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태자사건
6권
차 례
* * *
5부 세대은친 오진해 (2)
6부 죄인 오진해
5부 세대은친 오진해 (2)
“소가주 옥정려! 옥장합의 아들 옥묵려가 결투를 신청한다!”
“마찬가지로 옥곤합의 아들 옥존려가 결투를 신청한다!”
“옥장합의 아들 옥목려가 결투를 신청한다!”
놀랍게도 세 명의 도전자가 연회장에 들이닥친 것이었다. 가주에 도전하는 이들은 사병을 거느릴 수 있었고 당연히 서로의 사병을 막으려 했다. 연회장은 곧 사람 반 공기 반이 되고 말았다.
“헉, 일대다잖아?! 이래도 돼!?”
진해는 옥청려의 언급으로 도전자가 오리라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세 명이 한꺼번에 올지는 몰랐다. 진해의 눈이 동그래지는 것과 동시에 호별이 검을 움켜쥔 채 미려의 뒤를 지키고 섰다. 저들이 이곳까지 아무런 방해 없이 왔다는 건 시종 중에서도 저들과 내통하는 자가 있다는 말이었다.
“……쓰레기들이.”
그리고 그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던 미려가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섰다. 마치 무용의 한 동작처럼 고요하고 매끄러우면서 우아한 동작이었다. 꽃잎을 찍어 놓은 것처럼 매혹적인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온 것은 진해가 생전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우리 애가 저런 험악한 목소리를! 오호한테 옮았나 봐!’
미려는 진해가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뒤돌아섰다.
“형의, 세대은친의 얼굴을 봐서 목숨을 연명하게 뒀더니 감히 겁도 없이 머리를 들이미는구나.”
“그, 그러는 너야말로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소가주 행세냐! 우린 인정 못 해!”
“우부도 제대로 밝히지 못하는 놈을 어찌 소가주라고 인정할까!”
“서해 옥가의 비전을 제대로 익히지도 못했을 터!”
우부를 제대로 밝히지 못했다는 말에 강절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진해는 짧게 숨을 삼켰다. 차기 가주 자리에 근접한 자들이 저렇게 말할 정도면 강백서는 옥길합이 이 저택에 있을 땐 한 번도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예 이곳에 있지 않다거나.
“당장 목을 쳐도 모자랄 말이나.”
미려는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진해는 약간의 경계 태세를 갖춘 이들과 달리 목이 긴 술병을 움켜쥔 채 딸꾹질을 하고 있었다.
“은인 앞에서 피를 볼 순 없는 법. 한 번만 용서해 줄 테니 오늘은 물러가라. 흉한 꼴 보이기 싫으니까.”
그리고 미려는 진해가 무서워했던 험악한 목소리를 거두고 진해가 좋아하는 사근사근하고 매끄러운 목소리로 돌아와 제 종형제들을 달랬다. 미려의 입장에서는 엄청나게 관대하고 자비롭게 봐주는 것이었다.
“닥쳐! 우리는 이때까지 죽은 그놈들과는 다르다! 네놈을 죽이고, 우리 셋 중에서 정통한 가주를 낼 것이다!!”
하지만 도전하는 이들에게는 그 자비는 조롱과 마찬가지였다. 차기 가주로 촉망받다가 하루아침에 그 자리를 뺏긴 이들에겐 미려의 자비는 치욕과도 다름없는 것이었다. 옥묵려, 옥존려, 옥목려 세 사람은 각자의 소매를 걷으며 단번에 지면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저, 저거!”
그리고 진해는 그들의 손목에서 아주 놀라운 물건을 발견했다. 그들이 소매를 걷자 드러난 것은 붉은빛으로 번뜩이는 구리 채찍이었다. 언제 한 번 본 물건이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진해는 저것을 보자마자 자신이 증거 없이 심증만으로 맞췄던 정황이 사실에 근접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해산 역시 저들과 같은 구리 채찍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해산은 그것을 우후에게서 받은 몇 안 되는 가르침이라고 했었다. 그렇다면 황후 사마계는 누구에게서 저것을 받았는가.
“아악!”
“사람 살려!”
“도망가!!”
세 사람이 자신들보다도 훨씬 긴 구리 채찍을 종횡무진 휘두르기 시작하자 연회장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기 시작했다. 미려에게 뻗어진 첫 가닥을 호별이 달려들어 어렵게 튕겨 냈다.
“큭!”
미려에게 닿지 않은 채찍들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온갖 곳을 유린했다. 그곳에 자리한 물건과 사람 역시 화를 피하지 못했다. 도망가지 못한 시종들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솟구쳤다. 비명 하나 지르지 못하고 절명한 자도 있었다. 사방팔방 피가 솟고 살점이 튀었다. 붉었던 진해의 얼굴이 삽시간에 창백하게 변했다.
“우와악!”
그리고 눈 먼 채찍은 곧 진해에게로도 뻗어졌다. 어쩌면 애초부터 진해를 노리고 달려든 채찍일지도 몰랐다. 옥정려의 약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진해였으니까. 진해가 다친다면 옥정려는 이성을 유지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으니까.
“숙여라!”
하지만 진해에겐 백전노장의 강절곤이 있었다. 황아무도 있었다. 막지는 못해도 피할 수는 있었다. 강절곤은 진해의 멱살을 움켜잡아 황아무에게로 던졌고, 황아무는 진해를 받아 당장 둘러업었다.
“아얏!”
불행히도 그 와중에 부서진 집기의 파편이 진해의 뺨을 긁었다. 상처는 작았지만 피가 흘러 진해의 뺨을 물들였다. 진해의 신음 소리에 뒤를 돌아본 미려의 눈동자에 그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흑요석같이 투명하고 맑은 동공이 날카롭게 좁혀졌다.
“……호별, 알아서 피해라.”
“읏, 존명!”
미려는 황아무가 진해를 업고 연회장을 빠져나가는 걸 확인한 순간 오호에게 작게 중얼거렸다. 구리 채찍이 훑고 지나가 곱게 틀어 올렸던 미려의 머리칼이 풀어져 굽이굽이 흘러내렸다. 먹물처럼 새까만 머리칼이 바람도 불지 않는데 넘실거렸다. 오호는 자신의 주군이 공격받고 있는데도 미려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검을 집어넣고 당장 그 자리에 납작하게 웅크렸다.
“너희는 가주가 될 자격이 없어.”
옥묵려의 채찍이 미려, 옥정려의 목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서해 옥가의 가주는 냉정해야 한다지.”
틱, 보이지 않는 뭔가가 그 채찍을 튕겨 냈다.
“뭐, 뭐야!”
“연회장에서는, 금강사를 소지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당황한 옥목려의 채찍 역시 옥정려에게 쇄도했다. 텅, 옥목려의 채찍이 뭔가에 붙잡힌 것처럼 허공에 멈췄다. 잡아당겨도 거둬지지 않았다.
“하나만 묻지. 너희 눈에 지금 현 가주는 어떤 이이지? 냉정한가, 현명한가?”
마치 싸늘한 음성이 보이지 않는 뭔가가 되어 둘의 채찍을 막은 것 같았다. 채찍의 주도권을 뺏긴 두 사람은 긴장한 채 침을 삼켰다. 공격할 수 있는 건 옥존려 하나뿐이었다.
“다, 당연하지! 서해 옥가를 가장 번성하게 만드신 건 백부님이시니까! 현명하고 누구보다 냉철하시다!”
채찍을 뺏기지 않았음에도 옥존려는 보이지 않는 뭔가에 심한 압박을 받으며, 쫓기듯이 절박하게 부르짖었다. 가주 옥길합이 자신을 구원하기라도 할 것처럼.
“후후.”
그리고 옥정려는 그의 대답을 듣자마자 나지막한 웃음을 흘렸다. 피와 살점, 신음이 엉킨 연회장 안에서 그의 웃음이 오싹하게 울려 펴졌다. 산발이 된 머리채 사이로 화사하고 영롱한 눈동자가 셋을 향했다. 결코 닮아서는 안 될 이를 닮은 얼굴, 그러면서 가주를 닮은 얼굴이 그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누군가는 그 얼굴이 서해 옥가에 멸망을 가져올 것이라 했다.
“어?”
그리고 옥정려가 손을 앞으로 뻗은 순간 옥존려는 자신이 채찍을 쥐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정확히 말하면 채찍을 쥔 손이 손목에 붙어 있지 않았다.
“아악!!!!!!”
옥존려가 끔찍한 비명을 지르는 사이 그의 곁에서 거친 피보라가 뿜어졌다. 옥목려와 옥묵려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목이 잘려 나갔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이 데려온 사병들도 바람이 훑는 것처럼 빠르게 목이 잘려 나가고, 팔이 잘려 나가고, 빠르게 사람의 형체를 잃어 가고 있었다.
“힉, 히익!”
연회장 안에서 다친 팔을 움켜쥐고 있던 시종이 그 모습을 보며 오줌을 지렸다. 그리고 연회장 안팎으로 펼쳐진 붉은 실을 보며 몸을 떨었다. 원래는 새하얗게 빛나야 할 금강사가 피에 물들어 있었다. 언제부터 펼쳐져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쩌면 연회가 시작될 때부터 있었는지도 몰랐다.
“끝났다.”
“예.”
옥존려의 비명도 멎고, 털썩털썩 쓰러지는 소리가 끝이 나자 오호가 웅크리고 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웅크리고 있던 호별, 오호보다 높은 위치에 있던 것들은 거대한 칼날이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제 형체가 없었다.
“며, 멸살은화진, 멸살, 멸살! 가주, 멸살!”
오줌을 지리던 시종이 반쯤 정신이 나가 중얼거리던 것을 무시하고 옥정려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다가 진해가 기다리고 있을 바깥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옥정려의 옷에는 피 한 방울 묻지 않았다. 오호는 미려가 제 옷차림을 살피자 바닥에 떨어진 관을 주워 깨끗이 닦은 뒤 잽싸게 옥정려의 의관을 정돈해 주었다.
“형, 미안해. 많이 기다렸지?”
옥정려는 진해가 겁을 먹지 않았을까 싶은 염려로 가슴을 두근대며 바깥으로 향했다. 오호에게 뒤처리를 맡긴 채 진해를 달랠 말을 고르며 진해가 있을 정원을 서성거렸다.
“형아?”
하지만 이상하게도 진해와 강절곤, 황아무는 정원은커녕 그 어느 곳에서도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덜컥 불안해진 미려는 황급히 그들의 처소로 달려갔지만 그곳 역시 빈 것은 마찬가지였다.
차갑게 식은 진해의 방을 본 순간 미려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온갖 거짓과 더러운 짓을 써 가며 불러들인 형이 자리에 없었다. 사랑하는 이가 제 손에 없었다. 제 시야에 보이지 않았다.
“형, 형!! 진해 형!!!”
오호가 정돈해 준 의관이 흐트러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미려는 미친 사람처럼 온 집 안을 헤매고 다녔다. 조금 전 옥정려가 종형제 세 사람을 도륙했다는 소식을 들은 집안사람들은 그의 화를 살까 봐 그가 지나갈 때마다 납작 엎드려 말 한마디 함부로 걸지 않았다. 기이한 침묵 속에서 정려는 눈이 가려진 사람처럼 마구잡이로 복도를 헤매었다.
“아들아.”
그런 그를 멈춰 세운 건 가주 옥길합이었다. 옥길합은 눈을 가렸는데도 전혀 불편한 기색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땀에 흠뻑 젖은 미려의 눈가를 훔쳐 주었다.
“없어, 없어요, 형이, 내 형이, 없어……!”
“뭘 그리 걱정하느냐. 이곳은 월국이 아니야. 해국이다.”
“헤어지기 싫어요, 형이 돌아가 버리면 어떡해요!”
옥길합은 정신이 나간 것처럼 중얼거리는 미려를 보며 나지막이 웃음 지었다. 상심한 아들을 두고 웃음 짓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등 뒤에 선 가신들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들은 옥길합이 왜 웃는지 아주 조금은 이해하고 있는 이들이었다.
“내가 너에게 이름을 내릴 때 약조했었지. 너에게만은 결코 나와 같은 고통을 안기기 않겠다고.”
옥길합은 불안함으로 헐떡이는 미려를 품에 안았다. 어릴 때 헤어진 아들이 저만큼이나 크게 장성하여 제 품으로 돌아왔다. 자신이 사랑하던 그와 꼭 닮은 얼굴이었다. 서해 옥가의 비전을 위해 태어난 것처럼 완벽한 체질을 타고난 아이였다. 자신처럼, 열정적인 아이였다. 뭔가를 위해 미칠 줄 아는, 미쳐 버린 아이였다.
―서해 옥가의 가주는 미칠 줄 아는 자여야 했다. 범인과는 궤를 달리해야 그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
“강해아가 해국에 있는 한 그들은 돌아올 수밖에 없어. 그리고 그들이 돌아오는 순간 이 아비가 그를 완전히 네 손 안에 쥐여 주마. 너에게만은, 너에게만큼은 이 아비의 고통을 안겨 주지 않을 것이다.”
속만큼은 자신과 너무나 닮은 아들을 다독거리며 옥길합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옥길합은 방금 오진해와 일행이 습격을 핑계로 대문을 빠져나갔다는 소식을 들은 참이었다. 그들은 그것이 성공이라 믿겠지만 사실은 그것 역시 옥길합의 계획의 일부였다. 옥길합은 열정적인 이였고, 낭만적인 이였고, 미친 이였다. 그는 오진해가, 강해아가 이 집에 돌아왔을 때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그가 제 스스로 자신의 아들을 선택하게 될 바로 그때를.
* * *
연회장 밖에서 당황하던 황아무를 이끈 건 강절곤이었다. 진해 역시 황아무의 등에 업힌 채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처음에는 강절곤의 처소 쪽으로 달려가나 싶었는데 강절곤은 아니나 다를까 두 사람을 후원으로 데려갔고, 진해는 소매에서 못 보던 피리를 꺼내 있는 힘껏 불기 시작했다. 그러자 옥가의 사람이 분명해 보이는 음인이 나와 그들을 급히 어딘가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변고입니다!”
옥청려는 후원을 가로지르며 향을 가리는 향낭을 차고, 얼굴을 가리는 큰 겉옷을 뒤집어썼다. 귀한 집의 미혼 음인들이 주로 외출할 때 하는 복장이었다.
“귀빈들을 어서 대피시켜 드려야 합니다! 안에 아주 난리가 났어요!”
“뭐, 난리?”
진해가 뺨에 상처가 난 채로 업혀 오자 서해 옥가의 문지기들은 적잖이 당황했다. 거기다가 본래라면 뒷문으로 몰래 드나들어야 할 안채의 음인이 대문까지 나오니 더욱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황아무는 뭐가 뭔지 몰랐지만 대문 앞에 이르자 대충 상황을 파악한 듯했다.
“뭘 멍하니 있는 건가! 만약 오 대인의 신변에 문제라도 생기면 네놈들이 책임질 것이냐! 오 대인께 문제가 생긴다면 나 황아무가 가문을 걸고 절대 용서치 않을 것이다! 이곳에서 뼈를 묻을 각오로 네놈들을 응징할 것이다!”
“아니, 대체, 그러니까 저희는 아무 소식도―”
상황이 아무리 급박해 보여도 서해 옥가의 문지기는 그 자리를 거저 얻은 것이 아님을 증명하듯 쉬이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그러자 진해가 슬쩍 제 뺨을 눌러 피를 내면서 황아무의 등짝 위에서 앓는 소리를 냈다.
“아이고, 아이고, 아버지, 이렇게 아버지 곁으로 갑니다! 술을 먹여 준다더니 날 죽이려 하고 있어! 아니, 뭐가 휭휭 날아다니는 거야~!”
진해의 뺨에서 새빨간 것이 주르륵 흘러내리자 문지기의 등에 식은땀이 맺혔다. 황제의 나라인 월국의 사신이자 가문에서 대대로 은인으로 모시기로 한 이의 뺨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가주가 농처럼 가문을 줄 수도 있겠다고 말한 이였다. 서해 옥가의 하인들 사이에서는 어쩌면 오진해가 가주의 안배 아래 분가의 사위가 되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 난무했다.
어쨌거나 높으신 분이었다. 잘못되었다가는 문지기들 따위는 단번에 목이 날아갈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난장판이 따로 없습니다. 어쩌면 차기 가주가 갈릴 수도 있겠어요.”
“아니, 그 정도란 말이오?”
“말도 마십시오. 오죽하면 음인인 제가 이런 차림으로 여기까지 왔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보기 전에 얼른 돌아가야 합니다. 만약 제 정혼자가 이런 난잡한 모습을 보고 정숙하지 못하다고 하여 파혼이라도 하면 아버지께서는 크게 노하시어 저를 내쫓으실 테고, 저는 기댈 곳 없이 정처 없이 떠돌다가 큰 화를 당하게 될 것이며, 비록 쫓겨났다고는 해도 서해 옥가의 피를 이은 제가 화를 당했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면 근방의 음인들이 모두 두려움에 잠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어, 어, 그래?”
“그뿐만이 아닙니다. 저는 화를 입게 된다면 제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속곳만 걸친 채 관청 앞에서 목을 맬 것입니다.”
“헉.”
“사방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며 저를 가여워할 것이며 민심을 잠재우기 위해 관청에서 제게 화를 입힌 이를 찾기 시작할 것입니다. 아마 제가 어째서 쫓겨나게 되었는지부터 조사하겠지요. 그렇게 된다면 포교가 가장 먼저 찾아올 사람은 바로 당신!”
“나?!”
“그렇습니다. 지금 귀인의 앞길을 막고, 정숙한 제가 문가에서 오도 가도 하지 못하게 막고 있는 당신입니다.”
문지기는 옥청려의 논리정연하면서도 장황한 설득에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듣고 있던 강절곤과 황아무도 정신이 멍해질 정도였다. 오로지 이 자리에서 진해만이 옥청려의 말에 맞아, 맞아 추임새를 넣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
그리고 장황한 설득에 방점을 찍듯 옥청려가 고개를 반쯤 돌리고 훌쩍거리는 소리를 냈다. 긴 겉옷에 눈가를 비비며 눈물을 찍어 내는 모습도 보였다. 넋이 나간 문지기는 그 모습을 보자 매우매우 곤란해지는 걸 느꼈다. 명문가의 미혼 음인이 귀인을 위해 자신의 정숙함을 걸고 문밖으로 나왔는데 자신은 지금 그 길을 막고 있는 것이다. 물론 진해는 그것이 우는 시늉을 하는 것뿐이라는 것을 간파했지만.
“그렇게까지 급박한 사태라니 어쩔 수 없지! 오 은인, 멀리 가지 마시고 가까이 계셔야 합니다. 곧 사람들이 모시러 갈 테니까요.”
“지금 오 어사를 위험하게 하는 건 바로 이 집구석일세! 가세나, 황 시위!”
“예!”
마치 노여워서 견딜 수 없는 것처럼 강절곤이 으르렁거리자 문지기는 이젠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자리를 비켜 주었다. 옥청려는 그들이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얼른 안채로 돌아갔다.
아니나 다를까, 안채는 발칵 뒤집혀 있었다. 옥청려는 뒷간에 다녀오는 척 썼던 겉옷을 아궁이 속에 집어넣었다. 향낭은 이 집 음인이라면 모두 다 쓰는 것이니 굳이 숨길 필요가 없었다.
“아악, 내 아들들이!”
그러나 옥청려가 굳이 공을 들일 필요도 없을 정도로 안채는 엉망진창이었다. 옥묵려와 옥목려의 우부가 아들들의 시신을 확인하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실신했다. 좌부 옥장합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그저 부들부들 떨고 있을 뿐이었다.
“저 꼴을 안 보고 나가서 망정이지.”
옥청려는 안채 마당에 하나둘씩 수습되는 시신들을 바라보다 아무렇지도 않게 몸을 돌렸다. 훌쩍거리는 다른 음인 종형제들과는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함께 훌쩍거릴 수 있으면 편하련만, 그러기에는 옥청려가 가슴에 품은 꿈과 뜻이 너무나 컸다. 옥청려는 제 처소로 향하다 부러운 시선으로 죽은 이들의 응시했다. 양인으로 태어난 덕에 분수에 맞지 않는 가주 자리에 도전하다 죽은 이들을.
* * *
“야 이 개자식아!!!”
황 시위의 등에 업힌 탓인지 진해는 조금 겁이 없어졌다. 어쩌면 제 피 냄새에 흥분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장래의 낭군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개자식이라니. 말이 너무 심하지 않아?”
“누가 낭군이야! 장래의 낭군이 될지도 모르는 이를 내팽개치고 도망가는 놈이 어딜 낭군 소리를 씨부려! 어림 반 푼어치도 없으니까 꿈 깨시지! 역시 음인은 뭐니 뭐니 해도 월국 음인이야! 월국 음인 만세! 해산 도련님 만세! 삼랑이 만세!”
“하하, 대체 뭔 일이 있었길래 이러는 거야. 뭐, 대충은 알겠지만.”
제갈군무는 의외로 가까운 여각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의식주에 별 관심이 없는 고산국 사람답게 소탈한 여각에서 여각 주인과 시시껄렁한 잡담을 나누던 중에 진해의 눈에 포착되었다.
진해는 제 귀한 볼때기에 피를 볼 동안 제갈군무는 편하게 수다나 떨고 있었다는 사실에 극렬히 분노했다. 황 시위의 등에서 제갈군무를 향해 뭐라 뭐라 짖어 대기 시작했다. 그 비난이 어찌나 극렬했던지 황 시위와 강절곤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할 정도였다.
“화 풀어~ 나라고 아무것도 생각 안 하고 오 소협을 두고 나왔겠어? 그리고 어차피 창명후가 같이 있잖아. 지금쯤 창명후가 없어진 걸 진작 알았을 테니 월국에서도 무슨 수를 썼겠지.”
“저 영감 말고 나는! 나는!”
“하하하, 그러니까 내 말이 그 말이라니까? 창명후도 여기에 있고, 오 소협도 여기에 있고, 확신할 수 없으나 강백서도 여기에 있고. 그럼 당연히 누가 쫓아오겠지?”
“설마! 고산패자, 그대 지금 천협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하고 있는 건가!”
강절곤이 정색하자 제갈군무가 빙긋 웃음 지었다. 그리고는 느긋하게 기대 있던 몸을 일으켜 황아무에게로 다가왔고 손을 뻗어 분을 삭이지 못한 진해의 옷자락을 잡아 진해를 황 시위의 등에서 달랑 들어 올렸다. 진해는 옷자락만으로 저를 들어 올리는 제갈군무의 괴력에 입에 아교라도 들이부은 것처럼 조용해지고 말았다. 어째서 이 무서운 사람한테 대들었는지 급격히 후회가 밀려왔다.
“역시 창명후. 창명후 당신도 몰랐다고는 하지 않겠지. 당신이 위험에 빠지면 대사형이 당신을 찾으러 올지도 모른다는 걸 말이야.”
“흥. 허튼 소리. 내 아들과 손자가 실종된 후로 난 결코, 결코 천협을 본 일이 없네! 오히려 원망받으면 모를까 구출은 어림도 없는 일이야!”
“하하. 그래, 그래. 당신만이면 그럴지도 모르지. 당신은 장강성의 성주이니 대사형이 손 쓰지 않아도 월국 황제가 손을 쓸 테니까. 근데 말이야. 창명후 합하, 이것 좀 봐.”
제갈군무는 강절곤이 부정하거나 말거나 진해를 달랑 들어 올린 채로 진해의 옷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꺅! 내 순결한 몸뚱이를!!”
“헛! 오, 오 대인! 패자 저하! 지금 무슨 짓을 하시는 겁니까! 이분께는 장래를 약속하신 음인이 있거늘!”
“이런 흉악한 놈! 어린 양인을 희롱하려는 게냐!”
진해의 옷 속에 손을 집어넣자 옆에서 강절곤과 황아무가 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진해는 연상의 음인이 아닌 연상의 양인이 제 몸을 더듬는 감각이 심히 불쾌했다. 그러나 제갈군무는 무작정 진해의 몸을 더듬는 게 아니었다. 제갈군무는 정확히 진해의 목 부근을 노렸고, 손에 걸리는 걸 확인하자마자 큰 문제를 해결한 사람처럼 만족스럽게 웃음 지었다.
“봐, 창명후. 이게 있으면 오천협이 해국이 아니라 지옥이라도 쫓아올걸?”
제갈군무의 손에 잡힌 건 진해가 애지중지 목에 걸고 다니는 고산홍패 목걸이였 다. 진해의 좌부와 우부의 정표일지도 모른다는 소리를 들은 후로 진해는 더러운 비단 끈을 새 끈으로 바꾸고 목걸이가 끊어지지 않도록 아주 단단히 매듭지어 놓은 채였다.
“놔, 이 변태 놈아! 그리고 내 물건에 손대지 마!”
진해는 제갈군무가 목걸이를 움켜쥐자 우스꽝스러운 비명을 질렀던 것과 대조적으로 날카롭게 이를 드러냈다. 고산패자가 아니라 황제 폐하라도 우부가 남겨 준 보물에 함부로 손을 대서는 아니 되었다. 진해가 제갈군무의 손을 치자 제갈군무는 순순히 진해를 놓아주었다. 진해는 제갈군무를 찌릿 노려보며 옷자락으로 소중히 고산홍패 목걸이 위를 문질렀다. 아무래도 저놈의 손때가 묻은 것 같았다.
“저, 저건…….”
제갈군무가 산뜻하게 진해와 거리를 벌린 반면 강절곤의 눈을 홉떠진 채로 감아질 줄 몰랐다. 강절곤은 진해가 제일 깨끗한 옷자락으로 반질반질 윤을 내는 고산홍패 목걸이를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었다.
‘희한한 색의 옥이로구나.’
‘아버지, 이건 옥이 아니라 조개입니다.’
‘조개? 고산국은 산지가 아니더냐?’
‘하하, 산에서 나는 산조개인데 보통 조개가 아니지요. 제 경지로는 구할 수 없는 물건인데.’
강절곤의 회상 속에서 아들은 제 이름의 마지막 글자가 새겨진 패물을 소중히 쓰다듬었다. 배 속의 아이에게 보여 주기라도 하듯 태동을 시작한 배 위에 그것을 올려 두고 녹아내릴 것처럼 부드럽게 미소 지었었다.
‘대사형이 절 위해 구해 주었습니다. 오직 저를 위해 이것을 새겼습니다. 그이와 저의 정표이지요.’
그런데 그것이 지금 오진해의 손안에 있었다. 아들 강백서, 손자 강해아와 함께 사라진 물건이 오진해의 손안에서 매끄럽게 윤을 내고 있었다.
‘제 보물입니다.’
한때는 강백서의 허리춤에 달렸던 패물은 세월을 타지 않은 것처럼 그때와 한 점도 다르지 않은 모양을 유지하고 있었다. 진해가 호호 입김을 불어 닦을 때마다 강절곤의 시야가 아득해졌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했다.
“…….”
생각지도 못한 물건이 등장하자 강절곤은 정신이 혼미해졌으나 오히려 그 아득함이 그의 이성을 붙잡아 주었다. 강절곤은 거칠어지려는 호흡을 바로잡고 매섭게 제갈군무를 노려보았다. 이놈은 제 사위를 부른 뒤 결투에서 승리해 고산패왕이 되려는 놈이었다. 제가 한눈을 판 새 가짜를 오진해의 목에 걸어 뒀을지도 몰랐다.
“저것이 진짜라는 증거는 있는가.”
고산홍패가 가짜라는 소리를 하자 제갈군무가 뭐라 하기 전 오진해가 목소리를 높이며 바락바락 대들었다.
“이 영감이 요새 가만히 있더니 또 노망이네! 이건 어조원의 괴, 아니 소패군 일홍련이 검증한 진짜 고산홍패거든! 우리 우부가 나랑 헤어질 때 내 목에 걸어 주고 간 거란 말이야! 이걸 들고 있으면 언제든 우부가 날 알아볼 수 있게 말이야!”
“…….”
“홍패연리익이 속을 정도면 고산국에서 수입하고 싶을 정도의 위조품이지. 고산홍패는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니까. 나도 구하고 싶은걸?”
강절곤이 그 말을 듣고 입을 다물자 옆에 있던 진해만 신이 났다.
“그래? 제갈 형, 그럼 내 좌부가 고산국에서도 먹어 주는 무인이었던 거지? 이게 그렇게 구하기 힘든 거면 우부한테, 조금은 진심이었던 거지?”
“그걸 변덕으로 주는 놈이면 백 첩을 둬도 인정해야지.”
“헤헷. 그렇단 말이지.”
진해는 강절곤의 표정이 아연해지거나 말거나 우부가 일방적으로 좌부에게 버림받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진해의 좌부는 고산국의 고강한 무인인데 사정이 있어 우부와 헤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어쩌면 전쟁통에 전사하는 바람에 우부가 저를 홀로 키웠을지도 모른다. 진해는 옆에서 제 조부가 저를 지켜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홀로 상상의 나래를 폈다.
“어떻소, 창명후. 이래도 대사형이 오지 않을까?”
그리고 강절곤은 오천협이 자신에게 해아를 찾았다고 말했던 때를 떠올렸다. 딱 이놈이 활개를 치기 시작할 때였다. 그리고 오진해 이놈과 원수의 자식인 해원공의 혼담이 오가던 때이기도 했다.
“으윽.”
“헛, 영감! 설마 내가 소리 질러서 놀란 거야?! 의외로 약골이잖아?!”
강절곤은 갈라지는 신음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어느새 눈앞이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살아 있었다. 죽지 않았다. 무사히 살아 이렇게 크게, 건강하게 자라 있었다.
“오 대인, 아무래도 노쇠하신 몸으로 무리하신 듯합니다. 패자 저하, 송구합니다만 머무시는 방을 빌려도 되겠습니까?”
“당연히 되고말고. 맘대로 써. 필요하면 아예 거기서 자든 가. 난 다른 방을 빌리면 되니까.”
강절곤은 신음으로 눅눅하게 젖어 드는 입술로 손자를 부르려 했다. 완전히 확정할 수 없었지만, 이 아이가 손자일지도 모른다는 마음이 들자마자 철옹성 같던 마음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영감 울어?”
진해는 황아무가 강절곤을 부축하는 사이 목걸이를 다시 잘 갈무리해 넣었다. 강절곤이 저를 바라보며 철철 눈물을 흘리자 차라리 자기가 뛰고 황아무가 강절곤을 업게 할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내 정실의 성은 수씨였고, 이름은 강건이었다.”
“응?”
“손재주가 있어 얼굴에 분을 칠하면 아주 건강해 보이기까지 했다……. 서예를 즐기는 이들의 수집품에 한 점씩 기여하던, 그런 이였다…….”
그리고 수강건은 죽기 직전 손자들을 보지 못함을 안타까워했다. 어린 막내아들이 혼인하는 걸 보고 죽지 못함을, 강절곤과 함께 할아버지의 생을 누리지 못함을 슬퍼했다.
“알았어, 빨리 강해아를 찾을게. 제갈 형이랑 머리 좀 굴려 볼 테니까 영감은 가서 쉬어.”
진해는 제 손에 치덕치덕 엉겨 붙는 눈물 젖은 손을 몇 번 두드려 준 뒤 황아무에게 강절곤을 데려가도록 눈짓했다. 강절곤은 버티려 했지만 진해가 등을 밀고, 황아무가 몸을 끌자 어쩔 수 없이 질질 끌려가야만 했다. 눈물이 흘러 앞이 보이지 않는 것도 한몫했다.
“생각보다 많이 힘들었나 보네, 쯧쯔.”
“그러게 말이야, 오 소협.”
제갈군무는 강절곤의 그런 반응을 보며 매끄럽게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자 그럼 우리 오 소협은 왜 그리 급히 날 찾아왔을까.”
“왜긴 왜야. 이 의리 없는 양반아.”
진해는 병약자가 빠지자마자 제갈군무에게 눈을 부라려 보였다. 그리고는 그렇게 피 터지는 집구석에 연약한 저를 홀로 두었음에 항의했다. 제갈군무는 옥정려가 동시에 세 명의 경쟁자를 상대했다는 말에 웃음을 흘리며 즐거워했다. 태생이 고산국 무인인 그는 강자를 사랑하고, 강자와 대결하는 것을 즐겼다. 그의 남편 후보 중 하나가 괜히 그의 대사형이 아닌 것이다.
“하하, 흥미로운데. 해국 음인들은 모두 담이 작다고 알고 있는데 한꺼번에 세 명을 부채질할 정도의 기량이 있는 자라니.”
“책임질 생각 없으면 흑심 품지 마쇼! 품더라도 적어도 내가 강해아를 데리고 월국으로 간 다음에 품으라고!”
“내 신뢰가 아주 바닥을 친 모양이군. 구혼하고 있는 자가 있거늘 어찌 한눈을 팔겠나.”
“헛소리하네. 나한테도 남편 후보 운운했으면서.”
“말이 그렇다는 거지. 오 소협은 남편 후보보다는 음, 그래. 아들 후보.”
“……고산국에서는 패륜이 유행이야?”
“하하하, 설마.”
진해가 의심스러운 눈길로 흘겨보며 옷섶을 여미자 제갈군무는 진해를 아주 귀여워 죽겠다는 눈으로 봤다. 하긴 어찌 아니 귀여울 수가 있을까.
제갈군무는 진해의 화를 풀어 줄 겸 배도 채울 겸 이 여각에서 제일 잘 나간다는 특미 생선 만두를 주문했다. 해국은 그 이름을 증명하듯 바다와 인접한 곳이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수도에도 때때로 그곳의 생선이 유입되곤 했다. 이 여각의 주인도 바닷가 출신이었다.
“맛있어!”
“얼마든지 시켜 줄 테니까 더 먹어.”
“나도 돈 있거든요! 이거 안 보여?”
“알록달록하긴 하군.”
어쨌거나 제갈군무는 진해가 귀엽다 못해 기특할 지경이었다. 사질이라서 그런 것도 있었고, 자신의 꿈을 이루어 줄 발판이라 그런 것도 있었다.
월국 사람들은 몰라도 고산국의 무인들은 단 한 사람도 오천협이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오천협이 죽는다는 발상 자체를 안 했다. 오천협은 강했으니까, 괴물 영감이라 불리는 사부와 호각을 이룰 정도의 경지를 이루었으니까.
“이거 비싼 거야! 혹시 고산국에는 산호가 없어?”
“고산국은 산지야, 오 소협.”
“아니 산호가 바다에서 나는 거라는 걸 알면 귀한 것도 아는 거잖아?!”
분명히 숨을 죽이고 때를 기다리고 있을 터.
“오 소협, 그런 건 쉽게 부서지잖아. 고산국에선 금전은 중요하지 않아. 이게, 중요하지.”
“……주먹?
“힘이라고 해 주겠어?”
그리고 오천협이 움직이는 순간 월국에서는 유혈이 낭자하게 번져 나갈 것이다. 제갈군무나 사부가 나서지 않는다면 월국에서 오천협을 막을 자는 없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제갈군무는 오천협이 더할 나위 없이 가슴이 따뜻한 의협인이라는 것도 알았다. 지금은 짐승처럼 덤불에 숨어 눈을 빛내고 있지만 오천협은 고산국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무인이기도 했다. 오죽하면 사숙 중에서는 사부와는 원수처럼 싸우면서 오천협과는 화기애애하게 지내는 자도 있을 정도였다.
“그럼 난 고산국에 가면 천민이겠네?”
“무슨 그런 소릴. 우리 귀여운 오 소협을 누가 천민 취급을 해? 데려와.”
제갈군무는 과거 사부에게 데굴데굴 굴러 상처투성이던 자신을 안아 올리던 손을 떠올렸다. 크고 투박했지만 따뜻한 손이었다. 칠 사형과 대사형의 손을 한쪽씩 잡고 있으면 제갈군무는 사부조차 부럽지 않은 만족감을 느꼈었다. 마치 가족이 된 것처럼 따스하고 화목한 가정에 속한 듯한 기분이었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제갈군무가 품은 꿈의 시작이었다. 제갈군무가 고산패왕을 목표로 삼기 시작한 계기였다.
화목하고 튼튼한 가정을, 누구보다도 끈끈하고 우애로운 가족을.
“오 소협은 내 소중한 사람이 될지도 모르니 내가 가볍게 손을 봐 주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고 귀찮고 허약하기만 했던 막내 사제를 챙겼던 대사형이라면 사랑했던 이의 자식이자 자신의 핏줄인 오진해를 지옥 끝에서라도 찾으러 올 것이었다. 제갈군무가 아는 오천협은 난관을 부수고 언제나 새로운 경지를 이룩하는 자였고, 사랑하는 것들을 위해 누구보다도 강해지는 자였다.
제갈군무가 세상에서 가장 경애하고 함께하고 싶은 사내였다.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하는 사내이기도 했다.
“패왕의 가족을 욕보이면 어떤 꼴이 되는지 보여 줄 테니.”
동공이 거세게 진동하는 진해를 바라보며 제갈군무는 빙긋 웃음 지었다. 제갈군무가 강해아를 찾아 이루고자 했던 바가 조금만 있으면 그 모습을 보일 것만 같았다. 오천협을, 대사형을 꺾고 패왕이 된다. 고산패왕이 된 뒤 고강한 대사형과 총명한 칠 사형을 휘하에 둔다.
―그리고 고산국을 왕국으로 만든다. 대사형, 칠 사형과 함께 고산을 철저히 평정하고, 깎고, 다듬어, 왕의 혈통을 세운다.
고산국에서 손꼽히는 최강자와 월국의 명문이자 수재인 강백서의 힘을 얻어 왕이 되는 것이 바로 제갈군무의 목표였다. 제갈군무는 고산을 짐승의 나라가 아닌 좀 더 문명적이고 사람다운, 따뜻한 피가 흐르는 나라로 만들고 싶었다. 언젠가 자신이 죽고, 왕가가 뒤집히더라도 혈통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그런 나라로.
그러기 위해선 반드시 오천협을 꺾고 패왕의 자리를 손에 넣어야 했다.
* * *
특미 만두로 배를 채운 뒤 진해는 여각의 긴 의자에 몸을 눕히고 졸기 시작했다. 제갈군무는 양심 없고 의리 없는 놈이었지만 적어도 진해 자신을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탓이었다.
그러기를 얼마 지나지 않아 진해의 근처에서 조심스러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진해는 발소리를 듣자마자 반쯤 잠이 깼지만 상대가 무슨 의도인지를 알기 위해 일부러 잠이 깨지 않은 척했다. 발소리의 주인은 원래 진해가 누운 의자에 앉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긴 진해 자신이라도 제갈군무같이 파렴치하면서 파괴적인 인물 곁에 앉고 싶지는 않을 터였다.
‘응? 제갈군무 저 작자는 겉보기에는 꽤 매끄럽게 생겨서 처음 보는 나도 홀랑 넘어갈 정도였는데? 오호라, 그렇단 말은 제갈군무가 누군지 알고 있다는 소리군.’
진해는 상대가 제갈군무 곁에 앉을 수밖에 없게끔 작게 코 고는 흉내를 냈다. 입을 벌리고 커― 소리를 내자 눈을 가린 팔뚝 너머로 곤란해하는 기색이 그대로 전해졌다.
“하하, 잡아먹지 않을 테니 앉지?”
이윽고 제갈군무가 어쩔 줄 몰라 하는 상대에게 말을 건넸다. 상대는 제갈군무의 친절한 제안에도 불구하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컥!”
이내 진해의 배 위에 걸터앉았다.
“뭐 하는 짓이야!!”
“아, 일어나셨군!”
“뭐가 일어나셨군이야?! 지금 잘 자는 사람 배 위에 엉덩이를 대고, 뭐? 일어나셨군!?”
“어, 어쩔 수가 없었으니 이해해 주시오……! 그, 나도 나름의 사정이 있어서…….”
“사정은 뭔 놈의 사정! 제갈 형, 아는 사람이야? 제갈 형 아는 사람들은 다 이래?”
“하하, 오 소협. 말이 너무 심하잖아. 난 오 소협이 부른 사람인 줄 알고 친절을 베풀었어. 물론 모르는 사람은 아니지만 말이야.”
“엥? 내가 부른 사람?”
진해는 제갈군무의 말에 황당함을 제쳐 두고 제 옆에 앉은 이를 유심히 살폈다. 얼핏 보면 평범한 집의 평범한 공자처럼 보였으나 진해의 세심한 눈초리가 그가 보통 집의 공자가 아님을 알려 주었다. 일단 손등이 잡티 하나 없이 말끔하고 깨끗했던 것이다.
“위층에 둘, 문가에 둘. 뒷문 쪽에 또 둘이 있네.”
게다가 제갈군무가 웃으면서 알려 준 호위의 숫자만 해도 보통 집의 공자가 데리고 다니기엔 심히 많은 숫자였다.
“흠, 흠. 청려가 알려 줘서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뵈러 왔습니다.”
“청려? 옥청려 말인가? 댁이 그 사람을 어떻게 알아? 해국에서는 미혼의 음인을 금덩이처럼 다루던데.”
사람을 금덩이처럼 다루는 게 꼭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 그건 말씀드리기가 좀.”
“연애야?”
“그, 그럴 리가, 요! 제가 어찌, 서, 서해 옥가의, 미, 미혼의 음, 음인과!”
“옥청려가 서해 옥가 사람인 건 어떻게 알았어? 해국엔 옥씨가 하나뿐이야?”
“어, 그건―”
“짝사랑이야?”
“예?! 아니, 아니, 그, 그게―”
“흠. 내가 본 청려 공자는 남을 막 신뢰하고 그런 성정은 아니었는데. 아, 혹시 서로 좋아하는데 집안이 안 맞는 거야? 그게 아니면 집안의 반대?”
“으으…….”
진해가 실실 웃으며 집요하게 파고들자 눈앞의 양인은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겋게 물들기 시작했다. 대담하게 진해의 배 위에 걸터앉은 것과는 대조적인 태도였다. 그 모습에서 진해는 이 공자가 꽤 귀한 집 사람임과 동시에 옥청려가 믿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과 또한 제갈군무를 생각보다 많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긴 제갈군무를 만난 후로 진해 역시 고산국 무인에 대한 동경이 나날이 사그라들고 있기는 했다.
“하하하, 오 소협! 정말 대단한데? 사신이 되기 전에는 어사로 있다고 해서 긴가민가했는데 심문하는 걸 보니 과연 형부의 관리다워!”
“어험. 제가 이래 보여도 월국 육품 중에서는 제법 잘나가는 편입니다. 상서 대인의 총애를 듬뿍 받고 있다고요.”
“그래, 그 정도는 되어야 내 아들 후보가 되지!”
“아들 후보도 짜증 나지만 남편 후보보다는 낫네요.”
“남편 후보에 그렇게 미련이 남았어? 그럼 좀 더 대담해져 봐. 해국 왕손에게 더 당차게 굴면 정말로 남편 후보로 삼을 마음이 들지도 모르지?”
“……뭔 손?”
진해는 제 귀를 관통하는 왕손이라는 단어를 들으며 제갈군무가 정말 짜증 난다고 생각했다. 이 인간이 고산패자만 아니었어도 절대 얽힐 일이 없었을 텐데! 연약하고 힘없는 관리인 자신의 탓이었다. 얼른 월국으로 돌아가 고산패자보다 배경이 빵빵하고, 가슴도 빵빵한 해산 도련님한테 이놈이 저한테 작업을 걸었다고 일러바치고 싶었다.
“아, 알고 계셨군요. 과연 고산패자십니다.”
“혼자 여행을 다니려면 당연히 여러 가지 준비를 해 둬야지. 정보를 모아 주지 않으면 데려가 버릴 거라고 했더니 아주 자세히도 가져오더라구.”
제갈군무는 그렇게 말하며 고산국에는 자신 같은 정파의 무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끔 외부로부터 의뢰를 받아 비밀스러운 일을 대신 해 주는 사파의 무인들도 있다고 했다.
얼핏 들으면 정파와 사파는 대립할 것 같지만 바깥의 예상과 달리 고산국 무인들은 생각보다 굉장히 잘 어울리고 있었다. 자신이 최강이라는, 그리고 최강이 될 것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흑암문 전임 장로가 받았던 의뢰 중에 해국 왕실에 관한 것도 있었지. 그때 전해 줬던 독이 아직 남아 있을 거라던데? 왕손도 조심해. 지금은 누구 손에 들어갔을지 모르니까.”
“……예.”
또한 고산국 무인들은 자신의 수련을 방해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다. 현 흑암문 장로가 제갈군무에게 순순히 자료를 넘겨줬던 것은 제갈군무가 바깥에 익숙한 그를 데려가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정파의 어린놈인 제갈군무가 고산패자가 된 것도 마음에 안 차는데 한참 수련 중인 자신을 데려가려는 건 더 싫었다. 그로 인해 제갈군무는 자신을 데려갈까 봐 겁이 난 다른 파 무인들에게서 자료를 받았고 월국 황실과 해국 왕실, 그곳의 고위 관료들에 대한 정보를 싹 얻을 수 있었다.
“근데 서해 옥가와 왕손이 내통하고 있는 줄은 몰랐네. 흑암문에 선물로 가져가야겠어.”
“…….”
“그런 것보다 우리를 찾아왔다는 것은 왕손이 서해 옥가를 상대할 마음이 있다는 거로, 그런 거로 이해하면 되려나?”
“엥?”
진해는 아무렇지도 않게 독 이야기를 꺼냈던 제갈군무를 뜨악하게 봤다가 왕가와 서해 옥가가 대립한다는 이야기에 눈이 뭐만큼 커다래졌다. 아니, 서해 옥가와 왕실은 오랫동안 인척 지간이 아니었던가!
“이야기가 빠르시군요.”
하지만 진해가 놀람을 진정시킬 새도 없이 해국의 왕손이라는 공자가 제갈군무의 말에 답했다. 진해의 심문에 거세게 동요하던 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한 시선이 제갈군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예, 맞습니다. 해국 왕실, 아니 저 사마균은 서해 옥가와 해국 왕실의 연을 끊고 왕실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 싶습니다.”
“겸사겸사 그쪽이 왕위에 오르는 것도 포함해서 말이지.”
제갈군무가 아주 재밌는 이야기를 보는 것처럼 밝게 웃음 짓는 사이 진해는 얼빠진 얼굴을 수습하며 머리를 굴렸다. 자신은 강해아만 데리고 돌아가면 되는데 해국 왕실의 왕손이 왜 이 자리에 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진해는 곧 옥청려가 해국 왕손을 자신에게 찾아오게 한 이유를 깨달았다. 굳이 왕가와 손을 잡아야 하는 이유를.
‘빌어먹을! 옥 가주는 애초에 날 돌려보낼 생각이 없구만!’
진해와 사행단이 왜 찾아왔는지 알면서도 옥 가주는 이때까지 한 번도, 단 한 번도 강백서와 강해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진해에게 껌벅 죽는 미려마저도 요지부동이었다. 진해는 단순히 환영이 길어진다고 생각했지만 내부 사람인 옥청려는 진작부터 가주의 속내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가주는 오진해를 돌려보낼 생각이 없다는 것을.
‘청려 공자. 만약 청려 공자가 옥첩려와 우애가 깊었다면 난 진짜 큰일 났을지도 몰라. 첩려 그놈과 달리 청려 공자는…….’
진해는 옥청려가 월국에 태어났더라면 세간에 명성이 자자한 권세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본래 음인이 가주가 되는 것이 전통이었던 월국에서라면 옥청려는 개 버릇 가진 제 형을 제치고 당당히 가주 자리에 도전했을 것이다. 자신의 가문과 대적하기 위해 왕실과 손을 잡는 이 대담함을 보면 안 봐도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뭐……. 어차피 사신으로 온 이상 해국 왕님을 보러 인사를 가려고 하긴 했어.”
“그러시군요! 전…… 오 사신께서 일부러 서해 옥가로 가신 줄 알았습니다.”
“내가 아무리 그 집이랑 친해도 관직에 몸담은 이상 그렇게 하겠어? 입국할 때 날 그 집에서 바로 데리고 갔다구!”
진해가 일단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자 사마균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진해는 옥청려가 사마균을 왜 신뢰하는지, 혹은 왜 좋아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바르고 준수한 남자였다. 경직된 구석도 있지만 그 경직됨은 나침반과 같은 종류의 방향성이었다. 혼탁한 세류에 휩쓸리지 않고 꾸준히 이상을 향하는 그런 종류의 기질이 엿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옷이 이래서 괜찮을까? 잠깐 시장에 들렀다 가지?”
“아.”
사마균은 서둘러 제 사람들을 부르려다 진해의 목과 팔, 발목에 주렁주렁 매달린 패물들을 바라보았다. 호화로운 차림이었지만 왕의 앞에 나서기엔 좀 난잡한 차림새였다.
제갈군무는 빙글빙글 웃으며 그런 진해를 바라보기만 했다. 어차피 오천협이 오기 전까지 그는 아무런 할 일이 없었다. 그가 해국에 오지 않더라도 진해를 따라다니다 보면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사실 제갈군무가 힘을 쓰면 옥길합에게 강백서와 강해아를 내놓으라 요구할 수도 있지만 지금의 제갈군무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일단 옥길합이 데리고 있다고 소문이 난 강해아가 이렇게 버젓이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칠 사형이 있다는 것 역시 거짓이 분명하다. 제갈군무는 진해를 보자마자 그렇게 판단하고 서해 옥가에서 바로 빠져나왔다. 옥길합의 계략에 소름 돋기도 해서였다. 소문이 어찌 되었든 오진해는, 강해아는 서해 옥가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덤으로 강절곤도 함께 굴러들어 왔다. 월국의 큰 성 중의 하나인 장강성의 성주와 후계를 단번에 사로잡게 된 것이다.
“오 소협, 그럼 난 여기 있을게. 영감님도 당분간은 여기 있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괜찮지?”
“응? 같이 안 가게요?”
고산패자는 고산국의 후계이니 해국 왕을 알현할 만한 권리가 있었다.
“노쇠하신 아버님 후보― 가 걱정이 되어서.”
“아이고, 거참 효성이 지극 정성이시네. 고작 후보씩이나 되는 어르신한테 그리하시다니.”
“그 집에 혼자 남겨 뒀던 걸 사죄하는 의미라고 해 주겠어? 그땐 어쩔 수가 없었지만 오 소협 말대로 그 위험한 진 속에 오 소협과 아버님을 놔둬서는 안 됐었지. 대사형이 알면 엄청 화낼걸?”
“진?”
진해는 제갈군무가 말하는 바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해국 왕에게는 터럭만큼의 관심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왕손 사마균은 제갈군무도 가길 바라는 눈치였지만 차마 같이 가자고 강요하지는 못하는 듯했다. 하긴 무력 깡패들이 판치는 고산국의 패자한테 누가 감히 강요를 하겠는가.
“나중에 봐.”
제갈군무는 여각 밖으로 향하는 진해의 등을 보며 팔랑팔랑 손을 흔들었다. 탁자에 나태하게 기댄 자세가 참으로 빈틈이 많아 보였다.
* * *
해국의 왕궁은 생각보다 별거 아니었다. 예전의 잠춘동 빈민이었으면 한참 동안 입을 떡 벌리고 있었을 텐데 어조원에 죽치고 사는 어사 나리에겐 해국 왕궁은 황궁의 별궁과 비슷해 보이는 정도였다.
‘그래도 지붕 색깔은 참 마음에 드네. 월국이랑 흙이 달라서 그렇겠지?’
진해는 나중에 월국으로 돌아가면 동가소택의 별채에 이런 색의 기와를 입히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돌아가는 길에 기와를 왕창 사 가는 것도 괜찮은 것 같았다.
“저하, 정말 관복이 아니라도 괜찮은 건가요?”
“괜찮고말고요. 사람을 보내 양해를 구했으니 아무 문제 없습니다.”
해국의 왕손 사마균은 그와 동시에 자신은 왕자가 아닌 일개 왕손이라 저하라 부름은 맞지 않는다고 알려 주었다. 쑥스럽게 웃으며 다른 이들은 저를 왕손, 혹은 공자님 정도로만 부른다고.
황궁보다는 못하지만 봉국 중에서 가장 번화한 해국의 왕궁인지라 그래도 제법 볼 만한 것이 많았다. 진해는 서해 옥가의 연회장에 처박혀 있느라 구경하지 못한 해국의 정취를 마음껏 들이켰다. 정확히 말하자면 해국 왕실의 정취였다.
하지만 진해는 곧 서해 옥가에 들어설 때와 마찬가지로 알 수 없는 기묘함을 느꼈다. 서해 옥가의 것과는 다르지만 비틀린 불합리함이 이 왕궁 안에 도사리는 듯했다. 그것은 어쩌면 진해를 흘끔흘끔 훔쳐보는 궁인들의 시선 때문인지도 몰랐다. 저와 왕손이 지나간 뒤 슬그머니 어딘가로 사라지는 이들의 그림자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해는 자신이 느낀 비틀림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월국 사행총령 오진해가 해국 왕께 인사 올립니다! 월국와 해국의 우호 속에 천세를 누리소서!”
“이, 일어나시게…….”
해국 왕은 진해가 깜짝 놀라 무릎을 꿇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늙은이였다. 왕손의 할아버지가 아니라 증조할아버지라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늙은 왕의 우측과 좌측에 두 사내가 서 있었다. 한 명은 해국 왕과 제법 닮은 얼굴의 당당한 체구를 가진 이였고, 다른 하나는 왕손의 형뻘 정도 되는 젊은 사내였다.
“먼, 곳에서, 힘든, 발걸음을, 커헉, 켁……!”
해국 왕은 진해에게 나름의 공치사를 하려고 했으나 바싹 메마른 입술이 영 말을 듣지 않는 듯했다. 그러다가 사레가 들린 듯 거칠게 기침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해국 왕이 기침하기 시작하자 양옆의 두 사내 중 젊은 사내 쪽이 빠르게 움직였다. 대기하던 내관에게서 사발을 받아 든 뒤 민첩하게 해국 왕에게 다가붙었다.
“후― 낭군, 데지 않게 조심하셔요.”
진해는 귀를 의심했다.
“역시, 우리 귀비가, 최고로구나…….”
“낭군께서 귀찮으시면 제가 이어서 할까요?”
그리고 눈을 의심했다. 단아한 이목구비를 가진 젊은 사내가, 아마도 해국 왕의 후궁으로 추정되는 이가 자신이 대신해서 사신에게 공치사를 하겠다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옆에 있던 다른 사내의 얼굴이 구겨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럴, 까?”
더 놀라운 것은 해국 왕이 귀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미소를 짓자마자 홀린 듯 웃으며 그러라고 허락한 것이었다. 진해는 옆의 왕손을 돌아보며 해명을 요구하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사신 오진해여.”
“…….”
불렸으니 대답해야겠지만 진해는 어쩐지 대답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귀비 옆의 사내는 해국 왕과 닮아 있었고, 또 이 자리에 함께 서 있었다. 필시 해국 왕의 왕자이며, 차기 왕위에 오를 세자일 터였다. 여기서 귀비의 말에 예~ 하고 쓸개 빠진 것처럼 대답했다간 단번에 저 자의 미움을 살 터. 그리고 지금의 진해는 보통의 진해가 아니었다. 월국의 사신, 황제 폐하의 어사 오진해였다!
진해는 귀비의 말을 씹었다.
“거리가 멀어 잘 안 들리나 보군.”
귀비는 진해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려는 모양이었다. 진해는 어이가 없어 귀비를 쳐다봤고 귀비가 옥 가주와 입매가 꼭 닮은 걸 발견했다. 서해 옥가 출신의 귀비인 것이다.
“오 사신.”
“…….”
“오 사신.”
“…….”
“……사신 오진해.”
그럼 더 봐줄 것 없지. 진해는 옥 가주와 귀비가 얼마나 친한지는 몰랐지만 옥 가주의 아들과 진해는 엄청나게 친한 사이였다. 옥 가주도 진해가 저를 호부하는 걸 허락할 정도였다. 진해는 제 뒷배를 믿고 귀비의 말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옆에 함께 꿇고 있던 왕손이 다 안절부절못할 정도였다.
“저런 건방진.”
그리고 귀비는 진해가 제 말에 답하지 않자 입꼬리를 한껏 끌어 올려 보였다. 그러나 눈매만큼은 악귀 저리 가라 일그러져 그의 기분이 상당히 좋지 않음을 알려 주었다. 저것보다 더 무서운 음인을 많이 만나 봐서 다행이었다. 진해는 저를 이 층에서 집어 던지려거나, 담뱃대로 저보다 더 큰 놈들의 뒤통수를 깨던 음인을 떠올리며 귀비의 매서운 시선에서 회피했다.
“후후, 그래. 월국의 사신이라 이거지. 큰물에서 놀다 왔으니 흐름을 읽을 줄 안다고 여겼건만. 전하.”
“으, 으응. 그래.”
“전하, 보세요. 저것이 월국의 사신이라고 감히 저희 해국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저희 월국은 황후마마의 친정이 아니던가요.”
“그렇, 지. 응.”
“그리고 저는 전하의 처. 그렇다면 저는 황후마마의 우부이기도 하지요.”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었지만 해국 왕은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미는 귀비의 손을 주름진 손으로 그러쥐며 그래, 그래, 오냐, 오냐 할 뿐이었다. 해국 왕손이 일부러 진해를 찾아온 이유가 있었다. 귀비는 세자가 말 한마디 붙이지 못할 정도로 굉장한 위세를 뽐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서해 옥가가.
“일단, 옥에, 가둬라!”
“전하!”
“부왕, 일단 진정을―”
“우부인 내가 모욕을 당했는데도 남의 편을 들다니. 이것이 해국 왕실의 기강인가요!”
그리하여 황제국인 월국의 사신 진해가 옥으로 끌려가도 아무도 그에게 뭐라 하지 못했다. 그들은 귀비 의 권세에 눌려 아무 말도 못 했지만 진해는 지금 어이가 없어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허 참! 나 참! 내가 아무리 육품이라지만 그래도 우리 폐하의 사신인데! 그리고 우리 미려의 형인데!’
어두컴컴하고 좁은 뇌옥에 갇혀 진해는 한참이나 콧방귀를 뀌어 댔다. 그러면서 서해 옥가의 기강은 얼마나 바로 세워져 있을지를 가늠해 보기로 했다. 서해 옥가에서 얼마나 저를 빨리 데리러 오느냐에 따라 진해의 행동 역시 달라질 터였다.
‘……안 되면 영감만이라도 월국으로 돌려보내야 해. 저 영감이 볼모로 잡히면 영감한테 껌벅 죽는 무장들부터 위축될 테니까.’
게다가 해국이 월국에게 위해를 가하면 곤란해지는 이가 하나 있었다. 진해는 해국의 피가 섞였다는 것만으로도 적통이라고 떳떳이 말 한마디 뱉지 못하는 해산을 떠올렸다.
한때는 해국 왕실과 적극적으로 손을 잡아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던 진해는 오늘 이 참상을 보고 그 생각을 고이 접어 넣었다. 제 손자뻘인 귀비한테 홀랑 빠진 해국 왕이 도움이 될 리 없었고, 제 아비한테 변변한 간언 하나 못 올리는 세자는 더욱 쓸모없었다. 왕손도 마음은 갸륵했지만 제갈군무랑 시선도 못 마주치는 겁쟁이였고.
“아오, 난 강해아만 데리고 돌아가면 되는데!”
어쩌다 일이 이렇게 꼬였을까. 진해는 자신이 온 김에 정리를 해 놓지 않으면 나중에 해산이 곤란해질 것이라는 걸 예감했다. 만약 저 귀비가 낳은 아들이 왕이 되기라도 하면 해국이라는 나라는 그야말로 혼란의 도가니로 굴러떨어지는 셈이었다. 어쩌면 피가 이어져 있다는 걸 빌미로 황제가 된 해산을 귀찮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즉, 진해도 귀찮아진다는 말이다!
‘절대 안 돼! 만약 해산 도련님이 내 애를 배고 있는데 오늘 같은 개짓거리를 하면!’
해산은 몸이 건강하니 유산과 거리가 멀 테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몰랐다. 열 받은 해산이 억 소리를 내며 쓰러지기라도 하면 배 속의 아기씨도 함께 뒷목을 잡고 쓰러질 수도 있었다!
“안 돼!!!!!”
진해는 밑도 끝도 없는 상상에 절규하며 감방에서 벌떡 일어섰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부르짖는데 바깥쪽 문이 열리면서 사람 발소리가 들려왔다. 어지럽게 섞이는 모양이 한두 사람이 아니었다. 진해는 소리를 뚝 그치고 고개를 돌려 빛이 들어오는 쪽을 바라보았다.
“설마 우리 가문의 세대은친에게 고신을 가한 건 아니겠지?”
멀끔한 인상의 미중년이 진해 쪽을 바라보며 빙긋 미소 지었다. 그러나 목소리는 매우 익숙한 것이었다. 군데군데 진해가 근 이십 년을 길러 온 얼굴과 닮아 있었다.
“엥? 아버지?”
“음, 그래. 내가 왔소. 오 은인.”
미소 짓는 남자는 서해 옥가의 가주 옥길합, 안대를 푼 맨얼굴의 옥길합이었다. 그의 눈가에 희미하게 흉이 남아 있어 진해는 옥길합이 과거에 꽤 거친 전투를 벌였다는 사실을 짐작했다. 옥길합은 해국 제일의 무장인데 그의 얼굴에 상처를 입혔다면 상대 역시 굉장한 무인일 터였다.
“힉, 히끅, 흑……!”
그런데 그의 손에 이 자리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게 들려 있었다. 진해는 주먹을 꽉 쥔 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일고여덟 살쯤이나 되었을까. 얼굴이 눈물과 콧물로 젖어 있었지만 피부가 하얗고 통통한 것이 귀티가 줄줄 흐르는 어린아이였다. 옥길합에게 잡힌 손목 너머로 뻗은 손가락 역시 하얗고 부드러워 보였다.
“숙, 숙부님, 숙부님…….”
거기다 입은 옷 역시 상당했다. 급만 따지자면 해국 왕의 곁에 서 있던 세자가 입던 것과 비등해 보였다. 아니, 옷에 새겨진 용의 문양이 아이의 신분을 대변하고 있었다. 진해는 아직도 불끈 쥔 주먹을 들어 그대로 제 눈을 비볐다. 지금 옥길합이 왕자를 감옥에 데려온 건가.
“열어라.”
옥길합이 명하자 뒤쪽에 서 있던 내관의 어깨가 크게 움찔거렸다. 그리고는 곁에 있던 간수를 발로 걷어찼다.
“어, 어서 열지 않고 뭣해!”
“예, 예…….”
간수도 눈치가 소멸한 자는 아닌 듯 울고 있는 왕자와 그 왕자의 손목을 그러쥔 옥길합을 훔쳐보며 자물통에 열쇠를 꽂아 넣었다. 진해가 허깨비를 보나 싶어 눈을 껌벅거리는 사이 옥길합이 성큼성큼 들어와,
“싫, 싫어요, 숙부님, 무서, 워요!”
어린 왕자를 억지로 감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자, 오 은인. 이리 나오게. 좁아터진 곳에 둘이나 있을 필요는 없으니까.”
“어엉……!”
왕자는 난생처음 보는 감방의 참혹함에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이 자리의 누구도 감히 옥길합의 처사에 항의하지 못했다. 왕자의 담당 내관인 듯한 자만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 왕자조차도 옥길합에게 내보내 달라고 말할 시도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귀한 옷자락이 더러워지는 것도 개의치 않은 채 바닥에 주저앉아 서럽게 흐느낄 뿐이었다.
“…….”
서해 옥가의 위세로 보아 어느 소생의 왕자라도 이 꼴을 못 면하겠지만, 가주에게 숙부라 부르는 왕자가 몇이나 있을까. 진해는 저 왕자가 귀비 소생의, 서해 옥가의 피를 물려받은 왕자임을 직감했다. 아마 옥길합은 귀비가 진해를 감방에 처박았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귀비궁이나 왕자궁에 들러 왕자를 데리고 바로 이곳으로 온 모양이었다.
“……좁지만 둘 정도라면 뭐, 어떻게 지낼 만하겠네요!”
귀비가 저한테 한 꼴을 보면 이곳에 처박아도 할 말이 없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걸 보니 진해의 마음이 한없이 물러졌다. 하얗고 통통한 뺨은 어릴 때의 미려를 보는 것 같았다. 반은 같은 피를 갖긴 했다.
“쉬, 울지 마세요. 울면 눈이 부어서 붕어가 되어 버립니다. 뚝, 뚝 그쳐야 훌륭한 왕자님이지요~”
“부, 붕어?”
아무도 저를 편들어 주지 않는 곳에서 진해가 저를 안고 토닥이자 어린 왕자는 저도 모르게 진해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진해가 볼을 부풀리고 붕어처럼 입을 뻥긋거리자 조금씩 웃기도 했다.
“흠.”
옥 가주는 진해가 아이를 어르는 모습을 보며 잠깐 생각에 잠긴 듯했다. 눈을 가렸을 때의 그는 온화한 인상이었지만, 안대를 푼 그의 인상은 자못 냉정해 보였다.
“그대가 가지 않으면 우리 정려가 울 거야. 정려가 소중한가, 그 애가 소중한가.”
“엥? 여기서 우리 미, 정려가 왜 나와요?”
“그대가 그 아이를 우리 정려처럼 보는 것 같아서.”
“참 나. 우리 미, 아니 아니, 정려가 백 배는 더 귀여웠거든요! 아, 물론 왕자 아기씨가 귀엽지 않다는 건 아닙니다. 어린애들은 자고로 다 귀여운 법이지요.”
“후후. 백 배는 더 귀여웠군.”
정려가 더 귀여웠다는 소리를 듣자 옥길합은 이 감옥 안이 밝아 보일 정도로 환하게 웃음 지었다. 그러나 옥 가주는 진해의 머릿속에서 이미 점수를 한참이나 깎아 먹고 있는 중이었다.
‘어린애를 이렇게 다루는 놈치고 괜찮은 놈이 없어!’
진해는 다른 건 몰라도 어린애를 함부로 다루는 이는 절대로 좋은 이가 아니라는 신념을 고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양아치 중 상양아치인 한씨 형제도 제 막냇동생만큼은 끔찍이 생각했었다!
“그럼 오랜만에 같이 외유를 하도록 할까? 상이도 외가엔 오랜만에 가 보겠지.”
“자, 장군!”
“가지 않겠다면 어쩔 수 없지. 오 은인을 모시지 않으면 나 역시 움직이지 않겠다.”
옥길합이 진해가 나오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겠다 선언하자 감방 밖의 사람들의 안색이 삽시간에 창백해졌다. 왕자가 감방에 처박힐 때보다도 더욱 절박한 표정이었다. 그들의 간절한 시선이 일제히 진해의 얼굴에 내리꽂혔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았다. 일행의 뒤쪽 감방으로 오는 복도 쪽이 급히 달려오는 소리와 헐떡이는 소리로 순식간에 난잡해졌다. 옥길합이 성큼성큼 걸어오던 것과는 다른 발소리였다.
“상아, 상아!!!!”
해국 왕을 손에 쥐고 흔들면서 교만하게 굴던 이가 땀범벅이 된 채 감옥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화려하게 올렸던 머리칼이 산발이 되고 옷자락도 헤쳐져 있었다. 진해의 품 안에 안겨 있던 아이는 저를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뛰쳐나가 감방의 창살에 매달렸다.
“아바마마! 아바마마아!”
역시나 이 아이는 귀비 소생의 왕자였다.
“옥, 옥 장군! 이 무슨 짓입니까! 상이는 해국 왕실의 혈통을 이은 왕자입니다! 이 나라의 보위를 이을지 모르는 양인 왕자라구요!”
“백합아. 이 나라의 보위는 세자 저하께서 이으시거늘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우리 핏줄이 왕위를 이어도 좋다고,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그게 아니면 내가 왜, 그런 늙은이한테!!”
“세자 저하도 우리와 피가 이어져 계시지. 태후께서 우리의 고모할머님이 아니시더냐.”
“그래도 너무 하시잖아요! 상이는 형님의 조카라구요!”
귀비는 어린 아들이 옥에 갇혀 저를 향해 울부짖는 걸 보자 반쯤 이성을 잃은 듯했다. 옥길합에게 뭐라고 대들면서 악다구니를 써 댔다. 옥길합은 무심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다 손을 들었다. 진해는 순간적으로 몸을 움직여 왕자를 끌어안으며 뒤로 돌았고, 동시에 왕자의 귀를 막았다.
[철썩.]
커다란 파찰음이 감옥 안을 울렸다. 어찌나 큰 소리가 났는지 왕자의 귀를 가린 진해의 어깨가 움찔거릴 정도였다. 우당탕하고 쓰러지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백합아.”
“……읏.”
“백합아. 상이가 올해 몇이냐.”
“으으…….”
“상이가 올해 몇이지?”
“……여덟, 여덟입니다.”
“그래. 팔 년이나 전하의 총비로 있었구나. 감히 월국의 사신을. 우리 가문의 은인을 박대하고도 남을 정도로 분에 넘치는 총애를 받았어.”
“…….”
“네 핏줄이 보위를 잇지 않으면 그 늙은이를 모실 생각이 없었다고? 그럼 그만두거라. 당장 그만두면 돼. 내 어찌 소중한 혈육이 겁간당하는 꼴을 보고 있겠느냐. 백합아.”
“……예.”
아무도 숨조차 함부로 뱉지 못하는 감옥 안에서 귀비 옥백합과 서해 옥가의 가주 옥길합의 대화만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 왕자는 본능적으로 제 우부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직감하고 제 귀를 틀어막은 진해의 손을 붙잡은 채 줄줄 눈물만 흘렸다.
“백합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단다. 내가 무능해서 내 손에 쥔 것을 놓치던 그 감각을. 소중한 이의 손을 다른 이의 손에 쥐여 주던 그 느낌을.”
“…….”
“누가 혼사를 주선했었지? 전하셨던가, 아버지셨던가.”
누구의 혼례인지는 말 안 해도 뻔했다. 진해는 옥길합이 아직까지도 정려의 다른 생부에게 마음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또한 그 혼사가 그를 제외한 서해 옥가의 다른 이들과 해국 왕실의 독단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 역시.
“……실언했습니다. 제가 잠깐 이성을 잃었어요.”
“그렇지?”
“내궁에 살다 보니 식견이 좁아져 감히 은인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자식만 바라보고 사는 처지다 보니 그렇습니다. 형님께서 부디 너그럽게 용서해 주세요.”
“아니. 난 괜찮다. 우린 한 핏줄을 이은 혈육이 아니더냐.”
곧 어깨를 툭툭 치는 소리가 들렸다. 비척비척 일어나는 소리, 몇몇이 다가와 매무새를 다듬는 소리도 들렸다.
“사죄는 내가 아니라 우리 오 은인께 해야지. 내 적통 후사를 구원해 우리 서해 옥가의 후사를 이어 주신 오 은인께 말이다.”
진해는 소리가 잠잠해지자 고개를 살짝 뒤로 틀었다. 해국 왕과 세자 앞에서는 천하제일인 것처럼 굴던 귀비의 한쪽 입가에 터진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귀비의 눈동자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해국 왕의 위에서 노는 귀비의 배경은 서해 옥가였고, 그 서해 옥가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갖고 있는 자가 바로 가주였다.
그리고 가주는, 과거의 일로 인해 혈육에게 강렬한 증오를 품고 있었다. 해국도, 서해 옥가도 그에게는 모두 다 증오하는 대상일 뿐.
“오 은인, 제가 감히 은인을 몰라뵙고 무례를 범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귀비는 진해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바닥에 무릎을 꿇고 이마를 댔다. 더러워진 바닥에 몸이 쓸리는 것조차 신경 쓰지 않고 쿵쿵 이마를 찧었다. 옥길합은 구름이 지나가는 걸 보는 사람처럼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진해는 귀비의 이마에 피가 비치기 시작하는 걸 보며 질끈 두 눈을 눌러 감았다.
* * *
덕분에 편하게 감방에서 나오긴 했는데 진해는 심기가 영 좋지 못했다. 귀비는 이마를 찧다 기절했지, 품 안에서 왕자는 울고 있지, 감방 밖에서는 사람들이 저를 무슨 괴물 보듯 무서워하지, 게다가 옥 가주는 진해가 왕자를 마음에 들어 했다고 생각했는지 왕자를 그대로 집으로 데려왔다. 일국의 왕자를 진해가 마음에 들어 한다는 이유만으로 무슨 고양이 새끼 데리고 오는 것처럼 덜렁 데리고 왔던 것이다!
“오 은인…….”
“그, 그래. 괜찮아, 우린 괜찮, 을 거야, 아마.”
당연히 괜찮지 않은 상황이었고 어린 왕자는 겁을 먹은 채 진해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진해는 기회를 봐 다시 옥가 저택 밖으로 나갈 생각이었는데 제 편 하나 없는 아이가 이 집에 남겨질 걸 생각하니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강절곤은 당분간 제갈 또라이랑 둬야 할 듯했다.
‘제갈 또라이가 약을 올려서 영감이 뒤로 넘어가면 어떡하지.’
진해는 옆에서 깨작깨작 밥을 먹는 해국의 십팔 왕자 사마상의 숟갈 위에 생선 살을 올려 주며 강절곤의 안위를 걱정했다. 제갈군무가 지켜 주겠다고 했으니 몸은 멀쩡하겠지만 제갈군무의 미친 기운을 강절곤이 감당할 수 있을지 무척 걱정되었다.
그러다 무의식적으로 생선 살을 이번에는 제 좌측에 앉은 미려의 밥 위에 올려 주었다. 미려는 진해보다 훤칠하고 다 큰 청년이었으나 진해에겐 언제나 아끼고 귀여워하고 사랑해야 할 양인 아기였으므로 이것은 남들에게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아주 자연스러운 행위였다.
“편식하지 말고 잘 먹어야지. 그래야 어린 왕자님 앞에서 체면이 서지. 의젓한 사촌 형님으로서 말이야.”
“응. 형이 주는 건 다 먹을게.”
그리고 그 모습을 맞은편에 앉은 청려가 뜨악한 표정으로 보다가 상석에 앉은 옥 가주의 눈치를 살폈다. 옥 가주는 안대를 푼 후로는 줄곧 맨얼굴로 진해와 대면했다. 진해가 아니꼬운 표정을 하자 옥청려가 어두운 표정으로 서해 옥가의 비전을 수련하는 방법 중 하나라 넌지시 일러 주었다. 또한 그 시기에는 무척 조심해야 한다는 것 역시.
“형도 많이 먹어.”
“아이구, 우리 미, 아니, 정려가 다 컸구만!”
“후후. 부끄러우니까 그러지 마.”
―옥청려는 ‘눈먼’ 가주의 ‘실수’는 없었던 일이 된다는 말도 했다.
“상 왕자님도 나중에 생선 살을 발라 주는 훌륭한 어른이 되세요. 아시겠죠?”
“네…….”
“제가 보니까 상 왕자님은 어리신데도 이목구비가 섬세한 것이 나중에 크면 음인들이 줄줄 따를 것 같아요! 언제 한번 월국에 오세요. 제가 아주 어여쁜 아이들을 잔뜩 소개해 드릴 테니까.”
“어여쁜?”
“음. 어여쁘다는 건 우리 미려의 발가락 정도에 오는 거?”
원래라면 사마상을 돌보라는 명을 받고 이 자리에 온 옥청려는 진해의 팔불출에 처음에는 놀라다가 이제는 아주 무심한 태도로 밥을 먹었다. 하지만 가끔씩 청려가 참지 못할 정도로 터져 나오는 팔불출을 볼 때마다 청려는 자신이 인내하며 수련해 왔던 해국 음인의 도에 빠직빠직 금이 가는 것을 느꼈다.
“하하, 청려야.”
“예, 백부님.”
“네 눈에는 어찌 보이느냐.”
“아둔한 질자는 감히 가주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오 은인과 정려가 한 쌍의 원앙 같지 않느냐, 이 말이란다.”
“……원앙이요?”
게다가 옥 가주는 거기에 한술 더 떴다. 옥청려는 옥길합이 자신을 동석시킬 때 혹시나 자신과 오진해를 혼인시키려는 게 아닌가 걱정했었으나, 아니나 다를까. 옥 가주는 오 은인을 제 양인 아들인 옥정려의 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양인의 짝으로 양인을 염두에 두고 있었단 말이다.
“썩 잘 어울립니다.”
물론 속마음으로는 음양의 이치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으나 서해 옥가에서, 이 해국에서 옥길합이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은 적이 없었다. 먼 옛날, 옥정려가 태어나기 전 옥길합이 딱 하나 이루지 못했던 것이 무른 구석이 있던 옥길합을 철의 가주로 만들어 버렸다.
옥청려는 제 형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던 날, 아비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책하던 것을 떠올렸다. 첩려에게 괜히 황후와 가주의 옛날이야기를 해 줘서 그런 무모한 계획을 떠올린 것이라고, 그래서 가주가 우리에게 본보기를 보인 것이라고.
“그렇지? 곁에 어린아이가 있으니 정말로 한 가족 같구나. 이참에 상이를 우리 집에서 기를까?”
황제국의 황후를 아직까지 사랑하고 있는 남자 앞에서 양인과 양인 사이라서 아니 된다는 말은 씨도 먹히지 않을 터였다. 사실 옥청려도 남의 집 남편과의 불륜보다는 차라리 같은 양인이랑 혼인하는 쪽이 더 현실성 있게 여겨졌다. 물론 옥정려와 혼인하게 되면 오진해는 다시는 월국에 가지 못할 터였다. 아니, 아예 이 서해 옥가 안에 영원히 자리하게 될지도 몰랐다.
“참, 그 전에 청려 너도 슬슬 혼기가 찼구나. 형이 그렇게 되었으니 네가 아버지께 더 효도해야지. 꼭 정실이 아니더라도 괜찮으니 괜찮은 자리가 있다면 가져오렴. 내가 다리를 놓아 주마.”
“……가주의 은혜에 감읍합니다.”
“뭘, 우린 한 핏줄 아니더냐.”
그러나 옥청려는 결코 오진해를 해국 안에 둘 생각이 없었다. 오진해가 저를 압박하던 개놈을 치워 준 은인이라 그런 것도 있고, 제가 유일하게 신뢰하는 양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인물이라 그런 것이기도 했다.
옥청려는 조용히 수저를 움직이며 그가 유일하게 신뢰하는 양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쓸데없이 고귀하고 이상적인 성품의 왕손. 세자 자리 근처에도 가지 못한 왕자를 아비로 둔 어설픈 이.
하지만 그 왕손은 옥청려가 음인임에도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해국의 대부분의 양인들은 음인은 갈대와 같은 성정이라 여겨 들을 가치가 없다 여기는 이야기들을 사마균은 진지한 눈빛으로 한 글자도 흘리지 않고 조용히 들어 주었다. 옥첩려가 들었다면 배를 잡고 웃을 만한 이야기였다.
‘그럼 함께하자. 나는 해국 왕실을, 너는 서해 옥가를. 그렇게 함께 바꿔 가자!’
옥청려가 장차 가주가 되어 서해 옥가를 바꾸고 싶다는 이야기를 사마균은 한 번도 웃지 않고 진중하게 믿어 주었던 것이다.
물론 가주의 적자이자 서해 옥가의 비전을 제대로 구사하는 옥정려가 왔으니 옥청려가 가주를 노려볼 기회도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양인 가주만을 숭상하는 서해 옥가에서 옥청려의 꿈은 허깨비와 다름없는 것이었다.
옥청려는 그래서 사마균이 고마웠다. 그래서 사마균을 좋아했다. 지금도 그를 좋아하긴 했다. 옥길합에게 사마균의 짝이 되고 싶다 말하면 옥길합은 그래, 라고 간단히 허해 줄 터였다. 하지만 옥청려와 혼인하게 되면 사마균은 이때까지의 해국 왕족들과 마찬가지로 서해 옥가의 볼모가 되는 셈이었다.
“청려 공자는 잘 먹네. 역시 잘 먹는 사람이 보기 좋지.”
“……해국 음인에게 썩 좋은 말은 아닙니다.”
“난 월국 사람이니까 괜찮지 않아? 월국에서는 크고 아름다운 걸 제일로 친다고. 그렇지, 미, 정려야?”
“응, 형아 말이 맞아. 청려, 많이 먹도록 해. 부족하면 더 먹고.”
“감사합니다, 오 은인. 소가주…….”
그래서 옥청려는 오진해가 월국으로 돌아가 황제의 힘을 빌든, 뭘 하든 해서 서해 옥가와 해국 왕실의 사이를 좀 갈라놓길 원했다. 구체적으로 그가 모신다는 해국 궁주 소생의 황자, 안해산이 황위에 올라 왕실의 세력이 커지길 원했다.
사마균이 비록 자신과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 * *
단순히 농인 줄 알았던 옥길합의 말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구체적으로 변했다. 옥길합은 무려 굳게 닫아 놓았던 안채를 열 준비를 했다. 서해 옥가의 내밀한 곳에 자리한다 자부했던 음인들조차 함부로 접근하지 못했던 그 안채를 말이다.
“잠깐만. 그럼 청려 공자도 한 번도 거길 못 가 본 거지?”
“예, 그렇습니다.”
옥청려는 사마상을 돌본다는 이유로 진해와 자연스레 합류할 수 있었다. 사마상은 낯선 옥청려보다는 저를 어르고 돌보는 진해 곁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그러면 혹시 거기 사람이 살고 있을 가능성은 없어? 가주가 누굴 숨겨 둔다든 가.”
“흠.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군요. 이쪽 본채의 시종들은 분가와 연이 닿은 이들이 많으나 가주가 부리는 이들은 분가의 사람들과 단절되어 있거든요. 그들은 대대로 가주에게만 충성하는 그림자들이지요.”
“오호처럼?”
“이름은 모르겠으나 굳이 오라는 숫자가 들어간 걸 보니 은인께서 말하는 이 역시 그러한 모양이군요. 예, 맞습니다. 가신 중 딱 다섯 가문이 이 세상에서 오로지 가주 한 분께 충성을 바칩니다. 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 가문들은 대대로 양자를 들여 혈연이 아닌 가주에 대한 충성으로 연대한다고 하더군요.”
“으음. 그럼 그 가문 사람들이 몰래 드나들면서 안채에 사람을 살게 할 수도 있다는 거지? 음인 하나랑 어린애 하나라든 가.”
“설마, 오 은인……!”
옥청려는 오진해가 말하는 음인과 어린애라는 말에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옥청려는 머뭇거리며 고개를 가로젓기 시작했다.
“그건, 절대 아닐 겁니다. 안채를 그렇게 쉽게 내줄 생각이었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커지지도 않았을 테지요.”
“엉?”
“안채는 대대로 서해 옥가의 가주 부군들이 거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현 가주……, 백부께서는 과거 그곳을 장래를 약속한 분께 드리기 위해 꾸몄었지요.”
“지금은 아니잖아. 이미 헤어진 거―”
“오 은인.”
옥청려는 처음으로 진해의 말을 끊었다. 옥청려는 가주와 지금은 떠나고 없는 ‘궁주’ 사이를 아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그들의 사이를 아는 이들 대부분이 숨을 거뒀다. 옥길합의 패전의 책임을 덮기 위해 궁주를 월국에 보내자고 주장했던 조부가 그랬고, 궁주를 양육했던 덕비가 그랬다. 그 외에 조부의 의견에 찬동했던 가신들이나 백부, 숙부들도 다 지금은 저세상 사람이었다.
살아남은 건 가주에게 일찌감치 항복하고 가주의 권한을 포기하거나, 또는 알면서도 입을 다물고 있었던 자들이었다. 조부의 위세가 두렵고, 왕실의 압박이 버거워 그랬다고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했던 자들뿐이었다. 혹은 그 자식들이거나.
아마 서해 옥가의 젊은이 중 대부분이 황후의 얼굴을 모르고 옥길합이 혼인하지 않는 이유를 모를 것이다. 대뜸 등장한 옥정려의 미려한 얼굴을 보고 출신이 천해 맺어지지 못했다고 짐작만 할 뿐. 하지만 지난날 옥길합과 혼약이 오갔던 궁주의 얼굴을 아는 이들은 옥정려의 얼굴에서 멸망을 보았다. 아무리 서해 옥가라 할지라도 강대한 월국의 군세를 모두 막아 낼 수는 없었다.
“오 은인은 이미 알고 계시잖습니까. 소가주가 누구의 소생이신지를.”
“……청려 공자.”
“단순히 책임을 질 생각이라면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보내 안전하게 살게 하는 것이 아비의 도리지요. 가문을 생각한다면 의혹을 사지 않을 만한 곳에 양자로 보내는 것이 맞는 일이지요. 하나 지금 가주는 어떻습니까. 소가주는요.”
“서해 옥가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거야?”
진해는 자신의 짐작을 서해 옥가의 사람이 긍정하자 가슴 언저리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하지만 옥청려의 반응을 보아 황후와 옥길합의 관계는 사람들이 크게 떠들고 다닐 만한 가벼운 사안이 아닌 듯했다. 진해는 정려를 볼 때마다 만개한 꽃을 보듯 자애롭게 미소 짓는 옥길합을 떠올렸다.
“아니요. 자세히는 모릅니다. 하지만 가주가 마음에 둔 이가 있어 혼인하지 않고 있다는 건 알고 소가주의 발언으로 인해 그것이 강백서였던 것이 아닌가라고 추측하고 있지요.”
“음…….”
생각에 잠긴 진해의 머릿속에 젊은 시절의 옥길합이 성문 위에 올라 하염없이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장면이 떠올랐다. 전장에서 돌아와 갑옷도 벗지 못한 초췌한 모습으로 허망하게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본래부터 위험천만했던 계획을 크게 성공시키고 거의 성공시킬 뻔했건만 그를 부추겼던 이들은 단 한 번의 패전 책임을 물어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빼앗아 갔다. 해국 왕실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뒷배가 없는 궁주를 가마에 태워 멀리 월국으로 보내 버렸다. 네가 가지 않으면 패전의 책임을 물어 옥길합의 목을 칠 것이라 윽박지르면서.
“그럼 대체 강백서는 어디 있는 거야. 강해아는?”
진해는 해가 뜨고, 질 때까지 텅 빈 눈동자로 정인이 떠나간 흔적을 새기는 양인을 머릿속에서 지워 내려 노력했다. 그 텅 빈 눈동자 속에 기이한 광기가 들어차는 장면을 상상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 진해를 구원하려는 것처럼 미려가 사마상의 손을 잡고 멀리 복도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얼핏 보이는 그 얼굴이 황후, 사마계와 똑 닮아 있어 진해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형.”
미려는 그런 진해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꽃보다도 아름답게 미소 지었다. 진해는 황후 역시 저런 얼굴로 미소 지었을지 조금 궁금해졌다. 만약 저것과 같은 얼굴로 미소 지었다면 옥 가주가 그를 잊지 못하는 심정도 이해가 갈 듯싶었다. 저 미소가 제 손에서 떠난 후의 상실감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아버지가 청려랑 같이 안채 구경을 오라셔. 가구를 새로 해 넣을 건데 형이 조언을 해 줬으면 하나 봐.”
“내가?”
“아버지는 이때까지 직접 가구를 채워 넣어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시겠다네. 알고 계시는 건 옛날 양식이라 요즘에는 만드는 장인이 드물대.”
“나도 해국 가구는 잘 모르는데?”
“어쩌면 월국 양식을 도입해 보시려는 걸지도 모르지요. 오 은인이 오신 참에 말입니다.”
진해가 거절하려는 찰나 옥청려가 옆에서 진해를 부추겼다. 진해는 어리둥절했다가 청려의 의미심장한 눈빛에서 그 의도를 알아차렸다. 옥가의 음인들도 들어갈 수 없었던 안채에 당당히 입성할 수 있는 기회였다. 누가 살고 있었는지 없었는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어쩌면 그곳에 상이 방도 만들지 않을까? 형이 상이를 마음에 들어 해서 아버지가 아예 방을 만들어 주시려는 모양인데.”
그러나 눈을 번쩍이는 진해와 달리 미려의 손을 잡은 사마상은 잔뜩 풀이 죽어 있었다. 자신의 방이 생긴다는 말은 자신이 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뜻과 일맥상통했기 때문이었다.
사마상은 이제 여덟이었고 아직 우부의 품 안에 있을 나이였다. 유부가 양육한다지만 아이에게 우부라는 것은 잊을 수 없는 절대적인 그리움이었다.
“안채가 엄청 넓은가 보네. 하지만 안채가 아무리 넓어도 해국 왕실의 왕자마마가 기거할 정도는 안될 것 같은데? 그렇지요, 상이 왕자님?”
그런 상의 마음을 눈치챈 건지 진해가 상의 앞에 무릎 꿇으며 능글맞게 웃음 지었다. 사마상은 희미하게 비치는 희망에 웃음 지으려다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나는, 나는, 우후가 보고 싶어요, 부왕도, 유부도 보고 싶어요.”
“그럼요~ 곧 뵙게 해 드릴게요. 제가 가서 옥 가주께 이런 곳에 왕자님을 모시기 너무 부끄럽다고 한소리 해 줄게요.”
진해는 우는 아이를 끌어안고 엉덩이를 토닥여 주었다. 그러면서 미려를 향해 씩 웃었는데 미려는 그 얼굴을 마주치지 못하고 귓불이 새빨갛게 변해 버렸다. 왜냐면 미려가 어려서 떼를 쓰거나 속상한 일이 있을 때마다 진해가 미려를 끌어안고 저런 식으로 엉덩이를 토닥여 주었던 것이다.
과거의 추억에 젖은 미려와 달리 진해와 청려는 강백서와 강해아의 행방을 알 수도 있다는 사실에 긴장했다. 만약 강백서가 살았던 흔적이 있다면 진해는 사마상을 업고 나가는 한이 있어도 서해 옥가 저택 밖으로 나갈 작정이었다.
“아! 월국 양식이라면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있는데!”
그리고 진해는 만약 강백서가 있을 경우를 대비해서 누군가에게 소식을 빠르게 알릴 필요를 느꼈다. 강해아가 강백서와 함께 있다면 강제로라도 떼어 같이 돌려보낼 사람이었다.
“장강성은 월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성이고 창명후는 대대로 그곳 성주를 세습했으니 나보다 더 가구에 대해 잘 알 거야. 나는 아무렇게나 고른 게 사실은 나쁜 뜻이 있는 가구일 수도 있잖아?”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돼, 형.”
“아니오, 소가주. 오 은인의 말씀이 참으로 옳습니다. 가주께서 안채에 어느 분을 들이실 건지 모르는데 함부로 가구를 놨다가 부정을 타서는 아니 되지요. 상 왕자님께도 그렇구요.”
미려는 별로 동의하지 않는 눈치였으나 안채 일을 전담하는 음인이 그렇다 주장하니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미려는 진해가 옆에서 조잘대는 말을 들어 강절곤에게 나중에 제갈군무와 한번 들러 달라고 전갈을 넣었다. 진해는 황 시위라는 호위가 있음에도 반드시 제갈군무와 함께해야 한다는 조건을 자연스레 붙여 넣었다.
그렇게 도착한 안채는 정말로 내밀한 곳에 있었다. 사람이 살기 위한 곳이 아니라 도망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장소 같았다. 미려는 몇 번 와 본 듯 익숙한 눈치였으나 청려는 저도 모르게 두리번두리번 주변을 살펴보고 있었다. 본채의 안쪽에 갇혀 살다시피 하는 음인임에도 이런 구조는 처음 보는 모양이었다.
‘잠춘동 골목이랑 다르게 희한하게 복잡한 구조야. 일부러 머리를 써서 길을 헤매게 하는 것 같아. 으, 누가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어지간히 변태 새끼네!’
만약 이곳에 사람이 산다면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도저히 생을 이어 갈 수 없을 듯했다. 일단 생필품을 사러 가는 자체가 힘들어 보였다. 그렇기에 서해 옥가의 귀한 이가 기거할 수 있을 터였다. 수없이 많은 시종을 거느린 채 안채에서 가주만을 기다리며 살아왔을 터였다.
“다 왔어.”
“와.”
그러나 기괴하게 꼬인 바깥과 달리 안쪽은 천상 낙원이 따로 없었다. 해국의 지붕에 얹힌 남청색 기와를 마음에 들어 했던 진해는 안채의 기와를 보자 그렇게 마음에 들어 했던 남청색 기와를 모조리 잊어버리고 말았다. 안채는 투명해 보일 정도로 맑은 연청색 기와를 얹어 놓았다.
“굉장하군요. 과연 안주인이 기거하는 곳이라 할 만합니다. 가주의 직계 자손들은 예로부터 분가의 사람들과는 다른 시야를 갖고 있었다는데 이런 곳에서 자랐다면 그럴 수밖에 없겠습니다.”
게다가 안채의 앞쪽에는 네모반듯하게 큰 연못을 파 놓았는데 연못 바닥에는 지붕과 비슷한 색의 자기 조각들을 규칙적으로 깔아 놓았고, 연꽃이며 부레옥잠 같은 수초를 심은 수반을 넣어 언제나 맑으면서도 화사한 분위기를 풍기게 해 놓았다. 정원을 장식한 나무 역시 서해 옥가의 전통을 자랑하듯 하나같이 고아하고 독특한 것들뿐이었다.
“꽃이…….”
그중 백미를 꼽자면 어른 두 사람이 끌어안으면 간신히 손끝이 닿을 정도로 거대한 벚꽃 나무였다. 벚나무는 안채가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끝이 붉게 물든 하얀 꽃송이들을 조롱조롱 달고 있었다. 아마 저 꽃이 만개하고 바람에 흩날린다면 안채는 정말로 이 세상이 아니라 신선이 사는 세상으로 여겨질 게 분명했다.
“마음에 들어?”
“마음에 들고 말고 할 게 아니라 정말 훌륭한 집이야!”
“형은 황궁에 자주 드나들어서 마음에 차지 않을 것 같았어.”
“황궁이랑은 다르게 멋있어! 음, 산뜻하면서도 화사한 느낌?”
진해가 감탄하며 방방 뛰는 것과 달리 해국의 왕자 사마상은 별 감흥이 없어 보였다. 어려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이런 식의 정원이 해국에서는 생각보다 보기 흔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진해는 사마상의 손을 잡고 네모난 연못 가운데 하얀 자기를 깐 다리를 건넜다. 미려가 진해의 앞에 서고 청려가 진해의 뒤를 따라왔다. 그리고 진해는 다리를 건넌 뒤 커다란 벚나무 아래 서서 가만히 그 줄기를 어루만지는 누군가를 볼 수 있었다. 진해를 안채로 부른 장본인인 옥길합이 벚나무 아래서 상념에 잠겨 있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던 나무지.”
옥길합은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해마다 좋은 꽃이 피었어. 꽃이 필 때 태어난 아이는 기량이 좋은 아이라는 이야기까지 있었네. 나는 이 꽃이 필 때 신방을 차리고 싶었지.”
“낭만적이네요.”
“그런가? 난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 주고 싶었을 뿐이었네. 과거 계책을 짜고 총령 장군직을 수락했던 것 역시 내 안사람이 될 그에게 더 좋은 것을 주고 싶어서였어.”
진해는 옥길합이 말하는 총령 장군직이 지금 그가 맡은 자리가 아닌 과거에 해국이 월국에 봉기했을 당시의 자리임을 눈치챘다. 황제국의 사신인 진해 앞에서 꺼내기엔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는 단어였다.
“지루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안으로 들까? 꽃봉오리가 맺혔지만 바람이 차니.”
옥길합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빙긋 웃으며 뒤돌아보았다. 진해 일행이 오기를 기다린 것처럼 안채의 문이 열리고 본채의 사람들과 다른 분위기의 사람들이 주안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안채에도 손님을 맞을 수 있는 공간이 있는 모양이었다.
“자, 상아. 청려에게로 가거라. 오 은인은 지금부터 외숙과 중요한 이야기를 할 거란다.”
주안상에 앉자 옥길합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사마상을 진해의 맞은편 옥청려의 곁으로 보내 버렸다. 사마상은 가고 싶지 않은 눈치였지만 옥길합의 명을 거역할 정도로 멍청한 아이는 아니었다. 네모나게 각진 상의 가장 상석에 옥길합이 앉고, 그 좌측에 진해가 앉았다. 우측의 상석에는 미려가 앉고, 그 옆에는 사마상과 청려가 앉아 있었다. 혈육과 혈육이 아닌 자를 갈라놓은 듯한 자리 배치였다.
“흠, 중요한 이야기라는 건 역시 가구 말씀이에요?”
진해는 안채를 흘끗흘끗 훔쳐보며 옥길합에게 말을 걸었다. 드디어, 드디어 강씨 부자의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진해는 가구 이야기를 꺼내면서 방을 한 번씩 돌아봐야 될 것 같다고 말할 셈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안채에 사시던 분의 의견도 들어 봐야 할 것 같다고.
“그렇지. 아무래도 그대가 살 곳이니 익숙한 가구를 들여놓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옥길합은 진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뱉고 있었다. 이 집에서 가장 내밀하고 은밀하며 중요한 곳에 진해를 살게 하겠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어, 어음. 안채는 이 집에서 중요한 사람이 사는 곳 아닌가요? 가주 부군이라든 가?”
“가주 부군뿐만 아니라 때로는 어린 아들이나 사위가 살기도 하지.”
“엇, 사위요?”
“이때까지 부군이 없었으니 비워 놓았으나 이제는 자네가 들어왔으니 새롭게 단장을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자네도 알다시피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금방 황폐해지지. 그럴 바에는 새 사위에게 주는 게 좋지 않겠나?”
“자, 잠깐, 잠깐! 아니, 내가 왜 아버지의 사위예 요?! 나는 이 집의 누구랑도 혼인한 적 없거든요!?”
아주 생사람 잡는 소리였다. 지금 월국에서는 진해랑 혼인하겠다고 기다리고 있는 음인이 둘 혹은 셋이나 있었다. 이제 와서 이 집 음인이랑 혼인하겠다고 하면 잘나디잘나신 황자님들은 물론이고 성질머리 더러운 삼랑이가 당장에 해국으로 달려와 멱살을 잡아챌 터였다. 그리고 진해 역시 그들을 결코 가볍게 보지 않았고.
“하하, 그건 걱정 말게.”
그러나 옥길합은 손사래를 치는 진해 앞에서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 진해는 몇 술 뜨지도 못한 수저를 내려놓고 어이없는 얼굴로 옥길합을 바라보았다.
“곧 그렇게 될 테니까.”
그리고 옥길합이 진해를 향해 가느다랗게 눈을 접는 순간,
“컥……!”
“으읏…….”
진해의 맞은편에서 이상이 발생했다. 진해의 맞은편 자리에 앉은 이들이 갑자기 가슴을 움켜잡고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옥길합에게서 술을 얻어 마신 미려와 청려. 두 사람이 가슴과 목을 움켜쥔 채로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가, 강아지야!!”
무슨 짓을 한 건지는 모르지만 미려와 청려는 무척 괴로워했다. 미려는 목을 그러쥐고 고통을 참아 내려 했고, 청려 역시 몸을 뒤흔드는 열기를 참으려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청려가 앉은 의자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넘어졌고, 청려는 몸을 웅크린 채 움찔움찔 경련하기 시작했다. 옆에 앉아 있던 사마상의 얼굴이 종잇장보다도 창백하게 질렸다.
청려가 쓰러진 사이로 음인의 향이 엉망진창으로 새어 나왔다. 미려의 향 역시 찢어진 종이 조각처럼 갈팡질팡 흘러나왔다. 헉헉 몰아쉬는 숨이 뜨거웠다. 잔뜩 붉어진 입술 사이로 뜨겁게 달궈진 타액이 진득하니 흘러내렸다.
“무슨 짓을 한 거야!!”
결국 미려 역시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쓰러지자 진해가 옥길합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이 자리에서 둘에게 손을 쓸 수 있는 건 옥길합 단 한 사람뿐이었다. 사마상은 제 옆의 둘이 쓰러지자 겁에 질린 채 의자에서 내려가 후다닥 문 쪽으로 달려갔다.
[쿵.]
“열, 열어 줘! 열어 줘! 우아앙, 우후! 살려 주세요! 아바마마, 아바마마……!”
그러나 문은 개미 한 마리도 통과시키지 않겠다는 것처럼 굳게 닫혔다. 언제 물러났는지 시중들던 이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미리 작정한 것이었다. 진해는 헐떡이며 경련하는 미려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내가 말했지 않나. 곧 혼인하게 될 거라고.”
아이의 애절한 울음소리 사이로 두 향인의 거친 숨소리가 섞여 들었다. 옥길합은 제 아들이 쓰러졌음에도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술 주전자를 들어 올렸다. 특이하게 뚜껑에 구멍이 두 개가 나 있는 주전자였다. 옥길합은 비어 있는 잔 두 개를 나란히 놓더니 각기 다른 구멍을 막으며 한 잔씩 술을 따랐다.
“예전에 흑암문에 의뢰를 한 후궁이 있었지. 의뢰한 건 별거 아니었어. 왕의 총애를 받을 만한 비법. 그것이 바로 후궁의 의뢰였지. 가문이 한미한 이였거든.”
옥길합은 바닥에서 가문의 두 사람이 꿈틀거리고, 어린 외조카가 울부짖거나 말거나 시종일관 느긋하게 행동했다. 그는 얼핏 보기에는 똑같아 보이는 잔 하나에다가 식탁에 놓여 있던 귤과 알맹이를 떨어뜨렸다.
“춘약도 어떤 의미로는 독이지. 흑암문은 아주 굉장한 독을 보내왔어. 딱 하룻밤을 보냈을 뿐인데 왕은 불같은 열락을 잊지 못해 그를 찾아왔고,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찾아왔지.”
귤 알맹이가 떨어진 잔의 내용물이 순식간에 푸른색으로 변했다.
“후궁은 왕의 총애에 취해 독을 쓰는 양을 늘렸고, 그 후에는 어떻게 되었는 줄 아나?”
그러다가 이윽고 푸른 물이 귤 알맹이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과육이 듬뿍 든 주홍빛의 말간 알갱이가 얼룩덜룩 흉물스러운 색을 뒤집어썼다.
“죽었네. 일정이 꼬여서 후궁의 처소에 가지 못하고 정무를 처리해야 했거든. 억지로 욕정을 참고 정무를 처리하다가 기가 역류해서 칠공에서 피를 뿜으며 비명횡사했어. 근처의 내관에게라도 처리했으면 살았을 텐데 참으로 운이 없는 양반이었지.”
“이, 이런 나쁜 자식! 그럼 지금 자기 아들이랑 조카한테 그런 독을 먹였다는 말이야!?”
진해는 옥길합의 친절한 설명에 기가 차서 하늘로 승천할 것 같았다. 세상에 어떤 미친 작자가 자기 아들이랑 조카한테 독을 먹일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그것도 보기만 해도 간장이 살살 녹아내리는 듯한 어여쁜 아들한테!
“자식을 위한 아버지들의 마음이라고 해 두지. 아버지들은 때론 자식을 위해 험한 짓도 마다하지 않는 법일세.”
“무슨 개소리야! 우리 미려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냐고! 미려는, 가뜩이나 애틋한 자식이잖아! 그럼 더 잘해 줘야 되는 거 아니야!? 독 같은 건 입에도 못 대게 해야지!”
옥길합에게 뭐라 더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바닥에서 끅끅 숨넘어가는 소리가 나 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진해는 그제야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얼른 두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욕정을 일으키는 독약이라 그런지 두 사람에게서 풍기는 향이 지독했다. 억지로 끌어낸 향이라 그런지 진하지만 무척 불안정했다. 탈정고를 먹기라도 한 것처럼.
“히잉…….”
난생 처음 겪는 거센 향의 폭풍에 어린 양인인 사마상은 겁에 질려 문짝에 기댄 채로 울고 있었다. 진해는 미려가 눈이 반쯤 뒤집힌 채로 꼴딱꼴딱 숨이 넘어가자 제 심장도 함께 숨이 넘어가는 듯했다.
“혀, 혀…….”
미려가 굳어진 혀로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물론. 자네 말도 일리가 있어. 우리 정려는 보기만 해도 애틋한 자식이고, 청려는 가문의 음인 중에서 특히 기량이 뛰어난 아이지. 자신은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말일세.”
그리고 진해가 벌벌 떨리는 미려의 손을 잡는 걸 보며 옥길합이 조용히 손을 까딱였다. 길고 펑퍼짐한 소매 사이에서 삐져나온 손은 현악기를 연주하는 악공의 손과 닮아 있었다. 정확히 미려와 같은 자리에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왕이 돌연히 죽은 후로 태후는 후궁을 잡도리해 왕의 사인을 밝혀냈네. 당시의 태후는 서해 옥가 음인의 태에서 나왔다고 하지. 우리 가문 외에 딱히 이것을 조사하고 쓸 수 있는 가문도 없는지라 이것은 곧 우리 가문의 손에 들어왔고 대대로 가주들이 물려받았네. 세월이 흐르면서 이것의 대비책이 만들어지기도 했지.”
그 손가락 위에서 흑옥빛을 띤 환약이 매끄럽게 파도를 타고 있었다. 정확히 한 알이 길고 섬세한 손가락 위를 끊임없이 유영하고 있었다. 진해는 부들부들 떨리는 미려의 손을 잡고 옥길합의 손가락을 노려보았다. 옥길합은 해독약이 분명한 환약을 가지고 놀다 자신의 은가락지가 위치한 곳에 딱 멈추었다.
“선택하게.”
중독자는 둘인데 환약은 한 알뿐이었다.
“자네는 이것을 누구에게 먹일 것인가.”
“…….”
사실은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인 답이었다. 청려가 안쓰럽기는 했지만 미려와 청려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진해는 당연히 미려를 선택할 터였다.
“아 참. 내가 이 말을 깜박했군. 이 나이가 되면 조금씩 정신이 깜박깜박한단 말이지.”
그러나 옥길합은 진해에게 다른 답을 바라는 것 같았다. 그는 진해의 눈을 들여다보며 서늘하게 미소 지었다.
“만약 자네가 이 환약을 정려에게 준다면 가여운 청려는 중독된 채로 서서히 죽게 되겠지. 해소되지 못한 욕정에 시달리다 불명예스러운 몰골로 죽게 될 것이야. 하지만 백부된 이로 어찌 그 꼴을 두고 보겠나. 상아.”
“히끅!”
“이리 오거라.”
“우으…….”
“외숙 말을 듣지 않을 것이냐?”
사마상은 얼굴이 눈물에 잔뜩 젖은 채로 옷자락을 움켜쥔 채 마구 고개를 도리질 쳤다. 그러나 사마상의 반항은 옥길합이 사마상에게 미간을 구겨 보이자 순식간에 끝이 나고 말았다. 사마상은 보이지 않는 뭔가에 끌려오는 것처럼 옥길합에게 질질 끌려왔다. 진해는 알지 못했지만 그것은 언젠가 미려가 연회장에서 종형제들을 도륙할 때 썼던 것과 같은 종류의 물건이었다.
“흐으, 흐으으…….”
“그래서, 나는 자네가 우리 정려를 선택해 준다면 무척 기쁠 테지만 선택받지 못한 청려가 가여우니 이 자리에서 청려를 장가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네.”
“……뭐?”
“자네에게 청려를 장가보내는 것도 괜찮겠지만 그럼 정려가 싫어할 테니 여기.”
“수, 숙부님…….”
“우리 가문의 핏줄을 이은 어엿한 양인 왕자이신 상이에게 말이야.”
진해가 미려를 선택해 해독시키면 청려를 살리기 위해 사마상과 합방시키겠다는 말이었다. 진해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말에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린 채 사마상과 청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옥길합은 울먹이는 사마상을 강아지나 고양이를 쓰다듬는 것처럼 귀엽게 어루만졌다. 사마상의 얼굴은 옥길합의 손에 들어올 정도로 작고 여렸다. 고작 여덟 살이었다.
옥길합은 어린 사마상을 갖다 놓음으로써 진해가 옥청려를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놓았다. 게다가 진해는 해산에게 해국에서 다른 음인을 안지 않겠다고 맹세까지 하지 않았던가. 사마상의 애처로운 눈동자를 바라보며 진해는 미려의 손을 한 번 꾹 잡았다가 놓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옥길합에게 걸어갔다.
“……개자식.”
“후후, 강아지의 아버지니까.”
“당신은 정말 비열한 자식이야.”
“내 아이의 바람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옥길합은 사마상의 뺨을 비비며 진해에게 해독약을 얹은 손등을 내밀었다. 진해는 은가락지 위에 장식처럼 놓여 있는 그것을 손등을 때리듯이 빼앗았다. 부들부들 경련하는 미려를 지나는 걸음이 무거웠다. 진해는 덜덜 떨며 침을 흘리는 청려의 입을 열어 환약을 밀어 넣었고, 그것이 녹아 청려의 목구멍 너머로 흘러 들어갈 때까지 지켜보았다.
“하아…….”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청려의 숨이 편안해지고 굳어진 채 경련하던 사지가 편안하게 풀렸다. 엉망진창으로 뿜어져 나오던 향도 흩어지고, 붉어진 안색도 원래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반면에 미려는 웅크린 채 옷을 쥐어뜯기 시작했다. 꽉 움켜쥔 손마디가 하얗게 변해 있었다. 잔뜩 웅크린 다리 사이에서 질척질척한 소리가 났다.
“혀엉…….”
흐느끼는 소리를 들으며 진해는 미려에게 다가가 미려의 오금 아래에 팔을 집어넣어 미려를 번쩍 들어 올렸고,
“씨발, 이 자리에서 일 치르는 거 보기 싫으면 방으로 안내해.”
옥길합에게 선전 포고를 하듯 내뱉었다. 미려를 죽게 놔둘 수 없으니 일단은 저 빌어먹을 자식이 하는 대로 하랄 수밖에 없었다. 옥길합이 손짓하자 곧 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 둘이 진해를 안내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냈다. 덤덤한 표정의 일도와 입술을 꽉 깨문 오호였다.
* * *
본의 아니게 진해는 안채를 대충 둘러보게 되었다. 진해에게 안긴 미려는 시간이 지나자 뻣뻣하게 굳어진 사지가 늘어지면서 얼굴을 복숭아빛으로 물들인 채 쌕쌕 뜨거운 숨만 몰아쉬었다. 화사하고 고혹적인 향이 진해의 몸을 듬뿍 물들였다. 같은 양인의 향이라 약간의 거부감이 느껴졌지만 이 향은 진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양인의 향이었다.
“혀, 혀엉……, 형아…….”
게다가 진해가 감히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공언하는 입술이 연신 진해를 부르고 있었다. 달뜬 숨이 섞인 목소리는 백 살 먹은 고자라도 단번에 고칠 정도로 요염하기 그지없었다. 만약 진해가 평소에 미려의 이런 목소리를 들었다면 마하반야바라밀다를 외치며 귀를 막고 차가운 폭포수 아래로 뛰어들었을 것이다. 그만큼 동하는 목소리였다.
진해를 가로막는 것은 진해가 안은 이 아름다운 몸이 진해가 무려 십수 년이 넘도록 먹이고 입히고 씻겨 온 것이라는 점과 또한 진해와 미려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저 망할 옥 가주의 의도 때문에 정교하게 된다는 점이었다. 청려를 위한다는 입방정을 떨면서 사마상을 데려다 놓았으면서 미려에게는 해독할 음인을 데려다 놓지 않은 걸 보면 옥길합은 미려가 진해를 좋아한다는 걸 진작부터 알던 모양이었다.
안는다면 서로가 원해서 안는 게 좋았다. 비록 진해가 좀 변태적이라 이리 묶고, 저리 묶고, 이렇게 괴롭히고, 저렇게 울리고 하는 걸 좋아했지만 서로가 합의하에 즐기는 게 중요했다. 평소의 자신이 얼마나 교양 있고 정중한 변태였는지를 떠올리며 진해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구겼다. 일도와 오호는 그런 진해의 속도 모르고 부지런히 진해를 준비된 방으로 안내했다.
“드십시오, 소가주 부군.”
“…….”
이젠 아예 대놓고 소가주 부군이라고 불렀다. 일도는 허리를 깎듯이 숙였지만 오호는 진해에게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시도였다. 오호는 괴로운 표정으로 허리를 숙였고, 진해 역시 뭐 씹은 표정으로 미려를 안은 채 방으로 들어섰다. 탁, 등 뒤로 문 닫히는 소리가 천둥 치는 소리만큼이나 우렁찼다.
“여기가 안주인의 방인가?”
아무것도 모르는 진해가 봐도 안채에서 제일 좋은 방이었다. 너른 방에 우아하게 스며드는 햇빛, 화사한 병풍이며 고아한 가구들이 이곳이 안주인의 방이 아니면 어디가 안주인의 방이겠는가라고 고하는 듯했다. 무엇보다 침상이 어마어마하게 컸다.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고 온기가 가득했지만 진해는 어쩐지 이 방이 아주 오랫동안 비어 있었을 것이라 예측했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공간 특유의 썰렁함이 진해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 향료와 숯으로 온기를 더한다고 해도 사람의 체취는 더할 수가 없었다.
“하윽, 형…….”
미려가 괴로운 듯 몸을 뒤틀자 방을 살펴보던 진해가 서둘러 침상으로 향했다. 장신을 안고 오느라 팔이 저릿했지만 침상 위에서 헐떡이며 괴로워하는 얼굴을 보자 팔의 아픔보다 더한 것이 가슴을 잠식했다.
“형, 형…….”
미려는 숨이 넘어가려는 사람처럼 진해를 부르며 손을 뻗었다. 섬세하고 고운 손가락이 진해의 뺨에 닿았고, 떨리는 끄트머리가 진해의 뺨 위를 덧없이 맴돌았다.
“강아지야. 이건, 그러니까…….”
진해는 저를 부르며 다리를 움츠리고 덜덜 떠는 이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월국에서처럼 안 된다고 비명을 지르며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풀어 주지 않으면 죽는다. 진해가 가장 사랑하는 양인이 죽는다. 이 아름다운 이가 피를 흘리며 끔찍하게, 죽는다. 그 사실이 진해의 가슴을 괴롭게 옥죄었다. 누군가를 묶는 건 좋아해도 묶이는 건 싫어하는 진해를 난폭하게 뒤흔들었다.
“사, 랑해……. 형……. 진해, 형…….”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진해를 누구보다도 원할 것이 분명한 미려가 눈물을 흘리더니 진해의 뺨을 어루만지던 손을 거뒀다. 그리고 번개처럼 몸을 움직여 언제 숨겨 뒀는지 모를 단도를 꺼내 들고 곧바로 자신의 목을 찌르려 했다.
“안 돼!!”
중독된 몸이라 천만다행이었다. 중독되지 않은 미려는 진해가 쫓아가기 힘들 정도로 민첩한 아이였으므로 절대로 진해가 말릴 수 없을 터였다. 진해는 미려의 손목을 쳐 단도를 침상 아래로 떨어뜨렸다. 경악하며 바라본 수정 같은 눈망울 속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
그리고 진해는 이 엿 같은 상황이 미려에게도 엄청나게 상처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옥 가주 그 개자식은 미려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제멋대로 자식을 위한답시고 이빨을 깠다.
“미려야, 우리 강아지야.”
진해는 눈앞에 보이는 누구라도 안고 싶을 것이 분명함에도 꾹 눌러 참고 있는 미려의 양 뺨을 감싸 쥐었다. 옥 가주 그 개놈은 짜증 났지만 미려는 누구보다도 사랑스러운 아이였고, 또 언제나 친애하고 있는 아이였다. 절대로 상처 따위 주고 싶지 않았다.
“나도 사랑해. 정미려는 이 오진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유일하게 사랑하는 양인이야.”
“아…….”
“남들이 양심 없는 놈이라 욕해도 어쩔 수 없지. 아무리 찾아도 우리 강아지에게 어울리는 놈이 없으니 키운 내가 거두는 수밖에! 이건 정말 남는 장사야. 고작 십수 년을 들이고 세상에서 가장 예쁜 양인을 짝으로 맞다니!”
미려는 혼자서 주절주절 떠드는 진해를 바라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우습게도 미간이 구겨졌는데도 지나가는 사람들보다 훨씬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진해는 한참을 떠들다가 길게 한숨을 내쉰 뒤 눈물이 굴러떨어지는 미려의 양 눈가를 그러쥐었다.
“너를 범한다고 너무 미워하진 말아 줘. 네가 날 싫어하면 정말 슬플 것 같으니까.”
그리고 눈을 꾹 감으며 파들파들 떨고 있는 입술에 제 입술을 깊게 포갰다. 데지나 않을까 싶을 정도로 뜨거운 입술이었다. 입술이 닿자 미려는 언제 울었냐는 듯 진해의 목에 팔을 감았다. 매일같이 악기를 연주해서 그런지 탄탄하게 근육이 붙은 젊고 건강한 팔이었다. 길고 치렁치렁한 소매가 늘어지자 우유처럼 뽀얀 살결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으응…….”
하얗게 드러난 살이 진해의 목덜미에 비벼질 때마다 진해 역시 조금씩 기분이 이상해졌다. 피할 수 없는 배덕이 진해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러는 동시에 뭐 어때. 친동생도 아닌데, 이렇게 예쁜 것이 나를 좋다고 매달리는데 같은 무책임한 생각 역시 맴돌기 시작했다.
“하응…….”
게다가 잔뜩 달뜬 목소리는 진해가 이제껏 들어 본 것 중 가장 요염한 교성을 자아냈다. 사람들의 넋을 빼는 노랫소리가 진해의 아래에서 한껏 흐트러졌다. 덩굴처럼 엉겨 비비적대는 몸뚱이의 열기가 진해에게도 옮겨붙기 시작했다. 진해는 꽃잎처럼 부드러운 입술을 입술로 문지르다, 매끄러운 밑으로 파고들어 가 달콤하게 고여 있는 타액을 훔쳐 냈다.
‘이건 또 기분이 참…….’
한데 엉겨 붙어 혀를 섞는 동안 미려는 참지 못하겠는지 진해의 아래에 제 아래를 비벼 댔다. 음인들과도 사타구니를 비빈 적이 있었지만 양인과 이렇게 비비적대는 건 처음이었다. 양인의 것이라 그런지 양감이 좀 다른 기분이었고, 그것이 묘하게 진해의 취향에 들어맞았다.
이왕 안는다고 했고, 안기로 했으니 다른 생각 따윈 집어치우기로 했다. 머릿속에서 해산 도련님의 무서운 얼굴과 삼랑이의 꽉 쥔 주먹이 떠올랐지만,
‘거짓말은 안 했다! 거짓말은! 미려는 음인이 아니라 양인이야!’
진해가 애지중지하는 것이 헐떡거리며 몸을 비트는데 욕정이 안 솟으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부처였다.
“아……!”
진득하니 입을 맞추던 진해가 귀 뒤에 소리 나게 입을 맞추자 미려가 움찔거리며 또다시 요염하게 신음했다. 우습게도 음인들보다도 더욱 가련하고 애틋한 신음이었다. 진해의 가학심을 부채질하는 신음이기도 했고. 거기다 미려의 살은 정말로 부드럽고, 향기롭고, 달콤했다.
“아응…….”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진해의 입에 착착 달라붙었다. 진해는 술에 취한 것처럼 점점 열이 올랐다. 치렁치렁한 옷자락 속으로 급히 손을 밀어 넣고 되는 대로 욕심껏 살을 주물렀다. 균형이 잘 잡힌 아름다운 몸이 진해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움찔거리고, 떨며 진해의 손에 복종했다.
“형, 거긴, 거기는…… 더러워…….”
“괜찮아. 어릴 때부터 실컷 봤는데 뭘.”
중독된 뒤부터 바짝 솟아 물을 흘리는 곳을 그러쥔 채 슬슬 문지르자 미려가 부끄러운 것처럼 양팔로 눈을 가렸다. 진해는 씩 웃으면서 그곳으로 내려가 보란 듯이 길게 핥아 올렸다.
“윽……!”
미려가 허리를 펄떡이자 진해의 침과 미려의 타액에 젖은 천이 진해의 입술을 강하게 두드렸다. 진해는 천 위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도드라진 천을 이로 물어 천천히 벗겨 내기 시작했다.
“많이 컸네. 우리 강아지 정말 많이 컸어.”
“혀엉, 보지 마…….”
“왜? 이렇게 예쁜걸.”
“으읏…….”
천을 벗기자 잔뜩 단단해진 양인의 물건이 퉁기듯 튀어나왔다. 다른 양인 놈들의 것을 본 적은 없었지만 진해는 단연코 이것이 양인들의 물건 중 가장 예쁘게 생긴 놈일 것이라 장담했다. 험악하게 생긴 자신의 것과 달리 곱상하고 예쁘장하게 생긴데다가 색깔까지 고왔다.
“야하네.”
거기다가 하는 짓은 또 어찌나 귀여운지 진해가 보기만 하는 데도 움찔거리며 갈라진 끝을 액으로 적셨다. 희끄무레한 액을 흘리며 까딱까딱 흔들리는 게 퍽 귀여운 애완동물 모양이었다. 귀여운 애완동물은 사랑해 줘야 하는 것이 이치였다.
“하악……!”
진해는 입을 벌려 젖은 끄트머리를 사탕처럼 쪽 빨아 당겼다.
“형, 혀엉, 아, 아……!!”
그 뒤로는 그야말로 일사천리였다. 진해는 이 짓을 잘했고 하는 것도 좋아했다. 입 안에 찝찔하게 고이는 액을 거리낌 없이 삼키며 진해는 입을 크게 벌려 모양 좋은 물건을 삼키고 쭉쭉 빨아들였다. 미려의 발이 요를 밀다가, 허벅지로 진해의 머리를 조였다.
기둥에 불거진 혈관을 혀로 더듬거나, 갈라진 끄트머리를 뾰족하게 쑤실 때마다 머리 위에서 날카롭게 흐느끼는 소리가 났다. 미려는 진해를 밀어내려는 것처럼 손으로 진해의 머리를 흐트러뜨렸으나 진해는 미려의 것을 똑 떼 내 삼키려는 것처럼 집요하게 달라붙었다.
“흐앗, 아, 아아……!”
꽉 조인 채 머리를 위아래로 흔들자 미려의 허리도 진해의 고개를 따라 흔들렸다. 저도 양인이라고 허리를 흔드는 모양새가 제법 그럴싸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젠 쓸모없는 움직임일 뿐.
“흐앙……!”
진해가 안으면 미려는 이제 진해의 음인이나 마찬가지였다. 태가 없으니 아이를 갖진 못하겠지만 진해의 것이었다.
“어디 보자……, 분명히 준비를 해 놨을 텐데…….”
입 안에 토해진 씨물을 꿀꺽 삼킨 뒤 진해는 미려의 위를 엉금엉금 기어 침상 주변을 뒤지기 시작했다. 음인과 달리 양인은 뒤가 젖질 않으니 분명히 준비가 필요할 터였다.
“우왁!”
그런데 쌕쌕 숨을 몰아쉬던 미려가 진해의 허리를 잡고 침상으로 끌어 내렸다. 그리고 자신이 그 위에 올라탔다.
“하아, 형…….”
욕망에 젖은 눈동자가 요염하게 윤이 났다. 미려는 반쯤 헐벗은 채로 진해의 몸 위를 더듬었고 탱글탱글하게 올라붙은 엉덩이를 진해의 사타구니에 비볐다. 그러면서 제 손으로 제 물건을 잡고 마찰하기 시작했다. 방금 사정했음에도 순식간에 단단하게 부풀어 있었다.
“읏, 으읏…….”
참으로 굉장한 눈 호강이었다. 이제 와서 소리가 나는 게 부끄러운지 제 옷자락을 물고 눈가를 붉힌 채 자위하는 미인이라니! 진해는 어쩐지 코 쪽이 뜨끈한 것이 코피가 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미려야.”
“으응…….”
“착하지, 우리 다음 단계로 가려면 형이 찾아야 할 게 있어, 응?”
게다가 허벅지를 토닥거리며 잠깐 비켜 달라고 하자 고개를 마구잡이로 흔드는 게 깜찍하고 앙큼해서 콱 깨물어 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진해는 어쩔 수 없이 미려의 허리를 잡아 힘으로 침상에 찍어 눌렀다.
“형의 음인이 됐으면 말을 잘 들어야지. 해국 음인들은 조신해야 한다는 거 못 들었어?”
그리고는 혼을 내는 것처럼 하얀 엉덩이를 힘껏 내리쳤다.
“아아!”
손에 착 달라붙는 살맛이 그야말로 기가 막혔다. 하얀 피부 위에 새겨진 손자국은 더 마음에 들었고. 때린 살 위를 달래듯 살살 간질이다 진해는 침상 위를 뒤져 마침내 원하는 물건을 손에 넣었다. 하얀 자기 병에 요사스러울 정도로 붉은 천이 입구를 봉한 수상쩍은 병이었다. 진해는 병을 열어 제 손에 던 뒤 조심스레 냄새를 맡아 보았다. 옥 가주 이 빌어먹을 것이 또 이상한 약을 탄 게 아닌가 싶어서였다.
“우리 강아지, 다리 벌려 볼래?”
다행히 평범한 향유인 듯했다. 진해는 향유를 충분히 덜어 손을 적셨고 번들거리는 것을 고스란히 보이며 미려에게 상냥하게 웃어 보였다.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어투였다.
번들거리는 액체를 보자 미려는 꿀꺽 침을 삼켰다. 얼굴이 시뻘겋게 붉어진 채로 머뭇거리다가 조심조심 쭉 뻗은 다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마음의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다리를 벌린 후에는 스스로 제 허벅지를 잡기까지 했다. 지나칠 정도로 좋은 모양새였다.
“어쩜 이렇게 예쁜 짓만 할까.”
묶는 것도 좋아했지만 스스로를 포박하는 것도 엄청나게 좋아했다. 진해는 실실 웃으면서 향유병을 들어 미려의 다리 사이로 가져갔고, 그대로 미려의 물건 위에 부어 버렸다.
“흐으…….”
미끌미끌하면서도 점성이 있는 액체가 느릿하게 미려의 회음부로 흘러내렸다. 진해는 미려의 거웃이 젖어 색이 진해지다 못해 착 달라붙을 때까지 충분히 향유를 부었고, 향유가 도달한 틈이 움찔거리는 걸 놓치지 않고 모두 다 지켜보았다.
진해는 향유의 움직임을 따라 하듯 미려의 거웃을 문지르다, 미려의 구슬을 스치고, 끈적끈적하게 젖은 회음을 중지로 쓸어내렸다. 간지럼을 타는 것처럼 흰 허벅지가 움찔거렸지만 진해는 멈추지 않고 향유가 끈적하게 고인 곳까지 직진했다.
“윽…….”
“힘 빼.”
진해는 뭔지 모를 긴장감에 두근거리며 혀를 내어 입술을 핥았다. 미려가 눈물이 고인 채 저를 올려다보는 게 더할 나위 없이 흥분됐다. 손톱 끝으로 단단히 다물린 살이 느껴졌다. 힘을 주어 밀어 넣자 위쪽에서 작게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이니까 살살 해 주는 거야?”
처음이 아니라 만 번이라도 살살 풀어 줄 터였지만 진해는 미려에게 일부러 엄한 척 허세를 부려 보았다. 미려가 눈물이 맺힌 채로 입술을 꽉 깨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진해가 원한다면 미려는 상처가 나도 괜찮다고 했으리라.
“흐아…….”
하지만 그런 건 진해가 싫었다. 진해가 사랑하는 건 감미로운 고통이었다. 상대가 저를 잊지 못할 정도로 달콤하고 진득하며, 도착적인 감각이었다. 진해는 양인에게는 안기기만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잊히지 못할 사람이 되리라는 걸 알았다. 꽉 물린 이곳을 처음으로 개척하는 것이 자신이라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뿌듯하게 차올랐다. 건조한 속을 향유로 덧칠하면서 진해의 물건도 거칠게 맥동했다.
이 꽉 조이는 속을 마구잡이로 파헤치고 싶었다. 싸도 싸도 흐르기만 하는 곳을 제 정액으로 잔뜩 부풀리고 싶었다. 배를 누르면 허옇게 흘러내릴 것이다. 양인의 구멍에서 양인의 정액이 음탕하게 흘러내릴 것이다.
“아앗―!!”
진해가 중지를 밀어 넣고 향유로 속을 적시다 어느 부분을 긁어내리자 미려가 갑자기 새된 비명을 질렀다. 제 허벅지를 움켜잡은 손마디가 새하얗게 변했다. 진해는 눈을 가느스름히 뜨고 미려의 구멍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것 봐라?’
뒤로는 느끼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진해의 예상이 틀린 모양이었다. 미려가 특별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양인도 원래 개발하면 뒤로 느낄 수 있는 걸지도 몰랐다 . 진해는 저를 보며 흔들리는 시선을 무시하며 집요하게 손가락의 개수를 늘려 나갔다. 중지와 검지로 약간 감촉이 다른 곳을 문지르자 미려가 앓는 소리를 내다 저 혼자 그대로 싸 버리고 말았다.
“하아, 하아…….”
그래도 진해의 물건이 들어가기에는 턱없이 좁은 공간이라서 진해는 꺼떡거리는 물건을 방치한 채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사실 진해도 슬슬 한계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러다간 넣지도 못하고 밖에서 싸 버릴 판이었다.
“옳지, 옳지.”
“윽, 읏, 으큭…….”
미려가 몇 번이나 질펀하게 싸질렀을까. 진해는 마침내 제 것이 겨우 들어갈 만큼 미려의 뒤를 길들였다. 뻐끔뻐끔 벌어진 채 젖은 모양새는 음인의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급하게 속곳을 벗어 내리고 제 허벅지를 잡은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떨리는 입술에 입술을 마주 댄 채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밀어 넣었다.
거칠게 갈라지는 숨소리가 진해의 입술을 적셨다. 양인을 안는다는 도착적인 감각이 진해의 등줄기에 소름처럼 다닥다닥 솟아올랐다. 더군다나 제가 키운 아이였다. 남들이 본다면 뭐라 손가락질을 해도 할 말이 없는 관계였었다. 그랬다. 지금까지는 그런 관계였었다.
“진해, 오진해…….”
공을 들여 끝까지 밀어 넣고, 물건을 조이는 압박감에 진해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빠듯하게 조이는 감각이 음인과는 전혀 달라서 정신이 휙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때, 미려가 진해를 목에 팔을 감고 진해를 불렀다. 아름다운 입술에서 흘러나온 이름은 이때까지의 관계에 종말을 고함과 동시에 새로운 관계의 시작을 고하는 것이었다.
“버릇없어, 너.”
진해는 얼굴이 붉게 상기된 채로 약간의 씁쓸함을 담아 미려의 입술을 물어뜯었다. 밤은 깊었고, 정교 역시 끝나지 않았다. 독 기운 역시 질긴 놈이었다. 진해는 미려의 허벅지를 꽉 움켜쥔 채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아침 햇빛이 눈꺼풀 사이로 스며드는 걸 느끼며 진해는 천천히 눈을 떴다. 정사 후의 여운이 진해의 몸에 안개처럼 옅게 깔려 있었고, 머릿속은…… 복잡했다.
‘이제 어쩌지?’
자신이 안지 않으면 죽는다 해서 안긴 했지만 진해는 여러모로 착잡한 심경이었다. 소중히 길러온 꽃을 단번에 꺾어 버린 기분이었다. 거기다가 월국에는 진해와 혼인을 약조한 해산이 기다리고 있었다. 진해는 자신이 과거 해산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며 얼굴이 핼쑥해지고 말았다.
‘잘한다, 오진해! 저는 측실이 되기 싫다고 온갖 잘난 척을 다 하더니!’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았다. 진해는 미려를 친애했고 미려를 살릴 수 있다면 미려가 아니라 옥 가주와도 잤을 터였다. 다만 진해가 두려운 것은 해산이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일지였다. 또한 삼랑이 자신에게 어떤 보복을 가할지.
……솔직히 해산보다 삼랑이 무서웠다. 해산은 삼랑이 제 옆에서 얼쩡거리고 수작을 부려도 어찌어찌 넘어가 줬지만 삼랑은 예전부터 미려와 앙숙 사이였다. 미려가 저보다 먼저 진해에게 안겼다는 걸 알면, 양인이 음인인 자신을 추월했다는 사실을 알면 진해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빌어야 돼!!’
생각보다 금방 결론이 났다. 미려가 음인이 아니라는 얄팍한 핑계를 댄다면 해산은 삼랑보다도 먼저 진해를 넝마 조각으로 만들어 버릴 터였다. 솔직하게 털어놓고 손이 발이 되게 빌어야 했다.
“으응……. 형아……?”
“잘 잤어?”
“……응.”
미려는 진해가 뒤척거리자 잠에서 깬 모양이었다. 진해는 미려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돈해 주며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미려는 살짝 풀린 눈으로 벗은 진해와 마찬가지로 벗은 자신의 몸을 바라보았다.
“아픈 곳은 없지? 좀 불편할 테니까 오늘은 조심해서 움직이는 게 좋을 거야. 밥도 소화가 잘 되는 거로 먹는 게 좋구.”
상황을 이해한 미려의 얼굴은 붉어졌다가 창백해지기를 반복했다. 그렇게도 원하는 진해와 맺어졌지만 진해가 원해서 자신을 안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진해 못지않게 복잡한 심경에 사로잡힌 듯했다.
“형, 내가…….”
진해는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른 눈동자를 보다 고개를 숙여 떨리는 입술을 입술로 막아 버렸다. 앞서 말했듯이 미려가 상처받기를 원하지 않았다. 버려지는 것이 얼마나 비참하고 끔찍한 감정인가를 진해보다 잘 아는 이는 없었다.
‘……언젠가 이것 때문에 사고 칠 줄은 알았지만 이런 대형 사고를 칠 줄이야.’
진해는 아무 말 없이 안기는 미려를 토닥여 주며 사람 문제만 되면 거의 재앙급으로 우유부단해지는 자신의 성정을 저주했다. 놀랍게도, 진해는 해산에게 빌 생각을 하면서 미려를 저버리지 않으려 했다. 자신이 미려에게 손을 댔으니, 이 곱고 여린 것에게 손을 댔으니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모든 결정은 진해와 교제 관계에 있는 해산의 몫이었다. 진해는 해산이 이것 때문에 저를 버린다면 그 결정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씁쓸한 사실을 인정했다. 아마 확실히 버려질 터였다. 황자씩이나 되는 귀한 음인이 어찌 혹이 딸린 양인을 받아들여 줄까.
‘그것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지!’
그리고 마음을 정리한 진해는 이내 복수심으로 두 눈을 불태웠다. 진해와 미려에게 엿을 먹인 괘씸한 작자에게 더욱 큰 엿을 줄 의지에 불탔던 것이다. 엿을 먹을 자는 바로 미려의 생부인 옥길합이었다. 진해는 그가 미려에게 독을 먹인 순간 그에게서 아버지 자격을 박탈하기로 했다!
“미려야. 이왕 이렇게 됐으니 어쩌겠냐. 너도 네 좋을 대로 있다가 질리면 떠―”
“아니야! 나는, 형이 좋아. 형을 사랑해. 형이야말로 내가 싫지 않아? 나는 양인이라 아이도 낳지 못해. 형이 원하는 토끼 같은 자식들은 줄 수 없어. 게다가 형은, 나를 억지로 안았잖아…….”
“네가 여우보다 예쁜데 뭐가 문제겠어……. 것보다 하나만 물어보자.”
“응.”
“일도나 이단이나 그런 애들. 그런 애들은 가주 명을 따라, 아니면 네 명을 따라?”
생뚱맞은 질문에 살짝 붉어진 미려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미려는 잠깐 고민하다 짧게 답했다.
“내가 완전히 상속받은 건 이단, 단승 한 사람뿐이야.”
* * *
“소가주 부군을 뵙습니다.”
“…….”
진해가 이단이라 알고 있던 이는 미려의 부름에 바람처럼 달려왔다. 미려와 함께 얇은 침의 차림으로 있는 진해에게 지체 없이 무릎을 꿇었다. 잠춘동에 있을 때는 한들한들 노니는 것이 영락없는 한량 문지기였는데 각 잡고 차려입은 걸 보니 제법 그럴듯한 영식이었다. 그러나,
“국수는 많이 먹었어?”
진해는 단승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를 여전히 진해가 아는 이단으로 대하였다. 그리고 진해가 그의 앞에 다가가 서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이가 고개를 들며 씩 웃음 지었다. 허락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진해가 내민 손을 꽉 붙들었다.
“아니. 하지만 이젠 국수 먹을 일이 생기겠지. 안 그래, 오 형?”
진해와 이단은 월국에서 제법 말이 통하는 사이였었다. 일도, 본명은 도기라고 하는 자는 무력이 강하고 우직한 반면 이단, 단승은 눈치가 빠르고 손이 빨랐다. 삼략(본명 약전)과 사생(생결), 오호(호별)는 이 둘의 보조를 맞추거나 빈자리를 메꾸는 역할이었다.
더군다나 단승은 다섯 가문의 가신 중 가장 먼저 미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고 했다. 보통은 소가주가 가주 대리를 맡을 때쯤에야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 보통인데 단승은 무슨 생각인지 미려를 보자마자 미려를 자신의 주군으로 삼았다고 했다. 그리고 진해는 월국에서 봤던 단승의 성격을 떠올리며 그가 왜 그랬는지 대충 넘겨짚었다. 진해와 단승이 제일 많이 마주치던 곳은 바로 도박장이었다.
단승, 이단은 도박을 좋아했다. 패가 돌고 긴장이 감돌며 위기와 난관이 파도처럼 덮치는 아슬아슬함을 사랑했다. 이단에게 알려져서는 안 될 출생을 지닌 아름다운 주군은 그야말로 꿈에서나 나올 법한 이상적인 주군이었을 것이다.
“이단아. 일도랑 네가 싸우면 누가 이기냐?”
“글쎄. 서로 돕기만 하지 싸워 본 적은 없어서.”
“그럼 삼략이랑 사생이랑 오호는?”
“호별 그 녀석은 원래 싸우려고 있는 녀석이 아니니까 내가 이기겠지. 약전과 생결은 도기보단 수준이 못하다고 알고 있고. 것보다 그건 왜 물어?”
“국수 백 그릇 사 줄게.”
진해는 의아함에 눈썹을 꿈틀거리는 이단의 어깨를 그러쥐었다. 미려가 조금 걱정스러운 눈으로 진해의 등을 바라보는 동안 진해는 이단의 귀에 작게 뭐라뭐라 속삭였다.
“가끔 생각하는데 오 형은 정말 막 나가는 경향이 있어. 그래서 소가주랑 맺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아, 이미 맺어졌지 참.”
이단은 진해에게 능글맞게 웃어 보이고는 미려에게 공손히 예를 갖췄다. 미려가 진해와 이단의 대화를 막지 않았으니 이는 미려가 진해의 뜻을 따른다고 해도 무방할 터였다. 진해가 내린 지시는 단순하면서도 조금 위험한 것이었다. 이단, 단승은 가문에서 안다면 자신을 축출하다 못해 처리하려 할 것이 분명한 명을 품에 안고 조금 신나게 발걸음을 옮겼다. 해국에 온 후로는 조금 좀이 쑤시던 참이었다.
이단이 사라진 지 얼마 되지 않아 기다리고 있었던 듯 시종들이 물 밀듯 몰려왔다. 서해 옥가의 분가에서 특별히 선별된 이들과 다섯 가문의 가신들이 반반 섞인 인원이었다. 그들은 진해를 귀빈으로 대하던 때와는 다른 예로 진해를 대했다. 진해와 미려에게 같은 색, 같은 무늬의 옷을 입힌 뒤 같은 패옥을 늘어뜨리고, 같은 모양의 관과 같은 향의 향낭을 차게 했다. 백 리 밖에서 봐도 영락없는 한 쌍이었다.
“가주께서 본당에서 기다리십니다.”
일도의 아버지이며 과거 진해에게 자신을 정씨라 속인 이가 단장을 기다리다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이 집의 총관 집사이기도 한 이였다. 일도, 도기는 아마 안채 밖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저기 뭐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나?”
진해는 미려와 함께 안채의 긴 회랑을 걸으면서 그 동안 궁금했던 한 가지를 물었다. 진해가 이 방에 들어옴으로써 반쯤 확신하고 있던 사실이었다.
“이 방은 전 가주 부군 이후로는 쭉 비워져 있었던 거지? 이 방뿐만 아니라 안채 전체가 말이야.”
“예, 그러하옵니다. 저희 주군께서 혼인하지 않으셨고, 정려 도련님께서도 타국에 계셨으니 당연히 비어 있었지요.”
“그렇군. 알았어.”
그것은 강백서와 강해아가 안채에 있었는지의 유무였다. 전에는 빙빙 돌리며 대답을 회피하던 옥가의 사람들이 이제는 아주 선선히 진해의 물음에 답해 주었다. 궁금해하던 것이 풀렸으니 속이 시원해야 할 텐데 진해는 속이 점점 더 꼬이기만 했다. 문득 이 모든 것이 옥 가주가 자신을 미려에게 주기 위해 획책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덤으로 추문에 휩쓸린 황후의 안위도 챙기면서.
‘씨발, 잠깐만 그럼 그 서신은 뭐야? 창명후 영감이 그걸 보고 넘어간 걸 보면 가짜는 아닌데!’
확실한 것은 진해가 옥길합이 짠 거미줄 위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진해는 속으로 이를 득득 갈면서 이 거미줄을 찢어 버릴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신을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만 알게 되면 진해는 곧바로 지긋지긋한 해국에서 탈출할 계획이었다. 탈출할 계획은 이미 짜 놓았고, 또 실행하고 있었다. 진해는 청려가 부디 멀쩡하게 일어나서 강절곤과 접촉했기만을 바랐다. 그리고 강절곤의 사위인 영웅 오천협이 해국에 도착하는 것 역시.
* * *
진해의 심기가 엄청나게 불편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옥길합은 기분이 어마어마하게 좋아 보였다. 온 식구들을 불러 모아 연회를 연 것이다. 진해와 미려는 옥길합의 양옆에 앉았다. 가주의 옆에 앉는 것은 가주의 배우자이거나 혹은 뒤를 이을 후사뿐이었다. 진해는 서해 옥가의 사람들에게 이때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상 왕자님은 어떻게 됐어?”
독은 독인지라 옥청려는 낯빛이 썩 좋지 않았다. 청려는 제 속이 어떻든 소가주와 소가주 부군의 결합을 축하한답시고 진해에게 술을 올리러 왔다.
“당연히 돌아가셨지요. 누가 백합 숙부께 연통을 한 모양입니다. 만약 독을 먹고 앓아눕지 않았으면 저도 백합 숙부께 한 대 맞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게 왜 네 탓이야. 그것보다 창명후한테 말 한마디를 더 전해 줬으면 좋겠는데.”
“무엇이든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진해가 본 바로는 옥청려는 진해 이상으로 옥길합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품은 것이 분명했다. 옥청려는 음인에게 한없이 불합리한 해국에 태어나 가뜩이나 갈등을 겪고 있는 자인데 음인이라는 이유로 코흘리개 왕자와 강제로 혼인할 뻔했으니 속이 좋지 않은 게 당연했다. 게다가 옥청려는 이미 좋아하는 이가 있지 않던가.
“오천협이 오지 않으면 허사긴 한데 그래도 하긴 해 봐야지. 이건 내 호위인 황아무한테 주면 돼. 황아무한테 일말의 정이 있거든 꼭 내 말을 들어 달라고 하고.”
“그런데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
“정말 은인께 주어진 이 모든 것들을 내치실 자신이 있느냔 말입니다.”
옥청려는 진해에게 술을 따르다 말고 가만히 연회장을 훑었다. 진해 역시 그 시선을 따랐다. 해국의 왕궁을 방불케 할 법한 너른 연회장에 서해 옥가에서도 손꼽히게 아름다울 이들이 춤을 췄다. 허공에서는 하염없이 꽃잎이 떨어져 향기가 끊이지 않았고, 상 위에는 옥배와 금그릇이 정연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모든 이들이 진해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간혹 가시처럼 날카로운 질시의 눈빛도 있었지만 옥길합이 진해에게 말을 걸거나 친근한 태도를 취하면 순식간에 눈 녹은 듯 사라졌다.
정미려, 아니 가주 옥길합의 적장자인 옥정려. 갑자기 나타나 오롯이 그 자리에 선 그가 차기 가주가 된다면 그의 반려라고 공표된 진해 역시 서해 옥가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진해가 양인이라 불만을 품는 이들도 있었지만 동시에 진해가 양인이기 때문에 그들의 후사는 자신들의 자식이 될지 모른다는 기대를 품은 자들이 많았다. 아마 옥길합 역시 그런 식으로 장로들의 입을 다물게 했을 터이고.
“청려 공자는 날 생각보다 물로 보는데? 난 월국 조정의 육품 관리이고 황자마마랑 무려 약혼을 한 사이라고!”
“해국에서 밀어줌에도 불구하고 태자 자리에 오르지 못하신 미력한 황자마마 말씀이십니까? 권세를 바라신다면 차라리 소가주 곁에 계신 게 훨씬 더 많은 부귀영화를 누리실 텐데요.”
“씁! 날 뭐로 보고!”
“솔직히 정려 님께 쪽도 못 쓰시지 않습니까.”
“우리 미려에게는 나 말고 다른 사람도 쪽을 못 쓰니까 그건 말하지 말자구.”
“…….”
진해는 제 쪽을 바라보며 작게 손을 흔드는 미려에게 저도 손을 흔들어 주며 몸을 돌렸다. 옥청려가 기미한 음식을 받아먹는 척하면서 얼굴을 굳히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려가 뭐라 그러든 난 월국으로 돌아가야겠어. 옥길합을 아버지로 여기게 될 바에야 내 손에 장을 지지지. 저런 자가 가주로 있는 가문에 더 이상 의탁할 생각 없어. 강백서가 이곳에 없는 걸 알았으니 임무도 원점으로 돌아간 셈이야.”
옥청려는 잠깐 진해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보다가 다시 새 음식을 접시 위에 올리고 이마 위까지 들어 올리며 진해에게 바쳤다. 제 접시가 가벼워지는 걸 느끼자 조심스레 접시를 내리며 입을 가렸다.
“오 은인의 마음이 그리 굳으시니 다행입니다. 부귀영화 이야기는 오 은인의 마음을 시험하기 위함이었으니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 저 역시 이번 일로 인해 서해 옥가를 떠나기로 마음먹었으니 말입니다.”
“뭐?”
“빌어먹을 아버지는 제게 상 왕자와 맺어지지 못했다고 개소리를 퍼부었으니 혼자 남아 뒈지든지 말든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아무래도 옥청려는 진해의 생각보다 더 많이 가문에 원한이 깊어진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옥청려는 진해가 바깥에서 기다리는 일행들에게 전하라고 한 말을 착실히 주워들었다. 일상의 대화처럼 자연스레 건넨 말이었기 때문에 진해와 밀착한 옥청려가 아니면 그러려니 하고 흘릴 법한 말이었다.
게다가 진해는 겉으로 보기에는 이 상황에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워 보였다. 아름다운 소가주의 무릎에 누워 포도를 받아먹으며 빈둥빈둥 노는 이는 관리다운 기색이라고는 한 점도 보이지 않았다. 물론 진해는 원래부터 관리다움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형, 정말로 후회하지 않아?”
“아, 당연하지. 진짜 후회 안 한다니까. 그럼 너야말로 후회하지 않아? 나 같은 변태랑 같이 잔 거.”
“나는……, 처음부터 형밖에 없었어. 형과 떨어지지 않을 수 있다면 벼락을 맞아서 이 자리에서 죽어도 좋아.”
그리고 진해는 생각보다 미려의 마음이 무겁고 진중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불안해하면서도 저한테 매달리는 이를 보니 마음 깊숙한 곳에서 음습한 욕망이 만족되는 것이 느껴졌다. 사람 새끼가 품을 마음이 아니었지만 진해는 미려가 자신을 떠날 때까지 어찌 되었든 자신이 미려를 책임질 것을 마음먹었다. 또한 옥 가주가 양인인 자신을 사위로 삼을 정도로 미려를 중히 여기는 것을 눈여겨보았고.
‘미려에게는 미안하지만 당하고는 못 살아! 옥 가주, 아니 옥길합 저 새끼한테 엿을 줄 거야! 아주 큰 엿을!’
진해는 우선 안채가 마음에 안 든다며 꼬장을 부려 안채를 대대적으로 공사하게 했다. 일꾼들이 게으름을 피는 것 같다면서 그곳에 의자를 놓고 커다란 양산을 마련한 뒤 많은 시종을 거느리고, 그들에게 흙먼지를 막는 휘장을 높이 들고 서게 한 다음에 부채질을 받으며 느긋하게 안채의 공사를 관람하는 것이다.
“오 은인은, 아니 오 사위는 새로운 안주인이다. 마땅히 안채를 바꿀 권리가 있어.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주어라.”
그러나 옥 가주는 진해가 온 집을 다 뜯어고쳐도 전혀 말리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예산이 너무 많이 든다며 달려온 총관 집사에게 웃으며 금고의 열쇠를 쥐여 주었다. 총관 집사는 방긋방긋 웃으며 돌아와 아예 안채를 새로 짓는 게 어떻겠냐고 건의했다. 진해는 가만히 앉아 생각해 보니 원래의 안채가 고풍스러워 보기 좋다며 안채를 원래대로 되돌리게 했다. 이런 일이 일주일에 일곱 번 정도 반복되었다.
“형, 아버지가 안채가 답답해서 살기 싫으면 별채에서 살림을 차리는 게 어떻겠냐고 별채를 주셨어. 서쪽 별채가 싫으면 집 밖에 별채가 있는데 거기는 조금 거리가 있으니까 빨리 올 수 있도록 천리마 몇 마리랑 수레랑, 또―”
아무래도 돈으로 이 집 살림을 거덜 내는 건 무리일 거 같았다. 진해는 시종을 괴롭히려 했으나 진해 앞에서 실수로 물을 엎지른 이의 손목이 그 자리에서 날아가는 것을 보고 마음을 곱게 접었다. 상대에게 추근추근 작업을 걸면 옥 가주가 상대를 어떻게 할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진해는 어쩔 수 없이 옥 가주에게 정면승부를 청하기로 결정했다. 때는 바야흐로 달이 휘영청 높게 뜬 보름날이었다. 진해가 해국에 온 뒤로 두 달에서 석 달째 되는 날이기도 했다.
“아버님!”
옥길합은 직책에 걸맞은 공사다망한 이라 진해가 막상 만나려 하자 만나기가 힘들었다. 종종 바깥의 별채에서 자고 오는 일도 많았던 것이다. 그로 인해 진해는 옥길합이 나름, 아니 정말로 자신을 깍듯이 대접했으며 그로 인해 해국의 많은 정무가 지체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진해는 옥길합의 피곤한 얼굴을 보자 가슴이 약간 따끔거렸으나 미려가 독을 먹고 괴로워하던 모습과 자신의 눈치를 보는 모습을 떠올리며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오, 사위. 친히 마중을 나왔는가?”
“겸사겸사 나왔지요. 전에 아버님이 제게 안채를 마음대로 하라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그래서 제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안채가 워낙 괜찮아서 딱히 손댈 부분은 없고 거기 뭘 좀 하나 갖다만 놓으면 딱 좋겠다, 이 생각이 들지 뭐예요?”
“호오.”
총관 집사에게 말해 진해가 원하는 건 뭐든지 사 주라 했으니 진해가 돈을 조르기 위해 이러는 건 아닐 터였다. 게다가 진해 뒤에 죽 늘어선 시종들이며 집사들의 표정도 밝으면 밝았지 어둡거나 난감해 보이지 않았다.
“달!”
진해는 약간 호기심이 동한 옥길합의 앞에서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허공을 찔러 보였다. 상대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들어 산(山) 모양을 만드는 것은 잠춘동에서는 아버지들의 안부를 물음과 동시에 행해지는 욕설이었으나 다행히 옥길합은 모르는 눈치였다.
“안채에 달이 있으면 참 좋을 텐데 달이 없습니다.”
“흐음. 그것 참 문제로군. 달은 돈으로도 살 수 없으니.”
진해는 가운데 손가락으로 밝게 뜬 달을 가리키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물론 옥길합도 함께였다. 가주로서, 군의 총사령관으로서, 세자의 스승으로서 해야 할 일이 많았지만 가주가 총애하는 사위 앞에서 일을 들먹이는 건 가주의 눈 밖에 나고 싶다는 말과 진배없었다.
“보통은 그렇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제가 달을 사로잡는 비술을 발견했습니다!”
“달을 사로잡는다고?”
“해 보니까 별로 어렵지도 않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아버님께 보여 드리려고 서둘러 달려온 것이지요. 미, 아니 정려도 안채에서 기다리라고 해 뒀습니다.”
정려가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 옥길합은 껄껄 웃었다. 달을 사로잡는다는 말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나 사위가 저를 안채로 데려가는 이유는 일목요연한 듯했다. 아마도 자신이 출타한 동안 주안상을 차려 작은 연회를 준비해 놓은 모양이었다. 옥길합은 진해가 왜 술 생각이 났을지를 생각하다 문득 벚꽃의 꽃잎이 떨어질 때라는 것을 떠올렸다.
확실히 달 밝은 밤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쏟아지는 경치는 절로 술을 부르는 풍광이었다. 옥길합은 예전에 폭풍처럼 떨어지는 꽃잎 아래서 누군가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벚꽃 향보다도 그윽한 향을 하염없이 들이켰으나 이젠 그가 사모하는 이 대신 그를 꼭 닮은 아들과 (반쯤 억지로) 갓 들인 사위가 있었다. 촐랑촐랑 앞서는 모습을 보며 옥길합은 갑자기 술 생각이 간절해졌다.
과연 안채는 이미 주연 준비로 한창이었다. 사실 모든 채비가 끝난 채였다. 안채를 오가는 이들의 표정이 미미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이 안채에서 얼마 만에 주연이 열리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옥가 사람들이었다.
“백부님, 자리로 모시겠습니다.”
게다가 안채의 새 주인이 처음으로 연 연회였다. 총관 집사조차 안채에서 주연을 열고 가주를 초대한다는 발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너무나 오랫동안 안채가 텅 비어 있어 그런 것이었다. 총관 집사는 이것저것 세심하게 지시하는 진해의 명을 들으며 속으로 진해가 완전히 이 집에 뿌리를 내린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가장 상석은 옥 가주를 위해 비워 놓고 소가주인 미려가 그의 왼쪽에 앉았다. 보통의 연회라면 진해가 가주의 우측에 앉겠지만 오늘의 진해는 가주와 미려의 사이에 자기 자리를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는 누구 보라는 듯이 미려의 손에 제 손을 턱 얹었다.
미려는 진해로부터 왜 진해가 이 자리에 앉았는지 언질을 들었기 때문에 얼굴에 연신 미소를 띠고 있었다. 서릿발같이 매섭게 노려봐도 설레는 얼굴이 녹아내릴 듯이 미소를 지으니 오늘 밤은 달이 부끄러워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까 걱정될 지경이었다.
“그래. 예전에 우부께서 살아 계실 적에는 매해 연회를 열었었지. 아버지들과 형제들만이 자리한 작은 연회였었어.”
옥길합은 새삼 감회가 새롭다는 듯 상석에 앉아 안채를 가만히 둘러보았다. 놀랍게도 옥길합은 안채의 상석에 앉은 게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왜냐면 그가 안채에서 자랄 적에는 가주가 아니라 상석에 앉지 못했고, 가주가 된 후에는 안채가 비어 있어 연회가 열린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안채의 네모진 연못처럼 그의 눈동자 위도 고요히 흐르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 가지가 늘어질 정도로 흐드러진 꽃잎을 떨궜고, 꽃의 바람과 함께 연못에 잔잔한 파동이 일기 시작했다.
“……이젠 이걸로 만족해야겠지.”
옥길합은 흩날리는 꽃잎 아래 서 있는 누군가를 눈을 꾹 눌러 감는 것과 동시에 지워 버렸다. 고혹적이면서 천진한 얼굴로 벚나무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던 이였다.
“아버님! 잔 받으시지요!”
그런 옥길합의 감상을 날려 버리려는 듯이 진해가 술 주전자를 들고 엉금엉금 무릎걸음으로 다가왔다. 자그마한 술 주전자는 자기 그릇이 주인 월국와 달리 연금색의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고, 은으로 추정되는 금속으로 선계를 상감해 놓았다.
“그래, 우리 사위의 잔이니 받아야지. 난 사위의 잔은 절대 거절하지 않을 생각이야. 그나저나, 아까 자네가 내게 뭐라고 했지?”
“달을 잡는다고 했습지요.”
“그래, 그거. 대체 어떻게 하는 건가. 달은 저렇게 높은 하늘에 떠 있지 않은가.”
옥길합을 안내한 청려는 떨어지는 꽃잎을 막으려는 것처럼 손잡이가 길고 커다란 부채를 든 채 옥길합의 좌측에 서 있었다. 옥청려가 부채를 양산처럼 비스듬히 든 탓에 옥길합의 몸쪽에 길게 그림자가 져 있었다.
“그건 일단 제 잔을 받으셔야 압니다. 달을 사로잡는 주술에는 준비가 필요한데 첫 번째는 잔이 가득 차는 것이고.”
“첫 번째는 잔이 차는 것이고.”
“두 번째는 바로.”
진해는 술을 찰랑거리도록 가득 채운 뒤 주전자를 놓고 덩실거리듯이 제자리로 돌아가 미려의 팔뚝을 아주 부드럽게 그러쥐었다. 그리고는 살살 옥길합의 옆으로 끌어왔다. 미려도 옥길합과 진해가 그런 말을 나눴는지 몰라 호기심 어린 눈빛을 하고 있었다.
“두 번째는 바로!”
진해는 눈이 녹을 것 같은 미남과 눈가에 흉이 진 서늘하게 생긴 미남이 저를 응시하는 걸 보며 손가락 하나를 제 콧등 위로 들어 올렸다. 다섯 손가락 중 가장 긴 세 번째 손가락이었다. 손가락 하나가 곧추서자 손이 자연스레 산(山)모양이 되었다. 미려의 표정이 약간 미묘해졌지만 진해는 그러거나 말거나 손 너머로 옥길합과 눈을 마주치며 진중한 얼굴을 해 보였다.
잠춘동의 큰 노름꾼이자 반사기꾼인 오진해의 얼굴이었다.
“달이 홀릴 정도로 굉장한 미인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진해가 크게 소리치며 가운데 손가락을 하늘을 뚫을 듯이 치켜들자 자연스레 청려가 두 걸음 비켜섰다. 청려가 비키자 옥길합의 몸에 드리운 그늘이 사라졌고, 바람이 부는 청명한 봄밤이 그의 몸 위로 그대로 드리워졌다.
“하.”
옥길합이 무심코 술잔을 내려다보자 술잔 안에 작게 빛나는 원형의 물체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지금 보니 술잔이 연금색의 술 주전자와는 짝이 맞지 않는 넓고 얇은, 옻칠을 한 나무 술잔이었다.
“저런 얼빠진 놈. 우리 미려를 보고 넋을 잃고 그대로 빠져 버렸네.”
그냥 달의 그림자가 비친 것뿐이었지만 진해는 시침 뚝 떼고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였다. 진해가 저를 입에 담자 미려의 볼에 엷은 물이 들었다. 다른 이에게서 듣는 찬사와 사랑하는 이에게서 듣는 찬사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었다.
“하하하하!!”
그리고 옥 가주는 진해의 시치미 떼는 얼굴을 바라보며 술이 약간 넘칠 정도로 크게 웃기 시작했다. 옥 가주가 웃기 시작하자 옥가의 사람들이 모두 일제히 가주를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가주를 두려워하여 감히 고개를 들 생각도 하지 못하던 이들이 두 눈이 휘둥그레져 그를 바라볼 정도로 옥길합은 소리 내 웃는 일이 드물었던 것이다.
“내 사위는 정말 재주가 끝이 없구나! 과연 내 아들의 곁을 차지할 만해! 그래, 그래야 다음 대의 옥가와 해국을 이끌어 가지. 진해.”
“예, 아버님~”
“이 옥길합이 단언컨대 자네가 이곳에 있기만 한다면 이놈이 가진 것은 모두 자네 것이 될 것이야. 자네가 내 아들을 웃게 해 준다면, 저 얼굴을 항상 미소 짓게 한다면 이놈이 더 좋은 걸 가져다줄 수도 있어.”
“더 좋은 거요?”
“그래. 예를 들면 상이의 섭정 자리라든가.”
이 자리와는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섭정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옥청려의 몸이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섭정이라는 것은 왕이 어릴 때 그를 대신해서 국정을 보는 이였다. 사실상 왕의 대리라고 해도 무방하고, 왕이 힘이 없다면 그 나라의 왕이라고 해도 뭐라 할 수 없는 자리였다.
즉, 해국의 왕자 사마상의 섭정이라는 말은 사마상이 어린 나이에 즉위한다는 말이었고, 그 말은 또 아직은 골골하는 해국 왕이 조만간 옥길합의 마음에 따라 붕어하고, 그 뒤를 이을 태자에게도 무슨 일이 있게 된다는 말이었다.
옥길합은 진해가 원한다면 무력으로 왕실을 엎어 주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에이~ 아니오! 절대 싫습니다! 전 원래 유유자적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놈이에요. 관직에 오른 것도 운이 좋아서 그런 것이고 그 후에도 공무보다는 여해루 운영을 더 즐겼는걸요!”
“그래?”
“전 이렇게 안채에서 예쁜 부군이랑 인자하신 장인어른과 산해진미, 맛 좋은 술만 있으면 만사가 편안~ 합니다. 한 가지 아쉬운 게 있지만 그것도 뭐 어찌 되겠지요.”
진해는 방금 일국의 섭정 자리를 단번에 걷어차고는 무척 아쉬운 표정을 했다. 왕이나 다름없는 섭정보다 아쉬운 게 대체 뭐가 있단 말인가. 아마 그 자리의 모두가 그런 의문을 머릿속에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옥길합도 마찬가지였다.
“내 사위에게 부족함 없이 대한다고 생각했건만 그렇지 못한 모양이로군.”
“아니, 옥 가주께서 잘못하신 게 아니라 제 사정이라서 뭐.”
“장인과 사위 사이 아닌가. 말하지 못할 게 무어 있어.”
“에이, 아니에요. 괜히 바쁘신 장인어른 귀찮으시게.”
“어허, 사위. 진해. 어서 말해 보래두.”
거기다 진해가 말꼬리를 길게 빼며 이리 거절하고, 저리 거절하자 옥길합의 궁금증은 극에 달했다. 진해 역시 칼처럼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아쉬움이 그득 담긴 눈빛으로 이렇게 한 번, 저렇게 한 번 옥길합을 바라보며 열심히 간을 보는 듯했다. 진해와 옥길합 사이에서 가르쳐 주느니 못 가르쳐 주느니 실랑이가 벌어지고, 결국 보다 못한 미려가 진해의 옷자락을 잡아당기자 진해는 그제야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가 놀 줄 아는 놈이라는 건 미려도 알고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아마도 하늘에 계신 우부도 아실 거예요.”
“음, 그래, 우리 사위는 풍류를 잘 알지.”
“그런데 제가 이 해국에 와서는 잘 놀다가도 뭔가 미묘하게 마음이 흡족지 않은 부분이 있지 않겠어요?”
“……혹시 어떤 삿된 것이 자네의 심기를 거스르던가?”
“아이고, 아니에요! 이 집 사람들은 절 보면 기어 다닐 기세라 오히려 부담스럽다고요!”
“그럼 대관절 무엇이 내 사위의 마음을 어지럽혔나?”
진해의 대답에 따라 집안에 피 보라가 칠 수도 있었다. 진해는 너무나 평소와 다름없었지만 진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평소에 저놈이 저를 보는 꼴이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라거나 저 주제도 모르는 것이 제 부군을 훔쳐보던데요, 라고 입이라도 뻥끗하면 지목당한 자는 다음 날 아침 해를 볼 수 없을 게 분명했다. 옥 가주가 명할 것도 없이 충실한 가신들이 그를 철저히 이 세상에서 배제할 터였다.
“그것은 바로.”
진해의 오물거리는 입술에 이 자리의 모든 시선이 몰려들었다.
“음악!”
몰려든 시선은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그들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그것도 잠시 가신들 및 시종들이 진해가 참석한 연회의 악공들이 누구인지, 또 누가 그들을 준비시켰는지 떠올리기 시작했다. 진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으니 작게는 백수요, 많게는 손목 댕겅이었다.
“연회에서 들은 음악은 좋아요. 정말 좋아요. 들을 때마다 신나고 어깨가 덩실덩실~”
진해는 그런 이들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회의 음악을 떠올리는 것처럼 어깨를 들썩였다. 홍련이가 유일청 앞에서 고개를 까닥이던 것과 비슷한 모양이었다.
“한데 이젠 너무 많이 들어서 좀 질렸어요. 여기서 연주하기엔 너무 화려하기도 하구요. 오늘은 달을 사로잡았으니 붙잡혀서 서러울 달을 위로할 고요한 음악이 듣고 싶어요. 괜히 우르르 몰려다니게 하지 말고 우리 미려한테 비파를 연주해 달라고 부탁하면 어떨까요?”
“휴―”
누구인지 모를 이의 입에서 깊은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진해는 음악에 불만이 있는 게 아니라 그저 분위기를 바꿔 보고 싶을 뿐이었다.
“그렇지~? 우리 강아지 비파가 최고지~?”
“형도 참. 형이 원하면 언제든 연주할 수 있는데.”
미려는 진해의 말을 들으며 킥킥 웃음 지었다. 그리고 손짓을 해 하인들에게 자신의 비파를 가져오게 하려 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단다. 오늘은 비파 대신 다른 악기를 쓰자꾸나.”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옥길합이 비파를 가지러 떠나려는 가신, 호별(오호)을 제지했다. 그리고는 도기(일도)의 아버지이자 총관 집사에게 손짓하며,
“내 칠현금을 가져오게.”
자신의 악기를 가져오게 했다. 노련한 가신인 총관 집사의 눈에 놀라움이 서렸다.
“예. 주군.”
하지만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서둘러 걸음을 옮겼고, 살짝 놀랐던 진해는 곧 옥길합과 함께 몇 번이나 달의 그림자를 집어삼켰다. 미려도 몇 잔이고 잔을 비웠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주군. 현이 낡아 잠깐 손을 보았습니다.”
“그렇겠지. 자네가 손질하지 않았다면 현이 아니라 몸체에도 이상이 생길 정도로 방치해 뒀으니까.”
그리고 마침내 옥길합의 칠현금이 도착했다. 칠현금이 놓이기 위해 주안상이 치워지고, 총관 집사가 공손히 모셔온 칠현금을 떨리는 손으로 내려놓았다. 비단으로 된 집을 벗기는 그의 눈시울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상계(想桂).”
칠현금은 처음 보는 진해가 감탄할 정도로 매끈했다. 검은 목재는 밤처럼 새카만 미려의 흑발을 닮은 듯했다. 문양 하나 없이 단조로운 데도 어딘지 모르게 눈을 끄는 조형이었다. 장인의 일생일대 대작이라 일컬을 수 있을 정도로 절묘한 선이었다.
[퉁―]
울림은 더 굉장했다. 옥길합이 시험 삼아 울린 현에 서늘한 밤공기가 공명하듯 메아리쳤다. 바람 자체가 현이 되어 소리를 내는 듯했다.
그 순간, 바람이 불고 꽃잎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환한 달빛 아래서 흩날리는 꽃잎을 반주 삼아 옥길합이 탄주하기 시작했다. 길고 섬세한 손가락이 말 한마디 없이 현을 뜯었다. 빠르게 휘몰아치다 느리게 잦아들고, 거칠게 소용돌이치다 얌전히 풀어지고. 마치 바람이 그러하듯 계수나무를 그리워한다는 이름을 가진 칠현금이 허공을 울렸다. 진해도, 미려도, 심지어 청려까지도, 모두가 아무 말 없이 옥길합의 연주에 넋을 잃었다.
“손가락이 많이 굳었어. 사위의 귀를 더럽힌 건 아닌지 모르겠네.”
“와…….”
정신을 차리자 잔 속에 꽃잎이 잔뜩 빠져 있었다. 잔 속에 잡아 뒀던 달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진해는 약간 얼떨떨해 있다가 잔 위에 뜬 꽃잎을 훅훅 불어 밖으로 밀어냈다.
“옥 가주께서 이리 훌륭한 솜씨를 지니셨을 줄이야! 혹시 이런 것도 물려받는 걸까요? 우리 미려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연주를 하는데!”
“서해 옥가의 사람들은 다들 하나씩 악기를 연주할 수 있지. 가주의 직계는 반드시 현악기를 익히게 되어 있어. 정려가 비파를 배웠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굉장히 놀랐었지.”
―현을 다룰 줄 안다는 건 서해 옥가의 비전을 배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니까.
옥길합은 속내를 숨긴 채 정려를 바라보며 옅게 웃어 보였다. 미려는 진해가 어려서부터 비파를 익히게 한 덕에 이미 현을 다루는 데 능숙했으며, 자질도 있어 다른 이들보다 늦은 나이에 무공을 익혀도 금세 그들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하물며 비전의 전수자가 직접 무공을 전수했음에야.
아직 서해 옥가의 비전인 백사공(白絲功)의 오의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그것도 시간문제였다. 원래는 모든 경쟁자를 물리치고 가주 계승을 확실히 해야 전수받을 수 있는 오의를 옥길합은 유일한 자식일지도 모르는 정려에게 몇 번이고 보여 주었다. 심지어 그 일부를 쓸 수 있게 허락해 주기도 했고.
언젠가 미려가 진해와의 연회에서 겁도 없이 쳐들어온 도전자들을 참살했던 그것이 바로 가주들에게 대대로 이어 내려온 은사공의 비전, 은사공의 오의였다.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은 투명하고 얇은 금강사를 조종할 수 있는 권력. 옥가 저택의 곳곳에 뻗어 있는 그 은밀함.
절정에 이른 고수가 아니라면 감지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절묘하고 심오하게 짜인 금강사의 진이 바로 멸살은화진이었다. 옥길합이 해국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월국의 군사들을 학살할 수 있었던 건 옥길합이 진을 짜는 데 도가 터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예상하지 못했던 건 고수의 수준에 이르지 못했을(고산패자가 이 집에 들어오지 않을 것은 예상했다.) 옥청려가 일찍부터 멸살은화진을 눈치채고 경계했다는 점이었다. 옥청려는 영리한 아이답게 자신이 진을 눈치챘다는 사실을 숨기려 했으나 옥길합에겐 옥청려에게 부족한 노련함이 있었다. 옥길합은 옥청려가 금강사가 닿지 않는 곳에서만 일각 정도 휴식을 취한다는 사실을 진작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조카인 상 왕자와 맺어 주겠다고 이야기했지만 옥길합은 언젠가 정려와 진해에게 후사가 필요할 때 옥청려를 그들의 태로 쓰게 할 셈이었다. 후사가 필요할 때쯤 되면 오진해는, 아니 강해아는 아무 곳에도 가지 못할 테니 이해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어쩌면 후사가 없는 정려를 딱하게 여겨 먼저 권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된다면 이 빌어먹을 집안을 짓이겨 버리고 싶은 놈들의 핏줄에게 넘기지 않고 자신이 사랑하는 이의 후손에게 넘길 수 있었다. 단 하룻밤의 결착으로 잉태된 애틋한 아이에게 자신이 일군 모든 것을 넘겨줄 수 있었다. 그를 꼭 닮은 얼굴을 한 아이를 바라보며 썩은 속을 끌어안고 간신히 두 눈을 감을 수 있었다.
그러던 그때,
“웬 놈이냐!”
복잡한 상념에 빠져 있던 옥길합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옥길합의 반응을 본 총관 집사 역시 시선을 돌렸고, 동시에 가주의 다섯 그림자라고 불리는 가문의 가신들이 번개처럼 움직여 옥길합과 옥정려, 진해와 옥청려가 위치한 주안상을 중심으로 진형을 만들었다. 서해 옥가의 가신들은 모두 가주의 움직임을 보조하는 무공을 구사했다.
‘이, 이 향은……!’
그리고 돌풍처럼 강하게 불어온 바람을 들이켠 진해가 두 눈을 번쩍 떴다. 이 향은 진해가 일찍이 맡은 적 있는 향기였다. 향기는 진해가 굉장히 동경하는 무인의 나라에서 온 사람의 것이었다. 덩치가 작고 변태 같은 새를 데리고 왔던 사람의 것이었다. 진해에게 다시 만나도 되겠냐고 묻던 그 사람의 것이었다.
“오 대인!!”
그와 동시에 안채의 입구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아무와 강절곤이 두 손을 머리에 뒷짐 진 채 한가롭게 걸어오는 제갈군무와 함께 진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황 시위!! 야 이 나쁜 양반아! 대체 왜 이제야 오는 거야!!”
“오 형님이야말로 왜 호위인 저를 안 부르고 이제야 찾으시는 겁니까!!”
“아, 그야 네가 오호한테 홀랑 빠져서 도중에 내 뒤통수를 칠까 봐 그랬지!!”
진해는 오랜만에 만난 그들이 반가워서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제 속내를 털어놓았다. 진을 이루고 있는 이들 중의 누군가가 황아무를 발견하고 움찔 어깨를 떨었다.
“오랜만이군. 하나도 안 변했다고 하고 싶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모르는 척하는 게 예의일까?”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진해의 나이 많은 친구인 협 아저씨에게 옥길합이 매우 친근하게 말을 걸고 있었다. 심지어 부드럽게 미소를 걸고 있기까지 했다. 정말로 오랜 친우를 대하는 듯했다.
“…….”
그러나 협 아저씨는 옥길합의 친근한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안채의 네모진 연못의 딱 한가운데 놓인 다리에 서서 말없이 어딘가를 응시할 뿐이었다. 진해가 협 아저씨를 얼굴이 아닌 향으로만 알아본 이유가 있었다. 여기 왜 있는지 모를 협 아저씨는 얼굴에 가면을 쓴 채 뚫린 눈구멍을 이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가면 너머에서 반짝이는 눈동자와 반가움에 젖은 진해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오 어사, 무사한가! 다친 곳은 없는가!”
협 아저씨의 등 뒤에서 검을 든 황아무와 함께 보기만 해도 무서운, 큰 도끼를 든 강절곤이 진해를 향해 부르짖었다. 제갈군무가 입이 찢어질 것처럼 씩 웃으며 협 아저씨의 등을 응시했다. 상황이 이쯤 되니 진해는 자신과 교류하던 이가 누구인지를 모를 수가 없게 되었다.
‘협 아저씨의 협은 오천협의 협!!’
놀랍게도 진해와 동무를 하고 싶다 했던 이는 월국을 구한 고산국의 고수이자 강절곤의 사위인 오천협인 듯했다!
“오천협.”
그런 진해의 결론에 확신을 더하듯 옥길합이 그를 불렀다. 옥길합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다른 침입자들을 무시한 채 오천협에게 말을 걸었다.
“그때도 말했듯이 나는 자네에게 유감이 없어. 자네도 그저 자신의 할 일을 했을 뿐. 우리 무인들이 뼈를 깎든 피를 쏟든 윗분들에게는 쓸 만한 도구 그 이상이 아니었으니까.”
지금은 해국을 쥐고 흔드는 이가 말했다.
“그래서 나는 당연히 자네의 자식에게도 유감이 없어. 오히려 죽어도 씻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지. 강백서에게도 마찬가질세. 그러니 은혜를 원수로 갚은 월국의 황실 따위는 버리고 해국으로 오는 건 어떻겠나.”
그리고 옥길합은 자신과 대적할 것이 분명한 오천협에게 더할 나위 없이 달콤한 제안을 했다. 진해가 역시나, 라는 표정으로 두 눈을 부릅떴다. 강백서와 옥길합이 그렇고 그런 관계라면 오천협을 복장 터져 죽일 생각이 아닌 한 절대 저런 제안을 하지 않을 터였다.
“나와 함께 우리를 얽맨 것들을 하나씩 부숴 나가는 걸세. 우리가 가진 소중한 아이들을 다시는 상처 입히지 않을, 완전무결한 세상을 만드는 걸세. 원래라면 그저 없애 버릴 뿐이지만 아이들이 서로를 지극히 사랑하니 마땅히 돕고 보호해야 하는 것이 아비 된 자의 책임 아니겠나.”
옥길합의 제안은 오천협의 사연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그럭저럭 아는 진해의 귀에는 정말로 달콤하게 들렸다. 진해는 속으로 만약 자신이 뼈 빠지게 구한 나라가 자신의 남편과 아이를 실종되게 만들었으면 어떻게 했을지에 대해 상상했다.
‘……왜 살려 두지?’
힘이 있다면 절대로 가만히 두지 않는다는 게 진해의 결론이었다. 혼자서는 어쩔 수 없어도 타국의 강력한 권력자와 함께한다면 얼마든지 복수할 것이라는 게 진해의 생각이었다.
“…….”
하지만 오천협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천협은 대답하는 대신 조용히 손을 내저었다. 그의 양손에 똑같은 모양으로 생긴 묘한 모양의 검이 들려 있었다.
“유감이군.”
산곡도. 금강사와 한 무인의 손에서 태어났으면서도 서로가 서로의 천적인 무기였다. 천적을 꺼내 든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분명했다.
“형.”
미려가 진해 앞으로 나와 진해를 제 뒤로 숨기자 주변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옥길합은 긴박하다면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잔잔한 미소를 띤 채 소매를 펄럭이며 자리에 앉았다.
“솔직히 백서 공자의 일은 정말로 유감이야.”
[뚱―]
연회를 이어 가듯 칠현금을 울리자 몇 명의 가신들이 자세를 바꿨다.
“난 패자니 잃는 게 당연하다 해도 자네들은 아니었으니까. 자네들이라도 잘 이루어졌다면 원래 불합리한 세상이라 여기고 그렇게 살았겠지.”
[투웅―]
“합!”
옥길합의 음이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이번에는 다른 가신들이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는 곧장 오천협이 있는 다리 위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옥길합은 처음에는 천천히 현을 뜯다가 나중에는 연주하듯 빠르게 현을 뜯기 시작했다. 음표라도 되는 것처럼 수많은 가신이 음을 따라 오천협에게 쏘아지듯 달려갔다.
“대체 무슨 해괴한 짓이람?”
그러나 진해가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얼빠진 소리를 뱉을 정도로 오천협과 가신들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옥길합의 지휘와 몇백 년을 걸쳐 연마된 진법은 오천협을 빈틈없이 조였지만 오천협은 흔해 빠진 무인들과 급이 달랐다.
오천협은 절정이었다, 그는 극상이었다. 무에만 전념하던 고산패왕이 곁에 끼고 있으려 할 정도로 뛰어난 무재이기도 했다. 모두 다 가망이 없다고 여겼던 전장을 단번에 뒤엎은 영웅이었다.
“하――!”
오천협의 긴 기합 소리와 함께 달려드는 서해 옥가의 가신들에게 산곡도의 검광이 반짝였다. 유연하기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금강사와 마찬가지로 산곡도 역시 검의 궤적을 예측하기가 힘이 들었다. 순식간에 살이 갈리고 피가 솟았다.
“흐어엉!”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피를 쏟는 이를 보며 진해가 어울리지 않는 소리를 내며 미려 뒤에 숨었다. 진해 뒤에 서 있던 옥청려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그래, 그래야 오천협이지. 월국 황제의 골칫거리지. 하하, 오랜만이야. 아주, 오랜만에 몸을 풀겠어.”
피가 쏟아지고 뼈가 드러나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가신들은 옥길합의 웃음소리를 짊어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천협이 봐준 것인지 장애가 될 정도로 큰 상처를 입은 자는 없었다. 옥길합은 오천협이 왜 그 정도에 그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팅―]
그리고 가신들의 절반 이상이 더는 일어설 수 없게 되었을 때 옥길합이 크게 현을 뜯었다. 옥길합이 현을 뜯자 움직일 수 있는 자들이 곁에 쓰러진 이들을 끌고 뒤로 빠르게 물러났다. 오천협은 자신이 처음에 나타난 그 다리 위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벚꽃 잎으로 덮였던 연못 위에 붉은 막이 덧씌워졌다.
‘머, 멋있어……!’
꽃잎 섞인 광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굳건히 서서 옥길합을 노려보는 오천협은 기가 막힐 정도로 멋있었다. 진해는 피 섞인 연못 물에 구역질을 하다가도 당당하게 선 오천협의 기세에 가슴이 크게 두방망이질 치는 걸 느꼈다.
“비켜라, 이놈들!”
“해야, 기다려라! 이 할애비가 간다!”
물론 오천협이 자리한 가운데가 아닌 가장자리에서 열심히 분투하는 이들도 갸륵하긴 했다.
‘아 참. 영감한테 안채에 강백서와 강해아가 원래부터 없었다는 이야기를 안 했구나.’
진해는 원래라면 제갈군무를 부추겨 옥길합과 붙게 하고 그사이에 황아무와 강절곤을 만나 탈출한다는 계획이 엉망이 되었으나 딱히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애초에 제갈군무를 부추기는 것 자체가 반쯤 도박이었었다.
진해는 강절곤과 황아무를 먼저 불러들인 뒤 오천협이 나타났다는 거짓 소문을 내고 그 소문에 낚인 제갈군무에게 강절곤이 다치면 오천협이 널 다시는 보지 않을 거라는 협박질을 하려고 했었다. 그렇기 위해 단승(이단)에게 하인들 몰래 자신의 일행들을 들여보내 달라는 부탁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진해의 예상보다 훨씬 걸출한 인물이 나타났다. 진해는 운이 좋다면 제갈군무가 밀릴 쯤에 오천협이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한 이가 도와줄 거란 가능성이 희박해 제쳐 놓고 있던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천협은 진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가까이 있는 인물이었다. 진해는 자신의 이야기를 즐겁게 경청하던 이가, 자신을 다정하고 따스한 눈빛으로 봐 주던 이가 자신이 그리도 동경하는 영웅이라는 게 너무도 기뻤다. 그리고 그가 자신을 구하러 온 것이 기뻤다.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한낱 심심풀이 말벗인 자신을 위해 앞장서서 저 무서운 옥길합에게 대적하고 있었다.
“정려. 사위를 데리고 안채로 들어가거라.”
“예, 아버지.”
“어, 어엇?”
그러나 옥길합이 그렇게 순순히 진해를 보내 줄 리 없었다. 손안에 든 패인 강해아를, 자신의 집착이 투영된 아들의 정인을 보내 줄 리 없었다. 자신이 이뤄지지 못했으니 그를 닮은 아이의 사랑만은 이뤄져야만 했다.
“혀, 협 아저씨!”
미려는 옥길합이 명하자 진해의 손을 잡고 안채로 들어가려 했다. 진해는 오천협이 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안채에 들어가면 어쩐지 다시는 나오지 못할 것 같았다. 막말로 안채에 오 어사 댁이나 해원공부를 잇는 길과 같은 비밀 통로가 있으면 어쩌란 말인가.
“형…….”
진해가 당황한 목소리로 오천협을 부르자 미려는 애끓는 목소리로 진해를 불렀다. 진해가 오천협이 질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미려 역시 옥길합이 대승을 거두리라곤 생각지 않고 있었다. 예전에 한 번 승패가 가려졌으니까.
“형, 제발…….”
“미려야…….”
미려는 진해를 달래려는 것처럼 진해의 양어깨를 그러쥐고 간절함이 담긴 눈으로 진해를 바라보았다. 수정처럼 맑고 아름다운 눈동자 속에 불안이 거칠게 요동치고 있었다.
“형, 우린 이제 이루어졌잖아. 형은, 내 양인이잖아. 날 어떻게 취급해도 좋아. 형이 원하면 음인 향이 나는 향낭을 차고 살게. 아니, 아예 음인이 될게. 형이 좋아하는 음인이 될 테니까 제발 나랑 같이 가 줘. 제발, 내게서 떠나지 말아 줘.”
“…….”
난 형이고 넌 동생이라며 장난을 치며 슬슬 피했던 애정이 몸을 이은 후로는 막는 것 없이 고스란히 쏟아졌다. 진해는 저를 보며 고통스러워하는 미려를 보자 가슴이 아팠다. 이렇게 아름다운 이가, 모두가 원하는 게 분명한 이가 자신 하나를 얻기 위해 꼬질꼬질한 잠춘동에 있었다. 이 큰 집의 후계가 될 이가 자신의 곁에 있기 위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꾸민 미소를 지었다.
“날, 버리지 말아 줘…….”
자신을 버리지 말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
진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미려는 진해의 아픔을 알고 있었고, 자신이 생판 남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그 아픔을 진해와 함께 공유하고 있었다. 말캉하고 연약한 뺨은 진해가 인생에서 가장 처음으로 지켜 주겠다고 맹세한 것이었다. 자신만은 버리지 않겠다고 약조한 것이기도 했다. 버려지느니 버리지는 않는다. 진해가 이를 악물고 살아오게 한 원천의 탄생지였다.
“오 은인!”
그런 진해의 옆에서 옥청려가 낮게 소리쳤다. 옥청려는 진해의 흔들리는 시선을 눈치채고 진해에게 경고를 하고 있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넌 다시는 돌아갈 수 없으리라고.
“소가주. 죄송하지만 오 대인은 월국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너……!”
“불만은 질자에게 독약을 처먹인 부친께 하시지요!”
진해의 동공이 흔들리는 사이 옥청려가 선수를 쳤다. 옥청려는 위쪽으로 손을 뻗더니 눈을 질끈 감고 주먹을 쥐었다.
옥청려의 손바닥이 순식간에 불그죽죽하게 물들었다. 옥청려의 피가 숨어 있던 금강사를 타고 흐르며 붉게 물을 들였다. 옥청려는 금강사가 눈에 보이자마자 검을 휘둘러 그것의 일부를 끊어 냈다.
“저, 저건……!”
옥청려가 하는 행동은 주위의 모든 사람을 경악하게 했다. 가주와 후사 외에 알 수 없는 멸살은화진, 혹은 천변은화진이라 불리는 진의 일부를 지금 옥청려가 잘라 내 자신의 무기로 삼은 것이었다. 놀란 것은 옥길합도 마찬가지였다. 과장을 보태 머리털의 일부가 잘린 듯했다.
“한눈 팔지 마라!”
하지만 옥길합은 연못에서 들려오는 이의 목소리에 다시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안타깝게도 옥길합은 이번만큼은 다른 이들을 챙길 여유가 없었다. 금강사는 유연하고 질기고, 날카로웠지만 원체 가는 탓에 자르려고 하면 쉽게 자를 수 있었다. 물론 여러 가닥을 겹치면 순식간에 해결되는 문제였다.
옥길합이 이를 질끈 깨무는 사이 오천협이 발을 디뎠다. 사람이 뛴 거리라고는 생각지 않을 정도로 엄청나게 도약한 뒤 순식간에 층계를 뛰어 옥길합의 눈앞까지 도달했다.
“쯧!”
옥길합은 제 눈앞에 휘둘러지는 산곡도를 피해 유연하게 허리를 뒤로 젖혔다가 혀를 차며 다리를 휘둘렀다. 진해와 정려, 옥길합을 위해 차려졌던 진수성찬이 엎어지고 커다란 상이 오천협을 덮쳤다. 오천협은 짐승처럼 뒤로 재주를 넘으며 상을 피했다. 오천협이 착지하자마자 매끈한 몸체의 칠현금이 화살처럼 날아왔다. 오천협은 이번에는 주먹으로 그것을 상대했다.
“외지에서야 어쩔 수 없었다지만 본가에서까지 체면을 구길 수는 없지. 그대와 마찬가지다. 내 자식을 위해서 절대 물러설 수 없다.”
사랑하는 이의 이름이 붙었던 칠현금이 박살 나는 모습을 보며 옥길합은 눈에 날카로운 기운을 담았다. 칠현금의 현은 어느새 모두 옥길합의 손끝에 모여 있었다. 칠현금뿐만이 아니었다. 천 가지 모습으로 변화한다는 본가를 둘러싼 금강사, 청려가 잘라 낸 금강사를 제외한 모든 금강사가 옥길합 의 손끝에 이어져 있었다.
옥길합이 손을 움직이자 금강사들이 마치 생명을 가진 듯이 뭉치거나 가늘게 쪼개지며 오천협을 공격했다. 금강사가 닿는 공간마다 날카롭게 갈리거나 쓸린 흔적들로 가득해졌다. 허공을 가르는 금강사 옆으로 잘린 꽃잎들이 난무했다. 오천협은 뛰거나, 구르거나 땅을 박차거나 하며 금강사들을 회피했고, 간간이 옥길합을 향해 산곡도를 날려 반격했다.
“옥청려, 너!!!”
“우와앗?!”
“사랑 때문에 집안 말아먹는 가주는 필요 없습니다!!”
옥청려가 금강사를 다루는 걸 보자마자 미려는 크게 분노했다. 진해가 단승(이단)에게 말해 강절곤 등을 들이게 하는 건 눈치챘지만 집안 내에 배신자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대로 안채에 들어가 버티고 있으면 가신들이 해국의 군대를 끌고 오든 사병을 끌고 오든 해서 강절곤을 붙잡아 인질로 삼을 테고 그렇게 하면 장인과 자식이 잡힌 오천협도 마지 못해 검을 내릴 터였다. 아니면 강절곤만 데리고 달아나든지.
“미, 미려야――!”
그런데 그게 옥청려의 배신으로 인해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진해와 가정을 이루고 그를 지켜 주고 행복하게 해 주려던 모든 것이 깨져 버렸다. 미려는 손을 휘둘러 머리칼 사이에 숨기고 다니던 온전한 자신 몫의 금강사를 뽑아냈다. 피로 물든 옥청려의 것보다 길이도 길고 가닥 수도 많았다.
서해 옥가의 청년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거침없이 금강사를 휘둘렀다. 옥길합과 달리 손 에 덜 익은 구석이 있어 주변의 모든 것이 사정없이 갈려 나갔다. 미려가 그나마 진해를 염두에 두고 뒤로 보낸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진해는 몸을 웅크리고 양손으로 고개를 감싼 채 불꽃이 튀는 앞을 간신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우리 아들 후보가 고생이 많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누군가가 진해를 달랑 들어 제 옆에 세웠다.
“우와악!”
“엇차.”
진해가 일어서자 빗나간 건지 튕긴 건지 모를 금강사가 진해 쪽으로 날아왔으나 진해를 일으킨 이는 오천협의 것과 비슷하게 생긴 검으로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쳐 내 버렸다.
“자. 그럼 이제 어쩐다.”
가끔씩 날아오는 금강사를 막아 내면서 제갈군무는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읊조렸다. 무공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진해만 덜덜 떨며 겁에 질려 있을 뿐이었다. 금강사가 스치자 진해의 팔뚝만 한 나뭇가지가 소리 없이 잘려 나간 것을 본다면 진해가 아닌 누구라도 그럴 만했다.
“해야, 해야. 우리 해야. 이 숙부랑 같이 고산국으로 갈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창명후랑 같이 바로 가 버리지 뭐. 사부도 창명후 영감은 높이 사는 거 같으니까.”
하지만 제갈군무의 말에 진해는 간신히 정신을 추스를 수 있었다. 목숨이 아까워 가만히 있으려고 했더니 제갈군무 이놈이 지금 자신을 고산국으로 납치하려 했다.
“황 시위! 황 시위! 살려 줘!! 창명후 영감!! 이놈이 날 납치하려고 해!!!”
그리고 진해는 이 자리에서 자신을 가장 안전하게 월국으로 데려가 줄 이들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절대로 이 미친놈을 후계자로 섬기는 고산국에는 가기 싫었다!
“협 아저씨!! 협 아저씨――!!”
진해가 비명처럼 외치는 소리를 듣자 금강사 뭉치를 산곡도에 휘감은 채 힘겨루기를 하던 오천협의 눈이 크게 홉떠졌다. 가면의 눈이 뚫린 부분에서 짐승 같은 안광이 솟구쳤다. 조금 전까지 옥길합과 호각으로 겨루던 오천협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금강사가 제 가슴팍을 헤치는 걸 방치하고 전력을 다해 진해 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가 디딘 땅마다 붉은 핏방울이 꽃잎처럼 흘러내렸다.
“엇차!”
“악!”
그리고 옥길합 역시 제갈군무의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싸늘하게 변한 눈동자가 얼음처럼 차가운 이채를 띤 채 그를 노려보았다. 제갈군무는 오천협이 거의 제 앞에 당도하자 진해를 들어 제 앞에 척 내려놓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옥길합이 조종하는 금강사들의 공격이 닿는 부분이었다.
“미친놈아!! 이 미친놈아!!!”
“하하하하!!”
금강사들이 뭉쳐 하얗게 변해 있었기에 진해도 그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금강사는 진해를 해칠 생각이 없는지 공중에서 스르륵 흩어졌고 오천협 역시 날리려던 산곡도를 움찔 멈추었다.
“형!”
“큭, 오 은인!”
옥청려와 미려도 진해가 눈물 콧물을 쏟으며 방패 신세로 전락한 것을 보며 질겁을 했다. 일단은 두 사람 모두 다 진해에게 호의적인 인물이었던 것이다. 아니, 그 두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이 자리의 대부분이 진해에게 호의적이었고 진해가 무사히 있어야만 하는 사람들이었다.
“뭐야. 다들 왜 안 싸워? 난리 법석을 피워야 내가 우리 오 소협이랑 같이 신행을 떠날 것 아니야.”
“돌은 놈아!!”
“응? 내가 돌았어? 내가 신행을 월국으로 떠난다고 해도 돌았다고 할 거야?”
“엥?”
“여해루가 좋다고 나한테 그렇게 자랑했었잖아?”
조금 전까지 진해를 금강사와 산곡도의 방패로 삼던 이가 능글능글 웃으며 눈을 마주했다. 진해는 그 눈을 마주하자마자 머릿속에서 번쩍 번개가 내리치는 듯했다.
제갈군무는 고산패자였다. 황아무와 강절곤은 옥가의 가신들과 아웅다웅 싸우고 있는데 제갈군무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까지 도달했다. 심지어 미려와 청려의 금강사도 아이의 장난처럼 쳐 내 버렸다.
“아, 아버지!!”
옥길합과 제갈군무가 단둘이 싸운다면 승패가 어찌 날지 모르겠지만 제갈군무가 옥길합이나 오천협 중 한 사람과 편을 먹는다면 승패는 순식간에 기울어졌다. 적어도 제갈군무는 지금 이 자리의 누구보다도 확실히 진해를 바깥으로 데리고 나갈 수 있었다. 창명후나 황아무도 챙겨서!
“아버지, 제가 모실게요! 제발 제가 모시게 해 주세요! 월국에서!”
“하하, 아버지 소리를 내가 먼저 들어 버렸으니 이걸 어째~!”
진해가 배알도 없이 내뱉은 아버지 소리에 제갈군무는 엄청나게 만족한 것 같았다. 제갈군무는 진해를 방패처럼 잘랑잘랑 흔들면서도 슬금슬금 다가오는 가신들에게 위협적으로 산곡도를 날려 보였다. 산곡도는 가장 가까이에 접근한 가신의 머리털을 한 움큼이나 베어 냈다.
“귀한 아들은 내가 데려간다. 불만 있으면 내게 충성을 맹세하고 신하가 되든 가 아니면 월국까지 따라와.”
그리고 제갈군무는 한 나라의 후사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야비하게 웃어 보였다. 진해는 제갈군무의 웃음이 잠춘동 사기꾼들이 감탄할 정도로 비열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주춤주춤 대치하는 동안 황아무와 강절곤이 제갈군무와 진해에게로 도착했고 황아무가 냉큼 진해를 둘러업었다. 진해는 자신 말고 강절곤을 업으라 했으나 강절곤이 쥔 커다란 도끼를 보며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도끼의 날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형, 형―!!”
진해가 황아무의 등에 업혀 안채의 출구 쪽으로 향하자 제갈군무 탓에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던 미려가 부르짖었다. 어찌나 절절하고 애틋하게 부르던지 진해를 업고 가던 황아무의 발이 움찔 멈출 정도였다. 진해가 뒤를 돌아보자 철철 울고 있는 미려가 보였다.
진해는 만약 여기서 헤어진다면 다시는 미려를 만나지 못할 걸 알았다. 진해가 월국에 돌아가 황제에게 보고를 하면 미려는 강백서의 아이가 아님이 밝혀질 것이고 황제를 우롱한 죄를 지었으므로 월국에 입국할 수 없을 터였다.
강절곤의 재촉 어린 시선을 받은 황아무가 다시 발걸음을 움직이던 찰나, 진해의 머릿속에 미려와 함께한 십수 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진해가 보던 온갖 아름답고 어여쁜 것들의 대부분이 모두 다 미려의 것이었다. 각자의 행복을 위한다면 차라리 여기서 매몰차게 헤어지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진해는 월국으로, 미려는 생부의 나라인 해국으로. 각자가 서로에게 맞는 자리에서 서로의 삶은 사는 게 옳을지도 몰랐다.
‘내가 우리 강아지를 버린다고……?’
하지만 진해는 누군가를 버릴 수 없는 사람이었다. 버려지면 버려졌지 잡은 손을 먼저 놓아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하는 이의 손을 놓는다는 건 오진해라는 인물에게 있어서 불가능이나 다름없었다.
“에잇!”
진해는 치솟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황아무의 등에서 펄쩍 뛰어내려 미려에게 달려갔다. 넋을 놓고 울고 있던 손을 꼭 잡고,
“아니, 전 왜!?”
미려와 대치하던 청려의 손도 잡았다.
“옥길합 이 아비 자격도 없는 자식아! 서해 옥가의 예쁜이들은 내가 다 쓸어 간다! 퀴퀴한 집구석에서 혼자 잘 살아 보시지!”
그리고는 두 사람의 손을 잡은 채 옥길합에게 쌍으로 산(山)을 닮은 수화를 해 보였다. 해국 사람들은 가운데 손가락을 높게 든 수화가 뭘 뜻하는 줄 몰랐지만 직감적으로 엿 먹으라는 뜻임을 깨달았다. 경악한 얼굴을 뒤로 하고 진해는 미려와 청려를 끌고 후다닥 제갈군무와 황아무, 강절곤에게로 합류했다. 진해가 합류하자 일행은 부리나케 안채의 출구로 향하기 시작했다. 황망한 표정으로 서 있던 가신 중에서 체구가 작고 곱상하게 생긴 청년이 망설이다 이를 악물고 그들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호별!”
그의 아비 되는 자가, 그의 양부 되는 자가 그를 불렀으나 청년은 뒤돌아보지 않고 달려가 가장 앞서 달리는 이의 옆에 붙었다. 곧이어 청년과 비슷한 연배의 가신들 셋 역시 그들을 향해 달려갔다.
합류한 이들이 안채를 벗어나자 오천협이 안채의 입구를 막듯이 섰다. 산곡도를 들고 서해 옥가 사람들을 막다가 진해 일행의 발걸음 소리가 완전히 멀어지자 담벼락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오천협은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당했군.”
옥길합은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안채에서 크게 헛웃음 쳤다. 초저녁까지는 아들과 사위와 함께 잔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상은 엎어지고, 주변은 부서진 잡동사니로 엉망이었다. 다친 가신들 사이에서 얕게 억눌린 신음성이 새어 나왔다.
―이 아비 자격도 없는 자식아!
진해가 마지막으로 외친 소리가 그의 귓속에 맴맴 메아리쳤다.
“……그럴지도.”
옥길합은 진해를 따라가며 믿어지지 않는 눈으로 진해를 보던 정려를 떠올렸다. 기쁨이 기름막처럼 뜬 눈동자를 떠올리고, 그와 꼭 닮은 얼굴을 떠올렸다. 자신이 정략혼이 아닌, 그를 사랑하여 구혼했음을 알았을 때의 얼굴을.
“졌다.”
그리고 옥길합은 진해의 말을 진정으로 인정했다. 옥길합은 이 순간에도 아이 본인이 아닌 아이를 낳은 그 사람만을 떠올리고 있었다. 아비의 마음이 아니라 연인이 사랑하는 마음의 한 조각으로 정려를 챙긴 것뿐이었다.
“가주! 지금이라도 군을 동원해 쫓아가면……!”
“아서라. 아들이 정인과 야반도주한 걸 온 나라에 소문낼 셈인가.”
“야, 야반도주요?”
“그래. 거기다가 청려는 또 어찌할 것이냐. 아직 혼인도 하지 않은 음인인데. 소문이 나면 곤란해지니 그냥 내버려 둬라. 그것보다 이것들부터 치워 버려라.”
절뚝절뚝 걸어온 총관 집사는 박살 나고 깨진 집기들을 보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터덜터덜 걸어가 반파된 칠현금 상계를 집어 드는 가주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총관 집사의 아들인 도기(일도) 역시 소가주를 따라 탈주한 이들 중 하나였다.
* * *
마음을 완전히 굳혔는지 미려방에서 문지기 노릇을 하던 가신들이 진해 일행을 호위하기 시작했다. 진해는 황아무와 마주친 호별의 눈에서 뜨겁고 애틋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랑 혹은 우애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감정을.
그리고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일단 그들을 막아서는 사병들을 물리치며 일행은 마침내 서해 옥가 저택의 문밖으로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내내 보이지 않던 단승(이단)이 진해와 미려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소가주! 여기입니다!”
단승은 어디서 구했는지 사람 여럿이 탈 만큼 큰 수레를 끌고 있었다.
“헉, 도기랑 쟤들은 왜 같이, 컥!”
“출발해라.”
그리고 도망칠 준비가 만만한 단승을 보자 도기는 외부인들이 어떻게 저택에 침입했는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다른 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빠르게 단승에게로 달려가 그대로 명치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물론 그 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단승 옆에 앉았지만.
“형으로서의 충고이니 너무 그리 보지 마십시오, 오 형.”
“으, 으응…….”
너네 사실 형제 아니고 사촌이잖아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진해는 단승의 괴로워하는 얼굴을 보며 슬그머니 제가 데려온 이들 뒤로 물러났다. 옥청려는 그런 진해에게 굉장히, 어마어마하게 할 말이 많은 모양이었다.
“일단 타지? 서해 옥가는 그렇다 쳐도 곧 해국 왕실에서 쫓아올지도 모르잖아.”
“올지도 모르는 게 아니라 분명히 그럴 거야. 내가 해국에 도착하기 전부터 종종 자객을 보내곤 했으니 놓치지 않기 위해 군을 동원할지도 모르지.”
“뭣, 자객?! 타, 타, 빨리 타!”
“아니, 잠깐, 근데 오 은인, 저는 왜 타야 하는―”
“영감, 영감이 제일 늙었으니까 안쪽에 타! 황 시위가 바깥쪽에서 망을 보고! 어, 나머지 애들은. 음―”
이왕 모인 김에 모두를 다 데리고 가고 싶었지만 단승이 준비한 수레는 원래 예정된 인원밖에 태울 수 없었다. 그 인원보다 조금 많은 이가 탔으니 사실 정원 초과가 된 지 오래였다. 진해가 모두를 태우기 위해 머리를 굴리자 물러서 있던 호별, 오호가 앞으로 나서서 진해에게 말했다.
“저희는 해국 사람이라 어떻게든 탈 것을 구할 수 있으니 먼저 가세요.”
그리고는 강절곤을 부축해 수레에 태우던 황아무와 눈을 마주쳤다. 황아무 역시 강절곤을 태우다 말고 오호와 눈을 마주쳤다. 강절곤은 왕년에 장강성을 한 번 들었다 놓은 연애담의 주인임을 입증하듯 황아무의 무례를 탓하지 않고 엇흠, 기침 한 번과 함께 수레 안으로 쏙 들어갔다.
“아무 형, 나는 형의 동생이 아니지만, 하지만…….”
“쉿. 아무 말도 하지 말아.”
그리고 어느새 오호의 곁으로 다가온 황아무가 오호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황급히 몸을 피해야 함에도 오호는 황아무를 거부하지 않고 자신도 그를 힘차게 끌어안았다.
“혈연보다 더욱 강한 연으로 묶이면 되잖아. 처음부터 가족인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
“아무 형……!”
그들을 둘러싼 문지기 형제와 진해, 미려, 그리고 청려가 위기 속에서 피어나는 아름답고 뜨거운 사랑을 물끄러미 구경하고 있었다.
“휘유~ 뜨거운데~?”
아, 제갈군무도 함께.
“그래, 그래. 혼인 신고서 쓰면 순식간에 가족이 되니까 이제 그만 우리 갈 길 가자! 내가 월국에 도착하면 아는 관리한테 가져가서 순식간에 수리해 줄 테니까.”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서로를 끌어안던 두 사람은 그제야 주변의 시선을 인식한 듯했다. 진해가 혼인 신고서를 들먹이자 얼굴을 붉히기까지 하는 것이다.
“간 빼먹는 살살이가 진짜로 멀쩡한 집 음인 하나를 통으로 빼먹는구나. 그렇게 해원공 마마니 어엿한 월국 무관이니 우리 유부니 하던 사람을 해국까지 쫓아오게 하고.”
“오, 오 형~!”
“혼례는 여해루가 좋냐, 미려방이 좋냐?”
진해가 아무 말도 못 하는 황아무 대신 대드는 오호에게 농을 걸자 긴박했던 분위기가 조금 풀어졌다. 오호와 황아무는 서로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놓는 것으로 수백 마디의 말을 대신했다. 진해는 괜히 한 쌍을 떼어 놓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황아무는 성격상 진해가 계속 신경 쓰일 터이고 오호와 나머지 문지기 형제들도 무슨 수단을 써서 나올지 모르니 당분간은 떨어져서 행동하는 게 맞았다.
“저기…….”
간신히 제정신을 차린 이단이 일도와 수레를 몰자 가만히 구석에 앉아 있던 청려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저는 대체 왜 데려오신 겁니까?”
청려는 자신이 아직도 왜 이 수레에 타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안 따라왔으면 몸 성하지 못했을 테니까.”
그러나 청려가 바라던 대답은 진해가 아닌 미려의 입에서 나왔다.
“형은 자상한 사람이니 잠깐이나마 정이 붙은 널 내버려 두지 못했던 거지.”
“……뭐, 어차피 될 대로 될 인생 그렇게 신경 써 주지 않으셔도 되는데.”
“생판 남이었던 나도 애정을 다해 길러 준 형이야. 고작 그 집에서 빼 주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란다.”
청려는 미려의 사근사근한 목소리를 들으며 대충 납득하는 듯했다.
‘아닌데……? 그냥 청려도 데려가면 배로 빡칠 거 같아서 그런 건데? 미려는 내 동생인 줄 알고 그랬던 건데? 물론 어릴 적의 미려는 누구나 사랑할 수밖에 없는 천하제일 예쁜 아기였지만!’
안타깝게도 진해의 의도와는 별로 맞지 않는 설명이었다. 진해는 눈앞에서 출중한 재능의 혈육을 둘이나 채 가면 옥길합이 제곱으로 열 받을 것 같아 청려도 같이 데려온 것뿐이었다. 자신을 빼 주기 위해 앞장서 싸운 걸 갚는 의도도 있었지만 청려를 데려가서 뭘 어쩐다 하는 계획 따위 세우고 있을 리가 없었다.
“오 어사…….”
그리고 입 다물면 중간은 간다는 신조에 따라 진해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던 그때, 강절곤이 떨리는 음성으로 진해를 불렀다. 진해는 혹시 영감이 쓰러지는 전조가 아닌가 싶어 고개를 그쪽으로 휙 돌려 보였다.
“몸은, 다친 곳은 없는가?”
“참 나, 영감! 난 없는 동네라고 소문난 잠춘동에 살면서도 잔병치레 없이 건강한 몸이야! 우리 미려가 날 화병처럼 대해 줘서 다치긴커녕 오히려 살이 더 찐 것 같다고! 그나저나 영감이야말로 괜찮아? 안 본 새에 뭐 잘못 먹거나 열 받아서 넘어가거나 그런 건 아니지? 나야 젊으니 괜찮지만 늙은 사람은 그러면 큰일이잖아!”
“나는, 나는 괜찮네……, 이 늙은이는……, 당장에 죽어도 좋아……!”
“……향수병인가?”
그런데 강절곤은 진해의 생각보다 상태가 더 안 좋아 보였다. 진해를 향해 눈물을 글썽이는 모양새가 아무래도 진해를 빼 오느라 고생을 많이 한 듯했다. 진해는 측은한 마음에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강절곤의 몸에 둘러 주었다.
“큽……! 이렇게 건강히 자라 주다니……!”
“제갈 형, 대체 여각에서 뭘 먹은 거야? 대마라도 먹였어?”
진해는 숫제 제 손을 움켜잡고 철철 눈물을 흘리는 시작하는 강절곤을 뜨악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글쎄, 손자 때문에 충격이 큰가 보지. 월국에 가면 나을지도?”
“하긴 몰래 빠져나오면서까지 보려던 손자가 없었,”
“그래! 당장 월국으로 돌아가자꾸나! 당장 돌아가서 도성으로, 아니 장강성으로 가자! 다시는 놓치지 않으마, 이 할애비가, 이 할애비가, 크흑……!”
“악, 새 옷에 콧물은 좀 그렇잖아?!”
향수병의 증상에 헛소리도 있었던가. 진해는 자신의 경로사상을 최대한으로 발휘하여 강절곤을 다독이려 했으나 새 옷에 콧물이 묻자 이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질색을 하며 강절곤을 황아무 쪽으로 쭉 밀어내기까지 했다. 펑펑 우는 게 가엽긴 했으나 미려와 똑같은 색으로 갖춰 입은 새 옷이 더러워지는 건 사양이었다!
어쨌거나, 일행은 말을 달려 서둘러 성문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해국 왕실의 손이 닿기 전에 얼른 이 나라를 떠야만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해는 이 나라에서 벗어나면 미려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었다. 해국 안에서 미려에게 묻기에는 너무나도 위험하고 중대한 사안이었다.
“칫. 곤란하게 됐네. 오 형, 문제가 생겼어.”
그러나 일이 이렇게 순순히 풀릴 리가 없었다. 성문까지 쉬지 않고 사람 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거침없이 수레를 몰던 이단이 혀 차는 소리를 냈다. 일도의 얼굴도 설핏 굳어지는 듯했다.
“도련님, 왕실에서 벌써 손을 뻗친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일도는 어떻게 할까요라고 물으면서 허리에 찬 검에 손을 뻗고 있었다. 진해는 일도가 덤덤한 겉가죽에 비해 성질 급한 건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지나치게 많이 급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 없군요. 소가주, 밀려면 지금 미는 게 낫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성문이 아니라 국경 밖까지 손이 뻗칠 거예 요. 단, 지금 왕실을 적대하게 되면 다시는 해국으로 돌아오지 못할 겁니다.”
언제는 자기를 왜 데려가냐며 물었던 청려가 슬그머니 바깥을 살피며 미려에게 간언했다. 미려 역시 대충 마음을 굳힌 듯했다. 조용히 소매를 걷어 손목에 감은 금강사를 보이는 걸 보면 미려가 무슨 결정을 내렸는지 말 안 해도 뻔했다.
“잠깐! 안 돼! 다시는 해국에 돌아올 수 없다니!”
하지만 진해는 미려가 다시는 해국에 돌아올 수 없다는 소리를 듣자 핏대 높여 무력으로 밀고 나가자는 계획을 반대했다. 미우나 고우나 옥길합은 미려의 생부였고, 그 말인즉 해국은 미려의 본적이었다.
“안 돼! 절대로 안 돼! 우리 미려가 생으로 고아가 되게 둘 순 없지!”
“형…….”
“미려야, 우리 돈 많잖아. 까짓거 입은 옷만 벗어 팔아도 어찌어찌 벗어날 구멍이 생길 거야. 그러니까 우리 문제 될 일은 만들지 말자, 응?”
“형은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마음이 고울 수가 있어……. 고작 나 하나 때문에…….”
미려는 진해가 자신을 생각하는 것에 감동한 듯했으나 졸지에 집 떠나게 생긴 청려는 진해가 제법 이성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확실히 성문에서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면 그걸 빌미 삼아 해국에서 군을 풀지도 몰랐다. 물론 군의 총책임자인 옥길합이 그걸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겠지만 옥길합도 사람이었고, 마음이 변해 아들을 제 곁에 두고 싶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강절곤이 울던 것을 뚝 멈추고 눈매가 더러워질 정도로 미려와 진해가 애틋하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던 그때,
“아직도 여기서 꾸물대고 있는 것이냐.”
일행이 탄 수수한 수레 옆으로 그윽한 향기가 풍기는 화려한 수레가 멈춰 섰다. 수레는 일행의 것과 달리 한두 사람이 겨우 탈 정도로 작았으나 수레를 끄는 말이나 마부의 옷차림, 주렁주렁 달린 장식이나 휘장을 걷고 내려다보는 사람 등을 보아도 보통 수레가 아님을 증명하는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수레에서 휘장을 걷고 말을 건 이는 해국의 귀비이자 옥길합의 이복동생이며 왕자 사마상의 우부인 옥백합이었다.
“흥. 그리 꾸물대서는 환갑이 되어서야 월국에 당도할 것이다. 잔말 말고 따라오거라.”
그리고 옥백합의 옆에서 궁으로 돌아갔다던 상 왕자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사마상은 진해를 보자 반가워하며 자그마한 손을 흔들었다. 진해 역시 약간 얼떨떨한 표정으로 마주 손을 흔들어 보였다.
“내 왕자와 외유를 나간다.”
“예, 예?”
“귓구멍을 새로 뚫어 주어야 알아듣겠느냐! 내 아들, 이 나라의 고귀한 핏줄을 이어받은 왕자 상과 외유를 나가는 중이란 말이다! 천것이 어딜 건방지게 고개를 빳빳이 드느냐! 나를 감히 우습게 보는 것이냐! 내가 누군지 모르는 게야!”
“엇, 소, 송구합니다, 귀비마마! 하지만 뒤에 저들은―”
“멍청한 놈. 그럼 내가 외유 가서도 내 손으로 자리 펴고 내 손으로 차 끓이리?”
“예?”
성문을 수비하던 수비대는 당연히 수레의 앞을 막았지만 옥백합의 성질머리를 막진 못했다. 옥백합은 수비대장이 말을 더듬거리자 휘장을 걷고는 손가락질로 수비대장을 자신의 앞까지 불러들였다. 옥백합은 옥길합이 괜히 귀비로 만든 것이 아님을 증명하듯 무척 아름다운 음인이었고, 양인인 수비대장은 옥백합의 향긋한 향과 아름다운 얼굴을 보자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지고 말았다.
[짝!]
하지만 그것도 옥백합이 수비대장의 얼굴을 후려치기 전까지의 일이었다.
“시종. 시종 말이다 멍청한 것아. 왕자와 함께 나가는데 저 정도만 데려가면 고작 저 인원으로 되시겠습니까. 미천한 저라도 데려가시지요 이렇게 말을 올리는 것이 아랫것의 도리가 아니더냐!”
“엇, 어, 그럼 저, 저라도……?”
“필요 없다. 넌 손이 너무 두꺼워. 다도라도 익히고 나서 다시 찾아와라. 가자!”
수비대장이 뺨을 맞고도 어버버하며 말을 못 붙이는데 병사들이 말을 붙일 수 있을 리가. 병사들은 어쩔 수 없이 두 눈 멀쩡히 뜨고 옥백합의 수레와 진해 일행이 탄 수레를 성문 밖으로 보내 줄 수밖에 없었다.
전혀 생각지 못한 이의 도움으로 진해 일행은 성문을 무사히 빠져나왔다. 옥백합의 수레는 대로를 따라 달리다가 도성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천천히 멈춰 섰다. 진해 일행 역시 그 뒤를 따라 수레를 멈췄다.
“오 은인!”
“아구, 상 왕자님!”
수레가 멈추자 상 왕자가 진해에게 달려가 안겼다. 진해는 그런 상 왕자를 기껍게 안아 들었다. 진해는 상 왕자가 우부에게로 돌아간 것이 기뻤다.
“왜 우릴 도와주시는 겁니까?”
“흥, 돕기는 누가 도왔다는 게냐. 난 그저 신세진 것을 갚는 것뿐이다!”
옥청려가 옥백합에게 묻자 옥백합은 썩 좋아 보이지 않는 표정으로 말을 뱉었다. 그리고는 조금 풀어진 눈으로 자신의 아들을 둥개둥개 어르는 진해를 바라보았다.
“너같이 언제 터질 줄 모르는 음인과 억지로 짝을 짓게 하지 않아 준 보답이다. 내 아들은…… 마음에 차는 이와 혼인시킬 거다. 너 같은 늙은 음인이 아니라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이와 원하는 대로 행복하게 살게 할 것이야.”
“숙부…….”
“거기다.”
잠깐 따뜻한 눈으로 사마상을 바라보던 옥백합의 눈이 청려 너머에 서 있던 미려에게로 향했다. 옥백합은 미려를 보자 발광하며 닥치는 대로 패물을 모았던 이이기도 했다.
“가문의 위험 요소가 해국을 떠난다는데 방해할 이유가 없지. 왕실에서는 저것을 이용해 가주를 어찌해 보려는 것 같지만 멍청한 소리! 저건 화약고야. 형님은 다른 이의 아들들과 저것을 섞어 둘 수 있으면서 보란 듯이 저것을 소가주로 인정했어. 저것에 불똥이 튀게 되면…… 그때는 정말로 왕실의 역성(易姓)이 일어날지도 모르지.”
미려는 옥백합과 눈을 마주치며 그 말을 고스란히 듣고 있었다. 물론 미려 자신 역시도 옥길합이 자신에게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 자신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대충은 짐작하고 있는 터였다. 미려 역시 그것을 알면서도 진해와 맺어지기 위해 이용한 것뿐. 어찌 보면 참으로 닮은 부자였다.
“가라.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라. 내가 무슨 짓을 해서 그 늙은이의 씨를 받고 이 자리에 올랐는데 그걸 망치게 두겠느냐!”
옥백합은 오랫동안 삼킨 것을 토해 내듯 미려에게, 조카인 옥정려에게 소리치곤 사랑스러운 아들 상에게로 향했다. 옥가가 반역하게 되고, 그 반역이 성공하여 역성이 일어나게 된다면 반드시 목숨을 잃게 될 사마씨를 가진 자신의 아들에게.
“왕자, 이제 돌아갈 시간이란다.”
“응? 벌써?”
“그리고 양인을 품는 변태와는 오래 있어 좋을 것이 없어.”
“변태? 아바마마, 변태가 뭐예요?”
“아닛, 변태라니! 누가 누구보고 변태래?!”
옥백합은 자리에서 펄쩍 뛰는 진해를 무시하고는 사마상의 손을 잡고 수레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왔던 길을 거슬러 해국의 도성으로 돌아갔다. 미려는 말없이 그 뒤를 보고 있었다. 청려 역시 아무 말 없이 길 위를 보고 있었다.
특히 청려는 매우 복잡한 감각에 휩싸여 있었다. 첫 번째로는 집 밖을 이렇게 오래 나와 본 적이 처음이라 그랬고, 두 번째로는 이리 멀리 나와 본 것이 처음이라 그리했고, 세 번째로는 사마상과 같은 성씨의 왕손 하나가 떠올라 그런 것이었다. 네 번째로는…… 이젠 어떤 것도 자신을 막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아 그랬다.
“볼일 다 봤으면 다시 타지?”
잠깐 감상에 휩싸여 있던 일행들은 수레에 늘어져 입이 찢어지라 하품을 하던 제갈군무의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 제갈군무는 오천협의 존재를 확인한 뒤로 해국에 모든 관심이 떨어져 버렸다. 강절곤 역시 묘하게 초조해 보였다.
“좋아, 그럼 이젠 진짜 월국으로 출발!”
그들을 방해하는 것이 아무도 없는 길 위에서 진해는 그제야 정말로 자신이 해국에서 탈출했음을 실감했다. 기쁨이 가득 찬 것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온몸을 오그라뜨렸다가 참았던 것을 터뜨리듯 자리에서 팔짝 뛰어올랐다.
그 연치에 하기에는 심히 귀여운 행동이었으나 이 자리의 누구도 그것을 탓하지 않았다. 진해가 집에 돌아간다는 기쁨에 경박한 박자로 걸어갈 때마다 서해 옥가의 시종들에게서 갈취한 금품들이 영롱한 소리로 노래를 했다.
월국.
모든 것이 시작되고, 모든 것이 끝날지도 모르는 무대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행은 각자의 생각과 각자의 목적을 가슴에 품은 채 그들도 모르는 새 한 방향으로 고개를 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