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태자사건
7권
차 례
* * *
6부 죄인 오진해 (2)
7부 예비 정군 오진해
6부 죄인 오진해 (2)
“여는 네가 죽기를 바랐다.”
끔찍한 기억의 파도에 잔뜩 움츠러들어 있는 동안 월산은 진해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달빛이 아스라이 내려앉은 후원을 보는 얼굴은 그야말로 평온 그 자체였다. 그의 그림자에 얼룩진 채 부들부들 떠는 진해와 무척 대조적이었다.
“동시에 네가 죽지 않기를 바랐지.”
그런 진해의 떨림을 감지한 것처럼 월산은 뒤로 돌아 진해에게 다가왔다. 덜덜 떠는 진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미소 짓다가, 곧 울 것처럼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 찌푸림도 남들보다는 농도가 옅은 것이라 눈앞의 진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여는 네가 여와 함께 죽기를 바랐고, 동시에 너만은 살기를 바랐어.”
진해보다 손가락 두세 마디는 작은 월산이 거친 손을 제 손으로 그러쥐며 진해의 이마에 제 이마를 아프지 않게 갖다 댔다. 식은땀에 젖은 이마에 서늘한 이마가 닿았다. 서로의 숨이 가볍게 뒤섞였다.
“소해, 그거 아느냐? 네게 파각사를 보낸 그 순간, 여는 독을 마셨다. 여는 더는 살고 싶지 않았지만 네게는 어마어마하게 미련이 남더구나. 그만큼 네가 소중했다. 함께 죽고 싶었는데 네가 열심히 사는 모습을 떠올리니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어. 하하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니,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지.”
덜덜 떨기만 하던 진해는 월산이 웃음과 함께 흘린 사실에 떨림이 뚝 멎었다. 지금 자신이 들은 게 사실이 맞는지 되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월산이 부드럽게 웃으며 이마를 비비지만 않았어도 틀림없이 그랬을 터였다.
참으로 어마어마한 추문이었다. 한낱 제후의 자손이 자결을 시도해도 도성이 발칵 뒤집힐 텐데 황손이 자결을 기도했다니. 진해는 너무나 엄청난 사실에 정신이 멍해졌다. 진해의 머릿속에서 맑게 웃고 있던 소월이 그제야 눈앞의 성월공과 이어지는 듯했다.
“그, 그럼, 그럼 왜 다시 찾질 않았어?”
어쨌거나 안월산은 멀쩡히 살아 지금 진해의 눈앞에 서 있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그도 살고, 진해도 살았으니 당연히 진해를 다시 찾아와야만 했다.
“살았으니까.”
그러나 안월산은 진해가 이해하지 못할 답을 했다. 마주 본 눈동자에 든 건 칠흑보다도 검고, 깊은 어둠이었다.
“여가 살았으니까.”
“뭐……?”
“여가 죽고 네가 사는 게 제일 좋았지. 하지만 더러운 하늘은 이 몸을 살려 놓았어. 그렇다면 차라리 너를 잊는 것이 너를 위하는 길이었지. 그래서 여는 너의 생사를 묻지 않았다. 네가 살아 있다면 너를 수렁으로 끌고 갈 것 같아 다시는 너를 찾지 않았지.”
“뭐야, 그게!”
진해는 알면 알수록 이해할 수 없는 월산의 말에 소름이 끼쳤다. 파각의 여파로 타격을 입은 건 진해뿐만이 아니었다. 어쩌면 안월산이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순간 진해가 알던 소월은 죽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내가 알아듣게 말해! 왜 내가 모르는 말만 하는 거야! 그 뒤로 내가 얼마나, 얼마나 변태 새끼가 되었는지 네가 알기나 해!”
“후후, 그렇구나.”
“그렇구나는 뭐가 그렇구나야! 왜 그랬어! 왜 자결하려고 했어! 왜 죽으려 했어! 나한테 파각사를 보냈으면 잘 살았어야지, 왜 죽으려고 해서, 왜 그 말을 해서 나를 이상하게 해, 왜!”
진해보다도 다섯 살이나 어린 소월이, 그 어린것이 스스로 죽음을 결심하려면 대체 얼마나 큰일이 있어야만 할까. 진해는 황자가 자결을 기도했다는 것보다도 어디서 잘 먹고 잘살겠거니 여겼던 제 첫사랑이 자결 기도를 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물렁물렁한 진해의 성정은 자결을 기도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그를 온전히 원망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어찌 되었든 그 역시 진해에게 진지했다는 말 아닌가.
“그럼 너는 안 죽고 살 수 있겠느냐?”
“안 죽고 못 살건 또 뭐람! 얼마나 대~ 단한 이유로 잘나신 성월공이 죽으려 했는지 이야기나 들어 봅시다!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면 파각사 보낸 것도 없던 거로 쳐줄게!”
“그 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느냐?”
“내가 댁인 줄 아쇼! 설령 후회하더라도 그것 가지고 찌질거리지는 않으니까 걱정 마시지!”
해산에게 차인 뒤로 술만 퍼마시고 찌질거리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위통으로 쓰러졌던 게 진해라는 인간이었다.
“좋아. 하지만 이야기에 앞서 말하는데 입단속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거다. 여가 네게 이 이야기를 했다는 게 발설되는 날에는 여도 너를 지켜 주기 힘들 수가 있으니까.”
“……응?”
처음에는 이야기해 보라며 큰 소리 땅땅 쳤던 진해였지만 월산이 빙긋 웃으며 제 목숨 이야기를 하자 갑자기 모골이 송연해졌다. 적통 황자인 해원공을 압도할 정도로 황위에 가까운 성월공이 지켜 주지 못한다니, 대체 얼마나 심각하고 중요한 이야기이기에―
“자, 잠깐!”
한 입으로 두말하기는 그랬지만 진해는 웬만하면 질긴 목숨 끝까지 이어 가고 싶었다. 목숨이 있어야 저 좋다고 달라붙는 예쁜 것들을 귀여워하고 예뻐해 주고 오냐오냐해 주고 사랑해 줄 수 있었다!
“내 아버지, 여를 낳은 황태공 지순은 여를 낳은 날 자결했다.”
“―헉!”
“그리고 여는 네게 파각사를 보내기 일주일 전에 그 사실을 알게 되었지. 출가하신 아버지를 제하면 아바마마의 사람이 없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았어. 아바마마의 유부라는 자가 내게 그 사실을 알려 주더구나. 나를 위해서라고 했는데 하하, 어리석었지. 차라리 끝까지 숨겼으면 좋았을 것을.”
그리고 진해는 월산이 어째서 이 사실이 새면 자신을 지켜 줄 수 없을 거라 했는지 이해하고 말았다. 진해의 머릿속에 유일청을 쓰다듬으며 요절한 이들에 대해 안타깝게 이야기하던 황제 회순의 얼굴이 떠올랐다. 황태공 지순은 황제에게 자기 자리를 양보한 것으로 유명한 이였다. 잘은 몰랐지만 만약 사이가 나빴다면 황위를 순순히 양보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런 빌어먹을~~~!! 성월공이 자결 기도 했던 거랑 비교도 안 되는 일급 기밀이잖아!!!!’
이때까지 아는 사람이 없는 걸 보면 황제가 나서서 입막음시킨 게 분명했다. 진해는 어째서 성월공 주변에 친인척이 하나도 없는지 궁금했는데 황태공이 자결했다는 소리를 듣는 순간 모든 것이 번개처럼 파바박 정렬되는 듯했다.
황제는 성월공에게 우부가 죽은 걸 숨기고 싶었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얼마 남지 않은 화석정군의 혈육들도 도성 밖으로 치웠으며 성월공의 유부도 성월공에게서 떼어 놓았다. 그것만으로도 안심이 안 돼서 아예 황후에게 성월공을 맡기기까지 했다. 그렇게까지 했는데 만약 이 사실을 한낱 육품 관리인 진해가 알았다는 사실을 눈치챈다면…….
‘죽는다, 분명히 죽는다! 해산 도련님의 진위를 밝힌답시고 나댔을 때랑 달리 진짜로 죽일 거야! 자객이든 독이든 무슨 수를 써서든 황상은 한다면 하는 사람이야!’
황제가 좌부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지만 진해는 회순이 그렇게 만만한 인물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황손이라 황위에 오르고, 해국이 억지를 써서 황제가 되었다지만 그가 능력이 없었다면 조정 신료들이 그를 순순히 인정했을 리 없었다.
역병이 터지자마자 그가 설치한 구호청이며 생존자들을 수습한 구호책 등이 그의 수완을 능히 짐작하게 했다. 또한 역병이 퍼지는 동안 쥐도 새도 없이 사라진 그의 정적들 역시 그가 탁월한 황제라는 걸 느끼게 했다. 해국이 황후가 냉대받아도 찍소리 하지 못하는 것도 황제가 봉국들에게 상벌을 번갈아 가며 그들을 손에 넣고 굴려서 그런 것이기도 했다.
“후후, 겁먹었느냐?”
“……안 먹으면 그게, 사람인가?!”
“넌 언제 봐도 귀엽구나.”
월산은 진해가 허옇게 질리자 이젠 보통 사람들처럼 방긋 미소 지었다. 진해는 그 순간 월산이 어찌나 얄밉던지 달려들어 하얀 뺨을 떡처럼 쭉 늘여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월산은 황자였다. 황자였다, 빌어먹을, 황자였다!
“왜 자결하셨는지도 알려 줄까?”
진해가 두려움과 분노 그 사이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동안 월산이 진해의 턱을 손끝으로 들어 올렸다. 다른 손은 진해의 허리에 감아 바짝 잡아당겼다. 순식간에 진해의 샅과 그의 샅이 맞닿았다. 생기 없던 눈동자가 진해의 향에 젖자 둔탁하게 윤이 났다. 무섭게도, 월산은 진해를 곤경에 몰아넣을수록 즐거워하고 있는 듯했다. 어쩌면 월산은 아직도 진해와 함께 죽기를 희망하는지도 몰랐다.
“으, 알, 아니, 안 알, 아니, 알려, 아니 안 알려 줘도……!”
“여도 이참에 다 알려 주면 참으로 재미있겠다만, 불청객이 찾아왔구나.”
하늘이 진해를 가엽게 여기셨는지 이번에야말로 골로 간다는 두려움에 달달 떨고 있던 진해에게 구원의 손길이 내려왔다. 월산은 진해와 숨결을 나누나 눈만 굴려 후원 언저리를 바라보았다. 혈월대의 우두머리라는 이가 그늘에 몸을 숨기듯이 시립해 있었다. 월산을 어지간히 떠받드는지 덤덤한 표정 가운데 약간의 두려움이 떠 있었다.
“……시간은 오늘만 있는 게 아니니까.”
월산은 그를 흘끗 바라보다 가볍게 진해의 입에 입을 맞췄다. 진해는 여러 가지 온갖 복잡한 상념에 휩싸여 있다 초겨울의 매화처럼 향기롭게 피어나는 음인의 향기에 저도 모르게 눈이 가늘어졌다. 예전처럼 보드랍고 향기로운 입술이었다.
“여는 너를 놓아주었지만 너는 다시 여의 앞에 섰지. 여와 이어지면 넌 후회하게 될 거다. 지옥에 떨어지겠지.”
“……지옥에 떨어지고 말고는 댁이 정하는 게 아니지요.”
“후후, 그래. 너는 그런 점이 좋았어. 처음 봤을 때도 여에게 그런 식으로 대드는 놈은 처음이라 신선하기 짝이 없었지.”
머릿속에서는 월산을 밀어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진해는 우부가 자결하고, 좌부는 출가하고, 자신 역시도 자결하려 했었다는 이를 차마 밀어내지 못했다. 자결 기도 탓인지 파각 탓인지는 몰라도 뭔가의 결함이 생긴 월산에게 모질게 굴 수가 없었다.
물론 자신의 고통을 생각하면 월산의 뺨을 쳐도 백 번은 쳤다. 하지만 오진해라는 인물은 제 밥그릇 뺏는 놈은 물어뜯어도, 저 좋다는 이에겐 제 밥을 갖다 바치는 괴상망측한 놈이었다. 예쁜이들의 엉덩이를 실컷 때리고 난 뒤에는 바람 한 줌에 날려갈세라 오냐오냐하는 것이 오진해라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냐.”
월산이 저를 아는 체를 하자 혈월대의 우두머리는 그제야 월산의 앞에 다가와 무릎 꿇었다. 무릎 한쪽과 주먹을 바닥에 댄 채 머리를 조아려 완벽히 복종을 표했다.
“고산패자가 나타났습니다.”
“뭐?! 뭐가 나타나?!”
하지만 그의 말에 답한 건 월산이 아니라 진해였다. 진해가 아는 고산패자는 지금―
“가자.”
당황한 진해와 달리 월산은 가타부타할 것 없이 정자 아래로 내려섰다. 진해도 고산패자라는 말에 황급히 그를 따라나섰다. 설마 고산패자를 자칭하는 인간이 나타난 걸까. 제갈군무의 귀찮은 성질머리를 생각하면 그와 대적하기 싫어서라도 자칭하는 이가 없을 텐데. 월산의 뒤를 따라가며 진해의 머릿속에서 온갖 가능성이 휘몰아쳤다.
* * *
“창명후는?”
“채비 중이라고 합니다.”
“먼저 가자.”
“예.”
“저, 저기 잠깐만, 그러니까 고산패자가 어디 나타난 건데? 응? 그, 고산패자라는 건 대~ 단한 거잖아? 나도 관료니까 알아야, 헤헤, 하지 않, 을까?”
저 고산패자가 자기가 아는 그 고산패자인지를 알기 위해 진해는 조금 전까지 애틋하고 복잡했던 감정을 저 멀리 치워 버리고 평소의 발랑 까진 진해로 돌아왔다. 두 손을 비빌 듯이 월산에게 다가붙어 애교 있게 웃어 보이자 월산이 그 자리에 뚝 멈춰 섰다. 혈월대의 우두머리는 엄청나게 놀란 표정이었다.
“고해라.”
“아, 예.”
그리고 월산이 자신에게 정보를 거리낌 없이 나눠 주는 모습을 바라보며 진해는 자신이 역시 세기의 미남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그렇지 않으면 월산이 저에게 미련을 못 버린 것은 또 무엇이며, 이렇게 아무런 대가 없이 정보를 나눠 줄 리 없었다. 진해는 일단은 해원공 측의 사람인 것이다.
“고산패자가 황궁에 나타난 것이 지금으로부터 한 시진 전이었습니다. 고산패자라고 칭하는 자가 갑자기 나타날 리가 없어 시위들이 그에게 물러날 것을 권했으나 듣지 않았고 결국 무력 다툼으로 번지게 되었습니다.”
“겁나게 팼겠지…….”
“황궁 경비들이 밀리기 시작해서 휴직 중이었 던 내무부 이등시위인 동십사 대인을 모셔 와―”
“미쳤다, 미쳤어! 어딜 아직 수유 중인 사람을 데려와서!”
“충돌이 더 커질 뻔했으나 동십사 대인 아래의 위사가 패자 측의 손님을 인질―”
“양아치네, 양아치야! 고산패자가 진짜인지는 둘째치고 손님을 인질로 잡으면 어떡해?!”
“―이 아니라 대접을 하는 바람에 그럭저럭 대화의 분위기가 마련되었고 고산패자께서 굳이 황상을 뵈어야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수행 총관이신 산공공께서 나와 별궁으로 모신 참입니다.”
혈월대의 우두머리는 자신이 한마디 할 때마다 옆에서 호들갑을 떨며 추임새를 넣는 진해 탓에 평소처럼 냉철히 보고하기가 힘들었다. 말을 고르느라 손에 식은땀이 다 배었다.
“일단 황상을 뵙지는 않았다는 말이군.”
“아직까지는 그렇지만 소식이 들어가는 것도 시간문제입니다.”
“황상은 황제이시기 이전에 나의 백부님. 곤하신 백부님을 잠에서 깨우는 건 질자된 도리가 아니지.”
진해에겐 호들갑을 떨고 난리를 칠 만한 문제가 월산에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진해는 이 상황에서도 슬며시 웃음 짓는 월산이 너무나도 굉장해 보였다. 제 옆의 이 사람은 저보다 다섯 살이나 어렸다. 관례를 치른 지 일 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안 귀여워……!’
겉만 보면 꼭 끌어안아 주고 싶게 생겼는데 속은 끌어안는 순간 제 뱃구레를 찍어 버릴 것처럼 노련했다. 진해는 월산 앞에서 소리 지르며 제 감정을 드러낸 것을 조금 후회했다.
“입궁하겠다. 여가 황상 대신 이야기를 듣겠다. 고산패자를 맞이하기에 격이 모자란 것도 아니니까.”
“예.”
뭐가 어찌 되었든 진해는 그 고산패자가 진짜인지 아닌지를 확인해야 했다. 문득 강해아, 즉 변장한 제갈군무가 연회에 참석하지 않은 게 떠올랐다. 혹시 황궁에서 이 난리를 치려고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던 걸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진해와 헤어지고 나서 바로 황궁으로 뛰어갔다면 시간이 딱 맞았다. 그가 데리고 온 손님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고산패자가 진짜라면 그 손님이야말로 이번 일의 핵심임이 분명했다.
“성월공 마마, 입궁하시옵니까.”
“창명후. 더 쉬지 않고서.”
“황상의 안위가 달린 일이옵니다. 사지가 온전치 못하다면 기어서라도 가야지요.”
아직 얼굴에 붉은 기가 가시지 않은 강절곤이 대문에 서 있었다. 그 역시 소식을 들었는지 관복 차림이었다.
“음. 마무리가 아쉽지만 좋은 연회였어. 궁에서 보도록 하지.”
“예.”
너도 나도 입궁하는 분위기라 진해도 일단 궁으로 가려고 했다. 관복은 사람을 보내 문 앞으로 가져오라 하든지 해서 입으면 될 일이었다.
“이 녀석, 너 어딜 가려고 하느냐.”
그런데 창명후가 수레에 헐레벌떡 올라타려는 진해를 붙들었다. 창명후 자신도 갈 길이 급한데.
“궁에 가야지! 그 고산패자가 진짜면 어떡해?!”
“진짜다.”
“뭣?!”
“내 소식을 듣자마자 식솔들을 풀어 집을 뒤졌는데 그자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자가 맞아.”
“이런 미친! 내가 아버지까지 팔아 가며 비위를 맞춰 줬는데!”
강절곤은 진해가 아버지를 팔았다는 소리를 듣자 표정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 안 그래도 강절곤은 진해가 제갈군무에게 아버지 타령을 하며 꼬리를 흔들 때마다 속에서 치미는 것을 참는 표정이었다.
“그런 것보다 넌 겨우 육품인 녀석이 어딜 궁에 함부로 들어간다는 거야, 너보단 해원공이 궁에 먼저 들어가야지!”
“아.”
“성월공 마마도 별궁에 입궁해 채비를 갖추려면 시간이 꽤 걸릴 거다. 지금 당장 달려가 준비시키면 늦지 않아. 하지만…….”
“응? 왜 그래?”
강절곤은 눈을 동그랗게 뜨는 진해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만약 해원공이 황제의 친자라면 진해를, 해아를 시켜 당장 궁으로 오게 하는 게 맞았다. 이러나저러나 해아가 사랑하는 이였으니. 그러나 지금의 해원공은 황후가 낳은 아이가 아니었다. 어디서 데려왔는지는 몰라도 황제의 자식이 아니란 말이었다.
“이 늙은이의 기우면 좋겠다면 예감이 좋지 않아. 뭔가 큰일이 벌어질 것 같구나.”
“벌어질 일은 다 벌어졌는데 새삼 큰일이 벌어지겠어, 어서 빨리 마마께 달려가야지!”
“아니, 넌 무슨 수를 써서든 해원공을 입궁시키지 마라.”
“너무하네, 정말! 아무리 성월공이 좋아도 그렇지! 그래도 아직까진, 읍―”
“쉿, 너야말로 소문내지 말고 조용히 해야지! 내가 지금 그것 때문에 그러는 줄 아느냐!”
진해의 입을 틀어막은 채 강절곤의 표정이 정말로 심각해지자 진해 역시 조금 잠잠해졌다. 강절곤은 급히 입궁해야 함에 불구하고 깊이 생각에 잠긴 듯했다.
“집사, 혹시 당장 유용할 수 있을 만한 것이 있는가.”
“패물로 준비할까요?”
“응, 그래. 몸에 지니는 게 좋겠지. 전표는 이 녀석도 많이 있을 테니까.”
거기다가 집사를 시켜 돈으로 바꾸기 쉬운 작은 가락지 등을 한 움큼 가져오게 해서 진해의 손가락에 차례대로 끼워 주었다. 진해의 손가락이 굵어 대부분 중간에 걸리고 말았지만.
“여, 영감, 왜 그래?”
“불안해서 그런다.”
“장물이야?”
“……아니, 마음이 불안해서 그렇다니까.”
작은 물건이었지만 세공이 무척 훌륭했다. 진해는 아주 잠깐 패물을 감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일이 생기면 동십사든 누구든 네게 사람을 보낼 거다. 만약 나쁜 소식이면 이걸 들고 해원공과 몸을 숨기거라.”
“좋은 소식이면?”
“그럼 네가 나서지 않아도 모시러 오겠지. 해야, 해야…….”
“왜 이래, 갑자기. 느끼하게?”
“이 녀석, 이럴 땐 좀 진지해질 수 없느냐!?”
“내가 왜 영감이랑 진지해져야 하는데!”
숙연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는 집사를 배경으로 한 채 진해와 강절곤은 또다시 투닥거렸다. 진지해지려는 강절곤과 강절곤과는 별로 진지해지고 싶지 않은 진해 사이의 갈등이었다.
“떽, 이 녀석! 그 목걸이나 잃어버리지 말고 잘 가지고 있어! 무슨 일이 있으면 그게 널 지켜 줄 테니까! 그것만 있으면 누구든 널 지켜 줄 테니까!”
결국 진해의 까불거림을 이기지 못한 강절곤이 졌고, 강절곤은 발칵 화를 내며 진해의 앞섶을 움켜쥐었다. 진해는 강절곤이 제 고산홍패를 의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무척 놀랐다. 전에 제갈군무가 억지로 끄집어내서 보여 준 적밖에 없었는데 강절곤은 그걸 아직까지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와……, 이게 생각보다 엄청 귀한 물건인가 보다.’
진해는 그저 고산홍패가 어마어마하게 비싼 물건이거나 이름도 모르는 제 좌부가 고산국에서 날렸던 무인이라고 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영감이 그렇게 말 안 해도 이건 내 보물이야.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더라도…… 이걸 보면 기억할 수 있어.”
“……그래.”
진해는 강절곤이 고산홍패가 있는 자리를 소중히 여미는 제 모습을 어떤 심정으로 보고 있는지 몰랐다. 강절곤은 피가 날 것처럼 입술을 세게 짓씹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자신이 할아버지라고 밝히고 진해를 꽉 끌어안고 싶었다. 그간 어디서 무얼 했길래 얼굴에 그리 흉이 많느냐고, 손이 그리 거치느냐고, 이제부턴 할애비가 지켜 줄 테니 아무 걱정 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해아를 지금 당장 곁으로 데려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위가 찾아오지 않는 것도 마음에 걸렸고, 황제가 순순히 진해를 강해아로 인정해 줄지도 의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진해는 반드시 성월공과 혼인해야 했다. 성월공 본인은 그러겠노라 말했으니 이제 진해만 허락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성월공과 진해가 혼인하겠다고 황제에게 청하는 그때, 강절곤은 진해의 정체를 만천하에 밝힐 셈이었다. 황제는 진해의 신분이 천해 정군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거절할 터이니 그때 자신이 나서서 진해가 자신의 손자임을 고할 것이었다. 자신의 손자는 성월공의 원과 정군이 될 자격이 충분하니 인정해 달라고.
일단 성월공의 보호에 들게 되면 황제도 진해를 함부로 할 수 없게 되었다. 성월공과 합방해 성월공의 원이 되면 진해가 정말 천출이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될 터였다. 성월공이 행복한 가정을 이루지 못한다면 백부로서의 입장도 곤란해질 것이고, 백성들 사이에선 황실 음인들에게 저주가 돈다는 소문이 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만 가야겠다. 내 말 명심하거라. 늘어져 있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어!”
“알았다니까. 안 그래도 근래 해산 도련님을 못 봤는데 잘됐네.”
“이상한 짓 하지 말고!”
“쳇, 안 해!”
강절곤은 가슴이 저미는 심정을 애써 숨기며 수레 위에 올라탔다. 집사도, 마부도, 강절곤의 심정을 아는지 재촉하지 않고 강절곤과 진해의 이별을 바라보았다. 강가를 위해 대를 이어 일한지라 그들은 강절곤의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배신하지 않을 걸 확신했기에 그들에게 진해가 해아임을 살짝 털어놓은 터였다.
강절곤의 수레와 진해의 수레는 동시에 출발해 갈림길에서 갈라졌다. 강절곤은 진해의 수레가 떨어지자 뒤를 돌아 진해의 수레가 저 멀리 해원공부로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꼴사나운 모습이었지만 상관없었다. 누군가 비웃는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진해의 수레는 금세 콩알만 하게 변해 사라졌다.
* * *
아니나 다를까, 해원공부에 들어서자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는 하인들이 보였다. 아직 움직이는 모양을 보아 해산은 출발하기 전인 듯했고, 진해는 늦을세라 얼른 해산의 내실로 줄달음질 치기 시작했다. 이젠 진해가 이곳에 있어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원래라면 당장이라도 출발해야 된다고 오두방정을 떨 생각이었지만 진해는 그간 친해진 강절곤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강절곤을 온전히 믿는 건 아니었지만 그가 최소한 자신에게 금은보화를 걸치게 할 정도로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것 정도는 믿었다. 게다가 해산 도련님에게는 황실과 멀어져야 할 이유가 있었다.
“해아? 네가 지금 여기, 아. 너도 이야기를 들은 게로구나. 그러면 긴말할 것 없겠군. 지금 당장 궁으로 가야―”
“아니요! 궁으로 가지 마세요, 해산 도련님!”
“뭐?”
하지만 옷 갈아입는 시간도 아까운 해산에게 진해의 말은 아닌 밤중의 홍두깨나 다름없었다.
“그~ 고산패자가 진짜라는 보장이 없잖아요? 괜히 가서 시간 낭비하시는 것보다 여기서 소식을 기다리는 게 어떨까요?”
“그 고산패자가 진짜인지를 가려내는 게 중요한 거다! 수행 총관은 충직한 자이니 고산패자의 진위를 가리기 전에는 부황께 고하지 않을 것이다. 설령 고산패자가 참이라 해도 대월국 천자의 휴식을 방해할 수 없음이야!”
그건 그렇지만 그 작자 성질이 좀 능글지랄맞아서 말이지요, 진해는 이리 고하고 싶었지만 이렇게 말하면 심문당하는 건 고산패자가 아니라 진해가 될 터였다. 진해는 몰려드는 술기운을 흩으면서 해산을 붙들 오만 가지 간계를 추려 냈다. 역시, 해산에게 잘 먹히는 건 이거였다!
“아~ 갑자기 어지러워~!”
진해가 고른 수는 바로 미남계였다. 삼랑이 본다면 코웃음을 치다 하늘로 승천할 수였지만 적어도 해산에게만큼은 잘 먹힌다 자신할 수 있었다. 해산은 자신을 진짜 좋아하니까!
“해, 해야! 갑자기 왜 그러느냐, 혹, 혹시 고가 소리를 질러 그런 것은 아니지!?”
진해는 해산이 큰소리 낸 건 염두에도 없었으나 해산은 전에 진해에게 손을 올린 것 때문에 내심 신경을 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잠춘동과 추피동을 오간 진해에겐 그 정도는 날파리가 훑고 지나간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읏, 창명후 댁에 가기 전까지는 괜찮았는데…….”
“뭐? 오늘 창명후 집에 있었느냐? 거기 가기 전까지는 괜찮았다고? 이리, 이리 앉거라. 서두르지 말고, 조심해서.”
과연 해산은 진해가 현기증을 내며 쓰러지는 척을 하자 기겁하며 진해를 받아 들었다. 진해의 혈색은 현기증과는 백만 년 정도 거리가 있어 보일 정도로 멀쩡했지만 해산의 눈에 진해는 한 떨기…… 꽃…… 이었다. 좀 시끄럽게 나불거리는 꽃.
“응?”
그러나 진해가 하나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진해는 강절곤과 헤어지기 전까지 다른 음인과 함께 있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그 음인은 수하가 부르기 전까지 진해를 끌어안고 있었고, 심지어 입까지 맞추었다. 낯선 음인의 향이면 그저 이상하다 여길 향이었는데 하필이면 해산이 어마어마하게 잘 아는 향이었다. 아버지들을 제하고 가장 가까운 친척이었으니 모를 리가 없었다.
“너.”
해산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심해 천 리의 것처럼 낮게 가라앉았다.
“창명후의 집에 갔다고?”
“네!”
“……창명후 집에서 누구를 만났느냐.”
그리고 그때가 되어서야 진해도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냥 옆에 앉았다고 치기에는 옷에 향이 진하게 배어 있었다. 차라리 진짜 현기증을 내며 쓰러졌으면 좋을 텐데 현기증을 내기에 진해는 너무나 건강하고 혈기왕성했다. 혈기왕성한 진해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벽돌처럼 딱딱해지는 해산의 얼굴을 보면 안 흐를 땀도 흘러내리게 되어 있었다.
“어, 그게, 음, 저기.”
“성월공과 있었느냐? 창명후가 성월공을 초청했어?”
“하하, 그, 창명후랑 성월공 마마님은 치, 친하시잖아요~? 우리 해산 도련님이랑 동가대 대인처~ 럼~!”
“그런데 왜 성월공의 향이 네게 배어 있어. 이렇게 향이 진하려면 대체 얼마나,”
으드득, 해산의 이가 갈리면서 섬뜩한 소리가 났다. 이제 진해의 관자놀이에도 땀이 맺혔다. 최소한 장포라도 벗고 왔었어야 했었다!
“얼마나, 얼마나, 가까이 앉아야 이렇게 향이 배느냐. 응? 말해 보거라. 너 대체, 창명후 집에서 무얼 하고 온 게야!”
“오, 오해예요!”
“오해? 고가 뭘 말했다고 오해를 했다는 게야!”
일단 발뺌을 했는데 그게 더 해산의 화를 돋운 모양이었다. 해산은 입궁이고 나발이고 다 잊어버렸는지 활활 불타는 눈동자로 진해를 노려보았다. 모르는 사이면 오줌을 지릴 정도로 무서운 눈빛이었다. 저 눈빛으로 판관을 하면 죄인 된 자는 살려 달라 빌며 있는 죄, 없는 죄 다 털어놓을지도 모른다.
“저는 아, 아무것도 안 했어요!”
확실히 진해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소월이 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하면서 진해에게 뽀뽀를 했다.
“그래, 그렇지?”
“네! 저는 아무것도 안 했어요! 소월이 제 맘대로, 헛!”
“……소월? 서로 별호를 부를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단 말이냐?”
해산은 분노며 질투며 온갖 감정이 범벅이 되어 이젠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듯했다. 입궁할 생각 따위는 몽땅 날려 버렸으니 진해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다. 문제는 이제 해산의 화를 어떻게 진정시키느냐였다. 삼랑이의 다리 사이에서 기어 나왔을 때보다도 더 화가 난 것 같았다. 성월공과 해원공의 관계를 생각하면 그럴 만도 했다!
“그래, 이해한다. 너는 재주가 만 가지는 넘는 아이이고 야무지게 생긴 옥석 같은 아이라 음인들이 너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는 것을.”
진해가 이 사람, 저 사람 사귀기는 했으나 그건 진해 또래의 미혼 양인들의 평균치였다. 삼랑이와 미려를 이겨 내지 못하면 진해의 손조차 잡지 못하는 게 잠춘동 일대의 정설이었다.
“꼬~ 옥 그렇지는 않지만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너를 늦게 만난 고의 잘못이지. 고가 너를 일찍 만났으면 네가 결코 다른 이들에게 몸을 허락하는 일은 없었을 것 아니냐.”
“꼬~ 옥 그렇지는 않……. 아니요, 맞습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고는 과거의 연은 묻기로 결정했었다. 너를 원으로 삼고, 정실로 들이기로 결심하는 동안, 쓸데없이 미려한 네 아우도 참고.”
미려가 쓸데없이 미려하다니, 진해는 미려의 아름다움을 저렇게 무심하게 말하는 걸 처음 들어 정신이 다 혼미해졌다.
“출신을 못 숨기고 너한테 마구잡이로 비벼 대는 한 시위도 넘기기로 했고.”
해산이 다른 사람의 출신을 흠잡는 건 처음이었다!
“그 외에도 너와 어울렸다는 기타 등등 떨거지들도 다 용서하기로 했다. 그런데 말이다.”
아마 속된 말로 싸가지 없다 평해질 해산의 말은 황자라는 신분에서 온 것이 분명했다. 평소라면 고아하고 바른 단어만을 골라 이야기하던 해산의 입술에서 지금 남을 마구잡이로 헐뜯는 말이 나오고 있었다. 진해는 어쩐지 입술 끝부분이 근지러웠다.
“고와 미래를 약조해 놓고 다른 이를 만나는 건 절대 용서 못 해, 고를 알기 전이면 상관없지만, 고를 알고 나서 다른 놈과 자는 건 절대 용서 못 한다! 특히 안월산은 절대 안 돼! 절대 안 돼!”
저를 찢어 죽일 듯이 노려보는 해산을 바라보며 진해는…… 발기했다.
“당장 말해! 그놈이랑 뭘 했어! 당장 말해!”
“헤헤, 뭘 했을 것 같아요?”
“너, 너 이 녀석!”
참으로 변태 같은 일이었지만 진해는 황자인 해산의 입에서 저런 천하고 속된 말을 뱉게 한 원인이 자신이라는 사실에 크게 흥분했다. 용서하기로 했다면서 다른 이들에게 이를 득득 가는 모양새가 귀여워 돌아 버릴 것 같았다.
“그러게 날 방치하라고 했어요? 용서한다고 해 놓고 뺨을 때렸잖아!”
“뭘 잘했다고 큰소리냐!”
“날 버리지 않겠다고 했으면 내가 잘못해도 받아 줘야지!”
“뭐?! 뭐 이런 개 같은!”
결국 진해는 해산의 입에서 개 같다는 말까지 끌어내고 말았다. 진해는 개라는 말을 듣자마자 단전에서부터 정수리 끝까지 짜릿한 감각이 관통하는 것을 느꼈다. 더 나쁜 말을 가르치고 싶었다. 더 저속한 말을 읊게 하고 싶었다. 더, 더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었다.
“하아~”
“뭐, 뭐냐……!”
진해가 개 같다는 말을 듣고 화를 내긴커녕 황홀한 표정을 짓자 해산은 크게 당황했다. 해산 자신은 자신의 입술 사이에서 거침없이 튀어 나간 욕설을 후회하는 중이었었다.
“마, 말하라니까! 성월공과는 무슨 사이야! 월산과 뭘 했어!”
“휴, 해산아!”
“엇?”
해산이 당황한 채로 약이 올라 있자 진해가 갑자기 해산을 불렀다. 해원공 마마님도 아니고 해산 도련님도 아닌 이름으로.
“읏, 차!”
“어엇?”
그리고 해산을 끌어당겨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해산은 장성하기 전부터 누군가에게 안긴 적이 드물어 이런 자세가 무척 낯설었다. 그런 것보다도 자신이 힘을 빼고 앉으면 진해가 짜부라질까 봐 겁이 났다. 화가 나더라고 진해를 죽이고 싶은 건 아니었다. 해산은 침착하며 진해를 심문하려 했으나 진해가 제 가슴 사이에 턱을 괸 채로 올려다보자 그만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날 못 믿어?”
“소, 손부터 놓거라!”
“하긴 나도 날 못 믿지. 해국에서 아무것도 안 하겠다고 해 놓고 미려랑 그 짓을 했으니 난 죽어도 싼 놈이야.”
“…….”
“하지만 해산이라면 어쩔 수 없지. 해산이라면 날 죽여도 좋아.”
우유 냄새와 비슷한 향을 폴폴 풍기며 진해가 해산의 가슴 사이에서 나른하게 미소 지었다. 눈가를 발그스름하게 물들인 채 올려다보는 눈은 홀렸다는 비유에 딱 들어맞았다. 진해가 그런 눈으로 해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냐면 내가 해산을 너무 사랑하니까.”
그리고 그 순간 해산은 뒤통수를 크게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머릿속이 분노로 새빨간데 질투라는 녀석이 가시처럼 뾰족하게 솟아오르고, 그 가운데로 연정이 톡 튀어나왔다.
이 와중에 어떻게 저 얼굴이 귀여울 수 있을까. 저보다 다섯 해나 더 묵은 이한테 어찌 이런 애틋함을 느낄 수 있을까. 아니다. 속지 마라, 안해산. 저놈은 혓바닥으로 먹고사는 놈이 아니더냐. 그래도 저렇게 어여쁜 말을 하는데 한 번은 용서해 줘도 괜찮지 않느냐, 원래 미인은 나라를 뒤흔드는 법이다, 그래도 성월공의 향을 묻혀 왔잖느냐, 성월공 그놈의 성정이 개 같아 지랄을 했는지 어떻게 아느냐, 아니다, 그래도―
제 몸을 허벅지 위에 콱 앉혀 놓고 뺨을 비비는 진해 탓에 해산은 큰 혼란에 빠졌다. 화는 화대로 났는데 귀엽게 구는 진해가 사랑스럽고, 음인의 몸은 제 양인의 몸이 닿자 제멋대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거기다가 자세히 보니 오늘따라 굉장히 멋진 차림을 하고 있었다. 관복 차림은 또랑또랑한 맛이 있었는데 오늘은 입만 다물면 고관대작의 준수한 영식 같았다.
“하아, 하아. 그런데 죽일 거면 네 아래서 죽게 해 줘!”
해산은 방금 준수한 영식 같다는 말을 머리에서 씻어 냈다. 어느 집안 영식이 음인을 허벅지에 올리고 헉헉댄다는 말인가. 그것도 저보다 훨씬 큰 음인을.
“무, 무, 뭐엇?! 지금 고에게 널 압사시키란 말이냐?!”
“큭, 이 살인자 같으니!”
“고는, 고, 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지금 교태로 날 죽이려 했잖아!”
이건 또 무슨 헛소리인가. 해산은 당황이 지나치면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더 당황스러운 건 아까부터 자꾸 엉덩이 사이에 닿는 단단하고 크고, 굵으면서 뜨뜻한 무언가였다.
진해의 허벅지는 제 허벅지 아래에 있었는데 저 허벅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기만 했다. 해산은 진해가 모르는 새 허벅지가 하나 더 돋았냐는 생각까지 하다가 그것의 정체를 깨닫고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그리고 진해가 아래에서 죽게 해 달라는 말의 의미 또한 이해하고 말았다. 해산은 이런 상황에서 저를 원하는 진해가 미친놈인지, 이런 미친놈이 저를 원한다는 걸 기뻐하는 자신이 미친놈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이, 익!”
“내가 성월공을 소월이라고 부르는 게 마음에 안 들어?”
“다, 당연하지!”
“왜 마음에 안 들어?”
“그야…….”
고에게는 한 번도 그리 부른 적이 없잖느냐, 해산은 그리 말하려 했다.
“우리 해산이에게는 예쁜이라는 멋들어진 애칭이 있잖아?”
“뭐……?”
“아니면 얼룩이가 좋아? 우리 해산이가 뭐가 좋지? 아, 예쁜 건 너무 당연해서 예쁜이라는 이름이 별호로 안 느껴지나? 그럼 뭐가 좋은데? 말만 해, 더 좋은 별명을 지어 줄 테니.”
그런데 진해의 입에서 튀어나온 상상도 못 한 단어에 해산의 몸이 확 달아올랐다. 남들은 죽어도 부르지 못하고 생각지도 못할 예쁜이라는 별칭이 진해가 해산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확실히 그랬다. 진해는 해산과 둘이 있을 때는 해산에게 예쁜이라도 부르는 일이 잦았다. 뭔가 기분이 이상했지만 별칭이라면 별칭인 셈이었다.
“깜찍하니까 깜찍이? 아니면 더 좋은 게 있는데.”
“윽!”
해산이 그건 그래라고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진해가 해산의 골반을 그러쥐고 허리를 쳐올렸다. 의자가 바닥을 긁으며 끼익 소리를 내는 동시에 진해의 엉덩이 사이가 솟아오른 융기와 마찰했다.
“구멍은 어때? 내 구멍. 기와 얹는 사람은 기와장이, 장난 잘 치는 사람은 개구쟁이잖아. 그럼 우리 해산이는 잘 젖고 잘 무는 구멍을 가졌으니까 구멍이라고 해야지. 내 것만 씹으니까 내 구멍이지. 그렇지? 응? 그렇지?”
“윽, 해, 해야……!”
씩씩 콧소리가 날 정도로 마찰하는 진해 탓에 해산의 얼굴은 이제 거의 검게 보일 정도로 붉어졌다. 이상한 건 수치스럽고 모욕적인 별명임이 분명한데 진해가 잘 젖는다고 말하자 구멍이 절로 젖었다는 것이고, 잘 문다고 하자 저도 모르게 바짝 조여들었다는 점이었다.
“음란하긴, 넌 성월공이랑 뭐 했냐고 한마디도 못 해. 어? 어느 집 아들이 양인 위에 올라타서 질질 물을 흘려 대?”
“으…….”
“성월공이 다른 사람 위에 올라탄 거 봤어?”
“……아, 아니요.”
“그럼 다른 음인이 올라탄 건 본 적 있어?”
―봤으면 큰일이었다.
“아니, 요…….”
“근데 네가 남을 욕해? 다 큰 음인이 양인 위에 올라타서 엉덩이를 흔들어 대는 주제에! 이 천한 구멍!”
“아, 아냐, 고는……!”
“고? 참 나, 네가 뭐가 잘났다고 그리 칭해! 넌 구멍이야, 구멍! 박히려고 안달 난 구멍이라고! 따라 해! 나는 구멍입니다.”
“나, 나는…….”
해산은 자기가 왜 혼나는지도 모르고 혼이 나고 있었다. 진해가 하는 말이 다 맞는 건 아닌데 아주 틀린 말도 아니고 정말로 구멍이 제멋대로 젖고 움찔거리고 있어서 자신이 정말로 음탕한 성정인 것만 같았다. 그런 것보다 제 사이에서 문질러지는 기둥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얼른 일어나고 싶기도 하고, 더 비비고 싶기도 하고, 머릿속이 열기에 익어 제대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따라 안 해!”
“아, 아앗!”
진해가 엉덩이를 기둥 위에 꾹 누른 채 엉덩이를 내리치자 자극이 더욱 강렬해졌다. 얼굴만큼이나 뜨뜻하게 달아오른 둔부가 진해의 기둥을 사이에 둔 채 바짝 조여지자 해산의 하의에 진하게 무늬가 생기기 시작했다. 당사자인 해산이 모를 리가 없었다. 해산은 어린아이가 오줌을 지린 듯한 부끄러움과 수치심에 몸 둘 바를 모르게 되었다.
“빨리해! 나는!”
“나는, 나, 나는, 구, 구멍……, 흐앗!”
해산이 더듬더듬 진해의 말을 따라 하자 진해가 다시 한번 허리를 쳐올렸다. 마치 상이라도 주듯이 씩 미소 지으며 해산이 한 글자, 한 글자 더듬을 때마다 느긋하고 감질나게 해산의 엉덩이 사이를 마찰했다.
“흑, 나는, 천박하고, 음탕한, 좆, 받는 걸, 흐윽, 좋아하는, 구, 구멍 …… 입니다…….”
결국 해산은 남이 들으면 기절초풍할 만한 천한 말을 입에 담게 되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대월국의 적통 황자인 자신이 듣는 것만으로도 귀가 더러워질 듯한 말을 입에 담다니! 거기다가 그 말을 하며 엉덩이가 온통 젖어 들다니!
“그래, 구멍아. 이제 성월공이 안 부럽지? 내가 소월이라고 불러도 화 안 나지?”
더 웃긴 건 여기서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는 자신이었다. 해산은 이 지경이 되고서도 진해가 성월공 안월산을 소월이라고 부르는 게 끔찍하게 싫었다.
“싫어?”
“…….”
고개를 푹 숙인 해산이 답을 하지 않자 진해가 손을 뻗어 해산의 엉덩이를 한쪽씩 움켜쥐었다.
“으앗!”
“서방님이 싫냐고 묻잖아, 이 버릇없는 구멍아.”
꼬집듯이 힘을 주자 해산의 엉덩이 틈이 벌어지며 고여 있던 액이 왈칵 쏟아졌다.
“……싫어.”
“왜 싫은데?”
“…….”
“응? 왜 싫어?”
진해가 달래듯이 엉덩이를 주무르자 해산의 등줄기가 움찔움찔 경련했다. 기분은 나쁘고, 부끄러운데, 진해와 닿아 있는 부분이 짜릿하고 뜨거웠다. 진해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진해의 말대로 천박하기 짝이 없는 구멍이 허기진 것처럼 마구 벌렁거렸다.
“나는, 나는 네 구멍인데, 네 조, 좆만 바, 받는데…….”
눈가가 달아올라 앞이 일렁거려서 그런지 말을 끝까지 이을 수가 없었다. 그냥 소월이라고 부르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라 하고 다 치워 버리고 싶었다. 엉덩이 속이 가려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크고 굵은 것을 집어넣고 벅벅 긁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의 아래에 해산의 가려움을 해소해 줄 가장 적절한 도구가 놓여 있었다. 해산은 진해 앞에 무릎 꿇고 제발 박아 달라며 추하게 애원하고 싶었다.
“……엎드려.”
“응?”
“씨발, 당장 엎드려, 구멍 찢어 버리기 전에 빨리!”
“우왓, 해, 해야?!”
그런 해산의 심정을 알아챈 것일까 진해가 입술을 짓씹으며 해산을 제 무릎에서 내동댕이쳤다. 해산이 진해보다 힘도 세고 체격도 큰지라 바닥에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진해의 갑작스러운 변화는 해산을 무척 당황하게 했다. 하지만 진해는 해산이 그러거나 말거나 해산의 바지를 쑥 벗겨 버렸고(해산은 남의 바지를 무슨 껍질 까듯 벗기는 기술에 감탄했다), 어리둥절한 해산을 억지로 바닥에 엎드리게 했다. 물론 해산이 진해의 손길을 따르지 않는다면 어림없는 일이었다.
“흐앗, 아! 아!!”
“큭, 젠, 장! 젠장!”
그리고 잔뜩 젖은 해산의 엉덩이 틈으로 해산이 그렇게 갈망하던 진해의 좆이 파고들었다. 아무리 녹진녹진하게 젖었다지만 해산의 구멍은 작았고, 진해의 좆은 좀 많이, 엄청 많이 컸다. 나라에서 내로라하는 장군 강절곤이 버거워하던 수강건의 아랫도리를 쏙 빼닮았던 것이다.
“힉, 아으, 아, 아!! 찌, 찢어져, 아, 너무, 커!”
“좋지? 넌 음탕한 구멍이잖아! 내가 박아 줘서 좋지! 넌 내 전용이니까 당연히 좋아해야지!”
“아, 조, 좋아! 좋아!”
“대체 날 얼마나 엉망으로 만들 셈이야! 어?! 얼마나, 하으, 깜찍하게 굴어서, 하아, 날 미치게, 흐윽, 할 셈이야!”
“아냐, 난, 아니, 아으응!”
좆이 어찌나 큰지 넣자마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콱 찍어 올리자 곧추선 해산의 좆에서도 찍 하고 허연 액이 뿜어졌다. 퍽퍽 소리가 날 정도로 거센 허릿짓 탓에 해산의 숨이 턱턱 막히기 시작했다. 자기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진해가 뭐라 말하면 뭐라 답하긴 하는데 머릿속에는 온통 좋아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너무 좋고, 좋아서 자기가 누구인지 뭘 하는 중인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진해가 등을 끌어안으며 세게 짓누르자 눈앞이 하얗게 변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귀는 기능을 상실하고 아무것도 들려주지 않았다. 바닥과 가까워진 입가에서 줄줄 타액이 흘러내렸다. 더위에 시달리는 짐승처럼 혓바닥이 삐져나왔다.
“으앙, 아, 해, 좋아, 아앙――!”
그렇게 삐져나온 혀를 누군가 세게 짓누르며 손톱을 박아 넣었다. 뾰족한 아픔이 바늘이 되어 해산의 척추에 그대로 들이박혔다. 부르르 경련하며 허리를 흔들자 젖은 바닥이 또다시 정액으로 젖어 들었다. 진해가 허리를 빼고 붙일 때마다 해산의 구멍에서 치덕치덕 젖은 소리가 요란했다.
“훗, 우욱, 우으―!!”
“윽!”
해산이 이대로 가다가는 미쳐 버릴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를 무렵, 진해가 해산의 등에 이를 박았다. 도톰한 천 위에 박은 이는 희미한 감각으로 느껴졌지만 해산에게 그 감각은 손톱 밑을 쑤시는 것처럼 강렬하고 날카롭게 다가왔다. 정신을 차리자 진해의 향이 온몸을 덮고 있었다. 안월산이 진해에게 향을 묻힌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진한 향이었다. 우유를 닮은 향이라 우유 독을 통째로 뒤집어쓴 것만 같았다.
사실 다른 곳은 몰라도 진해가 구멍이라 칭한 엉덩이 틈은 비슷한 모양새이긴 했다.
“하아―”
진해가 더운 숨을 토하며 몸을 뺀 곳은 진해의 정액으로 허옇게 젖어 있었으니까.
“아, 아…….”
“귀여워라.”
진해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푹 엎드려 있는 해산의 엉덩이를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그저 귀여움을 담은 손짓에도 해산의 구멍은 뻐끔뻐끔 개폐를 계속하며 진해의 정액을 느릿하게 뱉어 냈다. 진해는 해산의 얼굴 옆으로 기어가 산발이 된 해산의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었다.
* * *
좀 이상한 방법을 썼지만 목적은 달성했다. 진해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해산을 빠듯하게 들어 옮기며 그렇게 자신을 합리화했다. 해산이 일어나면 화를 낼지도 모르지만 그런 해산의 화가 무섭지 않을 정도로 만족했다.
“어디서 이렇게 깜찍한 도련님이 나왔지? 어디 계신지 모르지만 정말 감사합니다, 아버님들! 그런데 절대 손해 보시는 거 아니에요!”
만약 진해에게 해산처럼 사랑스러운 아들이 있다면 진해는 세 번은 무슨, 열 번의 간택을 거쳐 신랑을 고를 터였다. 본인 상대는 성향만 맞으면 상관없는 놈이었지만 귀여운 아들내미의 짝은 눈에 불을 켜고 걸러 내는 작자였던 것이다. 철들기 전 아빠랑 평생 같이 살래라는 말을 들으면 울면서 그날을 기념일로 지정할지도 몰랐다.
“해산 도련님을 닮은 아이라면 스무 번도 모자랄 것 같은데…….”
헤롱헤롱 거리는 해산을 침상에 눕혀 놓고 진해는 복도로 고개를 빼꼼 내밀어 이미 다 알고 왔다는 표정의 시종에게 손짓했다. 시종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아주 자연스럽게 대야와 수건을 준비해 왔다. 진해는 기특한 시종에게 작은 은덩이 하나를 쥐여 주었다.
그리고 아주 잠깐 동안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해산이 칠칠치 못하게 널브러져 있는 모습을 보면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고 또 일을 칠 것 같아서였다. 물론 진해는 더 하자면 더 할 용의가 넘치다 못해 폭발했지만 지금은 비상시국이었다. 평소라면 해산의 앞에서 다른 걸 지릴 때까지 잔뜩 괴롭혔겠지만 지금은 망할 제갈군무 새끼가 친 사고를 수습해야만 했다. 이번 일로 우세를 점할 성월공을 제재할 방법도 생각해 봐야 했고…….
“으응……!”
“아이고, 착하다. 우리 해산이! 이렇게 잘 참는 애를 누가 혼을 냈어!”
살살 달래 가며 오냐오냐해 주자 해산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진해의 어깨에 턱을 얹었다. 갑자기 서러움이 몰려오는지 살짝 훌쩍거리기도 했다.
‘마하반야바라밀다! 공즉시색 색즉시공!!’
진해보다 큰 덩치에 맞지 않는 살인적인 귀여움이라 진해는 작지만 전혀 작지 않은 진해를 막기 위해 속으로 온갖 경건한 말을 읊조렸다. 부처가 알면 진해의 뒤통수를 갈길 정도로 황당한 사용법이었다.
“소월이라고, 하지 마…….”
“알았어요, 알았어. 뚝!”
“나는 왜 이상한 거로 부르는 건데……!”
“아니 예쁜이가 뭐가 어때서 이상하다는 거예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게 예쁜이들이라고요!”
“예쁜이…… 들……?”
“아.”
어느 정도 몸을 닦고 나자 해산은 그제야 가출했던 이성이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하필 그 시점에 진해가 예쁜이라는 단수가 아닌 예쁜이들이라는 복수를 입에 담고 있었다. 훌쩍대던 해산의 눈매가 단단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진해는 나비처럼 우아하게 나붓나붓 수건을 내려놓고 해산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사건은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
그리고 해산의 주먹에 불거진 힘줄을 바라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소월이라는 별칭의 유래에 대해 구구절절 읊조리기 시작했다. 해산은 진해가 가진 양인의 기능 중 하나를 반쯤 고장 내 버린 놈이 성월공 안월산이라는 사실을 알자 사람 하나 죽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험상궂은 표정이 되었다. 진해는 해산이 죽이는 사람이 제가 아니길 빌고 또 빌었고.
“―너, 그 소월인지 나발인지 하는 것이 성월공인 것을 알고 만난 것이냐.”
“제가 간은 크지만 담은 큰 놈이 아닌 거 아시잖아요!”
진해의 억울한 목소리에 해산은 긍정했다. 확실히 진해는 사고는 잘 쳤지만 강자 앞에서는 한없이 약해지는 가녀린 아이였다.
“고얀 것. 감히 내 양인에게 파각사를 보내?”
진해는 소월을 만날 당시 해산이 존재하는 줄도 몰랐지만 이를 부드득 가는 해산을 보며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가마니처럼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게 잠춘동 일대의 속설이었다.
“그래서 성월공이 네게 수작을 부려도 거역하지 못했던 것이로구나. 가엽게도…….”
그건 아니었지만 진해는 해산의 풀어진 표정을 보며,
“네!!”
라고 당차게 대답했다. 무릎걸음으로 후다닥 달려가 해산의 무릎에 매달리는 건 덤이었다.
“진짜 무서웠어요! 진짜, 진짜! 무서워서 꼼짝도 못 했어요!”
“해야…….”
“그래서 해산 도련님이 성월공이랑 안 만났으면 좋겠어요! 지금은 그냥, 제 곁에 있어 주시면 안 돼요?”
허벅지를 꼬집어 억지로 눈물을 그렁그렁하게 만들자 해산은 진해를 측은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진해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고 번쩍 들어 올리더니 무릎에 앉혀 놓고 서툴게 등을 두드려 주기까지 했다. 진해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얼른 해산의 가슴에 뺨을 묻었다.
“자고로 양인을 지키는 건 음인의 몫이거늘 고가 힘이 미약하여 너를 횡포에서 지켜 주지 못했구나. 하지만 걱정 마라. 이젠 더는 물러서지 않을 테니. 네게 파각사를 보낸 놈이 구질구질하게 엉겨 붙지 않도록 고가 확실히 너를 지켜 줄 테니까.”
“해산 도련님~!”
“해야…….”
해산 도련님이 정말로 황손이었다면 해 볼 만한 싸움이 될 수도 있었는데. 진해는 해산의 고아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바라보며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이젠 해산과 월산이 맞붙는 게 문제가 아니라, 해산이 월산에게 이기는 게 문제였다. 월산은 만만치 않은 상대였지만 혹시라도 해산이 이겨서 황좌에 앉게 되면 황실의 적통이 끊기는 거나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반역이나 진배없었다. 진해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지만 그것과 동일하게 해산이 다치게 둘 생각도 없었다. 그렇다면 월산이 이겨야만 했는데 망할 창명후 강절곤이 월산에게 자신을 억지로 들이댔고 월산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성월공의 성정은 후견인 창명후도 인정할 만큼 더러웠으니 진해가 해산과 함께 있으면 진해를 떼 내기 위해서라도 해산을 제거할 터였다.
‘어쩐다…….’
차라리 해산에게 진작 사실을 털어놓고 있는 거 없는 거 다 털어서 도망쳤어야 할지도 몰랐다. 제갈군무가 함께 있을 때 일을 꾸몄다면 지금쯤 진작 고산국에 숨어 있을지도 몰랐다. 적통 황자가 사라졌으니 나라가 발칵 뒤집어졌겠지만 이리 뒤집어지나 저리 뒤집어지나 마찬가지였다. 진해는 이번에야말로 자신이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았음을 인정했다.
“근데 해산 도련님.”
“응? 왜 그러느냐?”
“농이 아니라 전 진짜 예쁜이가 최고예요.”
“…….”
―자신의 목숨뿐 아니라 사랑하는 이의 목숨까지 걸렸기에.
* * *
그리고 위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왔다. 진해는 해산의 팔을 베고 꾸벅꾸벅 졸고 있다가 단단하게 긴장하는 해산의 가슴 근육의 움직임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비켜!”
잠결에 들리는 목소리는 제법 익숙했다. 진해는 뒤통수에 물벼락을 맞은 것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직각으로 벌떡 일어나는 모양새가 꼭 목각 인형을 방불케 했다.
“야, 창놈어사!”
“아, 아직 안 했어!”
예의를 밥 말아 먹고 문을 차고 들어온 이는 해산 휘하의 기무위사 삼랑이었다. 진해는 흉흉하기 짝이 없는 삼랑의 표정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절박하고 비통한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언젠가 담벼락에서 아슬아슬함을 즐기며 일을 치르기 직전에 담벼락 위에서 담배를 피우던 삼랑을 발견했을 때와 꼭 같은 목소리였다. 진해의 상대는 알록달록한 삼랑의 가슴팍을 보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뭔 개소리야! 지금 그럴 때냐?!”
“한 위사, 조용히 해라. 해아가 놀라잖느냐.”
다행히 해산은 진해의 반사적인 반응을 잠에서 막 깨어나 그렇다고 오해하는 듯했다. 진해는 구태여 그 오해를 바로잡지 않았고, 곧 이변을 깨달았다. 겉보기로나마 예를 갖추던 삼랑이 해산을 무시하고 방으로 들어와 온 방을 헤집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한 위사!”
“조용히 하시지, 지금 댁이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할 위치가 아니니까.”
“……뭐라?”
그리고 진해는 삼랑의 예리한 시선에서 마침내 올 것이 왔다는 걸 깨달았다. 누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침상에서 튀어나와 걸려 있던 제 장포를 펼치고 닥치는 대로 짐을 싸기 시작했다.
“이, 이게 무슨?”
아무것도 모르는 해산이 당황하는 게 당연했다.
“어떻게 된 거야? 고산패자가 불었어?”
“씨발, 아니!”
진해가 터무니없이 호화로운 보따리를 등에 멘 채 해산의 손을 잡아끌자 삼랑이 문을 열고 주변을 살폈다. 삼랑이 오면서 무슨 말을 했는지 방 앞에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삼랑의 직책을 아는 이들, 그리고 진해와 해산의 관계를 아는 이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경비를 늦추었다.
“고산패자의 손님! 그 거지 새끼가 문제였어!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콱 목을 부러뜨리는 거였는데!”
“잠깐만 손님이라니? 목을 부러뜨리다니? 서, 설마! 고산패자의 손님을 인질로 잡은 게 너였어?!”
“그래! 그리고 그 새끼는 은혜를 원수로 갚았지, 씨발!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 봤을 때 손을 썼어야 했어!”
“지금, 대체 무슨 소리들을 하는 게야!”
얼떨떨한 표정을 하고 있지만 일단 진해가 잡아끄는 대로 따라오는 해산과 조금 씁쓸한 표정의 진해의 앞을 걸으며 삼랑이 득득 이를 갈았다.
“회씨! 그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 같은 놈이 고산패자와 아는 놈이었 다고!”
“엑?! 회씨가 패자랑?!”
“보통 사이가 아닌지 고산패자가 그놈을 넘기자마자 날 죽여 버리려고 하더라. 동사부가 안 끼어들었으면 진짜로 뒈졌겠지.”
삼랑은 경비가 느슨해진 곳을 살피다가 진해가 해산을 끌면서 담벼락 쪽으로 향하자 작게 혀를 찼다. 진해가 제집에서 가끔 사라지는 일이 있었는데 그게 어찌 된 영문인지 알게 된 탓이었다.
“자, 해산 도련님. 어서 들어가세요.”
“해야, 잠깐만, 대체 무슨 일이냐? 무슨 일이라서 이리 막무가내로 구는 것이냐? 혹 황궁에 변고가 생긴 것이냐?”
“……변고긴 하지요.”
삼랑이 미행을 살피는 사이 진해는 해산을 밀어 넣고 삼랑에게 손짓했다. 삼랑이 들어온 뒤 진해는 비밀 통로의 문을 닫은 뒤 고민하다 문이 열리는 장치에 큰 돌을 괴어 놓았다. 이미 통로를 아는 사람에게 소용이 없겠지만 모르는 사람은 당황할 터였다. 진해는 자신의 집 입구에 이르러 살짝 화를 내려 하는 해산을 마주 보았다.
“삼랑아, 넌 청려한테 도성을 뜨라고 해.”
“나머지는?”
“나머지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니까 괜찮아.”
“어디로 갈 건데?”
“동문 근처에서 만나.”
“오시 전까지는 나와라.”
진해가 비밀 통로를 열자 삼랑은 기민하게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달려 나가며 경비가 없음을 살피는 건 물론이었다. 진해는 삼랑이 사라진 뒤 비밀 통로를 닫고 짧게 심호흡을 했다. 마침내 해산에게 진실을 이야기해야 할 때가 찾아왔다.
“해산 도련님.”
“해야, 대체 무슨 일이냐. 너 혹시 고가 황궁에 가지 못하게 한 것도 이것 때문이냐?”
“네. 사실 해국에 간 것도 이것 탓이에요.”
“뭐? 네가 해국에 간 건 강해아를 데리러 간 거였잖느냐. 그리고 강해아를 찾아와서 창명후와 사이가 좋아졌고.”
“다 거짓말이에요. 해국에는 강백서랑 강해아가 없었어요.”
“…………뭐?”
“제가 데려온 강해아는 창명후의 합의하에 데려온 가짜예요. 고산패자 제갈군무가 변용술로 제 계획에 어울려 줬던 거예요.”
터무니없는 사실에 딱딱하게 굳었던 해산의 표정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황제를 속이다니, 황제를 기만하다니. 평생을 대월률의 지엄한 국법을 따르고 수호하려 한 해산에게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무너질 사실이었다. 진해가 사고를 잘 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대형 사고를 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지, 지금이라도 화, 황상께, 황상께 가자!”
어찌나 당황했던지 평소의 우아한 태도를 저버리고 횡설수설할 정도였다.
“소, 솔직히 말씀드리면 관직 삭탈로, 끄, 끝날 게다! 그, 그래! 지금이라도 혼례를 올려서 너를 황적에 올리면……!”
“당신을 위해 조금이라도 시간을 더 끌고 싶었어요.”
“……뭐?”
쉴 새 없이 진동하는 해산을 눈을 바라보며 진해를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자신을 걱정해 주는 해산에게는 미안했지만 솔직히 황제를 속인 건 진해에게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애초부터 강해아의 혈육인 창명후 본인이 제안한 것이라 진해는 그 말에 따랐다고만 하면 그만이니까.
“해산 도련님. 사실 도련님은 황후마마의 소생이 아니에요.”
“……어?”
“소문은 사실이었어요. 노래도 사실이었어요. 누가 지은 노래인지는 모르겠는데 그 말이 다 맞아요. 황후마마는 옥길합의 아이를 낳았어요.”
“……뭐라고?”
“근데 그게 해산 도련님은 아니에요. 해산 도련님도 은연 중에 알고 계실 거예요. 제 동생인…… 미려가 황후마마와 판박이인걸.”
진해는 얼이 빠지다 못해 혼백이 모두 가출한 것 같은 해산의 팔을 부드럽게 그러쥐고 차근차근 일의 경위를 설명했다. 자신이 해국에서 그리 귀빈 대접을 받은 게 이것 탓이라는 얘기도 덧붙였다.
“그럼, 그럼 고는, 누구냐……?”
“죄송해요, 아직 그것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어요. 어쨌든 어서 도성을 벗어나야 해요.”
이때까지 살아왔던 인생이 거짓인 걸 알게 된 해산의 표정은 참담했다. 진해를 더 참담하게 하는 건 그런 해산을 위로할 시간조차 없다는 것이었다. 진해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해산의 장포를 벗겼다. 머리칼은 평민들이 묶는 것처럼 단출하게 묶어 주었고 잠깐 자신의 방에 들러 닥치는 대로 금과 은을 긁어모았다.
이젠 아무도 없는 회씨의 방 앞을 지나갈 때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문득 회씨가 자신에게 희미하게 웃어 보이던 게 생각났다. 이런 위기 상황에 왜 그 얼굴이 떠오르는지 모를 일이었다. 진해는 이를 악물고 어리둥절한 얼굴로 다가오는 집사에게 전표를 몽땅 쥐여 주었다.
“미안해. 급하니까 자세히 설명은 못 하겠고 보이는 사람한테 골고루 나눠 줘.”
“주인 나리…….”
“영 집사한테도…… 안부 전해 줘.”
다행히 집사는 진해에게 뭔가의 위기가 닥친 걸 눈치챈 듯했다. 그는 진해와의 이별을 직감하고 눈물이 고였다. 친척인 영 집사를 비롯한 혈육이 고관대작의 집사를 맡았기에 언젠가 이런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좋은’ 주인인 진해에게 이런 위기가 이렇게 일찍 찾아올 줄은 몰랐다.
“예, 보중하십시오.”
“고마워, 집사.”
진해와 집사는 서로의 손을 잡는 거로 이별을 끝냈다. 진해는 하인들이 장을 볼 때 쓰는 작은 수레 뒤에 멍한 얼굴의 해산과 보따리를 실었다. 진해가 쓰게 웃자 해산의 눈에 엷게 은막이 어렸다.
“괜찮아요. 제가 있으니까. 해산 도련님 곁엔 항상 제가 있을게요.”
시간이 촉박했지만 진해는 해산의 손 위에 제 손을 얹고 맹세했다. 해산이 어떤 위기에 빠지더라도 자신은 항상 해산만을 위하겠다고, 그의 행복을 위해 자신은 희생하겠다고. 사실 그 더럽고 퀴퀴한 움막에서 당신을 처음 본 순간 나는 당신을 위해 살 준비가 되어 있었노라고.
“해야……, 나는…….”
“해산 도련님, 마음 굳게 먹으셔야 해요.”
“나는 이제 아무것도 없는데…….”
“없긴 왜 없어요, 당신 태에는 저희 아이가 있는데.”
“……뭐라고?”
당연히 거짓말이었지만 약간은 진실이었다. 해산의 태에 그렇게 많은 씨를 부었으니 하나쯤은 들어가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진해의 소망이었다. 거기다 혈육을 몽땅 잃은 해산에게 뭔가 동기 부여를 해 줘야 할 것 같기도 했고.
“저희 아이를 낳아 주실 거죠?”
“어, 으응…….”
“전 아이들이 정답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우애로운 이름을 지어 주고 싶어요. 도성을 빠져나가면 그때 해산 도련님이 한 글자씩 따 주세요.”
“내 태에…….”
자신이 우부의 자식이 아니라는 충격에 이어 회임했다는 충격을 받은 해산은 뭐가 뭔진 몰라도 일단 진해를 따르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진해가 손을 꼭 잡자 어느 정도는 결심이 선 듯했고. 그리하여 두 사람은 빠르게 수레를 달려 동문 쪽으로 향했다. 삼랑이 서둘러 달려온 탓인지 아직까지 수배를 내리진 않은 듯했다.
문제는 삼랑보다 소식이 빠른 사람이 있다는 거였다. 진해는 익숙한 향내가 공기 중에 섞인 걸 눈치채자마자 얼른 수레를 골목에 갖다 댔다.
“망할!”
혈월대 몇이 동문의 경비와 섞여 있었다. 황궁뿐 아니라 온 나라가 뒤집힐 큰 사건이었기 때문에 황제는 일단 성월공의 사병을 빌리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거기다 재수가 없어도 되게 없는 것이 하필이면 동문에 성월공이 와 있었다. 진해는 바짝 굳어 성월공 앞에 서 있는 경비 대장을 보며 작게 욕을 지껄였다.
이대로라면 동문으로는 절대로 지나갈 수 없었다. 진해는 지금이라도 다른 쪽 문을 알아볼까 생각하며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여차하면 추피동으로 숨어들어 밀출국을 시도해야 했다. 문제는 그때가 되면 해산이 정식으로 수배가 될 것이고, 추피동 놈들이 진해의 재산 대신 현상금을 노릴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었다.
그러던 그때, 어디선가 향긋한 향기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가볍게 킥킥거리는 웃음소리와 달콤한 향내, 매끄러운 선율이 동문 일대에 연기처럼 떠돌았다. 동문 경비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저거, 청려 아냐?!”
휘장이 드리워진 수레에서 내린 건 여해루를 임시로 맡고 있던 옥청려였다. 옥청려는 꽃이라도 휘날릴 듯한 자태로 수레에서 내려 경비들을 둘러보며 아름답게 미소 지었다. 미려만은 못했지만 해국의 음인 특유의 호리호리한 자태가 뭇사람들의 마음을 끌었다. 경비들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청려의 몸에 달라붙었다.
“출국하려 하는데 문을 열어 주시면 아니 될까요?”
옥구슬이 굴러가는 목소리는 진해가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평소 청려의 성정을 아는 진해는 청려가 저런 목소리를 낸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안 된다. 현재 죄인을 잡기 위해 문을 봉쇄하고 있다.”
“죄인이요? 세상에, 얼마나 무서운 죄인이기에. 무서워라!”
진해는 이제 두 손을 들어 눈을 비볐다.
“듬직한 대인들께서 얼른 죄인을 잡아 주시겠지요?”
“크, 크흠! 당연하지!”
“저희는 가진 거라고 이 몸뿐이라. 아앗!”
청려는 발을 헛디딘 것처럼 경비대장 쪽으로 몸을 기울였고 경비대장은 저도 모르게 받아 들었다.
“……나리들께 의지할 수밖에 없어요.”
경비대장의 품에 안긴 청려가 애교스럽게 눈을 휘며 경비대장의 뺨을 쓸었다. 경비대장은 청려 같은 이가 취향이었는지 반쯤 넋을 잃고 있었다. 진해는 청려를 여해루에 맡긴 게 잘한 일인지 못한 일인지 알 수가 없어졌다.
“지금 뭐 하는 거냐.”
하지만 동문에는 성월공 안월산이 있었다. 경비대장이 해롱해롱한 걸 보자 동문을 살피며 혈월대와 이야기하던 월산이 미간을 찌푸리며 다가왔다. 경비대장은 크게 당황해서 청려를 떼 놓으려 했으나 청려는 경비대장의 목에 팔을 감은 채 두렵다는 듯이 몸을 붙였다.
“그, 그게, 혀, 현기증을 내서, 그래서, 바, 받아 주려고!”
“여해루의 기생이냐.”
당황하는 경비대장을 무시하고 월산은 다짜고짜 청려에게 말을 걸었다. 청려는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가 이내 경비대장의 목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렇다면 어쩌실 겁니까?”
“죄인의 무리다. 잡아라.”
“예?”
성월공의 말이 떨어지자 무섭게 청려는 경비대장의 목을 축으로 삼아 반 바퀴 돌았다. 얼빠진 소리를 내뱉었던 경비대장이 컥컥거리며 목을 긁었다. 그와 동시에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던 수레의 휘장이 찢어지며 무기를 든 기생들이 우르르 튀어나왔다.
“아니, 청려 저 애는 애들한테 뭘 가르친 거야?!”
기생들뿐만 아니라 추피동 출신의 문지기 몇도 함께하고 있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삼랑이 바람처럼 달려와 그들의 앞에 섰다. 그리고 삼랑이 눈짓하자 마차에 타고 있던 기생 중 하나가 곱게 칠한 손으로 부싯돌을 부딪치더니 하늘 쪽으로 치켜들었다. 삐익―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붉은 불꽃이 꼬리를 남기며 길게 날아올랐다.
“창놈아! 뭘 하고 있어!!”
불꽃의 꼬리가 미처 사라지기 전에 삼랑이 크게 소리를 쳤다. 진해는 삼랑이 빠져나가지 못한 자신을 위해 이들을 데려온 것임을 깨달았다.
“해산 도련님, 지금이에요!”
청려가 경비대장을 인질로 삼자 경비들이 주춤한 사이에 진해가 해산을 데리고 튀어 나갔다. 여해루 일행들이 그들을 호위하며 문을 여는 도르래로 다가가려는 순간,
“커헉!”
“역도를 놓치지 마라!”
경비대장의 입에서 피가 튀었고 청려의 미간이 있는 대로 구겨졌다. 경비대장의 배에는 혈월대의 표식이 새겨진 암기가 꽂혀 있었다. 성월공이 경비대장을 처분하자 허옇게 질린 경비들이 필사적으로 일행에게 달라붙기 시작했다.
“해, 해산 도련님! 위로, 위로!”
“씨발, 존나 많네!”
얼마 안 되는 기간 동안 가르친 것치고는 여해루의 일행들은 아주 잘 싸웠다. 문을 열지 못하게 된 걸 확인한 진해는 경비들을 밀치며 성벽 위로 향했고 여해루의 일행들과 삼랑이 그들의 뒤를 봐주었다.
“해야, 뭘 어쩌려고!”
“삼랑아, 그 불꽃, 미려지!?”
“그래, 씨발! 그 개자식이 빨리 와야 할 텐데!”
싸움이라고는 머리끄덩이 잡는 것밖에 모르는 진해와 혼란스러운 해산은 전력이 되지 않았다. 도성의 경비병들과 여해루 일행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수가 많이 달리는 싸움이었다.
붉은 불꽃을 본 다른 곳의 경비들마저 가세하기 시작했고 처음에는 잘 싸우던 여해루 일행들이 부상을 입거나 제압당해 하나하나 수가 줄기 시작했다. 추피동의 문지기 몇과 청려, 삼랑과 진해, 해산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던 그때, 녹색 불꽃이 성문 밖에서 쏘아졌다. 진해는 말하지 않아도 그것이 미려의 신호라는 걸 눈치챘다.
“야! 짝퉁 개새끼!”
“돌았습니까! 양아치 위사!”
경비병 하나를 발로 걷어차 성벽 아래로 떨어뜨린 청려에게 삼랑이 소리쳤다. 청려는 아주 적절한 답을 돌려주었다.
“네가 먼저 뛰어내려! 네가 먼저 뛰어서 뒈지는지 아닌지 확인해!”
“빌어먹을! 말을 해도 꼭 그런 식으로 해야겠습니까! 그러니까 아직도 장가를 못 가지!”
“이 새끼가!?”
칼날이 오고 가는 상황에서도 진해는 청려의 언변에 감탄했다. 혓바닥으로 삼랑을 닥치게 하는 이는 세상에 몇 되지 않았고, 허세가 아닌 진심으로 대꾸하는 이도 정말로 몇 되지 않았다. 심지어 미려도 삼랑과 입으로 다투다 주먹을 치켜들기 일쑤였던 것이다.
“먼저 갑니다!”
그러나 말로 다투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청려는 삼랑의 말을 따랐다. 진해가 청려에게 뭐라고 하기도 전의 일이었다. 청려가 과감하게 성 밖으로 뛰어내리자마자 진해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채 슬쩍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과연 아래쪽에는 이런 경우를 대비한 것인지 일도 형제들이 수레에 짚을 가득 채운 채 기다리고 있었다. 이단이 이제 막 수레에서 일어난 청려를 끌어내리는 중이었다.
“해, 해산 도련님 뛰세요!”
“해아, 너는!”
“도련님이 뛰셔야 저도 뛰죠!”
“씨발 놈들, 난 보이지도 않냐!”
성벽 위는 이제 경비병들로 가득 차 한 발짝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우세를 점하고 일행을 포위했던 경비병들은 청려가 뛰어내리자 황급히 포위망을 좁히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창이 금방이라도 진해의 등을 찌를 듯했다.
“아, 안 된다!!!”
하지만 그들이 진해를 찌르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으니,
“해, 아니, 오, 오 어사를 다치게 하면 안 된다!! 오 어사가 털, 끝! 하나라도 다치면 내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 네놈들의 뼈와 살을 갈라놓을 것이야―――!!!!”
혈월대의 대장에게 붙들린 채로 노성을 토하는 창명후 강절곤 때문이었다. 강절곤이 어찌나 거세게 버둥댔던지 강절곤의 나이 반 토막도 안 되는 혈월대 대장이 휘청거리다 못해 다른 이를 불러 그를 붙들 정도였다.
성월공은 몰라도 월국군에서 창명후 강절곤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사실상 군의 사령관이나 다름없는 인물이었다. 그런 창명후가 뼈와 살을 친히 분리하겠다고 했다. 창명후의 성정은 좋은 말로는 강직, 속된 말로는 뒤끝 있었다. 한마디로 한다면 하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오 어사는 사로잡되 다른 놈들은 죽여도 좋다.”
“해, 해원공 마마도 말씀이십니까?”
“창.”
“예?”
월산은 날뛰는 강절곤을 바라보다 옆의 병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병사가 얼떨떨하게 있자 혈월대 중의 하나가 창을 뺏어 월산의 손에 쥐여 주었고 월산은 창을 꽉 틀어쥐며 그대로 자세를 잡았다. 창을 쥔 그의 손등에 질긴 힘줄이 도드라졌다.
“아악!”
월산의 손에서 창이 떠나자 해산의 곁에 있던 추피동 출신의 문지기 하나가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창에 배를 꿰뚫린 그는 비틀거리다가 그대로 성벽 아래로 떨어졌다. 강렬한 피비린내에 진해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질리기 시작했다.
휙 돌아보자 월산이 다음 창을 손에 쥐는 걸 볼 수 있었다. 진해보다 키가 작은 월산은 자신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창을 자신의 무기로 삼은 모양이었다. 창을 던지는 품이 한두 번 던진 모양새가 아니었다. 거기다 맞추긴 또 얼마나 잘 맞추던지 이번엔 해산의 다른 쪽에 있던 이의 옆구리가 터져 나갔다. 그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스르륵 주저앉았다.
좌우가 비었으니 이제 더는 해산을 보호해 줄 사람이 없었다. 구리 채찍으로 경비병의 창날을 막아 내던 해산과 진해의 눈이 마주쳤다. 시간이 멈추는 것 같았다. 찰나가 백 년처럼 흐르고, 모든 소리가 느릿하게 흘러갔다. 월산은 해산을 죽일 것이었다. 심문 따위 하지 않고 이 자리에서 숨을 끊을 셈이었다. 진해의 눈꺼풀 위로 창에 꿰뚫린 해산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안 돼!!”
진해는 어디서 그런 순발력이 솟았는지 해산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바닥으로 넘어졌다. 그 위로 맹렬한 기세의 창이 스쳐 지나갔다.
“해아―――!!!!!”
진해가 넘어지는 걸 본 강절곤이 피가 터져라 외쳤다. 강절곤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솟고 그는 더는 참지 않고 혈월대의 대원 중 하나에게 주먹을 날렸다. 뻑, 경쾌한 소리와 함께 대원이 쓰러지고 질겁한 다른 이들이 강절곤에게 다닥다닥 달라붙었다.
“놓쳤군. 다음.”
옆에서 무슨 소란이 벌어지든 말든 월산은 다음 창을 거머쥐었다. 진해는 해산을 제 뒤에 꼭 밀어 넣은 뒤에 양팔을 벌렸다. 자신은 생포하려고 하니 이판사판 삼세판이라는 심산으로 그리한 것이었다. 하지만 진해는 월산을 얕보고 있었다.
“큭.”
진해의 머리 위로 솟은 해산의 머리 위로 창이 스쳐 지나갔다. 저 거리에서 이 정도면 맞춘 거나 다름없었다. 해산의 머리칼을 고정하던 관이 박살 나고 해산의 머리칼이 나풀나풀 흘러내렸다. 진해의 등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들었다.
“찔러 봐! 찔러 보라고!”
다행스러운 건 경비병들이 진해가 해산을 필사적으로 막은 탓에 주춤거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해산 도련님, 뛰어요!”
“해아 너를 두고 갈 순 없어!”
“아, 도련님이 가야 내가 간다니까요!”
“아, 씨발!! 좀 뛰라고!!”
결국 참다 못한 삼랑이가 해산을 성벽으로 거의 던지다시피 밀어 버리고,
“해야―――!!!”
해산은 진해를 부르며 성벽 밖으로 떨어졌다. 진해는 해산이 거지가 될까 봐 허둥지둥 묶고 있던 보따리를 함께 던졌다. 이윽고 삼랑과 진해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옆에 있던 이들이 하나씩 뛰어내리고,
“형!!! 형!! 어서 뛰어내려!!!”
성 밖에서 미려의 애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삼랑은 쇄도하는 창날을 힘겹게 쳐 내며 진해에게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진해는 그 눈을 보자 더더욱 혼자 뛰어내릴 수가 없어졌다. 어떻게 삼랑이를 두고 혼자 뛰어내리라는 건지.
“사, 삼랑아! 난 괜찮으니까!”
“괜찮긴 뭐가 괜찮아 씨발! 같이 뛰면 되지!”
“아.”
고민했던 게 바보 같을 정도로 삼랑은 명쾌히 답을 내리고 경비병들을 떠미는 동시에 진해에게로 달려왔다. 진해 역시 삼랑에게로 내달렸고 곧 둘의 손이 맞닿을 듯했다.
땀에 젖은 옅은 색 머리칼이 햇빛에 반짝였다. 늘어진 옷 사이로 문신이 검은 자개처럼 번들거렸다. 진해는 삼랑이 괜찮은 음인이라고 생각했지만 저를 이리 위하는 이인 줄은 알지 못했다. 그냥 삼랑이 자존심이 다락처럼 높아 저를 포기하지 못하는 줄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게 사랑이 아니라면 뭐가 사랑일까. 이렇게 저를 위하는 이를 어찌 그냥 못 본 척할까. 진해는 이제 일이 성공했다는 기쁨에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드리웠다.
“커헉!”
삼랑이 입에서 피를 토하기 전까지는.
“삼랑아!!!!”
“잡아!!!!!”
가장 거칠게 반항하던 삼랑이 옆구리가 뚫려 쓰러지자 경비병들이 순식간에 몰려들었다. 바둥거리는 진해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순식간에 사지를 포박했다.
“읍, 으읍!!!”
삼랑은 비틀대다가 다시 한번 피를 토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흐릿해진 옅은 색 눈동자가 진해를 향해 있었다. 삼랑 외 다른 일행들이 제압당하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누군가가 진해의 뒷목을 내리쳤고, 진해는 그대로 어둠 속으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피를 흘리던 삼랑의 모습이 낙인처럼 진해의 머릿속에 또렷이 아로새겨졌다.
* * *
의식을 잃은 진해가 어디론가 끌려가고 성월공의 감독하에 남은 이들의 즉결처분이 시작되었다. 가장 큰 죄인인 안해산을 놓쳐 성월공의 기분이 심히 좋지 않은 탓이었다.
“그만.”
그런 일행을 도운 건 고산국의 차기 패왕, 고산패자 제갈군무였다. 성월공은 제갈군무가 오거나 말거나 손을 흔들어 여해루 기생 중 하나의 목을 치게 했다.
“고산국이 법 없기로는 유명한데 월국도 만만치 않은데그래?”
“고작 패자 주제에 말이 짧군.”
“그 고작이라는 게 춤 한번 춰 보려는데 맞춰 주시려나? 고작 황손 나부랭이 마마.”
고산패자는 일당백을 자랑하는 고산국 무인들의 정점이었다. 그런 패자가 작정하고 난동을 부리면 성월공의 안위가 위험해질 터였다. 혈월대의 대장이 저도 모르게 검 손잡이를 그러쥐었다.
“심문할 놈들은 남겨 놔야 될 거 아냐. 특히 쟤. 저 애는 지금 치료 안 하면 죽겠는데? 북방의 악귀가 설국왕의 머리를 날렸다더니 저런 식으로 했나 보지? 우리 해아가 알면 참 좋아하겠어.”
제갈군무가 가리킨 건 의식 없이 쓰러져 있는 삼랑이었다. 그의 말대로 삼랑의 옆구리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쏟아져 지혈하지 않으면 손 쓰지 않아도 숨이 끊길 것만 같았다.
게다가 제갈군무의 뒤에는 반투명한 천으로 얼굴을 가린 이가 서 있었다. 월산은 이미 그와의 만남을 통해 그가 누구인지를, 무엇을 알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치료해라.”
그렇기에 마지 못해 제갈군무의 의견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만약 제갈군무 혼자만의 의견이었다면 안월산은 월국 황실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결코 제갈군무의 말을 따르지 않았을 것이다.
“해원공 마마님은 어디 계십니까.”
“도망쳤다.”
“일부러 놓치신 게 아니시구요.”
“일개 백성이 알 일이 아니다.”
안월산이 차갑게 일별하자 제갈군무가 그를 보호하듯이 앞에 섰다.
“일개 백성이 아니라 내 사형이지. 월국을 구한 영웅이자 차기 장강성 성주기도 하고. 말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성월공. 난 이번 일의 추이에 따라 월국과의 전쟁도 불사하겠어. 우리 사부는 나보다 성질이 더러우면 더러웠지 자상하지 않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군. 아, 대사형한테 미련이 줄줄 넘친다는 것도 말이야.”
고산패자가 전쟁이란 말을 꺼내자 주변의 분위기가 싸하게 얼어붙었다. 고산국은 혈연이 희미한 대신 사문과의 연이 끈끈해 사문의 일원이 해를 입으면 땅끝까지 쫓아가서라도 복수를 했다. 패왕의 허락을 받지 않고 고산국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경우였다.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여는 아직 그대를 강백서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창명후가 인정한다면 여 역시 그대를 그에 맞는 예로 대우할 것이다. 강해아와 여가 혼약을 맺는다면 더욱 그러하겠지.”
“…….”
회씨, 아니 강백서는 천을 덮어쓴 채로 물끄러미 월산을 바라보았다. 안월산은 황태공 지순의 유일한 혈육이었고, 안지순은 한때 연광, 강백서와 더불어 월국삼옥이라 불리던 이였다. 비슷한 연배의 음인 제후라 더욱 친하게 지낼 수 있었다. 지순은 회임한 백서에게 찾아와 여러 가지 선물을 주기도 했었다.
“그럼 제가 신분을 확실히 하는 것이 우선이겠군요.”
“그렇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리하지요.”
천진하고 밝은 성정으로 황실의 막내 노릇을 톡톡히 했던 지순과 달리 월산은 서릿발이 날릴 정도로 냉랭했다. 백서는 제 벗과 닮은 이목구비를 했으나 너무나도 다른 월산을 볼 때마다 씁쓸한 감정이 드는 걸 참을 수 없었다.
“……그런데 해아는 어디 있습니까.”
여기서 더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걸 확인한 강백서는 그대로 창명후 저택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하지만 그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흉터처럼 남은 이가 있어서.
“여의 궁에 있다.”
“그렇군요.”
강백서는 아들이 창명후 저택이 아니라 성월공이 하사받은 별궁에 있다는 소식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와 동시에 물건처럼 끌려가는 삼랑을 바라보았다. 오 어사 저택에서 삼랑과 이야기하는 진해는 즐거워 보였다. 삼랑이라는 이름의 저 아이가 손이 거칠기는 했지만 진해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건 틀림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저 애를 살려야 했다. 못난 자신이 없는 동안 해아의 빈자리를 채워 준 저이의 목숨을 이어 주어야 했다.
“칠 사형 . 슬쩍 봤는데 비껴가서 당장 죽지는 않을 것 같아. 하지만 당분간 운신은 힘들겠는데?”
“사람의 운명은 하늘에 달린 것. 일단 살고 나서 볼 일이다. 그런 것보다 너. 대사형이 주변에 오지 못하게 잘 감시하고 있겠지?”
“그렇다니까, 좀 믿어 줘. 그것보다 정말…… 괜찮겠어?”
“괜찮지 않을 게 또 뭐냐. 각인은 해소된 지 오래야.”
덩치는 저보다 커졌으면서 여전히 강아지 같은 막내 사제의 등을 두드리며 강백서는 일단 창명후 저택으로 가기로 했다.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줄 알았는데 정신이 들고 보니 아버지도, 저택도 모두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단지 해아만이 그 자리에 없었다. 천협도 사라진 후였다.
“일이 끝나기 전에는 죽어도 죽지 않아. 다른 건 몰라도 해아를 제자리에 돌려놓고 죽을 것이다.”
“왜 그런 소리를 해. 영약 먹으면서 정양하면 금방이라니까. 그나저나 약속 잊지 마. 해아가 인지 받으면 나랑 같이 고산국으로 돌아가는 거야? 응?”
“……그래.”
거기다가 황후 사마계는 오롯이 국우부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버림받을 줄 알았던 이가 슬하에 해원공이라는 음인 황자를 둔 채 황제의 유일한 음인으로 군림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다른 것보다 그게 가장 큰 의문이었다. 강백서가 아는 사마계는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 가지처럼 가녀린 이로 원귀비인 연광이 지나가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꼴사나운 이였다. 연광은 그런 황후를 가엽게 여겼지만 결과는…….
“사마계.”
살짝 비틀거리던 강백서는 제갈군무의 부축을 받으며 수레에 올라탔다. 그의 입술에서 이번 일의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이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그런 강백서를 지켜보는 제갈군무의 표정이 마냥 밝지만은 않았다. 그는 저 멀리서 느껴지는 시선을 향해 불평하듯 거한 한숨을 내쉬었다.
* * *
진해는 아릿하게 느껴지는 통증과 함께 눈을 떴다.
“으으, 어떤 오라질 놈이 사람을 이렇게…….”
그리고 정신을 차림과 동시에 강렬한 피비린내를 느꼈다. 이곳이 아닌 진해의 머릿속에서 나는 냄새였다.
“사, 삼랑이! 삼랑이는!!”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던 삼랑을 생각하자 번쩍 눈이 떠졌다. 진해는 목 뒤에서 느껴지는 통증을 무시하고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언젠가 진해가 옥첩려를 파멸시키고 갇혔던 뇌옥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더 호사스러운 생김새를 했다.
“삼랑아!!”
하지만 너른 방의 어떤 곳에도 삼랑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가뜩이나 구질구질하고 엉망인 진해의 낯이 더욱 초췌해졌다. 진해는 바깥으로 뛰쳐나가려다 벽 한쪽을 차지한 창살에 가로막히는 신세가 되었다.
“내보내 줘!! 내보내 달란 말이야!!! 삼랑아!! 우리 삼랑이를 어쨌어!! 소월!! 소월을 불러 줘!! 삼랑아!!!”
여기가 어딘지는 모르지만 진해는 자기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높은 사람인 월산에게 부탁해 이곳을 빠져나가려 했다. 하지만 진해가 소리를 치고 난리를 피워도 간수는커녕 경비 하나 오지 않았고 진해는 곧 기운이 빠져 바닥에 스르륵 미끄러졌다.
성벽에서 버티느라 손등에 못 보던 생채기들이 생겨 있었다. 그러나 그런 아픔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삼랑이가 걱정되어 견딜 수 없었다. 일단 살았는지 죽었는지부터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죽었으면 어쩌지, 우리 삼랑이 아직 혼인은커녕 누구랑 손도 못 잡아 본 총각인데!”
손은 아니지만 멱살은 몇 번 잡혀 봤었다. 은근슬쩍 선을 넘을 뻔하기도 했었다. 일부러 방치하는 놀이가 아니고 진짜로 달궈 놓고 도망친 건 삼랑이가 처음이었다. 진해는 닭똥 같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서 이럴 줄 알았으면 하고 후회하며 삼랑이와의 추억을 회상했다.
“흐어엉, 있을 때 잘했어야 했는데! 미안해, 삼랑아! 근데 네 주먹이 너무 아팠어!!”
결국 진해는 일가붙이 없이, 제사 지낼 피붙이 없이 죽은 삼랑이를 가여워하며 통곡하기 시작했다. 눈물 콧물 흘리며 우는 모양새가 꼭 신랑을 잃은 꼬락서니였다.
[끼익.]
바깥쪽 문이 열린 건 진해가 주저앉아 엉엉 울고 있던 때였다. 진해는 너무나 열중해 우느라고 문이 열리고 누군가 뇌옥 안으로 들어온 줄도 눈치채지 못했다. 주렁주렁 매단 콧물을 소매에 대고 대차게 풀자 그제야 눈앞이 훤해졌다.
“아이고, 깜짝이야!”
창살 앞에는 긴 천을 정수리부터 뒤집어쓴 이가 서 있었다. 손끝 하나 보이지 않게 덮어쓴 모양새가 긴 천이 허공에 떠 있는 것만 같았다. 잠깐 놀랐던 진해는 그 천이 눈에 매우 익숙하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진해가 회씨라고 이름 붙인 이의 모습이었다.
“회씨!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나는 회씨에게 최선을 다했는데!”
진해는 바닥에 주저앉아 울음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회씨를 올려다보았다. 콧물을 훌쩍거리는 모양새가 스물여섯이 아니라 영락없는 여섯 살배기였다. 회씨는 그늘진 천 속에서 진해를 내려다보다 소리 없이 스르륵 진해를 향해 몸을 굽혔다. 진해와 눈을 맞추려는 심산인 듯했다.
“나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단다.”
“그럼 뭘 생각, 응? 회씨 말 잘하네?”
“잠춘동 집에 갔을 때부터 기억이 돌아오기 시작했어. 그전에는 오직 살아남는 것만 생각했지. 또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만.”
회씨는 진해의 동그래진 눈앞에서 천을 조금씩 벗어 내렸다. 진해가 회씨의 온전한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아버지께…… 이야기 들었다. 기억이 온전하지 않다지?”
“아버지?”
“파각을 당하지 않았어도 이십 년이나 세월이 흘렀으니 기억이 나지 않는 것도 당연하지.”
“회씨,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솔직히 놀랐단다. 난 잠춘동 은신처가 멀쩡히 있어서 시간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은 줄 알고 있었거든.”
“은신처?”
회씨는, 강백서는 주저앉은 채 제 말에 어리둥절해진 진해를 보며 엷게 미소 지었다. 엷은 미소는 곧 회한과 고통이 서린 것으로 바뀌었다. 그곳으로 굴러떨어졌을 때부터 줄곧 하나만을 생각했다. 억울하게 죽은 친우인 연광에겐 미안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단 하나만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돌아가야 한다. 잠춘동 은신처로 돌아가야 한다.
굶주림과 갈증, 추위 속에서 간신히 목숨을 연명하는 동안 강백서의 뇌리에는 은신처에 남겨 두고 온 해아만이 가득했다. 자신이 없으면 물 한 사발 떠먹지 못하는 가녀리고 연약한 아이가.
장강성의 후사로 태어나 온 집안의 사랑을 받으며 금이야 옥이야 자라 온 아이였다. 도성의 내로라하는 가문들도 해아가 지나가면 길을 비켜 줄 정도였다. 성정이 순하긴 또 얼마나 순한지 지나가는 이가 있으면 반드시 한 번은 안겨야만 했다. 안겨서 볼을 비벼 그이의 입에서 웃음을 얻어 내고 나서야 만족하고 가던 길을 갔다.
착하기는 어찌나 착한지 갑자기 집을 나와 배를 곯고 맛없는 것을 억지로 먹게 되어도 결코 보채거나 하는 법이 없었다. 갑작스러운 추격에 노숙을 하게 되어도 제 아비가 추워 보인다고 걱정을 하는 아이였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잠춘동 은신처의 위치는 자신이 아닌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근방에서 황후의 아이를 양육하던 궁인을 처치하고 뺏은 아이를 숨기기 위한 임시 거처였다. 게다가 강백서의 가장 큰 기반인 아버지 창명후가 심문받고 있었다. 원귀비의 아버지인 연재균과 얽힌 이가 많아 심문만 근 반년을 넘어가고 있던 때였다.
월국의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고산국에서 오는 소식도 받을 수 없었고, 보낼 수도 없었다. 만약 자신이 위험에 처한 걸 안다면 오천협은 당장에 고산패자 자리를 받아들일 것이고 그러면 나라는 또다시 전화에 휩쓸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강백서는 돌아가야만 했다. 해아를 위해서 반드시 돌아가야만 했었다.
“황후에게 자백을 듣고 돌아갈 셈이었다. 내가 아군이라고 생각한 이가 있었거든.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지. 솔직히 내 무공을 과신한 것도 있어.”
“……잠깐만.”
“옥길합에게 서신을 보낸 것도 그 때문이었단다. 나도 자식을 가진 입장이었으니 죄 없는 아이를 죽일 수는 없었어. 그래서 해국으로 보내려고 했지.”
“다, 당신!”
진해는 그제야 회씨가 누구인지 퍼뜩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후다닥 일어나 얼른 몇 걸음 물러섰다. 강백서는 자신과 거리를 벌리는 진해를 조금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가, 가만 있어 봐. 잠춘동 집이 은신처였다고? 아하! 그래서 미려가 거기 있었군! 그럼 우리 우부는……?”
강백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 우부는 어디 갔어! 우리 좌부가 오천협이랑 연이 있어서 미려를 봐줬던 거지?”
……그냥 말을 할 걸 그랬다.
강백서는 회씨로 지내는 동안 진해를 지켜보며 진해가 똑똑한데 가끔 엉뚱한 짓을 한다고 생각했다. 더 신기한 건 그 엉뚱한 짓 때문에 일이 풀리기도 한다는 점이었다. 통곡하다 못해 실신했던 강절곤은 진해가 역도를 잡아 관직에 올랐다고 말해 줬었다. 좀 떳떳하지 못한 수단을 썼지만 훌륭히 제 앞길을 개척했다고.
“고산홍패.”
“내 목걸이가 왜.”
“금방 갔다 올게. 조금만 기다리면, 아버지와 만날 수 있어. 그러면 할아버지와 만나는 것도 금방이야. 얌전히 있으렴, 해야. 만약 내가 오지 않으면 앞집의 오씨를 친척이라고 하렴.”
“……어?”
“이건 기억나니?”
몇 걸음 떨어졌던 진해는 강백서가 해아의 목에 고산홍패를 걸어 주며 말했던 말을 읊조리자 얼굴이 굳었다. 진해는 강백서를 멍하니 바라보다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잠춘동 은신처에서 처음 주먹밥을 만들었던 건 기억하니? 나는 요리라고는 해 본 적이 없어 밥을 동그랗게 말지 못했어. 반면에 우리 해아는 크기는 작지만 야무지게 둥근 것도 만들고, 세모난 것도 만들었었지.”
“……아빠는 오각형을 만들었었어.”
“나는 볶은 고기를 넣고 싶었지만.”
“우리 집엔 고기가 없어서 소금과 말린 고사리 자른 걸 넣었지.”
“우리 해아는 혼자 화장실을 가지 못해서.”
“미려를 업고 화장실을 가려고 했어. 아빠가 곤히 자는 걸 깨우기 싫었으니까.”
강백서와 진해는 조금씩 서로가 아는 기억의 조각을 맞춰 나갔다. 말을 나누면 나눌수록 진해와 강백서의 거리는 줄어들었고, 진해는 나중에는 아예 창살에 바짝 매달려 있었다.
“으읏…….”
어느새 둘의 뺨은 눈물로 잔뜩 젖어 있었다. 진해는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이 비참하고 참혹한 몰골을 가진 이가 자신의 우부라고. 자신이 오랫동안 그리워하고 원망했던 이는 자신을 버린 것이 아니라 오고 싶어도 오지 못했던 것이라고. 자신은 줄곧 사랑받고 있었다고.
“아빠……, 아빠…….”
진해의 머릿속에서 갈기갈기 찢어졌던 기억이 조금씩 채워지고 있었다. 그리운 향, 그리운 체온, 그리운 얼굴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향은 같아도 얼굴은 너무나도 달랐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비쩍 마른 얼굴은 진해의 머릿속에서 단정하게 웃고 있던 이와 너무도 다른 생김새였다.
“해아, 미안하다……. 내가,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무엇보다 네 곁에 있는 걸 첫 번째로 하지 못해서…….”
“아니야, 아니야! 내가 더 잘못했어, 나는 아빠가 날 버리고 간 줄 알았어!”
강백서가 눈물을 흘리면서도 거칠게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 둘은 말도 못 하고 서로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욕심부리지 말고 널 고산국에 보냈으면 너를 고아로 만들지 않았을 텐데, 흣, 네가 고생하면서 살지는, 흐윽, 않았을 텐데…….”
전장을 누비면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던 강백서였지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고귀한 핏줄을 한 몸에 이어받은 귀공자가 빈민가에서 갓난아이를 키우면서 힘겹게 살아온 걸 생각하자 도저히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혼자 이렇게 번듯하게 컸다고 생각하니 절로 눈물이 쏟아졌다.
“흐어엉, 아빠― 그럼 나는 오씨가 아닌 거야?”
진해는 울다가 물었다.
“어엉, 잠깐만, 아빠가 강백서면, 후어엉, 내가 강해아야?”
딸꾹딸꾹 딸꾹질을 하면서도 물을 건 다 물었다.
“그래, 해아. 너는 장강 강씨의 적통 후사인 강해아야. 네 좌부인 천협이 오씨이니 오씨가 아닌 건 아니지만 천협은 본래 우리 집 데릴사위로 들어오기로 했으니 너는 강씨가 맞는 거야.”
“허어엉, 그 영감탱이가 내 할배라니―”
강백서가 자신의 아버지면 자동적으로 그 꼬장꼬장한 강절곤이 자신의 할아버지가 되는 셈이었다. 진해는 할아버지가 생긴 게 기쁘긴 한데 강절곤한테 그간 몹쓸 짓을 한 게 떠오르면서 양심이 따끔거렸다. 게다가 자신은 강절곤보다 자신이 더 오래 살 거라는 패륜적인 말까지 하지 않았던가.
“근데 아빠.”
강절곤이 할아버지라는 생각을 하자 엉엉 울던 진해가 조금 차분해졌다. 절대로 대전에서 강절곤의 발을 건 게 생각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아빠는 대체 왜 우물에 있었던 거야? 아까 황후의 자백이라는 건…… 해산 도련님 이야기 맞지?”
“응, 그렇단다. 우리 해아는 영특하구나.”
“미려가 내 동생이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까…….”
비쩍 마른 손이 제 뺨을 쓰는 걸 느끼며 진해는 두 눈을 깜박였다. 속눈썹에 매달려 있던 물기를 꾹 짜냈다.
“근데 아빠. 아빠가 왜 황후의 일에 끼어든 거야? 아빠랑 황후는 아무 관련이 없잖아. 아빠는 오히려 원귀비와 친분이 있지 않아?”
눈이 퉁퉁 붓기 시작한 진해가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묻자 강백서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이 이야기를 지금의 해아에게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고민도 잠시, 강백서는 해아를 이 사건에서 떼기에는 너무나 깊이 얽혔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무엇보다도 해아는 안해산과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황후가 아이를 바꾼 사건과 원귀비, 내 친우였던 연광이 저주의 반동으로 짐승의 아이를 낳은 사건. 두 개는 별개의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의 사건이란다.”
보고 또 봐도 보고 싶은 아들을 바라보며 강백서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쇠약해진 몸은 조금만 감정이 격해져도 눈앞이 아찔해졌다. 오천협을 만나지 않고 제갈군무와 고산국으로 향하기로 한 것도 다 이 몸 때문이었다. 강백서는…… 자신이 얼마 살지 못할 것을 직감했다.
“해아. 하나만 물어보자꾸나. 너는 원귀비 저주 사건에 대해 얼마나 아니?”
“……황태공 지순에게 저주를 해서 짐승의 아이를 사산했고 냉궁에 유폐되어 죽었다는 것밖에는.”
“그럼 해아 너는 원귀비가 왜 황태공을 저주했다고 생각하니?”
“으음. 아무래도 가장 강력한 차기 후사를 제거하기 위해?”
강백서는 진해를 앞에 두고 피식 웃음 지었다. 보는 진해가 저도 모르게 오싹해질 비릿한 조소였다.
“그렇다면 하나만 더 묻자꾸나. 해아 너는 저주라는 게 실존한다고 믿니?”
강백서의 물음에 진해는 대답을 미뤘다. 사실 진해도 이성적이라고 평해지는 황제 회순이 하필이면 저주라는 죄목을 붙인 것이 의아한 참이었다.
“……아니, 그냥 단순한 분풀이겠지. 지순 황태공의 자살에 대한.”
“사람이란 때론 너무나 감정적이라 터무니없이 사람을 사지에 몰아넣기도 하지. 나는 처음엔 연광이 지나친 부담과 압력 때문에 사산을 했다고 생각했었어. 달이 차지 않은 아이를 낳았으니 사람의 형상으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이렇게 생각하고 너와 은둔하려 했지.”
강백서의 눈은 이제 진해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과거에 아주 우연히 발견했던 궁인의 뒤를 쫓고 있었다. 언젠가 황궁에서 원귀비와 산책할 때 스쳐 지나갔던 이였다. 덜덜 떠는 황후를 보듬듯 끌어안고 연광을 무섭게 노려보던 이기도 했다.
어째서 쫓아갔는지 몰랐다. 황후 아래서 안정된 생활을 누리는 이가 미복 차림을 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강백서는 그의 뒤를 쫓았고, 그가 으슥한 빈민가로 숨어드는 것을 보았다. 사람에게 들키지 않을 곳에 해아를 숨겨 둔 그는 궁인이 잠깐 변소에 가는 틈을 노려 그를 제압했다. 그리고 그를 심문하기 위해 끌고 간 집 안에서 아주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양인 아기였단다. 아직 젖도 다 떼지 않았는데도 이목구비가 뚜렷한 어여쁜 아기였지. 해아 너도 알겠지만 궁인들은 대부분이 중인이라 자식을 갖는 경우가 드물어. 양자를 들이더라고 젖먹이를 들이는 경우는 더욱 드물지. 게다가 아기는 서해 옥가의 증표를 강보로 쓰고 있었어. 나는 그 애가 누군지 눈치챘고, 궁인을 심문해 확답을 받았단다.”
그리고 그 순간, 강백서는 소름 끼치는 사실을 발견했다. 황후가 낳은 아이가 없어졌는데도 궁에서는 어떤 소란도 일지 않았으며 심지어 거리에는 황후가 적통 후사를 낳았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만약 쌍둥이였다면 굳이 빼돌릴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겹경사라며 더욱 환영할 일이었다.
강백서는 황후의 담대함에 기함했다. 해국과 월국이 종전하는 조건으로 혼인한 이가 간 크게도 아이를 바꿔치기했다. 월국 황실의 대가 끊어질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재균 아저씨는 회순 황제가 지순의 아이에게 황좌를 물려줄 생각이라 했지만 그것도 다 황태공이 건재할 때의 일. 원귀비는 유폐되었고, 황태공은 죽었다. 차기 보위에 가장 근접한 건 바로 황후가 낳은 적자였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황후는 이 월국에서 갓난아기를 조달할 정도로 큰 연줄이 없더구나. 황궁에 들어가는 물자는 철저한 검문을 받지. 황제가 간신히 옥좌에 오른 터라 더욱 그랬어. 붕어하기라도 하면 나라가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었으니.”
그리고 강백서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보다 한 가지 소름 끼치는 사실을 발견했다. 황후는 원귀비보다 진통을 먼저 시작했으면서, 원귀비보다 훨씬 늦게 아이를 출산했다는 사실을.
“원귀비 궁 사람들은 바보예요? 어떻게 아이가 없어진 걸 몰라요?!”
“보통 때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황태공 지순이 죽었어. 화석정군이 황제에게 연광과 지순의 갈등을 고했지.”
“설마.”
“짐승의 아이를 가장 먼저 발견했던 건 황제였단다. 황제가 행차해 산부를 핍박하고 실랑이를 벌였으니 궁인 중 누구도 제정신이 아니었겠지. 조금만 힘을 쓰면…… 아이를 빼돌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야.”
진해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멍해졌다. 동시에 가녀리게만 보였던 황후의 비대한 간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개미 한 마리 못 죽이게 생겼으면서 무려 연적의 아이를 자신의 아이와 바꿔치기했다. 자신의 아이는 궁 밖에 내보내 양육하게 했다.
“자, 잠깐만! 그럼 해산 도련님이 황자야?! 워, 원이면 정실이랑 같은 급이라며?! 저, 적통인 것도 맞는 거네?!”
“그래.”
“그, 근데 해산 도련님은 지금 여기 없는데?!”
만약 해산이 원귀비 소생이 확실하다면 해산은 죄인은커녕 입지가 훨씬 좋아지는 셈이었다. 한마디로 쓸데없이 도망칠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다!
“내가 도망치자고 했는데!”
강백서는 당황해서 허둥지둥거리는 진해를 보며 짧게 한숨을 쉬었다. 허둥지둥대는 모습도 귀여웠지만 사실을 말해 줘야만 할 것 같았다.
“응, 그래서 지금 네가 거기 있는 거란다.”
진해는 새삼스레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철창이 거대해 보였다.
* * *
끝내고 싶지 않던 우부 강백서와의 해후는 강제로 끝이 났다. 월산이 보낸 사람이 강백서의 건강을 이유로 그를 돌려보냈기 때문이다. 백서 대신 자리에 남은 건 월산의 측근인 혈월대의 우두머리였다. 그는 다른 쪽 소매에도 팽 코를 푸는 진해를 매우 찝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뭘 봐! 할 말 있으면 하고 꺼져!”
딱히 친하게 지내고 싶은 생각이 없는지라 진해는 바닥에 주저앉아 껄렁하게 지껄였다. 혈월대의 우두머리인 그는 조금 욱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거한 한숨과 함께 진해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의 주공인 성월공 안월산이 진해와 혼인할 의사가 충만했기 때문이다.
더욱 놀라운 점은 그는 진해가 그를 알기 전부터 진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진해가 강해아라는 걸 안 게 아니라 진해가 월산과 각인했던 양인이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미래의 주부군께 인사 올립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저는 혈월대의 우두머리를 맡고 있는 자로, 이름은 딱히 없습니다.”
“그럼 소개는 왜 해?”
“주공께서는 보통 두(頭)야라고 부르십니다만 주부군께서는 다르게 부르셔도 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작고하신 제 조부께서 돌아가신 지순 황태공의 유부셨습니다.”
“잠깐, 지순 황태공의 유부면?”
자신의 두, 즉 머리라고 소개한 우두머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순 황태공의 유부는 사가에 내려온 월산에게 지순 황태공이 그를 낳고 자결했다는 사실을 알려 준 장본인이었다. 한마디로 지순이 자결을 결심하게 만든 장본인이며 월산이 자결을 기도하게 만든 원인이기도 했다.
“이, 이!!!”
그 말은즉, 진해에게 파각사가 오게 된 원인이기도 하단 말이었다.
“그 할방구 어딨어! 내 당장에 요절을 내 버릴 테니!!”
“진작 돌아가셨습니다.”
“뭣!”
“성월공께서 음독하신 날 자책하시며 자결하셨습니다. 제 아버지들께서는 심문을 받아 돌아가셨고, 저는 교형을 선고받고 옥에 갇혀 있다가 성월공께서 저를 쓰시겠다 하시어 풀려난 것입니다.”
“어, 음…….”
죽어도 싼 할아범이라고 욕을 퍼부으려다가 일가붙이가 모조리 옥사했다는 소식에 진해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제 조부지만 아둔한 이였지요. 차라리 지순 황태공의 유부였다는 이력을 세워 유부 자리를 구하거나 다른 집에 시종으로 들어갔다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거늘.”
“그, 그래도 할아버진데…….”
그런데 두가 엄청나게 싸늘한 표정으로 자신의 조부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진해는 그가 그의 할아버지를 비난할 때마다 자신이 강절곤을 욕하던 모습이 겹쳐졌다.
“때로는 몰라도 되는 일이 있는 겁니다. 손자보다도 어린아이에게 굳세게 자라셔야 한다는 헛소리를 일삼으며 가감 없이 알려 주어선 아니 되었던 겁니다.”
“으음…….”
맞는 소리긴 했지만 진해는 자신의 할아버지라면 저렇게 욕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 당장만 해도 그간 강절곤을 욕했던 과거가 후회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얼굴에 흙칠은 안 했을 텐데!
“그, 뭐, 좋은 의도였으니까 난 용서할게! 당신도 조부 덕분에, 어……, 성월공 곁에서 일하고 있고?”
그것이 행운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었으나 진해는 두의 얼굴에 길게 새겨진 흉터를 바라보며 죽은 그의 조부를 용서했다. 원인이기는 했으나 과정까지는 그가 행한 게 아니었으니까.
“그나저나 그 말 하려고 여기까지 왔어? 우리 아빠까지 쫓아 버리고?”
“그런 건 아닙니다만, 어쩌다 보니 쓸데없이 주절거리게 되었군요. 궁인들 사이에서 오 어사를 조심하라는 말이 있더니 듣던 대로입니다. 말 한 마디로 백 마디 진실을 끌어내시는군요.”
“그냥 그간 그 말 할 사람이 없었던 거겠지. 됐고, 아부하러 왔으면 가서 우리 아빠나 다시 불러 주지?”
“흠, 흠. 그럼 이제부터 성월공을 대신해 말씀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진해가 강백서를 내보낸 것에 큰 불만을 표시하자 두는 그제야 제 본래 목적을 말하기 시작했다.
“일단 폐하께서 오 대인의 관직을 거두셨습니다. 오늘부터는 오 대인께서는 그냥 오 공자이십니다.”
“한 방에 얻고 한 방에 가네.”
“본래는 재산도 몰수하시려 하셨으나.”
“안 돼――――!!!!”
“성월공께서 간청드려 그것만은 면하셨습니다.”
“휴~”
“질자인 성월공의 재산이 된다면 참아 주시겠다는 심산이신 듯합니다.”
“뭣.”
진해는 자기 재산이 월산의 소유가 된다는 말에 미간을 팍 찌푸렸다. 소월 그 녀석이 뭔데 자기 재산을 가지네 마네 소리가 나온단 말인가.
“주부군, 그리 노여워하실 게 아닙니다. 성월공께서 주부군을 구명하기 위해 폐하께 무릎을 꿇고 간청하셨습니다. 첫 정각인이고, 곧 혼인할 이이니 황족의 특권으로 용서해 주십사 하고요.”
“어어엉?!”
“물론 폐하께서는 당연히 반대하셨으나― 오 대인도 아시다시피 저희 주공은 한다면 하시는 분입니다. 근 세 시진을 넘게 무릎을 꿇고 계셨습니다.”
“세 시진이나…….”
“결국 황상께서 항복하시고 관직만 거두셨습니다.”
그 콧대 높은 성월공 안월산이 자신을 위해 여섯 시간을 무릎을 꿇고 있었다는 걸 떠올리자 진해의 마음이 복잡해졌다. 한 시간만 꿇고 있어도 감각이 사라지는데 안월산 그 독한 놈은 자길 구하겠다고 그 난리를 친 것이다.
“근데 난 혼인 안 할 거야.”
“하셔야 합니다.”
“각인은 파괴된 지 오래고 난 다른 사람이랑 혼인하기로 했단 말이야.”
“그래도 하셔야 합니다.”
“아니 난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니까?”
목숨을 구해 준 건 고맙지만 혼인할 생각은 없어 진해는 두의 말을 부정했다.
“만약 혼인을 거부하시면 옥에 갇힌 음인이 죽게 될 것입니다.”
“……누구?”
그러나 이어서 나온 말이 진해를 멈춰 세웠다. 진해는 저도 모르게 창살을 움켜쥐었다. 올려다보는 두는 어딘지 모르게 덤덤했다. 주공인 성월공을 쏙 빼닮아 음인인데도 향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교형을 선고받은 날 그의 혼도 함께 죽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사, 삼랑이가 살아 있어? 괜찮은 거지? 지금 어디에 있어!”
“모릅니다.”
“야, 이! 방금 죽게 될 거라고 했잖아!”
“정확히 말씀드리면 성월공께서 손을 쓰시지 않으면 죽게 될 것이란 말이었습니다. 그는 적통 황자의 납치에 관여한 인물. 거기다가 관군에게 무기를 들고 대항했지요. 참형에 처해지는 건 당연한 일 아닙니까.”
“나는 괜찮다며!”
“예. 그러니까 죽는 겁니다.”
“……뭐?”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진해는 차근차근 이어지는 두의 말을 들으며 황제가 지나치게 조용히 넘어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부가 누구인지는 둘째치고 좌부가 확실한, 황제의 자식임이 분명한 해산을 행방불명으로 만들었는데 고문 하나 당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아무리 강해아라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을 순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강해아라면 황제에게 가짜 강해아를 보내 기만한 셈이 되니 괘씸죄가 더해졌다. 성월공이 무릎을 꿇고 죄를 비는 것도 정도가 있었다. 성월공은 죄를 비는 동시에 황제에게 장강 강씨도 구원하고 황실의 체면도 살리는 해결책을 제시했다.
“숨이 끊기기 전에 저자에서 참형에 처하기로 했습니다. 참형에 처한 뒤 시신을 토막 내 풍화될 때까지 성문에 걸기로 했지요.”
“이, 이 개자식!!”
“사랑하는 양인을 대신해 죽는 것이니 그리 한은 없을 것이라 사료됩니다만.”
“삼랑이가 무슨 죄가 있어!! 내가 그랬어, 다 내가 꾸몄어!!”
실종되었던 강백서가 온전치 못한 모습으로 돌아온 이상 장강성은 강해아가 물려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강해아를 죽일 수 없으니 황제는 대중 앞에 세울 희생양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월산은 삼랑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기로 한 모양이었다. 삼랑은 남은 혈육이 없고 출신도 좋지 않으니 희생양으로 삼기에 딱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저희 주공 앞에서 다른 음인과 어울리지 마셨어야지요. 그리되었다면 시신만은 온전히 건질 수 있었을 것인데요.”
아무래도 그것 외에 다른 이유도 있는 모양이었지만.
“큭…….”
진해는 언젠가 봤던 한일의 참담한 모습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한일은 참수를 당해 죽었고, 한이는 정체 모를 괴한에게 살해당했다. 삼랑이마저 사형을 당한다면 형제가 너무나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 것보다도 삼랑은 진해가 좋아하는 음인이었다.
해산과는 다르지만 좋아했다. 어려서부터 봐 온 정도 있지만 독특한 매력과 톡 쏘는 성정은 참으로 매력적인 것이었다. 해산이 알면 진해를 죽도록 두드려 팰 말이었지만 솔직히 손에서 놓기 아까웠다. 저보다 잘난 이가 있다면 맺어 주겠지만 눈을 씻고 찾아봐도 저보다 잘난 양인이 보이지 않았다.
아, 하늘도 무심했다! 세상에 왜 진해를 하나만 내려 주시어 음인들을 괴롭게 만드는지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진해는 삼랑이를 좋아했고 결코 삼랑이 참형을 당하게 둘 생각이 없었다.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거는 음인을 버린다면 그것은 개만도 못한 인간일 터였다.
“……승낙하면 어떻게 되는데. 사실 넌 나한테서 승낙 얻어 가려고 온 거 아냐?”
“이해가 빠르시군요.”
“됐고. 승낙 전에 삼랑이를 봐야겠어.”
“우선 승낙을 하시면 됩니다. 승낙만 하시면 당장 뇌옥에서 벗어나셔서 정군으로서의 권리를 누리실 수 있습니다.”
“밑장 빼지 마라? 삼랑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어떻게 알아. 그리고 너, 음인이라고 했지? 그 음인이 정확히 삼랑이는 맞는 거야? 괜히 다른 애를 가지고 날 농락하는 거 아니냐고.”
“설마요.”
“그럼 삼랑이를 보게 해 줘. 허락은 그다음이야. 이건 절대로 양보 못 해. 내 눈으로 상태를 보고 나서 결정하겠어.”
진해는 결연히 말하고는 두를 뒤로한 채 침상에 가서 몸을 눕혔다. 보라는 듯이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 버리기까지 했다. 두는 진해를 물끄러미 보다가 짧은 한숨을 쉬며 감옥 밖으로 걸어갔다. 진해는 멀어지는 걸음 소리를 들으며 있는 복도 나갈 것이라며 두의 한숨 쉬는 버릇을 헐뜯었다.
* * *
진해의 투쟁은 교활했다. 진해는 자신이 강해아인 이상 그들이 저에게 절대로 상처를 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지금 당장 넘어갈 순 있어도 나중에 창명후에게 쪼르르 달려가 저놈이 날 쳤다고 이르면 성월공과 창명후 사이가 벌어지는 건 일도 아닌 것이다.
“안 먹어!”
“공자님, 조금이라도 드셔야지요.”
“설마 나한테 억지로 먹이려는 거? 맛없는 걸 억지로 쑤셔 넣으려는 거?”
게다가 지금 조정의 상황이 묘하게 돌아갔다.
고산패자가 손님과 함께 황제를 알현한 뒤로 해원공이 도주했다는 걸 온 신료들이 알게 되었다. 어떤 이는 역시 황후가 사통했음이 분명하다 부르짖었지만 어떤 이는 입단속을 하며 상황을 주시했다. 황후가 사통한 것치고 황제가 너무나 조용했기 때문이었다.
황후가 유폐되다시피 한 건 둘째치고, 해원공을 죽이라거나 수배하는 등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게다가 해원공의 후견인이었던 동가대가 그 어떤 때보다도 콧대가 높아 보였다. 해원공이 사통해서 생긴 자식이라면 동가대는 배신감에 거품을 물어야 하는데 그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당당히 돌아다녔다. 심지어 그의 아들인 동십사는 내무부 일등시위가 될 것이란 소문마저 있는 것이다.
이를 주시하던 호부시랑은 마침내 결론을 내렸고, 가산을 아낌없이 풀어 정보를 샀다. 제갈군무와 함께 황제를 알현했던 손님에 대한 정보였다. 그리고 그 손님의 정체를 알아챈 순간 호부시랑 역시 만면에 활짝 웃음꽃을 피웠다. 오진해에게 보은하기 위해 한 투자가 열 배, 백 배로 불어났던 것이다.
황후 소생은 아니었지만 황자였다. 그리고 황적에 기록된 회임은 단 두 건. 건평황후 사마계와 폐비 연광이었다. 황후 소생이 아니라면 황자는 자연히 폐비 연광의 자식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밖에서 들여온 아이일 수도 있지만 전쟁 전부터 도성에 있었던 호부상서는 양인 황자였던 회순이 혼인 전에 간 크게 음인을 만나러 다닐 처지가 아니었음을 알고 있었다.
호부상서가 눈치챈 걸 다른 이들이 모르라는 법도 없었고, 때론 호부상서가 일부러 말을 흘리기도 했다. 폐비 연광의 아버지, 연재균을 잊지 못한 문사가 차고 넘쳤다. 이대로 판을 굳히면 해원공은 도성에 돌아온 순간 태자가 될 수도 있었다. 성월공의 후견인 창명후가 있었지만 창명후가 폐비 연씨의 아버지인 연재균과 어떤 사이인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그랬기 때문에, 성월공은 반드시 강해아와 혼인해야만 했다. 창명후가 자신의 손을 놓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장강성의 후사를 상처 없이 온전히 손에 넣어야만 했다.
“오~? 용감하다~? 지금 내 입에 억지로 쑤셔 넣으려는 건가~? 내 입에 상처 나도 괜찮다는 거~? 아이고!! 거기 누구 없어요!! 사람 살려!! 아악!! 살려 줘!!!”
“고, 공자님?!”
“아버지!!! 할아버지!!!”
“고, 공자님 고정하십시오!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제발, 제발 고정을!!”
잠춘동에서 갖은 인사들과 실랑이를 벌였던 진해의 악쓰는 소리는 성월공의 측근들을 기죽게 하기에 충분했다. 당장이라도 죽을 듯이 넘어가는 소리를 내자 지레 놀라 의원을 부르려고까지 하는 것이다.
“됐고, 삼랑이를 보게 해 줘. 그전까지 안 먹어.”
진해는 난처한 얼굴들을 뒤로하고 보란 듯이 침상 위를 굴렀다. 단식과 함께 갖다 주는 세숫물도 걷어차 버렸다. 감옥 밖에 기척이 들리면 미친 사람처럼 엉엉 소리 높여 울기도 했다. 당연한 말이었지만 진해를 면회하려는 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을 보려는 아버지밖에 없었다.
꼬박꼬박 진해를 보러 오던 강백서는 면회가 거부당하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일단은 죄인의 몸이라 어쩔 수 없다는 핑계도 한두 번이었다. 강백서의 심기가 불편해지자 강백서를 모시고 온 하인들의 심기도 불편해졌다. 그들을 호위하는 무관들의 심기도 불편해졌다.
“사형을 선고받더라도 한 번쯤은 볼 수 있게 해 주는 법이거늘. 난 죽지도 않을 자식 얼굴을 보지 못하는구나.”
강백서가 서릿발이 날릴 정도로 차갑게 읊조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자 곁에 있던 하인이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도, 도련님……! 어찌 이리 가여우실 수가! 흐흑, 우리 도련님……!”
병약해진 과거의 영웅과 늙은 하인이 눈물을 글썽거리는 장면은 보는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창명후에게 충성심이 넘쳐 나는 무관들에겐 더욱 그랬다. 무관들은 간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검 손잡이를 매만졌다. 혈월대의 기무위사들이 와서 대치하지 않았다면 간수들은 겁에 질려 못 이긴 척 그들을 들여보내 줬을지도 모른다.
그러는 한편 오히려 진해를 보여 주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하인들이 진해의 발차기에 소득 없이 빈 세숫대야를 들고 온 지 제법 오래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지금쯤 진해는…….
그리고 과연 간수들의 짐작대로 진해는 너절함의 끝을 달리고 있었다. 식사를 끊어 안색도 좋지 않았고, 머리는 떡이 져서 거지도 이런 상거지가 따로 없었다. 옷도 갈아입지 않으려는 걸 진해가 잠든 틈에 억지로 갈아입혔다. 보는 이가 고역이니 제법 효과적인 투쟁이었다.
“소해.”
어찌나 효과가 탁월하던지 진해가 굶는다는 소식에 진해를 보러 온 월산의 마음도 움직였다. 진해는 기운이 없이 누운 채로 발만 까딱였다.
“아이고, 삼랑아……. 같이 죽자, 내생에는 주먹질 안 하는 착한 삼랑이로 태어나면 내가 그때는…….”
“어떻게 된 거냐. 이 일은 네게 일임한 거로 알고 있는데.”
두는 자기가 듣던 것보다 심각한 상태에 식은땀을 흘렸다. 두는 성월공을 따라간 북벌에서 볼 장 다 본 인간이라 안 씻고 안 먹는다는 이야기를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때가 되면 포기하고 먹겠거니 여겼었다.
그런데 와 보니까 귀공자는 어디 가고 웬 거지가 감방 안에 누워 있었다. 입혀 놓은 옷이 헐렁헐렁한 게 살도 쑥 내린 듯했다. 두도 한가하진 않았지만 성월공은 지금 절체절명의 위기에 맞닥뜨렸고 그렇기에 제 뒤처리를 하는 두에게 진해를 맡긴 터였다. 두는 자신이 잘못한 건 아니었지만 절대로 잘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성월공 휘하에 있으려면 무조건 잘해야 했다. 부귀영화가 문제가 아니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였다.
“죽여 주십시오.”
두는 빠르게 무릎을 꿇었다. 잘못했으면 아랫것답게 빨리 목숨을 구걸해야만 했다. 비는 말이 살려 주십시오가 아닌 것은 두가 그나마 제 밥벌이를 해서였다. 아직까지는 두의 자리를 대체할 인물이 없어서였다.
“소해는 장차 내 정군이 될 이다. 그전에 창명후의 자손이며 장강 강가의 후사이기도 하다. 그런데 일을 이런 식으로 해?”
말이 끝남과 동시에 감옥 안에 뻑 하고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리가 어찌나 끔찍하던지 누워 있던 진해가 저도 모르게 반쯤 몸을 치켜들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으면 죽어야지.”
성월공은 냉담하게 말하며 두를 후려쳤다. 한 대, 두 대, 시간이 지날수록 두의 얼굴이 울긋불긋하게 물들었고, 코며 입에서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진해 앞에서 보여 주기 위해 때리는 게 아니었다.
“아, 거! 자기 사람을 왜 그렇게 패고 그래!”
못 본 척하려고 했으나 진해는 눈앞에서 사람이 맞아 죽는 걸 볼 만큼 강심장이 아니었다.
“말리지 마라. 너를 업신여긴 자다.”
“업신여긴 적 없어! 나한테 주부군, 주부군~ 잘도 부르던걸.”
“그럼 네가 그 꼴을 하고 있으면 안 되지.”
월산이 손을 멈추자 두가 비틀거리다 주르륵 침을 흘렸다. 침보다 피가 더 많이 섞인 타액 속에 부러진 이 조각이 섞여 있었다.
“업― 신 여기진 않는데 말은 안 듣더라고.”
“죽여야겠군.”
“아니 싸가지가 없다는 게 아니라 협상이 결렬됐다는 거야! 말 나온 김에 잘됐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애초부터 중간 관리자인 저놈을 닦달할 것이 아니라 소월에게 직접 말하면 되는 거였다.
“삼랑이랑 만나게 해 줘. 삼랑이랑 만나게 해 주면 밥도 먹고, 잘 씻고, 아빠 앞에서도 별말 안 할게.”
“지금 여와 거래하자는 거냐?”
“애초부터 거래는 네가 먼저 시작한 거였어. 사람 목숨은 비싸. 이 정도는 계약금도 안 될걸? 싫으면 말아. 난 이대로 삼랑이랑 같이 저승으로 떠날 테니. 네가 그치를 때려죽이면 네 손해지 내 손핸가?”
진해는 삼랑아 해로하자라고 크게 외치며 익숙한 자세로 벌렁 드러누웠다. 진해의 밀고 당기기가 먹힌 것인지 더 이상 사람을 패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려오진 않았다.
“그럼 그놈을 보게 해 주면 혼인에 동의할 건가?”
“아이고, 황자 양반! 물건을 살 때는 제대로 보고 사야지! 두드려 보고, 만져 보고, 썩은 구석 없는지 한번 보고! 그런 다음에 물건을 사지 어떻게 눈으로 보기만 하고 사욧! 삼랑이가 완전히 이승 사람 되면 그때 다시 이야기해.”
다소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지금 진해에겐 꿀릴 게 없었다. 자신의 할아버지가 창명후고, 아버지가 무려 강백서와 오천협이란다. 정 안 되면 아빠 앞에서 눈물 짜면서 어릴 때 못 부려 본 어리광 한번 부리면 되는 일이었다. 할아버지한테는 양심이 찔려서 못 그러지만 아버지는 자신을 충분히 도와줄 터였다. 어디까지 도와줄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후후.”
그런데 갑자기 월산이 스산하게 웃기 시작했다. 진해는 또다시 슬그머니 고개만 들어 월산을 바라보았다. 쟤한테 빡치면 웃는 습관이 있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워서였다.
“그래, 너의 그런 점이 좋았지. 너는 언제 어디서나 당돌했어. 처음 만났을 때도 되바라지게 쏘아붙였었지.”
“…….”
놀랍게도 월산은 정말로 즐겁게 웃는 듯했다. 그 얼굴이 예전에 진해가 사랑하던 소월과 똑 닮아 있어 진해는 속에서 쓴 물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때 일만 없었다면 진해는 성월공의 측실이 되든 침방 시동이 되든지 해서라도 함께 있었을 것이다.
“좋아. 그놈을 보게 해 주지. 하지만 그전에 너도 사람 꼴을 갖추는 게 좋을 거야. 충격에 취약한 상태일 테니까.”
안타깝지만 삼랑이는 진해보다 더 더럽고 비루한 이들을 통솔하며 살아왔다. 진해가 다리를 못 쓰게 되도 주워 가겠다는 이였다.
“아, 잠깐만!”
엉망진창이 되어 비틀비틀 뒤를 따르는 두의 등 뒤로 진해가 뒤늦게 소리쳤다.
“솔직히 나 정도 되면 이제 평범하게 시중받을 급은 아니지 않아? 그리고 나 황실 예법도 하나도 몰라!”
두가 멈춰 선 걸 봐서 월산도 멈춰 서서 진해의 말을 듣고 있는 듯했다.
“어조원에서 놀 때 궁인들한테 뜯은 돈이 많은데 예법도 배울 겸 친한 궁인한테 넘기고 싶어! 수행 총관인 산공공을 내 선생으로 붙여 줘!”
창살에 매달려 소리치며 진해는 월산이 제 속셈을 알아챌까 봐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진해가 추측만으로 아는 사실을 월산이 알 리가 없었다. 만약 월산이 알았다면 그걸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을 테니까.
월산과 두는 소리 없이 나갔지만 진해는 월산이 제 청을 받아들였다는 걸 알았다. 동시에 월산이 저에게는 무르게 굴어 기분이 무척 이상해졌다. 파각사를 보낸 게 궁지에 몰려 그랬다는 걸 알자 소월을 무작정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 자기가 지겨워 파각사를 보냈다고 생각했을 때에도 소월과 함께했던 추억만큼은 소중히 여겼던 진해였다.
‘해산 도련님, 어서 돌아와 주세요. 금의환향해서 저 좀 구해 주세요! 제가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르긴 했는데 그래도 좀 살려 주세요!’
이 복잡한 심사를 날려 버릴 수 있는 이는 진해가 홀딱 빠져 있는 안해산밖에 없었다. 진해는 헐레벌떡 들어오는 하인들을 반기며 속으로 어디가 있을지 모르는 해산을 그리워했다.
월산에게 당당하게 거래를 요청했지만 이 거래는 어디까지고 월산이 진해를 곱게 봐 줘서 성립한 것이었다. 진해의 죄를 묻는답시고 면회를 금지해 버리면 강절곤과 강백서는 진해를 도와줄 수 없었다. 월산이 황제 앞에서 진해의 목숨을 구걸해 주었으니 그를 강하게 핍박할 수도 없는 것이다.
게다가 진해와의 혼약을 꺼낸 건 강절곤이 먼저였다. 강절곤은 죽은 친우와의 약조와 살아 있는 월산 사이에서 무척 난처해졌다. 진해가 해산과 좋은 사이고, 해산 외에도 주렁주렁 달고 있는 걸 알아 더욱 그랬다.
만약 진해가 슬하에 있었다면 강절곤이 요령껏 거절을 해 보겠으나 안타깝게도 진해는 월산의 손아귀에 있었다. 강절곤은 혹시라도 자신이 갖지 못하면 다 부숴 버리겠다며 월산이 진해를 해칠까 봐 매일같이 밤잠을 설치고 있었다.
황제는 황제대로 문제였다. 강절곤은 이렇게 된 거 얼씨구나 황후를 폐하고 폐비 연씨를 복원하자 청을 올렸는데 어찌 된 일인지 회순은 아무런 답을 하지 않고 있었다. 강절곤은 일순 황제가 정말 황후를 사랑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바깥이 여러 사람의 득실로 소란스러운 가운데 진해는 감방 안에서 먹고 씻고 싸면서 조용히 생각을 가다듬었다. 그러는 동시에 하나 깨닫게 된 것이 있었으니, 월산이 해산이 사통으로 태어난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해산에게 창을 날렸다는 것이었다.
아니, 오히려 알았기 때문에 죽이려 한 것이다. 어떠한 결점도 없는 직계 황자가 생기면 자신이 보위를 물려받기 어려워져 그리 한 것이다.
진해는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저도 모르게 손바닥으로 팔뚝을 문질렀다. 팔뚝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 있었다. 해산을 도망시킨 게 실책이라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제는 황실의 체면을 위해 이 일을 최대한 조용히(그리는 안 되겠지만) 처리하려 할 것이니 틈을 노려 해산을 해칠 수도 있는 것이다.
‘해산 도련님이 제때 돌아오시면 다행이지만 만약 안 그러면…….’
황제가 해산을 정식으로 원귀비의 소생으로 인지하면 해산은 똥을 칠하고도 비단을 밟으며 걸어올 터였다. 문제는 미려와 일행들이 해산을 어디까지 데리고 갔는지 모른다는 거였고 그들이 해산의 출생을 알 리가 없다는 거였다.
월산도 아마 그 점을 노리고 진해에게 혼인을 강요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해산이 오기 전에 진해와 혼인하면 창명후와 장강성은 어쩔 수 없이 성월공의 편을 들어야 했고 창명후를 따르는 이들도 변함없이 월산의 손에 쥐어지게 될 터였다. 황실과의 혼인이었으니 함부로 무를 수도 없었다. 진해는 꼼짝없이 유부남이 되게 생긴 현실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한데.’
물론 잠춘동의 만재 오진해에게는 이 일을 벗어날 방도가 있긴 했다. 웬만하면 이 방법을 쓰고 싶지는 않다는 게 또 문제였지만. 그래도 월산과 혼인하게 되면 꼼짝없이 해산과 척을 지게 되는 셈이었다. 가뜩이나 복잡한 황실사에 화려한 치정극 한 단락을 쓰게 되는 셈이었다.
그러던 그때, 감옥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진해는 몇 번의 면회로 인해 사람들의 발소리를 대충 구분하게 되었는데 이번의 발소리는 전혀 들어 보지 못한 것이었다.
“오 대인…….”
휙 돌아보는 진해의 콧속으로 희미한 향기가 파고들었다. 이미 알고 있는 진해만 알아챌 수 있을 만큼 희미한 향기였다. 어쩌면 그 사람이 진해에게 향으로 말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산공공! 산공공~! 아, 진짜! 내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
“미천한 노비를 기억해 주시니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진해는 황궁의 수행 총감 소산자를 보자마자 버선발로 침상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산공공 역시 진해를 보자 무척 반가운 듯했다. 산공공을 데려온 간수는 진해가 산공공 앞에서 팔짝팔짝 뛰며 반가워하자 떠돌던 소문이 사실이라며 질겁을 하며 감옥에서 멀어졌다.
간수가 들은 소문은 영찰어사 오 어사의 아랫도리가 지나치게 관대해서 내관에게도 추근댔고, 그중 제일 추근대는 것이 수행 총관 소산자라는 것이었다. 일단 들여보내라고 해서 들여보냈으나 두 사람이 좋아지내는 걸 봤다가 후에 성월공이 입을 막으려 죽여 버릴 수도 있었다. 간수는 자신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되뇌며 열심히 보초를 섰다.
“오 대인, 이 무슨 변고입니까.”
“산공공, 어디 얼굴 좀 봐. 그간 잘 지냈어? 응? 홍련이는 잘 있지?”
“오 대인께서 이리 계시는데 천지의 무엇이 잘 지내겠습니까.”
“산공공도 잘 참네. 나 같으면 절대로 그렇게 못 할 텐데.”
진해는 창살에 매달려서 산공공을 바라보다 그에게로 팔을 뻗었다. 팔을 뻗어 산공공의 팔을 그러쥐었다. 그리고는 산공공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홍련이와 함께 만났던 협 아저씨 오천협. 금목서를 닮았던 그의 향. 그리고 금목서 나무 앞을 지날 때 맡았던 진한 양인의 향기.
“아버지.”
산공공은 언제나 진해를 도와줬었다. 제갈군무가 변용술을 보여 주지 않았다면 진해도 이런 황당무계한 호칭을 입에 담지 않았을 터였다. 그러나 전부터 산공공에게서 금목서 향이 희미하게 나는 걸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다. 내관에게서 향이 나는 건 둘째치고 오천협과 향이 똑같았으니까.
오천협이 쌍둥이라는 소리는 못 들었으니 필시 두 사람은 하나일 수밖에 없었다.
“……오 대인.”
“나 관직 삭탈 되어서 이제 대인 아니에요. 아버지도 아시잖아요.”
진해가 그를 불러도 산공공은 진해를 그저 안타깝게 바라볼 뿐이었다. 결국 진해는 품속에 손을 넣어 고산홍패를 꺼내 들었다.
“이거 아버지가 아빠한테 준 거죠? 내가 죽은 줄 알고 복수하려고 내관으로 변장해 있었던 거잖아요. 그렇죠?”
“…….”
“그래서 나랑 해산 도련님이랑 결혼 못 하게 하려고 했던 거구요. 내가 혹시나 원수랑 결혼해서 불행해질까 봐.”
“…….”
말하는 진해의 목소리에 어느새 물기가 서려 있었다. 진해는 사라진 우부만큼이나 자신의 좌부를 궁금해했었다. 그런데 저를 발견하자마자 좌부는 저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자신의 주변을 맴돌면서 자신을 지켜 주려 했다. 해국까지 따라온 것도 자신을 위해서였다. 사실 장인인 강절곤도 구할 생각이었겠지만 아무래도 젊고 탱탱하고 귀여운 아들이 먼저가 아닐까.
“혹시 제가 못난 아들이라서 얼굴을 보이기 싫으신 거예요? 아버지는 아빠보다 절 많이 보셨으니까…….”
“아니다!”
“그럼 왜 계속 그 얼굴로 계시는 거예요? 설마 진짜 뗀 건…… 아니시죠?”
“…….”
아버지를 도발하기 위해 한 말이었는데 진해는 진짜로 아버지가 거기를 뗐으면 어쩌지 걱정이 되었다. 자신과 아빠의 복수를 위해 아버지가 거시기를 뗐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온갖 설움이 밀려들었다. 아직 창창하신데 그 재미를 모르고 평생을 사셔야 한다니.
“해아…….”
진해가 복잡한 슬픔에 뚝뚝 눈물을 흘리자 어느새 본래의 얼굴로 돌아온 오천협이 진해의 뺨을 살며시 그러쥐었다. 오천협의 손은 진해의 것 못지않게 거칠고 투박했다. 두 손을 나란히 놓고 보면 아마 똑같이 생겼을 것이다.
“아버지……!”
“해아…….”
진해가 눈물을 흘리며 창살 너머로 저를 끌어안자 천하의 오천협도 눈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단 한 번도 널 모자라게 생각한 적 없다, 오히려 네가 너무나 잘 자라 줘서 이 아비는 지금 당장 죽어도 한이 없어!”
“흐어엉, 우리 집은 죽어도 한이 없다가 가훈인가 다 돌아가면서 그 소리를 하네!”
“너를 제때 구하지 못했으니 너를 지켜 주다 때가 되면 할아버지와 만나게 해 줄 생각이었단다. 어리석었지. 네가 이리될 줄 알았으면 너를 찾은 순간 할아버지에게로 데려갔어야 했어.”
“어엉, 그땐 내가 안 믿었을 테니까, 괜찮아요! 괜찮단 말이야!”
진해는 제 어깨를 적시는 뜨거운 눈물을 느끼며 자신 못지않게 아버지들의 인생도 기구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이야 원래 천것이라 생각하고 이것저것 하면서 입에 풀칠했지만 아버지들은 한순간에 생이별한 것이다.
게다가 아버지들을 이 나라를 구했다. 온갖 부귀영화를 누려야 할 사람들이 사건에 휩쓸려 나락으로 떨어졌다. 진해는 아버지들의 불행함을 슬퍼하며 울었다. 오천협이라는 사내가 느꼈을 공허함을 상상하며 울었다.
“킁.”
진해는 시종이 두고 간 세숫대야에 얼굴을 씻고 코를 풀었다. 눈은 이미 퉁퉁 부어 개울가 붕어 꼴이 따로 없었다.
“근데 아빠랑은 같이 지내고 있는 거 맞아요? 아빠 향이 안 맡아지는데?”
오천협은 진해의 말에 답하는 대신 쓰게 웃으며 진해의 눈가를 어루만졌다. 그 손길이 다정해 진해의 어깨가 저도 모르게 스르륵 풀어졌다.
“나를 보려 하지 않는단다.”
“왜요?!”
“내가 원망스럽겠지. 요령 없이 사부와 정면 대결하겠다고 고집을 부려 너와 그를 구하지 못했고, 그리하여 일이 이 지경이 된 것이니.”
쓸쓸한 어조였지만 원망은 없었다. 진해는 오천협의 손에 뺨을 비비며 속으로 아빠는 전혀 그런 기색이 없어 보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버지.”
그리고 동시에 자신은 역시 불효자라는 생각을 했다. 오천협이 자신의 좌부임을 확인하자마자 무리한 부탁을 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저기…….”
“괜찮단다.”
“…….”
“같이 못 있어 준 세월만큼 네게 다 해 주고 싶은 게 이 아비 마음이야. 그러니 망설이지 말고 말하렴. 황제의 목이라도 따 줄 테니.”
아니, 그런 위험한 부탁은 하고 싶지 않아요. 진해는 고개를 거세게 도리질 치며 조금씩 자신의 부탁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혹시 그 삼랑이란 아이의 성이 한씨니? 추피동에서 살았고?”
“네! 어떻게 아셨어요?”
“형이 둘 있었겠지.”
“맞아요!”
가만히 진해의 이야기를 듣던 오천협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안해산과의 연도 복잡하게 얽힌다 싶더니 삼랑과의 연도 보통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 악연을 자신이 만들었다는 것이고.
“걱정 말렴. 네가 위치만 알아내면 이 아비가 반드시 그 애를 구해 주마. 그 애를 도성 밖으로 데리고 나가 해원공과 만나게 하면 되는 거지?”
“네. 그리고 그전에 문건 하나를 관청에 접수해 주세요.”
“정말 괜찮겠니? 넌 이제…….”
진해와 계획을 상의하던 오천협이 말을 흐리자 진해는 잠깐 머뭇거리다 이내 밝게 웃음 지었다.
“내가 이제 왜요! 난 오씨이기도 해요! 아버지 아들이기도 하니까! 그리고……, 삼랑이한테만큼은 오진해이고 싶구요!”
오천협이 걱정하는 것을 진해 역시도 눈치챈 모양이었다. 오천협은 지나치게 영민하고 깊은 아들의 속에 씁쓸함을 참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이 애는 자신의 조부가 저지른 무익한 살생 역시도 자신이 지고 가려는 모양이었다. 동시에 조부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할 셈인 모양이었다.
다시 소산자로 변한 오천협과 애틋한 이별을 하며 진해는 물끄러미 빈 침상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강절곤이 자신의 조부라는 사실에 자신이 행한 불손한 행동만 생각났는데 현실을 인식하자 그가 저질렀던 참혹한 사건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해산은 목숨을 건져서 괜찮지만 어떤 이들은 목숨을 잃었다. 가족이 없는 진해에게 가족이 되어 주려고 했던 이였고, 귀여운 동생과 결혼하라며 으름장을 놓던 이들이기도 했었다. 자신이 다른 누군가가 된다고 해서 그들을 저버릴 수는 없는 법이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진해는 보송보송하게 마른 침상을 한 번, 버석하게 마른 제 얼굴을 한 번씩 번갈아 쓸며 갈팡질팡 망설이던 마음을 바로잡았다. 삼랑이를 살리는 동시에 빚을 갚고, 월산과 혼인하지 않을 세 번째 방법을 시행해야만 했다.
* * *
본래 강백서를 따라온 하인이 진해를 시중들 예정이었지만 늙고 충성스러운 하인에게 금보다 귀한 작은 도련님의 마른 모습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그는 억 소리를 내며 기절해 버렸고, 덕분에 진해를 시중들기 위해 급히 산공공을 불러오게 했다. 진해는 의자 위에 힘없이 앉아 있는 강백서의 눈치를 살폈다.
강백서는 오늘따라 안색이 좋지 않았다. 진해는 창살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처지가 오늘처럼 한스러울 때가 없었다. 자신이 나가서 어깨도 주물러 주고, 다리도 주물러 주고,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비법 죽도 끓여 주고 싶었다. 몸이 건강해지면 대접하고 싶은 진해의 비법 요리들이 많이 있었다.
진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진해는 바느질도 잘해서 옷도 지을 줄 알았고, 간단하게 수도 놓을 줄 알았다. 포목점에서 일했던 적이 있어서 어떤 문양이 아프고 병든 사람을 돋보이게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때로는 부적이 되기도 하는 것들이었다.
거기다가 나무는 또 얼마나 잘해 오고, 불은 또 얼마나 잘 때는지. 가만히 눈을 감고 숨을 고르는 강백서를 바라보며 진해는 강백서를 업고 잠춘동 집으로 가는 상상을 했다. 창명후 저택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초라한 집이었지만 진해와 강백서만의 추억이 서린 집이기도 했다.
돌아오기만 하면 해 주겠다고 약속한 일이 많았다. 우부와 함께하고 싶은 일도 많았다. 그래서 진해는 가슴이 아팠다. 강백서의 건강은 둘째치고 자신의 입지가 너무나 불안해서.
“오 대인.”
“아이고, 나 이제 대인 아니라니까 또!”
그리고 마침내 산공공이라는 신분으로 위장한 오천협이 도착했다. 오천협은 의자에 앉은 강백서를 보는 순간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강백서 역시 오천협 쪽을 바라보았다. 강백서는 저도 모르게 살짝 일어서 있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오늘따라 상태가 좋지 않은 강백서가 주르륵 흘러내리자 오천협의 발이 저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시중을……, 들러 왔다지.”
마침내 강백서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건조한 것 같기도, 축축한 것 같기도 했다.
“……예, 소산자라 하옵니다.”
“몸이 성치 않아 자네에게 귀찮은 일을 하게 했군.”
“오 공자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마땅히 보은할 따름입니다.”
“그래? 내가 없는 사이 자주 보았나 보군.”
다행이야. 강백서의 마지막 말은 안개처럼 희미했다. 진해는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봤는지 못 알아봤는지 알지 못해서 입을 다물고 얌전히 보기만 했다.
“대인, 시장하시지요? 제가 찰밥을 좀 마련해 왔습니다. 연잎으로 싼 것을 쪄서 향이 그만이지요.”
“아버―”
“저는 괜찮으니 따뜻할 때 드시지요.”
오천협이 자신을 부르는 것을 막자 진해도 이젠 모를 수가 없었다. 오랜 세월 떨어져 있었던 아버지와 아빠는 서로를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물론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는 동안 진해가 알 수 없는 그들만의 세월을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 세월과 감정을 알 수 없는 만큼 진해는 그들에게 어떠한 말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강백서는 오천협이 진해를 먹여 주고, 씻기고, 옷을 입혀 주는 것을 지켜보다 돌아갔다. 진해는 오천협에게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오천협은 변용술을 풀지 않은 소산자의 모습으로 빙긋이 웃고 있었다. 가면 같은 그 얼굴을 바라보자 어쩐지 무척 슬픈 기분이 들었다.
그나마 좋은 소식은 월산이 두를 시켜 삼랑이가 갇힌 뇌옥에 데려가 줬다는 점이었다.
“사, 삼랑아!! 삼랑아!!”
침착하려 했던 진해였지만 양팔에 사슬을 달아 벽에 달아 놓는 걸 보자 이성을 유지할 수 없었다.
“이게 사람이야, 돼지고기야!”
“씨……, 발…….”
“아이고! 천지신명님, 감사합니다! 욕하는 거 보니까 우리 삼랑이가 맞네!”
두는 어딘지 모르게 꺼림칙한 표정으로 연신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진해를 데리고 오면서 뭔가 기척이 느껴지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진해가 오천협에게 따라오라고 지시했으니까. 오천협은 무인들이 득시글대는 고산국에서도 손꼽히는 절정고수였으니 두가 그 기척을 느낄 리는 만무했다.
“뭐 해! 문 열어!”
진해가 당당히 요구하자 두는 떨떠름한 얼굴로 문을 열었다. 진해는 문이 다 열리기도 전에 도토리를 낚아채는 다람쥐처럼 삼랑이에게로 달려갔다.
“이것도 풀어 줘!”
“안 됩니다.”
“너네 주공이랑 거지를 혼인시키고 싶은 게 아니면 좋은 말 할 때 시키는 대로 하지?”
진해가 진심 가득한 협박을 하자 두는 잠깐 고민하다가 삼랑의 양 손목을 묶은 사슬을 풀어 주었다. 사슬을 풀자 삼랑은 힘없이 미끄러졌고 진해가 달려가 삼랑을 끌어안았다. 곱게 차려입은 진해의 옷이 순식간에 더러워졌다.
“하아, 하아…….”
“삼랑아, 어디, 나 누군지 알겠어? 아이구, 아이구, 우리 삼랑이!”
열이 나는지 온몸이 뜨뜻했다. 진해는 제게 기댄 삼랑이의 몸을 더듬거리다가 삼랑의 옆구리 근처에 덧대진 천을 발견했다. 창에 입은 상처라는 걸 떠올리자 진해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삼랑이가 쓰러져 피를 흘리던 모습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아니, 애를 치료하려면 깨끗이 씻기고 옷도 새 거로 갈아입혀 주고 하지, 너무한 거 아니야?”
“곧 죽을 인간에게 왜 낭비를 하겠습니다.”
“……나 너 싫어!”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주부군.”
제 겉옷을 벗어 둘둘 만 뒤 진해는 그것을 베개 삼아 삼랑을 편하게 눕혔다. 멀뚱멀뚱 보고 있던 두에게 물을 떠 오라 명하고(두는 거부했으나 진해가 더러운 바닥에 얼굴을 비비는 시늉을 하자 순식간에 항복했다) 삼랑의 몸 여기저기를 살피기 시작했다.
“……갔지?”
진해는 두가 꽤 멀어진 것을 확인하고 삼랑의 품을 뒤졌다. 입으로는 옷을 갈아입히라고 했지만 전에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혀 둔 게 참으로 다행이었다.
“와, 진짜 깊이 숨겨 뒀네. 전에 내가 훔쳐 갔다고 이런 거야?!”
만에 하나 소지품을 빼앗겨 없을 경우도 생각했는데 삼랑이의 치졸함이 이 순간 빛을 발했다. 진해는 찾던 게 없자 삼랑의 옷을 꼼꼼히 살펴보았고 약간 색이 다른 실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삼랑이 혼인 신고서를 아예 옷에 넣고 꿰맨 것이었다.
“뭐, 하는…….”
“쉬, 괜찮아. 말하지 말고 누워 있어.”
혼인 신고서에 어지간히 집착이 남는지 삼랑은 눈을 감고 의식을 잃고 있다가 진해가 혼인 신고서를 빼내는 순간 번쩍 눈을 떴다. 진해는 씁쓸한 심정으로 삼랑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이윽고 두가 물과 수건을 가져오자 진해가 수건을 물에 적셔 삼랑을 천천히 닦아 주기 시작했다. 열은 심했으나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안색이 좋았고 일단은 멀쩡히 숨을 쉬고 있었다. 환자를 달아 두는 미친 짓거리는 어떤 놈의 머릿속에서 나왔는지는 모르겠으나 진해가 월산과 거래를 한 이상 삼랑에게 더는 해가 미치지 않을 터였다.
“내, 놔…….”
“아프다고? 미안, 좀 더 살살 닦을게!”
기절하고 깨어나기를 반복한 삼랑이 이를 갈며 진해에게 손을 뻗었으나 진해는 흑흑 흐느끼는 시늉을 하며 그 손을 제 뺨에 비빌 뿐이었다.
“창, 놈…….”
“삼랑아, 내 말 잘 들어. 나 혼인할 거야.”
“개…….”
“그러니까 누가 너 데리러 오면 반항하지 말고 얌전히 따라가야 한다, 알겠지?”
“씹…….”
“도성 밖에서도 항상 건강해야 해. 그래, 미려랑 같이 사는 것도 괜찮겠다! 좋네! 매일 예쁜 미려를 보면 몸이 더 빨리 좋아지겠지?”
“좆…….”
입을 뗄 때마다 다양한 종류의 욕설을 쏟아 내는 삼랑을 닦으며 진해는 복잡한 심경에 빠졌다. 정말 삼랑이랑 결혼하는 게 맞는 걸까. 차라리 지금이라도 더 더러운 척을 해서 월산이 자신에게 정을 떼게 하는 방법이 더 좋은 게 아닐까. 그게 아니면 차라리 아버지한테 감옥을 부숴 달라고 하든 가.
“그, 렇…….”
“응?”
그러던 와중 진해는 삼랑이 오만상을 쓰면서 자신에 무슨 말을 하자 몸을 기울여 삼랑의 말을 들으려 했다.
딱!
“우와악! 깜짝이야!”
물론 그것은 삼랑이 진해의 귀를 물어뜯으려 하기 전의 일이었다.
“왜, 왜 이래?! 고기가 모자라나?!”
삼랑은 몇 번 몸을 움직여 보려 하다가 식은땀을 흘리며 바닥에 다시 푹 퍼졌다. 진해는 물릴 뻔한 제 귀가 제대로 붙어 있는지 몇 번이고 확인했다.
“개, 자식, 내가, 하아……, 그렇게, 싫냐……?”
“삼랑아…….”
“…….”
“너 방금 내 귀 하나 없앨 뻔했다?”
진해가 어이없이 되묻자 삼랑은 말없이 눈을 감았다. 확실히 자기가 생각해도 양심에 찔리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삼랑이에게는 양심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진해는 삼랑이가 중환자라서 천만다행이라는 생각만 했다.
“좋아해. 당연히 너를 좋아하지. 너는 나를 버리지 않겠다고 했잖아.”
“……씹, 뭐?”
“아이고, 내가 음인이고 예쁜이들이 양인이면 공평하게 하나씩 애를 낳아 줄 텐데 이거 뭐 가슴을 쪼개서 보여 줄 수도 없고.”
“…….”
“삼랑아, 참자, 삼랑아, 한 번만 봐주자, 내 목숨은 하나다, 응? 알지? 삼랑아?”
삼랑은 병자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흉흉한 눈으로 진해를 쏘아보았다. 진해는 다시 한번 천지신명께 삼랑이의 목숨을 붙여 준 것에 감사함과 그를 움직일 수 없이 얌전하게 만들어 주신 것에 감사했다.
“최소한 네 거기를 물고 빨 정도로 좋아하긴 해.”
“너 그거 좆나 많이…….”
“아이참! 그냥 그렇다면 좀 그렇다고 해 줘! 그리고 난 한 번도 장난으로 빤 적 없어!”
모르면 약이 된다는 게 이런 경우에 쓰는 말인가 보다. 진해는 자신의 교제 상대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삼랑이 제 말에 대꾸하려 하자 기껏 잡은 분위기가 흐트러짐을 느꼈다.
“에이, 됐고. 미려한테도 내가 많이 좋아한다고 해 줘. 둘 다 사랑한다고.”
“뭐, 이런 개…….”
“맞아. 참 개자식이지. 그러니까 마음껏 욕해. 다 들어 줄 테니까. 아니, 다는 아니고 네가 좋은 만큼만 들어 줄 테니까. 헤헤, 다 들으면 아마 쉰은 넘을지도 몰라.”
삼랑은 진해가 멋쩍게 웃자 아주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걸 한 대 쥐어 패면 여한이 없겠다 싶은 표정이면서도 쟤 말도 괜찮은 것 같다고 생각하는 표정이기도 했다.
“어쨌든 내가 의원을 보내 줄 테니까 반항하지 말고 주는 대로 잘 먹고, 치료 잘하고, 나중에 사람이 오면 꼭 따라가야 해? 알겠지? 꼭 따라가야 해?”
“…….”
진해는 일어서려다가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삼랑 쪽으로 몸을 굽혀 콧등에 입을 맞췄다. 바싹 메마른 입술을 안타깝게 바라보다가 억지로 몸을 일으켜 삼랑에게서 떨어졌다. 삼랑의 시선이 등 뒤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진해는 자신이 머무는 호화로운 감방보다 더럽고 축축한 이곳에서 지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뭘 봐! 의원이나 수배해!”
“……예.”
괜히 짜증이 나서 서 있던 두에게 화풀이를 했다. 두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진해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가기 싫어서 일부러 느릿느릿 걸음을 걷자 두가 한숨을 쉬며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삼랑이라는 인질이 있으니 진해가 함부로 도망치지 못할 걸 알아서였다.
그리고 진해는 두가 앞을 향해 몸을 트는 순간, 품에 숨겨 두었던 신고서를 바닥에 소리 없이 떨어뜨렸다. 발을 질질 끌며 걷는 소리 탓에 진해를 따라온 이가 신고서를 줍는 소리도 두의 귀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오천협은 떨어진 것을 주워 내용을 확인하고 조용히 품에 넣었다. 하늘을 바라보자 어느덧 달이 중천에 떠 있었다. 진해가 저 애에게도 진심인 걸 알았으니 이제는 자신이 아비 노릇을 해야 할 때였다. 진해가 나중에 알면 화를 낼지도 모르겠지만 자신은 진해가 어떤 굴레에도 얽매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기 전 우선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오천협은 달을 응시하다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담 위로 뛰어올랐다. 오천협이 향하는 곳은 이제는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는 창명후 저택이었다.
* * *
“할아범, 나는 괜찮으니 이만 가 보게.”
“도련님…….”
“내가 피곤해서 그래. 일찍 자야 일찍 얼굴을 보지. 안 그래?”
“예, 맞습니다. 도련님 말씀이 참으로 맞습니다!”
강백서는 이 노인의 울상이 익숙했다. 강백서의 유부였던 노인은 강백서의 좌부였던 수강건이 강절곤에게 장가들 때 데려왔던 혼수 하인이었다. 수강건이 어릴 적부터 함께 지낸 터라 그는 병자를 시중을 드는 데 익숙했다. 기억 속의 수강건이 쌕쌕 숨을 몰아쉴 때마다 그는 능숙한 손길로 이마 위의 수건을 갈아 주었다.
강백서가 기억하는 그의 첫 울상은 강백서의 셋째 형이 죽었을 때였다. 강백서보다 두 살이 많은 양인 형이었었다. 좌부를 닮아 약하게 태어난 형은 강백서가 여덟 살이 되던 해에 하늘로 떠났다. 공교롭게 강백서가 좌부와 함께 있었다.
좌부가 백서의 옆에 있는 건 무척 희귀한 일이었다. 형과 달리 건강하게 태어나 일찌감치 유부들의 손에 맡겨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셋째 형, 지금은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그의 병세가 깊어졌을 때 우부가 좌부와 셋째 형을 떨어뜨려 놓았다. 좌부가 잠을 자지 않고 그의 곁을 지킨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반쯤은 유폐와 다름없는 처우에 좌부가 크게 화를 냈었다. 유부는 백서를 데리고 나가려 했지만 우부는 오히려 백서를 데려와 좌부의 앞에 세워 놓았다. 네 자식은 그 애뿐이 아니라고, 네가 죽으면 나랑 이 어린것은 어떻게 해야 하냐고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그러자 좌부는 거짓말같이 화를 멈췄다. 백서를 보며 입술을 떨다가 그를 안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우부 역시 눈이 잔뜩 붉어져 있었다. 백서는 우부 강절곤의 떨리는 등에서 셋째 형에게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를 읽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셋째 형을 보러 갔던 유부가 돌아왔다. 주인이 먼저 울지 않으면 함부로 울지도 않는 충성스러운 이가 우는 얼굴만으로 셋째 형이 어떻게 되었다는 걸 알려 주었다.
“아, 기억났다.”
기억 속에서 메아리치는 유부와 좌부의 통곡을 들으며 백서는 셋째 형의 이름을 기억해 냈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던 이유는 우부가 일부러 이름을 짓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어차피 죽을 아이라 그런다고 수군댔지만, 사실은 이름을 짓지 않으면 저승사자의 명단에 실리지 않아 성년까지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 수 있다는 미신 때문이었다.
……호랑이 같은 장군인 아버지가 생각하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하찮은 미신이기도 했다.
“연서(連誓) 형이었어.”
큰형의 이름은 맹서(孟誓), 둘째 형의 이름은 달서(達誓). 죽은 셋째 형을 시작으로 백서는 형제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큰형 맹서는 우부를 닮아 장강성의 성주로 한 점 부족함이 없다는 소리를 들었고, 우부를 따르기 전에는 백서를 가장 많이 안아 준 형이기도 했다.
그는 하옥된 아버지 대신 병사를 이끌다 장수로서 명예롭게 전사했다.
둘째 형은 노는 걸 좋아해 좌부를 걱정시켰다. 어찌나 난봉꾼인지 한 번은 좌부의 패물을 훔쳐 갔다. 하필이면 우부가 좌부가 쓴 글자를 장인에게 맡겨 본을 뜬 패물이었다. 좌부의 글은 제법 인기가 있었고, 장물아비는 우부가 혼인한 뒤로 절대 좌부의 글을 팔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있던 것도 장강 강씨의 재력으로 모조리 되샀다는 사실도.
장물아비는 돈을 주는 척 퇴청하던 아버지께 사람을 보냈고, 둘째 형은 현장에서 검거되어 후원 나무에 곶감처럼 매달렸다. 놀라운 것은 보기만 해도 어깨가 움찔거리는 아버지의 매를 맞으면서도 대꾸를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었고,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미꾸라지처럼 쏙 빠져나갔다는 점이었다.
사고뭉치였던 둘째 형이었지만 좌부가 돌아가신 뒤로는 거짓말처럼 철이 들어 무과에 수석으로 급제했다. 그는 태자, 지금은 황태공으로 추증된 경순의 호위가 되었고 숨이 끊어질 때까지 태자를 보호했다.
그는 태자의 곁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숨이 끊어진 호위였다.
그리고 좌부는,
“아버지…….”
백서는 자신이 열세 살 때 눈앞에서 숨을 거둔 좌부를 떠올리며 조용히 눈물 흘렸다. 어릴 때도 간간이 그리웠던 좌부가 지금은 사무치게 그리웠다. 셋째 형의 상을 치를 때에는 자신을 봐 주지 않는다고 낯선 사람한테는 안기기 싫다고 떼를 써 좌부의 가슴에 못을 박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 나이가 되자 좌부가 셋째 형에게 왜 그리 매달렸는지 절절히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식을 손에서 잃어버린 후에야 겨우 그 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더 그리웠다. 지금이라면 이해한다고, 그러니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러던 그때, 달빛으로 하얗게 물든 장지문 밖에 사람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한 차례 강한 바람이 불자 그림자는 문과 함께 물결처럼 흔들거렸다. 아버지는 아니었다. 강절곤은 비쩍 말라 향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는 아들을 보자마자 그대로 졸도해 버렸으니까, 해원공이 폐비 연씨의 소생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자마자 아예 몸져누워 버렸으니까.
해아가 성월공의 궁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이리저리 손을 쓰는 눈치였지만 연이은 충격에 늙은 아버지의 몸은 제구실을 하지 못했다. 강백서는 사당에 모셔진 자신의 위패와 그 앞에 놓인 깨끗한 방석을 보며 아버지도 지옥의 세월을 보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나오겠다는 거군.”
그랬기 때문에 아직은 죽어 줄 수 없었다. 강백서는 해아를 본래 자리로 돌려놓고, 비틀린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은 뒤에 아무도 보지 않는 먼 곳에 가서 생을 마감할 작정이었다. 막내 사제는 영약을 먹으며 요양을 하면 된다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영약 한두 알 가지고 죽을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고산국은 광적인 무인이 아닌 다른 것으로 유명해졌을 터였다. 영약은 본디 자질과 소질이 있는 자를 도울 뿐 기적을 일으키는 게 아니었으니까.
강백서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베개 밑에 숨겨 놓았던 단검을 그러쥐었다. 예전에는 제 몸처럼 다루던 검이었는데 지금은 손에 쥐고 있는 것도 힘이 들었다. 그러나 죽을 수는 없다, 아직 죽을 수 없다는 집념만이 칼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게 했다. 강백서는 움직이지 않는 그림자 쪽으로 조용히 몸을 움직였다.
옅었던 그림자는 이제 색이 진해져 있었다. 크기도 작게 줄어들어 윤곽이 뚜렷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쪽에서 가지 않는다면 이쪽에서 가 주겠다고, 방심하게 만든 후에 단번에 급소를 찌르겠다고 생각하며 강백서는 문 옆에 바짝 몸을 붙였다. 거친 숨소리를 한껏 가라앉혔다.
“사제.”
하지만 그림자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강백서의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목소리와 함께 문틈으로 진한 양인의 향기가 흘러들었다. 금목서 꽃을 닮은 향이었다. 멀끔하게 생긴 그에게 얼핏 어울리지 않는 듯했지만 강백서는 무공을 펼치는 그에게 이 향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알고 있었다. 대련할 때의 그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화려한 양인이었다.
“…….”
그랬기에 강백서는 그를 피했다. 훌쩍 커 고산패자가 되었다는 막내 사제 제갈군무에게 그가 접근하지 않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강백서와 유달리 친했던 막내는 대사형을 접근시키지 말라는 말에 한참을 망설이다 대신 자신과 고산국으로 갈 것을 조건으로 걸었다. 대사형이 창명후 강절곤의 호위를 맡겼던 여덟째 사형이 돌아와 폐인처럼 지내고 있다며, 자신은 이제 고산패자이니 영약을 물처럼 쓸 수 있다며, 고산국으로 함께 돌아갈 것을 조건으로 걸었다.
어차피 아버지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죽으려던 터라 망설이지 않고 조건을 받아들였고, 막내 사제는 철저히 대사형 오천협의 시선에서 자신을 막아 주었다. 어떨 때는 사내답게 밀고 오지 않는다며 짜증을 내기도 했다. 그렇게 피하고, 막아 내던 향기가 지척에 있었다. 천천히 흐려져 지금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 각인이 향기를 맡자 불꽃처럼 타닥 타올랐다.
“사제.”
고산국에 갔을 때부터 혼인 전까지 대사형은 완전히 말을 놓은 적이 없었다. 고산맹에서 인기가 절정을 찌르는 인격자를 무너뜨려 보겠다고 그의 앞에 침을 뱉고 일부러 음인의 향을 뿜어내는 등 갖은 도발을 했지만 오천협은 그럴 때마다 허허 웃고 그만이었다.
“백서.”
그런 그에게 처음으로 이름을 들은 건 혼인 첫날밤이었다. 난데없는 고백과 아버지의 참견으로 인해 뭐 구워 먹듯 후다닥 치러진 혼인 뒤 초야를 치르기 위해 신방에 들어갔을 때였다. 침상에 휙 눕히더니 지그시 눈을 바라봤었다. 얼떨떨한 얼굴의 자신을 바라보며 쇳물이 지글지글 끓는 듯한 눈을 하고 자신의 이름을 불렀었다.
그 순간, 강백서는 자신이 고산맹에서 그를 처음 봤을 때부터 그를 가지고 싶었다는 걸 자각했다. 강해지고 싶다는 욕망 속에는 강해져서 그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깊은 욕망이 숨어 있었다. 그래서 그의 동행도 못 본 척 허락해 준 것이다. 그가 자신을 따라오면 파문에 이르고, 자신과 달리 아무 데도 돌아갈 곳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집으로 데려온 것이었다.
“……왜, 왜 왔어요.”
그러나 그것도 다 옛날이야기. 강백서는 뒤틀리는 속을 진정시키듯 가슴 부근을 그러쥐었다.
“…….”
“각인은 해소되었어요. 해아가 혼인하면 손자들이 태어날 테니 더는 대를 이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요.”
하고 싶은 말은 이게 아닌데.
“그러니 돌아가요. 이제 월국에서 헛짓하지 말고 고산국으로 가요. 가서 제대로 무아 와 겨뤄 줘요. 이기든 지든 사부는 개의치 않을 거예요.”
서신에 적지 못한 말이 많았었는데.
“혹시 위자료가 필요해서 그래요? 그럼 내일 아침 아버지께 말해 둘게요. 예전만은 못하지만 그래도 쓸 만한 게 남아 있을 거예요.”
“…….”
“가요.”
강백서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가요, 제발.”
그가 그리웠었다.
“제발, 대사형. 이제 더는 나 때문에 고생하지 말고 가요, 좀!”
그가 돌아오면 함께할 행복을 상상하며, 강백서는 행복했었다.
“…….”
하지만 집으로 돌아와 처음 거울을 보았을 때, 강백서는 그 행복이 자신에게서 영영 멀어졌음을 깨달았다. 해아야 자신이 기억을 제대로 찾기 전에 자신을 봐서 어쩔 수 없었다지만 강백서는 마음 같아서는 아버지에게도 이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물며 자신의 양인에게는 어떻겠는가.
추하고 아름답고를 떠나 강백서의 얼굴에는 쇠약함과 비참함, 고통이 가득 서려 있었다. 과거에 말을 타고 전장을 달리며 적들을 상대했던 젊은 무인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노쇠해 보였다. 차라리 아버지가 자신보다는 건강하리라. 강백서는 절망했다. 이제 더는 불꽃처럼 빛나는 대사형의 곁에는 갈 수 없었다.
“……그래, 그럴게.”
그렇게 원했던 대답인데도 강백서는 가슴이 찔린 것처럼 아팠다. 죽음이 가까운 자신에게서 그를 떼 놓는 게 맞는 일인데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무인이고 말고를 떠나 그는 아직 창창한 양인이었다. 비참한 자신의 곁에 있는 것보다는 새 음인과 새 행복을 찾는 게 나았다. 해아에게 좌부 노릇을 하는 것과는 별개로.
“하지만 그 전에 한 번만 손을 잡게 해 줘. 다른 것은 원하지 않을게. 아니……, 염치가 있는 놈이라면 그 이상을 원해서는 안 되겠지.”
강백서의 저미는 심장과 달리 오천협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어쩌면 그는 강백서가 할 말을 미리 알고 왔는지도 몰랐다. 떨어져 지낸 세월 동안 그 역시 마음을 정리했는지도 모른다.
“……싫어요.”
손만 보게 해 달라는 부탁인데도 강백서는 망설였다. 그까짓 손이 뭐가 대수인가 싶으면서도 강백서는 그의 앞에서는 아름답고 자신만만했던 자신이기를 원했다. 그의 기억 속의 자신이 영원히 그 모습이기를 바랐다.
“그럼 문 너머라도 좋아.”
“…….”
그 정도는 들어줄 수 있었다. 아니 그 정도라도 닿고 싶었다. 강백서라고 왜 그와 닿고 싶지 않을까.
“보고 싶었어.”
종이 한 장 너머로 손이 겹쳐졌다. 조용히 손을 겹치는 동안 나무들이 몇 차례나 몸을 떨었다.
“나도 몇 번이고 뒤를 따라가려 했지. 하지만 고산맹의 가르침이 나를 그렇게 만들지 않더군. 최소한 황제의 목을 들고 가야 저승에서 사제와 해아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있을 것 같았지.”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아버님께서 막지 않으셨다면 진작 했을 거야. 나는 월국 사람이 아니니까 그에게 아무런 감흥이 없어.”
소원을 들어주었으니 이제 헤어져야 하는데 백서는 문에서 손을 뗄 수 없었다. 이 시간이 영원하길 바라는 마음이 그의 몸을 옥죄었다.
“살아서 다행이야. 사부는 칠 사제를 귀여워했으니 무슨 영약이든 아낌없이 내어 줄 거야.”
그리고 마침내,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시간이 끝이 났다. 오천협이 천천히, 아주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강백서는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팔 사제에겐 미안하다고 전해 줘. 고맙다는 것도. 그가 아버님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면 영원히 해아를 찾지 못했겠지.”
“아버지의 부탁이라고요? 대사형―”
“그간 해아에게 아버지 노릇을 하지 못했으니 내가 다 지고 갈 셈이야. 나는 해아와 사제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사형,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작별의 말을 할 줄 알았는데 전혀 모르는 소리를 했다. 강백서는 저도 모르게 문을 열려고 했다.
“해아에게, 사랑하는 사람과 맺어지면 얼마나 기쁜지, 더 얘기해 주고 싶었는데.”
그런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 문 너머의 그림자가 살짝 고개를 숙인 채 문을 막고 있었다.
“사형, 대사형!”
“……각인이 해소되어서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사형!! 오천협!!”
강백서는 의미심장한 오천협의 말을 듣자마자 문을 열어젖혔다. 바위처럼 단단하게 굳어 있어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문이 강백서의 손짓에 순식간에 몸을 움직였다. 다시 한차례 바람이 불었다. 풍성한 금목서 향의 바람이 강백서의 몸을 휩쓸었다.
하지만 정작 향기의 주인은 그 자리에 없었다.
“가지 말아요…….”
강백서는 향기만 남은 자리를 바라보며 스르륵 주저앉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얼굴이라도 한번 볼걸. 뒤늦은 후회가 눈물이 되어 그의 뺨 위로 흘러내렸다.
다음 날 아침, 감옥이 발칵 뒤집혔다. 엄중히 관리하고 있던 죄인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탓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사라질 동안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두는 즉시 진해에게 달려왔으나 그가 본 것은 배 위에 춘화집을 엎어 둔 채 코를 고는 단정치 못한 모습이었다.
뒤늦게 창명후에게 달려갔으나 창명후 저택은 무슨 일인지 초상집 분위기였다. 알고 보니 강백서가 새벽부터 몸이 좋지 않아 강절곤이 성치 않은 몸으로 아들 곁에 붙어 있는 중이었다.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락 말락 하는 강백서를 보면 강절곤이 손을 쓸 여유는 없어 보였다.
진해의 돈줄이었던 여해루를 뒤져 봐도 죄인은 보이지 않았다. 한순간에 직장이 망하게 된 기생들과 병사들 사이에서 시비가 붙었고, 진해를 탈출시키다 죽은 기생과 혼인할 예정이었던 기생이 눈이 뒤집혀 달려들었다.
평생 노래하고 악기만 연주하던 기생이 당연히 병사를 이길 리 없었고 기생은 곧 병사의 손에 덜미가 잡혀 뺨을 맞았다. 엉엉 우는 이, 화를 내는 이, 눈살을 찌푸리는 이들이 엉켜 여해루는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었다.
“이게 지금 무슨 난리인가!”
그 난리를 정돈한 건 정말로 의외의 인물이었다. 학사 관리의 의복을 반듯하게 차려입은 조관림이 기생을 병사의 손에서 떼어 놓았다. 그리고는 아주 당당하고 꼬장꼬장하게 연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조관림은 실연 후 제자 양성에 힘을 쏟고 강론에 힘을 쏟은 덕에 이른 나이에 일찍 진급을 했다. 멍청한 아들을 초시에 합격시켜 준 보답으로 추천서가 비 오듯 쏟아진 덕도 있었다.
“대월 건국 팔백구십오 년! 동서고금 변고도 이런 변고가 없도다! 무기를 든 병사가 힘없는 백성을 폭행하다니 지엄하신 대월률이 두렵지도 않는가!”
“아니, 먼저 대들―”
“어허! 어딜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끼어들어! 자네 몇 품이야!”
“어, 저기, 팔―”
“이런 고얀 놈! 고작 팔품이 감히 사품 강론학사 어르신 말씀하시는데 끼어드는가! 귀 뚫고 똑바로 잘 들어라! 균여관이 있는 것은 바로 네놈같이 무도한 자가 월국을 무너뜨리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야! 오오, 폐하! 죽여 주시옵소서! 신이 학사로의 본분을 다하지 못해 월국의 관료라는 자들이 광포해졌사옵니다! 도끼! 도끼를 가져와라! 내 당장 손을 잘라 황상께 혈서를 올리겠다!”
강론을 많이 한 탓일까. 조관림은 훈시를 할 때는 진해 못지않게 말이 많아졌다. 병사는 자신 앞에서 사품 관리인 조관림이 무릎을 꿇자 자신도 무릎을 꿇었고, 졸지에 그보다 낮은 품계인 병사들도 다 함께 무릎을 꿇고 강론을 듣게 되었다. 장장 두 시진에 이르는 긴 훈계였다. 오랜 학당 생활로 정좌가 익숙한 조관림은 사뿐히 일어섰으나 다른 병사들은 일어나지 못하고 한참 다리를 쥐어뜯어야만 했다.
“감사합니다, 조 대인!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감사하면 좋은 술이나 내주게. 오늘도 조용히 있고 싶으니 시중들 이는 필요 없어.”
총관 집사가 나와 감사를 표하자 조관림은 어딘지 모르게 초탈한 표정을 지었다. 우수에 젖은 눈으로 여해루의 중앙 계단을 바라보더니 총관 집사에게 쓱 손을 내밀었다.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닌 듯 총관 집사가 얼른 붓을 내밀었고 조관림이 가장 가까이 있는 기둥에 막힘없이 써 내려갔다.
“오오! 조 대인의 신작이다!!”
조관림이 붓을 돌려주고 아련한 얼굴을 한 채 별관으로 향하자 병사들 탓에 조용히 웅크리고 있던 손님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크, 조 대인! 연애를 잃고 문재를 얻은 남자!”
“역시 조 대인! 짝 없는 이들의 심금을 울리네!”
진해가 잃을 작정을 했던 여해루는 예기치 못한 인연 덕에 아주 잘 굴러갔다. 실연의 아픔 덕에 조관림의 재능이 깨어났는지 조관림이 시를 쓸 때마다 사람들이 줄을 서서 그의 시를 베껴 갔다.
그리고 그런 그를 보던 손님 중 누군가가 조관림을 찾아가 말을 건넸다. 사실 너와 친분이 있던 해원공은 사생아가 아니라 적통이며, 그가 보위에 오르면 진해도 원군이 될 것이며, 진해가 원군이 되면 그의 동생도 돌아올지 모른다고.
실연했지만, 정확히 말하면 차였지만 미려를 좋아하는 마음만은 변치 않던 조관림은 그 말을 한 이가 호부시랑과 건너건너건너건너 연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균여관으로 달려가 닥치는 대로 학사들을 모았다. 이마에 끈을 질끈 동여매고 날이 밝기 전에 황궁 정문 앞으로 내달렸다. 그를 따르는 학사들은 조관림의 대쪽같은 정의에 감동했지만 조관림은 정의보다 떡밥에 관심이 많았다.
“폐~ 하~!! 죽여 주시옵소서!!!!”
도끼를 앞에 두고 부르짖는 그의 목소리에는 진심을 능가한 사심이 진득하게 배어 있었다. 백 명이 넘는 학사들이 죽여 달라고 소리를 치니 근처 사는 백성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그들이 하는 양을 구경했다. 족집게 강사인 조관림이 제창하는 구호가 백성들의 귀에 쏙쏙 파고들었다.
곧 온 월국에 폐비 연씨 소생의 해원공이 황후가 사산한 아이와 뒤바뀌었다는 소문이 자자해졌다. 조관림이 엎드려 시위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지방의 젊은 학사들도 조관림에게 동참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당연히 황제도 이 소식을 들었고 그는 미간을 구기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그는 미간을 더는 구길 수 없을 만큼 구기다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일등시위로 진급 예정인 동십사가 그의 앞에서 무덤덤한 표정으로 시립해 있었다.
“당장 해원공을 찾아와라. 무슨 일이 있어도 살려서 데려와야 한다.”
“예, 황상.”
“그리고 오진해를 데려와라. 성월공에겐 내 명이라고 전해.”
황제에겐 다른 어사들이 많았지만 그들도 다 사람이었다. 또한 그들 중 누구도 황제에게 폐비 연씨를 거론한 적이 없었다. 그런 마당에 이제 와서 그들에게 황후를 취조하고 폐비 연씨 사건을 해결하라 한들 제대로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황제는 정말로 아니꼬웠지만 당장에라도 참수해 버리고 싶었지만 오진해가 강해아일지도 모르며, 성월공이 강력하게 그와의 혼인을 추진하자 어쩌면 해원공이 도성 밖으로 도주한 게 옳은 선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황제 역시 성월공의 성정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하여 진해는 참으로 오랜만에 황궁에 입궁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 자신을 데리러 온 동십사를 본 진해가 달려가 그를 끌어안고, 동십사가 진해를 보자 의리의 눈물을 흘릴 뻔한 작은 사건이 있었지만 너무나 작은 사건이라 밖으로는 알려지지 않았다.
* * *
동십사가 진해를 데리고 간다는 소식이 퍼지자 온 동네 대소 신료들이 일제히 입궁 준비를 했다. 권력에 관심이 없는 자라도 소문엔 관심이 많았다. 하나만 퍼져도 월국이 뒤집힐 소문이 백성들의 입을 타고 지글지글 끓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해원공이 폐 비 연씨 소생이라는 소문이 그랬다. 가뜩이나 황후에 대한 여론이 안 좋은 마당에 그의 뒷받침이 되는 적통 황자가 사실은 본래 황후가 되어야 했던 폐비 연씨의 소생이라니! 그야말로 눈이 띠용 튀어나올 극적인 이야기였다. 해원공을 후계에서 배제하던 관리들에겐 기절초풍할 이야기이기도 했다.
아니 그런 걸 제하더라도 이 이야기는 황실의 체통을 크게 깎아 먹는 소문이었다. 황제가 어련히 알아서 수습하겠지만 현재 황제의 유일한 부군이 황후밖에 없다는 게 또 문제였다. 더 큰 문제는 대체 이 소문이 어디서 발생했는지 모른다는 거였고.
“만세 만세 만만세! 하늘의 태양보다도 광채 찬란하시며 드넓은 바다보다도 자비로우신 대월국의 대좌부―”
“일어나라.”
그리고 폭풍의 눈, 소문의 중심에 자리한 오진해가 황제 앞에 섰다. 황제는 조용히 부르고 싶었지만 입궁한 신료들이 대전 근처에 물 밀듯 몰려오자 어쩔 수 없이 임시 조례를 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대놓고 해결하려는 걸지도 모른다.
“오진해. 한 가지만 물어보지. 그대 정녕 일이 이렇게 될 줄 모르고 폐비 연씨의 연좌제에 대해 상주했었나.”
“예, 아니요!”
긍정과 부정이 섞인 대답에 황제 회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입궁한 강절곤이 저도 모르게 가슴을 부여잡았다.
“대답을 똑바로 해라. 짐을 능멸한 죄로 곤장을 맞고 나서 시작하겠느냐.”
“헉, 아니요! 소신은~ 그~ 정확히는 모르고 반쯤 감으로만 알고 있었다. 이 말씀을 드리고 싶었사옵니다, 황상!”
한 대 때린다니까 진해는 곧바로 답을 정리했다. 강절곤이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걸 안다면 황제가 절대로 그를 때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누구나 잘 알 수 있었다. 앞에 서 있는 진해만 빼고.
“좋다. 그럼 강해아는 대체 어떻게 된 거냐.”
“가, 강해아요?”
“그래. 해국에서 강해아를 데려오라고 했잖느냐.”
“어, 음. 소신은 황상이 말씀하시는 바를 모르겠습니다만?”
“뭐라.”
“소신은 분명히 강해아를 데리고 왔사옵니다! 창명후 합하께 하문하시면 명료하게 알 수 있으실 터!”
강절곤은 황제가 묻지도 않았는데 자동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는 진해에게 그럼 당장 이 자리에 강해아를 데리고 와 보라고 하고 싶었지만 지금 급한 건 강해아가 아니었다. 바닥에 떨어진 황실의 존엄이었다.
“후. 마음 같아서는 함부로 일을 친 네놈을 형장에 놓고 싶다만 성월공이 그간 네가 세운 공을 참작하라 청을 올렸지. 그리고 짐도 가만히 생각해 보니 월국을 위해 헌신한 그대를 이대로 내치기가 참으로 안타까움이야. 그리하여.”
신료들이 일제히 꼴깍 침을 삼켰다.
“짐은 그대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고 싶네. 그대가 벌인 일이니 수습할 사람도 그대뿐이지.”
황제의 말이 끝나자 울 것 같았던 강절곤의 얼굴이 활짝 폈다. 회순이 손짓하자 내관이 자그마한 비단 방석 위에 도장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내관은 멈추지 않고 진해의 앞으로 걸어와 그것을 내려놓았다. 뭔지는 모르겠으나 좋은 돌로 만든 걸 보아 비싼 물건임이 틀림없었다.
“오진해를 다시 영찰어사에 복직시키고 폐비 연씨 사건을 수사할 것을 명한다.”
진해 외에 다른 사람들은 그 도장이 뭔지 아는 모양이었다. 수군거리는 소리 탓에 회순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릴 정도였다. 뭔지는 몰랐으나 일단 복직시켜 준다니까 감사한 일이었다. 복직하게 되면 일개 평민이 아니니 월산에게 조금이나마 대항할 수 있었으니까.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수사에 필요한 인력은 마음대로 뽑아 써도 좋다. 그걸 위한 어사직인이니.”
아하. 이걸 어사직인이라고 하는 모양이었다. 진해는 몰랐지만 어사직인은 본래 어사들의 우두머리가 갖는 도장이었다. 강절곤이 병권을 다스릴 권한을 얻으며 하사받은 황금 도끼처럼, 어사들은 황제의 명을 집행할 때 어사직인을 받았다. 작은 옥쇄라 해도 무방한 물건이었다.
“그럼 그 전에 제가 청을 하나 올려도 되겠사옵니까?”
그런데 어사직인만 받아도 과분할 터인 진해가 고개를 번쩍 들며 대담하게 청을 올렸다. 폐비 연씨 사건, 황후가 연관되었다고 의심되는 대사건을 맡은 진해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무게가 실렸다.
“이런 큰 사건을 맡았는데 육품은 좀 그러하니 사품으로 승진시켜 주소서!”
어이없게도 진해는 황제에게 자신을 승진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결코 동십사로부터 조관림 얄미운 은인 놈이 사품으로 승진했다는 소식을 들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단지 큰물에서 놀려면 큰 배가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
승진시켜 달라는 요구에 대전이 일순 조용해졌다. 오진해는 지금 성월공의 청 탓에 겨우 목숨이 붙어 있는 처지였다. 만약 폐비 연씨 사건을 매끄럽게 해결하지 못하면 성월공이 아니라 황태공이 살아 돌아와도 벌을 면치 못할 터였다. 그런데 승진이라니.
“큿, 대범하기도 하지…….”
신료들은 소매로 눈가를 훔치는 강절곤을 못 본 척했다. 월국을 떠도는 소문 중에는 사실 오진해가 강해아이며 신변의 안전을 위해 대역을 세웠었고, 성월공과의 혼인 후에 자신의 본 신분을 찾을 예정이라는 것도 있었다. 누군지 몰라도 반이나 맞췄다.
전에는 서로 발을 못 걸어서 안달인 사람이 지금은 오진해의 당돌한 발언에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만약 오진해가 강해아가 아니라면 강절곤이 오진해에게 새장가를 든다는 소문도 있으니 여러모로 오진해가 신분 때문에 꿀리게 될 일은 없을 터였다.
“……좋다. 황후를 심문하려면 육품으로는 모자랄 테지.”
신료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회순을 향하자 회순이 가벼운 한숨과 함께 진해의 청을 받아들였고 진해는 서른이 되기 전에 사품 을 달았다. 머리가 뛰어나게 좋다거나 (표면상) 가문이 좋은 것도 아닌데 사품에 오른 것이었다.
“옳으신 판단입니다, 폐하.”
그런데 이게 웬일. 감사 인사는 진해의 입이 아닌 다른 곳에서 나오고 있었다. 황제와 가장 가까이 서 있던 성월공 안월산이 대뜸 황제에게 감사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회순은 월산을 흘끗 보는가 싶더니 영 좋지 않은 표정을 했다. 오진해가 이모저모 쓸모가 있기는 한데, 강해아라면 성월공의 정실로 모자라지 않기는 한데, 그간의 행실이 있다 보니 썩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오 어사는 마땅히 제 할 일을 해낼 것입니다. 소신은 이 자리의 누구보다도 그를 믿고 있사옵니다.”
“……그런가.”
“예. 그는 제 첫 각인자니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월산은 온 신료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사고를 쳤다. 회순은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옥좌를 쥔 주먹에 굵은 핏줄이 돋아났다.
“성월공. 여기는 대전이다.”
“송구하옵니다.”
그 어떤 때보다도 무게가 잔뜩 실린 목소리였다. 월산은 가볍게 돌아갔지만 진해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진해를 바라보는 회순의 눈이 당장이라도 진해를 생으로 회 쳐 버릴 것 같았다. 회순은 진해가 해산의 침실 시중을 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해산이 도주하기 직전까지도 진해와 함께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한마디로 회순 시점에서 보면 저 놈팡이가 두 황손에게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성월공이 진해에게 청혼한 걸 모르는 해원공의 신료 측이 눈을 부릅뜨고 진해를 바라보았다.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눈빛이 반, 저놈 사실 첩자였던가 하는 눈빛이 반의반, 안 그럴 거지라는 눈빛이 반의반이었다. 예부상서 동가대는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눈빛 쪽이었다.
“오 어사.”
“예, 예…….”
진해는 등에 따끔하게 꽂히는 시선들을 느끼며 줄줄 땀을 흘렸다. 황제의 눈빛은 다른 이들의 눈빛을 합친 것보다도 매서웠다. 만약 진해가 강해아가 아니라 진짜 평민이었으면 무슨 죄를 씌워서든 당장 형장으로 보내 버릴 눈빛이었다. 진해는 살짝 화장실에 가고 싶어졌다.
“후― 일단 폐비 연씨 사건을 해결해라. 나머지는 이다음이다.”
여기서 성월공의 혼사 이야기를 꺼냈다가는 신료들끼리 머리채를 뜯으며 싸울 판이라, 자신은 이성을 잃을 판이라 회순은 거한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은 기회로구나. 이번 일을 잘 처리하면 그 공으로 짐의 정군이 될 수 있을 테니.”
다리가 후들거려 일어서지 못하는 진해의 곁으로 월산이 다가왔다. 보통 때라면 여느 직장인들과 다름없이 자신의 부서로 돌아가 퇴청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다하는 신료들이 그런 둘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기대하고 있으마, 해야.”
월산이 몸을 굽혀 진해의 관자놀이에 입을 맞췄다. 진해는 그가 입을 맞추는 순간 만 개의 눈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것을 느꼈다. 시기, 질투, 배신, 기쁨, 슬픔. 온갖 감정이 진해의 몸에 치덕치덕 들러붙었다. 진해가 부정한다고 해서 제대로 전해질지도 의문이었다.
그렇다고 사건을 대충 해결할까? 그건 또 아니었다. 사건이 마무리되지 않으면 해산은 영영 도성에 돌아올 수 없었다. 대역 죄인이 되어 평생을 쫓기게 될 터였다. 그리고 해산이 돌아와야 자신이 살았다. 일단 해산이 돌아오면 어떻게든 월산과의 혼인을 멈출 수 있을 터였다.
그러면 해산은 자신의 본래 자리로 돌아올 것이고, 그간 자신이 받지 못했던 정당한 적통의 대접도 받을 수 있을 터였다. 굶주렸던 황제의 인정도 마음껏 받을 수 있었다. 진해가 해산에게 주고 싶은 것들이었다. 진해가 속된 말로 밑이 빠지게 작업을 한 것도 다 해산에게 좋은 걸 주고 싶어서였다.
“그건 두고 봐야 알지요!”
설령 해산과 이뤄지지 못하더라도 진해는 해산에게 세상을 주고 싶었다. 월산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릿하게 아팠지만, 진해가 지금 사랑하는 사람은 해산이었고, 미려였고, 삼랑이었다. 자신이 갖지 못하면 부수겠다는 월산의 사랑은 진해의 것과는 맞지 않았다. 월산은 훌륭한 황제가 될지는 몰라도 진해가 원하는 귀여운 남편감은 아니었다.
진해는 제 앞에 놓인 어사직인을 움켜쥐고 힘 있게 일어섰다. 세상에 선언하듯 신료들을 향해 당당히 돌아섰다. 진해의 사람들을 모아야 했다. 오진해가 가진 모든 것을 끌어모아야 했다. 영찰어사 오진해는 황궁의 가장 내밀한 비밀을 파헤치기 위한 한 걸음을 내디뎠다.
* * *
진해가 가장 먼저 찾은 건 호위였다. 엿 같은 두(頭) 놈은 동십사와 마찰을 빚고 싶지 않은지 동십사가 진해 곁에 있을 때는 다가오지 않았다. 멀찍이 서 있는 게 기분 나빴지만 괴롭힐 명분이 없었다. 진해는 동형동형 노래를 부르며 조카들을 보고 싶다고 청했고, 동십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흔쾌히 진해를 안내했다.
동가대는 몰라도 동십사는 진해를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아니, 믿다 못해 감탄하고 있었다. 진해에게 몸을 숙이더니 자네는 이 모든 것을 ‘예견’한 것이냐고 은근슬쩍 물어보는 것이 아닌가. 흡사 갓 신내림 받은 무당을 보는 눈초리였다.
“아니요! 하지만 해산 도련님께 흐르는 기운이 보통의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죠!”
개소리였다. 진해가 자 본 결과 황족이고 평민이고 잘 먹고 잘 빠지면 장땡이었다.
“과연! 자네는 날카롭군, 영찰어사는 자네를 위해 만들어진 자리임이 틀림없어!”
“과찬이십니다. 동 상서 어르신께도 잘 말씀해 주세요. 휴, 어쩌다 연이 이렇게 꼬였는지.”
그러면서 진해는 동십사에게 사기를 치기 시작했다. 어릴 때 사가에 내려온 그를 본 적이 있는데 그에게서 흐르는 기품이 신기해 어울렸고 그게 어쩌다가 각인된 적이 있노라고. 하지만 장성한 후에는 만난 일이 없으며 자신은 오로지 해산 도련님의 홍복을 위해 뼈를 깎고 있노라고!
“마치 동 형이 아심 형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마음입니다.”
“그 정도란 말인가! 참사랑이군. 내 아버지께서 오해 않도록 이야기하겠네. 그나저나 성월공은 참으로 간악하군. 해원공 마마를 압박하기 위해 자네를 채 가려 하다니.”
“눈이 높은 거지요.”
“하하, 그건 아닌 것 같네.”
오랜만에 만나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니 오랜 옥 생활로 갑갑했던 몸이 풀리는 듯했다. 진해는 티끌 하나 숨기지 않는 동십사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새삼 그를 다시 보게 되었다. 맨 처음 이 사람을 처음 봤을 때는 동열넷이라며 비아냥거렸는데 지금은 형이라 부르며 진정으로 따르고 있었다. 진해의 간과 쓸개는 대기하고 있는 예쁜이들 몫이라 떼 줄 수는 없어도 동십사가 곁에 없으면 무척 서운할 것 같았다.
“형님, 형님은 제가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그리하여 진해는 동십사에게 물음을 던졌다. 아버지가 상서고 자신이 내무부의 일등시위였으니 동십사도 세간에 떠도는 소문을 모를 리 없었다. 어쩌면 오진해가 강해아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자네는 자네야.”
“…….”
“자네의 성씨가 뭐든 무슨 상관인가. 내가 본 자네는 자신의 입지가 달라진다 하여 교만해질 이가 아니야. 크흠, 흠! 그, 사내 버릇은 나쁘지만 의리가 있지! 사내끼리 의리가 통하면 되었지 또 뭐가 필요한가. 아니 그래?”
“동 형…….”
이름이 숫자라고 놀린 거 미안해요. 진해는 입 밖으로 내지 못할 사과를 하며 동십사를 바라보았다. 동십사는 말하고 부끄러운지 낯을 얼큰히 붉히고선 손으로 열심히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인 동가대로부터 포섭하라는 언질을 받았을지도 모르는데 동십사는 뚝심 있게 진해를 믿어 주고 있었다.
“동 형……. 조카들이 크면 여해루에 공짜로 들어오게 해 줄게요…….”
“뭣?!”
“술값도 내가 내줄 테니까 마음대로 마시라 그래요.”
“그건 아니 돼! 학문에 충실해야지!”
진해는 울컥 솟으려는 속을 다독거리며 입으로 농을 지껄였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눈물이 뿜어져 나올 것 같았다. 자신이 강해아일지도 모른다는 것만으로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졌다. 끈적끈적한 욕망의 시선은 간덩어리가 부은 진해에게도 차마 마주하기 힘든 것이었다.
포식자 앞에 놓인 초식 동물이 이러할까. 그들은 진해를 진해로 봐 주지 않고 뜯어먹을 수 있는 먹이로 보고 있었다. 심지어 황제마저 진해가 평민일 때와 아닐 때의 시선이 달라졌다. 어쩐지 쓸쓸해졌다. 그리고 겁이 났다. 혹시 해산도 자신을 저런 눈으로 보면 어쩌나 싶어서, 그가 자신에게 ‘오진해’를 벗을 것을 요구하면 어쩌나 싶어서.
“슉부~!”
“아이고, 요 강아지들 그새 말을 하는구나!”
진해는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해지는 마음을 감추며 동십사의 쌍둥이 형제를 꼭 끌어안았다. 동십사의 눈썹과 아심의 이목구비를 닮은 아이들은 참으로 앙증맞았다. 덩치는 동십사를 닮으려는지 벌써부터 우람하기 시작했지만 진해는 그래도 귀엽다고 뺨을 비볐다. 아이들의 체온에서 위로받았다.
언제 왔는지 황아무가 그런 진해를 지켜보고 있었다. 해원공의 도주 이후 이리저리 불려 다니느라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었다. 아마 오호가 저 얼굴을 보면 진해를 으슥한 골목으로 끌고 가 명치를 칠 터였다.
“황 시위, 다시 한번 내 호위가 되어 주겠어?”
“저 말고 또 누가 있겠습니까, 오 형님.”
아이들을 돌려준 진해는 황아무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황아무는 진해에게 어떠한 불평 없이 그 손을 다잡았다.
“고생 많이 했지?”
“오 형님을 처음 뵈었을 때부터 고생이었지요. 뭐, 새삼스럽지도 않습니다. 대 끊기기 전에 죽지만 않으면 됩니다.”
“……황 시위, 내가 진짜 잘못했어.”
“아시면 잘 해결해서 승진시켜 주십시오. 해원공 마마께서 돌아오시면 제게도 좋은 일이겠지요?”
“아, 근데 황 시위 하나 알려 줄 게 있는데 바깥에 좀 재수 없는 애 있거든? 그놈이 말이야, 자기 딴에 주먹 좀 쓴다고 하는데―”
진해는 이제 자신을 보호할 방패가 생기자 두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고자질하기 시작했다. 혈월대는 강했지만 무과에 합격해 혹독한 시험을 거치고 적통 황자의 시위 대장을 맡은 황 시위도 보통 주먹은 아니었다.
“저놈이야!”
진해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동가 저택 밖에서 하릴없이 기다리고 있던 두를 손가락질 했다. 어두운 분위기를 뿜으며 멋지게 기대 서 있던 두는 난데없는 손가락질에 당황해 엉거주춤 섰다.
“그대가 감히 오 어사를 핍박하는 이입니까?”
“핍박이라니. 나는 성월공 마마의 명을 받들어 오 어사를 보필하려는 것뿐이오.”
“언제부터 성월공께서 오 어사께 신경을 쓰셨지요? 오 어사님은 해원공 마마의 사람이오. 즉 오 어사 대인을 모시는 건 바로 나라는 말이오.”
키가 큰 무관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보고 서자 분위기가 심상찮았다. 진해는 황아무의 팔에 붙어 저놈이야, 저놈이 날 괴롭혔어라고 말하며 황아무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해원공이 돌아오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물밑 발길질 싸움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두가 주먹에 힘을 주는 순간 진해가 황아무의 손에 제 손을 끼워 넣고 어사직인을 딸랑이처럼 이리저리 흔들어 보였다.
‘약오르지, 이놈아! 내 호위는 내가 정할 수 있어! 꼬우면 소월이한테 가서 일러 보든지!’
그냥 무지렁이 같으면 기세만으로도 제압할 수 있을 텐데 상대가 해원공의 호위대장이었다. 혈월대는 강했지만 숨어서 움직이는 터라 급으로 치면 황아무가 두보다 두 품계는 더 높았다. 전에 서해 옥가 가신들과 싸울 때 섞여서 싸우는 걸 보니 실력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오 대인, 진짜 이러실 겁니까?”
“이러면 어쩔 건데.”
진해는 진지한 얼굴로 두를 노려보는 황아무의 팔을 잡고 춤을 췄다. 두는 조부가 진해에게 파각사를 보내게 한 원인이라 죄책감을 갖고 있었지만 저러는 걸 보자 성월공이고 뭐고 딱 한 대만 쥐어 패고 싶었다.
그러나 진해의 머리통을 때리면 두에게 복수하러 올 사람이 너무 많았다. 일단 주공인 성월공은 제쳐 두고, 이 집에 사는 일등시위 동십사라거나 성격이 불같은 강절곤이라거나 기타 등등.
결국 두는 물밑싸움 예선전에서 장렬히 탈락하고 말았다. 물밑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총애였는데 두에게는 그 총애라는 것이 가뭄 날 빗방울만큼이나 부족했다. 결국 두는 연신 뒤를 돌아보며 물러갈 수밖에 없었고 진해는 승리에 심취했다.
“드디어 방해꾼이 사라졌네. 이제 제대로 수사할 수 있겠어.”
“오 대인, 다음엔 어디로 행차하실 겁니까?”
“어디긴 어디겠어. 당연히 황궁이지!”
“서, 설마.”
“이런 건 괜히 일 복잡하게 만들 거 없이 당사자한테 물어보면 되는 거 아니야?”
형부로 가서 과거의 기록을 살필 줄 알았는데 진해는 대뜸 황궁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황아무는 당사자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가자, 황후궁으로!”
진해는 지나가는 수레를 잡아타고 황궁으로 향했다. 다른 이들이 사실이니 아니니 떠들지만 진해는 강백서가 추정한 내용을 들었고 그것이 대충 맞아떨어지리라는 것도 알았다. 진해가 생각해도 아무런 연줄이 없는 황후가 황궁에 몰래 아이를 들여올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확실한 증거와 자백뿐이었다. 당사자가 인정하고 진술서를 남기면 사건 종결 땅땅, 이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황후궁에 도착하자 큰 문제가 생겼다.
황후궁의 문지기들? 어사직인을 보자 바로 비켜 줬다. 황후궁의 궁인들? 이미 이야기를 들었는지 진해를 아주 극진히 대접해 줬다. 진해에게 여기서 자길 빼 달라고 돈 찔러 주는 이도 있었다. 그렇다면 문제가 무엇이냐.
“……오 어사.”
문제는 바로 건평황후 사마계였다. 사마계가 너무나 아름다운 연상, 음인이라는 점이었다. 진해는 수척해진 사마계가 창가에 서 있다 뒤돌아보는 순간 자신의 눈이 멀어 버리는 줄 알았다. 미려도 예뻐 죽겠는데 미려와 꼭 닮은 연상 음인이 아련하게 바라보자 심장이 제멋대로 뛰었다 멈췄다를 반복했다.
‘큭! 저런 미모라면, 무죄야! 무슨 죄를 지었든 무조건 무죄야!’
사마계가 나비의 날개 같은 풍성한 속눈썹을 내리깔자 진해의 가슴이 꽉 조였다. 진해는 이 세상 예쁜이들의 편이었고, 황후는 그 예쁜이들의 정점이었다.
‘마하반야바라밀다! 진해야! 개족보 만들지 말자! 진해야! 저 사람은 우리 강아지 우부시잖아! 진해야! 옥길합! ……에이 씨.’
황후의 아름다움에 취해 한참을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진해는 미려의 생부이자 황후의 정혼자였던 옥길합을 떠올리자 급격히 침착해졌다. 옥길합이 재수 없어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그가 황후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아주 잘 알아서였다.
식탁을 가볍게 걷어차는 발에 가랑이를 걷어차이면 진해의 예쁜이들을 더는 귀여워해 줄 수 없었다. 옥길합의 미소를 떠올리자 진해의 얼굴이 명판관 못지않게 아주 근엄해졌다.
오천협과 옥길합의 기물 파괴 장면을 떠올리며 진해는 진지하게 심문에 임했다. 옥길합과 유일하게 겨룰 수 있는 좌부 오천협은 진해의 부탁을 받아 삼랑을 데리고 도성 밖으로 나가 있었다. 그 말인즉슨 진해가 황후를 꼬였다는 소문을 들은 옥길합이 뚜껑이 열려 월국으로 날아와도 진해를 보호해 줄 이가 없다는 말이었다.
“여는 아무것도 모르오.”
“아직까지는 황후마마시니 말 편하게 하시지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우리 미려 우부시기도 하고.
“그런 것보다도 일이 이렇게까지 되었는데 모른다고 우기실 셈이십니까? 쉽게 가지요. 후딱 진술하면 제가 그래도 의식주는 어떻게 보장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해산이는 내 아들이오.”
“어허, 황후마마.”
그런데 벌레 한 마리도 못 죽이게 생긴 황후가 의외로 고집이 셌다. 꽃잎처럼 고운 입술을 앙다물고 고개를 새침하게 돌리는 게 아닌가. 참으로 심장에 좋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럼 다른 걸 물어보지요. 강백서한테는 왜 그랬습니까?”
하지만 진해는 황후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다. 미려 생각을 해서 꼭꼭 묻어 두고 있었지만 황후가 혐의를 부정하려 하자 속에서 울컥 뭔가가 치솟았다. 우부의 세월. 다시는 돌려받을 수 없는 우부의 시간들.
“우물 속의 귀신이 강백서라는 거, 알고 계셨죠?”
자신도 모르게 절로 목소리가 낮아졌다. 아니나 다를까 황후는 우물이라는 말과 강백서라는 이름을 듣자 움찔 어깨를 떨었다. 낯빛이 창백해지더니 몸을 잘게 떨기 시작했다. 진해는 갑자기 화가 나서 제 목에 걸고 있던 고산홍패를 억지로 끄집어냈다.
[탁.]
“이건 고산홍패라고 하는 물건입니다. 해국의 궁주님이시라 이미 알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고산국에서도 구하기 힘든 산조개를 가공한 것이지요.”
“고, 고산국이라고?”
“그리고 여기 새겨진 서라는 글자는 강백서의 이름 마지막 글자를 따온 것이라 하더군요.”
“아……!”
“제가 잠춘동 빈민가에서 유일하게 지니고 있던 물건이었습니다.”
진해가 느릿하게 말을 끝내자 황후는 더는 겁에 질릴 수 없을 만큼 두려운 얼굴이 되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도망칠 곳이 없었다. 그저 제자리에 앉아서 옷을 움켜쥐고 덜덜 떠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여, 여는, 몰, 몰랐어. 그, 그가 살아 있는 줄은!”
“우물에 처넣은 건 알고 있었다는 거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는 원귀비의 사람이야! 여와는, 이야기를 할 리가 없잖은가! 그리고, 구호소의 일도, 여가 원하던 것이, 아니었어!”
“됐고. 그가 돌아왔으니 물증 찾는 것도 시간문제입니다. 진술서 작성하고 빨리 끝내죠. 유배를 가든 뭘 하든 일단 목숨은 붙여 드릴 테니까.”
마음 같아서는 더욱 옥죄고 닦달하고 싶었지만 미려와 닮은 얼굴이 진해를 약하게 했다. 화가 나고 속이 뒤집혔지만 미려는 진해가 가장 어려울 때 가장 큰 기쁨을 준 진해의 보물단지였다. 애초에 이 사람이 그 짓을 하지 않았으면 진해가 어려워질 일도 없었겠지만, 이미 미려와의 추억이 진해의 뇌리에 진득하니 달라붙은 후였다.
진해 기준으로는 나라 구한 공과 진배없는 공이었기에 진해는 진술서를 받고 어떻게든 목숨은 붙여 놓을 셈이었다. 폐궁에 유폐시켜 우부와 비슷한 고통을 받게 하는 것도 좋을 듯했다.
“자, 빨리 써요! 빨리 인정하라고!”
그런데 자기 이야기에 잔뜩 겁을 집어먹으면서도 황후가 한사코 혐의를 부인했다.
“무, 물증을 가져와라! 가져오지 않으면 인정하지 않아!”
“어허, 심증은 엄청나게 많거든요? 상황 증거도 넘치고!”
“여는 인정 못 해!”
심지어 증거를 가져오라며 마구 뻗대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건 진해를 무척 난감하게 했는데 황후의 말대로 심증은 넘쳐 나는데 물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황궁에 머물던 궁인들을 찾아보려 했는데 대부분이 그 사건으로 인해 출궁했고, 두 차례의 큰 역병 이후 행방이 묘연하기까지 했다. 누군가 일부러 지운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깨끗했다.
이대로 밀고 가는 수도 있겠지만 황후가 끝까지 인정하지 않으면 훗날 해산이 황위에 올랐을 때 그의 출생에 의혹이 생길 수 있었다. 성월공의 목숨을 요절내지 않는 이상 황실의 유력자인 그는 포기하지 않을 터였고 해산이 낳은 황자들은 정통성이 부족해질 수도 있었다.
즉, 황후의 자백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꼭 황실뿐만의 일이 아니라 대월률에 따르면 이런 중범죄에는 반드시 범인의 자백이 필요했다.
“아, 목숨은 보장해 준다니까!”
진해가 참다못해 발칵 화를 내도 황후는 입을 꼭 다물고 한사코 고개를 내저었다. 별로 건강하지도 않다는 양반이 고집이 아주 쇠고집이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애를 바깥으로 빼돌려 키울 생각을 했을까.
‘어, 잠깐만.’
그러던 그때, 진해는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진해의 우부 강백서는 황후에게 연줄이 없어 바깥에서 아이를 조달하지 못할 것이라 했다. 그런데 미려는 바깥에서 발견되었다. 그것도 황후가 어디 있는지도 알지 못할 빈민가인 잠춘동에서.
아이를 들이는 게 힘들다면 마찬가지로 내가는 것도 힘들 터였다. 황궁은 들이는 것뿐 아니라 내가는 것도 엄격히 조사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살아 있는 사람의 아이는 더욱 그랬다.
왜냐면 대소 신료들의 대부분이 음인이기 때문이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이가 아니라면 대개 가임기였고 얼마든지 아이를 낳을 수 있었다. 지금은 상연 이 금지된 연극 중에 황제가 불길한 사주를 타고난 황자와 신료의 건강한 아이를 맞바꿨는데 나중에 그 불길한 사주를 타고난 황자가 운명을 이겨 내고 나라를 구하는 극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극이었다. 황실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었고 대월률에도 신료들이 산달이 다가오면 황궁에 입궁하지 못하도록 정해 놓고 있었다. 정 급하면 황제가 그 집으로 가야 했다.
이렇게 방비를 해도 성질 급한 아이가 산달보다 먼저 태어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럴 때도 다 법도가 있었다. 혹시나 하는 우려 탓에 출산 뒤 아이의 몸에 붉은 먹으로 우부와 좌부의 이름을 적고 발바닥 도장을 찍어 그 자리에서 출생 증명서를 만들게 했다. 그 뒤에는 아이의 좌부를 불러 아이를 데리고 바로 출궁하게 했던 것이다. 황통과 철저히 분리하기 위해서.
그런데 미려에겐 발 도장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미려는 어떻게 궁 밖에, 그것도 궁인과 함께 있었던 것일까. 궁인은 중인이라 그의 자식이라 우길 수도 없을 터인데. 짧은 의혹이 순식간에 불어났다. 진해는 창백한 얼굴을 하면서도 필사의 각오로 혐의를 부정하는 황후를 보며 미약한 가능성을 하나를 떠올렸다.
어쩌면 미려는, 황후의 아이는 황후가 원해서 내보낸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얼마 전에 해국에 다녀왔는데, 아십니까?”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버티던 황후는 진해가 해국 이야기를 꺼내자 슬그머니 진해를 바라보았다. 진해는 분위기를 조금 누그러뜨릴 필요를 느꼈다.
“서해 옥가의 저택에 머물렀지요.”
“…….”
“이야~ 정말 굉장했습니다! 과연 서해 옥가는 해국 제일 명문이더군요. 거기다 옥 가주는 어찌나 정정하신지 형님이라고 부를 뻔했지 뭡니까.”
“……합을 만났나?”
과연 황후 사마계는 과거의 정인 이야기를 꺼내자 관심을 보였다. 파리하게 죽어 있던 얼굴에 조금 혈색이 돌아오는 듯했다.
“네. 그리고 그 집 후사인 옥정려도.”
“후, 사……?”
“놀랍게도 그 집의 적자인데 아무도 우부를 모른다더라구요. 더 신기한 건 마마랑 찍어 낸 것처럼 닮았습니다.”
“아……!”
그리고 진해는 제 앞에서 천천히 변하는 사마계의 얼굴을 바라보며 속에서 쓴 물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할아버지인 강절곤과 강백서, 그리고 다른 이들은 폐비 연씨 사건의 주모자가 사마계라고 주장했지만 이 얼굴을 보면 아무도 그런 소리를 못 할 터였다. 사마계는 처음으로 살아 있는 사람 같은 표정을 했다.
“참으로 잘생긴 양인 총각이지요. 머리칼은 구름 같고, 눈동자는 수정, 입술은 꽃잎, 드리운 속눈썹은 마치 나비의 날개!”
잔뜩 웅크렸던 꽃이 피는 모습도 지금의 사마계에게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창백했던 얼굴에 혈색이 돌아오고 겁에 질린 눈매가 상기되는 장면은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것만큼이나 다채로웠다. 거기다가 저 얼굴은 진해에게 진실의 실마리를 안겨 주었다. 만약 진해가 억지로 밀고 나갔다면 진해는 미려에게 평생 버려진 자식이라는 꼬리표를 안겨 주었을 것이고, 이 사건의 배후 역시 찾지 못했을 것이다.
“피부는 또 어찌나 뽀~ 얀지! 벗기면 눈이 부셔서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다니까요!”
“벗겨……?”
“아차.”
하마터면 쓸데없는 말을 할 뻔했다. 미려 자랑을 시작하면 진해는 제 입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엇흠! 어쨌든 옥정려는 무척 건강합니다. 비파 연주도 잘하고, 주먹도 잘 쓰고. 그~, 어떤 이상한 놈팡이가 손잡고 달아나지 않으면 무난히 가주가 될걸요?”
이미 이상한 놈팡이가 손잡고 튀었다. 거기다 그 놈팡이는 사마계의 눈앞에 앉아 있었다. 사실대로 말하면 사마계가 화를 내며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을 것 같아서 진해는 적당한 사실만 추려 말했다. 어쨌든 미려가 그 집 적자로 인정받은 건 사실이었다.
“해산 마마님이랑 동갑이라니까 참 신기하죠.”
나이를 언급하는 걸 마지막으로 진해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상기된 사마계의 눈가가 붉어지더니 눈동자에 습기가 몰리기 시작했다. 사마계는 소매로 황급히 얼굴을 가렸으나 이미 고인 눈물을 멈출 순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한참 동안이나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옥 가주가 이르기를, 강백서가 서신을 보내지 않았다면 아이의 존재도 몰랐을 거라 합니다. 조금이라도 염치를 안다면 알고 계신 걸 말해야 해요.”
처음에는 황후의 진술서만 받아 내고 빨리 일을 끝낼 셈이었는데 진해의 촉이 말하고 있었다. 이대로 끝내면 안 된다고. 어사직인을 헛되이 써서는 안 된다고.
“……여의 진술을 받아 가게.”
그런데 황후는 자신의 아들이 서해 옥가의 후사로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언제 부정했냐는 듯 혐의를 인정했다.
“여가, 여가 원귀비 연광의 아이와 내 아이를 바꿨다. 내 아이가 사산, 된 것이 두렵고 겁이 나 그리하였다 .”
“마마.”
“혼인 전 부왕은 여의 가치는 월국의 후사를 낳아 화친을 든든히 하는 것밖에 없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그런 것이었다. 여는 재주가 없으니 후사의 아비 자리를 빼앗기면 황후 자리도 빼앗기고 이곳에서의 입지조차 없게 된다 생각하여 그런 것이다.”
당신 부왕은 첩의 미색에는 침을 흘리면서 왜 자식의 미모는 못 알아본 것인지? 진해는 인생 제일의 수수께끼를 머리에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재주가 별것이 재주인가. 남들보다 뛰어나면 재주고, 황후와 미려의 미모는 보통 재주가 아니라 천재 수준의 재주다.
“목숨을 보장해 준다고 했지? 그럼 다 털어놓겠다. 강백서도 여가 자백하겠다고 해서 불러들인 것이다. 궁으로 불러들인 뒤 궁인을 시켜 우물에 밀어 넣었다. 여와 어릴 적부터 자란 궁인이라 목숨을 버릴 각오로 함께 뛰어들었지. 그는……, 명을 달리한 모양이지만.”
“마마.”
“해산이 돌아와 제자리를 찾으려면 여의 진술이 필요할 텐데?”
“휴, 그건 그렇지만.”
“……강백서에겐, 내세에서라도 꼭 죄를 갚겠다 전해 주게. 지금의 여에게는 갚을 방법이 없으니.”
뭔가를 결심한 듯 의연한 얼굴을 하는 걸 보니 사마계는 진해와 비슷한 결심을 하는 모양이었다. 누군가를 위해 그가 모든 것을 안고 가겠다는 결심을. 하지만 저런 미인이 허무하게 지는 건 이 세상 다시 없을 비극이었다. 연루되었으니 당연히 죗값을 치러야 했지만 저런 미인을 이용해 먹은 놈을 그냥 둘 수는 없었다.
“뭐, 대충 그런 거로 칩시다. 그런데 말이죠.”
진해는 눈을 번뜩이며 사마계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사마계의 기개는 대쪽 같았지만 평생을 궁 안에서 살아서 그런지 여기저기 빈틈이 많았다. 잠춘동에서 짬밥을 먹은 진해에겐 너무나 털어먹기 쉬운 상대라는 것이었다.
“우리 해산 마마님이 연씨 소생이라는 걸 증명할 방법이 있나요? 막말로 꼭 연씨 소생이 아니어도 되고 바깥에서 아이를 들여와도 되잖아요.”
“그, 그건…….”
“왜 꼭 원귀비의 아이여야 했죠?”
사마계가 당황하는 모습은 내가 한 게 아니라는 대답과 일맥상통했다. 진해의 눈이 가늘어지자 사마계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뺨을 확 붉혔다. 엉겹결에 모른다고 답하지 않은 건 칭찬해 줄 만했다.
“해, 해산이의 출생을 즈, 증명할 이가 있다!”
“오?”
“지금은 후, 후궁이 없어 있으나 마나 한 관례지만 화, 황족의 아이가 태어나면, 가, 같은 황족의 정군이 찾아가 참관하거나, 아, 아이의 몸을 씻기며 추, 축복해 준다. 아이가 잘못된 곳이 없는지도, 확인해 주고!”
아마 지금처럼 아이가 뒤바뀌거나 다른 아이를 들여오거나, 혹은 아이의 장애를 숨기는 걸 방지하기 위한 관례겠지만 황후는 단순히 그걸 축복이라 말했다. 진해는 그래그래, 사내는 얼굴이 제일이지라는 표정으로 끄덕이다가 몸을 굳혔다. 잠깐, 황족의 정군이 찾아와 몸을 씻겨 준다 함은……?
“지, 지순 황태공은 황상이 찾아감이 격에 맞지 않는다 하여 그의 정군이 직접 행했지만 여에게는 화, 화석정군이 왔다!”
“설마.”
“화, 화석정군이라면 당시 해산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갓난아기임을 증명할 수 있다! 그는 해산의 몸을 기억하고 있을 테니 황상과 대조하면, 겨, 겹치는 곳이 있, 을지도……?”
화석태정군, 주로 화석정군이라 불리던 이는 지순 황태공의 정실이었다. 진해가 살던 집의 원주인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순 황태공이 죽은 뒤 어린 월산을 두고 출가해 버린 이이기도 하고.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진짜 출산하면 정군들이 와서 몸을 씻어 줘요?”
“그, 그렇네.”
“허.”
황후는 해산의 출생을 증명하려고 화석정군을 들이댔지만, 정작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말을 하는지 모르고 있었다. 월산과 해산은 생일이 하루 차이가 났다. 미려가 언제 났는지는 모르지만 양인임을 확인하려면 적어도 해산보다는 먼저 태어났을 터였다. 누가 진통을 먼저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어도 황후는 찔리는 구석이 있으니 대놓고 누구를 부르거나 하지 않았을 터였다.
진해는 황후에게 뭔가를 물으려다가 진해의 시선을 피하는 그를 바라보며 입을 다물었다. 단순 추측이라 하기에는 아귀가 딱딱 들어맞았다. 누가 황궁에서 아이를 바꿀 수 있었을까. 누가 원귀비 소생의 아이를 아버지들보다 먼저 볼 수 있었을까. 또 누가 근처 궁인들의 입을 막을 수 있었을까.
황제가 곧 들이닥친다는 것을 아는 이가 그럴 수 있었다. 당시 황제와 비등한 권세를 가진 황태공의 정실이라면 그럴 수 있었다. 그라면 의심받지 않고 아이를 씻길 수 있었고, 그라면 놀라는 척, 아이를 씻는 척 가져온 흉물로 바꿔치기할 수 있었다. 의무를 다하는 척하며 아이를 숨겨 황후궁으로 데려갈 수 있었다.
진해는 예상치 못한 사실에 맥이 탁 풀렸다. 그가 미려를 어떻게 데려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해원공부나 그 근처까지만 가도 아이를 누구의 눈에 띄지 않게 잠춘동으로 데려갈 수 있었다. 어쩌면 지금은 막혀 있다는 나머지 비밀 통로. 그중 하나는 황궁과 이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이리 봐도 저리 봐도 화석정군이 분명했다. 진해는 아이를 인질로 삼은 악랄함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월산이 누구 성질머리를 닮았나 싶었더니 제 좌부를 닮은 모양이었다. 뭐 때문에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참으로 몹쓸 자식이었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삼랑이한테 나가는 김에 좀 찾아보라고 할걸!”
진해는 뒤늦게 제 손에서 떠난 고급 인력들이 그리워졌다. 동시에 일이 예상보다 훨씬 길어질 것을 예감했다. 하나를 캐면 줄줄이 딸려 올라오는 고구마처럼 사건이 줄줄 딸려 올라왔다. 진해는 속으로 한껏 짜증을 냈다.
* * *
결국 황후의 진술서는 받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받지 않았다. 사마계에게 다 넘기고 마무리 지을 수 있었지만 그가 원해서 미려를 바깥으로 보낸 게 아니라는 걸 안 순간, 진해는 그를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죗값은 치르게 하겠지만 죗값은 사마계의 배후도 함께 치러야만 했다. 엄밀히 따지면 그야말로 진해의 원수였던 것이다.
만약 그가 아이를 바꾸지 않았다면 미려는 우부와 함께 있었을 터였다. 원귀비 연광은 얼토당토않은 죄목으로 유폐되지 않았을 것이고, 해산도 제자리에서 잘 자랐을 게 분명했다. 그가 아이를 바꾸지 않았다면, 어쩌면 출가하지 않았다면 월산도 지금보다 덜 비뚤어졌을지도 모른다.
“이런 망할 놈!? 내가 죽을 뻔한 게 다 이놈 탓이네?!”
진해는 황궁 한복판에서 치미는 분을 참지 못하고 빽 소리를 질렀다. 진해가 씩씩대고 있자 뒤에 따라오던 황아무가 헛기침을 했다. 황아무가 눈치를 주자 근처에서 진해를 구경하고 있던 궁인들이 후다닥 흩어졌다. 진해는 근래 궁인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유명 인사였다.
[뾰롱!]
그러던 그때, 누군가 진해를 발견하고 단숨에 달려왔다. 날아온 게 아니라 달려왔다.
“헉, 홍련이 너 또 탈출했어?”
[뾰롱! 뾰롱! 뾰! 뾰!]
“뭐라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어조원에 데려다 놔야겠군.”
홍련이는 날개가 비단 손수건에 묶인 채 진해를 올려다봤다. 제자리에서 팔짝팔짝 뛰며 뭐라 하는데 안타깝게도 진해는 새 나라 말을 한 마디도 할 줄 몰랐다.
다만 홍련이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시선으로 말미암아 저 녀석이 내가 자신을 오랫동안 찾아오지 않아 화가 났구나, 추측해 볼 따름이었다. 진해는 홍련이가 팔짝팔짝 뛰며 황궁 바닥을 훼손할 기세를 보이자 못 이긴 척 슬그머니 제 가슴팍을 풀어 보였다. 가슴팍을 풀자 고산홍패가 햇빛을 받고 반짝반짝 빛을 냈다.
[뾰, 뾰롱~!]
아니나 다를까, 홍련이는 백 년 만에 만난 정인을 보듯이 고산홍패를 보며 애절한 울음소리를 냈다. 진해는 아니꼬운 표정을 지으며 홍련이를 손바닥에 올려 가슴께로 올려 주었고 홍련이는 고산홍패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행복한 시간을 가지기 시작했다. 눈빛이 촉촉한 것이 사람이었으면 시라도 한 수 읊을 듯했다.
“하……. 그나저나 출가한 인간 행방을 어디서 찾냐. 것보다 아직 황궁에 끄나풀 있는 거 아니야? 내가 찾으면 막 연락해서 도망가라고 한다거나.”
[뾰롱?]
“너한테 한 이야기 아니니까 붕가붕가할 거면 빨리하고 끝내라.”
[뾰롱!! 뾰롱!! 뾰!! 뾰뿃!!]
“오 대인, 아무것도 모르는 제가 봐도 그 말은 참으로 무례한 듯합니다. 보통의 생명체는 지조라는 게 있으니까요.”
“……황 시위.”
놀랍게도 황아무는 진심 어린 표정으로 그 말을 하고 있었다. 진해는 그 얼굴을 바라보며 아주 잠깐 자신의 행적을 반성했다. 하지만 진해가 지조가 없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진해는 예쁜 것들이 좋았고, 예쁜이들의 말을 들어주고 싶었다. 그러니 예쁜이들이 자신을 원하면 내어 주는 게 당연한 게 아닌가.
[뾰오오!!]
“아이고, 알았어. 미안해! 내가 네 정절을 의심했네! 사과로 내 고산홍패를 너한테 장가라도 보내 줘?”
[……뾰롱?]
“못할 것도 없지! 이거에 그렇게 목숨 거는 건 너밖에 없을 거다. 솔직히 나나 아버지들은 이걸 증표로 중요하게 여기는 거지 이 자체에 애정이 없거든! 어쩌면 얘도 진정으로 사랑해 주는 네가 마음에 들지도!”
[뾰롱~, 뾰롱~!]
홍련이는 진해의 말이 기분 나쁘지 않은지 몸을 반만 튼 채 꽁지깃을 흔들었다. 어쩐지 부끄러워하는 듯한 모습에 진해는 기분이 기묘해졌다.
“근데 이거 아냐? 사람들은 남편 될 사람 집에 예물이라는 걸 들고 가거든. 너 예물 있어?”
[뾰롱…….]
황 시위는 이제 진해에게서 두 걸음 정도 떨어졌다. 새와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진해를 무척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조가 없는 건 그렇다 치고 새와 이야기를 나누다니. 혹시 이 사건을 해결 해야 한다는 압박 때문에 정신이 살짝 나가 버린 것은 아닐까. 정조의 위험과 정인과의 이별, 목숨의 위험 등이 겹치면 그럴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에잉, 이런 가난한 새일 줄이야! 하지만 어조원 패왕이니 내가 파격적으로 깎아 주지! 넌 유일청과 친했지. 그럼 유일청의 전 주인인 화석정군이랑 친했던 궁인 이야기를 들은 적 있을 거야. 만약 그치가 있는 곳에 안내해 주면 당장에 고산홍패를 네 둥지에 넣어 주겠어. 한 삼 일 정도?”
[뾰, 뾰롱! 뾰로롱!]
“내가 지조는 없지만 의리는 있다. 너랑 사귄 교분이 있으니 약속은 지키겠어.”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저 새가 진해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진해의 손바닥에서 착 뛰어내리더니 진해와 황아무를 돌아보는 것이 아닌가. 마치 따라오라는 것처럼.
“오, 오 대인?!”
“허, 혹시나 싶었는데 진짜 안내를 해 주네. 황 시위, 놀라지 마. 저 녀석이랑 제일 친한 새가 유일청인데 유일청 전 주인이 화석정군이랑 지순 황태공이라고 들었거든. 새들끼리도 잡담을 할 거야, 그렇지?”
유일청의 전 주인을 화석정군 혹은 지순 황태공이라 확신한 것은 유일청이 급할 때 자신의 집에 찾아와서였다. 저를 돌보는 이도 없고, 갈 곳도 없다면 새는 당연히 자신이 가장 오래 살았던 곳으로 돌아가려 할 터였다. 동십사는 유일청을 모르는 눈치였으니 그렇다면 유일청은 동십사 전에 그 집에 살던 이가 황제에게 진상했을 터였다.
“그, 그것보다 오 대인! 어서 쫓아가야 합니다!”
홍련이는 고산홍패와 쌍을 이뤄 준다는 약속을 듣자마자 어마어마한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저 자그마한 다리로 어떻게 저런 속도를 내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저 속도라면 다른 궁인들이 홍련이를 잡지 못한 게 당연했다. 무인인 황아무도 홍련이를 놓치지 않기 위해 집중하고 있는데 평범한 이라면 무조건 놓칠 터였다.
“헉, 헉, 호, 홍련아, 조, 조금만, 천, 천히!”
체력이라면 자신 있는 진해도 숨이 가쁠 정도로 홍련은 먼 거리를 달렸다. 진해는 저 녀석의 날개를 풀어 주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생각했는데, 날개를 풀면 더 빨리 날 터이니 차라리 저렇게 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리고 홍련이 멈춘 곳은 황궁에서도 무척 한적한 곳이었다. 비슷한 모양의 소박한 건물들이 쭉 늘어선 곳이었는데 이상하게 궁인들이 보이지 않고 있었다.
[뾰롱.]
홍련이는 그 건물 중 하나에 섰다. 생김새를 보아하니 같은 모양의 방들이 모여 건물을 이루는 구조인 듯했다. 진해가 뭐라 말할 틈도 없이 홍련이가 몸을 날려 문을 두드렸다.
“이 시간에 누구냐.”
문틈으로 늙은 사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벅저벅 걸어오는데 향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응? 이게 누구야. 소패군이 오셨구만.”
“이 동네는 사람은 눈에 안 보이는 유행병이 도나.”
“헉, 대, 댁은 뉘시오?”
“사품 영찰어사 오진해.”
“아, 아이고! 대, 대인! 늙은 것이 눈이 어두워 발치에 있는 것밖에 보이지 않아 미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부디 용서를!”
“됐고. 일단 좀 들어갑시다.”
진해는 황 시위와 시선을 주고받은 뒤 노인이 비켜 준 틈으로 성큼 들어갔다. 과연 방 안에는 향인의 향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고 진해는 그제야 이곳이 궁인들의 숙소임을 깨달았다. 홍련이는 진해를 궁인들의 숙소로 데려왔던 것이다.
“홍련이랑 무슨 관계야?”
“소, 소패군 말입니까? 가끔 제게 간식을 먹으러 옵니다.”
“모르는 사람인데도?”
“그것이, 아무래도 제가 전에 새를 다루던 기색이 남아 있어 그런 것이 아닌가 하고.”
“새를 다뤘다고?”
“예. 지금은 늙어 은퇴했지만 소싯적에 어조원에서 일했습니다. 은퇴 전까진 유일청을 담당했습지요.”
유일청이라는 이야기를 듣자 진해는 홍련이가 왜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온 줄 알 수 있었다. 유일청으로부터 전 담당 이야기를 들은 게 분명했다.
“유일청이랑은 얼마나 친해?”
“예?”
“어, 아니, 얼마나 오래 돌봤냐고.”
“알에서 부화시킨 게 저였으니 사람으로 치자면 유부지요.”
“그럼 유일청이 지순 황태공에게 갈 때도 따라갔어?”
“그때는 다른 이름이었지만 예, 갔습지요. 황자, 아니 황태공께서 잘 대해 주셨습니다. 화석정군께서도 여러모로 신경을 써 주셔서 저도 유일청에게 최선을 다했지요.”
이제야 이야기가 통하겠군. 진해는 화석정군 이야기가 나오자 노인에게 바짝 다가붙었다. 노인은 새를 돌보는 게 익숙한지 자신의 손 위에 말린 곡식을 올려놓고 홍련이에게 하나씩 먹여 주고 있었다.
“얼마나 잘해 주었나? 그보다 자네는 얼마나 황태공과 화석정군 두 분께 가까이 갈 수 있었지? 언제까지 그곳에 있었어?”
“저, 그, 아무래도 유일청을 돌봐야 하니까 제법 가까이 갔었, 지요? 황태공께서는 유일청에게 재주를 가르치는 걸 즐기셔서 거의 시종처럼 옆에 있었다고 보시면 되고, 어, 황태공께서 사, 산달이 되셨을 때 유일청이 걱정이 된다고, 어조원으로 왔습니다.”
“뭐?! 산달?!”
진해는 화석정군이 출가할 때까지 그곳에 있었다면 그가 행방을 알 것이라 생각하고 기뻐했으나 안타깝게도 노인은 황태공이 산달일 때 궁으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진해는 괜한 기대를 했다며 홍련이를 찌릿 노려보았다. 홍련이는 그러거나 말거나 노인이 주는 맛난 수제 간식에 푹 빠져 있었지만.
“그나저나 이게, 무슨 일인지요? 어이하여 잊힌 분이 되신 황자마마와 정군을 여쭤보시는지요. 혹 궁에 변고가 생겼습니까?”
진해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니! 그냥 내가 궁금해서.”
“……그렇군요.”
노인은 진해가 한숨을 푹 쉬는 걸 듣다가 보이지 않는 눈을 들어 진해를 바라보았다. 검은자위가 색이 바래 거의 회색빛으로 변해 있었다.
“대인.”
그는 뭔가를 떠올렸는지 조금 진지한 목소리로 진해를 불렀다. 진해는 실망감에 휩싸였지만 경로사상에 따라 노인의 말에 응했다.
“영찰어사시라면 억울한 일을 해결하시는 분이지요? 그럼 혹시 시간이 많이 지난 일도 해결하실 수 있으십니까?”
“뭔데?”
기껏해야 잃어버린 지갑이나 찾아 달라는 거겠지.
“안국후 연재균 어르신과 원귀비 연광 님의 억울함을 풀어 주십시오.”
“뭣!”
“연광 님은 결코 저주 따위를 쓰실 분이 아니십니다. 지순 황태공과도……, 악의가 있으셔서 그러신 게 아니었구요! 두 분은 정말 친하셨습니다. 월국삼옥 중 가장 너그러우신 분이 연광 님이셨습니다. 두 분이 무엇 때문에 다투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황태공께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시지 않으셨다면 분명히 다시 풀어지셨을 겁니다! 이미 돌아가신 걸 살릴 수는 없지만 적어도 명예만이라도 되찾아 주십시오!”
“노인장.”
“예.”
“이름이 뭔가.”
“소족자라고 합니다. 제 제자 놈이 유일청을 담당하고 있지요.”
놀랍게도 노인이 되찾아 달라는 건 지갑 따위가 아니었다. 억울하게 죽어간 원귀비 연광의 명예였다. 진해는 연광을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했지만 노인의 간곡한 부탁에서 그가 생전에 얼마나 너그러운 인물인지 알 수 있었다. 심지어 그는 문인임에도 월국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고산맹으로의 모험을 감행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만민의 모범이 될 만한 군자였다. 진해는 홍련이가 자신을 제대로 이끌었다는 걸 깨달았다.
“소족자 태감. 사실 나는 명을 받고 그 명예를 높이는 중이야. 그리고 내가 그대에게 뭔가를 물을 텐데 그대는 내가 이걸 물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 말해서는 안 돼. 그걸 말하면 누군가는 원귀비처럼 억울하게 된다는 것만 알아줘.”
“저, 정말이십니까? 정말 원귀비 마마의 명예를 찾아 주실 겁니까?”
“한 입으로 두말하겠어? 그럼 물을 테니까 잘 들어.”
진해는 감격 어린 눈동자를 자신을 바라보는 노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어쩌면 이 질문을 했다는 게 알려지면 누군가 노인에게 해를 끼칠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자신은 노인에게 질문을 하려 하고 있었다. 노인에게 목숨을 걸 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진해는 아주 살짝 망설였다.
“오 대인. 제발 하문해 주십시오. 다 늙은 몸이 이런 말을 하면 추하게 보시겠지만, 저는, 정말로 연광 님을 경모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분의 시신조차 제대로 거둬 드리지 못했지요. 어쩌면 하늘이 제게 마지막 기회를 주신 걸지도 모릅니다. 부디, 하문해 주십시오.”
노인의 눈에 조용히 흘러내리는 것을 보자 진해의 망설임이 끝이 났다.
“소족자 태감, 화석정군은 지금 어디 있어? 어디로 출가했지?”
“동북쪽, 향묘산 근처에 출가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유일청에게 작별을 하러 오실 때 가르쳐 주셨지요. 아마, 이 궁에서 아는 이가 몇 되지 않을 겁니다.”
“왜?”
노인은 말없이 웃었고 진해는 답을 알았다. 황제가 뒤처리를 한 것이었다. 어린 월산이 좌부를 찾아가 우부가 자결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까 봐 출궁시키거나 아예 도성 밖으로 쫓아내 버린 것이었다. 다만 소족자만은 유일청을 위해 남겨 둔 것이었고.
“참, 대인 성이 오씨라 하셨는지요?”
“응, 왜?”
“예전에 제가 잠깐 아시던 분과 기색이 퍽 닮아 그럽니다.”
“월국삼옥이랑?”
“하하, 농도 잘하십니다. 제가 아는 분은 월국삼옥 중 한 분과 형제 되시던 분이었지요. 본래 백살호의 주인이시던 경순 황태공을 모시던 분이셨는데 성이 강씨셨던 거 같습니다.”
이번엔 진해가 말을 잃을 차례였다. 진해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고 홍련이가 볼이 미어터지게 간식을 먹다 쪼르르 진해 쪽으로 달려왔다. 진해는 노인의 손을 힘 있게 꾹 잡는 것으로 작별을 대신했다. 노인은 배웅하지 않았고 진해도 배웅을 바라지 않았다. 다만 서로의 목표를 향해 한 발짝 다가갈 뿐.
“연광 님, 지순 황자님. 유일청은 없지만 그래도 저를 곁에 둬 주시겠습니까.”
아무도 없는 텅 빈 방에서 노인은 조용히 읊조렸다. 그날 저녁 스승을 보러 온 유일청의 내관이 울음을 터뜨렸고, 곧 미약하게 숨이 붙어 있는 노인의 몸이 황궁 밖으로 옮겨졌다. 유일청의 내관은 황궁 밖에서 화장된 노인의 유해를 돈을 주고 절에 맡겼다. 공교롭게도 진해가 그에게 이야기 값이라고 줬던 금의 일부였다.
* * *
황아무는 진해 손바닥 위에 근엄하게 앉은 일홍련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새가 말을 알아듣다니, 참으로 기이하기 짝이 없습니다.”
“고산국의 신조라니까. 황 시위, 날 형으로 생각하면 나를 좀 더 후하게 평가해 줘. 나도 보통 새랑은 진지하게 대화하지 않아.”
“하하, 앞으로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홍련이의 활약으로 인해 진해는 예상치 못한 수확을 얻었다. 진해는 간식을 어찌나 많이 밀어 넣었는지 아직도 부리를 짭짭거리는 홍련이를 어조원으로 데려다주었고 약속대로 홍련이의 둥지에 고산홍패를 넣어 주었다.
진해가 고산홍패를 풀자 만가헌 새들의 눈치가 장난이 아니었다. 특히 백살호는 날개를 푸드덕대는 게 당장이라도 진해를 사냥해 버릴 것 기세였다. 물론 진해도 소중한 고산홍패를 두고 싶지 않았지만 홍련이라면 이것을 함부로 하지 않을 걸 알고 있었다. 함부로 하지 않는 것을 넘어 다른 이가 손을 대면 그 손을 박살을 내 버릴 무시무시한 녀석이라는 것도.
[뾰롱…….]
“같잖게 왜 수줍은 척이야. 딱 삼 일이야. 삼 일이 지나도 가지러 오지 않으면 음, 어쩌지. 그래, 창명후 합하 댁에 맡겨 놓도록 해. 홍련이 너 약속 꼭 지켜라. 양것들의 의리야, 알겠어?”
[뾰.]
홍련이는 진해가 영영 돌아오지 않았으면 하는 눈치였지만 일단 대답은 했다. 진해는 소양자에게 삼 일 후 고산홍패를 어찌할지 알려 주고 자신은 황아무와 함께 궁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음 같아서는 어사직인 땅땅 찍어서 화석정군을 불러들이면 좋겠지만 그러면 온 사방 천지에 대고 저놈이 수상하다고 소리치는 셈이었다. 당사자인 화석정군은 당연히 알아챌 터이고.
“오 형님.”
그러던 그때, 황아무의 목소리가 낮게 잦아들었다. 진해는 퍼뜩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구석진 곳에서 혈월대의 의복을 갖춘 이들이 조금씩 진해와 황아무를 포위하고 있었다. 심지어 궁인으로 보이는 이도 있었다.
“이거 아무래도 우리가 화석정군 부를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수적으로 열세인지라 황아무의 행동은 신중했다. 날카로운 눈으로 어느 놈이 가장 약해 보이는지 가늠하는 듯했다. 황아무가 검을 뽑으려는 그때, 진해가 황아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황 시위, 이제 됐어. 자네는 퇴근해.”
“예?!”
“예쁜 성월공 마마가 부르시는데 언제까지 거절할 수도 없지. 끌려가느니 내 발로 가는 게 낫다, 이 말이야.”
성월공의 수하들이 예쁜 성월공이라는 말을 듣자 어깨를 움찔거렸다. 어떤 이는 순식간에 뜨악한 표정이 되었다. 황아무는 이것이 고도의 심리전이라고 믿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진해는 진심인 듯했다. 황아무의 등을 슥슥 긋더니 제 발로 그들에게 다가갔던 것이다.
“마침 배도 고프고 잘됐다. 너희들! 성월공께서 나를 어찌하라 했느냐!”
포위되었는데도 너무나 당당했다.
“모, 모셔 오시라 했습니다.”
“근데 왜 가마가 없어!”
“아, 그것은…….”
너무 당당해서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차라리 저항하는 이를 제압하는 게 이들에게는 백배 더 쉬운 일이었다.
“에잉, 몹쓸 것들! 거기 너! 제법 덩치가 좋구나. 양인인 건 더 좋군. 여기 엎드려.”
“……예?”
“가마가 없으면 몸으로 때워야지. 나는 사품이야. 사품이라고! 드러눕는 거 보기 싫으면 업어서라도 모셔!”
저를 죽일지도 모르는 이들에게 자신을 업으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혈월대는 어찌나 황당했던지 자신들도 모르게 황아무를 바라보았고, 황아무는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진해의 황당한 행동을 겪어 본 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동질감이었다.
진해가 순순히 따라가기로 한 이상 호위인 황아무는 제재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알아서 빠져 주겠다니 곱게 보내 주는 게 후일을 위해 좋을 터였다. 황아무는 엉거주춤 진해를 업으려 웅크린 이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다 걸음을 옮겼다. 담벼락 하나를 지나자 황아무는 미행이 붙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달려갔다.
진해가 황아무의 등에 쓴 글자는 삼(三)이었다. 황아무와 진해가 공통적으로 아는 삼이라는 인물은 단 하나밖에 없었고. 그 말인즉 진해는 황아무가 삼랑을 찾아 함께 화석정군을 데려오길 원한다는 것이었다. 삼랑의 부상이 얼마나 나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삼엄한 황궁 감옥에서 탈옥했으니 뭔가 비장의 수가 있는 게 분명했다.
황아무는 황궁 시위복을 벗어 구석진 곳에 버리고 그 길로 여해루에 들렀다. 황아무를 알아본 기생이 그를 눈에 띄지 않게 집사에게로 인도했고 집사는 돈이 필요하다는 황아무의 말에 냉큼 은전을 쥐여 주었다. 눈치 빠르게 황아무가 갈아입을 옷과 말도 준비해 주었다.
“이랴!”
황아무는 그길로 도성을 떠나 삼랑을 찾아 달리기 시작했다. 삼랑이 얼마나 멀리 갔는지 모르겠지만 말을 달리면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터였다. 화석정군. 이번 일의 핵심은 화석정군을 데려올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었다.
* * *
한편 두는 별로 기분이 좋지 못했다. 해원공부의 호위대장에게 밀린 게 여간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진해가 황후를 심문하는 것도 막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후후, 귀엽군.”
“……그냥 두실 겁니까?”
“말조심해라, 두. 그는 내 정군이 될지도 모르는 이다. 당연히 그냥 둬야지.”
“하지만 그자는 보통내기가 아닙니다. 아군이라면 든든……, 하겠으나 적이라면 성가시게 될 것입니다.”
“그거라면 걱정할 거 없어. 아니, 오히려 소해가 황후를 심문하게 둬야 한다.”
성월공은 측근들이 올린 서간을 훑어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월공 안월산은 얼마 전까지 황궁의 별궁에서 지내다가 그럴듯한 저택을 구입해 성월공부로 꾸몄다. 진해와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황후가 진실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을 테지.”
“그러면 주공께 해가 갈 텐데요?”
성월공은 다 읽은 서간을 화로에 던져 넣었다. 서간이 화르륵 타오르는 동안 화로의 불빛이 거세졌고, 밝은 주홍빛 광채가 성월공의 입가에 어른거렸다.
“사람이 얻고 살 수만은 없어.”
놀랍게도 월산은 미소 짓고 있었다.
“가끔은 잃기도 해 줘야지.”
“그리고 그 잃은 자리를 필요하신 것들로 채워 넣으시겠지요.”
“그래. 황후가 진실을 말하든, 소해가 눈치를 채든. 소해는 곧 내게 올 것이야. 그리고 아버지의 행방을 묻겠지.”
“마마께서는 당연히 공으로는 말해 주지 않으실 테니 뭔가 거래를 하시겠군요.”
두는 성월공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아는 것이 너무 많았기에 그는 성월공의 곁을 떠날 수 없었다. 죽음을 각오하면 벗어날 수 있겠지만 그는 자신이 지닌 비밀이 두려워 성월공의 곁에 머무르는 것을 택했다. 동시에 조부가 어째서 성월공과 필사적으로 만나려 했는지도 이해했고.
조부는 두려웠던 것이다. 목숨은 붙어 있었지만 언젠가는 제거당할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가능성이 그를 제정신이 아니게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성월공에게 진실을 말하고 그의 휘하에 머무르고자 했다. 성월공을 어린아이가 아닌 황족으로만 보는 바람에 일이 어그러졌지만, 덕택에 성월공은 일찌감치 황제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두.”
“예.”
“만약 여가 보위를 포기하겠다고 하면 어찌할 것이냐.”
두는 난데없는 물음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왜 그리 보느냐. 여에게도 선택할 권리가 있다.”
“강해아는 반드시 올 것입니다. 다른 건 제쳐 두고 혼사부터 치른다면 판이 기우는 것도 아니며, 혹 혼사를 치르지 못한다 해도 창명후도 당장은 마마를 놓을 순 없을 것입니다.”
말하는 두의 목소리가 떨렸다. 두는 황제가 되지 않은 월산을 상상해 본 적조차 없었다. 월산은 반드시 황제가 되어야 했다. 그는 황제가 되지 못한다면, 죽어야 했다.
“너는 여가 질 것이 두려워 이런 말을 한다고 생각하는구나.”
“송구합니다.”
성월공이 걷자 사락사락 비단 스치는 소리가 났다. 월산은 죽었다 깨어난 후로 걸음걸이부터 옷매무새 하나까지 모두 다 황제의 것을 모방했다. 황제와 함께 걷는 월산은 젊은 황제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냥,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만약 보위를 포기하고 소해와 함께 번왕으로 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
순간, 두의 가슴이 따끔하게 아팠다. 오랜 세월 그를 지켜본 음인 동지로서의 감정에서였다.
“하지만 이미 늦었지. 또 여가 소해를 택하는 것만으로도 소해는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었어. 그렇다면 여가 황위에 올라 소해에게 조금이라도 권세를 누리게 해 주는 수밖에 없다. 그 자리에 올라야만 소해를 여의 손에서 놓치지 않을 수 있다.”
“……마마.”
두는 성월공의 작은 체구에 얹힌 억겁을 바라보며 신음했다. 두는 월산을 볼 때마다 진실이 능사가 아니라는 교훈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월산 때문에 일족이 몰살당했음에도 월산을 원망하지 않고 그를 연민하고 동정하고……, 혐오했다.
“대를 위해서는 소를 포기해야 한다면 여는 사람의 마음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래야 살 수 있어. 여는 황제라는 도구가 되어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하여 여를 탄생케 한 하늘에게, 복수할 것이다. 여는 월국이 멸망하길 원해.”
하늘이 두를 도우셨는지 때마침 멀리서 하인이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성월공부의 하인이라 발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음에도 암살에 능한 두에게는 달려오는 소리와 진배없었다. 성월공이 그를 들이자 두는 휘장 뒤에 숨어 하인이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마마. 보내신 이들이 돌아왔습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물방울들은 모두 한 바다에서 만난다지. 여는 이것을 운명이라 들었는데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하인이 고한 소식을 들으며 두 역시 월산의 말에 동의했다. 파각사까지 보내서 떼 놨는데 오진해는 또다시 월산의 눈앞에 나타났다. 차라리 누군가와 이뤄지고 나서 만났다면 월산도 손을 대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가 행복을 찾았다면 월산은 분명히 그를 포기했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누구와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월산의 앞에 나타났다. 월산의 앞에 나타나 또다시 월산에게 손을 내밀었다. 차라리 냉정하게 굴었다면 좋았을 것을. 두는 오진해가 월산에게 냉정하지 못해 두 사람이 서로가 상처 입을 것을 알았다. 그러나 때로는 그렇게 이루어지는 관계도 있는 법이었다.
“들라 하라.”
두는 가장 그늘진 곳에서 월산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 * *
“단도직입적으로 말합시다. 거 성월공 전하의 부친이신 화석정군을 불러 주시지요.”
두는 떨떠름한 얼굴로 옷을 탁탁 터는 진해를 바라보았다. 동시에 이해할 수 없는 시선으로 진해를 업고 지고 온 수하들도 보았다. 그들은 두와 눈이 마주치자 그들 자신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해 보였다. 두는 일등시위와 손깍지를 끼고 제 앞에서 춤을 추던 진해를 떠올리며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지 못하겠다면?”
“그러면 뭐 혼인도 물 건너가는 거지.”
“너는 여와 거래를 했어.”
“했었지! 삼랑이를 멀쩡히 놔둔다는 조건으로. 그런데 지금 삼랑이가 어디 있어? 상처도 다 안 나은 사람을 어디로 빼돌린 거야?”
“…….”
월산은 진해의 말에 답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두는 월산이 왜 대답하지 못하는지 뼈저리게 알고 있었는데, 그것은 저 말을 들은 두 역시 월산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는데 오진해의 뻔뻔함은 정도라는 게 없는 듯했다. 두는 월산의 앞이 아니라면 네가 빼돌려 놓고 왜 나한테 지랄이냐며 진해의 멱살을 잡고 짤짤짤 흔들고 싶었다. 야 이 사기꾼아라는 말과 함께.
“그러니까 거래는 무효야. 게다가 나는 적어도 양가 아버님들 앞에서 혼례를 올리고 싶거든? 내 아버님들은 돌아가셨으니 어쩔 수 없지만 살아 있는 아버지를 놔두고 혼례를 치를 순 없잖아.”
“……아버지를 모셔 오면 순순히 혼례를 치르기라도 할 것처럼 이야기하는구나.”
“못 할 게 뭐람! 황손마마와 혼인하면 나도 황족이 되는 거 아니야? 이것만큼 굉장한 출세가 어디 있어? 까짓거 나도 팔자 한번 고쳐 보지 뭐. 황손을 측실로 두는 사람은 나밖에 없겠지?”
“뭐! 측실이라고! 네 이놈!!”
진해의 입에서 측실 소리가 나오자 두는 이성을 상실했다. 성월공은 자신의 주군이었고 월국 음인 황제의 직계 후손이었다. 만약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경순 황태공이 생존해 황제가 되었더라도 성월공은 당당한 월국 황실의 직계 자손이라는 말이었다. 운이 좋아 황제가 된 회순의 핏줄인 안해산과 달리 안월산은 천지가 뒤바뀌어도 지고한 신분이었다. 그런 월산에게 측실이라니!
“우리 집 가장은 나야!”
그러나 진해는 두가 입에서 불을 토하든지 말든지 양 옆구리에 손을 얹고 배를 앞으로 내밀면서 당당하게 외쳤다.
“내가 대를 잇지 않으면 오씨는 대가 끊긴다고! 기껏 좋은 집 양자로 들어가기로 했는데 그럴 수는 없지! 대월률에 의하면 가문의 가장은 필요에 의해 남편을 더 들일 수 있어! 그러니까 내가 특별히 양보해서 내 측실로 받아 주겠다는 말이야! 몇 번째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미쳤군! 오천협이 아무리 고강한 무인이라지만 근본은 한미한 가문이거늘 고작 오씨를 잇기 위해 측실을 운운해!”
“야!! 말 똑바로 안 해!! 누가 한미한 가문이야!!”
“틀린 말도 아니지! 까놓고 말해 고산국 놈들은 족보도 없는 미개한 것들이 아니던가!!”
“이게 정말!!”
화가 머리끝까지 난 두와 자신의 영웅이자 좌부인 오천협을 욕하는 말에 욱한 진해가 서로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아웅다웅 다투기 시작했다. 진해는 너 같은 건 오천협 발톱 때만도 못하다며 두를 욕했고, 두는 그러는 너도 만만치 않다고 네 우부가 아니었으면 진작 형장에 목이 걸렸을 거라며 핏대를 올렸다.
“씩씩, 그리고 누가 오천협의 대를 잇는데! 누가 들으면 내가 가, 강해아인 줄 알겠네!”
“……뭐?”
“난 잠춘동에 살 때 이미 양자 결연을 하기로 약조가 되어 있었다고! 공교롭게도 나와 성씨가 똑같은 아저씨가 날 귀여워해서 아들이 되라고 말해 줬단 말이야! 제법 잘나가는 낭중 양반의 남편이셨지!”
“……허.”
솔직히 두는 오천협의 위치를 생각하면 그가 출신이 한미하다 할지라도 감히 얕잡아 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오천협을 한미하다고 깐 것은 진해가 약이 오르길 바라서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진해는 오천협의 오씨가 아닌 다른 오씨의 대를 잇겠다고 했다. 농이 아니라 정말로 한미하다 못해 미천한 낭중, 하다못해 낭중도 아니고 그 남편의 대를 잇겠다고.
“그러니까 내가 가장이고, 돌아가신 양아버지들은 모셔 올 수 없으니 살아 있는 장인어른이라도 모시지 않으면 혼인은 불가하다는 말이야! 알아들었어!?”
진해는 팔짱을 끼며 팽 돌아섰다. 두는 진해의 말을 귀로 들으면서도 도무지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오진해는 강해아였다. 강백서의 태도가 그러했고, 강절곤의 태도가 그러했다. 수소문해 보니 강절곤의 죽은 정실이 오진해와 제법 닮은 구석이 많기도 했다. 그런데 오진해는 자신이 강해아가 아니라고 했다. 자신은 한미하고 비천한 낭중의 양자라고 했다. 두는 오진해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좋다.”
“마, 마마!”
“살아 있는 아버지를 모셔 오면 혼인하겠다는 말, 정말이겠지?”
“양인 사나이 오진해는 한 입으로 두말 안 해! 지조는 모자라지만 의리는 있다!”
그리고 진해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던 월산이 입을 열었다. 두는 진해가 워낙 강경하게 자신을 부정해 혹시 진해가 정말로 장강 강씨와 연관이 없는 비천한 출신이면 어쩌나 더럭 겁이 났다. 황제 앞에서 진해를 원으로, 정실로 들이기로 약조했으니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는 일 아닌가.
“거짓이면 강백서를 죽이겠다.”
“뭐……!”
“거짓이면 강백서를 죽이겠다고 했다. 지금 강백서의 몸 상태라면 가벼운 독 한 방울이라도 타격이 클 터. 독까지 쓸 필요도 없다. 약간의 사고만 있어도 병든 몸은 쉽게 무너지겠지.”
“…….”
“왜 그러느냐. 어차피 남이 아니더냐. 아, 그렇군. 너는 세상에 다시 없을 선인이라 남의 목숨을 걸고 하는 맹세는 할 수 없는 것이냐?”
진해는 월산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아버지를 부정하겠다고, 자신의 핏줄을 부정하겠다고 마음먹었으나 막상 그를 죽이겠다는 소리를 듣자 몸이 굳어 버렸다.
어려서부터 줄곧 그리워하던, 진해가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던 그의 핏줄. 그들을 부정하려는 이유는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입지가 불안정한 자신이 사라지면 그들이 보다 안전할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월산은 아무렇지도 않게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하고 있었다. 월산이 마음먹는다면 강백서는 정말로 죽을 것이고, 강절곤이나 오천협은 월산과 연관된 증거를 찾아내지 못할 것이었다. 심지어 진해 역시도.
“자루가 바뀐다고 속에 든 술이 바뀌겠느냐. 자, 다시 한번 말해 보아라. 여가 정말 살아 있는 아비를 데려오면 여와 혼인하겠느냐?”
사방이 가로막혔다. 사방이 낭떠러지였다. 월산을 우습게 보았다. 할아버지가 그의 후견이고 아직까지 건재하니 집에는 손끝 하나 대지 못할 줄 알았다. 진해의 손바닥에 땀이 쥐어졌다.
“그래! 그렇다니까! 속고만 살았나! 살아 있는 아버지만 모셔 오면 당장에 혼인해 준다, 내가!”
“좋다. 그럼 더 길게 말할 것도 없군. 지금 당장 황궁으로―”
“마마――――!!!”
월산이 덤덤한 얼굴로 뭔가를 말하려 하자 갑자기 두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부름이었지만 비명이나 절규라고 해야 무방할 듯한 처절함이었다. 진해가 깜짝 놀라 두를 쳐다보자 두는 얼굴이 시허옇게 질린 채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덤덤한 월산과 퍽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그러시면 안 됩니다, 제발, 그러시면 안 됩니다…….”
두는 반쯤 애원하며 월산의 앞에 무릎 꿇었다. 진해는 그놈의 화석정군을 불러오는데 황궁은 웬 말이며, 저놈은 또 왜 저러는지 도통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소해.”
그러나 월산은 두가 애걸하거나 말거나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띄워 보였다. 어찌나 상냥하고 자상해 보이는지 얼핏 부처가 연상되는 듯했다. 저렇게 웃으니 제법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너는 분명 살아 있는 아비라 했지? 그러면 굳이 멀리 갈 필요 없다.”
그러나 월산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진해는 온몸의 털이 거꾸로 곤두서는 듯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월산의 눈 속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진해는 그것을 감히 증오라 이름 붙였다.
“여에게 피와 살을 준 이는 향묘산이 아니라 황궁 안에 있으니 말이다. 그것도 아주 멀쩡히 말이지.”
월산은 다가와 소름이 돋은 진해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진해는 증오가 소용돌이치는 눈이 두려웠으나 감히 그 눈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월산의 심연은 깊었으나 상처가 많았고, 고혹적이었다. 월산을 성월공으로 우뚝 서게 만든 원천이 그 눈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월산을 따르는 자들을 매혹한 근원이었다. 그 근원이 월산으로 하여금 자결을 기도하게 했고, 전장에서도 결코 물러서지 않게 했다.
“그러고 보니 참으로 공교롭구나. 소해, 너는 언젠가 대전에서 황상을 좌부로 생각했었다고 했지.”
진해의 직감이 월산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듣지 말라 경고하고 있었다. 저 말을 듣게 된다면 다시는 돌아설 수 없으리라 예감하고 있었다.
“잘됐구나. 그 소원이 이루어져서.”
월산은 그 어떤 때보다도 환하게 웃으며 진해의 뺨을 아프지 않게 문질렀다. 진해의 뺨은 저도 모르게 흐른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이해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이었다.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었다. 도리에 어긋난 말이었다. 천륜에 어긋난 말이었다.
“소해. 여는 황자다.”
월산이 툭 털어놓는 순간 진해의 사고가 멈췄다. 진해는 홉뜬 눈으로 저도 모르게 월산에게서 물러나려고 했다. 그러나 월산은 손등에 핏줄이 설 정도로 진해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면서 다시 한번 또박, 또박 읊조렸다.
“여의 좌부는 화석태정군이 아닌 황제 안회순이다. 여야말로 황제와 황태공 사이에서 태어난, 월국의 진정한 적통 황자이다.”
월산은 제게서 벗어나려고 버둥대는 진해를 꽉 붙잡고서는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월산은 한참 동안 웃다가 잡아먹듯이 진해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진해는 뻣뻣하게 굳은 채 눈을 굴렸다. 두는 그런 둘을 바라보지 못하고 바닥에 머리를 처박듯이 조아리고 있었다.
* * *
정미려는 입술을 질겅거렸다. 청려가 너덜너덜해진 입술을 보며 한숨지었지만 지금 그를 말릴 수 있는 건 아무도 없었다. 진해를 위해 감행한 위험이었건만 정작 중요한 오진해가 도성에 남았다. 옥청려는 반쯤 넋이 나간 채 짐짝처럼 앉아 있는 안해산을 바라보며 복잡한 심사에 휩싸였다.
과연 이것을 성공이라 할 수 있을까.
“우후가, 부황이, 내 아버지들이 아니었다니…….”
넋이 나가 중얼거리는 안해산에게는 인간적인 동정심이 들었으나 그뿐이었다. 그는 생판 남이었고 옥청려에게는 옥정려와 그가 사랑하는 오진해의 안위가 우선이었다. 청려는 신음하는 부상자들을 바라보다 조용히 옥정려, 즉 정미려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곧 추격이 붙을 겁니다.”
“알고 있어.”
“갈라질까요?”
“왜.”
“저자를 그냥 데리고 다닐 수도 없지 않습니까.”
보는 사람이 안타까울 정도로 초췌한 얼굴을 한 미려는 그제야 해산을 흘끗 바라보았다. 해산의 존재조차 잊고 있던 모습이었다.
“본인이 회임했다고 하던데 진짜야?”
“……아니요. 회임은커녕 태기도 없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청려는 떨어지기 직후 아이 운운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 해산의 회임 여부를 살폈으나 놀라울 정도로 깨끗한 몸이었다. 정조가 어쩌고저쩌고하는 게 아니라 아기씨의 흔적이 한 점도 느껴지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아마 회임했다는 말은 진해가 해산에게 한 거짓일 가능성이 높았고, 분명 그럴 터였다.
“그럼 더 말할 것도 없지.”
미려는 해산이 회임하지 않았다는 말을 듣자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걸어갔다. 어찌나 싸늘한 표정을 했던지 청려는 미려가 이대로 해산을 죽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어쩌면 해산을 넘기는 대가로 진해와 교환할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면 해국으로 데려가 새롭게 일을 모의하던지.
[짜악―!]
하지만 청려의 예상이 빗나갔다. 미려는 해산을 죽이는 대신 그의 뺨을 때렸다. 미려보다 덩치가 큰 해산이 일순 기우뚱할 정도로 큰 타격이었다.
“일어나라. 언제까지 그렇게 질질 짜고 있을 셈이야. 회임도 하지 않았고 각인도 하지 않았고, 거기다가 이젠 신분도 불확실한 천것이 된 주제에.”
“……회임하지 않았다고?”
“그럼 네 주제에 그렇게 쉽게 회임할 수 있을 줄 알았어? 형의 귀한 씨가 너처럼 아둔한 것의 태에 앉아 줄 줄 알았냐고. 너 때문에 형이 잡혔다. 알아듣겠어?”
“…….”
넋이 나가 있던 해산은 자신이 회임하지 않았다는 말과 진해가 붙잡혔다는 말을 듣자 고아하면서도 서늘해 보이는 눈매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관례를 치른 어른이라고는 하나 아무도 해산이 그러는 걸 흉보지 않았다. 막말로 백발이 된 할배라도 이 상황에서는 눈물지을 수밖에 없으리.
“알아들었으면 정신 똑바로 차리고 움직여. 널 데려다 놓고 나는 형을 구하러 가야 되니까.”
“진해를 구한다고? 뭔가, 수가 있는 건가?”
미려는 답하지 않고 돌아섰다. 청려는 답이 없는 미려의 뒷모습에서 자신을 비롯한 아랫것들의 무한한 고생의 가능성을 엿보았다. 아아, 아무 계획도 없구나. 그냥 막 쳐들어갈 생각뿐이구나. 청려는 자신이 멍청해서 그냥 아무것도 몰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후로 일사천리였다. 너무나 무계획이라 일사천리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았지만 어쨌든 아무런 방해물 없이 일행은 길을 떠났다. 일행의 목적인 안해산을 안전한 곳에 데려다 놓은 뒤 도성으로 돌아가 진해를 탈취하는 것이었다. 안해산의 의사는 미려에게 참고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진해의 부탁만 아니었더라도 미려는 해산을 이곳에 버리고 갈 생각이었으니까.
무리의 대장인 미려의 생각이 그러했으니 다른 이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그간 진해와의 정과 소가주였던 미려만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었지 이젠 황자도 무엇도 아닌 해산을 위해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따라서 해산은 자연히 고독해질 수밖에 없었다.
“드시지요.”
그나마 청려가 해산의 끼니를 챙기고 배려해 주었다. 청려는 해산의 처지를 동정하고 있었다. 해산 역시 그 사실을 알았으나 이젠 세울 자존심도 없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진해의 모습을 회상하고 또 회상할 뿐이었다. 황자가 아닌 자신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진해뿐이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자신에게 반했다고,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을 행복하게 해 주겠노라고 맹세했던 그의 정인뿐이었다.
진해가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을 지키기 위해 황제를 속이기까지 했다는 걸 듣자 해산은 진해가 더욱 그리워졌다. 차라리 정말로 그의 아이를 회임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무정한 정인은 저를 살리기 위해, 저 같은 것이 살아남기를 바라서 해산에게 그가 회임했다는 거짓말을 했다. 해산이 조금이라도 생의 의지를 갖게 하려고.
그러나 해산은 그런 진해의 마음을 알면서도 기운이 나지 않았다. 이때까지 자신의 인생이라 생각한 모든 것이 다 거짓이었다. 좌부도, 우부도 다 남이란다. 이때껏 적통 황자라는 이름에 걸맞기 위해 노력했던 모든 것이 다 허사란다. 자신은 애초부터 황자가 아니었으니 성월공 안월산과는 처음부터 상대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첫 정각이었다고 했지…….”
문득 월산의 향을 듬뿍 묻히고 있던 진해가 떠올랐다. 진해는 처음 만났을 때 그와 자신이 격차가 너무 나서 월산이 그에게 파각사를 보냈다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진해는 월산에게 어떻게 보일까.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청려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해산에게 다가왔다. 청려는 혹시라도 해산이 미치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눈치였다. 혹여라도 나중에 진해가 멀쩡히 살아 해산을 찾게 되었을 때 해산이 미쳐 있다면 진해가 크게 원망할 것 같아서였다.
“……진해 생각을 하고 있었다. 혹여 고신을 당하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
“아, 그건 크게 걱정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황제는 절대로 오 은인을 해치지 못하니까.”
“어째서지?”
“그야 오 은인의 핏줄들이 그를 든든히 지켜 줄 테니까요.”
“핏줄?”
청려는 의아한 표정의 해산을 바라보다 그제야 해산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떠올렸다. 해국 사람들은 강절곤의 태도 변화와 정미려가 발견되었던 때의 상황 탓에 진해가 누구인지 대충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 모르셨습니까? 오 은인이 바로 행방불명되었던 강해아잖습니까. 창명후가 몰랐을 때라면 몰라도 해국에서 오 은인이 손자임을 확인했으니 여차하면 반란이라도 일으키겠지요.”
“뭐?! 해아가 강해아라고!”
“예. 어디 보자 지금 도성 안에는 고산패자도 있고 오천협도 있으니 제압하려면 지방군까지 다 끌어모아야겠군요. 그 전에 황제 본인이 무사하리라는 보증이 없고. 그러니 자연히 오 은인은 무사하게 되겠지요?”
그런데 청려가 해산을 안심시키기 위해 한 말에 해산의 안색이 더욱 파리해졌다.
“천출이 아니니 원도, 정실도 될 수 있겠구나…….”
“예?”
“성월공, 그자 말이다.”
안월산 이야기가 나오자 청려는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안 그래도 미려가 안월산 이야기만 나오면 이를 득득 가는 판국이었다. 그 마당에 그와 그나마 대각을 이루던 해산이 없어졌으니 사자가 등에 날개를 단 거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거기다 옛날에 신분 탓에 파각했던 정인이 사실 귀한 핏줄의 후손이란다. 수감되었으니 어디 도망갈 곳도 없다.
“음, 국혼 성사까지는 시간이 제법 걸리니 그 전에 구하면 되겠지요.”
“너희는 안월산을 모른다. 그는 어릴 적부터 사람 같지 않은 자였어.”
해산은 과거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확 변한 안월산을 떠올렸다. 황족임에도 불구하고 안월산은 제 몸의 귀함을 모르는 이처럼 굴었다. 잠을 자지 않고 쓰러질 때까지 단련하는 게 다반사였다. 쓰러지면 자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계속 몸을 움직였다. 손이 엉망이 되어 그를 시중드는 궁인들이 매타작을 당해도 그는 눈 한번 깜짝하지 않았다. 아랫것들을 위해 자신의 몸을 관리하는 해산과는 대조적이었다.
“사람인지 아닌지는 찔러 보면 알겠지.”
언제 다가왔는지 미려가 청려와 해산을 내려다보며 싸늘하게 읊조렸다.
“안월산 그놈에게 넘겨 줄 바에야 형과 함께 죽을 거야. 안월산 그놈을 저승 길동무로 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해산은 월산이 눈앞에 있다면 당장에 토막이라도 칠 듯한 미려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대체 이자는 언제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었을까.
“…….”
처음에는 위화감만 느꼈지만 이렇게 보니 우후와 대고 베낀 것처럼 닮은 얼굴이었다. 만약 서해 옥가와 해국 왕실이 잦은 혼사로 이루어진 사이가 아니었다면 그는 결코 의심을 피하지 못할 터였다. 그리고 진해는 그가 한 핏줄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진작 알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는 그때부터 자신이 우후, 사마계의 핏줄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걸까. 자신의 우부가 자신 대신 다른 이를 아들 삼고 있다는 걸 알았던 걸까.
그리고 그 우부에게 전혀 아무런 감정이 없는 걸까. 그 우부가 아들로 길렀던 자신에게는, 진해와의 연을 제하고도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는 걸까?
해산은 알 수 없었다. 이 모든 상황이 어지럽기만 했다. 눈을 감았다 뜨면 모든 것이 꿈이고 자신 옆에는 진해가 새근새근 잠들어 있을 것만 같았다. 아니, 그러기를 바라고 있었다. 황위 따위와 관계없이 저를 사랑한다고 말해 주는 이가 옆에 있기를 바랐다. 그가 옆에서 사랑한다고 말해 준다면 해산은……, 사소한 것 몇 가지는 그냥 넘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너, 정말로 안월산을 칠 셈이냐? 그는 이제 차기 후사나 다름없다. 온 월국이 그의 손안에 있게 될 것이야.”
“내가 그런 걸 신경 쓸 것 같아? 그런 걸 신경 쓸 거였으면 내 우부부터 빼돌릴 생각을 했겠지.”
우부 이야기가 나오자 해산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지금도 우부 생각에 심사가 복잡한 해산과 달리 미려는 제 생부임에도 어떠한 거리낌도 없는 듯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해산의 마음이 움직였다. 미려는 자신의 생부마저도 버리고 진해를 구하려는데 자신은 그의 마음을 받았으면서도 그저 망연자실하고만 있었다.
더 이상 그의 뒷배가 될 수 없다면 조금이라도 그의 도움이 되어야만 했다. 자신에게 남은 것이라곤 그 하나뿐이었으니 반드시 그를 찾아야만 했다. 해산은 바닥을 응시하다 결연한 표정으로 미려를 올려다보았다.
“한 가지 수가 있다. 다른 이는 몰라도 월산이라면 신경 쓸 수밖에 없는 수이지.”
이때까지 멍해 있던 해산이 수라고 말하자 미려는 흘려듣는 듯하면서도 흘끗 그를 바라보았다. 미려에게 확실한 계획이 있었더라면 무시했을지도 모른다.
“향묘산이라고 들어 봤는가?”
“제법 산세가 훌륭하다고 들었다만.”
“그곳에 사찰이 하나 있다. 남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사찰이지만 절대로 시주가 끊이지는 않는 곳이지.”
하지만 해산이 말하는 걸 듣자 미려의 표정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과거 황제의 아버지가 되지 못하거나 사연이 있는 황족들이 그곳으로 출가했다. 과거엔 여럿이 모여 살았다고는 하나 지금 있는 것은 단 한 사람뿐.”
“화석태정군이군.”
“그래. 안월산의 생부인 화석태정군 양지서가 그곳으로 출가했다. 예전에 부황……, 아니 황제가 안월산에게 이야기하던 걸 얻어들었었지.”
말하던 해산은 잠깐 안월산의 어깨를 두드리던 황제 안회순을 떠올리고 씁쓸해졌으나 곧 마음을 다잡았다. 이젠 그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이젠 그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다.
“곱게 자란 것치고는 제법 쓸 만한 수를 내놓았군. 좋아. 그를 인질로 삼도록 하지. 고고한 황자 나리께서는 체면을 위해서라도 생부를 버릴 수는 없을 터.”
미려가 잔혹하게 미소 짓는 것을 보자 해산은 자신은 교섭이라는 수를 떠올렸다고 말하려 했으나 미려가 어느 때보다도 훈훈한 미소를 짓는 걸 보자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그러는 동시에 교섭이나 인질이나 다를 바 없지 않냐며 어떻게 이런 비열한 수를 낼 수 있냐며 자신을 자책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뭐, 상관없지 않은가. 이젠 황자도 아닌데.’
해산의 머릿속에서 진해의 목소리를 흉내 낸 듯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고, 해산은 그것을 지워 버리려다가도 강하게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랬다. 해산은 이제 황자가 아니었다.
* * *
향묘산으로 가는 여정은 생각보다 퍽 괜찮았다. 미려는 자신들에게 수배가 내리지 않았음이 의아했고, 해산은 아무도 자신을 찾지 않음에 낙담했다. 수배가 내리지 않아 마음껏 다닐 수 있음에 안도해야 하는데도 자신의 존재가 한 점 티끌과도 같아진 듯하여 낙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해산은 미려 일행에 섞여 향묘산으로 가는 동안 자신의 아버지들에 대해 생각했다. 특히 그가 우후, 우부라고 생각했던 건평황후 사마계에 대해 생각했다. 우후는 해산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는 아마도 황후 자리를 지키기 위해 음인인 해산을 자신의 아들로 둔갑시켰을 것이다. 친정인 해국을 위해서 눈물을 머금으며 피 같은 친자식을 빼돌리고 남의 자식인 해산을 키웠을 것이다.
“잠깐 쉬다 가지.”
저렇게 꼭 닮은 자식을 어떻게 떼 놓을 수가 있었을까. 해산은 미려가 우후의 자식이라는 걸 안 이후로 때때로 그를 훔쳐보았다. 분위기는 달랐지만 이목구비만큼은 틀에서 찍어 낸 것처럼 닮았다.
‘가여운 것……, 이 아비를 원망하려무나, 모든 게 이 아비가 약한 탓이야.’
우후는 저이를 닮은 아름다운 이목구비를 언제나 슬픔으로 적신 채 해산의 뺨을 어루만졌다.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우후의 성정 탓에 황후궁에는 사람이 적었고, 가끔은 시종의 눈을 피해 어린 해산을 무릎 위에 올려 주기도 했다. 손목에 구리 채찍을 감아 준 것도 그때의 일이었다.
‘여가 줄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 이런 것뿐이구나.’
머리가 굵어지고 난 후에는 우후가 적통 후사임에도 불구하고 성월공에게 밀리는 자신을 연민하여 그런 것인 줄 알았다. 유부를 붙이지 않고 손수 양육하고, 세간의 눈이 무서워 자주 안아 주진 못해도 틈만 나면 그의 손을 꼭 잡고 눈을 마주치는 것이 다 자식인 그를 사랑해서 그런 것인 줄 알았다. 아니, 그것이 자식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사랑일까.
해산은 마음이 복잡했다. 부황이 자신을 미워하는 건 당연하다 여겼지만 우후의 사랑만큼은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나중에 그가 황제가 되지 못하더라도 우후만큼은 자신이 모시도록 노력을 해야지, 그런 생각마저 품고 있었던 것이다. 저를 바라보던 아름다운 눈동자를 떠올리며 해산은 무심코 자신의 손목을 어루만졌다.
체온에 데워진 미지근한 감각이 느껴졌다. 가슴속으로부터 울컥 치솟는 것이 느껴졌다. 대체 왜, 대체 왜 그렇게 자신을 귀여워했는가. 남의 자식이면 남처럼 대할 것이지, 대체 왜. 아니, 그 사람은 단지 정이 고팠던 것뿐이다. 남편인 부황을 의지할 수 없으니 자신이 자식으로 정한 나라도 의지하고 싶었을 뿐이다. 이게 다 부황 탓이다. 자신은, 아무 잘못이 없다.
“자, 출발한다!”
해산은 자신의 가슴속에서 뭉개 뭉개 피어나는 감각과 함께 손목을 꽉 움켜쥐었다. 구리 채찍을 으스러뜨리기라도 할 것처럼 손등에 핏줄이 불거졌다.
* * *
여정을 계속한 지 어언 한 달이 다되었다. 새로 합류했던 여해루 일행들은 서해 옥가의 가신들과 한 식구가 되었다. 본래부터 정미려가 여해루의 루주였으니 새삼 남이라 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말없이 길을 걷는 해산도 어느 정도 익숙해진 듯했다. 그의 처지를 동정하고 측은한 시선으로 바라보거나, 혹은 쯧쯧 혀를 차기도 하는 것이다.
그중 해산과 가장 가까워진 것은 단연 옥청려였다. 처음부터 진해의 정인이라 신경을 써 주기도 했지만 이제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해산을 걱정하고 있었다. 청려는 말이 없는 해산을 불안하게 생각했다. 진해가 있었더라면 어떻게든 그의 얼굴에서 미소를 자아냈겠지만 문제는 이 자리에 진해는커녕 해산과 살갑게 말 붙일 사람이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해산은 여정이 시작된 이래 단 한 번도 웃은 적이 없었다. 물론 심각한 상황이고 웃을 일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해산은 웃음뿐만 아니라 희로애락이 사라진 사람처럼 굴었다. 원래부터 황족다운 고아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서늘한, 조금 재수 없고 도도한 분위기로 말이 자자했던 해산이었다. 성군이 되기 글렀다고, 덩치도 큰 이가 저러고 있으니 보는 사람이 다 무섭다고 말이 나왔었다. 성군감이 아니라는, 외모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마저도.
하지만 청려는 그때의 해산과 지금의 해산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총명한 청려는 해산이 눈치채지 않게 그를 유심히 관찰한 결과, 해산이 예전처럼 자신을 관리하고 조절하는 것이 아닌 뭔가를 필사적으로 참는 중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동시에 청려는 해산이 참는 감정이 무엇인지 대충이나마 알아차렸다. 분노. 무엇에 대한 분노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해산은 지금 속에서 들끓는 분노를 참는 중이었다.
“해산 공자, 식기 전에 드시지요.”
“고맙군.”
청려는 해산의 굳은 마음을 조금이라도 풀어 보고자 친근하게 웃으며 해산의 어깨를 두드리려 했으나 해산은 청려의 손이 닿기 전에 슥 일어나 버렸다. 주면 주는 대로 받아 입고, 먹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면서도 해산은 낯선 이인 청려가 걱정할 정도로 단단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저러다 탈 나지, 저러다 터지지. 청려는 해산이 가여운 동시에 언제라도 터질지 몰라 불안했다. 해산이 탈주라도 하면 그땐 진해의 낯을 어찌 보나 걱정되기도 했다. 미려는 방긋 웃으며 해산이 홀로 떠났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청려는 진해를 보며 그런 말 할 정도로 뻔뻔하지 못했다. 청려는 본인 스스로 생각하기에 상식인이었고 인정머리가 넘쳤으며 총명하고 멀쩡하게 생겼고 무공도 수준급이었다. 특히 상식만큼은 서해 옥가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고민되는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주저 말고 말하세요. 저는 오 은인께 은혜를 입은 몸. 오 은인께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당신이 편안히 있으시길 바라요.”
그렇기 때문에 청려는 자기 스스로 생각하기에 멀쩡하게 생긴 얼굴에 미소를 띠 며 해산에게 사근사근 친절하게 말을 걸었다.
“……너, 닮았군.”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해산이 청려를 아주 싸늘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것이 아닌가.
“예?”
“정미려와 친척이라고 했던가.”
“정미려? 아, 소가주요?”
“기분 나쁜 얼굴.”
“……네?”
“진해에게 달라붙는 건 세 놈으로 족해. 더는 허락 못 한다.”
“……네에?”
“그러니까 고에게서 쓸데없는 신경 꺼.”
오금이 저릴 정도로 서늘하고 활활 불타는 시선이 아니었더라면 청려는 그 자리에서 콧방귀를 끼다 하늘로 날아갔을지도 몰랐다. 아니, 지금 누가 누구에게 달라붙는단 말인가. 청려의 이상형은 서글서글하면서도 우아하고, 박식하고 예의 바른 양인이었다. 진해처럼 똥강아지처럼 구는 양인은 이쪽에서 사양이라는 말이었다!
꺼지라면 꺼져야지. 청려는 너무나 큰 충격에 휩싸인 채로 처음으로 해산에게서 완전히 멀어졌다.
세상에, 어떻게 자신을 그런 바람둥이와 엮을 생각을. 아니 바람둥이라서 그런 생각이 가능한 건가. 그보다 정말로 속이 배배 꼬이고 있구나. 어서 빨리 화석정군인지 태정군인지를 잡아서 진해와 교환하지 않으면 오 은인 이야기를 하다 소가주랑 치고받을지도 모르겠어. 그럼 안 되지, 안 돼. 소가주가 이기겠지만 소가주는 아직 멸살은화진의 조종법이 미숙하니 주변에 있는 사람이 다 갈릴지도 모르잖아.
청려의 머릿속은 자신과 진해가 그런 쪽으로 엮였다는 충격으로 엉망진창이었다. 그러면서 흘끗 미려 쪽을 바라보았는데 세상에, 미려가 그 거리에서도 얘기를 들은 모양인지 가늘어진 눈으로 청려를 바라보고 있었다. 만에 하나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청려를 당장에 대롱대롱 매달아 놓을 듯한 눈빛이었다. 저러면서 어떻게 용케 한배를 탈 생각을 했는지. 청려는 고개를 푹 숙이면서 처음으로 오진해라는 인간에 대해 사색했다. 똥강아지 같은 인간이 범과 호랑이 같은 인간들을 끼고 살면서 용케도 살인이 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그때,
“꼼짝 마! 두 손 들고 가진 것 다 내놔!”
어디선가 막걸리 냄새가 나는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청려는 어느 놈 명줄이 이리 짧은가 궁금해서 고개를 들었고 아주 조금 놀라고 말았다. 어느새 주변에 위생 관념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산적들이 주변을 포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참으로 자기주장이 강한 산적들이었다. 전형적인 산적을 빚어 만든 듯한 이들이었다.
“싫다면?”
“뭐, 뭣?”
“싫다고 했다.”
그리고 이쪽에는 인정 넘치는 자신과 달리 겁이라고는 한 조각도 갖고 태어나지 않은 소가주 정미려가 있었다. 정미려는 고개를 반쯤 기울이며 삐딱하게 산적 두목인 듯한 이를 바라보았고, 기울어진 그의 목 뒤로 비단실처럼 매끄럽고 구름처럼 풍성한 머리채가 꿈결처럼 느릿하게 흘러내렸다. 산적 두목이 넋을 잃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어, 어, 그, 그럼…….”
보통 저 정도 되면 미려한테 넌 돈은 됐고 몸을 내놔라든지, 그게 아니면 미려의 발닦개가 되든지 둘 중 하나였는데 산적 두목의 태도가 좀 묘했다. 미려의 몸을 훑으며 침을 꿀꺽 삼키다가 어깨를 흠칫거리며 뒤를 돌아보는 것이 아닌가. 마치 누군가 뒤에서 그를 감시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에, 에잇! 그럼 모, 목숨을 내놓는 수밖에! 죽어라!!”
그리고 너무나도 단순무식하게 부하들을 향해 돌격 명령을 내렸다. 서해 옥가의 가신들은 무심한 표정으로 일어나 숨겨 두었던 암기며 무기를 꺼내 들었다. 적의 수가 많기는 했지만 이쪽은 무가의 인척이며 가신들이었다. 적의 수가 많다고 해서 도망칠 인간은 아무도 없다는 말이었다.
“……응?”
그러던 와중 청려는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적 중 일부가 조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돈을 노리는가 싶었는데 그건 또 아니었다. 산적이라면 많은 수를 장점으로 내세워 적들과 싸우는 도중 돈을 들고 튀는 법도 있을 텐데 오히려 짐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청려가 산적의 명치에 주먹을 꽂으며 유심히 살펴본 결과 산적들은 크게 세 무리로 나뉘어 있었다. 가장 큰 무리는 서해 옥가의 가신들과 싸우고 있었고, 나머지 두 무리는 각각 정미려와 안해산을 노리고 있었다. 특히 안해산을.
“설마 황제가!”
안해산이 산적에 의해 죽임당한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황제는 힘 하나 안 들이고 골칫거리인 안해산을 해결하는 셈이었다. 청려는 황제의 영악함에 전율하는 동시에 해산 쪽으로 가려고 안간힘을 썼다. 자신을 진해와 엮는 돌은 인간이었지만 그가 죽게 되면 진해가 크게 슬퍼할 게 분명해서였다. 게다가 해산은 무인이 아니었다. 오냐오냐 자라 온 황족이니 이만한 수에는 힘을 못 쓸 게 분명했다.
“……다.”
그런데 산적들과 맞서던 해산이 얼굴에 그늘을 드리운 채로 뭔가를 중얼거렸다. 청려는 날아오는 주먹을 피하며 해산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 했다.
“나는, 나다!!!!”
곧 그럴 필요 없어졌지만.
“나는 황자가 아니다!! 즉 더는 대월률 같은 거, 지킬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황자가 아니더라도 월국 사람은 월국 법을 지켜야 했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이 상황에서는 해산의 말에 반격해 줄 이가 없었다.
“난 잘못하지 않았어!!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난 결백하다!! 제기랄, 진해는 내 거야!! 황족 따위에게 뺏길 것 같으냐!!!!”
그러면서 어찌나 크게 소리를 치던지 온 사람들의 이목을 한 번에 집중시켰다. 그리고 그뿐이 아니었다. 해산은 이를 드득 가는가 싶더니 날카로운 안광을 흘리며 별안간 벼락같이 산적의 앞으로 돌진했다.
“으아아악!!”
“세, 세상에…….”
그리고 그대로 산적을 집어 던졌다. 말 그대로 들어서, 집어 던졌다.
“난 나야!!! 나라고!!!”
“괴, 괴력 괴물이다!!!”
집어 던지다 못해 넘어진 이를 들고 휘두르기도 했다. 묘기로 일부러라도 보기 힘든 광경에 주변 사람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입을 떡 벌리고 해산을 바라보았다.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해산에게서 도망쳤다. 해산이 집어 던진 이가 인간 빗방울처럼 그들을 향해 쏘아져 내렸다. 바닥에 넘어진 이들은 신음하며 몸을 뒤틀거나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렸다. 해산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정미려조차도 지금의 해산에게는 차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짝, 짝, 짝.
“그래, 이제야 좀 정신이 드나 보네.”
그리고 산적들이 비명을 지르며 반쯤 흩어졌을 때 누군가가 산적 두목이 있던 나무 뒤에서 몸을 드러냈다. 하나가 아닌 둘이었다.
“어이, 해산 도련님. 그리고 개새끼.”
놀랍게도 나무 뒤쪽에서 나온 이는 옆구리에 붕대를 감은 삼랑이었다. 삼랑은 무척 표정이 좋지 않은 중년의 사내 하나를 그림자처럼 단 채로 날카롭게 미소 지었다. 씩씩거리던 해산과 삼랑의 눈이 마주쳤다.
“한 위사. 지금 이게 무슨 짓거리지?”
“오, 아직 위사로 봐 주네. 영락없이 백수 된 줄 알았는데 말이야.”
“삼랑.”
“개새끼도 철 많이 들었다? 어디 갖다 버릴 줄 알았는데 순순히 데려가고 있네.”
삼랑은 정미려와 안해산이 한자리에 있는 걸 확인하자 다시 한번 씩 웃음 지었다. 삼랑이 손짓하자 난투를 벌였던 산적들이 우르르 그의 뒤에 정렬했다. 산적 두목이 아주 공손한 태도로 삼랑에게 굽실거리는 모양을 보아 아무래도 이놈들의 진짜 두목은 삼랑인 듯했다.
“그러는 너는 제 버릇 못 버리고 또 너절한 놈들을 모아 패를 꾸렸구나.”
“필요해서 만든 거야. 둘이서 꾸리느라 제법 고생했다? 뭐, 둘이라서 너희를 앞질러 오긴 했지만.”
“둘이라고?”
정미려는 그제야 삼랑 뒤에 그림자처럼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남자를 살피던 정미려는 저도 모르게 입을 살짝 벌리고 말았다. 그 남자의 향은 서해 옥가의 별채에 난입했던 남자의 것과 같았다. 체격도 비슷했고, 무엇보다 그 몸에 서린 강자의 기운이 영락없는 그자의 것이었다. 오천협. 고산국에서 패자에 근접했던 무인이자 진해의 생부이며 좌부인 이였다.
“역시 개새끼 넌 알고 있었군. 요망한 새끼.”
“…….”
그리고 정미려는 그가 오천협임을 확인하자마자 그가 왜 삼랑의 뒤에 뭐 씹은 얼굴로 붙어 있는지 대충 눈치챘다. 한일과 한이. 오래전 같으면서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던 때. 강절곤이 해원공에게 뻗은 마수의 뒤처리를 위해 오천협이 한이의 목을 긋고 한일을 납치해 형부에 범인이랍시고 던져 넣었던 것이다. 한일은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진해는 자신의 조부와 좌부가 벌인 일로 인해 저도 모르게 삼랑과 원수를 지고 있었다. 진해의 존재를 몰랐던 때라면 몰라도, 지금의 오천협은 진해의 존재를 눈치채고 삼랑과 진해가 제법 밀접한 관계인 것도 알아냈을 것이다. 또한 자신이 벌인 일로 인해 그 관계가 파탄 날지도 모른다는 것도. 그리하여 아들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삼랑에게 자신의 죄업을 밝히고 뭔가 계약을 맺은 게 틀림없었다. 삼랑 저놈의 흡족한 표정과 수하가 된 산적들을 보아 오천협이 삼랑의 말에 협조하고 있다는 건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이쪽은 내 채무자니까 신경 쓰지 마시고, 그래. 해산 도련님. 눈빛이 아주~ 좋아졌는데? 마음에 들어. 원래는 정신 못 차리는 틈을 봐서 쓱싹.”
삼랑이 손날로 목을 그었다.
“하거나 개새끼랑 같이 파묻으려고 했는데 지금의 당신은 그냥 파묻기엔 아까운 얼굴이 되었어. 오진해 그 새끼가 보면 좋아서 질질 쌀 텐데 참 안타까워.”
“원하는 게 뭐냐.”
그리고 미려가 오천협을 주시하는 동안 해산이 옷을 탁 털며 삼랑을 노려보았다. 광포하게 깨어난 해산의 본능이랄지, 성격이랄지 하는 물건은 삼랑이 조금이라도 허튼 수를 부리면 삼랑에게 달려가 삼랑 역시 해산이 집어 던진 산적들과 똑같은 꼴로 만들어 줄 것이라며 쉬지 않고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동맹.”
“……뭐?”
“정확히 말하면, 진짜 싫지만, 저 개새끼까지 끼워서 삼자 동맹.”
하지만 삼랑은 해산의 살벌한 눈빛에는 주눅 들지 않고 양어깨를 으쓱거렸다. 헤프게 묶은 앞섶이 그 탓에 나태하게 벌어져 버렸다. 진해가 좋아 죽는 문신이 붕대에 가린 부분을 제하고 여실히 드러났다.
“안월산 그 씹새끼를 타도할 동맹을 맺자고. 어차피 둘로는 부족할 거 아냐?”
“나 혼자서도 충분해.”
“해국을 끌어들이려고? 아서라, 가만히 있어 주는 게 돕는 거니까. 전쟁 날 일 있냐.”
“…….”
확실히 서해 옥가가 움직이면 해국군도 움직이는 거나 다름없다. 지금의 서해 옥가는 덩치가 커져도 너무 커져 해국군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으니까.
“그리고 정~ 말로 안타까운 말이지만 지금의 해산 도련님은 저 개새끼만큼의 힘도 돈도 없지. 사람 집어 던지는 재주야 좀 쓸 만하다지만 그거 가지고는 안월산 발치에나 닿을 수 있겠어?”
“…….”
속이 뒤집히는 말이지만 맞는 말이었다. 지금의 해산은 지위도, 무엇도 없고 심지어 신분마저 불분명한 뜨내기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내가 또 미친 듯이 잘났느냐? 그건 또 아니란 말이지. 일단 그 씹새끼한테 뚫린 옆구리도 문제고, 긁어모은다고 긁어모은 찌꺼기들은 턱없이 수가 모자라고, 여기 이 작자는 성안에 있는 사람들 때문에 함부로 도와줄 수가 없다네. 허 참. 나한테 목숨 빚이 두 개나 있으면서 참 팔자 좋게 빚을 갚고 말이야.”
“…….”
그리고 오천협은 삼랑의 빈정거림을 들으며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 삼랑이 억지로 우긴다면 그 혼자 도성에 들어가 안월산을 암살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성안에 있는 사람들, 장강 강씨와 진해가 무사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일단 황실의 대가 끊어져 버리게 되는 셈이었다.
그렇게 되면 황제가 양자를 들이기 위해 후보를 물색할 테고 그 과정에서 또다시 피비린내 나는 내전이 벌어질 터였다. 장강 강씨의 세력을 흡수하고자 손을 뻗친다면 몸이 쇠해진 강백서에게는 큰 타격일 터였다. 자신의 죄를 갚고자 했지만 사랑하는 이들이 위험해지는 꼴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천협은 자신은 절대로 암살은 하지 않겠다고 못을 박았다. 다른 것은 무엇이든 시키는 대로 다 하겠다고.
“하지만 우리 셋이 모이면 어찌어찌 길이 열릴지도 모르지. 솔직히 우리가 어디 한 구석 빠지는 데가 없잖냐.”
삼랑이 서로를 칭찬하는 말을 하자 미려의 눈동자가 진동했다. 저놈의 옆구리가 썩어 들어가 뇌에까지 썩은 기가 미친 것이 아닌가, 그런 추측마저 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가만 생각해 보니 오진해 그놈. 그 광활한 오지랖하고 바람기. 그것 역시 한 사람이 단속하기에는 너무나 지랄 맞단 말이지.”
확실히 진해의 정조 관념은…….
“거기다가, 내가 좀 급해졌어.”
유들유들하던 삼랑의 목소리가 갑자기 싸늘해졌다.
“안월산 그 개― 자식이 감히 내 창놈에게 장을 바르려 하고 있단 말이지. 굴러들어 온 새끼가 어디서 싸가지 없게 먼저 침을 바르고 있냐 이 말이야. 안 그러냐, 개새끼? 아, 씹새끼 개새끼 이러니까 헷갈리나?”
“닥치고, 지금 그게 무슨 말이야. 안월산이 형에게 무슨 짓을 하려 한다는 거지?”
“하― 역시 이 집단은 내가 없으면 안 돼. 둘 다 눈이 돌아 가지고 말이야. 마을에 언제 들렀어? 아니, 들러서 뭐 제대로 듣고 보기나 하냐? 식량이나 옷이나 대충 사고 빨리빨리 서두르라고 닦달이나 하겠지.”
“삼랑.”
“국혼!”
삼랑을 채근하던 이들은 삼랑의 입에서 튀어나온 단어를 듣자마자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황후의 부정이 드러난 이때 황제가 혼인을 할 리가 없으니 남은 국혼은 성월공 안월산의 혼인뿐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삼 일 전. 성월공 안월산이 창명후 강절곤의 손자인 강해아와 혼례를 치른다는 방이 붙었지. 근데 지금 그 새끼가 강해아라고 데리고 있는 게 우리 창놈이라며?”
삼랑은 정말로 웃긴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크게 웃기 시작했다.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는 것이 정신이 반 바퀴쯤 돈 광인 같아 보였다. 그러나 이 자리의 누구도 삼랑을 뭐라 하지 못했다. 왜냐면 국혼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해산과 미려의 눈매도 장난 아니게 무서워졌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이를 갈거나 관자놀이에 핏줄까지 세웠다. 미려의 흰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아닌 분노로 인한 홍조가 피어나고 있었다.
일도를 비롯한 그림자 가문의 가신들을 부디 미려가 정신이 휙 돌아 이대로 도성으로 달려가지 않기만을 바랐다. 미려가 원한다면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이었다. 또한 청려 역시 부디 이 시련이 지나가기를 바랐는데, 왜냐면 해산이 홧김에 눈앞에 보이는 이를 다 집어 던질 듯한 흉흉한 기세를 뿜었기 때문이었다. 청려는 던져지는 일만큼은 사양이었다.
“셋이서 나누지?”
그리고 잠깐 동안 웃던 삼랑이 웃음을 뚝 그쳤다.
“나는 실컷 파각사를 보내 파각해 놓고 이제 와서 독차지하겠다는 놈을 그냥 보고 있을 정도로 호구 새끼는 아니거든.”
“동감이야. 다른 자는 몰라도 그놈에게만큼은 절대 넘길 수 없어. 형이, 형이 얼마나 괴로워했는데!!”
미려는 분노와 악이 뒤섞인 소리를 내질렀다. 파각사라는 말에 오천협의 얼굴에 비통함이 떠올랐다. 진해가 고생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파각당했을 줄이야. 거기다가 이제는 그 상대와 혼인하게 될 줄이야.
“좋다. 받아들이지.”
그리고 마침내 해산이 삼랑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안월산 그놈은 옛날부터 음습하고 집요했다. 나 혼자서는 동귀어진 정도밖에 수가 없겠지. 그리고 무엇보다 진해가 너희 둘을 좋아한다. 나는 안월산 그놈과 달라. 사랑하는 이의 모든 것을 지켜 주고 포용하는 것이 바로 나라는 자다.”
어느새 해산의 자칭이 바뀌어 있었다.
“나는 진해를 버릴 수 없고, 진해 역시 너희를 놓지 않을 것이며, 너희도 진해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방법은 그것뿐.”
“삼랑 저놈과 한배를 타는 건 좋지 않지만, 사실 나는 형의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만족해. 그리고 형은 죽어도 음인 좋아하는 성질이 고쳐지지 않을 사람이구. 그런 사람이 양인인 내 손을 잡아 주었으니…… 나도 어느 정도는 양보하는 수밖에.”
세 사람은 진해를 두고 경쟁하는 사이였고 해와 달과 별이 다른 것처럼 다른 이들이었으나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진해를 사랑하고, 진해가 행복하길 바란다는 점이었다. 월산과 달리 그들은 진해가 한 사람과 확고하게 맺어진다면, 인정하기는 싫지만, 진해의 행복을 빌며 뒤로 물러설 이들이었다. 가지지 못한다면 없애 버리겠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홧김에 그렇게 내뱉을 수는 있어도 오진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 그들의 진심이었다.
잠깐 동안 세 사람의 눈앞에 각각 다른 진해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누군가는 마차에서 뛰어내려 홀로 돌아온 자신을 보며 울상을 짓는 이를 떠올렸고, 누군가는 제 몸을 상냥하게 닦아 주던 이를, 또 누군가는 창살 너머로 손을 잡던 이를 떠올렸다.
“셋이면 충분해.”
“솔직히 차고도 넘친다.”
“우리 셋이라면 감시하기도 쉽고, 서로 죽이기도 힘들 거야. 서로 편먹을 성격은 아니니까.”
절대로 이뤄질 것 같은 동맹이 한 가지 목적 아래 극적으로 성사되었다. 진해가 조금이라도 심지가 굳고 지조가 있었더라면 절대로 이뤄지지 않을 동맹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기도 진해는 의리는 있지만 지조가 없었고, 또 쓸데없이 다재다능하고 사랑스러웠다. 세 사람은 그 끔찍, 깜찍한 면이 진해의 매력이라고 느끼는 동시에 일단은 진해를 구하기로 결정했다.
처음에는 해산을 주축으로 도성에 혼란을 일으킨 후, 미려가 데리고 있는 가신들과 굴복시킨 산적들을 모아 진해가 황궁으로 가는 길을 습격할 계획이었던 삼랑은 해산과 미려의 예정을 듣고 계획을 변경했다. 삼랑의 계획도 제법 실용적이었지만 실패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었다. 안월산이 무시할 수 없는 인질을 쥐게 된다면 실패할 계획도 성공으로 돌릴 수 있었다.
그리하여 삼랑까지 합류한 일행은 향묘산을 향해 더욱 급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국혼인 만큼 성월공의 혼례에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겠지만 서둘러서 나쁠 건 하나도 없었다.
* * *
일은 그렇게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세상일이 모두 다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었다. 첫 번째로 해산 일행은 향묘산의 어디에 사찰이 있는지 몰랐으며, 두 번째로는 향묘산을 오르는 길이 닦이지 않아 당황했고, 세 번째로는 사찰로 보이는 곳이 무참하게 파괴되어 있어 황망했다. 혹시 잘못 찾았나 싶어 온 향묘산을 이 잡듯이 뒤졌으나 향묘산에서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는 곳이라곤 오로지 이곳뿐이었다.
“애초부터 사연이 있는 황족이 오는 유배지와 진배없었으니 주변에 인가가 많다면 그것이 더 이상하겠지.”
“필요한 물자를 황실에서 대 준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야.”
“씨발, 그러거나 말거나 이건 대체 왜 이 꼬라지야? 꼴이 일이 년 새에 이렇게 된 건 아닌 거 같은데?”
삼랑은 불에 탄 흔적이 여실히 남은 기둥인지, 서까래인지 모를 것을 손으로 훑었다. 검게 탄 나무 위에는 물기를 촉촉이 머금은 이끼들이 가득 덮고 있었다. 군데군데 자그마한 버섯이 솟아 있기도 했다.
“나도 자세한 건 알 수 없다. 오히려 내가 더 묻고 싶을 지경이야. 미려 아우의 말대로 아마 이곳의 물자는 황실에서 댔을 것인데 어째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것인지.”
비록 핏덩이인 성월공 안월산을 두고 출가했다지만 화석정군 혹은 화석태정군이라 불리는 이는 장차 보위에 오를지도 모르는 이의 생부였다. 장성한 성월공이 그를 그리워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해산은 향묘산의 변고에 대해 어떤 말도 듣지 못했다. 해산이 은근히 괄시받고 있다지만 그래도 황제의 단 하나뿐인 자식이었고 적통이었다. 모르는 이가 더 많은 화석정군의 거처에 대해 알고 있는 거만 봐도 그랬다.
“해산 형님 말 말고도 이상한 게 더 있어.”
이젠 아주 자연스레 서로를 호형호제하는 미려와 해산이 서로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그런 둘을 바라보는 삼랑의 표정이 아주 아니꼬워 보였다. 왜냐면 삼랑은 둘의 호형호제에 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려가 진해를 주축으로 한 동맹이니 진해와 맺어진 순서로 의형제를 맺자고 했을 때 자격이 없어 막내 자리도 꿰차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절을 지키는 자들은 이 사달이 날 때까지 뭘 한 거지? 황족들이 머무는 곳이라 분명 이곳을 지키는 자들이 있었을 거야. 설령 미움받는 이들이 머무르는 곳이라고 해도 화석정군은 함부로 죽을 수도 없는 위치잖아. 황제 입장에서도 그가 죽으면 무척 곤란할 테고.”
“글쎄, 그건 잘 모르겠군. 그는 거의 지워진 인물이야. 부황, 아니 황제는 절약과 황후의 건강을 이유로 연회를 여는 일도 드물었으니 그를 떠올릴 기회도 적지. 안월산이 별 볼 일 없는 인물이었으면 굳이 기억하려는 자도 없어.”
“젠~ 장~, 뭐가 됐든 지금 여기엔 아무것도 없고 화석정군인가 나발인가 하는 새끼도 없다는 거잖아? 씨발, 공쳤구만! 안월산 그 새끼가 지금 창놈어사 좆을 빨고 있을지도 모르는 판국에!”
진해 이야기가 나오자 미려와 해산의 얼굴이 일순 어두워졌다. 삼랑은 폐허 주변을 돌아보면서 쉴 새 없이 욕을 하다 가뿐한 걸음걸이로 돌아왔다. 상처는 제법 많이 나아 있었다. 가벼운 여정이 아님에도 나을 수 있었던 이유는 오천협이 삼랑에게 붙어 그를 극진히 간호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삼랑은 전혀 고마워하는 눈치가 아니었고 아주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태도였지만.
“됐고, 이왕 이렇게 된 거 빨리 내려가자고. 분명히 주변에 인가 하나쯤은 있을 거야. 오래 살던 사람이면 여기 난 불에 대해서도 알겠지.”
삼랑은 이제 포기했다는 듯 앞장서서 산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셋을 만난 이후 시종일관 표정이 좋지 않던 오천협이 그 뒤를 따랐고, 삼랑의 부하가 된 산적들이 마찬가지로 그 뒤를 졸졸 따라갔다.
“이상하네.”
“그렇군.”
미려와 해산도 이견 없이 그를 따르면서도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다는 건 이 절의 이야기가 아니라 좀 더 단순한 차원의 의문이었는데, 그들이 아는 삼랑이라는 인물은 뜻이 이뤄지지 않으면 좀 더 난동을 부리면 부렸지 결코 이렇게 가볍게 물러날 이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 * *
주변을 샅샅이 훑은 통에 인가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처음 오는 이라면 무심코 넘겨 버릴 정도로 한적한 곳에 작은 오두막 한 채가 서 있었다. 주변에 인가가 없는 만큼 자급자족이 기본인 듯 오두막 주변에는 온통 밭 천지였다. 푸릇푸릇한 채소들이 바람에 느릿하게 한들거렸다.
“뭐야, 주막인가?”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자 그냥 인가가 아니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술이라고 적힌 낡아 빠진 포렴이 울타리에 간신히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이, 먼저 들어가 봐.”
삼랑이 턱짓으로 등 뒤의 오천협에게 지시했다.
“삼랑, 아버님에게 명령하지 마라.”
오천협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미려가 강하게 반발했다.
“아버니임~? 닭살 돋게 아버님은 무슨. 그럼 네가 가든 지.”
“하! 내가 못 갈 줄 알고? 그나저나 너도 많이 늙었나 보네. 예전 같으면 누구보다도 먼저 쳐들어갈 녀석이. 그 패기만큼은 높이 사 줄 만했었는데 아쉬워.”
“뭐? 늙어? 이 늙다리가 지금 누구한테 늙었다는 거야!”
“내가 늙다리면 너도 얼마 안 남았겠는데? 넌 나보다 고작 반년이 어릴 뿐이니까.”
“이게 진짜!”
결국 둘의 다툼을 보다 못한 해산이 성큼성큼 울타리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오천협도 그 뒤를 따랐다.
“아무도 없는가!”
사실 삼랑이 오천협을 보내려 했던 이유는 오천협이 웬만해서는 타격을 받지 않는 고강한 무인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며 그가 형들의 원수인 이상 언제 죽어도 별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는 오천협이 진해의 좌부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상황이었다.
“뉘, 뉘신지요?”
해산이 큰 소리로 부르자 오두막의 뒤쪽에서 누군가 빼꼼 머리를 내밀었다. 아무래도 이 오두막은 뒤쪽에도 마당이 있는 모양이었다. 말린 작물을 손질 중이었는지 마른 이파리 조각이 머리칼에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도련님들을 모시고 유람을 가는 중인데 목이 말라 잠깐 쉬어 갈까 하오.”
대답은 오천협이 대신했다. 해산은 오천협을 바라보다 자신도 그에 맞춰 고개를 끄덕였다. 미려가 오천협에게 약하게 구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잘 보여서 나쁠 것은 없을 것이다. 행운의 신이 해산에게 잘했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듯했다.
“아, 그러셨군요? 그런데 일행이 제법 많으신 모양입니다.”
“장강성 성주이신 창명후 대인을 모시는 가문의 공자들이시오. 견문을 넓히기 위해 몇 달 전부터 유람 중이라오.”
“네, 네. 누추하지만 일단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손님이 이렇게 많이 오신 건 간만이네요. 저, 혹시 오늘 묵고 가실 겁니까? 묵고 가시는 손님이 없어 방이 좀…….”
“집 떠나면 고생이라 마당에서라도 눕고 싶은 지경이니 신경 쓰지 말게. 일손들이 많이 있으니 걸레라도 몇 조각 쥐여 주면 알아서 하지.”
“아이고, 이거 죄송해서 어쩌지요.”
해산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던 주인은 사람을 가늠하려는지 해산의 뒤를 따라 마당으로 나왔다. 주인이 자리를 권하지 않아도 법도라곤 없는 누구누구는 이미 마당에 수하 하나를 엎드리게 해 놓고 의자로 쓰고 있었다. 다행히 서해 옥가의 가신들은 질서가 있어 미려를 중심으로 대열을 이루고 있었다. 사람을 의자로 쓰는 기행을 벌이지 않아도 이들은 주인을 모실 준비가 되어 있었고, 어떻게 갖고 다녔는지 모를 의자를 꺼내 미려를 앉혀 놓았다.
“헉!”
그리고 삼랑과 산적들의 기행에 겁먹은 주인이 미려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주인의 입에서 탄성인지 뭔지 모를 소리가 터져 나왔다. 미려가 살짝 눈을 들자 그늘 아래서도 별빛처럼 영롱한 눈동자가 매끄럽게 윤을 냈다. 맑기는 또 어찌나 맑은지 금방이라도 물이 똑 떨어질 것만 같았다.
뭐, 일행에겐 이젠 제법 익숙한 일이었다.
“주인장.”
“예, 예?!”
“이 녀석한테 꼴려?”
“허억, 어,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요! 쇠, 쇤네는 그저 참으로 고운 공자님이다 싶어!”
“딱히 드문 일도 아니야. 이 녀석 낯짝이 좀 반반해야지. 솔직해도 돼. 그치?”
삼랑은 미려를 돌아보며 동의를 구했다. 미려는 삼랑의 행동에 영문을 알지 못해 미간을 찌푸렸으나 뒤의 가신들은 삼랑의 말에 천 번 동의하는 바였다. 소가주의 아름다움에 한낱 미물들이 넋을 잃는 건 동쪽에서 해가 뜨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이치였다.
“주인을 곤란하게 만들지 마라.”
“하하. 농 좀 친 거 가지고. 거 주인장.”
“예, 예…….”
“미안하게 됐수다. 주인장 하는 양이 다른 놈들이랑은 좀 달라서. 혹시 첫눈에 반했나 싶어서 말이야, 하하. 임자 있는 몸이라 그러면 곤란해지거든. 안 그러냐?”
“실없는 소리를. 주인장.”
“……예.”
“금전은 걱정하지 말고 저 어이없는 놈과 다른 이들에게 마실 것과 요기할 것을 내주세요. 시간은 얼마가 걸리든 괜찮습니다. 당분간 주변을 돌아볼 생각이라.”
미려가 상냥하게 웃자 주인장은 송구하다는 듯이 허리를 굽신거렸다. 다만 신경 쓰이는 것은 주인장이 정말로 미려에게 반하기라도 한 것인지 자꾸만 그를 흘끔흘끔 훔쳐본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훔쳐보는 것은 미려뿐만이 아니었다. 주인장은 미려를 보다가 잠깐씩 해산을 바라보기도 했다. 해산은 그런 시선을 눈치채지 못하는지 청려가 손짓하는 곳에 앉아 가만히 휴식을 취할 뿐이었지만.
그러나 삼랑은 주인의 그 행동을 모조리 눈여겨보고 있었다. 아니, 주인이 미려와 해산에게 정신이 팔린 동안 삼랑은 주인장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주인장의 차림새와 외양 역시 꼼꼼히 살피고 있었다.
“여기 뒷간은 어디야?”
심지어는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로 오천협을 꼬리처럼 매단 채 집 주변을 둘러보기까지 했다. 오천협은 화장실에 가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는 삼랑의 행동에서 뭔가 눈치챈 듯했지만 아무 말 않고 조용히 삼랑을 호위했다. 삼랑은 집의 자재며, 낡음 등을 살피며 곰곰이 뭔가를 따져보는 듯했다. 그리고 곧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일행에게 돌아왔다.
그사이 주인이 끙끙대며 커다란 술독을 굴리다시피 가져오고 있었다. 일행의 수가 수인지라 자신이 일일이 가져다주기는 힘들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길가의 주막이었으니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오랜만에 내온 술이라 영 자신이 없습니다. 맛이 이상해도 대인들께서 좋게 봐 주십시오.”
“맹물이 아닌 게 어딘가. 잘 마시겠네.”
“그래. 저기 여우 새끼는 몰라도 이 도련님은 술맛 잘 모르니까 신경 쓸 거 없어.”
“닥쳐라, 한삼랑.”
삼랑이 싱글싱글 웃자 술맛 모른다는 말에 빈정 상한 해산이 툭 쏘아붙였다. 확실히 미려는 청루를 두 개나 운영한지라 술이라는 술은 다 맛보았고 삼랑은 이미 미성년부터 단순한 비행을 넘어 승천 수준에 도달한 상급 양아치였다. 한때 술독을 베개로 삼은 적도 있는 것이다.
“음? 맛이 괜찮군?”
해산의 기억 속에서 술은 언제나 긴장 속에 마시는 것이거나, 혹은 진해와 마시다가 일을 치르게 되는 물건에 불과했다. 물론 전자보다는 후자의 맛이 훨씬 감미로웠었다.
“주인장이 직접 담근 건가 보지? 주변에 술도가는 안 보이던데?”
“예. 작년에 담가 놓은 좁쌀주입니다. 혼자 먹고살다 보니 기르는 양에 비해 먹는 양은 많지 않아서요.”
“우리가 다 먹고 가면 섭섭해하는 거 아니야?”
“하하, 설마 그러겠습니다. 사람을 이리 많이 만나는 게 오랜만이라 기쁘기까지 합니다. 같이 드실 만한 것을 만들어 올 테니 기다려 주십시오.”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직접 기른 농작물로 담근 술은 술맛을 모르는 해산이 마셔도 제법이었다. 삼랑이 데려온 산적들은 맛을 보더니 큰 소리로 낄낄거리며 마구 마셔 대기 시작했고, 반면에 서해 옥가 출신의 가신들은 주도를 지키며 조심스레 마시기 시작했다.
주인장이 급히 불을 지피는지 굴뚝으로 흰 연기가 솟기 시작했다. 뭘 굽는지는 몰라도 제법 고소한 냄새도 풍겨 왔다. 해산은 밀빛의 술을 머금으며 이 자리에 진해가 있었으면 더 즐거웠으리라고 생각했다. 진해와 마신다면 분명히 이 술이 더 맛있었을 것이라고. 그런 생각을 하며 계속 술을 들이켜려 했다.
* * *
주막 주인은 일각쯤 지나자 조용히 부엌 밖으로 나왔다. 자그마한 오두막이지만 있을 건 다 있었고, 가끔은 많은 이들이 머무를 때가 있어 몸을 숨길 공간도 많았다. 예를 들면 부엌이나 창고 같은 곳.
“…….”
안주를 준비해 온다던 주인은 요리한 것을 들고나오지 않았다. 만일을 대비해 준비해 두긴 했지만 아마 그것이 사용될 일은 없을 터였다.
“커어―”
왜냐면 주인이 내놓은 좁쌀주에는 안주에 넣은 것보다 훨씬 많은 수면제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연 마당은 코 고는 소리로 요란했다. 이리저리 널브러진 사람들 사이를 조심스레 지나다니며 주인은 자신이 가장 먼저 확인하고 싶었던 인물을 찾기 시작했다.
그 인물은 바로,
“……닮았군.”
“그러는 너는 쥐새끼를 닮았고.”
“―읏?!”
해산이었다. 주인이 해산에게 몸을 기울여 얼굴을 확인하는 동안 어느덧 삼랑이 오천협과 함께 주인의 뒤에 서 있었다.
“어, 어떻게……!”
“어떻게긴 뭘 어떻게야 안 마셨으니까 그렇지. 약 탄 술을 먹이려면 끝까지 마시는 걸 보고 들어가, 이 초짜 양반아. 냄새랑 맛은 합격점인데 뒤처리가 어설프네. 저런 얼치기 같은 놈들에겐 한 방이겠지만 말이야.”
삼랑이 엄지로 뒤쪽에 널브러진 산적들을 가리키자 다른 쪽에 있던 미려도 가뿐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해 옥가의 가신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정말로 마셨는지 약간 알딸딸한 표정의 이도 있었지만 이들은 기본적으로 위기 대처에 능한 자들이었다.
“하지만 의외네. 날 보고 놀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니.”
“너보고 놀란 이유야 뻔하지. 네 낯짝이 황후랑 판박이니까. 하지만 우리에게 술을 먹인 이유는 따로 있지. 안 그래?”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인의 앞에 누워 있던 해산이 눈을 떴다. 삼랑은 주인이 부엌에 들어가자마자 해산이 든 술잔을 뺏어 안에 든 것을 바닥에 쏟아 버렸다. 시끌벅적 떠드는 산적들은 미끼로 그냥 내버려 두었지만 이 술에 든 게 뭔지 확신할 수 없는 지금 해산에게 이상한 걸 먹일 수는 없었다.
“주인장.”
“……큿.”
“우리가 구면이던가?”
눈을 뜬 해산이 주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해산의 눈동자에 주인의 얼굴이 담기는 순간 주인의 얼굴은 이때까지 연기했던 순박한 산촌 주민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무참히 일그러졌다. 그 얼굴이 어찌나 참혹하고 비참한지 해산은 그가 자신을 노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차마 뭐라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대관절 이자가 누구기에 자신에게 이리 격렬한 감정을 불태우는지.
“난 대충 누군지 알 것 같긴 한데 확신을 못 하겠네. 본인이 부정하면 허사 아냐?”
“꼭 진짜여야 할 필요는 없어.”
“이야, 정미려 쩌는데? 그러니까 황제 앞에서도 사기를 치지.”
만약 눈앞의 이자가 자신들이 찾던 이라 해도 그가 자신을 이런 식으로 볼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화석정군과 황후가 사이가 나쁘다는 소식을 들은 적도 없을뿐더러, 심지어 자신은 황후의 자식도 아니었다. 성월공과 차기 황위를 다툰 적이 있어서 그렇다 치기에는 화석정군은 속세의 모든 미련을 버리고 출가한 이였다. 권력이나 부에는 관심이 없다는 뜻이었다.
“왜 독을 먹이지 않았지? 독이었다면 굳이 손을 더럽힐 필요도 없이 한 번에 끝났을 텐데.”
하지만 정작 해산의 입에서 튀어 나간 말은 본인의 머릿속과 전혀 다른 말이었다. 어쩌면 본인도 모르게 본인이 바라는 답과 가장 가까이 다가간 질문을 했을지도 모른다.
“무, 무슨 소리신지 쇤네는 전혀 모르겠습니다요. 그저 요새 돈이 궁해서 잠깐 주머니나 털려고 한 것을.”
그리고 주인장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대답하는 대신 비굴하게 웃으며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하지만 널브러진 산적들은 둘째치고 술기운이라고는 한 점도 보이지 않는 삼랑과 오천협, 정미려와 가신들을 제치고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해산을 인질로 삼기에는…… 해산이 너무나 건장해, 도리어 본인이 잡히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내게 닮았다고 했잖은가. 내가 누굴 닮았다는 거지?”
“…….”
“나를 알고 있는 거군. 혹시, 내 아버지들이 누군지 알고 있는 건가?”
그러나 주인은 해산이 말을 잇자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미려와 삼랑을 휙 돌아보더니 다시 해산과 눈을 마주쳤다.
“아, 산골에 살아서 아무것도 모르나 보네. 지금 눈앞에 계신 그분은 황자가 아니라 내 자지 동서 중의 하나인 해산 도련님이거든.”
“나와 해산 형님이면 모를까 넌 아니라고 했을 텐데.”
“시끄러!! 곧 될 거니까 닥치시지!?”
“꿈도 크지.”
자지 동서라는 희한한 단어를 들은 오천협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화, 황자가 아니라고?”
“그래. 나는 이때껏 적통 황자로 살아왔지만……, 사실은 아니라더군. 내 정인이 목숨을 걸고 나를 성 밖으로 보내 주었다.”
“마, 말도 안 돼! 황제가 당신을 그냥 보냈다고!”
“원래라면 나를 쫓아야 당연하겠지만 나를 보낸 정인이 워낙에 재능이 많고 사랑스러운 이라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날 구해 주었지. 당신에겐 미안하지만 난 그를 구하기 위해 화석정군이 필요하다. 안월산 그 사특한 놈이 내 정인을 억지로 범하기 전에 그를 구해야만 해.”
“……누가 누굴 범한다고?”
“안월산이 내 정인에게 억지 혼인을 강요하고 있단 말이다.”
해산의 짤막한 설명을 들은 주인의 동공이 진동했다. 방금 삼랑이 해산을 자지 동서라고 불렀고, 미려는 자신 역시 그렇다고 긍정했다. 그렇다면 해산이 말하는 사랑스러운 정인이라는 이를 이들이 공유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성월공 안월산이 그에게 혼인을 강요하고 있다고?
“어흠.”
보다 못한 오천협이 헛기침을 하며 나섰다.
“귀한 가문의 너그럽고 영준하신 공자님이신지라.”
자식의 바람기를 변호하기 위한 아버지의 필사적인 변호였다.
“분명 진해가 나를 살려 달라고 빌었겠지. 그 아이는 그런 아이다.”
해산은 조금 아련한 시선으로 도성 쪽을 바라보았다. 미려 역시 마찬가지였고, 삼랑은 상처가 쑤시는지 옆구리를 매만졌다. 일단은 진해가 한 몸 희생해서 내보낸 진해의 예쁜이들이었다.
“…….”
하지만 주인은 여전히 자신의 정체를 밝힐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도망칠 생각은 없는지 누가 권하지도 않았는데 자리에 앉아 말없이 생각에 빠지기 시작했다. 해산은 그가 마음을 정할 때까지 기다려 줄 셈이었다.
“……손님이 왔다.”
그러나 오천협이 삼랑에게 작게 속삭이는 말을 들은 순간, 이젠 주인장의 대답을 들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는?”
“마흔가량.”
“제법 많이 보냈네. 황손이 시선 의식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수가 그리 많진 않지? 이젠 거의 차기 황제로 낙점된 거나 다름없으면 더 그렇고.”
“친위대를 덜어 보낸 거라면 목숨의 위험을 부담했다고 봐도 무방하지. 언제 무슨 이유로 암살자를 보낼지 모르니까.”
“그렇다는 건 그 또라이가 무슨 수를 써서든 꼭 죽여 없애고 싶은 이가 여기 있다, 이 말이렷다?”
삼랑은 픽 웃으며 발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산적의 궁둥이를 걷어찼다. 어찌나 호되게 걷어찼는지 퍽 소리가 울려 퍼졌고 산적은 으으, 소리를 내며 비몽사몽 중에 깨어났다. 약이 어지간히 독한지 그러고도 한참을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삼랑은 친히 여럿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그들을 깨웠고, 아군을 증원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서해 옥가의 가신들 역시 물을 먹이는 등 그들이 정신을 차리도록 돕기 시작했다.
“아직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윽고 그들이 하는 양을 보던 주인장이 입을 열었다. 아니, 그의 눈빛은 더 이상 순박한 산촌 주민이 아니었다.
“목숨 부지하려면 협력하는 수밖에 없겠군. 안쪽 약방 가로로 세 번째, 세로로 네 번째 칸에 환으로 된 약이 있는데 그게 각성제일세. 그걸 타서 먹이면 정신이 번쩍 들게야.”
“그 전에 나는 당신에게 꼭 확인해야 하는 게 있소.”
각자가 분주히 움직이는 동안 해산은 마지막으로 눈앞의 남자에게 물었다. 남자는 이제 해산을 피하지 않으려는 듯 그의 눈을 올곧게 바라보았다. 그의 눈 속에는 아직도 가시지 못한 감정의 잔재가 부유하고 있었다. 그는 해산을 보면서도 다른 이를 생각하는 듯했다. 해산을 계속 보고 싶어 하면서도, 해산에게서 도망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와서 더 부정해 봤자 구차해지기만 할 뿐이지. 그래. 내가 바로 한때 화석정군이라 불리던 자일세. 하지만 이젠 더는 그렇게 불리고 싶지 않군. 나를 정군으로 삼아 줬던 이는,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 말일세.”
마지막으로 그는 누군가에 대한 강한 그리움을 담아 자신을 긍정했다. 자신이 화석정군, 추존된 지순 황태공을 따라 증봉된 화석태정군 양지서이며 성월공 안월산의 좌부라고.
그리고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손님들이 들이닥쳤다. 붉은색으로 월 자를 새긴 혈월대와 검은 글자로 월 자를 새긴 군복을 입은 흑월대라 불리는 이들이었고 오천협의 추측대로 마흔 명가량 되었다. 하지만 그 기세만큼은 수백 명을 능가했다.
“그 말을 들어 천만다행이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을 굳이 도울 필요를 못 느꼈을 테니까.”
해산은 자신의 옆으로 다가선 청려와 거의 동시에 소매에 감은 구리 채찍을 꺼내 들었다. 이것을 준 이를 떠올리면 쓰고 싶지 않은 무기였지만 모순되게도 해산의 손에 익은 무기 중 가장 강력한 것이었다. 서해 옥가의 가신 몇이 화석정군의 곁에 호위로 붙는 것을 보며 해산은 이를 악물었다.
진해를 되찾기 위해서였다. 진해만 되찾을 수 있다면 어떤 더러운 수를 쓰든 다 참아 낼 수 있었다.
“한 명도 살려 두지 마라.”
혈월대의 선두 중 누군가가 나지막이 읊조리자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서로가 서로에게 덤벼들었다. 오천협이 삼랑의 앞으로 나서고, 미려가 우아하게 팔을 내뻗는 것과 동시에 해산 역시 그들에게로 거칠게 돌진했다. 곧 비릿한 피 내음이 진동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