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태자사건
4권
차 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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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영찰어사(影察御使) 오진해 (2)
4부 월국 사신 오진해
3부 영찰어사(影察御使) 오진해 (2)
소산자와 약간 서먹한 분위기를 유지하며 진해는 마침내 황제의 앞에 도착하였다. 진해가 어찌나 덩실덩실 절을 하는지 주변 사람들은 진해가 절을 하다 날아가는 게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만세 만세 만만세! 천하의 주인이자 자애로운 백성들의 좌부이신 황상을 뵙습니다!”
자애로운 좌부라는 말에는 진해의 사심이 듬뿍 들어 있었다. 진해는 구휼 정책으로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황제를 아주 조금, 속으로 몰래, 아주 조금 좌부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해산과 혼인하면 장인어른이 될 터이니 아주 거짓은 아닐 것이다. 진해는 절을 한 뒤 빼꼼 황제를 훔쳐보았다.
“오 어사, 일어나라.”
오늘의 황제는 어전에서 보던 황제와 썩 달라 보였다. 어전에서의 황제는 면류관을 쓰고 위풍당당하게 옥좌에 앉아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 진해의 앞에 있는 건 야장 차림으로 의자에 편안히 기대 있는 단정한 양인 사내였다. 진해는 처음으로 아무런 방해물 없이 마주 본 황제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연애와는 다른, 긴장감에 근접한 두근거림이었다. 진해는 새삼 자신이 꽤 높은 관직에 오른 것을 실감하였다.
‘큰물에는 그만큼 큰 고기가 살지. 큰 고기를 잡으려면 그만큼 힘을 쏟아야 하고. 어쩌면 이 자리를 거절했어야 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 영감탱이 놈이 해산 도련님을 욕하는 바람에! 가만 안 둬, 영감탱이!’
진해는 황제를 흘금흘금 훔쳐보면서 자신을 열 받게 만들었던 강절곤을 떠올렸다. 창명후인지 뭐시긴지, 얼마나 대단한 양반인지는 몰랐지만 귀한 황자마마이자 귀하고, 귀하고, 엄청 더 귀한 자신의 정인을 모욕했던 망할 할아범을!
“오 어사.”
“예, 황상! 신 오진해 여기 있사옵니다!”
진해가 속으로 실컷 욕을 하는 동안 서책을 넘기며 침묵을 유지하던 황제가 나지막이 진해를 불렀다. 진해는 주인의 부름에 응하는 강아지처럼 충실히 황제의 부름에 대답하였다.
“짐이 그동안 오 어사에게 격조하였지. 아무것도 모르는 그대를 덜렁 영찰어사로 만들어 놓고 아무런 힘도 되어 주지 못하였어.”
“이미 은혜가 넘쳐 하해와 같사옵니다!”
“늦은 밤인데도 오 어사는 기운이 넘치는군. 참 보기가 좋아.”
옅은 미소를 입에 띤 황제는 입매가 해산과 꽤 닮아 있었다. 해산이 다부진 체격을 가진 것에 비해 황제는 문인처럼 늘씬한 편에 가까웠다. 나이를 먹어 관록이 붙었다지만 타고난 기품은 깊이를 더해 갔다. 진해는 해산을 꼭 닮은 입매를 바라보며 문득 해산이 그리워졌다. 대체 어디를 갔기에 정실 삼고 싶다던 저에게 말 한마디 없이 사라진 건지.
그러는 동시에, 진해는 황제가 자신에게 뭔가 할 말이 있음을 간파했다. 이 야밤에 기운이 어쩌고저쩌고하는 걸 보아 틀림없었다. 황제는 양인이니 밤일은 아닐 터였다.
‘밤일이면 어쩌지?!’
진해는 어떻게 해야 미래의 장인어른을 부드럽고 정중하게 거절할 수 있을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더욱 큰일은 황제가 애까지 있는 유부남이라는 사실이었다. 진해는 연상을 좋아했지만 추호도 남의 가정을 파탄 낼 생각은 없었다. 딸린 애가 제 정인이면 말 다 한 셈이었다.
“이번에 짐을 위해 그 기운을 써 줘야겠네. 거사를 치르―”
“황상! 그 이상은 말씀하지 마옵소서!”
“―음?”
“소신 신하 된 몸으로 황상의 말씀을 어찌 거역하겠습니까. 마땅히 따라야 할 일입니다. 하나 소신에게도 나름 품어 둔 생각이 있는 터라!”
“놀랍군. 이미 알고 있을 줄이야. 과연 오 어사는 정보가 빠르군. 그러니 옥첩려가 품은 역모의 뜻도 간파했겠지.”
“그, 렇지요?”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황제의 말이 진해가 예상한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진해는 이번에야말로 자신이 설레발을 치다가 뭔가 큰 사고를 친 걸 깨달았다! 정말로 큰 대형 사고였다! 월국의 주인이자 이 대륙의 주인이나 마찬가지인 황제 폐하가 뭔가 맡기려는데 이 방정맞은 입을 잘못 놀려 삼족이 몰살당할지도 모르는 큰 사고를 치고 말았다! 다행히 진해에게는 몰살당할 삼족이 없지만.
“그럼 야밤에 긴말할 필요 없이 짧게 말하겠네. 이번 일은 모두 자네에게 맡기겠어. 부디 유일청(唯一靑)을 다시 짐의 곁으로 데려와 주게.”
“아, 그거였구나.”
“음?”
“아니, 여부가 있겠습니까! 소신에게 맡겨 주시옵소서, 소신이 목숨을 걸어서라도 반드시 유 공자를 폐하의 옆에 딱 데려다 놓겠습니다! 마음 푹 놓으십시오!”
다행스럽게도 하늘이 진해를 돕는 모양이었다. 황제는 진해에게 다시 한번 맡기려는 일을 말해 주었고, 진해는 자신이 유일청이라는 인물을 황제의 곁으로 데려와야 함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황제의 근심 어린 표정이나 회한이 어린 눈매를 보아 유일청은 아무래도……, 후궁으로 들이지 않은 황제의 정인이나 정부쯤 되는 인물인 듯했다. 어쩌면 첩지를 내리지 못할 양인일지도 몰랐다. 전쟁 전에는 같은 양인이나 음인끼리도 잘 살았다지만 전쟁 후에는 세간의 눈이 좀 각박해졌으니까.
‘빙좌부 어른의 정인을 찾는 게 어사 되고 처음 맡은 일이라니! 빙우부께서 이 일을 아시고 역정을 내시면 어떡하지? 감히 시앗의 편을 들어? 너 같은 것에게 내 아들을 줄 수 없다! 이러시면 어떡하지?’
진해는 입으로는 유일청을 황제의 곁으로 데려오겠다 약조하면서 속으로는 황제의 정실이자 현재 유일한 남편 자리를 지키고 있는 황후를 떠올렸다. 황후는 해산 도련님의 생부였고, 역시 진해의 장인어른이 되실 분이었다.
성정이 자상하다거나 자비롭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 없었다. 하지만 진해는 사적인 일보다 공적인 일을 우선하기로 했고 일단 찾아 놓고 황후에게는 나중에 값진 선물을 하기로 결정지었다. 진해는 황제가 아까보다 한결 나아진 표정을 짓자 다시 날아갈 것처럼 절을 했다.
“오 어사는 기운이 넘칠 뿐만 아니라 재치도 넘치는군. 유 공자라. 한결 듣기가 좋군. 유일청이 돌아오면 작은 봉작을 내리는 것도 좋겠어.”
“황상의 손길이 닿으면 한낱 먼지조차도 먼지님이 되는 게 아니겠사옵니까.”
“하하, 근래 짐을 이렇게 띄워 주는 건 오 어사뿐이야. 그래, 오 어사. 유일청을 무사히 짐의 곁으로만 보내 주게. 이번 일을 무사히 해결하면 짐이 섭섭지 않게 포상할 테니.”
“만세 만세 만만세!”
세 번째로 날아갈 듯이 절을 한 진해는 고개를 숙이고 등을 보이지 않은 채 뒤로 걸어 나왔다. 허리를 어찌나 굽혔던지 새우가 뒷걸음질 치는 것 같았다. 진해는 이 짓을 몇 년 하면 늙어서는 지팡이를 짚고도 못 걸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황제는 엄청나게 높은 사람이었고 진해는 황제 앞에서 으스대며 걸을 배짱이 없었다. 구구이 말했지만 진해는 간은 크나 담은 작은 소인배였다.
“큭, 크흡. 오, 대인. 수고하셨습니다.”
밖으로 나오자 진해를 따라온 소산자가 소매로 입을 가리고 작게 웃음 지었다. 소매에 얼굴이 가려졌으나 퍽 듣기 좋은 웃음소리였다. 진해는 저도 모르게 새우 흉내를 내며 소산자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소산자는 아예 소매로 얼굴 전체를 덮어 버렸다. 황제의 침소 앞을 지키는 시위들도 입가를 실룩거리다 이를 악물었다.
“제가 재주가 많아 이런 것도 잘합니다.”
처음에는 소산자가 영 집사와 비슷한 연상의 인물이라 그런 줄 알았지만 계속 보다 보니 소산자는 영 집사와는 퍽 다른 느낌이었다. 특히 소산자의 목소리가 그러했다. 소산자의 목소리는 진해가 엄청나게 옛날에 들어 본 듯한 목소리였다. 그런데 묘하게 최근에도 몇 번 들어 본 것 같은 목소리기도 했다. 어쨌거나 진해는 소산자가 웃는 게 마음에 들었다. 소산자에게 저도 모르게 재롱을 부리게 되었다.
“크흠. 동물 흉내를 잘 내신다는 말씀이시군요. 제가 대인들의 체면을 위해 이런 말씀을 잘 드리지 않지만 대인 중에서도 흉내를 잘 내시는 분이 몇 분 계십니다. 대학사 어르신은 약주가 과하시면 학 흉내를 내신답니다.”
“아니, 한번 구경해 보고 싶네요?!”
“오 대인께서 열심히 하시면 언젠가 대학사 대인 근처에 자리를 잡으실 수도 있겠지요. 여하간 잘된 일입니다. 어쩌면 유일청, 아니 유 공, 푸훗, 자를 찾는 데에는 그 재주가 유용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소산자는 터진 웃음을 참지 못하겠는지 자꾸 킥킥거렸다. 보기 좋은 이가 웃으니 기분이 좋다만 진해는 뭔가 일이 이~ 상하게 돌아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쨌거나 황제에게 유 공자인지 나발인지를 데려다주기로 했으니 반드시 그 말을 지켜야만 했다. 진해는 출궁하면서 내일 소산자의 도움을 받아 유일청과 한 숙소에 거처하는 동료들을 방문하기로 했다.
소산자는 미려가 미리 대기시킨 수레에 진해가 올라타자 웃음을 그치고 진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진해가 손을 흔들자 저도 작게 손을 흔들기까지 했다.
‘설마 나 하루 만에 내관을 꼬신 건가!’
진해는 여기서 더 했다가는 소산자가 저에게 완전히 반하게 될까 봐 나태하고 방만한 자세로 수레에 기댔다. 자세만 보자면 권세의 극에 달한 왕공제후의 꼴이었다.
그런 진해의 뒷모습을 소산자는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진해의 향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가, 진해의 수레가 작은 점이 되고, 마침내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끊임없이 그쪽을 보고 있었다. 진해가 사라지고 나서야 소산자는 한마디 말 없이 조용히 궁으로 발을 들였다. 달빛을 받은 금목서 꽃송이가 그런 소산자의 마음을 대신하는 것처럼 은은하게 반짝였다.
마치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다음 날 아침 일찍 진해는 집을 나서서 궁으로 향했다. 유일청이 너무나 의아하지만 당연하게도 궁에 머무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려는 어젯밤 늦게 들어와 피곤함에도 일찍 일어나 진해의 등청길을 배웅했다. 부스스한 머리칼을 하고 힘없이 웃는 모습이 어쩐지 꼭 끌어안아 주고 싶은 모습이었다 . 그러나 그것도 잠깐 진해는 반쯤 풀어져 속살이 훤히 보이는 앞섶을 보자마자 눈을 부릅뜨고 황급히 그것을 여며 주었다.
“방금 본 사람 손 들어 봐! 내 동생 살 본 놈 당장 손 들어!”
손을 들면 당장이라도 때릴 듯한 기세에 하인들이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회피하였다. 미려는 진해가 제 앞섶을 여며 주자 감격해서 진해의 목덜미에 대롱대롱 매달리다시피 했다. 삼랑이는 원래부터 까고 다니고, 또 본인이 제 한 몸 지킬 줄 알아 상관없지만 미려는 불면 당장이라도 날아갈 것처럼 청초한 아이였다. 이렇게 맨살을 보이고 다녔다가는 어떤 놈팡이가 미려에게 흑심을 품을지 몰랐다.
진해는 수레 위에 앉아서 몇 번이고 미려의 옷섶이 단정히 여며져 있는 걸 확인했다. 하도 뒤를 돌아봐서 목덜미에 순간 담이 오려고 할 정도였다. 물론 진해는 미려가 일부러 자신의 옷섶을 풀어헤쳤으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육품이 탈 수 있는 것 중 가장 호사스러운 수레를 타고 진해는 황궁에 등청하였다. 보는 사람마다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굉장한 수레였지만 사실 진해의 돈은 몇 푼 들지 않은 알짜배기 수레이기도 했으며, 대인들을 모시는 몇몇 하인의 표정이 묘해지는 수레이기도 했다.
왜냐면 수레를 끄는 말이라거나, 수레의 차대, 휘장, 우산 등 대부분이 그들이 대인의 심부름으로 진해의 집에 가져다준 것이었기 때문이다. 진해는 밑바닥 출신답게 자신이 선물 받은 것들을 닥닥 긁어모아 제법 그럴듯한 수레를 꾸며 냈다. 물론 수레를 끄는 마부는 진해의 집 사람이었다. 진해가 이 수레에서 가장 많은 돈을 들인 것이 마부의 삯이었다.
원래라면 동이 틀 때쯤에 등청하여 조례에 참가하는 것이 조정의 규칙이었으나 농한기가 있는 것처럼 조정에도 한가한 기간이 존재하였다. 운 좋게도 진해가 어사가 된 시기가 바로 그 시기였다. 덕분에 진해는 한적한 시간에 등청해 여러 사람 보지 않고 자신의 업무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영찰어사는 형부 소속으로 기재되어 있었으나 황제의 칙명을 받는 벼슬이기도 했기에 형부에서는 진해에게 아주 사소한 업무만을 할당해 놓았다. 어찌나 사소하던지 진해가 가는 길에 들러 얼굴도장만 찍으면 다 해결되는 업무들이었다.
“오 대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소산자는 형부의 입구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진해가 언제 등청할지 안 할지도 모르면서 그곳에서 진해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크으, 이 죄 많은 몸!’
진해는 내관마저 꼬인 자신의 죄를 한탄했다. 월국 제일 미인에 추피동 깡패 두목, 황자마마에 내관까지! 돌아가신 우부가 보신다면 내 새끼 잘한다며 기립 박수를 칠지도 몰랐다. 물론 목숨이 아까우면 처신을 잘해야 할 터였다. 미려는 그렇다 쳐도, 삼랑은 원래부터 성질이 더러웠고, 해산 도련님은 욱하는 성질이 있었으며, 소산자는 황궁 사람이니 깊게 얽혀 좋을 게 없었다. 아, 물론 소산자가 출궁한다면 이야기가 달랐지만!
“산공공, 의자라도 가져와 앉아 계시지 않고선!”
진해는 소인배였지만 저 좋다는 이를 홀대할 좀생이는 아니었다. 애정은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좋았고, 받고 또 받아도 좋았다. 미각의 극치에 이른 진미처럼 입에 넣고 있어도 생각이 나는 그런 것이었다. 진해는 소산자에게 달려가 그의 팔에 달라붙었다. 흑심은 둘째치고 자신을 기다려 준 그가 반가워서였다.
“산공공이라니요? 혹시 저를 이르시는 것입니까?”
“황궁의 태감들께서는 모두 다 성이 소씨가 아닙니까. 소공공이라 부르면 백에 백이 다 돌아볼 터이니 이름의 가운데 글자라도 불러야 제대로 구분이 되지 않겠어요 ?”
“영명하십니다. 과연 영찰어사다우신 혜안입니다.”
“아니 뭘 이런 걸 가지고.”
소산자는 산공공이라는 해괴망측한 호칭에도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진해보다 번듯한 체구를 했으면서도 기껍게 진해의 부축을 받아들였다. 그런 산공공과 진해의 뒤로 내관 몇이 꼬리처럼 따라붙었다. 산공공이 아랫것들을 부릴 정도로 급이 높은 내관이라는 증거였다.
“어제 말씀드린 것처럼 유 공자 의 숙소로 향하겠습니다. 오 어사께서 그리 하고 싶다 하셨지요?”
“네. 일단 주변 사람들 이야기부터 들어 보려구요. 저는 유 공자가 어떤 성격이고 뭘 좋아하는지, 그리고 누구랑 만났는지도 모르니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맞지 않겠어요?”
유 공자가 스스로 가출했을 가능성도 있으니 진해는 평소 유 공자가 어떤 인물인지부터 알아보려 했다. 일단은 그와 한 숙소에 산다는 동료들부터 탐문할 생각이었다.
“―응?”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여기가, 어디에요?”
“유 공자가 머무는 거처입니다. 오 대인.”
“유 공자가 여기서 머문다고요? 어, 유 공자가 평소에 새를 참 좋아하셨나 봐요?”
소산자가 진해를 안내한 곳은 황궁에서 가장 풍광이 좋고 공기가 맑은 어화원이었다. 너른 어화원에서도 가장 햇볕이 잘 드는, 새장들이 즐비한 장소였다.
“유 공자께서도 조류니 같은 조류인 새를 좋아하시긴 하시지요.”
정확히 말하자면 황궁 소유의 진귀한 새들이 모여 있고 그 새들을 시중드는 이들이 사는 어조원. 고소한 곡물 냄새와 아름다운 깃털, 영롱한 울음소리가 흘러넘치는 그런 곳이었다.
“유 공자가, 새라고……?”
“예. 유 공자의 이름은 바로 그 색에 연유하여 지어진 것입니다. 멀리 남만국이 고향인데 남만국에서 바친 알을 황태공의 정실께서 사들이시고, 그것을 어조원에서 힘겹게 부화시켰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태어나 그런지 깃 색이 남만국에서 진상한 혜조(慧鳥)들과는 달라 황상께서도 특별히 아끼고 있었지요.”
“혜조라니! 말도 안 돼!”
근래 왜 이렇게 새들이랑 만날 일이 많은지. 진해는 뒤통수를 가격당한 충격에 꽥 비명 지를 수밖에 없었다. 황제의 첩이나 정부인 줄 알았는데 새란다! 황제가 영찰어사인 이 몸을 불러 명한 것이 고작 새 찾기란다!
“하아……. 대충 물어보고 시위들이나 풀어서 뒤지게 해야겠네. 새가 기껏해야 어딜 가겠어.”
진해가 허탈한 한숨을 쉬며 어깨를 늘어뜨리자 소산자는 작게 헛기침을 하더니 진해에게 의욕을 불어넣어 주려는 것처럼 진해의 귀에 작게 몇 마디를 속삭였다. 소산자가 중얼거리는 걸 들은 진해의 눈이 크게 홉떠졌다. 정말이냐는 듯이 소산자를 휙 쳐다보기까지 했다.
“금 천 냥.”
소산자가 진해의 귀에 읊조린 말의 정체였다.
“유일청이 부화하기 전, 화석정군께서 상인에게 지불한 가격입니다. 황상의 총애를 입고 깃 색마저 유일청이라는 이름을 얻을 정도로 아름다우니 지금은 백 배, 아니 천 배도 훌쩍 넘겠지요?”
“아, 아니! 새가 여해루보다 비싸잖아?!”
“기루는 돈만 있으면 새로 지을 수 있지만 유일청은 이 세상에 한 마리뿐이니까요. 그것도 황상께서 봉작을 내리실 작정을 하고 계실 정도로 애지중지하는 한 마리.”
“차, 찾아야 해!”
“잘 생각하셨습니다, 오 대인.”
진해는 소산자의 미소를 뒤로한 채 허겁지겁 어조원에 발을 들였다. 소산자가 미리 언질을 준 탓에 새를 ‘시중’드는 내관들이 오랜만에 어조원의 모든 새를 정원에 데려다 놓고 있었다. 아름다운 음률과 깃털이 흩날리는 소리가 진해의 귀를 자극했다.
“유일청이랑 같은 처소를 쓰는 새들만 있으면 돼!”
진해의 말 한마디에 구름처럼 모였던 새들이 물러나고 정확히 세 마리가 자리에 남게 되었다. 유일청과 같은 숙소를 쓸 정도로 진귀하여 감히 값을 매길 수 없는 새들이었다.
“만년빙설을 닮은 만빙빙이옵니다.”
“황상의 사냥지기인 백살호이옵니다.”
“서남사막에서 데려온 야독월이옵니다.”
내관들의 시중을 받으며 횃대에 올라앉은 새들은 새를 모르는 진해의 눈으로 봐도 굉장하기 짝이 없었다. 우선 만빙빙. 만빙빙은 이 어조원에 가장 늦게 들어온 새였는데 북국 이민족들과의 원정에서 발견한 새라고 했다. 최근에 들어와서 그런지 다른 새들에 비해 조금 주눅 든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 처연함이 망빙빙의 투명하리만큼 연푸른 깃털을 더욱 아름답게 살려 주었다.
다음으로는 감히 황제의 사냥지기라고 칭하고 있는 백살호였는데 진해는 백살호를 앞에 두자 자신이 순식간에 짜부라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일단 크기부터가 다른 새들에 비해 서너 배는 컸다. 게다가 날카로운 눈매, 단단한 부리와 발톱은 백살호가 왜 백 마리의 여우를 죽였다는 이름을 달게 되었는지 능히 알 수 있게 했다.
“우와…….”
마지막으로는 야독월. 야독월은 꼬리가 제 몸보다도 긴 새였는데 그 꼬리를 돋보이려고 다른 새들보다 훨씬 더 높은 횃대에 앉아 있었다. 깃털은 백색과 금색에 가까운 빛깔이었다. 햇빛에 비치면 하얗게 보이는 색이었는데 달빛 아래서는 금빛으로 빛날 것만 같은 신묘한 광채를 머금고 있었다. 눈동자 역시 홍옥을 박아 넣은 듯이 새빨갰으며, 출신지 역시 독특하게도 사람이 살지 않는 서남사막이었다. 만약 그곳을 표류하던 상인과의 만남이 없었다면 야독월은 아직도 금빛 모래 위를 고아하게 날고 있을 터였다.
“유일청이 이런 애들이랑 숙소를 같이 썼다고?”
“경비 때문입니다. 한 마리에 집중한 사이 다른 새를 노릴 수 있으니 차라리 값어치가 같은 새들을 한곳에 모으고 경비를 집중시키는 편이 낫다고 여긴 것이지요.”
“설마 저기 저 궁이 이 새들이 사는 곳이에요?!”
“예, 저 만가헌이 이 새들의 처소입니다. 방이 다섯 개 있는데 각각 한 방을 한 새가 쓰고 있었지요.”
“잠깐만, 다섯 개? 여기에 세 마리, 그리고 실종된 유일청이 한 마리. 그럼 한 마리가 더 있다는 건데?”
“으음……, 그것이…….”
진해가 눈썹을 치켜올리자 소산자가 난처한 웃음을 흘렸다. 새들을 볼보는 다른 내관들도 어색한 웃음을 띠며 시선을 피했다.
“설마 그 새도 실종된 거예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다!”
“아닙니다! 이번엔 제대로 잘 지키고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저희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오 대인!”
말을 꺼내자마자 내관들이 피하던 시선을 진해에게 단번에 집중했다. 그리고는 절박하고 애절한 목소리가 자신들의 결백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뭐, 뭐야. 그냥 해 본 말인데 왜 이렇게 절박해?”
“하하, 그건 그 새가 성격이 조금…… 독특해서 그렇습니다. 다른 새들은 숙련된 내관들의 손을 타면 얌전해지지만 그 새는 내관을 여럿…… 갈아 치웠거든요.”
“갈아 치우다니?”
“음, 그러니까 일단 유일청과는 연관이 없는 새입니다. 그러니 오 어사께서는 그 아이는 제쳐 두시고 다른 새들, 아니 내관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어떨까요?”
“아니 갈아 치우고 자시고 유일청의 내관 옆에 그 새를 돌보는 내관도 같이 있었을 거 아니에요?”
“그렇긴 합니다.”
“그럼 당연히 한곳에서 이야기를 들어야지, 어디서 특별 취급이야! 당장 새랑 같이 데려오라고 그래요!”
진해는 겁나게 비싸고 귀하지만 고작 새 새끼 한 마리에 자신이 굽힌다는 생각이 들어 호기롭게 나머지 새와 전담 내관을 데려올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소산자를 비롯한 내관들은 크게 망설였고, 잠깐 시선을 교환하는가 싶더니 아예 진해와 함께 그 새가 있는 곳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그 새 한 마리 때문에 귀하디귀한 나머지 세 마리가 움직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세 마리의 새와 진해 등 여러 사람이 도착한 곳은 아름답고 화사한 어조원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 장소였다. 진해는 여기가 어조원인지 산적들의 보물 창고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뇌옥?”
“비슷합니다.”
커다란 자연석에 굵은 쇠창살을 박아 넣고 그 속에 촘촘한 사슬망을 쳤다. 그것도 모자라서 자연석 바깥에도 대형 새장을 설치해 벌레 한 마리도 제대로 나가기 힘들게 만들어 놓았다.
[삐이―]
[구―]
이상한 건 이 근처에 오자 나머지 세 마리가 심상치 않은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진해는 새들이 흥분하는 것을 보며 저도 모르게 긴장하기 시작했다. 출신도 모양도 범상치 않은 새들을 흥분하게 만들 정도면 필시 세상에 다시 없을 귀조일 터. 유일청을 찾는 것도 급선무였지만 저 속에 든 새를 보고 싶어 목이 바짝바짝 타들어 갈 정도였다.
“공공.”
“음, 열거라. 황상께서 유일청을 찾기 위해서라면 무슨 수를 써서든 개의치 않겠다 하셨다. 오 어사께서 필요하다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라 하셨지.”
“그럼, 알겠습니다.”
안에 든 새의 담당 내관인 듯한 자가 비장하고도 신중한 표정으로 품을 뒤져 새장의 열쇠를 끄집어냈다. 암굴을 연상케 하는 커다란 새장의 열쇠는 투박한 뇌옥만큼이나 거칠고 험상궂게 생겼다. 다른 새들의 전담 내관 역시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심지어 소산자마저 여유롭지만 매서운 눈매로 뇌옥, 아니 새장 입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뾰롱!!]
“엥?”
[구우!]
[삐이! 삐!]
[까악―!]
놀랍게도 새장 안에서 나온 건 담당 내관의 손 위에 올라올 정도로 작달막한 새였다. 날지 못하도록 날개를 비단으로 꽁꽁 묶어 놓은 새는 진해에게 제법 익숙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자, 오 대인. 저 새가 바로 만가헌의 두 번째 방에 살고 있는 괴조 일홍련입니다. 원래는 괴조가 아니라 다른 이름이 있었지만 지금은 황상께서도 괴조라고 부르시니……, 오 대인께도 그리 소개를 올리지요.”
[뾰롱!]
식은땀을 흘리는 담당 내관의 손안에서 우렁차게 우짖는 것은 바로 진해의 가슴팍을 노리던 음탕한 새, 홍련이었다!
“엇, 저, 저 녀석은!”
[삑, 삐익!!]
[까아악!!!]
[구우!!]
진해는 홍련이를 보자마자 큰 소리를 냈으나 내관들이 데려온 다른 세 마리의 소리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횃대에 얌전하게 앉아 있던 녀석들이 음탕한 홍련이, 사실은 본명이 괴조 일홍련이라는 홍패연리익을 보자마자 거칠게 흥분하기 시작했다.
특히 몸집이 거대한 맹금류 백살호가 날개를 치기 시작하자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야독월과 만빙빙 역시 백살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아서 어조원은 순식간에 개판이 되고 말았다. 아니, 새판인가.
“휴, 일홍련을 이리 주게.”
다른 내관들이 담당 새를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흘리는 사이 진해는 후다닥 소산자의 곁으로 도망가 있었다. 진해는 저 새들을 진정시킬 방법을 한 가지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산자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식은땀이 맺힌 담당 내관의 손에서 심드렁한 표정으로 잡혀 있는 일홍련을 건네받았다. 일홍련은 담당 내관보다도 소산자의 손이 편안한지 몸을 풀듯 좌우로 고개를 까닥거렸다.
“오 대인, 죄송합니다.”
“산공공이 뭘 죄송해요. 산공공이 새들더러 미쳐 날뛰라고 한 건 아니잖아요. 그나저나 저 녀석들 왜 저래요? 설마 음, 아니 홍련이, 아니 일홍련이랑 별로 사이가 안 좋은가요? 원수라서 보자마자 물어 죽이고 싶다든가?”
“그럴 리가요. 태감들은 그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 붙어 있는 것입니다. 괴조 일홍련은…….”
소산자는 다시 한번 한숨을 쉬며 일홍련의 날개를 묶은 비단 매듭을 풀었다. 일홍련은 날개가 풀리자 소산자의 손안에서 일어서더니 어딘지 모르게 위엄이 넘치는 표정으로 두 날개를 쫙 펼쳐 보였다. 하는 양만 보자면 영웅호걸이 따로 없을 정도였다. 덩치가 작은지라 진해 눈에는 가소롭게만 보였지만.
“일홍련은…… 반대로 인기가 너무 많아서 탈입니다. 일홍련은 다른 새들에게 관심이 없는데 다른 새들은 일홍련을 너무, 너무, 너무 좋아한답니다. 새들의 음과 양을 가려 수용하지 못해 벌어진 일이지요.”
“엥? 음과 양? 그럼 설마 홍련이, 아차, 일홍련.”
“편하게 부르시지요.”
“그럼 홍련이! 홍련이가 음이에요? 이게?”
[뾰롱!!!]
진해가 홍련이를 보며 뜨악한 표정을 짓자 홍련이가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진해 쪽으로 홱 돌아보며 날카롭게 울었다. 진해는 홍련이 색이 곱긴 하지만 음다운 구석이 단 한 점도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진해 자신이 양인이라 하는 생각이었다.
“하하, 일홍련은 양이랍니다. 홍패연리익은 양만 태어나는 새라 하더군요.”
[삑! 삐익!]
[구우―]
[깍!! 까아악!!!]
“……유일청을 제한 다른 아이들은 모두 음이지만 말입니다.”
진해는 이제야 다른 새들이 크게 흥분한 까닭을 깨달았다. 홍련이는 음탕했지만 겉만 보면 꽤 귀여운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깃털의 색은 진해도 인정할 만큼 진하고 아름다운 붉은 색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꼴에 양이라고 수작질은! 이 음탕한 놈!”
[뾰.]
“뭐야, 내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거야? 어디서 꼬박꼬박 대꾸질이야?!”
[뾰롱? 뾰로롱~ 뾰로롱~]
홍련이는 소산자의 손에서 날개를 몇 번 까닥거리더니 푸드득 날아 진해의 어깨로 날아왔다. 그리고는 진해가 질색하는 홍련이 특유의 집요한 눈으로 진해의 가슴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얘, 얘들아, 제발, 진정 좀!”
“쥐를! 당장 쥐를 가져와!”
“빙빙아~ 우리 빙빙이 석빙고에 갈까~? 응? 얼음 좋아하지?”
다른 새들이 홍련이 곁으로 일제히 날아오려 하는 바람에 내관들이 거지꼴이 되어 가는 것과는 비교되는, 참으로 정적인 모습이었다.
“아니! 탈옥의 신조, 괴조 일홍련이 수행 총관님을 제외한 다른 사람을 따르다니!”
한편 일홍련의 담당 내관은 일홍련이 스스로 사람의 어깨에 올라탄 모습을 보자 놀라서 거의 기절하기 직전이 되었다. 동시에 진해가 일홍련이 평소에 짓는 것과 비슷한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어 더욱 놀랐다. 어쩌면 오 대인은 일홍련과 어릴 적에 헤어진 형제가 아닐까!
내관은 어찌나 놀랐는지 천지가 뒤집혀도 한참 뒤집힐 만한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일삼으며 뒷목을 부여잡았다. 자신 이전에 일홍련을 거쳐 간 선배 내관들이 떠올랐다. 그들은 일홍련을 어조원 밖으로 탈출하게 하는 바람에 벌을 받아 지금은 빨래터에서 손이 부르트도록 빨래를 하고 있었다. 일홍련의 담당 내관 자리는 미워하는 내관을 저승으로 보내는 가장 빠른 자리라는 농담마저 있을 정도였다.
“수행 총관?”
“제가 맡은 직함이 수행 총관입니다. 홍련이는 제가 데리고 입궁한 아이라 그나마 제 말은 잘 따른답니다. 홍련이가 탈출하면 가장 먼저 제게 연락이 오지요.”
“이 녀석이 탈출을 해 봤자 얼마나 한다고. 고작 새 아니에요? 새대가리라는 말도 있잖아. 봐, 이 녀석을. 자기 동료들이 저렇게 난리를 치는데도 눈길 한 번 안 주고 내 가슴팍만 보고 있고.”
[뾰롱…….]
“오 대인 모르세요? 홍패연리익은 고산국의 신조입니다! 인생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녀석을 수행 총관께서 정말 운 좋게 발견하셔서 데리고 나오신 거라구요! 신조라는 말을 증명하는 것처럼 사람 말을 다 알아듣고 평범한 새장은 종잇장처럼 박살을 내구요!”
“엉? 정말 말을 알아듣는다구?! 떽! 어디서 구라질이야! 내가 새를 모른다고 머리까지 모지리인 줄 알아!”
“그, 그게……! 확실하진 않지만 일홍련은 유일청과 유일하게 대화를 하는 녀석이었어요! 유일청은 낯을 가려서 황상 앞이 아니면 거의 말을 하지 않았는데 일홍련과 같이 있을 땐 가끔 말을 했다구요!”
[뾰롱…….]
진해는 필사적으로 항변하는 담당 내관의 얼굴을 한 번, 제 가슴팍을 노리는 홍련이의 집요한 얼굴을 한 번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산공공 쪽을 바라보고,
“저 사람 머리 괜찮아요?”
다시 한번 홍련이의 지능에 강한 의혹을 나타냈다. 소산자는 진해에게 말없이 쓴 미소만 지어 보일 뿐이었다.
“일단 제가 부르면 대답도 하고 돌아오기도 하니 어느 정도 말은 알아듣는 게 분명합니다. 유일청은 일홍련과 있을 때 웃음소리를 내거나 신이 나서 말을 하기도 했으니까요. 어쩌면 오 대인께 가장 도움이 될 아이가 바로 일홍련일지도 모릅니다. 일홍련이 사람이었다면 굳이 오 대인에게까지 일이 가지 않았을지도 모르지요.”
“전혀 안 그래 보이는데.”
진해는 옆에서 누가 말하거나 말거나 여전히 제 가슴을 보고 있는 홍련을 쳐다봤다. 홍련이 눈길 한 번 주지 않자 결국 몸부림치던 새 중 하나가 내관의 손을 벗어나 진해 쪽으로 짧게 날아왔다.
[삐이…….]
북국 출신의 만빙빙이었다. 진해는 기른다면 홍련이처럼 되바라진 녀석보다는 만빙빙처럼 귀여운 새가 좋다고 생각했다.
[삐, 삐이―]
게다가 만빙빙은 진해의 앞에서 낮게 날며 정말로 아름답게 춤을 췄다. 진해는 만빙빙이 왜 갑자기 춤을 추는지 몰랐지만 예쁘니까 일단 두고 보기로 했다. 홍련은 옆에서 뭔가 푸드득대니 잠깐 쳐다보긴 했다. 너무나 잠깐이라 진해가 홍련의 목을 틀어 빙빙을 바라보게 하고 싶을 정도였다.
[까아악!!]
그리고 다음 순간, 사고가 일어났다. 세 사람의 내관이 붙잡고 진정시키려던 백살호가 춤을 추는 만빙빙을 향해 날개를 크게 푸드덕거렸던 것이다. 낮고 짧게 나는 만빙빙과 달리 백살호는 사냥조라 그런지 날개도 크고 높고 길게 날았다. 빠르기는 또 어찌나 빠르던지 진해가 어찌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만빙빙을 덮쳤다.
[뾰롱!]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진해의 어깨에 앉아 있던 홍련이가 쏘아지는 화살처럼 빠르게 날아가 백살호의 가슴팍에 그대로 머리를 박았던 것이다.
“무식해!”
“악, 백살호――――!!!”
“크, 큰일이다! 의원을 불러!!! 당장!!!”
진해는 작은 새 한 마리가 박았다고 저 커다란 맹금류에게 무슨 해가 있겠나 싶었지만 백살호는 홍련이가 사뿐이 날아 만빙빙의 옆에 내려앉을 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소산자가 짧게 탄식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홍련아! 백살호 역시 네가 어여삐 여겨야 할 수하이니 부드럽게 대하라고 했잖느냐!”
[뾰롱? 뾰로롱~?]
곧 십여 명에 달하는 어조원 내관들이 사색이 된 채로 달려와 백살호를 옮기기 시작했다. 그 장면을 본 야독월이 거짓말처럼 얌전해졌다. 방금까지 흥분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태도였다. 그리고 만빙빙은 주저하다가 홍련의 곁에 다가와 깃털을 골라 주기 시작했다. 만빙빙의 크기가 홍련이보다 커서 쉽게 다듬어 줄 수 있는 곳이 머리밖에 없었다. 홍련이의 머리 깃이 닭 볏 모양이 되었다.
“……그래서 날개를 묶어 놨구나!”
“웬만한 새장은 다 박살이 나니까요. 홍련이가 오기 전까지는 백살호가 이 어조원의 서열 일 위였으나 이젠 홍련이가 으뜸이지요. 으뜸이 양이니 당연히 어조원의 모든 새가 자신의 음이고…….”
진해는 새삼 홍련이가 자신의 어깨에 날아와 앉는 것이 부담스러워졌다. 아니, 이때까지 저 무섭고 음탕한 놈이 제 어깨에 아무렇지도 않게 앉아 있었다는 사실이 섬뜩했다. 전에 협 아저씨가 홍련이를 낚아챘던 이유를 이제야 깨달았다. 만약 저 돌대가리와 자신의 손이 부딪혔더라면!
[삐이―]
홍련이의 짧은 활약상으로 인해 어조원의 소란은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괴조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탈출과 사고를 밥 먹듯이 반복하면서도 어조원에서 기어코 잡아 두려는 건 다 이유가 있어서였다. 만빙빙과 야독월이 미련이 뚝뚝 흘러넘치는 눈빛을 하고 자신들의 방으로 물러난 뒤에야 진해는 자신이 왜 여기에 왔는지 떠올리고 말았다.
“아, 탐문.”
내관들을 탐문하러 왔다는 사실이 뒤늦게 생각났다. 하지만 이 마당에 와서 다시 그들을 불러들이는 건 너무나 가혹한 처사였다. 특히 백살호의 내관은 수명이 뭉텅 깎여 있을 터이니 자비를 베풀어야 마땅했다.
“하아……. 그럼 대체 유일청을 어디서 찾는담…….”
“저, 오 대인. 감히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될까요?”
하지만 하늘이 보우하사 이 자리에는 한 사람의 내관이 남아 있었다. 그것도 유일청과 바로 옆방을 쓰는 홍련의 내관이.
“한낱 말단 내관인 제가 이런 말씀 드리기는 그렇지만 유일청의 행방을 알려면 역시 뇌옥에 한 번은 가 보셔야 할 듯합니다.”
“응? 뇌옥에는 왜? 유일청도 이 녀석같이 변태적인 취향이 있어서 뇌옥에 자주 가고 그랬어?”
“아뇨! 유일청은 나이도 많고 이 어조원에서 가장 얌전한 새인걸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제 말은 그러니까 유일청의 담당이었던 소양자와 마지막으로 만났던 사람을 만나 보시라는 겁니다. 소양자가 그날 유일청을 데리고 외출했으니 아마 그자가 마지막으로 유일청을 봤을 겁니다.”
“오오, 자네 그렇게 안 봤는데 제법 쓸모 있는걸? 이 녀석을 잘 못 다루는 걸 빼곤 말이야!”
“하하……. 일홍련보다 유일청을 백 마리 돌보는 게 쉽지요…….”
줄곧 긴장하고 식은땀만 흘리던 내관인지라 진해는 그 사람의 증언을 전혀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내관은 제법 사리에 맞는 말을 하고 있었다. 하긴 웬만한 사람이 아니면 변태에다가 돌대가리에 취미가 탈출인 새를 제정신으로 돌보긴 힘들 터였다. 진해는 새삼 내관의 처지에 연민이 갔다. 만약 일이 잘 풀려 유일청이 돌아온다면 유일청을 놓친 그놈을 자르고 저자를 추천해 볼 생각도 했다.
“그런데 왜 그 사람을 만나러 뇌옥으로 가야 해? 소양자 그치가 뭔 짓을 했길래, 아니 당했으니까 그 사람이 뇌옥에 가 있겠지. 어쨌거나 대체 뭘 해서 뇌옥에 갇혀 있는 거야?”
“아니, 오 대인?! 유일청을 찾으러 오신 거 아니셨나요?”
“그래서 내가 묻고 있잖아.”
진해가 홍련이를 한쪽 어깨에 태운 채로 아무렇지도 않게 묻자 내관의 표정이 갑자기 안 좋아졌다. 술술 말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소산자의 눈치를 봤다. 소산자는 내관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진해와 홍련을 자상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그게, 소양자가 죽었으니까, 그 사람이 소양자를 죽인 용의자로 의심받고 있으니까 뇌옥에 있는 거잖습니까!”
“헉?! 소양자가 죽었다고?!”
그리고 진해는 이 어조원에 와서 가장 쓸모 있고, 가장 중요한 정보를 획득했다. 진해는 연로하고 얌전한 유일청이 어째서 실종되었는지 이제야 그 연유를 알게 되었다. 소양자인지 소우자인지 하는 놈이 유일청을 데리고 나갔다가 살해당하는 바람에 유일청의 행방이 묘연해진 것이었다. 황제가 가장 총애하는 혜조, 유일청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고급 정보를 들었으니 잊어버리기 전에 얼른 써먹어야 했다. 진해는 소산자에게 뇌옥의 위치를 물었고 직접 그곳으로 행차하기로 마음먹었다.
“오 대인, 제가 사람을 보내 연통할 터이니 천천히 행차하심이 어떠신지요? 뇌옥은 썩 보기 좋은 곳이 아닙니다.”
죄인을 가두는 곳이니 당연히 그렇겠지만 뇌옥은 소산자가 진해를 만류할 정도로 지독한 곳인 듯했다. 그러나 진해가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러갔고 황제의 애조인 유일청은 어디서 무슨 봉변을 당하고 있을지 몰랐다. 혹시라도 유일청이 시체로 발견되면 애꿎은 사람 여럿 잡을 수 있는 것이다. 어조원의 내관들이라든 가, 혹은 이 일을 맡은 신입 관료인 진해라든 가.
“뇌옥이 지독해 봤자 얼마나 지독하겠어요. 시체 썩은 내보다 고약한 냄새가 나나요?”
“시체라니요?”
“아~ 제가 옛날에 먹고살 일이 막막해서 잠깐 시체 옮기는 일을 했거든요. 시체 냄새는 질리도록 맡았지요! 뇌옥이 그것보다 지독하면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굳이 귀찮게 연통할 필요 없고!”
진해는 호기롭게 말했지만 소산자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
진해는 소산자가 저를 더럽게 여기나 싶어 살짝 주눅이 들었으나 소산자의 표정은 혐오와는 거리가 먼 연민과 고통에 가까운 것이었다. 소산자는 입을 다물고 있다가 곧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오 대인께서는 젊은 나이에 그런 것까지 다 겪으셨군요. 제가 오 대인 앞에서 감히 건방을 떨었습니다. 하지만 뇌옥의 간수들에게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니 오 대인께서 아량을 베풀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확실히 갑자기 찾아가면 놀라겠네요. 그럼 사람을 보내 주세요.”
소산자는 진해의 말이 끝나자마자 뒤를 따르던 내관 중 하나에게 손짓해 뇌옥에 연통하라 명하였다. 그러면서 황궁의 뇌옥에 대해 짧게 설명해 주었는데 황궁 안에 있는 뇌옥에는 백성들 앞에서 일부러 본보기를 보여야 할 연쇄 살인범이나 강간범, 역모, 혹은 신분이 귀한 죄수들이 갇혀 있다고 했다.
사형수라는 말에 진해는 문득 함거에 실려 자신과 삼랑을 향해 고래고래 고함치던 누군가를 떠올렸다. 혀가 잘린 채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던 한일을. 한일이 죽인 것은 고작 빈민가의 낭중인지라 길게 시간 끌지 않고 빠르게 사형이 집행되었었다. 삼랑이 팔자에도 없는 위사복을 걸치게 된 계기가 바로 그것이었다.
“참 신기하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곳인 황궁에 그런 바닥 같은 곳이 있다니.”
그리고 이 황궁 안에 한일처럼 목숨을 잃을 사형수들이 잔뜩 모여 있다고 했다. 오묘한 기분이었다. 금방이라도 죽을 이들이 황제 폐하와 한 담벼락 안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니.
“가시죠, 오 대인.”
사람을 보내고 일각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소산자가 생각에 잠긴 진해를 불렀다. 사색에 잠긴 진해는 얼굴만 보자면 어느 귀한 집 영식과 같은 생김새를 갖고 있었다. 관직에 오른 뒤 잘 먹고 잘 입고, 잘 자서 살이 오른 탓도 있었지만 평소의 촐랑거리는 목소리가 사라져 그런 것이었다. 만약 강절곤이 지나가다 진해의 옆모습을 보았다면 저도 모르게 “백서야!” 혹은 “거, 건아?!”라고 소리 높여 불렀을 것이다.
그리고 소산자 역시 진해의 옆모습에서 묘연해진 정인의 그림자를 읽어 냈다. 명문가의 자제인 백서는 무예뿐만 아니라 문에도 소질이 있어 때론 서책을 읽으며 가만히 생각에 잠기곤 했다. 가장 친한 친우인 연광이 대학사와 토론할 정도로 뛰어난 문재인 덕도 있었다.
문예가 희귀한 고산국에서 자란 소산자는, 아니 소산자로 변장한 오천협은 강백서가 생각에 잠긴 모습을 좋아했다. 그의 어떤 모습도 사랑했지만, 오천협은 강백서가 총명한 눈매를 사색에 적시고 있는 모습을 아끼고 사랑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이 한목숨 바치고 싶다 생각할 정도로.
“아, 근데 이 녀석은 어쩌지요?”
진해는 문득 어조원을 나서려다 아직도 자신의 어깨에 앉아 있는 홍련이를 가리켰다. 홍련이는 너무나 당연하게 뇌옥에 따라갈 기세였다. 흑요석처럼 까맣고 초롱초롱한 눈동자는 진해의 가슴팍, 정확히 쇄골 부분을 뚫을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눈빛으로 호시탐탐 진해가 가진 고산홍패를 노리고 있었다. 진해가 틈을 보이면 물고 달아날지도 몰랐다.
“흐음. 오 대인이 아주 마음에 든 모양인데 억지로 떼 놓을 수도 없고 곤란하군요. 사실은 얼마 전에 궁을 나간 녀석을 제가 어찌어찌 붙들어 암굴 뇌옥 안에 넣어 둔 터라.”
“아, 설마? 이 녀석, 너 그때 가출한 거였어?!”
[…….]
진해는 홍련이와 처음 만났을 때 홍련이를 데리고 있던 협 아저씨도 고산국 사람인 걸 떠올렸다. 아무래도 소산자가 지인이거나 동향 사람인 협 아저씨에게 그가 지닌 고산홍패를 이용해 홍련이를 데려와 달라 부탁한 듯했다.
“그럼 이렇게 하지요. 제가 황상께 말씀을 드릴 테니 당분간 오 대인께서 홍련이를 맡아 주십시오.”
“말도 안 돼! 내가 왜 이 사고뭉치를―”
“소, 소인이 당장 황상께 말씀 올리러 가겠습니다!”
“잠깐만! 이보쇼! 일홍련의 담당 내관은 댁이잖아?!”
무슨 생각을 했는지 소산자는 진해에게 홍련이를 맡아 달라 부탁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일홍련의 담당 내관이 진해와 소산자의 대화가 끝나기 전에 쏜살같이 어전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일홍련의 탈출로 인해 많은 심적 부담을 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진해는 제 일을 너무나 기쁘게 팽개치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만 어이가 없어져 버렸다.
“참 나.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 야, 홍련이. 넌 나 따라가도 괜찮냐?”
[뾰롱~?]
“하긴 가출도 밥 먹듯이 하는 돌대가리가 무슨 생각이 있겠어. 밥만 주면 만사형통이겠지. 근데 어조원의 새를 이렇게 가볍게 반출해도 돼요? 유일청이 이런 식으로 실종됐잖아요.”
“다른 새들은 몰라도 일홍련은 괜찮습니다. 황상께서는 일홍련에게 깊은 신뢰가 있으시니.”
“나가든 말든 상관없다 이거네.”
“하하, 오 대인은 농도 참 재미지게 하십니다.”
아무리 신조라도 제멋대로 가출을 해 대고 새장을 부숴 대면 정나미가 떨어지는 게 당연했다. 게다가 이런 변태 같은 성정을 가진 새라면 자신이 황제라도 짜증이 날 것 같았다. 진해는 홍련이를 어깨에서 밀어내려다 한숨을 쉬며 검지로 홍련이의 작은 머리통을 헝클어뜨렸다.
[뾰롱―]
홍련이는 진해가 머리를 헤집거나 말거나 집요하게 진해의 쇄골 부분을 바라보았다. 진해의 고산홍패가 눈앞에 나타나면 당장이라도 뜨거운 사랑을 나눌 듯한 열렬한 눈빛이었다.
뇌옥은 황궁에서도 후미진 곳에 있어 소산자와 진해는 제법 긴 거리를 걸어야 했다. 해는 따스하고 바람은 시원해 긴 거리를 걸음에도 마치 산책을 가는 듯했다. 홍련이는 진해의 가슴팍을 노리다 지쳤는지 햇볕을 받으며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여러모로 한산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유일청의 담당 내관이 죽고, 유일청이 실종되지 않았다면, 진해가 맡은 일이 없었다면 근처에서 한가하게 농땡이를 부리고 싶은 그런 날이었다.
그러나 뇌옥 앞에 도착한 순간 진해는 온몸의 털이 거꾸로 곤두서는 듯한 불길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단순한 냄새를 넘어선 불길하고도 끔찍한 냄새가 났다. 살과 피가 썩는 냄새가 아닌 인간성이 썩는 냄새였다. 어디선가 희미한 비명이 들려왔다.
“오 대인.”
“아, 괜찮아요. 괜찮아. 제가 여러 가지 일은 해 봤지만 뇌옥 올 일은 한 번도 안 해 봐서 조금 꺼림칙하다고 할까…….”
진해는 소름이 돋은 피부를 문지르며 저를 맞이하는 간수의 뒤를 따라 천천히 뇌옥 속으로 들어갔다. 진해가 인생 처음으로 심문하게 될 죄수는 뇌옥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갇혀 있다고 했다. 진해는 그 방으로 가면서 나름 귀하신 대인인 진해를 위해 뭔가를 황급히 감춘 것을 눈치챘다. 머리카락이 타는 것보다 강렬하고 날카로운 냄새가 진해의 콧구멍을 후벼 팠다.
‘고문이구나.’
유일청을 찾는 것과는 별개로 범인의 심문은 따로 이뤄지고 있을 터였다. 진해는 자신이 마주할 죄인이 사람 꼴이 아니면 어쩌나 싶어 걱정되기 시작했다. 가만히 죽어 있는 사람이면 몰라도 죽을 꼴을 한 사람에게 새를 어디로 빼돌렸냐고 물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천만 다행스럽게도 감옥 안에서 진해와 마주한 죄인은 단 한 점의 상처도 입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정신적인 압박감이 상당한지 눈 밑이 움푹 꺼진 것이 한눈에 봐도 매우 힘들어 보였다.
“해, 해산, 아니 해원공 마마?!”
진해가 심문해야 할 죄인은 월국의 유일한 적통 황자이자 진해와 몰래 정을 통하는 중인 해원공 안해산이었다.
“진해? 네가 어떻게― 아니 되었다. 아무래도 부황께서 네게 심문을 맡기신 모양이로구나.”
“아니, 이게 대체―”
진해는 목소리를 높이려다가 흘끗 저를 따라온 소산자와 간수의 동향을 살폈다. 간수는 둘째치고 소산자는 황제의 수행 총관이었다. 그 말인즉 산공공은 황제의 측근이었고 그가 보는 모든 것은 황제의 귀에 들어갈 수 있다는 소리였다. 진해는 새삼 황제 폐하가 무서울 정도로 공정한 사람임을 자각했다.
해원공은 황제의 유일한 적장자였다. 지금으로서는 차기 황제로 가장 유력한 인물이었다. 그런 이의 체면을 생각한다면 아무리 살인 의혹이 있다 한들 이렇게 뇌옥에 처박아 둬서는 아니 되는 법이었다. 아니, 그런 것보다도 해원공 안해산은 황제의 친아들이었다! 원수의 나라 출신의 우부를 뒀다지만 황제의 유일한 친자식인 것이다!
‘해산 도련님도 대월률이 지엄하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지만 황상에 비하면 새 발의 피도 안 되는 거였구나. 폐하는 자비로우면서도 단호하신 분이야. 내 아들이 잘못했다면 나는 일단 아들을 보호하려고 들 텐데.’
이리저리 흔들리는 마음을 바로잡으며 진해는 눈으로 재빠르게 해산의 몸을 훑었다. 해산은 조금 초췌해졌지만 상처도 없고 혈색도 제법 좋아 보였다. 하지만 의혹이 인 정도로 황자를 뇌옥에 가두었으니 해산이 결백하다는 증거나 증인이 나오지 않는다면 다음번에는 해산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몰랐다. 적어도 해산 자신은 이곳에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고통받는 듯했다.
‘……꽃으로도 때리면 안 되는 우리 해산 도련님을.’
남들 눈에는 어찌 보일지 몰라도 해산은 진해에게 사랑스럽고 귀여운 정인이었다. 진해보다 키도 크고 어깨도 떡 벌어지고 손목에는 무서운 구리 뱀을 감고 다니는 등 여러 가지를 포함하고도 사랑스러운 이였다. 특히 저한테 홀딱 빠져서 저를 정실로 삼고 싶다는 허황된 소리를 한다는 점에서 그랬다. 진해에게 첩으로 들어오라고 강요하거나 힘으로 강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랬다. 안해산 자신은 충분히 그럴 힘과 권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실이 아니면 곁에 있지 않겠다고 했지만 진해는 사실 해산이 저를 정실로 맞을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진해는 해산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거친 풍파에 몸을 맡겨 왔다. 편하게 살고 싶은 진해는 편하게 살 수 있는 법을 생각해 왔다. 신분에 맞지 않는 혼사 같은 건 추호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인생 계획이었다.
그러나 잠춘동의 더러운 천막에서 해산 도련님을 처음 본 순간, 진해는 저 발칙한 음인을 자신 외에 다른 양인에게 넘겨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집을 제한 전 재산을 걸고, 심지어 미려의 도움까지 받을 생각으로 그 음인을 제 남편으로 들일 생각을 했던 것이다.
눈이 맞은 적은 많았고, 몸이 맞은 적은 더 많았지만 진해가 이렇게 강하게 끌린 건 처음이었다. 고통스럽게 끝났던 첫사랑이 생각날 정도로 강한 이끌림이었다. 상대의 신분을 알게 되면 자연스레 사라질 줄 알았던 이끌림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렇게, 이렇게 더 강해지기만 했다. 초췌해진 안색을 보자 가슴속에서 알 수 없는 것이 무섭게 들끓을 정도로 진해는 어리고 귀여운(다른 사람들 눈에는 안 그렇지만) 해산 도련님을 좋아했다.
“흠! 좀 놀랐지만 할 일은 해야지. 천세 천세 천천세! 해원공 마마께 소신 영찰어사 오진해가 문안드리옵니다!”
“……일어나거라.”
진해가 일어나자 소산자의 지시를 받은 간수가 의자를 하나 가져왔다. 해원공은 다행스럽게도 침상과 탁자, 의자가 있는 뇌옥에 갇혀 있었다.
“그럼 이제부터 심문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기록할 이는 데려오지 않은 것이냐?”
“응? 기록이요?”
“심문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본디 죄수를 심문할 때에는 옆에서 죄수의 진술을 기록할 기록관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형부 일을 해 보지 않은 진해가 당연히 그걸 알 리가 없었고, 해산은 기록관이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어리둥절했다.
“아~ 기록관~ 이 똑똑한 머리가 있는데 무슨 기록을 한다고, 핫핫하!”
[뾰롱.]
“……홍패연리익은 또 왜 여기에 있는 것이냐?”
“제 기록관입니다.”
“…….”
분위기를 띄워 보려 농을 쳤는데 해산의 표정만 묘하게 만들었다. 진해는 어험 헛기침을 하고는 뒤로 돌아 소산자에게 애타는 구원의 눈길을 보냈다. 소산자는 진해의 구원 요청을 받고는 따라온 내관에게 손을 뻗었다. 내관은 어디 지니고 다녔는지 모를 종이와 붓을 꺼내 소산자에게 건네주었고, 소산자는 그것을 해산과 진해가 마주 앉은 탁자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단지 그것뿐으로 소산자는 더 이상의 도움을 주지 않았다. 왜냐면 진해는 탐문을 하러 온 것이지 심문을 하러 와 정식 기록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진해가 정식 기록을 해야 했다면 소산자는, 오천협은 오는 길에 형부에 들러 기록관 한 사람을 빼 왔을 것이다.
“그~ 러니까, 해원공 마마님.”
“죄인 안해산이다. 뇌옥 안에서는 모두 동등한 죄인이니.”
“저한테는 아니에요.”
“……그래서는 아니 된다.”
진해가 동등한 죄인이라는 해산의 말을 단호하게 부정하자 지친 해산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해산이 뇌옥 안에서 가장 그리워하던 이가 눈앞에 나타났으니 안 흔들리는 게 이상했다.
“그럼 안해산.”
죄인 안해산이라 불러야 마땅했지만 진해는 장난으로라도 해산에게 죄인이라는 말을 하기 싫었다. 장난이면 웃으면서 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장난이 아니었으니까.
“그렇소. 내가 안해산이요.”
“그― 대가 소양자인지 소우자인지를 죽였다는데 사실인가?”
“대월률이 지엄한 도성에서 내가 어찌 그런 죄를 범할 수 있으리오.”
“안 그랬다는 말이죠?”
“……그렇소.”
“그럼 이건 됐고, 죽은 사람은 왜 만나러 갔던 거요? 궁 안에서 만났어도 됐을 양반을 도성 밖에서 만나다니! 설마, 바람?”
“그럴 리가!”
“어흠. 해산. 목소리가 울린다.”
“……소양자가 내게 먼저 바깥에서 만날 것을 제의했소.”
“왜 만나자고 한 거지?”
반말을 하려니까 기분이 이상했지만 진해는 그럭저럭 첫 심문인지 탐문인지를 잘 끌어가고 있었다. 물론 진짜 심문은 이것보다 훨씬 고압적이고 딱딱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니까…….”
그런데 갑자기, 진해의 물음에 술술 답하던 해산이 답을 망설였다. 진해의 눈을 피하는 모양새가 진해가 농으로 쳤던 바람이라는 단어를 연상케 했다. 설마 이 요망하고 발칙한 예쁜이가 거시기도 없는 내관이랑 바람이 난 건 아니겠지! 진해의 눈에 바짝 날이 서기 시작했다.
“그, 러니까, 내게 연을 잇고 싶은 자가 있다 하여, 그래서…….”
‘바람이잖아!!!!!!!!!!!’
진해는 크게 소리치는 대신 천년의 인내를 끌어모아 붓을 꽉 그러쥐었다. 종이 위에 기어가는 지렁이 글씨 대신 크고 선명한 원이 생겨 버렸다.
“무, 물론! 거절하러 간 것이다! 내게 연을 잇고 싶다는 자가 지인과 안면이 있어 부드럽게 거절하려 한 것이다! 뭐, 뭣하면 내가 다른 자리를 주선해 주려고!”
“흐음~ 해산 도련님과 안면이 있는 자면 나름 괜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일 테고 그런 사람과 아는 사람이면 또 제법 괜찮은 인물인데 측실 하나 없는 해산 도련님이 거절하러 가셨다고. 오~ 그것참 신빙성이 있는 말이네, 신뢰가 아~ 주 넘쳐흐르네!”
“고를 못 믿는 것이냐! 고는 맹세코 거절하러 간 것이다! 실제로 연서도 돌려주었고!”
“연서!? 그 썩은 놈이 남의 서, 아니 남의 귀한 아들에게 함부로 연서를 줬단 말인가 매파도 통하지 않고 채신머리없게!”
[뾰롱?]
해산은 더는 참지 못한 진해가 꽥 소리를 지르자 귓불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하긴 해산 체면에 제 입으로 진해에게 이런 소리를 하는 것 자체가 달갑지 않을 터였다. 얼마 전에 해산 본인이 진해에게 네가 정실이면 좋겠다고 속된 말로 이빨을 까지 않았던가. 그런데 연서를 받고 그 자리에 나갔다니.
아마 해산 본인은 진해 귀에 들어가지 않게 조용히 처리하려던 것이었겠지만 하필이면 해산과 만난 뒤 소양자가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황제 폐하의 총애를 한 몸에 입는 귀한 애조도 실종되었고!
“고추도 없는 놈이 어딜 함부로 뚜쟁이질이야 잘 죽었다, 망할 새끼!”
진해의 분노는 이윽고 연서를 준 이와 연서를 전해 준 소양자라는 내관에게 돌아갔다. 진해가 소양자의 신체적 약점을 적나라하게 거론하자 뒤에서 소양자와 마찬가지로 뭔가가 없는 이들이 작게 헛기침을 했다. 소산자는 어딘지 모르게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에이 씨!”
진해는 씩씩대다가 붓을 바닥에 던져 버렸다. 홍련이는 진해의 어깨가 들리자 가볍게 뛰어 진해의 관모 위에 올라탔다.
“이 소양자라는 놈의 행실을 보아 분명히 다른 데서도 원한을 듬뿍 사고 있을 게 분명해! 암, 그렇고말고! 간덩이가 부어서 임자 있는 몸에게도 연서를 찌르고 다니는 걸 보면 뒤에서 칼 갈고 있는 이가 한둘이 아닐 터!”
[뾰롱!]
“내 이놈의 뒤를 샅샅이 조사해서 억울한 이가 없게 해야겠다! 그것이 바로 영찰어사의 사명!”
“오 어사, 이 일은 이미 형부시랑이 맡고 있는데…….”
“산공공! 영찰어사는 독자적인 조사권이 있지요? 거기다 저는 유일청을 찾아오라는 황명을 받았고?”
“예, 그렇습니다. 오 대인.”
“황상께서 유일청을 찾을 수 있다면 갖은 수를 써도 좋다고 하셨고요?”
“예, 그렇습니다. 황상께서는 유일청을 찾아올 수 있다면 뭐든지 오 대인의 말씀을 들어드리라 하셨습니다.”
“그럼 우선 소양자를 죽인 범인을 찾아야 해요! 분명히 그 극악무도한 놈이 소양자를 죽이고 유일청을 데려갔을 거야! 어쩌면 유일청이 목적이었는지도 모르지!”
“뭐라? 유일청이라니, 그럼 진해 너는 고를 심문하러 온 것이 아니라 유일청을 찾으러 온 것이란 말이냐?”
해산은 진해와 소산자의 대화를 듣자마자 아주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다. 자신의 정인 앞에서 껄끄러운 사실을 수치를 참아 가며 억지로 말했는데 사실 심문이 아니라 유일청을 찾으러 온 것이란다. 부황의 애조이긴 하지만 육품 어사를 붙여 찾게 할 정도로 귀한 새이긴 하지만, 심지어 친자식인 자식을 제쳐 두고 찾아 헤매는 새이긴 했지만, 고작 새 한 마리를, 겨우 새 한 마리를 찾으러 왔다는 말이었다!
“해산 도련님!”
진해는 손을 뻗어 어이없어하는 해산의 손을 꼭 그러쥐었다. 뒤에 서 있던 내관들의 눈썹이 동시에 꿈틀거렸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죽어 마땅했던 소양자를 죽인 놈을 찾아 이곳에서 꺼내 드릴게요. 어쩌면 유일청을 찾게 된 건 당신을 구하라는 돌아가신 우부의 도움일지도 몰라요! 잘은 모르겠지만 사위를 아끼실 게 분명하니까!”
사위라는 소리에 내관들의 눈썹이 또다시 꿈틀거렸다. 한 번만 더 꿈틀거렸다가는 눈썹이 이마를 벗어나 하늘 위로 솟을 기세였다.
“너는 고를 믿는 게냐? 고가 소양자를 죽였으면 어쩌려 그러느냐?”
“안 죽이셨다면서요.”
“……그래.”
“그럼 그걸로 된 거예요. 만약 제가 뇌옥에 갇혀 있으면 해산 도련님은 어쩌실 건데요?”
“…….”
“그거랑 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마음 단단히 잡고 계세요. 요기 이 녀석, 홍련이가 유일청이랑 친했다니까 홍련이를 풀어 두면 유일청도 이 녀석을 보고 어디서 금세 날아올 거라구요! 유일청은 말을 할 줄 안다니까 물어보면 범인도 알겠죠!”
“진해야 유일청이 말을 할 줄 아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게 똑똑하지는―”
“범인을 못 찾더라도, 유일청을 찾게 되어 제게 포상이 내려진다면 전 가장 먼저 당신을 이곳에서 꺼내 달라고 할 거예요. 좀 밉보이긴 하겠지만! 해원공 마마 당신께서 이곳에 계신 건 싫으니까요.”
“해야……!”
해산이 진해를 가끔 부르는 애칭으로 부르자 소산자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진해와 해산이 서로를 애틋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걸 말없이 지켜보았다.
“더 있고 싶지만 곧 날이 어두워져요. 유일청은 곱게 자란 녀석 같으니 밤이슬을 맞으면 힘들겠지요. 동 형 모르게 하는 것도 큰일이겠네요. 만삭이니까요.”
“그래, 마땅히 그래야지. 고는 오로지 너를 믿고 있으마. 설사 네가 범인을 찾지 못하더라도, 고는 네 말만으로도, 충분히,”
해산은 말을 다 마치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진해는 악문 입술에서 무너진 자존심과 상처받은 마음을 읽어 냈다. 동십사가 건재했다면 동십사가 나서서 해산의 편을 들어 주었겠지만 동십사는 현재 모든 이와의 만남을 거부하고 반쯤 칩거에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동가대를 비롯한 동십사의 가족들은 매일 아침 얼굴이 밝았다가 어두웠다가 하는 게 일상이었다.
동십사 하나가 없어진 것만으로도 해산은 이렇게나 위치가 불안정했다. 해산의 정인이자 나름 형부의 육품 관료라는 진해조차 해산이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었다. 진해가 해산이랑 떡이나 칠 생각을 하는 동안 해산은 어둡고 쓸쓸한 곳에서 모두에게 버림받은 채 홀로 고난을 거듭하고 있었던 것이다.
‘눈물 나려 하네.’
진해는 마지막으로 해산의 손을 꾹 한번 잡아 주고는 눈시울이 붉어진 해산을 힘겹게 뒤로했다. 진해의 어깨가 처진 탓에 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던 홍련도 비스듬하게 앉게 되었다. 홍련은 과연 고산의 신조답게 제 위치가 불안해져도 불평하거나 하지 않았다. 대신 짠한 눈으로 진해를 내려다보았다. 고작 진해의 주먹만 한 녀석이.
“산공공.”
“예, 오 대인.”
“심문을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나요?”
뇌옥을 나온 진해는 눈이 부셔 근처의 난간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았다. 새삼 해산의 곁이 험난하다는 걸 자각했다. 자신은 해산에게 고작 이 정도의 도움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도.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시기가 딱 맞네. 해원공부에 호위들이 사라졌을 때랑.”
“호위들 역시 심문을 받고 있습니다.”
“설마 고문받는 게 호위들이에요?”
“다는 아닙니다. 아직까지는 대월률에 따른 순서를 지키고 있으니까요.”
“누가 뒤에서 입김이라도 불면 더 심해질 수도 있다는 말이네요. 창명후라든가.”
소산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진해는 이미 창명후가 손을 쓰고 있다는 말로 알아들었다. 황자의 살인이 소문이라도 나면 아무리 적장자라고 한들 황위 계승에 문제가 생길 터였다. 그럼 다음 황위를 누구에게 물려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해산의 입지가 상당히 곤란해진다는 말이었다.
‘잠깐만, 해산 도련님이 위치가 곤란해지면 나한테 좋은 거 아닌가? 흠 있는 황자라면 나랑 결혼해도 아무도 뭐라고 안 할 거잖아?’
아무것도 없는 해산과 잠춘동으로 들어가 오순도순 사는 상상을 했다.
‘미친 새끼! 정신이 나가도 제대로 나갔네!? 해산 도련님이 안 했다잖아! 나 좋다고 안 한 걸 뒤집어쓰게 둘 생각을 해?!’
진해는 퍼뜩 제정신이 들어 양손으로 뺨을 후려쳤다.
[뾰, 뾰롱?]
홍련이가 갑작스러운 진동에 뜨악한 표정으로 진해를 내려다보았다.
“좋― 아. 일단 출궁해서 소양자가 갔다는 곳부터 가야겠네! 자, 홍련이 너 내려! 난 이제 밖으로 가야 하니까.”
[…….]
“왓, 뭐야? 이 녀석 발톱 뭐로 만든 거야?! 관모에 파고들었잖아!! 야 이 나쁜 새 새끼야! 이걸 얼마를 주고 만들었는데! 떨어져, 떨어지라고!”
진해는 출궁 전에 산공공에게 홍련이를 돌려주려고 했다. 그러나 홍련이는 관모에 발톱을 박고 떨어지지 않았다. 진해가 몸을 잡아당기자 홍련이의 다리가 한껏 늘어졌다. 통통한 몸매가 길쭉하게 변했지만 홍련이는 부리를 앙다물고 한사코 진해의 관모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그 전에 진해의 관모에서 투둑, 투둑, 뜯어지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오 대인, 오 대인. 일홍련이 다치면 황상께 제가 벌을 받습니다.”
보다 못한 소산자가 다가와 진해를 말렸다. 일홍련보다 진해의 관모를 걱정해서였다. 관모는 만드는 데 시간이 제법 걸리는 물건이었다.
“그럼 관모를 벗고 가요?”
“헛, 그것도 아니 됩니다. 관모를 벗고 가는 건 사퇴했을 때나 죄를 저질렀을 때뿐입니다. 차라리 아까 하신 말씀대로 일홍련을 데리고 탐문을 가시지요.”
“엥? 당연히 농이었죠! 얘가 뭘 안다고 데리고 가요?”
[뾰롱! 뾰롱! 뾰롱!]
“말은 못 해도 제법 신통하니 도움이 될 겁니다. 만약의 사태에는 호신이 될지도 모르구요. 유일청이 근처에 숨어 있다가 일홍련을 보고 나올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맞네? 유일청은 이 녀석이랑 친했다니까!”
홍련이를 떼어 내려던 진해가 다시 관모를 썼다. 깃털이 좀 헝클어지긴 했지만 붉은색의 홍련이는 마치 고관의 산호 장식처럼 진호의 머리꼭지 위에 앉아 있었다. 오랜만의 외출을 예감하고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하여 진해는 괴조 일홍련과 함께 유일청을 찾기 위해, 동시에 소양자의 살인범을 찾기 위해 함께 탐문을 떠나게 되었다. 사람들은 머리 위에 새를 얹은 관료를 이상하게 보았으나 일홍련의 덩치가 작고 색이 고와 그저 진해가 좀 독특한 취향을 가졌거니 생각하였다. 진해는 우선 집으로 들러 자신의 호위인 삼랑이를 데리고 가기로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해산 도련님이 뇌옥에 갇혔다는 걸 알면 누구보다도 빠르게 진해를 노릴 삼랑이가 오늘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지나가는 하인을 잡고 물으니 진해가 등청한 뒤로 한 번도 바깥에 나오지 않았다고.
“형아, 어서 와.”
“응? 우리 강아지 아직 안 갔어?”
“오늘은 휴점 날인걸. 그런데…… 형아 머리에 그건 뭐야?”
“아, 이 녀석은 사정이 있어.”
많이 아픈가 싶어 삼랑이 방에 찾아가려는데 삼랑이의 방 근처에 방이 있던 미려가 진해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미려에게 흔치 않은 미려방과 여해루, 두 가게의 휴점일이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미려는 오늘따라 단순하면서도 가뜬한 옷을 입고 있었다. 평소에는 화사하고 화려했던 아이가 단정한 옷을 입으니 꼭 잘생긴 무사님이 된 것 같았다.
“근데 삼랑이가 많이 아프나? 그럼 다른 곳에서 호위를 구해야겠는데.”
“형아, 무슨 일이야? 호위라니? 누가 형을 노려?”
“아니 그게 아니고.”
호위를 구한다는 말에 미려의 커다란 눈이 더 커다래졌다. 순식간에 걱정이 어리는 걸 보며 진해는 미려에게 구구절절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이야기해야만 했다. 미려는 해산이 뇌옥에 갇혔다는 소리를 듣자 잠깐 생각에 잠기는 듯하다가 해산의 호위들이 고문당하기 시작했다는 소리를 듣자 뭔가 깨닫는 표정이 되었다. 그것도 잠시 금세 평소의 미소 짓는 얼굴로 돌아왔지만.
“형, 그럼 나랑 오호가 같이 갈게.”
“뭐? 세살이가? 차라리 일도나 이단이를 데려가지. 아니, 것보다 넌 왜? 위험할지도 몰라! 살인범이라고!”
“난 언제나 사랑에 죽고, 사랑에 살고 싶었어. 형아를 위해서라면 이 한 몸……!”
“아, 안 돼!!”
“야 이 씨발!! 시끄러워서 살 수가 있나!! 야, 두 놈 다 내 방 앞에서 꺼져!! 꺼지라고!!”
다행히 삼랑이는 별로 안 아픈 모양이었다. 진해는 친숙한 욕설과 함께 큰 소리로 열리는 문에 안도했다. 하지만 삼랑이는 호위를 해 달라는 진해의 말에도 표정이 시큰둥했다. 흘끔흘끔 방을 바라보는 게 뭔가 사정이 있는 듯했다. 방에 아무도 들일 수 없는 사정이.
‘헛, 설마 삼랑이에게도 드디어 짝이! 해, 해방인가!’
진해는 뒤늦게 삼랑이의 방을 들여다보려고 망치 피하는 두더지처럼 이리저리 고개를 내뻗었지만 삼랑이는 인상을 쓰며 문을 닫았다. 대신 길게 휘파람을 불었는데 삼랑이 휘파람을 불자 어디 있었는지 모를 위사들이 두 명 툭 튀어나왔다. 진해는 모르고 있던 진해 집의 식객들이었다.
그리하여 진해는 미려와 설득인지 토론인지를 거친 뒤, 미려를 집에 놔두고 삼랑이가 부른 위사 둘과 오호를 호위로 데리고 가기로 했다. 세살이의 휴무를 방해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찝찝했지만 세살이는 미려가 연통을 넣자마자 땀을 흘리며 뛰어와 진해에게 가세했다.
뒤에 건장한 호위 둘과 예쁘장한 청년 하나를 따르게 하는 진해는 겉만 보자면 제법 그럴싸한 어사 나리였다. 진해 머리꼭지 위에 앉아 있는 홍련이도 표정만큼은 근엄하기 짝이 없었다. 호위를 거느린 진해의 첫 목적지는 당연히 소양자가 죽은 곳이었다. 놀랍게도 소양자는 번화가에 위치한 객잔에서 살해당했는데, 아무도 소양자와 만난 이를 기억하지 못했다.
“뭐야, 장난하나!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면 애먼 사람이 뇌옥에 갇혀 있다는 말이야, 지금!”
진해는 짜증을 내며 탁자를 소리 나게 내리쳤다. 관복을 입고 호위를 셋이나 단 관리가 화를 내자 딴에는 정말로 결백한 객잔 주인이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렸다. 번화가에 객잔을 내며 갖은 수난을 다 겪었지만 이런 살인 사건은 처음이었다. 아, 물론 살인 사건이 처음이라는 게 아니라 황궁과 얽혀 한순간에 제 모가지가 날아갈지도 모르는 사건이 처음이라는 말이다.
“대, 대인, 아시다시피 그날 저녁은 지나가는 거지라도 고용하고 싶을 정도로 바쁜 날이었습니다. 저기 비단점의 안주인 나리께서 손자의 건강의 기원하신다고 지나가는 이들에게 풍등을 나눠 줬잖습니까.”
“그래서, 뭐.”
“아, 아니, 그러니까 비단점 주인 나리분들은 호부의 시랑…….”
“이런 간 큰 놈을 봤나. 제 할 일을 못 한 걸 감히 호부시랑 어르신을 걸고넘어져! 이 뻔뻔한 작자야, 난 준 아기씨가 회임되시고부터 지금까지 쭉 지켜본 사람이야. 내 말 알아듣겠어? 내 앞에서 호부시랑 어르신을 들먹이는 건 씨알도 안 먹힌다는 거야!”
진해가 포목점에 새로 태어난 아기씨의 이름을 거론하자 객잔 주인은 깜짝 놀랐다. 근방의 웬만한 관리들은 호부시랑의 이름을 들으면 못마땅해하면서도 한 수 물러나곤 했기 때문이다.
탐문을 왔던 포교나 형부의 관리들도 그랬다. 객잔 주인이 비단가게 방 도련님의 자제인 준 아기씨의 건강을 빌기 위해 바빴노라 말하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금방 돌아갔었다.
“하, 하하, 하하, 아이고, 제가 높으신 나리를 몰라뵙고―”
객잔 주인은 진해가 나이에 비해 상당히 높은 관리임을 눈치채자 땀을 비 오듯 흘리기 시작했다. 저 나이에 호부시랑과 안면을 틀 사이면 객잔 주인의 예상보다 훨씬 더 굉장한 가문의 자제일지 몰랐다.
주인은 눈을 질끈 감으며 품속에서 아끼고 아끼던 전낭을 끄집어냈다. 예로부터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는 법이라고, 돈을 받고도 주인에게 윽박지르는 관리는 보지 못했다. 굉장한 관리에게는 더 많이 집어 주면 되는 일이었다.
“허, 주인장.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닌가 봐?”
아니나 다를까 진해는 주인이 슬그머니 탁자에 올려 둔 전낭을 집어 들었다. 진해가 주머니를 여는 모습을 보며 주인이 속으로 안도의 숨을 쉬는 찰나 진해가 주머니를 그대로 뒤로 휙 던져 버렸다. 가만히 서 있던 위사 중 하나가 날아오는 주머니를 자연스레 잡아챘다.
“주인장의 성의란다. 나중에 와서 술이나 한잔 사 마셔. 주인장이 뇌옥에 갇히기 전에 말이야!”
위사가 고개를 끄덕거리는 동시에 진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인장은 일이 어그러져도 심각하게 어그러졌음을 눈치챘다. 전쟁 후의 월국에는 청백리가 멸종한 줄 알았는데……!
“대, 대, 대인! 대인, 대인! 잠깐만요, 뇌옥이라니요!”
“그럼 억울한 사람을 잡아 가두고도 멀쩡할 줄 알았어? 급한 일 있으면 빨리 마무리 지어 두는 게 좋을 거야. 저런 푼돈으로 무슨 사람 목숨을 사겠다고.”
“하, 하지만 대인! 전 정말 아는 게 없다니까요! 전 바빠서 모른다고, 그냥 그 중인이, 그 태, 태감! 태감 어르신이 큰 새장을 들고 올라가는 것만 봤다구요! 제가 눈이 천장에 박힌 것도 아니고 이 층의 별실에 있는 나리의 동태를 어떻게 한눈에 봐요! 그냥 젊은 사내 몇이 왔다 갔다 하는 것만 알았습니다요! 포교에게 진술한 건 그들의 인상착의뿐이에요! 누가 누구인지는 하늘에 맹세코! 맹세코 모릅니다요!”
진해는 주인의 말을 믿지 않는 것처럼 매달리는 주인의 손을 탁 뿌리쳤다. 그리고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냉랭한 표정으로 주인을 흘겨보았다. 장사치인 객잔 주인은 제법 큰 돈을 아무렇게나 호위에게 던져 주는 진해에게 제법 기가 꺾인 상태였다. 진해가 여해루의 전주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자연스레 납득했겠지만, 돈이 궁할 게 분명한 젊은 관리인 진해가 돈을 집어 던졌다는 건 그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자네는 그들의 인상착의만 알 뿐 누가 누구라는 건 모른다는 거지?”
“예! 살짝 귀한 댁 자제와 제법 부유한 집 자제라는 것 정도밖에 모릅니다요!”
“아니 인상착의만 안다더니 그런 건 또 어떻게 아는 거야? 역시 나한테 거짓을 고하고 있군. 좋아, 이대로 돌아가서 당장 포교―”
“옷차림! 옷차림이랑 분위기! 이곳 근처에 균여관이 있어서 젊은 학사 관리들이 자주 오갑니다! 그분들을 보다 보니 자연히 감이 생기게 되었어요!”
“균여관……!”
국립 학당이자 학사 관리들의 근무처인 균여관의 이름을 듣자 진해는 머릿속에 환하게 불이 들어오는 듯했다. 해원공을 알아보지 못한 주인 대신 누가 해산을 신고했는지 대충 감이 올 것 같아서였다. 어쩌면 범인 역시.
진해는 해산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해산이 잠시 균여관에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해산은 균여관에 오래 있지 못했음을 아쉬워했었는데, 그 당시 균여관에 있었던 학사 혹은 관료들은 해산의 얼굴을 알고 있을 터였다. 어쩌면 해산을 밀고한 것 역시 균여관 사람일지도 모른다.
‘범인이 제 발 저린 걸지도 몰라.’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진해는 객잔 주인이 붙잡은 제 옷자락을 홱 잡아당겼다. 바닥에 철푸덕 엎드린 객잔 주인과 시선을 맞추려는 듯이 바닥에 쪼그려 앉아 주인에게 말을 걸었다.
“좋아. 댁의 절박함을 봐서 관리에게 뇌물을 주려 한 죄는 눈감아 주겠어. 포교한테 말한 것보다 더 기억해 내면 무고한 이를 뇌옥에 가둔 것도 눈감아 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음인! 맨 처음에는 음인이었습니다!”
진해가 병 주고 약 주자 객잔 주인은 진해가 시키지 않아도 술술 불기 시작했다. 진해는 용돈을 얻게 된 위사가 가져다준 차를 마시면서 객잔 주인이 최선을 다해 짜낸 인상착의들을 정돈했다. 이 층에 올라간 손님 중 소양자를 만났을 거라고 짐작되는 인물은 총 셋이었는데 하나는 균여관 학사의 분위기를 풍겼고, 하나는 그럭저럭 있는 집 자식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체구가 크고 눈매가 단단해 보이는 이였다.
“덩치만 보면 주먹깨나 쓰게 생겼는데 옷은 좋은 걸 입은 걸 보니 무가의 도련님인 것 같습니다!”
‘이 새끼가! 어딜 봐도 귀티가 흐르는 해산 도련님의 어디가 주먹깨나 쓰게 생겼다고!’
객잔 주인이 묘사하는 체구가 큰 이가 영락없는 해산이라 진해는 하마터면 사적인 감정을 듬뿍 담아 객잔 주인을 노려볼 뻔했다. 그러나 객잔 주인의 사람 보는 눈은 매우 탁월했는데, 언젠가 추피동에서 해산 도련님은 구리 채찍으로 삼랑의 은신처를 몽땅 뒤집어엎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여하간 객잔 주인의 증언을 모은 결과 진해는 해산 외에 소양자를 죽인 용의자가 두 사람이나 더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게다가 그중의 한 놈이 균여관 학사로 보인다고 했으니 분명히 이놈의 자식이 수를 써서 해산 도련님을 함정으로 밀어 넣은 게 분명했다!
“이 싸가지 없는 놈의 자식……! 당장 이놈의 자식을 잡아서 곤장을 쳐 주지 않으면……!”
“오 대인, 살인에 고작 곤장이라니요. 주리를 트셔야지요.”
“압슬도 있습니다.”
“오 형,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 뇌옥에서는 곤장보다 더한 게 벌어지고 있는데 겨우 곤장?”
“…….”
몇 푼의 돈으로 순식간에 사이가 가까워진 위사들과 또한 웬일인지 진해의 호위에 적극적인 오호가 진해의 말에 한마디씩을 거들었다. 주리나 압슬까지는 생각해 보지 못한 진해는 서슬 퍼런 한마디에 관자놀이에 식은땀이 맺히는 걸 느꼈다. 자신이 범인을 잡지 말고 관아에 잡도록 맡기는 것이 인도적인 처사가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진해도 물러설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어차피 사람을 죽인 몹쓸 놈이었다. 해산 도련님을 함정에 빠뜨린 빌~ 어먹을 자식이기도 했고.
“주리든 압슬이든 일단 잡아야지! 자, 가자!”
“어디로 갈 건데?”
“어디긴 어디야, 균여관이지.”
“오 형, 설마 용의자 중 하나가 균여관 학사 같다고 해서 지금 균여관으로 가자는 거 아니지? 아, 제발 아니라고 해 줘. 어사 자리까지 꿰찬 오 형이 그렇게 멍청한 짓을 할 리가 없으니까 말이야!”
“균여관에 가는 게 뭐 어때서 그렇습니까? 쭉 세워 놓고 찔려 보이는 놈을 잡아 불게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머리가 이러니까 끄트머리로 들어간 추피동 깡패한테 대장 대장 거리고 있지.”
“뭐요!”
“어깨 위에 단 걸 잘 굴려 봐. 균여관에 학사가 몇인 줄 알고 그 두 놈을 추려 낼 건데? 그리고 균여관은 국립 학당이야. 그중 십분지 팔은 등용되고 우두머리인 대학사는 이품! 황제의 공식적인 자문이기도 하지. 학사 중에 살인범이 있다고 하면 대학사가 아 그렇습니까 이러겠어? 헛소리 말라면서 쫓아내지나 않으면 다행이게!”
오호의 논리 정연한 말에 위사들이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진해 역시 조용히 입을 다물었는데 진해는 균여관 앞에 잠복하면서 거동이 수상한 놈을 집어낼 생각이었던 것이다.
‘오호 녀석 평소에는 고기 먹는 거 말고는 관심도 없는 녀석이 웬일로 저렇게 머리가 쌩쌩 돌아가지? 어쨌든 저 녀석 말이 맞아. 솔직히 말했다가는 균여관 문턱도 못 넘을 거야. 그럼 어떻게 한다…….’
진해는 입으로는 당연히 그럴 생각이 아니었다고 말하면서 빠르게 머리를 회전시켰다. 오호 녀석도 답지 않게 분발하고 있었다. 그러니 해산 도련님의 정인인! 자신은 더 분발해야 했다. 더 분발해서 해산 도련님을 멋지게 구해 내고 그동안 못 친 떡방아를 찧어야 했다. 해산 도련님이 손에 하는 걸 엄청 부끄러워했으니 이번엔 발에다가 해 볼 생각이었다. 해산 도련님의 것을 발로 해 주는 것도 좋은 생각일 듯했다.
기분 좋은 일에 약한 해산 도련님은 처음에는 화내다가, 그다음에는 당황하다가, 다음에는 진해의 무릎을 잡고 매달릴 터였다. 무릎을 잡고 애걸―
“조관림!”
“응?”
“오호야, 내가 하려고 했던 말은 균여관에 가서 우리와 안면이 있는 조관림을 만나자는 말이었어.”
“아, 그러고 보니 조반편이가 균여관 학사 관리였지? 흐음, 확실히 그치면 균여관 사람을 거의 다 알겠네. 둔재는 아니라서 과거에 급제하기 전부터 균여관에서 공부했다니까.”
해산이 진해의 무릎을 잡고 애걸하는 장면은 어느새 조관림이 미려의 옷자락을 붙잡고 애걸하는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상상이 아닌 진짜 과거에 일어났던 일이었다. 조관림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고개를 뻣뻣이 쳐들고 다니면서 미려 앞에만 서면 사람이 달라져서 옷을 잡고 매달리고 난리였다. 지나가던 학사 관리 중 하나가 눈을 비비고 사람을 확인할 정도였다.
“근데 오 형, 괜찮겠어? 조반편이가 형을 만나려 할까?”
“으음― 당연히 안 만나려 하겠지. 전부터 날 잡아먹고 싶어서 이를 가는 인간인데.”
“근데 형이 잘못하긴 했어. 모르고 살았으면 조반편이도 인생 편하게 살았을 텐데 형이 일패 어른을 소개해 주는 바람에 다른 양인은 눈에도 안 들어오는 몸이 되었다잖아.”
“확실히 우리 미려보다 어여쁜 양인은 없지. 월국, 아니 이 세상 전체를 털어도 나오지 않을 것이야. 음, 내가 정말 잘못했어.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진해는 말을 하면서 새삼 자신의 죄를 또다시 통감하였다. 조반편이, 아니, 아니, 조관림은 미려에게 반하지만 않았으면 지금쯤 적당한 상대와 혼인해서 알콩달콩 가정을 꾸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왜냐면 그도 젊은 나이에 육품의 관직에 오른 인재였기 때문이다.
듣자 하니 본인의 재능은 고만고만한데 남을 가르치는 데는 제법 일가견이 있어, 그가 가르친 학생은 반드시 초시에 합격한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등수를 보장 못 하는 게 단점이지만 초시에 합격하기만 해도 수재라는 호칭을 달 수 있었다. 똑똑한 아들 갖길 원하는 아버지들에게 조관림의 몸값은 그야말로 천정부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조 학사 대인을 뵈러 왔소만.”
그리하여 진해는 자기가 누구라고 하지 않고 균여관의 문지기에게 용건을 고했다. 문지기는 관복을 입은 진해를 한 번, 진해의 뒤에 붙어 있는 오호를 한 번, 과일과 당과 꾸러미를 든 위사들을 한 번 바라보았다.
“근래 맡은 학생이 많아 안 만나려 하실 텐데요?”
“아~ 나는 내 아우를 맡기러 온 것이 아니라 인사를 하러 온 거요. 덕분에 잘되었다고!”
“음? 초시의 합격 발표가 나려면 이레는 있어야 할 터인데?”
오호를 아우로 가장해서 조관림에게 인사를 시킨다는 작전은 균여관의 일정을 꿰뚫고 있는 문지기에게 간파당했다. 그러나 진해가 누군가. 진해는 역적이 제 입으로 죄를 실토하게 만든 것도 모자라 거의 사로잡기까지 한 인물이었다. 또한 대전에 한바탕 짠 내를 돌게 만들며 황상께 친히 어사직을 하사받기까지 한 인물이었다!
물론 진해가 담이 크다기보다는 사적인 이익을 어찌저찌하려다 일이 잘 풀려 이리된 것이었지만.
“참 나. 이 양반아. 누가 그걸 몰라?”
“하면……?”
“척하면 척이어야지. 다른 사람이 모른다고 나까지 모르라는 법 있어?”
문지기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진해는 씩 웃으면서 소매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손톱만 한 은 덩이를 끄집어냈다. 그리고 그것을 여전히 의아한 표정의 문지기 손바닥에 올려 주었다.
“가서 조 학사한테 오 어사와 아우가 왔다고 전하게. 당장 데려오라고 난리 법석일 테니.”
문지기는 손바닥 위에 하얗게 빛나는 덩어리와 오 어사라는 말을 듣자 두 눈을 번쩍 떴다. 어사 중에 오씨가 없지는 않겠지만 최근 도성 안에서 가장 유명한 어사의 성씨가 바로 오씨였다. 기지를 발휘해 역적을 쫓아낸 영찰어사 오진해, 좌부우부도 없고 빈궁한 잠춘동 출신이라면서 재주가 그리도 많다는 양인 사내!
“저, 정말 오 어사 나리입니까? 역모를 밝혀냈다는!? 아이고, 오 대인! 우리 애가, 꿈에서라도 대인을 보고 싶어 한다구요!”
“응? 날 왜?”
“우리 애는 머리가 돌이라서 과거에는 죽어도 급제 못 하거든요! 그런데 오 어사 대인은 과거를 치르지 않고도 어사 자리에 올랐으니 그 애가 어찌 안 좋아할 수 있겠어요!”
좋아해 준다니 감사한 일이지만 기분이 좀 이상했다.
“자, 잠시만 기다리십쇼! 제가 당장 조 학사 대인께 금방, 금방, 말씀드리고 올 테니!”
은이 문지기를 진해에게 반하게 만든 건지, 아니면 진해가 모르는 곳에서 진해가 생각보다 훨씬 유명해진 건지. 해산과의 연애에 골몰한 진해는 몰랐지만 진해는 가진 것 없는 평민들, 특히 잠춘동 인근의 주민들에게는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작은 극단에서는 진해와 옥첩려의 일로 연극을 만들 정도였다.
사실은 황제 역시 그 사실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진해에게 어사 자리를 내어 준 것이었다. 전쟁을 끝내고 평화의 시대를 연 회순 황제는 평화가 지속되면 물이 고이듯 정체된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해산에게는 냉정한 좌부지만 군주로서는 훌륭한 이였다. 강절곤이 연씨 가문의 몰락에 대해 입 다물고 있는 것도 회순이 황제로서는 좋은 인물이었기 때문에, 자신과 치균이 손을 잡은 것이 그에게 위협이 되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오 어사님! 어서 들어오십시오! 과연 오 어사 대인의 말씀대로 조 학사께서 어서 들어오시라고 난리십니다. 서두르시다가 소매를 먹에 적시기도 하셨다니까요.”
“혹시 고할 때 오 어사와 예쁘장한 아우가 왔다 일렀소?”
“예? 아니 그냥 아우님이 같이 오셨다고만 했습니다.”
“음, 잘했소. 아주 잘했소.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아드님과 한번 만나보도록 하지.”
“정말이십니까?! 세상에!”
“이렇게 아들을 생각하는 우부를 뒀으니, 아드님은 참 운이 좋아.”
진해가 아들을 만나 준다고 이야기하자 문지기는 기뻐서 눈물을 글썽일 지경이었다. 그런 문지기의 모습을 보며 진해는 그의 아들을 만나면 늦기 전에 더 열심히 공부하라고 말할 작정이었다. 진해는 공부를 안 하고 어사가 되었지 않느냐고 따지면 일단 변소부터 푸게 할 작정이었다. 진해가 해 온 막노동 중 몇 가지만 시켜 보면 오냐오냐 자란 아이들은 대번에 책상 앞이 그리워질 터였다.
“엇, 어? 미, 미려 공자는?”
아니나 다를까. 조관림은 진해와 동생이 왔다는 소리에 서둘러 새 옷으로 갈아입은 모양이었다. 머리도 새로 빗고 관모도 똑바로 쓰려 노력한 티가 역력했다. 하지만 진해가 데려온 아우는 진해의 강아지가 아니라 진해가 아우처럼 생각하는 문지기 형제의 막내 오호였다. 조관림은 굉장히 당황한 눈치였다.
“요기 있네요, 제가 아우, 처럼 생각하는 귀여운 세살이가.”
“뭣?! 분명히 내겐 아우가 왔다고……!”
“잘못 들으신 거겠죠. 눈 밑이 시커먼 게 며칠 밤은 새우신 것 같은데.”
“너, 너 이놈! 또 되먹지 않은 수작질로 나를 속인 게로구나!”
“어허, 수작질이라니요~? 남 듣기 우세스러운 말 하지 마세요, 조 학사!”
“조 학사!? 허! 이놈이?!”
“본관이 언제 조 학사에게 수작을 부렸다고 그럽니까? 난 수작 부린 적 없어요? 수작은 조 학사가 우리 미려에게 부렸지!”
조관림은 진해에게 당장 꺼지라고 하려다가 진해의 입에서 튀어나온 본관이란 말에 정신이 돌아왔다. 믿고 싶진 않지만 이놈은 무려 자신의 눈앞에서, 단번에, 그것도 같은 관품인 육품 영찰어사에 제수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용건이 무엇인가. 미려 공자가 온 것처럼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나를 보려고 하다니.”
천출이었지만 관품이 같은 이상 이놈, 저놈할 수는 없었다. 자신과 같은 관품을 까내리는 건 누워서 침 뱉기나 마찬가지였다.
“별건 아니고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용건이 없으면 균여관에 못 들어올 것 같아서.”
진해 역시 말이 짧아졌다. 조관림이 미려를 데려가 주기를 원할 때는 세상에서 제일 귀한 사람이었지만 이젠 미려는 예쁘기만 한 기생이 아닌, 무려 육품 영찰어사의 동생이었다. 동십사는 물 건너갔지만 진해가 노력하면 얼마든지 좋은 상대를 구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살림이 폈으니 일찍 장가보낼 필요 있나? 우리 미려는 할배가 되도 데려가려는 사람이 줄을 설 텐데 뭐~’
미려는 할배가 되어도 귀여울 게 분명했으니 진해는 일찍 장가보낼 생각을 미뤄뒀다. 원래는 삼랑이를 견제할 생각으로 미려와 같이 살자 했지만 오랜만에 같이 사니 진해 역시 굉장히 즐거운 기분이었다. 가난하지만 즐거웠던 옛 추억이 생각났다.
덜덜 떨며 서로를 끌어안고 자던 기억, 질기게 우는 녀석을 업은 채 밭에서 일하던 기억, 미려를 노리는 치한을 처음으로 퇴치했던 기억, 미려가 처음으로 진해에게 떼를 쓰던 기억, 그 애랑은 놀지 말라고 울고 화를 내던―
‘헛.’
진해는 과거의 흐뭇한 기억에 휩싸여 있다 오싹 소름이 돋았다. 진해가 길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 처음으로 죽을 위기에 처했던 기억이 떠오를 뻔했다. 어찌나 아팠던지 진해는 그 이전의 기억을 일부 잊어버렸을 정도였다. 미려가 한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극진히 간호한 덕에 의원을 부르지 않고도 일어날 수 있었지만 운이 조금만 나빴더라면 진해는 어린 나이에 세상을 버렸을 게 분명했다.
“그대가 배움이 필요한 건 아닐 테고.”
조관림은 진해에게 말은 높였지만 얕보던 태도를 완전히 버리진 못했다. 눈빛은 여전히 비아냥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필요 없지. 안 배우고도 육품인데. 거, 조 학사는 공부를 얼마나 했다고 했었지?”
“…….”
하지만 뛰는 조관림 위에 나는 오진해 있었다. 진해는 평소에는 부리지 않던 거드름을 한껏 피워 대며 조관림의 앞에 털썩 앉았다. 뒤에 있던 오호가 조관림의 허락도 받지 않고 차를 끓이기 시작했다. 진해 몫뿐만 아니라 위사 둘과 자신의 몫도 함께였다.
“어쨌든 조 학사. 내가 여기 균여관에 온 것은 당신에게 필요한 게 있어서야. 내가 원하는 걸 얻으면 당신에게도 합당한 대가를 나눠 줄게. 쉬운 말로는 누워서 떡 먹기라는 거지.”
“떡은 좋아하지 않으니 할 말 있으면 빨리하고 나가기나 하게. 초시의 답안을 채점하느라 몸이 둘이라도 모자랄 지경이니.”
“좋아.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조 학사는 이 균여관의 학사 관리들에 대해 얼마나 알아?”
“균여관에 입학하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나가지 않으니 이름은 몰라도 얼굴은 다 알게 되어 있지.”
“즉 거의 다 안다는 말이네.”
“잠깐, 설마 지금 날 심문하는 건가! 난 아무 죄도 짓지 않았어, 적법한 절차는 아니지만……, 결코 대월률에 위배될 만한 짓은 하지 않았네!”
대충 말만 꺼낸 건데 조관림의 반응이 지나치게 격렬했다. 조관림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반쯤 일어나기까지 했다. 진해의 눈이 가느스름하게 좁혀지고 위사 둘이 눈빛을 교환했다. 오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어허, 조 학사 넘어지겠다. 얘들아, 가서 좀 앉혀 드려라.”
“앉으시죠, 조 대인.”
“어사 대인께서 물으실 말이 있으시다지 않습니까.”
“대학사, 대학사 대인을 불러와! 나, 나는, 아무것도……!”
건장한 위사 둘이 어깨를 잡아 누르자 조관림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파래졌다. 다른 곳도 아닌 자신의 직장인 균여관에서 말로만 듣던 영찰어사의 즉석 심문을 받게 되어 매우 당황한 모양이었다.
사실 진해는 영찰어사의 권한 중에 즉석 심문권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조 학사, 그대의 죄를 그대가 알렸다?”
“나, 난, 그게―”
“너무 겁먹지는 말아~ 우리가 몇 년을 알고 지냈는데. 그대는 내 가족이 될 뻔한 적도 있었잖아. 천천히, 또박또박 잘 말해 봐. 그럼 황상의 귀에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야.”
“뭐? 황상의 귀에까지는? 그게 무슨……? 분명 강학 박사가 황상께 고하였다고 했는데?”
“고하긴 뭘 고해? 내가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우린 고작 육품이야. 육품이 직접 고한 것도 아니고 윗전한테 이리해 주세요~ 한 게 황상 귀에 들어갈 거 같아?”
“그, 그럴 리가! 해원공 마마님의 일인데 황상께서 안 들으실 리가 없어! 이것 때문이 아니라면 해원공이 왜 뇌옥에 있겠, 헉!? 너, 설마!”
“이런 쥐새끼 같은 놈!”
조관림은 자신의 말이 이어질수록 귀신처럼 일그러지는 진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문득, 진해를 육등시위로 천거한 이가 동십사였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동십사는 명백한 해원공의 사람임도 기억해 냈다. 그 말인즉, 진해 역시 해원공과 관련이 있다는 말이었다. 언젠가 해원공이 미려방에 들러 시위 하나와 만취했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밀고한 균여관 학사라는 게 네놈이로구나! 이놈 잡아!”
“아악! 난 그냥 본 대로 이야기한 것뿐이야! 내 잘못이 아니야! 난 오랜만에 해원공 마마님을 본 게 반가워서 강학 박사한테 마마님을 본 걸 이야기한 것뿐이야! 마마께서 그렇게 엮이실 줄 몰랐다고!”
조관림은 위사들이 저를 붙잡아 책상에 엎어뜨리자 크게 비명을 질렀다. 위사들을 조관림이 비명을 지르거나 말거나 억세게 그의 팔을 꺾어 잡았다. 오호의 표정이 차갑게 식어 갔다.
“오호, 넌 밖에 나가서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해! 이놈 자식 잘 만났다! 너희들 아까 뭐라고 했지? 주리? 압슬?”
“예. 그런데 여기는 도구가 없어 제대로 하지는 못할 것 같은데요.”
“상관없어! 무고한 이에게 누명을 씌웠으니 뜨거운 맛을 보여 줘야지!”
“오 어사! 난 정말 밀고할 생각 없었어! 그냥 말한 것뿐이란 말이야! 게다가, 마마가 죽은 내관과 만난 건 사실이잖아!”
“그러든지 말든지! 해원공 마마랑 호위들은 지금 뇌옥에서 험한 고생 중이거든! 너도 그 맛을 좀 봐야 사람의 도리를 하겠지! 시작해!”
“아악, 오 어사! 오 어사!!!”
두 위사 중 하나가 정말로 주리를 틀 것처럼 조관림을 들어 의자에 꽁꽁 얽어매자 조관림이 아주 죽는 소리를 했다. 다른 위사는 조관림의 종아리를 빈틈없이 동여매고는 사이에 긴 붓 두 자루를 엇갈려 끼워 놓았다. 간이로 만든 주리 트는 도구였다.
“오 어사!! 규, 균여관 학사들이 궁금하다고 했잖아!! 난 내 또래는 물론이고 후배들도 고루고루 잘 알고 있어!! 근래 지도 학습을 해 줘서 후배들은 더 잘 안다고!!”
“전부 다 안다고? 이름이랑 얼굴만 아는 정도면 필요 없어!”
“지, 지도 학습은, 공부만 하는 게 아니야! 앞으로의 진로나 학자로서의 고민이라든 가, 관리로서의 고민이라든 가!”
“연애 상담도 해 줘?”
“물, 물론이지!”
“자기 연애도 못 하는 놈이 연애 상담은 무슨.”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진해는 붓대를 힘껏 비틀려는 위사를 제지했다. 그리고는 건방진 자세로 앉아 조관림에게 턱짓을 해 보였다. 어디 한번 말해 봐라 들어나 주지라는 듯한 모습이었다.
“어, 그게…….”
그런데 조관림은 막상 입을 떼려니 할 말이 없었다. 균여관 학사가 얼마나 많은데 그걸 다 일일이 말한단 말인가.
“아이고, 이 반편이 양반아! 소양자랑 관련 있는 학사부터 이야기하면 되잖아! 그게 아니면 객잔에 자주 들락거리는 학사라든 가!”
“아, 아! 맞아! 그러니까 내가 그날 객잔에서 본 학사가 총 열댓 정도 되는데…….”
학사들이 공부도 안 하고 어딜 저렇게 싸돌아다닌단 말인가. 진해는 조관림이 그 시간대에 본 학사들만 열댓이라는 말에 기함했다. 객잔 주인이 둘이라고 집어 주지 않았으면 열댓 명을 모조리 다 조사해야 할 판이었다. 다행스럽게 조관림은 반편이보다 덜하지는 않은지 열댓 명 중 몇 명이 위층에 올라갔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융통성이나 순발력은 없어도 기억력은 발군이었다.
“그리고 이건…… 안 좋은 소문이라 웬만하면 말하지 않으려 했는데…….”
“지금 댁이 좋은 소문 나쁜 소문 따질 때가 아닐 텐데? 붓대가 먼저 부러질지 댁 종아리가 먼저 작살날지 한번 시험해 봐?”
망설이던 조관림의 입이 바로 열렸다.
“실은 위층에 올라간 학사 중에 좋지 않은 소문이 있는 자가 있다. 양인 학사인데 알다시피 양인이 균여관에 입학이 허가된 지 얼마 되지 않았어. 황상의 즉위와 동시라고 할 수 있지. 그래서 양인 학사들에게 시선이 꽤 몰려 있어. 좋은 쪽도 있고 나쁜 쪽도 있는데―”
“말이 길다.”
“수, 수재 고성준이라는 자 역시 양인인데 암암리에 나쁜 소문이 돌아. 내 눈엔 싹싹하고 괜찮은 이인데 다른 이들은 그가, 그, 뭐지, 그러니까…….”
“여러 다리를 걸치고 다닌다고?”
“그, 그렇다고 하더군.”
“그걸 말한다는 건 그 고성준이라는 놈 역시 위층으로 올라갔다는 말이고.”
“그래.”
“소심한 네놈이 굳이, 굳이, 내게 끄집어내서 말한다는 건 그 고성준이라는 놈이 걸치는 여러 다리가 혹시 황금 다리나 은 다리라서 그러는 거 아니야?”
“엇, 어떻게 알았는가!?”
어떻게 알긴 뭘 어떻게 알아. 진해는 소문이 나쁘다는 고성준이라는 놈이 양인이라는 소리를 듣는 순간부터 대충 감이 오기 시작했다. 확실하진 않지만 아무래도 이 고성준이라는 놈이 소양자인지 우자인지 하는 놈에게 연서를 전해 달라 부탁한 듯했다. 황상에게 미움받긴 하지만 적통 황자인지라 엄청나게 튼튼하고 거대한 황금 다리인 해원공에게.
그리고 아마 조관림 자신은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예전에 균여관에서 어울렸던 해원공을 그가 눈여겨본 이유 역시 고성준이 올라간 위층에 해원공이 올라가서인 게 분명했다. 암암리라고는 했지만 이 반편이에 둔탱이인 조관림의 귀에 들어올 정도면 귀 밝은 이들에겐 거의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소문이 무성할 터.
“됐고. 그 고성준이라는 놈은 언제 내려왔어?”
“응?”
“아니, 이것부터 묻자. 그 고성준이라는 놈이 지금 사귀는 놈이 있던가?”
“균여관에서는 학사 사이의 교제를 절대 엄금하고 있다! 한 사람이 나가면 몰라도!”
“그건 댁이나 그렇겠지. 그럼 바꿔서 묻지. 혹시 고성준이랑 엄~ 청 친한 학사가 고성준보다 먼저 올라가지 않았어? 제일 마지막으로 내려왔다든 가.”
조관림은 진해의 말을 듣더니 눈을 감고 가만히 기억을 더듬는 듯했다. 진해는 조관림이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기자 아주 조금 조관림에 대한 평가가 올라갔다. 이렇게 보니 머릴 굴리는 게 제법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아니, 고성준은 해원공 마마님보다 뒤에 내려왔다. 네가 말하는 고성준과 친한 학사보다도 뒤에 내려왔지. 임재율은 해원공 마마님이 가신 뒤 일각 정도 뒤에 내려왔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울고 있더군.”
“그래, 고성준이랑 임재율이란 말이지.”
진해는 마침내 해산을 함정에 빠뜨린 인물들의 이름을 캐냈다. 물론 해산을 뇌옥에 갇히게 만든 건 조관림이었지만 강학 박사인가 하는 인물이 단지 조관림의 이야기만으로 해원공을 황제에게 밀고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분명 여러 사람의 말이 더해졌기 때문이지. 고성준이란 놈은 소문이 나쁘니 믿지 않았다가, 나중에 임재율이라는 놈이랑 조관림까지 그렇게 말하니까 믿게 된 게 분명해! 조반편이는 균여관 밖에서는 몰라도 안에서는 인기가 좋은 것 같으니.’
진해는 의자에 기댄 채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조관림은 남을 속일 재주가 없는 인간이라 당연히 진실만을 이야기했을 터이고, 만약 거짓을 이야기했다면 위사를 시키든지 여해루 문지기들을 시키든지 해서 혼쭐을 내 주면 되는 일이었다.
다만 이대로 조관림의 말을 덥석 믿었다가는 저놈이 또 기고만장해질 수 있었다. 진해는 이미 다음 할 일을 정해 놓았으면서 늦장을 부리며 조관림을 의심하는 척했다. 조관림이 흘리는 식은땀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오, 오 어사…….”
“…….”
“균여관 학사들은, 기, 기본적으로 다 기숙사 생활이네. 나도 관리가 된 후에야 집에서 다니지 그전에는 학당에서 지냈어. 그러니까, 그, 고성준과 임재율을 만날 거면 내가 앞장을 설 수도 있는데…….”
과연 진해의 계획대로 조관림은 제 옆에 우뚝 선 건장한 위사들 사이에서 주눅이 들어 있었다. 위사들이 언제 손을 뻗어 제 종아리를 비틀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한껏 젖어 있었다.
자신의 보금자리에서 수치스러운 꼴을 당하기도 했지만 자신이 한껏 얕보던 놈이 영찰어사라는 무시무시한 감투를 쓰고 있다는 게 조관림을 한층 더 긴장하게 했다. 저 소인배가 자신에게 앙심을 품고 복수하면 어쩌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저놈이 미려 공자를 소개해 자신을 달콤한 지옥에 빠뜨렸다고 온갖 비난이라는 비난은 다 퍼부었잖은가.
“임재율과 고성준이 한방을 써?”
“아, 아니. 일단은 음인과 양인이 한방을 쓰는 경우는 없네. 다들 심신을 수양하고 학문에 열중하고 있지만 그래도 피가 끓는 청춘들이니까.”
“하긴! 피가 엄청 엄청 끓어서 내 동생을 귀찮게 따라다니는 학사도 있으니 안에만 있는 학사들은 피가 아주 끓어 넘치겠지!”
“……그, 그건! 자네가 먼저 미려 공자를 소개해 줬잖은가! 그때의 미려 공자는 대학사라도 정신을 잃게 할 정도로 아름다웠어!”
“뭐! 지금은 안 예쁘다는 소리냐!”
“아니, 물론 지금도 아름다워! 하지만, 하지만 그 아름다움이 다른 이를 연모하는 데서 온다면 어떻게 그 아름다움을 순수히 사랑할 수 있겠나! 학자는 신선이 아니야, 사람이야! 아무리 선현의 말씀을 외우고 공부해도 마음에서 솟아나는 질투와 정욕을 완전히 이길 수는 없어! 자네는, 자네는 내게 정말 너무 했다고!”
주리를 틀릴지도 모르는 위기 상황이었지만 조관림은 미려 일에 어지간히 억하심정을 품고 있는 모양이었다. 얼마나 억울했는지 눈에 눈물이 다 비쳤다. 그동안은 진해가 자신보다 신분이 낮았으니 진해를 멸시하는 거로 화를 풀었지만 이제는 그렇게 할 수도 없으니 억울함을 풀 길이 없게 되었다.
“거, 그건 내가 잘못하긴 했는데…….”
진해는 콧물을 훌쩍이는 조관림에게 새삼 미안해졌다. 확실히 진해의 강아지의 아름다움은 월국 제일의 것. 그리고 강아지가 가장 따르는 사람은 바로 자신. 건방지게 배 위에 올라타려 할 정도로 진해를 따르는 미려. 미려의 아름다움이 사랑에 빠진 이들에게 통하지 않듯 조관림이 아무리 잘난 작자라도 지금의 미려에게는 손톱만큼의 관심도 얻지 못할 터였다.
“어, 어쨌거나! 이제는 우리 미려는 포기하고 다른 사람 찾아봐! 이 나이에 벌써 얼굴 보기 힘들어질 정도면 앞길은 더 탄탄대로일 것 아냐!”
“싫다! 이 세상에 미려 공자만큼 아름다운 사람은 없어!”
“혼사가 얼굴로 이뤄지는 줄 알아? 미려보다 얼굴은 떨어져도 당신이랑 마음이 찰떡처럼 맞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아니면 궁합이 겁나게 좋든지!”
“균여관에서 상스러운 소리 하지 마!”
조관림과 진해는 그 후에도 한동안 옥신각신 미려를 포기하라느니, 못 한다느니 다툼을 벌였다. 조관림의 주리를 틀기 위해 대기하던 위사 둘이 기다리다 못해 눈짓을 주고받을 정도였다.
“어험, 오 대인. 저희가 오 대인을 호위하고는 있지만 시간이 무한정 있는 것이 아니라서.”
“두목, 아니 대장에게 술시 전에 보고를 해야 뒤탈이 없습니다. 그렇게 안 보이지만 생각 외로 철두철미한 사람이라서 빼먹으면 이만저만 지랄이 아니거든요.”
게다가 슬슬 사람이 올 것 같기도 하고. 이어지는 위사의 말에 진해는 혀를 찼다. 마음 같아서는 조관림에게 미려를 포기하겠다는 확답을 듣고 편해지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상황이 여의치 못한 듯했다. 일단 해산 도련님을 뇌옥에서 꺼내 드리고 미려에게 확실히 이놈을 차 버리라고 말해야 될 것 같았다. 미려는 선선히 그러겠다고 대답할 터였다.
‘아니야, 잠깐. 그럼 조관림은 내가 시켜서 미려에게 버려지는 거잖아? 너무 불쌍한데?’
위사 둘이 묶은 끈을 풀어 주자 조관림을 훌쩍거리면서 의관을 바로 했다. 새로 입은 옷인데 묶인 탓에 주름이 잔뜩 져 있었다. 머리칼도 잔머리가 다 튀어나와 있었고 관모는 날아간 지 오래였다.
‘으음, 새 짝을 구해 주면 마음이 변하려나. 미려보다 저놈을 장가보내야겠는데?’
조관림은 진해의 생각을 눈치챈 것처럼 진해를 째릿 노려보았다. 훌쩍거리는 콧방울이나 째려보는 눈빛이 생각보다 귀여워서 진해는 의외로 조관림의 상대를 쉽게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진해가 건너 건너 알고 지내던 사람 중에는 우는 얼굴이 귀여운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으니까. 특히 진해의 비밀스러운 놀이 동무 중에서는.
물론 진해 역시 우는 얼굴을 좋아하긴 했지만 진해는 현재 교제하는 상대가 있었고, 또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알았다. 자신이 지옥을 안겨 준 조관림에게 수작을 부릴 정도로 짐승 새끼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 조관림은 옆의 위사들을 의식하며 쭈뼛쭈뼛 의관을 정돈했고 어설프게나마 바깥으로 나돌아 다닐 정도가 되었다.
“어느 쪽부터 갈 건가.”
진해와 투닥거리면서 평온을 되찾은 조관림이 뾰족한 목소리로 물었다. 진해는 턱을 긁으며 아주 잠깐 생각에 잠겼다.
“양인 놈의 이름이 고성준이라고 했지? 그놈부터 보러 가지. 그놈의 자식이 손가락만 한 물건을 덜렁거리다 벌어진 일 같으니까.”
벗겨 보지도 않은 고성준 의 물건이 손가락만 한지 아닌지 네가 어떻게 아냐고 따져 묻고 싶었으나, 조관림은 잠춘동 출신인 진해와 달리 균여관의 교양 있는 학사 관리였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잘한 선택이었는데 조관림이 저렇게 물었다면 진해는 직접 하초를 까 보이며 이 정도는 되어야 손가락 소리를 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큰소리를 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조관림은 알 것 다 아는 나이이긴 했지만 꼬장꼬장한 학사 관리인만큼 미려 외에 다른 이들과 교제를 한 적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미려를 쫓아다니느라 있던 혼담도 팽개쳤다. 그런 그가 진해의 뭐만 한 물건을 보았다면 충격으로 양인을 보기 싫어졌을지도 몰랐다. 미려 공자 외에 다른 놈들은 다 짐승이라며 상사가 더 깊어졌을지도 몰랐다.
한편 진해는 자신의 귀여운 해산 도련님에게 연서 따위를 건넨 고~ 약한 놈을 어떻게 혼을 낼지 고민하고 있었다. 일단 그놈의 방에 가서 위사들을 시켜 대들보에 거꾸로 매달아 놓을 셈이었다. 진해가 매달려 보니 피가 위로 쏠리는 게 죽을 맛이었기 때문이다. 그 뒤에는 사적인 감정을 듬뿍 담아 심문을 할 작정이었다. 조관림을 데려갈 터이니 그놈 입에서 짜낸 진술을 적도록 시키면 될 터.
아마 소양자와는 뭐가 틀어져서 다투다가 죽인 게 분명했다. 유일청은 어디로 날려 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놈의 입에서 자백을 짜낸 뒤 유일청의 행방을 빌미 삼아 더욱 괴롭히면 그것 역시 금세 해결될 터였다. 놀랍게도, 그리고 당연하게도, 진해의 머릿속엔 적법한 심문이라는 단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방 바깥에 조관림의 비명을 들은 사람들이 몰려 있을 줄 알았는데 오호가 무슨 수를 썼는지 문밖에는 단 한 사람도 찾아볼 수 없었다. 조관림이 초췌한 몰골로 걸어 나오자 오호가 그를 찌릿 노려보았다. 명백히 적대적인 시선이었다. 진해는 속으로 조관림이 미려를 자신의 생각보다 더 귀찮게 했나 보다 생각했다.
“균여관은 동재와 서재로 나뉘는데 양인 학사들은 나이와 관등에 불문하고 무조건 동재의 방을 주고 있네. 몇 없는 양인끼리 서로를 도울 수 있으니 좋은 일이지.”
“감시하기도 쉽고?”
“오 어사, 균여관은 나가는 이를 굳이 잡을 정도로 한가한 곳이 아니야. 이곳을 꿈꾸는 학도들은 해변의 모래만큼이나 많아.”
“알았고, 당신이 좋아하는 양인상은 어때?”
“미려 공자 말인가?”
“당연히 우리 미려를 빼고 말해야지, 이 양반아.”
조관림은 미려에게 미련이 깊었다. 진해의 눈앞에 다 늙은 조관림이 미려를 그리다가 홀로 죽는 장면이 그려졌다. 조관림이 독자라는 소리는 들은 적 없지만 애꿎은 자식이 혼인도 하지 않고 홀로 쓸쓸히 늙어 죽는 걸 반길 아버지들은 없었다. 아니, 아버지들이 아니라도 자신의 소개 탓에 가뜩이나 고지식하고 꼬장꼬장하고 별로 친구도 없어 보이는 조관림이 독고사 하는 건 진해에겐 상당히 죄책감 느껴지는 일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진해의 머리 위에서 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조관림이 난리를 칠 때는 가만히 머리 위에 있던 것이 조관림과 동재의 어느 방 앞에 도착하자 포르르 날아 가까운 나무 위로 날아가 버렸다.
“헛, 그대 심문 자리에 새를 데리고 왔어?!”
“댁이 알 거 없고. 그것보다…….”
홍련이는 조관림이 미려를 연모하는 것 이상으로 진해의 목걸이에 집착하고 있었으므로 진해로부터 어느 정도 이상 멀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진해가 떼 내려 해도 떼어지지 않는 녀석이었다. 그런 녀석이 떨어질 이유가 뭐가 있을까.
“오 대인.”
“응. 이젠 나도 맡아지네.”
그러나 그 이유는 오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진해의 코끝에 익숙하고 싶지 않지만 제법 익숙한 냄새가 맡아졌다. 그리고 그 냄새는 진해를 호위하기 위해 온 위사 둘과 오호에게도 전해진 모양이었다. 오호가 진해에게 바짝 다가붙고, 위사 하나가 조관림을 자신의 뒤로 물렸다. 조관림은 영문을 알지 못해 어리둥절한 채였다.
“어쩔까요.”
“어쩌긴 뭐 어째. 열어야지. 우리가 안 열어도 다른 사람이 열 테니까.”
진해가 턱짓을 하자 문 앞에 선 위사가 검 손잡이를 움켜쥔 채 힘껏 문을 잡아당겼다. 드르륵, 거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자 진해는 안에서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진한 악취를 맡을 수 있었다.
“으악!!!!”
악취는 한발 늦게 울려 퍼진 조관림의 비명과 섞여 균여관의 평화를 산산이 부수어 놓았다.
“대인, 죽었습니다.”
“그래. 설명 안 해도 그래 보이네. 안 죽으면 그게 더 무섭겠는걸?”
조관림은 비명을 지른 뒤 가까운 화단으로 뛰어가 속을 게워 냈다. 오호와 위사 한 사람을 방 밖에 세워 두고 진해는 위사 한 사람과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갔다. 위사는 피비린내의 진원지를 찾아내 진해에게 보였다. 진해는 미간을 찡그린 채로 눈앞에 널브러진 시신을 살폈다.
“다른 부분은 훼손된 곳이 없어 보이는군. 치정 사건이라서 거시기를 잘라 갈 줄 알았는데.”
“그 사건이 특이한 겁니다. 보통은 시신에서 뭘 잘라 가려 하지 않지요. 잘라서 없애 버리려 할 뿐.”
“그래? 그럼 이것도 좀 특이한 경우라고 봐야겠지?”
질펀한 피 웅덩이 한가운데서 잠을 자는 듯 두 손을 모으고 누워 있는 시신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크게 훼손되어 있었다.
균여관 동재의 방 안에서 살해당한 이에겐 머리가 없었다. 살인자는 간 크게도 한낮에 사람을 죽이고 머리를 떼어 갔다. 사라진 머리 부분에서 진해는 지독하고도 복잡한 감정을 읽어 낼 수 있었다. 여러 다리를 걸쳤다는 고성준, 아마도 고성준과 깊은 관계였을 임재율.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조관림은 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 나무를 붙잡고 한참 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하필이면 홍련이가 앉은 나무라 위에서 남의 토사물을 구경하게 된 홍련이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진해는 뒤를 흘끗 돌아보며 어쩌면 고산국의 신조가 이 참극을 미리 예지한 건 아닐까 하는 묘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물론,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진해의 생각일 뿐이었다.
* * *
조관림의 우렁찬 비명과 토악질 소리 탓에 방에서 오수를 즐기던, 혹은 공부를 하고 있던 학도와 학사 관리들이 머리를 내밀었다. 그들은 건장한 체격의 낯선 이가 조관림의 곁에 서 있자 크게 당황했고, 곧이어 달려가 현재 균여관에 있는 학사 관리 중 가장 높은 관품의 관리를 불러왔다.
“강학 박사 반득의요.”
“영찰어사 오진해입니다.”
“그래, 그 유명한 오 어사시로군. 그런데 이게 대체, 우리 균여관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오!”
진해는 눈을 가늘게 뜨고 강학 박사를 관찰했다. 조관림을 챙기는 걸 보니 아무래도 이 강학 박사란 놈이 황상께 말을 올린 장본인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길게 말을 섞어 좋을 게 없지. 어쩌면 창명후라는 놈과 닿아 있을지도 몰라. 아니, 분명히 닿아 있어! 그렇지 않으면 형부의 관리인 나도 몰랐던 사실을 창명후가 그리 빨리 알 리도 없고, 또 고신을 가하도록 압박이 가해질 리도 없으니까!’
강학 박사는 되도록 상세하게 일의 전말을 듣고 싶어 했으나 진해는 옆에 위사 둘을 거느린 채로 짧고 명료하게 사건의 개요만 설명했다.
“그리하여 제가 수상한 점을 쫓다 보니 이곳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아무래도 죽은 소양자 태감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 해원공 마마가 아닌 고성준과 임재율인 듯하여.”
당연히 유일청을 찾으러 왔다는 말은 쏙 뺀 채였다.
“고성준, 확실히 행실이 나태한 이이긴 하오. 하지만 임재율은 제법 준수한 인물인데 어찌하여.”
“고성준에 대해 좀 이야기해 주시지요.”
“지금 날 심문하려 하는 것인가?”
“심문과 탐문은 다릅니다, 박사 대인. 당신께서는 선의로만 일을 행하셨을 뿐 아닙니까. 저는 그저 황상의 명을 이행할 뿐 절대로 다른 뜻은 없어요. 게다가 미래의 학문이 자라나는 균여관에서 사건을 질질 끌어 무엇 한답니까.”
“정말로……, 내 선의를 알아주는 겐가?”
“당연하지요! 솔직히 저였으면 말 못 했을 겁니다. 황상께서 정에 휩쓸려 자칫 판단을 잘못하시기라도 하면 화를 입는 건 저잖습니까?”
“그렇지!”
“그런데 강학 박사께서는 용기를 내시어 황상께 말씀을 올렸군요. 영명하신 황상께서는 대월률에 따라 행하셨구요. 다만 시위들에게 고신이 가해지는 시기가 빠르긴 하지만 사건의 조속한 해결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지요.”
“…….”
“무고한 시위들이 지금도 뇌옥에서 고통받고 있지만 그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어느 어느 분께 빠르게 달려가신 것만큼 제 탐문에 얼른 협조해 주신다면 범인을 확실히 해 무고한 자들을 정당히 빼낼 수 있으련만 이것도 제가 박사께 강요할 일이 아니지요. 이 균여관에서 누가 감히 박사께 강요하겠습니까.”
진해는 최대한 무고한 이들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강학 박사라는 이는 창명후 측에는 붙었지만 그리 사악한 이가 아닌 듯 시위들이 고신을 받고 있다는 소리를 듣자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거기다가 현재 자신이 관리 중인 균여관에서 살인이 벌어졌다. 그런데 범인이 임재율일 가능성이 높고, 임재율과 그가 죽인 고성준이 소양자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그렇다면 소양자 역시 임재율이 죽였을 가능성이 굉장히 컸다. 만약 본격적으로 형부가 개입하고 황상의 귀에 이 일이 들어가게 되면 해원공을 밀고했던 자신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창명후가 손을 써 목숨은 부지하게 해 주겠지만 대학사와 다른 학사 관리들은 자신을 어찌 볼지 알 수 없었다. 밀고, 그것도 무고한 이를 밀고해 고신을 겪게 하고 그 탓에 범인을 일찍 잡지 못해 애꿎은 학사 하나가 죽은 게 알려진다면, 그것도 수가 많지 않은 양인 학사가 죽은 게 알려진다면!
헉, 혹시 양인 학사를 차별한다는 의혹이라도 받게 된다면 큰일이었다. 이는 양인에게 편견을 가졌다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고, 그렇다면 양인 황상께 진심으로 충성을 다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
“박사 대인.”
“헛, 응?”
“고성준에 대해 빠르고 짧게 이야기해 주시지요. 임재율의 성품과 친한 학사들에 대해서도.”
강학 박사의 상상은 가지를 뻗어 마침내 자신의 목을 성문에 걸고 있었다.
“실은 말일세. 고성준은 아버지들이 없어. 역병이 두 번째로 돌던 해에 차례로 숨을 거뒀다고 하네.”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입니까?”
“흠, 흠!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세상 모든 일이 능력으로 돌아가는 건 아니지 않나.”
“아.”
“우리 균여관도 마찬가지야. 성현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철저히 속세의 규율을 따르고 있단 말이지. 외부의 다른 학당들과 달리 학비 면제이긴 하지만 입거나 먹는 것 등은 본인이 알아서 부담해야 한단 말일세. 나는 학사들의 사생활에는 관심이 없지만 고성준의 경우는 특이해서 기억하고 있어. 고성준은 입학했을 때부터 궁에서 생활비를 지원받고 있었네. 정확히 말하자면 궁인이 그에게 돈을 대 주었단 말이지.”
“아하~”
진해는 이제야 소양자와 고성준의 관계를 알 것 같았다. 고성준의 목 위가 사라져서 알 수는 없지만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고성준은 혓바닥에 기름칠을 했거나 상판이 반반한 놈이었음이 틀림없다.
어떻게 만났는지는 몰라도 만만하고 반반하고 그럭저럭 머리 잘 돌아가는 고성준을 거시기는 없지만 돈은 있는 소양자가 후원하기 시작했음이 틀림없었다. 소양자도 애먼 사람에게 돈을 대 줄 정도로 높은 내관이 아니었으니 아마도 둘의 관계는 보통 사람 이상이었을 것이다.
강학 박사의 말에 의하면 임재율은 크게 두드러지는 점이 없는 학사였다. 균여관의 다른 학사들과 마찬가지로 영리했고, 성실했으며 심성이 바른 자였다. 그런 임재율이 고성준과 어찌 어울리게 되었는지 수수께끼였다. 결과적으로 두 사람은 겉으로는 친우, 속으로는 밀회하는 관계가 되었다. 고성준과 소양자가 관계를 끊지 않았음에도.
“오 형!! 임재율이 나타났어!!”
“뭐!? 어디, 어디!!”
“학사 하나가 서고에 있는 걸 발견하고 소릴 지르자 후원으로 도망쳤어! 균여관의 경비들과 함께 몰아넣었는데 아무래도 자결할 모양이야!”
“안돼!! 죽을 땐 죽더라도 유일청은 내놓고 죽어야지!!!”
“유, 유일청?”
진해는 뜬금없는 유일청 소리에 얼이 빠진 강학 박사를 버려두고 오호와 함께 쏜살같이 후원으로 튀어 갔다. 과연 경비와 위사들이 둘러싼 가운데로 균여관 학사복을 입은 이가 뭔가를 끌어안고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학사복은 검게 얼룩져 본래의 모습은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잠자리 날개처럼 반투명한 관모에도 피비린내가 진동했고, 그가 안고 있는 둥근 물체의 절단면에서도 이따금 피가 떨어져 내렸다.
“오지 마!! 오면 다 죽여 버릴 거야!! 가까이 오지 마!”
진해가 도착하자 위사들은 진해와 눈을 마주쳤다. 즉결 처분을 받지 않은 범인이 자결한다면 그것 역시 관리의 책임이었다. 형을 언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본인의 자백이 필요하기도 했고.
“네가 임재율이냐!”
진해는 일단 위사와 경비들을 대기시킨 뒤 임재율과 대화를 시도했다. 안타깝게도 진해는 임재율의 목숨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당장 자결하더라도 이 사건을 맡은 것이 진해가 아니니 진해의 책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단지 진해가 임재율에게서 듣고 싶은 건 유일청의 행방, 황제가 총애하는 애조의 행방뿐이었다. 이왕 하는 김에 자백도 해서 해산을 풀려나게 하면 더욱 좋았다.
“나는 육품 영찰어사 오진해다! 네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 왔으니 그리 경계하지 않아도 돼!”
“거짓말! 날, 날 잡으러 온 거잖아!”
“그건 네가 무슨 짓을 했느냐에 따라 다르지! 난 다른 관리들이랑은 좀 달라. 나는 죽을 짓을 했으면 죽어야 된다고 보는 사람이다!”
진해의 말이 끝나자 주변 사람들이 진해를 동시에 돌아보았다. 진해 자신의 말대로 다른 관리들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말이었다.
“네가 안고 있는 게 고성준이냐? 생각한 것보다 더 추남이구만! 그런 거시기 가벼운 놈은 죽어도 싸지! 어딜 감히 양다리를 걸치려 해! 잘 죽었다! 암, 잘 죽었고말고!”
사람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진해는 한참 동안 고성준 욕을 했다. 어찌나 적나라하고 노골적인 비아냥과 욕설인지 듣는 사람들의 표정이 떨떠름해질 정도였다. 생전 처음 본 사람인 데다가 고인인 고성준에게 굳이 저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러니까 이제 그런 놈은 버려! 넌 아직 젊고 탱탱하고 개선의 여지가 있어! 그놈의 평소 행실을 내가 싹 긁어모으면 어떻게든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거다!”
그러나 진해가 다음 말을 잇자 사람들은 진해가 어째서 고성준의 욕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진해는 임재율과 동조하여 그의 마음을 진정시키려 하는 듯했다.
“못 해…….”
하지만 사람을 죽이고 그 목을 자를 정도의 격정이 쉬이 가실 리가 없었다.
“성준은 내 정인이야. 내 양인이야……. 비록 떳떳하게 나서진 못했지만 그는 나를 사랑했어, 나도 그를 사랑했어. 그래서, 그래서 다 참았던 거였는데…….”
“소양자랑은 대체 무슨 관계야?”
임재율은 진해의 물음에 대답하기에 앞서 참혹한 형상의 고성준, 정확히 말하자면 고성준의 머리를 꽉 끌어안았다. 피투성이 얼굴 위로 눈물 줄기가 흘러내렸다.
“……그자는 성준의 후원자였어. 그리고 대가로 성준의 몸을 요구했지.”
긴장감으로 팽팽한 후원에 임재율의 침통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오싹한 목소리가 조용히 이어졌다. 진해는 임재율이 말하는 동안 자신의 뒤에 있는 오호에게 조용히 손짓을 해 보였다. 미려방 식구들 사이에서 통하는 수신호였다.
“어쩔 수 없다는 건 알아. 의지할 데 없는 어린 성준이 무슨 방도가 있었겠어…….”
“그런 것치고는 여러 다리 걸쳤던데?”
“소양자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그랬던 거야. 그랬다고 했어. 사랑하는 건 나뿐이라고 했어.”
“그럼 너와 혼인하면 되는 거였잖아. 넌 왜 고성준이랑 혼인 안 한 거야? 사랑했다면서?”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이었다. 임재율의 집은 명문가는 아니었지만 사위 하나 후원하지 못할 정도로 빈한한 집은 아니었다. 고성준이 정착하게 되면 돈을 빌미로 몸을 요구하던 소양자도 떨어져 나갈 터.
“……성준은 관리가 되고 싶어 했으니까.”
하지만 진해가 하나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학사 둘이 교제하게 된다면 둘 중 하나는 균여관에서 나가야 한다는 규칙이었다. 아무래도 고성준은 제 나름대로 꿈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면― 네가 최소한 소양자와의 관계 정도는 끊어 줄 수 있지 않았어?”
“…….”
임재율은 소양자 이야기가 나오자 눈에서 폭포수 같은 눈물이 떨어졌다. 한편 진해의 손짓을 받은 오호가 그림자처럼 조용히 움직이며 진해가 데려온 위사 둘에게 차례로 다가갔다. 손가락으로 등을 몇 번 그었고, 위사 둘은 눈으로만 힐끗 오호에게 대답해 보였다.
“……다고 했으니까.”
“뭐?”
“내가, 자신이 질릴 때까지 어울리지 않으면, 성준과 자신의 관계를 폭로해 버리겠다고 했으니까, 자신과 동침하지 않으면 성준을 평생 놓아주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성준이 그도, 사랑한다고 했다고 말했으니까……!!”
비명을 지르듯 소리 지른 임재율은 고성준의 머리를 으스러뜨릴 듯이 움켜쥐었다. 핏방울이 튄 눈에 임재율이 그동안 참아 온 인내와 고통이 스쳐 지나갔다.
“됐어, 이젠 됐어! 다 끝났어! 다만 후회가 남는 건……, 아버지들에게 자식 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 거야, 죄송해요, 죄송해요, 아버지! 난 이젠 못 견디겠어!!”
임재율은 마침내 결심한 듯 손에 쥐고 있던 단도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원래는 종이를 재단하는 용도였을 뾰족하고도 무딘 날을 지닌 단도였다.
“지금이야!!!”
임재율이 단도를 높이 치켜든 순간 어디선가 뾰족하고 날카로운 암기가 임재율의 손등으로 날아들었다.
“악!!”
암기는 손등을 정확히 관통했고 임재율은 고통의 비명과 함께 단도를 놓쳤다. 안고 있던 고성준의 머리 역시 놓쳐 버렸다.
그리고 그때를 놓치지 않고 대기하고 있던 위사들이 번개같이 임재율에게 달려들었다. 위사 둘이 임재율을 덮쳐 누르자 경비들 역시 우르르 몰려가 임재율을 제압했다.
“아악!! 아!!!!! 아악!!!!!!!”
제압당한 임재율은 고성준의 머리를 향해 손을 뻗으며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질렀다. 진해는 알 수 없는, 알게 되면 입맛이 사라질 복잡한 사연이 녹아든 목소리였다. 경비들이 제압한 임재율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끌고 가자 진해는 발치로 굴러온 물건을 향해 걸어갔다. 사자의 얼굴은 참혹한 형상이었다.
[뾰롱.]
일이 마무리된 걸 알았는지 지붕 위에 앉아 있던 홍련이가 포르르 날아와 진해의 관모 위에 걸터앉았다. 진해는 들고 있던 머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암기를 던졌던 오호가 건네주는 자루에 집어넣었다. 해원공에게 연서를 건네고 순진한 학사와 내관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친 빌어먹을 작자였지만, 그것도 다 죽기 전의 이야기였다.
* * *
집으로 돌아온 진해는 당장이라도 눕고 싶었다. 이 일의 총괄 책임자였던 형부시랑과 수령 총감의 시선이 여간 매서운 게 아니었다. 자신들의 공로를 진해가 채 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진해가 그들에게 능글맞게 굴기 전까지의 이야기였다.
진해는 형부시랑의 일그러진 미간을 보자마자 형부시랑을 이끌고 으슥한 회랑 모퉁이로 향했다. 형부시랑은 진해의 손을 뿌리치고 싶었지만 상관인 형부상서와 동기 간인 호부시랑이 오 어사와 교분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예산의 분배는 호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 호부시랑의 눈에 나서 좋을 거 하나 없었다. 형부시랑은 참을 인 자를 세 번 그리며 진해의 말을 기다렸다.
“저 죄송한 말씀이지만 이번 일의 보고서에서 제 이름은 빼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뭐……?”
“소 뒷걸음치다 잡은 걸 가지고 일일이 보고서에 이름을 올릴 필요도 없고.”
형부시랑은 순간 진해가 공명에 관심이 먼 괴짜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적장자인 해원공을 옥에 처넣은 사건의 진범을 찾아냈으니 큰 공이라면 큰 공인데 진해는 그 공을 포기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자네 미쳤나? 온 균여관 사람들이 자네가 범인을 잡는 걸 보았는데 뭘 빼고 자시고야!”
“에이, 그러지 마시고~ 저도 잘 알죠, 잘 알구말구요. 그런데 제가 그곳에 간 건 정말로~ 우연이거든요. 황상의 심부름을 갔다가 아주 우연~ 히 범인을 잡게 된 거거든요~”
“어떻게 범인을 잡게 되었든 잡은 것은 잡은 것일세. 형부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큰 공을 세웠구만!”
부러워서 배알이 뒤틀리는데 그 공을 마다하니 정말로 얄밉기 짝이 없었다. 형부시랑은 진해가 잡은 옷소매를 뿌리치고 휑하니 돌아서려 했다. 그런데,
“시랑 대인, 제가 유식하진 않지만 아주 바보는 아니에요! 설마 그걸 모르고 이러겠어요?”
“그럼?”
“이번 일 원래라면 시랑 대인이 해결하셔야 할 일이잖아요, 제가 하지 않았어도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시랑 대인께서 해결하셨을 거잖아요? 그렇죠?”
“……그렇긴 하지.”
“실은 제가 균여관에 간 건 제 아우와 꽤 친한 사이인 조 학사를 보러 간 거거든요. 왜 조 학사를 보러 갔냐 하면 제가 아우처럼 아끼는 여해루 아이 하나가 울적해해서 균여관의 청명한 공기를 쐬게 해 주면 어떨까 해서 간 거거든요. 근데 그 균여관 아이가 왜 울적하신지 아십니까?”
“나야 모르지?”
“아니 세상에, 전 몰랐는데 요새 그 애가 연애를 하고 있다니 뭐예요. 누구랑 연애를 하냐 물었더니 아이고, 해원공 마마님의 호위와 눈이 맞았다네요?!”
“으음……?”
“죄인을 심문하시는 건 시랑 대인의 권한이시죠?”
진해는 형부시랑의 눈을 마주 보며 은근히 미소 지었다. 형부시랑은 머릿속에서 한 줄기 빛이 내리쬐는 듯했다. 영찰어사 오진해, 이자는 지금 자신에게 거래를 제안하고 있었다. 물론 노련한 관리인 그가 신진 관리의 공을 가로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적통 황자를 무고하게 옥에 가두고 호위들에게 절차보다 꽤 일찍 고신을 시작했다는 면책을 피할 수는 없을 터였다. 만약 그가 이 모든 것을 상쇄할 공을 세우지 않는다면 최악의 경우에는 면직도 피할 수 없었다.
“―확실히 진범이 잡혔는데 무고한 자들을 옥에 가둬 둘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렇죠!”
“고신당한 호위들은 요양이 필요하니 당장 내보내도록 해야겠네.”
“지당한 말씀!”
“해원공 마마님도 얼른 내보내 드려야겠어.”
“아무렴요!”
“자네의 이름은……,”
“사람들이 정 뭐라 그러거든 시랑 대인의 심부름을 가던 길에 그랬다고 해 두세요. 심부름 역시 시랑 대인의 지시이니 공 역시 시랑 대인이 세우신 거겠죠~?”
확실히 자신의 명을 받아 균여관을 탐문하러 갔다고 조서를 꾸미면 공 역시 형부시랑의 것이 되었다. 형부시랑은 약간 망설이다가 진해가 능글맞게 웃으며 형부시랑의 팔에 착 달라붙자 못 이긴 척 진해의 말에 따르기도 했다. 형부시랑도 음인인지라 꽤 귀염성 있게 생긴 양인 총각이 아양을 떨자 저도 모르게 마음이 흔들렸다. 커다란 공 앞에서는 더욱 마음이 두근거렸고.
그리하여 진해는 형부시랑이 조서를 꾸미고 해원공부 사람들이 출옥 절차를 거치는 걸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해산 도련님은 황족인지라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세밀하고 정중한 절차를 걸친다는 모양이었다. 귀한 몸이면 더 빨리 보내 줘야지 무슨 세밀한 절차란 말인지.
[뾰롱…….]
“홍련아, 너도 피곤하냐?”
그리고 놀랍게도 탈옥의 괴조 일홍련은 진해와 함께 진해의 집에 왔다. 홍련이가 진해의 관모를 잡은 발톱에 힘을 주자, 산공공이 웃으며 유일청을 찾기 전까지 허가를 얻어 두었으니 그때까지는 함께 있어도 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소 뒷걸음질에 쥐 잡는다고 오호 핑계를 댔는데 오호는 해원공부의 호위들이 출옥한다는 소식을 듣자 진해를 집에 밀어 넣고 쌩하니 사라져 버렸다. 진해는 황아무가 생각보다 오호에게 많이 집어 줬나 보다 생각했다.
평소라면 미려가 환하게 웃으며 형아를 마중하겠지만 슬슬 여해루와 미려방이 문을 열 시간이 되었다. 휴점이었지만 다음 날을 위해 루주와 방주 대리인 미려가 두 곳을 돌며 더욱 세밀히 만전을 기해야 했다. 진해가 육품 관리가 된 후로 여해루의 전주 노릇을 할 수 없어 미려는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빠져 버렸다.
“에이, 꽃 같은 내 새끼가 없으니 어쩐지 허전한걸. 삼랑이 녀석도 안 나와 보고……, 해산 도련님은 좀 있어야 된다 그러고…….”
예전이었다면 이런 기분이 들 때 놀이 동무들을 찾아가거나 하룻밤 침상을 데워 줄 인연을 찾아 나섰겠지만, 이제 진해에게는 교제 중인 해산 도련님도 있었고 (예전부터 있었지만) 꽃처럼 어여쁜 미려도 있었으며, 성격이 지랄 맞지만 훤칠한 삼랑이도 있었다.
“홍련아, 배 안 고파?”
[뾰롱!]
“넌 고기를 먹냐? 과일을 먹냐? 산공공한테 이걸 물어본다는 걸 깜박했네. 둘 다 있으니까 맘에 드는 거로 골라 먹어. 궁에서만큼 좋은 음식은 아니지만 밖에서 하는 군것질은 그것 나름대로 각별한 맛이 있잖아? 그치?”
[뾰롱!]
그래서 진해는 오늘 하룻밤은 변태 같지만 작고 귀여운 홍련이에게서 위안을 얻기로 했다. 가끔은 육욕에서 벗어나 이렇게 청빈한 생활을 즐겨도 좋을 것이다.
[배고파~!]
그런데 삼랑이의 방 앞을 지나던 그때, 홍련이가 갑자기 몸을 곤두세웠다.
“응?”
몸을 곤두세운 홍련이는 진해가 의아함을 느끼자마자 날개를 펼치더니 곧 붉은 섬광과 같이 빠르게 어딘가를 향해 돌진했다.
[―쾅!]
“악!!! 문짝이!!!!”
“씨발!!! 이건 뭐야!!?”
진해는 눈앞에서 문짝에 정확히 홍련이의 몸통만 한 구멍이 생긴 것에 기함했으나 방 안의 사람은 진해보다 더 놀란 것 같았다. 하긴 방에서 쉬고 있는데 난데없이 뻘건 새 한 마리가 문을 뚫고 날아오면 놀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거침없이 터져 나오는 욕설 덕분에 진해는 피곤한 와중에도 방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홍련이는 하필이면 삼랑이의 방문을 뚫고 들어갔다. 피곤함이 싹 가시는 대사건이었다.
진해는 삼랑이가 홍련이를 때리기라도 할까 봐 헐레벌떡 삼랑이의 문을 열어젖혔다. 괴조라 불리며 은근히 찬밥 신세를 받고 있었지만 홍련이는 일단 황제 소유의 어조원 소속이었다. 홍련이에게 해가 생긴다면 삼랑이는 물론이요, 진해 역시 무사히 넘어가지 못할 게 분명했다.
[뾰롱!!]
[소패군아~ 소패군 일홍련! 안녕하세요? 안녕!]
그리고 들어간 방 안에 펼쳐진 장면을 보고 진해는 입을 떡하니 벌렸다. 삼랑의 방 안에는 새 한 마리와 사람 한 마리가 눈부시게 아름다운 청록색 깃을 가진 새 한 마리를 두고 팽팽한 대치를 벌이고 있었다.
“유일청……?”
[안녕하세요! 배고파! 아야!]
유일청은 진해가 제 이름을 부르자 탁자 위에서 자박자박 걸어 진해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유일청의 장기임이 분명한 사람 말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늙은 노조인지라 목소리가 영롱하고 맑진 않았지만 발음이 제법 또렷했다. 문 너머에서 들으면 사람 목소리라고 착각할 법했다. 진해가 삼랑이가 고뿔이 걸렸나 의심할 정도로.
[뾰롱!]
“이 새 새끼는 뭐야, 이 건방진 새끼. 넌 오늘 뒈졌어. 한 입 거리도 안 되는 게 깝치고 말이야, 어!”
진해는 유일청이 왜 여기 있는지는 몰랐지만 일단 눈앞의 불부터 꺼야 했다. 삼랑이는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몽둥이를 들고 있었고, 일홍련은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유일청을 보호하려는 것처럼 한 뼘 길이의 날개를 쫙 펼치고 있었다.
“자, 잠깐, 잠깐! 삼랑아~ 삼랑아~ 우리 진정하고 이야기하자, 응? 아니, 그것보다 저 새가 왜 우리 집에 있는 거야? 유일청이 왜 여기 있는 거냐구?”
“유일청? 뭐야, 이름이 있어? 씨발, 김 샜구만. 주인 놈이 찾으라고 창놈 오 어사를 보냈네.”
“창놈 오 어사라니…….”
“아, 몰라 몰라. 적당히 나으면 팔아먹으려 했더니.”
“앗, 유일청! 날개를 다쳤잖아?”
“집 근처에 떨어져 있던데? 살려 달라고 오만 지랄을 다 떨길래 가 보니까 이 새끼가 고양이 앞에서 희한한 장기를 부리고 있더라. 사람인 줄 알고 적당히 뜯으려 했는데.”
과연 유일청은 날개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유일청은 사람 손을 잘 타는 듯 진해가 유일청의 날개를 살피자 고분고분 날개를 펴 상처 부위를 보여 주었다.
“아이구, 많이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야. 황상께서 얼마나 걱정하고 계신데!”
[황상?]
유일청이 황상이란 말에 반응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게 꼭 어린아이 같았다.
[사랑해요!]
“오, 이런 말도 할 줄 알아?”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
“이게 참 마음에 든단 말이지. 저게 마음에 들어서 제값을 못 받으면 내가 기를 생각이었어. 짜식, 제법 귀엽지 않냐?”
유일청 은 그 후에도 한참이나 사랑해요,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라는 말을 노래하듯 반복했다. 신이 났는지 고개를 흔들거리며 춤까지 췄다. 홍련은 유일청이 신이 나자 그제야 경계를 풀고 유일청의 옆에서 함께 고개를 까닥였다. 아무래도 유일청과 일홍련은 서로의 놀이 상대인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유일청은 날이 밝자 진해의 전갈을 받은 어조원 내관의 진찰을 받게 되었다. 다행히 가볍게 긁힌 상처였고, 날개를 쓰는 데 큰 지장이 없다고 했다. 어조원 내관은 어찌나 기쁜지 하마터면 홍련이를 챙겨 가는 걸 잊어버릴 뻔했다. 홍련이는 진해의 가슴께를 미련이 덕지덕지 남은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다친 유일청을 홀로 보낼 수는 없는지 함께 궁으로 돌아갔다.
* * *
[사랑해요,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그대를 줄곧 사랑해 왔어요. 사랑해요, 정말 사랑해.]
황제 회순은 돌아온 유일청을 횃대에 올려 두고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놀랍게도 유일청의 부리에서 흘러나오는 건 진해가 들었던 쉰 목소리가 아닌 맑고 명료해 정말로 사람의 목소리처럼 들리는 소리였다.
유일청이 재주를 부린 뒤 회순의 근처로 아장아장 걸어오자 회순은 손을 뻗어 유일청의 턱 근처를 긁어 주었다. 유일청은 주인인 회순의 손가락에 부리를 비비며 애교를 피웠다. 그런 유일청을 바라보는 회순의 눈이 깊었다. 회순이 보는 건 단순한 새 한 마리가 아닌 새의 주인들과의 지독한 악연이었다.
삼랑이 유일청을 발견했던 진해의 집, 오 어사 댁은 동가소택이라 불리기 전 화석정군 댁이라 불렸던 곳이었다. 또한 유일청이 황궁에 들어오기 전 가장 오래 살았던 곳이었다. 유일청을 회순에게 선물했던 이들 역시 그곳에 살았었다. 유일청이 그 말을 외울 정도로 회순에게 열렬하고 끊임없이 그 말을 읊조렸던 이들이었 다.
“……짐도, 사랑하고 있다.”
말을 뱉는 회순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회순은 더 이상 들을 사람 없는 말을 공허하게, 고통스럽게 중얼거렸다. 익숙한 대답인지 유일청은 전혀 개의치 않고 회순의 손가락을 물고 장난을 쳤다.
이를 악물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은 회순이었지만 그것도 찰나의 순간이었고, 그는 언제나처럼 곧 일국의 황제로 돌아올 터였다. 자신의 ‘실수’를 깊숙이 숨겨 둔 채 월국을 번영하게 할 성군으로 돌아올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