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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전 창명후의 맹세 (5/18)

3부 전 창명후의 맹세

창명후 강절곤은 오랜만에 손님을 맞았다. 그가 후로 봉해진 뒤로 어중이떠중이가 들러붙는 바람에 손님을 거절해 온 지 오래였다. 그런 그가 친히 맞이하는 손님이니 중요한 인물인 게 당연했다. 중요한 건 둘째치고 강절곤과 친하기로는 으뜸인 이라 강절곤이 특별히 신경을 쓰는 중이었다.

오늘 창명후 저택을 방문하기로 약조한 이는 안국후 연재균. 안국후 연재균은 선황이 무리한 출정을 감행하자 현 황제를 찾아가 조정을 안정시키고 나라의 기틀을 세울 것을 읍소한 이였다. 만약 연재균이 없었다면 선황의 분을 사 뇌옥에 갇혔던 강절곤은 나오지 못했을 터이고 월국은 속수무책으로 해국에게 정복당했을 것이다. 연재균이 다른 황자에게 갔더라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흠, 나쁘지 않구만. 치균은 차에 까다로운 이라서 말이야. 오늘은 집사 자네가 같이 있어 줘야겠어. 치균도 자네를 보고 싶어 할걸?”

물론 안국후 연재균은 공적으로도 중요한 이였지만 창명후 강절곤에게는 안국후라는 거창한 작위보다 치균이라는 아명이 훨씬 더 익숙했다. 그들은 서로가 문과 무의 길로 들어서기 전부터 동무로 자라 왔기 때문이다.

“주인 나리도 참. 그것보다 이 목록이나 한번 봐 주십시오. 소인이 신경 쓴다고 썼는데 괜찮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디 어디. 오, 괜찮군. 괜찮구만! 쓸데없는 물건에 비해 광아가 좋아하는 게 적지만 구색을 맞추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이 다과, 자네가 만들었지? 광아가 자네가 만든 걸 먹으려고 서아와 싸우고도 우리 집 문가를 기웃거렸지 않은가.”

게다가 그들의 자식인 강백서와 연광 역시 부친들을 따라 세상에 다시 없을 동무가 되었다. 전쟁이 나기 전 월국이 평화롭던 시절에는 삼 황자 지순, 강가의 백서, 연가의 광을 일컬어 월국삼옥이라고 일컫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 만큼 강절곤은 연재균의 맞이에 심혈을 기울였다. 오랜만에 만나는 벗도 반가웠지만 벗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잘 알고 있으므로 더욱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연재균과 안면이 있는 이라면 누구나 그럴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본디 이 황자, 현 황제 안회순의 정실이 되기로 예정되어 있던 연광이 졸지에 측실로 굴러떨어졌으니 누가 연재균을 안타깝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차라리 같은 나라 다른 명문의 자식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억울하진 않았을 것이다. 황상이 좋다고 하는데 어찌할 것이냐며 강절곤 나름대로 힘껏 위로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연광을 밀어내고 황후의 자리를 차지한 건 다름 아닌 원수의 나라인 해국의 궁주였다. 강절곤은 전장에서 이 소식을 듣자마자 차라리 자신이 죽을 때까지 싸우겠다고 주장했으나, 그때는 이미 모든 것이 늦어 있었다.

“쯧!”

강절곤은 먼발치에서 스쳐 지나갔던 연재균의 모습을 떠올렸다. 연재균에겐 음인 자식이 둘 있었으나 이젠 연광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하나 남은 자식이 궁으로 들어가는 것도 쓸쓸한 일이거늘 연재균은 월국과 백성들을 위해 제 입으로 해국과의 혼인을 찬성하라 고하였다. 아비 된 자가 제 손으로 자식을 측실로 굴러 떨어뜨려 버렸다.

“그래도 원의 봉호를 거머쥐었으니 후사는 당연히 우리 광아가 이을 것이야. 누가 해국의 뜻대로 하게 둘까 보냐! 어림도 없는 소리! 우리 광아가 세운 공을 참작하면 이미 황후가 되고도 남고말고!”

더욱 안타까운 것은 연광 본인 역시 해국과의 종전에 큰 공을 세웠다는 점이었다. 월국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고산맹의 참전 덕분에 월국이 희망을 되찾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는데 실은 고산맹에게 해국의 침략을 알린 것이 바로 연광이었다.

황태공 지순과 연광, 강백서는 삼옥으로 불린 만큼 서로를 의식했고, 꽤 친한 사이였다. 동년배의 명문과 어울리기가 쉽지 않은 일이라 셋은 어려서부터 서로를 이름으로 부를 정도로 친하게 지내 왔다.

그리고 마침내, 해국과의 전쟁 중 태자가 선황의 시신과 함께 돌아왔다. 태자는 성문을 넘는 순간 한 맺힌 눈을 감았고 삼 황자 지순은 졸지에 황실의 유일한 음인 황자가 돼 버리고 말았다. 유유자적 풍류를 즐기던 막내 황자가 졸지에 황위에 오르게 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해국군은 진격을 멈추지 않았고 이대로라면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도성이 정복당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새 황제를 옹립한다고 해도 고스란히 빼앗길 것이 뻔했다. 그리하여 이 황자이자 양인 황자인 안회순은 연재균과 모의하여 안지순을 바깥으로 빼돌리기로 했다. 믿을 만한 이들의 손에 맡겨 안전한 곳에서 새롭게 황실을 일으켜 세우도록 계획했다. 핏줄이 끊어지지 않는다면 언젠가 다시 일어서리라는 실낱같은 희망에서였다.

본래라면 아는 사람이 없다시피 한 기밀이었지만 이 황자 안회순과 연광은 혼약한 사이었다. 연광의 형은 강백서의 형과 함께 태자를 호위하다 죽었고, 연재균에게는 연광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연재균은 저를 마중하는 연광을 보자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고 연광에게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회순 마마와 혼약했으니 응당 이곳에 남아야 마땅하겠지만, 지순 마마를 따라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네가 지순 마마께 청해 너를 데려가게 하리라.’

충직한 연재균이 처음으로 품은 사심이었다. 자식을 위한 눈물겨운 부정이었다.

‘저는 아버지와 함께 남겠습니다. 죽을 때 죽더라도 깨끗이 죽어 연가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연광은 아버지의 바람을 저버리는 동시에 아버지를 기쁘게 해 주었다. 연재균은 비장한 얼굴로 대답하는 연광을 바라보며 눈물을 쏟았고 회순에게 찾아가 아비 된 자의 마지막 부탁이니 연광과 조촐하게나마 혼례를 치러 주십사 간청하였다. 전쟁이 터지지 않았다면 본래 이뤄졌을 일이라 회순은 연재균의 청에 응하였다. 비장함이 감도는 가운데 연광은 회순과의 혼례를 위해 준비한, 하지만 완성하지 못한 혼례복을 입은 채 황궁으로 가는 가마에 올라탔다.

회순은 조촐한 혼례상을 앞에 두고 법도에 따라 붉은 천으로 얼굴을 가린 채 연광을 기다리고 있었다. 양인의 수건을 벗겨 주는 건 양인의 반려가 될 음인의 몫이었다. 그러나 그 조촐한 신방에 들어간 신랑은 연광이 아니었다. 회순의 천을 벗긴 건 본래라면 회순의 혼례와 동시에 도성을 빠져나갔어야 할 삼 황자 안지순이었다.

“우와앙~! 시러! 시러어~!”

“응? 이게 무슨 소리냐, 설마 우리 해아가 우는 것이냐!”

회상에 잠겼던 강절곤은 난데없는 아이 울음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우는 아이의 목소리가 강절곤이 목숨과 바꿔도 아쉽지 않을 손자의 목소리와 똑 닮아 있었다. 강절곤은 집사가 뭐라 할 새도 없이 부리나케 정자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바람이 부는 것처럼 빠르게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달려갔다.

“시러! 시러! 하뿌! 해아, 시러~~~!”

“해아! 뚝 그치지 못해!”

“해아, 이걸 해야 무공을 익히지. 조금만 참자? 나중에 사숙이 아버지를 만나면 해아가 잘 참았다고,”

“아앙~!! 하뿌!!! 하뿌!!!!”

“지금 이게 뭐 하는 짓들이야!!”

아니나 다를까 금쪽같은 손자 해아가 소릴 높여 통곡하고 있었다. 해아가 부르짖는 하뿌란 바로 할아버지인 강절곤을 부르는 말이었다.

“하뿌!!!”

“옳지, 옳지. 이 할애비 가 여기 왔으니 이제 다 괜찮느니.”

“하뿌~ 아바랑 사쑥이 해아 아야 했어요, 아야! 아야 시러, 시러요~!”

“뭣! 해아를 아프게 했단 말이냐!”

강절곤의 손자 해아는 강절곤을 보자마자 손을 뻗더니 냉큼 그 품에 안기었다. 해아의 아버지이자 강절곤의 아들인 강백서가 어딘지 모르게 황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버지, 해아도 이제 다섯 살이니 슬슬 무공을 익힐 준비를 해야 합니다. 다리를 자유자재로 놀리는 것이야말로 무공의 기초 아니겠어요?”

강백서는 고산맹에서 함께 수련했던 사제의 도움을 받아 해아의 다리를 ‘찢고’ 있던 중이었다. 유연한 신체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릴 때부터 이런 식으로 거듭 수련을 계속해야 했고, 강백서를 비롯한 강가의 자제들은 보통 세 살 때 이 과정을 마치곤 했다.

“됐다. 됐으니 이젠 더 하지 마라.”

“아버지?!”

“해아가 이렇게 아프다는데 뭘 더 어찌할 것이냐.”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제가 세 살 때는 아프다고 통곡을 해도 매정하게 다리를 쭉 잡아 찢던 아버지가 강백서에게 수련을 멈추라고 하고 있었다. 가랑이가 찢어지면 치료하면 된다고 말하면서 강백서의 두 눈에서 폭포수가 쏟아지게 했던 양반이 손자는 눈물 몇 방울 고였다고 수련을 금하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하뿌, 해야 아직 아야해요. 다리 찌리찌리해요.”

“아이구, 우리 해아 다리가 찌릿찌릿 하느냐? 이 할애비 가 주물러 주마. 네 아버지 참 나쁘다! 요 어린것이 아프다는데 어찌 저리 매정하게 굴 수 있느냐!”

강백서는 어이가 없다 못해 이젠 혼이 가출하는 듯했다. 옆에 있던 고산맹 출신의 사제 역시 어딘지 모르게 멍한 표정이었다. 전장에서는 호랑이 같던 강절곤이 손자인 해아 앞에서 흐물흐물하게 풀어지는 모습은 몇 번을 봐도 도저히 적응되지 않았다.

“어흠.”

“아, 연 아저씨!”

“하하, 잘들 지냈는가?”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강절곤이 맞이 준비를 하던 손님이 후원의 소동을 듣고 아예 이쪽으로 발걸음을 해 버렸다. 안국후 연재균이 후원에 모인 이들을 향해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창명후가 봤을 때보다 좀 더 마른 모습이었다.

“응? 다른 하뿌가 와써~?”

“해, 해아!”

“오, 혹시 그 애가 소문이 자자한 해아인가. 어디 보자,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로구나. 이 할애비 에게도 한번 안겨 보겠느냐?”

강백서는 손님을 향해 맹랑하게 말하는 해아를 데려가려 했으나 해아는 강백서와 사숙 쪽을 쓱 바라보더니 연재균을 향해 팔을 뻗었다. 해아는 영특한지 영악한지 알 수 없는 아이라 때때로 우부인 강백서를 매우 당황하게 하곤 했다.

“가까이서 보니 참으로 잘생긴 아이로구나. 네 할애비가 어째서 해아, 해아 노래를 부르는지 알겠어.”

“하하, 그렇지? 우리 해아가 참으로 잘생겼지?”

“하뿌도 해아가 이뻐?”

“말도 잘하는군!”

“그렇다니까, 우리 해아가 벌써 말문이 탁 트였다니까!”

해아는 강백서가 저를 데려가 또 다리를 찢을까 봐 혼신의 힘을 다해 연재균의 품에 매달려 있었다. 아비로부터 때때로 악동이라는 소리를 듣는 아이답게 연재균의 뺨에 제 뺨을 비비는 등 온갖 재롱을 떨어 두 할아버지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버렸다. 강백서는 자신이 낳았지만 어디서 저런 요물이 나왔는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사제 역시 대사형 과 칠 사형 사이에서 저런 영악한 아이가 나온 게 믿어지지 않는 눈치였다.

두 사람이 그러거나 말거나 연재균과 강절곤은 만면에 웃음이 가득한 채로 해아를 안고 채비를 마친 정자로 걸어가 버렸다. 강백서는 제게 메롱 혀를 내밀어 보이는 아들의 얄미운 모습을 바라보며 오늘도 남편에게 쓸 말이 늘어만 간다고 생각했다. 사제 역시 똑같은 말을 서신에 쓸 터였다.

* * *

“해아는요~ 해야는요~ 예삐 좋아요~, 예삐 좋아서 마니 결혼할 거예요~ 예삐랑 겨론하면 아기 많이 태어나요~! 아기 많으면 하뿌 마니 좋아해요!”

“해아! 이 할애비를 위해 벌써부터 그렇게 준비를 하는 게냐!”

강절곤은 손자의 재롱에 지나치게 감격한 나머지 눈에 눈물이 다 어리었다. 연재균은 해아가 귀엽긴 했지만 친손자가 아닌지라 강절곤만큼 크게 감명받지는 못하였다. 다만 친우인 강절곤이 하는 양이 우스워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뿐.

“그래! 우리 해아가 원하는 음인이 있다면 이 할애비가 다 데려다주마! 양인 황상이 나셨는데 양인 가주가 나지 말라는 법은 없지! 해아, 널 닮은 예쁜 아기들을 낳아 강가를 크게 번영시키거라!”

아비인 강백서가 들었다면 어린것이 벌써부터 색을 밝힌다며 웃음 섞인 혼을 냈겠지만 조부인 강백서는 해아에게 홀려 제정신이 아니었다. 고작 다섯 살 된 아이에게 벌써부터 약혼자를 골라 주겠다고 설레발을 치고 있었다.

“하하, 이걸 어쩌나. 미안하지만 해아는 예쁜이를 많이 못 만날지도 모르겠는데.”

그런데 가만히 듣고 있던 연재균이 해아의 재롱에 제동을 걸었다. 해아를 안은 채 다과를 먹이던 강절곤이 의아한 표정으로 연재균을 바라보았다. 해아를 바라보는 연재균의 얼굴엔 쓴웃음이 가득 차 있었다. 강절곤은 그 웃음을 보는 순간 연재균이 단순히 회포를 풀기 위해 자신을 찾아온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치균, 무슨 일인가. 혹시 광아, 아니 원귀비 마마께 무슨 변고라도 생긴 게야?”

“변고는 무슨……. 혼자서 고산맹까지 다녀온 간 큰 아이일세. 궁중이 깊다고 한들 그 아이의 재주라면 능히 헤쳐 나갈 수 있을 테지.”

“한데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어?”

연재균은 강절곤의 물음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쓸쓸한 표정으로 앞에 놓인 차를 들이켤 뿐이었다.

강절곤은 고산맹이라는 소리를 듣자 새삼 지나왔던 과거가 스쳐 지나갔다. 연재균이 피눈물을 흘리며 아들의 혼례를 준비했던 때를 떠올렸다. 회순과 지순, 연재균과 연광, 강절곤과 강백서를 제외한 다른 이들이 모두 순조롭게 치러진 줄 아는 혼례를.

* * *

회순의 방에 들어갔던 건 연광이 아니었다. 회순은 제 천을 걷어 올린 이를 보자 하마터면 크게 기함할 뻔했다. 그러나 고작 그 정도로 기함을 한다면 죽을 각오로 월국을 지킬 수 없었다. 회순은 도성을 빠져나가 봉국 어딘가 안전한 곳으로 몸을 숨겼어야 할 동생, 음인 황자 지순이 제 눈앞에 서 있는 걸 보고 말을 잃었다.

사실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연재균은 회순과 상의하여 지순을 다른 곳으로 피신시키기로 했으나 연광은 이 계획이 실패로 끝날 것임을 예감했다. 안지순과 스스럼없이 어울려 다니는 만큼 안지순의 사람됨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연광은 나가는 것까지는 성공하겠으나 나간 뒤가 문제라고 생각했다. 안지순은 천성이 유순하고 사람을 잘 믿었다. 그랬기 때문에 같은 음인 황자인 태자와도 아무런 마찰 없이 잘 지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좋은 사람이었지만 좋은 군주는 될 수 없을 터였다. 군주란 무릇 단호한 면이 있어야 했다.

또한 믿을 수 있는 이를 딸려 보낸다고 한들 월국에서만큼 잘 보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보필하는 이들의 수에도 한계가 있을 것이었다. 순하기만 한 황자는 봉국의 좋은 먹잇감이 될 터, 최악의 경우에는 봉국에서 지순을 잡아 가두고 지순을 범해 강제로 후사를 뽑아낼지도 몰랐다. 아버지와 혼약자인 회순이 목숨을 버려 가며 얻은 기회가 연광의 벗인 지순에게 또 다른 지옥이 될지 몰랐다.

그런 결론에 다다른 연광은 남몰래 지순을 찾아가 생각해 온 계획을 꺼냈고, 지순 역시 혼자서는 도성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사실에 동의했다. 연광의 생각대로 혼자 대업을 이룰 자신도 없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서로의 옷을 바꿔 입기로 했다. 서로의 옷을 바꿔 입고 서로가 행할 책무를 바꿔 이행하기로 결의했다.

다행히 연광과 지순의 체격이 비슷해 옷을 바꾸고 얼굴을 가리니 그럭저럭 자연스럽게 변장할 수 있었다. 서로가 옷을 바꿔 입는 장소는 황궁과 성문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화석(和晰)정군 양지서의 집으로 결정했다. 화석정군은 지순과 혼인한 이로 지아비이자 황자인 지순의 명에는 무엇이든 고분고분 따르고 있었다.

그리하여 연광과 지순은 화석정군의 도움을 받아 서로의 계획을 실행했다. 연광은 지순인 척 밖으로 빠져나가 고산맹에 유학 중인 강백서를 찾아갔다. 도중에 첩보 중이던 해국군을 만나 죽을 뻔한 적도 많았지만 천신만고 끝에 어떻게든 고산맹에 도착하였고, 강백서에게 나라의 위기를 알려 그가 오랜 유학 생활을 끝내게 했다.

그러나 연광의 진짜 뜻은 강백서의 귀국이 아니었다. 그가 원한 것은 고산맹의 강한 무력이었고, 연광은 강백서에게 유학을 끝냄과 동시에 고산맹의 도움을 구할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강백서는 연광의 청을 들어주지 못했다. 고산맹은 본디 무의 수련만을 위해서 만들어진 집단이었다. 적자생존, 유아독존의 깃 아래 무인들이 고국을 버리고 결성한 집단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월국과 봉국의 다툼에 끼어들 리 없었다.

다시 생각해도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강절곤은 고산맹이 결국 월국과 해국과의 전쟁에 끼어들었음을 알고 있었다. 고산맹에서 맹주만큼이나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 그의 아들, 강백서를 따라 맹을 나왔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강백서를 남몰래 사모하고 있던 이였다. 고산맹주의 수제자이자 첫 번째 제자로 이름을 오천협이라 했고, 강절곤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손자 해아의 좌부 되는 이였다. 그가 강백서를 따라 맹을 나오고, 서해 옥가의 가주 옥길합과 결투를 벌인 소식이 고산맹에 전해지면서 고산맹의 무인들이 본격적으로 해국과의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이 할애비는 해아가 할애비의 진짜 손자가 되어 줬으면 좋겠구나. 예삐가 태어날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예삐가 태어나면 해아가 할애비의 예삐와 함께 있어 줬으면 좋겠어. 황상도 원귀비 마마도 수려하시니 태어날 아기씨도 분명 수려할 것이야. 해아가 다른 예삐를 못 만나는 대신 이 할애비가 해아가 아기씨의 최고가 되도록 해 주마.”

과거를 회상하던 강절곤은 연재균의 말을 듣자마자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저도 모르게 입이 크게 벌어졌다. 놀랍게도 연재균은 고작 다섯 살이 된 해아에게 구혼을 하고 있는 듯했다.

“치, 치균!”

“예삐 마니 안 대?”

아무것도 모르는 해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 조부를 올려다보았다. 친우인 연재균과 인척이 되는 건 강절곤으로서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었지만 문제는 연광이 황실의 사람, 원귀비의 신분이라는 점이었다.

창명후와 안국후가 손을 잡는다면 황자를 다음 황제로 옹립하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황제는 성군이었지만 군에는 무지했고 그로 인해 창명후 강절곤이 월국의 병권을 지휘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또한 안국후는 대소 신료들의 신망을 얻고 있었으며 원수인 해국 출신의 황후는 월국의 명문들에게 외면당하고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원귀비가 낳은 아이야말로 월국의 진정한 후사라고 할 수 있었다.

거기다가 원의 봉호를 받은 비의 자식은 황후의 자식과 진배없어, 만약 원귀비 연광의 자식이 황제가 된다면 황자의 정군이 된 이는 황정군의 자리에 오를 터였다. 즉, 해아가 연광의 아이와 혼인하고 연광의 아이가 황좌에 오른다면 해아는 월국의 황정군이 된다는 소리였다.

“두 달째라는 걸 확인받고 오는 길일세. 태의가 아기씨가 아주 건강하다고 하시더군. 귀비마마께서 근래 우울해하셔 걱정하였는데 아무래도 아기씨를 회임한 탓이었나 보아.”

“허어…….”

“어떤가. 좀 이르긴 하지만 해아를 이 연재균의 손자사위로 주는 건. 자네가 해아를 귀애하는 만큼 이 늙은이도 해아에게 최선을 다해 주겠네. 서아의 아들이기도 하니 더할 것도 없겠지.”

“허어―!”

강절곤은 난데없는 청혼에 혼이 빠져나갈 듯했다. 그것도 보통 청혼이 아니라 황가의 청혼이었다. 해아가 다른 아이들보다 몇 배는 귀엽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빨리 혼담이 들어올 줄 몰랐다. 강절곤은 전장에서 결단을 내릴 때보다 눈앞이 더 흔들리는 듯하였다.

“하뿌?”

“……괜찮다, 해아. 이 할애비는 아무렇지도 않아.”

황가와 연을 맺고 황적에 이름을 올리는 건 굉장히 명예로운 일이라 망설일 것도 없었지만 강절곤은 천진난만한 손자를 앞에 두고 쉬이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자네가 굳이 이러지 않아도 나는 광아와 아기씨를 도울 것일세. 아기씨께 미흡한 점이 있더라도 나는 절대로 돌아서지 않아.”

“……알고 있네.”

왜냐면 지금 황실에서는 후사 자리를 두고 벌써부터 미묘한 알력다툼이 일어나고 있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회임한 황실의 음인을……, 두 사람이나 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태공 안지순과 황후 사마계는 경쟁이라도 하듯 동시에 배를 불리고 있었다.

“알고 있어. 하지만 나는 우리 광아가 가여워 견딜 수 없네. 황상께서는 이 늙은이에게는 분에 넘치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면서 우리 광아에게는 음인으로서의 기쁨을 내려 주시지 않아. 심지어 우리 광아보다 사마계에게 먼저 결을 하고, 먼저 아기씨를 주셨단 말일세!”

“치균……!”

“허허, 그래, 그것까지는 그렇다고 치지. 화친을 위해서니 먼저 아기씨를 주신 것까지는 그렇다고 치자 말일세! 그런데 자네 이걸 알고 있는가? 황상께서는 당신의 자식에게 황위를 물려주실 생각이 없으시다네, 허허허! 본디 당신의 것이 아니었으니, 태어날 황자들에게 조금이라도 흠이 있다면 옥좌의 원래 주인인 황태공 전하의 후사에게 황위를 물려주실 작정이란 말일세!”

“뭐, 뭐라고!”

측실이 된 광아가 가엽긴 했지만 강절곤은 이 격동의 시기에 해아를 황실에 밀어 넣는 것은 너무나 잔인한 짓이라고 생각하여 속으로 청혼을 어떻게 거절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연재균이 토해 낸 말은 강절곤이 꿈에도 상상치 못한 충격적인 것이었다.

물론 회순이 황위에 오르기 전에는 강절곤 역시 황태공이 황실의 정통이라고 생각했다. 황실에 하나밖에 남지 않은 음인이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황위에 앉아 있는 것은 회순이었다. 비록 양인의 몸이었으나 나라를 일으켜 세운 것 역시 회순이었다. 황제는 지순이 아니라 회순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연재균의 말에 의하면, 회순은 자기 자식이 아닌 안지순의 자식에게 황위를 물려줄 생각이라고 했다. 황태공의 자식이 황위를 잇는다면 황후는 둘째치고, 목숨을 걸고 고산맹에 다녀와 회순과 함께 나라를 일으켜 세운 광아는 어찌 되는 것인가. 원의 봉호를 받았으나 황후가 아니니 태후는 될 수 없었다. 본인 소생의 아이가 황위에 오르지 않는다면 더더욱 태후는 될 수 없었다.

원의 봉호를 받았으니 회순과 한 무덤에 안치되겠지만 원수의 나라 출신인 황후와 함께 남편을 나누어야 했고, 소생은 황자지만 황제가 되지는 못할 것이며, 황태공의 자식은 뒷말이 나올 것이 분명한 황자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을 터였다. 작게는 봉지를 줘 도성 밖으로 쫓아낼 것이고, 크게는 역모죄를 씌워 연씨 일가의 씨를 말려 버릴지도 모른다.

“어떻게 그리 잔인하게……!”

“황상과, 회순 마마와 광아의 혼인을 주선한 것은 나일세……. 회순 마마는 영민하신 분이라 우리 광아와 이야기가 잘 통할 것 같았지……. 광아는 황실과의 연을 부담스러워했지만 내가, 이 내가 밀어붙였어…….”

“치균…….”

“나는 우리 광아를 황후로 만들어 주지 못했으니 최소한 태후만큼이라도 되게 해 주고 싶어……. 우리 광아가 목숨을 걸고 살린 월국에서 떳떳하게 고개를 들게 하고 싶어, 뒷방에서 소리 없이 죽는 것이 아니라, 떳떳하고, 당당하게……!”

고개를 숙인 연재균의 찻잔에 비가 내렸다. 소리 없이 똑똑 떨어진 눈물이 원을 그렸다. 강절곤의 품에 안긴 해아는 연재균의 눈물에 적잖이 당황한 모양이었다. 심각한 표정의 강절곤과 울고 있는 연재균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영차 강절곤의 무릎에서 내려가 연재균의 무릎에 매달렸다.

“하뿌~ 하뿌~ 울지 마! 해아가 호호 해 줄게!”

“……해아는 정말 심성이 고운 아이로구나.”

눈가가 젖은 연재균이 해아를 안아 들자 해아는 연재균의 눈가에 호호 바람을 불었다. 다과를 먹고 있던 터라 아이의 입에선 단 냄새가 났다.

“좋네.”

그런 둘을 보고 있던 강절곤이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혼란스러운 시기였지만 혈육과도 마찬가지인 벗과 벗의 자식을 못 본 척할 수 없었다. 거기다 해아에겐 자신과 강백서, 그리고 사위인 오천협이 있었다. 오천협은 선황을 붕어하게 만든 옥길합과 호각을 이루는 강한 이었으니 일가가 힘을 합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든 해아를 지킬 수 있을 터였다.

물론 아이의 좌부인 오천협에게 일언반구 말도 없이 해아를 약혼시키는 건 미안했다. 하지만 오천협은 의과 협이 넘치는 고산맹 출신이니 자신의 결정을 이해해 줄 것이며, 천협도 백서도 젊으니 아이라면 앞으로 몇이나 더 만들 수 있었다.

“원귀비 마마께서 음인 아기씨를 생산하신다면 우리 해아를 아기씨의 정군으로 받아 주게. 아기씨가 우리 해아에게 도리만 다해 주신다면 나는 절대로 원귀비 마마와 아기씨를 배신하지 않겠네. 아니, 우리 강가는 아기씨에게 절대 충성을 맹세하겠네.”

“절곤……!”

“너무 그렇게 좋아하지 마, 이 친구야. 양인 아기씨가 태어나시면 다 없던 일이 되는 거니까.”

“고맙네, 정말 고마워…….”

그리하여 강절곤의 손자 해아는 호적에 제대로 이름이 오르기도 전에 원귀비 연광이 낳을 아기씨와 복중 혼약을 맺게 되었다. 강절곤은 오천협에게 안부 서신을 쓰는 백서에게 찾아가 이 사실을 일방적으로 통보했고, 강백서는 강절곤을 닮은 성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아버지에게 아주 오랜만에 대들었다. 내 새끼의 혼약을 왜 아버지 마음대로 하냐면서.

하지만 강백서도 내심 친우인 연광에게 마음이 쓰이던 터라 금방 기세를 꺾고 아버지의 감독하에 남편 오천협에게 최대한 부드럽고 기쁜 듯한 어조로 해아의 약혼에 대해 쓰기 시작했다. 강절곤의 눈치를 보며 아버지가 아무 이름이나 지어 해아를 호적에 올려 버리기 전에 당신이 돌아와 나와 함께 해아의 새 이름을 지었으면 좋겠다고 적기도 했다.

강절곤은 아들의 금실에 흐뭇했으나 강백서는 아버지 보기가 심히 민망하였다. 동시에 고산맹에 있는 사부를 향해 이를 가는 것을 잊지 않았다. 왜냐면 해아가 다섯 살이 되도록 아명만 가지고 있는 건 다 고산맹주인 사부가 오천협을 불러들인 뒤 월국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 다. 고산맹을 나가 월국에서 살려면 이 사부를 꺾으라고, 고산맹의 모든 무인들을 꺾고 가든가 아니면 무공을 폐하고 가라며 협박 아닌 협박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기 싫으면 차라리 백서와 사손을 불러 고산맹에서 살라고 했다. 고산맹과 묘한 경쟁 관계에 있는 서해 옥가의 가주 옥길합을 꺾었으니 맹주의 자리를 물려받을 자격이 충분하다며 맹주가 되어 새롭게 고산맹을 이끌라고 했다. 그러나 강백서는 혈육을 다 잃은 강절곤을 홀로 둘 생각이 없었고 오천협은 강백서와 떨어져 살기가 싫었다. 강백서가 회임한 걸 알아 더욱 그랬다.

그래서 오천협은 산달에 이른 강백서의 배에 입을 맞추며 반드시 사부를 꺾고 돌아오겠다고, 우리 해아에게 떳떳한 아버지가 되어 주겠다고 맹세하며 고산맹으로 돌아갔었다. 장인인 강절곤은 사위가 맹주 자리를 버리고 자신과 함께 살려고 하니 당연히 기특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후후, 네 아버지가 이걸 보면 없던 힘이 번쩍 솟겠는걸? 안아 보지도 못한 아들을 생으로 빼앗기게 생겼으니!”

“아빠? 아빠가 또 와요? 해아 아빠 여기 있는데?”

“음, 백서야. 해아의 말도 서신에 받아 적도록 하거라. 오 서방의 투지를 불태워 줄 게다.”

“사형, 창명후 대인. 그러다 대사형이 주화입마에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할아버지와 아버지, 손자 삼대가 오천협의 복장을 터뜨릴 서신을 작성하는 동안 고산맹에 서신을 전달할 사제가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제는 대사형이 겉으로는 표하지 않지만 강백서에게 홀딱 빠져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아들인 해아가 보고 싶어 주리를 트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해아가 붓을 잡고 삐뚤빼뚤 쓴 아빠라는 글자는 기름종이와 천을 이용해 젖지 않도록 따로 보관해 둘 정도였다.

사제는 해아가 해아, 겨론이라고 쓴 종이가 강백서의 안부 서신에 덧대어지는 것을 보며 고산맹에 있을 대사형에게 동정을 금치 못했다. 그러는 동시에 이번에는 어쩌면, 정말로 대사형이 사부를 이겨 버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해아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한 번, 해아가 걸음마를 걸었다는 소식에 또 한 번 사부를 위기에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사제는 강백서의 싱그러운 미소와 함께 서신을 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고산맹으로 쉬지 않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고산맹까지 갈 길이 멀었다. 사부를 이긴다 쳐도 호승심에 불타는 고산맹의 다른 무인들을 떨쳐 버리려면 족히 일 년은 걸릴지도 몰랐다.

양인 아기씨가 태어난다면 없던 일이 되겠지만 음인 아기씨가 태어난다면 오천협은 아들의 혼사에 의견도 내지 못한 채 아들을 장가보내 버리는 셈이었다. 사형이기 전에 사람으로서 동정과 연민이 샘솟았다.

* * *

그로부터 일 년 하고 얼마 지나, 마침내 오천협은 고산맹의 모든 무인들을 꺾고 당당히 고산맹을 나올 수 있었다. 쉬지 않고 말을 달려 드디어 그리운 백서와 아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활기로 가득해야 할 창명후 저택은 텅 빈 채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만 풍기고 있었다. 황망한 표정으로 창명후 저택으로 뛰어든 오천협을 맞이한 건 장강 강가의 늙은 집사 하나뿐이었다.

원귀비 저주 사건의 심리가 막바지에 이른 때였다. 강절곤은 원귀비의 아비 안국후 연재균과 막역하다는 이유로 뇌옥에 끌려가 고초를 겪고 있었다. 강백서는 관군이 어린 해아까지 뇌옥으로 끌고 가려 하자 관군을 제압하고 해아와 모습을 감춘 뒤였다.

오천협이 돌아왔다는 소문이 퍼지자 강절곤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뇌옥에서 풀려났다. 쥐고 있던 병권을 빼앗기고 직위도 해제된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처지였으나, 사위가 돌아와 기뻤고, 이젠 아들과 손자가 돌아올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강백서와 해아는 돌아오지 않았다. 원귀비 연광은 저주와 함께 사산의 죄를 물어 궁에 홀로 갇혀 죽었으며, 아비인 연재균은 연광의 사망 소식을 듣자 연광의 뒤를 따르듯 자결하였다. 오천협과 강절곤은 서로를 의지하며 해아와 강백서를 끝없이 기다렸다.

하지만 황후 소생의 황자가 두 살이 되던 해, 강절곤과 오천협은 마침내 희망을 버리고 말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버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해, 도성에 역병이 창궐했다.

흉악한 역병은 수많은 아이의 목숨을 앗아 갔다. 수많은 시신이 연고도 없이 마구잡이로 화장당했다. 강절곤은 반쯤 미친 채로 화장터를 찾아다녔으나 그곳에서도 강백서와 해아를 찾아내지 못했다. 차라리 고산맹으로 도망쳤으면 좋으련만. 오천협은 일말의 희망을 품고 고산맹으로 돌아갔으나 백서와 해아는 그곳에도 모습을 비추지 않았다.

역병이 완전히 잦아들고 구호소가 살아남은 자들을 추리기 시작할 때, 강절곤은 마침내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강절곤의 자리를 꿰찼던 이가 병사하는 바람에 다시 병권을 쥐게 되었지만, 강절곤은 이미 예전의 그가 아니게 되었다.

강절곤에겐 이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알량한 봉작과 관직, 그를 따르는 병력만이 그를 이루는 전부였다. 사위인 오천협은 제 몫의 상복을 거부하고 그대로 자취를 감춰 버렸다.

“치균, 광아, 백서, 해아.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복수해 주마. 이 늙은이가 지옥에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복수해 주마……!”

강절곤은 제 손으로 새긴 위패 앞에서 핏줄이 터지도록 눈을 부릅떴다. 강절곤은 연광의 사람됨을 알았고 저주를 쓸 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며, 하나뿐인 비이자 명문의 지지를 얻고 있는 귀비가 고꾸라지면 득을 얻을 이가 누구인지 월국의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황후 사마계.

복수의 맹세를 거듭하는 강절곤의 입가로 피가 흘러내렸다. 늙은 육신에 깃든 복수심이 화산처럼 강절곤의 목을 역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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