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부 죄인 오진해 (10/18)

6부 죄인 오진해

[짤랑짤랑.]

“굽어살피소서! 굽어살피소서!”

황궁의 한적한 곳, 어딘지 모르게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기는 창고 근처에서 요란한 방울 소리가 울려 퍼졌다. 평소에는 감히 황궁에 발걸음조차 할 수 없는 이의 방울 소리였다.

과거에는 무당이 파각사를 겸하고 있기도 해서였다. 파각이 법으로 금해진 지금은 파각이라는 게 뭔지 모르는 무당이 대부분이었지만 고정 관념이란 참으로 무서워서 지금도 웬만해서는 무당을 부르는 일이 없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으으, 제발 황상 귀에는 안 들어가게 비나이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무당은 내관들이 이 층으로 쌓아 올린 상을 앞에 두고 팔짝팔짝 제자리에서 뛰고 있었다. 손을 비비며 절을 올리는 내관 중에는 진해와 막역한 사이인 일홍련의 담당 내관 소연자도 자리하고 있었다.

“흐읍!”

“왜, 왜 그러세요? 강신 도련님?”

“있다!”

“뭐, 뭐가요?”

그냥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소연자는 남들보다 더욱 얼굴이 허예진 채로 손이 닳아지라 무당에게 빌고 있었다. 무당이 반응하자 동료들을 제치고 무당의 말을 일일이 받아 주기까지 하는 것이다.

“원귀. 아주 독~ 한 원귀가 있어!”

“허억, 원귀래!”

“저, 정말 귀신 들린 우물이었던 거야?! 지어낸 이야기 아니고 진짜!?”

“야 이 미친놈아 그럼 내가 생돈을 주고 무당을 부르겠냐? 총관 어르신한테 빌어 가면서?!”

“조용히들 안 해!!”

소연자와 어조원 내관, 그리고 이 근방에서 일하는 내관들이 옥신각신 다투기 시작하자 무당이 다소 근엄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윽발 질렀다. 무당은 궁 밖에서는 사근사근한 태도로 그들을 대하더니 그들에게 돈을 받고 굿판 위에 서자 아주 그들 머리 위에서 춤을 추었다. 검 소지가 허용되었으면 검무를 추었을지도 모른다.

“그래 이 우물! 이 우물이 원인이로구만! 음험하고 사특한 기운이 느껴진다! 이 기운은 양인? 아니, 음인의 것인가! 어허, 어허!”

“치정인가요?”

“신령이시여, 신령이시여!”

“치, 치정 때문에 서로 막?”

소연자가 무당이 내뱉은 실낱같은 가능성에 소심하게 물었으나 무당은 소심자의 말에 답하는 대신 눈을 감고 방울을 흔들었다. 방울을 잘랑잘랑 흔들면서 혼자 중얼거리는 모양새가 제법 그럴싸했다.

“도령께서 시시하다고 하신다! 우리 도령은 큰 도령이시라 이런 시시껄렁한 얘기는 안 좋아하신다!”

“헛, 그럼 어떡하죠?! 옆에 이놈이라도 떨어뜨려서 더 큰 사건으로 만들어야 하나!?”

“이 새끼 완전 또라이 아냐?!”

“어흠! 어흐음!”

“아.”

그러나 그럴싸한 무당에게 빙의한 대~ 단하신 도령은 내관들을 공포에 휩싸이게 만든 이 사건에 별 흥미가 없는 모양이었다. 어찌나 흥미가 없는지 무당에게 시켜 제상에 돈을 더 쌓게 만들었다. 호기심 때문에 따라온 내관이 어이가 없어질 정도였다.

“오신다! 오신다! 도령 오신다!”

어쨌거나 무당이 모시는 강신 도령인지 무엇인지 하는 신령, 혹은 무당은 제상에 은전이 수북하게 쌓이고서야 겨우 무거운 걸음을 뗐다. 겁에 질린 소연자가 진해에게 성의 표시로 받은 은전을 남김없이 털었기에 무당은 귀신 들렸다는 소문이 자자한 우물에 턱 하니 발을 걸치는 대담함까지 보여 주었다.

“강신 도련님이 우물 안에 들어가서 확인해 주시려나 봐!”

“도, 도련님! 힘내세요! 귀신만 없어지면 제가 톡톡히 사례해 드릴게요!”

소연자가 사례 이야기를 꺼내자 아예 우물에 걸쳐진 밧줄을 움켜쥐고 쓱쓱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사람이 바글바글한 황궁에 자리한 우물인지라 사람 하나 내려가는 건 일도 아니었지만 다른 우물과 달리 이 우물은 사람이 오르락내리락하라고 만든 물건이 아니었다. 내관들은 무당의 화려한 깃털 장식이 사라지자 일제히 우르르 우물가로 몰려갔다.

“보여?”

“아니, 안 보이는데?”

“마른 우물이라서 참말 다행이지 뭐냐.”

“올라올 때 쓰레기나 좀 주워 오라고 해야지.”

실제로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는 소연자나 불안한 얼굴이었지 나머지 내관들은 무당을 썩 걱정하는 모양새가 아니었다. 실제로 이 우물을 제외한 다른 우물들은 돌아가며 청소했기 때문이었다.

“으아아악!!!!!”

하지만 그들의 태평함은 우물 안에서 들려오는 끔찍한 비명 소리에 순식간에 깨어지고 말았다. 어찌나 처절하고 겁에 질린 비명이던지 우물 아래를 내려다보던 이들의 눈동자가 화등잔만 하게 변해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사, 살려 줘! 귀신! 진짜 귀신이다!!!”

그리고 내관들이 황급히 아래를 내려다보자 희미하게 비치는 우물 바닥에서 무당이 제 옷자락에 걸려 넘어졌는지 엉덩걸음을 하며 우물 바닥으로 뒷걸음치는 것이 보였다. 무당은 어지간히 겁에 질렸는지 자신이 지금 뭘 하러 이 궁에 들어왔는지도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헉!”

그러나 무당이 우물 벽에 바짝 다가붙고 내관들의 머리가 가리지 않은 공간 사이로 햇빛이 비치는 순간 내관들은 그들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서 도망칠 뻔했다. 너무나 놀라면 비명을 지르지 못하는 경지도 있는 법이었다.

거품을 물며 까무룩 기절하는 무당의 앞으로 뭔가가 천천히 기어 오고 있었다. 둥그런 머리와 굽은 허리가 꿈틀인지 비틀인지 모를 모양새로 아주 천천히 해가 비치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햇빛이 비치는 곳에 도착한 그것은 머리를 들어 허공을 바라보았다. 보통 사람의 것과 달리 혼탁해진 눈동자가 저를 내려다보는 내관들의 것과 맞부딪쳤다.

“자, 잠깐만! 저, 저거 사람 아냐!?”

듬성듬성한 머리칼과 잔뜩 굽어진 허리, 쪼글쪼글한 피부와 탁한 눈동자, 잘 펴지 못하는 다리와 바싹 마른 체구를 가진 그것의 정체는 바로 이 우물에 사는 ‘귀신’이었다. 내관들은 그것이 무당의 앞에서 힘없이 주저앉고 나서야 간신히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 * *

“아니 그래서 지금 나더러 그런 시시한 뒤처리나 맡으라는 거야?”

오진해는 어조원으로 가는 길목에서 어이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근래 오진해는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해국에서 돌아온 후로 진해는 미려방을 정리하랴, 여해루를 관리하랴 눈코 뜰 새 없었다. 진해가 없는 사이 형부와 호부에서 벌어진 신경전도 진해가 나서서 해결해야 했다.

“오 대인~ 그러지 마시고 오 대인이 어떻게 좀 해 주세요~! 오 대인이 아시다시피 저희가 그렇게 시간이 넘치질 않잖아요!”

“그래도 궁 일을 어떻게 나한테 맡기려 그래? 그냥 궁 밖으로 보내 버리면 안 돼?”

“저도 그러고 싶지만 절차라는 게 있어서……. 일단 신원도 확실하지 않구요, 거기다가 그 우물에 그 사람 말고도 시신이 널려 있어서 그거 처리하는 것도 문제예요. 아무래도 전쟁 전에는 다른 용도로 쓰던 우물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거나 말거나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나설 일은 아닌 것 같아. 소연자, 미안. 다른 사람 찾아봐.”

“오 대인~~!”

“아, 지금 내 꼴을 보고도 일을 맡아 달라는 소리가 나와?!”

소연자의 징징거림을 참다못한 진해는 제 오른쪽에 서 있던 소연자 쪽으로 몸을 확 틀어 보였다. 과연 진해는 제 모습을 꼴이라 칭할 정도로 참혹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건강한 색의 뺨 위에 커다란 손자국이 선명하게 도드라졌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것도 붓기가 많이 가신 거였다. 갓 생성된 손자국의 참혹함은 동십사가 저도 모르게 갓 태어난 쌍둥이들의 눈을 가려 버릴 정도로 무참했었다.

“그, 당연히 공짜는 아니죠~! 완전 해결을 바라는 것도 아니구요! 저희는 그냥 이 사람한테 적당히 쥐여 주고 황궁에서 내보내고 싶어요! 가족을 찾아 주면 좋겠지만, 어쨌든 그 우물을 깨끗하게 치워 버리고 싶다구요!”

“흥.”

“흠, 흠! 이 일을 맡아만 주시면 오 대인께서 예전에 궁금해하시던 그것.”

“그것?”

“예, 바로 그것의 전문가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대대로 황궁의 방중술을 가르치셨던 선생께 데려다 드릴게요!”

해국에서 돌아온 이래로 해산과 영 좋지 못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진해는 방중술 소리를 듣자 두 눈이 번쩍 뜨였다. 뺨 한 대로 끝났으니 싸게 먹히긴 했으나 해산이 저를 보면 한숨을 쉬는 바람에 진해의 작지만 작지 않은 진해가 영 풀이 죽어 있던 터였다.

“거기다 황궁에서 밀회로 유명한 장소를 한 시진 동안 비워 드리겠습니다. 주변도 저희가 정리하고요.”

“수락!!”

진해는 해산을 만나자마자 세 발짝 멀리 복도에서 오체투지로 큰절을 하면서 미끄러지던 것을 떠올렸다. 해산은 진해가 저를 보며 환하게 웃는 것도 잠시 납작 엎드리며 죄를 빌자 우려하던 것이 현실이 되었음을 직감했다. 해산의 뒤에 있던 삼랑이 먼저 선수를 치지 않았다면 해산은 손보다 발을 먼저 놀렸을 것이고, 사람 많이 때려 본 삼랑과 달리 진해를 한 방에 사망의 경지에 다다르게 했을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진해는 해산이 씨근덕씨근덕 불끈거리며 간신히 그를 용서해 주는 동안 삼랑에게 갖은 욕설을 들으며 구타를 당했다. 해산 도련님에게 오랜만에 맞은 뺨은 혼이 날아갈 정도였으나 미려를 버리라는 말을 듣지 않고 이 정도로 끝났으니 매우 싸게 먹힌 셈이었다.

그리고 진해는 마침내 해산에게 설복할 기회를 얻었다. 해산과 회복할 기회가 오고 말았다! 해산은 진해와 그 일하는 걸 좋아했으니 진해가 혼이 쏙 빠지게 요리조리 흔들어 대면 다시 예전처럼, 아니 예전만큼은 못해도(양심이 있으면 예전처럼을 바라서는 안 되었다) 진해를 푹 품어 줄 터였다. 거기다 황궁에서 해산 도련님과 좋은 일을 하게 된다는 건 변태인 진해를 여러모로 흥분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진해는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소연자가 내민 손을 힘껏 움켜잡았다. 이후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 줄도 모른 채 아주 천진난만하게.

우물에서 건져 냈다는 ‘귀신’은 애매한 장소에 있었다. 황궁에 함부로 침입했으니 죄인이나, 예전에 실종된 궁인일 수도 있었다. 최악에는 황궁에 잠입한 자객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 귀신의 몰골을 보면 아무도 자객이라는 생각은 안 했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또 알 수 없는 것이다.

“어, 그―”

“뇌옥에 가두기엔 상태가 안 좋아서 말이지요.”

앞서 말한 장소라는 건 바로 어조원이었다.

[뾰롱!]

어조원에서 가장 공간이 많이 남고 시선이 끊이지 않는 장소에 귀신을 가둬 놓았다.

“어차피 일홍련한테는 별 쓸모도 없는 새장이니까 유일청한테 부탁을 해서 방을 합치고 귀신을 여기다 두었지요, 하하…….”

“아니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새장에 가두는 건 좀 아니지 않아?! 저건 내가 해 보고 싶던 거기도 했단 말이야! 이젠 이 장면이 생각나서 다시는 못 해 보겠네!”

“예? 뭘 해 보신다고요?”

“됐어!”

진해는 제 어깨에서 콩콩 뛰며 안부를 전하는 홍련이를 손으로 상대하며 오랫동안 꿈꿔 왔던 환상이 박살 남을 슬퍼했다.

“헤헤, 그리고 총관께서 오 대인이 이 일을 맡아 주신다고 하니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뇌옥이든 어디든 편하신 대로 쓰시라던데요?”

“아이고, 소연자! 나도 사람 새끼야. 머리도 제대로 달려 있고! 자네들도 뇌옥에 두면 안 되겠다고 판단한 사람을 뇌옥에 처박을 정도로 냉혈한으로 보여, 이 내가?”

“아유~ 그건 아니죠!”

놀이가 박살 남에 슬퍼한 것도 잠시. 진해는 뾰롱뾰롱 요란하게 울어 대는 홍련이를 제 손바닥 사이에 가둔 뒤 조심스레 커다란 새장 쪽으로 다가갔다. 우물의 귀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진해가 봐도 쇠약해 보였고, 새장의 창살이 없이 그냥 놔둬도 아무 데도 가지 못할 것 같았다.

“흠.”

진해가 크게 헛기침을 하자 담요 한 장을 덮어쓴 채 짚더미 위에 힘없이 누워 있던 이가 꿈틀거렸다. 진해는 담요가 스르륵 벗겨지며 드러난 머리통에 참담함을 금치 못했다. 깡마른 목덜미 위에 간신히 자리한 머리 위에는 머리칼이 한 줌이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듬성듬성 남아 있었다.

원래 입었던 옷은 넝마 조각이 되어 새로 입힌 침의 위로 척추뼈가 다 비칠 정도로 도드라졌다. 흘러내리는 담요를 끌어 올리려는 손가락은 젓가락이 저럴까 싶을 정도로 여위었다. 발가락도 상황은 마찬가지였고 피부는 오랫동안 햇빛을 받지 못한 것처럼 병적으로 창백했다.

“그― 우선 심문보다 요양을 좀 해야겠는데?”

진해는 홍련이가 제 손바닥 사이에서 뜨뜻하게 찜질을 즐기는 동안 말을 잃었다가 간신히 입 밖으로 말을 뱉었다. 저렇게 마른 사람이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핫, 그럼 한동안 계속 여기 둬야 하나요?!”

“이 매정한 작자 보게? 입 하나 느는 게 뭐가 대수라고 호들갑이야? 뇌옥에 죄수들도 밥은 주잖아!”

“하지만 어조원에는 황상이 드시잖습니까. 굿판을 벌이다 생긴 일이라 보고는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지만…….”

아하. 진해는 보고를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는 말에 소연자가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알 수 있었다. 굿판이라는 말에 더욱 그랬다. 현재 월국의 황제인 회순은 무교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종교에 초탈해 황궁의 불당에는 먼지가 내려앉을 정도라고 했다. 그런 마당에 황궁에서 굿을 벌이다 이상한 걸 건졌다는 말이 돈다면 황제의 얼굴에 진흙을 집어 던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가장의 허락 없이 굿판을 벌였으니 작게는 매타작이요, 많게는 추방이니, 거시기가 없는 내관들에게 추방은 매우 혹독한 처벌이었다.

“그럼 우리 집으로 데려가지 뭐.”

그리고 이 내관들을 통솔하는 이의 얼굴을 떠올린 진해는 아주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진해는 여전히 산공공이라는 내관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 산공공은 해국에서 돌아온 진해를 보자 저도 모르게 눈물을 어룽거릴 정도로 진해의 귀환을 기뻐해 줬었다. 또한 진해는 그에게서 아주 희미하게 남아 있는 향취로 인해 그가 왜 그렇게 자신의 귀환을 기뻐하는지도 눈치챈 후였다.

금목서를 닮은 향기는 양인 오천협의 향이었다. 산공공은 일홍련과 함께 입궁했으며, 오천협 역시 일홍련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아마도 두 사람은 같은 고국 출신일 뿐만 아니라 매우 가까운 사이임에 분명했다.

“저, 정말요?”

“대신 어조원에서도 비용을 대! 그리고 굿 같은 건 나한테 물어보란 말이야, 어딜 그런 사이비를 데려와서 일을 크게 만들어?”

“다, 당연히 그래야죠!”

“오랜만에 빚 장부가 그득~ 해지겠구만!”

[뾰롱~]

귀신, 아니 저 사람의 신원을 밝히기 위해 일단 집에서 요양을 시키기로 결정한 진해는 제 손바닥 사이에서 떡처럼 늘어진 홍련이를 쥔 채 만가헌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소연자는 골칫덩이가 사라진다는 소식에 연신 입가를 벙실거렸다.

내관들의 놀이판이 진해를 열렬히 기다리는 중이었다. 진해가 거드름을 피우며 방 밖으로 나오자 어조원의 내관들이 호들갑을 떨며 진해를 준비된 방으로 모셨다. 우물의 귀신은 잘게 경련하는 손으로 담요를 그러쥔 채 그 모습을 한순간도 빼놓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진해는 이자가 요양이 필요하다는 사실만큼은 정확하게 맞추었으나, 이자가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한다는 것만은 빗나가고 말았다. 빛에 약해져 색이 흐려졌으나 귀신의 눈동자 위에는 보는 사람이 깜짝 놀랄 정도로 영롱하고 예리한 이지(理智)가 흐르고 있었다. 귀신은 진해가 사라진 쪽을 보며 눈을 깜박이다 조용히 담요 아래로 숨어들었다.

* * *

어느새 소문이 났는지 궁인들이 어조원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소문을 찾아 몰려온 그들은 꼭 먹이를 쫓아온 잉어 떼와 닮아 있었다.

“뭔 구경 났어! 다들 저리 안 가!”

정말 귀신이라면 진해도 아무 생각 없이 둘 테지만 진해가 집으로 데려가는 건 사람이었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아주 오랜 세월 동안 황궁의 우물 속에 갇혀 있었던 살아 있는 사람. 그리하여 진해는 작은 짐수레 위에 올라탄 담요를 걷으려는 궁인의 손을 매섭게 쳐 내고는 품 안에서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야, 너! 상환이 늦는데 어떻게 된 거야!”

“헛, 오 대인. 그― 저희가 정확한 상환일을 정했던가요?”

“이런 괘~ 씸한 놈을 보았나! 빚을 졌으면 빨리 갚을 생각을 않고 뭐? 상환일을 정했던가요? 이거 이거 다들 안 되겠구만! 다들 빠져 가지고 말이야! 어! 내가 산공공한테 이걸 들고 가서 한 번에 받아 낼까?! 채권자를 산공공으로 바꿔 봐?! 엉?!”

진해가 품속에 넣고 다니는 궁인들의 빚 장부를 무당 방울 흔들듯이 흔들자 궁인들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진해의 놀이 솜씨는 신기와 같아서 진해는 궁인들에게 져 주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그들 머리 꼭대기에서 돈을 거둬들이고 있었다. 궁인들은 진해가 무작정 이기는 것도 아니라서 사기라고 우길 수도 없었으며, 더욱이 궁 안에서 놀이판을 벌이다 빚을 졌다는 사실을 알릴 수 없어 진해를 볼 때마다 온갖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굽신거렸다.

“떽! 저리 가!”

진해는 어물쩍거리는 궁인들을 쫓아낸 뒤 귀신이 뒤집어쓴 담요를 여며 주었다. 누군가 슬그머니 진해의 손을 피해 담요 자락을 잡자,

[뾰!]

진해를 배웅 나왔던 어조원의 패왕, 아니 어조원의 괴조가 백살호를 굴복시켰던 강력한 발차기로 그의 뺨을 후려쳤다.

“악!”

[뾰롱뾰롱! 뾰롱!]

맹조인 백살호는 정통으로 맞고 기절했지만 궁인은 기절하지 않은 걸 보아 홍련이가 가볍게 경고만 한 듯했다.

“헉, 일홍련의 날개를 맞고도 정신이 있다니, 자네 어조원으로 옮겨 보지 않겠어?”

소연자와 어조원 내관들은 그 내관이 발자국이 남은 뺨을 부여잡고 통증을 호소하거나 말거나 그를 어조원으로 영입하려고 했다. 어조원 제일의 맹조가 진해의 어깨에 앉아 진해 주변에 접근하는 것들을 공격하니 궁인들은 자연히 슬금슬금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빚이야 갚으면 그만이지만 몸뚱이가 잘못되면 되돌릴 수가 없었다.

“이 음탕한 새 같으니. 네가 아무리 그래도 여기서 순결한 내 가슴팍을 까진 않을 거야.”

[뾰. 뾰롱~!]

“오늘은 이 사람을 집으로 데려가야 하니까 다음에 다시 보자고. 그동안 가출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 괜히 가출해서 사고 치지 말고!”

[뾰…….]

그리고 진해는 홍련이가 이리 기특하게 구는 속셈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홍련이가 제 옷 속에 걸고 다니는 고산홍패에게 홀딱 빠져서……, 고산홍패의 주인인 제게 잘 보이려 이러는 것이었다. 진해는 제 말을 알아듣고 기운이 빠진 홍련이의 머리털을 문질러 헝클어뜨린 뒤 가볍게 잡아 담당 내관인 소연자의 손 위에 올려 주었다.

“응?”

그런데 그 모습을 담요를 푹 뒤집어쓴 ‘귀신’이 가만히 보고 있었다. 진해는 오싹한 모습에 슬쩍 소름이 돋았다가 이제부턴 한집에 살며 자주 봐야 함을 상기하고 그에게 애써 웃어 보였다.

“홍패연리익은 처음 보나? 고산의 신조고 한 세대에 한 마리만 보이는 녀석인데 총관인 산공공께서 입궁하실 때 데려오셨다고 해. 고산홍패랑 쌍을 이룬다는데 나도 확실히는 몰라.”

진해가 싱긋 웃으며 이야기를 마치자 귀신이 뒤집어쓴 담요 더미가 천천히 꿈틀거렸다. 진해는 처음엔 그 움직임이 뭘 뜻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곧 그가 자신의 말에 대답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목소리가 안 나오는지 고갯짓으로라도 진해의 말에 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헛, 설마 지금 고개를 젓는 건가?! 그, 고산홍패랑 짝짓는다는 게 거짓말 같다는 거지?”

홍련이가 있었으면 뾰롱거리고 팔짝거릴 이야기를 들으며 귀신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진해는 이것저것 되묻다가 마침내 그가 홍패연리익을 처음 봤냐는 물음을 부정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홍련이를 처음 본 게 아니라니. 그렇다면 홍련이가 입궁하고 나서 거기로 떨어진 건가?”

귀신은 진해의 이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약간의 문답에도 힘이 빠진 듯 거칠게 숨을 몰아쉴 뿐이었다. 확실히 비쩍 말라 쇠약해진 이에게는 고개를 젓는 것도 많은 힘이 들 게 분명했다. 진해는 약간의 안쓰러움을 느끼며 이왕 맡은 일을 제대로 처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걱정하지 마! 내가 누구냐, 어험! 이 몸은 황상의 신임을 받는 영찰어사야! 형부상서 대인도 내게는 함부로 일을 시킬 수 없지, 어찌 보면 이 일도 내가 맡는 게 맞아! 황실과 연이 닿은 일이니까. 그러니까 당신은 날 믿으라구! 내가 반드시 집으로 돌려보내 줄게!”

―그래야 내관들로부터 방중술 선생도 소개받고 으슥한 곳에서 해산 도련님이랑 좋은 일도 할 수 있으니까!

이 일도 좋은 일이요, 저 일도 좋은 일이었다. 진해는 우부 좋고 좌부 좋고, 라고 기세 좋게 외치며 궁문 밖으로 향했다. 귀신의 무게가 어찌나 가볍던지 나중에는 짐수레를 끌던 내관을 돌려보내고 진해가 친히 수레를 끌고 갈 정도였다. 궁문 밖에서 진해를 기다리던 마부가 진해가 끌고 오는 작은 수레를 보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근데 산 사람을 계속 귀신이라 부르긴 뭐한데? 아직 이름은 기억이 안 나는 것 같고. 흐음―”

마부가 작은 수레를 어찌어찌 진해의 수레에 연결하는 걸 보며 진해는 잠시 눈을 감았다. 살아 있는 사람을 계속 귀신이라 부르자니 기분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개나 고양이처럼 아무렇게나 부를 수도 없었다. 진해는 오랜만에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하다 마침내 머릿속에서 한 글자를 끄집어냈다.

“사람 사는 곳으로 돌아왔으니까 회(回)! 당분간 회씨로 부르자!”

“대인, 차라리 환(還)이 좋지 않을까요?”

“회가 더 쓰기 편하잖아. 나중에 조서 꾸미기 귀찮으니까 회로 해. 회로.”

쓰기도 좋고 뜻도 좋은 회. 진해는 귀신이라 불리는 사내에게 잘 돌아왔다는 의미로 회라는 이름을 부여해 주었다. 영감인지 아저씨인지 알 수 없어 회씨라고 임시로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귀신은, 아니 회씨는 그렇게 진해의 집에 입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진해는 집에 돌아와 느긋하게 회씨를 볼 여유를 갖지 못했다. 바쁜 해산과 달리 시간을 제 맘대로 유용할 수 있는 이가 진해를 떡하니 기다리고 있었다. 진해는 기무위사들의 근무 형태에 격렬히 이의를 제기하고 싶었다.

“야.”

“헉, 삼랑아. 하, 하하. 와, 왔으면 안에 들어가 있지, 왜, 바, 바깥에.”

진해가 해국에서 미려와 맺어졌다는 걸 안 이후로 삼랑의 손길이 더욱 매서워졌다. 만약 해산이 진해를 용서하지 않았다면, 아니 적어도 해산이 그 자리에 없었다면 삼랑은 그 자리에서 진해의 옷을 찢어 냈을지도 몰랐다.

“씨발, 뭐야. 왜 말을 더듬는데? 내가 꼽냐? 어? 우스워? 되지도 못할 신고서나 갖고 다니니까 우스워 보이냐?”

“아이~ 말이 또 왜 그렇게 돼~!”

삼랑은 그야말로 충실히 진해와의 약속을 지키고 있었다. 진해가 떠난 뒤로 성월공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조정에서 더욱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혼교를 제외한 모든 활동에 그의 손이 뻗칠 정도였다. 심지어 해산의 우후인 황후에게도 꼬박꼬박 문안 인사를 드리니 친자인 해산이 더욱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해산은 황후의 친자가 아니었지만.

“내가 우리 삼랑이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응? 삼랑아, 내 맘 알지? 내가 좋은 자리만 있으면 당장~”

“이게 그냥, 콱!!”

“꺅!”

“야, 네 뒤를 그렇게 실컷 만지작거려 놓고, 뭐? 좋은 자리만 있으면? 계속 말해 봐, 창놈 새끼야. 어! 계속 말해 보라고!”

“악, 해산 도련님!”

삼랑이 손을 치켜들자 진해는 머리를 감싸 쥐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삼랑이 사람 치는 솜씨는 진해가 패를 놀리는 솜씨와 다름없어 사람을 손상 없이 아프게 치는 법도 알고 있었다. 한마디로 매우 많이 칠 수 있다는 소리였다.

“엉?”

그리고 문가에서 한참 동안 실랑이를 벌이던 삼랑은 문 앞을 빙 돌아 마부 앞에 서고 나서야 진해에게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 마부는 허허 잘 논다라는 눈빛으로 진해와 삼랑의 실랑이를 보고 있었고, 그의 옆에는 못 보던 짐이 한 개 딸려 있었다.

“이건 뭐야?”

작은 수레에 얹혀 있는 것이 사람의 형상임을 확인하자 삼랑은 다가가서 담요를 들쳤다.

“앗, 삼랑아. 그러지 마!”

몇 대 얻어맞은 진해가 후다닥 달려왔으나 삼랑은 이미 담요 아래의 내용물을 실컷 구경한 후였다.

“창놈어사 너.”

돌아본 삼랑의 얼굴은 경멸과 의심으로 얼룩져 있었다.

“이젠 아주 대놓고 측실을 들이냐? 늙은이를 좋아하는 건 알았지만 이런 비쩍 마른 노인네를 수레에 태워 오다니.”

“아니야, 그런 거! 그리고 난 풍만한 사람이 좋거든?!”

“지랄 마, 개새끼야. 정미려 그 새끼 어디에 살점이 붙었냐?”

“아니 여기서 미려 이야기가 또 왜―”

“해원공은 또 어디에 살점이 붙었는데?”

“가슴, 엉덩이, 허벅지.”

“이게 진짜!!”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그 사람은 그런 게 아니고~!”

진해는 자신이 왜 삼랑에게 이런 변명을 해야 하나 알 수 없었으나 삼랑의 신고서에 써진 제 이름 두 글자를 떠올리면 삼랑에게 감히 찍소리도 할 수 없었다. 계약 때문이라고는 하나 두 글자 다 자신의 의지로 적어 놓은 것이다. 애초에 혼인을 거래 조건으로 삼은 이상 다른 사람들에게 개자식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었다.

“저 사람은 진짜 억울해! 연고도 없고 신원도 불명이라서 그래서 당분간 우리 집에서 봐 주기로 한 거란 말이야!”

진해는 삼랑에게 멱살이 붙잡혀 이리저리 흔들린 후에야 간신히 그의 손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삼랑은 진해를 마구 흔들어 댄 후에도 표정이 영 좋지 못했다.

사실은 삼랑도 진해가 저런 쇠약한 환자와 관계할 정도로 미친놈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제가 제 양인 삼으려는 놈이 같은 음인도 모자라서 다른 양인과, 그것도 어려서부터 철천지원수처럼 지내던 놈과 잔 사실을 안 이상 삼랑은 진해에게 도저히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었다. 차라리 진해를 포기할 수 있다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하지만 여기서 또 포기하자니 정미려 그놈한테만 좋은 일이 될 것 같았다. 해원공 그 머저리는 황족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천하의 쓸개 빠진 것인지 진해가 제게 돌아온다면 어느 정도는 눈감아 줄 모양인 듯했다. 그러나 삼랑은 달랐는데 삼랑은 해원공처럼 진해가 돌아올 것이란 확신도 없었고, 그처럼 맺어지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정미려처럼 경국지색이거나 진해에게 온전히 사랑받는 것도 아니었다. 삼랑에겐 가진 패가 아무것도 없었다. 완성되지 못한 혼인 신고서를 쥐고 있지만 그것도 진해가 다른 사람과 결혼해 버리면 무용지물이 되는 물건 이었다.

“휴, 옷 다 구겨졌네. 삼랑이 넌 오늘 뭐 먹고 싶어? 회씨도 먹일 겸 오랜만에 죽이나 먹어 볼까 하는데. 전병(煎餠)이랑 먹으면 맛있잖아.”

초조했다. 제 마음이 제 뜻대로 되지 않아 초조했다. 이놈이 쓸데없이 귀여워서 짜증이 났다.

“에이, 씨발!”

“시, 싫으면 그냥 고기 먹을래?”

“네가 만들 것도 아니면서 귀찮게 뭘 또 만들어! 나도 죽!”

“그렇지? 죽이 좋지? 소화도 잘되고. 자, 회씨. 조심해서 일어나. 많이 놀랐지? 삼랑이가 입이 험해서, 손도 좀 험하지만, 아무튼 그렇게 나쁜 애는 아니야. 평소에는 나한테 얼마나 잘해 준다구.”

회씨는 담요 속에서도 진해의 말에 무척 의심스러운 눈빛이었다. 진해는 땅바닥에 떨어진 체면에 가슴이 아팠으나 상대는 삼랑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삼랑이는 진해와 이래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오히려 자상하게 대해 주는 삼랑이가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목욕은 어느 정도 기운을 차리면 하기로 해. 혹시 먹고 싶은 죽이 있어? 일단은 쌀죽을 준비하려는데 옥수수죽을 더 좋아하는 사람도 있잖아. 사실 난 옥수수죽이 더 좋아. 어릴 때는 지겨웠는데 지금은 옥수수가 더 맛있는 거 같아서.”

“야이씨, 해 다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냐? 넌 왜 하인 놈들 다 두고 네가 부축하고 지랄이야? 이 집 하인 새끼들은 다 뒈졌어!?”

하지만 삼랑은 또 그런 면이 매력이었다. 입은 험하지만, 물론 손도 험하지만, 진해에게만은 살짝 틈을 보여 주는 그 면이 참을 수 없이 귀여웠다.

어릴 적에도 진해가 몸을 씻기면 얼굴에 튄 물을 은근슬쩍 닦아 주던 것이 삼랑이였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는데 다른 사람 같으면 개지랄 말라고 거품 물 일들을 삼랑은 고작 완성되지 못한 혼인 신고서 따위를 조건으로 해 주었다.

해산과는 다르지만, 미려와는 다르지만, 진해는 삼랑이 좋았다. 해산을 만나기 전까지는 진해를 가장 많이 독점하던 음인이기도 했다. 다들 삼랑이한테 죽기 싫어 진해를 피한 것이었지만, 진해는 삼랑의 흰 피부와 옅은 색 체모가 무척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뾰족한 성격에 어울리지 않는 흠 하나 없는 피부 위에 화려하게 피어난 문신은 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다.

“근데 자고 갈 건 아니지?”

“…….”

“사, 삼랑아~?”

하지만 삼랑을 위해서도 삼랑과는 조금씩 거리를 두는 게 맞는 일이었다. 진해는 이미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었고 몸과 마음을 주고받는 이도 있었다. 심지어는 미려와도 맺어지지 않았는가. 반쯤 잡힌 손을 놓으려니 어마어마하게 미련이 남았지만 진해는 미련이란 놈의 뺨을 후려치며 마음을 다잡았다.

‘좋은 놈은 못 되더라도 개새끼는 되면 안 되지!’

하늘에 계신 우부도 진해가 개새끼가 된다면 몹시 슬퍼할 것이 분명했다. 거기다 진해는 고강한 고산국 무인의 자식이었다. 굉장한 무인일 좌부도 진해가 개새끼가 된다면 몹시 안타까워할 터였다.

“하~, 아버지들! 저를 왜 이리 잘생기게 낳아 주셨나요!”

이것은 모두 자신이 잘생겨서 생긴 문제이다. 진해는 따끔거리는 양심을 부여잡으며 그리 결정 내렸다. 자신이 미려만은 못하지만 그래도 빼어난 미남인지라 음인들의 마음에 그만 불을 질러 버린 것이다! 어릴 때부터 봐 온 삼랑이까지도!

“뭔 개소리야? 도성 미남 다 뒈지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안 움직이냐?”

“응…….”

그러나 아주 약간 치솟았던 오만함은 삼랑의 경멸하는 눈빛으로 인해 사정없이 꺾였다. 진해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삼랑이 저 녀석이 자신과 비슷한 취향을 가졌다면 근방 놀이판에서 인기가 제일 좋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변태적인 놀이판에서.

* * *

집사와 상의해서 진해는 창고였던 자신의 옆방을 비우고 회씨를 그곳에 두기로 했다. 삼랑은 집사가 진해 옆방의 짐을 치우는 것을 보며 눈매가 세모꼴로 찢어졌다. 진해는 미려와 삼랑과 함께 살 때 그 짐은 업무에 중요한 것이라 치울 수가 없다고 말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옆방이 빈다고 그곳에 쳐들어갈 수도 없었다. 해원공의 경호 업무를 황아무가 가져가더라도 최근 맹렬히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성월공 탓에 해원공 휘하의 기무위사들은 몸이 두 개가 있어도 모자랄 정도로 바빴다.

실은 이미 삼랑 휘하의 기무위사 중 몇이 숨이 끊어진 채 발견되었었다. 그것도 진해의 집 근처를 감시하고 있던 놈들만. 웬만하면 아직 몸이 다 회복되지 않은 동십사에게 가고 싶지 않았지만 진해의 일만큼은 그냥 넘길 수 없었다. 해원공에게 보고한다면 숨김없는 성격인 해원공은 아예 진해를 제집으로 들이려 할 테고 그것이 오히려 성월공을 자극할 수도 있었다.

동십사는 눈썹은 자신을, 이목구비는 아심을 닮은 쌍둥이들이 자는 모습을 바라보며 심각하게 말했었다. 더는 뺄 인력이 없으니 차라리 진해를 다른 곳으로 빼돌리는 것이 어떻겠냐고, 마침 진해가 안전하게 지낼 곳이 있지 않냐고.

삼랑은 그게 뭔 헛소리냐고 대들었으나 일단 삼랑 자신이 더는 진해의 곁을 지킬 수가 없었다. 사실 진해의 곁에서 신분을 노출하는 것도 삼가야 했다. 그렇다면 용감하다 못해 과감한 동십사의 계획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그곳이라면 암살은 꿈에도 못 꿀 터였다.

* * *

“다녀올게. 오늘 늦게 아니면 내일 새벽에 올 거야. 문 열어 둘 사람이랑 관복만 좀 준비해 줘.”

“아이고, 주인어른! 어찌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마침 여해루에서 들른 여해루 총관과 오 어사 댁의 집사가 나란히 진해를 배웅했다. 진해는 삼랑이 잠깐 진해의 방에서 눈을 붙이는 동안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고 수레에 올라탔다.

“백 날이고 천 날이고 기다리겠습니다. 그러니 무사히 다녀오십시오.”

“해국에 갈 때도 그렇게 비장하게는 말 안 했던 거 같은데. 어쨌든 회씨한테 신경을 써 줘. 자기 이름도 기억 못 하는 사람이라 잃어버리면 끝이니까 방에 있는지 항상 확인해 주고.”

“예.”

“아, 청려는 좀 어때?”

집의 집사와 이야기를 마친 진해는 여해루의 총관에게 물었다.

“아주, 아주 잘 지내십니다. 처음에는 좀 수줍어하시나 싶더니 지금은 여해루를 꽉 쥐고 계십니다. 루주 어르신과는 다른 거친 멋이 있으신 분이지요. 이제 기강 걱정은 안 해도 될 듯싶습니다.”

“그래?”

진해는 월국에 다시 입국할 때 강절곤과 청려, 그리고 다른 한 사람과 함께 입국했다. 미려는 얼굴이 알려져 있고 또 진해가 보고를 하면 자연히 황제를 기만한 죄인이 되므로 월국에 함께 들어올 수 없었다. 진해는 현재 루주가 없는 여해루를 청려에게 맡겨 놓았다.

청려는 처음에는 조신한 해국의 음인이 어찌 남들 앞에서 음악을 팔겠느냐 거절했지만 성격이 난폭한 기생 몇이 시비를 걸자 제 성질 못 참고 폭발한 모양이었다. 그 무거운 칠현금을 들어 올려 단번에 명치를 찍고, 반쯤 기절한 이를 줄에 묶어 삼 층 계단 아래 대롱대롱 달아 놓았던 것이다. 같은 꼴이 되기 싫은 기생들이 청려의 말에 고분고분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조관림도 행패는 더 안 부리고?”

“그분도 앞길 생각하시겠지요. 가끔 와서 청려 님의 금 연주나 듣고 돌아가십니다. 술이나 좀 하시고요.”

“그럼 다행이지. 뭐…….”

미려를 끔찍이 짝사랑했던 학사 관리인 조관림은 처음에는 미려가 사라지자 충격에 빠졌다가, 미려와 닮은 구석이 있는 청려가 돌아왔다는 소리에 여해루에서 미려를 내놓으라 행패를 부렸지만 이제는 현실을 인정하는 모양이었다. 자신이 사랑했던 미려라는 양인은 옥정려가 월국에 드나들기 위해 만들어 낸 껍데기라는 것을. 자신은 그 껍데기에 반해 있었음을.

“불쌍한 양반……. 좋은 양인 있으면 소개해 줘야지…….”

진해도 미려가 서해 옥가의 자제인 줄은 몰랐기에 일이 이리된 것이었다. 만약 미려가 해국에 생부가 있는 줄 알았다면 만일을 대비해서라도 절대 월국 사람과는 혼인시키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거나, 지금의 진해에겐 지금의 진해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진해는 회씨를 거듭 부탁하며 수레를 출발시켰다. 진해가 가는 곳은 도성에서도 내로라하는 명문가들만이 자리한 곳이었다. 돈만 있어서는 이곳에 집을 지을 수 없었다. 최소한 오 대가 벼슬을 하거나 이름을 날려야 간신히 얼굴이나 내밀 수 있는 곳, 근방에 동십사의 본가가 있기도 한 곳, 바로 그곳에 진해가 가는 중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오 대인.”

진해가 도착한 곳은 그곳에 사는 명문 중에서도 이름 높은 가문의 저택이었다. 한때는 상을 뜻하는 흰 천들이 널려 있던 저택이었으나 진해가 드나들기 시작한 후로는 그것을 싹 치워 버린 후였다.

“아니, 왜 또 다들 이렇게 나와 있어? 난 그냥 알아서 들어가면 되는데.”

“어찌, 어찌 그리한단 말입니까!”

“헛…….”

“자, 우선 손부터 닦으시지요. 어디 다른 불편하신 곳은 없으신지요?”

“어, 음…….”

진해가 도착한 곳은 바로 강절곤을 비롯한 장강성 성주들의 도성 별장이었다. 장강성 성주들은 맡은 관직이 없을 때는 장강성의 본가에서, 강절곤처럼 중책을 맡을 때는 도성의 별장에서 살았다. 말이 별장이지 규모는 본가 못지않았지만.

‘와, 올 때마다 너무 부담스럽단 말이야!’

지금은 창명후 저택이라 불리는 이 저택에 발을 들일 때마다 진해는 부담스러워서 등에 식은땀이 다 났다. 이 집 하인들은 진해가 온다는 전갈을 받으면 하던 일을 팽개치고 집사부터 부엌 할아범까지 모두 일렬로 서서 진해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절곤 혼자 살 때부터 수를 많이 줄인지라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장강성 출신이며, 대를 이어 명문 강씨를 위해 일한 이들의 어깨엔 자부심과 긍지가 그득했다. 그들은 진해를 보며 자상하게 웃기도 했고 어떤 때에는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한 번은 다 늙은 마부가 진해가 내리는 걸 돕는답시고 수레 앞에서 엎드리고 앉아 진해를 기겁하게 하기도 했다.

“해아 공자도 나만큼 대접을 받나?”

진해가 농을 던지자 진해의 손을 닦아 주던 집사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집사는 싱긋 웃음 지으며 진해의 말에 답해 주었다.

“해아 도련님을 모셔 와 주신 은인이신데 더욱 대접해야지요.”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을 했는걸.”

“자, 어서 드시지요. 오늘도 주인어른과 도련…… 님께서 목이 빠지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응, 그러지.”

놀랍게도 진해는 이 집에서 후사인 강해아를 해국에서 데려온 은인으로 통하고 있었다. 강절곤을 포함하여. 그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이었다. 해국에서 강백서는 물론이고 강해아도 발견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진해는 강해아를 데려왔을까.

“오. 오 소협.”

그것의 진상은 아주 간단했다. 진해는 강해아를 데려오지 못했다. 하지만 강해아라고 자칭할 수 있는 누군가를 데려왔다. 강해아를 입증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아군의 도움을 받아서 말이다.

“나 없는 새 사고 친 건 아니지, 제갈 형?”

진해가 데려온 강해아는 본명을 제갈군무라고 했다.

“사고 친 건 아니지만 곧 칠 것 같기도 하네. 변용술로 바꾼 얼굴이 그리 편한 건 아니라서. 물론 나 같은 절정고수야 잘 때도 얼굴을 고정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 같으면 진작 들켰을걸?”

“이 건은 정말 제갈 형한테 감사하고 있어. 만약 제갈 형이 동의해 주지 않았다면 난 지금처럼 고개를 들고 다니진 못했겠지.”

“별말을 다 하네. 내가 아들을 위해 못 해 줄 게 뭐가 있겠어? 월국에서 날 모신다는 귀여운 아들을 위해서 말이야, 하하!”

사실 진해는 월국의 국경에서 심히 망설였었다. 아무것도 없는 빈손으로 돌아가자니 황상의 분노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사실대로 고하면 죄는 없어지겠지만 그렇게 된다면 강백서의 자식을 자처했던 미려의 죄가 더욱 무거워지고, 또한 강백서의 서신을 들고 있던 옥길합도 자연히 월국의 의심을 받게 되었다. 설마 저자가 강백서와 강해아를 헤친 것이 아니냐는.

그것 때문에 진해는 감히 월국에 들어갈 수 없었다. 미려가 쫓긴다는 생각을 하니 속이 울렁거리고 얼굴이 창백해지며 식은땀이 줄줄 흐를 지경이었다. 미려가 단순히 가출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불안감이었다.

그리고 그런 진해를 보고 있던 누군가가 진해에게 제안했다. 자신이 증인이 될 테니 이 중에 나이가 맞는 청년에게 강해아를 연기시키자고. 자신이 증언할 테니 황상에게 강해아를 찾았다고 보고하라고. 이 창명후 강절곤이 강해아의 신분을 증명할 테니 너는 아무 걱정 없이 입국하라고.

그 결과로 완성된 것이 바로 강해아(가짜)였다. 청려는 변장시키기 전에 음인이라 안 되었고, 문지기 형제들은 알아보는 이가 있을 수 있었다. 미려는…… 얼굴이 아까웠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발탁된 것이 제갈군무였다. 제갈군무는 강절곤과 몇 마디를 속닥거리더니 어깨를 으쓱거리며 강절곤의 제안을 수락했다. 대사형을 만나기 전까지 공짜로 먹고 잘 곳이 생겼으니 이 정도 노동은 하겠다는 말과 함께였다.

“그리고 다른 사람한테 안 맡기고 내가 하길 잘했어. 월국 황실 놈들의 얼굴을 보자니…….”

“헉, 말조심해!”

“왜 이래, 나 제갈군무야. 고산패자야. 이 세상 누구도 내가 다른 누구를 까는 걸 방해할 수 없어.”

“고산패자 이전에 우리 사람의 예의를 지켜 보자고, 형.”

“참 나, 우리 오 소협은 담이 너무 작다니까. 어쨌거나, 날 보는 얼굴들이 장난이 아니라, 하하하. 하마터면 환영받지 못한다고 착각할 뻔했다니까.”

확실히 청려가 아니라 제갈군무에게 맡기길 잘한 듯했다. 진해는 변용술로 훨씬 어려 보이게 변한 제갈군무를 대전에 데려갔을 때를 생각하고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장강성의 후계자, 창명후의 유일하게 남은 자손, 고산국과 월국의 화친의 상징, 구국 영웅의 자식. 강해아에게 달린 꼬리표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그냥 장강성의 후사라 해도 관심이 쏠릴 텐데 월국의 구한 영웅 오천협의 유일무이한 핏줄이라는 점도 강해아를 돋보이게 했다.

“휴, 나도 그때만 생각하면 가슴이 철렁한다니까.”

강해아가 들어선 순간 강해아에게 쏠리던 시선과 그 시선에 담긴 감정들을 생각하면 진해는 지금도 가슴이 꽉 조일 정도였다. 특히 강해아를 바라보는 황제의 시선은 면류관 너머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롭고 예리하기 그지없어서 진해는 하마터면 벌써 일이 그르친 줄 알았었다.

그러나 그 모든 시선을 물리칠 이가 이번만큼은 진해의 편이 되어 주었다. 장강성의 성주이자 구국의 영웅, 창명후로 봉해진 이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대전을 훑었던 것이다. 혈육에 대한 창명후의 애정과 집착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라서 그와 눈을 마주친 이들은 목에 칼날이 들이대진 것처럼 어깨를 움찔거리며 눈을 돌렸다. 창명후는 황제와 눈이 마주쳤을 때는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있었다. 진해가 감탄할 정도로 감쪽같은 연기였다.

“다른 연락은 없지? 성월공은 별말 없고?”

“무슨 말을 하겠어? 창명후가 두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지켜보고 있는데. 이 집 사람들도 보통이 아닌 게 내가 할 말이 없어서 기침 몇 번 하니까 아주 하늘이 무너지라 호들갑을 떨면서 날 방에 처넣더라고. 예전 안방마님이 생각난다나 뭐라나. 주치의는 또 뭐 하는 인간이야? 나 멀쩡한 거 알면서 뜸을 뜨지 않나.”

“음, 우리 집 사람들도 언젠가 이 집 사람들처럼 돼야 할 텐데.”

다행히 강해아에 대한 문제는 강절곤이 알아서 쳐 내는 모양이었다. 장강성의 유일한 후사이고, 이미 면죄된 죄인이라 황제도 함부로 불러들일 수 없었다. 거기다 황제의 명으로 어린아이를 하옥하려다 우부와 함께 실종된 터라 강해아의 생존 문제는 황제의 인성과도 직결되어 있었다.

강해아에게 더 문제가 생기면, 그러다가 창명후 강절곤에게 문제가 생기면, 장강성의 대가 끊어지면 황제는 멀쩡한 명문의 대를 끊는 셈이 되었다. 황제 안회순을 옥좌에 올린 충신을 배반하는 셈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현재 안회순을 모시는 신하들의 마음에도 의혹이 일 터이고, 지금 당장은 몰라도 훗날 월국의 다른 황제들에게도 그 영향이 갈 수 있었다.

“오오, 왔는가!”

진해가 제갈군무와 쑥덕거리고 있는 사이 강절곤이 바깥에 다녀왔는지 외출복 차림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강절곤의 뒤에서 집사가 싱글벙글 웃으며 뭔가를 받쳐 들었다. 강절곤은 해국에 가기 전에는 진해와 아웅다웅 자웅을 겨루었으면서(일방적으로 진해가 열세였지만) 해국에서 생사를 함께한 후부터는 진해를 엄청나게 총애했다. 제갈군무를 강해아로 변장시키는 대신 일주일에 세 번은 강가 저택에서 머물라는 조건을 건 것도 강절곤 본인이었다.

“식사는 하였는가? 못 본 새 뺨이 핼쑥해졌어!”

“아니 영감님은 하루를 일 년 같이 사시나 그저께 봤는데 어떻게 뺨이 핼쑥해져?”

“아닐세, 이 손 거칠어진 거 보게!”

“난 어릴 때부터 궂은일을 해서 원래 거칠 거든요?”

“입술은 또 왜 이러는가!”

“지금 나한테 시비 거는 거야, 뭐야? 내 입술이 뭐 어때서!”

처음에는 강해아, 제갈군무와 말을 맞추라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이 영감탱이가 자신을 곁에 두고 시비를 털려는 모양이었다. 진해는 혀를 내어 입술을 핥아 살짝 튼 자국을 없애면서 이 영감에게 어떻게 해야 한 방 먹일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했다. 솔직히 성월공의 측근인 창명후와 가까이 지내는 것도 좀 꺼림칙했고.

“나리, 그러지 말고 얼른 이것부터 입어 보시게 하셔야죠.”

“어이구, 그렇지. 내 정신 좀 보게.”

진해와 강절곤이 아웅다웅 다투는 모습을 보던 집사가 여전히 싱글거리는 얼굴로 들고 있던 것을 두 사람 사이에 내밀었다. 그런 집사의 뒤로 집사와 마찬가지로 싱글거리는 노인 양반 두 사람이 나타났다. 강가에서 진해를 시중드는 전담 하인들이었다.

“오늘따라 옷을 왜 그리 춥게 입었어. 자, 그걸 벗고 이걸로 갈아입게.”

“엥? 내 옷이 뭐 어때서!? 이거 나름 먹어 주는 상회에서 선물 받은 거거든?!”

“어허, 어서 벗어 보래두!”

“악, 사람 살려! 제갈 형, 뭘 보고 있는 거야?! 지금 내가 겁탈당할 위기에 처해 있는데 그냥 보고만 있어?!”

“나도 손님인데 신경 좀 써 주면 안 되나?”

“필요한 게 있으신지요.”

“출출한데 다과 좀.”

“예.”

“아니, 구해 달라니까 뭔 다과를 처먹고 있어!?”

제갈군무는 진해가 싱글싱글 웃는 노인 양반들에게 포위당한 채 비명을 지르거나 말거나 다른 하인이 가져다주는 다과를 먹으며 한가롭게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진해는 하나같이 자상하게 웃는 노인들의 무자비한 탈의 공격에 그대로 옷이 벗겨지고 말았다. 힘으로 밀칠 수도 있지만 창명후 강절곤도 끝내주는 경로사상 탓에 치지 못한 진해였다. 그런 마당에 강절곤보다 훨씬 허약해 보이는 노인네들을 친다는 건 그야말로 어불성설.

“씨, 두고 봐! 내 나중에 우리 해산 도련님한테 다 일러바칠 테니까! 그럼 창명후 영감은 당장 감방에 갈걸!”

“허허, 그래, 그래. 어디 작지는 않느냐?”

“딱 맞습니다, 주인 나리. 기장만 줄였는데 품이 딱 맞네요. 안방마님께서는 크게 입으셨는데 어사 대인께는 딱 맞습니다요.”

노인들은 진해가 씩씩대는 걸 미소로 무시하면서 진해의 머리까지 다 풀어 내렸다. 어떻게 빗는 건지 머리칼이 한 올도 당기지 않게 술술 빗어 내리더니 준비해 온 백옥 비녀로 곱게 틀어 주기까지 했다. 은회색의 겉옷과 무척 잘 어울리는 빛깔이었다. 허리띠에 늘어뜨린 패옥이며 산호 장식 등 무엇 하나 조화롭지 않은 게 없었다.

“호오. 이러니까 정말 똑 닮았는데?”

제갈군무는 노인 양반들이 떨어져 나간 진해를 보며 살짝 감탄하는 눈치였다.

“그래……, 이리 보니 내 그간 등잔 밑을 헤매고 있었음을 알겠다.”

못마땅한 얼굴로 옷을 탁탁 터는 진해를 강절곤은 회한과 상념에 젖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진해가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민 채 앞을 바라보자 집사가 더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틀었다. 과거 이 집의 안주인이었던 수강건을 시중들었던 하인들 역시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자, 잘 어울리십니다! 참말로 잘, 어울리십니다.”

“응? 집사 할아범은 왜 툭하면 울고 그래? 저 영감님이 안 보이는 데서 혼을 내나? 그럼 우리 집으로 와!”

“아니, 아닙니다. 도련님이 돌아오셔서, 너무 기뻐서…….”

“아…….”

한껏 못마땅한 표정을 짓던 진해는 도련님 이야기가 나오자 양심이 찔렸는지 어깨를 움츠렸다. 이 집 사람들이 이렇게 기뻐하는데 진해는 가짜 강해아를 데리고 온 것이다.

“그, 이, 이 옷 나한테 잘 어울리는 거 같은데, 나, 날 주나~?”

그리하여 진해는 집사 및 울먹이는 하인들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옛날에 수강건이 입던 비단옷을 입고 한 바퀴 빙 돌아보았다. 사치를 하지 않는 강절곤이었지만 수강건에게만은 결코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가 언제 곁을 떠날지 모를 정도로 병약했던 탓에.

“암! 주고말고! 그것 말고도 마음에 드는 게 있다면 얼마든지 말하게! 내 뭐든 다 줄 테니! 뭐든!”

“그러믄요. 도, 아니 은인인 오 대인께서 원하시는데 뭘 준비 못 하겠습니까.”

“뭐든 시켜만 주십시오. 이놈 남은 목숨을 다 바쳐서라도!”

“이놈도 쓸 데가 있다면 써 주십시오!”

“……으, 으응.”

하지만 강절곤이나 기타 등등의 속을 모르는 진해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부담스럽기만 했다. 그나마 제 편을 들어 줄 제갈군무는 강절곤이 이럴 때마다 웃으면서 구경만 할 뿐 한 번도 도와주지 않았고, 이 집의 하인들은 자신에게 뭘 못 해 줘서 안달이었다. 심지어 변소까지 따라오려고 해서 진해가 비명을 지르기 일쑤였다. 마치 자신을 다섯 살배기 어린아이처럼 대하는 것이다.

‘부담스러워! 이 집 너무 부담스럽다고! 차라리 예전처럼 물어뜯고 싸우는 게 낫겠어!’

진해는 오늘도 감히 값으로 매기지 못할 귀한 것들을 주렁주렁 매단 채 등줄기에 식은땀을 흘렸다. 얼른 강해아를 고산국으로 유학 보내든지 장강성으로 보내든지 해서 이 집에 올 이유를 없애야만 했다!

“그래, 말 나온 김에 오늘 보고를 열어 보세. 건아가 쓰던 건 그대로 있겠지?”

“예, 계절마다 손질해서 아직 새것 같습니다.”

그러나 부담스러운 마음도 잠시, 진해는 제 몸에 착 달라붙은 비단옷을 쓰다듬으며 물건은 죄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강절곤의 부군이 쓰던 물건이면 오래되어도 한참 오래된 물건일 텐데도 아직까지 번쩍번쩍 광이 났다.

적당한 두께며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바느질, 생생히 살아 움직일 것 같은 자수들이 진해의 마음을 확 끌어당겼다. 진해가 선물 받은 것들도 나름 고급이었는데 그것을 몽땅 끌어 놔도 이 옷 한 장에 못 미칠 것 같았다.

“어험, 그래도 이왕 왔는데 창명후 댁 보고는 구경을 해야, 겠지?”

진해는 염치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주는 걸 거절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강절곤이 왜 이런 걸 퍼 주는지 의심스러웠지만 일단 물건을 받아야 그의 의도도 알 수 있었다. 실은 다 핑계고, 귀엽고 예쁘고 반짝이는 걸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하여 진해는 오늘도 강절곤 외 늙은 하인들과 의기투합하여 집안의 보물들을 보고에서 끄집어냈다. 진해가 잘 싸여 있던 옷들을 이것저것 걸쳐 볼 때마다 사람들 사이에서 탄성과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캬, 역시 좌부랑 우부가 날 잘생기게 낳은 게 틀림없어! 그렇지 않으면 이 생면부지의 노인들이 내게 홀딱 빠질 리가 없잖아!’

진해는 조금 전까지 부담스럽다고 여겼던 마음을 홀랑 던져 버리고 오늘도 창명후 저택에서 잘 입고, 잘 먹고, 잘 놀았다. 창명후가 후원에서 진해와 독대할 때까지는 진해는 그날도 그렇게 무사히 지나가는 줄 알았다.

* * *

강절곤은 나이가 나이인지 진해를 앞에 두면 진해와 무엇 때문에 만나는지 자꾸 잊어버리는 것 같았다. 진해는 그 때문에 강절곤을 만날 때마다 자신들이 만나는 목적을 상기시켜 줘야만 했다.

“그런 것보다.”

하지만 오늘의 강절곤은 진해에게 뭔가 다른 할 말이 있는 듯했다. 진해는 후원의 정자에 앉아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해원공과 정리할 생각은 없는가?”

“이 영감이 정말! 난 이미 해산 도련님과 갈 데까지 갔다고!”

“자식은 없잖은가.”

“그거야 결착을 못……, 안 했으니까…….”

“긴말할 것 없고, 끝내게. 자네도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해원공이 장차 어찌 될지를.”

진해는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사실 진해는 강절곤이 자신과 공유하고 있는 다른 사실 때문에라도 그가 제법 부담스러웠다. 강절곤은 진해와 미려가 한 대화를 알고 있었다. 다름 아닌 해원공의 출생에 대한 이야기를.

당분간 근방을 돌기로 결정한 미려와 헤어지기 전, 진해는 마침내 속에 담고 있던 물음을 물었다. 사실 미려가 아니면 답해 줄 사람이 없는 물음이기도 했다. 황후는 대답하지 않을 가능성이 컸으니까.

‘맞아.’

그리고 미려는 진해의 물음에 긍정했다.

‘내가 계수나무에 열린 옥열매야. 현 황후 사마계가 내 우부야. 그리고 우부는 내가 태어난 사실을 숨겼지.’

‘미려야, 그럼 해산 도련님은, 해원공은 누구인 거야?’

솔직히 그 얼굴로 황후의 자식이 아닐 수는 없다고 생각한 터라 진해의 충격은 크지 않았다. 다만 진해가 궁금했던 것은―

‘미안해, 형. 나도 그것까지는 몰라. 아버지는 백서 님의 서신을 받기 전까진 내가 태어난 줄도 모르고 있었어.’

‘―아이를 대준 게 옥 가주가 아니라는 말이구나.’

‘응. 뭔가 짐작하는 게 있으신 것 같지만 이야기해 주시지는 않았어. 아버지는 확실하지 않은 건 입 밖에 내지 않아.’

‘잠깐만, 이런 망할, 그럼 진짜로 상 왕자랑 청려를 혼인시킬 생각도 했었다는 거야?!’

강절곤이 듣지 않았으면 좋을 문답이었지만 강절곤은 이미 일행이었고 따돌린다고 따돌려지지도 않는 인물이었다. 진해는 강해아의 정체와 미려의 출생의 비밀, 해산의 출생의 비밀까지 강절곤에게 잡힌 셈이 되어 속이 무척 불편했다. 강절곤이 황상에게 한마디만 나불거리면 진해는 당장 목이 잘릴 터였다.

“상관없어. 난 해산 도련님이 좋아! 황자마마가 아니면 진작에 혼인했다고! 혼인해서 손에 물 한 방울도 안 묻히게 내 집에 꼭꼭 숨겨 뒀을 거라고!”

“어허, 고집부리지 말고 헤어지라니까! 내가 입 다물고 있다고 이 비밀이 언제까지 갈 것 같아!”

“그, 그럼 해산 도련님의 친아버지들을 찾을 때까지만이라도!”

“쯧쯔, 대체 그 덩치의 어디가 좋단 말이냐.”

“그 덩치가 좋은 거라고, 이 바보 영감탱이야!”

해산과 헤어지라는 말은 복장이 터질 만큼 속상했지만 이젠 진해도 강절곤이 제게 괜한 심술을 부리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확실히 진해가 이대로 해산과 함께한다면 해산의 비밀이 밝혀지고 황후와 해산이 몰락하는 날 진해도 함께 몰락할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차라리 네가 그때 끼고 있던 음인. 그 아이와 혼인하거라. 천출이지만 서로 좋아하는 데 뭐 어떻겠느냐.”

“삼랑이도 괜찮지…… 가 아니고, 아니, 근데 영감이 뭔데 내 혼인에 이래라 저래라야?”

“그, 그것은…….”

“난 해산 도련님이 엄청 좋거든! 난 절대로 내가 누굴 버릴 생각은 없거든?! 그러니까 나한테서 뭘 버려라 마라 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시지!”

그리고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강절곤과의 대화는 진해의 일방적인 씩씩거림으로 끝이 났다. 강절곤은 자신의 의견을 곧게 밀어붙이다가도 진해가 당신이 뭔데라는 소리만 하면 얼굴이 굳어지고 식은땀을 흘리며 당황하기 일쑤였다. 진해는 혹시 이 영감이 제게 마음이 있어 그런 거 아닌가라는 생각에 등줄기가 오싹했으나 아직까지 죽은 부군의 물건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걸 보면 새장가를 들 생각은 아닌 듯했다. 진해는 하마터면 자신이 강해아로 분장하고 있는 줄 착각할 뻔했다.

“……정말로 예삐들을 많이 거느릴 생각이로구나.”

강절곤은 진해가 씩씩대며 고개를 홱 돌리자 진해는 알 수 없는, 혹은 기억하지 못하는 세월을 회상하며 정자 아래로 시선을 향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어려서부터 함께해 왔던 동무 치균과 치균을 닮아 고아한 구석이 있던 광아, 자신의 부군과는 정반대로 개구쟁이로 소문났던 막내 백서가 보이는 듯했다.

자신의 침실 앞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연정을 고하던 사위와 보는 자신이 민망할 정도로 멀뚱하게 그를 바라보던 백서, 이윽고 두 사람이 전장에서 살아 돌아오고, 휴전이 진행되는 동안 맺은 결실, 그리고 그 결실이 후원을 아장아장 걸어서 이 정자로 오는 모습까지도, 단 한 순간도 강절곤의 눈꺼풀 아래서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그래, 네가 무엇을 택하든 이 할애비는 너를 지킬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너를 다치게 하지 않을 것이야.”

강절곤은 진해가 차를 호로록 들이켜는 것을 바라보며 꾹꾹 눌러 담은 세월을 다짐처럼 토해 냈다. 해아가 무슨 선택을 하더라도, 진해가 무슨 선택을 하더라도 진해에게는 실 한 올만큼의 해도 가지 않게 하는 것이 강절곤의 책무요, 의무였다. 그것을 위해 이어 온 목숨이었다. 그것을 위해 남겨 둔 생이었다.

‘아버님은 황제를 믿으실 수 있습니까?’

언젠가 사위 오천협이 했던 이야기가 귓속을 맴돌았다. 그때는 당치 않다고 생각했던 말이 해아가 황제의 측근인 동시에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패인 영찰어사에 임하자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황제는 이 나라의 누구보다도 해아를 쉽게 헤칠 수 있는 인물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강절곤도 그간 허투루 황제 밑에서 고개를 숙인 것은 아니었다. 강절곤은 황제가 무엇에 강하고, 무엇에 약한지 누구보다 잘 알았고, 해아가 누구 곁에 붙어야 안전할지 훤히 꿰뚫고 있었다. 다만 고민되는 것은 해아가 그의 결정을 잘 따라 줄지였다.

강절곤은 해아가 자신의 결정을 따른다면 목숨을 건지는 건 물론이요, 장래의 부귀영화까지도 책임질 수 있었지만 해아의 마음은, 행복까지는…… 보장할 수 없었다. 왜냐면 강절곤이 해아의 곁에 붙이려는 사람은 해아에게 파각사를 보냈다는 성월공 안월산이었기 때문이다.

* * *

진해는 자신이 밥을 열 번 넘게 씹어 삼키는지 유심히 지켜보는 하인들의 눈에서 벗어나 마침내 자유의 몸이 되었다.

변장한 제갈군무와 명목상의 인사를 하며 수레에 올라타 드디어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 일찍 나온다고 나왔는데도 거리에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다. 진해를 태운 수레가 내는 삐걱이는 소리만이 거리에서 나는 모든 소리인 듯했다.

“이렇게 누워 있으니까 아무런 걱정이 없네. 배부르고, 등 따시고, 편안하고.”

마부는 반쯤 조는지 대꾸가 없었다. 이 순간만큼은 진해도 그의 무심한 친절이 반가웠다. 몸에 착 달라붙은 부드러운 감촉이 진해에게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상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어쩌다가 자신이 여기까지 왔을까. 어쩌다가 간 크게 황제를 속이는 지경까지 왔을까.

진해의 머릿속에 이제는 희미해져 그림자밖에 남지 않은 우부의 마지막 모습이 비쳤다. 기억나지 않는 목소리의 자상함과 품에 안은 미려의 보드라운 살결, 산 사람보다 죽어 가는 사람이 더 많던 구호소의 살풍경한 광경도 떠올랐다. 돈 몇 푼 을 받고 억지로 끌고 가던 죽은 몸뚱이의 감촉도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억지로 낀 도박판에서 제 옆의 손가락이 잘려 나가던 것도 충격적인 기억 중 하나였다.

어찌 보면 재수라곤 하나도 없는 인생이었다. 편안하고 안락한 삶과는 거리가 먼 생이었다.

그러나 그런 진해의 생에도 몇 가지 반짝이는 것들이 있었다. 진해는 수레에 드러누운 채 제 목에 걸린 고산홍패를 만지작거렸다. 비단 끈을 갈아 끼워 새것처럼 말끔해진 고산홍패는 진해의 오래된 보물 중 하나였다. 또한 이 고산홍패의 기억과 함께하는 미려 역시 진해의 소중한 보물이었다. 손이 매운 삼랑이 역시 빼놓을 수 없었다.

‘고는 너를 원으로 삼을 것이야. 그리고 너를 내…… 정실로 들이고 싶어.’

……해산 도련님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돈이나 보석도 소중했지만 진해는 제 곁에서 저를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제일 좋았다. 맨바닥을 데굴데굴 굴러 못난이 감자처럼 볼품없는 자신을 사랑한다 말해 주는 이들이 제일 좋았다. 진해도 그들을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사랑했다.

“내 목숨으로 끝날 수 있다면…… 싼 거겠지.”

죽기는 싫었지만 그들의 목숨과 진해의 목숨을 저울질한다면 당연히 진해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의 목숨이 무거웠다. 진해는 강절곤이 황제에게 입을 열기 전까지 어떻게든 해산 도련님과 삼랑을 어떻게든 월국 밖으로 빼돌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국경 밖에는 미려가 있었으니까.

야속한 생각이었지만 세 명 다 재주가 출중한 이들이니 서로 의지해 산다면 국경 밖이라고 해서 모자라게 살 것 같지 않았다. 자금은 지금부터 천천히 빼돌리면 되는 일이었다. 사실 그것 외에 다른 계획은 생각지도 않고 있었다. 해산의 비밀이 밝혀지는 날 여러 사람의 목이 땅에 떨어지겠지만 진해에겐 해산의 목숨만이 중요했다.

“뭐, 할 수 있으면 나도 같이 도망치고!”

물론 뭐니 뭐니 해도 제일 좋은 건 아무도 죽는 사람 없이 월국 밖으로 도망치는 것이었다. 진해는 만약 자신도 무사히 도망친다면 예전에 삼랑이한테 말했던 것처럼 고산국 근처에 작게 집을 지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제갈군무는 고산패자라는 든든한 신분이 있으니 진해가 안 구해 줘도 알아서 빠져나올 테니 그때 제갈군무에게 아버지 타령을 하며 손을 비비면서―

“응?”

제갈군무에게 손 비비는 연습을 하려고 수레에서 벌떡 일어난 그때, 진해는 자신의 집 근처에서 평소에 보지 못하던 사물을 발견했다. 진해의 집과 다른 집 사이에 난 좁은 골목이었다. 다른 사람은 무심코 지나치는 골목이었지만 진해는 그곳에 개구멍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오며 가며 잠깐씩 눈길을 주었었다. 그런데 오늘 그 골목 사이에 진해가 난생처음 보는 물체가 자리 잡고 있었다.

“자, 잠깐! 저거 회씨 아냐?!”

놀랍게도 그것은 담요를 뒤집어쓴 깡마른 인물의 뒷모습이었다.

처음에는 소리 높여 회씨를 부르려던 진해는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회씨가 어떻게 밖으로 나왔는지는 모르겠으나 뭔가 기억을 떠올린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회씨를 방해하지 않고 차라리 조용히 따라가는 게 나을 듯했다. 진해는 마부에게 손가락을 들어 올려 조용히 집으로 돌아가라는 신호를 보내고 자신은 수레에서 가뿐히 뛰어내렸다.

‘설마, 회씨도 개구멍으로 나온 건가? 그나저나 집안사람들은 다 뭐 하고 있는 거야? 나도 회씨가 저렇게 잘 걸어 다닐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지만!’

회씨는 느리지만 멈추지 않고 어딘가로 향했다. 진해는 허리띠에 맨 장신구들에서 소리가 나지 않게 긴 장포를 허리띠처럼 둘둘 감싸 멨다. 윗옷은 펄렁하고 아래는 바지가 덜렁 드러난 민망한 차림이었지만 지금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진해는 때때로 뒤를 돌아보는 회씨의 시선을 피하면서 조심스레 그의 뒤를 쫓아갔다.

놀랍게도 회씨가 향하는 곳은 잠춘동이었다.

“야.”

“허억!”

더 놀라운 건 회씨를 쫓아온 게 진해 하나만이 아니라는 것이었고.

“사, 사, 삼―”

“조용히 해. 들키겠다.”

“어, 어떻게 온 거야?”

“그건 나중에 말하고 조심해. 저 노인네 보통이 아니니까. 잠가 놓은 문을 자기가 열고 나왔어.”

“엥? 잠근 문을 땄다고?”

“네가 잃어버리지 말라고 해서 집사가 일각에 한 번씩은 보러 왔다가 계속 잠들어 있으니까 문을 잠그고 자기도 자러 갔지. 근데 조금 전에 저 노인네가 일어나서 자물쇠를 땄다는 거 아니냐.”

“허어!”

삼랑이가 하는 말에 따르면 회씨는 사람들의 눈을 감쪽같이 속이고 쇠약한 척을 하고 있다가 뭔가를 이용해 자물쇠를 열었다는 말이 되었다. 쇠약한 지금도 능숙하게 하는 걸 보면 건강했을 때는 더 이런 일이 용이했을 터이고.

“설마 진짜로 자객인가?”

“모르지. 지금은 추피동으로 몰렸다지만 예전엔 잠춘동에도 청부업 하는 놈들이 제법 있었으니까. 그래서 집안사람 안 깨우고 나 혼자 나온 거고.”

“삼랑이 너…….”

진해는 사람이가 자기 집 식솔들을 생각했다고 말하자 가슴속이 찡해졌다. 앞섶을 다 풀어헤치고 곰방대로 깡패들을 딩동댕동 패고 다니던 놈이 어느새 다른 사람들을 생각할 줄도 알게 되었다.

“왜 그런 눈으로 봐? 왜, 꼴리냐? 할래?”

“아닙니다, 한 위사님. 우리 어서 회씨를 쫓아갑시다.”

그러나 감동도 잠시 삼랑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눈으로 파렴치한 말을 입에 담았다. 진해는 어른의 놀이를 밖에서 하자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삼랑이도 참 대단한 물건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그 대단한 물건이 호시탐탐 자신의 작지만 작지 않은 물건을 노리고 있다는 거였고.

“멈췄다!”

“쟤 뭐 하냐?”

정조를 지키며 계속되던 추적은 오래가지 않았다. 잠춘동 어느 언저리에 이른 회씨에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춰 섰기 때문이었다. 회씨는 이리 기웃, 저리 기웃거리더니 곧 못 박은 듯 멈춰 서고 말았다.

“아. 혹시……?”

진해가 굳이 입 밖으로 꺼낼 것도 없었다. 갈팡질팡하는 모양새는 명백히 길 잃은 사람의 그것이었다. 진해는 한참을 이 골목 저 골목을 헤매던 회씨를 안타깝게 바라보다가 회씨가 제 풀에 지쳐 주저앉자 더는 기다리지 않고 그에게로 다가갔다.

“회씨…….”

진해가 부르자 회씨라고 불린 이가 화들짝 놀라며 진해를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담요로 몸을 꽁꽁 감싼 채였다.

“회씨, 혹시 잠춘동에 살았던 거야? 집이 어딘지 기억이 났어?”

진해의 목소리는 더할 나위 없이 상냥했다. 진해는 눈앞에 있는 이가 자객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과거에 이자가 어떤 죄를 지었든 지금 이 사람은 그저 집을 찾지 못해 헤매는 사람이었으니까. 진해와 같은 동네 사람이었으니까.

“잘 못 찾겠지? 알아. 잠춘동 길이 워낙 복잡해야지. 나도 오랜만에 오면 이 길이 이 길이 맞는가 헷갈린다니까. 다들 좀 치우고 살지.”

“…….”

“야, 뭘 기억이 나고 말고 주접을 떨고 있냐? 그냥 동네 사람 다 깨워서 아는 사람 나오라 그래. 어사 자리는 엿 바꿔 먹냐.”

“아이고, 삼랑아. 이 동네 사람들이 나오라고 해서 순순히 나올 사람들이냐?”

“잘 나오던데?”

“그건, 네가! 에휴, 말을 말자.”

회씨는 지금 당장이라도 동네 사람들을 다 두들겨 깨울 기세인 삼랑과 그런 삼랑과 실랑이하는 진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지친 눈동자를 깜박이다 진해의 옷차림을 확인하고 두 눈을 크게 홉떴다. 진해는 창명후 저택에서 나올 때의 차림새 그대로 집으로 돌아온 터였다.

“아…….”

“응? 왜 그래? 혹시 뭐가 기억났어?”

“…….”

“에이, 서두를 것 없어. 내가 말 안 했던가? 나 부자야. 어조원 놈들 신경 쓰지 말고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달라고 해서 맘껏 먹고, 배부르게 먹어서 일단 건강해져. 그러면 기억도 금방 돌아올 거야. 그나저나 어떻게 일어설 수는 있겠어?”

진해는 회씨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회씨와 시선을 맞췄다. 회씨는 진해를 꿰뚫을 것처럼 빤히 바라보다가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회씨는 회씨 나름대로 필사의 힘을 다해 이곳까지 온 듯했다.

“야, 못 걷긴 뭘 못 걸어? 그럼 여기까지는 기어왔냐?”

“아, 여기까지 왔으면 힘이 빠져서 못 걸을 수도 있지 왜 우리 회씨를 뭐라 하고 그래욧!”

“이게 돌았나, 무슨 흉내야 그건?”

말을 투덜투덜하면서도 삼랑은 진해가 회씨를 부축하자 자신도 옆에서 회씨를 같이 부축했다. 진해는 희미하게 맡아지는 땀 냄새를 맡고 난 뒤에야 회씨가 음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느릿하게 회복이 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어디 보자. 지금 이 시간에 집에 돌아가면 문을 두드려서 다 깨워야 되는데.”

진해는 회씨를 데리고 오 어사 저택으로 돌아가려다가 잠깐 발을 멈췄다. 회씨를 따라 제법 걸어온지라 시간이 벌써 늦은 새벽이었다. 조금만 눈을 붙이면 동이 틀 터였다. 집안 식솔들은 지금 모두 다 달콤한 잠에 빠져 있을 터였다. 개구멍으로 들어가면 되겠지만 기운이 빠진 회씨가 다시 개구멍을 기어갈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집에 들렀다 가자.”

“아니 그놈의 궁상맞은 집구석은 아직도 끼고 있냐? 좀 팔아라, 좀.”

“왜! 우리 집이 뭐 어때서!”

“눈 없냐? 지금 네가 뒹구는 집구석이랑 그 집구석이랑 비교가 돼?”

“며, 명당이다 뭐!”

진해와 삼랑은 회씨를 사이에 낀 채로 또다시 아웅다웅 다투기 시작했다. 삼랑은 낡은 집을 아직도 끼고 청소하는 진해를 이해하지 못했고 진해는 그 집의 가치를 모르는 삼랑을 맹렬히 비난했다.

“미려 같은 국보급 미인이 자란 집은 나라에서 보호해야 해!”

“너 같은 창놈이 난 집은 관에서 앞서서 불태워야지.”

“내가 뭘! 내가 뭘!”

“뭘? 병자 앞에서 내가 굳이 네 추한 행적을 줄줄 읊어야겠냐? 이참에 혼인 신고서도 내 마빡에 붙이고 다녀 볼까, 엉?!”

“우웃…….”

회씨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피곤함에 절어 가는 듯했다.

“회씨, 조금만 기운 내. 거의 다 왔어.”

진해는 회씨가 왜 피폐해져 가는지 이유를 알지 못하고 삼랑이와 열심히 회씨를 잠춘동 집으로 옮겼다. 해국에서 돌아오자마자 쓸고 닦고 광을 내서 그런지 잠춘동 집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깨끗하고 단정해 보였다. 얼마 전에 자물쇠도 튼튼한 놈으로 바꿔 달았다. 견물생심이라고 혹시나 이웃들이 물건을 말없이 ‘빌려’ 갈까 싶어 크게 한턱 쏘기도 했었다.

“생각보다 가깝지? 농이 아니라 이 집은 정말 명당이거든. 잠춘동 어디서 와도 거리가 비슷해. 지름길도 없고 돌아오는 길도 없고.”

“겁나 돌아오는데 명당은 무슨.”

“추피동 땅굴보단 낫지!”

“땅굴이 아니라 기지다, 기지. 멍청한 놈아. 그리고 네 신방이 될 곳이었지.”

“아, 아무튼 우리 집에 온 걸 환영해, 회씨.”

진해는 그 살풍경한 땅굴이 자신의 신방이 될 뻔했다는 삼랑이의 말에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렸다. 멀쩡한 잠춘동 집을 두고 왜 추피동에 신방을 차릴 것이며, 그 토굴에 득시글거리는 깡패 놈들을 생각하니 조상님이 자신을 도우시고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아.”

그리고 회씨는 진해와 삼랑에게 붙들린 채로 작게 신음했다. 진해는 회씨가 피곤해서 그런가 싶어 회씨를 잠깐 삼랑에게 맡겨 두고 후다닥 침상으로 내달렸다. 그 후에는 삼베 보자기에 싸 두었던 이불을 꺼내 팡팡 턴 뒤 고르게 깔기 시작했다. 이 계절에는 어울리지 않는 두꺼운 솜이불이었지만 깡마른 회씨에게는 얇은 이불보다 이쪽이 훨씬 잘 어울렸다.

“삼랑아, 조심조심.”

“죽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니야?”

“당연히 아니지……?”

진해는 삼랑이 혹시라도 회씨를 이불 위에 던져 버릴까 싶어 불안했으나 다행히 삼랑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회씨를 조심스레 이불 위에 올려 두었다. 진해는 삼랑이 회씨를 내려놓고 탁자 근처에 앉아 있는 동안 바깥으로 나가 빗물 항아리에서 받아 놓은 빗물을 퍼 왔다.

근래 비가 많이 내린 터라 항아리에는 맑은 빗물이 찰랑찰랑 고여 있었다. 진해는 새벽 특유의 촉촉한 공기를 듬뿍 들이마시며 물을 길어 왔고, 먼지가 내려앉은 화로도 깨끗이 닦아냈다. 기운이 쇠한 회씨에게 아침을 먹인 뒤 오 어사 저택으로 데려갈 셈이었던 것이다.

“우, 아으…….”

회씨는 삼랑이 하품을 하며 살짝 눈을 감고 있는 사이, 바지런하게 움직이는 진해를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뭔가를 말하고 싶은 것처럼 작게 신음을 계속했다. 진해는 회씨의 신음 소리가 높아질 때마다 회씨를 돌아보며 빙긋 미소 지었다. 일단 하던 일을 마무리 지은 뒤에 회씨를 달래 줄 생각이었다.

“휴, 이것도 일이라고 제법 땀이 나네. 슬슬 날이 더워지려는 모양이야.”

진해는 식량 창고를 열어 내일 아침 먹을 죽 준비를 모두 마친 뒤에야 움직임을 멈추었다. 얻어 입은 비단 장포를 곱게 벗어 걸어 두고 살짝 구겨진 옷도 조심스레 벗어 개어 놓았다. 침의 한 벌 차림이 되자 꾸벅꾸벅 졸고 있는 삼랑이가 보였다. 진해는 잠깐 고민하다 삼랑이를 흔들었고, 삼랑이는 진해가 오금이 저릴 만큼 진해를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사, 삼랑아, 치, 침대에서 자야지?”

삼랑의 지랄 맞은 성격이 어디 가지 않듯 삼랑의 잠투정 역시 상당히 지랄 맞은 것이었다. 진해는 삼랑의 손이 움찔거리자 얼른 등을 내밀어 보였고 삼랑은 이건 뭔 개짓이냐는 표정으로 진해의 등짝을 바라보았다.

“돌았냐? 내가 좆만 한 놈 등에 업힐 정도로 모자라 보여?”

“그냥 우리 삼랑이가 귀여워서……, 오랜만에 업어 주려고 그러지~!”

“개소리 말고 비켜. 이 집엔 왜 침대가 하나뿐인 거야. 그러니까 그 개새끼가 분별을 못 하고 너랑 붙어 자려고 지랄을 했지.”

“우리 미려가 얼마나 천사처럼 잤는데 그런 말을!”

삼랑은 진해와 실랑이를 벌이다가 졸린 눈을 비비며 회씨가 앉은 침상의 반대편으로 올라갔다. 기무위사의 특성상 이렇게 오랜 시간 잘 수 있는 기회는 드물었다. 삼랑은 보기와 다르게 정말 피곤했는지 자리에 눕자마자 곤한 숨소리를 뱉어 냈다. 진해도 그제야 피곤함이 몰려들었다.

“회씨, 회씨도 자야지? 일단 자고 나서 내일 생각하자. 자리가 불편한가?”

진해는 삼랑이 자는 걸 흘끗 쳐다보다 회씨에게로 다가와 그가 눕는 것을 도우려 했다. 침의만 입고 업어 주느니 마느니 실랑이를 벌이는 바람에 여며 놓은 침의가 헐렁하게 벌어져 있었다.

“조심조심, 그렇지, 조심조심 누워야지.”

회씨를 눕히느라 진해의 허리가 굽어지고 헐렁하게 벌어진 침의 사이로 진해의 살이 슬쩍 비쳐 보였다. 진해가 가장 아끼는 보물이 진해의 침의 밖으로 톡 삐져나왔다. 비단 끈에 달린 고산홍패였다. 진해는 알지 못하는 강절곤의 후사, 강백서의 이름 마지막 글자가 새겨진 정표였다. 사실상 진해의 출생증명서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본 순간 회씨의 눈이 이때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홉떠졌다. 회씨의 입술이 비명이라도 지를 것처럼 크게 벌어졌다. 그러나 진해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다시 제 품속으로 집어넣었고, 입이 찢어지라 크게 하품을 하며 뒤돌아섰다.

진해는 비척비척 걸어가 탁자에 뺨을 대고 누웠다. 처음에는 팔을 포개 베고 있더니 나중에는 도롱도롱 코를 골며 탁자 위에 침을 흘렸다. 회씨는 진해가 뒤척이는 사이 다시 모습을 보인 고산홍패를 계속 바라보았다.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고, 그것이 누구의 손에 있어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흐릿했던 기억의 파편이 하나로 합쳐지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깜박이던 눈동자가 마지막으로 닿은 곳은 곤히 잠든 진해의 얼굴이었다.

* * *

“대……, 인…….”

“옳지, 옳지 잘한다! 회씨 이제 거의 다 나았잖아!”

제갈군무가 적당히 내성적인 척, 아픈 척을 해 준 덕에 진해는 황제의 시선에서 한결 자유로울 수 있었다. 강절곤이 휴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려 더욱 그랬다. 황제는 강절곤이 몰래 빠져나간 것을 덮어 줄 정도로 그가 필요했다. 음인 자식을 가진 무관 가문에서 강해아가 나타나자마자 혼수 준비를 서두른 걸 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진해는 그동안 회씨의 회복에 집중했다. 회씨의 회복에 걸린 조건도 조건이었지만,

‘해야. 네 어찌 직접 이런 허드렛일을 하느냐?’

‘헤헤, 다 같은 월국의 백성이잖습니까. 마땅히 돕고 살아야지요.’

‘너란 아이는 어쩜 그렇게도……!’

진해가 회씨에게 죽을 떠먹이는 모습을 본 해산이 크게 감동했기 때문이었다. 해산은 어찌나 감명 깊었던지 진해를 보고 한참 동안 관료의 귀감이라느니, 청백리라느니(창고에 쌓인 게 다 선물이었다), 황실의 일원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느니 온갖 칭찬을 쏟아부었다. 한동안 냉랭했던 해산의 눈치를 봤던 진해에게 해산의 가감 없는 칭찬은 가뭄의 단비나 마찬가지였다. 이대로 회씨를 무사히 회복시켜 집으로 돌려보내면 진해를 예전처럼 다시 품어 줄 것만 같았다.

“기억만 돌아오면 가족을 찾아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지.”

“오, 대인…….”

“응? 왜 그래?”

“오늘, 어디…….”

“아……. 들었어? 아무래도 오늘 밤엔 회씨를 만나러 오지 못할 것 같아.”

뛸 듯이 기뻐했던 진해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졌다.

“성가신 영감이 귀찮은 손님을 불렀거든……. 내가 안 가면 곤란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가야 해.”

“누, 구……?”

“응? 성가신 영감탱이가 누구냐고?”

“…….”

“귀찮은 손님 쪽을 말하는 거구나. 그…… 회씨는 몰라도 되는 사람이야.”

“…….”

“음, 회씨한테만 살짝 이야기해 줄까. 삼랑이한텐 절대로 말하면 안 돼. 가끔 오는 잘~ 빠진 형한테도 말하면 안 돼?”

진해는 자신을 곧게 바라보는 회씨를 바라보다 푹 한숨을 쉬었다. 사실 진해도 누군가에게 하소연하고 싶던 참이기도 했다. 회씨는 아무것도 모르니 말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전적으로 자신을 따르는 걸 보아 자신에게 해를 끼칠 것 같지도 않았고.

“성월공 마마님이야.”

“성월, 공……?”

“회씨 혹시 성월공 마마님이 누군지 몰라? 아 참, 회씨는 해원공 마마도 몰랐지. 성월공 마마님은 말이야. 그……, 돌아가신 지순 황태공 전하와 출가하신 화석태정군 사이에서 나신 황손이셔.”

“출, 가?”

“응, 화석태정군, 그러니까 예전에 화석정군이라 불리시던 지순 황태공의 정실께서는 지순 황태공이 돌아가신 후로 갓 태어난 성월공 마마님을 두고 출가하셨다지 뭐야. 덕분에 황상께서 성월공 전하를 엄청 귀애하시지. 친자인…… 해원공 마마님이 홀대받는다 느껴질 정도로.”

“…….”

“쓸데없는 이야기를 했네. 어쨌든 그런 성월공 마마님을 오늘 뵈어야 해서 회씨를 보러 오지 못한다는 거야. 잘 빠진 형, 그, 해원공 마마님이 오면 그냥 숙직한다고 그래. 알겠지?”

“어째서?”

창명후 강절곤이 억지를 부려 가며 성사시킨 만남 덕에 근심이 가득한 진해는 회씨의 목소리가 명료해진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모르겠어. 나도 왜 그런지 잘 모르겠네.”

해원공이 자신을 걱정할까 그렇다고 이야기하면 되는데 진해는 어쩐지 그 답을 입에 올릴 수가 없었다.

“해원공을 사랑하는군요.”

“응…….”

진해는 복잡한 상념에 잠긴 채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숨김없이 답했다. 어딘지 모르게 친근하고 익숙한 목소리가 하는 말이 맞았다. 진해는 해산을 사랑했고 해산이 걱정하는 게 싫었다. 그러나 해산을 좋아하는 마음에 비등할 정도로 성월공이 두려웠다. 자신에게 파각사를 보내 잊지 못할 고통을 선사한 소월이 무서웠다.

하지만 모순되게도, 진해는 성월공 안월산을 완전히 미워할 수 없었다. 예전에 반짝거리던 눈망울 대신 공허하고 허무한 눈동자를 한 그를 마주친 순간 소월에게도 뭔가 일이 있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방적으로 파각이 되었으면서 무슨 배부른 소리인가 싶겠지만 파각의 고통이 큰 만큼, 안월산에게 배신당했던 아픔이 큰 만큼, 그와 행복했던 기억이 더욱 풍성해지고 더욱 선명해졌다.

설레었던 입맞춤, 애틋했던 향기, 사랑스러운 손.

첫사랑의 순수했던 추억이 소중했던 기억을 대신하려는 듯이 진해의 머릿속에 진득하게 눌어붙어 있었다. 조금만 더 함께 있었다면 틀림없이 서로의 처음을 가졌을 것이 분명했던 만큼 진해에게 소월은 잊을 수 없는 첫 음인이었다.

그런데 지금, 진해의 첫사랑이었던 성월공과 현재 진해와 미래를 약조한 해원공이 대립하고 있었다. 황손이 적은 만큼 겉보기에는 서로를 존중하는 듯했지만 태자를 확실히 해야 할 때가 오면 두 사람은 반드시 서로에게 칼을 겨누게 되어 있었다. 둘 중 하나는 패배가 결정 나는 순간 도성에서 사라져야만 했다.

“해원공 마마님이 다칠 게 두려워. 황상은 이성적인 분이시지만 해국이 대를 이어 득세하게 두실 것 같진 않아. 해산 도련님은 소월을 해치진 않겠지만 소월은 모르겠어. 어렸을 때의 소월은 참 착한 아이였는데 지금은…… 북방의 괴물이라 불릴 정도로 무서운 사람이야. 내 목을 조른 건 둘째치고 해산 도련님을 죽일 것 같아서 무서워 죽겠어 . 우부가 사라졌을 때도 슬펐는데 해산 도련님이 사라지면 난 어떻게 하지?”

회씨가 아무 말도 안 하고 잠자코 들어 주자 진해는 그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두려움을 토해 내고 말았다. 이렇게 말해 봤자 아무것도 변하는 게 없는데도 진해는 말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남들에게는 기세 좋게 웃고 있었지만 사실은 소월이 또다시 자신에게 파각사를 보낼 것 같아 무서웠다. 파각보다 더한 고통을 줄 것 같아 두려웠다.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없애 버릴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걱정, 마세요.”

그런 진해를 바라보던 회씨가 깡마른 손을 내밀어, 진해가 열심히 먹여 그나마 사람의 형상을 갖춘 손을 내밀어 진해의 어깨를 부드럽게 그러쥐었다. 진해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한 얼굴을 들어 회씨를 바라보았다. 회씨는 여전히 담요를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그래도 진해를 대할 때만은 반쯤 담요를 벗어 주었다. 진해가 밥을 먹이기 힘들다며 졸랐기 때문이었다.

“다, 잘, 될 거예요.”

“그렇겠지? 사실 회씨한테 말 안 한 게 있는데, 아니, 말할 수도 없지만. 실은 해산 도련님 말이야―”

“알, 아요.”

“응?”

“다, 잘될, 거예요, 모두, 다.”

회씨는 비쩍 마른 얼굴 위에 미소를 띤 채 진해를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는 듯이, 모든 것이 진해의 뜻대로 될 것이라고 말하는 듯이.

“―그래, 잘되겠지. 어련하겠어!”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진해는 문득 맥이 탁 풀려 버렸다. 자신의 앞에 있는 이가 지금 왜 여기 와 있는지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회씨는 자신의 누구인지도 몰라서 진해의 손에 맡겨진 터였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을 두고 진해는 지금 엄청나게 복잡한 고민 상담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말이나 다 알아들었는지 모르겠다. 진해는 저를 위로해 주려는 회씨의 진심만을 받아 든 채 힘차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판은 이미 벌어졌고, 패도 다 깔려 있었다. 피한다고 피해지지도 않는 위험한 판이었다. 그렇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헤쳐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속임수를 쓰든, 운에 맞기든, 잠춘동 만재의 만 가지 재주를 발휘해서 이 위기를 헤쳐 나가야만 했다!

“회씨, 다녀올게. 나 없다고 서운해하지 말고 집사 말 잘 듣고 있어?”

진해는 저번에 창명후 저택에서 얻어 입은 비단옷을 반듯하게 갖춰 입은 채 마지막으로 회씨에게 인사를 하러 왔다. 이 옷을 입으면 그 집 할아범들이 어마어마하게 좋아하고 강절곤도 히죽히죽 웃으며 좋아해서 진해는 그 집에 갈 때면 일부러 이 옷을 입거나 이 옷과 함께 얻은 장식을 차고 갔다. 심지어 제갈군무마저도 그 옷이 잘 어울린다 극찬하니 아무래도 이 옷은 진해의 의복 중 으뜸을 차지할 모양이었다.

“……잘 어울리는구나.”

진해가 인사를 하고 문가를 나서자 회씨가 담요 아래서 작게 읊조렸다. 진해는 회씨가 무슨 말을 하나 뒤돌아보았으나 마부가 진해를 재촉하러 와 더는 묻지 못하고 방을 나섰다. 성월공을 마주한다는 생각에 쓸데없이 몸치장에 시간을 많이 들인 탓이었다. 이러다가는 창명후 저택의 늙은 마부가 통곡하며 진해를 데리러 올지 몰랐다.

진해는 꽉 조이는 가슴을 움켜쥔 채 그렇게 창명후 저택으로 향했다. 오 어사 댁의 집사는 진해가 부탁한 회씨를 돌보기 위해 깨어 있을 때는 적어도 한 시진에 한 번은 회씨를 보러 왔다. 저번에 회씨가 몰래 탈출한 후로 집사는 자물쇠를 두 개로 늘려 놓았다. 회씨가 잠춘동 근처까지는 갔지만 끝내 집을 찾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어 걱정되어서 그런 것이었다.

“회씨? 오늘은 벌써 잠이 들었는가? 그래도 석반은 들고 자야지. 주인 나리께서 입맛이 없어도 미음은 꼭 먹이라고 하셨어. 자네 우리 주인 나리 솜씨를 모르지? 주인 나리께서 만드신 홍소육은 우리 집 주방 아재도 두 손 들 정도야. 어서 회복해서 나리가 만드신 홍소육을 먹어야지.”

집사는 동그랗게 부푼 채 미동도 하지 않는 담요 더미에 다가갔다. 집사 역시 사람인지라 바싹 마른 채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는 회씨를 가엽게 여기고 있던 참이었다. 또한 무슨 사연으로 황궁의 우물에 갇혀 있었는지도 궁금했고.

“회씨?”

하지만 집사는 회씨의 석반을 먹이지 못했다.

“컥, 잠, 뭐, 커헉!”

뒤에서 순식간에 덮쳐들고 목을 꽉 조이는 질긴 팔뚝에 숨이 막혔기 때문이었다. 체격이 좋은 집사가 몸을 뒤틀었으나 집사의 목을 조른 팔뚝은 풀릴 기미가 없었다. 이러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다는 것처럼 필사의 힘을 다하고 있었다. 평생 주먹질 한번 해 보지 못한 집사가 의식을 잃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미안하오.”

회씨는 정신을 잃은 집사를 반듯하게 눕혀 둔 뒤 집사의 허리를 뒤져 열쇠 꾸러미를 찾아냈다. 그 후에는 헉헉거리는 숨을 다스리며 집사의 겉옷을 몽땅 벗겨 버렸다. 집사를 기절시킨 회씨는 오랫동안 뒤집어쓰고 있던 담요를 버리고 집사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는 집사가 숨을 제대로 쉬는지 확인한 뒤 조용히 자물쇠에 열쇠를 꽂아 넣었다.

* * *

무려 성월공이 묵고 갈 것이라는 소식에 창명후 저택의 늙은 하인들은 오랜만에 바빠졌다. 사람 수가 모자라 창명후가 전성기를 달릴 때만큼은 꾸미지 못하지만 그래도 최소한 황자마마가 드셔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집을 꾸며 놓아야 했다.

상대가 자신의 후견인 창명후인지라 성월공은 늦지 않게 도착했다. 진해도 살짝 낯이 익은 호위가 성월공의 말 옆에 엎드렸다. 성월공은 기겁한 진해와는 달리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등을 밟았고, 진해는 그때가 되어서야 그를 어디서 봤는지 떠올렸다. 그는 혈월대를 끌고 해국으로 가는 진해를 납치하려 했었다.

황자는 아니지만 황자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 성월공을 모른 척할 수 없어 진해 역시 엄청나게 떨떠름한 얼굴로 대문 밖에 나와 있었다. 강절곤이 성월공과 친해 해원공에게, 해산에게 해를 끼칠 일이 뭐가 있겠느냐고 억지를 부리지 않았다면 안월산이 온다는 얘길 듣자마자 줄행랑쳤을 것이다.

“긴장 풀어, 오 대인.”

어찌나 딱딱하게 굳어 있던지 제갈군무가 진해의 옆구리를 아프지 않게 찔러 댈 정도였다. 그래도 막상 이렇게 눈앞에 마주하자니 심장이 두근거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진해는 강절곤이 허옇게 질린 얼굴을 훔쳐보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연신 마른침만 삼켜 댔다. 금방이라도 꼴사납게 구역질을 할 것 같았다.

안월산이 싫다기보다 그가 진해의 인생에서 겪은 가장 큰 고통의 원인이라는 점이 컸다. 진해는 이리저리 시선을 피하다가 결국 마지못해 눈을 들어 창명후 저택으로 다가오는 성월공 안월산을 바라보았다.

“헉.”

시선을 들자마자 눈이 딱 마주쳤다. 언제부터 진해를 보고 있었는지 한 치의 미동도 없이 진해만을 올곧게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말에서 내리기 이전부터 진해를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천세, 천세라고 인사를 올려야 되나요, 할아버지? 아니면 백세?”

“흠, 그럴 필요 없다.”

그런 그를 구원해 준 건 제갈군무와 강절곤이었다. 고양이 앞의 쥐처럼 바짝 얼어 있는 진해 앞을 가로막듯이 강절곤이 나아가 예를 갖췄다.

“성월공 마마, 소신의 누추한 집에 발걸음을 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노신이 늙은 몸을 움직여 비루하나마 성의껏 준비하였으니 하해와 같은 은혜로 굽어살피소서.”

“창명후의 초대는 가치를 헤아릴 수 없는 것이지. 창명후야말로 여(余)를 초대한 걸 후회하지 말게. 여는 재미라곤 한 톨도 없는 사람이니까.”

“어찌 그리 말씀하시옵니까. 해아, 이리 오거라.”

의례적인 인사 몇 마디를 나눈 뒤 창명후는 변용술로 변장한 제갈군무를 곁으로 불러들였다. 창명후는 약간의 친근한 접촉을 곁들여 제갈군무를 강해아라고 소개했고 제갈군무 역시 싹싹한 손자인 척 굴었다. 성월공이 제갈군무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진해의 간이 떨어질 것처럼 덜컹거렸지만 조부인 강절곤이 그렇다고 하자 안월산 역시 크게 흠을 잡지 않고 넘어갔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는데,

“성월공 마마께서도 익히 알고 계실 것이옵니다. 오 어사, 이리 오게.”

“어, 응, 어…….”

“이 사람은 육품 영찰어사 오진해라고 하는 이인데 제가, 손자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이입니다.”

―뭐?

“창명후가 내 권고를 무시하고 뛰쳐나갔을 때 친히 보호해 주었다지.”

“예, 그전에는 제가 이 사람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고 홀대하였는데 그것은 큰 잘못이었사옵니다. 아직 홀몸이라고 하니, 성월공 마마께서는 아무쪼록, 아무쪼록 어여삐 봐 주시옵소서.”

이 영감이 지금 누구한테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진해는 멀쩡한, 아니 변장한 타인이었으니 사실 안 멀쩡했지만, 어쨌든 손자를 앞에 두고 저를 홀몸이니 어여삐 여겨 달라느니 운운하는 창명후를 기가 막힌 눈으로 쳐다보았다. 마찬가지로 홀몸인 상대 앞에서 이 사람은 홀몸이니 뭐니 말하는 건 내가 다리를 놔 줄 테니 서로 잘 좀 해 보시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홀몸이라고?”

“예. 곁붙이 하나 없는 깨끗한 홀몸이옵니다.”

“안 그래 보이는데 그렇단 말이지.”

“소신이 어찌 거짓을 고하오리까.”

“그래, 그렇군.”

더 큰 문제는 그 말을 들은 안월산이 눈을 접어 가며 웃었다는 것이었고.

“저기, 저는 그러니까 혼인을 약―”

“드시지요!”

진해는 월산이 더 큰 오해를 하기 전에 자신은 혼인을 약조한 이가 하나, 혼인을 반쯤 약조한 이가 하나, 저와 연이 이어진 이가 하나 있다고 말하려 했으나 창명후가 전혀 노인답지 않은 소리로 진해의 말을 끊어 버렸다. 진해는 월산의 앞만 아니라면 아 영감이 대체 왜 이러는 거냐고 멱살을 쥐고 짤짤 흔들었을 것이다.

“휘유~ 할아버지가 언젠가 이런 자리를 마련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성질 참 급하시네. 그렇지, 오 대인?”

“아닛, 왜 멀쩡한 손자를, 안 멀쩡하지 참.”

“사람을 앞에 두고 안 멀쩡하다고 말하는 건 좀 그렇지?”

“어쨌든 자기 손자를 두고 왜 날 중매하는 거야! 그것도 한낱 육품 관리를 황자마마한테!”

“음, 글쎄. 난 알고 있지만 함부로 나불거리면 할아버지가 복수할 테니 입 다물고 있을래. 그나저나 오늘은 주방 할아범이 평소보다 더 맛있는 걸 준비했다던데? 월국 음식은 부드럽게 씹히는 게 참 먹기가 좋단 말이야.”

“캬악, 날 지켜 준다고 했잖아!”

너무나도 천연덕스러운 제갈군무의 행태에 분이 치민 진해가 제갈군무의 옷깃을 쥐고 흔들었으니 제갈군무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기색이었다. 그는 오히려 진해를 신경 써 주듯이 진해의 잔머리를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우리 귀여운 오 대인. 말만 들어서는 성월공이 얼마나 미친놈인지 내가 알 수가 없잖아. 정말 미쳐 돌아가는 인간이면 내가 그때 손을 써 줄게. 오 대인이 그렇게 좋아 죽는 해산 도련님이랑 사랑이를 데리고 고산국으로 가자고.”

“사랑이가 아니라 삼랑이야!”

사랑이 쪽이 어감이 더 좋다고 실실 웃는 제갈군무를 팽개치고 진해는 우거지상을 한 채 문안으로 들어갔다. 월산이 보냈는지 강절곤이 보냈는지 호위로 데려온 혈월대 중의 하나가 멀리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을 지체하면 질질 끌려갈지도 몰랐다.

그리고 진해의 예상대로 혈월대는 강해아가 아닌 진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제 앞을 말없이 스쳐 지나가는 진해의 뒤를 조용히 따라왔다. 강절곤의 손자일 터인 강해아에게는 한 점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고.

톡,

“응?”

만약 그때 진해가 뒤를 돌아보았다면 일이 꼬이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진해의 신경은 모조리 안월산에게 쏠려 있었고, 그 탓에 그를 따라오려던 강해아가 그 자리에 멈춰 선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강해아가 멈춘 것이 누군가가 그에게 돌을 던져서라는 것도.

강해아, 즉 변용술로 변장한 제갈군무는 자신에게 날아온 돌멩이를 그대로 낚아챘고 무료한 눈매로 돌멩이가 날아온 방향을 쳐다보았다. 돌멩이는 진해의 수레가 세워진 곳에서 날아왔다. 정확히 말하면 그 수레의 그림자로부터였다. 제갈군무에게 돌을 던진 이는 제갈군무에게서 숨지 않았고,

“오호라. 변용술을 알아보는 모양인데. 동문인가? 아니면 동향 사람? 마침 심심했는데 잘됐어. 난 연회 같은 건 질색이니까 대련이나 한판―”

제갈군무는 느긋한 걸음걸이로 그자에게 다가가 눈을 마주 보았다.

“……할까.”

훔친 옷을 입고 그늘 속에 숨은 이의 얼굴을 본 순간 무료했던 눈매가 순식간에 팽팽해졌다. 느긋했던 걸음걸이가 빨라지고 작게 줄였던 키가 걸음걸이마다 쑥쑥 커졌다. 그의 앞에 다다랐을 때 제갈군무의 주먹 쥔 손 위에 굵게 핏줄이 서 있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돌을 던져 제갈군무를 불러 세운 이는 제갈군무와 한 사부 아래서 수련한 사람이었고, 제갈군무의 두 번째 남편 후보였으며, 성은 강씨, 이름은 백서라고 했다. 얼마 전에 진해로부터 회씨라고 이름 붙여진 자이기도 했다.

* * *

아니나 다를까, 강절곤은 진해의 자리를 아주 노골적으로 배치해 놓았다. 자신은 멀찍이 앉고 안월산과 진해의 자리를 바짝 붙여 놓았던 것이다. 집안 하인들도 강절곤의 의도를 눈치챈 건지 평소와 다른 차림새와 다른 상차림을 선보였다.

진해는 주방 할아범이 얼마 남지 않은 수명을 쏟아부어 완성한 찐 닭 요리를 보며 줄줄 식은땀을 흘렸다. 찐 닭은 두 마리를 재료로 하고 있었는데 당근이나 고추 등 온갖 색깔 나는 재료를 다듬어 봉황 모양으로 꾸몄고, 한 쌍임에 분명한 닭 사이에 알을 엄청나게 쌓아 놓았다.

‘저 봉황 새끼들은 대체 떡을 얼마나 쳤길래 알을 저만큼이나 낳았어?!’

채색한 달걀을 어찌나 수북하게 쌓아 놓았던지 집주인인 강절곤도 요리를 보며 흠칫 어깨를 굳힐 정도였다. 민망할 정도로 대놓고 다산을 기원하고 있었다. 진해는 제가 부엌에 들어가서 불을 때자 손사래를 치면서도 멀쩡하게 요리 한 그릇을 완성하자 감동한 얼굴로 오열하던 주방 할아범의 얼굴을 떠올렸다. 수북하게 쌓은 달걀 위에 그가 엄지를 치켜들고 있는 모습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어, 어험! 차린 건 없지만 드시지요!”

그 요리 외에도 깔끔하게 굽기 힘들다던 장어라든 가, 부추라든 가, 자라탕 등 온갖 정력에 좋고 몸에 좋은 음식이 상 위 가득 자리하고 있었다. 이게 술자리 음식인지 혼인식 음식인지 구분이 힘들었다.

집사가 경건한 표정으로 들고 온 음식을 보자 더욱 그랬다. 진해는 강절곤이 눈가를 씰룩거리지 않았다면 강절곤이 오늘 월산과 자신을 합방시키려 한다고 오해하였을 것이다.

“성월공 마마, 오 대인.”

“파, 팥밥이네?”

“예, 팥은 본디 상서로운 음식 아닙니까. 성월공 마마의 강림이 기꺼워 힘 좀 써 보았습니다.”

“팥은 그렇다 치고 밥은 왜 이렇게 고봉으로……?”

“허허, 술을 드시기 전에 밥으로 속을 채우시면 숙취가 덜하다 하여 준비하였사옵니다.”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맞는 말이긴 한데 진해의 영혼이 집사에게 자꾸만 이의를 제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의를 제기하고픈 진해와 달리 월산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그것보다는 별 관심이 없는 듯했다. 처음에는 쭈뼛거렸던 진해는 월산이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서 그렇다 여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놀랍게도 성월공 안월산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안월산은 창명후가 말을 걸면 그에 답하고 적절히 말을 걸기도 했지만, 가끔 진해 쪽을 쳐다보기도 했지만, 그 외에 다른 사물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다.

‘저 알 무더기를 보고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니. 해산 도련님이었으면 지금쯤 시뻘게지고 난리가 났을 텐데.’

그의 귀에 집사가 하는 말이 들렸는지나 의문이었다. 뭘 먹든 한결같이 일관적인 반응이라 진해는 그가 맛을 느끼는지도 궁금해졌다. 진해는 이 자리가 어마어마하게 불편했지만 그래도 밥만큼은 정말 맛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월산의 향. 진해에게 너무나 익숙하고, 뜯겼다 아문 각인 자리를 핥듯이 노리는 저 향.

월산의 향은 단순히 침착하다기엔 너무나도 고요하고 조용했다. 아무리 침착한 사람이라도 하루 종일 향이 일정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물을 마시거나 침을 삼키거나, 숨을 쉬는 등의 활동을 할 때 자신도 모르게 무심코 편안하게 풀리는 것이 향이란 놈이었다.

그런데 안월산의 향은 쇳물을 부어 굳히기라도 한 것처럼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감정이라는 다채로운 빛깔을 입지 않은 그야말로 무채색의 무미건조한 향기였다. 어딘지 모르게 오싹한 감각마저 주었다. 안월산이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면 진해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안월산과 거리를 벌리려 했을 것이다.

“어허.”

“주인 나리. 많이 취하셨습니다.”

“허허, 기쁜 자리라 나도 모르게 많이 마셨군.”

“이만 일어나심이 좋을 듯합니다.”

“그리는 아니 돼, 집주인인 내가 자리를 비우면 누가 손님을 대접하나!”

강절곤은 이런 안월산이 익숙한 듯 혼자서 실컷 떠들고 실컷 마셨다. 진해가 깨작거리자 집사에게 손짓을 해 진해에게 요리를 퍼먹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안월산은 그런 강절곤과 진해를 유심히 바라보다 눈을 살짝, 아주 살짝 동그랗게 떴다. 물론 그럼에도 향은 전혀 변함이 없었지만.

“도련님이 계시는데 무슨 걱정이십니까. 제가 사람을 보내 도련님이 오시게 하겠습니다.”

“……으음.”

“해아 도련님께 다, 맡기시지요.”

“그러고 보니 해아 공자는 왜 안 오는 거야? 아까 나랑 같이 들어오는 줄 알았는데.”

그리고 강절곤이 얼굴이 시뻘게져서 비틀거릴 때가 되어서야 진해는 제갈군무가 연회 자리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까는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었는데 황당하지만 맛있고 영양가 좋은 음식으로 배를 채우니 그제야 멈췄던 머리가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접대는 되었소. 창명후와 내가 하루 이틀 안 사이도 아니니까.”

진해가 고개를 쭉 빼 제갈군무의 행방을 궁금해하는 동안 이 자리의 제일 높은 손님인 월산이 상황을 마무리했다. 주인이 없어도 된다는 그의 말에 집주인인 강절곤도, 집사도, 진해도 눈이 다 휘둥그레졌다.

“……그건 그렇지요. 제가 성월공 마마를 오래 모시긴 했지요.”

진해가 안월산 자기가 뭔데 집주인을 가라 마라 하냐고 어이없어하는 동안 강절곤과 안월산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소리 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강절곤의 입에서 월산을 모신 세월이 언급되자 진해는 어딘지 모르게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오랫동안 모셨으니 감정이 남다를 텐데 지금의 강절곤에게는 뭔지 모를 가시가 느껴졌다.

“그래. 그대만큼 내 곁에 오래 있었던 이가 없지. 그러니 내가 먼저 그대를 저버릴 일은 없어. 내가 때론 그대의 기대에 못 미치거나 그대에게 해를 입혔지만 앞으로 더는 그럴 일 없을 거야. 그대가 만족할 만큼 충분히, 넘칠 만큼 보상해 주겠어.”

월산은 강절곤의 가시를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전과 변함이 없는 태도로 술을 들이켰다. 혼자서 홀짝홀짝 마시는 모양새가 술이 보통 센 게 아니었다. 진해도 술은 제법 했지만 어느 정도 마시면 얼굴이 붉어지고 말이 늘어졌다. 그러나 안월산은 자기 혼자 위장을 따로 뒀는지 진해랑 비슷하게 마셨으면서도 여전히 하얀 낯빛을 하고 있었다.

“신은 보상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알아. 하지만 딱히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는군. 그대가 기억해야 할 것은 나도 감정을 지녔고 때로는 자네가 당황스러울 정도로 풍부하다는 거지. 그리고 그 대상이 몇 되지 않다는 것도.”

“……신은, 믿사옵니다. 신에게 유일하게 남은 것이옵니다.”

하얀 낯빛을 한 안월산과 강절곤이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나누었다. 진해는 분홍빛 얼굴을 한 채로 그들의 얼굴을 한 번씩 쳐다보았다. 굳이 끼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한자리에 앉았으니 이해라도 하고 싶은 것이 진해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주인을 모셔 가라.”

서로를 뚫을 듯이 뜨거운 시선이 오가고, 월산이 집사에게 냉랭한 어조로 명했다. 집사는 어딘지 모르게 서럽고 슬픈 얼굴로 강절곤을 부축하기 시작했다. 다른 하인들 역시 묘하게 낯빛이 좋지 않았다.

“자리를 옮기지.”

아직 상 위에 산더미처럼 많은 음식을 쌓아 둔 채로 내뱉어지는 말에 진해는 자리에서 한 뼘은 튀어 오를 정도로 놀랐으나, 월산은 진해의 답을 듣지 않고 진해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손은 진해보다 작고 곱상한데 악력이 장난이 아니었다. 한때 진해의 목을 졸랐던 바로 그 손이었다.

“취하는군.”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진해는 허연 낯짝을 한 채로 취한다는 월산을 어이없이 바라보았다. 저 얼굴이 취한 거면 진해는 고주망태가 되어 바닥에서 전을 부치며 뒹굴고 있어야 했다.

“……나도요.”

취한 것과는 별개로 평소와는 좀 달라 보이긴 했다. 최소한 강절곤의 앞에 있을 때는 성월공의 격식을 차렸던 월산이 진해와 둘만 남게 되자 순식간에 진해가 알던 소월로 돌아온 것 같았다. 풀 향기가 달콤하게 풍기는 후원에서 안월산이 진해를 돌아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예전에는 같이 술을 마시지 못했지. 생각보다 술이 약하구나.”

“마마가 술이 강하신 겁니다.”

“같잖은 존대 따위는 하지 않아도 좋아.”

“그렇게는 아니 되겠는데요? 아시다시피 제 뒷배가 동십사 어르신이잖아요. 그분 부친이 누구신지 모르시는 건 아니겠지요?”

“내가 허하지.”

동십사의 우부인 동가대가 예부상서라는 걸 들먹이며 월산과 말을 놓으려던 것을 막으려 했지만 황자의 명은 생각보다 묵직했다. 담은 작지만 간은 비대해서 창명후 강절곤에게도 대들고, 황자를 정인으로 두고 오입질을 하기도 했지만 진해 역시 월국에 사는 사람이었다. 월국에서는 월국의 법을 따라야 했고, 월국에서는 황제가 최고였으며, 황자들은 다음 황제가 될 자격을 갖고 있었다.

“응.”

딱히 손해 볼 명도 아니었다. 될 되면 되라는 식으로 툭 뱉어 놓고 진해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월산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미건조한 음인의 향에 저녁 이슬 냄새가 섞이자 어쩐지 예전 생각이 나는 듯했다.

산을 몇 번이나 오가며 관청에 땔감을 채워 놓고 나면 어느덧 소월이 문 앞에서 진해를 기다리고 있었다. 산에서 미끄러져 구르는 바람에 진해는 머리칼은 나뭇잎 범벅, 옷은 흙투성이에 팔은 긁혀서 보기 싫게 상처가 나 있었다.

그러나 소월은 꾀죄죄하고 깡마른 데다가 꼬질꼬질하기까지 한 진해를 외면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해의 손목을 잡아 우물로 데려간 뒤 적신 손수건으로 진해를 꼼꼼하게 닦아 주었었다.

‘소월, 정말 괜찮아? 나는 앞으로도 더 나은 일을 할 거란 보장이 없어. 미려도 장가보내야 하구.’

‘뭐가 괜찮냐는 말이야?’

‘그러니까, 각인 말이야. 각인했으니 소월은 내게 장가올 거잖아. 이런 나랑 혼인하느니 차라리 지금이라도 해소를―’

‘장가는 네가 나한테 오는 거겠지. 걱정 마. 네 동생도 남부럽지 않을 곳에 장가보내 줄 테니까.’

소월은 풀이 죽은 진해의 뺨을 잡고 이마에 입을 맞췄었다.

‘하지만 네가 다치는 건 조금 화나는군. 앞으로는 내 허락 없이 다치지 마.’

자신을 소중히 해 주는 소월의 말에 진해는 잠을 자지 못할 정도로 설렜었다.

“여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지 않나.”

추억에 잠겨 있던 진해를 깨운 건 예전과 비슷한 음색을 지녔으면서도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냉랭한 목소리였다. 북벌은 끝난 지 제법 되었는데도 월산의 몸은 여전히 북쪽에 있는 것 같았다.

“너는 여가 왜 파각사를 보냈는지 궁금하겠지.”

여지를 주지 않고 단호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서 진해는 거대한 빙하 덩어리를 마주한 듯했다. 확실히 저것은 진해가 아주 오랫동안 품어 온 의문이었다.

진해는 낯선 사람들이 제 사지를 움켜잡을 때도, 수상한 차림새의 사람이 기다란 바늘을 꺼내 들 때도, 오로지 머릿속에 왜라는 물음만이 가득 찼었다. 근 일주일이 넘도록 보이지 않아 어디 아픈 게 아닌가 크게 걱정하고 있던 터였다.

하지만 소월, 안월산은 그를 걱정하던 진해에게 파각사를 보냈다. 미려에게 먹일 연밥 덩이를 사서 돌아오던 진해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사지를 붙잡고, 커다랗고 긴 바늘을 수십 개를 꽂아 넣고, 그 바늘 위에 불을 붙인…….

<『환태자사건』7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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