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영찰어사(影察御使) 오진해
“아이고! 귀여워라~! 손이 어쩜 이리 작을까!”
진해는 갓 백일이 지난 아기의 손을 잡고 있었다. 아기는 진해가 제 칭찬을 하는 걸 알아듣기라도 하는 듯 입을 오물거렸다.
“그야 당연히 자기랑 내 아이니까 그렇지! 우리 자기랑 닮았으니 당연히 귀여운 거 아니겠어?”
눈앞의 아기는 진해가 명목상의 옥살이를 할 동안 태어났던 방 도련님과 곽열의 아이였다. 방 도련님은 조산에 가까운 출산을 했는데 태어난 아기는 산달을 다 채웠으면 우량아가 되었을지도 모를 만큼 건강하고 튼튼했다.
“…….”
한편 아기를 향해 감탄을 금치 못하는 진해와 방 도련님의 뒤에서 해산과 삼랑이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의 아버지인 곽열은 얼굴빛이 약간 하얘진 채로 둘의 눈치를 살폈다. 여차하면 방 도련님과 아이를 데리고 도망갈 생각마저 했다.
“좋아하는 꼬락서니하고는. 제 새끼도 아니면서.”
“혼인하면 아이는 금방이거늘.”
“씨발, 이젠 두 자만 더 적으면 돼.”
“셋, 셋 정도는 낳아야 진해가 육아에 전념할 터.”
방 도련님이 수줍게 안겨 준 아이를 둥개둥개 어르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곽열에게는 한없이 높으신 분인 해산과 한없이 무서운 분인 삼랑이 음침하게 중얼거렸다. 두 사람의 눈에는 제가 낳은 아기를 안고 좋아 죽는 진해의 모습이 펼쳐져 있었다. 남의 아이도 저렇게 귀여워하는데 제 씨로 불거진 싹이면 좋아서 까무러칠지도 몰랐다. 분명 아이를 위해서라도 바람직한 아버지, 좋은 남편이 되려고 할 터였다.
“미안해요, 늦어서. 조금 늦잠을 자 버렸지 뭐예요.”
해산과 삼랑이 각자의 꿈에 잠겨 있는 동안 하인이 다른 손님을 모셔 왔다. 손님은 다름 아닌 미려였는데 미려는 방 도련님이 회임했을 때 진해를 대신해 곽열과 방 도련님의 혼인 선물을 준비했었다. 예상외로 길어진 옥살이 때문에 혼례에 참가하지 못한 진해 대신 참가함은 물론이었다.
“아, 어쩜 이리 귀여운 공자님일까. 눈매가 방 도련님을 똑 닮았어요. 커서 여러 사람 울리는 공자님이 되겠는걸요?”
“하핫, 월국 제일 미인이라는 정 공자가 그리 말하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 그런데 정말 그렇게 보여? 정말 우리 애가 그렇게 미인이 될 것 같아?”
“아무렴요! 방 도련님, 미려 말은 사실이에요. 예쁜 아기들은 어려서부터 딱 태가 난다니까요? 제가 미려를 길러 봐서 압니다. 미려도 어릴 때 어찌나 예쁘던지 안고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느새 해가 져 있었다니까요?”
“정말? 정말이야? 그럼 지금부터라도 아이를 지킬 호위를 기르는 게 좋을까?”
굴러 온 돌이 박힌 돌 빼낸다고 제일 늦게 온 미려가 물 흐르듯 자연스레 진해의 옆에 앉아 진해와 함께 아기를 보고 얼렀다. 아기도 보는 눈이 있는지 삼랑을 보자마자 빽빽 울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까르르 웃음을 짓기까지 했다. 해산의 품에서는 기저귀에 실례를 했었다.
“저 뻐꾸기 새끼가!”
“……동생이니까 용인해 주는 것이다. 동생, 이니까.”
아기를 안은 미려의 뺨을 어루만지는 진해의 모습은 행복 그 자체였으나 지켜보는 두 사람에게는 속이 뒤집히는 광경이었다. 삼랑은 결국 참지 못하고 욕을 구시렁대며 밖을 나갔고 곽열은 그제야 긴장한 숨을 토해 냈다. 이 자리에서 성질이 최고로 더러운 삼랑이 나갔으니 아이에게 더 해 될 만한 일은 없겠거니 싶었던 것이다.
“앗, 자기! 이리 와 봐! 준이가 자기를 보고 있어!”
“우리 준이가!?”
고생 끝에 복이 온다고 위험한 순간이 지나가자 곽열의 남편인 방 도련님, 아방이 곽열을 향해 급히 손짓했다. 좌부와 함께 별채에 살게 된 곽열은 아방이 회임했을 때엔 밤낮없이 아방을 안고 다녀 의원이 산부에게도 운동이 필요하다며 그러지 말라고 뜯어말릴 정도였다.
“준아, 아빠 왔다~”
“오, 웃는다, 웃어! 역시 아빠가 좋나 보네!”
시작은 삐걱거렸지만 모든 이들의 축복을 받으며 태어난 방 도련님과 곽열의 아기는 그 후로도 한동안 진해의 진심 어린 축복을 독차지했다. 해산이 왔다는 소리에 그를 영접하러 왔던 호부시랑이 저도 모르게 흐뭇하게 그 모습을 감상할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오 시위도 혼기가 꽉 찼군요.”
호부시랑은 기어코 손자를 한번 안고 나서야 해산을 영접할 여유가 생겼다. 손자는 많았지만 노산으로 낳은 막내아들이 조산으로 낳은 손자는 훨씬 각별했다. 호부시랑은 벌써부터 아이의 별채를 짓기 시작한 터였다.
“가문이 한미하다지만 하려면 못할 것도 없습니다. 아니, 어쩌면 이제부터는 제법 혼담이 들어올지도 모르겠군요. 옥에서 나온 이상 죄는 사해진 것이나 마찬가지니 말입니다.”
“…….”
호부시랑의 서재에서 해산은 말없이 차를 들이켰다. 사실 진해는 해산의 예상보다 훨씬 오래 옥살이를 했다. 진해 본인이 친 사고 때문이 아니라 진해의 뒷배인 해산의 공과를 어찌 처리할지 갑론을박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해산이 진해의 보고서인지 반성문인지 모를 상소를 올리는 동시에 조정에서는 대소 신료들이 두 편으로 갈라졌다. 한쪽은 진해를 벌하라 했고, 다른 한쪽은 진해에게 상을 내리라 했다. 해산은 황제의 단 아래 서서 신료들의 다툼을 지켜보아야 했다. 섣불리 나서서 반해국파에 불똥이라도 튀겼다가는 진해는 둘째치고 해산의 거동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각 파의 대표는 예부상서 동가대와 창명후 강절곤이었다. 동가대는 공적으로는 해산이 적장자라는 이유로, 사적으로는 그가 자신의 아들인 동십사를 구해 줘서 해산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있었다. 반면에 강절곤은 십수 년 전에 벌어졌던 원귀비 저주 사건으로 인해 옥고를 겪은 후로 황후를 적대했다. 황태공에게 저주를 걸고, 태아를 사산시킨 게 원귀비가 아닌 황후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후가 그랬다는 증거는 없었지만 해국과의 전쟁으로 인해 대가 끊기거나 친족을 잃은 이는 많았다. 그렇지 않더라도 구국의 영웅인 강절곤은 무관들 사이에서는 황제 다음가는, 왕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런 그가 반해국을 주창하는데 누가 거부할까. 무관들은 강절곤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 때때로 황제보다 강절곤에게 먼저 찾아들곤 했다.
“울 안에 거두시려면 서두르셔야겠습니다.”
“뭔가 소식을 들었나 보군.”
“듣다마다요. 이 사람이 지금 어디서 오는 길인지 아십니까? 황상께서 상서 대감과 저를 불러 노련한 이들을 추리시라더군요. 저희뿐만 아니라 이부, 형부, 공부에도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예부야 천천히 준비하면 될 일이니까요.”
“설마 해국이 접선을 했나?”
해산은 좌부인 황제가 사람들을 꾸린다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반쯤 일어섰다. 무덤덤한 척하려고 해도 자신과 관련이 있는 일이라 저도 모르게 신경이 쓰였다.
“예. 이번에는 ‘진짜’ 사절을 몰래 도성 안에 들여보냈더군요. 황상께서는 목을 자르시려다가 자비를 베푸셨다더군요.”
“자비…….”
“해국에서 두주(杜州)를 비롯한 국경의 칠주(七州)를 바치겠다고 합니다. 자신들은 옥첩려를 사절로 임명한 적도 없고, 결코 역심을 품은 적도 없지만 황상께 누를 끼쳤으니 이걸로 어찌어찌 용서해 주십사, 뭐 그런 거지요.”
“놀랍군. 과거에는 그곳에서 삼 년이 넘도록 교전이 벌어졌다고 했는데.”
해산은 해국이 국경 부근을 바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자 조금 전까지 놀랐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침착해졌다. 얼굴조차 보지 못했던 조부인 선황이라면 몰라도 현 황제인 부황은 언제나 그랬듯이 감정을 죽이고 실리를 취할 터였다. 해산의 좌부는 유일한 혈육인 해산조차도 장기판의 말로 보는 사람이었다.
“그거야 옥길합이 건재할 때 이야기지요. 저는 무관이 아니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옥길합은 창명후 각하께서도 인정한 몇 안 되는 명장이 아니더이까. 해국 사정은 잘은 모르지만 그런 명장이 가주로 있는 집안에서 옥첩려 같은 모지리를 보낼 정도면 해국도 사정이 썩 좋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듣자 하니 해왕이 전과 달리 황후마마께 아주 극진하시다지요.”
“극진이라. 귀찮게 엉겨 붙는 것도 극진이라면 극진이긴 하지.”
부황의 이야기만 들어도 심기가 어지러운데 외가인 해국의 이야기를 듣자 해산의 미간에 깊은 내 천 자가 새겨졌다. 반해국파가 득세하고 있는 지금 조정은 해산에게 살얼음판 같은 곳이라, 해산은 언제나 평온을 유지하고 이성적인 결정을 내리려고 노력했다. 어찌 보면 소심하게 여겨질 정도로 자신의 보호에 몰두했다.
그러나 해산이 스스로를 보호하고 굳건히 서려 할수록 해산의 출신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해산이 장성하자 외가인 해국에서 자꾸만 해산에게 그들을 잊지 말라 추근거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혈육인 만큼 아주 팽개칠 수는 없었다. 일단 그를 낳은 우후의 친정이 아니던가. 하지만 해산에게 외가보다 더욱 큰 문제가 있었다. 해산이 아무리 침착하고 냉정해지려 해도 해산을 사정없이 깨 버리는 벽 같은 존재였다.
“혹여, 그대 오는 길에 우후를 뵈었는가?”
“마마께서도 못 뵙는 황후마마를 제가 어찌 뵈옵니까.”
“그렇겠지.”
그것은 바로 월국의 우부이자 해산의 우부인 황후였다. 사마씨를 가진 음인 사내인 황후는 놀랍게도 해산에게 어떠한 훈시도 내려 주지 않고 있었다. 어린 해산이 당황할 만큼 서늘하고 냉정하게 친정인 해국을 멀리했던 것이다. 옥첩려를 예비 정군으로 대우한 게 놀라울 지경이었다. 차라리 우후가 친정에 살가웠다면 해산도 반해국파를 신경 쓰지 않고 마음껏 해국을 지지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황상께서는 국경의 칠주를 받으시고 이 일을 마무리 지으실 셈인 듯합니다. 일을 좋게 마무리 지으려면 상을 받을 사람이 필요하고,”
“동십사는 한 것이 없고, 고에게는 내리지 않으실 테니 진해에게 하사하시겠군.”
“오 시위는 마마의 사람이라고 하나 출신이 한미하고 배경이 없으니 더욱 안성맞춤이지요. 생각보다 큰 상을 받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울 안에 거둘 수 없을 만큼.”
햇병아리 황자인 해산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노련한 관리인 호부시랑이 저리 말할 정도면 상당히 파격적인 포상이라는 말이었다. 해산이 진해를 측실로 섣불리 들이기 어려울 정도로 중요한 자리일지도 몰랐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꼭 그렇지는 않다는 거 아시잖습니까.”
호부시랑은 숨기지 못하고 드러나는 해산의 얼굴을 바라보며 인자하게 미소 지었다. 사랑에 번민하는 젊은이는 너구리 소리를 듣는 관리마저도 한풀 꺾이게 했다.
“사랑을 하면 선대가 무슨 짓을 해도 맺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제 아들아이를 보십시오, 소인이 아무리 철벽을 둘러쳐도 결국 저렇게 짝을 물어 왔잖습니까?”
―그것도 손자와 함께.
해산이 호부시랑의 농 섞인 말에 어색하게 미소 짓는 찰나 별채 쪽에서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진해가 옳지, 옳지라고 말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해산은 그 소리를 들으며 어색했던 미소를 거둬들였다. 진해가 크길 바랐던 건 자신인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몰랐다. 자신만의 진해였는데, 자신 스스로의 힘으로 이룬 자신만의 진해였는데.
해산은 어딘지 모르게 울적해지려는 마음을 감추고 공무를 핑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부시랑은 황제와 황후에게 동시에 거리를 두고 있는 황자인 해산이 그리 큰 중책을 맡고 있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노련한 관리였다. 정세를 읽고, 정국이라는 장기판에서 말을 움직이기도 하는 이였다.
지금은 끈 떨어진 연 신세였으나 끈을 이어 준다면 해산은 누구보다도 훨훨 날 수 있는 이였다. 적장자라는 신분이 그러했고, 해산 자체의 재주도 나쁘지 않았으며, 저 어린 나이에도 끝없이 참아 내고 또 참아 냈다. 무엇보다도 해산은 성정이 온후하고 다감했다.
거기다 해산은 저 오진해의 주인인 것이다. 오진해는 아무 생각 없이 일을 벌였지만 호부시랑은 이번 일로 인해 오진해가 하잘것없는 육등시위가 아닌 뭔가 다른 중요한 것으로 변할 것을 직감했다. 일을 벌이는 솜씨와 규모를 보면 참으로 담대하기 짝이 없는 작자였다.
“분명히 훌륭한 줄이 될 테지. 연을 하늘로 높이 올리는 줄이.”
그리하여 호부시랑은 오진해가 해산의 사람임을 확신하는 순간 장기판의 가장자리에서 한복판으로 발을 디뎠다. 전쟁이 끝나고 막 평화가 시작하는 시대, 성군의 탄생에 손을 보태기로 했다.
“동가대 어른께 전해 주게. 본관의 서재에 대감께서 관심 있으실 그윽한 향이 있다고.”
호부시랑이 해산이 떠난 자리를 바라보며 말하자 해산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숨어 있던 인영이 호부시랑의 앞으로 다가왔다. 옅은 머리칼과 옅은 눈 색, 이리처럼 늘씬한 몸뚱이. 기무위사의 검은 수건을 목에 걸친 이가 서늘한 눈으로 호부시랑을 마주 보았다.
그는 호부시랑과 눈을 마주치고는 두말없이 뒤돌아 방을 나갔다. 아무렇지도 않게 방을 나가 다시 별채로 들어갔고, 아무렇지도 않게 아기를 축복하는 이들의 틈에 섞여 들었다.
* * *
호부시랑의 말대로 한 주가 지나기도 전에 진해는 해원공부로 불려 갔다. 뒷문을 쓰지 않고 정문으로 들어간 건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진해는 자신이 들락거리던 곳이 황자부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황궁은 아니지만 황궁과 비슷한 곳이었구나!”
영 집사는 고이 기른 송아지를 새 주인에게 넘기듯 진해의 관복을 한참이나 매만져 주었다. 감격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똑같은 관복인데 왜 이리 어설퍼 보이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했다.
“촌스럽긴. 누가 창놈 아니랄까 봐 어리숙한 티를 줄줄.”
“그거랑 그게 무슨 상관인데! 게다가 나 창놈 아니야!”
“지랄하고 자빠졌네. 아무랑이나 처자는 놈이 창놈이 아니면 누가 창놈이야?”
“아무랑이랑도 안 잤어!”
“그으래? 그럼 내가 이때까지 너랑 잔 연놈들 이름을 줄줄 불러 볼까? 맨 먼저 이 집 주인인―”
“우와앗, 나 창놈 맞아! 맞아! 마음에 드는 사람이랑 다 자!”
동십사는 자신이 진해를 해원공부에 데리고 가고 싶었으나 안타깝게도 이번 사건으로 인해 황궁의 경비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역심을 품은 자가 황상과 황후를 알현하기까지 했으니 황궁 시위들의 우두머리 격인 동십사가 할 일이 많아졌다.
하는 일만 보자면 진작 일등시위에 오르고도 남았으나 문제는 그가 부리는 시위들의 대부분이 무관이었고 반해국파인 강절곤을 따른다는 점이었다. 동십사의 실력은 인정했으나 동십사의 주군을 인정하지 못해 동십사는 때때로 그들과 마찰을 겪기도 했고, 따라서 그가 일등시위가 된다면 분명히 시위들 사이에 큰 소란이 일터였다.
어쨌거나, 동십사는 공사가 다망하여 진해를 해원공부에 데려다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거둔 제자이자 진해와 친밀한 사이인(동십사는 그렇다고 알고 있는) 삼랑을 진해의 호위로 붙여 주었다. 삼랑은 겉으로는 동십사 아래서 수련을 하는 백의 무사로 되어 있으므로 남들 보기에도 썩 그럴듯했다.
“그러니까, 쉿, 쉿!”
“참 나,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쥐새끼처럼 숨기고 다녔냐? 너 밖에서도 잘 싸잖아? 왜 네 잘난 정부 양반께서 너더러 닥치고 있으라던?”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거 아니면? 지금 우리 보고 있는 저 새끼들 눈깔 때문에? 저 새끼들 겁나서 할 말 못 하는 거면 내가 확 파내 줄까?”
삼랑은 진해와 해원공부의 회랑을 걷다가 마당을 쓰는 일련의 무리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진해를 호위하는 것까진 좋았는데 제 손으로 해산공에게 데려다주려니 부아가 치밀어 미칠 지경이었다. 게다가 진해가 왜 말을 조심하는지 알 것 같아 더 짜증이 났다.
진해는 자신이 신분을 밝히고 당당하게 해원공부에 들어오자마자 다닥다닥 달라붙는 시선들을 눈치채고 해원공을 보호하기 위해 그렇게 부정하던 창놈 칭호마저 긍정하며 입조심을 하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삼랑이 벌컥 화를 내며 손가락질을 하자 얌전히 빗자루질하던 이들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들은 아닌 척하면서도 진해와 삼랑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있었다. 삼랑이 흉폭한 기세로 당장이라도 달려올 기세이자 그들은 눈치를 보다가 후다닥 진해와 삼랑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졌다. 진해는 그들이 사라지자 참았던 숨을 길게 토해 내었다.
“씨발, 그 새끼가 그렇게 좋냐.”
삼랑은 진해의 표정이 풀어지는 걸 보며 이를 갈았다. 개새끼가 삼랑에게 귀띔한 게 있어 참고 있지만 마음 같아서는 진해 입에 아무거나 처넣고 손발을 꽁꽁 묶어 국경 밖으로 달아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탈상을 늦게 해 조금이라도 더 이놈의 연민을 끌어 볼 걸 그랬다.
“사실 잘 모르겠는데 그냥 해산 마마님이 잘되셨으면 좋겠고 그러네. 측실은 좀 그렇지만 떨어지고 싶지는 않은 그런 기분?”
“멍청하긴.”
진해는 삼랑이 방해꾼들을 쫓아 주자 히죽 웃어 보이고는 방금과는 다른 촐랑거리는 걸음걸이로 자신이 아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진해는 해산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고 눈치로 대충 해산의 응접실 역시 어디쯤 있을지도 알고 있었다.
“천세 천세 천천세! 육등시위 오진해가 황자마마를 뵙습니다!”
진해가 응접실에 들어서자 해산과 진해의 눈이 딱 마주쳤다. 하급이나마 번듯하게 관복을 갖춰 입은 진해를 보자 해산의 눈이 저도 모르게 반달처럼 휘어졌다. 반가움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가려 했다. 진해 역시 해산이 반가운 건 마찬가지였다. 비밀 통로로 들어왔다면 단번에 달려가 포근한 품에 얼굴을 묻었을 것이다.
“일어나거라. 공신을 차가운 바닥에 오랫동안 꿇려 둘 수는 없지.”
찰나도 되지 않을 순간이건만 해산은 성큼성큼 걸어가 예를 차리는 진해를 일으켜 세웠다. 영 집사가 정성을 다해 뽀득뽀득 씻기고 잔털을 뽑아 단정하게 만들어 놓은 얼굴을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흠, 흠! 그래, 내 그대를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대로 보다가는 한참이 지나도 용건을 말할 수 없을 것 같아 해산은 억지로 진해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헛기침하는 해산을 바라보며 진해는 개구쟁이 같은 웃음을 지었다. 저보다 어리면서 의젓하게 공무를 수행하는 해산의 뒷모습이 참으로 멋져 보였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정인이 너무나 귀여웠기 때문이었다.
“황상께서 황궁에서 직접 그대의 이야기를 듣고자 하시네. 하나 그대는 황궁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어 의도치 않게 우를 범할 수도 있지. 그리하여 고로 하여금 그대에게 황궁에 대해 알려 주라 하셨어. 본디 예부에서 전담해야 할 일이나 자네의 후견인 동십사의 부친이자 상서인 동가대가 나를 천거했네.”
“그것 참으로 황공하기 짝이 없네요! 그 어르신은 겉보기와 달리 꽤 화통한 면이 있으시다니까요. 아심이랑 동 형의 혼인도 그렇고.”
“어험! 어쨌거나 그대를 황궁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일은, 이 내가 맡게 되었네. 그대를 황상의 앞으로…… 데리고 간단 말일세.”
“아~ 그렇구나~ 황상께서 제 이야기를 듣고자 하시구나~ 그래서 황상의 앞으, 헉!”
진해는 해산의 사랑스러움에 취해 해산이 무슨 말을 하는지 대충 넘겨짚고 있었다. 자신의 죄(죄라고 생각 안 하지만)는 옥살이로 갚았으니 됐고, 상으로 금전이나 몇 푼 내려 주겠거니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황상께서 저를 보고 싶다고 하셨다. 월국에서, 아니, 이 세상에서 제일 귀한 분이,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해산 도련님의 좌부 되시는 분이 저를 보자고 하신다!
“헉, 저 어떡하죠? 새 옷이 없는데! 머리도 새로 다듬어야겠고 신도 새로 사고, 아차! 처음 뵙는데 맨손으로 갈 수는 없지! 뭘 사지? 뭘 준비하지?!”
진해는 혼비백산하다가 뭔가를 떠올린 듯 바깥으로 뛰쳐나가려고 했다. 하는 양만 보자면 꼭 뭐 마려운 강아지가 따로 없었다.
“이보거라.”
“역시 술이겠지? 아니 술을 안 좋아하시면 어떡해!”
“진해야.”
“그럼 차로!”
얼마나 당황했는지 진해의 영혼과 육신이 따로 노는 것 같았다. 해산은 허둥지둥 밖으로 나가려는 진해를 잡아 자신의 앞으로 끌어 놓았고 황망한 눈동자를 바라보다 그의 양 뺨을 붙잡았다. 얼굴을 가까이하자 정처 없이 헤매던 진해의 눈동자가 해산의 쪽으로 돌아왔다. 반짝반짝 윤을 내는 눈동자 속에 해산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쪽. 이마가 닿자 진해가 해산이 뭘 하기도 전에 먼저 해산의 입에 입을 맞췄다. 진해 자신도 인지하기 전에 행해진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황상은 뭘 좋아하세요?”
“어, 어?”
당황한 진해를 안정시키려 했는데 어느새 해산이 더 당황하고 있었다. 닿은 입술 사이로 당황이 전염된 모양이었다.
“그, 그런, 그, 부황께서는 음, 그러니까.”
“이야, 세상 좋~ 아졌다~ 황제 폐하가 고작 육등시위한테 삥이나 뜯고~ 세상 참 자~알 돌아간다!”
그런 해산을 진정시킨 건 문가에서 둘이 하는 꼬락서니를 낱낱이 지켜보고 있던 삼랑이었다. 삼랑은 진해가 상견례라도 하는 것처럼 부산을 떨어 대자 참아 왔던 복장이 마침내 터져 버리고 말았다. 완전히 터지지는 않고 십 분의 일 정도.
“어이, 오진해. 목 위에 단 건 장식이냐? 네 녹봉을 누가 주는 줄 알고 선물을 준비하네 마네야? 네 녹봉보다 훨씬 많은 녹봉을 나눠 주는 게 누구냐? 어?”
“앗, 그러고 보니?”
“그만큼 돈이 차고도 넘치는 양반한테,”
“무엄하다!”
“하급 관리 꽁무니에 서 있는 네가 선물을 한다고? 대놓고 정인이라고 말하지도 못하고 겨우 정부 축에나 들어가는 네가 선물?”
“그, 그런가?”
“한 시위! 고와 진해의 대화에 끼어들지 마라!”
“아, 예. 저는 들어도 못 들은 척 봐도 못 본 척해 드립죠, 예, 예.”
해산은 삼랑을 찌릿 노려본 뒤 다시 진해와 이야기를 하려 했다. 하지만 진해는 삼랑의 말을 듣고 뭔가 깨달은 바가 있는 모양이었다.
“확실히 세상을 다 가지신 황상께 제가 드릴 만한 건 없겠네요…….”
좋게 말해도 좋으련만 꼭 저런 식으로! 진해는 풀이 죽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해산은 네가 상을 받으러 가는 자리니 선물을 준비할 필요가 없다고 얘기하려 했다. 진해에게 달래진 적은 있으나 진해를 달래 본 적은 없어 해산은 풀 죽은 진해를 앞에 두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사실 해산 앞에서 이렇게 풀이 죽은 사람 자체가 드물었다.
“안아 주세요.”
“어? 그래, 가여운 것. 고의 품에 안기도록 해라. 한 시위 저 몹쓸 것이 달린 입이라고 네게 함부로 지껄이는구나.”
하나 인생지사 새옹지마라고. 풀이 죽은 진해가 양팔을 벌리며 해산에게 안겨 들었다. 해산은 우유 향이 솔솔 풍기는 정수리를 앞에 두고 있는 힘껏 진해를 안아 주었다.
근래 진해와 만날 때마다 이렇게 서로를 안고 있는 때가 많아졌다. 좆부터 잡았으니 이제는 손을 잡자고 말해 왔던 진해는 그 말을 지키려는 것처럼 해산에게 기대거나 해산을 기대게 하거나 했다. 해산은 진해를 볼 때마다 가슴속에서 전과 다른 온도의 애틋함이 차올랐는데 이것은 부황이나 우후에게서도 받아 보지 못한 따스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물론 진해는 생각이 다른지 해산의 폭신한 품에 뺨을 기댄 채 헤 입을 벌리고 있었다. 뺨에 닿는 감각을 음미하며 해산이 진해에게 전해 주려는 애정이라든 가 연민이라든 가 하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해산의 육체에서 한껏 위로를 받고 있었다. 처음에는 삼랑의 말에 풀이 죽었지만 생각해 보니 하인이 주인에게 선물하는 것 자체가 웃기는 말이었다.
또한 해산과 진해는 혼례는커녕 약혼도 하지 않은 사이였다. 물론 해산 도련님의 마음은 다른 것 같았지만 진해는 아직도 측실이 되기가 꺼려졌다. 이 폭신한 품에 기대고 있으면 해산 도련님의 말에 무조건 고개를 끄덕이게 되지만 진해의 가슴속에 깊이 뿌리내린 신념에는 변화가 없다는 말이었다.
삼랑의 구시렁거림을 뒤로 하고 해산과 진해를 서로를 안은 채 동상이몽에 빠져 있었다. 해산은 진해를 실컷 위로한 뒤 진해가 걱정했던 것들을 하나씩 해결해 주었다. 새 관복과 새 관모, 그리고 새 신이었다. 하인이 진해의 옷을 갈아입히는 동안 주변이 무섭도록 조용해져 진해는 새삼 해산과 삼랑이 무서워졌다.
약간 더 복잡한 예법을 익힌 뒤 마침내 진해가 황제를 알현하는 날이 다가왔다. 적통 황자 해원공과 해원공부 일등시위인 황아무의 뒤를 따라 붉은 칠을 한 수레에 타고 당당히 황궁에 입성하였다.
진해는 속으로 황아무를 굉장하다 여겼다. 해산이야 여기서 나고 태어났으니 그렇다 쳐도 황아무는 저보다 좀 잘사는 집 자식일 뿐인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황궁을 걸어가고 있었다.
‘휴, 당장이라도 짜부라질 것 같네!’
입궁에 앞서 해산이 조곤조곤한 어조로 황궁에서는 함부로 경거망동해서는 아니 된다고 타일렀었다. 황궁 시위들은 항상 신경이 곤두서 있으니 조금이라도 수상한 행동을 했다가는 해산이 뭐라 하기도 전에 뇌옥에 끌려갈 수도 있다고 했다. 진해는 아닌 척했지만 꽤 겁을 집어먹었다. 해산이 새삼 얼마나 높은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인지를 알게 되었다. 자신이 얼마나 대담하게 해산과 어울렸는지도.
“해원공 마마와 내무부 육등시위 오진해가 들었사옵니다!”
시위들이 빽빽한 건물의 가장 큰 문 앞에서 내관임이 분명한 자가 큰 소리로 외쳤다. 출입이 허가되지 않은 황아무는 얌전히 진해에게 길을 비켜 주었다. 어쩐지 해원공부에 정문으로 들어갔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진해가 다 알아채지도 못하는 엄청나게 많은 시선이 진해에게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었다.
“……해야.”
저도 모르게 뻣뻣하게 굳어 있는 진해를 구한 건 해산이었다. 해산은 내관에게 살짝 눈짓하더니 자신의 옆에 선 진해의 손목을 슬그머니 그러쥐었다. 남들보다 행동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해산에게는 크나큰 모험이나 다름없는 행동이었다.
“네, 네?”
“명심하거라. 지금의 너는 월국의 공신이다. 다른 건 다 잊고 그것만을 생각하거라. 너는 월국을 위해 그리한 것이야.”
“엇, 그건…….”
월국이고 나발이고 해산의 옆에 그런 허섭스레기 같은 놈이 붙어 있는 게 싫을 뿐이었다. 월국을 위한다는 거창한 뜻을 품은 적은 없었다. 그랬다면 옥첩려를 좀 더 그럴듯한 수단으로 손봐 주었을 것이다.
“가자꾸나.”
진해가 대답하기도 전에 해산은 진해의 손을 놓고 당당히 어전 안으로 들어갔다. 바르게 편 어깨며 곧은 등이 참으로 단정해 보였다. 진해는 저 등과 같은 체온이 머물다 떠난 손목을 살며시 쓸어 보았다. 어쩐지 떨림이 많이 가신 듯했다.
해산을 따라 종종 걸어가는데 묘하게 익숙한 향취와 시선이 느껴졌다. 휙 고개를 틀자 젊은 관리들이 시립해 있는 가운데 진해와 수십 번이나 마주쳤던 인물이 서 있었다. 육품 무슨 학사라던 조관림이었다. 조관림은 제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진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해는 갑자기 콧대가 뾰족해졌다.
“만세 만세 만만세! 내부무 육등시위 오진해가 황상을 뵙습니다!”
해산은 진해가 적당한 위치에 서자 그를 놓아두고 황제의 단 바로 아래 왼쪽에 섰다. 예부상서 동가대가 해산과 가까운 위치에 서 있었다.
“음.”
황제는 약간의 틈을 두고 대답하였다. 진해는 황제가 일어나라고 하기 전까지는 일어날 수 없었으므로 뒤통수로 대답을 들어야만 했다.
“오 시위가 역도를 잡았다고.”
황제는 온 조정이 다 아는 사실을 느릿한 어조로 되물었다.
“예, 그렇사옵니다!”
그러자 황제의 옆에 서 있던 형부상서가 크고 명료한 소리로 긍정하였다. 그는 그 후에 들고 있던 두루마리를 펼쳐 이 일에 대해 정리한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내용은 진해가 아는 것도 있고, 모르는 것도 있었는데 진해는 옥첩려가 사실 해국에서 선발한 사신이 아니고, 월국으로 오는 도중에 해국에서 선발한 진짜 사신을 죽이고 자신이 그 자리를 꿰찼다는 말을 듣고 등을 크게 움찔했다.
그랬거나 저랬거나 두루마리의 내용은 진해가 옥첩려가 품은 역심을 눈치채고 그를 저지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었다. 옥첩려가 제 입으로 역심을 실토하게 만들어 그를 처치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는 말이었다. 형부는 자결한 옥첩려의 목을 성 밖에 달아 놓았다는 알고 싶지 않은 정보를 덧붙임으로 진해의 속을 메슥거리게 만들었다. 형부상서의 보고가 끝나자 신료들 사이에서 작은 수군거림이 일었다. 보잘것없는 시위 하나가 벌였다기에는 터무니없이 큰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튼튼한 고목이라 할지라도 속에서 썩어 감에는 별도리가 없음이야.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옥첩려가 획책한 불미한 계략이 성공하여 그가 조정에 입김을 불어넣기라도 했으면 우리 대월국은 그야말로 바람 앞의 촛불과 다름이 없었음이야.”
신료들이 수군거림을 멈추게 한 것은 평이한 어조로 내뱉어지는 황제의 말이었다. 황제가 입을 열자 수군거림은 거짓말같이 가라앉았고, 그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음에도 가장 끝줄에 시립한 신료들에게도 명료하게 울려 퍼졌다.
“한직에 있다고는 하나 그 공은 왕공제후 못지않다. 짐은 육등시위 오진해의 공을 치하하고자 하는데 경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공을 세웠으니 치하하고 포상하는 게 당연했다. 상을 주겠다는 황제의 의견에 대꾸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해원공의 사람인 진해에게 순순히 상을 줘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 있었다. 곧 날이 선 도끼처럼 묵직한 목소리가 어전에 울려 퍼졌다.
“신 창명후 강절곤이 감히 폐하께 말씀 올리옵니다!”
강절곤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데 전혀 주저함이 없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황후의 파멸. 해국의 파멸이었으므로 연막을 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전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선두에 섰고 측근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공은 공이고 사는 사라고 하나 신은 과연 저자에게 상을 내려야 할지 의문이 듭니다.”
“그 이야기는 이미 끝난 거로 아오만.”
“신이 이번에 드리려는 이야기는 전과는 좀 다르옵니다! 저자가 아닌 황자마마, 그보다는 황후마마에 대한 사안이옵니다!”
강절곤의 입에서 황후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어전이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예부상서 동가대는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이었다.
“애초에 옥첩려를 궁에 불러들인 것이 누구이옵니까. 옥첩려에게 분에 넘치는 은혜를 베풀고 역심을 품을 여지를 준 것이 누구이옵니까. 분명 저자는 그의 역심을 눈치채고 그를 저지하였습니다. 하나 저자는 해원공 마마의 사람이옵니다. 옥첩려의 계책이 다른 이에 의해 퍼졌다면 저자를 비롯하여 연관된 자들이 성하였겠사옵니까?”
신료들 사이에서 확실히, 과연이라는 말이 새어 나왔다. 이리저리 돌려 말하고 있었지만 강절곤이 전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했다. 강절곤은 해원공이, 혹은 황후가 제 아랫사람인 진해를 시켜 속된 말로 그들 자신이 싼 무엇을 처리했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사익에서 비롯된 행위가 황상의 치하를 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전장에서 이슬처럼 사라진 용사들도 지하에서 탄식을 금치 못할 것이옵니다.”
“창명후, 무례하오! 어찌 감히 역도와 해원공 마마를 한데 묶는 것인가!”
가만히 들어 주다가는 해원공이 함께 엮일 판이라(이미 반쯤 엮였지만) 예부상서 동가대가 반격에 나섰다. 문제는 동가대가 예부상서를 맡을 만큼 예와 격식에 충실한 인물인지라 강절곤보다도 더, 더 돌려 말한다는 점에 있었다. 강절곤과 동가대가 몇 마디씩 논쟁할 때마다 절한 채로 꿇고 있는 진해의 몸에 무리가 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혓바닥들이 참 길기도 하지!’
그런 진해를 인내하게 하는 건 황궁 시위들의 번뜩이는 검집들이었다. 해산이 오면서 신신당부한 황궁 시위들의 눈먼 검 때문이었다.
“그만하시오, 동 상서! 삿된 말로 무과조차 치르지 않은 저치가 무엇을 알고 충을 행한단 말이오! 소 뒷걸음치다 쥐 잡은 격이지, 저런 천것을 거둔 해원공의 안목도 알 만하지! 아니, 오히려 딱 맞는 수하를 골랐소이다! 우후인 황후마마의 미모도 저자가 발을 걸친 여해루인지 나발인지 하는 곳에 썩 어울리니 말입니다! 하하하하하!”
“차, 창명후!!”
그리고 마침내 논쟁은 극에 달해 강절곤이 동가대의 얼굴이 창백해질 정도로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제 우후가 기루와 어울린다는 소리를 들은 해산의 안색 역시 좋지 못했다. 하지만 이 자리의 누구도 강절곤을 말리지 않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언제나 암묵적으로 강절곤의 말을 용인하거나 흘리거나 할 터였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그 입 닥치지 못해―――――――!!!”
그러나 오늘은 평소와 달랐다. 강절곤의 대담한 발언으로 인해 들끓던 대전에 노호가 울려 퍼졌다. 놀랍게도 그 소리는 몸을 일으킨 진해의 입에서 나오고 있었다.
“당신, 당신이 뭔데 황후마마를 욕되게 해! 당신이 뭔데 여해루를 욕해! 황후마마는 폐하의 정실이시고 이 나라의 우부신데, 당신이 어찌 감히 황후마마를 욕해! 그리고 여해루도 당신 같은 손님은 사양이야! 여해루에는 매일매일을 성실하게 일하는 귀여운 애들만 있다고!”
한낱 육등시위가 공신인 창명후에게 대들고 있었다. 예부상서 동가대를 비롯한 모든 신료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일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리고 뭐? 내가 한미해서 충을 몰라? 무과도 못 봐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에라이, 차라리 숨 쉬는 법을 모른다고 해라! 숨 쉬는 법을! 나는 월국 사람이야, 그 뭐냐, 대월률 아래서 성실히 살아가는 준법 국민이라고! 그리고 황상은 내 목숨을 구해 주신 은인인데 내가 어떻게 황상께 충성을 안 한단 말이야!!”
“모, 목숨을 구해 주셨다고?”
쉬지 않고 침을 튀기면서 다다다 쏘아붙이는 말 사이로 창명후의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섞여 들었다. 담대하고 강건한 창명후 역시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그래! 그건 내가 어릴 적의 일이었어. 내 우부는 내게 아우를 보라하고 나가셨지! 하지만 돌아오지 않으셨어, 사고인지 뭔지는 모르지만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셨어! 나는 집 밖으로 나가는 것도 무섭고 집 안에 낯선 사람을 들일 수도 없어서 동생을 안고 꼼짝없이 굶어 죽어 가고 있었지!”
진해는 약이 올랐는지, 그도 아니면 감정이 북받쳤는지, 그것도 아니면 그때를 회상하는지 어느새 눈물이 고여 있었다. 창명후와 대소 신료들이 그 모습을 똑똑히 보고 있었다.
“그런 나를 데려간 게 바로 구호소였어. 역병이 돌자 도성의 생존자들을 모아 공짜로 입히고 먹여 주었어! 거기서 날 이 년을 키워 줬고 그 후에는 일자리까지 소개해 줬어! 관리가 날 잘 본 줄 알았지만 사실 황상께서 도성의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행하신 조처였지! 황상께서 특히 고아들을 잘 돌보라는 성지를 내리셨던 거야!”
확실히 저런 사연이 있다면 아무리 밑바닥에서 살았어도 황제의 은혜를 알 만했다. 창명후는 황후에게 원한이 있었지만 사리 분별을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복수를 위해 도를 넘은 수단을 사용하기는 해도 황제에 대한 충성만큼은 변하지 않은 것처럼.
―그리고 역병, 전쟁의 여파가 가시기도 전에 도성을 덮쳤던 바로 그 역병.
진해 또래의 자식이 있는 신료들은 저도 모르게 진해의 기구한 사연에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그들은 흉포한 역병의 기세와 참혹한 실상을 알고 있었고, 진해가 황제의 은덕으로 고아인 채 살아남았다고 말하자 진해에게 절로 연민의 정을 느끼게 되었다. 어떤 이는 그때 잃은 자식이 생각났는지 굵은 눈물방울을 흘리고 있었다.
“폐하!”
창명후 역시 그 후로 다시 아들과 손자를 만나지 못했다. 말문이 막힌 창명후가 입을 다물자 진해가 바닥에 다시 엎드렸다. 절한 채로 꿈틀꿈틀 세 걸음 정도 기어가더니 울음 섞인 목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어찌나 절절하던지 예부상서 동가대가 가슴께를 움켜쥘 정도였다.
“저는 상이고 뭐가 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우부도 없고, 좌부는 누군지도 모르는 한미한 놈입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언제나 폐하를 좌부처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제가 폐하께 누를 끼친다면, 제 관직을 걷어 가셔도 좋아요! 제 인생에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올까 싶지만 이렇게 폐하와 황후마마, 해원공 마마를 욕되게 하느니 차라리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게 낫습니다!”
해산은 진해가 저런 마음을 품고 있는지 미처 몰랐다. 진해와 살을 맞대면서도 저런 깊은 속을 간직하고 있는 줄 알지 못했다. 예부상서 동가대도 마찬가지였다. 진해가 저렇게 황제에 대한 충심이 깊은 줄 알았다면 진해를 좀 더 제대로 대우해 주었을 터였다.
창명후 측의 신료들도 저도 모르게 숙연해졌다. 그들이 적대하는 것은 원수의 나라 해국과 해국 출신의 황후였다. 그들의 적은 월국의 백성이 아니었고, 진해는 그들과 같은 월국의 백성이었다. 같은 황제 아래서 같은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월국의 백성.
“이름이 진해라고 했던가.”
진해의 분기 어린 훌쩍거림이 조용해진 대전에 흐르는 동안 침묵을 유지하던 황제가 진해에게 물었다. 진해는 코맹맹이 소리로 긍정하였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황제 역시 진해의 말에 꽤 감동한 모양이었다. 그는 진해를 자세히 보려는지 진해를 자신의 곁으로 불렀으나 진해는 엎드린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엎드린 채 부들부들 등을 떨 뿐이었다. 그러자 황제의 곁에 있던 내관 하나가 성큼성큼 걸어가 진해의 곁으로 다가갔다. 콧물을 훌쩍이는 진해를 부드럽게 부축하고 조심스레 그를 황제의 앞으로 데려가기 시작했다. 내관은 눈물을 흘리진 않았지만 눈가가 잔뜩 붉어져 있었다. 입술 역시 세게 깨물어 상처가 나 있었다.
“고개를 들라.”
황제는 계속 엎드리려는 진해를 보다 못해 황좌에서 내려와 진해에게 먼저 다가갔다. 훌쩍훌쩍 우는 소리를 내는 진해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 제 얼굴을 보게 했다. 황제와 눈이 마주치자 진해의 입에 헤 벌어졌다. 해산의 좌부인 황제는 해산과 꽤 많이 닮아 있었다. 아니, 해산이 황제를 닮은 거겠지만.
“과거 짐은 도성에서 월국의 멸망을 앞두고 있었다. 많은 왕공제후들이 짐에게 항복을 권하거나 변절하거나 했었지. 개국 이래로 수없이 많은 영화와 공명을 입었던 자들이.”
반면에 분위기는 해산과 썩 달랐는데 진해는 황제의 손이 따스하다는 걸 알면서도 어쩐지 저도 모르게 오한이 드는 것 같았다. 황제는 전장에서 가족을 잃어서 그런지 따스한 표정의 해산과 달리 삭막하고 서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해산을 닮은 미남이 아니었다면 꽤 재수 없다는 소리를 들었을 듯했다.
“그 후로도 짐에게 진정으로 충성하는 자는 몇 되지 않았다. 짐은 마치 망망대해를 뗏목을 타고 건너는 듯한 기분으로 살아왔지. 하지만 그대는 그런 짐에게 가뭄의 단비 같은 존재구나. 짐은 짐이 뿌린 씨앗이 이리 훌륭한 결실을 보아 참으로 기쁘기 한량없어. 그 열매가 월국을 구하는 공까지 세웠으니 어찌 기쁘지 아니하겠는가.”
그래도 황제는 진해에게 있어 생명의 은인이었다. 진해는 너무 오래 엎드려 있어 다리가 저려도,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기어 다녔어도 황제의 얼굴을 직접 본다는 사실에 가슴이 크게 술렁거렸다. 구호소에서 죽을 얻어먹으면서 항상 고맙게 생각했던 은인이 저를 기특하다 말하니 창명후를 닥치게 하기 위해 아무렇게나 꾸며 냈던 말 역시 진짜로 만들어 버렸다. 아주 거짓은 아니니 이제부터 그렇게 행동하면 되는 것 아니냐면서.
사실 진해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쥐 죽은 듯이 엎드려 있을 셈이었다. 상이야 받으면 좋고 못 받아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이미 여해루가 있으니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창명후인지 나발인지의 말대로 자신은 무과를 치르지 않았고 치르지도 못할 테니 육등시위 자리도 감지덕지였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 보니까 저 늙은이가 해산을 욕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해산의 우부를 욕하고 있었다. 아무리 사이가 나빠도 그렇지 아버지들 욕을 해서는 아니 되는 법이었다. 그것도 진해의 예쁜이의 우부를 기루에 빗대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또 여해루는 기루이긴 했지만 창관이 아니었기 때문에 저딴 식으로 입에 올리는 것 역시 참을 수 없었고! 그런 진해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해산이 어전의 문 앞에서 해 줬던 충고였다.
―너는 월국의 공신이다. 다른 건 다 잊고 그것만을 생각하거라. 너는 월국을 위해 그리한 것이야.
진해는 해산의 향이 확 사그라진 걸 느끼자마자 이판사판이라는 격으로 일단 소리부터 지르고 봤다. 고래부터 싸움은 목소리 큰 놈이 이기는 법이었다. 창명후가 무례하다고 반격했으면 당장에 뇌옥으로 끌려갔겠지만 진해는 조정이 돌아가는 사태에 대해 잘 몰랐으므로 시장에서 싸울 때처럼 대뜸 소리부터 지른 것이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가장 높은 사람인 황제에게 잘 보이기 위해 불쌍하고 청승맞고 구구절절한 자신의 과거 이야기와 황제를 엮었고.
“이번 일만 봐도 그대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세태와 본질을 꿰뚫어 보는 재능이 있음이야. 짐에 대한 충정은 더 말할 것도 없고. 그리하여 짐은 육등시위 오진해를 영찰어사로 봉하려 하네. 본래라면 오품이나 사품을 주어야겠지만 배움이 부족한 건 사실이니 품계는 육품을 내리도록 하지.”
“폐, 폐하!”
진해가 황제의 얼굴을 실컷 감상하는 동안 황제는 진해를 어깨를 두드리며 진해의 포상을 진급으로 마무리 지어 버렸다. 문제는 그가 진해에게 내린 영찰어사라는 자리였는데, 이 자리는 형부에서도 꽤 요직에 해당하는 자리로 현재 진해가 몸담은 육등시위라는 변두리 관직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굉장한 벼슬이었다.
파격적이다 못해 파괴적인 인사에 조정이 크게 술렁거렸다. 예부상서 동가대는 어찌나 놀랐는지 말도 못 하고 눈만 부릅뜨고 있었고, 창명후 강절곤은 얼굴이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가만 생각해 보니 저놈의 간계에 걸려 해원공 좋은 짓만 해 준 꼴이었다.
“과거도 치르지 못한 자를 어찌 어사에 앉힌단 말입니까!”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천부당만부당한 인사이옵니다!”
진해가 가엽고 불쌍한 인생을 살아온 것과 별개로 영찰어사 자리는 아무에게나 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상관인 형부상서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자리, 역도와 부정부패를 적발하며, 황제의 기밀 업무를 처리하는 자리가 바로 영찰어사였다. 황제의 성향에 따라 때때로 누가 영찰어사인지 모를 수도 있었다.
“그만.”
황제는 진해의 어깨를 몇 번 토닥이다가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진해는 벙벙한 얼굴로 해산 쪽을 바라보았다. 해산 역시 상당히 놀란 표정이었다. 진해는 문득 자신이 육품이 되면 해산이 청혼하겠다고 한 말을 떠올렸다.
‘나 이제 혼인하는 거?’
“경들은 짐에게 어떤 말도 할 수 없소. 이 중에서 하나라도 옥첩려의 역심을 알아본 자가 있다면 앞으로 나오시오. 해국에 대한 적대감이 아닌 진정으로 그의 야심을 알아본 자가 있으면 나와 보라는 말이오.”
아무도 나오는 자가 없었다. 황제가 해국에 대한 적대감을 운운하자 창명후 역시 할 말이 없어졌다. 황제가 굳이 저 말을 한 것은 반해국파들의 의견을 듣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 이만 조례를 끝내도록 하지. 형부와 이부상서는 짐을 따르도록 하게. 만월궁에 가 바로 조서를 꾸미도록 할 테니.”
파격적인 인사를 마치고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슴없이 대전 밖으로 향했다. 신료들은 황제의 의견에 완전히 동의하진 않았으나 황제가 확고하게 의사를 밝힌 이상 더는 그에 반대할 순 없었다. 막말로 황제의 앞을 가로막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허어―”
그리고 그건 진해 역시 마찬가지였다. 진해는 그냥 적당히 먹고 살 수 있는 관직이면 족했다. 만약 황제가 무슨 관직을 원하냐고 물어봤으면 진해는 잠춘동 포교를 시켜 달라고 했을 것이다.
“해야.”
진해가 멍하니 옥좌를 바라보고 있자 어느덧 해산이 다가가 진해의 어깨를 그러쥐었다. 진해는 화들짝 놀라며 해산을 바라보았다.
“어서 가자. 일단 이곳을 벗어나자꾸나.”
해산은 기쁨 반 긴장 반의 이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진해는 해산이 긴장하는 까닭을 알지 못해 어리둥절했는데 주변을 둘러보고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창명후를 비롯한 반해국파가 진해를 날카롭게 노려보고 있었다. 파격적인 인사를 납득하지 못한 이들까지 진해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한낱 육등시위 오진해는 순식간에 조정의 주목을 받는 자가 되었다. 이야기를 들은 것인지 멀리서 동십사가 허겁지겁 다가오고 있었다.
* * *
“오늘은 내가 쏜다!!”
“와아!!!”
“오 대인! 오 대인!”
“전주, 아니 오 어사 나리가 제일이시다!!”
여해루는 그야말로 문전성시였다. 추피동에서 데려온 여해루의 호위들이 진해를 받쳐 들고 요란하게 여해루를 행진했다. 아직 성지가 내리기 전인데도 어떻게 알았는지 온갖 사람들이 진해를 보겠다고 여해루 밖에서 길게 줄을 서고 있었다. 미려는 진해가 승진했다는 소식을 듣자 휘하의 기생들에게 가장 좋은 성장을 꺼내 입도록, 하인들에게는 여해루에 있는 등이란 등은 다 꺼내 걸도록 명하였다.
그리하여 여해루에서는 진해의 승진 축하라는 명목으로 성대한 연회가 벌어졌다. 기생들이 연주하고 노래하고, 요리사들은 아껴 두었던 식재들을 몽땅 다 끄집어냈다. 하인들은 부엌에 재료를 나르랴, 오는 손님들을 접대하랴 눈코 뜰 새 없었다. 그러나 전주며 손님이 아낌없이 뿌려 대는 금전 덕에 주머니가 두둑해져 절로 피로를 잊게 되었다.
“오 어사.”
“앗, 호부시랑께서 어찌!”
거기다가 호부시랑이 여해루에 귀한 손님을 모시고 왔다. 호부시랑에게는 안 귀한 손님일 수도 있지만 아직 심사를 받지 못한 여해루에는 최고로 귀한 손님이었다.
“오 대인, 처음 뵙겠습니다.”
그는 바로 기루들을 심사하는 심사관이었다. 당연히 호부에 속해 있었고 호부시랑을 상사로 모시고 있었다. 눈치도 빨라서 느긋한 성정의 호부상서보다 노련한 호부시랑을 모시는 게 자리를 지키는 데 더 유리하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었다.
호부시랑의 진한 웃음 속에서 진해는 그가 자신이 누구라도 소개하지 않아도 그가 누구라는 걸 눈치챘고 즉시 미려에게 연통을 했다. 가장 높은 자신의 방에서 단장을 하고 있던 미려는 아름다운 꽃잎 세례와 함께 나타났는데 그 모습은 마치 선계에서 선인이 강림하는 듯한 아름다움과 신성함마저 띠고 있었다. 호부시랑도 잠시 시선을 뺏길 정도였다.
“어서들 오십시오. 미력하지만 저 미려가 작은 연회를 열었는데 함께 어울려 주시면 좋을 듯합니다.”
훤히 드러낸 이마에는 붉은 연지로 꽃문양을 그려 넣었는데 그게 또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진해는 아름다운 동생을 남들 앞에 자랑하게 되어 콧대가 하늘을 뚫을 듯했고, 오늘따라 더욱 솜씨를 발휘한 숙수들 덕에 어깨가 평야처럼 넓어졌다. 만족한 손님들 속에 심사관의 사돈이 있어 더욱 그랬다. 공짜로 먹는 연회였으니 손님 중 누가 불만을 표시할까.
“하하, 마라오향기 가 하나 남았군요. 일이란 숫자는 예로부터 길함을 뜻했지요. 길한 자리에 어울리는 길한 숫자입니다. 천하제일과 같이. 오늘은 이 여해루가 천하제일인 듯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심사관도 대세를 따를 수밖에. 술에 취해 흥이 한껏 오른 심사관은 실낱같은 이성으로 최대한 말을 가렸으나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했다. 여해루는 일급 기루다. 다른 이가 이의를 제기하면 오늘은 일급이 될 이유가 충분했다, 그렇게 항변하련다,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밀과 받으시오, 하나씩 받으시오~! 일급, 아니 일씩 받으시오~!”
일급 기루는 황족이 드나들어도 수군거리지 않을 고급 기루였다. 여해루는 일급 기루치고 역사가 짧았지만 월국 제일 미인이 루주로, 영찰어사가 뒷배,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황자 해원공을 뒷배로 두고 있는 영찰어사를 전주로 두고 있었으므로 누구도 감히 불평하지 못할 터였다.
진해는 승진의 기쁨에 승급의 기쁨까지 누리게 되어 미려를 옆에 끼고 아래층의 사람들에게 설탕 옷을 입힌 당과를 마구 뿌려 댔다. 겉은 부드럽고 쫀득하면서 속은 향긋한 과일로 싼 이 당과는 진해가 돈 버는 보람을 느끼게 해 주는 물건 중 하나였다. 술과 흥에 취한 진해는 술에 취한 사람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를 하고 춤을 추었다. 미려는 그런 진해의 옆에 착 달라붙어 진해에게 뽀뽀 세례를 받고 입으로 당과를 얻어먹고 온갖 즐거움을 다 누렸다.
근처의 기루들은 손님들을 다 뺏기게 되어 속이 쓰렸지만 앞으로 더 크게 성장할 여해루에 잘못 보였다간 좋을 게 하나 없었다. 게다가 전주가 무려 영찰어사가 아니던가. 심사관에게 잘못 보이면 등급이 내려가지만 영찰어사에게 잘못 보이면 목이 날아갔다. 한산해진 기루의 사람들은 한숨을 쉬다가 에라 모르겠다, 소리치며 그들도 다 같이 여해루로 뛰어가 버렸다.
거리 전체가 다 들썩거렸다. 오진해의 날이라 할 만큼 시끄럽고 요란스러운 축제였다. 해원공과 동십사, 그리고 삼랑이 진해의 경호 문제를 가지고 갑론을박을 벌이는 줄도 모르고 진해는 달이 하늘 높이 떠오를 때까지 즐겁게 놀고먹었다. 여해루의 술독이 다 빌 때까지 사람들과 함께 어울렸다.
그리고 달이 기울자 떠들썩하게 놀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지쳐 쓰러지기 시작했다. 여해루의 술독이 비자 기둥을 움켜잡고 여기저기 속을 비우는 사람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호부시랑은 너무 취해 하인들이 거의 들어다 모셔 갈 지경이었다. 하인들도 꽤 얻어먹어 호부시랑을 들고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힘겹게 집을 찾아갔다.
미려가 큰소리로 손뼉을 치자 그나마 제정신이 남은 사람들이 쓰러진 사람들을 수습해 여해루의 객실이나 집으로 기어들어 갔다. 미려 역시 지쳤는지 청소는 내일 하자고, 내일은 문을 닫고 하루 쉬자고 휴업령을 내려 버렸다. 미려에게 기대 중얼중얼 노래를 부르는 진해를 끌어안고.
미려는 당연하다는 듯이 진해를 안고 자신의 방으로 갔다. 술에 전 사람들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술에 취하지 않았어도 이 여해루에서는 루주인 미려가 최고였다. 미려방에서는 명목상 방주라는 인물이 있었지만 이 여해루에서는 지분을 가진 진해 외에는 미려의 말을 거역할 자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그것 외에도 미려가 진해의 동생이라는 거라든가 기타 등등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미려가 새초롬히 바라보면 웬만한 사람은 다 미려 말이 맞다고 긍정했다. 미려가 농으로 팥으로 장을 쑨다는 말을 하자 열정적인 숭배자 한 사람은 정말로 팥으로 장을 쒀 버렸다.
“형아, 잘자.”
진해를 벗길 절호의 기회건만 미려는 진해를 제 침상에 눕히고 그 옆에서 얌전히 잠만 잤다. 예전에 진해를 덮칠 뻔하다가 실패한 후로 다시는 진해가 잘 때 손을 대지 않았다. 미려방에서 자주 자고 가던 진해가 미려방에서 다시는 잠을 자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묘하게 미려와 거리를 두고 연애를 할 때마다 온 사방에 대놓고 광고를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물론 오래가진 못했지만 좋아하는 사람과 다른 이의 연애를 바라보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미려는 진해 앞에서 어린애로 보이기 싫어 되도록 어른스러운 척을 했지만 진해가 넘어오려 하지 않자 결국 작전을 바꿔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어룽거리기 시작했다. 진해의 동생 자리는 자신만이 가진 장점 중의 장점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약간의 술 냄새를 풍기면서 한참을 달게 자던 때였다. 기루와 주점이 즐비한 탐화가의 사람들도 달게 잠에 빠져든 시간이었다. 작게 코를 골던 진해가 컥 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과음을 넘어선 폭음인지라 몸이 제 몸이 아닌 듯했다.
“무, 물―”
진해는 손을 뻗어 침상 옆 협탁에 놓인 대접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들이켜는 물은 다디달았다. 진해가 퍼 주는 공짜 술에 절었지만 뼛속까지 성실한 하인들이 미리 준비해 놓은 꿀물이었다.
“푸하, 이제 좀 살겠네…….”
꿀물을 마시고 어느 정도 술이 깬 진해가 뒤늦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이 어디 있는지 확인하는 모양이었다. 화려하지만 섬세한 방의 꾸밈새, 화려하고 풍성한 양인의 향취. 안 봐도 누구 방인지는 뻔했다. 기다란 속눈썹을 늘어뜨리고 새근새근 잠을 자는 미인은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었다.
“아이고, 귀여워라. 자는 게 꼭 아기 염소 같구나.”
아기 염소치고는 지나치게 요염하고 고혹적이었지만 진해 눈에는 앙증맞고 귀엽기 그지없었다. 미려는 잠투정을 하는지 “으응…….” 소리를 냈고 진해는 하얀 뺨에 저도 모르게 입을 맞췄다. 술에 취해 이성이 무뎌져서 생긴 일이었다. 술에 취해 저도 모르게 어린 시절처럼 미려의 뺨에 입술을 비볐다. 사랑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미려는 아직도 진해의 소중한 사람이었다.
“휴, 속이 안 풀리는 거 같은데 조금만 걸을까.”
술독에 들어가다시피 한 사람치고는 엄청나게 빨리 술이 깼지만 진해는 아직 술이 덜 깼다고 생각했다. 진해는 본인은 모르지만, 진해가 남들보다 술이 빨리 깨고 잔병치레가 덜한 것은 진해의 우부 가문인 장강 강가가 선천적인 무골인 것과 진해가 우부의 배 속에 있을 당시 진해의 좌부가 어렵게 구한 영약을 우부에게 먹였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진해는 술에 취해 담요나 모포 등을 덮고 복도 여기저기에 뒤엉켜 자는 사람들을 피해 조심스레 층계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낯익은 호위 한 사람이 배를 내놓고 자고 있자 킥킥 웃으면서 나뒹구는 천 쪼가리를 주워 덮어 주고 양손을 그 위에 가지런히 놓아 주었다.
“달 좋다~”
인적이 드물었지만 탐화가의 불빛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불이 꺼지면 가게의 재물신이 가 버린다는 미신 탓에 상점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등불 하나, 혹은 두셋 정도는 켜 놓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늘은 달이 이상할 정도로 크고 밝게 떠 있었다. 저렇게 높이 떠 있는데도 커다란 걸 보니 아무래도 오늘이 보름이었나 보다.
처음에는 주변을 둘러보려 했던 진해는 마음을 바꾸어 허위허위 걸어가기 시작했다. 밝은 달을 보자 희미하게 뭔가가 떠올랐던 탓이었다. 그것은 진해가 아주 어릴 적, 몇 살인지도 기억나지 않을 때의 일이었다. 진해가 우부와 함께 있던 때의 일이었다.
‘아빠…….’
자다가 눈을 뜬 진해는 코가 시렸다. 고개를 들어 보니 그를 안고 있는 우부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에는 지금처럼 커다란 달이 떠 있었다. 추피동인지, 잠춘동인지, 혹은 다른 곳의 골목인지 모를 곳에서 진해의 우부는 장포를 벗어 어린 진해를 감싸 안고 있는 중이었다.
‘왜 그러니?’
어린 진해가 부르자 얼굴이 희미한 우부가 그를 내려다보았다. 진해는 우부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지만 우부가 크게 슬퍼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미려가 없는 걸 보아 미려와 만나기 전이었는지도 몰랐다. 미려를 맡기 전이라 정처 없이 떠도는 중이었고, 그날 머물 곳을 찾지 못해 진해를 안고 밤을 새우던 중이었는지도 몰랐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춥니? 미안해. 아빠가 좀 더 안아 줄게.’
포근한 품 탓에 춥지는 않았지만 우부가 슬퍼하는 게 슬펐다. 하지만 어린 진해가 그 말을 꺼내면 우부는 더욱 슬퍼할 것 같았다. 그래서 진해는 대답하는 대신 팔을 뻗어 우부의 목에 매달렸다.
‘이러면 더 따뜻해요.’
우부가 울지 않길 바라면서 어두운 골목에서 그를 꼭 끌어안았었다. 그랬던 진해가 지금은 어사 나리였다. 집도 없이 떠돌던 가난뱅이가 지금은 황제 폐하를 알현하고 육품을 하사받은 당당한 관리가 되었다. 지금이라면 우부가 춥지 않게 좋은 집을 사 줄 수 있었다. 이사가 싫다면 잠춘동 집을 개축할 수도 있었고, 두터운 비단옷에 솜이 든 이불, 좋은 숯이 이글거리는 화로를 선물할 수도 있었다.
“아빠, 나 이제 성공했어…….”
우부를 생각하면서 걸었던 탓일까. 진해는 어느새 잠춘동 집 앞에 와 있었다. 엄청나게 오랜만에 오는 집이었는데 헷갈리지도 않고 정확하게 찾아왔다. 아마 진해가 이곳을 떠나 죽는 순간까지도 잊지 못할 집이었다. 진해는 집 앞에 서서 달빛에 윤이 나는 지붕을 바라보았다.
새삼스레 몸에 걸친 비단 관복이 신경 쓰였다. 뭔가 굉장한 걸 이루었는데 속은 텅 빈 듯 공허하기만 했다. 진해는 청승맞은 기운을 떨치고 애써 밝게 웃음 지으려 했다. 이때까지 그랬던 것처럼, 남들이 그렇게 여기는 것처럼 밝고 흥겨운 잠춘동의 만재 오진해로 돌아오려고 했다.
‘진해야, 정신 차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너한테 매달린 음인이 무려 둘이나 돼! 하나는 그냥 예쁘고, 하나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예쁘긴 해! 월국 제일 미인도 네가 좋아 죽는데 왜 이렇게 청승을 떨고 있어! 세상에 아빠 없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나 입 밖으로 새어 나는 건 술내 나는 한숨뿐이었다. 진해는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멍하니 대문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 문에서 누군가 진해를 반겨 줄 듯이, 따스하게 진해를 안아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갈 듯이.
그러던 그때,
[뾰로롱~ 뾰롱뾰롱~]
어디서 기묘한 소리가 들렸다. 근 이십 년가량을 잠춘동에 산 진해도 처음 듣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 소리는 무려 공중에서 들리고 있었다. 진해는 주변을 휘휘 둘러보다가 어깨를 가볍게 내리누르는 감각에 화들짝 어깨를 바라보았다.
[뾰롱! 뾰롱!]
“뭐야 이건?!”
놀랍게도 진해의 어깨에 앉아 있는 건 분홍빛과 붉은빛의 중간쯤에 위치한 색을 가진 새였다. 크기는 진해의 주먹만 했는데 눈은 흑요석과 같이 반질반질하고 새카맸다. 전반적으로 상당히 귀여운 모양새의 조류였다.
[뾰로롱~]
게다가 동네 똥개 뺨치게 애교가 있는 새였다. 새는 진해가 저를 보고 경악하든지 말든지 눈을 휘며 진해의 뺨에 제 부리를 비볐다.
“하, 이놈의 인기! 이젠 새 새끼마저 나를 쫓아다니는구나!”
진해는 새가 노래를 부르며 친근하게 굴자 우울했던 기분이 금세 나아지는 걸 느꼈다. 새삼스레 자신의 위험한 매력을 자각했다. 하긴 추피동 깡패 두목도 홀랑 반하게 만든 자신이었다. 황자마마가 구혼을 할 정도로 잘난 몸이었다! 미려가 따라다닐 정도로 잘생기기도 했다!
“아유, 요 귀여운 녀석! 어디서 이런 게 왔지? 근방에 이런 녀석이 있었던가?”
진해는 새를 손가락 위에 앉힌 채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이놈의 새는 자꾸 진해의 가슴팍과 목 부근에만 머무르려 했다. 진해의 표정이 묘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 새는 진해의 얼굴보다 몸 쪽이 더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음―”
“홍련(紅連)아, 홍련아.”
몸을 노리는 새에게 음탕하다고 한바탕 훈계를 하려는 그때, 어디선가 진중하면서도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새는 목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갸웃거렸고 목소리가 몇 번 더 부름을 반복하자 진해의 목 부근을 아쉬운 듯 바라보더니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밝은 달을 등지고 자그맣고 귀엽지만 음탕한 새에게 손을 뻗고 있었다. 키는 해산 도련님과 비슷했고, 허리는 삼랑이보다 탄탄하고 굵어 보였다. 풍기는 향은……, 진해가 업어 키운 미려의 것처럼 익숙하기 짝이 없었다. 진해는 자신이 사내와 언제 만났는지를 반추했다.
하지만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도 저런 사내는 만난 적이 없었다. 만약 저런 사내를 만났다면 진해가 작업을 안 걸었을 리는 없었다. 진해는 연상에 사족을 못 써 제 아비뻘에게서도 매력을 느꼈으니까. 그러나 잠시 뒤 진해는 자신이 왜 사내를 기억 못 하는지 알게 되었다. 사내에게서 풍기는 향은 명백한 양인의 향기였다.
‘어쩐지!’
진해의 기억에서 존재할 수 있는 양인은 몇 없었다. 특히 연상 양인은 진해가 좋아하는 연상 음인을 앗아 가는 연적이었으므로 진해가 기억해서 좋을 것이 하나 없었다. 진해가 좋아하는 양인은 진해가 키운 미려와 황제 폐하 정도뿐이었다.
“우리 홍련이가 소협께 폐를 끼쳤군요.”
‘소협?’
진해는 사내에게서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월국의 도성에서 한 번도 나가 본 적 없는 진해는 이놈아, 공자님, 나리, 대인 외에 어떠한 호칭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삼랑이는 개새끼야, 창놈아 등 여러 가지 창의적인 별명으로 진해를 불렀지만 그건 모두 다 삼랑이 전용이었으므로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름이 홍련이군요, 그 음―”
“음?”
“―률이 훌륭한 새가!”
훈훈한 얼굴로 호의적인 미소를 띤 사내에게 당신의 애완조가 참으로 음탕하기 그지없다 말할 수 없어 진해는 없는 소리를 지어냈다. 새소리가 아름다운 건 사실이니 아주 거짓을 말한 건 아니었다.
“소협이 듣기 기껍다니 다행입니다. 이 아이는 제가 머무는 댁에서 기르는 새인데 산책길이 적적하여 잠시 데리고 나왔답니다.”
사내는 음탕한 홍련이를 손가락에 얹고 조용히 걸어왔다. 잠춘동 사람들은 다 곯아떨어졌는지 사방이 괴괴해 마치 사내와 진해 두 사람만이 잠춘동에 있는 듯했다. 홍련이는 진해와의 거리가 좁아지자 다시 진해의 쪽으로 날아와 진해의 가슴께를 얼쩡거렸다. 진해는 홍련이가 귀엽긴 했지만 순결한 제 살을 보이기 싫어 옷깃을 꼭 여미었다. 진해의 순결한 살을 볼 수 있는 건 진해의 아래서 엉덩이를 흔드는 예쁜이들뿐이었다. 진해는 수간을 할 생각이 없었다!
“아하~ 그렇군요. 하지만 조심해야겠어요. 이렇게 낯선 사람을 잘 따르는 새라니. 따라가 버리면 주인한테 뭐라고 말해요?”
“하하, 그건 걱정 마십시오. 그 새는 평소에는 사람이 불러도 잘 오지 않으니 말입니다. 그 새가 좋아하는 물건을 지닌 사람에게만 다가가니 잃어버릴 걱정이라고는 추호도 할 일이 없지요.”
“좋아하는 물건이요?”
“그렇습니다. 그 새는 고산국에서 온 녀석으로 홍패연리익이라는 종입니다. 주로 절벽 근처에 사는데 그 절벽에는,”
사내는 진해와 한 발짝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자신의 손가락을 내보였다. 음탕한 홍련이가 앉았던 바로 그 손가락이었다.
“으레 이 고산홍패(紅貝)가 있답니다. 고산국에서도 인적이 드문 높은 절벽에서만 볼 수 있는 귀한 산조개지요.”
“산에 조개가 산다고?!”
생전 처음 듣는 말에 진해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사내의 손가락에 껴있는 반지가 진해가 가진 물건과 상당히 흡사한 색과 질감을 갖고 있다는 점이었다. 진해는 음탕한 홍련이에게 습격당할까 두려워 꼭 여몄던 가슴팍을 풀어헤쳤다. 진해가 잠춘동 집을 비운 뒤 한시도 빼지 않고 걸고 다니던 것이 달빛에 반들반들 윤을 냈다.
“설마 이것도?”
음탕한 홍련이가 진해가 꺼낸 물건을 바라보며 기쁘게 노래했다. 홍련이의 반응을 보며 사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사내의 눈 속에 온갖 종류의 복잡한 감정이 휘몰아쳤다. 사내의 시선은 진해가 든 목걸이를 지나 그것을 든 진해의 얼굴에 내리꽂혔다.
“예, 그것 역시 고산홍패입니다.”
그리고 사내는 진해의 말에 긍정했다. 깎아지른 절벽 위에서 고산홍패를 구해 올 수 있는 사내, 금강석과 맞먹는 표면을 검기로 가공했던 사내, 가슴 속에 품고 다니던 그것을 백서가 떠나기 전에야 겨우 전할 수 있던 사내가 진해가 지닌 것이 고산홍패라 긍정했다. 자신이 자신의 반쪽에게 주었던 증표라고.
“이럴 수가! 난 그냥 주변에 굴러다니는 조약돌인 줄 알았는데!”
[뾰롱뾰롱뾰롱!]
“야, 저리 가! 지금 중요한 이야기 중이잖아, 이 음탕한 녀석이!”
[뾰로롱! 뾰로롱!!]
“이 녀석이 진짜?!”
고산홍패와 마찬가지로 홍패연리익 역시 그 무게의 열 배, 아니 백 배가 넘는 금을 줘야 겨우 손에 넣을까 말까 할 귀물이었지만 진해는 그걸 알지 못했고 자신의 목걸이에 덤벼드는 홍련이를 막기 바빴다. 홍련이는 진해의 좌부, 오천협이 낀 반지보다 붉고 아름다운 고산홍패를 보자 너무 좋아 눈이 반쯤 뒤집힌 상태였다. 오천협이 가진 반지는 오천협이 저 홍패를 구하면서 같이 주워 온 찌꺼기에 불과했다. 그러니 고산홍패를 사랑하는 홍패연리익이 진해의 목걸이에 집착하는 건 당연했다. 오천협은 진해와 홍련이가 한참 동안 씨름하는 장면을 미소를 머금은 채 바라보았다.
동시에 가슴속에서는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이 솟구쳐 올랐다. 목걸이를 쥔 진해의 손에는 온갖 굳은살과 잔상처가 빈틈없이 붙어 있었다. 무인 역시 손이 곱다고는 할 수 없지만 장강 강가의 막내 공자인 강백서는 무인치고 꽤 고운 손을 지니고 있었다. 무사히 자랐더라면 강가의 후사인 해아 역시 강백서와 비슷한 손을 지녔을지도 모른다.
“떽, 저리가!”
[뾰롱!!!]
진해가 홍련이와의 사투 끝에 목걸이를 옷 속에 쑥 집어넣자 홍련이가 무서운 눈으로 진해를 노려보았다. 진해는 강약중간약의 성질을 지녔지만 주먹만 한 새인 홍련이에게 겁을 먹을 정도로 담이 작진 않았다. 진해는 홍련이의 이마에 딱밤을 먹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먹이려 했다.
“쉬이, 홍련아 그러면 아니 된다. 소협을 다치게 하면 아니 돼.”
[뾰롱~ 뾰롱~]
진해의 혜성 같은 딱밤이 홍련이의 머리에 닿기 전 오천협의 손이 홍련이를 잽싸게 낚아챘다. 홍련이는 꽤 익숙한 일인지 오천협의 손안에서 한가하게 노래를 불렀다. 금강석 같은 고산홍패의 옆에 사는 홍패연리익은 고상홍패와 맞먹는 강도의 골격을 갖추고 있었다. 만약 진해의 손이 홍련이의 이마와 부딪쳤다면 진해의 손가락은 큰 상해를 입었을 터였다.
“버릇없는 새 새끼! 주인 얼굴이나 보고 싶네!”
진해는 오천협의 손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노래를 부르는 홍련이를 보며 잔뜩 약이 올랐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이 지닌 이것이 저 음탕한 새 새끼가 환장하는 고산홍패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고산국에서도 인적이 드문 높은 절벽에서만 산다는 신비한 산조개라는 사실이.
“어, 이상하네? 이건 내 우부가 내게 준 건데 고산국 물건이라고?”
진해는 홍련이가 다시 덤벼들까 봐 목걸이가 위치한 곳을 옷 위로 쓰다듬었다. 고산국에서도 구하기 힘든 물건이라면 월국에서는 더욱 구하기 힘든 물건인데 어째서 우부가 그걸 가지고 있었던 걸까.
“필시 소협의 좌부께서 우부께 준 걸 겁니다. 고산국에서는 고산홍패는 영원을 뜻하는 귀물입니다. 붉은색은 혼례와도 상통하여 예물로 많이 쓰이지요. 마련하는 것은 주로 구혼하는 쪽이랍니다.”
“음? 그럼 당신, 아니 어르신, 아니, 음―”
―나는 네 좌부란다.
“그저 지나가는 고산 무인입니다. 협이라 부르시지요.”
“그럼 협 아저씨로.”
“그러시지요.”
오천협은 협 아저씨라는 구수한 호칭에 피식 웃음 지어 버렸다. 그러면서 자신과 백서가 처음으로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어린 백서는 상당히 당돌한 아이였는데 자신을 보자마자 대뜸 비무를 청했고, 시원하게 진 뒤로는 죽자 사자 쫓아다니며 결투 신청을 했다. 눈앞의 아이는 그 시절의 백서를 떠올리게 했다.
지금이라도 자신이 좌부라는 걸 밝힐까. 천협은 백서와 입술 모양이 닮은 아이를 바라보며 수천 번을 망설였다. 당장이라도 자신을 밝히고 아이를 제 옆에 두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었다. 아이가 어떻게 저것을 가지고 있는지도 의문이었고, 무엇보다도 백서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백서와 해아를 찾아 헤매는 동안 천협은 나라를 덮친 역병의 참상을 똑똑히 눈에 새겼었다. 전쟁을 방불케 할 정도로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었다. 해국의 봉기를 눈감아 준 봉국들에게서 걷어 들인 재정이 없었더라면, 회순 황제가 아낌없이 그것을 풀지 않았더라면 월국은 종전이 무색하게 스스로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을 터였다.
어쩌면 아이는 숨어 있던 백서가 죽은 뒤 저것을 손에 넣었을 수도 있었다. 천협은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반반이었는데 전자는 아이라도 찾아 다행이어서였고, 후자는 하필이면 아이가 원수로 추정되는 황후 소생의 해원공과 긴밀한 사이라서 그런 거였다.
강절곤과 마찬가지로 오천협 역시 황후와 그 소생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다. 맹렬하게 달려드는 강절곤과 달리 오천협은 황후의 주변에서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동시에 그의 음인인 백서의 행방을 가장 최우선으로 하고 있었다. 죽었다면 시신이 어디 묻혀 있는지만이라도 알고 싶었다.
“우와 진짜 고산국 사람이라니! 고산국 사람들은 고산패왕의 허락이 없으면 나라 밖으로 못 나온다면서요? 진짜? 진짜예요?”
“반쯤은 그렇습니다.”
“반쯤?”
“패왕의 허락이 필요하지 않은 자들은 마음대로 나라 밖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다시 돌아올 생각이 없는 자라든가.”
오천협은 더는 패왕의 허락이 필요 없는 자였다. 오천협은 아들의 약혼 서신을 받은 후로 사부와 거의 동귀어진의 지경까지 갔었다. 사부와 오천협이 둘 다 죽을 생각이 없어 다행이었지 하마터면 고산맹 최강의 무인 둘이 동시에 사망할 뻔한 어이없는 사건이었다. 사부는 오천협의 가능성과 결과에 만족했고 하산해도 좋다고 말했었다.
“신기하다! 고산국 이야기 좀 더 해 주세요! 저 사실 옛날부터 고산국의 무인들을 좀, 아니, 많이 동경하고 있었어요! 고산국 무인들은 하나하나가 다 월국 장군들에 버금가는 강한 사람들이라고 했었거든요!”
[뾰로롱~]
“이 홍패연리익인지 뭔지 하는 새 새끼 이야기는 더 안 해 주셔도 돼 요. 아주 몹쓸 놈인 건 알았으니!”
[뾰롱!]
홍패연리익의 울음소리가 천협을 상념에서 깨워 주었다. 천협은 자신의 이야기가 궁금한지 곁에 바짝 다가붙은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니, 아이라고 하기엔 훌쩍 자라 있었다. 제 자식은 원수의 자식인 해원공과 어울릴 정도로 훌륭한 양인 사내가 되어 있었다. 해아는 강절곤의 손자이기도 했으니 그에게도 알려야 했지만 문제는 역시 해아가 해원공의 손안에 있다는 점이다.
“그럼 제 이야기를 해 드릴까요? 제가 예전에 제 남편에게 구혼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설마 아저씨도 고산홍패로?”
“예. 꽤 높은 곳에 있는 걸 공들여 가져왔지요.”
게다가 미심쩍은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해아의 곁에 붙어 있는 다른 양인, ‘그’의 얼굴을 꼭 닮은 미려하기 짝이 없는 그 양인이 해원공보다 오천협을 더 신경 쓰이게 했다.
“힘 조절 못해 다섯 개 정도를 부쉈습니다. 제 손의 반지는 그때 부순 것을 이어 만든 것이지요. 그렇게 힘들게 조각한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막상 얼굴을 보니 입이 떨어지지 않더군요. 그에 비하면 제가 쌓은 모든 것들이 다 먼지와 다름없이 여겨졌습니다.”
“이야, 중증이네.”
“하하, 그래요. 중증이었지요. 떠나는 그를 따라 맹을 뛰쳐나올 만큼 중증이었습니다. 사부께서 대노하셔 저를 잡아 오라고 사제들 몇을 보낼 정도였으니까요.”
“쫓긴 뭘 쫓아, 사부라는 사람도 참 분위기 파악 못 하네!”
서해 옥가의 무공을 전수받고, 과거 옥길합이 지녔던 금강사를 가진 자. 그자가 해아의 곁에서 해아를 형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오천협과 사투를 벌였던 그 남자의 자식이 분명한 아이가 해아의 곁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래도…… 전해 주기는 전해 주었습니다. 전장으로 떠나기 전날, 그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고백했지요.”
“응? 구혼 아니었어요?”
“전 고백이었습니다.”
“……응?”
“하필이면 고백했던 게 그의 집 정원이고, 빙부님의 방문 앞이라서 빙부님이 제 말을 그대로 들으셨더군요. 방문을 활짝 여시고는 언제 죽을지 모르니 네가 좋다면 죽어도 외롭지 않도록 당장 혼례를 치르라 하시어.”
“와우!”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던 건 처음이었습니다.”
오천협은 제 아버지들의 결혼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는 해아의 얼굴을 바라보며 당분간은 이대로 아이의 곁을 맴돌기로 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지만 일단 아이를 찾았으니 더는 상처받지 않도록 지켜 줄 셈이었다. 백서 역시 그러기를 바랄 터였다. 백서는 자신과 그의 아이를 끔찍이 사랑했으니 눈 감는 순간까지도…… 아이를 생각했을 터였다.
“우리 월국 사람들이 좀 화끈하긴 해요.”
“그렇긴 하더군요.”
“흐흐, 협 아저씨 그리 안 보이는데 엉큼하셔!”
[뾰롱~]
그 후로 오천협은 오진해와 한참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천협은 고산국에서 사부에게 시달릴 동안 해아를 만난다면 해아에게 해 줄 이야기들을 차례대로 정리해 놓곤 했었다. 예를 들면 이 아버지가 너를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라든가 , 너와 우부를 두고 갈 때 얼마나 슬펐는지라든가 , 오로지 너와 우부만을 위해 무서운 사조와의 결투에 임했다든가 , 이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네 약혼은 인정할 수 없다든가 등등.
그러나 오천협은 진해에게 품어 왔던 어떠한 이야기도 해 줄 수 없었다. 그 이야기를 하기에는 세월이 너무 많이 지나 있었다. 오천협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햇살처럼 따사로운 눈으로 진해를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진해가 술이 다 깼더라면 처음 보는 사람이 왜 날 저런 눈으로 보는지 의아해할 정도로 따스한 눈동자였다.
[뾰로롱…….]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둘의 만남은 홍패연리익이 졸음을 참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자 끝이 났다. 이 홍패연리익은 정말로 빌린 새였기 때문에 주인이 돌아오기 전에 제자리에 돌려놓아야만 했다.
“진해…… 소협.”
“응, 왜요?”
“다음에 만나거든 또다시 저와 이렇게 이야기를 나눠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니, 뭘 그런 걸 물어봐요! 당연히 되죠! 말했잖아요, 난 고산국 무인을 동경한다고! 협 아저씨처럼 멋진 무인이면 당연히 괜찮죠! 음인이었으면 뽀뽀부터 했을지도 몰라요?”
천협은 어쩐지 눈시울이 뜨뜻해지는 듯했다. 백서와 주고받았던 마지막 서신의 내용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해아가 벌써부터 음인을 밝히는데 이게 다 바람직한 본보기가 없어 그러한 것이다, 어서 당신이 돌아와서 해아에게 바른 양인의 자세를 가르쳐 주었으면 좋겠다, 우리 아버지는 약혼만 아니었으면 해아에게 백 첩을 안겨 줄 기세이다, 라는 내용을. 만약 자신이 사부와의 결투를 미루고 그때 돌아갔다면 뭔가가 달라졌을까.
“하암~ 나도 좀 졸리네. 어제 내도록 퍼마셨더니 내 몸이 내 몸이 아니야. 아, 협 아저씨. 저기가 우리 집이긴 한데 요새 저기 안 살거든요? 그래도 저 있을 때 오시면 밥이라도 한 끼 해 드릴게요. 제가 잠춘동 막내라 밥도 기가 막히게 잘합니다.”
―백서는 설거지도 제대로 못 하는 귀공자였는데.
“듣던 중 반가운 소리입니다. 소협, 그럼 다음 만남만을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부디 다치시는 곳 없이 내내 평안하시기를.”
천협은 그리고 또 그리던 핏줄을 뒤로하고 홍패연리익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그와 진해를 지켜보던 시선을 무시한 채로.
* * *
술기운이 가시자 그 자리를 잠기운이 대신했다. 달이 제법 기울어 있었다. 두어 시진만 지나면 해가 뜰 듯했다. 오천협이 사라진 뒤 진해는 하품을 하며 손바닥만 한 마당에 발을 들였다.
“문 고쳐 놨네?”
미려와 자신만이 아는 비밀 장소에서 열쇠를 꺼내 낡은 고물 자물쇠에 억지로 찔러 넣었다. 부수는 건지 따는 건지 헷갈릴 정도로 자물쇠를 휘저은 뒤에야 겨우 문을 열 수 있었다. 눈 감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익숙했는데 며칠 안 했다고 시간이 꽤 걸려 버렸다.
“후아암~”
진해가 없는 동안에도 미려가 부지런히 드나들었는지 집 안은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다. 모든 것이 미려가 진해와 살 적 그대로 놓여 있었다. 잘 말려 보송보송하고 깨끗한 이불에 몸을 누이자 오늘 일이 아득하게 멀어져 갔다. 황제를 알현하고 파격적으로 승진한 일, 진해의 목걸이를 노리는 변태 새와 중후한 무인을 알게 된 것까지 모두 다 꿈결 속으로 스며들었다.
[끼익.]
그리고 진해가 반쯤 잠이 들었던 그때, 진해와 마찬가지로 익숙하게 문을 따고 들어오는 이가 있었다. 무거운 눈꺼풀 사이로 화려한 옷자락이 엿보였다. 흰 바탕의 간소한 야장 차림임에도 미려가 입으니 선인의 날개옷처럼 섬세하고 화려한 옷이 되었다.
“형아―”
미려는 진해가 잠이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자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딘지 모르게 잔뜩 풀이 죽은 목소리였다. 듣는 진해의 가슴이 애달파질 정도로.
“형아, 날 떠나지 말아 줘. 제발 날 버리지 말아 줘…….”
나비의 날개처럼 길고 진한 속눈썹이 파르르 진동하자 사람으로서의 본능이 진해를 자극했다. 저 아름다운 눈매에 물이 맺힌다면 엄청나게 불행하고 비극적인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그런 것보다도 사람이라면 저렇게 예쁜 아이가 우는데 그냥 있어서는 아니 될 일이었다 . 진해는 눈꺼풀만큼이나 무거운 팔을 움직여 이불을 반쯤 들추었다.
“이리 와, 우리 강아지. 어서 이리 와…….”
새벽이슬을 맞은 나비처럼 힘이 빠져 있던 미려는 진해의 부름을 듣자마자 곧장 진해의 옆으로 달려왔다. 진해가 미려를 울리면 비극적인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한 것처럼 미려 역시 진해를 놓치면 세상의 끝이 올 것처럼 진해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하암, 강아지야 너도 술 적당히 해야겠다. 내가 가긴 어딜 간다고 이렇게 어리광을 부려. 이래서 장가는 어찌 갈라고 그러나. 아이구, 우리 아기 강아지.”
“…….”
“왜? 혹시 지방으로 발령이라도 날까 봐? 그럼 너도 같이 가면 되지 뭘 그래. 일도랑 총관한테 맡겨 놓고 넌 형아 따라 미려방 분점이나 세우자. 지방마다 하나씩 세워서 온 월국에 떵떵거리는 거부가 되어 보자, 이거야. 어때? 이 형아의 명안이?”
“…….”
진해가 잠기운이 섞인 목소리로 이리저리 떠들어도 미려는 진해를 안은 팔에 힘을 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흘끗 내려다보자 매끄럽고 새까만 머리칼이 제 품이 이마를 대고 있는 게 보였다. 문득 이렇게 다 큰 동생이랑 껴안고 있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여기는 진해의 집이었고, 진해의 영역이었다. 미려는 진해의 사랑스러운 강아지였고.
“오랜만에 자장자장 노래 불러 줄까?”
“……응.”
관례를 치렀는데도 응석이 가시지 못한 미려를 위해 진해는 아주 오랜만에 자장가를 불렀다. 미려가 업힌 채로 울음을 그치지 못할 때마다 강박적으로 중얼거리던 노래였다. 그랬던 것이 미려가 자라고 밤에 눈이 말똥말똥할 때마다 미려를 재우기 위해 부르는 노래로 바뀌었다. 진해는 자신이 어떻게 이 노래를 알고 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잘 자라, 잘자, 우리 강아지. 태산의 별들이 아길 돌본다~ 북쪽의 빙설국~ 동쪽의 고산국~ 서쪽의 해~국~ 봉국의 가운데는 황제님이 사네~ 황제님의 궁에는 꽃들이 많아~ 우리 아기 어서 자라 궁으로 가자~ 어여쁜 이 기다린다 우리 강아지~”
지금 봐도 참 괴상한 가사였다. 빈민가에 가까운 잠춘동에 사는 진해가 어떻게 황제님의 궁에 갈 수가 있다는 말인지. 그래도 진해가 아는 유일한 자장가였고, 미려가 진해와 공유한 추억이었다.
미려는 서서히 흐려지는 자장가를 들으며 눈을 깜박였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막상 눈앞에 닥치니 가슴이 미어져 견딜 수가 없었다. 오천협. 미려의 생부 옥길합과 사투를 벌였던 고산국의 무인. 고산맹주, 현 고산패왕의 수제자였으나 강가의 강백서를 따라 월국으로 온 사람.
해국으로 가는 수레에서 뛰어내려 월국으로 돌아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해국에서 옥길합이 직접 찾아왔다. 월국 황실에 발각당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데도 미려를 보러 그 먼 해국에서 이곳까지 찾아왔었다. 어쩐지 보자마자 자신의 아버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단정하나 핼쑥한 얼굴이 저를 보자마자 무너지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네 마음 가는 대로 하거라.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무엇이든 하려무나. 후회할 일은 만들지 말거라. 후회는 병마와 같은 것이라,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삶을 만들게 하니.’
그리고 옥길합은 미려에게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미려의 우부가 누구라는 것부터, 그가 어떻게 미려의 존재를 알게 되었는가 등등. 놀랍게도 미려의 존재를 알린 건 해국으로 날아온 서신 한 장이었다고 했다. 더 놀라운 건 서신이 고산국에 있을 오천협의 이름을 대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이는 죄가 없으니 화가 미치기 전에 데려가라.
서신의 내용은 짧지만 깊은 내용을 품고 있었다. 옥길합은 서신을 받자마자 날을 꼽았고, 자신이 미려의 우부와 마지막으로 동침하고 결했던 날과 일치함을 확인했다. 그러나 월국에 큰 역병이 돌았고 접선 장소에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옥길합은 오천협의 이름을 대도 탈 없는 자를 몇 알고 있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이가 오천협의 남편인 강백서였다.
또한 강백서에게 오천협과의 사이에서 난 양인 아이가 있다는 것도 알았다. 강백서와 함께 수배가 된 아이였고 쭉 행방불명이라는 것도. 미려는 그날 처음으로 진해에게 비밀을 품게 되었다. 옥길합의 앞에서 뚝뚝 눈물을 흘리며 진해와 헤어지고 싶지 않다고 한참을 서럽게 울었었다. 자신은 형을 좋아한다고, 진해와 평생 함께 있고 싶다고.
옥길합은 제 자식을 한번 끌어안고는 미련 없이 해국으로 돌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해국에서 서해 옥가의 가신들이 미려를 ‘모시기’ 위해 찾아왔다. 월국 황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자금을 융통하기 위해 정씨라는 가명을 만들고 미려를 양자로 입적시켰다. 미려가 원하는 바를 이루게 하는 것. 가주 옥길합의 명에 따라 미려가 진해와 함께 있도록 하기 위해 미려방을 세워 잠춘동의 실세가 되었다.
양인과 양인 사이라던가, 원수의 자식이라던가. 여러 가지 장애물이 서로를 가로막고 있는데도 세월이 지날수록 마음은 더 깊어지기만 했다. 동생의 자리마저도 잃을 수도 있다는 긴장감이 때때로 미려의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 그래도 함께 있는 동안은 행복했다. 이 사람의 곁에 있을 수 있다면 뭐가 어찌 되든 상관이 없을 것만 같았다. 진해의 비유를 빌자면 피죽만 먹어도 배가 부를 지경이었다.
“커어―”
자장가가 코골이로 변하자 미려는 마침내 진해의 품에서 조용히 떨어져 나왔다. 술 냄새가 풍기는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오천협이 진해의 좌부라는 사실을 밝히면 이제 진해의 유일한 가족 자리와 작별이었다. 미려의 보물 중 하나가 없어지는 것이었다.
“진해 형, 나는…….”
미려는 몸을 굽혀 잠이 든 진해의 입술 위에 제 입술을 포갰다. 눈을 뜬 진해는 해 주지 않을 미려 혼자만의 입맞춤이었다. 진해의 행복을 바란다면 오천협이 진해의 신분을 밝히고 데려갈 수 있도록 놓아주어야 했다. 자신의 행복을 원한다면 진해를 이대로 잠춘동의 만재로 두어야 했다.
진해는 앞으로도 미려를 동생으로 여기며 이리저리 옮겨 다닐지도 모르지만 미려는 그걸로도 만족했다. 진해의 온갖 정인들보다 아름답고 화려한 진해의 강아지로서 그의 곁에 있을 수 있다면 미려는 더는 바라는 것이 없었다. 세월이 지나고 또 지나다 보면 진해가 한 번쯤은 저를 바라봐 줄 수도 있었으니까.
결국 참지 못한 눈물이 진해의 뺨 위로 떨어졌고, 진해는 잠결에 미간을 찡그리며 뭐라고 중얼거렸다. 미려는 새벽 별이 질 때까지 끊임없이 진해의 숨소리를 듣고 있었다.
* * *
음탕한 홍련이가 복을 불러온 걸까. 진해는 다음에 협 아저씨를 만나면 홍련이의 주인을 만나게 해 달라고 청해 볼 셈이었다. 음탕한 조류이긴 했으나 복을 불러온다면 그 집요한 성정을 감내하지 못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네?! 이 집을 절 주신다구요!?”
진해는 순간 제 귀에 이상이 생긴 줄 알았다. 혹은 동십사가 제정신이 아니라거나. 그래서 진해는 뜬금없이 발을 치고 앉아 있는 동십사의 얼굴을 보려고 부산스레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활개를 쳐 댔다. 진해가 동십사를 가리고 있는 얇은 발을 걷어 내려 하자 오늘따라 단호한 기세의 노집사와 영 집사가 진해를 끌어내다시피 해서 다시 앉혀 놓았다.
“마음 같아서는 거저 주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세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시끄러울 테지. 하지만 이제 막 발걸음을 시작한 오 제에게 어찌 큰돈을 받을 수 있겠나. 그러니 자네는 당분간 나 대신 이 집을 관리하는 거로 하고 있게. 사람들 눈이 잠잠해지면 그대로 이 집에 눌러앉으면 되잖은가.”
“허어! 아니, 아니, 그럴 수는 없지요! 이 좋은 집을 어떻게 거저 받아요?”
“그리 높이 쳐주지 않아도 돼. 나 역시 이 집이 작고 낡았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 여해루에 비하면 얼마나 초라한 집인가. 화석정군께서 사셨던 걸 제하곤 아무런 유래도 없는 집일세.”
“아니, 정말 좋은 집이라니까요?”
“허어~! 그리 높이 안 쳐줘도 된다니까! 아우에게 고작 이런 낡은 집을 선물해 주는 형을 더 이상 부끄럽게 하지 말게!”
동십사는 감기라도 걸렸는지 며칠간 두문불출하다가 진해를 불러 대뜸 이 집을 가지란 소리를 했다. 이 집이란 바로 동가소택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진해가 해원공부에 가기 전에는 가장 좋은 집이라고 여겼던 저택이었다.
집안 대대로 벼슬을 해 오고 아버지가 예부상서에 형제들도 줄줄이 관직에 오른 동십사 입장에서 보면 이 집은 정말로 별것 아닐지도 몰랐다. 그러나 세간 사람들 눈으로 보면 거저 줄 수 있을 정도로 낡은 물건이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동십사가 진해를 불러 이 집을 가지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동 형님, 갑자기 집은 왜 비우시는 거예요? 제가 여기 살면 형님은 어디 사시려구요? 설마 같이?”
“흠, 흠! 그건 말일세, 그건 으흠, 말이지!”
“작은 주인님께서 회임하시어 그렇습니다, 오 대인.”
“뭣, 회임!”
그러면 그렇지! 동십사가 아무리 갑부집 아들이고 본인도 한자리하는 인물이지만 아무 이유 없이 집을 비울 리는 없었다. 게다가 아까부터 이 괴상망측한 발도 신경 쓰이던 참이었다!
“아니 세상에, 대체 얼마나 해 댔으면 혼인한 지 일 년도 안 됐는데 덜컥 애가 들어―”
“어험, 험! 어험!”
“도련님, 여기 따스한 탕입니다. 가문의 비법이 담긴 것이니 쭉 들이켜십시오. 복중의 아기씨를 생각하셔야죠.”
“어디 불편하신 곳은 없으신지요? 뭉치신 곳이라던가 답답하신 곳이 있으면 즉시 말씀하여 주십시오.”
“와, 세상에. 웬일로 집사 두 분이 다 같이 붙어 있나 싶었네.”
아무래도 이 발은 산부인 동십사를 외간 양인인 진해의 양기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쳐 놓은 듯했다. 진해는 듣도 보도 못한 고루한 관습에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또한 동십사가 어째서 집을 비우는지도 단숨에 이해해 버렸다. 두 집사가 저럴 정도니 동십사의 아버지인 동가대는 훨씬 더 아들의 상태를 걱정할 터, 아마 집을 비우고 본가로 돌아오라고 명을 내린 게 분명했다. 동십사가 노산이기도 하니 두 집사 역시 동십사에게 본가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을 것이고.
“확실히 형님이 안 계시면 이 집을 볼 사람이 없긴 하겠네요. 두 집사님이 다 따라가시면 쥐구멍에 다른 사람이 들락거릴 수도 있고.”
“흠, 뭐, 그런 셈이지.”
“에이, 뭐야~ 난 동 형이 정말 통 크게 쏘는 줄 알았잖아!”
선물은 선물이었으나 조건부 선물이었다. 아무래도 동십사는 해원공부와 비밀 통로로 이어져 있는 이 집이 걱정되어 진해에게 맡기려 하는 모양이었다. 진해라면 해원공부에 얼마든지 들락거려도 상관없었었고, 또한 이 집은 황태공 지순의 정실이 살던 집이기도 했다. 원이 될지도 모르는 진해가 살기에는 아주 적격이라 할 수 있었다.
“자네가 혼인하게 되면 그땐 정말 크게 쏘도록 함세. 아마 내 선이 아니라 아버지와 형님 아우들까지 합한 가문 차원의 선물이 되겠지만 말일세.”
“그건 또 너무 거창한데요?”
“하하, 그때가 되면 모를 일이야. 우리 동가에서 준비한 선물이 약소하고 고루하다고 불평할지도 모르지.”
“동 형이 주시는 선물 가지고는 절대 안 그래요!”
“그래, 그래. 그래서 내가 자네에게 이 집을 맡기는 거야. 해원공 마마께서도 자네를 믿고 계시니 더욱 그렇지.”
“…….”
어슴푸레한 발 너머로 보이는 동십사는 어쩐지 평소보다 부드러워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유롭고 느긋해 보이기도 했다. 제 곁의 사람이 혼인을 하고 회임을 하는 건 참으로 기묘한 기분이었다. 아방 도련님은 손님인지라 그러니 여겼는데, 호형호제하는 동십사가 회임을 하니 기분이 정말로 이상했다.
문득 자신의 우부도 저런 표정을 지었을지 궁금해졌다. 또한 해산 도련님이 저런 표정으로 자신의 배를 감싸 안는 장면이 떠올랐다. 놀랍게도 해산 도련님의 곁에 있는 건 진해 바로 자신이었다.
그리하여 동가소택은 이제 동가소택이 아니라 오 어사 대인 댁이 되었다. 진해는 약간의 고민 끝에 잠춘동 집의 살림살이를 덜어 오기로 했다. 해원공부와 이어진 이곳을 두고 다른 곳에서 잠을 잘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진해가 없는 사이에 비밀 통로로 낯선 자가 들어가 해원공부로 숨어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생각만 해도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탈정고를 먹기 전에도 온갖 사고를 당한 해산 도련님이었는데 만약 저 통로가 발각된다면 무슨 일이 또 일어날지 몰랐다.
“동 형이 없으니 내가 빠릿빠릿하게 하는 수밖에!”
게다가 해원공의 유일한 측근이라 할 수 있는 동십사가 곧 출산 휴가에 들어가게 되었다. 동십사는 산달이 될 때까지 최대한 버틸 셈인 듯했지만 노산인 아들을 바라보는 동가대의 표정이 심상찮았다. 아이에게 뭔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 원망이 해원공에게 가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사람은 사소한 일 가지고도 얼마든지 원수가 될 수 있는 존재였다.
“어이, 오진해.”
“헉, 왜, 왜 네가 여기에 있어?! 그 보따리는 또 뭐고!?”
“뭐긴 뭐야. 내 짐이지. 왜. 순결하고 깨끗한 총각인 내가 동사부의 구완에라도 따라갈 줄 알았어?”
“그러고 보니 그렇긴 하네, 전혀 안 그래 보이지만!”
“말이 좀 길다? 전혀 안 그래 보인다는 건 또 뭔데? 어? 이리 와서 자세히 좀 말해 봐.”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고―”
그러나 진해는 이사 당일 제 집 앞에 떡하니 들어선 누군가를 본 순간 자신이 동십사 걱정을 할 때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생각해 보니 동십사가 출산에 들어가게 되면 동십사가 부리던 기무위사들은 누가 지휘를 하는 걸까. 다른 이는 몰라도 삼랑은 말해도 듣지 않을 게 뻔했다. 그걸 증명하듯 떡하니 진해의 집 앞에 제 짐을 내려놓고 있었으니까.
“형아, 내가 집에서 이거 들고 왔어. 날이 추워지니까 형아 옆에 두고 불을 쬐면 좋을 것 같아서. 쉴 때는 여기다가 밤이랑 떡도 구워 먹자.”
“핫, 미려야!”
“응?”
“어?”
그리고 마침내 진해의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잠춘동 집에서 쓰던 자그마한 손화로를 안고 온 미려가 수레에서 내리는 순간 삼랑과 미려의 눈이 딱 마주쳤다.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진해는 주변의 공기가 삽시간에 얼어붙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버석하게 말랐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불꽃 하나가 튕기면 화산처럼 폭발할 아슬아슬하고도 위험한 공기가 주변을 팽팽하게 만들었다. 두 사람의 사이를 모르는 이들도 어쩐지 눈치를 살피게 하는 그런 분위기였다.
“형아.”
“응……?”
“형아 옆방은 내 거지?”
“옆, 옆방?”
“돌았나, 다 큰 동생 새끼가 뭔 옆방이야? 당연히 내 방이지.”
“외간 음인보단 다 큰 동생이 있는 게 더 낫지 않겠어?”
“아니지. 오진해 본인을 생각하면 다 큰 양인 동생보다는 물 찬 음인이 옆방에 있는 게 낫지 않겠어?”
“음란하긴.”
“앞으로 더 할 건데?”
진해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등이 흥건하게 젖어 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둘 사이가 원만해졌는지 예전처럼 보자마자 주먹질을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만약 동네 사람들이 다 보는 이 자리에서 주먹질을 했다가는 진해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될 터였다. 오 어사 나리 앞에서 음인 하나와 양인 하나가 어사 나리를 두고 주먹질을 했다는 소문이 퍼져 나간다면 앞으로의 관직 생활에도 영향이 갈 것이 분명했다.
“집사, 이리 와 봐.”
진해는 두 사람이 주먹질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동십사가 추천해 이 집의 새로 온 집사가 된 이를 불렀다. 듣자 하니 영 집사의 사촌인지 육촌인지 하는 이라고 했다.
“나는 예전부터 지내던 동쪽 별채가 편하니까 거길 내 방으로 하고 미려랑 삼랑이는 본채랑 서쪽 별채를 원하는 대로 쓰게 해 줘. 내 옆방은 창고야. 반드시, 창고야! 책이든 뭐든 꽉꽉 채워서 사람 못 사는 방으로 만들라고, 알겠지?”
“……예, 주인 나리.”
집사는 제 옆방을 반드시 창고로 만들라는 진해를 짠한 눈으로 바라보며 허리를 굽혀 보였다. 영 집사와 노집사가 진해의 명에는 절대 거역하지 말라고 일렀으므로 그는 진해의 명령에 아주 순종적이었다. 진해가 비밀 통로와 가까운 동쪽 별채를 제 방으로 하겠다고 말해도 저 둘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 자연스레 넘겨 버렸다.
그리하여 잠춘동을 벗어난 잠춘동 만재의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다. 진해는 동십사의 자문을 얻어 경호원을 데리고 다니기로 했는데 안타깝게도 그 경호란 것 역시 삼랑이가 맡게 되었다. 왜냐면 진해가 접선하는 이들마다 복통이나 두통, 요통 등을 호소하며 경호를 거절하고 천 리 밖으로 달아났기 때문이다.
“거 애들한테 시킬 일 있으면 나한테 말해. 동 사부가 애들을 나한테 맡겼거든?”
“네가 그랬지!!”
“이야, 오진해. 아니, 우리 오 어사. 많이 컸어. 언제부터 나한테 이렇게 손가락질을 하고 그랬지? 손가락 하나 정도는 없어도 밥하고 떡 치고 그러는데 문제없지?”
“…….”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응? 이 한삼랑이가, 오 어사 곁에 딱 달라붙어 있을 테니까, 어?”
“…….”
진해는 갑자기 해산 도련님이 아주 많이 보고 싶어졌다. 해산 도련님의 폭신한 가슴에 파묻혀 엉엉 울고 싶어졌다.
* * *
진해가 그리도 보고 싶어 하던 해산은 진해가 팔자에도 없는 두 집 살림에 얼굴이 반쪽이 되고 나서야 겨우 만나 볼 수 있었다. 진해는 경호를 한답시고 변소까지 따라오는 삼랑이를 피해 온갖 수를 다 써야만 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삼랑이의 정향탕에 농간을 쳐 놓는 것이었다. 음인들이 물처럼 마시는 정향탕에 배앓이약을 집어넣어 평소보다 길게 볼일을 보게 만든 것이다. 삼랑이 알면 진해의 손가락을 부숴 버릴지도 몰랐지만 마음이 통한 정인을 지척에 두고 볼 수 없는 건 사랑꾼 진해에게 너무나도 가혹한 처사였다.
“황 시위! 황 시위! 여기야!”
“응? 헛, 오 어―”
“쉿, 쉿!”
진해는 이제 알려질 대로 알려진 신분이었으므로 비밀 통로의 출입도 조심히 해야 했다. 황아무가 아닌 다른 이가 어떻게 들어왔는지 궁금해하면 일이 귀찮게 될 터였다.
“저기 마마 좀 불러 줘.”
“예?”
“이 답답한 양반아, 해원공 마마님 좀 불러 달라고!”
황아무는 떳떳하게 알현하지 않고 기둥 구석에 숨어서 속살거리는 진해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진해가 해결한 일련의 사건과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며 진해에게 자신이 알 수 없는 뭔가 큰 뜻이 있겠거니 여겼다. 해원공 마마께서 보잘것없어 보이던 진해를 곁에 두고 총애하는 이유 역시.
게다가 진해는 근래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오호와의 유일한 연결 고리였다. 오호. 즉 세살은 기생 생활을 정리하려는지 여해루에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세살에게 흠뻑 빠진 황아무에게는 잔인하기 그지없는 처사였다. 황아무는 차라리 세살이 저에게 돈이라도 요구했으면 속이 시원할 듯하였다.
“저 형님, 대신 저도 부탁이 있습니다.”
“응?”
그리하여 황아무는 진해의 부탁을 들어주는 동시에 진해에게 청을 하나 넣었다. 듣자 하니 세살은 다른 기생들과 달리 여해루의 루주인 정미려의 사람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정미려와 우애 깊은 형제인 진해라면 정미려에게 부탁해 오호를 여해루에 나오게 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 세살 공자 말입니다.”
“뭐? 세살이가 여기서 왜 나와? 황 시위 정신 차려! 당신 지금 근무 중이야!”
“제가 똑바로 근무하면 여기서 형님을 끌고 가야 하는데요……?”
“물~ 론 근무 중이지만 우리는 한 식구니까 잠깐 잡담 정도는 할 수 있지. 우리 세살이가 왜?”
“그, 그게……. 저희 집에서 완자를 빚었는데 혼자 먹기에 많은 것 같아…….”
황아무는 전에 오호가 제 유부가 만든 완자를 맛있게 먹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진해는 여해루의 기생은 연회가 아니면 다른 집 문지방을 넘지 않는다고 이야기해 주려다가 황아무의 시뻘게진 귓불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황아무 역시 몸이 달은 저와 마찬가지로 세살이를 몹시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알았어. 전해는 줄게. 근데 세살이가 갈지 안 갈지는 장담 못 해. 나도 요새 여해루에 안 가 봐서 애들이 뭐 하고 있는지 모르거든.”
“정, 정말이시죠!”
“그럼 내가 한 입 가지고 두말할까! 이 오진해는 절대 한 입 가지고 두말하지 않아!”
가끔 말을 덜거나 보태기는 해도.
“내가 미려한테 딱 말해 가지고, 세살이한테 바로 딱 전할 테니까. 알았어?”
“혀, 형님만 믿겠습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제가 바로 마마님께 아뢰겠습니다!”
황아무는 진해가 단지 말을 전해 준다고 했을 뿐인데도 화색이 만연하여 부리나케 자리로 돌아갔다. 그런데 이 답답한 놈이 한 치의 신중함도 없이 곧바로 문을 두드려 알현을 청하는 것이 아닌가. 주변 시위들이 이상하게 보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진해는 저놈을 믿은 제가 바보라며 가슴을 쳤다.
그러나 답답함도 잠시 황아무를 따라 해산이 밖으로 나왔다. 잠깐 주변을 둘러보는가 싶더니 대뜸 황아무의 따귀를 올려붙였다. 어찌나 호되게 때리는지 진해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황아무는 따귀를 맞자마자 곧바로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우매한 것. 그런 중요한 일을 어찌하여 이제야 말하는 것이냐!”
“송구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믿을 놈 하나 없군. 됐다. 아무도 따라오지 마라. 바람을 쐬려 하니 궁에서 온 전갈이 아니면 총관에게 맡겨 두도록.”
해산이 휑하니 가 버리자 황아무는 그 후로도 한참을 엎드려 있었다. 처음에 황아무를 이상하게 보던 시위들도 이제는 황아무를 동정 어린 눈으로 볼 뿐이었다. 진해 역시 황아무를 답답하게 여겼던 걸 몹시 미안하게 생각했다. 자신이 마마를 불러 달라고 하지 않았으면 황아무는 오늘도 성실하게 근무했을 터이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 발을 닦으며 편안히 하루를 마감했을 터였다.
“황 시위…….”
진해는 이제는 정말로 책임지고 황 시위가 세살이를 만나게 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오호에게 말해 돈은 자기가 줄 테니까 황 시위한테 좀 잘해 주라고 말할 작정이었다. 아니면 미려한테 말해서 오호가 황 시위네 집에 자주 밥을 먹으러 가게 시킨다던가.
“진해야.”
“우왁, 깜짝이야!”
하지만 그런 상념은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순식간에 흩어져 버렸다. 진해는 부드럽게 닿는 손길에 물벼락을 맞은 고양이처럼 펄쩍 뛰어올랐다.
“해, 해산 도련님!”
“도련님이 아니라 마마라 하지 않았느냐.”
조금 전 황아무의 뺨을 구타한 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부드러운 미소였다. 진해는 해산이 겁이 나는지 반가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에이, 모르겠다! 날 때린 것도 아니고!’
진해는 미려를 통해 오호에게 금 조각을 줄 작정을 했다. 금 조각을 보면 오호는 눈이 돌아가 황아무의 뺨에 제 입술 자국을 몇 개나 만들어 줄 터였다.
“해산 도련님~!”
“엇, 어, 진해, 이, 이 녀석!”
“보고 싶었어요, 진짜, 진짜, 많이 보고 싶었어요!”
진해는 보고 싶은 정인의 앞에서 황아무에 대한 미안함을 저 멀리 치워 버렸다. 황아무에겐 미안한 만큼 더 해 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진해는 양팔을 벌리고 해산에게 뛰어가 해산을 폭 끌어안았다. 해산의 품이 든든해 해산의 등 뒤에서 진해의 손끝이 겨우 만났다.
‘아, 이 감촉이야! 꿈에도 그리던 이 느낌!’
“그렇게 고가 많이 보고 싶었더냐?”
“당연하죠! 매일 꿈에서 가, 음, 해산 도련님을 봤는걸요! 하도 못 만나서 저한테 질리신 줄 알았어요! 오죽하면 제가 이제 손부터 잡자고 해서 그런 줄 알았다구요!”
“그럴 리가 있겠느냐.”
해산은 좆부터 잡은 게 뭐 어떠냐는, 이제부터 손을 잡자는 진해의 적나라한 교제 선언을 떠올리며 얼굴에 미미하게 열이 올랐다. 그러는 동시에 자신도 새삼 진해를 많이 그리워했다는 걸 자각했다. 진해가 제 가슴에 비벼대는 뺨의 감촉이 사무치게 그리웠다는 걸 인정했다. 오진해는 안해산이 좋아하는 이였으니까.
“내가 어찌 네게 질릴 수 있겠느냐.”
게다가, 진해는 용감하게도 삭막하고도 살벌한 어전에서 해산의 우후와 해산의 편을 들어 주었다. 예부상서 동가대도 감히 어쩌지 못하는 창명후에게 떳떳하고 당당하게 대들기까지 했다. 해산의 좌부인 황제는 창명후의 병권과 그의 공, 그리고 그를 따르는 이들을 생각해 창명후가 해산의 우후와 해산을 모욕해도 그를 처벌하는 일이 없었다. 말이 심해지면 잠깐 만류하는 게 다였다.
어릴 때는 그게 그렇게 서운할 수가 없었지만 관례를 치른 지금은 섭섭해도 이해할 수 있었다. 황제라는 자리는 마음이 아니라 머리로 움직여야 하는 자리였고, 그를 위해서는 때때로 자신을 희생하여야 한다는 것을. 동시에 좌부가 머리로 움직였기 때문에 원수의 나라 궁주인 우후와 혼인하여 제가 태어날 수 있었음을.
창명후는 해국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몇 안 되는 공신이었다. 황후를 모욕하지만 황제에겐 충성했고, 황제를 옹립한 기반이기도 했으며, 원귀비 저주 사건 때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고, 그 후 역병으로 아들과 손자를 잃은 한스러운 삶을 살아온 인물이기도 했다. 월국을 승리로 이끈 영웅이 해국 출신의 황후를 비방하다 옥에 갇히면 신료들이 어떤 반응을 할지는 안 봐도 뻔했다. 해산은 억울하지만 참고, 또 참을 수밖에 없었다.
머리로 움직이는 좌부에게 내쳐지지 않기 위해서는, 참고 또 참아야 했다.
“응? 해산 도련님. 좀 마르신 것 같아요.”
“그래?”
“식사를 거르세요? 그러면 안 되는데. 여기가 좀 빠졌잖아요. 여기도, 여기도.”
“……그렇게 말하는 건 네가 처음이구나.”
“당연하죠! 저보다 해산 도련님의 몸을 잘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
“진해야……!”
진해와 해산은 감격에 겨운 채로 서로를 껴안았다. 해산은 머릿속으로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진해의 진심 어린 눈빛을 보니 어쩐지 감동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한편 진해는 자신이 그리도 그리던 해산의 품 안에서 극락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맛보고 있었다. 대체 해원공부의 숙수는 뭐 하는 놈이기에 우리 해산 도련님을 이렇게 빼빼 말려 놓았느냐는 괘씸한 마음이 솟구쳤다. 여전히 풍만한 품이긴 했지만.
그럼 이제 임을 봤으니 뽕을 딸 시간이었다. 진해는 오랜만에 만난 해산의 품을 더욱 진하게 맛볼 셈으로 해산에게 마음에 걸리는 한 가지를 물었다.
“저기 해산 도련님. 근데 황 시위 뺨을 왜 때리셨어요? 그렇게 늦게 들어간 것도 아니었는데.”
“응? 아, 황 시위 말이냐.”
“네, 황 시위.”
“네가 뭘 약조했다고, 몰래 빠져나가야 한다고 말하길래 말을 맞췄다. 이리하면 나 혼자 널 만나러 가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 해서.”
황아무, 이 너구리 같은 놈. 진해는 황 시위가 이상한 곳에서는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간다는 정보를 기억해 두었다. 너구리 황아무는 나중에 처리하기로 하고 진해는 죄책감 한 점 없이 맑은 눈으로 해산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언제 봐도 참으로 잘나면서도 우아한 눈매였다. 귀공자의 표본이라 해도 고개가 끄덕여질 만큼.
‘과연 이 오진해의 정인이로다!’
진해의 오랜 결심이 흔들리게 할 정도로 마음이 가는 이였다. 그런 이를 앞에 두고 아랫도리가 가만히 있다면 그놈은 분명히 아랫도리에 이상이 있음이 틀림없었다!
진해는 제 가슴을 노렸던 홍련이처럼 맹렬하게, 하지만 새 새끼보다는 좀 더 사람다운 우아함을 곁들여 해산의 입에 입을 맞췄다. 살그머니 눈을 감자 해산 역시 엉겁결에 눈을 감는 걸 볼 수 있었다. 오랜만의 입맞춤은 다디달아 입술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하아…….”
이렇게 입술을 대고 있는 동안은 찰나가 영원이었고, 영원이 찰나였다. 당장 세상이 잠깐 정도는 무너져도 괜찮을 정도의 만족감. 진해를 정말로 오랜만에 감싸 안는 만족감이었다.
“……네게 말해야 할 것이 있다.”
“뭔데요?”
“…….”
“왜요? 말해 주세요. 저 여기 있어요.”
“고는,”
입술 사이로 진해의 감각이 전해진 것일까. 해산은 떨리는 눈꺼풀을 바로잡기 위해 몇 번을 깜박거렸다. 진해가 말똥말똥한 눈으로,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그윽한 눈으로 해산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저를 능욕한 괘씸한 놈이었던 진해였다. 그 후에는 조금 쓸 만한 하인이었다.
“너를 원으로 삼을 것이야. 그리고 너를 내…… 정실로 들이고 싶어.”
그러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진해는 해산에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이가 되었다. 고고한 적통 황자의 탑에 갇혀 있던 해산에게 겁도 없이 날아온 한 마리 참새 같은 이였다. 살과 살을 맞대고 함께 열락을 나누는 감각은 외로운 해산을 흠뻑 적셔 버렸다. 진해가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진해와 있을 때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망각할 정도였다.
그게 좋았다. 그 감각이 좋았다. 가시 같은 정쟁의 가운데서 꼿꼿이 버텨야 하는 황자가 아니라 한 명의 사람으로서 사람과 함께 정을 나누는 그 감각이 좋았다. 진해가 아닌 누군가가 앞으로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해 줄 수 있을까.
“너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 너와 매 순간을 지금과 같이 보내고 싶어. 말이 안 되는 건 안다. 고에겐 주어진 책무가 있고, 너 역시 감당할 수 있는 무게가 있으니.”
물론 사람의 일은 알 수 없어 해산이 다른 이와 함께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이는 진해보다 해산에게 더한 즐거움과 열락을 안겨 줄지도 몰랐다. 하지만 처음은 진해였다. 안해산을 처음으로 음인으로 만든 것도 진해였고, 처음으로 해산에게 진짜 웃음을 알게 해 준 것도 진해였고, 사랑받는 기분을 느끼게 해 준 것도 진해였다.
“하지만 지금 고의 심정은 이대로 너와 함께 비밀 통로로 들어가 다시는 나오고 싶지 않은 것이야. 너와 단둘이 다른 이의 눈을 신경 쓰지 않고 이렇게 마주 바라보고만 싶어.”
“해산 도련님…….”
해산은 이번엔 자신이 먼저 진해의 입에 입을 맞췄다. 체통과 격식에 얽매인 해산이 힘겹게 낸 용기였다.
“진짜 절 정실로 들이실 거예요? 해산 도련님은 저~ 만큼 높이 계신 황자님인데도? 전 우부도 좌부도 없는데도?”
“……나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허, 헉! 그런 말 밖에서는 하시면 안 돼요!”
진해는 누가 듣기라도 하면 해산의 스승이나 기타 등등의 목이 당장에 떨어져 나갈 듯한 위험천만한 소리를 듣자 얼른 해산의 입을 틀어막았다. 쪼는 듯한 입맞춤으로 입을 막고는 황급히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당연하게도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어쨌든, 기뻐요……. 해산 도련님이 절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시다니! 혼인까지 생각한 건 저도 정말로 오랜만이에요. 곁에서 오랫동안 지켜보기라도 하고 싶은 건 해산 도련님이 처음이고요.”
“해야…….”
“너무 기뻐서 몸이 말을 안 들을 지경이에요……. 도련님은 저한테 손을 잡자고 하는데 전 손이 아니라…….”
“……응?”
“에이, 아시면서.”
“너……!”
진해는 해산과의 감동적인 분위기를 깨기 싫었지만 해산이 저를 보며 저리 깜찍한 소리를 해 대는 바람에 가뜩이나 차오른 정욕이 더욱 크게 부풀어 올랐다. 해산이 귀엽고 사랑스러워 한입에 꿀꺽 삼켜 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해산이 입에 넣을 수 있을 정도로 사랑스럽다면 진해는 하루 종일 해산을 주머니에 넣어 다니고 하루 종일~ 그 주머니만 들여다보고 있을 터였다.
그런 해산이 저런 소리를 하니 아랫도리에 직방으로 신호가 가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세상의 모든 양인 놈들이 진해의 의견에 동의를 외칠 터였다. 양인이 아니라 음인이라도 마찬가지. 정인이 저랑만 같이 살고 싶다는데 품어 주는 것이 인지상정이 아니겠는가. 진해는 당황한 해산의 얼굴을 바라보며 쪽쪽쪽 연달아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그러면서 해산의 손을 자신의 아랫도리로 이끌었다.
“으, 으……?”
입이 닿았다 떨어질 때마다 해산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아래를 보았다가 저를 보았다가 눈동자가 격렬히 진동했다. 해산의 손은 커다래서 진해의 물건에 딱 맞았다. 손이 작은 이는 진해의 물건을 제대로 쥘 수도 없었다. 지금처럼 단단하게 성이 난 진해의 물건은 양손으로 겨우 움켜쥘 정도였다.
“예쁜아~ 어쩜 이렇게 예쁜 소리만 골라서 해? 예쁜이 부모님은 덕을 참 많이 쌓으셨어! 그러니 이렇게 예쁜 예쁜이를 낳고 이 오진해 같은 잘난 사위를 보시지!”
“예, 예뻐…….”
“응! 세상에서 제일 예뻐! 나도 우리 예쁜이랑 어디 콱 틀어박혀서 이렇게,”
“흐억?!”
“예쁜이랑 요분질만 치고 싶다니까.”
진해는 해산의 손을 사이에 둔 채 해산과 자신의 아랫도리를 밀착시킨 뒤 크게 한 번 처박았다. 해산은 손에 진해의 물건이 비벼지자 얼굴이 뻘게지다 못해 이젠 폭발할 정도가 되었다. 진해의 것을 품고 들쑤셔지던 감각이 손끝으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예민한 손끝에 단단하고 뜨거운 것이 문질러지자 해산의 머릿속에 진해와 몸을 겹치면서 만끽했던 수천 가지의 쾌락과 열락들이 동시에 몰려들었다.
해산은 저도 모르게 허벅지에 힘을 주었다.
“예쁜아, 다시 한번 말해 봐. 내가 그렇게 좋아? 나랑만 살고 싶어? 아유, 이뻐. 진짜 이뻐.”
“지, 진해…….”
“하악, 부끄러워하니까 더 예뻐! 왜 부끄러워? 응? 왜 부끄러운 건데?”
“그건 네가, 내 손에……!”
진해 역시 욕정으로 얼굴이 붉어졌지만 눈만은 짐승 저리 가라였다. 말똥말똥 수준을 넘어서 번뜩이는 눈매가 해산을 올곧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동자 그대로 해산의 입술을 잡아먹었다. 쪼는 듯한 가벼운 입맞춤이 아니라 해산의 입술을 가르고 거칠게 침입해 해산의 혀를 깔아뭉개는 거칠고 무자비한 것이었다.
입가가 찢어질 것처럼 거친 입맞춤과 함께 해산의 손에 진해의 것이 거칠게 비벼지기 시작했다. 언제 벗었는지 벌거벗은 맨살과 까슬거리는 것이 해산의 손에 고스란히 맞닿았다. 단단하고 굵은 기둥과 도톰한 경계, 살짝 젖은 끄트머리까지 가감 없이 느껴졌다. 해산은 손을 움찔거렸다가 손톱을 적시는 미지근한 액체에 놀라 어깨를 경련했다.
달콤하다 생각했던 진해의 향이 해산을 압사할 것처럼 덮쳐 왔다. 거친 숨소리가 해산의 귓전을 장악했다.
“허억, 예쁜아, 예쁜아…….”
저 민망한 예쁜이 소리가 해산을 더 당황하게 했다. 당황이 두껍게 쌓이다 못해 파도처럼 해산의 뇌리를 휩쓸었다. 무력으로나 힘으로나 진해보다 우위에 있음이 분명한데 희롱이 분명한 이 짓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었다. 손이 뜨겁다 못해 델 것만 같았다. 손뿐만 아니라 온몸이 뜨거웠다.
“아, 안 돼, 여기는 바깥인데, 바깥인데…….”
“바깥이니까, 빨리 끝내야지.”
“그런…….”
너무 뜨거워서 진해가 제 허리를 잡아당겨 샅과 샅을 바짝 붙이고는 손을 뻗어 제 허리춤으로 파고드는 것도 말리지 못했다. 방심하면 이 열기에 완전히 익어 버릴 것 같아서, 어쩌면 이미 익어 버렸는지도 몰라서 해산은 진해의 손가락이 제 둔부의 갈라진 틈으로 파고드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읏……!”
“젖었네? 바깥이라고 안 된다고 하지 않았어?”
“아아!”
진해의 물건처럼 거칠고 굵은 손가락이 젖은 틈 위를 간질거리자 해산의 피부 위로 다닥다닥 소름이 돋았다. 거친 감촉과 달리 살며시 쓸어 올리기만 했는데 등줄기로 짜릿하게 전기가 통했다. 열기로 흐려진 시야에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가 보였다. 저 멀리 해원공부의 하인들이 정성껏 가꿔 놓은 가산(假山)이며,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물보라도 볼 수 있었다.
언제든지, 누구든지, 이곳에 올 수 있었다. 나무에 등을 붙이고 진해와 교미하는 짐승처럼 샅을 맞댄 해산을 볼 수 있었다.
“앗, 아!”
손가락이 얕게 출입하는 것과 똑같은 박자로 진해의 물건이 해산의 손에 비벼졌다. 얕게, 얕게 파고들다가 깊숙이 쑥 파고들고,
“으앗!”
쑥 파고든 채로 해산이 느끼는 곳을 짓누르다가 서슴없이 빠져나가고,
“아응!”
해산은 진해를 거의 부둥켜안다시피 진해에게 매달렸다. 진해보다 더욱 뜨거운 숨을 뱉으며 정신없이 헐떡거렸다.
“아, 아앗, 아! 거긴, 아, 아아!”
“하아, 하아…….”
진해의 손가락이 점차 빨라지고 진해의 옷자락을 그러쥔 해산의 손등에 힘줄이 불거졌다.
“으긋, 으, 으으……!”
해산은 터지는 신음을 참으려 노력하며 이를 악물다가 짜릿한 열락을 참지 못해 토해 내듯 숨을 뱉었다. 삼키지 못한 타액이 해산의 입술과 입술 사이에 투명한 실을 자았다. 제 뒤에서 들리는 질척이는 소리를 인정하지 못하고 연신 도리질을 쳐 댔다.
“하으윽――――!!”
별안간 찾아온 열락처럼 절정 역시 벼락처럼 해산에게 내리꽂혔다. 해산은 눈물로 끈적거리는 눈을 한 채 진해에게 매달려 앞으로, 뒤로, 체액을 쏟아 냈다. 눈앞이 번쩍거려 해산은 자기가 누구의 옷에, 누구의 손에 뭘 싸고 있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휴, 이제 살겠네―!”
진해는 헐떡거리는 해산의 옷매무새를 바로잡은 뒤 스르륵 무너지는 걸 제대로 나무둥치에 앉혀 주었다. 예쁜 해산 도련님은 진해가 좋아하는 예쁘고 야한 목소리로 울더니 반쯤 넋이 나가 정신없이 헐떡거리기만 했다. 바깥이라 급하게 끝낸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진해는 입맛을 다시며 해산이 정신을 차리면 비밀 통로에서도 한번 해 봐야겠다며 발칙한 포부를 품었다.
* * *
그러나 세상의 모든 일이 진해의 포부대로 이루어지진 않았다 . 진해가 포부를 품은 대상인 해원공을 그 뒤로 코빼기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상한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진해의 사랑의 동아줄이기도 한 황아무 역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아니, 해원공부에 호위들이 한 사람도 남김없이 싹 사라졌다.
“뭐지. 대체 다 어디로 간 거야.”
진해는 황아무를 대신해 해산을 불러낼 이를 찾고자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진해의 품속에는 앞으로 좋은 관계를 만들어 줄 단단한 황금빛 덩어리가 들어 있었다. 해원공을 암살자에게 이끌면 천하의 죽일 놈이었지만 진해 자신은 암살자가 아니라 해원공에게 밀월을 선사해 줄 꿀벌이었다!
꿀벌이 갖다 주는 금빛은 달콤한 게 분명했고 새 동아줄 역시 이것을 마음에 들어 할 것이 분명할 것이라, 그렇게 생각했었다.
“이것 참. 동 형한테 물어보려니 노산이라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하고…….”
진해는 시무룩한 채 비밀 통로 속을 터덜터덜 걸어 돌아왔다. 돌아오면서 이번에는 삼랑이에게 뭐라고 둘러댈지 생각해 봤다. 처음에는 삼랑이와 미려의 주먹질에 사회적 체면의 사망을 감지했던 진해였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지자 물불 가리지 않게 되었다. 호위를 한답시고 달라붙는 삼랑이를 떼 놓기 위해 미려에게 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짜 보이며 옛날처럼 같이 살자는 거짓부렁을 늘어놓았던 것이다.
정조의 위기를 겪은 후로는 웬만하면 미려와 한 침상에 눕는 일을 피했던(그런데 묘하게 같이 자는 일이 많다) 진해였지만 추피동의 깡패 두목을 막기에는 진해의 고용인들이 너무나 가녀리고 연약했다. 삼랑이가 찍 침을 뱉으면 사색이 된 채 얼음처럼 굳어지기 일쑤였다. 게다가 주인인 진해의 호위를 맡는다는데 누가 감히 대항할 수 있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진해가 슬그머니 집으로 들어오자 미려가 진해의 방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삼랑이에게 들켜서는 안 되는 통로였으니 당연히 미려에게 들켜서도 아니 되었다. 진해는 좀도둑 흉내를 내며 살금살금 바닥을 기었다. 미려가 휙 뒤돌아보는 바람에 심장이 떨어질 뻔했으나 다행히 비밀 통로를 들키지는 않은 것 같았다.
“형아, 어디 갔다 왔어!”
오늘의 미려는 꽃잎처럼 연한 분홍빛 옷에 흰 자수가 놓인 옷을 입고 있었다. 자수를 어찌나 정성 들여 세심하게 놓았던지 꽃잎 사이에 구름이 몇 덩이가 떠 있는 듯했다. 헐겁게 땋아 놓은 머리채가 나풀거리는 게 퍽 사랑스러웠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아기 망아지가 천진난만하게 달려오는 모양새였다.
“우리 강아지를 깜짝 놀래 주려고 했지! 그런데 벌써 들켜 버렸네?”
“그러지 마~! 기껏 형아랑 다시 살게 되었는데 형아가 숨어 버리면 난…… 너무 외로운 기분이 든단 말이야!”
“아이구, 그랬어요? 그랬어요, 우리 예쁜 강아지! 어디 보자, 오늘도 예쁜 옷을 입었네. 형아가 우리 강아지 새 옷 만들어 줄까? 응? 이 형아가 요새 좀 잘나가잖아. 형아 보려고 사람들이 막 찾아오는데 이야 있는 집 놈들은 달라도 뭐가 다른지 올 때마다 선물을 들고 오네? 마음에 드는 거 있으면 우리 강아지 가져. 형아가 우리 강아지 줄 테니까 다~ 가져!”
“정말? 형아 최고! 역시 형아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아이구, 이 녀석! 다 큰 녀석이 이렇게 엉겨 붙고 누구한테 장가를 가려구!”
“형아한테.”
“아, 그래…….”
귀엽고 예쁜 것에는 한없이 약한 진해에게 미려는 극약과도 같은 아이였다. 미려 눈에 눈물이 맺히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웃게 해 줘야 할 것 같았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자라면서 더욱 그런 기분이 들었다. 장가를 보내지 말고 데릴사위를 들이면 어떨까, 아니 장가는 최대한 늦게 보내고 같이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면 어떨까. 이런 생각을 했었다. 빈털터리인 저와 달리 번듯한 미려의 생부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런데 강아지야, 삼랑이는 어디 갔어? 평소에는 둘이 같이 놀더니 오늘은 왜 혼자 있어?”
“같이 안 놀아!”
“또래 동무니까 친하게 지내야지. 삼랑이가 성질이 더러워서 그렇지 꽤 괜찮은 애야. 허리가 얼마나 늘씬하고 호리호리한데? 문신도 문신사의 걸작이라고 꼽힐 정도로 예쁘게 자리 잡았어. 꿈틀거릴 때 보면 아주 그냥!”
“나랑 있을 땐 나만 생각하라고 했는데…….”
“앗, 아! 다, 당연히 우리 미려랑 있을 땐 미려가 최고지~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진해가 한때는 동네 사람들 다 구경할 수 있었던 삼랑의 늘씬한 허리를 상상하는 동안 미려의 입술이 샐쭉해졌다. 입술이 삐죽거린다는 건 눈가에 이슬이 맺히기 전의 징조였다. 진해는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니던 날씬하고 탄탄한 허리의 감각을 떨쳐 버리고 황급히 미려를 어화둥둥 달래기 시작했다. 삼랑의 것 못지않은 우아한 허리를 끌어안고는 오냐오냐 문지르기 시작했다.
진해보다 손가락 두어 마디는 큰 녀석이 어린아이처럼 진해의 어깨의 뺨을 기댔다. 엄마의 보살핌을 받는 것처럼 진해의 품 안에서 한껏 향기를 즐기고 있었다. 진해의 향기는 세상 만인이 원하는 미려 자신의 것보다도 달콤하고 따뜻했다. 미려는 진해의 향을 맡을 때마다 우부의 젖을 빠는 새끼 짐승들을 떠올렸다. 영원히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영원히 둘만의 세계였으면 .
“그런데…… 진짜 삼랑이 어디 갔어? 아니, 내가 삼랑이한테 관심이 있어서 그러는 건 아니고~ 애가 보이다가 안 보이면 뭔가 껄끄럽고 신경 쓰이고, 알지? 응?”
“…….”
하지만 진해의 곁에는 언제나 날파리들이 많았다. 가장 대표적이고 끈질긴 특대 날파리가 바로 삼랑이었다. 미려와 손을 잡긴 했지만 진해가 삼랑과 같이 있는 모습이 절대로 보기 좋다는 말이 아니었다. 삼랑에게 양보한 것은 진해의 아이의 우부, 그것도 생부 자리! 진해의 정인 자리와 아이가 인정하는 우부 자리는 자신이 차지할 계획이었다.
“몰라.”
“에이, 그러지 말고~”
“정말 몰라. 오늘 아침부터 안 나왔어. 밥도 하인을 시켜 가져다 먹던걸. 고뿔이라도 걸렸는지 목이 팍 쉬어서 배고파~ 이러기나 하고.”
“엉? 삼랑이가 고뿔? 아니 그렇게 벗고 다니던 때에도 안 걸리던 고뿔이 꽁꽁 싸매고 다니는 지금 걸렸다는 말이야?”
“그래서, 아쉬워?”
“응?”
“삼랑이 그 자식이 이제 싸매고 다녀서 아쉽냐구.”
“아니, 말이 왜 또 그렇게 되는 거야~!?”
솔직히 말해서 좀 아쉬웠다. 하지만 진해는 자신이 아쉬운 티를 냈다가는 삼랑을 그나마 견제할 수 있는 미려가 미려방이나 여해루로 쌩하니 가 버릴 걸 알고 있어 티 내지 않고 열심히 미려의 새 옷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내친김에 손을 잡고 창고로 가서 이 비단 저 비단 다 대 보면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다가 정말로 진지하게 집중하는 바람에 진해는 하마터면 상으로 받은 금의 대부분을 모조리 미려의 옷값으로 써 버릴 뻔했다. 만약 궁에서 사람이 오지 않았다면 분명히 그러했을 것이다.
* * *
“오 대인, 이쪽입니다.”
“황궁에도 뒷문이 있었다니!”
“뒷문이 아니라 후문입니다. 나다니는 사람이 많아 간소히 만들어 놓은 것이지요.”
“간소하진 않은 것 같은데……?”
“자, 서두르시지요. 황상께서 오매불망 기다리고 계십니다.”
궁에서 진해를 데리러 온 것은 황제의 직속 내관이자 호밀 내관이며 수행 총관인 소산자였다. 소산자는 종자로 같은 내관 두엇을 거느리고 왔는데 세상에 이들 이름도 소씨 성에 자자 돌림이었다. 진해가 내관만 낳은 그들의 우부좌부의 태와 정에 놀라워하자 소산자가 나지막하게 웃으며 내관들은 궁에 들어오는 순간 본명을 버리고 황궁의 부속이 되는 삶을 산다고 하였다. 선임 내관이 쓰던 이름을 물려받거나, 혹은 저처럼 황제에게 이름을 하사받거나 하면서.
‘거시기가 없으면 그만큼 몸이 줄어들 줄 알았는데 황상을 모시는 내관들이라 그런지 향이 없는 것 빼고는 듬직해 보이는걸? 한 번쯤은 자 보고 싶을 정도야! 물론 해산 도련님이 있는 한 그런 일은 없지만!’
진해는 해산 도련님만큼이나 키가 크고 삼랑이보다 허리가 탄탄한 소산자를 따라가며 그가 안다면 경을 칠 만한 생각을 일삼았다. 진해는 안 그런 척 은근슬쩍 소산자의 여기저기를 관찰했는데 소산자에게 흑심이 있어서가 아니라(사실 쥐똥만큼은 있었다), 캄캄한 밤에 어둑어둑한 회랑을 조용히 걸어가자니 심심해서 주리가 틀릴 지경이라 그리했다.
‘응? 소산자 나랑 어디서 본 적이 있나? 굉장히 익숙한 기분이 드네. 어쩐지 향이 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향이 맡아지는 것 같기도 하고~?’
우뚝.
“오 대인.”
“앗, 아, 예!?”
“소인께 뭔가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요?”
생각에 너무 심취했는지 진해는 어느새 소산자의 등짝에 코를 박을 기세로 가까이 달라붙어 있었다. 소산자는 등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콧김을 참다못해 자리에서 멈춰 서서 진해에게 말을 건 참이었다.
“하하, 아니, 옷에 향이 참 근사해서, 아시다시피 제 아우가 멋에 살고 멋에 죽는, 그러니까, 하하!”
“여해루의 루주라 하셨었지요.”
“그렇지요! 아무래도 아우가 그러다 보니 형인 저도 자연히 향이나 옷에 관심이 가서 소공공이 무슨 향을 쓰셨는지 궁금해지기도 하고? 그런데 물어보기는 쑥스럽고 그래서?”
“그러셨군요. 전 딱히 옷에 향을 입히진 않지만 항상 황상의 곁에 있다 보니 황상의 향이나 혹은 저 정원의.”
소산자는 진해가 급조한 변명을 그럭저럭 믿어 주는 모양이었다. 하긴 내관에게서 향이 나는 것 같아 그랬다는 말을 누가 믿겠는가.
“금목서가 풍기는 향일 것입니다. 황상께서 근래 저 나무 아래 자주 거하시지요.”
“음~ 그러고 보니 정말 향긋하고 달콤한 냄새가 사방 천지에 진동을 하네~ 꽃송이는 작은데 이렇게 진한 향기를 풍기다니 정말 신통방통한 나무로군요!”
“월국이 세워진 역사와 나이가 같은 나무입니다. 내관들 사이에서 떠도는 이야기에 따르자면 태조께서 저 금목서와 꼭 같은 향을 지니셨다지요.”
“인기 많으셨겠네요.”
과연 소산자가 가리킨 곳에는 커다란 금목서 나무가 자리하고 있었다. 철이 되어서인지 작고 앙증맞은 꽃송이들을 나무 가득 달고 있었는데, 미풍이 불 때마다 자그마한 꽃송이에서 풍기는 것이라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진하고 달콤한 향기가 흘러넘쳤다. 진해는 이런 향기라면 옷에도 밸 수 있겠다고 납득하였다.
<『환태자사건』4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