했었다. 그나마 자신은 우부랑 어릴 때 같이 살기라도 했는데 사마계는 갓 태어난 자식을 누군가에게 인질로 잡혀 아이를 살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살아야만 했었다.

“……그 애를 회임한 건, 월국으로 오던 길이었어.”

사마계는 미려를 회임한 때부터 이야기를 시작할 모양이었다.

“정전 협정이 맺어지고, 몇 년간 지지부진한 이야기가 오갔지. 결국 책임을 누가 지느냐, 그게 해국의 가장 큰 문제가 되었어. 그리고……, 부왕은 여와 합을 더 이상 만나지 못하도록 했다. 여는 부왕이 누구에게 책임을 넘길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지.”

애초에 이 전쟁을 기획한 것이 옥길합이었다. 하지만 옥길합이 전쟁을 마음먹은 것은 사마계를 더욱 고귀한 이로 만들어 주기 위함이었다. 사마계는 그것을 참을 수 없었다. 자신 때문에 옥길합이 월국으로 보내져 죽게 된다면 자신은 더는 살 수 없으리라 여겼다.

“그래서 부탁했다. 당시 옥가의 가주인 합의 아버지에게. 그는 합의 재능을 아끼고 큰 기대를 걸고 있었으니 합을 살리고 싶을 거라 생각했고, 여는 그의 계책에 응했지. 부왕은……, 서해 옥가에 빚도 지우고 월국의 장인국이 된다는 사실에 더할 나위 없이 흡족해했어.”

당시 옥길합은 정전 협상 중 지지부진하게 진행되던 국지전에 반강제로 나가 있던 참이었다. 전쟁이 실패로 돌아갔으니 국경이 좁아지지 않도록 힘을 다하라는 말에 어쩔 수 없이 나간 것이었다.

“여는 처음으로 부왕이 미웠다. 부왕이 찬동하지 않았다면 합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었다. 서해 옥가의 가주도 증오스러웠다. 합은 그가 이유를 들어 반대한다면 그리 서두르지 않았을 터였다. 여는 고국이 싫어 오히려 월국으로 빨리 떠나기를 바랐다. 그가……, 여를 보기 전에.”

그리하여 지지부진한 오륙 년간의 정전 사태는 황제 안회순과 궁주 사마계의 정략 혼인으로 마무리되었다. 옥가의 가주가 아들을 살리기 위해 인근의 봉국 몇 군데에 바람을 넣어 불온한 움직임을 조성했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전쟁이 길어지게 되면 가뜩이나 피폐해진 월국이 더욱 피폐해지는 것은 물론, 해국 역시 큰 손해를 보게 될 것이다. 안회순은 그래도 아직은 가장 큰 봉국인 해국에서 후를 들여 주변 봉국들의 움직임을 잠재웠다.

“……그런데 합이 따라왔어.”

하지만 다른 이들은 납득해도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만은 납득하지 못했다. 옥길합은 그 많던 가신을 다 어디로 보냈는지 단 한 사람만을 데리고 사마계를 쫓아왔다. 혼인 사절은 기겁했지만 그중 누구도 옥길합에 대적할 수 있는 이가 없었다. 결국 사마계가 직접 나서서 옥길합을 진정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는, 아직도 미안해. 거짓말을 했거든.”

이 패배자. 사마계는 한껏 화려하게 치장한 채 높은 수레 위에서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옥길합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도도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하면서 그를 비난하려고 했다.

“난 이제 황후야…….”

너는 나를 왕비로 만들어 준다고 했었던가. 그런데 나는 이제 왕비보다 더 높은 황후가 되었다. 네까짓 것 없이도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음인이 되었단 말이다.

“다시는 보기 싫다고 했어. 내 눈앞에서 사라지라고…….”

진해는 힘없이 중얼거리는 황후를 바라보며 그때 상황을 어렵지 않게 그릴 수 있었다. 황후는 연기를……, 지독하게 못했다.

“같이 도망치자던가요?”

“응…….”

“그런데 안 가셨군요.”

“응……. 여가 그와 함께 가면 해국과 월국이 함께 그를 쫓을 테니까. 그럼 그가…… 죽을 테니까.”

다시는 보지 못한다는 절박함이 두 사람을 이었다. 옥길합은 죽으면 죽었지 사마계에게 강제로 뭘 할 수 없는 인간이었고, 사마계는 옥길합이 제발 살아서 무사하기만을 바랐다. 혼인 사절은 두 사람을 떼어 놓아야 한다는 걸 알았으나 옥길합이 괜히 난동을 부려 사마계를 데리고 도망치면 큰일이었으니 그냥 그들이 하는 대로 두는 수밖에 없었다.

“……아기는 그때 생긴 거야.”

하룻밤을 꼬박 같이 보낸 옥길합은 마지막으로 사마계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본 뒤 품속에 지니고 있던 보 하나를 꺼내 반으로 갈랐다. 살아서는 이어지지 못할 연, 죽어서는 이어지자며 그 증표로 이것을 나눠 갖자고 했다. 사마계는 그 말에 답하지 못했다. 답하지 못하고 엎드려 소리 없이 울기만 했다. 옥길합은 그대로 밖으로 나가 해국으로 돌아갔다. 사마계는 그 뒤 일부러 고국에 대한 소식을 듣지 않았다. 아이가 생긴 걸 알기 전까지.

“연광에게는 정말로……, 미안하게 생각해. 강백서에게도. 연광은 자신의 자리를 뺏은 괘씸한 자일 여에게도 정말 잘해 주었어. 반쪽짜리나마 황후로 행세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다 그가 나를 가엽게 여겨 줬기 때문.”

“연광이요?”

“응, 그는 오히려 여를 가엽게 여겨 주었어. 그래서 여는……, 속죄의 의미로 해산이를 궁 밖에 있을 여의 아들이라 생각하고 키웠어. 그렇지 않았다면 해산이에게 합이 준 것을 주지 않았겠지.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역시 여가 잘못했어. 애초에 그때 되돌렸어야 했는데…….”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오른 건지 사마계의 얼굴이 침침해졌다. 술술 말하던 사마계는 한참이나 말을 잇지 않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손을 뻗어 진해의 손을 꼭 움켜쥐었다.

“그대, 해산이의 정인이라고 했지? 우리 정려의, 가족이라고 했지?”

슬픔에 젖어 있던 눈동자에서 기이한 열기가 피어났다.

“네.”

“그럼 무슨 일이 있어도 둘을 지켜 줄 거지? 앞으로도 쭉, 그렇게 해 줄 거지?”

“당연하죠! 하지 말래도 할 거니까 걱정 말라구요!”

사실은 진해가 지켜지고 있지만.

“그럼……, 한 가지 부탁을 더 해도 될까?”

“부탁이요?”

“정려를 감쌌던 보…….”

옥길합과 사마계가 정표로 나눴던 보. 미려가 서해 옥가 출신임을 증명했던 그것. 지금은 진해가 어딘가 곱게 싸 뒀을 물건.

“여가 죽으면 그걸 여와 함께 묻어 줘. 만약 여가 묻히지 못하고 버려진다면……, 그 자리에 함께 버려 줘.”

“왜, 왜 그런 재수 없는 소리를 해요?! 내가 구해 준다니까~?”

“어서 약속해 줘. 빨리. 그러지 않으면 화석정군에 대해 말하지 않을 테야.”

“아이고 참.”

이런 구석은 제법 미려를 닮았다. 울망울망한 눈으로 올려다보면서 고집을 부리면 당해 낼 이가 없다는 걸 진해는 엄청나게 잘 알고 있었다. 진해는 잠깐 고민하다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아이를 데려간 건 화석정군이야. 그는 자신의 남편인 지순 황태공이 죽은 일에 크게 화가 나 있었어. 원귀비에게도, 황제에게도. 그대라면……, 왜 그런지 알지도 모르지.”

“앗.”

진해는 의외의 사실에 깜짝 놀랐다. 놀랍게도 사마계도 월산의 출생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궁 안에 처박혀 있는 사람이라 전혀 모를 줄 알았는데. 근데 어떻게 안 거지?

“황상께는 이렇게만 말해도 충분히 아실 거야. 해산의 출생 역시 그가 증명해 줄 거야. 그가 그날…… 핏기가 가시지도 않은 아이를 데려와 씻기는 걸 여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니.”

“으아…….”

사마계는 말을 끝내고 진해의 손을 한 번 꾹 잡았다 놓았다. 진해는 상을 당한 정군이 훽 돈 눈으로 빼돌린 아기를 울고 있는 사마계 앞에서 씻기는 장면을 상상하고 오싹 소름이 돋았다. 아마 사마계가 씻기고 있는 아이는 해산뿐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황후궁에 찾아와 양인 아기를 빼앗아 인질로 삼아서 그나마 있는 해국 출신의 궁인들이 꼼짝 못 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여의 궁인들에게 여가 황후 자리를 지키게 하고 싶거든 협조하라고 했지. 우습지. 여는 그런 것 따위 원하지 않았는데 여가 황후 자리에 있어야 해국도, 그들도 무사할 수가 있다더군. 그래서 그들이 순순히 화석정군에게 협조했어. 강백서를 우물에 안고 뛰어든 이도 화석정군의 말에 동의하던 이였다. 여는 몇 번이고 우물에 가 보려 했으나, 그럴 때마다 혹시나 강백서가 정말로 죽어 있을까 봐……, 그가 살아 있으면…….”

머뭇거리던 궁인들은 화석정군이 황제의 핏줄이라고, 건강한 음인 아기라고 만약 이 애가 정식으로 황자로 인정받으면 너희 궁주가 낳은 양인이 이 궁에 설 자리가 있을 것 같냐고 윽박질렀다. 진해는 두려워하던 궁인들의 눈에서 탐욕이 피어나는 광경이 눈앞에 생생했다.

그 뒤는 안 봐도 뻔했다. 아이를 돌려 달라며 울부짖는 황후의 입에 산통이라는 명목으로 재갈을 물리고, 태어난 아이를 태어나지 않은 것으로 했다. 사실 그 아이의 좌부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기에 아이를 치워 버리고 싶은 건 그들도 내심 바라던 터였다. 순둥이인지, 혹은 약을 먹인 것인지. 모든 준비가 끝나자 화석정군이 양인 아기를 다른 방으로 데려가게 한 뒤 자신이 준비한 음인 아기를 데려왔다. 입과 손이 막힌 채 비통하게 울부짖는 사마계의 앞에서 힘껏 아이의 엉덩이를 때렸다.

갓 태어난 비극이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 * *

어떤 형제 이야기

돌아간 옥길합은 얌전히 왕의 명을 따르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듯했습니다. 가끔은 쓸쓸한 듯 그간 못 봤던 식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지요. 그리고 그는 동생 중 하나를 데리고 다니기 시작합니다.

―옥백합.

우부가 다른 음인 동생이고 우부의 출신이 그리 좋지 못해 별 관심을 못 받던 아이였습니다. 옥길합은 그의 앞에서 움츠리는 동생의 손을 잡아 금을 가르치고, 춤을 가르치고, 노래를 가르치고, 어여쁜 옷을 선물해 줬습니다.

‘가여운 백합이. 이 형 때문에 가문의 격이 깎여 별 볼 일 없는 곳에 장가가겠구나. 양인은 그나마 낫지만 음인은 가문의 격에 따라 신분이 정해지니 정말로 가엽다.’

가문의 자랑인 형이, 성공할 뻔한 계획이 재수가 없어 실패한 가여운 형이 쓸쓸히 말하자 백합은 마음이 슬퍼졌습니다. 형이 정인과 헤어지게 된 걸 알아 더욱 그랬습니다. 형이 자신에게 잘해 주는 게 쓸쓸해서 그런 걸 압니다. 그래도 다른 형제들을 두고 자신이 선택받은 건 뭔가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형님께 힘이 될 순 없을까요?’

옥백합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고 옥길합은 옅게 미소 지었습니다.

‘이 해국에서 음인이 가문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한정되어 있어. 너에게 그런 힘든 길을 걷게 하고 싶지 않아. 물론 잘되면 너는 이 해국에서 가장 존귀한 음인이 되겠지만.’

가장 존귀한. 그 말이 옥백합의 귀에 내리꽂혔습니다. 옥백합은 단 한 번도 귀해 본 적이 없었고 언제가 그러기만을 마음속으로 소망하고 있었습니다. 옥백합은 형이 다른 형제들을 제치고 자신을 택한 이유를 알았습니다. 옥백합의 마음속 깊이 품은 야심. 형은 그것을 눈치챈 것입니다.

‘왕의 음인이 되거라. 백합아. 그리고 왕자를 낳는 거다. 내 조카가 태어나면 나는 당연히 그 애를 돕겠지.’

이번에는 옥백합이 빙긋 웃음 지었습니다. 옥백합은 왕께 심려를 끼쳐 드린 사죄, 라는 명목으로 후궁으로 들어갔고 그리고 필사의 노력과 지원을 받아 왕의 총비가 됩니다.

보답으로 옥백합은 형이 죽인 아버지의 부검을 막고 왕이 형에게 힘을 실어 주게 도왔습니다. 문제는 자신이 낳은 아이가 생각보다 사랑스럽고 소중하다는 거지만 그런 건 앞으로 시간이 해결해 줄 것입니다.

* * *

돌아온 두가 본 것은 낡아 빠진 담요를 든 진해와 담담한 얼굴을 한 황후였다. 진해가 든 담요에는 희미해진 핏자국이 묻어 있었고, 두는 아주 잠깐의 사고 끝에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갓 태어난 아이를 받았던 담요. 두는 자신도 모르는 새 그만 창백하게 변해 버렸다.

“심문은 끝났어.”

진해는 뺨이 젖었으나 그래도 어딘지 모르게 침착한 태도의 황후를 뒤로하고 성큼성큼 방을 나섰다. 두는 황후 쪽을 흘끗 바라보다 서둘러 진해의 뒤를 따라나섰다. 둘이 나서자 발이 드리워져 황후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혼자 남게 되었다.

“부, 부군! 주부군!”

진해가 어찌나 거침없이 걷던지 키가 큰 두도 제법 따라가기가 벅찼다. 두는 언제나 헤실거리던 진해에게서 풍기는 기세에 속으로 꽤 놀라고 말았다. 언제나 엄살을 부리면서 깽깽거리던 똥강아지인 줄 알았는데 저런 얼굴을 할 줄도 알았던가.

그러거나 말거나, 두에게는 우선적으로 할 일이 있었다. 이 세상에서 두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바로 자신의 주공인 성월공 안월산이었다.

“이러신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황상께서 국혼을 발표하셨고 당신은 그걸, 따라야만 해!”

두가 진해의 팔뚝을 그러쥐며 소리치자 진해가 그제야 걸음을 멈췄다.

“놔, 이놈아. 팔 부러져!”

“그것, 당장 이리 주십시오! 당신도 그게 있으면 곤란할 텐데요? 황후가 낳은 아이, 그 아이가……!”

“황후가 낳은 아이가 뭐. 그 애가 이 일이랑 무슨 상관이 있어?”

“……예?”

성월공 안월산은 미려가 황제를 속일 때부터 이미 그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다. 성월공이 알고 있었으니 황제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둘이 입을 다문 이유는 일목요연했다. 왜냐면 그 애를 바깥으로 빼돌린 작자가 바로 성월공의 생부인 화석정군이었기 때문에.

“사산한 애를 원귀비 의 아이와 바꿔치기한 거잖아. 짐승 취급당하면서 버려진 게 안타깝지. 근데 그게 뭐. 그게 네가 이렇게 발작하면서 달려들 일이야?”

“읏, 하지만!”

“아니면 평생 이렇게 숨기고 있을래? 설마 보위에 오르면 다 끝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해원공의 출생이 밝혀진 지금 이 시국에?”

확실히 해원공의 출생을 몰랐던 때라면 몰라도 지금은 새 나간 소문을 막을 수 없었다. 거기다 황제가 해원공을 직접 살려서 데려오라고 했다. 사실 이때까지 해원공을 없앨 수 있었음에도 없애지 않은 건 해원공이 남의 자식이 아닌 황제의 핏줄이었고, 황제가 해원공을 괄시하면서도 그의 직위와 체면만큼은 보장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황제가 모든 사실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두는 때때로 말도 안 되는 상상에 휩싸이며 두려움에 떨었다. 만약 황제가 이 사실을 알고 있다면 어째서 금기의 상징인 성월공을 이때까지 살려 두었는지도 의문이며, 또한 왜 눈엣가시인 해국의 황후를 제거하지 않고, 왜 해원공에게 적법한 신분을 찾아 주지 않았는지 모든 것을 알 수 없었다.

“짐승의 새끼라니, 그 아이는 지금 살아서―”

“죽었어! 그 애는 죽어서 태어났고 화석정군이 그걸 보고 나쁜 마음이 들어 우발적으로 아이를 바꾼 거지! 겁이 나고 죄책감이 들어 도망간 것이고!”

“우, 발적?”

“그래. 우발적이지. 설마 두 너는 네 주군의 아버지가 이 모든 걸 계획적으로 꾸몄다는 건 아니겠지?”

“…….”

두는 멀쩡하게 살아 있는 황후의 자식을 죽었다고 하는 진해를 빤히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건 황제도 마찬가지였지만 눈앞의 이 작자도 마찬가지였다. 제 손으로 길렀다지만 그래도 원한을 진 이의 자식일 텐데.

“대인의 말이 맞습니다. 우발적으로 저지르신 겁니다. 제정신으로 할 짓이 아니지요.”

“그렇지? 그리고 그걸 부추긴 건 바로 황후고 말이야.”

“……예. 맞습니다. 황후가 화석정군을 부추겨 죄를 저지른 겁니다. 해국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음인 황자를 낳아야만 했으니까요.”

“똑똑하네, 두. 계속해 봐.”

“즉 성월공 마마께서는 이때까지 아무것도 모르신 겁니다. 성월공 마마께서는 그걸 모르시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후사를 이어 황통을 공고히 하고 싶으신 겁니다.”

“그래, 그래. 설령 화석정군이 돌아오더라도 성월공은 아~ 무 것도 모르는 거야. 화석정군 쪽에 뭘 했든 성월공은 제 혼인 사실을 알리려 했다거나 기타 등등 혈육의 정 때문에 그랬거나 혹은 네 독단으로 그런 거지.”

그러나 자신이 이해하는 건 둘째치고 눈앞의 이가 의외로 성월공의 편을 들고 있었다. 월산의 출생을 알고도 혼인에 동의했을 때는 의심스러웠는데 어쩌면 진심으로 월산과 혼인하려는 걸지도 몰랐다. 그래서 월산을 구해 주려는 게 분명했다. 증오스러운 운명의 연쇄에 휘말려 모든 걸 부수고 불태우는 길을 택한 월산을 조금이라도 편안한 곳으로 끌어내 주려는 걸지도 몰랐다.

“황후는 죽여야 해.”

그리고 그런 두의 말에 마침표를 찍듯 진해가 낮게 읊조렸다. 진해는 담요에 얼룩진 피를 바라보며 날카롭게 눈을 빛내고 있었다.

“이것으로 황후의 사통을 증명하고, 동시에 화석정군이 아이를 바꿨다는 것 역시 증명한다. 동조하는 무리는 소월이 알아서 만들라고 해. 아니, 반드시 소월의 손으로 해원공을 본래 자리로 돌려놔야 해.”

“어째서입니까?”

“그래야 혹시 그가 돌아오더라도 빚을 지운 셈이 되지. 소월이 우호적으로 나온다면 해원공도 먼저 반격할 수 없어. 쌓은 공으로 치자면 이미 소월이 훨씬 앞서고 있고. 또 해원공 본인이 멀쩡할 거란 보장도 없지. 제법 충격이 클걸?”

담요를 둘둘 말아 옆구리에 끼고 앞서 걸어가는 진해를 따르며 두는 다시 한번 감탄했다. 자신은 그저 숨기고 없애려는 생각만 했는데 진해는 월산이 보위에 오르기까지의 계획을 착착 세워 놓았다. 진해와 혼인하게 된다면 창명후의 세력을 손에 거머쥐는 것뿐만 아니라 저 잔머리라 칭하기 아까운 머리도 함께 손에 들어오는 셈이었다. 두는 그리 생각하며 어조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 오 대인!!!!”

하지만 어조원에 발을 들인 순간, 긴박했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뒤바뀌었다. 진해가 발을 들이자마자 어조원의 내관들이 우르르 달려와 그를 당장 둘러업고 행진을 할 것처럼 반겼기 때문이었다.

“뭐야, 왜 이래? 다들 원금 회수라도 했나?”

물론 진해 역시 영문을 알지 못함이었다.

“원금 회수 따위가 문젭니까!”

“뭐, 뭔데?”

그중 소연자 의 입술이 유별나게 휘어져 있었다. 진해는 소연자 가 당장이라도 덩실덩실 춤을 춰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터였다.

“일홍련이 알을 낳았습니다! 얼마 지나면 곧 아기 새를 볼 것 같아요!”

“……응?”

“……아기 새?”

진해는 일홍련이 알을 낳았다는 사실에 할 말을 잃었고, 두는 일홍련이 뭔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곧 정신을 차린 진해가 후다닥 만가헌 쪽으로 달려갔다. 진해가 만가헌에 들어서자 눈에 띄게 침울해져 있는 새들을 볼 수 있었다. 어조원의 다른 내관들을 기뻐했지만 그 새들의 담당 내관들은 마냥 웃지 못하는 듯했다. 만빙빙이 구슬픈 울음소리를 내자 만빙빙에게 약한 내관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만빙빙의 깃을 쓸어 주었다.

“말도 안 돼! 홍련이는 양것인데!”

“그러게 말입니다! 과연 고산국의 신조!”

“정신 차려! 고산국은 뭐 음양 조화가 반대로 되어 있는지 알아?!”

만약 고산국의 음과 양이 반대였으면 진해는 지금쯤 오천협을 우부라고 부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해도 할 말이 없어진 것이 정말로 홍련이가 둥지에서 알을 품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고산홍패와 알을 함께 품고 있었다. 홍련이는 자그마한 몸으로 알과 고산홍패를 동시에 품기 위해 진해가 본 것 중 가장 납작하고 넓죽한 모양으로 엎드려 있었다.

[뾰롱!]

“야 너 왜 내 홍패 반납 안 해!”

[뾰, 뾰롱~?]

“이 날강도 같은 놈! 가~ 암히 예물도 안 가져온 주제에 살림을 차려!”

[뾰, 뾰롱! 뾰로롱!]

홍련이는 진해를 보자 필사적으로 납작한 몸을 더욱 납작하게 만들며 눈치를 봤다. 진해는 뒤로 홱 돌아 홍련이의 담당 내관인 소연자 를 노려보았다. 분명히 자기가 오지 않으면 홍패를 창명후 저택에 보내라고 했는데!

“저, 저렇게 좋아하는데! 어떻게 떼어 놓습니까!?”

소연자 는 진해의 이글거리는 눈빛에 찔끔 어깨를 움츠리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진해는 소연자 와 홍련이를 번갈아 바라보다 이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홍련이가 낳았는지 어쨌는지는 몰라도 홍련이가 저렇게 품고 있는 이상 홍련이의 핏줄이 분명할 터였다. 만가헌의 다른 새들이 저렇게 기가 죽어 있는 걸 보아 쟤들이 낳은 알은 아닐 터이고.

‘진짜 고산홍패랑 그런 짓을 해서 낳았다는 건가……?’

홍련이가 홍패가 그런 짓을 하는 상상을 하자 진해는 갑자기 고산홍패를 아버지들에게 돌려보내는 게 망설여졌다. 새가 붕가붕가를 한 패물을 돌려보내다니.

“두.”

“예.”

“너 싸움 좀 하지? 그럼 저 새 좀 둥지에서 들어내.”

“예.”

“오, 오 대인!!!”

[뾰롱!! 뾰로롱!!!!]

“약속은 약속이잖아!”

홍련이는 진해의 말을 듣자 깃을 곤두세우며 반항하는 듯했으나 약속이라는 말에 금세 시무룩해졌다. 그래서 두가 자신을 둥지에서 집어 들어도 반항하지 않았다. 소연자 가 울상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는 걸 무시하며 진해는 소매에서 작은 붓통을 꺼내 들었고 고산홍패를 꺼내는 대신 홍련이가 품고 있던 알에 진하고 선명하게, [차압]이라는 글자를 적어 넣었다.

[뾰, 뾰롱?]

“오 대인……?”

“담보가 가치가 없어졌으니 어쩔 수 없지! 대신 저 알을 받아 가는 수밖에. 그렇다고 어린 걸 떼 놓을 수 없고. 두, 다시 집어넣어.”

두는 상황이 어찌 되는 줄 모르나 그냥 시키는 대로 새를 뺐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소연자 는 어딘지 모르게 감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 대인……. 아랫도리만 따뜻하신 분인 줄 알았는데…….”

“야, 착각하지 마! 알에서 깨어나면 당장 팔 거거든!”

“하하, 농담도 참. 저 귀한 걸 감히 누가.”

“소연자 , 너야말로 정신 차려. 너 홍련이가 여기 있어서 심각하게 손해 입은 나라가 있는 걸 몰라?”

“네? 손해요?”

“홍패연리익이 뭐냐.”

“고산국의 신조. 아, 아아!?”

소연자 는 감히 누가 어조원의 새를 매입할 수 있을까 코웃음 쳤지만 제 입으로 일홍련이 무엇이라는 걸 말하는 순간 진해가 누구에게 저 알을 팔려는지 깨닫고 말았다. 홍패연리익은 고산국의 신조, 고산국에서 한 세대에 한 마리만 나타난다는 귀한 새. 그리고 지금 월국에 바로 그 고산국의 패자가 와 있었다. 일홍련이 월국의 어조원에 입성한 뒤로 고산국에서 홍패연리익을 봤다는 목격담이 없으니 고산국 입장에서는 다음 대의 유일한 홍패연리익일지도 모르는 저 알에 무척 흥미가 있을 게 분명했다!

“아, 안 됩니다! 오 대인! 저 어린것을!”

“뭐래. 그럼 사고 치기 전에 말렸어야지! 그리고 홍패연리익이 왜 세대마다 한 마리겠어? 응?”

“……듣고 보니 그렇네요? 왜 세대마다 한 마리만 목격된다고 하죠?”

“뭔가 이유가 있으니까 그렇겠지. 어쩌면 아버지 새인 홍련이 쪽에 영향이 갈지도 모르고.”

[…….]

진해가 홍련이를 힐끔 바라보자 홍련이는 웬일로 아무런 울음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저 얌전히 알을 품고 있을 뿐. 진해는 소연자 에게 행여나 저 담보 글자를 지울 생각 말라는 으름장을 놓으며 자못 사나운 기세로 어조원을 나왔다. 다음으로 진해가 향한 곳은 바로 나라의 큰 손님들이 머무는 별궁이었다. 진해는 두에게 마치 보라는 듯이 당당하게 별궁으로 들어갔고, 대기하던 궁인에게 패자께 홍패연리익 건으로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다 이야기했다.

두는 어쩐지 눈앞에서 사기를 당하는 기분이었다.

* * *

“이야, 이게 누구야? 우리 아들 아니야?”

방탕의 끝을 달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웬걸, 제갈군무는 정갈한 무복 차림으로 둘을 맞았다. 수련 중이었는지 이마에 약간의 땀이 맺혀 있었다. 아마도 필요 없을 호위가 제갈군무의 뒤를 따라와 수건을 건넸다. 제갈군무를 바라보는 호위의 눈이 선망으로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좀 부담스러울 정도로.

“오랜만인데 한번 안아 볼까?”

“제갈 형이 음인이 되어 찾아오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음~? 이래도 돼? 모시겠다고 해 놓고 팽개친 나쁜 아이가 누구였지?”

“제갈 아빠! 너무 보고 싶었어요!”

진해는 주변 사람이 어이가 없을 정도로 빠르게 태도를 바꿔 제갈군무를 팍 끌어안았다. 물론 제갈군무의 체구가 더 커 진해가 안기는 꼴이 되었지만.

“근데 뒤에 저 이는 낯이 익은 듯하기도 하고, 누구야?”

“몰라요.”

“모르는 애야? 그럼 굳이 여기 있을 필요 없겠네.”

진해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두를 모른 척하자 제갈군무가 손을 슥 들어 올렸다. 그의 손은 누구의 이마를 튕길 듯한 모양새를 잡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면 그의 손가락 위에 작은 자갈 하나가 얹어져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남들이 그러면 평범한 장난질이었지만 고산국의 무인들은(고산패왕의 허락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출국할 수 있는 경지의 무인들은) 별 희한한 재주를 부렸다.

일단 제갈군무와 오천협이 상용하고 있는 향용술 이라는 것부터가 고산국 바깥에서는 눈이 뒤집힐 정도로 굉장한 묘기였다. 땅이 움푹 팰 정도로 강력한 다리 힘이라든가, 바위에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린다든 가, 말이 달릴 거리를 사람이 달린다든 가. 고산국 무인들이 행하는, 혹은 행했다고 전해지는 기행은 무궁무진했다. 제갈군무가 손톱보다도 작은 자갈로 뭘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뭔가를 하겠다고 하면 필시 위협적인 무언가임이 틀림없었다.

“죽이진 마세요.”

“설마 내가 사람을 죽이겠어. 필요하면 할 거지만.”

게다가 진해와 나누는 저 대화! 두는 무엄한 행동이라는 걸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칼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고, 언제든지 제갈군무의 행동에 반격하려고 했다.

자신의 귓가에서 딱, 소리가 날 때까지만.

“우, 우와!! 그거 뭐야? 그거 뭐예요!?”

“탄지공 말이야? 원래 촛불 끄려고 쓰는 건데 밖에서는 이런 식으로도 많이 쓰더라고.”

팔짝팔짝 뛰는 진해와 달리 주변의 궁인들 표정은 반반이었다. 경악한 이가 반, 고산패자에 대한 동경과 선망에 빠진 이가 반. 두는 쓰러지지도 않고 눈을 뜬 채로 기절해 버렸다.

“눕혀 놔. 일어나면 토할지도 모르니까 대야 같은 거 갖다 두는 게 좋을 거야.”

탄지공의 다음 희생양이 되지 않기 위해서 궁인들이 아주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여럿이 달라붙어 두를 들어 별궁의 빈방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진해는 제갈군무의 치근덕거림은 귀찮지만 그의 이런 재주는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우리 아들은 무슨 핑계를 대고 날 보러 오셨나? 일단 그걸 알아야 나중에 입을 맞추겠지?”

“아, 맞다. 혹시 홍패연리익이 어떻게 알을 낳는지 알아요?”

“응? 홍패연리익은 다 양것일 텐데 ?”

“그러니까 말이지요. 어조원에 홍련이가 알을 낳은 거 같은데 진짜 그거 홍련이가 낳은 건가. 어디 다른 데서 훔쳐 와서 자기 알이라고 우기는 거 아냐?!”

“혹시 네 고산홍패랑 홍패연리익을 같이 뒀어?”

“네.”

“그럼 고산홍패가 알을 낳은 거네.”

“―네?”

“홍패연리익이 양것이라 알을 낳을 수 없으면 고산홍패 쪽이 낳은 게 당연하잖아? 설마 그거 물어보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진해는 잠깐 자신이 아는 상식이 맞는 상식인지를 점검하기 위한 고찰에 들어갔다. 고산홍패는 생물이 아닌데 어떻게 알을 낳는다는 말인가. 그것보다 홍련이가 단순히 패물을 밝히는 변태라 그런 것이 아니라 진짜 고산홍패와 붕가붕가가 가능해서 그리 목을 맸던 것인가. 아니, 그것보다 패물이 알을 어떻게 낳지? 부, 붕가붕가는 어디로 하고, 어느 구멍으로 나온 거지?

“자세한 건 나도 몰라. 홍패연리익이 있으면 고산홍패가 있고, 고산홍패가 있으면 홍패연리익이 있다는 것밖에는. 하지만 홍패연리익이 알을 가지고 있는 걸 보면 그건 분명 홍패연리익이라는 소리겠지?”

“허어…….”

“그러고 보니 고산홍패는 제법 많은데 홍패연리익은 한 세대에 한 마리가 고작이구나. 이런 식으로 태어나기가 힘들어서 수가 적었던 건가. 여하튼 굉장한데? 한 세대에 한 마리가 아니라 두 마리가 생길 수도 있겠어.”

“흠……. 근데 왜 한 세대에 한 마리만 있는 거죠?”

“글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네. 하지만 뭔가 이유가 있겠지.”

진해는 고산패자인 제갈군무라면 홍패연리익에 대해 잘 알 거라 생각했는데 제갈군무는 진해가 추측하는 것 이상을 알지 못했다. 차라리 좌부인 오천협에게 물어보는 쪽이 더 나을 뻔했다. 물론 그가 옆에 있었다면의 이야기지만.

원하는 정보는 얻지 못했지만 진해에겐 제갈군무의 도움이 필요했다. 제갈군무는 현재 이 월국에서 가장 자유로운 사람 중 하나였다. 황제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고산국을 등에 업고 본인 자체도 고강한 무인이라 누구도 함부로 수작 부릴 수 없는 이. 진해에겐 지금 그런 사람이 필요했다.

“제갈 형한테 부탁이 있는데 홍련이가 품은 알을 ‘이’ 값에 사 줬으면 좋겠어.”

진해는 품에서 접은 종이를 꺼내 제갈군무 쪽으로 슥 밀었다. 제갈군무는 종이를 펼쳐 보더니 그것을 다시 반듯하게 접어 놓았다.

“좀 비싼 거 같은데? 고산국의 무인들이 강하고, 나도 패자라 운용할 수 있는 게 많긴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어. 패왕의 자리에 오르는 자는 일단 고산국을 위하긴 해야 하거든.”

“아이고, 이 정도는 해 줘야 수지가 맞지. 까짓거 덤 하나 더 얹어 줄게. 내가 그 결투! 제갈 형이 원하는 그 결투 하게 해 준다, 그냥!”

“호오.”

“무조건, 무조건 하게 해 줄게! 이기든 지든 난 상관하지 않을 테야. 제갈 형은 너그러운 사람이니까, 그렇지?”

“당연하지. 내가 이기든 지든 대사형과 칠 사형은 내 사람들. 결코 해가 되는 일은 없어.”

“그럼 그 값에 사 줘. 혹시 지금 당장 줄 수 있어?”

거절의 기색을 비치던 제갈군무는 진해가 덤으로 무려 오천협과의 결투를 주선하자 소리 없이 웃음 지으며 품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손가락 두 마디는 되려나 싶을 정도로 자그마한 병이었는데 밤하늘이 이럴까 싶을 정도로 새까맸고, 주둥이는 붉은 종이로 꽉 틀어막혀 있었다.

“진짜 있네?”

“사형들이 어떤 처지에 있을지 모르니까 준비해 뒀지. 설마 이렇게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귀여운 사질이 헛된 일에 쓰지 않기만을 바라. 시기가 맞지 않으면, 알지?”

제갈군무는 말을 하며 진해가 준 종이를 톡톡 쳐 보였다. 진해는 그 종이를 바라보다 꿀꺽 침을 삼키며 제갈군무가 준 병을 부리나케 품 안에 챙겨 넣었다. 제갈군무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자신 역시 진해가 준 종이를 품에 갈무리해 넣었다. 평소와 달리 두 사람 모두 제법 긴장된 기색이었다. 그러던 그때, 궁실 입구에서 누군가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절했던 두가 제정신을 차리고 진해를 찾으러 온 것이다.

“결투 양식이 따로 있는 건 아니지?”

“응?”

진해는 두의 그림자가 근처에 어른거리자 급하게 제갈군무에게 물었다. 제갈군무는 어리둥절하여 진해의 물음에 답하지 못했지만 진해는 누구보다도 빠르게, 정확하게 행동을 개시하였다!

“허억, 오 대인!!!!!!?”

머리가 혼잡스러운 두가 정신이 번쩍 들 행동이었다. 오천협이 본다면 결코 참지 못할 행동.

“흡?”

진해는 제갈군무의 멱살을 잡아끌며 그대로 입을 맞추고 있었다. 제갈군무는 이게 지금,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지 눈을 질끈 감은 진해와 달리 눈을 붕어처럼 끔벅이고 있었다.

확실히 오천협이 이 장면을 본다면 제갈군무를 그냥 두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이 자리에 있었다면 당장에 달려들어 제갈군무를 참깨 수확하듯 탈탈 털려 할 것이 틀림없었다. 아마 소문만 들어도 천 리 밖에서 달려올 터. 진해는 정조는 없지만 의리는 있었고, 약속도 제법 잘 지키는 이였다.

* * *

두가 너무 놀라 꽥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온 동네 궁인들이 진해와 제갈군무의 입맞춤을 목격했다. 두가 재빨리 입을 막기는 했지만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고 오후가 되자 그 소문이 창명후 저택까지 전해졌다.

“뭣, 우리 해아가 누구랑 무얼 했다고!”

“…….”

앓아누워 있던 강백서는 하인이 쩔쩔매며 전하는 소식을 듣자 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방긋 웃는 강백서의 얼굴은 옛날 해국의 수도에 독약을 풀 것을 계획하던 때로 돌아간 듯하였다.

한편 황제 역시 단단히 화가 났다. 해원공을 성 밖으로 내보낸 것도 모자라 성월공에게 양다리를 걸쳐 혼인 발표를 하게 하더니, 이젠 고산패자와 입을 맞췄다고 한다. 그것도 자기가 직접.

“혼례를 당겨라. 더는 추문이 나게 둘 수는 없지. 혼례를 치르면 성월공의 사람이 되니 성월공이 알아서 단속할 것이다.”

그리하여 황제 안회순은 속에서 들끓는 분노를 가라앉히며 혼례를 서두르게 할 것을 명했다. 월산이 무엇 때문에 진해와 혼인하려 하는지를 알고 있어 더욱 그랬다. 창명후 저택 앞에 심어 둔 기무위사가 황제에게 강백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궁으로 올 채비를 하고 있다는 소리를 듣자 골치가 아파졌다.

“아야야, 아야야, 칠 사형! 내가 그러려던 게 아니고, 아니, 당연히 그럴 리가 없잖아! 해아는 내 아들도, 아야, 아파!!!?!”

잠시 뒤 강백서가 입궁한 별궁에서 고산패자의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짐은 물론이었다.

그리하여 일단 황후에 대한 처결은 미뤄 놓고 성월공와 강해아의 국혼이 최우선이 되었다. 해원공이 자리를 비운 지금 성월공은 차기 후사와도 다를 바 없어 격식을 갖추는 데 꽤 힘이 들었다. 창명후는 끝내 혼인 예물을 거절했지만 황제가 직접 불러 예물을 건네는 건 거절할 수 없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강백서가 벌떡 일어나 고산패자의 입에서 곡소리를 뽑아내는 바람에 더는 핑계를 댈 수도 없었다.

* * *

혼례는 월국의 전통을 따르기로 했다. 예로부터 월국에서는 양인이 화려하게 장식된 붉은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한 쌍이 될 음인과 함께 붉은 비단과 붉은 꽃잎이 깔린 길을 걸어가 그 끝에 자리한 가문의 어른께 인사를 올리는 것이 혼인의 예였다.

혼인한 지 삼십 년이 지나면 흰 천에 은실로 수를 놓은 의장을 갖춰 저승까지 함께할 것을 다짐하는 혼례를 치르기도 했지만, 전쟁 이후 월국의 혼례는 조금 달라졌다. 음인 후사의 대가 끊겨 양인을 후사로 삼는 가문이 늘어나 후사인 양인의 얼굴을 가리지 않고 드러내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황제 안회순이 처음으로 즉위한 양인 황제이니만큼 그를 의식해 양인인 진해 역시 얼굴을 가리지 않게 될 줄 알았다. 사실 신료들 사이에서 그런 의견이 없던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예부상서인 동가대도 황제가 그러길 원한다면 한 수 접고 들어갈 마음이었다. 그런데 황제이자 성월공의 백부인 회순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강경하게 진해의 얼굴을 가릴 것을 원했다.

“저자에 이런 말이 있더군. 영찰어사가 옷깃을 펄럭이면 총각도 배가 부른다고.”

회순의 못마땅한 말에 대신들이 침묵했다. 진해가 행방이 묘연한 해원공 안해산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것과 그가 데리고 다니던 머리 색이 특이한 시위와 묘한 사이라는 것, 그를 쫓아다니던 절세가인이 있다는 점 등 진해의 사내 버릇이 나쁘다는 건 신료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자자한 터였다. 게다가 진위가 확인되지 않은 소문 중에는 소산자라는 내관이 진해의 추근거림을 견디지 못하고 퇴궁해 버렸다는 것도 있었다. 거기에 한술 더 떠 진해는 얼마 전 사람들 앞에서 고산패자와 입을 맞추기도 했다.

황제가 혼인을 깨다 못해 황실을 모독한 죄로 진해를 유배 보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황가가 아닌 보통의 민가라도 제 피붙이가 저런 바람둥이와 혼인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말리려고 들 터였다.

그러나 오진해는 강해아일지도 몰랐다. 아니, 강해아임이 분명했다.

창명후 강절곤이 몸을 날려 진해를 보호하는 걸 보아 그랬다. 돌아왔다는 강해아가 고산패자가 나타난 이후로 홀연히 사라진 것 역시 그를 뒷받침했다. 강절곤이 손자를 보호하기 위해 대역을 세웠다는 설이 우세했다. 황제가 강절곤에게 아무 언급도 하지 않는 게 증거였다.

그렇다면 성월공에게 이 혼인은 무슨 수를 쓰든 놓쳐서는 안 되는 혼인이었다. 해원공이 적통에, 해국의 피가 단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월국 혈통이 밝혀진 지금 그가 돌아오게 된다면 성월공의 명분이었던 정통성이 빛을 잃게 되니까, 그러니까 황가에 버금가는 장강 강씨의 금지옥엽과 혼인해 자신의 기반을 다져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황제가 끝내 진해를 참아 주는 이유였다.

“오 어사. 이것은 내 부군이 쓰던 것일세.”

호적상 진해는 우부좌부 없는 천애 고아였다. 강절곤은 이 시점까지도 진해가 자신의 손자인 강해아라고 말하지 않고 있었다. 다만 그가 성월공의 후견인이라는 명목으로 진해에게 직접 혼례의 붉은 천을 씌워 주고 있었다.

“내 사위 역시 이것을 쓰고 혼인했다네. 다른 사위는 그 가문의 것을 쓰고 혼인했었지만……, 다 옛날이야기지.”

원래 장강 강씨의 후사는 강절곤의 장자이자 강백서의 형인 강맹서였다. 그는 장강 강가의 후사인 만큼 제법 일찍 혼인을 했고 막냇동생인 백서가 돌아올 때쯤 후손을 보기로 계획해 놓은 터였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인 강절곤을 대신해 선황과 전장에 나갔다 죽고 말았다. 그의 남편이었던 이는 맹서와 사이가 좋았으나 그의 가문은 맹서의 전사 소식을 듣자마자 피난을 결정했고, 후손이 없는 양인 자식 역시 데려가기로 결정하고 강절곤에게 이혼을 청했다. 전장의 처참함을 아는 강절곤은 씁쓸함을 삼키며 이혼에 동의했고 사위는 그의 가문과 지방으로 내려가 그 후로는 소식이 끊기고 말았다.

태자를 보필했던 달서는 특유의 자유분방한 성격과 태자를 모신다는 책무 탓에 약혼도 하지 못하고 전사했으며, 어릴 적에 죽은 연서는 말할 것도 없었다. 줄줄이 음인 자식만 낳은 통에 강절곤 생전에 이것을 쓰게 된 건 데릴사위가 되기로 약조한 막내 사위 오천협밖에 없었다.

“……잘 어울렸어요?”

강절곤이 씌워 준 천 아래서 진해가 자그맣게 물었다. 강절곤은 온통 붉고 화려한 천으로 꽁꽁 싸맨 진해가 긴장한 것도, 동시에 어울렸냐고 묻는 목소리에 약간의 웃음기가 배어 있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천협은 번듯한 양인이나 솔직히, 내 부군만큼 미남은 아니었다.”

“허 참.”

“천을 씌워도 고산국 무인의 기개는 숨길 수 없어 범과 범이 혼인하는 것 같았단다. 이 늙은이는 흡족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제법 이야깃거리가 되었던 듯도 하더구나.”

진해의 기가 찬 목소리를 들으며 강절곤은 약간 어색한 태도로 진해의 매무새를 가다듬어 주었다. 강절곤은 항상 다듬을 받는 이였지 이렇게 누군가를 다듬어 주는 이가 아니었다.

“……참 작구나.”

“보태 준 거 있어요!?”

강절곤의 말에 진해가 빽 소리를 질렀다. 작은 키는 아니지만 그래도 주변에 워낙 훤칠한 장신이 즐비하다 보니 진해도 겉으로는 말하지 않아도 한 뼘쯤은 더 컸으면 좋았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해가 얼굴을 천으로 가리지만 않았어도 이리 소리는 지르지 못할 터였다. 강절곤은 진해가, 해아가 가족과 떨어진 후로 온갖 힘든 고생을 다 하며 살아왔다는 걸 알았고, 그 어린것이 고생을 하느라 이리 자라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면서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야. 왜 아무 말도 안 해? 참 나. 내 키가 이만큼~ 인 걸 다행으로 알라고요. 내 키가 장신이었으면 이 나라 예쁜이들이 밤마다 나만 생각하느라 결혼을 안 해서 출산율이 떨어졌을걸~?”

“…….”

“그리고, 거,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요! 그……, 백서 님께도……, 걱정하지 말라고 그러고! 나도 다 수를 써 놨거든요? 절대로 이대로 끝나지는 않는다는 말씀!”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강절곤은 진해가 어떤 표정으로 으스대는지 눈에 훤히 보이는 듯했다. 해국으로 가는 여정에서, 해국에서 함께 지내면서, 그와 함께 월국으로 돌아오면서 줄곧 진해를 지켜봤기 때문이었다.

“그래. 믿는다. 믿고 있느니라. 만약 하늘이 도와 이 순간만 넘긴다면, 이 늙은이도 황상께 올릴 말씀이 있고, 계책이 있다.”

“응? 이 순간만 넘기다니?”

“해원공께서 돌아오기 전까지 초야만 치르지 않는다면 어떻게든 널 다시 찾아올 수 있단 말이다.”

“뭣?!”

강절곤이 간신히 목소리를 가라앉히며 한 말에 진해의 어깨가 펄쩍 뛰었다.

“네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사실 너는 약혼자가 있다.”

“마, 말도 안 돼! 난 이미―”

“그래. 네가 다섯 살 때 원귀비 마마의 복중에 든 아기씨가 음인 황자시면 너를 정군으로 보내기로 약조했었다.”

“―응?”

“원 이 녀석. 말을 이리 못 알아듣느냐! 넌 원귀비 마마 소생의 황자와 진작 혼인을 약조했고, 그게 해원공이니 해원공 마마가 돌아오시면 내가 증인이 되어 너와 성월공의 혼인의 무효를 주장하겠다는 말이다! 해원공 마마도 당연히 너를 찾으려 할 것이고 황상도 내가 거절했다는 걸 아실 테니 크게 누구의 편을 들어 주시지 못할 터.”

말을 끝냄과 동시에 강절곤이 크게 한숨지었다. 그러면서 세상에는 정말 운명이라는 게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출생이 바뀐 안해산과 다른 인생을 살게 된 강해아. 낳은 아버지들도 예상하지 못한 운명이 그들을 다시 이어 놓았다. 운명이 그들을 갈라놓았던 것이 더욱 견고히 그들을 잇기 위한 것이었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치균과 죽은 원귀비 마마를 위해서라도 내 가만있지는 않을 터이다. 그러니 너도 버티 거라. 알겠지? 너도 버텨야 해.”

“…….”

충격적이라면 충격적인 말에 진해는 말을 잇지 못했다. 강절곤은 진해가 어지간히 충격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주름진 손으로 진해의 손을 꼭 잡고 가만히 손등을 두드려 주었다. 하뿌 하뿌 하며 달려오던 아이가 이렇게 커 혼인을 앞두게 되었다. 죄 많은 늙은 몸이 운이 좋게 손자의 혼례를 보고 어쩌면 증손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강절곤은 온갖 감상에 말없이 눈물 흘렸지만 진해의 머릿속은 그와는 다른 생각으로 회오리치고 있었다. 왜냐면 진해는 이미 호적상으로는 유부남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 어떡하지! 아버지한테 삼랑이 혼인 신고서에 서명해서 관청에 내 달라고 했는데!’

사실 진해는 월산이 자신을 노리고 혼인을 강요할 때부터 이미 수를 써 뒀다. 월국에서 혼인이 무효가 되는 경우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단순하고 효과적인 건 상대가 혼인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었다. 다른 이는 몰라도 결코 황족이자 황제가 될 성월공만큼은 혼인할 수 없는 상태가 무엇이냐. 그것은 바로 진해가 이미 혼인해 첫째 남편을 두거나 진해가 그의 남편이 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누구와 혼인하느냐. 진해와 혼인할 상대는 하늘의 별만큼 많…… 지는 않고 딱 셋이 있었다. 하지만 월국의 법률상 양인인 미려는 진해와 혼인이 인정되지 않았다. 해산과 혼인하려고 하니 진해가 감히 황족인 해산의 혼인 신고서나 호적 등본을 뗄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하나였다. 항상 진해와 혼인을 준비하고 다니며 월산에게 목숨을 위협받던 상태의 삼랑.

‘으읏, 어차피 삼랑이랑 혼인하기로 했잖아! 아버지가 죽인 형들을 대신해서……, 내가 삼랑이 가족이 되기로 마음먹었잖아!’

그런데 이 상황에서 사실은 해산이 자신과 태어나기도 전부터 혼인을 약조했다는 소리를 들으니.

“흐어엉……!”

“해, 해아, 왜 우느냐! 이 할애비가 해결한다니까?!”

“바보 영, 아니 할아버지!!”

“으응?!”

차라리 말이나 말지 괜히 저 말을 해서 진해의 심경이 더욱 복잡해져 버렸다. 해산 도련님은 가뜩이나 정이 많아 저 이야기를 알게 된다면 삼랑이를 이 층에서 집어 던져서라도 진해를 찾으려 할 텐데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인가. 아, 이 모든 게 죄 많은 자신의 탓이었다. 하늘이 재주 많고 잘생긴 자신을 질투해서 모든 짐을 떠넘긴 게 분명했다!

“이제 나오셔야 합니다.”

진해가 천을 쓴 채 펑펑 울고 있자 기다리고 있던 궁인이 조심스레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와 동시에 두가 강절곤을 데리러 왔다. 강절곤은 서럽게 우는 손자를 보며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두를 보자 간신히 자신을 바로잡았다. 근엄하고 엄격한 창명후 강절곤으로 돌아가 부들거리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 창백한 얼굴을 한 아들 강백서의 곁에 섰다.

회순이 즉위한 이후 두 번째 국혼이었다. 황자에 준하는 황손의 혼인이었으니 규모가 크고 화려해야 하건만 안타깝게도 서둘러 준비한 탓에 월국 황실치고는 그리 큰 규모는 아니었다. 그래도 황실의 혼인인지라 보통 민가와는 차원이 달랐다. 진해가 얼굴을 가리고 있지 않았다면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크고 화려한 혼례장이 월국의 난다 긴다 하는 대신들과 제후들, 국빈들, 악단들과 춤꾼들, 궁인들 등 온갖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혼례에 참가한 사람들의 표정은 딱 두 개였다. 한쪽은 안도, 한쪽은 불만. 안도한 쪽은 성월공 측의 사람들이었으며 불만인 쪽은 당연히 해원공 측의 사람들이었다. 특히 예부상서 동가대는 창명후에게 무슨 언질이라도 받았는지 얼굴이 불그죽죽한 것이 지금 당장이라도 이 혼례는 무효라고 외칠 듯했다.

보지는 못했지만 진해는 붉은 시야 속에서 자신에게 내리꽂히는 시선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눈을 가리니 온갖 사람들의 향이 천 너머에서 진해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친숙한 향도 낯설게 느껴질 분위기였다. 진해는 자신의 곁에 선 이의 향이 월산의 것임을 알면서도 어깨가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걱정 마라.”

월산이 답지 않게 제 손을 한 번 잡았다 놔서 그랬을 수도 있다. 새삼 월산의 사정을 알게 되어 자신이 같잖은 계책으로 이 가여운 이의 가슴에 상처를 남기는 게 아닌가 더럭 겁이 났다.

뭐라 말하고 싶은데 진해의 곁에 선 궁인이 진해를 이끌었다. 진해와 동시에 월산의 발 역시 움직였다. 길게 늘어진 천 탓에 자기 발밖에 보이지 않았다. 진해와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과장되게 화려한 꽃장식이 진해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웃는 것처럼 몸을 떨었다.

거기다 더욱 문제인 건 길이 너무 길었다. 어마어마하게 길어서 떨리던 진해의 마음이 슬슬 짜증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리고 진해가 느낀 건 사실이었다. 혼인에 참석한 손님들이 주인공 둘의 모습을 보는 것을 원하기 마련이라 손님이 많으면 그만큼 가문의 어른들에게 가는 길도 길어졌다. 그 길을 얼굴이 가려진 채로도 떨지 않고 우아하고 곧게 걸어가는 게 한때 월국 양인들의 미덕이라 옛날에는 얼굴을 가리고 걷는 연습을 하는 웃지 못할 풍습도 있었었다. 그러니 황실의 혼례길이 긴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인 것이다.

진해가 궁인의 손을 뿌리치고 그냥 뛰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 때쯤 진해의 발이 층계 앞에 닿았다. 진해를 부축하던 궁인이 진해의 팔을 놓고 물러났고 월산이 대신 진해의 손을 잡았다. 진해는 말하지 않아도 자신과 월산이 이 계단을 올라 황제 회순의 앞에 꿇어야 함을 눈치챘다.

그리고 과연, 계단을 올라가자 낯설지만 익숙한 향이 맡아졌다. 몇 번의 알현과 독대를 통해 알게 된 황제 회순의 향이었다.

“…….”

뭔가 말을 할 줄 알았는데 회순은 진해와 월산이 앞에 꿇었는데도 별말 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용히 둘을 내려다보는 듯했다. 그 침묵 속에서 진해는 순간 일이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다. 어쩌면이라는 불길한 단어가 목젖을 탁 치고 올라왔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성군이라는 평을 듣는 이 사람이, 정말 이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을까?

“오 어사가 내 사람이듯 신료들 역시 다 기본적으로는 내 사람이지. 호부도 마찬가지다.”

과연 불길한 예감이 적중하는 듯했다. 진해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슬쩍 천을 걷어 올렸다. 그리고 저를 바라보는 회순과 눈이 마주쳤다.

“더는 쓸데없는 걱정할 것 없다. 사마계를 실각시킨 네 공을 참작해 그간의 일은 모두 없던 거로 해 줄 테니. 쓸데없는 걱정 말고 월산과 해로하도록 해라.”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황제는 자신의 동생인 황태공 지순과 동침했고, 그 결과로 저주받은 황자가 탄생했다. 진해는 자신을 바라보는 싸늘한 눈동자를 마주하며 소름이 돋았다. 이 사람은 자신을 치워 버리려 하고 있었다. 근친의 결과물인 월산과 자신을 억지로 혼인시키려 하고 있었다. 월산은 죄가 없지만 이 사람은 죄를 지었다. 아이를 바꾼 것, 정말 이 사람은 몰랐을까?

―만약 알았다면 왜 바로잡지 않았을까?

황제가 말을 끝내자 월산이 진해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진해는 다리에 힘이 풀려 일어나지지 않았지만 월산이 보기보다 힘이 좋아 억지로 일으켜졌다. 이제 이대로 식장을 빠져나가면 둘의 혼례가 끝난 셈이었다. 빌어먹을 황제가 호부에 사람을 풀어 진해의 수를 차단했다고 말했으니 진해는 꼼짝없이 월산과 한 쌍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

그건 싫었다. 월산의 출생이 문제가 아니라 진해와 월산은 끝난 사이였기 때문이었다. 진해가 혼인하고 싶은 사람은 따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정과 연민이 아닌 사랑과 욕정으로 가득 찬 혼례를 올리고 싶은 사람이.

“이, 이건 아니야!”

멋지게 손을 뿌리쳤으면 좋았으련만 앞서 말했듯이 월산의 힘이 장난이 아니었다. 이럴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진해의 손을 으스러지라 붙잡고 있었다. 정말 끝이었다. 월산의 남편이 되면 다시는 해산과 좋은 일을 하지 못하게 된다! 다 끝이다!

“멈춰라!!”

그러던 그때, 식장의 한가운데서 누가 크게 소리쳤다. 사람들이 이제 막 축하의 박수를 치려고 하던 때였다.

목소리의 주인은 붉은 비단길 한가운데 서 있었다. 분홍빛 꽃잎이 간간이 흩날리는 혼례식장의 한복판에서 까만 옷을 입고 불이 타오르는 듯한 새빨간 가면을 쓰고 있었다. 혼례 뒤 이어질 연회의 흥을 돋우기 위해 특별히 출입이 허락된 춤꾼이었다.

“지엄한 대월률의 판결 아래 이 혼인은, 무효다!”

그러나 훌쩍 큰 장신이며 크게 벌어진 어깨, 날렵한 허리 등이 그가 보통 춤꾼이 아님을 짐작하게 했다. 춤꾼들의 달라붙는 의복이 그가 단련된 몸을 갖고 있음을 능히 알 수 있게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목소리.

“해, 해산 도련님?!”

가면에 가려졌지만 진해는 누구보다도 저 목소리를 잘 알았다. 왜냐면 이때까지 줄곧 듣고 싶어 했고, 줄곧 그리워했기 때문이었다.

“해야!”

진해가 얼굴을 가린 천을 휙 걷어 올리자 해산 역시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 던졌다. 약간 야윈 듯했지만 역시나 해산이었다.

‘크으, 그래! 저 잘빠진 몸이 이 세상에 둘일 리가 없어!’

진해는 해산이 들으면 얼굴을 붉힐 생각을 일삼으며 열정적으로 해산의 몸을 훑었다. 얼굴에 다시 붉은 천이 씌워지기 전까지의 이야기였지만.

“소해. 신랑이 초야 직전 천을 벗겨 주기 전까지 절대로 천을 벗어서는 안 된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구나.”

“무슨 그런 개떡 같은 법도가 다 있어!”

“네 아버지들과 할아버지들 욕을 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얌전히 있거라. 일단 여는 해원공을 자칭하는 저 무뢰배를 잡아야겠으니.”

“에엥?!”

진해는 다시 천을 벗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몇 번을 말했듯이 월산은 보기와 다르게 힘이 엄청나게 셌다. 월산에게 반항하며 천을 벗으려면 천을 찢어야 할 판이었는데 이 천은 진해의 할아버지가 썼고, 또 진해의 아버지가 썼던 유서 깊은 천이었다. 잘 남겨 두면 진해의 아들에게도 물려줄 수 있는 소중한 물건이란 말이었다. 한마디로 찢으면 진해만 손해였다.

“뭣들 하느냐! 혼례를 방해하는 저 무뢰배를 잡지 않고서!”

“무엄하다―――! 감히 월황실의 적통인 해원공 마마께!!!”

“닥쳐라, 저 이가 해원공이라는 증거가 있느냐! 해원공이라면 어째서 정식으로 입궁 절차를 밟지 않았는가!”

“그럼 네놈 같으면 지금 눈 뜨고 양인을 뺏기게 생겼는데 그냥 보고 있으란 말이냐!”

월산의 손짓에 따라 두가 일사불란하게 어전 시위들과 흑월대를 이끌고 해산을 잡으려 했으나 웬걸, 그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가뜩이나 심기가 불편한 동가대가 벌떡 일어나 목이 터지라 소리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알다시피 동가대는 유산한 자식을 포함 총 열넷의 아들을 두었다. 그중 관직에 오른 이는 동십사를 포함해 여덟. 동가대에게 누군가 삿대질을 하자 아들들도 참지 못하고 하늘이 뚫어지라 삿대질을 해 대기 시작했다.

[펑―!!!]

거기다가 어디선가 날아든 폭죽이 흑월대 앞에서 폭발했다. 타다다닥, 소리를 내며 회전하는 불꽃은 위력은 크지 않았으나 사람을 기겁하게 하기에 충분했고, 그런 것이 여러 발 날아들자 천하의 흑월대라도 절로 발걸음을 주춤하게 되었다.

“오진해!!!!”

그리고 진해는 축제 저리 가라 할 만큼 성대한 폭죽 소리 속에서 자신을 부르짖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찾아냈다. 급하고 난폭한 성질이 고스란히 녹아든 목소리는 다름 아닌 삼랑의 것이었다.

‘아이고, 저 녀석 상처는 다 낫고 저 지랄인가!’

생각을 그렇게 하면서도 진해는 삼랑이 저를 찾으러, 그것도 해산 도련님과 손을 잡고 사이좋게 자신을 되찾으러 왔다는 사실에 깊이 감동했다.

“우와앗?!”

그러나 그것도 얼마 가지 못했다. 진해는 자신의 예쁜이들과 곧 해후하겠다는 감상에 젖어 있다가 몸이 붕 뜨는 바람에 우아하지 못한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혼례는 끝났다!”

외치는 목소리는 월산의 것이었다. 당연히 진해를 안은 손도 월산의 것이었다. 아무래도 월산은 이 자리를 벗어나 곧장 신방으로 직행할 생각인 듯했다.

“닥쳐! 그깟 초야가 무엇이라고 법도를 어긴단 말이냐!”

“정식으로 청혼했고, 정식으로 혼례를 치렀다. 무슨 법도를 어겼느냐!”

“하! 가족을 인질로 잡고 힘으로 억지로 강제하는 혼인도 혼인이라 치더냐! 이미 혼인을 약조한 이 몸! 그깟 초야 따위는 백 번, 천 번도 넘게 치른 이 몸을 두고 하는 혼례를 정식으로 칠 수 있더냐! 이 태에, 진해의 씨가 들었다!!”

청천벽력 같은 해산의 선언에 요란한 폭죽 소리 사이로 일순 정적이 흘렀다. 진해는 자신과 월산의 뒤에서 누군가 벌떡 일어서는 소리를 들었다.

“화. 황상을 보호하라! 상장군, 중장군은 뭣들 하는 겐가! 이 난리통에 황상께 해라도 가면 죽어서도 그 죄 갚지 못하리!!”

그리고 제정신을 차린 창명후가 자신 휘하의 장군들과 무관들에게 호령했다. 해산과 월산을 바라보며 우왕좌왕하던 무관들이 급히 황제에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황제의 경호는 본디 시위들의 몫이었지만 이런 긴급한 상황에서 몸 쓰는 이들이 넋 놓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황상을 모셔라!”

“황상, 이리 업히십시오!”

“짐은―”

“포, 폭죽 떼가 날아온다!!”

월산이 진해를 안고 소금 기둥처럼 서 있는 뒤로 온갖 무관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황제를 업고 궁인의 안내를 따라 급히 혼례식장을 빠져나갔다. 황제 회순은 뭐라 말하려는 듯했지만 춤꾼들 사이에 있던 누군가와 눈을 마주치고 입을 다물었다. 그가 마주친 눈은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원한으로 얼룩져 있었다.

무관들이 자리를 비우고 황제가 자리를 비우니 혼례식장이 제법 휑해졌다. 문관들은 잠깐 눈치를 보다가 누가 뭐라 할세라 거치적거리는 예복을 무릎 위로 걷어 올리고는 후다닥 출구로 향해 뛰기 시작했다. 성월공은 자칭이라고 했지만 뒤로 봐도 옆으로 봐도 저건 해원공이었다. 출생의 시비에 휩쓸려 잠깐 피신했던 해원공이 제 양인을 뺏길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이 사태를 벌인 것이다.

성월공이 이기든, 해산공이 이기든, 이 자리에 있어 좋을 게 없었다. 하나는 월국의 실세요, 하나는 월국의 적통. 황제가 누구의 편을 들지 감히 예상할 수 없었다. 혹 누가 이긴다 해도 승자의 전리품이 된 진해는 어찌할 것인가. 차라리 진짜 한미한 집의 양인이면 뒤탈이 적을 텐데 장강 강가의 후광을 입어 번쩍번쩍 빛이 나는 금지옥엽이다. 이 자리에 있던 이들에게 이를 갈며 복수를 할 수도 있다.

“쳐라!!”

“씨바, 뭣들 하고 있어!! 쏴!!”

“아악, 불이!!”

문관들까지 도망치자 이제 혼례식장은 혼례식장이 아니라 흡사 난투장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춤꾼으로 변장한 옥청려와 서해 옥가의 가신들, 삼랑이 가려 뽑은 도적들이 각자 옆구리에 커다란 폭죽을 끼고 연회장을 온갖 색의 불꽃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불이 붙자 어전 시위들이 크게 당황했고 흑월대와의 공조가 무너졌다.

“시위들, 화재를 진압해라!!”

언제 돌아왔는지 모를 어전 시위들의 우두머리, 내무부 일등시위인 동십사가 나타나 화재부터 진압하라니 당연히 그 말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어전 시위들이 무기를 버리고 화재를 진압하자 이제 해산 측과 월산 측의 수가 비등해졌다. 애초에 월산 역시 황궁에 자신의 근위대를 마음대로 들일 수 없는 입장이었다.

“해야!!!”

해산이 손에 잡힌 흑월대 하나를 멀찍이 던지며 달려오는 걸 보며 월산은 안고 있던 진해를 탁 내려놓았다.

“아얏!”

바닥이 푹신해 다행이었지 그렇지 않으면 진해는 천금 같은 허리가 망가진다며 빽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언젠간 결판을 내긴 해야 하지. 예상보다 이르고, 예상과는 다르지만.”

그리고 달려오는 해산을 향해 월산이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월산이 손을 내밀자 화약과 땀 범벅이 된 채로 두가 월산의 손에 창을 쥐여 주었다. 본래 궁에서는 함부로 무기를 소지할 수가 없는데도.

“그래? 나는 단 한 번도 내가 너와 이렇게 마주할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네게 빼앗길 것이 없고, 나도 네게서 원하는 것이 없었으니까!”

월산이 층계를 뛰어 내려가는 것과 동시에 해산 역시 손목에 감춰 뒀던 구리 채찍을 꺼내 들었다. 펑펑 위협적으로 터지는 폭죽의 불꽃을 휘감으며 유연한 구리 선이 붉게 빛을 냈다. 긴 채찍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해산도 굉장했지만 제 몸보다 기다란 창을 휘둘러 그걸 막아 내는 월산도 혀를 내두를 만했다.

“마치 선황을 보는 듯하구나!”

무관들을 선동해 황제를 치워 버린 창명후가 두 황손의 결투를 바라보며 신음을 흘렸다. 창을 다루는 월산의 몸동작과 해산의 장대한 체구. 이 둘을 합치면 한때 창명후와 대련하기를 즐기던 선황 그 자체였다. 이런 상황만 아니라면 두 황손의 출중한 재능에 감동의 눈물을 흘렸을지도 몰랐다. 무관으로서 황손들이 무에 뛰어나다는 사실이 어찌 기쁘지 아니할까.

“사제.”

“응, 칠 사형. 슬슬 나가자고?”

“그런 것보다. 환기가 안 되니 갑갑하구나. 문을 좀 열어 주지 않으련?”

“그러지 뭐.”

그리고 황손들을 바라보며 감탄하는 아버지를 뒤로하고 강백서가 조용히 제갈군무를 불러 청했다. 화재를 진압하는 건 둘째치고 혼례식장에 침입한 이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문은 어전 시위들에 의해 굳게 닫힌 채였다. 황제를 비롯한 귀하신 분들이 빠져나갔으니 무력을 동원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헛차.”

그리고 제갈군무는 갖고 있던 폭죽이 떨어져 슬슬 수세에 몰리는 이들을 향해 눈웃음을 짓더니 막혀 있던 문으로 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무인들이 날고 기는 고산국의 패자라 하더라도 황궁의 두꺼운 출입문을 부수려면 조금 준비가 필요했다.

“하아!”

다름 아닌 마음의 준비가.

그리고 놀랍게도 제갈군무가 혼례식장이 떠나가라 지른 기합성과 함께 내지른 주먹에 황궁의 문에 금이 갔다. 제갈군무의 주먹만큼의 금이었지만 웬만한 성인 몸통의 두께를 한 문짝에 맨손으로 금을 냈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이 이상은 손해라서 힘들겠는데?”

바깥에 있던 시위들이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줄도 모르고 제갈군무는 빨갛게 변한 손을 털었다. 더 힘을 쓰면 문짝에 구멍을 내 줄 수도 있겠지만 제갈군무는 언제나 힘을 아껴야만 했다. 언제나 도망칠 구석 정도는 마련해 놓는 것이 고산국의 패자된 자로서의 미덕이었다.

“흣―”

그런데 그때 강백서가 갑자기 현기증이 나는 듯 비틀거렸다. 하나뿐인 아들을 위해 버티려고 했지만 몸이 상한 강백서는 제갈군무에게 말해 아들의 동료들을 위해 살길을 뚫어 주라는 것 정도밖에는 할 수 없었다. 아버지 강절곤은 이 자리를 마무리 해야 하니 자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 어두컴컴한 우물에서 그랬던 것처럼 악착같이 버텨야 하는데―

“사제.”

“아…….”

강백서가 이를 악물며 버티던 그때 굳건한 팔이 그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금목서를 닮은 향긋한 양인의 향이 그의 몸에 스며들었다. 사자춤을 추는 춤꾼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백서는 떨리는 손을 들어 가면을 벗겼고, 그렇게 보고 싶던 얼굴을 마침내 볼 수 있었다.

“대사형…….”

“사제가 있을 줄 몰랐어. 어째서 이런 곳에 온 거야.”

“우리 아들의 혼례잖아요. 어떻게 아버지 된 자가 빠질 수 있나요. 사형도, 와 줬군요.”

폭죽이 터지고 고성이 오가고 주먹이 오가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서로를 마주 보며 서로의 세상에 빠졌다. 차기 보위에 근접한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뭐라 뭐라 소리를 지르는 것도, 창명후가 옳지, 옳지, 아니, 아니 응원인지 말리는 건지 모를 말을 하는 것도 두 사람의 귀엔 전혀 들리지 않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했다. 서로를 마주 보는 순간 아직도 서로를 사랑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강백서가 애틋한 손길로 오천협의 뺨을 어루만졌고, 오천협은 뜨거운 눈빛으로 여윈 뺨을 바라보았다.

“야, 호구! 가자!”

세상에 다시 없을 격정적이고 애틋한 순간이었으나 유감스럽게도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진해와 그의 예쁜이들이었다. 강백서와 오천협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서로에게서 살짝 떨어졌으나 잡은 손은 떨어질 줄은 몰랐다.

“아빠! 아버지!”

“해아!”

알고 보니 삼랑이 채찍을 버린 해산과 창을 버린 월산이 주먹질을 하는 동안 층계로 다가가 진해를 데리고 온 것이었다. 미려가 성월공의 궁에 진을 쳐 지원이 나오지 못하도록 막고, 해산이 월산을 막고, 만약 황제가 나서면 화석정군이, 그리고 그동안 삼랑이 진해를 훔친다는 예정 그대로였다.

삼랑은 진해가 오천협에게 아버지라고 부르자 눈썹을 꿈틀했으나 진해가 기뻐하며 두 사람을 끌어안자 입을 꾹 다물었다. 어째서 이놈이 자신에게 스스로 노비가 되기를 청했는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혼례복을 예쁘게 차려입은 어여쁜 창놈 앞에서는 어쩐지 말을 아끼게 되었다. 이놈이 원래는 저와 혼인 신고서를 제출할 생각이었다고 하자 기특한 마음마저 드는 것이다. 황제 개놈의 것이 그것을 막아 문제였지만!

“엇, 대사형?”

“넌 나중에 보자.”

제갈군무가 닫힌 문 앞에서 간간이 진해 일행을 도와주며 어떻게 문을 열까 고민하고 있는 사이 달려온 오천협이 그대로 금 간 곳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히이익!!”

꽂힌 주먹을 그대로 문을 관통했고 오천협은 팔이 건너편 고리에 닿지 않자 청려를 불러 금강사를 걸어 고리를 당기게 했다. 금강사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청려에게 건너편의 문고리를 당기는 건 식은 죽 먹기였고 문은 그대로 열리게 되었다. 아연실색하여 멍한 표정의 시위들 사이로 황아무가 튀어나와 소리쳤다.

“뭣들 하는 겁니까! 동 대인께서 화재를 진압하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황손들의 대련에 함부로 낄 생각은 아니겠지요!”

진해 일행과 처참하게 부서진 문을 바라보던 시위들은 주춤거리며 무기를 버리며 양동이를 찾아 뛰어갔다. 설치해 둔 폭죽이 연이어 터져 하늘을 오색 빛으로 물들였고 해산과 월산의 얼굴도 붉은빛, 푸른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소동이 완전히 마무리된 것은 폭죽이 다 터지고, 황제 회순이 무관들의 과한 보호를 참다못해 윽박질러 그들을 물리친 후였다.

“그만!!!!!”

회순이 다시 식장에 돌아갔을 때는 막 해산이 월산을 들어 바닥에 패대기치려 하고 있던 참이었다. 들어 올려진 월산은 분을 참지 못하고 거칠게 씩씩대고 있었고, 월산을 요절내지 못한 해산도 씩씩대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황제는 두 황손의 멍든 얼굴을 보며 뒷목을 움켜쥐었다.

* * *

다음 날이 되자 월국의 수도가 발칵 뒤집혔다. 마침내 소문의 주인공인 해원공 안해산이 돌아온 것이다! 그것도 성월공의 혼례식 날에!

“강해아는 창명후의 부군인 수강건을 많이 닮았다던데, 그게 사실인가.”

“예, 그 말이 참이옵니다. 폐하. 제 손자는 제 부군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쏙 빼닮아 이 늙은이가 체면 불고 바람이라도 불면 날아갈까 봐 꼭 끌어안고 지낸 것이었사옵니다. 대역도 다 어린아이의 몸이 성치 않아 세운 것입니다.”

“창명후, 어째서 그 사실을 이제야 고하는가! 만약 그리 몸이 약한 줄 알았다면 짐도 혼인을 허하지 않았을 것이다. 혼인은, 보류다!”

“폐하~! 어찌 앞길 창창한 미혼 총각의 혼인을 이리 가볍게 폐하시나이까~!”

대소 신료들이 가득한 어전에서 창명후는 엎드려 우는소리를 하는 듯했지만, 신료들은 다 알았다. 창명후가 지금 좋아 죽는 중이라는 걸. 그도 그럴 게 해원공은 월국의 적통인 데다가 창명후의 둘도 없는 친우인 연재균의 손자가 아니던가. 성월공의 후견인을 맡은 건 폐비 연씨의 소생이 저주받은 요괴라는 누명 때문에 죽은 탓이었다. 만약 해원공이 본래의 출신대로 살았다면 창명후는 절대로 성월공을 후원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성월공과 강해아의 혼인은 강해아가 ‘혼인식 날에 건강상의 이유로 쓰러지는 바람에’ 무기한 연기되었다. 강해아가 오진해와 동일인이라는 걸 아는 사람들은 오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강해아와 오진해가 동일인이라는 걸 모르는 백성들은 실종되었다 돌아온 강해아가 몸이 많이 약해졌다고 그것 때문에 혼인이 파기된 것이나 마찬가지니 참으로 안타깝다고 혀를 찼다.

“흥. 강해아가 누구와 혼인하더라도 창명후 그대는 손해 볼 일이 없으니 더는 할 말 없도다. 그리고 다음, 영찰어사 오진해. 오진해는 등청했는가.”

당연히 등청할 리 없었다.

“영찰어사는 몸이 여의치 않아 쉬고 있다 들었사옵니다, 부황.”

진해는 해원공이라는 뒷배가 있으므로 도망가지 않고 창명후 저택에 틀어박혀 아버지들과 꿀이 떨어지는 해후를 맛보는 참이었다. 오천협과 강백서에게 사위로 잘 보이려는 미려도 함께였다. 삼랑은 뭔가 생각에 빠진 듯했다.

“몸이 좋지 않아?”

“예. 소자가 직접 이 두 눈으로 확인하였사옵니다. 부황께서 소자를 의심하신다면 직접 사람을 보내 확인하셔도 좋사옵니다.”

“후…….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리고 돌아온 해산은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예부상서 동가대는 해산이 예전의 조심스럽고 냉정한 모양새를 던져 버리고 당당하고 오만해 보일 정도로 솔직한 태도를 보이자 적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어떤 의미로는 굉장히 잘 어울렸다. 동가대는 어쩌면 이런 태도야말로 월국의 진정한 적통이 가져야 할 긍지라 생각했다. 사실 성월공의 오만함에 비하면 이 정도는 겸손한 수준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돌아온 해산은 자신에게 뭐라 말하려는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읍소했다. 자신은 결코 도망간 것이 아니라고, 제 앞을 가로막고 창을 던지는 ‘어떤’ 무뢰배에게 놀라 잠깐 몸을 피신한 것이라고. 만약 그이가 던진 창에 자신의 시위가 중상을 입지 않았으면 자신 역시 황제의 곁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고 이런, 불경한 일이 벌어질 일도 없었다고 말이다.

“폐하, 고정하시지요. 소신이 듣기로 영찰어사 오진해라는 이가 황후의 문제로 제법 고생을 했다지요?”

게다가 해원공 안해산은 돌아오면서 나이든 대신들의 정신이 번쩍 들게 할 인물을 데려왔다. 황제 회순은 해산과 월산보다는 아래쪽에, 그러나 대신들보다는 위쪽 줄에 자리한 인물을 흘끗 바라보았다. 초라한 주막의 주인으로 변장해 있던 이는 궁인들의 시중을 받자 순식간에 고귀한 귀족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애초에 황족과 혼인할 정도로 귀한 핏줄에 갖가지 교양을 갖춘 이였다. 기술에 손에 익는 것처럼 그의 몸에 밴 기품이 단번에 사라지지는 않는 것이다.

“……그래. 그는 제법 고생을 했지. 근래 짐이 여러모로 실수를 하는군. 성월공의 혼인에 대해서는 자네에게 특히 할 말이 없음이야.”

화석정군 양지서. 귀족으로서 그리 유서 깊은 가문은 아니지만 가문에 쌓인 재산이 훌륭하여 막내 황자인 지순의 부군으로 간택받았다. 관직이나 책무에 관심이 없는 천진무구한 황자가 평생 걱정 없이 살 수 있도록 안배한 선황의 배려였다. 지순과 지서의 이름 가운데 글자가 같다는 것도 선황의 마음을 끈 요인이라고 전해진다.

하지만 부군이 아닌 그의 개인적인 인물됨은 그리 알려진 게 없었다. 알려진 것이라고는 그가 평소 자신의 남편인 지순 황태공에게 순종했다는 것과 지순이 바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구했다는 것뿐. 아들인 성월공을 일찍이 궁에 맡기고 출가한 것도 지순에 대한 정절을 표한 것이라는 평이었다.

“혼인은 천륜지대사 아니겠습니까. 사람의 연이라는 게 참 그렇지요. 소신이 불문에 몸을 의탁하며 깨달은 것은 연이라는 건 사람이 막으려 해도 막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사옵니다. 성월공 마마께서도 그걸 잘 헤아리시리라 믿습니다. 하늘이 살펴 주신다면 안달 내지 않아도 잘 해결되겠지요.”

“……그대 말이 맞다.”

그리고 황제는 해원공과 함께 돌아온 화석정군에게 제법 무른 태도를 보였다. 화석정군이 과거와 달라 많이 여윈 탓도 있겠지만 단지 그뿐만은 아닌 듯했다. 황제는 둔한 편인 해산도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로 화석정군에게 저자세였다. 화석정군이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해산의 출신을 보증했을 때부터.

반면에 화석정군의 친자라고 알려진 성월공 안월산은 표정이 그야말로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화석정군은 월산의 가까이에 서 있었지만 신료들은 월산이 단 한 번도 화석정군을 제대로 바라보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마치 원수가 서 있는 거로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동이 벌어질 줄 알았으면 소신이 자리를 비우지 않을 걸 그랬사옵니다. 부처님께서도 이런 일을 미리 내다보시고 소신에게 그런 시련을 내리신 거겠지요. 아미타불!”

화석정군은 자신이 머물던 절이 불에 타 근처의 오두막을 암자로 꾸미고 칩거 생활을 했노라며 하하 웃었지만, 그 말을 듣는 황제와 월산은 웃지 않았다. 절이 불탄 원인을 제공한 황제는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리하여 자칫 황실의 체면이 바닥으로 추락할 뻔했던 치정 사건이 어찌저찌 무마되는 듯했다. 성월공의 혼인에 주목했던 백성들은 화석정군이 돌아와 해원공 안해산의 출생을 증명하자 순식간에 그쪽으로 주의가 쏠렸다. 알다시피 월국 사람들은 해국에 감정이 좋지 않았고, 자연히 해국 출신의 황후에게도 호감이 없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 * *

“……아직도 꿈만 같구나. 정말 아바마마께서 내 우부 가, 아니시라니.”

미려가 강백서의 옆에서 아버님을 연호하며 점수를 따고, 오천협과 삼랑이 어색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동안 해산과 진해는 아주 오랜만에 손을 잡고 산책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바지를 까 내리고 쿵덕쿵덕 방구들이 무너져라 방아를 찧고 싶지만 때로는 몸보다 마음이 이어지는 게 좋았다. 진해는 쾌락에도 종류와 완급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분께도 다 사정이 있었어요. 아시겠지만 미려가…….”

“그래. 그럴 거 같았다. 친정을 위한다면 어쩔 수 없었겠지.”

진해는 황후 사마계가 해국을 위해 그랬다고 생각하는 해산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망설였다. 화석정군을 데려온 해산에게 사실은 그 작자가 모든 일을 꾸몄다는 이야기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었다. 일단 그자가 해산의 출생을 증명했지만 아직 정식으로 폐비 연씨의 복위가 진행되지는 않았다. 진해가 써서 올린 진술서가 아직 논의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웃기네. 강해아와 오진해가 동시에 없어지면 안 되기 때문에 내가 영찰어사 일을 계속해야 하다니. 황제도 참 힘든 일이야. 나 같으면 다리 몽둥이를 두 짝 다 부숴 버리고 싶을 텐데. 물론 그 작자는 고생해도 싸지만~!’

황제가 은밀히 보낸 궁인은 오진해에게 강해아와 성월공의 혼인은 연기되었다고, 그렇기 때문에 영찰어사 오진해가 더욱 활약해 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 사건을 오진해가 맡고 있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어 오진해가 강해아와 동시에 사라지게 되면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진해는 황제의 철천지원수가 되었어도 영찰어사로 등청하고 황후의 안건도 마무리 지어야 했다. 또한 진해는 이 혼인이 말로만 연기였지 사실은 혼인의 상대를 결정하는 일이라는 것 역시 간파했다. 승자에게 넘어갈지 패자에게 넘어갈지 몰랐지만 일단 강해아는 황실과 혼인의 연이 있는 몸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황실에 준하는 가문이 아니면 감히 혼인을 청할 수조차 없었다.

‘뭐 어찌 꾸미든 황자 중의 한 사람과 혼인하게 되면 황제는 한숨 돌리는 거지. 야비한 놈. 날 감히 보상으로 삼아? 자기가 뭔데 날 넘기겠다는 거야?’

황제는 아마 월산과 해산, 둘 중에 이기는 자에게 모든 걸 몰아줄 생각인 듯했다. 몸이 약해 파기된 혼인이었으니 몸이 회복되었다고 하면 그뿐, 상대가 바뀌게 된다면 성월공에게 다른 이를 먼저 붙여 성월공과 더는 혼인할 수 없어져서 그랬다면 그뿐.

“해야,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느냐?”

“해산 도련님의 혼례복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요.”

“……그러고 보니 난 네 혼례복을 자세히 보지도 못했구나. 아니! 어차피 그런 혼례복이라면 볼 필요도 없다! 내가 그딴 것보다 더 좋은 혼례복을 마련해 주마. 아예 홍색이 아닌 자색으로 짓는 건 어떻겠느냐!”

“아이고, 그건 너무 사치예 요! 게다가 자색은 좀 나이 들어 보인다구요!”

“그래?”

“그런 것보다 어디 얼굴을 더 보여 주세요. 어째 봐도 봐도 또 보고 싶네요.”

“……해야.”

머릿속은 황제와의 수로 복잡했지만 진해는 해산의 청량한 향을 맡자 다른 건 다 때려치우고 해산과 자기 예쁜이들, 그리고 가족들을 데리고 당장 어디 외딴섬에 콕 틀어박히고 싶었다. 이 잘생긴 얼굴이 반쪽이 되어 돌아오자 가슴이 쿵 내려앉는 듯했다. 혼례복 소매를 걷어붙이고 주방으로 들어가는 걸 온 집안 하인들이 뜯어말렸다. 진해는 자기 손으로 밥을 떠서 해산과 미려, 삼랑에게 각각 한 그릇씩 떠먹이고 나서야 겨우 성에 차는 듯했다.

“그런데 해야.”

“응, 왜요?”

“그, 여전히 황후의…… 심리는 네 책임하에 있느냐?”

진해가 한창 해산의 사내다운 얼굴 감상에 빠져 있는 동안 해산이 진해의 손을 그러쥐며 조심스레 진해를 불렀다. 진해는 해산이 자신에게 이리 말하는 걸 들어 본 적 없어 조금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그럼……, 혹시 아바, 아니 황후를 한 번만 만나 볼 수 없겠느냐?”

* * *

의외의 부탁이었지만 못 들어줄 것도 없었다. 아니, 무슨 수를 써서든 꼭 들어줘야만 하는 부탁이었다. 진해는 피가 이어지지 않아도 가족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미려가 생판 남이라는 걸 알기 전까지만 해도 진해를 정말로 제 동생으로 키웠지 않은가.

‘그렇게 보니 내가 정말 구제 불능의 쓰레기 같잖아……?’

어험, 미려와는 어찌어찌 사이가 꼬여 짝이 되었지만 여하튼 진해는 피가 이어져야만 가족이 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따지고 보면 아버지들도 생판 남이 모여 가족이 된 거 아니겠는가.

진해를 보며 완전히 굽신거리던 황후궁 궁인들은 이제 진해에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헷갈리는 모양이었다. 황제만 생각하면 진해를 비웃고 냉대해도 뒤탈이 없겠지만 진해와 엮인 성월공과 해원공을 생각하면 절대로 진해를 가볍게 여길 수 없었다. 성월공과 해원공은 장차 보위에 오를 몸이었다. 누가 되든 진해를 취할 것이니 진해 역시 마땅히 귀한 몸이 될 터.

“이건 얼마 안 되지만 내 작은 성의야. 요새 날이 제법 싸늘~ 하지? 우유에 차를 우려서 한잔 마시면 몸이 따스해지거든. 응?”

“아이고, 오 대인. 뭘 이런 걸 다. 어사 대인께서 어련히 알아서 하시려구요. 저희는 아무것도 못 봤고, 아무것도 못 들었습니다.”

그러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궁인들이 진해를 택한 까닭은 일목요연했는데 황제가 궁인들에게 높기만 한 인물임에 반해, 진해는 그들의 앞에 있었고 무엇보다 돈을 잘 썼다. 어찌나 돈을 잘 써 주는지 궁에서 진해의 은전을 받아 보지 못한 이가 모래 속에서 바늘을 찾기보다 힘이 들었다.

황후궁을 지키는 시위들과 궁인들은 제각각 손 위에 묵직한 돈주머니를 얹은 채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황제 회순이 즉위한 이래 궁인들의 봉급 제도를 개선해 예전보다 많이 먹고살 만해졌다지만 언제 어떻게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진 이들에게 돈은 가져도 가져도 부족한 것이었다. 시위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앞장서서 진해가 들어갈 수 있게 문을 열었다.

“해산 도련님, 이리로.”

“…….”

그리고 그들은 진해가 데려온 이 역시 전혀 못 본 척해 주었다. 어떤 의미로는 지금 황후와 가장 만나서는 안 될 인물임에도 은전의 무게가 그들의 눈을 가려 주었다. 방에 들어서자 힘없이 침상에 앉아 창문을 바라보는 등을 볼 수 있었다. 진해가 본 사내들의 등 중 가장 쓸쓸하고 슬픈 등이었다.

“…….”

해산은 방에 들어왔음에도 그 등을 부르지 못했다. 그는 자신을 이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기른 이를 부르려 입술을 달싹거렸으나 이상하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결국 방 안에 퍼진 해산의 향이 뒤돌아 앉은 이를 돌려세웠다. 뒤돌아본 황후의 눈이 놀라움에 커져 있었다.

“해, 해원공…….”

“……아바마마.”

진해를 문가에 두고 해산은 천천히 황후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황후에게서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 무릎을 꿇고 부친에 대한 예를 갖추었다. 침상에서 일어난 황후 사마계가 비틀비틀 걸어와 해원공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가가 순식간에 붉어졌다.

“이러지, 마세요. 여는 죄인입니다. 그대에게, 그대의, 생부에게 몹쓸 짓을 했어요.”

“아바마마…….”

“나는…….”

“아바마마, 아바마마……!”

해산은 사마계가 자신에게 다가오자 그의 옷에 매달리듯 사마계를 끌어안았다. 사마계는 이를 악물며 뺨을 적셨고, 해산은 손에 힘줄이 불거지도록 주먹을 쥐었다.

“아바마마, 소자는, 소자에게는, 아바마마밖에 없는데, 아바마마라 하면 당신밖에 생각나지 않는데, 이제 소자는 어찌하면 좋습니까――!”

소매가 흘러 드러난 해산의 손목에 구리 채찍이 감겨 있었다.

“……잊으세요. 다 시간이 해결해 줄 겁니다. 당신의, 본래 자리로 돌아가, 흣, 당신이 원래 누려야 할 것을 누리면 여 같은 건 전혀 생각나지 않을 겝니다. 예, 그래요. 그래야만 해요.”

“아바마마……!!”

해산이 사마계에게 매달린 채 오열하자 사마계는 한참을 머뭇거리며 망설이다 아주 조심스레 해산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손끝에 와닿는 감촉이 천 가닥의 바늘이라도 되는 듯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다 이내 해산과 마찬가지로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사마계는 저보다도 훨씬 큰 아들을 끌어안았다.

“정말로, 미안한 일을 했습니다, 해원공……. 절대로 여를, 용서하지 마세요…….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흐윽, 알아주세요……. 여에게도, 그대 외에 아들이 떠오르지 않아요. 여 역시 그대를, 하아……, 아들로…….”

“아바마마…….”

이유가 어찌 되었든 황자를 바꿔 키우는 일에 동조한 셈이니 황후는 자리를 지키기 힘들었다. 작게는 무기한 유폐, 크게는 공개 교형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진해는 해산을 끌어안으며 오열하는 사마계를 보며 그가 해산을 아들로 키웠다는 말이 거짓은 아님을 확인했다. 해산이 원수일 사마계를 굳이 보러 오겠다는 것만 봐도 그랬다.

그래도 누군가는 죽어야만 했다. 이 사건을 마무리 짓고 해산이 본래의 자리를 찾기 위해서는 반드시 황후는 죽어야만 했다. 진해는 그칠 줄 모르는 통곡 소리를 뒤로하고 조용히 방을 나섰다. 진해가 사람을 물린 탓에 궁인과 시위들은 진해가 보이는 곳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진해는 답답한 가슴을 한숨으로 달래며 잠깐 산책을 하기로 했다.

진해는 제갈군무와 홍련이와 고산홍패의 알을 거래한 후로 항상 그에게 받은 병을 품에 넣고 다녔는데 지금도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그 병을 갖고 있었다. 집 안에 두기 위험한 물건이라 그런 것이기도 했지만 아무도, 심지어 진해의 아버지들도 몰라야 할 물건이라 그런 것이었다. 이 물건에 대해 아는 건 진해와 제갈군무 단 두 사람뿐이었다.

해산이 황후를 만나게 해 달라고 하기 전부터 진해는 마음을 굳게 먹었지만 해산이 저러는 걸 보니 또다시 마음이 쓰였다. 황후가 죽고 해산이 자신의 자리를 찾는다 해도 해산에게 자신을 키워 주고 사랑해 준 우부는 사마계일 터였다. 진해는 그것이 못내 마음이 아팠다.

“황후를 만나러 왔더니 선객이 있군.”

그리고 눈앞의 이자가 못내 미워졌다.

“초면인가? 자네라면 이미 내가 누군지 알 거라 믿네만.”

이 일의 원흉이자 이 사건을 주도한 이 몹쓸 작자를 당장이라도 후려치고 싶었다.

“화석정군, 아니 지금은 태정군인가. 아무튼 성월공의 아비 되는 사람일세. 황후를 만나기 힘들어졌으니 다음 순번인 자네와 먼저 이야기를 나누고 싶군. 괜찮겠는가?”

진해는 제 눈앞에 나타난 화석정군 양지서를 말없이 노려보았다. 양지서는 진해와 반대로 시종일관 진해에게 따스한 시선을 보내는 듯했다. 물론 그것은 겉으로 보이는 표면의 이야기였고 진해와 마주친 눈동자 속에는 뭐라 말할 수 없는 격류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황상께 두다다 달려가 이놈이라고, 이놈이 다 저질렀다고 이놈도 같이 죽여야 한다고 빽 소리치고 싶었지만 월산과의 혼례 후로 진해는 자신의 계획을 수정했다. 왜냐면 황제가 아이가 바뀐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미약한 가능성 때문에.

“거 짧게 말하쇼. 바쁘니까.”

“시간을 줄이는 건 다 자네 하기에 달렸지.”

“아, 그래?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물읍시다. 왜 그랬어?”

“보기보다 성격이 급한 모양이군. 아버지들과는 정반대야.”

화석정군이 아버지들을 입에 담자 가뜩이나 심사가 더러운 진해의 가슴에 불을 붙였다. 진해는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화석정군에게 대뜸 쏟아부었다. 펄펄 끓는 차는 아니었지만 완전히 식은 차도 아니었다. 화석정군은 난데없는 차 세례에 눈을 감은 채 뚝뚝 물방울을 떨어뜨렸다.

“쓰레기 같은 놈.”

그 모습을 바라보며 진해는 이를 악문 채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격렬한 혐오를 담아 말을 뱉었다.

“……굳이 떠볼 필요도 없었군. 얼마만큼 아는지 몰라 고민했는데 괜한 짓을 했어.”

화석정군은 까마득한 황실의 일원인 자신에게 무례를 범했음에도 전혀 진해를 탓하지 않았다. 그는 궁인을 부르지 않고 침착한 태도로 자신의 얼굴을 훔쳐 냈다.

“황후가 말했나?”

“그게 중요하냐? 내가 추궁했다. 하도 수상한 냄새를 풍기길래 온 궁을 뒤져서 얻은 심증 쪼가리를 들이대서 억지로 자백을 받아 냈다. 됐냐?”

“후후, 그래. 그가 먼저 말하지 않았단 말이지. 버드나무 가지처럼 여린 이가 생각보다 강단이 있어. 의리도 있고. 그럼 나도 그를 될 수 있는 한 존중해 줘야겠지.”

진해는 젖은 채 큭큭 웃는 화석정군을 마치 미친놈 보듯 바라보았다. 사실 한 짓만 보면 미친놈 저리 가라였다. 화석정군은 젖은 얼굴을 괴고 진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진해는 저놈의 눈동자에 자신이 담겨 있는 게 싫었지만 눈을 피하면 지는 것 같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월산과 해산. 두 황자가 자네를 좋아한다던데 자네는 둘 중 누가 좋은가?”

“왜? 이제 와서 아비 노릇이 하고 싶은가 봐? 내 앞에서 굳이 애쓰지 않아도 되는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네.”

“자네야말로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설마 황상께서 성월공이 황자라고 말씀하시던가? 아니, 성월공은 내 아들이야. 지순 황태공께서 목숨을 걸고 낳아 주신 내 아들. 이 사실은 누구도 바꿀 수 없어.”

개떡 같은 소리였지만 뭔가 깊은 감정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화석정군은 진해를 쳐다보다 곧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황후궁에 접한 정원의 어느 한구석이었다. 그의 눈은 이제 진해가 아니라 어딘가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래. 성월공은 내 아들이지. 그래서 나는 자네가 누구를 택할지 진정으로 궁금해하고 있어. 함께 수라도에 떨어질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혼자만이라도 인간의 길을 택할 것이냐. 누구를 택하든 자네의 부귀영화는 보장되겠지. 자네가 누굴 택하든 나는 그에게 힘을 보태 주겠네. 자네를 황정군으로 만들어 주겠어.”

“필요 없어. 그 전에 당신을 형장에 세울 테니까.”

“하하. 냉정하긴. 그런 점이 황자들을 홀렸을까?”

“…….”

“그리고 안타깝게도, 자네는 날 형장에 세우지 못해.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자네가 뛰어나다 칭송해도 나는 죽지 않아. 적어도 황자 중 한 사람이 죽지 않는 한 이 몸의 목숨은 보장되어 있지.”

“뭐……?”

진해는 한시라도 빨리 이자와 헤어지고 싶었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의미심장했다. 황자 중 한 사람이 죽지 않는 한이라니, 대체 무슨 뜻일까.

“자, 다시 물어보겠네. 자네는 황자들 중 누구를 택할 건가. 월산인가, 해산인가. 자네를 보니 옛 생각이 나서 특별히 기회를 주는 걸세. 자네는 나를 죽여 버리고 싶어 하지만 나는 자네를 보니 옛날이 생각나서 참을 수가 없어서 말이지.”

게다가 진해를 보니 옛날이 떠오른다는 괴상망측한 말까지 하기 시작했다. 진해는 이자가 진정 광인이 아닌가 생각했으나 다시 마주친 눈동자는 아까와 같이 감정이 회오리치는 게 아니라 마치 불이 꺼진 뜨거운 재를 닮아 있었다. 그리고 그 눈을 본 진해는 꽤 큰 충격을 받았다. 화석정군 이자, 생각보다 엄청나게 대담하고 엄청나게 파괴적이었다. 자기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할 정도로.

그랬다. 이건 도박이었다. 손에 땀이 쥐어지고 심장에서 쿵쿵 크게 북 치는 소리가 날 정도로 커다란 판이 진해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도박의 상대는 화석정군과 황제. 판돈은 화석정군의 목숨과 진해가 알 수 없는 중요한 무언가.

“……옛날의 나는 멍청했지. 그래서 내 낭군을 잃게 되었어. 자네는 내가 쓰레기 같다고 했지만 나는 단 한 순간도 내가 한 짓에 대해 후회한 적이 없네. 시간을 되돌린다 해도 나는 또 할 거야. 그리고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거야.”

“대체, 당신 뭔 짓을 한 거야? 뭔 짓을 또 한 거냐고!!”

“궁금한가?”

지금 저지른 짓도 충분히 잔학하고 흉악하기 짝이 없는데 화석정군은 거기에 자신의 목숨을 더해 또 뭔가를 했단다. 마음 같아서는 황제와 화석정군의 도박판 따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고 싶었지만 도박판에서 돌려지는 패가 해산과 월산이다. 진해의 첫사랑과 진해의 정인이다.

“그럼 택하게. 월산인가, 해산인가.”

진해는 그제야 자기가 자신도 모르게 반쯤 일어서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다. 동시에 잠춘동의 도박꾼들을 주름잡은 큰손으로서의 오진해가 되살아났다. 강렬한 호기심과 모험심이 주저하는 진해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못 먹어도 거(去), 거라면서.

진해는 곧 화석정군에게 자신의 패를 내밀었고, 진해의 패를 본 화석정군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는 자신의 패를 뒤집으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옛날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것은 양인 황자는 황제가 될 수 없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 * *

화석정군 양지서의 부군 안지순은 월국삼옥으로 유명했다. 월국삼옥이란 대학사 연재균의 아들 연광, 대장군이자 장강성주인 강절곤의 아들인 강백서, 그리고 삼 황자인 안지순을 묶어 일컫는 말이었다.

하나같이 유서 깊은 명문대가의 자제들인지라 셋은 어릴 적부터 접점이 많았다. 특히 연광과 강백서는 우부들끼리도 친우인지라 친해지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안지순이 이들과 어울리게 된 건 태자 경순이 강백서의 큰형인 강맹서와 토의인지 뭔지를 한다고 자주 장강성 별장에 내려가서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적어도 화석정군 양지서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어쨌거나 월국삼옥은 그 시절 월국 사람들의 자랑이자 보물이었다. 금을 타는 데 뛰어난 연광과 피리를 잘 부는 안지순의 음악에 맞춰 검무를 추는 강백서는 마치 한 폭의 그림과 같았으니까. 그리고 그때 양지서는 처음으로 사랑을 느꼈다. 훤칠한 편인 두 친우와 달리 아담한 체구로 새침하게 피리를 부는 황자 안지순을 보았을 때 양지서는 비로소 운명이라는 단어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하늘이 양지서에게 그 운명을 쥐여 주었다. 가문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으나 수완이 뛰어나고 하나같이 부지런한지라 쌓은 재물이 많았다. 혼기가 꽉 찬 양인이 함부로 밖을 나서면 큰일이 나는 시절이었으나 운명에 눈이 먼 양지서에게 그런 것이 보일 리가. 양지서는 하인들을 주렁주렁 달고, 얼굴을 면포로 가리는 수고를 하면서도 안지순이 피리 부는 자리를 찾아다녔다. 강절곤의 생일잔치 때도 마찬가지였고, 그 모습은 황제를 대신해 참석한 태자 안경순의 시선을 끌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양인이 이런 데를 오는가?”

태자가 묻자 막 태자를 호위하기 시작한 강백서의 둘째 형 강달서가 답했다.

“양씨의 자식인데 피리 듣는 걸 좋아한답니다. 뭐, 나비가 꽃을 찾아드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푸핫, 나비가 꽃을 찾아? 이봐, 저기 자네 아우도 있는 거 안 보여?”

“전하, 혹시 황상께서 눈치 없다고 안 하시던가요?”

“이런 무례한 양반. 하지만 그대를 벌하면 내 호위가 없어지니 참아 주지.”

“거 저치가 피리 소리 듣는 걸 좋아한다잖습니까. 대가리 멀쩡하게 달린 놈이면 제 동생을 좋아해도 감히 황자마마 피리 소리를 핑계로 대겠어요? 차라리 금 타는 게 보기 좋다고 하지.”

“오호라. 자네 지금이라도 문과 볼 생각 없어?”

“아이고, 저희 집은 무가거든요!”

태자 경순과 달서는 그 후로는 제법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한때 이름 높은 양아치였던 달서는 모르는 가문이 없었고 태자의 물음에 막힘없이 답해 주었다. 태자의 물음이란 가문에 벼슬한 자가 있느냐, 얼마나 높으냐, 인척 관계는 어찌 되느냐, 혹여 외국과 얽힌 것은 아닌지, 빚은 없는지 등등이었다. 특히 가문 사람들의 호오와 야망 등에 대해서는 꽤 집요하게 물었는데 눈치 빠른 강달서는 그 물음에서 경순의 의도를 모조리 눈치채 버리고 말았다.

태자 경순은 자신 외에 황위 계승권을 가진 음인 동생을 황궁에서 내보내 버리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낮은 가문에 보내면 형인 자신의 격 역시 같이 떨어져 버리는 셈이니 기우는 가문엔 절대 보낼 수 없었다. 그렇다고 너무 쟁쟁한 가문에 보내 버리면 지순의 의도와 관계없이 황위를 노릴 수도 있었다. 유서 깊진 않지만 돈 많고, 인망 좋은 양씨 가문이 딱이었다. 지순에게 홀딱 반해 쫓아다니는 걸 보면 거절할 리도 없었고.

―그렇게 하여 양지서는 안지순의 정실이 되었고, 화석이라는 봉호를 받게 되었다.

“서방님. 벌써 나가십니까?”

양지서는 그야말로 최선을 다했다. 황자와 혼인해 대번에 격이 뛴 가문 역시 양지서에게 아낌없는 후원을 했다.

“어. 새로 가르친 재주를 보여 주려고.”

머나먼 이국에서 힘들게 수입한 앵무새의 알이 그랬다. 황제에게 바쳐도 모자람이 없을 새의 알은 양지서와 어조원 내관 소족자의 보살핌 속에 부화해 안지순의 기쁨이 되었다. 지순은 새의 이름을 유일청이라고 지었다.

“혹여 언제 돌아오실지 알 수 있을까요? 돌아오실 때 맞춰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필요 없어. 먹고 올 거니까.”

하지만 세상일이 어디 마음대로 되던가. 약혼 때부터 시큰둥하던 지순은 혼인 후에도 여전히 시큰둥했다. 양지서와 있을 때보다 친우들과 어울려 피리를 불 때가 훨씬 행복해 보였다. 재료를 아낌없이 부어 지은 아담한 저택을 봐도 덤덤했고(약간의 노력을 더해 황궁의 비밀 통로와 굴을 잇자 조금 기뻐하긴 했다), 온갖 산해진미를 준비해도 한순간이었다. 귀한 황자님이다 보니 비단옷이나 금은보화는 식상할 것 같았다.

“저…….”

함께 즐거워지려고 손끝에 피가 맺히도록 금을 연주했지만 연광에 비하면 미흡했다. 춤은……, 조신한 양인이 추기에는 요란스러운 것 같았고.

“알아. 희락기지?”

“아, 알고 계셨습니까?”

그래도 양지서는 여전히 안지순이 좋았다.

“바보. 내가 아무리 놀고 다녀도 내 정실을 희락기에 방치할 정도로 무책임하진 않아. 백서가 중요하게 할 이야기가 있다니까 이야기만 듣고 돌아올 거야.”

때때로 그가 보여 주는 저 미소가 좋아서, 단지 그의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그를 안을 수 있게 해 주어서,

“다녀올게, 지서.”

자신을 그의 양인으로 택해 주어서, 그래서 양지서는 안지순을 정말로 사랑했다. 비록 안지순이 첫날밤에 눈물을 보이고 그것이 그가 따로 사랑하는 이가 있어 그랬음을 알게 되어도 말이다.

* * *

그날 강백서가 말한 것은 그가 곧 고산국으로 유학을 가게 된다는 말이었다.

“백서가 없으면 심심해지겠어. 광도 좋은 친구지만 아버지를 쏙 빼닮아서 고리타분할 때가 있거든.”

정사의 여운 속에서 지순이 말했다. 지순은 지서의 무릎을 베고 있었고, 지서는 조심스레 지순의 머리를 어루만지고 있던 중이었다. 결은 일부러 하지 않았다. 지서는 지순과의 아이를 원했지만 동시에 지순이 자신과의 아이에게도 관심이 없으면 어쩌나 걱정이 되어서였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가 자신에게 마음을 열면 그때 부탁해 볼 셈이었다.

“거기다가 연광도 뭔가 다른 일이 있는 것 같고.”

“다들 혼기가 찼으니까요. 슬슬 혼담이 오갈 때지요.”

“에이, 싫어! 연광은 혼인하면 더 늙은이가 될 것 같단 말이야! 지금도 맨날 너한테 좀 더 잘해 줘라, 첫 아이는 꼭 정실과의 사이에서 봐야 한다. 이런 잔소리만 하는데!”

“저런, 다음에 연광 님을 보면 뭐라도 드려야겠습니다.”

“어? 지서 너 그런 말도 할 줄 알아?”

“조금 주제넘었습니까?”

지서가 살짝 농을 섞자 지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지서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지서는 지순의 맑은 눈동자와 마주치자 가슴이 뛰기 시작해 희락기의 열기가 다시금 살아나는 듯했다.

“아니, 재밌어. 양인은 다 비슷한 줄 알았는데……, 좀 다른 느낌이네.”

지순의 양인.

“우리 둘만 있을 땐 더 해도 돼. 아바마마나 다른 영감들이야 양인이 어쩌고저쩌고하는데 난 하나도 신경 안 쓰거든.”

“……그럼 제가 조금이라도 서방님의 무료함을 덜어 드려도 될까요?”

“왜 안 되겠어. 금도 열심히 연습한다던데.”

“아, 아, 알고 계셨나요?”

“바보. 내가 말했지. 내 정실에 무관심할 정도로 무책임한 사람이 아니라고. 손을 그렇게 하고 다니는데 모르면 그게 멍청이지. 연습은 좋지만 손을 혹사하진 마. 연광 그 녀석은 걸음마를 뗄 때부터 배웠는데 그걸 어떻게 단기간에 따라잡아?”

지순은 깜짝 놀라 어버버거리는 지서의 손끝을 들어 살짝 입을 맞췄다. 이렇게 친밀한 접촉은 처음이라 지서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물이 들었다.

“……그래, 나도 날 사랑해 주는 사람이 좋아. 나도 얼마든지 잊을 수 있다고.”

지순이 작게 속삭이는 말에 가슴이 뜨끔했지만 그 후에 이어지는 입맞춤이 지서의 불안을 순식간에 녹여 주었다. 지서는 조심스레 지순을 자리에 눕혔고, 언제나처럼 지순에게 봉사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말랑하고 탄력 있는 허벅지는 지서가 지순의 몸 중에서 가장 입 맞추기 좋아하는 곳이었다.

* * *

강백서가 떠나기 직전, 연광의 중요한 일 역시 밝혀졌다. 밝혀졌다 한 이유는 연광이 방이 붙기 전까지 입을 다무는 바람에 강백서도 안지순도, 그 누구도 이 사실을 알지 못했던 탓이었다.

“…….”

연광과 양인 황자이자 이 황자인 안회순이 혼약했다.

[안녕하세요!]

재롱을 부리는 유일청을 앞에 두고 지순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강백서는 지순 앞에서 팔짝팔짝 뛰며 연광 이 의리 없는 놈을 가만두지 않겠다며 이를 갈다 뛰쳐나갔다. 지서는 외간 음인인 강백서가 나간 뒤 조심스레 정자의 기둥 뒤에서 몸을 드러냈다.

[응애응애!]

유일청이 날개를 들고 고개를 묻었다. 갓 배운 아기 흉내였지만 지서는 단순히 유일청이 아기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지순이 잠이 들거나 자리를 비운 새 유일청에게 재주를 복습시키는 게 지서의 일과였기 때문이었다.

“……서방님.”

“있잖아, 나.”

역시나 지순의 목소리는 물기에 잔뜩 젖어 있었다.

“나……, 너무 기뻐. 연광이 내 인척이라잖아. 연광은, 진짜 성격도 좋고, 자상하고, 그 집은 아바마마랑 달리 첩실 들인 적도 없고. 정말 좋아.”

양인 황자 안회순은 황제가 외유를 갔다가 갑작스러운 희락기를 맞아 얻은 자식이었다. 정향탕을 불규칙하게 복용한 탓에 생긴 부작용이라 어찌 막을 방법도 없었다고 한다. 차라리 호위와 잤으면 좋았으련만 황제의 상대는 글자도 읽을 줄 모르는 무식한 이였고, 황제는 못마땅함을 참으며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려왔었다.

“둘째 형님은, 오랫동안 혼자였잖아. 가뜩이나 아바마마는 양인도 별로 안 좋아하시는데, 그런데.”

그러나 온갖 귀한 가문과 미인이 판치는 황실에서 무지렁이 평민이, 그것도 영특하지 못한 이가 오래 버틸 리 없었다. 그는 차라리 출궁하길 원했으나 황자의 생부인 이상 그럴 수 없었고, 결국 목숨을 버려 혼만이라도 궁 밖으로 떠나갔다.

“서방님. 말 안 하셔도 괜찮아요. 저는, 저만은 서방님의 편입니다.”

“있지, 사실 둘째 형님은 엄청 똑똑하다? 너무 똑똑해서 일부터 큰형님 앞에서 글자를 틀린다? 난 정말로 몰랐는데, 대학사랑 둘만 있을 때는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막 하는데.”

지서가 조심스레 어깨를 어루만지자 지순이 울음을 터뜨리며 지서를 꽉 끌어안았다. 지서는 그제야 지순이 어떤 식으로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했음을 알 수 있었다. 연광을 좋아했든, 혹은 이 황자를 좋아했든.

“내가 이상한 거 알아, 미친 소리 하는 거 알아! 하지만, 하지만 좋아진 걸 어떡해!”

“괜찮아요, 저도 압니다. 그 기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해요.”

내가 당신을 그렇게 좋아했으니까.

“정군, 나 어떡해, 어떡하면 좋아……. 축하해 줘야 하는데, 자꾸 나쁜 생각만 들어!”

“서방님…….”

비록 해서는 아니 될 사랑이라지만 그 기분을 너무나 잘 이해해서 지서는 지순을 끌어안고 함께 울었다. 하필이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이가 가장 모질고 힘든 사랑에 아파해서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차라리 대신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차라리 그의 아픔을 대신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서는 그의 아픔을 나눠 받으며 세월이 흘러 지순의 상처가 잘 아물기만을 바랐다. 감히 자신이 치료하길 바라진 않아도 적어도 자신이 그 상처를 보살필 수 있기를 바랐다.

* * *

그리고 하늘은 양지서를 버렸다.

* * *

“축하드립니다, 정군! 마마께서 회임하셨습니다!”

“아, 아아……. 그래?”

해국과의 전쟁 이후 많은 것이 달라졌다. 양지서의 가문은 지방으로 피난하느라 규모가 반쪽이 되었고, 징병을 갔다가 죽은 이들도 수두룩했다. 가장 크게 변화한 건 황실이었다. 태자 경순이 죽은 뒤 본래라면 황위에 올랐어야 할 황자 지순이 자신의 황위를 이 황자이자 양인 황자인 안회순에게 양보했다.

“하, 하하, 하…….”

언제부터 그렇게 하기로 했을까. 지서는 자신의 아둔함이 이때처럼 원망스러운 적이 없었다. 언제 수도가 함락될지 모른다는 불안함과 지순만이라도 내보내야 한다는 슬픔과 결단에 잠겨 지서는 파도에 휩쓸리는 조각배처럼 지내 왔었다. 그때, 연광이 변장을 하고 찾아 왔을 때도.

“……정, 군?”

“네, 마마. 저 여기 있습니다.”

연광은 자신이 지순으로 변장하고 포위한 해국군 일부를 끌어내는 겸 고산맹으로 가 도움을 청하겠다고 했다. 만약 자신이 언제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자신이 뚫은 빈틈으로 지순을 탈출시키라고 했다. 지순은 자신이 월국을 책임져야 한다는 중압감과 홀로 수도를 빠져나가야 한다는 불안함에 지서와 마찬가지로 제정신이 아니었었다. 그래서 지서가 그를 비밀 통로 안에서 연광으로 변장시켜 줄 때도 연신 불안한 눈으로 지서를 바라봤었다.

“나, 어디 아파……?”

이제는 황자가 아니라 태공이었다. 지서 역시 진봉해 곧 봉호를 바꾼다고 했다.

“……아니요.”

“근데, 왜 그래?”

지서는 지순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서가 지순을 변장시켜 준 때가 벌써 몇 년 전이었다. 고산맹을 끌어들여 월국을 승리로 이끈 영웅 강백서가 휴전 조정 중에 낳은 아이가 벌써 다섯 살이었다. 그리고 지서는, 아직 지순에게 결한 적이 없었다.

“…….”

결은커녕 근래 정교한 적도 드물었다.

“마마…….”

“대체 왜 그러는데?”

현기증을 일으키며 쓰러진 지순의 얼굴이 홀쭉했다. 최근 식사도 거르고 구역질을 해서 가뜩이나 가슴을 졸이던 지서였다. 그런데 그게 다 회임 때문이었다.

“저를, 아직도 정군으로 여기신다면 솔직히 이야기해 주십시오.”

“왜 그런 소리를 해?”

“대체,”

언제부터.

“왜 그러셨습니까?”

“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는 지순을 보자 지서의 가슴속에 처음으로 불꽃 같은 감각이 일어났다. 하지만 창백한 얼굴을 보자 그 불꽃은 순식간에 사그라지고 말았다. 빌어먹게도, 아직도 사랑했다. 배 속에 다른 놈의 새끼를 품고 있어도 아직도 그가 걱정되고, 아직도 그가 사랑스럽고.

“그럼 다르게 여쭙겠습니다. 아이의 아버지가 황상이 맞으신가요?”

“……아, 이?”

지순은 아이라는 말에 저도 모르게 제 배를 내려다보았다. 정사를 나누진 않지만 잠자리는 같이하는 지서였다. 지순의 옷 시중 역시 지서가 자청해서 들고 있었다. 그런 그도 몰랐으니 지순 역시 알지 못했으리라. 아니, 어쩌면 상상조차 하지 않았으리라.

“아, 아이라고?”

“예. 태의가 회임하셨다 하더군요.”

“아이, 아이라니!”

“마마.”

지서는 지순을 알았다. 지순은 아직 아버지가 될 준비도 자격도 갖추지 않은 이였다. 지서는 지순의 그 순수 혹은 무지 역시 사랑했다.

“……미안해.”

그리고 이런 비정함 역시도.

“정말, 미안, 해…….”

“…….”

사과 따위 듣고 싶지 않았지만 사과를 멈추게 할 기력도 없었다. 지서는 지순을 만나 처음으로 반했던 때만큼이나 사지에 힘이 없었다. 마치 세상에 홀로 버려진 기분이었다.

“……그래서 아이의 좌부는 황상이 맞으신가요?”

지순은 자신의 등 뒤에서 자신이 말하는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제 입을 움직이는데도 감각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지순이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단 한 번이었지만 분명한 끄덕임이었다.

“그렇군요. 그럼 됐습니다.”

“돼, 됐다고? 정말 이대로 된 거라고?”

“그럼, 지금이라도 아이를 없애시겠습니까? 아직 배가 부르지 않았으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말투는 평소와 다름없었지만 지서는 자신이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니, 오히려 이성적인 걸지도 몰랐다. 황제의 아이라면 결코 태어나서는 안 될 아이였으니.

“제게는, 선택권이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은 둘의 관계에서 어떠한 것도 택할 수 없었다. 안회순이 그냥 양인 황자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의 그는 황제였고 안지순은 태공이었다. 안회순이 지우라고 해도 안지순이 거부하면 그만이었다. 월국은, 아직은 음인이 우선인 나라였다.

“……모르겠어.”

그런데 조금 문제가 생겼다. 사랑하는 이와의 사이에서 생긴 아이이니 기뻐할 줄 알았던 지순이 심란한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이 애, 과연 태어나서 행복할까?”

또한 차갑게 식어 있던 지서가 당황할 정도로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지서는 지순이 단순함이나 무지가 아닌 나름의 큰 결단을 하고 황제와 동침했음을 알 수 있었다. 때로는 강력한 하나가 자잘한 여럿을 이기기도 하는 법이다. 게다가 음인과 양인 사이에는 때때로 사람이 알 수 없는 인력이 작용하는 법이다. 형제 사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못하겠지. 만약 형님이 거부하면 다 크기도 전에 죽을지도 몰라. 잘 크더라도, 제대로 행복할 수 있을까. 나부터가 이렇게 가슴 아픈데 아이는, 행복할까?”

……음인과 양인 사이에는 때때로 사람이 알 수 없는 인력이 작용하는 법이다. 지서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거칠어진 지순의 손을 그러쥐었다. 퀭한 눈이 지서를 바라보았다.

“행복하게 해 주면 됩니다. 아니, 제가 행복하게 해 줄 겁니다. 그 아이는, 제 아이니까요.”

“지서……?”

“당신은 저의 남편. 저는 당신의 남편. 그렇다면 당신의 태에 든 것은 당연히 저의 아이입니다. 예, 그렇고말고요. 황상께서 거부하시거든 아이와 함께 떠나겠습니다. 본가도 지방으로 내려갔으니 거기서라면 얼마든지 건강하게 기를 수 있어요.”

“정군…….”

퀭한 눈가가 지서의 눈을 바라보며 젖어 들었다. 미운 사람, 하지만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 지서는 언젠가처럼 와앙 울음을 터뜨리는 지순을 꽉 끌어안았다. 지서의 눈에도 방울방울 눈물이 맺혀 있었다.

“나도, 나도 같이 갈 거야! 만약 형님이 지우라고 하면, 그땐, 지서랑 떠날 거야, 당신만 사랑할 거야……!”

그리고 자신에게 매달려 오는 음인을 느끼며 지서의 눈에 맺힌 것이 주르륵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겨우 이렇게까지 해서, 이렇게 만신창이가 되어서야 이 사람의 진심 한 조각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 참담하고 행복했다.

그리하여 지서는 자신의 음인을 지키기 위해 누가 뭐라 하기도 전에 큰 잔치를 열었다. 작은 저택이 미어지라 사람을 초대하고 구걸하는 거지들에게 음식 찌꺼기가 아닌 커다란 은전을 한 덩이씩 내어 주었다. 얻어먹은 입이 많은 만큼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지서는 조금씩 짐을 정리하며 황제가 그들을 놓아주기를 기다렸다.

황후의 회임 소식이 전해지기 전까지.

* * *

비밀리에 화석정군 댁을 방문한 회순은 아이를 없애라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네가 그 아이를 낳아 길러 줘야겠다는 말을 했다. 지순은 몸이 허약해진 통에 황제가 온 것도 모르고 자고 있었다. 지서는 지순을 보여 줄 생각도 없었지만 황제 회순이 지순의 안부를 단 한 번도 묻지 않는 것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황후가 음인을 출산하면 곤란해진다. 그러니 지순이 음인이든 양인이든 낳아 줘야겠어. 적어도 출산 전까지는 힘이 분산될 테니까. 아니, 지순 쪽이 훨씬 유리하지.”

“……한번 보시지도 않는 겁니까?”

회순은 듣고 있던 지서가 말하자 그제야 지서를 제대로 돌아봤다. 그전까지의 회순은 신하에게 일방적으로 명령을 하달하고 있을 뿐이었다.

“왜 그래야 하지? 원래는 낳아서는 안 되는 아이다.”

“아니요. 제 아이입니다. 제 남편이 제 아이를 낳아 주시는 겁니다.”

“그래. 그렇겠지. 그리고 그걸로 대답을 대신하도록 해라.”

내 음인이 아니니, 내 아이가 아니니 당연히 궁금하지 않다. 명백한 부정이었다. 둘만 있는 자리인데도 단 한 점도 제 핏줄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지서가 다른 이의 아이를 가졌을 때 사그라졌던 불꽃이 단번에 피어올랐다. 불꽃이 폭발해 지서의 눈이 뒤집히게 했다. 제정신을 차리자 지서가 회순의 멱살을 잡고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짓을!! 이런 짓을 해 놓고도,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어!!!”

회순은 제법 놀란 표정이었다.

“놀랍군. 그대 진정으로 태공을 사랑하나?”

“그래, 사랑하고말고, 빌어먹을, 당신을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그를 사랑해! 태어나서는 안 될, 저주받은 핏덩이를 내 자식으로 삼을 정도로!!”

그러나 곧 순식간에 침착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회순은 힘을 줘 지서의 손을 떨쳐 냈다.

“그렇다면 나는 그 저주받은 핏덩이를 만들 정도로 절박했다고 말해 두지.”

“뭐?”

“절박해 보이는 건 지순도 마찬가지였으니 서로 거래를 한 거야. 지순은 내 몸을, 나는 이 황위를.”

“……뭐?”

“본디 양인은 황제가 될 수 없다. 당연한 거 아닌가? 지순 저 애가 아무리 아둔하더라도 황족이다. 아무리 책무가 무섭고 겁이 나더라도 자신을 도와줄 이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

“고작, 고작, 그런 것 때문에……!”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금 분노하는 지서를 보며 이번에는 회순이 정말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황위가 고작이라고?”

지서는 그 말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회순의 뺨에 주먹을 날렸다. 회순의 뺨이 순식간에 부어오르고 입가가 찢어져 피가 났으나 회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것 역시 대가로 받겠다는 듯 한결같이 변함없는 표정으로 올곧게 지서를 바라보았다.

“황제의 태를 타고 태어나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게, 그대는 얼마나 허망한지 모르는군.”

“닥쳐!!”

“지서는 단지 태자가 죽은 것만으로도 황위를 거머쥐게 되었다. 나는 그게 더할 나위 없이 갖고 싶었어. 나는 결코 가질 수 없는 별을 내 손에 쥐고 싶었다. 단지 그뿐.”

“그래서 천륜을 거슬렀어?! 그래서, 내 음인을 빼앗았어!?”

“그래. 그것뿐이다. 정말로 그것뿐이야. 그리고 나로 인해 월국의 많은 것이 바뀌겠지. 나는 역사에 이름을 남길 것이고, 변화한 월국을 만대에 이어지게 할 것이다. 그래, 그뿐이야.”

“아악!!!!”

고작 황위 따위에 자신의 음인을 범했다는 소리에 지서의 이성이 끊어졌다. 지서는 괴성을 지르며 회순에게 다시 덤벼들었으나 이번에는 회순이 받아 주지 않았다. 회순은 가볍게 피한 뒤 지서의 팔을 비틀어 지서를 제압했다. 지서가 온갖 소리를 지르며 날뛰어도 제압이 풀어지는 일은 없었다. 소리 없이 얌전히 산 줄만 알았던 양인 황자가 이런 것도 할 줄 알았다. 아니, 이젠 황제였지만.

“뭘 낳든 제 몫만 하면 목숨은 붙여 주마. 네 말대로 천륜을 어기고까지 얻은 아이니 중히 여겨 줘야지.”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그리고 아이의 아버지인 너의 무례 역시 눈감아 주겠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말해 주자면 나는 예전부터 얌전 떠는 네가 별로 마음에 차지 않았어. 세상이 바뀌었으니 이제라도 좀 움직이는 게 어떠한가.”

회순은 자신이 할 말을 끝낸 뒤 지서를 멀찍이 밀어 버렸다. 밀쳐진 지서는 휘청휘청 걸어가다 넘어졌고, 제 속에서 휘몰아치는 온갖 격정과 분노를 참지 못하고 악을 썼다. 차라리 두 사람이 정말로 사랑했으면 참았을 것이다. 천륜을 어겼다고 매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랑으로 태어난 아이니 함께 기르자고 애써 웃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울부짖는 지서를 뒤로하고 회순은 저택을 떠났다. 황후가 회임했다는 소식을 들은 지순은 입맛을 잃었고, 조금씩 말라가기 시작했다. 지서는 자신을 감싼 이 모든 상황이 저주스러웠다. 희미하게 웃는 지순의 얼굴마저도 밉고, 증오스럽고, 그러면서도 애틋해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아이 이름을 뭐로 지으면 좋을까?”

그래도, 그래도 눈앞의 이가 사라지는 건 원치 않아서 그와 끝까지 함께 살고 싶어서―

* * *

“왜 그랬어, 왜 천륜을 어기는 그런 짓을 했어!!”

“지, 질투하는 거야? 광이 네 양인, 을 빼, 뺏었다고? 아, 안 됐지만 이, 이 애가 먼저 태, 태어날 거야, 이 애가 먼저 봉작을 받―”

“아니야, 지금 네게 화내는 거 아니라고!! 난, 너를……, 너를……, 걱정하고 있단 말이야……. 그 애에게, 내 아이가 형이라고 부르게 할 순 없어…….”

* * *

산파와 함께 아이를 씻기고 돌아온 지서의 눈앞에 대롱대롱 매달린 두 다리가 보였다.

* * *

“연광에게 한 소리 들은 후로는 신경이 예민해지셨었지. 오로지 내게만 곁을 허락하셨어. 내게만.”

지독한 사랑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사내가 말을 멈췄다.

“……그러지 말걸.”

절대로 후회 따위 하지 않는다고 했던 사내는 아직도 후회하고 있었다.

“……외롭게, 혼자 두지 말걸.”

지서의 귓가에 매달린 다리를 붙잡고 처절하게 울부짖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날 사랑한다고, 같이 살자고, 그렇게 말했잖아. 기억은 쉽게 풍화된다고 하던데 이것을 보면 그 말은 다 거짓인 듯했다. 지금도 그가 생각나고, 지금도 이리 고통스러운 걸 보면.

“나는 모든 것이 증오스럽다. 이 월국은 부서져야 해. 다행히 우리 아들이 효자라 이 아비 대신 비원을 이뤄 줄 것 같아 무척 기쁘게 생각하고 있어.”

“…….”

“나 혼자 말이 너무 길었나? 미안해. 황제가 보낸 감시인을 없앤 뒤로는 쭉 혼자 살았거든. 사람이랑 이렇게 오래 말한 건 오랜만이야. 호감을 가진 상대와는.”

“……호감 좋아하시네.”

“아니, 정말이야. 자네는 내 사위가 될지도 모르잖아?”

“…….”

부스스 웃는 얼굴을 보며 진해는 속사포처럼 쏟아붓던 욕설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저 말이 어디까지 사실일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이 남자도 딱하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가 저지른 짓을 용서할 수는 없지만.

“난 황정군 같은 건 필요 없어.”

진해는 자신이 고른 답을, 패를 내밀었다. 판에는 무수한 경우의 수가 있었고 정 안 되겠으면 판을 엎으면 그만이었다. 속임수나 숨긴 패 등은 치지 않고 순수하고 놀이로만 보면 말이다.

“하지만 소월과는 혼인할 수 없어. 이유는 단순해. 소월을 좋아하지만 소월이랑은 끝났기 때문이야! 파각사를 보낸 게 원망스러워서 그런 것도 아니고 걔가……, 뭐 좀 복잡한 사연이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야! 아니, 그 전에 난 이미 딸린 음인이 셋이나 있다고!”

“정말 황정군 자리가 필요 없나?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황제에게 계속 당하고 있어야만 할 거야. 그에게 목줄을 잡힌 사냥개가 되어 내 남편처럼 그렇게 끝날지도 몰라.”

“알 게 뭐야. 알 거 다 아는 당신도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 해산 도련님이 황위를 원하신다면 최선을 다해 내조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나는 굳이 황제한테 알랑거릴 이유가 없어!”

그놈보다 내 친좌부가 훨씬 더 멋진 사람이었다며 진해가 흥 콧방귀를 뀌었다. 지서는 황정군 자리가 필요 없다는 진해에게서 누군가의 그림자를 강하게 겹쳐 보았다. 표현하는 방식은 정반대였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단 한 점도 다르지 않은 색을 띠고 있었다.

황자 안지순을 사랑하던 양지서. 화석정군이 아닌 한 사람의 양인으로서 양지서는 그가 행복하길 바랐다. 자신이 이용당했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며 부른 배를 내리치던 그를 말리면서도, 자신이 천륜을 어긴 것뿐만 아니라 친우마저 배신한 셈이 되었다는 사실에 고통스러워하는 그를 끌어안으면서 양지서는 안지순이 행복하길 바랐다.

‘산파는 한 사람이면 돼. 나는 내가. 마지막으로 보는 사람이…… 정군이었으면 좋겠어.’

차갑게 식은 그의 몸을 끌어내리고, 공허해진 머리를 하고, 침상에 누운 그를 내려다보며 무슨 생각을 했던가. 서툴게나마 손수 씻긴 아기를 안고 무슨 생각을 했던가.

복수.

슬픔과 절망 뒤에 찾아온 것은 지서가 지순을 위해 누르고 또 눌러 놓았던 감정이었다. 자신은 그와 거래했노라며, 그를 사랑 따위 한 적 없다는 황제 회순에 대한 복수. 아이를 바꾼 건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솔직히 그게 이렇게 매끄럽게 이어진 건 하늘이 자신을 도와서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의 남편에게서는 목숨을 앗고, 황제 그놈에게는 천벌을 내린 게 분명했다.

원귀비 연광 그자는 그저 운이 나빴다. 그런 놈의 아이를 가진 것 자체가 불행이고 저주였다. 아니, 그런 것보다 그가 지순을 조금만 더 감싸 주었으면 지순이 목숨을 버리진 않았을 것이다. 황후? 황후는 회순의 정실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와중에 황후가 낳은 아이가 황제의 씨가 아니라는 점이 유쾌하긴 했다.

―너는 그 자리 외에 다 잃어야 해.

“할 말 끝났으면 서로 깔끔하게 헤어집시다. 하지만 나한테 호감 같은 건 바라지 마쇼. 복수를 할 때면 자기 무덤 자리도 같이 파 놓는 거잖아. 것보다 소월이 댁을 가만 안 놔둘걸? 걔가 데리고 있는 애 중에 두라는 애가 있거든? 가끔 이 머리로 어떻게 소월 곁에 붙어 있는지 신기하긴 한데 걔가 주먹은 좀 쓰더라구!”

“그래? 그럼 자네는 황제가 어째서 날 죽이지 않는지 더는 궁금하지 않다는 거지?”

자리에서 일어나 뒤돌아선 진해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사실 엄청나게 궁금하긴 했다. 그래도 사나이 체면이 있지 댁이 주는 거 안 받겠다고 해 놓고 이제 와서 달라고 하긴 좀…….

“……뭔데?”

하긴 언제부터 체면을 챙겼다고.

“황제가 황자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는 거지. 그리고 그 선택에 내가 필요하고.”

“아까부터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인지. 댁이 출생을 증명해 줘야 해서 그런 거잖아!”

아이의 몸을 씻긴 화석정군만이 연광의 아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연 원귀비 소생의 적통 황자를 증명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황제는 다른 이들은 모두 제거하면서 화석정군만은 살려 둔 게 분명했다.

사실 다른 아랫것들은 살려 둬 봤자 다른 곳에서 입을 열 수도 있으니 자신에게 강렬한 증오를 품은 동시에 지순을 잊지 못하는 화석정군을 살려 두는 게 가장 현명한 선택지이긴 했다. 도중에 화석정군 양지서가 감시로 붙인 이를 죽이고 스스로 절에 불을 지르는 과격한 행동을 하면서까지 몸을 숨기긴 했지만.

“후후, 답을 알아내면 찾아오게. 틀렸는지 아닌지 알려 줄 테니.”

진해가 쏟은 찻물이 다 마르지 않은 축축한 옷을 입고 양지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진해와 마주 보았다. 속에 든 것을 털어 낸 그는 조금은 야위고, 비어 보였다.

“이것을 알게 되면 그대는 나와 같은, 황제가 감히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자가 될 거야. 그리고 황제가 가장 없애고 싶어 하는 자가 되겠지. ……사실 자네가 영원히 몰랐으면 싶은 생각도 들어.”

―그래야 내 복수가 완성되니까.

희미하게 웃는 화석정군의 얼굴을 바라보며 진해는 목에 가시를 삼킨 기분이었다. 화석정군은 막상 진해에게 말은 했으면서도 진해가 답을 맞히는 건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자네가 영원히 몰랐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쪽이 선의가 넘쳐 보였다. 그는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섰다. 진해는 우두커니 서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 * *

진해보다 해산이 먼저 진해를 찾아왔다. 단정하고 냉정한 모양을 하고 있으나 진해는 해산의 속이 얼마나 다정하고 부드러운지 알고 있었다. 진정시킨다고 했으나 붉게 물든 눈시울이 그것을 고스란히 증명해 주었다. 이 눈시울을 보면 정답이고 자시고 화석정군을 조리돌림 하며 쳐 죽여도 모자랐다.

그런데 묘하게 뭔가 걸렸다. 그냥 아무 함정이나 파서 그를 몰아넣어 없애 버리거나, 혹은 소월에게 자리를 마련해 줘서 알아서 처리하게 하면 될 텐데 그의 과거를 들어서 그런지 이상하게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런 것보다 그가 숨기려 하는 사실이 진해에게 생각보다 더 중요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래, 그런 예감이 들었다.

“응? 왜 이리 일찍 오셨어요? 설마 걔들이 나가라고 하던가요? 이런 나~ 쁜 놈들! 섭섭지 않게 쥐여 줬는데 내 당장 가서, 그냥!”

“해야, 아니다. 그들이 쫓은 게 아니라 내가 나온 것이다. 곧― 부황께서 당도하신다더구나.”

“엥? 황상께서요? 웬일이래. 이때까지 쳐다도 안 보던 사람이 벌써 노망이 났나?”

“해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으로는 황제를 이해하지 못한 진해의 입이 대번에 황제를 까기 시작했다. 해산 역시 바보는 아니었고, 진해의 태도와 화석정군을 감싸는 부황의 태도로 인해 자신의 생우부의 죽음에도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어쩌면 그가 오랫동안 황자로 살아왔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쉽게 알아차린 것일지도 몰랐다.

“잠깐 걷겠느냐.”

서러운 눈을 하고 걷는 해산이 쓸쓸해 보여 진해는 해산이 뭐라 하기 전에 제 손을 해산의 손안에 쏙 밀어 넣었다. 혼례식장에서 씨가 어쩌고저쩌고하기까지 했는데 이젠 무엇이 더 두려울까. 한마디로 볼 장 다 본 셈이었다.

“날이 서늘해져서 그런지 손이 시리네요.”

“너도 참…….”

“싫으세요?”

저를 보며 빙글빙글 웃는 진해를 마주하며 해산도 푸스스 웃음 지었다. 진해가 저를 기운 나게 하려 일부러 이러는 걸 모르지 않아서였다.

“해야. 내가 도성으로 돌아오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느냐.”

“제 생각?”

“어, 음, 그것도 맞지만―”

“너무하네! 전 정조를 위협받는 와중에도 해산 도련님만 생각했는데!”

“너야말로 거짓말하지 말거라.”

“엉?”

“내 생각이 아니라 날 포함한 네 예쁜이들 생각이겠지.”

“어, 어……. 어어……?”

언제나처럼 해산을 곯려 먹으려던 진해는 뜻밖의 반격에 큰 충격을 받았다. 아니, 우리 해산 도련님이 날 공격하다니! 못 본 새에 아주 어~ 른이 되셨어!

“해야. 나는 화석정군을 찾으러 가면서 쭉 생각했단다. 아이가 바뀐 그 순간 바로 바로잡았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될 수 있었을까. 내 생부와…… 수많은 사람이 그리 죽을 필요가 있었을까 하고 말이다.”

“제 말이 바로 그 말이에요. 황상이 멍청하신 분이 아닌데 왜 그러셨을까요?”

“일부러겠지.”

“네?”

“내 우부의 우부. 즉 내 할아버지인 연재균을 쳐 내려고 일부러 그런 것이겠지. 그는 백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러면서 군권을 쥔 창명후와 형제와도 다름없는 사이었지. 그런 그의 아들이 음인 황자를 낳았다.”

진해는 서글픈 표정에 날카로운 분노가 스미는 걸 똑똑히 지켜보았다.

“거기다 부황은 막 즉위한 양인 황제.”

“…….”

“가만히 놔둘 수가 없지. 아이가 바뀐 사건은…… 부황에게 좋은 기회였을 터.”

인척은 양날의 검이었다. 어떨 때는 적에게 대항할 배신하지 않는 힘이 되었지만 어떤 때는 내부의 적이 되기도 했다. 연재균이 아무리 인격자라도 그를 따르는 이들 모두가 황제에게 순수하게 충성을 맹세한다고 볼 수 없었다. 오히려 연재균이 있기 때문에 충성심이 분산되는 것이다. 거기다 황제 회순은 그 자리를 얻기 위해 천륜마저 어겼다. 오로지 그 자리를 얻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이와, 그것도 제 아우와 잤던 것이다.

“해산 도련님.”

“……응.”

“뽀뽀할래요?”

“……응?”

“응이라는 건 좋다는 뜻이죠. 자, 당장 뽀뽀하러 갑시다.”

“뭐, 뭐?”

사람으로는 쓰레기였지만 황제로는 최고였다. 그 자리를 지켜야 하는 게 황제라면 회순은 정말로, 굉장한 황제였다. 진해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가 황제라서 불행해졌고, 그가 황제인 덕에 굶어 죽지 않았다. 진해는 빈민동의 가장 밑바닥에서 구호소 덕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살았는지 똑똑히 두 눈으로 지켜보았다. 예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다는 말 역시 두 귀로 똑똑히 새겨들었다.

“가, 갑자기 무, 무슨?!”

“오, 마침 한적한 곳 발견!”

“해, 해야?!”

하지만 그런 이를 아버지로 둔다는 건 너무나 비극적인 일이었다. 황제로는 존경할 수 있지만 아버지로는 아니었다. 평범한 애정을 원하는 이에게는 맞지 않는 신발과도 다름없었다. 삐걱삐걱 걷다가 뒤꿈치가 모두 까지고 상처가 날 그런 신발.

진해는 궁인들이 오가지 않는 한적한 건물을 발견하고 해산을 그리로 이끌었다. 번듯하니 좋은 건물인데 이상하게 오가는 궁인들이 없었다. 자물쇠가 잠겨 있었는데 만재 오진해에게 그게 문제일까. 잠춘동 집 자물쇠도 고장 나면 이런 식으로 열었다. 해산의 눈이 자물쇠에 철사를 쑤셔 넣는 진해를 보며 한껏 커다래졌다.

“해산 도련님, 제가 좋아하는 거 알죠?”

“아, 알긴 하는데―”

“그럼 뽀뽀해 주세요. 하고 싶은 만큼 많이.”

순식간에 문을 따고 안에 들어선 진해가 해산을 닫힌 문에 밀어붙였다. 그리고는 도망치지 못하고 양팔로 그를 가둬 버렸다. 밀친다면 쉽게 풀릴 호위였지만 해산은 어쩐지 그러고 싶지 않아졌다. 오랜만에 맡는 체향이 해산을 둘러싸고, 그토록 그립던 눈동자가 해산을 뜨겁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 속에 오롯이 해산이 담겨 있었다.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진해는 언제나 필요한 순간에 그 말을 했다. 그를 사랑한다는 말. 진해가 해산을 사랑한다는 진심을.

해산은 진해를 밀치는 대신 커다란 양손으로 진해의 뺨을 감싸 쥐며 진해의 입술에 입술을 겹쳤다.

오랜만에 겹치는 입술은 달았다. 서로의 점막이 닿고 향이 섞이는 순간 둘은 모든 걸 잊어버렸다. 단지 눈앞의 이 열기가 있으면 모든 게 괜찮았다. 거칠고 습한 숨소리와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감각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상념을 모조리 불태우는 듯했다.

“하아, 하아―”

누구 하나가 죽을 것처럼 절박한 입맞춤이 멈춘 사이 감았던 눈을 뜨고 서로를 마주 보았다. 좋은 옷을 입고, 좋은 관을 쓰고, 좋은 신을 신고, 단 한 점의 생채기 없이 안전한 곳에 멀쩡히 서 있건만 진해는 해산의 쩍 벌어진 상처를 볼 수 있었다. 해산 역시 진해의 커다란 흉터를 볼 수 있었다.

“해야.”

평소에는 진해가 나불나불 입을 놀리는 편이었는데 이번엔 해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대나무의 냄새처럼 청량한 향이 후끈 달아오를 때만 풍긴다는 건 참으로 기묘한 일이었다. 진해는 해산의 말을 들으며 속에서 느긋하게 치미는 열기를 감내했다.

해산이 더 말하지 않아도 그의 말을 알 것 같았다. 그의 상황이 그래서? 아니, 그의 눈이 말해 줘서였다. 그리고 자신 역시 가끔 그런 기분이었으니까. 그를 만난 후로 아주 많이 그런 기분이 들었으니까. 당신과 함께라면 아무것도 필요 없어. 물론 사는 데는 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것들이 딸려 오기 마련이지만 당신과 함께 살아 숨 쉬면 어느 정도는 다 이겨 낼 수 있을 것도 같긴 해.

이런 기분.

열기에 뜨끈뜨끈하게 달아오른 뺨을 해산의 뺨에 비비자 천 너머로 진해와 마찬가지로 열에 데워진 몸이 느껴졌다. 진해는 눈을 감고 아래서부터 천천히 해산의 몸을 더듬었다. 예민한 손끝으로 단단하게 뭉친 근육 다발이 느껴졌다. 부드러운 비단 아래 옅은 땀 냄새가 났다. 음인의 향과 섞여 해산만의 냄새를 자아냈다.

진해는 가끔 이 뜨거운 가죽 아래로 손을 넣어 그 아래 위치한 근육이나 뼈, 핏줄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고 싶다는 징그러운 생각을 했다. 해산의 질긴 가죽에 진해가 계획적으로 낸 상처가 새겨지고 옅게 피가 스미면 진해는 그의 속에 든 것을 조금이라도 차지한 것 같아 기묘한 포만감에 휩싸이곤 했다.

사랑한다는 말은 아무리 해도 부족하지만 때로는 그 말이 필요 없을 때도 있었다. 진해는 해산의 허벅지를 느릿하게 어루만지다 해산의 몸에서 머리 다음으로 둥글게 뭉친 둔부로 손을 옮겨 느리게 문지르다, 꽉 움켜쥐기를 반복했다. 손안에 가득 차는 살 사이가 얼마나 뜨겁고 꽉 조이는지를 아는 건 이 세상에 오로지 진해 한 사람뿐이었다.

“흐으―”

예전 같으면 이를 악물고 무슨 수를 써서든 소리를 참을 해산이 진해가 제 가슴에 뺨을 기댄 채 심취한 모습을 보며 약하게 신음을 흘렸다. 사고로 만난 연이었으나 이젠 절대 놓을 수 없는 사람이 된 진해였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열과 쾌락은 모두 다 진해가 해산에게 가르쳐 준 것이었다.

한창때의 음인이었다. 진해의 향만 맡아도 가슴이 뜨끈해지고, 저도 모르게 둔부에 힘이 들어갔다. 과거 진해를 거쳐 간 이가 많다는 건 알았다. 진해가 그들 모두에게 최선을 다했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그들 모두를 위해 황제에게 대적할 수 있을까? 사고로 이어진 인연을 끊지 않고 이렇게 이어 올 수 있을까?

해산을 마음껏 만지며 욕심을 채운 진해가 해산의 허리를 묶은 끈에 손을 댔다. 해산의 허벅지에 닿는 샅이 두툼했다. 그저 쓰다듬는 것만으로도 흥분하고 있었다. 만져지는 것만으로도 신음이 흘러나왔다. 해산은 제 허벅지 사이가 끈적하게 젖어 든 것을 느꼈다. 거칠게 성이 난 진해의 물건이 젖은 틈을 비집고 들어올 때마다 얼마나 황홀한지, 해산은 이제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끈을 끄르는 두 사람의 손길이 바빠졌다. 황자가 착용하는 것들이니 감히 값을 매기기도 힘든 귀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둘에게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평소에는 비단에 얼룩이 지면 꽥 비명을 지르는 진해가 비단옷이 땅에 떨어지는 데도 눈길도 주지 않았다. 옷이 다 내려가지도 않았다.

“아, 아!! 아!!!”

급해진 진해가 가타부타할 것도 없이 무릎을 꿇고 해산의 다리 사이로 기어들어 갔다. 해산이 몸부림을 치자 해산의 등 뒤에 있던 문이 크게 덜컹거리는 소리를 냈다.

“해, 해야, 해야……!!”

날카로운 교성과 함께 질척거리는 소리와 첩첩 급하게 핥는 소리가 났다. 축축하게 젖은 부분이 진해가 혀를 놀릴 때마다 꿈틀거리며 벌렁거리다 꽉 다물리기를 반복했다. 해산은 진해의 혀가 연약한 안쪽을 후비자 이를 악물며 뒤통수를 문짝에 비볐다. 찌릿찌릿한 감각 탓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진해의 머리통을 그러쥐고 무의식중에 진해 쪽으로 허리를 내밀었다.

“아응, 응……!”

다리에 힘이 풀리려는 걸 진해가 양 허벅지를 꽉 쥐고 지탱했다. 굳은살이 박인 굳건한 손가락이 해산의 허벅지에 파고들며 하얗게 물들였다. 손을 떼면 붉게 물들지도 모른다. 어쩌면 멍이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런 것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다리 사이에 파고들어 핥고 또 핥는 행위는 짐승의 교미와 무척 닮아 있었다.

“큭, 아, 해야, 그만, 아, 아!!”

엉덩이 틈을 집요하게 핥으며 손가락을 밀어 넣던 진해가 어느 순간 해산의 앞을 빨기 시작했다. 뒤가 젖은 만큼이나 앞 역시도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진해가 입을 대자 홀로 움찔거리던 것이 대번에 성을 내며 부풀어 올랐다.

“크응, 응…….”

굵은 손가락과 젖은 입술이 움직임을 같이했다. 목구멍이 뚫릴까 싶을 정도로 깊게 밀어 넣는 것과 동시에 진해의 손가락이 해산의 속에 깊게 파고들었다. 해산의 발끝에 힘이 들어가고 허리가 둥글게 휘었다. 손가락이 어딘가를 누르고, 입술이 갈라진 틈을 후비자 눈앞에 순식간에 흐려지고 입에선 민망한 교태가 흘러나왔다.

“아, 아!! 악, 그, 그만!!”

절정은 비명처럼 찾아왔다. 억지로 찢어 내는 감각과도 닮아 있었다. 날카로운 파편이 온몸에 들이박히는 듯했다. 눈앞에 하얀 빛무리가 점멸하기를 반복했다. 털끝이 곤두서고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으, 아으, 해야, 해야― 흐아, 아으으―”

그리고 서서히 가라앉는 몸을 진해가 억지로 안아 올렸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해산의 오금 사이에 제 양팔을 넣어 해산을 안아 일으켰다. 해산은 다리가 붕 뜨자 비몽사몽 간에 팔을 뻗어 진해를 안았다.

“으아!! 아!!”

허공으로 붕 뜬다 싶더니 젖은 틈에 두꺼운 쐐기가 들이박혔다. 축축하게 젖었으나 좁은 곳을 멈추지 않고 단번에 밀고 들어왔다. 해산의 입이 소리 없는 비명을 토하고 진해의 몸에 붙었던 몸이 뒤로 휘었다. 쾅, 소리와 함께 해산의 몸이 몸에 강하게 부딪쳤다.

“아, 아아!! 싫, 싫어, 그만, 아아!! 죽어, 죽어, 죽을 것, 아, 좋아, 그만, 아, 아아!!”

어찌나 깊숙이 들어오던지 배 속이 몽땅 뒤집힌 것 같았다. 해산은 진해의 목을 끌어안고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는 채 그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 해산이 엉망진창으로 울부짖을 동안 진해는 이를 악물고 거친 숨을 뿜어냈다. 잔뜩 흐물흐물해진 몸을 문에 억지로 밀어붙이면서 마구잡이로 허리를 움직였다.

“해야, 해야!! 그렇게 하면, 싫어, 싫어―”

어찌나 거칠게 움직였던지 나중에는 해산의 입에서 거의 통곡 수준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싫어? 허으, 뭐가 싫어? 응?”

“아파, 아파―”

“아프긴 뭐가 아파. 응? 뭐가 아프냐, 고!”

“하으윽!!”

진해는 아프다는 엄살에 난폭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입술로 엉망진창으로 젖은 눈가를 훔쳐 주면서도 허리는 멈추지 않고 연신 해산이 느끼는 곳을 쾅쾅 두들겨 댔다. 해산의 몸을 받치고 있어 손으로 뭘 해 줄 수도 없었다. 한참을 앙앙 울어도 진해가 멈추지 않자 결국 해산은 문에 몸을 기대로 진해를 안은 손 중 하나를 풀어 스스로 제 물건을 움켜쥐었다.

“으응, 응…….”

그 모습이 기가 막히게 야했다. 진해보다도 덩치가 큰, 웬만한 사람보다도 훨씬 크고 당당한 해산이 진해에게 꿰뚫리며 엉망진창으로 울고 있었다. 입으로는 아프다고 말하고 있지만 해산의 몸은 정직했다. 속은 진해의 물건을 자를 듯 조이고 있었고 해산의 물건은 진해가 찌를 때마다 찍찍 정액을 쏟았다. 진해는 거울이 있다면 해산에게 들려 주고 본인의 얼굴을 보여 주고 싶었다.

“아, 해야, 해야――!!”

스스로 문질러 절정에 달한 해산의 속이 다시금 진해의 물건을 꽉 조였다. 진해는 이를 악물며 마구잡이로 허리를 흔들었고 진해가 움직일 때마다 해산의 등과 닿은 문이 부서질 듯 심하게 흔들렸다. 이곳이 황궁이라 참말로 다행이었다. 보통 시가의 문이었으면 지금쯤 부서지고도 남을 터였다.

“큭, 해산, 아…….”

팔에 힘줄이 불거지게 힘을 주고 있던 진해는 해산이 몇 번인가의 절정을 맞이하고 헐떡이며 혀를 내밀 때쯤 자신도 끝을 맞았다. 허리를 쿡쿡 쑤시자 진해의 몸에 겹쳐진 해산의 몸이 앓는 소리와 함께 꿈틀거렸다. 틀어막듯 쑤셔 넣고 해산의 가장 깊숙한 곳에 몽땅 싼 진해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뒤통수를 문에 비비고 울고불고 난리를 치느라 진해와 함께 주르륵 미끄러진 해산의 머리는 산발이었다. 진해도 멀쩡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해산보단 사정이 나았다. 자리에 주저앉아 몽롱해진 정신을 다잡은 해산은 그제야 제 앞에 주저앉아 헐떡거리는 진해를 볼 수 있었다. 여러 번의 절정을 맞은 자신도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는데 진해는 그런 자신보다 더 피곤해 보였다.

해산은 어쩐지 뻐근한 등을 무시하고 손을 뻗어 진해의 귓가를 부드럽게 어루만졌고 쾌락의 여운에 어울리는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헐떡거리던 진해가 그런 해산을 보며 씩 웃음 지었다.

* * *

“그런데 해산 도련님 여기가 어디예요?”

정신을 차리자 진해는 과거의 자신을 한 대 때려 주고 싶었다. 눈에 휙 돌아서 해산을 들어 올리고 떡을 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팔이며 허리며 안 당기는 곳이 없었다. 옛날에 쌀가마니 옮기는 작업을 했었는데 딱 이런 기분이었었다.

“여기가? 아, 이런.”

진해가 왕년의 솜씨를 발휘하여 해산의 머리를 정돈해 주는 동안 해산은 멍하니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진해는 해산이 뭐 때문에 이러는지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하다가 눈을 가늘게 뜨고 멀리 보이는 건물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인기척이 하나도 없는 걸 보니 별궁이나 별채는 아닌 것 같았고, 이렇게 넓고 번듯한 곳을 창고로 쓸 리도 없고.

“이, 이곳은 그러니까……, 태묘, 다…….”

“아.”

태묘 혹은 종묘. 죽은 황제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다. 한마디로 해산과 진해는 지금 죽은 조상님들의 무덤 앞에서 일을 치른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진해는 그제야 해산이 어째서 당황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는 동시에 확실히 이곳이라면 평소에 일을 쳐도 아무도 안 올 것이라는 아주 불경한 생각을 했다.

“와, 그럼 여기 역대 황상들이 모셔져 있는 건가요?”

“선황들뿐만이 아니라 선황들의 좌부나 우부도 모셔져 있지. 사가에서는 어떨는지 모르겠지만 선황 일대에 한해서는 영정을 그려 모신단다.”

“영정? 초상화요? 헉, 한번 봐도 돼요?”

“뭐, 안 될 것 없지.”

태묘 안에서 떡도 쳤는데 그거 하나 보는 걸 안 된다고 할 수는 없다. 과거에 대월률 운운하며 말렸을 해산은 이젠 조금 대담해지고 말았다. 그리고 진해가 선황의 초상화를 보고 싶어 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으니, 창명후가 해산을 볼 때마다 얼굴만큼은 선황을 쏙 빼닮았다고 노래를 불렀기 때문이었다.

‘영정을 보면 미래의 해산 도련님을 살짝 구경할 수 있으리란 말이렷다!’

언제나 그렇듯이 진해는 제사보다 젯밥에 관심이 많았다. 해산이 문을 열자 진해는 조금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안을 들여다보았고 정말로 해산을 꼭 닮은 중년 사내의 초상화를 볼 수 있었다.

“으윽, 가슴이!”

“해, 해야! 왜 그러느냐! 서, 설마 태묘에서 불경한 짓을 해서?!”

“내,”

“내?”

“내 이상형이!”

비틀거리던 진해를 부축하던 해산이 진해를 팽개쳤다. 진해는 민들레 홀씨처럼 힘없이 나가떨어졌다.

“농이고 정말로 해산 도련님과 똑 닮으셨네요. 과연 이 얼굴이면 누구도 핏줄 시비는 못 하겠어요.”

“그런 용도도 있다고 하는데 음인 황제가 즉위하면 황제 스스로가 아이를 낳으니 시비가 일 일이 없다.”

진해는 선황의 초상화를 구경하다가 태묘의 모든 방을 하나하나 둘러보기 시작했다. 해산도 제사를 지낼 때가 아니면 올 일이 없어 조금은 흥미롭게 방들을 구경했다. 어디가 어떤 용도인지는 알고 있지만 이렇게 한적하게 들여다본 적은 없었던 것이다.

“어? 해산 도련님 저건 누구예요?”

그러던 중 진해는 선황 외에 다른 이의 초상화가 그려진 것을 발견했다. 초상화는 일 대에 한해 모신다고 했으니 다른 황제일 리는 없었다.

“아, 저분은 지순 황태공이시다. 그러니까, 성월공의 우부시지. 본래라면 화석정군과 성월공이 모셔야 하는데 화석정군이 출가를 해 성월공이 궁에서 자라게 되어 이리 모셨다.”

“아하…….”

작은 방에 홀로 모셔진 초상화가 바로 그 지순 황태공이었다. 진해는 조금 씁쓸한 마음과 호기심이 들어 방으로 들어가 초상화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데…….

‘응?’

해산은 진해가 들어가는 걸 보고 자신도 함께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해산도 이 방에는 들어온 적이 없었다.

“선, 황이랑은 별로 닮지 않으셨네요?”

“음. 그런 것 같기도 하구나. 어릴 때 경순 황태공의 초상화를 하늘로 보내 드리기 전에 여기 잠깐 걸어 놓았었는데 그분과도 그리 닮지 않았었거든. 아마 돌아가신 선황정군을 닮은 게 아니겠느냐?”

진해는 해산의 말에 아무 답하지 않고 가만히 지순 황태공의 초상화를 들여다보았다. 확실히 소월과 닮이 있었다. 같은 핏줄의 음인임을 부정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런데 또 묘하게 해산과 닮은 것이…….

진해의 뱃속에서 싸한 기운이 올라왔다. 선황과 닮지 않은 인물이 선황과 닮은 인물을 닮으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지순 황태공과 소월은 같은 핏줄의 음인이라 닮았다. 그렇다면, 해산 도련님이 지순 황태공을 닮아 있는 것도 같은 핏줄의 음인이라 그런 것일까.

―두 황자가 살아 있는 한 절대로 날 죽일 수 없다.

“해야? 갑자기 왜 그러느냐?”

진해의 귓속에 화석정군의 말이 메아리쳤다. 두 황자가 살아 있는 한, 두 황자 중 하나를 택해 황위에 올려야 하는 한, 화석정군은 꼭 살아 있어야 한다. 왜냐면 화석정군이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했기 때문에. 황제는 구분할 수 없는,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했기 때문에.

* * *

아직은 황후인 사마계가 회순의 앞에 무릎을 꿇고 예를 갖췄다. 예를 채 다 갖추기도 전에 회순은 손을 흔들어 그를 따라왔던 궁인들을 모조리 물려 버렸다. 그의 눈이 살풍경한 궁실과 창백하게 여윈 황후의 어깨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위었군.”

해산이 출생의 시비에 휘말린 이래 처음 한 방문이었다. 계는 회순의 말에 답하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일어나라. 그대는 아직까지 나의 정실이다. 내게 그렇게까지 저자세로 굴 필요는 없어.”

그런 계를 바라보다 회순이 피식 웃음 지었다. 대단치 않은 옛 기억이 떠올라서였다.

“그러고 보면 그대를 만날 때마다 항상 이 소리를 하는 것 같군. 나를 원망해서 그러는 건가?”

“아니요.”

이번에는 즉답이었다. 계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회순을 바라보았다. 회순을 바라보는 계의 얼굴은 진해와 해산, 다른 이들을 바라볼 때와 사뭇 달랐다. 언제나 죄인의 얼굴을 하고 있던 그는 회순을 볼 때만큼은 연민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럼 일어나. 나는 그대가 짐의 앞에서 그러는 걸 원치 않는다. 비록 그대를 구해 주지 못할지라도.”

회순이 다가가 계를 일으켰다. 계는 비틀거리면서도 회순의 손을 거부하지 않았고 오히려 기대기까지 했다. 계는 다른 이들이 보면 조금 놀랄 정도로 친근하게 회순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그것 역시 아닙니다. 폐하는 항상 절 구하시려고 했지요. 다만 저의 운이 따르지 못해 일이 이렇게 어긋난 것뿐이에요. 다른 이들은 몰라도 저는 알아요. 저는 폐하를 이해해요. 폐하가 저를 이해해 주신 것처럼.”

“…….”

“죄송해요. 좀 더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계가 힘없이 말하자 회순이 자신에게 기댄 몸을 살짝 끌어안았다. 회순의 눈 역시 연민에 가득 젖어 있었다. 사랑의 형태는 여러 가지라서 정욕이 일고, 살을 섞는 것만이 사랑의 방식이 아니었다. 사마계는 여전히 옥길합을 연모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안회순이라는 사내 역시 애틋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모든 건 내가 부족해서다. 내가 더 뛰어나지 못해서야.”

그것은 회순 역시 마찬가지였다. 회순은 마음이 없는 이와도 동침할 수 있었지만 황후와는 동침하지 않고 그의 연모를 지켜 줄 정도로 그를 좋아하고 있었다. 남들이 말하는 소문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던 것이다. 황제는 황후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 미모에 홀린 것은 아니었다.

“네가 죽으면, 난 이제야말로 오롯이 홀로 있겠군.”

단지 회순은 계의 처지를 이해했을 뿐이었다. 계 역시 회순의 처지를 이해했던 것이었다. 월국의 양인과 해국의 음인. 천출의 아비를 둔 두 사람이 서로가 택한 비극을 이해하고 가엽게 여긴 것뿐이었다.

회순은 제 혈육들이 비참하게 죽었을 때도 느끼지 않던 저릿한 감정을 느끼며 황후 사마계를 처음 봤을 때를 떠올렸다. 휴전 조정 중에 서로 선을 본다는 건 참으로 사치스러운 이야기였다. 월국은 혼인을 탐탁지 않아 했고 해국은 마음이 급했다. 혼인이 성사되자마자 회순의 황후가 될 이는 예물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출발부터 했다.

아비와 형을 죽음에 몰아넣은 해국의 궁주와 혼인하면서도 회순은 무감했다. 오히려 제법 괜찮은 선택지라고까지 생각했다. 지순은 회순이 황후를 들인다는 소식에 울면서 귀찮게 굴었지만 회순은 그런 지순을 달래는 척 가장 큰 봉국의 후를 들인 뒤 소생은 영리하면 후사로, 그렇지 않으면 사고로 처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그리고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채 국혼이 치러졌다. 월국의 관례를 깨고 양인인 회순 대신 음인인 계가 붉은 천을 뒤집어썼다. 살아남은 음인 늙은이들의 시선이 따가웠다. 그리고 회순은 그 시선이 너무나 즐거워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래, 이 늙은이들아. 너희들이 천히 여기던 내가 이제 이 나라의 주인이다. 네놈들이 굽신거리던 음인 놈들은 다 어디로 갔느냐. 이런 생각에 하마터면 엄숙한 혼례식장에서 크게 웃을 뻔했다.

참으로 긴 세월이었다. 기억이 희미한 좌부는 태어나면서부터 걸림돌이었다. 영리하거나 독하기라도 했으면 회순을 최대한 비싸게 팔아먹거나 회순의 아우를 얻어 후일을 도모해 보련만 쓸데없이 착하기만 한 작자랬다. 음인 황자를 둘이나 낳은 황정군에게 질투를 사 드넓은 황궁 어딘가에서 일만 하다가 발이 미끄러져 그대로 자빠져 죽었다고 했다. 무덤? 그딴 게 있을 리가.

그리고 좌부가 없는 회순을 보호해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황정군은 의무 탓에 회순을 양육하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의식주만을 챙겨 주는 수준이었고, 그것도 그가 열병인지 무엇인지에 걸려 죽고 나서는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그나마 있던 유부도 회순이 장성하여 자신이 해방되기만을 바랐다.

그래서 어렸던 회순은 멍청하게 죽은 좌부보다 더 똑똑하길 바랐다. 좌부가 하늘에 그렇게 기도를 했다던데 그게 통한 덕인지 회순은 일을 보면 열을 알았다. 열을 보면 백을 보고, 백을 보면 천을 알았다. 천재는 아니었지만 천재보다 뛰어난 게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냉대와 고독 끝에 얻은 차가운 심장이었다.

―양인 놈이 건방지게!

양인 운운한 건 태자이자 황장자였던 경순의 입버릇이었다. 이름 없는 궁인들과 살던 회순을 변덕으로 불러들여 보살펴 주는 척했던 그는 회순이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음에도 그에게 전혀 모자람이 없는, 아니 오히려 그보다 뛰어남을 보이자 크게 화를 냈다. 감히 장차 보위를 이을 자신보다 씨내리에 불과한 양인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차라리 경순 앞에서 멍청한 척을 할 것을. 회순은 처음으로 일이 귀찮게 되었음을 느꼈다. 자신의 입장에서는 그저 평범한 것이 경순의 앞에서는 뛰어난 것이 되었다. 의식주를 빼앗기는 비참한 생활이 계속되자 결국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굴복과 애걸뿐이었다. 차가운 가슴속에 분노만이 쌓일 뿐이었다.

―제 앞에서라면 괜찮습니다.

그러던 회순의 앞에 나타난 것이 대학사 연재균. 연재균은 회순을 구해 준답시고 황제에게 정실 양인들을 교육할 교양학당을 만들고자 황자마마를 연구해 보고자 한다 했다. 자신이 있는지조차 신경 쓰지 않았던 아비의 답은 얼마든지 갖다 쓰거라, 였고.

―제가 당신을 보호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연광. 본래 자신의 정실, 아니 자신이 정실로 들어갔어야 할 사내. 그는 다른 양인들의 밤잠을 뺏는 그야말로 상냥하고 자상하기 짝이 없는 완벽한 음인이었다. 거기다 놀랍게도 경순과 달리 양인인 회순의 말을 들어 주었다. 회순과 함께 토론을 나누기도 했고, 회순을 반드시 데리고 나가 보호해 주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다.

정말로 짜증 나는 작자였다.

회순은 저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힘없는 양인을 보호해야 한다는 정의감에 젖어 있는 연광을 차갑게 바라보았다. 연광의 호의는 회순에게 모욕이었다. 그는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학식을 가졌으면서 단지 음인이라는 이유로 자신과 엄청나게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그리고 마음껏 회순을 동정했다. 회순은 자신의 처지가 비참할지언정 누군가에게 동정받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 자신을 동정함이 참을 수 없었다.

“…….”

그런데 이젠 달랐다. 자신을 불쌍하게 바라보던 사내는 자신의 측실이었고, 자신은 무소불위의 자리에 앉아 더욱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 한발을 딛고 있었다. 아직은 불안했지만 다른 봉국에서도 착실히 측실을 들이면 월국 제후들의 힘을 누를 수 있을 터.

“흐흑…….”

그러던 그때, 회순이 걷으려던 붉은 천 너머에서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회순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멈췄다. 뒤늦게 옷을 움켜잡은 채 하얗게 변한 손마디가 보였다. 휙 걷으려던 처음과 달리 인내를 갖고 부드럽게 천을 걷자 보는 것만으로도 애처로워지는 얼굴이 드러났다. 잔뜩 젖어 서럽게 우는데도 입이 살짝 벌어질 정도의 굉장한 미인이었다.

과연 해국에서 자신 있게 혼인을 밀어붙일 만했다. 그 눈이 자신의 눈과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혼미해졌으니까. 하지만 회순은 천륜을 거스르면서까지 이 자리를 손에 넣었다. 고작 미색에 흔들릴 정도면 이 자리에 오르지도 않았다. 아직도 경순에게 뒤통수를 짓밟힌 감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자신은 다시는 누군가에게 짓밟히는 이가 되지 않을 생각이었다.

“걱정 마라. 부드럽게 할 테니.”

회순은 방울방울 눈물을 떨어뜨리는 눈을 외면하며 천천히 황후의 혼례복을 벗겨 주었다. 옷자락이 떨어질 때마다 몰래 사람을 시켜 알아본 사마계의 정보가 떠올랐다. 사마계가 원래는 선황과 태자를 죽음에 몰아넣은 원흉인 사령관 옥길합의 약혼자였다는 것. 사마계 역시 일찍이 우부를 여의고 다른 이의 손에서 자랐다는 것. 해국에서 음인은 어린 양인보다도 지위가 떨어진다는 것.

“너……!”

그리고 계의 옷을 다 벗긴 회순은 저도 모르게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하는 생각에 계의 팔을 들어 급하게 향을 들이마셨다. 코끝에 뭔가 거슬리는 향이 맡아졌다. 다른 양인의 향을 뒤집어쓴 건 아니었다. 그랬다면 이 침실에 들어서지도 못했을 테니. 하지만 희미하게 양인의 향기가 났다. 늘씬한 몸에 부자연스러운 곳이 있었다. 둔한 이라면 눈치채지 못했을 위화감이었으나 회순은 예민했다. 회순은 잡은 손목을 팽개치고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해국이 감히 이딴 식으로 나와? 왜, 양인 따위가 황제가 되어 우습게 보인다더냐?”

“아,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럼 뭐냐. 감히 다른 사내의 씨를 품고 황후가 되려 해!”

계는 회순의 말에 변명하는 대신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물만 흘렸다. 예나 지금이나 눈물이 마르지 않는 사내였다. 계는 변명하는 대신 옷을 다 벗은 채로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두 손을 비볐다. 회순은 그 모습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잘못했습니다, 제발 목숨만은 살려 주세요, 아니, 죽이셔도 좋으니 아이만은 낳게 해 주세요, 제발, 용서해 주세요…….”

해국의 궁주라는 자가 비는 데 익숙했다. 발가벗고도 전혀 부끄러워함이 없었다. 오로지 강자에게 굴복하고 철저하게 짓밟힐 뿐이었다. 눈부실 정도로 하얀 살결과 호리호리한 몸매에서 빛이 가셨다. 회순은 힘없는 이가 남들보다 뛰어난 걸 가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이 세상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이자는 자신이었다.

“……옥길합의 자식인가?”

계는 대답하지 않고 엉금엉금 기어 와 회순의 신발에 이마를 얹었다. 회순이…… 경순에게 했던 것과 한 치의 다름이 없었다.

“용서해 주세요,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반이나 같은 피를 나눈 아우에게는 흔들리지 않았던 마음이, 저를 동정하던 완벽한 음인에게는 움직이지 않던 마음이, 가엽고 불쌍한 이의 앞에서 스르륵 녹아내렸다. 사랑은 아니었다. 욕정은 한 점도 일지 않았다. 회순은 계가 이마를 비비던 신발을 뒤로 빼고는 제 옷을 벗어 계의 몸을 감쌌다. 눈물에 젖은 눈이 저를 올려다보았다.

“여기는 월국이다. 월국 음인은 그렇게 비굴하게 굴지 않아.”

“……하지만 저는 월국 사람이 아닌걸요.”

“내 황후가 되었으니 이젠 월국 사람이지. 그리고 네 배 속의 아이, 낳도록 해라. 후사를 노리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그것을 어기지 않는다면 아이 하나 정도는 거느릴 수 있게 해 주마.”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요.”

“내게 불가능한 건 없어. 나는 천자다.”

회순은 절망에 휩싸여 있던 눈동자 속에서 희망이 꽃피는 걸 보며 작게 전율했다. 그는 황제가 되어 월국을 재건했고 양인 황제가 즉위함으로 일어난 불만을 종식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이 황제로 있기 위한 조처였다. 온정과 자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전쟁은 끝났지만 자신의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이었었다. 그런데 그런 자신에게도 베풀 수 있는 게 있었다. 회순은 계의 손을 잡고 토닥거렸다.

그 뒤로 계는 회순의 편이 되었다. 회순의 유일한 벗이 되었다. 계와 회순은 밤마다 서로가 누리지 못했던 것에 대해 이야기했고, 서로를 이해했고, 서로를 위로했다. 양인 역시 자유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회순의 말에 계는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계는 회순이 만들 나라를 부정하지 않는 유일한 조력자였다.

그래서였을까. 화석정군이 아이를 바꾸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황후궁에 쳐들어온 것이.

“감축드립니다, 폐하!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건강한 음인 황자이시옵니다!”

지순이 자결한 것을 확인한 후, 원귀비 연광의 궁을 봉쇄하고 급히 달려온 회순을 바라보며 화석정군이 예를 갖췄다. 치켜뜬 눈이 증오와 광기로 번들번들 윤이 나고 있었다. 회순이 우두커니 서 있자 침상 쪽에서 우당탕 떨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계가 회순 쪽으로 엉금엉금 기어 왔다. 궁인들은 회순과 화석정군의 대치에 감히 그를 일으킬 생각도 않는 듯했다.

“황상! 황상――!”

계의 입가가 빨갛게 쓸려 있었다. 산고가 극심할 때 천을 물리긴 하지만 뭔가 달랐다. 엉엉 목 놓아 우는 이의 태도는 건강한 아이를 출생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황상, 제발, 제발 제 아이를 찾아 주세요―― 황상――!”

울부짖는 계를 추슬러 안으며 회순은 다시금 화석정군을 노려보았다. 화석정군은 언제 준비했는지 갓 태어난 아이를 요람에 눕힌 뒤 천천히 그것을 흔들며 아이를, 아니, 아이들을 달래고 있었다. 우측에 하나, 좌측에 하나, 두 개의 요람을. 요람에 든 것은 날을 달리해 태어난 음인 아기 둘이었다.

회순은 그 둘 중 누가 자신의 아들, 아니, 누가 연광 소생의 아이인지 알 길이 없었다.

* * *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황후의 처벌이 결정되던 날, 진해는 화석정군 양지서를 찾아갔다. 공교롭게도 그는 진해가 자주 놀던 어조원에 있다고 했다.

[사랑해요!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그러고 보니 유일청의 옛 주인이 지순 황태공이었다. 양지서도 유일청을 제법 아꼈다 하기도 했고. 홍련이가 알을 품느라 바빠진 요즘 유일청은 놀이 동무가 없어 제법 심심했을 터였다. 그런데 자신을 귀여워해 주던 옛 주인이 돌아왔으니 얼마나 기쁠까.

“―나도 사랑하고 있습니다.”

유일청의 방에 들어가려던 진해의 발이 멈췄다. 유일청에게서 처음 듣는 영롱한 목소리는 그렇다 쳐도 양지서의 메마른 목소리는 진해가 감히 들어서지 못하게 했다.

“그자도 마마를 사랑한대요. 예, 사랑해서 그랬답니다. 그러니까 마마 잘못이 아니에요. 마마는 사랑받고 계십니다.”

[줄곧 당신을 원했어!]

“제 앞에서 몇 번이나 마마를 사랑한다고 했어요.”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가 멈추고 유일청이 다시 진해가 아는 목소리로 재롱을 부리기 시작했다. 진해는 화석정군이 황제에게 무슨 생각으로 사랑한다고 말하게 시켰는지 이제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짐도 사랑하고 있다!]

“……당신이 고통받은 만큼 말하게 할 겁니다. 당신을 사랑했다고 말할 때마다, 크큭, 그는 당신과 우리 아이를 생각하겠지요. 좋으시지요, 마마? 네? 뭐라고 말씀 좀 해 주세요.”

혹시나 했는데 정말로 지순 황태공과 황제는 사랑 따위 한 톨도 없는 관계였다. 진해의 머릿속에 두 아이를 놓고 황제에게 강요하는 화석정군이 생생히 나타났다. 아이를 돌려 달라며 우는 황후는 그의 안중에도 없었다. 말해, 어서 말해, 사랑한다고. 나도 사랑하고 있다고, 어서 말해, 말해.

그러나 지순 황태공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장례를 마치고 황제 앞에 놓인 것은 언제 익힌 것인지 지순의 목소리를 고스란히 따라 하는 희귀한 새 한 마리였다. 어떻게 안 것인지 연광이 위험을 무릅쓰고 성 밖을 빠져나간 날 지순이 황제에게 했던 말을 고스란히 흉내 내고 있었다.

둘 중 누가 자신의 ‘진짜’ 후사인지 알기 위해 황제는 지서가 원하는 대로 했고, 화석정군은 광소를 터뜨리며 자신의 출가 결정을 통보했다. 참으로 잔인한 작자였다. 아이들을 인질로 삼고 이젠 사랑한다는 거짓된 고백조차 들을 수 없는 이에게 계속 사랑한다고 말하는 형벌을 내렸다.

어쩌면 황제가 유일청을 곁에 둔 이유는 다른 이에게 유일청이 넘어가면 자신의 치부인 저 목소리가 새 나가서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화석정군의 협박을 되새기며 억지 대답을 할 때마다 그가 천륜을 어기는 짓을 해서까지 이 자리를 손에 넣었다는 각오를 되새겼을 것이다.

‘미친놈들.’

진해는 양지서와 안회순을 간단히 정리했다. 저 두 작자의 미친 짓에 낀 유일청이 불쌍할 지경이었다. 유일청은 주인들이 자신을 그저 사랑하고 있다고 여기겠지.

“유 공자 식사하시게 적당히 좀 하시지?”

진해는 유일청이 짐도 사랑하고 있다고 말할 때마다 자신은 이해할 수 없는 우주 저편의 기묘한 물체와 마주하는 소름 끼치는 감각에 휩싸인 채 방 안에 들어섰다. 돌아보는 지서의 눈동자는 피폐함 그 자체였다. 진해와 만났을 때보다도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죽은 이의 향은 흔적조차 없건만 과거의 기억이 지서를 난도질하고 깎아 냈다.

“들었는가? 사랑하고 있다는걸. 그 역시 지순 마마에게 흑심이 있었던 거야. 지순 마마는 이용당하지 않았던 거야. 보게, 유일청이 기억할 정도로 많이 말했어. 하하, 계속해야지. 저승에 계신 마마께서 들을 정도로 계속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난 절대로 말하지 않을 것이야. 나는 절대로―”

“둘 중에 누가 지순 황태공 전하의 소생인지 말 안 하겠다고?”

“……자네 역시 범상치 않군.”

“운이 좋았지요.”

지순 황태공의 초상화를 보기 전이라면 절대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일이었으니까. 지서가 의자에 힘없이 앉자 유일청이 푸드덕거리며 날아가 지서의 무릎 위에 앉았다. 지서는 손을 들어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유일청의 부리를 매만져 주었다.

“하려면 무덤에 찾아가서 하게 시킬 것이지 애꿎은 유일청한테는 왜 지랄인지.”

“……목소리를 들어야 고통받을 테니까.”

“그 사람이 그걸로 죄책감을 느낄 것 같소? 오히려 댁이 원하는 대로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읊으면서도 무덤덤할 사람일걸?”

“…….”

진해의 말을 들으며 지서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유일청이 짐도 사랑한다는 말을 기억할 정도로 많이 말했으면서도 화석정군을 봤을 때 일말의 죄책감조차 비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봐주는 이유는 오로지 자신의 뒤를 이어 월국을 굳건히 세울 후사의 출생이 궁금했기 때문. 만약 그 후사에게 ‘흠’이 있다면 자신이 손을 써서 제거해야만 했기 때문.

“험, 그리고 전에 그 제안. 아직 유효하오?”

그리고 진해가 마침내 용건을 꺼냈다. 화석정군 양지서는 자신이 진해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더듬어 보았다.

“황제에 대항할 무기 말이군.”

“누가 진짜 원귀비 소생인지 아는 것이 무기지요?”

“그래. 황제 그자는 자신이 일으킨 월국에 흠이 남길 원하지 않아. 자신의 대에서 황통에 흠이 남게 되면 자신의 허물이 되는 것이지. 그걸 생각하면 사랑한다는 말을 하면서도 멀쩡한 얼굴을 하기 힘들걸?”

“…….”

그 기세로 지순 황태공을 꼬실 것이지. 진해는 이렇게 생각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게 뭐가 있는가. 그리고 이제 출생의 문제는 황제뿐만이 아니라 진해에게도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진해는 뒤바뀐 아이 중 하나인 해산과 이어졌던 것이다.

“그대에겐 미안하게 되었어. 나 때문에 수라도에 떨어지겠군.”

“헹! 수라도 좋아하시네. 그리 안 봤는데 제법 곱게 크신 모양이지요~? 저기 잠춘동 지나서 추피동 가면 이것보다 더한 지랄을 실컷 볼 수 있는데! 혹시 생각 있으면 내 당장 모셔다드리지!”

“솔직히 강해아가 아직까지 살아 있을 줄은 몰랐지. 알았다면 강백서가 있는 곳을 언질이라도 해 둘 것을.”

“이 씨발 놈이 좋게 말하려니까 아버지 이야기를―”

“황제가 구호소에 있는 아이 중 자네와 같은 나이의 양인 아이들을 추려 제거한 것을 아는가?”

“―뭐?”

“정확히 말하면 아버지들 없이 홀로 떨어진 아이, 피붙이 없는 아이들. 자네는 호적에 황후의 아이와 형제로 기재되어 있었다지?”

“왜, 왜, 그런 짓을…….”

“그래야 오천협을 월국에서 떠나게 하고 강절곤에게 성월공을 붙일 수 있을 테니까.”

단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사실에 진해의 머리가 띵해졌다. 문득 어릴 적에 미려를 안고 있는 진해에게 관원이 다가와 이것저것 묻던 기억이 났다. 아버지들은 어디 있느냐. 네 이름이 뭐냐. 그러던 그에게 다른 관원이 다가와 손이 부족한테 형제가 있는 애들까지 넣으면 어떡하냐고 타박하는 소리를 했다. 왜 하필 지금 그 기억이 떠오르는지.

“……난 구호소 덕분에 살았는데.”

“구호소 덕에 죽은 아이들도 있지.”

“왜 그런 말을 해 주는 거야? 젠장, 난 지금도 머리가 복잡해서 터질 것 같은데!”

“나는 자네가 내 뒤를 잇기를 원하니까.”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둘이 말을 하지 않는 동안 만가헌의 귀한 새들이 번갈아 노래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일청은 늙었어. 분명 그보다 먼저 죽을 테지.”

“…….”

“그리고 나 역시 오래 살진 않을 거야. 나는 할 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내 서방님의 뒤를 따르고 싶은데 하늘이 날 돕더군. 길면 반년. 이 목숨은 그 안에 끝이 나네.”

반년 안에 죽는다는 말을 듣고 진해는 멍하니 생각했다. 어쩐지 월산이 이 녀석이 저자를 가만히 내버려 두더라니 손을 쓰지 않아도 곧 죽으니까 내버려 둔 거였구나. 아니었으면 그 성깔 못 참고 사람 시켜서 칼빵이라도 놓았을 텐데.

“……둘 다 내 서방님을 제법 닮으셨더군. 솔직히 나도 놀랐어. 내가 두 사람을 바꿨으니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줄 알았으니까. 하지만 해원공이 날 찾아왔을 때 나는 그를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네. 내 서방님과 닮은 구석이 있어 긴가민가했는데, 하하. 성월공도 내 서방님과 닮았더군. 같은 핏줄인 게지. 씨를 달리 태어났던 황제와 서방님도 닮은 구석이 있는데 사촌이라도 닮지 않을 리가.”

“그럼 댁도 모른다는 거야 지금?!”

“황제는 서방님 소생의 아이와 원귀비 소생의 아이를 나눌 때 아이들의 체구로 나누었다. 큰아이를 서방님의 소생으로, 작은 아이를 원귀비 소생의 아이로. 원귀비 의 아이는 조산이었으니까.”

“내 말 무시하네.”

“하지만 사람의 체구가 태어날 때의 것으로 정해지지 않는다는 걸 잘 알 것이야.”

화석정군은 그렇게 말하며 슬쩍 진해의 등 뒤를 바라보았다. 진해도 그 시선을 따라 돌리자 황급히 사라지는 궁인의 옷자락을 볼 수 있었다. 황제가 진해와 지서에게 사람을 붙여 놓은 것이었다. 진해는 깜짝 놀라 간담이 서늘해졌지만 지서는 익숙한 듯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손짓을 해 진해를 가까이 불러들였다.

“답은 자네의 음인 중 하나에게 맡겨 놓았어.”

“내 음인?”

“당분간 이 나라에서 가장 안전할 이에게.”

“엥?”

양지서는 그렇게 말하고 빙긋 웃었다. 그는 어리둥절한 진해를 두고 큰 소리로 사람을 불러 유일청에게 먹일 간식을 가져오게 했다.

“유일청, 따라해 보거라. 형님.”

[형!]

“아니지, 형님.”

[형님!]

“옳지, 잘하는구나. 그럼 이젠 절 버리지 마세요, 라고 말해 볼까?”

[버려? 버려!]

“아니야, 버리지, 마세요.”

진해는 유일청에게 누가 말했을지 뻔한 말을 가르치는 지서를 뜨악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그대로 뒷걸음쳐 방을 나왔다. 어쩐지 굵은 소금을 뿌려야만 할 것 같았다.

“내 음인? 당분간 가장 안전한 음인? 무슨 말이 그래?”

양지서가 아는 진해의 예쁜이들 은 총 넷이었다. 일단 소월과 해산은 당사자라 제쳐 놓으면 남은 건 둘, 정미려와 삼랑이었는데 진해는 그 둘 중 누가 ‘당분간’ 안전한 이인지 도통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일단 둘을 만나 물어보기라도 해야 했다. 진해는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며 급하게 궁을 나섰고 당분간 이 월국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 된 창명후 저택으로 달려갔다.

“아!!!?”

그리고 집을 보는 순간 진해는 순식간에 양지서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창명후 저택이 당분간 이 나라에서 가장 안전하게 된 까닭이 양지서가 말한 그 음인이 안전한 이유와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창명후 저택이 안전하게 된 까닭은 그 집에 웬만한 월국인들은 감당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이들이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산국의 패왕이 될 수 있는 두 사람. 고산패자 제갈군무와 고산패왕의 수제자 오천협.

양지서는 안해산, 정미려, 삼랑과 함께 도성에 왔다. 그리고 그동안 누가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지 봐 왔을 것이고 삼랑의 곁을 누가 지키는지 똑똑히 봤을 것이다.

“사, 삼랑아!! 삼랑아!!!”

고산패왕의 수제자이자 진해의 좌부이며 월국 구국의 영웅인 오천협이 모종의 이유로 삼랑의 종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천협이 삼랑을 지킨다면 고산패자쯤은 와야 삼랑의 머리칼 한 올 정도는 건드려 볼 수 있을 터였다. 뭐, 독살이나 기타 등등을 제한다면의 이야기였지만.

“나 안 죽었어. 매정한 새끼야.”

기무위사를 때려치운 삼랑이 앞섶을 다 풀어헤친 나태한 자태로 진해의 부름에 응했다. 진해는 다급하게 삼랑을 불렀다가 예상치 못한 대담한 노출에 그만 할 말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무슨 상황이 닥치든 진해의 사람됨이 바뀌지는 않는 법이다.

“어어―”

언제 봐도 신기한 몸이었다. 따로 관리하는 것 같지 않은데도 옥과 상아에 비견될 만큼 새하얬다. 미려와는 다른 채도의 피부였다. 한 벌 얻어 입은 건지 그렇지 않으면 따로 빼돌린 건지 언젠가 진해가 장강 강가의 보고에서 봤던 광택 도는 화려한 남색 장포를 걸치고 있었다.

“갑자기 벙어리가 됐나. 어어는 무슨 어어야.”

저걸 저렇게 나태하고, 요염하게 걸치는 것도 재주였다. 진해는 저 옷이 저런 모양인지 전혀 알 수 없었었다.

“야.”

“으, 으응?”

오랜만에 잘빠진 문신이 빼곡한 살결이 눈앞에 보이니 시야가 산만했다.

“야.”

“응?”

“그만 쳐다보라고.”

드러난 상체에서 가장 백미 부분인 쇄골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진해는 저도 모르게 입을 헤 벌리고 오랜만에 피어난 멋진 문양 다발을 감상했다. 오죽했으면 삼랑이 진해의 볼을 잡아 위쪽으로 들어 올릴 정도였다.

‘어라?’

그리고 진해는 삼랑이 새삼 낯설었다. 삼랑은 못 본 사이에 진해가 모르는 분위기의 남자가 되어 있었다. 욕 한마디 안 하고 물끄러미 얼굴을 들여다보기만 했다. 뭔가 묘하게 낯설다 싶더니 어깨 이상으로 자라면 칼같이 잘라 내던 머리칼이 어깨 밑으로 살짝 늘어져 있었다.

“너 왜 집에 잘 안 들어오냐?”

“엥? 집에 매일 들어왔는데?”

“그럼 왜 날 안 보러 오냐?”

“할아버지랑 아빠 보느라?”

“너. 너 없는 새에 내가 이 집에서 무슨 취급을 받는지 알고나 있냐?”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나 따당하고 있다.”

“어엉?! 네가? 네가 다른 사람을 따돌리는 게 아니고?! 진짜? 착각하는 거 아냐?”

“…….”

“으, 으음.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래, 그렇고말고.”

무표정하게 고개를 꺾는 게 무서웠다. 진해는 원한다면 동네 사람을 다 따돌릴 성질머리가 따돌림당했다는 말을 믿을 수 없었지만 본인이 그렇다는데 어쩔 것인가. 게다가 진해는 삼랑의 말대로 할아버지인 강절곤과 몸이 좋지 않은 우부에게 재롱을 떠느라 제법 바쁘게 지냈다. 황후의 처벌 건도 아직 진해가 책임자였고 오랜만에 만난 해산 도련님을 응원하면서 가끔씩 좌부인 오천협과 만나 뜨끈한 부자의 정을 나눴다.

“왜? 네가 왜 여기서 따돌림을 당해? 미려 어디 갔어? 미려랑 놀면 되잖아.”

“대가리에 화살 맞았냐? 네 할아버지랑 우부 앞에서 꼬리 흔드느라 바쁜 놈이랑 시시덕거리라고?”

진해가 자리를 비우면 미려가 할아버님, 아버님을 연호하며 강백서의 시중을 들었다. 미려의 깜찍한 애교는 월국 제일이었으니 강백서가 미려를 귀여워하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흥. 내 말 못 믿어도 상관없어. 그렇다고 진실이 바뀌진 않는 법이니까.”

“아니……, 삼랑아. 대체 무슨 일이야? 응? 누가 널 괴롭혀?”

삼랑이 진해의 볼을 놓자 진해가 살짝 붉어진 양 볼을 두 손으로 비비며 삼랑에게 물었다. 아까부터 욕을 안 한다 싶더니 어쩌면 삼랑은 지금 풀이 죽어 있는 걸지도 몰랐다. 진해는 자신이 삼랑에게 근래 너무 신경을 안 썼나 싶어 조금 걱정스러워졌다.

“난 안 끼워 준다네.”

“어딜 안 끼워 줘? 누가 안 끼워 줘? 말해 봐. 뭔진 몰라도 내가 말해서 당장 끼워 주라고 할게.”

“해원공이랑 정미려.”

확실히 삼랑을 따돌릴 배짱이 있는 사람은 그 둘뿐이다. 진해의 머릿속에 커다란 세 마리 고래에게 마구 꼬리치기 당하고 있는 통통한 새우 한 마리가 보였다. 붉고 오동통하고 맛나게 생긴 새우의 이름은 오진해였다. 문제는 새우가 고래한테 침을 질질 흘리는 놈이라 그 싸움판에서 빠질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 혹시 돈 때문에 그래? 헤헤, 내가 여해루 지분 좀 넘겨줄까? 아니면 아예 하나 세워 줘? 우리 삼랑이 건물 한 개 세워 줄까?”

“어디서 졸부 영감탱이 수작질만 배워 가지고. 내가 그깟 돈 몇 푼 때문에 그놈들이 날 따돌리게 둘 것 같아?”

“으음~ 그럼 뭐 때문일까~? 우리 삼랑이가 왜 삐졌을까?”

진해는 삼랑이 몸을 돌리자 뒤를 쫓아가 얼른 삼랑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진해의 어깨 안마를 받고도 진해의 말을 들어주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황제마저도 진해의 안마 솜씨에 홀랑 넘어가지 않았던가. 진해가 사근사근 어깨를 주무르며 아잉, 콧소리를 내자 삼랑이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지라는 표정으로 진해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주무르는 손은 깜찍끔찍한 표정과 달리 천상의 손놀림을 갖고 있었다. 삼랑의 눈이 진해의 투박한 손에 고정됐다.

“진짜 들어줄 거냐?”

“물론~! 물론이지! 내가 우리 삼랑이 얼마나 좋아하는데!”

“건물 한 채만큼 좋아하겠지.”

“아, 아냐! 원하면 더, 더 세워 줄게! 아니지, 층을 올려 줄게! 그게 더 비싸고 좋아 보여~”

“그럼 해원공이랑 개새끼랑 의형제 맺게 해 줄 수도 있냐?”

“……뭔 형제?”

“뭐야, 너 몰랐냐? 그 두 놈 의형제잖아. 그래서 해산이 형, 미려 아우 이러고 난리 났던데?”

태어나기는 미려가 먼저 태어난 거로 알고 있는데 미려가 왜 형이지? 진해는 알 수 없는 이유에 어리둥절해졌다. 아니 그보다 둘이 사이가 별로 안 좋고, 썩 좋지도 못할 관계인데 갑자기 뭔 놈의 의형제란 말인가.

“해 줄 거야, 말 거야.”

“우리 삼랑이가 해산 도련님이랑 미려를 생각보다 많이 좋―”

“놔. 나 갈 테니까.”

“아이고, 왜 이러세요. 한 두목님~! 해 드릴게요! 제가 다리 딱 놔 드린다니까요~!”

이유야 어쨌든 삼랑도 그 둘이랑 의형제가 하고 싶단다. 건물을 세워 달라는 것도 아니고 서로 사이가 좋아지고 싶다는데 고래 싸움에 등 터지던 새우가 그걸 마다할 리가.

“그리고 혼인 신고서.”

“앗.”

“그거 진짜로 제출했었냐. 네 자의로 제출했어?”

황제가 도중에 빼돌리긴 했지만, 월산과의 혼인을 막을 대비책이긴 했지만 진해 스스로 신고하긴 했다. 자신의 혈육이 삼랑이의 혈육을 앗아 간 것을 갚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중간 과정 다 생략하면 진해가 스스로 삼랑이와 혼인 신고한 것이 맞다.

“응…….”

“그래?”

품에서 한 장 더 꺼낼까 봐 긴장했는데 삼랑은 그래라는 말 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딘가 먼 곳을 응시하더니 어깨를 조물거리는 진해의 손을 잡아 강하게 잡아당겼다.

“그런 것보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날 부르고 난리야? 아, 알겠다. 혹시 이것 때문인가?”

“헉, 그거 혹시!?”

그리고 언제 꺼냈는지 모를 자그마한 주머니를 손가락 사이에 넣고 돌리고 있었다. 안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그리 무거워 보이지는 않았다.

“그 작자가 갖고 있으면 좋은 일이 생길 거라더니 이런 거였네.”

“나 줘, 나 줘, 나 줘~!”

“왜 이래, 애송이같이. 내가 말했지. 의형제 맺게 해 달라고.”

진해의 손이 삼랑의 손가락 끝에 매달린 주머니로 뻗었다. 삼랑이 팔을 움직일 때마다 진해의 팔이 삼랑의 팔에 얽혔다. 어느새 몸이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매끄러운 비단이 진해와 삼랑의 몸 사이에서 일그러졌다.

“어.”

어느새 진해와 삼랑의 이마가 가볍게 닿아 있었다. 어디에 기댄 삼랑의 몸을 진해의 몸이 덮치듯 누르고 있었다. 상큼한 듯 톡 쏘는 향을 가진 삼랑이의 향이 진해의 코끝을 간질였다. 색소가 옅은 눈동자에 진해의 얼굴이 가득 담겼다. 참 잘생긴 얼굴이었다. 성질 조금만 죽이면 더 좋을 얼굴이다.

“그놈들, 너랑 잔 순서로 형 아우 정했어.”

“……응?”

“나는 너랑 안 잤으니까 못 끼워 준다네.”

“………뭐, 라구?”

“그놈 새끼들이랑 부대끼고 싶진 않은데, 내 성질 알지? 지고는 못 사는 거. 못 이길 거면 비기기라도 해야 해.”

진해가 난데없고 절조 없는 의형제 서열에 대한 진실에 할 말을 잃고 어버버거리고 있자 삼랑이 민첩하게 움직이더니 주머니를 열고 안에 든 것을 꺼냈다.

“아악! 삼랑아?!!”

그리고는 누가 뭐라 할 새도 없이 그것을 홀랑 입 속에 털어 버렸다. 애를 뒤바꾸고 새한테 킥킥거리면서 저주를 가르치던 놈이 맡긴 물건이다. 답이 될 물건이라고 했지만 먹어서 안 죽으면 승자라네라고 말하면서 독약을 넣어 놨을지도 모른다!

“배, 뱉어! 뱉어!! 당장 뱉어!!”

거기다 침이 닿으면 녹을 물건일지도 몰랐다. 이름이 쓰인 종이쪽지일지도 몰랐고. 물에 젖은 종이가 취약하다는 건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나도 아는 바!

“으읍?!”

그런데 삼랑이가 입에 든 것을 몇 번 오물거리더니 진해의 턱을 잡고 입을 맞췄다. 그새 뽀뽀 몇 번 했다고 처음 할 때보다는 제법 실력이 는 것 같았다.

“푸학?”

그리고 무엇보다, 주머니 속에 든 게 화석정군이 맡긴 물건이 아니라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진해는 낯선 듯 익숙한 향의 약 맛에 두 눈이 동그래졌다.

“타, 타, 탈―”

“기억하네? 나 말고 다른 새끼랑 나눠 먹은 적 있는 거 아냐? 그리고, 나 며칠 전부터 정향탕 안 먹고 있다.”

“아악! 뒷간, 당장 뒷간에 가야 돼!!”

진해는 탈정고의 터질 듯한 고통을 떠올리면서 꽥 비명을 질렀다. 해독법을 알고 있으니 뒷간에서 약효가 퍼지기 전에 얼른 볼일을 보면 해결될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삼랑이 진해의 손목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진해는 정향탕을 먹지 않았다는 삼랑의 말과 탈정고의 주요 부작용 중의 하나를 떠올리며 얼굴이 새하얘졌다.

딱히 부작용은 아니었지만 탈정고를 먹은 양인과 음인 사이에서는 아이가 많이 났다. 한 번에 여러 쌍둥이가 난다는 말이 아니라 불임인 줄 알았던 부부 사이에서 아이가 생길 정도로 회임률이 높다는 말이었다.

‘당연히 그렇겠지! 그만큼 싸고 또 싸는데 애가 안 생기는 게 이상하잖아!!’

거기다 희락기를 억제하고 피임 효능이 있는 정향탕까지 먹지 않았으면 빼도 박도 못한다. 진해는 얼굴이 분홍빛으로 변한 채 저를 잡아끄는 삼랑을 뜨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삼랑은 가장 가까운 방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다행히 사람이 없는 빈 손님방인 듯했다. 창고가 아니라서 천만다행이었다. 진해는 먼지가 가득한 방에서 삼랑이와 첫날을 보내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래, 인정하자. 솔직히 언젠가 한 번은 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이 더러운 성질머리가 내가 결혼했다고 가만히 놔둘 것 같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애는 아니야. 애는!!’

진해의 머릿속에 얼굴을 모르는, 그러나 진해의 아이임에 분명한 아이가 물었다. 아빠, 저는 어떻게 생겼어요라고. 그러자 방금까지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아이를 보던 진해의 몸이 굳었다. 진해는 아이에게 도저히 진실을 알려 줄 수가 없었다.

누구누구야, 미안해. 원래 계획대로라면 널 비단 이불 위에서 사랑이 넘치는 정교로 생기게 해 주고 싶었어. 그런데 너희 아빠가 너무 의욕이 넘치고, 이 아빠도 법 있어도 안 지키는 사람이라 약 처먹고 뒹굴다가 널 만들었단다, 라고는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자, 잠깐, 잠깐만!”

“뭐.”

관모는 어디로 날아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진해는 흐트러진 관복을 여미며 긴급히 중지를 부르짖었다. 별로 먹히지는 않았지만.

“또 같잖은 놀이인지 뭔지를 하고 싶어서 그러냐? 후. 역시 창놈어사. 암, 그래야 잠춘동의 필두 창놈이지.”

“누가 필두 창놈이야?! 난 돈 받고 판 적은 없거든?!”

머릿속에서 진해의 아이를 연기했던 누군가가 말했다. 아빠, 그냥 입 다물어라고.

“그래? 그럼 나랑도 공짜로 할 거지?”

“그럼! 당연하지!”

아예 돈을 줄 수도 있다고, 진해가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며 용감무쌍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삼랑이가 입은 건지 만 건지 모를 옷을 슥 벗어 내렸다. 매끄러운 비단옷이 살아 있는 생물처럼 삼랑의 흰 피부 위를 꿈틀거리며 미끄러졌다. 옷 색과 문신 색이 비슷해서 피부 위에 종이 오린 걸 얹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기묘한 균형이 잠춘동에서, 아니 월국에서 소문난 변태인 진해가 침을 삼키게 만들었다.

“시발, 나도, 하아…… 돈 같은 건 필요 없어.”

평소에는 사납게 치켜 올라간 눈매가 열기에 부드럽게 녹은 게 장난이 아니었다. 삼랑이 진해 위에 올라탄 적은 많았지만 서로 거시기를 세우고 올라탄 적은 없었다. 조금 늦다 싶던 약효가 갑자기 훅 치고 올라왔다. 아랫도리에 단번에 피가 몰리면서 진해의 작지만 작지 않은 진해가 부풀었고, 진해의 위에 주저앉아 있던 삼랑이 고스란히 그 융기를 알아챘다.

“섰네?”

옷을 팔 쪽에만 걸친 채 삼랑이 진해의 배 위에 손을 얹었다. 벗기지 않은 관복 위에 손을 얹고 뭔가를 찾듯이 느릿하게 더듬거렸다. 험한 일은 진해 못지않게 많이 했을 텐데도 손이 묘하게 고와 보였다. 저 손에 맞으면 곡소리가 난다는 걸 알면서도 진해는 저 손가락을 예뻐해 주고 싶어 침이 고였다.

“흐읏…….”

달콤하면서도 상큼한 향. 진해는 이때까지 수도 없이 맡았던 삼랑의 향에 아무런 생각이 없었는데 오늘이야말로 삼랑의 향기가 마침내 매화와 닮은 구석이 있다는 걸 찾아냈다. 매화도 삼랑도 하얬으니 썩 잘 어울렸다. 매화 가지로 몽둥이를 만들면 겁나게 아프다는 것도 비슷했다.

“왜, 아직도 할 기분이 안 나?”

사실은 엄청 끌리는 중입니다만.

진해는 코의 점막이 약했으면 흥분으로 코피를 흘렸을 거라고 생각했다. 겉으로는 어찌 보일지 몰라도 머릿속으로는 삼랑의 손가락을 모아 예쁘게 받쳐 준 뒤 그 오목하게 모인 곳에 넘치도록 싸 주는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아…….”

더 환장하겠는 건 진해가 무슨 망상에 빠진 줄도 모르고 삼랑이 진해의 앞에서 자신의 하의에 손을 밀어 넣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부푼 앞섶에 손을 넣고 진해가 허옇고 걸쭉한 액체로 더럽혀 주고 싶은 손가락으로 질척질척 소리를 내면서 스스로를 위로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으응……!”

탈정고의 약효가 돌기 시작했는지 평소와는 다른 소리를 냈다. 많이 들어 본 건 아니지만 진해가 들어 본 것과는 다른 음색이었다. 가냘프고 애달프면서, 요망했다. 저 눈 돌아가는 몸을 가지고 아직도 총각이라니.

“……도 보여 줘.”

탈정고의 열기가 진해의 눈앞을 뿌옇게 가려 버렸다.

“나도 보여 줘!”

진해는 어디서 기운이 솟았는지 삼랑의 팔을 잡아 침상에 콱 눕힌 뒤 삼랑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았다. 헐떡헐떡 땡볕 아래 묶인 집 지키는 짐승을 닮았다. 이제 진해에겐 정말로 두 가지 선택이 남았다. 억지로 한 발 싸서 삼랑이를 만족시켜 주고 요강을 찾든지, 아니면 삼랑이랑 약효가 떨어질 때까지 미친 듯이 놀든지.

그런데 여기서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화석정군인지 황제인지 나발인지 하는 놈들 때문에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란 지금 합리적으로 생각하자면 그냥 한 발 싸고 말아야겠지만, 문제는 잠춘동의 만재, 자칭 잠춘동 최고 절륜남인 진해에겐 억지로 한 발이라는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안 하고 말지.’

시간이 없어서 손장난으로 끝내야 하는 상황도 아닌데 한 발만? 진해의 작은 진해가 진해의 선택지를 비웃었다. 사실 진해도 이 상황에 이른 이상 할 일은 단 하나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건 바로 삼랑이의 바지를 벗기는 것! 진해는 눈을 번뜩 빛내며 삼랑의 바지를 무슨 채소 껍질 벗기듯 매끄럽게 훌렁 벗겼고, 순식간에 삼랑을 반라로 만들어 버렸다.

“계속해 봐.”

겉으로 보이는 살도 하얀데 속살은 더 하얬다. 진해는 언젠가 이 살을 꼭 밝은 햇살 아래서 보고 싶었다. 눈이 내리는 날 밖에서 보면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았다. 슬그머니 허벅지를 어루만지자 기가 막힌 감촉이 진해의 이성을 앗아 갔다.

맛있겠다.

진해의 이뿌리가 시큰거리고 혀 밑에 군침이 고였다. 슬슬 문지르던 손이 힘을 줘 욕심껏 허벅지를 움켜쥐었다.

“응……!”

길고 하얀 다리가 뒤틀리며 진해의 옆구리에 반쯤 달라붙었다. 진해는 끌어당기는 듯한 움직임에 홀려 저도 모르게 허릴 숙여 삼랑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삼랑의 성격답게, 삼랑에게 천천히 부드럽게라는 단어 따위는 존재치 않았다. 처음 입을 맞췄을 때도 이가 부딪쳐 피를 봤던 삼랑이었다. 삼랑은 진해의 입술이 닿자마자 물어뜯으며 끌어당겼다. 살결만 보면 달콤하게 녹아내릴 것 같은데 사실은 쥐 잡을 때 쓰는 백반(白礬)인 모양이었다.

“하음―”

게다가 진해도 이제 슬슬 급해졌다. 아랫도리가 터질 것처럼 부풀고 단전이 딱딱하게 뭉치는 게 탈정고가 제 몫을 다하려는 모양이었다. 혀와 혀가 엉킬 때마다 저도 모르게 허리를 움직여 다리 사이에 철썩 갖다 붙였다. 질척질척 소리를 내던 점액이 진해의 관복을 얼룩덜룩하게 만들었다.

“하아, 하아―”

입을 맞추면서도 눈앞이 몇 번이나 흐려졌다가 선명해졌다. 입맞춤으로도 쌀 것 같은 경지가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정신을 차리자 진해의 머리가 산발이 돼 있었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뻔했다.

“빨리, 빨리……!”

입술이 떨어지자 삼랑이 진해의 목을 꽉 끌어안고 스스로 허리를 흔들었다. 허리를 들어 올려 진해의 몸에 붙이고 들썩들썩 몸을 움직이는데, 이걸 버틸 양인 놈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터였다. 진해의 머릿속이 새까맣게 물들었다.

진해는 초인적인 이성을 발휘해 삼랑의 몸을 떼 내 덜렁 뒤집었다.

“씹, 지금, 뭐!”

“삼랑이 너는 좀 버릇이 없어. 순서도 없고. 어딜 혼례도 안 치른 음인이 애를 가지려 그래? 응? 내가 널 그리 가르치디?”

“시발, 네가 언제 날 가르쳤다고 그래!”

삼랑이 무릎을 세우고 일어나려 하자 삼랑의 뒷목을 잡아 내리눌렀다. 베개에 얼굴을 박은 채 뒤를 노려보는 삼랑의 눈이 진해를 회 쳐 버릴 듯이 형형했다. 진해가 비뚜름하게 웃으며 삼랑의 엉덩이에 하체를 문지르자 순식간에 녹아내리긴 했지만.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야. 그리고 규칙이 있는 법이지.”

진해는 가끔 자기가 떡을 칠 때 좀 개소리를 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번 한 번으로 끝낼 거 아니면 너도 내 규칙을 따라야 해. 내 예쁜이들은 모두 착한 애들뿐이지.”

그러면서 진해는 삼랑의 엉덩이를 덮은 장포를 슬쩍 걷어 올렸다. 걷어 올리고는 삼랑의 허리 중 가장 움푹 들어간 곳에 입을 맞췄다. 입술에 닿는 감촉을 음미하듯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진해가 살짝 우물거리자 삼랑의 허리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아!”

진해의 손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삼랑의 배 쪽으로 기어갔다. 삼랑이 스스로 잡고 문지르던 물건을 부드럽게 그러쥔 채 살짝 힘을 주었다.

“삼랑아, 내 애가 갖고 싶어? 응?”

제 손의 음인을 달래는 진해의 목소리가 참기름 한 숟갈을 먹은 것처럼 미끄러웠다. 탈정고를 먹으면 모든 감각이 예민해지기 마련이라, 삼랑은 진해의 말에 답하는 대신 이를 악물며 베개에 이마를 박았다.

“말 안 하면 주지 않을 테야.”

진해가 손을 교묘히 놀려 삼랑의 물건 끄트머리, 갈라진 부분을 간질였다. 사실 아랫도리가 터질 것 같아서 당장이라도 박고 싸고 싶었다. 그래도 한 알을 통째로 먹었던 저번보단 나았다. 적어도 처음일 삼랑에게 피를 보게 할 정도는 아니라는 말이었다.

“으응!”

삼랑이 대답을 하지 않자 진해는 끈적끈적하게 젖은 끝을 문지르는 동시에 삼랑의 엉덩이 틈에 손을 미끄러뜨렸다. 이곳 역시 앞과 마찬가지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음인 특유의 냄새가 진하게 고여 있었다. 진해는 문득 삼랑이 자신이 원하는 곳에 문신을 새겨 주겠다고 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눈앞의 별천지에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지금은 생각이 간절해졌다. 진해는 앞을 문지르던 손을 가져와 엄지와 엄지로 삼랑의 양쪽 엉덩이를 잡아 벌렸다. 손가락이 푹 들어가는 부드럽고 탱탱한 살이었다. 어리고 신선한 살결이 진해의 거친 손 아래서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철썩.]

“하윽?!”

자신도 모르게 진해는 손을 들어 삼랑의 엉덩이를 내리쳤다. 백도처럼 뽀얀 엉덩이가 순식간에 물이 들었다.

“이 음탕한 엉덩이! 나쁜 엉덩이!”

철썩,

“미, 친! 아윽!”

“이거 봐라? 나쁜 엉덩이에 나쁜 입이네! 나쁜 삼랑이는 혼이 나야 해! 좀 더 혼이 나야 한다고!”

손바닥에 달라붙는 살맛이 기가 막혀 진해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붙여 가며 실컷 엉덩이를 가격했다. 엄지 한쪽으로 엉덩이 한쪽을 붙잡은 채 다른 쪽을 내리치자 진해 앞에 여실히 드러난 음인의 부분이 엉덩이를 맞을 때마다 움찔거리며 더욱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그 모양에 진해는 심취했다. 자신만이 볼 수 있는 이 엉덩이 틈새에 자신만이 볼 수 있는 뭔가를 새겨 넣고 싶었다.

진해가 때려 한쪽만 벌겋게 익은 엉덩이를 하고 삼랑이 뒤를 노려보았다. 색소가 연한 눈매가 낯선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진해를 돌아보는 장면은 이 세상 극치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었다. 진해는 빙그레 웃으며 그 눈을 마주 보면서 삼랑의 엉덩이 사이에 중지를 밀어 넣었다.

“읏, 아……!”

길이는 삼랑의 손가락과 비슷하지만 굵기는 굵은 진해의 손가락이 축축하게 젖은 살 속을 자유롭게 유영했다. 벌떡 일어나려다가 허물어진 몸을 보며 진해는 손가락을 굽혀 속을 긁듯이 문질렀다.

“으응, 읏, 응…….”

탈정고는 속의 어떤 곳을 문질러도 쾌락을 자아내는 듯했지만 고작 탈정고 따위에 기댈 생각은 없었다. 진해는 참고, 참고, 또 참으면서, 때로는 참지 않고 삼랑의 엉덩이를 박자를 맞추듯 쳐 대면서 삼랑의 기분 좋은 곳을 탐색했다. 그러다가 삼랑의 체액에 절은 손가락을 쑥 빼내고는 부은 엉덩이와 붓지 않은 엉덩이를 가를 듯 움켜쥐어 젖은 부분은 훤히 드러나게 했다.

“흐악! 아! 창, 미쳤, 뭐, 아으?!”

그리고 그 사이에 고개를 박고 흘러나오는 액을 마셨다. 음인의 냄새가 잔뜩 나는 액체에 혀를 문지르며 촘촘하게 엉킨 주름을 하나씩 맛보았다.

“아, 아아! 진, 진해!! 오진해!!”

삼랑은 이런 건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했는지 엉덩이를 때릴 때보다 반항이 거셌다. 만약 삼랑이 앞을 보고 있었다면 발로 걷어차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진해가 삼랑을 누르고 있었고, 진해의 변태 짓도 한껏 달아올라 있었다. 진해는 삼랑의 그 부분이 자신의 혀를 자를 것처럼 조이자 미간을 찌푸리며 부은 엉덩이에 손톱을 박았다.

“힛!”

동시에 혀를 깊숙이 밀어 넣자 늘어진 장포에 반쯤 가린 앞쪽에서 픽 하고 뭔가 튀는 소리가 났다. 하얀 몸뚱이가 얻어맞은 엉덩이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붉게 물이 들고 두 주먹은 베개를 움켜쥔 채로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해는 자신의 할 일을 할 뿐이었지만.

“응, 앗, 아, 진해, 오, 진해……!”

맛보는 게 여의치 않자 진해는 손가락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삼랑의 구멍을 늘렸다. 순수한 빨간색을 지닌 살은 진해가 아는 가장 원초적인 맛이 났다. 어느덧 삼랑의 목소리에 울음소리가 섞였다. 곧추서 있던 무릎이 픽픽 쓰러지기도 했다. 세 번인가 무릎이 쓰러지자 진해는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민 채 앞을 바라보았다. 젖은 구멍은 다시 닫힐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흐물흐물하게 풀어져 있었다.

“흐으, 흐으…….”

그 삼랑이 울고 있었다. 옆구리를 창으로 뚫려도 울지 않던 이가 진해의 세 치 혓바닥에 흐느끼고 있었다.

“삼랑아.”

“으응…….”

“삼랑.”

진해는 부은 엉덩이를 살짝, 그러나 망설임 없이 꼬집었다.

“아읏!”

“형이라고 불러 봐. 그러면 빨리 끝내 줄게.”

고작 이것 가지고 혼이 빠지면서 아기는 무슨. 진해는 엉금엉금 기어가 땀에 젖어 다닥다닥 달라붙은 삼랑의 머리칼을 떼어 주었다. 진해가 진미를 맛보는 동안 삼랑은 혼자 몇 번이고 극락에 다녀왔는지 눈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형이라고 부르면, 안에 잔뜩 싸 줄게.”

진해는 그 힘없는 눈동자가 울부짖게 만들고 싶은 욕구에 휩싸인 채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러고 보니 삼랑 이 싸가지 없는 놈은 진해를 한 번도 형이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창, 놈…….”

“…….”

이 상황에서도 그 고집은 여전했다.

“체엣, 형이라고 부르는 게 뭐가 힘들다구! 형이라고 불리는 게 얼마나 좋은지 알아, 삼랑이 형?”

“……뭐?”

“삼랑이 형한테 오늘 그 참맛을 보여 주지.”

진해는 반쯤 녹아내린 삼랑을 뒤집으며 삼랑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미묘한 맛이 나는 혀를 받아들이며 삼랑은 미간을 찌푸리다,

“으읍, 으으응!! 으응!!!”

아래가 갈라지는 압박감에 진해의 입 속에서 크게 비명 질렀다. 진해가 어느덧 삼랑의 두 허벅지를 양 옆구리에 낀 채 삼랑의 구멍에 작지만 작지 않은 진해를 쑤셔 넣고 있었다. 아무리 풀어 줬어도 삼랑은 처음이었고, 진해의 작지만 작지 않은 진해는 이 짓에 익숙한 사람들도 엄지를 치켜들 정도로 훌륭한, 대장군이었던 강절곤도 첫날밤에 반쯤 기절하게 만든 조부 수강건의 것을 쏙 빼닮은 것이었다.

“형, 어때? 좋아? 응? 좋아 죽, 지?”

“으앗, 아, 아아!”

쉬지 않고 꾸역꾸역 밀어 넣던 진해는 꽉 조이는 속살에 물건이 잘려 나갈 것 같아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양 옆구리에 끼운 삼랑의 다리가 미친 듯이 경련하고 있었다. 진해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뿌리 끝까지 콱, 밀어 넣었다.

“흐앙!”

퍽 소리와 함께 끝까지 밀려 들어가자 삼랑의 물건에서 찍 액이 뿜어졌다. 격렬히 튄 액이 문신이 새겨진 삼랑의 가슴 근처까지 튀었다. 진한 문양 위에 흰 점액이 튄 장면은 뭔가의 예술 작품처럼 근사하기 짝이 없었다. 저런 걸 전시하면 풍기 문란죄로 잡혀가겠다만은.

“으앙, 앙! 아, 아으응!!”

“삼랑이 형 좋아? 으흑, 좋다고, 해! 빨리!”

[철썩.]

진해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허벅지 한쪽을 놓고 그 위를 때렸다. 허벅지에 손자국이 남자 삼랑의 속이 꽉 조이면서 목을 뒤로 젖히고 가늘게 떨기 시작했다. 옅게 핏줄이 돋는 듯도 했다. 구멍 속이 왈칵 젖었다. 는실난실 허리를 흔들자 빈틈없이 맞물린 구멍 사이로 즙이 빠듯하게 새어 나왔다. 줄줄 흘러넘친 액이 진해의 거웃까지 몽땅 적셔 버렸다.

“아, 아!! 나, 나, 죽, 아!! 아응, 거기, 싫, 읏, 아앙!!”

“죽어! 그냥 이대로 죽어도, 흐앗, 돼!!”

진해가 콱 처박자 삼랑의 물건에서 멀건 액이 분수처럼 쏟아졌다. 안쪽도 벌벌 경련하며 진해의 것을 물어뜯었다. 삼랑은 어느 순간부터 정신이 나갔는지 놓았는지 두 손을 휘휘 저으면서 진해를 밀어내려 했다. 진해는 허공을 젓는 손에 깍지를 낀 채 반쯤 몸을 일으켜 아래로 쿵쿵 내리찧었다.

“악!! 아극, 아, 아악!!”

좋아하는 부분을 계속 찧어 대자 삼랑이 비명 같은 교성을 지르며 허리를 꿈틀거렸다. 평소의 진해라면 헉, 처음인데 너무 심했나 싶은 생각을 하며 조금씩 조절을 했겠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의 진해는 탈정고에 취해 살짝 맛이 가 있었다.

“야!! 형이라고 해, 빨리 형이라고 안 해!!”

어지간히 형 소리에 한이 맺혔는지 삼랑을 끝까지 밀어붙이며 형 소리를 강요했다.

“형, 어흑, 진해, 형!! 형!!”

“큭, 아니지, 이젠 형 아니잖아!!”

쿵쿵 내리찧던 진해는 삼랑이 형이라고 부르자마자 삼랑의 손을 놓는 동시에 삼랑의 허벅지 한쪽을 어깨 위에 걸친 채 작지만 작지 않은 진해를 깊숙이 꾹 누른 채 그대로 멈췄다.

“하악, 하악!!”

쿵쿵 찧는 것도 미칠 노릇이었지만 느끼는 곳을 누르고 있는 것도 돌아 버릴 지경이라 삼랑은 자신도 모르는 새 눈물을 철철 흘리며 손으로 침상을 긁고 있었다. 철퍽, 어느 순간 눈앞이 하얗게 변하며 삼랑의 속에 뜨거운 액이 잔뜩 쏘아졌다. 삼랑이 주먹이 하얗게 되도록 움켜쥐며 생전 처음 겪는 감각을 참는 동안 진해는 삼랑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어 삼랑을 반쯤 들어 올렸다.

“형 아니지. 이젠 아빠지.”

탈정고에 힘 입어 빳빳하게 솟는 작지만 작지 않은 진해를 보며 삼랑이 코를 훌쩍였다. 진해는 그런 삼랑을 보며 자상하게 웃어 보였고, 그대로 삼랑을 작지만 작지 않은 진해 위에 콱 내려 앉혔다.

“흐앙!”

“이왕 시작한 거 끝을 보자고, 삼랑 아빠!”

진해는 삼랑의 골반을 꽉 움켜잡은 채 문신이 닿지 않은 분홍빛 유두을 물어뜯었다. 삼랑이 걸치고 있던 장포는 차마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자태로 구겨지고 더러워져 어느덧 침상 아래로 굴러가 있었다. 탈정고의 약효는 길지 않았지만 진해의 정력은 으뜸이었고, 삼랑의 아빠 소리는 진해를 돌아 버리게 했다. 진해는 삼랑의 속이 젖다 못해 진해의 것으로 가득 차 삼랑이 배가 아프다고 칭얼거릴 때가 되어서야 겨우 노곤한 몸을 눕히고 잠이 들었다.

자고 일어났을 때는 날이 바뀌어 있었다.

* * *

“커어―”

진해는 코를 골며 자다 진저리를 치며 잠에서 깼다. 얼굴 모를 아이에게 진땀을 흘리며 아버지를 오해하지 말아 달라며 비는 꿈을 꿨었다. 아이가 뭐라고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꿈이었다. 묘하게 삼랑이를 닮은 아이였던 거 같지만 일단은 꿈이었다!

“음? 근데 얘는 어딜 갔지……?”

꿈에서 깬 진해는 자신이 대자로 뻗어 자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팔에 걸리는 게 없다는 말은 삼랑이 이 자리에 없다는 말과 진배없었고, 진해는 삼랑의 흰 몸뚱이 대신 뭔가 이질적인 감각이 손끝에 걸리는 걸 알아챘다. 부스스 몸을 일으키니 아니나 다를까 삼랑이 대신에 못 보던 상자 하나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상자는 칠을 한 것처럼 새까만 목재로 만들어져 있었다. 진해는 여해루의 운영과 황궁에서의 빚쟁이 노릇, 그리고 장강 강가의 보고를 터는 등의 행동을 통해 자신의 안목이 어느 정도 수준은 된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 상자가 월국에서는 나지 않는 먼 이국에서 온 귀한 목재로 만들어졌다는 것 역시 알 수 있었다.

진해보다 돈이 없는 삼랑이 이런 상자를 가졌을 리 없다. 진해는 이 상자야말로 자신이 삼랑을 찾아온 목적이라는 건 눈치챘다. 화석정군이 아무도 모르게 삼랑에게 맡겨 놓은 답, 거칠 것 없는 냉철한 황제를 유일하게 좌지우지할 수 있는 무기라는 것을.

“…….”

진해는 말없이 상자를 바라보다 조심스레 그것을 집어 들었다. 상자는 손바닥 위에 겨우 올라올 정도로 작았다. 관리가 잘 되어 오래되었음에도 거슬리는 소리 하나 없었다.

“……그랬나.”

속에 든 것을 본 진해가 바람처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과연 이것이 답이었나. 진해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든 문제의 답이었음에도 진해의 표정은 별 변함이 없었다. 답이 두 개가 아닌 다섯 개 정도였으면 조금 긴장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답은 단둘이었다. 해산이 아니면 월산이었고 모가 아니면 도가 되는 것뿐이었다.

“이젠 어쩐다.”

진해는 상자를 닫은 뒤 그대로 뒤로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답을 확인한 진해는 어쩌면 화석정군 역시 ‘지금은’ 바뀐 아이들을 구분하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진해에게 답을 알아서 좋을 것이 없다는 경고를 하고, 진해가 영영 답을 몰랐으면 좋겠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왜냐면 ‘지금은’ 진해만이 두 사람을 구분할 수 있기 때문에.

잠깐 허공을 바라보던 진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진해가 나오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멀찍이서 늙은 하인이 진해를 향해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여기는 창명후 저택이었다.

“작은 도련님, 소셋물을 내올까요? 아니면 조반부터 자시겠습니까?”

그 말은 즉, 진해와 삼랑이가 이런 짓 하고 저런 짓 한 걸 아버지들과 할아버지들이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었다. 적어도 하인 중 누군가는 들었으리라. 그리고 그 추측은 하인이 내온 소셋물과 다른 하인이 건네주는 뜨거운 약탕으로 인해 사실이 되었다. 엉망이 된 관복은 어떻게 손질했는지 새것처럼 변해 있기까지 했다. 진해와 삼랑이 뻗은 사이에 방에 들어와서 옷을 내갔다는 이야기다.

진해는 싱글싱글 웃는 할아범들 앞에서 아무 말 없이 세수를 하고 기운을 보하는 약탕을 단숨에 들이켰다. 관복을 입고 문안 인사를 생략한 채 아무 말 없이 궁으로 향했다. 밖에서 이런저런 짓을 하는 것도 거리낌 없는 진해였지만, 가족들 앞에서 할 정도로 수치심이 없진 않았다. 진해는 아주 오랜만에 잠춘동 집에 가서 잘 생각을 했다.

* * *

궁에 들어간 진해는 화석정군을 만나기 전 형부에 들러야 했다. 진해의 입궁 소식을 들은 형부상서가 진해를 호출했기 때문이었다. 황족의 일은 형부가 아닌 상서들의 임시 회의와 영찰어사인 진해의 책임이었지만 총괄 책임인 진해가 형부 소속인지라 자연히 형부에 무게가 실렸다. 황후 사마계의 처결 역시 형부에서 주도하게 되었다.

“봉호를 삭탈하고 폐서인한 뒤 교형에 처할 것일세. 시신을 성 밖에 내걸어 본보기를 보여야 했으나 그리되면 해국과 또 마찰이 생길 거라는 의견이 있었지.”

정확히 말하자면 황후에게 문제가 생긴 걸 안 해국에서 미리 국경 부근의 성을 무려 스무 개나 바치며 제발 황후 개인의 문제로 끝내 달라고 빌었다. 다 늙은 해국 왕은 이젠 귀찮은 일 없이 평안히 노후를 보내고 싶은 듯했다. 그것보다는 군사적 마찰이 일어도 옥길합이 앞장서 줄 확신이 없어서 그런 것이었다. 다 버리고 망명이라도 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럼 시신은 어떻게 합니까?”

“국경 근처에 묘를 만들어 주기로 했네. 단 묘비를 세우지 않고 이름 없는 필부로 끝내도록 말이지.”

“해원공께서 가만히 계실까요?”

“생부인 원귀비 마마를 복원하고, 황후로 책봉하기로 했으니 납득하시겠지.”

내 말은 그 말이 아닌데. 진해는 황후 사마계와 해산의 눈물 나는 이별 장면을 떠올리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황후가 죽는 건 둘째치고 황후를 국경 근처에 버리다시피 매장한다는 걸 알면 사마계에게 정이 많은 해산은 참지 못하고 길길이 날뛸 터였다.

“뭐, 찢어서 버리지 않는 게 어딥니까.”

그러나 진해는 상서에게 뭐라 토를 다는 대신 빙긋 웃으며 장궤(長櫃)를 받아 들었다. 길쭉한 장궤는 형부에서는, 아니 평소 황궁의 어느 부서에서도 볼 수 없는 금빛의 봉인이 붙어 있었다. 아마 원귀비의 복원이나 황후 책봉, 해산의 출신 관련한 서류에도 이런 봉인이 붙을 것이었다. 진해는 상서와 논의해 정확히 일주일 뒤 형을 집행하기로 했다.

그리고 마침내, 진해가 황후의 형을 집행하는 날이 다가왔다. 진해는 이날을 위해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목욕재계하고 부정을 쫓는 온갖 민간요법과 의식을 다 행해야 했다. 자신의 출신을 안 뒤로 창명후 저택에서 머물던 진해는 할아버지인 창명후 강절곤의 진중한 얼굴을 마주하며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창명후는 이번만큼은 손자와 할아버지가 아닌 같은 관리로서 진해를 배웅해 주었다.

“해산 도련님?”

그런데 나가려는 창명후 저택의 문 앞에 예상치 못했던 사람이 있었다. 해산이 흰 상복을 입은 채 진해를 기다리고 있었다. 진해가 휙 뒤를 돌아보자 강절곤이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절곤은 해산이 원귀비의 소생이라는 걸 안 후로 그에게 알게 모르게 약해진 터였다. 아마 이번에도 황후에게 정이 깊은 해산을 위해 알려 준 게 분명했다. 진해는 무거운 가슴을 끌어안고 해산에게로 갔다.

“입회하진 못하실 거예요.”

“상관없다.”

“저,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실 수도…….”

“너도 어려서부터 온갖 추한 것을 다 보았다지 않았느냐. 남의 시신을 옮긴 너도 있는데 내…… 우부의 마지막을 어찌 외면할까.”

“……제가 밉지 않으세요?”

진해의 말에 진해와 함께 수레로 걸어가던 해산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뒤를 돌아 진해를 바라보는 해산의 얼굴이 창백했다. 해산은 진해를 바라보며 아주 엷게, 당장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해야. 나는 황자다. 내 아버지가 너에게 나를 키워 준 이를 죽이라 명을 내렸어. 그리고 나는 그 아버지에게 어떤 말도 하지 않았지.”

“해산 도련님…….”

“너야말로 내가 경멸스럽지 않느냐? 나는 내 위치인지 뭔지를 위해 날 키워 준 이를 죽음에 몰아넣으려 하고 있다. 그가 친자식을 살리기 위해 그리했음을 알면서도 내가 속한 황실, 이 빌어먹을 황실의 체면을 위해 그의 목숨이 사라지게 두고 있단 말이다.”

“그만하세요.”

진해는 들고 있던 형 집행 명령이 든 장궤를 던지듯 바닥에 내려놓고 해산을 끌어안았다. 해산은 눈가가 붉어진 채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해는 뜨지 않았고 하늘을 아직 검푸른 빛깔이었다. 진해는 촛불과 새벽의 음영이 얼룩진 해산의 뺨을 쓸어내렸다. 오늘부로 모든 우부를 잃게 될 가여운 정인의 뺨을.

“……나는, 내 핏줄이 밉다.”

이마와 이마를 맞댄 채로 해산이 쉰 소리로 중얼거렸다. 해국 출신 우부를 뒀다고 은근히 따돌림을 받던 해산을 유일하게 사랑해 준 건 사마계였다. 사마계는 죄책감 때문이라고 했지만 진해는 사마계가 죄책감만으로 해산을 양육한 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내 우부가 바뀌었다는 것만으로 이제 와서 내게 허리를 굽히고, 아는 척을 해. 내가 뭘 해도 비웃고 인상을 찌푸리던 자들이 지금은 내게 박수를 치고 아첨을 해.”

아마 그것은 진해의 조부인 강절곤을 포함한 이야기일 터였다. 진해는 그저 아무 말 없이 해산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우부가 사라지면, 내게 남는 건 정말 너밖에 없구나. 너는 내가 누구이건 늘 변치 않고 나를 사랑해 줬지.”

입술을 피가 날 것처럼 씹는 동시에 진해의 뺨에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참고, 또 참다가 겨우 흘린 한 방울이었다. 해산을 진해의 뺨이 젖자 고개를 들어 바로 눈물을 닦아 냈다. 진해는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지고 찢어지는 경지가 있음을 깨달았다.

이 사람을 위해서 뭐든 해 주고 싶었다. 원하는 게 있다면 다 들어주고 싶었다. 심장을 꺼내 달라면 가슴에 칼 정도는 박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진해는 자신이 반한 남자의 눈물에 하늘이 갈라지고 땅이 무너지는 것 같은 깊은 고통을 맛보았다. 정의? 도덕? 체면? 그런 게 다 뭐가 소용일까. 그런 거 다 지키다가 정작 소중한 걸 못 지키면 무슨 소용이 있느냔 말이다.

“해산 도련님.”

진해는 울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는 얼굴을 잡아 제 쪽으로 돌렸다. 답이 듣고 싶었다. 다른 사람이 아닌 해산이 말해 주는 답.

“한 가지만 여쭐게요. 해산 도련님은 이걸로 만족하세요? 생부, 원귀비 마마의 복수를 하고 싶진 않으세요?”

―황상께는요?

힘이 제법, 아니 엄청 많이, 아주 많이 들겠지만 열심히 하면 자신이 말한 모든 걸 이룰 수 있을 거 같았다. 아버지에게 복수한다는 건 패륜이었지만 아버지라는 인간이 먼저 뒤통수를 쳤는데 누가 뭐라고 할까. 진해 개인도 황제에게 약간의 사감이 생긴 터였다.

“……너는 나를 겁쟁이라 욕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더는 다른 이의 목숨을 앗고 싶지 않다. 그것은 앞으로도 마찬가지야. 나와 나의 소중한 이인 너에게 위해를 가한다면 반격하겠지만 결코 내가 나서서 다른 이를 해치고 싶진 않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없어요? 그때 다 죽일걸 이러시면 곤란해요?”

진해가 몇 번이고 되묻자 해산은 쓸쓸한 얼굴로 웃었다. 진해는 겉보기에는 전장에서 수십 승을 거뒀을 장군의 모습을 했으면서 다른 이가 죽길 원치 않는 해산의 마음에, 조금 짜릿했다. 자신의 권력을 위해 천륜을 어기고 정을 저버린다거나, 자신이 갖지 못한다면 부숴 버린다거나 하지 않는 이 다정함에 작지만 작지 않은 진해가 움찔할 정도로 감동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해산의 답 역시 진해가 내린 일련의 답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다른 이들은 뭐라 욕할지 모르겠지만 진해는 자신의 복수를 마무리 지을 셈이었다. 우물에서 온갖 고생을 한 우부를 생각하면 산 채로 성벽에 걸어 놓고 말려 죽여도 모자라겠지만 진해가 이리한다고 우부 강백서의 예전 모습이 돌아오는 건 아니었다. 해산 자신이 핍박받은 복수를 한다고 해서 그가 쓸쓸했던 세월이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사실 좆 같긴 해.’

하지만 진해는, 해산은 그들이 끝내지 않으면 복수가 끝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복수를 시작하면 또 다른 진해와 해산이 생길 것임을, 또 다른 미려와 월산이 생겨날 것임을 알았다. 개 같지만 황제 회순이 월국을 번영시키고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만 했다. 그의 치하에 굶어 죽는 이가 월등히 줄고, 향인들 모두가 제 능력을 발휘하기 편해졌다는 것을.

눈을 감은 채 해산의 입에 입을 맞추는 동안 저 멀리 담장 위가 노랗게 물이 들기 시작했다. 새벽이슬이 아스라이 반짝이며 새로운 날의 새로운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밤이 되면 새롭게 달이 뜰 것이다.

“가요, 해산 도련님.”

진해는 상처받은 다정한 이의 손을 잡고 수레에 올라탔다.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시작이, 누군가에게는 끝이 될 수 있는 날이었다.

* * *

소식을 들었는지 황후궁의 궁인들이 모두 진지한 태도로 진해를 기다리고 있었다. 진해는 궁인들에게 눈짓해 해산을 멀리 떨어진 곳으로 데려가게 했다. 해산은 이번만큼은 말없이 진해의 의견을 따랐다.

“황명이오! 황후 사마계는 감히 사람으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악독한 발상으로 원귀비 연광에게 누명을 입혀 죽음에 이르게 하고 그 소생을 자신의 소생으로 바꿔치기하였으며 이 사실을 안 장강 강가의 후사 강백서를 살인하려 했다! 이는 대월 황실을 능멸하고 황통을 어지럽힌 대역죄임에 진배없음이야! 하지만 황손을 죽이지 않고 양육한 점을 참작하여 시신만은 온전히 보전케 한다! 이상!”

“……황은에 감사드립니다.”

사마계는 자신이 죽게 되었음에도 침착했다. 오히려 기다리던 끝을 보는 얼굴이었다. 진해의 성지 낭독이 끝나자 뒤에서 기다리던 궁인들이 준비를 시작했다. 대들보에 천을 걸고 설 수 있는 작은 의자를 갖다 놓은 것이다. 황후가 좋게 받아들이면 자결이 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교살이 될 터였다. 황후가 조용히 일어서자 방 안이 긴장감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어험!”

그런데 진해가 갑자기 크게 헛기침을 했다.

“어험, 어험!”

진해가 너무나 부자연스럽게 헛기침을 하자 궁인들이 진해의 안색을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진해가 궁인 중 제일 급이 높은 이를 손짓해 불렀다.

“밖에 해원공께서 와 계신 거 알지?”

어찌 모르겠는가.

“그럼 해원공이 왜 와 계신 줄도 알아?”

“그, 글쎄요?”

“사실 양육해 준 우후의 마지막 모습을 뵈러 온 것이야. 즉 죽은 후의 모습을 봐야 하는 것이지. 그런데…… 교살은 어떻지?”

죽은 후에 모습이야 다 그렇다지만 본능적으로 발버둥 치고 질식하느라 과히 좋은 모습은 아닐 터이다. 궁인은 생각보다 황급히, 제대로, 깨끗이 염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조금 귀찮아졌다.

“그래서 말인데, 아니지, 우리끼리 이야기인데 사실 형은 집행되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 일단 숨만 끊어지면 되는 거 아냐?”

“오, 오 대인?”

“짠~?”

진해는 당황하는 궁인을 향해 소매 속에서 작은 병을 꺼내 보였다. 예전에 제갈군무에게 홍련이의 알값으로 받은 약이었다. 제갈군무가 절대로 이것의 존재를 모르게 하라고 했던 그 약.

“허헉?! 대, 대인! 이런 걸 함부로 들고 오시면 큰일 납니다!”

“쉿! 자네나 조용히 해! 나라고 이러고 싶은 줄 알아!”

“그, 그럼?”

“우리 해원공 마마님이 슬퍼하니까 내가 이런 짓까지 하게 된 거잖아!”

“…….”

확실히 해원공과 영찰어사 오진해는 서로가 좋아 죽는 사이라고 했다. 성월공과도 그런 사이면서 해원공이랑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궁인은 그 비결이 참으로 궁금했지만 눈앞에 흔들리는 병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진해가 저렇게 자신하는 것 보면 효과가 확실한 약인 거 같아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독약이면 뭐 칠공에서 피를 토하는 정도일 것이고, 교살이면 혀가 음…… 그걸 음…….

궁인은 황제의 명과 지금 밖에 와 있는 해원공의 슬픔(이라고 쓰고 잘 보일 기회라고 읽었다) 사이에서 고민했다. 고민하던 궁인은 진해가 약병 밑에서 둘둘 말린 종이 뭉치를 흔들자 모르는 척 그걸 받아 펼쳤고, 일십백천만십만백만천만이 이어지는 무수한 나열의 숫자를 읽으며 마음을 정리했다. 역시 오 대인은 통이 크시구나, 라면서.

“허험! 소인은 잠깐 준비를 하고 오겠으니 대인께서 형의 집행을 지켜봐 주시지요!”

“이건 밖에 있는 사람들 몫.”

“천천~ 히 하셔도 되옵니다!”

진해가 방 안의 사람들, 밖의 사람들까지 입막음할 돈을 전표로 돌리자 궁인이 실쭉거리는 입술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하며 다른 이들을 데리고 방 밖으로 향했다. 막말로 목에 자국만 있고 숨만 끊어져 있으면 그리 크게 명을 어긴 것도 아니지 않은가. 설령 들킨다고 해도 영찰어사 오진해가 시킨 것이니 그가 책임질 것이고, 또 오진해의 뒤에는 해원공이 있으니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은 이가 아니면 굳이 이걸로 트집 잡지는 않을 터였다.

“오 어사. 어째서 해원공을 데려온 것이오.”

사마계는 밖에 해산이 와 있다는 말에 약간의 원망을 담아 진해를 바라보았다.

“그럼 오고 싶다는데 제가 어찌 말립니까……. 그것보다 대충 이야기 들으셨지요? 이걸 마시면 순식간에 끝이 납니다. 눈을 뜨면 아마, 새 세상이겠지요.”

“…….”

사마계는 진해가 내미는 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죽음을 받아들이긴 했으나 내심 목을 매는 게 겁이 나기도 했다. 고통이야 있겠지만 그래도 순식간에 끝난다니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사마계는 손을 뻗어 병을 받았고 짧게 눈을 감은 채 자신의 길지도 짧지도 않은 생을 반추했다.

“……해산이와 정려에게 미안하다고 전해 주세요.”

병을 막은 붉은 종이 마개를 벗기며 사마계가 작게 중얼거렸다.

“합에게도.”

그리고는 눈을 질끈 감으며 속에 든 것을 그대로 들이켜기 시작했다. 양이 얼마 되지 않아 순식간에 동이 났다. 사마계는 타는 듯한 감각에 양손으로 목을 움켜잡고 몸을 웅크렸다. 컥컥, 짧은 기침 소리가 몇 번 이어졌다. 목을 움켜잡던 손이 바닥을 긁다 짧게 피 섞인 기침을 했다. 흰옷에 점점이 붉은 방울이 생겼다. 핏발 선 눈이 진해를 잠깐 바라보는가 싶더니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진해는 사마계의 움직임이 멎자 매어 놓았던 줄을 풀어 사마계의 목에 매고 밖에 있던 궁인과 사망 확인을 위해 대기하던 태의를 불렀다.

“폐서인 사마씨, 확실히 숨이 끊어졌사옵니다.”

진해가 확인을 하고, 궁인이 확인을 하고, 태의가 확인을 해 서류를 꾸몄다. 궁인은 사마계가 생각보다 깨끗하고 빨리 숨이 끊어져 오싹한 기분으로 진해를 바라보았다. 이런 극약을 품고 궁을 활보하다니 어찌 보면 강심장이 따로 없었다. 기다리는 해원공을 위해 서둘러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혔다. 관에 넣을 때쯤 해산이 방으로 들어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돌려드리겠습니다, 우후.”

창백한 모습의, 그러나 비교적 깨끗해 마치 잠든 듯한 모습의 사마계를 지켜보던 해산이 소매 속에서 항상 지니고 다니던 구리 채찍을 꺼냈다. 월산과의 대련에서 져 낙심한 해산에게 우후가 몰래 감아 준 채찍이었다. 해산은 온기가 사라지는 손목을 들어 그것을 꼼꼼히 감아 준 뒤 배 위에 양손을 곱게 포개 주었다. 해산은 우는 대신 관을 따라가 시신이 홀대받지 않고 무사히 궁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초라한 수레가 궁을 나가자 망루 위에서 그 모습이 없어질 때까지 해산은 가만히 그걸 보고만 있었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더는 울지 않겠다는 듯이 자신을 길러 준 이가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 뒤에서 진해가 해산의 그런 모습을 한 점도 빠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황궁은 애 기를 곳이 못 돼.’

진해는 이번 일로 인해 중대한 교훈 한 가지를 얻었다.

* * *

“옛소.”

진해는 어조원으로 가 화석정군 앞에 상자를 집어 던졌다. 화석정군 양지서는 그 상자를 잡아 안을 본 뒤 다시 닫아 진해에게 돌려주었다.

“이건 이제 자네 것이야.”

“누가 그럼 사양할 줄 아나? 상자도 비싼 거더만.”

진해는 거절하지 않고 다시 받아 챙겼다. 그리고 뚱한 얼굴로 화석정군을 바라보았다. 유일청의 낮잠 시간인지 방 안이 조용했다. 옆방에서 알에 핏줄이 비춰 보인다고 좋아하는 소리가 들렸다. 진해는 경과보고도 할 겸 황제에게 예전에 유일청 사건을 해결하고 받은 포상권을 써서 홍련이 품은 알을 제갈군무에게 팔아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홍련이가 일단은 어조원의 새였기 때문이다 .

황제는 그 외에 다른 것을 원하는 듯했지만 진해는 그리 쉽게 줄 생각은 없었다. 아니, 절대로 순순히 내주지는 않을 터였다. 그리하여 진해는 본의 아니게 화석정군 이 작자와 공범자가 되는 길을 택한 것이다.

“그래서 자네는 어찌할 것이지? 자네의 답은 뭔가.”

“답 못 맞춰서 죽은 귀신이 들렸나. 왜 자꾸 답답하는지 모르겠네. 인생은 막타까지 쳐 봐야 아는 거 몰라? 아 댁은 반년 남았다 했지. 죄송, 죄송.”

“…….”

진해는 이제 볼 장 다 봤는지 예의 따위 집어치우고 무례하게 굴었다. 나름 체면을 차린 진해밖에 보지 못했던 화석정군은 진해의 허물없는 모습에 조금 당황한 듯했다.

“그런데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불량하게 앉은 채 귀를 후비던 진해가 화석정군에게 손가락을 튕기는 시늉을 했다.

“거, 상자 속에 왜 그런 걸 넣어 놓은 거요?”

진해는 상자를 열어 그대로 화석정군의 앞으로 쭉 밀었다. 상자는 미끄러지다 둘 사이에서 비스듬하게 멈췄다. 열린 상자 안에는 푹신한 솜과…… 잘 말린 벚꽃 한 송이가 들어 있었다 . 흰 꽃 한 송이가 들어 있었다. 누군가의 허벅지 안쪽에 핀 점을 닮은 하얀 꽃 한 송이가.

“있었으니까.”

화석정군은 미소를 입에 띤 채로 손을 뻗어 상자 가장자리를 어루만졌다. 행여 속에 든 마른 꽃잎 이 부서질까 봐 조심이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그리고 진해는 저 꽃이 어디에 있는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알고 있었다. 진해는 이 작자와 어른의 밤 이야기를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았지만, 꽃은 해산이나 지순과 동침한 자가 아니면 도저히 알 수 없는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랬다. 회순 황제와 지순 황태공이 천륜을 어기고 낳은 아이는 월산이 아니라 해산이었다.

앞서 말했지만 진해가 이 생각을 하게 된 건 태묘에서 지순 황태공의 초상화를 보고 난 후였다. 월산이 지순을 닮은 구석이 있으니 같은 핏줄인 해산도 지순을 닮은 구석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고, 반대로 두 사람의 출신이 달라져도 이 말은 성립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해산은 황가의 음인 핏줄 중 선황의 핏줄을 닮았고, 월산은 숙부인 지순을 닮았다. 정확히 말하면 지순과 회순이 형제인지라 그 둘의 공통점 중 음인이 닮을 수 있는 부분을 쏙 뺐다. 해산은 선황을 쏙 빼는 바람에 지순과는 조금 다른 방향의 얼굴이 되었고.

“원귀비 마마가 아시면 섭섭하시겠어 ?”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자세히 보면 원귀비를 닮은 점이 없는 것도 아니야. 연가의 핏줄이 살아 있다면 대조해서 찾을 수 있을지도.”

“없다는 거 알고 그런 거잖아.”

“자네가 이걸 가져오기까지는 확신하지 못했지만 믿지 않겠군. 그래서 이젠 어쩔 건가?”

닫혔다 열렸던 상자가 다시 닫혔다. 진해는 여전히 미소 짓고 있는 화석정군을 노려보다 픽 웃음 지었다. 진해가 그러고 있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밖에서 약간의 소란이 일었다. 어조원에서 화석정군과 진해를 안 보이게 감시하던 눈길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그건 댁이 알 필요 없잖아?”

진해가 휙 뒤를 돌아보자 문가에 어느 때보다도 냉랭한 표정으로 서 있는 성월공 월산을 볼 수 있었다. 진해는 상자를 옆구리에 끼고 일어나 건들거리며 월산에게 다가갔고, 스스럼없는 태도로 어깨를 쳤다. 월산이 눈만 굴려 진해를 노려보았다.

“너, 만약 거짓이면 여는 절대로―”

“이것 역시 내 알 바 아니지. 성월공 마마, 원하시는 진실은 눈앞에 있습니다. 저는 잠깐 정리를 해야 해서 이만 물러가 보고 나중에 두를 보내든지 하세요. 하지만 제가 당신을 부른 이유는 알 것이라 믿습니다.”

“…….”

진해는 월산과 양지서를 방에 둔 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하는 모습만 보면 꼭 어디 소풍이라도 온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월산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만약 진해의 말이 사실이라면, 저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은 대체 왜, 왜 이렇게까지 해야 했던 걸까.

진해의 말대로 답은 눈앞에 있었다. 월산은 단 한 번도 제대로 대화해 보지 못한, 자신의 좌부라고 알려져 있던 이의 앞에 조용히 자리 잡았다. 화석정군 역시 월산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지순의 핏줄이 아니면서 지순과 제법 닮은 안월산을.

어쩐지 이 순간이 되자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았다. 평생 갈고닦으리라 생각했던 독이, 결코 후회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마음이 자신의 손으로 운명을 뒤바꾼 아이의 앞에 서자 스르륵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문득 지순이 아이의 행복에 대해 이야기하던 것이 떠올랐다.

“묻겠다. 대답 여하에 따라 그대를, 네놈을 죽일 것이다.”

그리고 화석정군 양지서는 진해가 어째서 월산을 이 자리에 데려다 놓았는지 알아챘다. 진해는 월산을 단순히 복수를 하라거나 복수를 대리하게 하기 위해 데려다 놓은 게 아니었다. 일생의 원수를 두고도 이만큼 침착할 수 있는 아이였다. 생존을 위해서라지만 이렇게나 크게 세력을 키운 이였다.

“예, 전하. 하문하소서.”

진해는 안월산을 차기 황제로 생각하여 이 자리에 부른 것이었다. 만약 진해가 월산에게 입을 다물었다면 월산은 해산과 격렬히 경쟁했을 것이고, 아마도 질 확률이 높았었다. 억울하게 죽은 원귀비에 대한 동정과 적통이라는 명분, 강절곤과 동가대 등 원로들이 해산의 편을 들었을 테니까.

―한마디로 진해가 차기 보위를 이을 태자를 바꾸게 된 것이다.

월산의 물음에 양지서는 숨김없이 대답하였고, 월산 역시 모든 일의 전말을 알게 되었다. 그가 누구인지 확실히 안 순간 월산의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에 힘이 들어갔으나 월산은 큰 소리를 내거나 결코 눈물을 보이거나 하지 않았다.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기특하게 여기실 겁니다.”

그래도 저 말에는 참지 못하고 화석정군의 뺨을 때렸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월산은 화석정군에게서 모든 것을 얻고 난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남은 것은 다른 이에게서 되찾을 생각이었다.

* * *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황후의 건이 처리되자 신료들은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빠졌다. 사서를 기록하는 사관들은 이 말도 안 되는 일을 최대한 황실의 체면이 훼손되지 않게 적기 위해 골몰했고, 예부에서는 복위식과 그 외의 의례에 대해서, 기타 등등의 부서들도 이번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그리고 슬슬 태자를 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황후 자리가 사실상 공석이나 마찬가지가 되었고, 혹여 황상께서 지금 새 후사를 보신다고 해도 이미 관례를 치른 두 황손이 계시니 만일을 대비해도 늦지 않다는 의견이었다. 황제 역시 새 황후를 들일 생각이 없어 보였고.

어쨌거나,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모든 신료들이 원귀비 연씨를 복원하고 황후로 책봉하는 동시에 해원공을 원래 자리로 돌려놓는 일에 동의했다. 이 일이 끝나면 슬슬 태자를 정하기 위한 암투가 시작될 터였다. 본래라면 창명후 강절곤의 비호를 받으며 음인 황제의 혈통을 이은 성월공이 유리하겠지만 이젠 월국의 완벽한 적통을 이은 해원공이 유리했다. 게다가 원귀비, 아니 이젠 황후가 될 연광이 장강 강가와 긴밀한 사이였다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중요한 건 황제의 결단이었지만 사실상 태자는 해원공으로 정해진 듯했다. 정작 해원공은 자신의 출신이 밝혀지기 이전보다 더욱 냉담한 얼굴로 신료들을 대했지만.

그리고 마침내, 원귀비 연광의 황후 책봉식이 다가왔다. 예부에서는 이례적으로 도성을 가로지르는 혼례 행렬을 열 것과 그 혼례 행렬을 해원공이 이끌기를 주장했다. 예부상서 동가대 왈, 자신이 들은 바에 의하면 백성들이 온갖 의혹에 휩싸여 생업조차 미뤄 놓은 판이라 추문을 가리지 말고 차라리 대놓고 해결하자는 것이었다.

참고로 동가대는 이 소문을 아들인 동십사에게, 동십사는 의형제인 오 모 씨에게 들었다고 했다.

그리하여 해원공 본인의 의견은 반영하지 않은 채로 신랑이 없는 혼례식이 준비되었다. 해원공은 혼례복은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의장을 갖췄고 백마 위에서 붉은 천으로 감싼 위패를 실은 가마를 호송해야만 했다. 출발은 도성 밖에서 하기로 했다.

“……이런다고 죽은 이가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그에게 보상이 되는 것도 아니거늘.”

해원공은 저를 보며 얼굴을 붉히는 이들을 외면한 채 차갑게 읊조렸다. 궁인들은 해원공의 표정을 좋게 하기 위해 눈치를 보았으나 안타깝게도 해원공과 단 한 명도 친하게 지낸 궁인이 없었다. 황후궁의 궁인들은 사실상 감시를 위한 이들이었으니 친할 턱이 없었고.

게다가 이상하게 이 며칠간 해원공의 정인인 오진해의 행방이 묘연했다. 화석정군과 어조원에서 이야기를 나눈 걸 본 이는 있으나 그 뒤로는 입궁한 걸 본 이가 없다는 것이다. 진해가 보고 싶어진 해산이 창명후 저택에 찾아가도 오리무중이었다. 오히려 강백서가 해산에게 진해의 행방을 물어 해산은 임기응변으로 진해의 행방을 얼버무렸다. 정미려는 뭔가 알고 있는 눈치였으나…….

“마마. 때가 되었사옵니다.”

“음.”

혼례 행렬이었으나 떠들썩하지 않고 엄숙했다. 황가의 것이지만 죽은 이를 위한 것이라 더욱 그랬다. 누군가 해원공은 적장자이니 자색 의장을 갖추어야 한다고 했으나 해원공이 거부했다. 해원공이 코웃음 치며 나는 이전에도 적장자였다고 말하니 말한 이가 도리어 할 말이 없었다. 해산은 이 기쁜 날에도 그저 공허하기만 했다. 앞으로도 이 공허함을 끌어안은 채 생을 살아가야 한다 생각하니 눈앞이 아득하기만 했다.

“해야……. 대체 어디 있느냐. 왜 너마저 내 곁에 없는 것이냐.”

해산은 정말로 진해가 보고 싶었다. 진해의 또랑또랑한 눈동자와 답지 않게 포근한 향내, 딴딴한 몸을 끌어안고, 혹은 그 몸에 끌어안긴 채 아무 생각 않고 그저 쉬고 싶었다. 차라리 정미려와 삼랑과 함께 진해를 구하러 올 때가 즐거웠다. 한 대씩 쥐어박고 싶긴 했으나 그들은 적어도 해산과 이야기가 통했다. 진해라는 공통점을 두고 밀접하게 지낼 수 있었다.

“…….”

만약 태자가 되면, 동가대가 고한 대로 태자가 되면 아마 그들과도 영영 이별일 터였다. 태자라는 지엄한 신분으로 정군을 다른 이들과 나눈다는 건 감히 입에도 올릴 수 없는 말이었고, 아마 진해도 더는 진해라는 이름을 쓸 수 없을 터였다.

안월산? 예전에는 그가 밉고 질투가 나 견딜 수 없었다. 그가 저보다 작은 체구임에도 당당한 것이 부러워 샘이 났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자신이 명백한 적통이라 그런 것이 아니라 이제는 그딴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아서였다. 누가 뭐래도 안해산은 안해산이었다. 월산과 그는 달랐고 해산은 월산이 우수한 대신 자신보다 성질이 더럽다는 사실을 알았다. 진해만 봐도 월산보다 해산이 좋다지 않는가 . 역시 사람은 성격이 좋아야 했다.

해산이 여러 가지 상념에 잠긴 채 무감각한 얼굴로 말에 타고 있는 동안 혼례 행렬은 어느덧 황궁 앞까지 도달했다. 황궁의 문 앞은 여러 거리를 합쳐 놓은 것보다 커다랬는데 도성의 백성들이 이 혼례를 보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와 있었다. 엄숙한 분위기의 관원들 탓에 요란하진 않았지만 수군거림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제 곧 문이 열리고 궁으로 들어가 신랑 없는 혼례를 치르고, 태묘에 황후로 진봉된 위패를 올리면 되었다. 그리고 태묘에서 그대로 해원공을 새롭게 적장자로 복원시키는 의례를 행할 터였다. 자신은 그대로인데 단지 그것만으로 주변이 확 달라지게 될 터였다. 해산 자신이 태자 따위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 터였고, 해산 그가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태자 자리에 침을 흘리는 자들이 그를 그 자리로 밀어 넣을 터였다. 얼굴도 모르는 양인 자식들을 마구 들이밀겠지.

[펑――――――!!]

그러던 그때, 어디선가 큰 대포 소리가 들렸다. 공격용이 아닌 황궁에서 예포로 쓰는 대포의 소리였다.

“마마를 보호해라!!”

“가마를 지켜라!!”

시위들이 즉시 칼을 뽑고 해산과 가마를 둘러쌌다. 반면에 해산의 얼굴에서 살며시 미소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거기 잠깐 나 좀 보실까!!”

아니나 다를까, 망루 위에서 진해가 행렬을 내려다보며 빽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진해는 장식이 과하다 못해 광대처럼 보일 정도로 오색찬란한 옷을 입고 머리에도 커다란 천 방울을 두 개나 달고 있었다. 광대처럼이 아니라 광대 그 자체였다. 그리고 진해가 길게 휘파람을 불자 골목 구석마다 징 소리가 울려 퍼졌다. 구경꾼들이 어리둥절하며 주변을 둘러보자 곧이어 요란한 나팔소리와 함께 주변 건물의 지붕에서 진해와 비슷한 복장을 한 이들이 마구 꽃잎을 뿌려 댔다.

“혼례 축하인가?”

“하긴 혼례식에는 역시 광대가 있어야지!”

“자, 잠깐만 이거?!”

그리고 진해가 망루에서 멋지게 밧줄을 타고 내려오며 뭔가를 가득 뿌렸다. 색종이와 다른 종이들은 그걸 주워 든 이들의 눈을 커다랗게 만들었다. 지붕 위에서 진해와 같은 것을 뿌리던 이들이 가볍게 지붕에서 뛰어내려 구경꾼들 사이로, 가마 행렬 앞으로 뛰어왔다.

“돈이다!!!!!”

맨 처음 종이를 주워 든 이가 크게 소리치자 주변이 잠깐 조용해졌다. 악단인지 광대패인지 하는 이들이 연주하는 음악만 주변에 흥겹게 울려 퍼졌다. 그것도 잠시, 주변이 그들이 뿌리는 종이를 줍기 위해 소란해졌다. 광대패 중 한 사람이 혼례 행렬에 한 움큼 뿌리자 구경꾼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가마 쪽으로 몰려갔다.

“가, 가까이 오지 마라!!”

정말 사람이 들었다면 몰라도 안에 든 건 고작 위패일 뿐이었다. 여러 가지 의미가 담긴 위패긴 했지만 산 사람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게다가 이 행렬은 혼례였다. 혼례에서 피를 보는 것만큼이나 부정한 일은 없었다. 따라서 시위들은 뽑았던 칼을 집어넣고 칼집으로 엉망진창이 된 구경꾼들을 밀어낼 수밖에 없다는 말이었다. 해산 역시 혼란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아이고, 저 좀 태워 주세요!”

자신의 발에 매달리다시피 한 진해와 눈이 마주쳤다. 진해는 저기서부터 여기까지 구경꾼들 사이를 헤치느라 광대가 아니라 광대 거지쯤 되는 몰골이 되어 있었다. 해산과 눈이 마주치자 진해가 환하게 웃었다. 해산의 머릿속에 순간 이 혼례가 얼마나 중요한지, 이 혼례가 치러진 뒤 변할 자신의 위치 등이 스쳐 지나갔다.

“저 말 못 타요!”

하지만 진해가 사람들의 파도 속에 휘청이자 고민은 끝이 났다. 해산은 팔을 뻗어 진해를 잡아 올렸고, 자신의 앞에 태웠다. 그리고,

“이랴!!”

누가 뭐라 하지도 않았는데 힘껏 말의 배를 걷어찼다. 말이 크게 울며 일어서자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고, 그것은 시위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해산은 그대로 말을 돌려 자신이 거쳐 온 길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얀 말 위에 진해를 태운 채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행렬을 소란스럽게 만들었던 광대패들은 어느덧 다 사라지고 성문 앞에는 흑월대의 군복을 갖춘 이들이 정식으로 사자춤이며 용춤을 추며 가마를 환영하고 있었다. 예포 소리가 연이어 울리며 성문이 열리자 돈을 줍던 이들이 그제야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당황한 시위들을 이끈 건 문에서 백마를 타고 나온 성월공 안월산이었다. 월산은 가마 앞에 도달한 뒤 말에서 내려 가마를 향해 절을 했고, 잠깐 동안 그대로 멈춰 있었다.

“우후를 모셔라!”

그리고 절이 끝난 뒤 월산은 당황한 이들을 싹 무시한 채 그대로 가마와 행렬을 궁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해원공이 사라졌지만 누구도 그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왜냐면 백마를 탄 월산이 태자의 연금빛 의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 * *

“역시 내 정군이 되어라.”

화석정군과의 대담이 끝난 뒤 월산이 말했다. 진해는 월산의 손에 들린 술잔을 뺏어 멀리 화단에 쏟아 버렸다.

“여는 소해 네게 죄를 지었어. 평생 지울 수 없는 죄를. 그걸 갚을 수 있게 해 줘. 내 정군이 되어서 월국에서 가장 귀한 양인이 되어라.”

“안 돼.”

“네 정인들 때문이냐? 괜찮다. 다 궁에 들여서 같이 살아도.”

“아이고, 이 상황에서 또 무슨 개족보를 만들려고 그래? 됐네요, 됐어. 정상 참작이라는 것도 몰라? 그리고 내가 공짜로 널 용서해 준대? 미안하지만 넌 내 뒤처리를 해 줘야겠어. 진짜로 목숨 걸고 날 보호해 줘야겠다고!”

어느덧 월산의 뺨이 축축해져 있었다. 평소와 달리 두는 곁에 자리하지 않았다. 진해는 두 역시 월산의 곁에서 이야기를 들었음을 눈치챘다. 두는 월산이 살기 위해 온갖 짓을 했었다고 했다. 천륜을 어긴 자신이 살기 위해서.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월산이 아무것도 모르고 무지한 채 평화롭고 우둔하게 산다고 생각하던 해산이야말로 저주받은 출생의 장본인이었다. 월산이 자결을 기도해야 했던 것도, 진해에게 파각사를 보내야 했던 것도 모두 다 필요 없었던 일이었다.

“해국에도 아비 노릇 못 하는 놈이 있었거든. 그래서 내가 말이야. 그 집에서 예쁜이들을 싹 다 훔쳐 왔단 말이지.”

“…….”

자신이 생전 처음 사랑했던 따스한 이를 상처 입힐 이유가 전혀 없었다.

“여가 너를, 내가 너를……. 정말로 소해 너를 좋아했는데…….”

그냥 자신만 죽었다 살아났으면 진해는 지금과 다른 생을 살 수도 있었다. 적어도 자신에게 좀 더 좋은 기억만을 가질 수 있었다. 아니, 이것뿐만이 아니다. 자신만 조용히 살고자 했으면 차라리 다 포기하고 화석정군처럼 절에 들어가는 시늉이라도 했으면 자신이 흘리게 한 피들, 그 수많은 목숨은 살 수 있었다.

“알아. 하지만 넌 최선을 다했어. 왜 안 어울리게 울고 그래!”

월산은 얼굴을 가리고 있어 진해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다만 진해가 자신의 곁으로 와 자신을 끌어안아 주는 것만 느낄 수 있었다. 우유를 닮은 향. 한때는 자신의 양인이었던 향. 진해의 향은 월산이 행복했던 추억이었다.

“소월, 가까이 있진 못하지만, 너를 내 예쁜이 시켜 주진 못하지만 그래도, 적어도 우린 친구야. 내 목만 안 조르면 네 취향에 대해 좀 더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도 있겠지.”

진해가 그렇고말고라며 말하며 어깨를 두드리는 동안 월산이 울면서 웃음 지었다. 이제 와 되돌리기에 늦었다는 걸 월산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되돌리려고 해도 모두 다 지나가 버린 일이라는 걸.

“그러니까 네가 그치보다 월국을 더 끝장나게 다스려 버려. 다시는 이런 일이 안 생기게 좋은 나라로 만들어 줘.”

“……그자에게만은 지지 않겠다. 나라도, 가정도.”

다시 사랑하기 힘들지는 몰라도 자신의 옆에 설 이에겐 최선을 다하리라. 천륜을 어기고 황위에 오른 이에게 지지 않을 통치를 하리라. 이제는 월국을 부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부순 그 자리 위에서 더 크고 풍성하게 자라나게 하리라. 월산은 진해와 이별하며 그렇게 마음먹었다. 이 출생의 비밀은 자신이 무덤까지 갖고 가리라 결심하면서.

* * *

구경꾼들이 가마를 따라 이동한 덕에 거리는 한산했다. 해산이 말을 달려도 아무것도 방해하는 것이 없었다. 성문을 지키던 이들이 해산이 말을 타고 달리자 잠깐 주춤했으나 전속력으로 달린 탓에 차마 잡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해산은 그 후로도 한참 동안 말을 타고 달려 인가가 드문 탁 트인 농지 한가운데 멈춰 섰다.

가슴이 뻥 뚫린 것 같았다. 가슴속에서 알 수 없는 것이 벅차올라 터질 것만 같았다. 살면서 처음으로 자기 자신의 의지로 밖으로 뛰쳐나온 것이다. 뒤의 일이 신경 쓰이지 않는 것도 처음이었다. 될 대로 되라지. 해산은 관례를 치르기 전까지 줄곧 신경 썼던 부황이라거나 신료들의 눈빛 따위가 지금은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게 신기했다.

“우웩―”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다 제 품에 있는 진해와 만났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으으, 속이 뒤집힐 것 같아요……. 다들 그냥 쓱쓱 잘 타고 다녀서 아무 생각 없었는데 으억…….”

진해가 옆에 있어 준다면 앞으로 또 무슨 역경이 닥치든 헤쳐 나갈 수 있을 것 같은 근거 없는 용기가 솟았다. 첫 만남은 괴이하기 짝이 없었지만 마지막이 그렇게 되리라는 법은 없었다. 예전에 진해가 말했던 것처럼 첫 시작이 어떻든 끝을 잘 마무리하면 다 잘 된 것이었다.

“해야.”

추수의 계절이 무르익어 온통 금빛으로 물든 어느 논지 한가운데서 붉은 옷을 입은 해산이 말에서 내렸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고, 산뜻한 바람이 불어 금빛 이삭 위를 물결치고 있었다. 관에 고정하지 않은 해산의 머리 몇 가닥이 함께 흔들렸다. 붉은 옷깃이 크게 한 번 펄럭였다.

“아니, 영찰어사 오진해.”

“왜, 왜 그러세요, 갑자기?”

진중하게, 그러나 하나도 어둡지 않은 목소리로 해산이 진해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해산의 몸이 내려가자 진해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해산은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댄 채 한 손을 말 위로 향했다. 해산의 가슴속 가득 찬 설렘을 담아 진해를 바라보았다.

“나와 혼인해 평생 함께 살아 주겠는가?”

황족의 혼례는 중매인과 산 같은 예물과 사주단자, 정치 기타 등등이 개입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런 것 따위 아무 상관 없었다. 해산 자신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행동이었다. 사가에서 무릎을 꿇는지 어쩌는지도 알 수 없었다.

“헛, 어헛…….”

그리고 해산의 진심 어린 청혼을 받은 진해가 처음으로 말문이 막혔다. 해산이 아는 오진해는 온갖 야단법석을 떨며 청혼을 승낙하고 그 핑계로 낯부끄러운 짓을 일삼을 이였다. 그런데 그럴 진해가 말을 잃고 눈만 커다랗게 뜬 채로 해산을 보고 있었다. 해산은 긍정의 답을 받지 않았음에도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나랑요?”

“그래.”

“진짜 나랑?”

“그럼 내가 다른 이를 정군 삼길 원하느냐?”

“싫어!”

“그럼 어서 그런다고 해. 내가 아는 오진해는 그런 사람이다.”

“하지만…….”

그러나 진해가 계속 뜸을 들이자 해산은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진해가 뭔가 이유가 있어 그래 보였던 것이다.

“저, 저……. 헤헤, 저 사실 영찰어사 때려치워서 지금 백순데……. 헤헤…….”

“…….”

진해 이 녀석은 지금 해산이 오진해가 아니라 ‘영찰어사’ 오진해에게 청혼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듯했다! 잠깐 두 사람 사이에 적막한 기류가 흘렀다. 진해를 얌전히 태우고 있던 백마가 민망한지 작게 푸르릉 콧소리를 냈다. 그러다가 돌연,

[히힝!]

“아이고!”

못 참겠다는 듯 크게 몸을 털었고 말을 탈 줄 모르는 진해가 그대로 말 위에서 고꾸라졌다. 진해가 낙마하는 것을 본 해산이 바로 몸을 일으켰고, 그대로 진해를 받아 안았다. 어쩌다 보니 진해의 턱이 해산의 가슴 사이에 폭 안착했다.

“내가 먹여 살려 줄 테니 어서 좋다고 말하거라. 다른 이들을 주렁주렁 달고 살아도 된다고 말해 주는 너그러운 이는 나밖에 없어.”

“진짜 괜찮아요? 내가 변태라도?”

해산이 아주 잠깐 멈칫했다.

“……나도 나쁘지 않으니까.”

“네? 뭐라구요?”

“뭘 해도 용서해 줄 테니 괜찮다고 했다!”

해산과 진해가 승낙을 하니 안 하니 공방을 벌이는 동안 어느덧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잠춘동 빈민가에서 우연히 마주쳐 괴이한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이 지금은 서로의 향을 맡고, 서로를 끌어안으면서 함께 미래를 약속하고 있었다.

거절할 핑계가 없어진, 사실은 처음부터 거절할 생각이 없었던 진해가 입을 다물자 해산도 조용히 진해를 바라보았다. 싸아아― 부는 가을바람 소리가 두 사람 주변을 맴돌았다. 어느덧 이삭이 노랗게 주홍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이 뜨겁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해가 가장 밝게 지는 순간 진해가 발을 돋워 해산의 입에 입을 맞췄다. 해산 역시 진해의 몸을 끌어안고 진해의 입에 입을 맞췄다.

일국의 태자가 뒤바뀌게 된 사건은 이렇게 끝을 맞이하게 되었다.

* * *

하지만 진해와 예쁜이들의 인생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었으니.

“야, 네가 왜 여기 있어!?”

“아, 씨발…….”

기세를 몰아 말을 타고 근처를 여행하기로 했던 해산과 진해는 제법 멀리 떨어진 여각에서 정말로 생각지도 못한 인물을 만나게 되었다.

“이런 씹!”

“악!”

뜨끈뜨끈 김이 피어오르던 면을 흡입하려던 삼랑은 제 앞에 선 진해와 해산을 보자마자 상을 걷어차고 잽싸게 달아나기 시작했다.

“잠깐, 그때부터 며칠 지났지?! 일, 이, 삼― 해, 해산 도련님! 저거 잡아야 해요! 지금 회임 초기야!!”

“뭐?! 해야, 너!! 언제 또 손을 댔느냐!! 언제!!”

“아니 그런 것보다 임신 초긴데 여기서 이러고 있다니까요?! 삼랑아!! 한삼랑!! 거기 안 서!! 너 왜 집에 안 있고 여기서 이러고 있어!! 술도 마셨네!?”

진해와 해산은 온 여각 상을 다 뒤집어엎으며 도망치는 삼랑을 쫓아가며 입씨름을 했다. 해산은 뭐가 뭔지 몰랐지만 일단 잡아야 한다는 진해의 부르짖음에 선천적인 무골의 힘을 뼛속 깊이 발휘하여 따라 뛰던 진해가 헉헉거리며 뒤처질 정도로 무섭게 추격하기 시작했다.

“씨바알!! 알아서 떨어져 나왔더니 왜 쫓아오고 지랄이야!!!”

“진해의 아이라면 내 아이기도 하니까 그렇지!!!!”

“악, 쫓아오지 마, 좀!!!”

“허억, 허억, 삼랑아, 초기에, 허억, 안정을―!!”

앞서 말했다시피 인생의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었다. 진해는 젊었고, 해산도 젊었으며, 삼랑도, 미려도 아직 파릇파릇한 청춘이었다. 태자가 뒤바뀐 이야기는 끝이 났지만 인생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적어도 후에 대를 이어 어사로 이름을 날린 강교오의 기록에 의하자면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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