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월국 사신 오진해
입김도 몽땅 얼어붙을 것처럼 추운 겨울날, 사건은 일어났다. 누군가 죽은 것처럼 싸늘하기 짝이 없는 날의 시작이었지만 사실은 아무도 죽지 않았고, 심각한 사고가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 단지 돌아올 이가 때가 되어 돌아오고 있다는 것뿐.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아, 정말! 갑갑해 돌아가시겠네! 동 형, 그 짜증 나는 발 좀 치우고 말하면 안 돼요? 동 형이랑 내가 남도 아니고 무슨!”
“어사 대인, 이것은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예법으로서―”
“거짓말하지 마요! 이런 거짓부렁 같은 예법이 어딨어!”
그리고 이 으스스한 날의 아침부터 오진해는 생판 남의 집에 가서 있는 대로 짜증을 내고 있었다. 진해가 방문한 집은 웬만한 사람은 감히 발도 들이지 못한다는 고관대작의 저택으로서 대대로 관직에 몸을 담았고, 예법에 관해서는 황실에서도 한 수 물러 준다는 뼈대 있는 가문의 집이었다. 그랬다. 진해는 지금 예부상서 동가대의 집에, 내무부 이등시위 동십사의 친가에 와 있었다.
“톡 까놓고 말해서 말이야, 어! 저 뒤에 있는 사람이 동 형이라는 보장이 있어요?!”
“예?!”
“아니, 그렇잖아요. 얼굴도 안 보이는데 어떻게 목소리만으로 사람을 구분하냐구.”
진해는 조금 전까지 자신과 동십사가 남이 아니라 주장해 놓고 목소리로 사람을 구분할 수 없다는 모순된 주장을 했다. 오랜만에 본 영 집사는 못 본 사이에 더욱 빤질빤질해진 진해의 혓바닥에 당황을 금치 못했다.
“듣고 보니 그렇구만.”
“도련님.”
“되었네. 발을 걷어 주게. 나도 오 제를 못 본 지가 오래되었어. 발 너머로 보는 건 한계가 있지.”
영 집사는 발 너머의 동십사를 바라보며 어쩔 줄을 몰라 하다 결국 작은 한숨과 함께 시비들을 불러 발을 치워 버렸다. 예부상서 댁에 일하는 하인들은 어찌나 교육을 잘 받았는지 옷 스치는 소리가 크게 들릴 정도로 조용한 태도로 발을 걷었고, 이내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조용히 방 밖으로 물러났다.
“그래, 오 제. 이젠 나를 알아보겠는가?”
“…….”
그리고 드러난 모습을 보며 진해는 입을 꾹 다물었다. 동십사는 단단했던 몸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배가 산처럼 크게 부풀어 있었다. 명백한 산부의 모습이었지만 진해의 입을 다물게 한 건 움푹 들어간 양 뺨이었다. 진해는 순간 발을 걷자고 한 말을 후회할 뻔했다.
“왜 이렇게 마르셨어요?”
하지만 발을 걷지 않았다면 동십사가 이렇게 마른 사실도 몰랐을 것이다. 진해는 망설이다가 동십사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 한때는 수련이랍시고 진해를 바닥에 사정없이 패대기치던 손이었다.
“배 속의 녀석이 여간내기가 아니라.”
“입덧이 심하셔서 그렇습니다.”
걱정스러운 안색의 영 집사가 덧붙였다.
“대체 얼마나 굉장한 조카가 태어나려고 산달이 가까운데 입덧이에요? 혹시 여기 음식이 입에 안 맞는 거 아니에요? 제가 뭘 좀 만들어 올까요?”
진해는 동십사가 말만 한다면 당장이라도 부엌으로 달려가 뭐든 만들어 올 기세였다. 하지만 동십사는 미소를 띤 채로 조용히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게워 내는 만큼 더 많이 먹고 있으니 괜찮네. 나보다는 아심이 더 걱정이지.”
“형이요? 왜요?”
“자기 탓이라는 생각하거든. 의원이 괜찮다고 하는데도 말이야.”
“…….”
진해는 그 말에 할 말을 잃었다. 미소를 띤 동십사는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만 같았다. 진해의 머릿속에도 혹시라는 불길한 가정이 피어났다. 동십사는 건장했지만 출산은 힘든 일이었고, 때로는 출산으로 목숨을 잃는 이도 존재했었다. 심지어 월국의 역대 황제 중에서도 출산 중에 붕어하여 급하게 후사를 찾아야 했던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우리가 하려는 이야기는 이게 아니지. 내가 자네에게 중요한 이야기를 한다는 게 옆길로 새고 말았어.”
진해는 어떤 이야기인지는 몰라도 동십사의 목숨만큼 중요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회임 중의 동십사를 만나기는 하늘의 별 따기이고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동십사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절로 제 말을 아끼게 되었다.
“어젯밤에 아버지께 사람이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네. 아버지는 내게 쉬쉬하시려는 모양이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이상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
“대체 무슨 이야기인데 그래요? 또 어떤 망할 놈이 해산 도련님한테 누명을 씌우려 한데요? 아니면 창명후 미친 늙은이가 황후마마가지고 지, 어흠, 난리래요?”
“그랬으면 굳이 자네를 부르지 않았겠지. 자네는 참 잘해 주고 있어. 이 동십사가 없어도 굳건히 마마를 보좌해 드리고 있단 말일세. 나는 자네를 동생으로 삼은 것만큼 생에 잘한 일은 없다고 생각할 정도야.”
“왜 그런 말을 해요…….”
동십사는 어쩐지 아련한 분위기를 풍기며 자신의 손을 잡은 진해의 손 위에 손을 얹었다. 저 먼 곳을 바라보는 눈동자 속에 해산을 향한 충심과 걱정, 약간의 비장함이 담겨 있었다. 마치 몰려오는 거대한 태풍을 대비하는 것처럼.
“앞으로는 조금 더 힘들어질 거야. 아버지께서도 최선을 다하시겠지만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지도 모르지. 나는 해원공이야말로 적법한 후사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니까 말일세.”
“그렇지 않은 자들이 있으면 뭐 어때요. 어차피 해산 도련님이 차기 황제 하실 거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문젤세. 어젯밤 내가 아버지께 막돼먹은 짓까지 해 가며 들은 게 문제란 말일세. 오 제.”
“네.”
“자네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해원공 마마를 배신하지 않을 거지?”
“당연하죠. 그, 동 형도 이미 알고 계시잖아요! 제가 어흠, 해산 도련님이랑 깊은 사이란 걸. 저, 측실은 되지 않겠다고 했지만 해산 도련님이라면…… 조금, 아니 꽤 많이 흔들릴지도 몰라요.”
“진심인가?”
“진심이고 자시고 어제도 신나게 떡―”
깊어도 너무 깊은 사이라 어제도 신나게 해산의 엉덩이를 때려 줬었다. 해산이 눈물이 맺힐 만큼 부끄러운 작대기로.
“…….”
“……때가 되면 얼른 장가가고 싶습니다.”
방 분위기가 뜬금없이 어색해지자 진해는 작은 헛기침과 함께 어색하게 말을 끝냈다. 진해의 말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동십사는 우습게도 그제야 진해가 아는 동십사로 되돌아온 것 같았다.
“뭐, 좋은 일이지. 도망치려 했던 자네가 그렇게까지 마음을 먹었다니까. 그래, 그 마음에 변치 않는다면 자네는 절대 마마를 배신하지 않겠지. 오 제, 잘 듣게.”
“네.”
“지금 그자가 오고 있다네.”
“그자요?”
“창명후 일파와 반해국파들이 미는 차기 후사. 이 월국에 둘밖에 존재치 않는 직계 황손.”
“서, 설마!”
“그래, 성월공 안월산이 북벌을 끝냈네. 북벌을 끝내고 어제 막 국경을 넘었다는 파발이 도성에 들어왔어! 성월공이 돌아오면 이제껏 잠잠했던 이들이 들고일어날 걸세, 이때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해원공 마마를 격렬히 공격할 거야!”
동십사는 말과 동시에 진해의 손을 꾹 움켜쥐었다. 약해졌다고는 하나 동십사의 손아귀 힘이 다 사라진 것이 아니라 진해의 손에 하얗게 손자국이 생겨 버렸다. 하지만 진해는 제 손을 자극하는 강한 압박에도 신음 하나 내지 않았다. 진해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단 하나,
‘근데 집 나갔던 성월공이 돌아오는 게 왜 해산 도련님한테 위협이지?’
성월공 안월산이 어떤 인물인지를 알지 못해 생겨나는 순수한 의문이었다. 진해는 동십사에게 대충 동조한 뒤 자신이 아는 한 가장 쉽게 이 의문을 풀어 줄 사람을 찾아가기로 했다.
* * *
“푸흡, 저, 정말입니까? 오 형, 정말 성월공이 돌아오시고 있대요?!”
진해가 선택한 건 해원공부 일등시위인 황아무였다. 황아무는 유일청 실종 사건, 지금은 잊힌 소양자 살인 사건 때문에 심문을 받은 후로 집에서 오랫동안 요양을 하고 있었다.
범인이었던 임재율이 유배 갈 때쯤엔 거의 다 나았지만 고문당한 이들을 안쓰럽게 여긴 해산이 요양이라는 명목으로 그들을 몇 달 더 쉬게 해 주었다.
“응. 근데 성월공이 돌아오는 게 그리 큰일인가? 성월공은 황자도 아니잖아.”
“황자는, 아니지요! 황자는!”
“그럼 황위랑 관련도 없잖아?”
“아이고, 오 형~!”
황아무는 진해가 태평한 얼굴로 반문하자 그답지 않게 속 터지는 소리를 하며 주저앉았다. 황아무가 큰 소리를 내자 방문 사이로 오호가 쏙 고개를 내밀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부엌과 이어진 방 너머에서 오호는 황아무의 유부와 감자를 깎는 중이었다. 놀랍게도 오호는 진해가 뭐라 하기 전부터 자주 이 집에 드나드는 듯했다.
“왜 그래요, 형? 오 형이 이상한 소리라도 해요?”
“아냐, 아냐. 아무것도 아냐.”
“막내 도련님, 큰 도련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아무것도 아니래. 유부, 근데 이거 얼마나 더 까야 해? 나 배고파. 얼른 감자떡 만들어 줘.”
“아이구, 막내 도련님은 아직도 아기시라니까.”
진해는 부엌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저도 모르게 헤 입을 벌렸다. 자기도 제법 사기꾼 기질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연기를 하는 오호를 보니 명함도 못 내밀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호는 이 집에서 늙은 유부에게 막내 도련님이라 불리고 있었다. 황아무도 유부의 앞에서는 오호를 정말 친동생처럼 대했다. 옛날에 역병으로 아버지들과 함께 죽었다는 그 애교쟁이 막냇동생처럼.
“흠, 흠. 오 형.”
“응.”
“오 형의 말대로 일반적인 법도로만 따지면 확실히 저희 해원공 마마께서 차기 황위를 이어받으시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일이 그렇게 쉽지 않아요. 그, 아시다시피 황상께서는 조금 특수하게 황위에 오르셨잖습니까. 원래라면 돌아가신 경순 황태공께서, 그렇지 않다면 마찬가지로 돌아가신 지순 황태공께서 이어받으시는 게 월국의 정통 법도지요.”
“그런데 지금은 아니잖아.”
“그게 문제입니다. 지금은 전시가 아니거든요. 그러면서 월국의 법도는 예전 그대로.”
“아.”
“황후 소생의 적장자이긴 하시지만 월국은 본디 음인 계승의 나라지요. 돌아가신 지순 황태공께서 소생이 없으셨다면 아무 말 없었겠지만…… 지순 황태공께서도 화석정군과의 사이에서 독자를 낳고 돌아가셨어요. 그것이 바로 해원공 마마님과 같은 해에 태어나신 성월공 안월산 전하입니다.”
“허어.”
“해원공 마마님께서 아직 태자가 되지 못하신 것도 성월공 마마의 존재 때문이지요.”
“허어!”
황제의 자식이 아닌 황태공의 자식이라 황위 계승은 해산이 유리하다고 생각했던 진해는 뒤통수를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창명후나 다른 놈들이 아무리 악을 써도 법도는 해산의 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법도에도 성월공에게 유리한 근거가 있었다니!
“게다가…….”
황아무는 진해의 얼빠진 얼굴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죽였다. 감자를 다 깠는지 부엌에서 오호가 신나는 소리로 유부를 재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이가 많아 정신이 온전치 않다는 유부는 오호에게 막내 도련님이라는 소리를 연발하며 부지런히 움직이는 듯했다. 이 방에서 나누는 심각한 대화와는 동떨어진 평화로운 소리였다.
“게다가…… 황상께서 아무리 공명정대하신들 원수의 나라 궁주 사이에서 본 자식보다는…….”
“……자신에게 황위를 양보한 동생의 자식에게 마음이 더 가겠지.”
진해의 말에 황아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의 심각성을 알게 된 진해의 표정이 그제야 조금씩 진중해졌다. 동십사가 이제야 왜 몸 상태가 좋지 않아도 자신을 불러들여 경고해 줬는지 알 것 같았다. 지금이야 몇몇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도성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질 터였다.
월국의 진정한 적통인 성월공 안월산이 북벌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도성으로 돌아오고 있다고.
* * *
아니나 다를까, 다음 날 조례에 창명후가 오 년은 젊어진 듯한 모습으로 등청했다. 평소에는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진해에게도 너그럽게 미소 짓는 모습이 참으로 얄밉기 짝이 없었다.
‘참자, 참자. 저 늙은이가 나보다 먼저 죽을 거야! 오래 살 내가 참아야지!’
진해는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슬그머니 해산의 쪽을 훔쳐보았다. 얼굴이 확 편 창명후와 대조적으로 해산은 평소와 다름없어 진해를 꽤 놀라게 했다. 진해 자신이었더라면 안절부절못하며 안색이 새파래졌을 것이다. 아니면 자신의 사람들을 있는 대로 불러 모아 성월공에게 대비할 수를 모색하거나.
그러나 해산은 어느 것도 하지 않았다. 해산은 그저 있는 그대로, 평소에 조례하는 해산의 모습 그대로 무표정하고 담담한 모습으로 옥좌가 놓인 단의 구석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진해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가슴 한구석이 따끔하게 아려 오는 것을 느꼈다. 해산의 너른 등에서 해산의 감정 한 자락을 읽어 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해가 읽어 낸 감정 한 자락은 진해의 어깨를 축 늘어지게 했다. 진해는 미려와 같은 나이인 해산 도련님에게 벌써부터 저런 것이 익숙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 서글프기 그지없었다. 체념과 포기는 이제 막 관례를 치른 젊은이와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었다.
“해원공 마마!”
조례가 끝나자 예부상서가 사람들을 모아 심각한 표정으로 해산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해산은 그들의 말에 응하고 있었으나 눈동자는 현재가 아닌 과거 속을 떠돌고 있었다. 명색이 정인인데 그 모습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진해는 옷매무새를 좀 흐트러뜨리더니 다급한 기색을 띠며 후다닥 해산에게로 달려갔다.
“오 어사? 무슨 일인가, 자네가 그리 급히 달려오다니.”
진해와 눈을 마주친 해산의 눈동자에 살짝 생기가 돌아왔다.
“그것이, 잠깐 귀 좀―”
“응?”
고개를 숙인 해산의 귀에 진해는 작게 뭐라고 속삭였다. 묘하게 변하는 해산의 표정을 바라보며 예부상서 동가대 및 여러 관료들은 진해가 뭔가 새로운 정보를 물어 온 것이라 생각했다.
“뭐?”
“여기선 자세한 말씀이 불가합니다. 잠시 이쪽으로.”
“그건……. 어쩔 수 없지. 동 상서, 자세한 이야기는 황자부에서 하도록 하지. 먼저 가 있게.”
진해가 다급히 옷깃을 잡아끌자 해산은 조금 망설이다 결국 동가대와 신료들을 먼저 보내 버렸다. 그리고는 진해가 끄는 데로 이리 꺾고, 저리 꺾어 해산이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외진 곳으로 향했다. 말단 궁인들이나 알 정도로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해야, 대체 무슨 일이냐? 아까 그 말은 또 뭐고?”
그리고 멈춰 선 곳에서 해산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진해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진해가 귓속에 속삭인 말은 간장공장공장장은…… 으로 시작되는 황당한 말장난이었기 때문이다.
“암호인 게냐? 암호를 써야 할 정도로 중요한 이야기인 게야?”
“중요하긴 하죠.”
“혹여 성월공이라거나.”
“성월공은 티끌만큼 관련 있긴 해요. 마마님의 얼굴을 흐리게 만들었으니.”
“뭐?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여전히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는 해산을 앞에 두고 진해는 어느 때보다 밝게 씩 웃어 보였다. 그리고 허세를 부리는 홍련이처럼 양팔을 쫙 펼쳐 보였다. 홍련이는 어조원으로 돌아간 뒤 회복하는 유일청의 옆에서 유일청이 좋아하는 호두를 부숴 주고 있다고 했다.
“마마! 안기세요!”
“……어?”
“일단 안기세요!”
진해는 안기라고 말해 놓고 제가 달려들어 해산을 꽉 끌어안았다. 해산은 진지하게 자신의 몸 상태가 제정신인지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안월산이 돌아온다는 소식 때문에 잠을 설치긴 했지만 해산의 몸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아주 건강했다. 그러므로 자신의 머리 또한 제대로 돌아가고 있을 터였다. 해산은 자신이 돌아 버린 것이 아니라 진해가 뜬금없은 행동을 하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해야,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냐? 너도 이미 들어 알겠지만…… 성월공이 돌아오고 있다. 성월공이 돌아오면 그가 자리를 비웠던 동안 대신했던 책무들을 인계해 주어야 해. 몇 안 남은 황친이니 그간의 노고 역시 치하해 줘야 하고.”
“마마, 왜 저한테 청혼 안 하세요?”
“처, 청혼?”
“제가 육품이 된 지 제법 오래된 거 같은데 왜 저를 원으로 들이지 않으시냐구요.”
“엇, 그건―”
성월공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은 해산은 진해를 떼 내려 했지만 난데없는 청혼 이야기에 또다시 머리가 멍해지고 말았다. 확실히 자신의 입으로 진해에게 네가 육품이 되면 청혼하겠다고 했었던 것도 같다.
“성월공은 아직 후사가 없으시죠? 제가 듣기로는 정실도, 측실도 없으시다고 들었어요.”
“그, 렇지?”
“귀여운 아이는 나라를 흔드는 법입니다.”
“미인이 아니라?”
“할아버지에겐 미인보단 손자가 더 효과가 좋죠.”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는 해산에게서 떨어져 나와 진해는 손으로 해산의 팔꿈치를 그러쥐고 해산을 딱 마주 보았다. 생기로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기운 없는 해산의 것을 가득 담았다.
“혼인합시다, 해산 도련님! 혼인해서 귀엽고 영특한 손자를 낳아 황상의 마음을 사로잡아요!”
해산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 * *
진해는 얼이 빠진 진해를 데리고 당당히 해원공부로 들어섰다. 마치 보라는 듯이 해산의 손과 제 손을 깍지 끼고 씩씩하게 대문에 발을 들였다. 해원공부 문지기들의 눈이 빠질 것처럼 커다래졌다.
“저희 혼인합니다!”
“불가하오!”
당연히 예부상서 동가대는 반대했다.
“여염집도 아니고 황실의 적장자께서 중매도 거치지 않으시고 야합하듯 혼인하시다니, 고금 동래에 찾아볼 수 없는 치태요!”
둘이 혼인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혼인하기 전의 절차를 문제 삼았다.
“뭐 어때요, 정실도 아닌데.”
“측실도 측실의 예가 있는 법!”
“……고는 아직 혼인할 생각이 없다만.”
“과연 오 어사! 확실히 좋은 방법입니다!”
“아니, 고는…….”
반쯤 넋이 나간 해산을 앉혀 놓고 동가대와 해산을 따르는 해원공파의 신료들, 진해가 쑥덕쑥덕 논의하기 시작했다. 해산은 여전히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멍하니 그들을 응시할 뿐이었다.
“오 어사, 근데 괜찮겠소? 이 일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오 어사의 혼사는 이제 막히는 것이나 마찬가지요.”
“지금 그게 문제예요?”
“과연, 오 어사는 이 시대에 보기 드문 참된 충신이요. 내 어전에서 오 어사가 창명후에게 호통칠 때부터 그대가 충신임을 알아보았소. 본인의 혼삿길까지 막으면서 해원공 마마님을 지켜 드리려 하다니!”
“확실히 해원공 마마께서 혼례를 치르겠다 공표하면 성월공이 오기 전에도, 그리고 온 후에도 잠시나마 해원공 마마께서 주목을 받을 수 있소. 측실을 들인다 하면 중립을 지키고 있는 자들 사이에서도 분명 흔들리는 자가 있을 터.”
“음. 비어 있는 정실의 자리가 탐나겠지.”
“잠깐…….”
해산이 뒤늦게 가냘픈 목소리로 그들 사이에 끼어들려 했지만 논의는 벌써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해산은 하는 수 없이 뒤로 빠져 진해와 동가대 등이 자신의 혼례를 결정짓는 것을 바라보았다. 진해가 제 옆에 선다는 장면을 상상 안 해 본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빠르게, 그리고 이렇게 갑작스럽게, 또 이런 식으로 이용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상상해 보지 않았다. 해산은 새삼 자신이 어리숙하다는 걸 자각했다.
“해산 도련님, 화나셨어요?”
“…….”
동가대와 신료들이 돌아가자 진해는 제집으로 돌아갔다가 비밀 통로를 통해 해원공부로 돌아왔다. 해원공부의 호위들은 소양자 살인 사건 후로 진해에게 호감을 갖고 있어 진해가 드나드는 것을 어느 정도 눈감아 주었다. 게다가 해원공과 혼인하기로 결정되었으니 말해 무엇할까.
“죄송해요, 저도 기다리려고 했는데 더 이상 못 기다리겠더라구요.”
“기다렸다고?”
“청혼하신다고 했잖아요.”
“할 생각이었다! 곧 할 생각이었어!”
“네, 알아요. 하지만 제가 더 이상 못 참아서 그랬어요.”
“뭘 참는다는 거냐.”
“당신의 곁에서 정당히 당신을 도울 수 있는 자격.”
“…….”
“영찰어사는 공평해야 하지만 원윤은 전적으로 당신만을 위해 움직일 수 있겠죠. 여해루가 모은 정보도 절차 없이 쓸 수 있구요.”
조금씩 화를 내는 해산을 바라보며 진해는 조곤조곤 말을 이어 갔다. 진해의 말이 이어질수록 해산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해 갔다. 처음에는 분노가, 다음에는 놀라움이, 그다음으로는 감동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해산 도련님. 일단 혼례를 치르겠다고 황상께 말씀드리세요. 황상이 당장 허하지 않으시더라도 조례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신들의 시선을 끌 거예요.”
그랬다. 진해는 해산에 대한 사랑이 넘쳐 해산에게 청혼한 것이 아니라 성월공에게 밀려날 해산의 자리를 지켜 주기 위해 청혼한 것이었다. 성월공이 아무리 굉장한 공을 세웠다 하더라도, 황상이 아무리 해원공을 등한시하더라도 적장자의 첫 혼례는 간과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해원공은 이미 진해에게 원의 봉호를 약조했으니 정실의 혼례와 거의 대등하게 치러질 터였다.
신료들이라면 몰라도 백성들은 황실의 대소사에 흥미가 많았다. 인간은 본디 호기심이 강한 생물이었다. 황실은 원래 손이 적고, 황친들은 모조리 쓸려 나갔으니 황실에서 혼례를 치를 이라곤 해원공과 성월공밖에 남지 않았다. 정세에 민감한 이들이라면 북벌을 성공하고 돌아온 성월공을 주목하겠지만 그런 것과 관계가 먼 백성들은 분명히 해원공의 혼례에 주목할 터였다.
하물며 그것이 빈민촌인 잠춘동에서 자라 역적을 잡고, 황제의 파격적인 인사로 영찰어사에 오른 진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적절한 때에 혼례를 발표하기만 하면 성월공은 개선 행군도 제대로 치르지 못한 채 도성에 들어오게 될 터였다. 그리고 개선 행군 대신 해원공의 혼례 행렬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오늘은 돌아가거라.”
그러나 해산은 도저히 기쁜 표정을 지을 수 없었다. 진해가 제 측실이 되는 건 해산 역시 원하는 일인데도 해산은 자신이 작아지는 듯한 기분에 진해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만약 자신이 황자가 아니었더라면 어땠을까. 진해를 쫓아다니는 삼랑이나, 정미려였다면 어땠을까. 과연 혼인에 이런 비참한 무력감을 느낄 수 있었을까.
진해는 해산에게 말을 건네는 대신 해산에게 다가가 자신을 등진 해산을 꼭 끌어안았다. 진해 역시 이런 식으로 해산에게 청혼하고 싶지 않았지만 성월공이 이대로 들어오면 해산의 풀 죽은 표정이 많아지고, 그 표정을 하는 날이 많아질 것을 예감했다.
“사랑해요, 해산 도련님.”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해와 해산 사이를 이어 주는 온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두 사람의 신뢰는 변하지 않았다. 해산은 저를 끌어안은 투박한 손에 제 손을 겹쳐 쥐었다.
* * *
다음 날 아침, 밥상머리에서 진해는 자신의 약혼 사실을 공표했다. 밥상에는 진해와 미려, 삼랑이가 앉아 있었다.
“이 씨발 새끼가 장난하나.”
예상했던 대로 삼랑의 입에서는 육두문자가 튀어나왔다. 너무나 상상했던 모습 그대로라서 진해는 그나마 침착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야, 오진해 이 개새끼야. 당장 밖으로 튀어나와 이 창놈 새끼가. 씨발 당장 관아로 가자고!”
“과, 관아?”
“그래 이 개자식아! 어딜 감히 양다리를 걸치고 지랄이야, 지랄이! 넌 나랑 약혼했잖아 씨발놈아! 봐! 이 혼인 신고서를!”
아니나 다를까 삼랑이는 항상 품속에 넣고 다니던 혼인 신고서를 꺼내 진해 앞에 들이밀었다. 하지만 혼인 신고서의 양인란에 적힌 것은 오진해라는 이름 중 단 한 글자였다.
“삼랑아. 혼인 신고서는 완성이 되어야 효력이 있는 문서야. 내가 근래 형부 일을 하면서 이런저런 사건을 봐서 알아. 미완성인 문서는 효력이 하나도! 하나도! 없어!”
“씨발 개소리 마!!!”
물론 삼랑도 바보가 아니었기에 미완성인 혼인 신고서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눈앞에서 오진해를 빼앗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것도 제일 마지막에 굴러온 돌한테.
[쾅!]
그러던 그때, 삼랑이가 진해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던 그때, 미려가 밥상을 치며 일어났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표정을 살필 수 없었다.
“……죽을 거야.”
그리고 자그맣게 중얼거리더니 언제 준비했는지 모를 흰 무명천을 꺼내었다. 춤을 추듯 우아하고 신속한 동작으로 무명천의 한쪽 끝을 대들보 위로 집어 던지더니 순식간에 고리 하나를 완성하였다. 자살 희망자들이 본다면 감탄할 정도로 재빠른 올가미 만들기였다.
“형아, 그동안 고마웠어. 사랑했어. 아니, 지금도 사랑해. 형을 다른 사람한테 영영 보내느니 형아를 사랑한 채로 죽을 거야. 기억해 줘. 형아를 사랑하는 이 내가 있었다는 것을.”
“미, 미려야―――!!!! 안 돼! 안 돼!! 제발 그러지 마!! 형이 잘못했어!! 너무 갑작스럽지? 그래도 그럼 안 돼!!”
“형아, 이러지 마. 형아가 자꾸 이러면 내 마음이, 흑, 더, 아파진단 말이야.”
“강아지야, 제발 내려와……! 형은 너 그렇게 안 키웠잖아, 누가 밥상을 밟고 올라가라고 했어! 제발, 제발 내려와서 이야기하자, 응? 제발!”
“꼴값 떨고 있네.”
미려는 삼랑이와 달리 욕설 한 마디 뱉지 않고 밥상 위에 올라가 하얀 올가미에 목을 매려고 했다. 당연히 미려를 애지중지하는 진해가 두고 볼 리 없었고 미려의 다리를 잡고 늘어지는 진해와 눈물을 흘리며 목을 매려는 미려, 그 모습을 아니꼽게 바라보며 욕설을 염불처럼 외는 삼랑으로 인해 오 어사 댁의 아침 풍경은 완전히 엉망이 되고 말았다.
일각이 넘는 시간 동안 울고불고 애원하고 빌고 달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미려는 겨우 밥상에서 발을 뗐다. 진해는 오랜만에 심장이 짜부라지는 듯했다. 커다란 나비의 날개처럼 길고 풍부한 속눈썹이 젖은 채 깜박이는 모습을 바라보자 진해는 산 채로 심장이 저며지는 것 같았다. 미려가 싫어할 거라곤 예상했지만 이렇게까지 싫어할 줄은 예상치 못했었다. 삼랑이 역시 미려를 말리던 제 뒤통수를 때려 기절시키려 할 줄은.
“형아……. 흐흑, 형아…….”
“오진해 창놈 새끼. 내가 이대로 끝날 줄 알아? 두고 봐. 두고 보라고. 씨발, 두고 봐.”
“…….”
진해는 흐느낌과 욕설로 어두운 분위기를 조성하는 둘을 피해 소리 없이 슬그머니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아직도 식은땀으로 등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끄응, 이를 어쩐다.”
사실 혼사를 추진하려면 이대로 추진할 수도 있었다.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고 발표할 시기를 고르는 중이었으니까. 다만 진해에게 저 두 사람이 소중해서, 해산과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느낌으로 소중해서, 진해는 어쩐지 저 두 사람이 동의하지 않으면 제대로 혼인하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진해는 삼랑이가 마구 뿜어 대는 담배 연기를 훔쳐보다 한숨을 쉬며 집 밖으로 나와 버렸다.
어정쩡한 기분으로 등청해서 제 아래의 주사며, 위사를 부려 가며 주먹구구식으로 일을 해치운 진해는 완전히 제 편이 된 형부시랑에게 업무 보고를 한 뒤 퇴청하였다. 형부시랑은 진해의 아양과 적절한 줄타기, 약간의 뇌물로 인해 진해에게 언제나 꿀 같은 업무만을 밀어 주었다. 거기다가 소식 역시 빠른 모양이었다. 진해에게 은근한 눈빛을 보내며 나는 언제나 자네를 높이 샀다는 말을 하는 걸 보니.
다른 날 같으면 저도 시랑 대인이 최고입니다~ 라며 아양을 떨 진해였지만 오늘은 그 눈빛이 진해를 얽매는 족쇄 같았다. 해산과 혼인을 하려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지만 괴로워하던 해산의 뒷모습과 흐느끼는 미려, 뻑뻑 담배를 피우던 삼랑이의 얼굴이 떠올라 마음이 마구 심란해졌다.
“됐다. 먼저들 돌아가. 난 잠깐 둘러볼 곳이 있으니.”
그리하여 진해는 황궁을 나서자마자 관복을 벗어 제 수레 안으로 던져 넣었다. 관모 역시 던져 넣고 수레를 먼저 돌려보내 버렸다. 관복도, 관모도 없는 진해는 평범한 월국의 백성이었다. 주머니와 아랫도리가 두둑하긴 했지만 이렇게 홀가분해진 건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심란해진 진해가 갈 곳은 세상천지에 단 한 군데밖에 없었다. 작고 초라했지만 잠춘동 만재가 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게 잠들 수 있는 곳, 언제나 진해의 마음 한 조각이 머물고 있는 곳. 진해는 잠춘동 집 마당에 서서 손질하지 않아 잡초가 돋아난 지붕을 바라보았다. 이 집에 살 적에 진해는 자신과 함께 이 지붕 아래서 알콩달콩 살림을 꾸릴 이를 그렇게 원하고 또 원했었다.
“아이고, 먼지 앉은 것 좀 봐.”
그간 오지 않아 먼지가 내려앉은 창틀을 훑으며 진해는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진해가 소중히 여기는 보물 상자에 오물이 묻은 격이었다. 진해는 얼른 자물쇠를 따고 들어가 정갈히 개어 있던 걸레를 집어 들었다. 빗물을 모은 항아리에 집어넣고 박박 빤 뒤 왼쪽 창틀부터 차례대로 닦아 내기 시작했다.
왼쪽의 창문 두 개, 오른쪽의 창문 두 개, 창문을 닦고 나니 바닥이 더러워 보였다. 바닥을 닦고 나니 구석에 거미줄이 쳐진 게 보였다. 진해는 걸레를 하나 더 꺼내서 바닥도 닦고, 거미줄도 치우고, 탁자도 닦고 침상도, 화덕도 남김없이 닦아 내기 시작했다. 모든 고민을 치워 버린 채 먼지를 치우는 데만 주력하였다.
“하아!”
무려 걸레 네 개가 새까매질 정도로 규모가 큰 청소였다. 진해가 이 집에 살 적에 이렇게 크게 청소를 한 적이 없었다. 왜냐면 진해가 평소에도 매일 닦는 집이었기 때문에.
몸을 움직인 덕인지 복잡했던 머리가 한결 가뿐해졌다. 진해는 바닥 창고를 열어 당장 요리할 수 있는 보존 식량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열심히 몸을 움직였으니 이젠 빈 속을 채워야 했다. 아주 오랜만에 잠춘동 집 화덕에 불이 지펴졌다.
그렇게 진해가 몇 시진을 이 집에 머물렀을까. 밥을 먹고 이불을 털고 잠깐 눈을 붙이자 어느새 하늘이 까맣게 변해 있었다. 진해는 총총히 빛나는 별을 바라보며 좀 더 자다가 새벽이 되면 집에 돌아갈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문득 머리 한구석에 이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참 나,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혼인 전에 신랑을 소박 놓는 미친놈이 세상에 어디 있어!”
그런 놈 많았지만 진해의 머릿속엔 해산과 파혼한다는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았다. 해산이 무시받지 않길 원해 홧김에 저지른 일이었지만 마음만큼은 진짜였다. 성월공이 뭐 하는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해산 도련님과 자신이 으쌰으쌰 해서 만든 아기씨만큼 사랑스럽지는 않을 터였다.
해산 도련님은 배움에 부지런했고 자신은 잔머리가 잘 돌아갔으니 아기씨 역시 분명히 영특할 것이 분명했다. 일단 재롱부터 가르쳐서 황상을 마음을 사로잡을 생각이었다. 사랑스러운 아기씨의 재롱은 사람을 기절시킬 정도로 강력했다! 진해도 어린 미려의 재롱을 볼 때마다 귀여워서 심장이 다 터질 것 같았으니까.
“어?”
그런데 진해의 담장 너머에서 진해가 맡아 본 적이 있는 향이 솔솔 풍겨 왔다. 만개한 금목서의 향을 옅게 희석한 듯한 양인의 향기였다.
“진해 소협.”
“앗, 협 아저씨! 진짜 밥때 돼서 오셨네? 어서 들어오세요!”
진해의 마당 입구에 서 있는 사람은 고산국 출신의 무인 오천협, 진해에게는 협 아저씨로 불리고 있는 이였다.
“아니, 마음은 고맙지만 됐습니다. 배가 고프지 않아서.”
“드시고 오셨어요? 그럼 차 한잔 드실래요? 저 안 그래도 고산국에 대해 더 물어볼 게 있었어요!”
진해는 오천협을 보자마자 반색하며 오천협을 방으로 이끌었다. 마당에 의자를 꺼내 놓고 앉아 별을 보며 이야기하는 것도 좋았지만 그러기엔 너무 추운 계절이었다. 오천협은 집 문 앞에서 진해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잠깐 망설였다. 이미 몇 번 들어가 본 집이었지만 진해의 초대를 받아 들어가게 될 줄은 몰랐다. 오천협은 강절곤의 뒤처리를 위해 진해를 죽이려고 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올 때 군것질거리나 좀 사 올걸. 드릴 게 정말 차밖에 없네요.”
“아닙니다. 정말 이렇게 맛있는 차는 오랜만입니다. 이런 걸 마시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치 못했습니다.”
“응? 고산국에는 차가 귀해요? 산이 많아서?”
죽은 줄 알았던 자식이 끓여 주는 차를 마시게 될 줄이야. 진해의 차 우리는 솜씨가 훌륭하기도 했지만 오천협은 그것 외에 여러 가지 감상이 어우러져 죽을 때까지 이 차 맛을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차 우리는 솜씨는 이미 제 우부를 상회하고 있었다. 오천협은 그윽한 향을 한껏 들이켰다.
“그래서 제가 주먹을 이렇게 지르면서, 야 이 자식들아 너희들은 상도덕도 없냐! 우리 동네에서 이런 개소리는 안 먹혀, 너네 동네로 꺼져, 라고!”
“진해 소협.”
“앗, 네?”
진해는 오천협에게 차를 우려 주면서 옛날에 자신이 도박판을 뒤엎었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잠춘동에는 도박꾼들이 즐비했고 암암리에 속임수를 쓰는 걸 눈감아 주었지만 단 하나 눈감아 주지 않는 게 있었으니, 그건 바로 눈에 보이는 속임수를 쓰는 것이었다.
도박으로 먹고 사는 도박꾼들은 어설픈 속임수를 엉덩이 닦은 휴지만큼이나 싫어했다. 거기에 허세가 더해지면 오진해가 짜증을 낼 정도로 비루한 것이 되었다. 오진해는 그 당시의 흉내를 내어 탁자를 뒤엎는 시늉을 하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신을 부른 오천협을 바라보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이 혼인 그만두십시오.”
“네? 혼인요? 아니, 잠깐만, 협 아저씨 저 혼인하는 거 어떻게 아세요? 물론 우리 집에서는 울고불고 난리가 났지만―”
“안해산은 안 됩니다. 귀한 이와 연을 잇고 싶으신 거라면 다른 이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오천협의 진지한 말에 진해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이미 반쯤 결정 난 일이긴 했지만 진해와 해산의 측근 외에 아무도 모르는 사안이었다. 그런데 오천협은 진해의 약혼도 알고, 상대도 알았다. 진해는 제 앞에 앉은 이에게 오싹 소름이 일었다. 이자는 대체 누구인가.
“……해산 도련님과는 그런 식으로 교제하는 거 아니에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답해야 할 것이 있었다.
“저는 해산 도련님이 넝마 한 조각만 걸치고 있어도 좋아해요. 음……, 생각해 보니까 제법 귀여운 것 같은데……? 어쨌거나 해산 도련님이 황자마마라서 혼인하려는 거 아니에요. 저는 그냥…… 해산 도련님을 돕고 싶을 뿐이에요.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황실은 위험합니다. 뒷배가 있어도 순식간에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곳입니다. 뱀들이 아가리를 벌리고 당신을 집어삼킬 순간만을 기다리는 무저갱과 같은 곳.”
“하지만 해산 도련님이 자라신 곳이죠.”
“그의 외모가 마음에 듭니까? 그럼 닮은 이를 찾으면 됩니다.”
“닮기만 할 뿐 해산 도련님이 아니잖아요.”
“마음. 지금은 활활 불타오르는 그 마음이 언제까지 갈 것 같습니까. 세월은 쏜살같습니다. 그의 곁에는 수많은 양인이 모여들겠지요. 그때도 당신의 마음이 한결같을까요?”
오천협은 작정하고 온 사람처럼 진해에게 비수 같은 말을 쏟아 내었다. 말을 하는 오천협 자신도 상처를 입는 동귀어진과 같은 말들이었다. 단호하게 부정하던 진해는 오천협의 마지막 말에 잠깐 고개를 숙였다. 오천협은 진해의 정수리를 보면서 슬픔과 안도가 범벅이 된 강렬한 감정에 휩싸였다.
마음, 그놈의 마음.
“……그럼 협 아저씨는 어떤데요?”
“예?”
“협 아저씨는 협 아저씨랑 혼인했던 그 사람, 지금은 싫어해요?”
가까스로 찾아낸 자식이 제 우부를 똑 닮은 눈동자로 오천협에게 묻고 있었다.
“협 아저씨는 그 사람이 협 아저씨가 싫어졌다고 하면 그냥 헤어질 거예요?”
진해의 우부 , 강백서도 오천협에게 도전하기 전엔 항상 저런 눈을 했었다.
“지금은 사랑하지 않아요?”
깜박이는 눈꺼풀 사이로 백서가 웃는 모습이 다가왔다 멀어졌다. 벌써 십수 년간이나 보지 못한 모습이고, 각인이 흐려질 정도로 떨어져 있는데도 이렇게나 선명하고 깨끗하게 기억이 났다.
“……사랑합니다.”
긍지 높던 무인인 오천협을 타락하게 만든 사람, 시신이라도 좋으니, 다른 이와 있는 모습이라도 좋으니, 제발 살아 있기만을 바라는 그 감정.
“나도 사랑해요. 해산 도련님을 사랑해요. 해산 도련님도 절 사랑해요.”
“…….”
“어떻게 아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 측실이 총애를 잃으면 뒷방 늙은이가 된다는 거 저도 잘 알아요. 하지만 전 오진해예요!”
말을 잃은 오천협을 향해 진해가 씩 웃어 보였다. 장난기 어린 미소는 청년보다는 소년에 어울리는 것이었다. 오천협은 진해를 설득시키기 위해 준비했던 모든 말을 잊고 그 미소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찾아 헤매는 동안 아이는 속세의 무수한 가시밭 속에서 이렇게나 크게 자라 있었다. 이렇게나 굳건히 싹을 틔웠다.
“해산 도련님이 절 버리면 그땐 저도 측실 하나 들이죠, 뭐. 아니지, 아니지. 하나 가지고는 안 돼. 해산 도련님이 팔짝팔짝 뛰려면 열댓 명은 들여야 하나?”
진해는 전혀 그럴 마음이 없어 보이는 목소리로 킥킥댔다. 오천협은 깃털처럼 가벼운 웃음 속에서 철옹성과 같이 단단한 마음을 읽어 내었다. 잠시 뒤 오천협도 진해를 따라 웃기 시작했다. 어쩐지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자신 없이도 이렇게나 훌륭하게 자란 아이에게 감히 무슨 말을 지껄였던 건지. 오천협과 진해는 한참 웃다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한담을 나누었다. 오천협은 주먹을 내지르는 진해에게 다가가 보다 효율적이고 파괴적인 주먹질에 대해 가르쳐 주었다.
* * *
창명후 강절곤은 차오르는 기쁨을 억누르며 서신을 읽고 또 읽었다. 서신은 무려 성월공의 친필로 쓰인 것이었다. 무엄한 말이었지만 창명후는 손자인 해아를 잃고부터 성월공을 마치 자신의 손자처럼 대하였다. 나서부터 우부를 잃고, 얼마 뒤 좌부마저 출가해 버린 성월공 안월산과 자식과 손자를 잃어버린 창명후는 누가 짜기라도 한 것처럼 잘 어울렸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성월공 마마께서 황위에 오르시면 모두 다 끝이 난다. 서야, 해아야. 치균, 광아. 다들 조금만 기다리게나. 내 그 사특한 것들을 요절내는 날 기꺼이 그대들을 따라갈 터이니.”
서신에는 곧 국경을 넘어 도성으로 향하는 가장 큰 여로에 진입한다고 되어 있었다. 길이 잘 닦인 곳이니 그곳에 진입하기만 하면 도성에 도착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황태공 지순을 닮은 성월공 안월산은 황제에게 있어 아픈 손가락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성월공에게 충성했던 가신들도 마찬가지였고, 반해국파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중립을 지키고 있는 이들도 북벌을 끝마치고 성공적으로 돌아온 안월산을 보면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북방 이민족들을 훌륭히 몰아내고 다섯 개의 주를 월국의 영토로 만든 안월산은 명백한 황제의 재목이었다. 사감을 제하더라도, 성월공 안월산은 냉철하고 이지적인 이였다. 국익을 위해 원수의 나라 궁주와 혼인한 현 황제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누구냐!”
그러던 그때, 거센 바람이 불어 방 안의 촛불이 꺼졌다. 강절곤은 이 바람이 자연스레 분 것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 일으켜진 것임을 감지했다. 강절곤은 성월공의 서신을 숨김과 동시에 패용하던 단도를 움켜쥐었다.
“아버님.”
“……자네였군.”
창명후 강절곤은 침입자가 오천협임을 확인하자마자 검집에서 손을 떼었다. 오천협을 신임하기도 했지만 오천협이 목숨을 내놓으라면 내놓을 용의도 있는 게 강절곤이란 사람이었다. 강절곤의 섣부른 판단으로 인해 오천협은 졸지에 남편과 자식을 몽땅 잃어버렸다. 가족 관계가 희박한 고산국 출신인 그에게 강백서와 강해아는 유일한 가족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강절곤은 그에게 큰 죄를 지었다고 생각했다.
“오랜만이군. 궁 생활이 그리 녹록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잘 지냈는가?”
강절곤이 자리를 권했지만 오천협은 앉지 않았다. 백서가 사라지기 전 이 집의 데릴사위로 들어왔던 오천협은 강절곤이 자리를 권하면 잔뜩 긴장한 채로 쭈뼛쭈뼛 맞은편에 앉곤 했었다. 월국을 멸망시킬 뻔한 맹장 옥길합과 사투를 벌여 월국을 구한 구국의 영웅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순진한 태도였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달라졌다. 강절곤이 무고한 피를 손에 묻혀 가며 복수귀가 된 것처럼 오천협의 눈에서 의과 협이 사라졌다. 수풀에 똬리를 튼 뱀처럼 변용술로 모습을 가린 채 가슴속에 꺼멓고 꺼먼 독을 품고 있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별일이로군. 자네가 내게 할 말이 있다니.”
단 하나 남은 가족이었기에 강절곤은 오천협에게 물렀다. 오천협이 궁에서 잘 적응할 수 있었던 것도 강절곤이 두세 다리 건너 그에게 도움을 줬기 때문이었다.
“성월공의 개선 행진을 멈춰 주십시오.”
“뭐라고?”
오랜만에 만난 사위는 강절곤이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뱉었다. 성월공이라니. 창명후라면 몰라도 오천협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성월공이 왜 그의 입에서 나온단 말인가.
“그리는 아니 되네.”
하지만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사위가 어째서 성월공의 개선을 막으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창명후의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성월공에게 있어, 창명후에게 있어, 이 개선은 정말로 중요한 뜻을 지니고 있었다.
이번 북벌은 성월공이 성년이 되어 처음으로 세운 공이었다. 월국에서 아주 오랜만에 세운 군공이란 말이었다. 월국의 백성들은 봉국인 해국에게 일방적으로 짓밟힌 것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성년이 된 성월공이, 본래라면 황제가 되어야 마땅한 황태공 지순의 적자가 성년이 되어 군공을 세운 것이 알려진다면 월국의 백성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해원공과 성월공이 성년이 되기 전까지는 두 사람이 세울 수 있는 공이랄 것이 없었다. 두 사람을 지지하는 신료들이 호시탐탐 서로의 빈틈을 노리며 물 밑에서 발길질을 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젠 두 사람이 성년이 되었다. 황실의 핏줄은 귀했고, 황제 역시 다른 후궁을 들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면 성년이 된 황자와 겨룰 생각 자체를 하지 않겠지만.
이제 월국의 진정한 후사를 정할 때가 왔다. 그리고 그 후사 자리는 성월공 안월산이 꿰차게 될 것이었다. 창명후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창명후 자신이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 해국의 사특한 요괴에게 황실을 넘기지 않을 터였다. 그렇기 때문에 개선해야 했다. 어떤 때보다 위풍당당하고 화려하게 성월공의 군대가 도성의 성문으로 들어와야 했다.
“우리 해아가 위험해져도 말입니까?”
“……뭐?”
그리고 마침내, 오천협이 강절곤에게 툭 내뱉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담담한 어조였지만 말끄트머리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강절곤은 순간 자신이 무엇을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자네, 지금 뭐라고 했는가?”
“성월공이 개선하면 우리 해아가 위험해진다고 했습니다.”
“…….”
창명후는 이젠 아예 입을 반쯤 벌리고 있었다. 창명후 자신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 저도 모르게 벌어져 버린 것이었다. 해아라니, 우리 해아라니. 지금 사위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 강절곤이 알고 있는 이름과 정녕 같은 이름인 것일까.
“미쳤는가? 드디어 미쳐 버린 게야? 이보게, 사위! 정신 차리게! 자네가 정신을 놓으면 나는 이제 누구를 의지한단 말인가!”
강절곤은 오천협이 가족들을 잃은 슬픔과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마침내 미쳐 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는 동시에 고강한 무인이며 함께 전장을 누빈 그가 결코 정신을 놓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누구보다도 강력한 의지의 소유자인 오천협이 목표를 두고 정신을 놓을 리가 없었다.
“해, 아라고……?”
오천협이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동안 수천 가지의 바람이 강절곤의 머릿속을 뒤죽박죽으로 섞어 놓았다.
‘하뿌!’
문가에서 불어온 바람결이 늙은 뺨을 어루만졌다. 바람은 어린 해아의 형상이 되어 강절곤에게 달려왔다. 갓 태어난 젖먹이 시절부터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던 모습, 한창 애교를 부리던 모습, 관병에게 거칠게 팔을 붙잡혀 겁에 질렸던 모습까지 해아의 온갖 모습이 한 덩어리가 되어 강절곤의 다리에 달라붙었다.
“어디, 있나. 아니, 살아, 있었던 건가? 우리, 해아가, 우리 해아가 살아 있었어?”
“제 증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증표라면,”
“백서에게 예물로 주었던 고산홍패를 목에 걸고 있었습니다. 홍패연리익이 진품임을 입증하기도 했습니다.”
“어디에, 있나! 우리 해아 어디에 있어! 당장 데려오게! 당장 데려와! 우리 해아, 해아!! 어디 있느냐!!! 이 할애비가 여기 있다!! 천협, 당장 데려오게!! 해아를 당장 데려와!!!!”
강절곤은 시체라도 발견하길 바랐던 손자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자 이성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오천협에게 다가가 멱살을 그러쥘 듯했다. 그러나 오천협은 강절곤의 피맺힌 부르짖음에도 냉정할 정도로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차가움이 강절곤의 이성을 조금씩 찾아 주었다.
“아직은 안 됩니다.”
“어째선가! 혹시, 아직도 나를 원망하고 있는 겐가? 내 오판으로 서아와 해아를 잃게 되어서, 아직도 나를 원망하는 게야?”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런데, 왜 우리 해아를 데려오지 않아!!”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위험하다니?”
“아버님. 만약 제가 지금 해아를 데려오면, 진정으로 해아를 지켜 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야, 당연히……!”
오천협을 거의 윽박지르던 강절곤이 말을 멈췄다. 그는 새삼 자신이 벌여 놓은 일들, 자신이 이끄는 일들, 자신이 처한 상황을 되돌아보았다. 반해국파의 수장, 황위 다툼의 한복판. 그리고 창명후의 손자이자 구국의 영웅인 오천협의 유일한 자식인 강해아. 늙어 빠진 창명후와도 혼교하고자 하는 이가 넘치는데 해아가 돌아온다면 사람들이 해아를 그냥 두고 볼 리 없었다. 이득을 바라는 날파리 같은 것들이 해아에게 덕지덕지 달라붙을 터였다.
“전 황제를 믿지 않습니다.”
“천협!”
“아무리 죄를 지었다 한들 오랜 지인이자 공신의 자식이고, 제 자식을 회임했던 음인인 원귀비를 그리 비참하게 죽게 만든 자입니다. 거기다가 아직까지도 그 죄를 풀어 주지 않고 있지요.”
“…….”
“게다가 백서는 죽은 원귀비의 가장 절친한 친우였지요. 과연 백서가 어린 해아를 데리고 무리하게 몸을 숨긴 것이 황후만의 탓입니까?”
“……그만하게.”
오천협의 말에 열기가 실리기 시작하자 강절곤은 두 눈을 질끈 눌러 감으며 그 말을 외면했다. 강절곤이라고 오천협이 말하는 사실을 왜 모를까. 강절곤 역시 치균이 자결했을 때에는 황제에게 서러운 감정이 없지 않았다. 원귀비 연광이 갇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자식 같은 아이가 가여워 통곡할 정도였다.
“해아는 상황이 안정되면 반드시 데려올 것입니다. 아버님, 그러니 제발 성월공의 개선을 멈춰 주십시오. 다 우리 해아를 위해서입니다. 아버님께서 해아와 백서의 복수가 아닌 영화를 위해서 그러시는 것이라면 더 말씀드리지 않고 물러나겠습니다.”
다시 자리로 돌아간 강절곤은 오천협의 말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안색이 어두워졌다. 오천협은 잠깐 강절곤을 바라보는가 싶더니 인사도 아니 하고 밖으로 향했다.
“……우리 백서는, 백서는 보았는가.”
그리고 강절곤은 뒤돌아선 오천협의 등에 자신의 의사를 결정지을 마지막 질문을 날렸다. 오천협은 여전히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는 헤어진 우부가 증표를 제게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오천협은 흔적을 남기지 않고 바람처럼 빠르게 사라졌다. 고산패왕을 제하고 고산국에서 제일 가는 무인의 실력이었다. 강절곤은 그림자도 남지 않은 그곳을 바라보며 메마른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럴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미 포기하고 있었지만, 하나가 살아 돌아오니 잠시나마 가슴에서 희망이 샘솟았었다. 그 어린것이 홀로 살아남을 수 없으니 분명 제 아비와 함께 있으리라고 생각했었다. 담배 한 대 태울 수도 없는 이 짧은 시간 동안.
강절곤이 뜬눈으로 밤을 새우는 동안 바깥세상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잘만 흘러갔다. 달과 별이 기울고 지평선 너머가 희끄무레하게 밝아 왔다. 도성에서 가장 부지런한 닭이 울고 아침 짓는 연기가 안개처럼 물들었다 . 그리고 그 순간, 강가 저택의 문이 부서지라 세게 두드려지기 시작했다.
“장군! 큰일 났습니다! 해원공이 혼례를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늘이 강절곤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심인지, 그도 아니면 가엽기 그지없는 해아를 위해서인지 진퇴양난의 위기에 빠진 강절곤에게 구명의 손길이 내려왔다. 이른 새벽부터 강절곤의 집에 찾아온 것은 해원공부의 위사를 두세 다리 건너 알고 있는 젊은 무관이었다.
“해국 것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놈들이 제법 머리를 썼지 않느냐.”
강절곤은 해아를 위해서, 오로지 손자의 무사를 위해서 창백한 낯을 바로 하며 비뚜름하게 미소 지었다. 속은 손자를 위하는 할아버지의 그것이었으나 겉가죽만큼은 반해국파의 수장이었다.
“아니꼽지만 그놈들의 손에 놀아 줄 수 없으니 개선을 미루어야겠다. 당장 성월공께 파발을 띄워라! 될 수 있는 한 가장 소박한 차림으로 도성으로 들어오시라 이르도록. 나중에 그놈들이 한풀 식거든 만백성이 성월공의 겸손함을 미덕으로 알 수 있도록!”
강절곤이 일갈하자 젊은 무관은 읍을 해 보이고는 부리나케 파발을 띄우러 달려갔다. 강절곤은 완연히 밝아진 하늘을 바라보며 부디 천지신명께 해아가 무사하기만을 기원하였다. 이 할애비가 모진 목숨을 이어 갈 테니 언제든지 무사히 이 품으로 돌아오라고.
* * *
“와, 골때리네.”
진해는 해원공부와 오 어사 댁 사이를 이은 비밀 통로를 지나며 구시렁댔다. 결과만 말하자면 진해와 해산의 혼인은 미뤄지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혼인 자체를 비밀로 숨겨 놓자고 했다. 해원공부 사람들은 이미 알 거 다 아는 거 같았지만 황제와 황후에게 허락을 받는 것과 말만 오가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혼인이 미뤄지게 된 것은 오늘 아침 헐레벌떡 진해의 집으로 찾아온 내관 때문이었다. 어조원 소속이며 괴조 일홍련, 아니 소패군 일홍련을 전담하는 내관이 다급히 오 어사님을 뵙게 해 달라고 소란을 피운 탓이었다. 내관은 진해를 보자마자 성월공이 밤새도록 파발을 달려 황상께 개선을 원치 않는다는 상주를 올렸다고 전했다. 오 어사님은 해원공 마마와 연이 있으시니 아셔야 할 것 같아 급히 달려왔다고 말했다.
진해는 여해루에서조차 수집하지 못한 정보에 감사하며 내관에게 손에 잡히는 대로 금을 쥐여 주었다. 내관은 사양했지만 급료가 적은 하급 내관에게 돈은 있으면 있을수록 좋을 터였다.
“이번에는 정말 혼인하는 줄 알았는데!”
진해는 너무나 자연스레 해산의 방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해산은 궁에 들어가 소식의 진위를 확인하고 온 참이었다. 과연 성월공은 재정의 이유로, 혹은 병사들의 피곤함을 이유로, 혹은 죽은 병사들을 기리는 뜻 등으로 개선 행군을 원치 않는다고 전해 왔다. 황제는 성월공이 개선을 했으면 하는 눈치였으나, 노련한 장수인 창명후가 성월공의 뜻에 동의하여 개선은 여느 때보다 작고 소박하게 치르기로 하였다.
“너 정말로 고와 혼인할 생각이었느냐.”
“그럼 구혼을 장난으로 하나요? 전 언제나 진심이라구요!”
“고와 같이 덜떨어진 반편이라도 진심이란 말이냐?”
“허 참, 나 참! 해산 도련님이 덜떨어졌으면 전 바닥에서 아예 기어 다니게요?! 당연히 진짜죠! 그것 때문에 매일 연습도 하는데!”
진해가 금방이라도 튀어 오를 듯 발칵 소리를 내자 해산은 새삼 가슴이 두근거리는 듯했다. 혼인이 미뤄지자 여유가 생긴 해산은 그제야 새신랑의 기대라거나 긴장 같은 것이 생겼다. 진해를 볼 때마다 두근거리던 심장이 때때로 해산이 막기 힘들 정도로 쿵쾅거렸다.
“연습이라니?”
“결혼 전에 신랑이 해야 할 필수적인 덕목의 연습이었죠.”
“무엇이기에 너처럼 다재다능한 이가 매일 연습까지 해 가면서 준비한단 말이더냐?”
“뭐긴 뭐겠어요. 당연히, 초야 연습이지!”
푸스스 웃던 해산의 웃음이 뚝 끊어졌다.
“뭐, 뭐, 무, 뭐라?”
“초야 연습이요. 초야 연습. 혼인하면 초야를 치러야 하잖아요. 초야를 잘 치러야 금실이 좋아지지요. 아무리 반반해도 거시기가 부실하면, 쯧!”
“초, 초, 초야?”
“응? 왜 그렇게 말을 더듬으세요? 아무리 목적이 있는 혼인이라지만 할 건 해야죠. 초야 안 치르실 거였어요? 헉, 설마 저 소박맞는 거?”
“아니, 그것은 아니지만, 아니, 그렇다고, 그것이……!”
솔직히 말하자면 해산은 초야의 초 자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차기 보위를 위해 자리를 지키기 위해 치르는 혼례라는 생각에 가슴만 갑갑해지고 있었는데 무슨 초야를 생각하고 금실을 생각한단 말인가. 그런데 진해는 말간 눈동자로 아주 당당하게 초야를 치러야 함을 주장하고 있었다. 해산은 초야의 의미를 되새김과 동시에 얼굴이 순식간에 벌게지고 말았다.
“……잠깐 바람 좀 쐬고 오마.”
“흐음~?”
해산은 잠깐 자신을 진정시키고자 했으나 흐트러진 해산을 두고 볼 진해가 아니었다. 성월공이 화려하게 개선하지 않는다면 굳이 뭔가를 서둘러 준비할 필요도 없었고 창명후 일파는 성월공을 맞을 준비로 바쁘니 해산을 걸고넘어질 이도 없었다. 한마디로 아주 오랜만에 해산과 여유를 만끽하게 되었다는 말이었다.
턱.
“해산 도련님.”
진해는 해산이 열려는 방문에 손을 떡 올려놓았다. 해산의 옆에서 해산을 올려다보며 이가 다 드러나도록 크게 미소 지었다.
“안 궁금하세요? 제가 어떻게 연습했는지.”
그러면서 목이 마른 것처럼 혀를 내 입술을 핥았다. 두 눈 속에는 갈증을 닮은 종류의 감각이 뜨겁게 고여 있었다. 해산의 발치를 끈적끈적하게 휘감으면서도 불씨가 닿으면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오묘하고도 복잡한 감각이었다.
“혹시 도련님도 연습하셨어요?”
“고는…….”
“어떻게 연습하셨어요?”
뭘 연습하셨어요. 해산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음에도 감히 진해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언제나 몸을 단정히 하고 체통을 지켜야 함을 알면서도 이상하게 진해만 두면 몸 어딘가에서 심지가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지금도 그랬다. 진해가 발돋움을 해 제게로 얼굴을 가까이 하는 데도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음…….”
입술과 입술이 맞닿는 감각은 기묘했다. 해 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니고, 하는 사람이 바뀐 것도 아닌데 초야라는 단어가 끼어든 것만으로도 기분이 이상해졌다. 진해와 처음 입을 맞췄던 게 언제였더라. 진해와 자신이 서로를 완전히 인지하면서 혀를 섞었던 것이 언제였더라.
“……먼저 입을 맞출 거예요.”
입술 사이를 지그시 베어 물다,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빨아 당겼다 놓은 뒤 진해가 조용히 읊조렸다. 흐릿하게 피어오른 열기 속에서 진해의 목소리는 천 하나를 두고 말하는 것 같았다. 마치 혼례의 면사포를 쓴 것처럼.
해산이 말을 하거나 말거나 진해는 해산의 골반을 부드럽게 붙든 채 해산의 입술을 탐하였다. 평소의 진해와 달리 느릿하면서도 정중한 입맞춤이었다. 그렇다고 그 깊이와 농도가 덜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혀가 뒤섞이며 표면과 표면이 마찰할 때마다 해산의 뒷덜미로 저릿하게 소름이 돋아났다. 해산이 저도 모르게 진해 쪽으로 고개를 숙일 정도로 감미로운 감각이 쉬지 않고 둘을 간질였다. 두 사람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해야…….”
“네, 서방님.”
“서방이라니…….”
“그럼 낭군이라 부를까요? 초야에 마마라는 호칭은 너무 딱딱해요. 다르게 부르게 해 주세요.”
반들반들하게 젖은 해산의 입술 위를 핥은 뒤 진해는 해산의 목덜미에도 입을 맞췄다. 맥박 치는 곳에 입술을 묻은 뒤 해산의 장포를 벗기고 한결 가벼워진 옷 위를 만지며 해산의 굴곡을 가늠하는 듯했다.
“아…….”
진해는 매끄러운 비단 위를 덧그리고 또 덧그리며 해산의 쇄골이 있을 법한 곳에 입을 갖다 댔다. 옷 위로 진해의 입김이 느껴졌다. 따뜻한 온기가 애를 태우는 것처럼 느릿하게 해산의 살을 물들였다. 내려다본 진해는 눈을 감은 채 천천히 다른 곳으로 입을 옮기는 중이었다. 종이 위에 대단한 작품을 그리는 것처럼, 세상에 다시 없을 진미를 맛보는 것처럼 진해는 무아지경으로 해산의 옷 위에서 자신만의 길을 가는 중이었다.
“읏!”
맨살 위를 핥아지는 것처럼 자극적이지는 않았지만 연약한 온기가 제 몸 위를 그리는 건 또 다른 쾌락이었다. 진해가 이를 세우지 않고 옆구리 위를 물자 해산은 저도 모르게 크게 몸을 떨고 말았다.
초야. 부끄럽기도 하고, 특별하기도 한 단어. 두 사람이 부부가 되어 처음으로 맞는 밤. 진해는 자신의 남편이 될 이에게 언제나 이렇게 부드럽게 해 주겠다고 생각했던 걸까.
“해, 야…….”
느긋하게 달아오르는 열기는 부드러운 것과 별개로 해산 자신을 조금씩 안달 나게 했다. 다른 이였다면 그냥 두고 봤을지도 모르지만 문제는 해산의 몸 위에 무한정 입 맞추고 있는 이가 해산에게 양인의 맛을 가르쳐 준 진해라는 점이었다. 평소의 진해는 장난스러우면서도, 난폭하고, 또 그러면서도 집요해서 해산은 진해와 몸을 겹칠 때면 자신이 거의 다른 사람이 된다고 느낄 정도였다. 그런데 그 진해가 지금 거북이처럼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해산의 몸은 이미 쾌락을 알고 있었다. 목이 마른 것처럼 입술을 적시는 저것이 얼마나 유용한 물건인지 알고 있었다. 빨리고, 물리고, 핥아지고, 문지르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부드럽게 달아오른 몸에 전율이 일었다. 진해가 지그시 입을 맞춘 곳이 저번에는 강하게 빨아들여진 곳이라 더욱 그랬다.
진해가 입을 맞추며 천천히 아래로 내려갈 때마다 해산의 머릿속에서 진해는 해산을 마음대로 갖고 놀고 있었다. 모멸적이지만 애정이 담긴 별칭으로 해산을 부르며 해산의 허벅지 사이가 덜덜 떨릴 정도로 젖게 만들었었다.
어서 빨리, 해 줬으면. 평소처럼 머릿속이 다 타 버릴 정도로 난폭하게 다뤄 줬으면.
해산은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상념에 소스라칠 정도로 놀랐으나 불이 붙기 시작한 몸은 해산의 의지에 반하였다. 단지 그 당시를 회상한 것만으로도 해산의 아랫도리가 끈적하게 젖어 들기 시작했다. 진해의 입술은 이제 해산의 아랫배에 닿아 있었다. 해산의 태가 있을 곳 위에 인사를 하는 것처럼 정중히 입을 맞췄다. 동시에 생긴 것만큼은 산적 저리 가게 생긴 거친 손으로 해산의 허벅지 뒤쪽을 어루만졌다.
“하, 으…….”
다리에서 힘이 빠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해산의 머릿속에서, 머리 밖에서 진해가 동시에 해산과 닿아 있었으니까.
“섰어요, 예쁜 서방님.”
평소에 몸을 겹칠 때는 결코 들을 수 없었던 존대가 해산의 귀를 간질거리자 해산은 두 눈이 찔끔거릴 정도로 짜릿한 감각에 몸서리쳤다. 진해의 손이 천 위를 슥슥 쓰다듬자 저도 모르게 기대로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진해는 정말로 평소와 달랐다. 해산의 것이 옷 위로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부풀고 젖어 들자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그것에게도 천 위로 입을 맞춰 주었다.
“아……!”
축축했지만 점액질이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온건한 습기였다. 단단하거나 딱딱한 것이 하나도 닿지 않는 연약한 구음이었다. 입술이 쓸리는 게 거슬렸는지 진해는 형태가 온전해진 것을 붙잡고 혀를 내밀어 조금씩 문질러 댔다. 진해가 혀를 내밀 때마다 진해의 타액이 아닌 다른 종류의 액체가 더해진 얼룩이 해산의 옷 위를 진하게 적셔 나갔다.
“빠, 빨리, 빨리……!”
축축하게 젖은 뒤쪽에서 척추를 타고 머리까지 저릿한 감각이 전해졌다. 결국 참다 못한 해산이 진해를 끌어당기며 진해의 아랫도리를 제 샅에 맞붙였다.
“빨리요? 처음인데 뭘 빨리 하라는 거예요, 예쁜이 서방님?”
“어서 빨리, 빨리 너, 넣…….”
막상 소리를 내서 말하자니 참으로 수치스럽기 짝이 없었다. 진해는 이렇게나 느긋한데 자신 혼자 몸이 달아 빨리 넣어 달라는 말이나 하고 있었다. 초야인데, 상대에게 잘 보여야 할 초야인데 이렇게 음탕하게, 이렇게 난잡하게.
“괜찮겠어? 내 거 좀 커. 처음이라서 찢어질지도 몰라?”
“괜찮아, 괜찮으니까……!”
어느새 진해의 말이 반토막 났지만 해산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궁지에 몰려 있었다. 어지간히 애가 탔는지 진해를 꽉 끌어안고 저도 모르게 허리를 흔들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진해의 눈에 난폭한 기운이 깃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저를 받으며 절절 울기만 했던 예쁜이를 이렇게 만든 것이 바로 자신이었다.
“너 누구랑 놀아났어? 어? 초야인데 이렇게 능숙하다니, 내가 처음 아니지!”
“하읏……!”
“이 음탕한 놈! 혼을 내 줘야겠구만!”
그리고 해산은 그렇게 바라던 것을 손에 넣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손이 아니라 다른 곳이었다. 진해는 해산을 밀어 뒤로 눕게 한 뒤 침 자국이 군데군데 묻은 하의를 뭐 껍질 벗기듯 홀랑 벗겨 버렸다. 완전히 벗긴 건 아니고 발목에 걸릴 정도로만 끌어 내렸다. 그리고 자신이 벌어진 무릎 사이로 기어 들어갔다. 해산의 다리 사이에 안긴 것처럼.
“허어! 이것 봐라! 축축히 젖어 가지고 내가 뭘 했다고 이렇게 젖었어! 사기당한 거 아니야? 겉가죽은 조신해 가지고!”
“해, 해야…….”
“싸가지도 없네! 난 서방이라고 꼬박꼬박 부르는데! 어!”
해산은 벌겋게 달아오른 채 눈물을 글썽거리며 고개를 살짝 모로 틀었다.
“서방, 님…….”
해산이 작게 입술을 달싹거리는 순간 진해는 등줄기에 마치 번개를 맞은 듯했다. 귀여워서, 귀여워서, 귀여워서, 귀여워서 죽어 버릴 것 같았다. 욕정이 넘쳐서 머리가 펑 터져 버릴 것 같았다. 흥분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거친 숨은 발정기의 짐승 저리 가라 수준이었다.
가만히 있다가는 진해가 먼저 불타서 재가 될 지경이었다. 진해는 가타부타 할 것 없이 제 하의를 끌어 내렸고 이미 팽팽하게 서 있는 것을 해산의 틈새로 갖다 붙였다. 끈적하게 젖어 있지만 아직 약간의 틈만이 있는 곳이었다. 진해는 해산이 엉엉 울며 비명을 지르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넣는다.”
“뭐, 잠깐, 아직―”
아니나 다를까, 진해가 씨근덕거리며 넣는다고 하자 해산의 눈이 대번에 동그래졌다. 뽑을 수만 있다면 뽑아서 소중히 간직하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눈망울이었다.
“읏, 크, 아, 아!!!”
“힘, 빼…….”
평소에도 물건 큰 거로는 남들에게 진 적이 없는 진해였다. 진해는 이젠 사람 중에서는 제 상대가 없는 것이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할 정도였다. 그런 것을 덜 풀린 곳에 밀어 넣고 있으니 해산의 입에서 비명이 나오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자를 듯이 세게 옥죄는 감각이 진해를 황홀경에 들게 했다.
“하악, 아, 서방, 서방님!! 서방님!!”
“…….”
해산의 탄탄한 허리가 한껏 휘어지자 진해는 그 허리를 덥석 끌어안아 제 몸에 밀착시켰다. 빈틈없이 맞붙자 진해의 것과 마찬가지로 성이 나고 젖어 있는 해산의 물건이 진해의 배에 비벼졌다.
“으응……!”
해산은 아래를 채우는 빠듯함에 괴로워하면서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괴로움과 쾌락 그 사이에서 해산은 마구잡이로 휘둘리고 있었다.
“아, 아아!!!”
“여기가 좋지? 우리 예쁜이는 여기를, 하아, 좋아하잖아.”
“거기, 좋아, 좋, 아……!”
분명히 뒤가 가득 차서 괴로운데도 진해의 것이 익숙한 곳을 문지르자 배와 배 사이가 울컥 젖어 들었다. 꽉 깨문 이 사이로 삼키지 못한 타액이 질질 흘러내렸다. 진해가 거칠게 숨을 뿜으며 허리를 흔들자 해산의 허벅지가 진해의 허리에 감겨들었다. 탄탄한 근육이 불거진 다리가 진해를 으스러뜨릴 듯이 조여 댔다. 해산이 느낄 때마다 해산의 발끝이 한껏 오므라들었다.
“예쁜이, 너, 진짜 골, 흐으, 때려, 정말!”
갈비뼈가 부러질 것 같은 압박감을 느끼며 진해는 크게 웃음 지었다. 해산은 다리로도 부족한지 아예 진해를 끌어안은 채 체통 없이 교성을 흘리고 있었다. 진해는 고자도 단번에 세울 정도로 야한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귀여운 예쁜이를 더욱 귀여워해 줘야겠다며 이를 악물었다.
* * *
이제는 단골 위주의 장사로 돌아가는 미려방의 어느 곳, 미려방의 일패이자 여해루의 루주인 정미려가 홀로 잔을 채우고 있었다. 감히 섬섬옥수라고 일컬을 수 있을 정도로 고운 손의 마디에는 악기를 쥐는 부분마다 굳게 인이 박여 있었다. 서해 옥가의 무공인 은사결(銀死結)의 흔적과 완전히 일치하는 곳들이었다.
“쫑 내자, 우리. 시발, 처음부터 믿었던 내가 병신이었지. 맨날 형아 타령만 하는 놈한테 무슨 뾰족한 수가 있다고!”
정미려가 잔을 비우고 다시 잔을 채우는 동안 멀찍이서 정미려를 내려다보던 이가 으르렁거리듯 내뱉었다. 색소가 옅은 눈동자가 머리칼이 인상적인 이였다.
“……형은 돌아와, 반드시.”
“하! 그래, 돌아오기야 하겠지! 해원공을 옆에 끼고 말이야. 우리 강아지, 우리 강아지 하면서 예전처럼 행~ 복하게 살겠지.”
“…….”
“그런 게 네 계획이면 난 이만 빠지련다. 난 이대로 못 끝내. 식 치르기 전에 엎을 거야. 오진해 그 창놈한테 날 제대로 책임지게 해야지.”
어떤 의미로는 구구절절 맞는 소리인 삼랑의 말에 미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독한 술을 쉬지 않고 들이켤 뿐이었다. 그러나 몇 병을 마셨음에도 미려의 안색은 변함이 없었다. 진해 앞에서는 한 잔만 먹어도 어지러워 보였던 이가 지금은 독주를 물처럼 마시고 있었다.
“맘대로 해.”
“간다.”
“하지만, 그러면 네 형들의 원수는 영영 못 갚는다는 거, 알고 있겠지.”
“……나더러 뭘 어쩌라는 거야.”
그대로 뒤돌아 나가려던 삼랑은 미려가 억울하게 죽은 형들을 들먹이자 자리에서 멈춰 섰다. 삼랑이 세상에서 유일하고 믿고 사랑하는 이들이었었다. 오진해 이놈은 놔뒀다가는 가벼운 아랫도리를 팔랑거리니 세상에서 제일 믿지 못할 놈이었고.
“솔직히 말하자면 시기가 내 예상보다 지나치게 일러. 형과 해원공은 성월공이 돌아온 후에 잠깐 불타올랐다가 곧 흐지부지하게 헤어질 예정이었지. 정확히 말하자면 해원공이 형을 버리고, 형은 상심한 채 내게 돌아오는 거였어. 그럼 나는 네게 형의 아이의 우부가 될 기회를 줄 예정이었고.”
“흥. 네가 뭐가 잘났다고 기회를 주니 마니.”
삼랑은 정미려의 이야기를 들으며 속으로 미려를 한껏 비웃었다. 정미려 저 자식은 아이의 우부 자리를 선심 쓰듯 준다고 말하고 있었는데 그것이야말로 저놈의 패배의 원인이 될 터였다. 남의 자식도 귀하게 여기는 오진해가 제 자식을 어찌 생각할지, 그리고 아이의 우부에게 어찌 대할지는 안 봐도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여차하면 애를 밴 채로 몸을 숨기면 오진해 자식이 스스로 굽히고 들어올지도 몰랐다. 아이를 사생아로 만들고 싶지 않을 테니 정미려가 아무리 울고불고 지랄을 해도 단호하게 혼인 신고서에 제 이름을 적어 넣을 것이다.
“한삼랑.”
“뭐.”
“넌 어디까지 포기할 생각을 하고 있지? 혈육인 형들의 원수를 포기할 작정이라면― 나라 역시 포기할 수 있어?”
“이건 또 뭔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할 수 있어, 없어. 말만 해.”
술기운이 옅게 서린 눈동자와 마주 보며 삼랑은 이 새끼가 취해도 제대로 취했다고 생각했다. 형들의 원수가 저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도 속된 말로 빡치는 노릇인데 나라를 포기할 수 있냐는 건 또 뭔 개소리인가.
“이 씨발놈은 오진해가 오냐오냐 키워서 난민이 뭐 하고 사는지도 모르나 보네. 돌았어? 등 따신 집 놔두고 떠돌아다니게?”
월나라 도성에서 가장 가난한 빈민촌인 추피동의 두목이었던 삼랑은 나라 없는 유랑민들이 어떻게 사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때때로 그들에게 푼돈을 던져 주고 귀찮은 심부름을 시키기도 했었으니까. 몸을 파는 건 예사고 급하면 살인까지도 하는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을 부리고 살았던 삼랑에게 나라를 포기하라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오진해가 처음부터 외국인이었다면 몰라도 말이다.
“그래? 그럼 됐어.”
그런데 더욱 미심쩍은 건 삼랑이 거절하자 아무 미련도 없이 말을 끝냈다는 점이었다. 삼랑은 저 조막만 한 머리통 속에 대체 무슨 엿 같은 생각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없어 기분이 더러워졌다. 어쨌거나 이젠 저 여우 새끼와 결별하고 자신의 힘으로 오진해를 되찾아야 했다. 삼랑은 바닥에 침을 뱉고는 주머니 양쪽에 손을 찔러 넣은 채 건들건들 밖으로 걸어 나갔다. 미려는 삼랑이 나가거나 말거나 여전히 음주 삼매경이었다.
* * *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 진해는 오랜만에 정복을 차려입게 되었다. 조례에 정복을 입고 참여한 것은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영찰 어사를 제수받을 때는 하급 시위의 옷을 입고 있었으니까.
“드디어 올 게 왔구나.”
간밤에 성월공이 도착해 황상을 배알했다는 소리를 들었었다. 황상이 그를 위해 서궁 중 하나를 내어 주었다는 소리도 들었다. 성월공이 관례를 치르기 전에 북벌을 떠나 제 소유의 저택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지순 황태공이 살아 있거나, 화석정군이 출가하지 않았다면 이야기가 달랐겠지만 안타깝게도 성월공은 산고로 우부를 잃고 좌부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참으로 공교롭게도 화석정군의 가문은 전시에 지방으로 내려간 뒤 역병의 피해를 입었고, 그 후로는 도성으로 올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진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성월공 역시 해원공과 함께 황후의 슬하에서 형제처럼 자란 적이 있다고 했다. 황후는 성월공과 해원공이 동시에 울면 세간의 시선 탓에 성월공을 먼저 안아 들어야 했다고.
‘분명 그 탓에 해산 도련님이 성월공에게 기가 죽어 있는 거겠지. 차라리 미워하고 증오하면 좋겠지만 해산 도련님은 상냥한 분이니까 그저 자기 자신을 죽이고 있으신 거야.’
거기다가 성월공은 어려서부터 수재 소리는 기본이요 천재 소리도 들을 정도로 총명하고 다재다능한 이라고 했다. 해산이 열여덟을 넘고 나서야 간신히 조례에 얼굴을 내민 반면 성월공은 그보다 삼 년이나 빠른 열다섯부터 황제의 곁에서 정무를 보고받았다고 했다.
“오, 황 시위! 어때, 알아봤어?”
진해는 궁에 들어가자마자 저를 기다리고 있던 황아무와 마주쳤다. 진해의 부탁을 받아 뭔가를 조사했던 황아무는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아 보였다.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을 수도 있겠습니다.”
“대승인가 보네.”
“대승이란 말이 모자랄 정도로 성공적인 북벌이었다고 합니다. 거리가 멀어 소문이 잘 안 났다뿐이지 함께 북벌을 떠났던 장수들은 성월공을 거의 황상처럼 따르고 있을 정도랍니다. 복속된 곳도 아직은 반란 한 번 없이 조용하구요.”
“거참, 하늘도 너무하시네. 차라리 근거 없는 편애였으면 일이 쉬웠을 텐데!”
황아무가 진해에게 부탁받은 일이란 건 바로 성월공의 북벌 성과였다. 황아무는 건너건너건너건너 아는 무관에게 술을 사 주고 성월공이 북방에서 이룬 각종 업적들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황아무가 들은 이야기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갓 관례를 치른 공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단호하고 신속한 일 처리였다. 게다가 써먹은 전술들 역시 효율적인 것들뿐이었다. 아무리 창명후가 성월공을 후원한다고 하나 성월공 본인의 재주가 따르지 않으면 이룰 수 없는 것들이었다.
“오 형님, 어쩌실 겁니까?”
“어쩌긴 뭘 어째. 당분간 두고 봐야지.”
“예? 그럼 이대로 가만히 있으시려구요?”
“황 시위, 내가 만재긴 한데 만능은 아니야. 성월공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데 함부로 손을 놀릴 순 없다고! 내가 해원공 마마랑 줄이 닿은 걸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영찰어사인 내가 함부로 나대다가 걸려 봐!”
“음, 확실히 영찰어사는 공평무사해야 하는 자리이긴 하죠.”
고개를 끄덕이는 황 시위를 바라보며 진해는 속으로 실쭉 웃음 지었다. 황아무는 사람도 좋고 실력도 뛰어나나 영 약질 못했다. 진해가 가만히 있고자 결정한 이유는 황 시위에게 말한 것과 동일했으나 동시에 동일하지 않았다.
헛소리 같겠지만 진해가 가만히 있기로 한 건 자신이 영찰어사이기 때문이지만 자신이 공평무사해야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영찰어사 자리가 황제의 수족이라 그런 것이었다. 진해가 쓴 감투인 영찰어사가 힘을 발휘하려면 황제의 입김이 닿아야 했다. 황제가 진해의 배후가 되어야 영찰어사가 가진 모든 권한이 힘이 될 수 있었다.
‘거기다가 혹시 모르니까……. 정말로 성월공을 편애하는지, 그게 아니면 해산 도련님과 경쟁시켜 뛰어난 후사를 차기 보위에 올리시려 하는지.’
황 시위를 꼬리처럼 달고 대전으로 향한 진해는 대전 밖에서 기다리는 이들 중 몇에게서 진한 전장의 냄새를 맡았다. 진해를 처음 본 이들이 대놓고 진해를 바라보았다. 진해가 씩 웃자 표정들이 묘해졌다. 진해는 황 시위의 어깨를 두드려 준 뒤 언제나처럼 씩씩하게 대전으로 발을 들였다. 여느 때처럼 제자리에 자리 잡자 멀찍이서 해산이 어깨를 빳빳이 굳힌 채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해산과 떨어진 곳, 단의 우측에 진해가 처음 보는 이가 서 있었다.
뛰어난 전공을 세웠고, 해산과 형제나 마찬가지라고 해서 해산과 체구가 비슷한 줄 알았는데 웬걸, 해산보다 머리통 하나가 작았다. 꼿꼿이 편 등에는 황족의 품위가 서려 있었으나 겉보기만 보자면 보통 이들보다 여리고 약해 보였다.
‘허어! 갑자기 황상의 편애가 이해 가려고 하는데?! 해산 도련님 곁에 있으니까 덜 자란 것 같잖아! 덜 자란 것 같은 애가 아빠들도 없고 또롱또롱하면 정이 갈 수밖에 없…… 겠지?’
그리고 마침내, 운명처럼 성월공이 뒤를 돌아보았다. 월국에서 해산만큼이나 지고한 이가 진해 쪽으로 몸을 틀었다.
‘어……?’
단지 몸을 틀었을 뿐인데 진해는 어쩐지 아주 익숙한 향이 풍긴다고 생각했다. 신료들이 가득 찬 이곳에서 저렇게나 멀리 떨어진 이의 향을 맡을 수 있을 리가 없는데도 진해는 이 대전 안에서 그의 향이 가장 진하다고 생각했다.
눈과 눈이 마주치고, 시선과 시선이 오갔다. 해산과 닮은 듯 닮지 않은 눈동자, 우아함보다는 사랑스러움이 고인 눈매. 진해가 본 미인 중 비슷한 이를 들자면 오호와 가장 비슷했다. 관례를 치렀음에도 어린 티가 가시지 않은 듯한 단정한 얼굴이 진해의 눈 속 가득 들어왔다.
“어……?”
진해의 입술 사이로 머릿속 가득 차 있던 말이 흘러나왔다. 성월공 역시 진해를 그 눈 가득히 담고 있었다. 성월공 안월산은 진해가 처음 보는 이가 아니었다. 성월공 안월산은 아주 오래 전 진해와 만난 적이 있는 인물이었다.
안월산은 진해에게 파각사를 보내 죽을 위기에 처하게 한 이였다. 진해의, 첫사랑이었다.
* * *
어린 진해는 좋아하는 아이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물론 그때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소월아! 여기! 여기야!”
천애 고아이자 빈민가의 주민이며 역병의 생존자인 진해는 월국 관청이 의무적으로 고용해야 하는 고용인 순위 중 일 위였다.
어린아이치고 손도 야무지고 책임감도 강해 관청 사람들도 진해를 자주 불러 줬었다. 미려가 혼자 집을 볼 수 있게 되어 진해의 짐이 조금 가벼워졌던 나이였다. 아직은 한씨 형제들이 가까이서 일을 구하던 때였다.
“소해.”
소월과는 바로 그 관청에서 만났었다. 소월은 진해가 정원에서 잡초를 뽑고 있자 진해에게 여기서 뭘 하냐고 물었었다. 처음에는 무서운 목소리로 물어봐서 겁먹었지만 진해는 일을 하던 중이었고 잘못한 것이 없었다. 내가 뭘 하든 네가 무슨 상관이냐고 받아친 것이 두 사람의 시작이었었다.
“내가 좀 늦었지?”
“헤헤, 아니야. 그것보다 이거.”
어린 진해는 소월이 다가오자 정성껏 다듬은 꽃 한 다발을 내밀었다. 이름 모를 잡초들이었지만 그중 꽃이 예쁜 것들을 진해가 무려 재배씩이나 해서 만든 꽃다발이었다.
“선물이야. 음, 소월이 보고 좋아했으면 해서.”
“신기하네. 이렇게 작은 꽃송이들은 처음이야.”
“엇흠! 내가 직접 기른 거야.”
“왜?”
“어? 아. 그러니까, 어, 음…….”
그 당시의 진해는 연애와는 거리가 먼 순수한 영혼이었었다. 때 한 점 묻지 않은 맑은 심성의 소유자라고, 진해 자신은 생각했었다.
“나 주려고 기른 거구나.”
“……응.”
“고마워. 난 아무것도 해 주는 게 없는데.”
“아냐 아냐, 신경 쓰지 마! 관청의 물건은 함부로 손대면 안 되잖아. 절대로 나 때문에 무리하지 마. 내가 소월한테 주고 싶어서 해 주는 거니까 소월은 그냥…… 예쁘게 보고 즐거워했으면 좋겠어.”
지금 생각해 보면 소월은 가끔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항상 깨끗한 옷을 입고 오는 건 그렇다 쳐도 진해가 소소한 선물을 줄 때마다 그것을 이상할 정도로 신기하게 여겼던 것이다. 이 잡초들만 해도 길가에 흔히 볼 수 있는 풀이었는데.
“기뻐.”
하지만 소월이 형편없는 꽃다발을 쥐고 환하게 미소 지을 때마다 진해는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문들을 모조리 날려 버렸다. 소월은 미려와 다른 의미로 사랑스러운 아이였었다. 진해가 처음으로 미려를 돌보는 데 소홀할 정도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소월이 진해의 손을 잡을 때마다 미려의 손을 잡을 때와 달리 얼굴이 새빨개지기 일쑤였었다.
“언젠간 네게 더 큰 보답을 할 거야. 때가 되면 너와 네 동생이 고생하지 않게 해 줄게.”
그리고 소월 역시 진해와 마찬가지로 서로를 특별하게 여기는 것이 분명했었다. 진해와 소월은 서로의 눈을 들여다볼 때마다 둘의 눈동자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뜨거운 빛깔을 알 수 있었다. 그 빛깔이 인도하는 대로 처음에는 친구로, 다음에는 많이 친한 친구로, 그다음에는 서로를 내 음인, 내 양인이라 부르는 사이가 되었다. 둘은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서로에게 제법 진지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좋아해, 소월.”
서로가 이렇게 서로에게 입맞춤하기를 망설이지 않을 정도로 진지했었다. 진해는 소월에게 얹혀살 생각은 없었지만 언젠가는 소월과 함께 가정을 이룰 것을 의심치 않고 있었다. 그리고 소월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여겼었다.
왜냐면 진해과 소월의 입맞춤이 깊어지기 시작했던 어느 날, 진해는 저를 묶는 강한 이끌림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저를 향해 조용히 불타오르는 소월의 각인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그랬기 때문에 진해는 소월이 어째서 제게 파각사를 보냈는지 알지 못했다. 그가 자신이 감히 넘볼 수도 없을 만큼 귀한 집의 도련님이라는 걸 알게 되었지만 그로 인해 자신이 파각당해야 한다는 건 납득하지 못했다.
파각은 진해의 많은 부분을 바꾸어 놓았다. 파각의 후유증은 심각했고 어린 진해와 미려가 모아 놓은 대부분을 소진해 버렸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죽을 뻔했다. 파각은 대월률이 개정되기 전엔 형벌의 일종으로 포함될 정도로 지독하고 끔찍한 고통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각인한 사람들이 이혼하게 되면 한쪽이 멀리 이사가 각인을 해소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우웩!”
“형 괜찮아. 괜찮으니까 다 토해. 내가 옆에 있으니까, 응?”
“허억, 허억…….”
각인이 앗아 간 건 많았지만 그중 가장 큰 것은 바로 진해의 기억이었다. 진해는 파각으로 인해 꽤 많은 기억을 상실했다. 미려의 눈물 어린 청을 받고 들린 낭중은 파각으로 상실한 기억은 운에 맡길 수밖에 없다고 했다. 미성년이 파각을 겪고 목숨을 건진 것만으로도 운이 좋은 편이라는 말을 해 줬었다. 하지만 진해는 낭중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는데, 파각은 진해가 가진 것 중 가장 소중한 기억을 빼앗아 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희미하게 떠오르는 온기, 자상한 손길, 상냥한 입매.
“아빠……, 아빠…….”
“……씨발. 더러워서 못 봐 주겠네.”
파각은 진해에게서 우부의 기억을 몽땅 앗아 가 버렸다.
“이 새끼가 이렇게 심각하단 소린 안 했잖아!”
“내가 왜 해야 하는데. 우리 형이 파각 후유증이 심하다고? 그래서 각인을 무서워하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랑 헤어졌다고? 알았으면 네가 뭘 해 줄 건데. 의원도 못 고치는 걸 네가 어떻게 고칠 건데.”
“…….”
속에 든 것을 쏟아 낸 진해의 곁에는 미려와 삼랑이 있었다. 퇴청한 진해는 시체처럼 새파란 얼굴로 돌아와 대문에 들어서자마자 기절했었다. 그리고 일어나는 순간부터 이 모양 이 꼴이었다. 삼랑은 미려에게서 진해의 첫사랑이 성월공이라는 이야기는 전해 들었었지만 진해의 파각 후유증이 이렇게 심한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우으…….”
“괜찮아. 우리 해아 괜찮아. 쉬이, 착하지?”
미려의 품에 안겨 절절 울기만 하는 얼굴은 삼랑에게 무척이나 낯선 것이었다. 오진해 저놈은 언제나 바보처럼 웃기만 하는 녀석이었다. 맞아도 웃고, 슬퍼도 웃고, 아파도 웃고, 기쁘면 크게 웃고.
그리고 미려는 그런 진해를 안타깝고 애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씹어 죽여도 시원찮을 성월공을 떠올리며 조용히 불타오르고 있었다. 언젠간 무릎 꿇게 해 주겠다고 별렀던 결심은 비겁하게도 그가 차기 보위에 근접한 걸 알게 되자 그와 형을 마주치지 않게 하는 것으로 노선을 바꾸었다. 친부인 옥길합에게 부탁하면 성월공의 팔다리 하나쯤을 뗄 수 있겠지만 옥길합의 핼쑥한 얼굴을 떠올리면 도저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야, 비켜. 얘 재워야 될 거 아냐. 내가 이쪽 들 테니까 네가 저쪽 들어.”
“…….”
“뭐. 그럼 이대로 바닥에 재우리?”
진해가 기절하듯 잠이 들자 멀찍이 서 있던 삼랑이 다가와 진해의 어깻죽지 아래로 손을 넣었다. 미려는 언제나처럼 진해와 저만의 시간으로 끝날 고행에 삼랑이 자리하자 기분이 이상했지만 삼랑의 말대로 진해를 바닥에서 재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삼랑과 미려가 진해를 침상에 옮기자 진해는 이때까지 그랬던 것처럼 곤히 잠이 들었다. 꿈만은 좋은 것을 꾸는지 입가에 옅은 미소가 어려 있었다.
“시발, 기분 이상해.”
“…….”
미려가 침상 곁에 앉아 진해의 손을 잡고 있는 동안 삼랑은 문가에서 둘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미려가 어째서 진해가 돌아올 것이란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갖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확실히 각인을 할 때마다 이 지랄을 떤다면 진해를 감당할 음인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사랑은 동정과 다른 것이었으니까.
그렇지만 삼랑은 진해의 약점을 보았음에도 이상하게 진해의 곁을 떠날 마음이 들질 않았다. 오히려 항상 품고 다니는 신고서에 진해가 스스로 어서 빨리 제 이름자를 적어 넣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드는 것이다.
삼랑은 그저 진해의 단점이 진해가 가진 장점에 비해 모자라서 그런 것으로 이해했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마음의 주인인 자기 자신조차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사랑하는 이의 약한 모습을 보게 되면 지켜 주고 싶은 마음이 샘솟는 게 당연하다는 걸 인정하지 못한 탓이었다.
삼랑은 욕을 뇌까리며 해가 지고 방 안이 어둑해질 때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미려가 자리를 비우자 슬그머니 다가가 미려가 쥐고 있던 손을 자신이 꼭 쥐어 보기도 했다.
“……삼랑아?”
“오진해, 빨리 지장 찍어. 그럼 아주 눈 돌아가게 잘해 줄 테니까.”
너무 꽉 움켜쥔 탓인지 진해가 눈을 뜨고 삼랑을 바라보았다. 꽤 오랜 시간을 잤으나 진해의 안색은 평소와 달리 아직도 파리한 색을 띠고 있었다. 삼랑은 어린아이가 본다면 겁을 먹을 정도로 무서운 표정을 한 채 무릎을 꿇으며 진해에게 바짝 다가갔다. 잠이 덜 깨 어수선한 얼굴을 마주하곤 조용히 입을 겹쳤다.
아직 완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진해는 삼랑을 거부하지 않고 삼랑의 입술이 닿는 대로, 삼랑의 혀가 파고드는 대로 가만히 입을 내 주고 있었다. 삼랑의 코끝에 기운 빠진 향내가 파고들었다. 입맞춤이 끝났을 땐 진해의 눈꺼풀이 반쯤 내려앉는 중이었다. 뜨겁지만 부드럽고 안온한 입맞춤이었다.
“추피동 가면 너보다 맛 간 놈들 쌨어. 고작 이런 거 가지고 기죽지 마, 새끼야.”
삼랑은 손을 올려 반쯤 내리감긴 눈을 완전히 감겨 주었다. 뜨끈한 손바닥의 열기가 진해의 서늘한 눈매로 스며들었다. 진해는 누군가가 저를 끌어안는 안온한 감각에 휩싸여 그대로 잠 속으로 굴러떨어졌다. 해산이 진해의 이상을 알게 된 것은 진해가 어느 정도 몸을 추스른 이틀 뒤였다.
* * *
진해의 머리맡에 선 해산은 참담함을 금치 못했다. 성월공의 귀환을 축하하는 연회에 불려 다니느라 진해에게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었다.
“그런 얼굴 하지 마세요, 해산 도련님.”
하지만 신경 못 쓸 것이 따로 있지 어떻게 혼인을 약조한 양인을 신경 쓰지 못할 수가 있을까.
“바쁘셨잖아요. 가벼운 고뿔이니까 금방 털고 일어날 거예요. 그런 것보다 어서 가까이 앉으세요. 이쪽이 화로랑 더 가까워요.”
“…….”
성월공 안월산과는 어릴 적부터 묘한 경쟁 속에 놓인 터라 해산은 월산에게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경쟁을 제쳐 놓고라도 황실에 남은 직계 음인은 월산과 자신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월산은 해산 자신과 달리 황태공의 자식이라도 황자와 마찬가지의 대우를 받았다. 어떨 때는 적통 황자인 자신보다 더 귀한 대우를 받곤 했다.
“요새 잘 못 주무세요?”
“아니……, 그래.”
저가 모르는 새 혼자 앓은 양인에게 무엇을 숨길까. 해산은 저를 바라보며 묻는 진해의 말에 솔직해지기로 했다. 진해는 그런 해산의 속내를 환히 들여다본 것처럼 밝게 웃음 지었다. 정말로 햇살 같은 이였다. 항상 쌀쌀함이 감도는 해산의 곁에 이렇게 따스한 온기를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손잡아도 돼요?”
“그러거라.”
그러나 그 불씨 같은 이의 손이 오늘은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 해산은 온기가 줄어든 손을 잡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새삼 또다시 자신의 무신경함을 알 수 있었다. 해산은 이럴 때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한참 동안 고민했다. 해산에게는 이렇게 가까운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해산과 살을 섞을 정도로 친밀한 이가 없었기 때문에, 함께 살고 싶을 정도로 원하는 이가 없었기 때문에.
“따뜻해요.”
“다행이구나.”
“해산 도련님은 언제나 따뜻하세요. 그거 아세요? 손이 따뜻한 사람은 마음이 따뜻하대요.”
“그래?”
“그러니까, 해산 도련님은 정말로 바쁘셨던 거예요. 절대로 저한테 신경을 못 쓰신 게 아니라요.”
그리고 언제나처럼 진해가 또다시 해산의 골칫거리를 명쾌히 없애 버렸다. 물 흐르듯 자연스레 없애 버린 터라 해산은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할 정도였다. 진해 저 녀석은 자신의 고민거리를 어떻게 알아낸 것일까.
해산이 살짝 흔들리는 눈동자로 바라보자 진해는 병색이 완연한 얼굴로도 빙긋 웃었다. 평소에는 까불거리는 입매 때문에 방정맞은 분위기가 감돌았지만 이렇게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자 진해는 빈민촌에서 났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괜찮은 이목구비를 갖고 있었다. 자잘한 흉도 그럴듯한 이유만 갖다 대면 납득할 수 있을 정도로 오밀조밀한 용모였던 것이다.
“넌 언제나 내 속을 시원하게 만들어 주는구나. 고가 말하기 전에 어찌 그리 고의 속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게냐? 혹여 사술이라도 쓰는 게냐?”
“사술이라뇨, 도술이에요!”
“……정말?”
“당연히 농이죠. 그냥 해산 도련님을 계속 생각하다 보면 자연히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뿐이에요. 저는 선택과 집중의 인간이거든요. 한번 고르면 끝날 때까지 전력투구!”
“호오.”
“밤에도 낮에도 새벽에도 해산 도련님 생각!”
“해야…….”
“그러니까 해산 도련님은 좀 덜 생각하셔도 돼요. 제가 더 많이 생각하면 되니까 저랑 있을 땐 그냥 쉬셔도 된다구요.”
“…….”
그리고 진해는 해산의 고민을 해결하다 못해 아예 박살 내 버렸다. 해산은 눈앞의 양인과 자신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오를 정도였다. 월산이 돌아왔다는 사실이 두렵기까지 했는데 진해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자 자신이 언제 긴장했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부황이 월산에게 궁을 하사하셨다는 소식에 침울했으면서도 지금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았다.
“해야, 그거 아느냐. 사실 고는 바로 전까지 무척 두려워하고 있었단다.”
“네? 왜요? 뭐가 해산 도련님을 무섭게 해요! 우리 해산 도련님을 무섭게 하는 건 제가 가만 안 둘 거예요, 이 영찰어사 오진해가……!”
“성월공 안월산.”
“…….”
“고와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주에 태어난 사촌 형이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나와 달리 부황께 듬뿍 신임받고 있지. 원래라면 균여관의 감찰도, 북벌도 고가 해낼 과업들이었다.”
진해는 해산의 입에서 성월공의 이름이 나오자 입을 꾹 다물었다. 해산은 그런 진해를 눈치채지 못하고 진해의 손을 꼭 잡은 채 참회하듯 조용히 말을 이어 나갔다.
“고는 항상 그를 두려워했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언젠가 찾아올 끝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 때부터 고에게 정해진 결말. 오르지도 못하고 정해진 하야를.”
지그시 감은 눈꺼풀 위로 해산의 지난 세월이 스쳐 지나갔다. 명료한 목소리로 글을 읽어 내려가는 월산의 모습이 보였다. 해산 역시 그 구절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월산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눈들이 해산의 입을 틀어막았다.
어떤 때에는 월산이 나무 봉을 들고 힘껏 휘두르고 있었다. 창명후와 안면이 있다는 노련한 무장이 월산의 옆에 붙어 월산의 자세를 바로잡아 주었다. 해산 역시 봉을 다룰 수 있었다. 월산이 다루지 못하는 구리 채찍은 우후가 해산에게 내려 준 유일한 가르침이었다.
하지만 채찍을 꺼내는 순간 부황의 눈이 못마땅하게 변하는 걸 눈치챘다. 창명후는 구리 채찍을 보자 노여움을 감추지 못했다. 해산은 다시는 다른 이 앞에서 무공을 시연하지 않았다.
“그런데 해야.”
관례를 치르기 전까지 모든 것이 지독한 반복일 뿐이었다. 어떤 이는 월산이 형이라 당연한 것이라고 말했고, 어떤 이는 황위를 양보한 황태공의 공을 생각하라 했다.
“이상하게, 지금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구나. 동시에 두려워서 견딜 수 없구나.”
해산은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이렇게 고요하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관례를 치렀음에도 미숙하게만 여겨졌던 자신이 비로소 진짜 어른으로 성장한 듯했다. 해산은 눈을 뜨고 안색이 좋지 않은 자신의 양인을 응시했다. 오진해. 안해산이 유일하게 함께하고 싶은 이를 마주 보았다.
“해야. 당분간 혼인은 미뤄 두도록 하자꾸나. 약혼 역시 나중에 공표하도록 하자.”
“……왜요?”
해산이 아는 진해는 답을 모를 리가 없었다. 해산은 대답해 주는 대신 잡은 손을 잡아당겨 진해를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할쭉해진 몸을 안은 후 해산은 한참 동안 숨을 골랐다. 조금 전까지 고요했던 가슴속이 작게 술렁거렸다. 기이한 기분이었다. 해산은 눈을 깜박이며 진해의 침상 옆 창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바야흐로 서리가 내리는 계절이었다. 오 어사 댁의 담벼락을 가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해원공부와 오 어사 댁을 잇는 비밀 통로의 입구인 담벼락이었다. 장식인지 위장인지 모를 담쟁이덩굴이 서리를 맞고 노랗게 시들어 있었다. 반들반들한 잎맥이 달빛을 하얗게 반사했다.
“만약 내가 지거든, 너는 가산을 처분해 월국 밖으로 떠나거라.”
“해, 해산 도련님!?”
“정식으로 혼약을 맺은 것도 아니고, 후사를 잉태한 음인도 아니니 굳이 쫓으려 하진 않을 것이다. 한 위사가 너를 따르니 데리고 가는 것도 좋겠지. 너는 아우를 좋아하니 당연히 데려가야 할 테고.”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아직, 아직 아무것도 안 했잖아요! 이제 막 관례를 치르셨는데 왜 벌써 그런 말씀을 해요!”
해산의 품에 안겨 있던 진해의 목소리에 열기가 실렸다. 버둥거리며 해산의 품에서 빠져나오려 했지만 해산은 어느 때보다 강하게 진해를 끌어안아 그를 제 품에 가두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의 얼굴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를 위해 떠나라고 말하면서 그가 자신과 함께 죽어 주길 원하여 추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내가 있잖아요! 내가 있는데 왜 벌써 포기해요! 난 과거도 안 치르고 육품 어사라구요! 잠춘동 만재라구요!”
“그래. 알고 있다.”
“저는 호부시랑 어른이랑도 알고 벌써 동가대 어른 집에도 드나들어요! 황상도 저를 꽤 신임하시고!”
“그래.”
“그런데 그런 제가 있는데 왜 그런 말을 해요!”
마침내 품에서 빠져나온 진해가 붉어진 얼굴로 빽 소리쳤다.
“고가 지는 것보다 네가 다치는 게 두려우니까.”
“……네?”
“고가 앞으로 겪을 가시밭길에서 너만은 무사하길 바라니까.”
“해산 도련님…….”
“독을 먹거나 마차에서 굴러떨어지거나 하는 건 아무렇지도 않다. 하지만 네가 독을 먹거나 다치거나 하면 고는 어찌 반응할지 고조차 알 수 없어. 네가 고뿔로 아픈 것만으로도 이리 가슴이 아프니 말이다. 그러니 해야. 약조해다오. 고에게 패색이 짙어지면 반드시 월국을 떠나겠다고. 떠나서…… 행복하게 살겠다고.”
“그럼 해산 도련님이 이기면요, 해산 도련님이 황상이 되시면요?”
해산은 그리되진 않을 것이라 말하고 싶었지만 분기가 가득 찬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진해에게 차마 그 말을 할 순 없었다. 진해에게 저를 떠나라고 말하는 순간부터 해산의 가슴이 미어질 것처럼 아팠으니까.
“그렇게 된다면 다시는 네게 떠나라고 하지 않으마. 네가 떠나겠다고 해도 고가 잡으마. 고를 떠날 수 없도록 강하게, 강하게.”
“약속이에요, 해산 도련님! 절대로 그 말 잊지 마세요! 절대 절 버리지 말란 말이에요!”
진해가 해산에게 품에 달려들자 해산은 입술을 꾹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도 진해와 떨어지지 않고 싶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는 동시에 진해의 둥근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이제까지와는 다를 것이라고 되뇌었다. 지켜야 할 것이 생겼으니 부딪치지 않게 비켜 주며 살아왔던 삶과 달리 월산에게 있는 힘껏 대항하겠다고.
그렇게 진해가 병석에 누운 지 삼 일이 지났다. 진해와 짧게 잠이 들었던 해산이 해원공부로 돌아가고 새날의 새해가 뜨기 시작했다. 허옇게 내렸던 서리가 투명하게 녹아내렸다. 어깨에 맺힌 물을 털며 황궁에서 찾아온 사자가 오 어사 댁의 문을 두드렸다.
* * *
꼭두새벽부터 남의 집 문을 이유 없이 두드릴 사람은 없었다. 특히 황궁에서 온 이라면 더욱 그랬다. 육품 어사를 새벽부터 오라 가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월국에서 단 한 사람뿐이었다.
“만세 만세 만만세! 대월국의 좌부! 천하의 주인! 영명하시고 자애로우시며 공평무사하시고―”
“오 어사, 앞으로 인사는 간략히 끝내도록 하게.”
“예! 폐하!”
조례가 없는 날이건만 안회순은 단정한 자세로 서탁에 앉아 있었다. 수북하게 쌓인 서류들이 황제가 진 짐을 대변해 주는 듯했다. 슬그머니 얻어들은 소문에 의하면 황제는 용의주도하여 진해 외에도 다른 어사들을 곳곳에 심어 두었다고 한다.
“병가를 냈다던데 몸은 좀 괜찮은가?”
해산을 닮은 얼굴이 진해의 안부를 물었다.
“팔팔 날아다니옵니다!”
안 괜찮아도 괜찮다고 대답해야 했다.
“그렇군. 젊은 나이라도 몸은 아껴야 하네. 젊다고 방심해서는 아니 된다는 말이야.”
“명심하겠사옵니다!”
황제는 진해에게 훈시를 하려다가 잠깐 말을 멈췄다. 젊은 나이라는 단어를 뱉은 뒤부터 심기가 불편해진 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진해는 문득 지순의 형제 두 사람이 모두 다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선황의 장자이자 태자였던 경순은 부상으로 인해, 삼 황자였던 지순은 산고로 인해 모두 다 젊은 나이에 일찍 숨을 거뒀던 것이다.
“좀 더 일찍 부르려 했는데 형부시랑이 자네가 근래 과로한 듯하다 말하더군. 확실히 형부 외에 호부나 이부의 결재에도 자네의 이름이 올라 있으니 과로가 아닐 수 없어.”
“월국의 관적에 올라 공무를 원활히 수행하게 함은 관리가 마땅히 행해야 할 일이 아닌지요. 소인은 그저 소인이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옵니다. 아주 작은 손길인 것을요.”
“작은 손길이 모여 산을 옮길 수도 있는 게지. 수고했네. 자네를 영찰어사로 발탁한 건 역시 잘한 일이었어.”
황제가 진해를 칭찬하자 진해는 저도 모르게 헤벌쭉 웃음 지었다. 속으로 좌부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장인어른이 저를 칭찬하자 기쁨이 만면에 새어 나왔던 것이다.
황제 회순은 그 모습을 보고 옅게 웃으며 들고 있던 붓을 내려놓았다. 진해를 미워하는 창명후라도 진해의 저 모습을 본다면 잠시나마 진해를 귀엽게 생각할 정도로 천진한 웃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포상에 자네의 노고를 치하하는 의미를 더할까 하는데 자네는 어찌 생각하나.”
“포상이요?”
“북벌의 마무리로 다망하여 이때까지 미뤄 뒀지. 자네가 섭섭하지나 않을까 모르겠군.”
그리고 진해는 회순이 난데없는 포상을 거론하자 천진한 웃음을 거두고 금세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 궁금증은 곧 해결되었으니 어조원의 내관이 유일청을 공손히 ‘모시고’ 내실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앗, 유― 공자!”
[황상~! 안녕히 주무셨어요?]
“너무 오래된 일이라 잊었나 보군. 짐이 유일청을 찾아 주면 섭섭지 않게 포상을 하겠다 했던 것 같은데 아닌가?”
“그러셨던 것 같습니다. 아니요, 그러셨습니다.”
확실히 황제가 유일청을 찾아 주면 진해에게 상을 내리겠다 했었다. 유일청을 찾는 와중에 소양자 살인 사건에 해산이 연루되고 그 누명을 벗겨 내느라 홀랑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게다가 상을 내려야 하는 건 그뿐만이 아니지. 유일청을 찾아 줌과 동시에 해원공의 누명을 벗겨 주었지 않은가.”
“아, 그건…….”
“그래, 자네가 왜 그러는지 알고 있어. 다들 짐이 해산이를 미워하고 월산이를 편애한다 하여 그러는 게지?”
편애하고 자시고 모르는 사람이 봐도 해산은 미움받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야. 짐은 짐 나름대로 해산이 역시 사랑하고 있다네. 누가 뭐래도 짐의 자식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공의 봉작을 내리지도 않고 그냥 황자로 두었겠지. 전례가 없었던 것도 아니야.”
진해 역시 황제가 해산을 미워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의외의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진해가 그러거나 말거나 황제는 제 무릎에 앉은 유일청에게 해바라기씨를 먹이느라 바빠 보였지만.
“그러나 짐은 황제일세. 해산이의 아비일 뿐만 아니라 자네가 말하는 대로 이 월국의 아비이지. 뛰어난 후사를 세워야 월국이 평안하네. 월산이에게도 황통이 흐르니 짐은 당연히 두 아이를 비교할 수밖에 없어.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면 더욱 그렇지.”
“뛰어난 재능…….”
진해가 말을 읊조리자 회순이 힐끗, 그러나 예리하게 진해의 표정을 살폈다. 유일청을 쓰다듬는 손과 눈이 다르게 움직였다. 목소리 역시 평온 그 자체였다.
“겉만 본다면 해산이야말로 황제의 재목이지. 하나 내면은 또 다르네. 월산이는…… 죽은 제 우부와 정반대야. 지순도 화석정군도 온화한 이인지라 만사에 무른 면이 있었는데 월산이는 맺고 끊음이 분명해.”
분명하긴 분명했다. 파각사를 보내 각인을 끊어 낼 정도니까.
“그럼 황상께서는 어째서 성월공 마마를 태자로 삼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갑자기, 진해의 입에서 저도 통제할 수 없는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월산의 이야기가 나오면서부터 고여 있던 감정이 덩어리가 되어 진해의 입 밖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제게 파각사를 보내 소중한 것을 앗아 간 월산을 칭찬하는 말에 저도 모르게 반발해 버린 것이다.
‘앗차!’
한낱 육품 어사가 하기에 지나치게 건방지고 무례한 말이었다. 진해는 제 뒤통수를 연거푸 내리치고 싶을 정도로 당황했으나 물은 이미 엎질러진 후였다. 이왕 엎질러졌으니 그 위에 오줌을 싸든 씨를 심든 뭘 하든 해서 수습을 해야 했다.
“뛰어난 재능에 황상의 손길이 더하면 더욱 화려하게 개화하지 않을까요? 사실 지금도 조정은 두 갈래로 나뉘어 있지요. 소신은 미천하여 잘은 모르지만 이 대립은 두 마마님께서 태어나신 후 줄곧 이어져 왔다고 들었사옵니다. 이렇게 길게 다투느니 차라리 어서 빨리 결말을 내 둘을 딱 합치는 것이 월국을 평안하게 하는 길이 아니온지요?”
그래서 진해는 눈 딱 감고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제 목숨이 위험하지 않을 정도로 살살 돌려 가며 황제가 들어도 기분 나쁘지 않을 말만 골라서 했다. 해산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았지만 괜히 긁어 부스럼 하지 말고 잠시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자네는 생각보다 보는 게 많군.”
“……저를 거두신 황상께 보탬이 되기 위해서지요.”
“그래?”
유일청을 쓰다듬던 회순의 손이 어느새 멈춰 있었다. 차기 황위는 고작 육품 따위와 의견을 나눌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문제가 아니었다. 누가 황위에 오르느냐에 따라 반대편이 모조리 갈려 나갈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래. 그랬었지. 하지만 자네가 이리 눈이 좋을 줄은 몰랐어.”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듯 황제의 목소리가 낮게 잦아들었다. 진해의 목덜미에 땀이 맺히고, 궁실 안은 멀찍이 서 있던 내관이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정적에 휩싸였다.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그런데 갑자기 유일청이 뭔가 신호라도 받은 것처럼 고개를 쳐들며 진해의 아연하게 만들었던 장기를 발휘했다. 돌이라도 맞은 것처럼 뒤를 휙 돌아보며 또렷하고 명료하게 소리쳤던 것이다.
“뭐, 좋네. 고여만 있으면 썩게 되니까 때로는 새로운 의견 역시 필요한 법이지.”
단지 새가 사람 말을 흉내 냈을 뿐인데도 궁실 안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짜부라질 것처럼 진해를 짓누르던 긴장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오 어사, 조금 전에 말했듯이 해산이는 짐의 자식일세. 자네라면 하나뿐인 아들이 뒤떨어진다 하여 모질게 굴 수 있겠나?”
“아니요.”
“대답이 빠르군.”
“제 아들이라면서요?”
진해는 상식이 깃든 눈으로 황제와 마주 보았다. 진해에겐 너무나 당연한지라 신념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래. 그런 걸세. 짐도 해산이가 짐의 자식이기 때문에 강하게 키워 주고 싶은 것이며, 그래서 그 애를 구한 자네에게 포상해 준다는 걸세. 알겠는가.”
손가락을 물며 장난을 치는 유일청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이 말이 왜 이렇게 길어졌는지 모르겠다고 황제가 자그맣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진해의 머릿속에 포상이 문제가 아니었다. 해산이 황제의 자식이라는 말, 그 말이 번개처럼 콱 들어박혔다. 만약 해산이 지난밤 자신에게 떠나라고 하지 않았다면 저 말이 이렇게나 선명히 들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황상. 그럼 제가 받을 포상이 두 가지라는 것이옵니까?”
“그렇게 되겠지.”
진해는 황제가 시간을 주는 동안 머리를 굴렸다. 아무리 유일청을 아낀다고 한들 해산을 태자로 만들어 달라거나 좀 더 그럴듯한 권한을 달라거나 하는 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을 터였다. 그렇다면 진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유용하게 효율적인 소원을 황제에게 말해야 했다. 진해는 황제의 발 근처를 바라보다 문득 뜻밖의 인물, 아니 새 한 마리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새로 인해 빌 수 있는 소원 역시.
“저 사실 유일청을 찾으러 돌아다니면서 일홍련에게 정이 많이 들었습니다.”
“일홍련이 갖고 싶은가?”
“아뇨!”
황제는 진해의 즉답에 조금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소인의 집에는 일홍련처럼 귀한 새를 기를 새장이 없사옵니다. 대신 일홍련과 자주 만날 수 있도록 제게 어조원의 출입 권한을 주셨으면 합니다.”
“흠?”
“그리고 다른 소원은…… 제가 아니라 다른 이를 위한 것인데 들어 주실 수 있을는지요?”
“무엇인가.”
진해는 침을 삼키고 질끈 두 눈을 눌러 감았다.
‘에라이, 모르겠다. 하지만 해산 도련님에게 가장 도움이 될 사람은 이 사람뿐이야! 이 사람이 나서야 그 집도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지!’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진해는 어조원 출입 권한을 달라고 할 때와는 다른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잇기 시작했다. 마치 주사위를 던질 때와 같은 감각이었다. 위험한 판에 잘못 끼어 손가락이 잘리기 전과 비슷한 감각이 진해의 피부 위를 기어 다녔다.
“폐비 연씨 저주 사건에 연좌로 얽힌 사람들의 죄를 사해 주십시오!”
진해의 말이 끝나자마자 황제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다.
“오 어사. 지금 자네가 입에 올린 이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는가.”
황제는 목소리가 싸늘해짐과 동시에 손을 들어 어조원의 내관을 불러들였다. 유일청은 갑자기 서늘해진 주인의 목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제는 마치 험한 일을 피하게 하려는 것처럼 유일청을 궁실 밖으로 내보냈다. 진해는 유일청이 멀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자신이 이번엔 정말로, 단번에 죽을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잘 모르옵니다!”
진해는 반질반질한 혓바닥으로 이 험한 세상을 살아왔다. 물론 진해에겐 어여쁜 동생과 작지만 안락한 집, 실한 거시기도 있었지만 일단은 혓바닥이 진해가 가진 가장 큰 자산이었다.
“모른다고? 그럼 죄인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자가 일으킨 사건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연루된 죄인들의 죄를 사해 달라 청했다는 건가.”
“예, 하지만 황상께서 관례를 치르지 않은 죄인들의 목숨을 붙여 놓으라 명하신 것은 압니다. 그리고…… 저를 이 자리까지 끌어 주신 제 의형인 동십사가 언제 세상을 뜰지 모른다는 것도 압니다.”
“동십사가 자네의 의형이라고?”
“비천한 저를 알아봐 주시고 육등시위에 추천해 주셨지요. 솔직히 동 형이 없었더라면 제가 이렇게 황상의 앞에 서는 일은 요원했을 것이옵니다.”
황제는 진해의 입에서 동십사라는 이름이 나오자 딱딱해진 얼굴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황제 회순은 대노해 동십사를 처형하려 했지만 그 분노가 풀리자 동십사가 무과에 응시하는 것도 허해 주었고, 동십사가 제 몫을 다하자 그가 이등시위에 오르는 것도 허락해 주었다. 납작 엎드린 진해의 등을 보며 황제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목이 날아갈 뻔하고도 아직도 미련을 못 버렸던가.”
신기하게도 과거 동십사가 젊은 시절 이수했던 관직도 형부의 것이었다. 주로 미결 사건이나 심리나 판결에 수상쩍은 점을 발견하여 파헤치고 해결하는 일을 맡았었다. 우직하면서도 집요한 성품 덕에 동십사는 제법 촉망받는 관리였었다. 이대로라면 십 년 안에 형부시랑이 바뀌겠다는 이야기마저 있었었다.
그러나 젊은 시절의 동십사는 지금보다 훨씬 고지식했다. 고지식하다 못해 딱딱하고 둔탁해 마치 벽돌을 연상케 했다. 예부상서인 아비는 흡족해했으나 그 시절의 회순에게는 그 완고함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다. 폐비 연씨, 원귀비의 사건을 다시 조사해야 한다는 말만으로도 자신이 위협받는다고 생각했었다. 덕망 높은 문인이었던 폐비 연씨의 아비 연재균은 슬하에 수많은 제자를 두었고 연재균이 자결한 일 탓에 그의 제자들이 황제 회순에게 알게 모르게 반감을 품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뇨, 동 형은 제게 원귀비 저주 사건, 즉 폐비 연씨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 자네가 어사가 되었으니 말 한마디 할 법도 한데. 그렇다면 오 어사 자네는 무엇 때문에 폐비 연씨의 사건에 연루된 죄인들을 사해 달라 청하는가.”
“앞서 말했듯이 동 형이 좀…… 안 좋습니다.”
진해는 황제가 조금 누그러지자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이야기를 끌어 나갔다. 입덧이 심한 것 빼고는 노산치고 양호한 편인 동십사를 엄청나게 심각하고 위중한 상태로 과장했다. 그런 후에는 동십사가 아심을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이사이에 어린 아심이 얼마나 비참하고 불쌍하게 살아왔는지 끼워 넣는 건 물론이었다.
물론 아심은 진해에게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한 번도 이야기한 적 없었다.
“그리하여 힘겹게 살아온 아심은 드디어 사랑하는 사람과 맺어지게 되었습니다. 동 형 역시 드디어! 혼인하고 싶을 정도로 사랑하는 이를 찾게 되었구요. 이것이 천생연분이 아니면 무엇일까요? 아아, 그런데 이게 무슨 변고입니까.”
“……계속하게.”
“회임한 동 형이 그만! 나날이! 나날이!! 말라 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 사랑 동십사, 그대가 죽으면 난 어찌하면 좋습니까, 나도 그대와 함께 따라가겠소!”
입이 무거운 편인 아심이라면 죽어도 하지 않을, 동십사가 본다면 어이가 없어 눈을 부릅뜰 흉내를 황제는 제법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유일청의 재롱을 볼 때와 비슷한 눈빛이었다.
“아, 안 된다~ 아심! 절대로 나를 뒤따라와선 안 돼, 부디 내가 죽더라도, 이 몸이 차가운 땅에 묻히더라도, 너는 무사히 살아야 한다! 무사히 살아서, 흑! 우리 아이를, 우리 후사를 잘 길러 줘야 해! 동가의 적통 자손인 우리 아이를!”
“적통이라고? 동가대가 어쩐지 급하게 혼례를 치른다 싶더니 정실의 출신이 비천해서 그런 것이었나.”
“그런 것도 있고 이미 넘을 선은 다 넘어서 동가대 대인께서 두 손 두 발 다 든 것도 있사옵니다.”
“그래? 동십사가 그 정도로 연모하는 이란 말이지. 흠? 잠깐, 혹시 그 아심이라는 이가 자네가 짐에게 폐비 연씨 사건에 연좌로 연루된 이들을 사해 달라는 연유인가?”
황제 회순은 공으로 황제가 된 것이 아님을 증명하듯 영리했다.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대더니 가만히 턱을 쓰다듬었다. 눈빛이 깊은 게 생각에 잠긴 듯했다. 진해는 눈치를 살피며 슬금슬금 다가가 그의 옆에 착 붙어 섰다. 어전 시위들의 손이 칼 손잡이에 붙었으나 진해는 전혀 두려워함이 없었다. 성질 급한 추피동 깡패들의 칼부림에 비하면 저 정도 위협은 아이 재롱 수준이었다.
“폐하~ 태어날 아이는 아무 죄가 없사옵니다~ 조부도 아니고 증조부가 잘못한 죄가 아이에게 딱지로 붙는 건 너무 잔혹한 일이잖습니까~”
“죄인의 자손일 뿐이다.”
“죄인의 자손이기도 하지만 예부상서 대인의 손자기도 하지요. 동가대 대인은 이 나라의 충신이고, 동가는 월국 가례의 집대성이라고 불리는 유서 깊은 명가인데 그런 가문의 자손이 죄인의 자손이라니!”
그러면서 진해는 손을 뻗어 황제의 어깨를 살살 주무르기 시작했다. 진해의 손이 닿는 순간 시위들이 검을 뽑으려 했으나 황제가 손을 들어 그들을 만류했다. 청탁을 넣으며 어깨를 주무르는 꼴이 제법 웃겼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폐비 연씨와 주모자들은 대대손손 죄를 받아야지요.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악독한 윗전에 이용당한 아랫것들은 무슨 죄입니까.”
“흠, 확실히 단순 연루로 증손까지 죄를 묻는 건 잔혹한 일이긴 하지. 좀 더 왼쪽을 주무르게.”
“이쪽이요?”
“그래, 거기.”
그런데 진해의 손놀림이 황제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황제의 내관 중에는 황제의 안마를 전담하는 이도 있었는데 진해는 안마로 먹고사는 것도 아니면서 그자보다도 황제의 어깨를 더욱 잘 주무르는 듯했다. 어찌나 잘 주무르던지 지끈거리던 머리가 다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문득 황제는 해산과 진해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을 떠올렸다. 소문이 아니라 해산 옆에 심어 놓은 첩자가 보고한 소식이었다. 해산에게 양인이 접근하지 못하게 막은 건 아니었지만 해산 본인의 성격이 신중하고 또 월산에게 주눅 들어 자란지라 황제가 알기로 해산은 단 한 사람의 양인도 거느린 적이 없었다. 혼담도 흐지부지되기 일쑤였다.
“과연 그런 것인가.”
“예?”
“아니, 혼잣말일세. 이번엔 오른쪽을 풀어 보게.”
“넵! 그래서 말인데요, 폐하. 동 형이 어찌나 뭘 못 먹던지 그 건장하던 사람이 가을철 마른 풀떼기가 되어서―”
그런 해산의 곁에 붙어 있다 하여 단순히 말 잘하고 잔머리 잘 굴러가는 측근인 줄 알았는데 이 범상치 않은 손맛을 보니 황제는 해산이 진해를 왜 곁에 두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저 측근으로만 보던 것이 묘하게 인상이 달라 보이는 것이다. 정실이든 측실이든 예비 사위라는 말이었다. 황제는 눈을 가느스름히 뜬 채 진해를 이리저리 저울질해 보았다.
처음에 원귀비 저주 사건의 연좌제를 사해 달라 했을 때는 무슨 꿍꿍이가 있나 싶었는데 지금 보니 이놈은 그저 제 의형인 동십사가 낳을 아이에게 흠을 지워 주고 싶을 뿐이었다. 연재균이나 원귀비에 대해선 한 음절도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있었다. 하긴 이자가 코흘리개 시절일 때 죽은 이들을 어찌 알고 있겠는가. 그것도 잠춘동 빈민가에서 자란 자가.
황제는 진해의 안마를 즐기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황제가 눈을 감자 진해의 목소리가 자그맣게 줄어들었다. 재주도 있고, 눈치도 좋았다. 무엇보다 출신이 천한 점이 측실로 딱이었다. 슬슬 월산에게 혼담이 들어올 테니 해산에게도 말이 나오지 않게 이놈을 붙여 주는 게 좋을 듯했다. 황제는 폐비 연씨, 연광의 사건에 연루된 이들의 이름과 그들에게 내려진 형벌들을 하나씩 떠올리기 시작했다.
“역시 포상은 다른 것으로 하지.”
“아이, 폐하~ 그러지 마시고~”
“연좌로 연루된 이들은 사해 주겠네. 하지만 이것은 월산이 무사히 북벌을 마치고 돌아온 걸 축하하는 의미에서 행하는 일이야. 북벌에서 많은 피를 흘렸으니 그만큼 길한 일로 상쇄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 그럼?”
“동십사에게 가서 전하게. 그의 정실은 이제 죄인의 몸이 아니니 떳떳이 행동해도 좋다고 말일세. 아이 역시 명실상부 동가의 적통이라고.”
“만세! 황제 폐하 만만세!”
황제가 들어줄 줄은, 아니 어떻게든 들어주게 만들 셈이었지만 정말로 제 청을 들어줄 줄은 몰랐던 진해는 만세를 부르며 굉장히 기뻐했다. 동십사 역시 이 소식을 들으면 기뻐할 것이 분명했고, 진해가 이 일을 끌어냈다는 걸 듣는다면 동십사의 아버지인 동가대도 기뻐할 것이다.
거기다 관직에 있는 동십사의 다른 형제들이나 친인척들도 진해에게 고마운 마음을 품을 것이며 그것은 진해의 주군인 해원공에 대한 감사로 이어질 것이다. 연좌제로 수난을 겪은 이들은 더욱 그럴 것이다. 같은 빈민이라도 죄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천차만별이었으니까.
그리하여 진해는 황제에게 어조원의 출입 권한을 받음과 동시에 작은 청탁권 하나를 받았다. 황제에게 할 수 있는 작은 청탁이란 게 무엇인지 가늠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진해가 원하는 건 모두 다 이루어진 셈이었다.
* * *
“아싸 세 마리! 났다!”
“아이고, 오 대인! 좀 봐주세요!”
그리고 진해는 지금 황제로부터 받은 권한을 아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중이었다. 진해는 어조원에 출입하기 시작하자마자 자신이 여해루에서부터 차곡차곡 쌓아 왔던 금전을 아낌없이 풀기 시작했다.
“그런 거 없고! 소연자, 다 받아 적어!”
“예! 오 대인!”
동시에 풀었던 금전을 진해의 특기로 고스란히 빨아들였다. 진해는 이제야 통성명을 하게 된 일홍련의 전담 내관, 소연자를 제 비서처럼 부리면서 울상을 한 내관들의 이름을 받아 적게 했다. 소연자가 손에 든 두툼한 서책은 진해에게 도박 빚을 진 궁인들의 명부였다.
“오 대인은 정말 신의 손이신 것 같습니다. 어찌 그리 패를 딱딱 골라 맞추십니까?”
“오 대인이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는데 이 녀석이랑 저랑 오 대인 한번 이겨 보겠다고 짰거든요.”
“그랬어?”
알고 있었어, 이놈들아.
진해는 속으로 실쭉 웃으면서 만가헌의 의자에 느긋하게 기대앉았다. 궁인들이 속임수를 써 봤자 손가락이 날아가고 발가락이 날아가는 도박판에서 살아왔던 진해에게는 땅 짚고 헤엄치기 수준의 얕은 수작질이었다. 진해는 어느새 자신이 뿌렸던 금전의 배는 넘는 막대한 채무를 거머쥐었다.
[뾰롱―]
맨날 만가헌에 와 있다 보니 홍련이의 집요한 눈빛도 이젠 익숙해지는 것 같았다.
[삐이…….]
[까악! 깍!]
[구우.]
홍련이를 쫓아다니는 다른 새들도 제법 눈에 익었다. 험상궂게 생긴 백살호가 홍련이에게 고기 조각을 찢어 주는 모습은 이젠 일상이나 다름없는 장면이었다.
“아아~ 피곤하다~ 잠깐 패를 멈출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모, 목 마르시지요, 오 대인?”
“시장하시지 않습니까? 제가 어선방에 아는 놈이 있는데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아니, 그런 것보다 여기 좀 심심하지 않아? 어조원 밖으로 함부로 나다닐 수는 없으니 이것 참. 거기! 누가 재밌는 얘기 좀 해 봐!”
“재밌는 얘기요?”
“왜 있잖아, 그 궁중의 방중술이라든가―”
하지만 진해가 아무런 생각 없이 어조원에 와 죽치고 앉아 있는 건 아니었다. 진해는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다 똑같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고, 제 특기를 이용해서 궁중의 사람들과 연을 트고자 했다. 실제로 진해의 계획은 성공해서 궁에서 놀음 좋아한다는 궁인이란 궁인은 죄다 진해의 명부에 이름이 적혔다. 온 사방 천지, 온 궁의 궁인들이 다 진해의 빚쟁이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말입니다, 저기 우물에는 아직도 가끔씩 흐느끼는 소리가 난답니다!”
“으아, 그런 걸 왜 안 막고 있는 거야?! 난 무서운 건 질색이라고!”
“그러고 보니 그렇긴 하네요? 왜 안 막는 거지?”
“으이구, 바보야. 없는 우물을 파면 모를까 있는 우물을 왜 막아?”
“마른 우물이잖아?”
“마른 우물 같은 소리 하시네. 너 그 우물 들여다봤어? 본 적 있어?”
“듣고 보니 말랐다는 소리만 들었지 본 적은 없네……?”
그리고 진해가 궁인들과 연을 트고자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진해는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하며 궁인들이 하는 이야기를 고스란히 귀에 담았다. 이 사람들에게는 잡담이나 시시껄렁한 일상 이야기였지만 궁 밖에 사는 진해에겐 하나같이 새로운 내용뿐이었다.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는 우물 이야기 같은 것도 있었지만 해산의 우후인 황후 사마계의 이야기라거나 황제나 성월공의 이야기 같은 건 밖에서는 천만금을 줘도 듣기 힘든 이야기들이었다.
‘무관들을 콱 틀어쥔 창명후가 성월공의 후견인 이상 해산 도련님은 다른 쪽으로 파고들어야 해. 꼭 뛰어난 사람이 머리가 되라는 법은 없거든.’
진해는 이 이야기들을 모아서 쥐어짜고자 했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어떤 일은 서두르면 도리어 망칠 수도 있었다. 쥐어짜고, 거르고, 또 쥐어짜고, 거르고, 이 일련의 과정을 반복해서 해산에게 도움이 될 만한 귀중한 한 방울을 얻어야만 했다.
“그런데 오 대인. 정말이신가요?”
“뭐가?”
“흠, 흠! 제가 일부러 엿들은 건 아닌데 여기 이치가…….”
“아니, 난 또 왜?”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
“어흠! 그러니까 이 친구가 말하기를 오 대인께서 그, 폐비 연씨의 저주 사건에 연좌제로 연루된 사람들의 죄를 사해 달라 청하셨다면서요?”
“야! 내가 비밀이라고 했잖아!”
꽥 소리를 지르며 백살호의 전담 내관의 입을 틀어막은 건 진해가 황제와 독대할 때 유일청을 데리고 들어왔던 내관이었다. 확실히 유일청을 돌보기 위해 어전 시위들만큼이나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귀 좋네? 어떻게 그걸 다 들었대?”
“하하, 하, 오 대인~ 제가 대인께 진 빚이 오십 냥입니다! 오십 냥을 죽이실 건 아니죠? 오십 냥이 적은 돈은 아니잖아요? 그렇, 죠?”
“참 나, 이 친구야! 날 어떻게 본 거야? 내가 고작 오십 냥에 사람을 죽일 거 같아? 소연자~?”
“예, 오 대인.”
“이 친구가 참 재밌는 농을 하네. 농값으로 열 냥을 제해 줘.”
진해가 씩 웃으며 소연자에게 손짓하자 둥글게 앉아 있던 내관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고급 내관들은 상서와도 비등한 품계를 받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지만 이들처럼 말단에 자리한 내관들에겐 열 냥도 제법 큰 액수였다. 궁에서 일하니 꾸준히 갚아 나갈 수는 있지만 단번에 금 열 냥을 변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진해는 그 금 열 냥을 농담 한 번에 제해 주었다. 별 시답지도 않은 농인데도 자기가 재밌게 웃었다고 그대로 깎아 주었던 것이다. 진해에게 빚을 진 내관들의 눈빛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눈치 빠른 이들은 진해가 왜 자신들과 어울리며 빚을 지웠는지 알아채기 시작했다.
“나는 말이야,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사람이거든. 내 의형인 동십사 대인이 목숨처럼 사랑하는 정실이 자기가 저지르지도 않은 죄 때문에 평생 숨어 살아야 한다는 건 참, 너무하지 않아? 게다가 내무부 이등시위를 우부로 둔 아이에게도 죄인의 낙인이 찍히다니! 내 두 눈 멀쩡히 뜨고 있는 한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야! 불우했던 내게 손을 내밀어 주신 동 형의 은혜를 갚아야 하고말고!”
“캬! 역시 오 대인! 양인 사나이십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황상의 역린이라 입도 벙긋하지 못하던 그 일을 이렇게 해결하시다니! 사실 저도 연좌로 엮인 이들은 가엽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연좌라는 것도 범위가 참 애매해서 정말로 억울하게 엮인 이들도 많았다니까요?”
“아, 그래? 동 형의 정실은 조부가 원귀비 궁의 호위였던가 그렇다던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엮였길래 그래?”
“그게 말이지요. 당시 원귀비, 즉 폐비 연씨의 우부가 황상의 스승을 맡으실 정도로 힘 있는 문인이었답니다. 이건 우리끼리 하는 이야기지만 황상을 옹립한 것도 그 양반이 있는 학연 없는 지연 다 모아서 해낸 거라니까요.”
“오오, 그건 몰랐는데. 난 창명후 그 영감님만 황상의 공신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진해가 창명후를 영감이라 칭하자 내관들이 슬그머니 서로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폐비 연씨 사건은 궁에 사는 이라면 늙거나 어리거나 다 아는 일이었지만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황상과 창명후 때문에 쉬쉬하기 바쁜 사건이었다.
그런데 황상께 폐비 연씨의 연좌를 사하게 만든 진해가 창명후를 대놓고 까고 있었다. 진해가 어전에서 창명후에게 도리를 따지며 꾸짖은 사건은 내관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대사건이기도 했다. 그런 진해가 폐비 연씨 사건을 궁금해하는데 말하지 못할 것이 무엇 있으랴. 이 자리에 없는 창명후의 눈치를 살피기보다는 눈앞의 진해에게 잘 보여 도박 빚을 갚는 게 훨씬 이득이다.
“에이, 사실 창명후 합하보다는 죽은 안국후가 더 공을 많이 세웠죠. 게다가 폐비 연씨도 공으로만 따지자면…….”
“엥? 폐비 연씨는 또 왜?”
“그게 말이죠. 해국이 봉기하고 황상께서 황위에 오르시기 직전에―”
내관들은 늙은 내관에게서 전해 들은 옛날이야기를 물 만난 고기처럼 신나게 풀어 댔다. 진해는 폐비 연씨, 원귀비 연광이 어떻게 월국을 구해 냈는지를 들으며 점점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 갔다. 무인도 아니고 문인이었다면서 어떻게 나라 밖을 나가 고산맹까지 갈 생각을 했을까. 거기 친우가 있다고 해서 무조건 동맹을 체결할 수 있을 거란 보장도 없는데.
“허어, 이야기만 들으면 귀비로도 모자라겠는걸?”
“안 그래도 안국후가 그걸 그렇게 원통해했답니다. 창명후 합하도 거품을 물고 반대했었구요. 하지만 전쟁이 길어지면 양측 다 손해를 보잖아요. 결국 안국후가 한 발짝 물러났죠.”
“호구인 거야, 보살인 거야?”
“성질 더러운 창명후랑 어려서부터 친우로 지내면서 한 번도 다툰 적이 없다는 걸 보면 보살이겠죠?”
유일청의 내관이 안국후의 인품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백살호의 내관이 쯧쯧 혀를 찼다. 그는 유일청의 내관과 다른 의견을 가진 듯했다.
“에이, 보살이 낳은 아들이 그런 짓을 해? 난 전혀 아니라고 봐. 그냥 다른 높으신 분들처럼 발이 넓어서 그런 평을 받은 거겠지.”
“야, 이건 소족자 태감께서 내게 말씀해 주신 거거든!”
“치매기가 올락말락한다는 그 태감?”
“이게 정말!”
“잠깐, 잠깐, 싸우지들 말고 얘기나 계속해 봐. 난 도중에 끊어지는 건 딱 질색이란 말이야, 어? 내 말 알겠어?”
두 내관이 투닥거릴 기세이자 진해는 손에 든 투전 패를 위협적으로 흔들어 보였다. 두 내관은 진해의 손에 은근슬쩍 보이는 패를 바라보며 조개처럼 입을 꽉 다물었다. 척 봐도 둘의 패보다는 훨씬 웃도는 좋은 패였다. 진해가 놀음을 계속하면 빚이 또 늘어날 것이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이야기였다.
“그래, 그래서 그 보살의 아들이 뭔 죄를 저질러서 폐비가 된 거야? 내가 황상이면 한 번쯤은 눈감아 줄 법도 한데 말이지. 거기다 저주라니! 요즘 세상에 그런 걸 믿는 사람이 있어?”
“음, 사실 저도 그게 의문이긴 한데 말이지요. 당시에 그 저주 때문에 죽은 사람이 있으니 벌을 내리지 않을 수가 없었겠죠?”
“엥?”
“확실히. 거기다가 저주를 했다는 명백한 증거도 나왔고요.”
“뭔데, 무슨 짚 인형이라도 나왔어?”
“하하, 오 대인도 참. 겨우 짚 인형 가지고 사람 죽은 증거가 되겠어요? 그 정도면 걍 며칠 근신만 받고 말지.”
진해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 홍련이는 가장 높은 횃대에 앉아 만빙빙의 털 손질을 받고 있었다. 뒤쪽에는 백살호가, 우측에는 만빙빙이, 좌측에는 야독월이 동시에 홍련이의 깃을 손질하는 중이었는데 홍련이의 체구가 심히 작아 마치 사지를 잡아당기는 모양새였다.
뭔가 심각한 이야기가 나오려는 것같은데 앞의 내관들은 옛날이야기라 그런지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사실 진해에게 필요한 건 성월공 안월산과 황제에 대한 이야기인지라 굳이 듣지 않아도 되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진해는 황상의 역린이라는 이야기를 들어 두고 싶었다. 진해가 이 사실을 안다는 자체만으로 황제의 눈 밖에 날 수 있음에도 진해는 반드시 이 이야기를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말이죠, 폐비 연씨가 말입니다. 낳았답니다.”
“낳았다니? 회임 중이었었어?”
“아, 확실히 황상이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시기였지.”
“그렇지, 황태공께서도 황후마마께서도 어쩜 그리 짠 것처럼 연이어 해산을 시작하셨는지.”
“맞아, 맞아.”
“아니 그래서 폐비 연씨가 낳았다는 게 뭔 말이야? 낳았다면 황자가 한 분 더 계신다는 말이야?”
그리고 진해의 예감은 딱 들어맞았다. 진해는 해산 외에 다른 황실의 혈통이 있을 수도 있다는 엄청난 사실에 오싹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만약 저 황자 역시 음인이라면 해산에게는 또 다른 경쟁자가 있다는 말이 아닌가.
“아뇨, 이 황실에 황자마마는 해원공 한 분이십니다. 같은 품계는 성월공 마마뿐이시고요.”
“낳았다며?”
그리고 두 내관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잠깐 말을 미루는 듯했다. 소연자는 언제 빠져나갔다 돌아왔는지 함께 먹을 군것질거리를 들고 오는 중이었다. 이윽고 고소한 냄새가 코끝에 맡아질 정도로 다가오자 망설이던 두 사람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유일청의 내관보다 백살호의 내관이 담이 조금 더 큰 듯했다.
“그게 말입니다……, 폐비 연씨는 사람의 자식이 아니라, 그…… 고양이라고 할까, 쥐라고 할까…….”
“……뭐?”
“저도 듣기만 해서 잘 모르겠는데 황태공이 산고로 돌아가신 날 폐비 연씨도 해산을 했는데 사람이 아니라 짐승의 자식을 낳았다고 합니다. 화석정군이 황상께 황태공의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폐비 연씨가 황태공께 악담을 퍼부었던 사실을 고했고, 유일한 혈육인 황태공이 돌아가신 황상께서는…….”
유일한 혈육이자 자신에게 황위를 양보했던 동생이 저주로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 황제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진해는 폐비 연씨를 입에 올리자 순식간에 굳어졌던 황제의 얼굴을 떠올렸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으로 정평이 난 회순 황제가 그런 식으로 분노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혈육의 죽음. 사람이라면 누구나 감정적이 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진해는 새삼 젊은 시절의 동십사가 엄청나게 담이 크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에이, 재수 없어! 무슨 재미난 이야기인가 했더니 또 무서운 이야기야!”
진해는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기 전 얼른 패를 뒤집어 버렸다. 과연 진해의 패는 두 내관의 패를 상회하고도 남을 만큼 굉장한 패였다. 패를 본 내관들이 동시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런 이야기인 줄 알았으면 미리 귀띔을 해 줘야 할 것 아냐! 난 무서운 건 질색이라니까! 그것보다 다른 재미난 이야기는 없어? 난 연애담이 참 좋더라고. 아, 맞아. 혹시 소산자 태감이 지금 교제하는 분이 있으시던가?”
“예?! 소산자 태감이요!?”
“응. 수행총감이신 소산자 태감.”
“아이고, 오 대인~! 궁인들은 다 황상의 사람들이잖아요~!”
“아니, 누가 뭐래? 그래서 있어, 없어?”
겉으로는 음흉한 웃음을 웃으면서 진해는 속으로 폐비 연씨에 대해 생각했다. 저주의 증거로 짐승의 아이를 낳아서 유폐당했다니. 이 월국에서 가장 번성한 곳에서 일어났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걸 합리적이라는 황상이 그대로 믿었다는 건 더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었고.
‘하지만 안국후가 자결하고, 창명후가 뇌옥에 갔다 오면서 모든 권력이 황상에게로 흘러 들어갔어. 문신들은 황상이 무서워 입을 다물었고, 뭉쳤던 무신들은 단번에 흩어졌지. 만약 폐비 연씨가 그대로 음인 황자를 생산했더라면…….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 감정적인 처사야, 너무 잔인해.’
진해는 손으로는 패를 돌리면서 난산으로 인한 부상을 제대로 치료받지도 못한 채 궁에 갇혀 죽었다는 가여운 음인을 떠올렸다. 검 한 번 잡지 못한 문인이면서 월국을 위해 용감하게 고산맹으로 향했다는 공신이기도 한 이를. 기분이 영 찝찝했으나 진해는 그래도 이 이야기를 들음으로 인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얻을 수 있었다. 회순 황제는 냉철하고 이성적으로 보이나 사실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감정적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그날 밤, 진해는 전혀 예상치 못한 손님의 방문을 받게 되었다. 진해는 어조원에서 노느라 다 처리하지 못한 서류를 쌓아 놓고 벼락치기로 직인을 찍는 중이었다.
“주인 나리. 웬 노인 영감이 찾아오셨는데요.”
“응? 나 지금 좀 바쁜데.”
“저도 그렇게 전했는데 보통 고집이 아닙니다. 어떻게, 사람을 써서 물릴까요?”
“뭔데? 야, 창놈어사. 너 이제 할아범도 꼬시냐? 아니지, 넌 할아범 취향이었지 참.”
그리고 그런 진해의 옆에는 호위랍시고 삼랑이 떡 버티고 서 있었다. 삼랑은 창가에 비뚤게 기대고 앉아 진해가 직인을 찍는 모습을 세심하게 비웃는 중이었다.
“흠……. 아니야, 들라고 그래.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노인을 공경해야지.”
“잠깐 한눈팔고 싶은 건 아니고?”
“……아니거든!”
“아, 그래? 한눈팔고 싶으면 늙은 노친네 말고 젊고 탱탱한 내가 놀아 주려고 했지.”
삼랑은 진해가 앓아누웠다 일어난 후로 진해에게 묘하게 질척거렸다. 전처럼 힘으로 찍어 누르거나 덮치려 하지 않고 은근슬쩍 엉기는 게 마치 유혹을 하는 듯했다. 추피동 깡패 두목인 삼랑이 유혹이라니!
“아쉬우면 말해라. 나 정향탕 안 마신 지 꽤 됐거든.”
“어어?!”
“향 맡아 보면 알잖아. 맡아 봐. 진해졌지? 점점 희락기가 다가오고 있어. 정향탕을 안 마시면 더 진해지겠지.”
삼랑은 눈이 커다래진 진해에게 다가가 그 무릎에 은근슬쩍 걸터앉았다. 길이 잘 든 고양이가 애교를 부리는 것처럼 진해의 몸에 제 몸을 밀착시키고 진해가 향을 맡을 수 있게 선과 선이 이어지는 목덜미를 진해의 얼굴 근처에 들이댔다.
“이쪽에 문신을 새길까 하는데 네 생각은 어때?”
“어, 어? 문신?”
“너 요새 어조원에 간다며, 새를 새길까? 아니면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개새끼를 새길까?”
이 추운 날 따끈한 몸이 다가와 저를 끌어안고 진해진 향을 맡게 하니 진해의 눈동자가 팽팽 돌기 시작했다. 정향탕을 안 마셨다는 게 사실인지 톡 쏘는 듯한 향이 더욱 진해져 있었다. 이 진한 향을 맡으니 삼랑이 새삼 성숙한 음인이라는 사실이 다가왔다.
늘씬한 허리는 진해의 취향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색소가 옅은 체모와 살결은 누구에게서도 찾을 수 없는 독특한 매력을 자아냈다. 거칠고 날카롭기만 했던 삼랑이 부드럽게 굴자 진해 역시 삼랑을 무턱 대고 밀어낼 수 없게 되었다.
“어험!”
“아, 씨발. 눈치도 없나.”
그런데 그때, 진해의 눈동자가 삼랑의 목덜미로 거의 넘어가려는 그때, 진해를 찾아온 손님이 커다랗게 헛기침을 했다. 삼랑의 입에서 거칠게 새어 나온 욕설이 진해의 이성을 일깨워 주었다. 진해의 눈꺼풀 사이로 진해를 들어 올려 던져 버리려 했던 해산의 모습이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방문 안 잠근다.”
“어, 응? 아?”
삼랑은 진해의 턱을 쓸며 매끄럽게 일어나 다시 본래 서 있던 창 쪽으로 돌아갔다. 생전 처음 보는 손님 앞에서 낯뜨거운 장면을 연출해 놓고도 일단은 진해의 호위 역할을 하려는 것이었다.
“꼬락서니 하고는. 네가 그러고도 대월국의 영찰어사더냐!”
“엉? 아니, 이 목소리는?!”
그리고 얼떨떨했던 진해의 정신이 순식간에 되돌아왔다. 머리 위로 깊게 눌러썼던 외투 아래로 진해에게 낯선 듯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껏 못마땅했던 기색을 띤 채 그자는 천천히 제 머리에 뒤집어쓴 외투를 끌어 내렸다. 부리부리한 호랑이 눈매에 깃든 예리한 눈빛. 늙었지만 다부진 체구. 월국을 멸망의 위기에서 이끌어 낸 희대의 명장.
“창명후…… 합하가 여긴 어쩐 일이신지요?”
놀랍게도 창명후 강절곤이 진해의 집을 방문했다. 창명후는 방 안에 감도는 삼랑의 향을 맡은 것인지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휘휘 저었다. 삼랑은 그런 창명후를 바라보며 보란 듯이 코웃음을 쳤다. 성질 더럽기로는 월국 제일을 다투는 삼랑에게 노인을 공경하는 마음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진해는 삼랑이 황제 앞에서도 그리 예를 차리지 않을 것이라는 기이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네 이놈! 감히 영찰어사란 자가 호위와 이런 불경한 짓거리를 하다니!”
그러나 창명후에 대해 공경심을 갖추려던 것도 잠시, 진해는 제게 한껏 아니꼬운 표정을 짓는 창명후 때문에 속에서 불뚝 화가 치솟았다. 이 야심한 밤에 남의 집에 쳐들어와서 뭐 하는 짓인지 참말로 알 수 없는 일인 것이다.
“퇴청한 지가 옛날이옵니다만!”
“영찰어사가 뭐 하는 자리인지 모르는 것이냐! 누구보다도 청렴하고 결백해야 할 자리이다!”
“아니 그럼 어디 절에서 뽑을 것이지 왜 애먼 사람한테 영찰어사를 시켜요!”
“무어라! 네놈이 정녕 겁대가리를 상실했구나……!”
“삼랑아! 이리 와!”
대체 왜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이곳은 진해의 집이었다. 똥개도 제 집에서는 절대로 꼬리를 말지 않는 법이었다. 어전에서도 대들었는데 제 집에서 겁먹을 리가 없었다. 진해는 재미난 구경거리에 신이 난 삼랑을 제 곁으로 불러들였고 삼랑이 가까이 다가오자마자 손목을 끌어 제 쪽으로 확 잡아당겼다.
“이, 이놈이?!”
“내 집에서 내가 음인이랑 놀든지 말든지 창명후 합하께서는 전~ 혀~ 상관할 일이 아니죠! 막말로 저도 혼기가 꽉! 차서 이젠 가정을 꾸려야 할 나이라구요! 창명후 합하가 저랑 혼례를 치를 게 아니시면 이만 빠지시죠~?”
“오진해, 네 이놈!!”
진해가 삼랑의 허리를 꽉 끌어안자 삼랑의 입술이 씰룩씰룩 호선을 그렸다. 훼방을 놓은 때려죽일 노인네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복덩이였다. 진해는 어찌나 열이 받았던지 삼랑이 진해의 귓불을 주무르고 엉겨 붙어도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찰싹 달라붙어 하반신을 비비자 창명후 보란 듯이 엉덩이를 주무르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꾸 네 이놈, 네 이놈 하시는데! 계속 그렇게 무례를 범하시면 저랑 볼 장 다 본 제 호위가 제 안전을 위해 창명후 합하께 뭔 짓을 할지도 몰라요! 그치?”
“암. 그렇고말고. 한창 재미 볼 시간에 눈치 없이 찾아온 늙은이를 봐줄 생각은 없어. 내 양인을 위해서라면 까짓거 이 한 몸 희생해 주지.”
“뭐, 뭣이?! 내 양인이라고!?”
창명후는 삼랑이 이를 드러내며 날카롭게 웃음 짓자 순간 무척이나 당황하고 말았다. 삼랑에게 두려움을 느껴서가 아니라 삼랑의 입에서 흘러나온 내 양인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진해가 황아무를 통해 정보를 얻듯이 창명후 역시 여러 사람을 통해 해산 측의 정보를 얻고 있었다. 성월공의 개선을 멈출 수 있었던 건 사위인 오천협의 간곡한 부탁도 있었지만 해산이 한창 인기가 있는, 소위 말해 민심을 얻고 있는 영찰어사 오진해와 혼례를 치를지도 모른다는 정보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해원공과 혼례를 치르기로 약조했다는 오진해가 제 앞에서 듣도 보도 못한 음인 하나를 끼고 희희낙락하고 있었다. 난잡하게 엉긴 향은 정말로 일을 치르기 직전의 그것이었다. 양인 황상이 즉위하신 이래 양인 가주들도 많이 생겨 여러 음인을 거느리는 경우가 있다지만 음인의 신분이 높은 경우에는 턱도 없는 소리였다. 어떤 음인 가주가 정신이 나가 자신의 양인을 다른 음인들과 공유하겠는가.
창명후 자신만 해도 제 양인을 아끼고 사랑하여 일평생 그와의 사이에서만 자식을 보았다. 나면서 약하게 난 이라 막내아들인 백서가 어릴 적에 눈을 감았지만 창명후는 그를 보석처럼 아끼고 사랑했었다. 그를 홀대한다면 창명후 자신을 홀대하는 것과 진배없다고 생각하기도 했던 것이다.
“영감. 알아들었으면 빨리 꺼져. 내 양인이 씨를 뿌리고 싶다고 난리잖아. 날씨도 딱 애 만들기 좋은 날씨네.”
“허, 허어!”
“아니면 내가 직접 배웅해 드려?”
삼랑이 흉흉한 기세로 주먹을 움켜쥐자 창명후는 그제야 정신이 돌아오는 듯했다. 창명후는 전장에서 이름을 날린 무장인지라 저에게 날아드는 살기를 받자 오히려 정신이 더욱 맑아지는 듯했다. 창명후는 눈을 가느스름히 뜬 채 진해와 한 치의 틈도 없이 착 달라붙은 삼랑을 훑어보았다. 해원공의 황자로서의 자존심을 생각해 볼 때 아무래도 혼례는 창명후와 성월공을 혼란스럽게 하기 위한 연막이었고 저 호위 놈이 오진해의 진짜 음인인 듯했다.
“흥! 네깟 놈이 백 명이 와도 이 몸이 하는 바를 막을 수 있겠느냐. 백로가 까마귀 노는 곳에 가지 않는 연유는 깃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이니 이 노장은 네놈이 있으라 잡아도 떠날 것이다.”
“그럼 애초에 안 오면 되잖아요?”
“닥쳐라.”
“아, 예…….”
삼랑이가 진해의 귓가에 쪽쪽 입을 맞추는 민망한 모습에 인상을 찌푸리던 창명후는 진해가 삼랑을 등을 문지르기 시작하자 그 모습을 더는 참지 못하고 등을 돌렸다. 진해는 저 양반이 대체 왜 이 시간에 자기 집에 왔는지 알지 못해 무척이나 어리둥절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너! 건방지게 감히 너 따위가 폐비 연씨를 입에 올렸다지!”
“그래요, 왜요. 저도 명색이 어사인데 못할 것도 없죠!”
“아 씨발, 좀 빨리 가라고 해…….”
진해가 창명후의 말에 긍정하자 창명후는 굉장히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삼랑이 헐떡거리는 모습을 보자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얼굴을 하면서도 진해의 얼굴을 뚫어지라 보는 게 뭔가 무척이나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다.
“……딱 한 번이다! 딱 한 번, 이 늙은이가 네 목숨을 살려 주겠다! 할 말은 이것뿐이다.”
그러나 창명후는 구구절절 말하는 대신 전혀 알 수 없는 소리를 씹듯이 뱉어 내곤 휙 뒤돌아섰다. 진해는 지금 창명후 강절곤이 제게 무슨 소리를 했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한 번이라니? 뭘 한 번 해 준다는 거야?
“하악, 거기, 좀 더, 읏, 아…….”
“목숨을 살려 준다고?”
“아, 씹……. 개좋아…….”
진해가 창명후가 왜 저러는지 몰라 이유를 곱씹는 동안 삼랑은 진해의 허벅지에 하반신을 문지르며 한껏 즐기고 있었다. 풀어헤친 진해의 쇄골에 입술을 묻고 빨아들이면서 저 혼자만의 낙원에 빠져 있었다.
음인이 앞에서 신음 소리를 내고 흐트러지니 진해의 작지만 작지 않은 진해도 부풀긴 했으나 진해는 저 창명후의 심중을 알기 위해 온 정신을 집중하는 중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제법 큰일이 났을지도 몰랐다.
“아, 아아!?”
그리고 마침내 진해는 창명후와 폐비 연씨 사이에 이어진 연을 발견해 냈다. 백살호와 유일청의 내관들이 심심풀이 삼아 떠들던 소리에서 창명후와 안국후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렸던 것이다.
“창명후와 안국후는 소꿉친구였지, 참!”
“씨발, 오진해 개새끼야!”
“그래서 그런 거였구나! 폐비 연씨의 연좌에 안국후도 엮여 있을 테니 이번 연좌가 풀리면서 죄가 사해지거나 감해진 거였어! 그래서 창명후가 이 밤에 날 찾아온 거였어!”
“야 이 씨발 새끼야!!!”
깨달음을 얻은 진해가 벌떡 일어나자 무릎 위에 앉아 한껏 달아올라 있던 삼랑이 그대로 굴러떨어졌다. 삼랑은 엉덩이의 충격과 함께 뜨겁게 불탔던 몸이 순식간에 식는 걸 느꼈다. 그런데 오진해 저 자식은 뭐가 좋은지 그랬군 그랬어를 흥얼거리며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차라리 고자였으면 포기라도 하지 하반신이 슬쩍 두툼해진 꼴을 보니 더욱 빡이 쳤다.
“아이고, 삼랑아. 왜 야밤에 소리를 치고 그래? 다 자는 시간에 시끄럽게.”
“이 창놈 새끼야, 내가 지금 소리 안 지르게 생겼어! 소리 안 지르게 생겼냐고! 어쩔 거야, 개새끼야!”
“응? 어쩌다니, 뭘?”
“좆 같은 놈이 이럴 거면 처음부터 응하지를 말던가 속 터져서 씨발!”
“아야! 아야야야야야!! 아야야!!!”
진해와 삼랑이 긴긴밤을 실랑이로 보내는 동안 눈 밑이 시커멓게 변한 집사가 와 조용히 방문을 닫아 주었다. 친척인 영 집사가 오 대인을 잘 모시면 복이 있을 거라 했는데 지금 저 모습을 보니 복이 오기 전에 잠을 못 자 이른 나이에 단명할 듯싶었다. 그렇게 자신의 잠을 희생하여 집안사람들의 수면을 지킨 집사도 잠이 들고, 자신의 숙원이 이루어진 동십사도 오랜만에 평화롭게 잠이 든 밤. 아심이 깨끗해진 저의 신분을 몇 번이고 자각하며 들떠 있던 그런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가자.”
하지만 누군가는 이 밤의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있었다. 흥성거리는 탐화가를 나와 저를 기다리는 다섯 명의 그림자를 데리고 누군가가 조용히 도성 밖으로 떠나는 중이었다. 다섯 명의 그림자 중 가장 어리고 체구가 작은 이가 깊게 눌러 쓴 외투를 살짝 들어 올려 어둑해진 도성을 바라보았다. 그가 바라본 곳은 주로 중급 관리들의 가문이 거리를 이뤄 살고 있는 곳, 해원공부 일등시위 황아무의 집이 있는 곳이었다.
“오호, 서둘러라.”
“……응.”
앞서가던 이가 저를 부르자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얼굴을 한 이가 미련 가득한 눈으로 발길을 돌렸다. 장난으로 시작했지만 해국에 있는 가족들보다 더욱 아늑한 감각을 선사해 준 이를 떠올리며 꾹 입술을 사리물었다.
어쩌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오호는 불안함이 그득한 눈으로 앞서 걸어가는 주군의 등을 바라보았다. 외투를 눌러썼지만 화려한 향과 훤칠한 체구를 가릴 순 없었다.
미려방의 일패, 여해루의 루주, 오진해의 동생. 소구 공자 정미려가 어둠을 틈타 도성을 떠나고 있었다. 예리하게 빛나는 눈이 도성 바깥에 펼쳐진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다.
* * *
참으로 안타깝게도 삼랑은 희락기가 다가왔으나 정향탕으로 그것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월국의 음인들에겐 일상적인 일이었으나 진해와의 동침을 노리고 있던 삼랑에겐 참으로 복장 터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강아지, 우리 강아지가…….”
“해야, 어찌 이리 기운이 없느냐.”
“하아……. 해산 도련님, 우리 강아지가 없어졌어요……. 우리 강아지가 나한테 말도 안 하고…….”
“해야…….”
“어허엉, 아무래도 제 혼례 이야기에 충격이 컸나 봐요! 진짜로 어디서 목을 매면 어떡해요! 이러고 있을 게 아니야! 당장 사람을 풀어서 우리 미려를 찾아야 해!!!”
“해야, 진정하거라.”
그도 그럴 것이 정미려의 행방이 묘연해진 후로 오진해가 억 소리를 내며 자리에 드러누웠기 때문이다. 오진해가 우리 강아지를 부르짖으며 헛소리를 하는 걸 본 의원은 몸은 팔팔하니 며칠 요양이나 하면 나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저번에 진해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던 해산은 진해의 곁에 착 달라붙어서 입으로만 엉엉 울어 대는 진해를 연신 달래고 어르는 중이었다.
“야, 그 새끼가 나이가 몇인데 사람을 풀어 찾고 지랄이야? 그 새끼가 서신도 써 놓고 갔다며!”
“아냐! 이건 누군가 미려에게 협박을 해서 쓰게 한 거야!”
“응? 한 시위, 정 공자가 쓴 서신이 남아 있다고?”
“그렇고 말굽쇼. 소인은 글을 몰라 뭐라 씨부려 놨는지 모르겠는데 저놈이 서신을 보고 나서 줄곧 저 지랄이지 뭡니까!”
삼랑이 던지듯 서신을 건네자 해산이 서신을 찬찬히 읽어 내렸다. 진해는 서신을 보자 속에서 뭔가가 치솟는지 끙 소리를 내며 돌아누웠다.
“형아, 나를 찾지 말아 줘. 때가 되면 돌아올게. 내가 형을 사랑한다는 그 사실만을 기억해 줘. 안녕. 형아의 강아지가. 정말로 고와의 혼례에 크게 충격을 받은 모양이로구나.”
“아이구, 아이구…….”
“돌아온다는데 뭔 걱정이야? 제 입으로 돌아온다잖아!”
삼랑이 진해를 타박하자 머리에 흰 띠를 두른 진해가 벌떡 일어나서 침을 튀기기 시작했다. 삼랑이 눈을 부라리면 겁을 먹고 눈치를 살피던 것과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우리 강아지가! 우리 미려가 얼마나 연약하고 가녀린 앤데 혼자 집을 나가겠어!? 이건 누군가 우리 미려를 꼬여서 데려간 게 분명해! 우리 미려는 나 없으면 잠도 혼자 잘 못 자는데!”
“……진해 너와 같이 잤다고?”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무섭다고 달달 떠는 애가 어떻게 혼자 월국 밖으로 나가! 말도 안 돼! 이건 말도 안 돼!!!”
하지만 진해가 대든다고 해서 순순히 받아 줄 삼랑이 아니었다.
“이 새끼가 진짜 미쳤나. 네가 그 지랄을 떠니까 지겨워서 제 애비한테 갔나 보지!”
삼랑은 진해가 소리를 지르자 진해를 똑바로 마주 보며 더 크게 소리를 질렀고 진해는 삼랑의 말을 듣자마자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몸을 멈췄다.
“한 시위! 해아가 대체 뭘 잘못했다고 소리를 지르는 게냐! 형이 아우를 걱정하여 그러는 것을 보듬어 주지를 못할망정!”
“아, 씨발…….”
그러나 진해의 눈이 일렁거리기 시작하자 삼랑은 뒤통수를 움켜쥐며 욕을 뱉었다. 홧김에 뱉은 말이 오진해의 명치를 때려 버렸다. 해산은 진해가 말없이 울먹거리자 황급히 진해를 제 가슴에 기대게 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진해는 자신의 가슴에 기대면 심히 안정을 찾는 듯했다.
“……해산 도련님, 미려가 정말 자기 아버지에게 가 버린 걸까요? 영영 안 올까요?”
“설마 그러겠느냐. 그 아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곧 돌아올 것이야. 정 돌아오지 않으면 고가 사람을 풀어 행방을 찾도록 하마. 네가 원한다면 데려오도록 하지.”
“……억지로는, 데려오지 마세요.”
“그래, 그래. 그럼 주기적으로 안부를 전하도록 권하마 . 그럼 되었지?”
“네…….”
둘이 서로를 오냐오냐하는 꼴을 보며 삼랑은 문득 정미려가 자신에게 월국을 버릴 수 있냐고 물었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는 오진해를 둘러업고 국경 밖으로 도망이라도 치려는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정미려에겐 다른 꿍꿍이가 있는 듯했다.
“……씨발, 한 놈 감시하기도 힘든데,”
가뜩이나 동십사가 성월공을 주시하라고 삼랑을 불러 엄명을 내린 터라 삼랑은 성월공 안월산의 동태를 주시하느라 자신이 부릴 수 있는 위사란 위사는 다 동원한 참이었다. 성월공은 창명후를 후견으로 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언제나 최고의 무장들을 곁에 거느렸고, 삼랑은 제 밑의 기무위사 몇이 소식이 끊어진 걸 접하며 처음으로 기무위사 일이 쉽지 않다는 걸 실감했다.
하지만 오진해가 저렇게 찡찡거리는 꼴을 보고 있자니 정미려의 향방을 아주 안 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삼랑은 거칠게 짜증을 내며 자신을 대신해 오진해의 옆에 붙여 놓을 놈을 물색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성월공 일에 직접 뛰어들고 몇 놈을 빼서 정미려의 뒤를 쫓게 할 셈이었다. 삼랑은 진해가 찡얼거리며 잠이 들자 눈짓으로 해원공 안해산을 밖으로 불러냈다.
“해원공부 시위 하나를 빼서 오진해한테 붙여야 할 듯싶습니다만.”
“좋을 대로 하거라. 추천하는 이가 있느냐?”
“황아무인지 뭔지 하는 놈이 저놈이랑 제법 친하다면서요. 그놈을 좀 빼 주시지요. 그리고.”
삼랑은 아주 오랜만에 해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불경스러운 짓이었지만 해산은 삼랑의 행동을 나무라는 대신 그 눈빛을 고스란히 받아 주었다. 어쩌면 삼랑이 할 말을 조금은 예측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대체 언제 알려 줄 겁니까.”
“…….”
“얼마만큼 더 뒤를 닦아 드려야 제 형들을 죽은 원수를 알려 줄 거냐고요. 설마 모르는 건 아니죠?”
“건방지구나, 삼랑.”
삼랑이 오진해에게 빠져 있긴 했지만 그의 속에는 언제나 형들의 원수를 갚겠다는 각오가 도사리고 있었다. 비참하게 죽어 간 형들의 원수를 갚고 오진해 놈과 살림을 차려 형들이 바랐던 행복이란 놈을 거머쥐고 싶었다.
“원수를 갚아 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이름을 가르쳐 달라는 거예요. 저도 기무위사 일로 잔뼈가 굵어졌으니 이름만 가르쳐 주시면 깨끗하게 처리할 수 있다고요.”
“…….”
그러나 해산은 여전히 삼랑의 말에도 묵묵부답이었다. 어떤 의미로는 삼랑에게 답을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황자인 해산이 입을 다물 정도로 굉장한 상대는 다섯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적었으니까. 그리고 해산 역시 자신이 삼랑에게 어느 정도 답을 주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고 있었다. 해산은 결국 거하게 한숨을 쉬며 삼랑에게 답을 주기로 했다.
“솔직히 말하면 한이를 죽인 이가 누군지는 모른다. 한일을 포도청에 던져 넣은 이도 누구인지 알 수 없어.”
“씨발, 뭐야. 그럼 모른다는 거잖아요!”
“하지만, 한일과 한이에게 일을 사주한 배후는 안다. 수단은 달랐지만 언제나 고의 안위를 노려 왔지. 이젠 답이 되었느냐?”
“……그때 그 늙은이였어, 빌어먹을. 멀쩡히 보내면 안 되는 거였는데.”
비로소 형들의 원수 중 일부를 알게 된 삼랑이 흉흉히 눈을 빛내자 삼랑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삼랑을 바라보았다. 해산은 삼랑이 아무리 기무위사 일로 잔뼈가 굵어져도, 심지어 자신의 비호를 받는다고 해도 절대로 공신이자 무신들의 우두머리인 창명후를 건드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창명후를 해할 수 있는 건 이 나라에서 가장 지고한 이뿐.
“조심해라. 창명후는 성월공의 후견이다. 성월공은 제 후견인인 창명후를 적극적으로 보호할 게야. 창명후는 성월공의 가장 큰 힘이니.”
“그거야 성월공이 멀쩡할 때 이야기죠.”
“너……!”
“보위에 오르시면.”
삼랑은 이글거리는 눈빛을 가득 담은 채 해산을 바라보았다. 꾹 깨문 입술 속엔 숯을 담고 있는 것 같았다. 삼랑은 답지 않게 인내하고, 또 인내하는 중이었다. 혈육을 잃은 고통과 원수에의 증오가 삼랑의 옅은 눈동자 속에서 거칠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기무위사가 모시던 주군이 보위에 오르시면 제거당하거나 혹은 포상을 받는다 들었습니다. 제가 밑을 광나게 닦아 드리면 당신은 제게 포상을 주시겠지요.”
“…….”
“두고 보십쇼. 내가 그 늙은이가 애지중지 아끼는 보물을 깨 버릴 테니까. 제 말 알겠습니까?”
내가 성월공을 제거하거나, 혹은 성월공의 치부를 드러내면 당신이 나서서 성월공을 제거하라. 그리고 보위에 오르면 자신의 원수를 갚아 달라. 삼랑이 해산에게 요구하는 바는 명확했다.
하지만 해산은 삼랑의 말에 쉬이 답할 수 없었다. 성월공에게 항상 지고만 살아왔던 해산은 성월공에게 이길 것이라는 꿈조차 꾸지 않고 살아왔었다. 해산을 둘러싼 모든 상황이 해산을 그렇게 만들었다. 해산이 답을 하지 않자 삼랑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돌아섰다. 기대조차 하지 않은 듯한 모습이었다.
“……만약 그리된다면.”
해산은 삼랑이 모습을 감추고 나서야 겨우 작은 소리로 몇 마디를 속삭일 수 있었다.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알지만 꿈이란 것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꿀 수 있는 것 이었다.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 * *
진해가 애지중지하는 미려가 사라진 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삼랑이 진해의 곁을 떠나게 되었다.
―조신하게 있어, 오진해.
진해에게 가까이 오려면 했지 결코 멀리 가지 않았던 삼랑이 처음으로 진해의 곁에서 떨어져 나간 것이다. 삼랑의 험악한 욕설과 난폭한 주먹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니 기뻐해야 마땅하건만 진해는 저 좋다고 해 주던 이들이 단번에 둘이나 사라지니 공허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해산이 열심히 진해를 위로해 주었지만 해산 한 사람이 두 사람 몫을 채워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아― 밥은 잘 먹고 다니려나.”
그런 공허함과는 별개로 진해는 이제 궁인 몇과는 형 아우 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진해는 해산의 말대로 해산과의 약혼을 감춰 두고 궁인들 몇에게는 일부러 추근대기도 했다. 미려와 삼랑이 사라진 공허함 덕에 진해의 치근덕거림은 제법 그럴듯해 보였다. 소문을 들은 소산자가 부리나케 달려와 진해를 감시할 정도로 성공적인 치근덕거림이었다.
“다음 달이면 새해인데 그때까지 안 돌아오면 어쩌지. 좋은 고기를 파는 집을 알아 두었는데. 미려랑 삼랑이가 돌아오면 해산 도련님도 모셔서 즐겁게 놀아 보려고 했는데.”
미려는 돌아오겠다고 말했지만 삼랑이는 돌아오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미려는 진해의 얼굴조차 보지 않았고, 삼랑은 짧은 입맞춤으로 긴말을 대신했다. 진해는 새삼 자신이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려도, 삼랑도 자신을 포기하면 얼마든지 원하는 짝을 만날 수 있었고, 더 좋을 삶을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쓸쓸하네.”
퇴청하는 수레 위에서 진해는 자신의 마음을 옮겨 놓은 듯한 흐린 하늘을 바라보았다. 문득 창명후가 찾아왔던 날 밤, 진해의 몸에 달라붙던 호리호리한 몸이 떠올랐다. 진해는 그 몸의 구석구석을 알고 있었다. 그렇고 그런 의미로 아는 건 아니었지만 해산의 몸만큼이나 익숙한 몸이었었다.
항상 저에게 돌진해 오던 몸이라 언제나 그 자리에 있으려니 여겼었는데 이렇게 쉽게 멀어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진해는 코에 흐릿하게 남아 있는 음인의 향을 떠올리며 자신의 우유부단함을, 야무지지 못함을 자책했다.
“에휴…….”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진해에게 쏟아지는 찬사와 경탄이 나날이 늘어 가건만 고작 두 사람이 없다고 기분이 축 처져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진해의 심기가 좋지 못한 걸 눈치챈 집사가 오늘 저녁엔 목간을 준비해 두겠다고 일렀지만 등청부터 퇴청하는 순간까지 진해의 머릿속에는 미려와 삼랑이 생각뿐이었다. 해산에게 드는 희미한 죄책감까지 더해져 지금의 진해는 그야말로 바람 앞의 등불처럼 초라한 신세라 할 수 있었다.
“응?”
그런데 진해가 집에 거의 다 왔을 때, 수레에 드리워진 차양에 톡톡 빗방울 튀기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을 때, 진해는 자신의 집 담벼락에 서 있는 이를 보게 되었다. 키는 진해보다 작은 듯했으나 균형이 잘 잡혀 그리 작게 보이지는 않는 뒷모습이었다.
“잠깐……, 잠깐만 세워!”
그 뒷모습은 진해의 집 담벼락 너머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수수하나 얼룩 한 점 없는 깨끗한 옷을 입은 모양새가 진해의 기억과 똑 닮아 있었다. 진해는 놀란 마부가 수레를 세우자마자 거의 뛰어내리다시피 수레에서 내려왔다.
“…….”
진해가 수레에서 내려 그에게로 다가가자 그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차양에 작은 얼룩을 새기던 빗방울이 시간이 지날수록 굵어지고, 잦아지고 있었다. 돌아본 이는 언제부터 이곳에 서 있었는지 느슨하게 묶은 머리칼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동그란 앞머리에 젖은 머리칼 몇 가닥이 달라붙어 있었다.
진해와 그는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진해가 잊은 줄 알았던 옛 기억이 강렬한 향기와 함께 진해의 뇌리를 휩쓸기 시작했다. 진해에게서 강제로 떨어진 조각들이 그를 만나는 순간 조금씩 되살아났다. 진해의 가슴속에서 가장 처음, 가장 순수하게 피어났던 불꽃이 술렁거렸다.
“지금은 이 집에 네가 사는 모양이로구나.”
한때 진해에게 소월이라 불렸던 이가 속눈썹에 물방울을 단 채 그리 말했다. 진해는 제 기억 속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성장한 이의 모습에 말을 잃었다. 그리고 진해를 향해 반짝거리던 눈동자가 어딘지 모르게 텅 빈 것을 바라보며 입을 달싹거렸다. 진해는 소월을 만나게 되면 반드시 묻고 싶은 한 가지가 있었었다.
너는 어째서 나를 버린 것이냐고, 너는 어째서 내게 그리 모질게 굴었느냐고. 나를 사랑하지 않았느냐고, 그런데 왜 내게 그랬느냐고.
“그거 알고 있느냐. 이 집 담벼락에는 숨겨진 틈이 있어 조금만 몸을 웅크리면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저자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을.”
“…….”
“옛날에 잠깐 이곳에서 살았었다. 내 소유의 빈집에 고집을 부려 살림을 차렸었지.”
“…….”
“황상은 당연히 반대하셨지만 그래도 나는 이곳에 살고 싶었다. 황상은 내 좌부가 아니었고, 황후는 내 우부가 아니었고, 그들에게는 해산이라는 친자가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내 좌부가 내게 물려준 이 집에서 혼자라도 살고 싶었어. 혹시라도 좌부가 내 소식을 들으면 돌아올지도 모르니 이곳을 내 집으로 삼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이 집은 동십사 이전에 화석정군의 소유였었다. 화석정군은 전쟁 이전에는 그럴듯한 집안의 막내였었고 약혼이 결정되자 선황의 배려하에 이 집을 짓기 시작했다고 했다. 지순 황태공과 화석정군 두 사람이 살기 좋은 크기의 집을.
“그런데…… 그 집에 이젠 네가 살고 있구나.”
그러니 화석정군이 출가를 한 지금 이 집은 당연히 황태공과 화석정군의 적자인 성월공의 것이 되었을 것이다. 진해는 언젠가 자신이 지나다녔던 개구멍을 떠올리며 성월공이, 안월산이, 어린 소월이 어떻게 잠춘동까지 오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진해가 휘몰아치는 과거에 눈을 깜박이는 동안 빗방울은 거세져 진해의 관모를 적시다 못해 온몸을 적시고 있었다. 바람이 불자 소월의, 안월산의 얼굴이 핏기를 잃고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얽혀서는 안 되었다. 저를 버린 이였다. 제게 잔혹한 짓을 한 이였다.
“……날이 좋지 않으니,”
해산의 적이었다. 해산의 자리를 위협하는 적수였다. 진해가 절대로 가까워져서는 안 되는 이였다.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그런데도 진해는 그를 못 본 척할 수 없었다. 파리하게 질린 무표정한 얼굴 위로 투명한 물줄기들이 연이어 흘러내리는 것을 보자 도저히 그를 무시할 수 없었다. 좋아했었다. 정말로 좋아했었다. 그와 미래를 꿈꿀 정도로 사랑하고, 아꼈었다. 그와 함께한 시간은 진해가 기억하는 것 중 가장 순수한 사랑이었었다.
진해는 걸친 장포를 벗으며 월산에게 다가갔다. 조금 망설이다 푹 젖어 비 맞은 생쥐 꼴을 하고 있는 월산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진해의 옷도 젖었지만 월산의 것보다는 멀쩡했다. 진해는 저를 바라보는 월산의 얼굴을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월산이 저를 어떤 표정으로 바라보는지 알기가 두려워서였다. 진해는 월산을 안내하듯 대문으로 향했고, 그런 진해의 뒤로 그를 따르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폭풍이라도 오려는지 비는 기세를 불려 요란하게 처마 때리는 소리를 냈다. 진해는 마른 옷으로 갈아입은 채 하염없이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그러는 동시에 초조하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집사가 정성껏 준비한 목간에는 지금 진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들어가 있었다.
이윽고 누군가가 반쯤 열려 있는 진해의 방 문턱을 넘는 소리가 들렸다. 따스한 물에 데워진 향이 진해의 등 뒤로 훅 끼쳐 들었다. 진해는 아직도 자신이 뭐라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묻고 싶은 게 많았는데, 아니, 그냥 얼른 눈앞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는데.
“……보고 싶었다.”
그런 진해의 상념을 박살 내려는 것처럼 뜨겁고 축축한 체온이 진해의 등을 꽉 끌어안았다. 미려나, 삼랑이나, 해산과는 다른 팔이 진해의 허리에 꽉 감겨들었다. 진해가 죽는 순간까지도 절대 잊지 못할 향이 진해의 몸에 스며들었다. 진해는 그 향이 제게서 강제로 떨어져 나가던 순간을 기억하며 핏줄이 도드라지도록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럴 거면 왜 내게 그랬던 걸까. 이렇게 말할 거면 왜 나한테 파각사를 보낸 걸까. 왜 그 흔한 이별 통보조차 하지 않은 걸까. 왜 이제 와서 나한테 이러는 걸까.
“……비가 그치면 가세요.”
웃기는 건 파각을 당한 이후 이상하게 비틀린 취향을 갖게 되었으면서도, 진해는 그에게 단 한 순간도 모질게 굴 수 없다는 점이었다. 진해가 고통스러웠던 만큼 진해를 행복하게 했던 추억이 진해를 한껏 무르게 만들고 있었다.
“정말로 완전히 끊어져 있구나.”
“귀하신 분이 고뿔에 걸리면 아랫것들이 고생합니다.”
“그렇게 강하게 이어졌었는데 이젠 한 올도 이어져 있지 않아.”
“황상께서도 성월공 걱정을 많이 하십니다.”
진해의 몸을 끌어안은 손이 슬금슬금 진해의 몸을 더듬었다. 진해가 입술을 깨물고 애써 외면하던 손이 이윽고 진해의 목 부근에 도달하였다.
“죽을 만큼 괴로웠겠구나.”
그 손이 순식간에 진해의 목을 꽉 틀어쥐었다. 진해는 놀라 뒤를 돌아보려 하였지만 뜨거운 체온과 어울리지 않는 음습한 목소리가 귓전을 적시는 게 먼저였다.
“그리고 그만큼 나를 확실히 기억하였겠지. 죽는 순간에도 절대로 잊지 못할 만큼 깊이, 누구보다도 깊고, 강렬하게.”
진해가 알던 소월과는 전혀 다른 목소리였다. 진해의 목을 움켜쥔 손은 진해의 것보단 작았으나 진해가 뿌리치지 못할 만큼 강한 악력을 갖고 있었다. 진해가 뒤늦게 손을 떼 내려 했으나 손은 점점 더 강하게 진해의 목을 죄어 왔다. 마치 처음부터 이것이 목적이었던 것처럼 진해의 목에 붉게 자국을 남기기 시작했다.
목이 틀어막힌 진해는 누군가를 부르고 싶었으나 눈앞이 흐려지는 게 먼저였다. 진해가 비틀거리자 진해의 목을 틀어쥔 이가 진해를 어딘가로 끌고 갔고, 점점 어두워지는 시야 속에서 진해는 하얗게 웃고 있는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래, 그렇게 나를 생각하고, 괴로워해. 나를 내치지 못하는 네 성정을 탓해라. 내가 사랑하도록 태어난 너를…….”
몸이 툭 쓰러지는 감각과 동시에 진해는 의식을 잃어버렸다. 가까스로 만난 첫사랑은 진해를 또다시 죽이려 했고, 그와 동시에 진해의 물음에 약간의 답을 돌려주었다. 진해는 새까매진 의식 속에서 희미하게 빨리 장가를 갈 걸 그랬다고 생각하였다. 어딘가 아득하게 먼 곳에서 저를 닮은 아이들을 가득 안은 채 헤벌쭉 웃는 모습을 본 것도 같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느낀 것은 진해의 뺨을 쓰다듬는 부드럽고 작은 손의 감촉이었다.
<『환태자사건』5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