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태자사건
3권
차 례
* * *
2부 육등시위 오진해 (2)
3부 전 창명후의 맹세
3부 영찰어사(影察御使) 오진해
2부 육등시위 오진해 (2)
“헉.”
바위산도 박살 낼 것처럼 날카로운 눈과 마주치자 진해는 그제야 집 나갔던 이성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해산이 쿵쿵거리면서 걸어오는 것을 보자 더욱 그랬다.
“이놈!! 고에게 꽃밭을 만들겠다고 해 놓고 감히 기루를 짓고 놀아나? 고의 원이 될 놈이 감히 이딴 짓을 해!!”
그리고 해산은 추피동에서 보여 줬던 괴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한 손으로는 옷깃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진해의 가랑이를 붙잡아 번쩍 들어 올렸다. 진해는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허공에 들어 올려졌다.
“죽여 버릴 테다, 네까짓 게 뭐라고 고에게 이런 수치를 준단 말이냐!! 네놈을 죽이고, 나도―!”
“우와아악!! 마마, 잠깐만, 잠깐만요!!”
진해를 번쩍 들어 올린 해산은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창가로 달려갔다. 공중에 뜬 진해의 얼굴이 삽시간에 창백해졌다. 해산이 향하는 방향이 창인 것을 보자 두 눈이 크게 홉떠지기까지 했다.
“살려 줘, 사람 살려!! 살려 줘!!!”
해산은 이를 악문 채 진해를 창밖으로 그대로 집어 던지려 했다. 눈이 홱 돌아간 모양새가 어지간히 화가 난 듯했다. 아니 단순히 화가 난 정도가 아니었다. 해산은, 안해산은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위치와 책무를 잊지 않았고 혈통의 고귀함과 그 무게 역시 인지하고 있었다. 그 모두를 잊을 정도로 이성을 잃었다는 건 화가 난 게 아니라 반쯤 미쳤다고 해도 무방한 것이다.
“삼랑아!! 삼랑아!!!”
“쯧.”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바로 한 삼랑은 창틀을 붙잡고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는 진해를 바라보았다. 진해는 눈물 콧물 흘리면서 줄줄 울고 있었다. 마마 제 말 좀 들어 보세요와 삼랑아 도와줘라는 말 외에 다른 말은 모두 다 까먹은 것처럼 두 말만을 반복하였다.
그리고 삼랑은 아주 잠깐 오진해를 도와줄지 말지에 대해 고민했다. 화가 난 해원공이 진해를 집어 던지면 오진해는 크게 다칠 테고 해원공에 대한 모든 미련을 접게 될 터였다. 운이 좋으면 다리 병신이 된 걸 주워 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재수가 없으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했다. 삼랑이 아는 오진해는 재수가 좋은 듯 묘하게 재수가 없는 놈이었고 돈을 잘 따지만 연애 운은 극악이었다. 몸 정은 잘 쌓으면서 마음 정은 못 쌓는 웃기는 새끼였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사람은 떨어져도 좀 다치고 말 이 층 높이라도 오진해에게는 위험한 높이가 될 수 있었다. 정말로 재수가 없으면 머리부터 떨어져서 깨진 수박 꼴이 날 수도 있는 것이다. 다리 병신 오진해는 확실히 거둘 테지만 바보 오진해는 거둘 수 있을지, 없을지.
잠깐 고민을 하던 삼랑이 마음을 정리했다. 진해가 불쌍해서가 아니라 진해의 신변에 이상이 생기면 눈이 뒤집힐 누군가를 떠올려서였다.
정미려는 자신의 형들이 진해를 다치게 하자 이를 악물고 힘을 길러 열 배, 아니 백 배도 넘는 수모를 안겨 주었다. 제 형이 사 준 비파를 안고 다니던 여린 놈이 잠춘동의 두목이던 한씨 형제를 내쫓아 버린 것이다. 팔이 살짝 비틀린 정도로 그 지랄을 떨었으니 다리가 부러지면 이번에야말로 다 죽여 버리겠다고 날뛸지도 몰랐다.
“개새끼가 날뛰면 일이 복잡해지지. 아직 그놈 손을 놓긴 이르기도 하고.”
해원공의 손등에 굵은 핏줄이 불거지고 진해의 (자기 혼자) 억울한 통곡 소리가 극에 달할 무렵 삼랑은 평소에 숨겨 다니던 작은 암기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것을 진해에게 집어 던졌다.
“무슨!”
조금 전까지 진해를 집어 던지려던 해산이 진해를 품에 안고 황급히 소매를 치켜들었다. 쨍, 금속과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집무실 가득 메아리쳤다. 해산이 소매 속에 숨기고 다니는 구리 채찍과 삼랑의 암기가 부딪쳐 내는 소리였다.
“뭐 하는 짓이냐!”
해산은 진해를 꽉 끌어안고 호랑이 같은 기세를 뿜어냈다. 진해는 튕겨 나간 암기를 홉뜬 눈으로 보고 있었다. 동그래진 눈동자가 삼랑이 너마저, 라는 말을 뱉는 듯했다.
“죽이신다면서요?”
“그건…….”
“죽이신다고 해서 마마의 위사인 제가 손을 보태려 했습니다. 땅바닥에 떨어져 병신 되느니 한 방에 깔끔하게 보내 주는 것이 서방 될 뻔한 놈에 대한 예의 같기도 하고요.”
해산은 삼랑의 말에 뭐 씹은 표정이 되었다. 확실히 조금 전까진 진해를 던져 버릴 생각으로 가득했었다. 그러나 우습게도 해산은 진해가 정말로 죽을 위기에 처하자 번개처럼 움직여 진해를 제 품에 거둬들였다. 진해가 제 허리를 끌어안자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노여움이 스르륵 풀어지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건, 그건 그냥 이 녀석을 혼을 내 주기 위한 시늉이었다. 대월 황실의 피를 잇고 있는 고가 대월률이 지엄한 월국의 땅에서 어찌 사람을 함부로 해하겠느냐.”
이성을 되찾은 해산은 입에 익은 단어들로 그럴듯한 변명을 지어냈다. 삼랑은 믿는 눈치가 아니었지만.
“아, 예. 그러십니까. 소인이 그것도 모르고 큰 실수를 할 뻔했네요. 괜찮지, 오진해?”
“어, 응? 어?”
“자식, 한 번만 대답해도 될 걸 세 번이나 답하네.”
눈물을 매단 채 얼이 빠진 얼굴은 멍청해 보이기도 하고 천진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입술만은 색정적인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화가 풀리려던 해산은 삼랑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고 있던 진해를 떠올리자 또다시 속에서 욱하고 치받는 감각이 느껴졌다. 진해의 어깨를 감싼 팔에 힘이 들어갔다.
“오진해, 너.”
“네…….”
“고에게 네 말을 들어 보라고 했겠다. 어디 한번 변명해 봐라.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딴 짓을 벌인 건지.”
그리고는 진해를 거칠게 품에서 떼 놓고는 저만큼 걸어가 벽에 기댔다. 평소 같으면 상석인 의자에 앉았겠지만 삼랑과 진해가 천인공노할 짓거리를 벌인 의자에 농담으로라도 엉덩이를 걸치고 싶진 않았다. 의자에는 삼랑과 진해의 향이 듬뿍 배어 있었다.
“그게 실은, 꽃밭을 만들긴 했는데 만들고 나서 자리가 너무 광활하게 남지 뭡니까.”
“오진해.”
“……사실은 처음부터 기루를 만들 생각을 했습니다. 모란이나 작약도 좋지만 뭐니 뭐니 해도 인화초가 제일 아닙니까. 봐 둔 자리도 딱 기루가 설 자리였고, 우리 강아지도 기루를 하고 하니 이참에 규모를 늘리는 건 어떨까 싶어서 이렇게 여해루를 세우게 되었구요.”
해산이 더는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을 직감한 진해는 할 수 있는 한 솔직히 털어놓기 시작했다. 해산의 매서운 눈매 앞에서는 거짓을 말하래야 말할 수도 없었다. 앞서 말했다시피 진해의 담은 그리 큰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절대로 마마를 기만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오면서 보셨겠지만 별채를 짓는 대신 꽃밭이랑 정원을 크게 만들었구요. 놀이도 도박이 되지 않는 심심풀이로만 제공하고 있고 매춘도 지양하고 있고, 또…….”
“기루는 됐다. 어차피 네 것도 아니잖느냐. 네 아우에게 투자를 한 거로 치면 되겠지.”
해산은 진해가 주절주절 늘어놓는 말을 한마디도 빼놓지 않고 듣고 있었다. 제일 큰 문제였던 기루를 휙 넘겨 버리자 진해는 그만 말할 밑천이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열 배로 갚아 드리겠다느니, 앞으로 접대는 맡겨 두시라느니 하는 말을 할 셈이었는데 해산은 정작 기루에는 별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럼 왜 진해를 바닥에 집어 던지려 했을까.
“그것보다, 왜 한 위사가 네 방에 와 있는 게냐. 그리고 이 방에서 무슨 파렴치한 짓거리를 했던 게냐.”
“아.”
그렇게 안 보였는데 해산은 생각보다 성격이 급한 모양이었다. 기루 건을 넘기자마자 곧바로 진해에게 삼랑과의 일을 물어 왔다. 진해가 슬그머니 삼랑 쪽을 바라보자 삼랑이 머리 뒤로 팔짱을 끼고 씩 웃어 보였다. 허리춤이 묘하게 헐렁해 보였다.
“그, 그건……. 실은……. 제가 사고를 좀 친 것, 같아서…….”
“사고? 무슨 큰 사고를 쳤기에 그런 천한 짓거리를 해! 너, 평소에도 그런 식으로 사람들과 통하였느냐? 고를 똑바로 보고 말해 보거라, 평소에도 그런 식으로 했어!”
“절대로 아니에요! 절대로 안 했어요! 전 다른 건 몰라도 몸은 안 팔았어요! 제가 좀 잘하긴 하지만 몸은 절대로 안 팔았다구요!”
“호오, 그래? 그럼 고가 본 건 무엇이냐? 응? 고에게 맡아지는 이 향은 무엇이야? 응?”
“읏, 그건…….”
해산이 추궁하기 시작하자 진해는 정말로 할 말이 없어졌다. 사실만을 말했는데도 뒷덜미에 송골송골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진해는 이제야 해산공이 왜 화가 났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남편을 위한 꽃밭을 운운해 놓고 기루를 지은 것도 괘씸한데 그 기루에서 다른 음인 놈의 거시기를 빨아 줬다. 진해라도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을 것이다. 팔짝팔짝 뛰면서 저 두 놈을 내치라고 입에 거품을 물지도 몰랐다.
“뭐긴 뭡니까. 저와 오진해 놈의 평범한 교제 장면이지.”
“응……?”
“뭐?”
그런데 가만히 있던 삼랑이 솟아나는 죽순처럼 삐죽하게 튀어나왔다. 진해는 삼랑이 뭔 말을 할까 싶어 더럭 겁이 났고, 해산은 가만히 있어도 모자랄 놈이 대꾸를 하니 어이가 없었다.
“마마님의 위사가 될 때 마마님이 제게 하신 말씀, 벌써 잊으셨습니까?”
하지만 황망한 두 사람과 달리 삼랑은 태연자약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삼랑의 말을 들은 해산의 얼굴에서 서서히, 아주 서서히 표정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태연자약하다 못해 의기양양한 삼랑과는 대조적인 표정이었다.
“오진해가 제게 먼저 손을 대면 그 이후는 상관치 않겠다 하셨지요?”
“…….”
“엥? 마마, 진짜예요?”
“오진해가 진짜냐고 여쭙네요, 마마. 어서 말씀해 주세요.”
확실히 삼랑을 들일 때 그런 말을 하긴 했었다. 그러나 그때는 진해를 금방 자신의 궁으로 들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했던 말이었다.
“그리고 마마께서 오진해한테 그런 식으로 대하시면 아니 되죠. 어디 보자. 이 속도라면 삼 일인가?”
거기에 한술 더 떠 삼랑은 의미심장한 웃음과 함께 해산과 눈을 마주쳤다. 안 그래도 그 일에 촉각이 곤두선 해산은 삼랑이 그 일을 언급하자 속이 쿡쿡 쓰라려 왔다.
“그거 혹시 해국 사절 이야기야?”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진해 너 어떻게 이걸 알고 있느냐? 설마 도성에 벌써 소문이 번진 게야?”
“아니 그건 아니고 어쩌다 보니까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 그럼 그것도 아냐? 이번 사절에 말이다. 해원공 마마님께 구혼―”
“그만!”
삼랑이 반색하며 구혼이라는 단어를 꺼내자마자 해산이 날카롭게 소리쳐 삼랑의 말을 끊어 버렸다. 삼랑은 입을 다물었지만 진해의 눈은 여전히 반짝이는 채였다. 해산은 진해와 눈을 마주치자 분기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애틋함과 미안함이 채우기 시작했다. 이렇게 보니 자신이 지금 진해에게 어쩌고저쩌고할 처지가 아닌 것이다.
“해국이라면 황후마마의 친정이지요?”
“―그렇단다.”
“그럼 마마님의 외가가 되는 곳이네요. 마마님을 뵈러 오시는 거지요?”
해산은 이번에는 대답하지 못했다. 해산의 원래 계획은 진해를 원윤으로 만든 뒤 아이 하나를 안겨 원의 자리를 굳건히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그 뒤 둘이든 셋이든 힘닿는 대로 진해의 아이를 낳아 진해를 원군으로 만들어 줄 셈이었다. 아이가 영리하다면 그 아이가 자신의 후사가 되도록 최선을 다할 셈이었다.
그런데 우후(右后: 황후, 해산의 우부)께서 해국에서 자신의 정실이 될 만한 이를 추천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이가 지금 도성으로 오는 중이라고 했다. 아직 진해와의 식도 치르지 않았는데 아직 진해에게 원의 봉호를 주지도 못했는데.
해산이 입을 다물자 방 안의 다른 이들도 절로 입을 다물게 되었다. 창밖이 주홍빛 노을로 어른거렸고, 장사 준비를 시작하는 이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진해의 집무실 밖 복도에서 하인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진해가 살려 달라느니 하는 소리 때문에 신경이 쓰여 온 것이 틀림없었다. 영업 중이었다면 창틀에 매달린 진해를 보러 마당이 사람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
“나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일들 봐.”
진해는 미간을 찌푸린 해산을 흘끗 바라보다 문을 열고 서성거리는 하인들을 쫓아 보냈다. 하인들은 진해가 멀쩡히 걸어 나오자 그제야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래서 어쩌실 겁니까.”
삼랑은 퐁퐁 넘치는 향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나른한 눈매를 하고 허술해진 옷섶을 더욱 허술히 만들었다. 입은 것이 관복이라는 걸 제하면 추피동에 있을 때와 비슷한 모양새였다.
“원인지 나발인지 하는 거. 그거 처음으로 인지 받은 측실에게 내려 주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사절은 벌써 코앞까지 다가와 있고, 황후마마는 벌써 마음을 먹으신 것 같고.”
“…….”
“지금 당장 측실을 들이겠다고 해도 안 들어주시겠지요. 정군을 맞으신 후에 들여도 충분하다 하실 터. 아닙니까?”
해산은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삼랑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진해의 향이 묻은 채 나른하면서도 예리한 기세를 유지하고 있는 음인은 해산의 앞에서도 한 점의 거리낌도 없어 보였다. 해산이 지켜 준다는 명목으로 제 아래에 거둬들였지만 사실 삼랑은 해산의 도움이 없어도 제 목숨 정도는 어찌 지킬 수 있을 터였다.
삼랑을 기무위사로 들이고 싶다고 청한 건 동십사였다. 해산은 들짐승 같은 이를 자신의 위사로 삼는 게 찝찝했지만 기무위사의 일이 깨끗한 것만 있는 게 아니고, 자신의 유일한 측근이라 할 수 있는 동십사의 청이었기에 마지못해 삼랑을 기무위사로 봉해 주었다. 그러나 삼랑은 뒷배가 생기자 무시무시하게 성장하였다. 부족한 기초를 동십사가 채워 넣고 약간의 권력과 탈법을 손에 쥐여 주자 순식간에 성장해 기무위사들 중 으뜸이 되어 버렸다.
가만히 놔두면 해산이 손을 더 보태 주지 않아도 제 형들의 원수를 알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해산과 동십사가 입단속을 철저히 하고 상대 역시 꼬리를 깨끗이 잘라 내 알아내지 못한 것이었지만 알게 되는 것도 시간문제인 듯했다.
어쨌거나 삼랑은 이제 해산이 거둬 주는 것이 아니라 해산의 아래서 정당하게 자신의 몫을 다하고 당당하게 목숨을 보장받는 위치에 서 있었다. 신분이 아주 귀하거나, 혹은 신분이 아주 천한 기무위사들 사이에서 삼랑은 추피동을 휘어잡은 통솔력을 그대로 발휘하여 동십사가 공사다망하여 살펴보지 못했던 문제들까지 차근차근 해결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 우후께서는 그렇게 생각하고 계실 것이다. 하지만 사절이 도착한다고 해도 당장 혼례를 치를 수 있는 건 아니야. 부황의 인가도 받아야 하고 공신들의 의견 역시 수렴해야 한다. 그러니까…… 아직 시간이 좀 남은 셈이다.”
그런 삼랑의 앞에서 말을 돌려 봤자 소용이 없을 터였다. 삼랑은 이미 해산의 내부 사정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고, 분하게도 해산은 삼랑에게 진해가 먼저 손을 댄다면 상관하지 않겠다는 헛소리까지 뱉었었다. 그래서 삼랑이 지금 이렇게 행동한 것이다. 해산이 곤란한 처지에 처해 있는 걸 알고 먹이를 낚아채려 한 것이다.
적어도 해산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 참 나.”
그리고 삼랑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해산의 빈틈을 거침없이 파헤칠 셈인 듯했다. 아득히 높은 분인 해산의 앞에서 팔짱을 끼고 크게 코웃음을 쳤던 것이다.
“온갖 귀한 대접을 다 해 줄 것처럼 난리를 치더니. 겨우 측실?”
“너 이놈……!”
“왜요, 내 말 틀렸습니까? 아무리 뛰고 날아 봤자 측실은 측실 아닙니까. 뭐 황상의 측실쯤 되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황상이 되실지도 모르는 분의 측실이면 좀, 그렇죠?”
“황실을 우습게 보지 마라!”
“마마님이야말로 장난치지 마십시오. 마마님이야 열이든 백이든 들여놓고 잊어버리면 되지만 우리 같은 놈들은 하나 데리고 살기도 힘든 형편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오진해 저놈이 누군가의 측실로 들어갈 생각이 추호도 없다는 점이지요. 안 그러냐?”
“……응?”
문가에 숨듯이 서서 둘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진해는 삼랑과 해산이 동시에 쳐다보자 크게 몸을 떨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삼랑이 저놈은 왜 여기서 저런 소리를 다 까발리냐며 크게 원망하였다.
“진해, 저게 무슨 소리냐. 네가 측실이 될 생각이 없다니. 너는 나를 남편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했잖느냐?”
“어, 그게…….”
아무래도 오늘이 진해의 인생에서 가장 긴 날인 듯싶었다.
“높으신 분이 물어보시는데 저 소심한 놈이 잘도 싫다고 하겠습니다. 가뜩이나 몸 정에 약한 놈이.”
삼랑은 진해를 엿 먹이며 우아하게 욕을 했다. 해원공의 앞에서 창놈이란 단어를 꺼내지 않은 것도 칭찬해 줄 만했다.
“사실이냐, 한 위사가 하는 말이 모두 사실이냔 말이다.”
“으으…….”
해산의 추궁하는 말에 한마디도 대꾸할 수 없었다. 삼랑의 말에 한술 더 떠 진해는 해산으로부터 독립하려는 계획을 꾸미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식으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진해는 될 수 있으면 부드럽게, 해산이 자신과 헤어져도 생채기 하나 남지 않을 정도로 건조하고 메마른 관계가 되었을 때 자연스레 그와의 관계를 해소하고 싶었다.
“대답하지 못하는 걸 보니, 사실이로구나.”
그리고 해산은 대답하지 못하고 식은땀만 흘려 대는 진해를 바라보며 조용히 읊조렸다.
“해산 도련님, 그게 아니라요. 저는 그러니까, 그게 아니라……!”
진해는 해산에게 뭐라 변명하려 했으나 해산은 듣지 않고 희로애락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처럼 멍한 표정으로 진해를 마주 볼 뿐이었다. 진해는 어딘지 모르게 텅 빈 눈을 마주치자 가슴속이 따끔하게 저리는 것을 느꼈다. 진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 고통이었다.
결국 진해는 해산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게 아니라고, 저는 해원공 마마님을 정말로 사모하며 삼랑이가 질투를 한 것이라고, 마마님의 측실이 되는 것이 기쁘며 원이든 뭐든 아무것도 개의치 않는다고 거짓을 말하면 기뻐하며 진해를 안아 줄 텐데 진해는 해산에게 어떠한 말도 건넬 수 없었다. 또한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 해산에게 거짓을 고한다면 오진해라는 인물의 양심을 배반하는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랬군. 그랬단 말이지…….”
진해가 고개를 숙이자 해산은 헛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것을 뱉으며 얼굴을 문질렀다. 파국을 몰고 온 장본인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해산과 진해를 지켜보고 있었다. 삼랑의 성격을 생각하면 쾌재를 불러도 모자랄 상황이건만 빌어먹을 오진해의 상태가 이상했다. 삼랑은 오진해의 입에서 긍정의 말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진해는 고개만 숙이고 있을 뿐 어떤 말도 뱉지 않았다. 차라리 입에 발린 거짓말이라도 했으면 훨씬 나았을 것이다.
“가겠다.”
무겁게 늘어진 공기 사이로 해산이 살짝 쉰 목소리를 뱉었다. 집무실에 들어올 때는 잔뜩 격앙되었던 해산이 나갈 때는 식은 재같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무심하게 걸어가던 해산은 문가에 이르러 잠깐 진해의 머리꼭지를 보던가 싶더니 그대로 그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는 그대로 방을 나갔다.
“야.”
“…….”
“야!”
“……응.”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진해의 고개가 더욱 굽었다.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가 되었을 때 삼랑은 진해를 불렀고, 진해의 대답에서 익숙지 않은 뭔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씨발, 지금 뭐 하자는 짓거리야!”
삼랑은 진해에게 달리듯 걸어가 진해의 멱살을 그러쥐었다. 억지로 고개를 들게 해 바라본 곳에는 삼랑이 생전 처음 보는 것이 자리하고 있었다.
“너 해원공이랑 헤어지길 원했잖아. 절대 측실은 안 될 거라고 했잖아!”
“응, 맞아.”
“근데 왜 그런 눈깔을 하고 있어? 어! 씨발, 왜 그런 꼬라지를 하고 있냐고!”
잘은 모르지만 정미려가 오진해의 이런 꼴을 알면 가만있지는 않을 것이다. 입술을 꽉 깨물고 코를 들이켜며 눈을 벌겋게 물들이고 있는 꼴을 보게 되면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무엇이든 해 주려 할 것이다.
“아무것도.”
그리고 그런 얼굴이 억지로 웃으려고 하는 걸 보면 아마 배를 갈라 심장이라도 꺼내 주려 하겠지. 삼랑은 속이 뒤집히는 듯한 뜨끈한 감각을 느끼며 진해를 밀쳤고, 주르륵 미끄러지는 진해를 버려두고 자신도 진해의 집무실을 나가 버렸다. 어찌나 거칠게 나갔던지 진해가 애지중지하는 은촛대가 넘어져 버렸다. 좋은 밀랍으로 만든 초가 바닥에 떨어져 동강이 나 버렸다.
컴컴해지는 하늘을 기루의 불빛들이 물들이기 시작했다. 흥성거리는 소리가 커질수록 진해의 방에 스며드는 어둠은 더욱 짙어지기만 했다. 진해는 벽에 등을 기댄 채로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따끔거리는 가슴이 가라앉고, 눈가를 적신 것이 마를 때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웃을 수 있게 될 때까지 한참을 어두운 방 안에 앉아 있었다.
이젠 제법 익숙한 일이었다.
* * *
눈을 뜬 건 해가 중천에 뜬 때였다. 진해는 눈을 깜박였고 이곳이 여해루의 객실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진해의 옆에서 미려가 진해의 손에 제 손을 겹친 채 엎드려 자고 있었다. 비단처럼 매끄럽고 거미줄처럼 가느다란 것들이 미려의 등을 산만하게 덮고 있었다.
“이 녀석은 왜 이렇게 자고 있담.”
진해는 자신의 목소리가 낯설었다. 오랜만에 듣는 쇳소리였다. 왜 이렇게 목소리가 쉬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진해는 눈 한쪽을 찌푸린 채로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벌써 여러 차례 겪은 일이라 진해는 눈의 부기가 가라앉자마자 곧장 여해루를 한 바퀴 둘러봤었다.
평소와 달리 관복을 벗고 갔었던 것 같다. 짠 내가 나서 그랬는지, 심하게 구겨져서 그랬는지. 어쩌면 다시는 입을 일이 없어 그랬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진해는 관복이 아닌 평복을 입었고 약간의 문제가 생긴 놀이판에 끼어들어 자신이 직접 패를 돌렸다. 손님은 잠춘동에서도 소문난 꾼이었다. 고관의 셋째 아드님이라는데 주도면밀해서 자신이 절대 누구의 아들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고관이라는 것도 주변의 하인들이 실수로 흘린 정보였다.
잠춘동에서도 소문난 꾼인지라 여해루에서 고용한 놀이꾼이 손님에게 도리어 패를 털리고 있었다. 진해는 잠춘동에서 같이 패를 돌리던 이들을 돈을 주고 고용하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그날따라 단 한 사람도 여해루에 남아 있지 않았다. 패를 완전히 털리게 되면 다시는 이 업계에 발을 못 붙이는 것이 관례인지라 불쌍한 직원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나선 거였었다.
잠춘동은 물론이요 추피동에서도 먹히는 것이 진해의 솜씨인지라 진해는 당연히 손님의 패를 갖고 놀았고 평생 한 번도 구경해 보지 못한 놀이에 손님은 엄청나게 즐거워했다. 너무 즐거워해서 그날 여해루의 술을 모두 다 살 정도로.
“으으, 머리야.”
어떤 고관인지는 몰라도 돈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고관임이 틀림없었다. 한량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 아들이라는 작자가 저 정도로 돈을 써 대니 고관 본인은 아마 금종이로 뒤를 닦을 것이다.
“으응.”
진해가 숙취에 신음하자 진해의 손에 뺨을 대고 있던 미려가 작게 잠투정을 했다. 미려방에서 자고 정오쯤에 기상할 미려가 여기 있다는 건 진해가 어젯밤 평소와 다른 행동을 했음을 의미했다.
“토했나?”
진해는 몸을 덮은 이불을 슬쩍 걷어 보았다. 안타깝게도 이불 아래 자리한 건 진해가 즐겨 입는 평범한 침의였다. 구토를 했어도 이것으로 갈아입었을 것이고, 하지 않았어도 갈아입었을 것이다.
“설마 징징 짠 건 아니겠지?”
짚이는 구석이 있는 진해는 미려에게 잡히지 않은 손을 들어 얼굴을 더듬었다. 그러나 진해는 평소에도 아침에 눈이 부어 있었다. 석반을 짜게 먹은 다음 날이면 붕어처럼 눈이 부어 있기도 한 것이다.
“똥만 안 싸면 됐지, 뭐.”
드문드문 끊긴 기억을 이으려 노력하며 진해는 팔등을 눈에 얹었다. 만취한 손님과 함께 만취해 시끄럽게 떠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손님이랑 어깨동무했던 것 같기도 하고?
“……형아?”
“아, 일어났어? 미안. 깨워 버렸네.”
상제께서는 너무나 공평하셔서 범인인 진해에게는 아침에 붓는 눈을 주시고, 월국의 절세가인에게는 아침에도 한 치의 붓기도 허용치 않는 아름다운 눈매를 주셨다. 미려는 잠이 덜 깬 듯 천천히 두 눈을 깜박였다. 두 눈이 깜박일 때마다 그늘을 드리우는 검고 긴 장막이 나비가 날갯짓하는 것처럼 가볍게 몸을 떨었다.
“어이쿠!”
그리고 그늘이 드리워진 눈동자에 선명함이 깃들자마자 진해는 저에게 덮쳐드는 무게에 크게 신음했다. 화사하고 풍부한 향이 진해의 몸에 듬뿍 끼얹어졌다.
“나 어제 사고 많이 쳤어? 수습이 안 돼서 우리 강아지가 온 거야?”
미려는 말없이 진해의 몸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진해는 미려가 안고 있던 손을 빼 가만히 미려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아이구, 나도 참 주책이야! 전주라는 게 손님이랑 술이나 처먹고, 우리 예쁜 강아지 밤새도록 불편하게 자게 만들고!”
진해가 능청스레 말하자 진해를 끌어안고 있던 미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흑요석이 울고 갈 정도로 검고 아름다운 눈동자에 진해의 가슴을 아릿하게 하는 것이 담겨 있었다. 미려와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온 진해는 그게 뭔지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자신이 친 사고의 종류 또한 유추할 수 있었다.
“괜찮아. 벌써 몇 번이나 지나간 일인걸. 그런 눈으로 보지 말고 이리 올라와. 아침이라 그런지 좀 춥네.”
그것은 단순히 슬픔이라 뭉뚱그릴 수 없는 감정이었다. 진해가 저것을 처음 봤을 때 진해는 파각의 고통 속에서 죽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진해가 누군가와 이루어지고 헤어질 때마다 진해는 미려의 눈 속에 담긴 저것과 마주해 왔다. 어쩌면 미려의 저 눈이야말로 진해가 자신의 실연을 마무리 짓는 마지막 단계일지도 몰랐다.
“형아.”
평소라면 냉큼 올라올 미려는 진해의 몸에 얼굴을 댄 채로 속삭였다.
“응.”
“나는 형아 거야. 정미려는 오진해 거야.”
“또, 또.”
“그러니까 난 형아를 버릴 수 없어. 난 형아 거니까.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랑 달리 계속 형아 곁에 있어. 형아가 날 버리지 않으면 난 영원히 형 곁에 있을 거야.”
진해는 혹시나 싶어 몸을 일으켜 방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방 안에는 아무도 없는 듯했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진해는 거한 한숨을 내쉬었다. 진해가 실연한 다음 날 술에 절어 늘어져 있으면 미려는 진해를 간호하며 언제나 저런 말을 뱉곤 했다. 어려서는 형 곁에 내가 있다는 기특한 말이 언제 저런 식으로 변했는지 모르겠다. 진해는 미려를 떼 놓으려다가 숙취 뒤의 오한에 잘게 몸을 떨었다.
진해가 몸을 떨자 그제야 미려가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든 미려의 얼굴을 제법 처참했는데 추하거나 꼴사납다는 게 아니라 아름다운 얼굴에 깃든 감정이 보는 이의 심장을 꽉 조일 정도로 피폐하고 메말랐기 때문이다.
“그래, 나 챙겨 주는 건 진짜 우리 강아지뿐이네. 이렇게 커서 형아를 부양하고. 기특한 내 새끼.”
그리고 그것은 진해의 심금을 울리기에도 부족함이 없었다. 진해는 미려가 자신 때문에 속상해하는 게 부끄럽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그래서 미려가 저런 표정을 할 때면 언제나 뽀뽀를 해 줬다. 미려의 뺨에 스친 상처라도 날까 봐 조심조심 뺨을 잡고 반듯한 이마에 메마른 입술을 갖다 붙였었다.
그런데 오늘은 뭐가 잘못됐는지 미려가 제 뺨을 감싼 진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진해가 뽀뽀를 해 줄 때면 수줍어하던 아이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사내 티가 완연한 (그러나 굉장한 미인인) 이가 자신을 지그시 노려보고 있었다.
“우읍?!”
그것도 모자라서 진해의 손을 잡아끌며 진해의 입술에 제 입술을 부딪쳤다. 양인과 양인의 향이 뒤섞이며 진해의 눈앞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어느새 뒤통수가 베개에 닿아 있었다. 입술 사이를 가르고 말랑한 것이 거칠게 파고들었다. 눈앞에 작은 별이 반짝거렸다.
“윽!”
이에 입술이 스쳐 짭짜름한 것이 새어 나왔다. 정신을 차렸을 땐 검은 장막 안이었다. 길고 매끄러우면서 드문드문 늘어진 머리카락 사이에서 맥을 못 추고 해롱거리고 있었다.
“나 농담 아니야.”
진해의 입술에서 새어 나온 것이 미려의 입술에도 묻어 있었다. 꼭 연지를 바른 모양새였다.
“그, 그래.”
숙취고 뭐고 기운이 다 빠져 버린 진해는 미려가 내어 준 한쪽 팔을 베고 새근새근 고른 숨을 뱉기 시작하자 자신도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채로 반쯤 기절해 버렸다.
물론 그사이에도 해국의 사절은 쉬지 않고 움직여 어느덧 도성의 근방에 도달해 있었다. 해국의 사절이 성문에서 출입 허가를 받는 동안 미려방의 문지기인 이단이 소리 없이 여해루의 객실로 몸을 들였다.
“도련님, 왔습니다.”
이단이 말을 뱉기도 전에 미려는 눈을 뜨고 있었다. 진해의 팔을 벤 채로 진해를 꽉 끌어안았다.
“변경 사항은 없겠지?”
“예. 첩려 님을 제하면 한 사람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 그럼 너희는 평소대로 대기하고 있어. 어차피 그들은 있으나 마나 한 이들이야. 알고 있지?”
“물론입니다.”
이단은 미려가 등을 돌리고 누워 있는 데도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충성과 복종을 표하고 있었다. 미려가 진해의 품에 파고드는 것을 보자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소리 없이 방 밖을 빠져나갔다. 완전히 잠이 든 진해와 달리 미려는 다시 잠이 들 수 없었다. 어긋나 버린 예정이 소중한 이의 마음에 상처를 냈다고 생각하자 이가 절로 갈리는 듯했다.
“좀 혼내 줄까?”
미려는 진해에게 답을 원하는 것처럼 크게 읊조렸다. 그러나 진해는 답을 하는 대신 작게 코를 골기 시작했다. 미려가 팔을 베는 바람에 베개의 위치가 바뀐 탓이었다. 미려는 그런 진해를 보며 작게 웃다가 진해가 편하게 벨 수 있도록 베개의 위치를 바꿔 주었다.
그러나 평화로운 웃음과 달리 아름다운 눈매는 답을 내리고 잔혹하고 무정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오진해의 강아지는 오진해를 상처 입힌 이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물어뜯을 셈이었다. 진해가 알게 되면 무서워할지도 모르니 조용히 움직이는 게 가장 큰 관건이었다. 진해가 눈치채지 못하게, 그러나 진해가 소소한 기쁨을 느낄 수 있도록 가만히.
대강의 계획을 세운 미려는 이번에야말로 진해의 품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진해의 향이 멀리 도망가기라도 할 것처럼 그것을 잔뜩 들이마셨다. 숨을 내쉬면 진해의 향이 콧속에서 빠져나가는 게 아쉬웠지만 진해는 언제나 미려의 곁으로 돌아올 것이고, 그럼 또 이 가여운 향기를 마실 수 있을 것이고, 또 미려만을 곁에 두게 될 것이다.
어느새 미려의 입에는 행복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진해와 미려는 한 침상에서 꽤 오랫동안 잠이 들었다.
* * *
기운을 차린 진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그동안 맺어 줬던 정인들을 찢어 놓는 것이었다.
“호부시랑이 도련님의 아버지라고 하셔. 액을 피하려고 일부러 양자로 보내신 거고 사는 건 여전히 그 댁에 사신다네.”
“그래서 저더러 도련님과 헤어지라는 겁니까? 제기랄, 왜 저한테만 그러시는 건데요! 심가 놈은요! 애초에 그놈이 시작한 일이잖아요!”
“말조심해! 아심을 부르시는 분은 내 후견인이시고 호부시랑만큼이나 높으신 분이야. 아심을 부른 건 아심의 재주를 높이 사 곁에 두고 쓰실 생각으로 그러신 거라고.”
“하지만 심가는 전혀 그런 눈치가 아닌 것 같았는데…….”
실제로 진해가 보기에도 아심은 동십사를 각별하게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사포처럼 거친 사내가 우락부락한 동십사를 갓 피어난 꽃을 보는 것처럼 바라보았다. 그러나 동십사는 아심을 연민한다고 했고, 진해는 그것을 최대한 이용해야 했다. 화근이 될 만한 싹들을 모조리 잘라 낸 뒤 여해루의 장래를 위해 더욱 튼튼한 기반을 마련해야만 했다.
“그거야 내 알 바 아니지. 그리고 당신도 아심 걱정할 때가 아니고. 최근에 좌부가 몸이 별로 안 좋으시다지? 잘 생각해. 도련님과 깨끗이 정리하지 못하면 나도 여해루를 위해 당신을 추피동으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으니까.”
성은 곽, 이름은 열이라고 하는 수박회의 삼 등은 진해의 경고와 다름없는 말을 듣자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심과 마찬가지로 곽열 역시 추피동에서 손을 씻고 싶어 여해루에 온 것이다. 범법과 범죄가 난무하는 추피동에 드리워진 거미줄 같은 희망을 믿고 추피동의 옛 두목을 따라온 것이었다.
문전성시를 이루는 여해루에서 추피동의 주민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득을 누렸다. 규칙적인 수입은 물론이요, 따스한 잠자리, 풍부한 식사며 약재, 사람다운 대우까지. 무엇 하나 놓치고 싶지 않은 소중한 것들이었다.
더군다나 곽열은 우부를 잃고 혼자된 좌부를 모시며 살고 있었다. 곽열은 좌부는 곽열이 자신을 희롱한 관리의 친척을 쳐 유배형을 받자 건강하지 못한 몸을 이끌고 유배지까지 곽열을 만나러 갔다. 그러나 그것은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한 행동이었다. 메마르고 혹독한 땅에서 채찍질을 당하며 노역에 시달리는 곽열을 본 아버지는 충격에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기나긴 여로에서 얻은 피로와 아들이 자신을 구하려다 혹독한 형을 받은 것에 대한 억울함 때문이었다. 곽열은 아버지가 쓰러져도 사슬 때문에 아버지를 구하러 갈 수가 없었고, 곽열의 아버지는 일각 정도 방치되다 행인에 의해 겨우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빌어먹을.”
곽열이 삼랑의 밑에서 일을 한 것도 다 아버지를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푹 쉬면 나을 줄 알았던 아버지의 병은 지병이 되어 버렸고 곽열은 도성으로 돌아오고 난 후에도 아버지의 치료비를 벌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법을 벗어난 일에 손을 대야만 했다.
“도련님을 단념시키면 소개비를 당신에게 줄게. 그거면 빚도 갚고 의원도 모시고 잠춘동에 번듯한 집 한 채를 구할 수도 있어. 동잠동 근처에 구하면 의원 모시기도 한결 수월하고.”
“…….”
그렇기 때문에 곽열은 진해의 말을 한마디도 거부할 수 없었다. 목화솜처럼 보송보송한 도련님이 생각났지만 도련님 때문에 아버지를 버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도련님도 자신과 진지하게 만나는 것도 아니었고…….
“알겠습니다. 방 도련님과 정리할 테니 당분간 수박회에서 좀 빼 주십시오. 경비도 내실 경비로 바꿔 주시고요.”
“괜찮겠어? 뭣하면 며칠 쉬어도 돼. 힘들 테니까…….”
“참 나. 이 정도로 힘들어해서 어떻게 먹고 삽니까? 전주 양반 그렇게 안 봤더니 생각보다 무르시네요. 추피동 깡패들을 불러 쌈박질을 시킬 생각을 한 양반으로는 안 보입니다?”
거한 한숨을 짓는 진해를 바라보며 곽열은 호기롭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진해는 그런 곽열을 향해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찌그러진 웃음을 보일 뿐이었다. 왜냐면 진해도 헤어진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기 때문에, 잠깐의 정이라도 얼마나 깊어질 수 있는지 알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다.
진해가 도련님, 이름이 방이라는 도련님이 건넸던 소개비 오백 냥을 곽열에게 주자마자 곽열은 사람을 보내 도련님을 여해루로 불러냈다. 급한 성질답게 단번에 끝낼 모양이었다.
“싫어!! 싫단 말이야!!!”
그리고 방 도련님과 곽열이 있던 방 안에서 요란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거칠게 문이 열리고 무시무시한 얼굴을 한 곽열이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자기, 내가 잘못했어! 내가 요새 뜸했지? 미안해, 내가 잘못했으니까 제발 헤어지자고 하지 마!”
뒤쫓아 나온 방 도련님의 얼굴은 눈물은 물론이요, 콧물로 엉망이었다. 아직 앳된 얼굴이 눈물을 철철 쏟아 내는 모양새가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자기라는 충격적인 호칭을 잊게 할 정도로 불쌍해 보이기도 했다.
“……저 같은 놈 잊고 좋은 사람 만나십시오.”
곽열은 잠깐 멈추어 서는가 싶더니 나지막하게 읊조리고 그대로 여해루 밖으로 나가 버렸다. 방 도련님은 쫓아가려 했으나 눈물 탓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방 도련님이 엉엉 우는 소리가 들리자 방 도련님을 기다리던 하인들이 혼비백산하여 뛰어왔다. 그중 하나가 여해루의 하인에게 이게 어찌 된 일이냐고 화를 내다 방 도련님과 여해루의 싸움꾼이 헤어졌다는 소릴 듣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잠깐 객실 좀 빌립시다.”
하인들은 흐느끼는 도련님을 데려가 몇 시간을 달래고 씻기고 새 옷으로 갈아입혔다. 사실 도련님이 그 싸움꾼과 헤어지는 건 방 도련님을 모시는 하인들이 가장 바라고 있던 일이었다. 작게는 고관의 정실, 크게는 황실의 측실을 노리고 있는 주인님께서 아신다면 틀림없이 큰일이 벌어질 테니까.
진해는 도련님이 우는 소리가 잦아들고, 대충 상황이 정리되는 듯하자 여해루를 나서는 도련님을 직접 배웅했다.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방 도련님은 진해를 보자 곽열이 어째서 자신과 헤어지자 말했는지 알 수 있었다. 방 도련님은 곱게 자란 도련님답게 분을 참지 않았고 손을 들어 진해의 뺨을 내리쳤다. 진해는 반항하지 않고 뺨을 맞았고 방 도련님은 진해의 뺨을 한 대 더 때리려다 눈앞이 흐려져 그만두고 말았다.
진해는 뺨에 손자국을 단 채로 방 도련님이 탄 수레가 떠날 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하인들이 진해의 뺨을 걱정해도, 진해에게 얼른 치료할 것을 권해도 고개를 들지 않고 한참 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가슴속 깊은 곳이 맹렬히 따끔거렸다. 헤어진 것은 방 도련님과 곽열인데 어째서 해산이 눈에 어른거리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정인이었었나.”
헤어지기 전에는 실수로라도 교제라는 말을 읊조리지 않았는데 헤어지고 난 후에는 정인이라는 말이 잘도 나왔다. 심보가 못돼 저 혼자 헤어진 것도 모자라서 다른 정인들까지 연달아 찢어 놓았다. 진해는 이를 악물고 가슴속의 아픔을 지우려고 했다. 그러나 아픔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고 진해는 자신이 그제야 정인과 헤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 * *
해산과 끝이 났으니 동십사와도 끝이 날 줄 알았는데 웬걸. 어느 날 진해에게 예상치 못한 손님이 찾아왔다. 손님은 동가소택에서 진해와 가장 절친하다 할 수 있는 이였다.
“오 대인.”
“어, 영 집사!”
동가소택 밖에서 보는 영 집사는 희한했다. 단정하고 멀끔하게 생긴 음인이었다. 진해는 반가워서 영 집사를 당장 자신의 집무실로 데려갔다. 하인들에게 상다리 부러지게 차리라고 하려다가 영 집사가 밥을 먹고 왔다 하여 간단한 다과를 차려 오라 명했다.
“영 집사, 이게 얼마 만이야!”
“그건 제가 드릴 말씀이지요. 오 대인, 어찌하여 나리 댁에 오시질 않는 겁니까? 근래에는 저희 나리랑도 보신 일이 없다면서요.”
근래라는 게 언제의 근래를 이야기하는 걸까. 진해는 동십사를 삼 일 전에 보았었다.
“아, 가게가 아직 자리가 안 잡혀서 그래. 심사관도 기다려야 하고.”
물론 동가소택이 아닌 이곳 여해루에서.
“그러셨습니까? 휴, 그럼 제가 괜한 오해를 한 모양이군요. 전 오 대인이 저희 나리와 틀어지셔서 나리 댁에 오지 않으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시다시피 저희 나리가 기루를 별로…… 안 좋아하시니까요.”
“아냐, 아냐! 내가 동 형이랑 틀어질 리가! 진짜 바빠서 그랬어! 자리가 잡히면 그, 수업도 다시 받으려 했는걸!”
“정말이십니까?”
진해가 수업을 다시 받을 생각이라고 하자 영 집사의 만면에 희색이 돌았다. 진해는 그 얼굴을 바라보면서 동십사를 만나면 이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하리라 결심했다. 동십사가 이곳에 발걸음 한 것을 영 집사가 모르는 걸 보면 동십사가 꽤 무리해서 가솔들에게 자신의 행적을 숨기는 게 분명했고, 진해는 마음에도 없는 수업 소리를 해 가며 그를 지켜 주었던 것이다.
“그럼 정말이고말고! 이왕 말 나온 김에 지금 당장 동 형을 보러 가자고. 내 결의 형제인 동 형을 보기 위해서라면 하루 정도는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어!”
진해는 한술 더 떠 지금 당장 동십사를 보러 가겠다고 호기를 부려 댔다. 곱게 걸어 두었던 관복을 차려입는 연극까지 해 가면서 영 집사를 단번에 기쁘게 만들기까지 했다. 그러나 진해는 영 집사가 자신을 말릴 것을 예상하고 이러는 것이었다. 현 내무부에는 내무부를 총괄할 일등시위가 없어 이등시위인 동십사가 임시로 내무부를 총괄했고, 그랬기 때문에 동십사의 퇴청 시간이 남들보다 늦다는 걸 알기 때문에 벌인 수작이기도 했다.
“과연 오 대인! 마침 제가 수레를 타고 왔으니 거기 같이 타고 가시죠. 아니, 아예 오늘 밤은 나리 댁에서 주무시고 가시는 게 어떨는지요?”
“……응?”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영 집사가 진해를 말리기는커녕 진해가 관복 입는 걸 거들기 시작했다. 바람처럼 손을 놀려 진해의 옷매무새를 다듬더니 관모를 씌우고 각을 맞춰 수건을 매 주기까지 했다.
“두 분은 정말 하늘에서 맺어 주신 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쩜 이렇게 운이 따르는지. 오 대인, 마침 주인 나리께서 평소보다 훨씬 일찍 퇴청해 댁에 돌아오셨답니다.”
“뭐!”
“거기다 황후궁에서 모셔 온 숙수(熟手)가 사흘 전부터 준비하고 계시는 거 아니겠습니까.”
“서, 설마.”
“자, 오 대인 어서 가시지요. 어쩌면 한 식구가 되실지도 모르는 분이십니다. 혼례를 치르기 전에 친해지시면 입궁 후에 든든한 뒷배가 될지도 모릅니다!”
“잠깐만, 잠깐만! 영 집사,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동열, 아니 동 형이 와 있다니? 한 식구가 될지도 모른다니?”
상냥하고 정이 많은 영 집사는 진해를 동가소택으로 데리고 돌아가는 것을 하늘이 내린 천명쯤으로 아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아귀가 딱딱 들어맞을 수는 없는 법이라며 진해를 문으로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잔뜩 들뜬 영 집사의 말을 들으며 진해의 미간에 잘게 주름이 가기 시작했다. 진해는 영 집사가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았다.
“아직 소식 듣지 못하셨습니까? 해국 사절의 우두머리신 사행총령(使行總領) 옥첩려 님께서 저희 댁에 며칠 머무르신답니다!”
“아, 역시.”
황후가 숙수까지 보낼 정도면 그가 해국 의 사신단에게 꽤 많은 신경을 쓰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사행총령인 옥첩려가 해원공과 나이가 비슷하다면 눈치 빠른 사람은 황후가 왜 신경을 쓰는지도 알 수 있을 터였다. 진해는 뭐 씹은 표정을 하고 어쩔 수 없이 영 집사의 뒤를 따라나섰다. 오늘따라 수레가 더럽게 빠른 것 같았다.
* * *
영 집사가 마부를 재촉해 가며 도착한 동가소택은 그야말로 잔치 분위기였다. 주인인 동십사가 평소에 손님을 잘 데려오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 긴장한 것 같기도 했다. 진해와 패를 돌리던 바깥채 하인들도 열심히 마당을 쓸고 있었다. 진해는 그들에게 아는 척을 하려다가 그냥 입술만 몇 번 삐죽이고 말았다.
“영 집사님, 안 그래도 노집사님이 오 대인 안부를 물으셨는데 한발 앞서 모셔 오셨군요.”
“오 대인은 우리 집 식구니까 당연히 내가 나서야지. 자, 오 대인. 이쪽으로 오십시오. 주인 나리는 오늘 이쪽 별채에 계십니다.”
진해는 영 집사의 안내를 따라 동가소택의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진해가 머물던 별채는 서쪽이었는데 오늘 진해가 향하는 별채는 동쪽에 위치한 곳이었다.
“원래 안채 주인님을 맞으려고 준비한 별채였는데 이렇게 먼저 쓰게 될 줄이야. 하하, 저희 나리도 얼른 좋은 짝을 만나셔야 할 텐데요.”
“음……. 동 형은 건실한 대장부니 젊고 탱탱한 짝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오 대인도 참!”
영 집사는 진해의 말을 농으로 들었지만 진해의 말은 반은 농이요, 반은 참이었다. 진해는 동십사의 짝이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눈앞에 아심이 어른거리는 듯했다. 동십사보다 젊고 싱싱한 나이의 아심이.
“앗, 이런. 저희가 아무래도 좀 늦은 모양입니다. 어서 서두르지요.”
그런데 그때, 영 집사가 복도 저편을 보고 서두르기 시작했다. 고개를 흔들어 아심의 환영을 지운 진해 역시 복도 끄트머리를 바라보았다. 복도 끝에는 동십사가 노집사와 하인들을 대동한 채 어딘가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 월국에서 드문 문양의 옷깃이 바람에 느긋하게 펄렁이고 있었다.
대월사행총령 옥첩려. 황후의 친정인 해국에서 특별히 선별한 양인이라 했다. 옥첩려의 가문인 서해 옥가의 시조는 고산 지역 사람이었으나 고산맹, 현 고산국과 뜻이 틀어져 해국으로 망명했고 위기에 몰려 있던 해국 왕실의 직계 왕손을 도와 해국을 새롭게 일으켰다고 한다. 서해 옥가가 없었다면 지금의 해국 역시 없었던 셈이다.
“어서, 어서 가십시다. 어서.”
“아, 영 집사 잠깐만~!”
영 집사는 어지간히 급했는지 한 손으로 진해의 등을 떠밀면서 황급히 동십사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말이 걸어가는 것이었지 달리는 것이나 진배없는 속도였다. 평소에 입에 달고 다니던 관리의 체통은 어디다 던져 버렸는지 모르겠다.
“음?”
그리고 마침내, 오진해와 옥첩려는 처음으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불만을 뱉는 진해의 목소리와 영 집사의 급한 발걸음이 옥첩려의 시선을 끈 것이다.
“오! 오 시위가 왔는가!”
“……근래 별고 없으셨는지요, 동 대인.”
당연히 별고 없었다. 삼 일 전에도 아심이랑 만나는 걸 봤는데 무슨 별고가 있을까.
“안 그래도 자넬 부르려고 했네. 나이가 들었는지 자주 깜박한다니까.”
동십사는 가솔들 앞에서 체면을 구기고 싶지 않은 모양인지 제법 필사적으로 연기했다. 진해를 오랜만에 봤다는 걸 강조하고 싶은지 진해에게 다가와 콱 끌어안기까지 했다. 어찌나 세게 끌어안았는지 진해는 저도 모르게 꽥, 짓눌리는 소리를 낼 뻔했다.
“옥 사령, 소개하지요. 이 사람은 제 휘하의 시위 중 한 사람인 오진해라고 합니다. 재주가 뛰어나 만재라고 불리기도 하지요. 해원공께서도 제법 아끼시는 이입니다.”
“호오, 해원공께서도 말입니까.”
동십사의 품에서 풀려난 진해는 그제야 옥첩려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멀리서 봤을 때는 좀 괜찮은 사내였는데, 가까이서 본 옥첩려는 좀 괜찮은 게 아니라 아주 괜찮아 보이는 사내였다. 무인 가문인 걸 증명하듯 장신의 체구를 갖추고 있었으며 멀끔한 피부에 미려한 눈매, 짙은 속눈썹을 드리우고 있었던 것이다.
‘하긴 특별히 추남을 선별해서 보낼 리는 없지.’
풍기는 향도 은은하고 그윽했다. 옥첩려는 진해에게 슬쩍 목례를 했고 진해는 그제야 후다닥 옥첩려에게도 예를 갖추었다. 옥국의 총령사신인 옥첩려는 칠품 관리인 진해보다도 훨씬 귀하신 몸이었다.
“자, 자. 이럴 것이 아니라 황후마마께서 하사하신 진미를 맛보러 가십시다. 해원공께서도 좋은 술을 보내셨습니다.”
“미천한 것에게 이리 신경을 써 주시니.”
“미천한 것이라니요! 황후마마의 친정인 해국의 사신을 어찌 미천하다 하겠습니까.”
옥첩려는 진해와 인사가 끝나자마자 동십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진해는 연회장으로 향하는 옥첩려와 동십사의 뒤를 따라갔다. 해원공 이야기가 나오자 가슴 한구석이 날카롭게 저미는 듯했지만 진해는 짐짓 태연한 얼굴을 가장했다. 해원공이 술을 보냈다고 하는 말을 보아 아무래도 해산은 오늘 연회에 참가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제법 잘 어울리는 한 쌍이야. 해원공 마마님의 옆에 서도 전혀 모자라지 않겠는걸.’
진해는 옥첩려의 늠름한 어깨를 바라보며 해산과 옥첩려가 함께 서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옥첩려와 마주 보는 해산은 어느새 붉은 혼례복을 입고 있었고 옥첩려를 바라보며 싱긋 미소 짓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해산은 자리에 앉아 자그마한 비단 보퉁이를 안고 있었다. 비단에 싼 것을 어르자 속에서 자그마한 손이 해산을 향해 뻗어 나왔다. 그 곁에 옥첩려가 있었다. 옥첩려와 해산은 진해가 바라 왔던 가장 이상적인 가정을 이룬 채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정략혼이지만 내가 조금만 손을 쓰면 다른 이들보다 훨씬 행복하게 살 수 있어. 순조롭게 황위에 오르시고 누구보다 예쁜 아기씨를 얻으실 거야. 그리고 태평성대를 이루시겠지. 해산 도련님은 자상하시니까 누구보다도 잘하실 거야.’
잠깐 눈앞이 흐려졌던 진해는 주먹에 힘을 주며 자신이 해산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했다. 진해는 자기 스스로의 의지로 해산과 헤어지길 원했지만 아직 해산에 대한 정을 완전히 흩어 버리지 못하였다. 진해는 그런 자신이 참으로 가증스럽고 우스웠다. 가장 좋은 선택지를 합리적으로 골라 놓고 왜 이제 와서 해산에게 미련을 갖는지 모를 일이었다.
‘해산 도련님과 옥 사령을 이어 주자. 두 사람이 이어지면, 그러면 이 마음도 사라질 거야.’
연회장의 밝은 불빛에 눈이 부시는 걸 느끼며 진해는 언젠가 해산이 자신을 안아 주었던 걸 떠올렸다. 거꾸로 매달리고 난 뒤의 일이었다. 다시 한번 안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이미 다 끝난 일이었다. 진해는 해산이 자신 때문에 상처 입지 말고 더 좋은 사람을 만나 탄탄대로를 걷길 바랐다.
그렇기 때문에 진해는 옥첩려와 해산이 혼인하기 전에 서로에 대해 좋은 감정을 품길 바랐다. 두 사람은 서로의 체면과 체통 때문에 서로에게 거리를 지켜야 할지도 몰랐다. 어쩌면 혼인하기 전까지 얼굴 몇 번 보는 게 다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는 생길 연심도 사그라질 터였다. 진해는 동십사와 술잔을 부딪치는 옥첩려를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가슴에 탈이 났는지 자꾸 따끔거렸지만 진해는 이 계획이야말로 해산이 가장 행복할 수 있는 길이라 믿었다. 잘생긴 옥첩려가 해산에게 다정하게 대하면 실연의 아픔에 젖어 있는 해산도 옥첩려에게 좋은 마음이 싹틀 터였다.
“우선 해산 도련님이 좋아하는 취향으로 가르치자.”
진해는 가르치는 일에 서툴렀지만 까짓것 못할 것도 없었다. 진해는 제 앞에 놓인 술을 홀짝홀짝 들이켜며 해산 도련님이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묶는 거. 아니 이건 진도가 너무 빨랐다. 깨물리는 거. 아니, 이것도 진도가 너무 빨랐다! 핥아 주기?
대체 왜 생각나는 게 이런 것뿐인지 모르겠다.
진해는 짜증이 솟아 잔에 술을 콸콸 쏟아붓기 시작했다. 곁에 있던 하인이 진해를 말리려 했지만 술잔을 비우는 진해의 기세가 흉흉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정인이 저 말고 다른 이와 혼례를 치르기라도 한 모양새였던 것이다.
제법 술이 센 진해였지만 홧김에 마신 술을 당해 낼 수 없었다. 진해는 얼굴이 불긋하게 달아오르기 시작했고 결국 연회장을 돌아다니던 영 집사의 눈에 발각되고 말았다. 영 집사는 혼비백산하여 진해를 객실로 데려가 재우려 했으나 진해는 본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제법 술에 많이 취해 있었다. 여기서 안 잘 거라고, 우리 집 가서 잘 거라고 마구 떼를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런 진해를 누가 보고 있기라도 한 것인지 여해루에서 진해를 데리러 사람이 왔다. 칠품 관리가 탈 수 있는 수레 중 가장 호화로운 수레를 끌고 몇 명이나 되는 하인이 전주 어르신을 모시러 온 것이다.
게다가 진해를 데리러 온 것은 하인뿐만이 아니었다. 보는 것만으로 눈이 환해지는 어여쁘고 단정한 미인들이 어르신을 연호하며 진해를 부축했다. 연회장의 시선이 진해 쪽으로 모이는 건 당연지사였다.
“잠춘동~ 잠춘동으로 가~”
“아오, 오 형! 몇 잔 먹지도 않고 왜 이렇게 앙탈을 부려?”
“세살아, 여기 바깥이야. 어르신께 예를 안 갖추면 일패 어르신한테 확 고해 버린다?”
“전주 어르신, 점주 대인이 동틀 때까지는 꼭 여해루에 모시라고 했어요. 잠춘동 집은 문짝을 안 고쳐서 못 주무신대요.”
그리고 진해가 여해루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수레에 타려는 그때,
“잠깐.”
진중하지만 젊은 목소리가 여해루 사람들을 불러 세웠다. 여해루 사람들은 진해를 부축한 채로 목례했고 진해는 부축을 받는 건지 팔이 붙잡혀 들려 가는 건지 모르는 꼴을 한 채 목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목소리의 주인을 본 순간 진해는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자신이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이 오진해라고 했던가. 보아하니 잠깐 마실을 나가는 모양이군.”
목소리의 주인은 옥첩려였다. 연회의 주인공인 옥첩려는 무슨 일인지 진해를 따라 연회장을 나온 모양이었다.
“자네가 괜찮다면 나도 그 마실에 함께 데려가 줄 수 없겠는가? 동 시위의 연회는 좀, 지루하구만.”
진해는 오늘 처음으로 영 집사의 말에 동의했다. 오늘은 하늘이 정말로 오진해를 돕고 있었다. 진해는 저를 붙잡은 팔에서 빠져나와 옥첩려에게 얼른 수레의 상석을 양보하였다. 옥첩려는 아무렇지도 않게 수레에 올라탔고 진해는 옥첩려와 함께 여해루로 향하였다. 진해의 원대한 계획의 시작이었다.
* * *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진해는 날이 가면 갈수록 자신의 계획에 자신이 없어졌다. 옥첩려, 통칭 옥 사령을 여해루에 데려와 극진히 대접해서 친해진 것까지는 좋았는데 친해져도 너무 친해지는 바람에 옥 사령의 보고 싶지 않은 부분을 자꾸만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야, 거기! 여기 술 더 가져와! 뱀술 없어? 뱀!”
예를 들자면 술을 마시면 목청이 커진다던가.
“이 새끼가 지금 이게 얼마짜린 줄 알고 구기는 거야, 어!”
하인들에게 말이 험하다던가,
“이리 와! 어허, 이리 오래도! 이름이 뭐랬지? 응? 귀여운 것. 이따 따라 나오면 이 나리가 좋은 구경을 시켜 주지.”
묘하게 어린애들한테 집적거린다던가 등등.
진중하고 단정해 보였던 첫인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잠깐 술 몇 잔을 같이 마셨을 뿐인데 세살이는 반쯤 헐벗은 꼴을 하고 있었다. 애가 어찌나 시달렸는지 며칠 새 살이 쑥 내린 것 같았다.
“오 형~ 이제 쟤 데리고 오지 마! 아주 진상이야, 진상!”
“…….”
세살이는 다른 기생들을 지키기 위해 옥첩려의 전속이 되다시피 했다.
“분명히 해국에서 선발해서 보냈다고 했는데……? 해국은 나름 잘 살고 오래된 나라 아냐? 그런데 왜 저렇게 싸가지가 없지? 뭔가 잘못됐나? 옥 사령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랑 혼인하기로 했나?”
“오 형! 내 말 듣고 있어?”
설상가상으로 황아무도 진해를 찾아와 난리였다. 세살이한테 요새 무슨 일이 있냐고 꼬치꼬치 캐물어 댔고 진해는 진땀을 흘리며 세살이가 요새 몸이 안 좋다고 거짓말을 했다. 병문안을 가겠다는 걸 전염병이라는 말로 간신히 저지하였다.
“그래! 어쩌면 술버릇만 나쁜 걸지도 몰라! 집 안에서만 잘하면 되지, 뭘! 저런 사람이 자기 남편한테는 잘하더라, 반한 사람한테는 분명히 꿀이 뚝뚝 떨어지게 잘해 줄―”
“형 쟤 고추도 작아~ 쟤 가라고 해~ 가라고 해~!”
“…….”
진해가 혼잣말을 멈추자 세살이는 진해의 등에 매달려서 옥 사령이 얼마나 진상인지에 대해 구구절절 토해 놓았다. 술 한 잔을 제 손으로 안 마시고 꼭 먹여 주게 했고, 입으로 먹여 달라는 걸 안주를 입에 처넣는 것으로 회피했다고 했다. 거기다 밝히기는 또 얼마나 밝히는지 틈만 나면 세살이를 데리고 밖에 나가려 한다 했다. 다른 객잔에 가자고 꼬드기며 제 중심 부분을 어루만지게끔 했다는 것이다.
“……야, 너 거짓말 하면 혼난다. 진짜 작아? 정말 작아?”
“아, 그럼 내가 형한테 고추 가지고 거짓말을 하겠어? 작아, 진짜 작아! 덩치가 다 아깝다니까? 거기다가 정신이 돌았는지 음인만 보면 욕을 하더라구. 해국에서는 양인이 하늘이라나 뭐라나.”
“음인 욕을 했다구?”
“응. 월국 음인들은 다 싸가지가 없고 뻣뻣해서 안을 마음도 안 든다면서 해국 음인들은 길이 잘 들어서 고분고분하고 잘 조인대. 자기는 나같이 어리고 싱싱한 음인이 좋은데 해원공 같이 커다랗고 시커먼 음인이랑 혼인하게 돼서 기분이 아주 더럽다고까지 한다니까. 웃겨, 난 양인인데 뭘 나 같은 음인이 좋대!”
“뭐……?”
그리고 옥 사령에 대한 실망은 옥 사령이 해산의 욕을 했다는 걸 전해 듣는 순간 극에 달했다. 극에 달하다 못해 화산이 폭발하듯 맹렬히 폭발하였다.
“이런 오라질 놈! 제가 잘나면 얼마나 잘났다고 해산 도련님을 욕해! 생긴 건 꼭 닦다 버린 걸레같이 생긴 놈이! 뭐? 커다랗고 시커메서 싫어? 이런 엿 같은! 눈깔을 개를 주고 왔나! 해산 도련님이 얼마나 멀끔하고 훤칠하신데 저딴 소리로 도련님을 욕보여? 이 망할 자식, 잘 만났다! 내 저놈의 주둥아리를 당장!”
“아앗! 오 형, 오 형!!”
실망은 분노가 되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진해는 해산을 욕보인 옥 사령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해산은 하얗지 않았지만 건강하고 탄력 있는 피부를 갖고 있었고, 키가 크고 훤칠하며 폭신한 품을 하고 있었다. 천지신명이 조화를 부린 것처럼 멋들어진 부분들이었다. 진해가 이상적이라고 여기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런데 저 건방진 것이 보기만 해도 아까운 해산을 욕했다 . 진해는 진해가 화를 내자 움츠러든 세살을 추궁해 세살이 차마 말하지 못한 다른 말까지도 털어 냈다. 그리고 생전 처음으로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세살이 머뭇거리면서 전한 말은 참으로 가관이었는데 옥 사령은 아무리 잘난 황자라도 고작 음인일 뿐이라며 제 물건에 꿰뚫리면 침을 질질 흘리면서 제 손아귀에 있게 될 것이란 망발을 뱉었던 것이다.
“후…….”
“오, 오 형. 진정하고 여기 물 한잔 마셔. 응? 저 진상 그냥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그러니까 화 풀고 속부터 진정시키자. 일패 어르신이 알면 혼나겠어.”
“하…….”
들숨 한 번에 분노가, 날숨 한 번에 살의가 샘솟았다. 옥 사령이 해국의 사신이 아니고, 해산과 선을 볼 상대가 아닌 평민이었다면 진해는 짱돌을 들고 쫓아가 저 뒤통수를 당장에 깨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아니. 세살이 너 혼자 해결할 문제가 아니야. 저 진상을 여해루에 데려온 건 나야. 그러니까 나도, 저 진상을 쫓아내는 걸 도와야지.”
“정말? 정말 쫓아내게?”
“그래. 여해루에서, 아니 이 월국에서 쫓아내 버릴 테다. 내가 가진 모든 힘을 다 동원해 월국에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니게 만들겠어! 저 고자 거북이 같은 놈이 절대로 해원공 마마님과 혼인하지 못하게 하겠어!”
그리고 마침내 진해의 계획은 옥첩려와 안해산을 이어 주는 것에서 옥첩려를 해산과 이어지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다른 것도 문제였지만 물건이 실하지 못하다는 것 역시 진해의 화를 북돋웠다. 거시기도 작은 놈이 감히 해산 도련님을 욕하다니. 귀엽고 애처롭고 야하게 우는 해산 도련님을 고추 작은 놈이 욕하다니!
“세살아, 너한텐 정말 미안하다. 저 새끼가 엄청 큰 똥이라서 당장은 못 치워. 그러니까 네가 당분간만 저 새끼 상대를 해. 너랑 나랑 판을 짜서 알거지로 만들어 버리자.”
“좋아.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진해는 세살에게 어깨동무를 한 채로 음침하게 웃음 지었다. 세살은 왕진상을 쫓아낼 수 있다는 사실에 만면에 희색을 띠었다. 거기다가 무려 진해가 가세해 저놈을 알거지로 만들겠다고 했다. 세살이 혼자 터는 것보다 배, 아니 열 배는 빠르게 저놈을 거지로 만들 수 있었다.
“쟤 거지 되면 우리 앞마당 쓸게 해도 돼?”
“앞마당? 하하, 세살이 이 녀석! 변소를 비우게 해야지, 앞마당은 무슨.”
“역시 오 형이야. 일패 어르신의 정인다워.”
“세살이 너 농이 많이 늘었다?”
술에 곯아떨어진 옥첩려가 여해루의 객실에서 코를 고는 동안 진해와 세살은 저놈을 어떻게 족칠 것인지 의논했다. 세살은 술을 먹여다 계단에 굴리는 건 어떻겠냐고 했고, 진해는 저놈의 뒷배가 빵빵하니 되도록 사지를 멀쩡히 남겨 둬야 한다 했다. 한참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마침내 저놈을 패가망신의 지름길인 도박의 길에 끌어들이기로 했다.
“내가 돈 줄 테니까 아저씨들한테 새 옷 사고 목욕하고 이발까지 싹 하고 오라 그래. 너는 애들한테 단골인 척하라 그러고.”
“아하~ 그렇게 아저씨들이랑 형이랑 판을 짜서 따게 해 주다가 한 번에 털게?”
“저놈이 얼마나 가져왔는지는 몰라도 한계가 있겠지. 사신이니 행동을 조심하란 소리도 들었을 거고.”
“조심~?”
“머리를 장식으로 달고 다니다 보지 뭐. 오늘 수고했고 내일부터 열심히 놀아 보자고!”
진해는 세살을 시켜 기생들을 추리게 했다. 연기에 능숙하고 입이 무거우며 옥첩려 놈이 좋아하는 어려 보이는 이들이었다. 그 뒤에는 퇴근한 잠춘동의 주민들(주로 도박꾼들이다)에게 사람을 보내 새 옷과 돈을 건네줬다. 이놈에게서 딴 돈은 모두 그들에게 나눠 주겠다는 솔깃한 조건을 붙여서. 잠춘동의 주민들은 두말할 것 없이 승낙했고 희희낙락하며 귀한 집 어르신들처럼 차려입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진해는 바깥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아심을 불러들였다.
“이건 흥기단이라고 하는 물건인데 들어 본 적 있지?”
“예.”
아심은 제 앞에 놓인 환약을 보고도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흥기단은 탈정고를 만들었던 낭중이 생전에 미려방에서 돈을 받고 제조한 춘약으로 탈정고의 장점은 키우고 단점은 줄인 최고의 춘약이었다.
“내가 너한테 이걸 주면 넌 누구한테 쓰고 싶어?”
“……원하시는 게 뭡니까.”
“며칠이라도 좋으니까 동십사의 주의를 돌리고 싶어. 동십사는 분명히 내 일을 방해하려고 할 거거든. 그러니까 어디 집을 빌려서 며칠만 처박혀 있어. 약효가 떨어지면 잠춘동에 가서 미려나 내 이름을 대고 숨어 있으라구. 보상은 그때 달라는 대로 줄 테니까.”
아심은 환약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손을 뻗어 그것을 소매 속에 집어넣었다.
“보상은 필요 없습니다. 이것만으로 충분하니까요.”
역시나 아심은 동십사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진해가 흥기단을 줬을 때 이 일을 단칼에 거절했을 것이다. 동십사가 그가 사면된 뒤의 밝은 미래에 대해 말해 줬을 것이므로 굳이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없기도 했다. 그런데 아심은 동십사를 속여서라도 동침하는 길을 택했다. 동십사가 너무나 올곧은 사람이라, 너무나 높은 사람이라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저에게 손길 한 번 뻗지 않을 걸 알고 있어서였다.
“미안해.”
진해가 툭 하니 뱉는 사죄의 말에 아심은 아무런 답도 해 주지 않았다. 흥기단을 소중히 품은 채로 미련 없이 진해의 집무실 밖으로 나갈 뿐이었다.
“나도 야반도주할 준비를 해 놔야 하나.”
일단 일을 꾸몄지만 사실 그 뒤처리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변소를 청소하게 한다는 것도 진해의 바람일 뿐 해국의 명문가 자제인 옥첩려가 변소를 청소하게 될 일은 없을 터였다. 집무실에 혼자 남자 뒤늦게 동십사의 분노라든가 해원공의 입장이라든가, 나아가 황후와 황제의 분노가 생각났지만 이상하게도 지금의 진해는 그런 것들이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지금 진해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저런 놈과 해산이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뿐이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옥첩려가 이렇게 쉽게 손아귀에 넘어올까 반신반의했다. 그 어떤 나라라도 도박을 권장하진 않을 터였고 사신단의 우두머리인 옥첩려가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옥첩려는 날이 가면 갈수록 진해의 예상을 넘어서는 행각을 보여 주었다. 옥첩려는 진해가 짠 판에서 돈을 따자마자 미친 듯이 도박판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지금 진해가 청화 자기 술잔 속에 주사위를 넣어 놓고 돌리고 있는 이유였다.
“가운데? 진짜 가운데요? 걸린 돈이 좀 많은데~”
“이 옥 사령님이 하는 말을 안 듣겠다는 거야, 지금!”
“아이, 고정하세요. 바람 잡는 거 가지고 일일이 화내지 마시라구요. 네?”
진해가 열을 올리면 세살이가 달래고 옥 사령이 조금 잦아들면 돈을 따게 만들었다. 귀한 집 공자나 나리로 분장한 도박꾼들이 옥 사령에게 아낌없는 찬탄과 질시를 보냈다. 옥 사령은 그들의 찬탄이 쏟아질 때마다 더할 나위 없이 오만하게 뻐기면서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금전을 여해루에 쏟아부었다. 솔직히 해산만 아니면 옥 사령의 주머니에 구멍이 날 때까지 이대로 쭉쭉 빨아먹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나 진해는 바보가 아니었고 이 판에 한계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옥 사령은 몰라도 옥 사령을 수행한 다른 사신들은 멍청이가 아닐 터였고 곧 옥 사령을 제지하러 올 터였다. 사실 벌써 몇 번이나 옥 사령의 수행 총관이라는 이가 옥 사령을 데리러 오기도 했다.
‘미려가 안 도와줬으면 꼼짝없이 파투 났겠지!’
그런 수행 총관을 돌려보낸 건 미려였다. 진해는 혹시라도 옥 사령이 미려를 탐낼까 봐 옥 사령이 왔을 땐 절대로 미려를 이 층에서 내려오지 못하게 했다. 부득불 내려와 도와주겠다는 애한테 어릴 때나 하던 뽀뽀 세례를 안겨 내려오지 않겠다는 약조를 받아 낸 것이다.
그런데 그 미려가 옥 사령을 억지로 모셔 가려는 초로의 수행 총관을 보자 사람을 시켜 그를 여해루의 한적한 곳으로 끌어냈다. 그리고는 자신이 직접 수행 총관과 만나 담판을 지었다. 진해는 날뛰는 옥 사령을 진정시키느라 미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듣지 못했지만 수행 총관은 미려와 이야기를 나눈 후로 다시는 여해루에 발걸음 하지 않았다. 신이 난 옥 사령은 사신단의 예산을 더욱 물 쓰듯 탕진할 뿐이었다.
“앗, 정말 가운데네! 역시 옥 사령님 굉장하십니다! 그럼 우리 세살이 옷 다시 입을까~?”
“으응, 싫어! 멋진 옥 사령님이 하시는 걸 보니까 몸이 좀 더운걸. 그렇죠, 옥 사령님?”
“흐흐, 그러냐? 그럼 그대로 있어야지, 아무렴!”
옥 사령이 허리를 더듬자 오호의 얼굴이 슬쩍 일그러졌다. 바라보는 동료 기생들의 표정에 연민이 어리었다. 동료인 도박꾼들도 질색하는 표정이었다. 옥 사령은 명실공히 여해루 최고의 왕진상, 아니 대왕진상이 되었다.
그렇게 진해의 계획은 하루하루 완성에 가까워지는 듯했다. 진해가 옥 사령에게서 야금야금 빼먹은 돈이 벌써 금 오십 냥에 가까워졌다. 과연 해국이 부유하긴 부유한 모양이었다. 동시에 진해는 해산이 자신을 얼마나 자신을 귀애했는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금 한 냥을 아직 혼례도 치르지 못한 자신에게 망설임 없이 건네주었던 것이다.
‘해산 도련님, 제가 반드시 이 못난이를 도련님에게서 떼 드릴게요. 그리고 도련님은 훨씬 훌륭하고 좋은 사람이랑…… 혼인하시는 거예요.’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모든 계획에는 약간의 차질이 생기는 법이었다. 진해는 저녁에 올 옥 사령을 위한 패를 만들다가 밖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창밖을 내다보았다. 매일 밤늦게까지 옥 사령을 상대하느라 진해도 제법 수척해져 있었다. 아침 햇살이 따갑게 느껴질 정도였다.
“비켜라! 한 번만 보고 가겠다지 않느냐! 곽열을 부르거라, 당장 불러!”
“도, 도련님 조금만 진정하십시오. 저희가 들어가서 찾아볼 테니…….”
“곽열! 곽열!! 자기야!!”
창밖으로 보이는 장면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매일 밤을 새운 진해보다 더욱 수척해진 방 도련님이 하인들에게 팔을 붙들린 채 목청 높여 곽열을 부르고 있었다. 마음 여린 도련님의 성정상 쉬이 잊지 못할 거라 예상은 했지만 저렇게까지 고생을 할 줄은 몰랐다. 저렇게까지 고집을 부릴 줄은 몰랐다.
“아이고, 머리야.”
진해는 도련님이 지쳐 돌아갈 때까지 그냥 두느냐, 아니면 자신이 내려가 달래서 보내느냐 두 개의 선택지를 두고 망설였다. 어느 쪽이든 진해가 지치게 될 것은 자명했다. 하지만 방 도련님은 진해가 예상했던 것과 달리 곧 잠잠해졌다. 여해루의 연회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여해루 경비의 옷을 입은 곽열이 우뚝 서 있었다.
“자기!”
방 도련님은 자신을 붙드는 하인들을 뿌리치고 달려가 곽열에게 안겼다. 곽열은 도련님을 뿌리치진 않았지만 눈을 질끈 눌러 감은 채 입술을 피가 나도록 세게 짓씹고 있었다. 곽열은 머뭇거리는 하인들을 놓아두고 방 도련님을 데리고 빈방을 찾아 들어갔다. 진해는 소란이 잦아든 것에 안도하다 일각이 되기 조금 모자란 시간에 곽열을 데리러 갔다.
“아방! 기다려, 아방!”
그런데 진해가 아래로 내려가는 층계에 발을 디디기도 전에 곽열의 거친 목소리가 온 여해루에 울려 펴졌다. 진해는 아방이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자기와 아방이라니. 방 도련님과 곽열은 생각보다 정인 놀이에 열중한 듯했다. 얼굴을 가린 채 울며 달려가는 도련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곽열의 표정이 그것을 고스란히 말해 주었다.
“왜 그래? 아직도 포기를 못 하시겠다고 그래?”
진해는 곽열을 당분간 미려방에 둘 생각을 하며 곽열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곽열은 어딘지 모르게 멍한 표정이었다.
“아니요, 아니, 네, 아니, 그건 아닌데…….”
“응? 왜 그래? 무슨 일이야?”
곽열은 어지간히 큰 충격을 받았는지 진해의 말에 제대로 답하지도 못했다. 진해는 곽열의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한 걸 보자 갑자기 가슴 한쪽이 덜컹거렸다.
“아무래도 회임한 것 같다고…….”
“뭣!!”
그리고 덜컹거리던 가슴은 곽열의 말을 듣자마자 십팔 층 지옥 계단 아래로 쿵 하고 내려앉았다.
“야 인마! 너 설마 도련님한테 결한 거야? 결한 거냐고!!”
쿵 내려앉은 가슴은 진해에게 곽열의 멱살을 움켜잡게 만드는 용기까지 샘솟게 했다.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도련님이 희락기가 와서 좋은 향이 나서 그냥…….”
“아이고!”
옥 사령 일에 신경을 쏟아도 모자란 마당에 예상치 못한 곳에서 문제가 터져 나왔다. 방 도련님은 생각보다 훨씬 맹랑하고 무서운 애송이였다.
“너, 일단 미려방으로 가. 방 도련님은 내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까 미려방에 가서 절대로 밖으로 나오지 마, 알겠어?”
“…….”
진해는 일단 방 도련님 댁에 드나드는 의원을 매수해 회임이 진짜인지 아닌지부터 판별하기로 했다. 하지만 방 도련님은 실연을 아픔을 치유하려는 듯이 별장으로 떠나 버렸고 방 도련님의 주치의도 도련님과 함께 떠나 버렸다. 진해는 자신이 보낸 사람이 도련님의 그림자도 보지 못하고 돌아오자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졸도할 뻔했다. 진해는 허둥지둥 남는 사람을 꾸려 도련님을 쫓게 했다.
* * *
옥 사령은 그런 진해의 속도 모르고 부어라 마셔라 아주 난리였다. 진해는 방 도련님의 소식을 기다리는 한편 옥 사령을 상대하느라 아주 죽어났다. 다행인 점은 아심이 동십사를 제대로 붙잡고 있다는 것이었다. 동십사 댁의 하인들이 동십사를 찾아 은밀히 돌아다니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진해는 그나마 마음이 놓이는 듯했다.
‘흥기단 효과가 생각보다 오래가는걸. 아심 설마 일이 안 돼서 동열넷을 죽인 건 아니겠지? 아니면 동열넷이 아심을 죽였다거나!’
진해는 저에게 잘해 준 동십사를 곤경에 몰아넣은 게 조금 미안했으나 동십사보다는 해산이 우선이었다. 해산에게서 이 더럽고 추잡하고 못난 놈을 떼어 내는 게 진해의 목적이었다.
“오 시위, 요새 감이 좀 떨어지는 거 같은데?”
“제가 감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 옥 사령님이 빨리 배우시는 거라구요! 제가 이 재주로 관직을 사기까지 했는데 옥 사령님이 따라오시는 속도는 못 당하겠네요!”
“하하, 이 사람 참.”
너스레를 떨며 말하긴 했지만 여러 가지 악재가 겹쳐서인지 그도 아니면 옥 사령이 해국 제일 무가라는 가문의 이름값을 하려는 것인지 옥 사령도 이젠 정말로 따는 날이 많아졌다. 도박꾼들이 진해에게 슬그머니 눈짓을 해 보였다. 이젠 자신들도 본격적으로 나서겠다는 신호였다.
일주일이 지나자 하나가 가세하고, 이 주일이 지나자 둘이 가세했다. 한 달이 되자 이젠 진해도 제 실력을 숨길 필요가 없게 되었다. 어느 순간 세살이도 애교를 떠는 대신 웃는 척 진해에게 옥 사령의 패를 암시해 주기 바빴다. 그동안 빼앗긴 금전을 되찾으려는 것처럼 옥 사령은 맹렬히 공격해 왔다. 본디 빼앗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힘든 법, 진해는 옥 사령을 아주 쉽게 이겨 버릴 수 있었지만 그리되면 자신의 계획이 탄로 날까 봐 머리를 써 가며 겨우 비등비등한 수를 맞추었다.
“아주 재미있어. 처음에는 그냥 돈에 관심 있는 양아치인 줄 알았는데 말이야.”
“무슨…… 말씀이신지요?”
옥 사령은 우아하게 패를 뽑았다. 여전히 술에 취해 있고, 여전히 세살이를 비롯한 동안의 기생들을 옆에 끼고 있었지만 손만큼은 민첩하고 재빠르기 그지없었다. 진해는 그 손속이 동십사의 움직임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아직도 잡아뗄 셈인가? 금 팔십 냥도 모자라는가 보군. 역시 자네는 보통 사람이 아니야. 보통 양아치가 그런 손을 갖고 있을 리 없지. 누가 보냈지? 황제? 창명후? 아니면 성월공?”
“……예?”
“하하, 그래. 그렇게 쉽게 털어놓으면 이야기가 아니 되지. 하지만 내가 단언하건대 금 백 냥이 되기 전 자네의 그 얄팍한 가면을 벗겨 낼 걸세. 그리고 해원공과의 혼인을 확정지어 가주 자리 역시 차지할 거란 말일세.”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진해는 너무나 뜬금없는 말에 황망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고, 가주 어쩌고 하는 소리를 듣는 순간 세살이, 즉 오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진해는 그날 처음으로 돈을 뜯겼다.
“아니 여기서 황제랑 창명 뭐시기가 왜 나와? 것보다 이 건방진 놈이 겨우 자기 집 가주가 되려고 해산 도련님을 이용하려 들어? 이런 고얀 놈!”
진해는 의아했으나 굳이 반박할 필요를 못 느꼈다. 그런 것보다 서해 옥가의 가주가 되기 위해 해원공과 혼인하려 한다는 말이 진해의 심기를 크게 거슬렀다. 만약 자신이 해산과 혼인한다면 진해는 해산을 누구보다 아껴 줄 자신이 있었다. 절대로 손에 물 묻히는 일이 없이 설거지도 빨래도 심지어 세수도 자기가 시켜 줄 수 있었다.
집에 혼자 있으면 심심하니 최대한 힘들지 않은 일을 찾아 맡겨 두고 자신은 일을 나가 해산의 배가 곯을 일이 없도록 열심히 일할 터였다. 저녁 무렵에 골목 입구에서 만나 반갑게 웃음 지으며 손을 잡은 뒤 집으로 돌아와 맛있는 저녁을 나눠 먹고 밤이 되면 옆집에서 시끄럽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열렬히 사랑을 나눈 뒤에 잠이 들 터였다.
그러나 해산은 진해가 부양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고귀한 이였다. 진해가 해산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쉽게 얻게 되면 쉽게 버려지고, 아무리 열렬한 감정도 시간이 지나면 퇴색되었다. 고귀한 이는 책임이 크고 큰일을 위해 작은 것을 버려야 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는 건 싫었다. 버려지는 건 죽어도 싫었다. 버려지지 않는, 버리지 않는 사랑을 원했다. 마음이 심란해진 진해는 낡은 패를 만지작거리며 집무실 구석에 마련된 침낭에 몸을 눕혔다. 해산을 언제 봤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문득 울면서 달려가던 방 도련님이 생각났다. 이 방에서 돌아서던 해산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해산 도련님도 방 도련님 같은 기분이었을까.’
한번 떠오르자 해산의 뒷모습이 눈꺼풀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진해는 한참을 뒤척이다 동이 틀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 수 있었다.
* * *
옥 사령이 이젠 술을 마시지 않았다. 기생을 끼고 주물럭거리는 건 여전했으나 멀쩡한 맨정신으로 진해와 대결했다. 진해는 생각보다 이 일이 쉽지 않다는 걸 인정했다. 이젠 패를 돌릴 때마다 손바닥에 식은땀이 가득했다. 옥첩려의 눈빛은 진해의 속을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았다.
그 눈과 마주칠 때마다 진해는 속이 메슥거렸다. 겉으로는 웃어 보이면서 속으로는 자신이 해산 때문에 저자를 싫어한다는 걸 알게 될 것 같아 식은땀이 났다. 진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저자가 진해가 가지지 못한 것들 덕분에 해산의 곁에 당당히 설 수 있다는 사실을 질투하는 진해를 알게 될까 봐.
“……근데 뭔가 잊고 있는 것 같은데.”
진해는 하인이 가져다준 차를 마시면서 자신이 벌여 놓은 일들을 돌아봤다. 동가소택의 별채, 즉 해국의 사신단이 머무는 곳에 차를 납품하던 이가 양이 줄었다며 불평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 말인즉, 옥첩려가 진지하게 나오는 게 이유가 있다는 말이었다. 옥첩려에게 허용된 금전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말이었다.
“아 참, 이 녀석들은 방 도련님이랑 만났으면 얼른 서신을 보내야지, 왜 안 보내고 있는 거야? 별장이 도대체 얼마나 멀길래 몇 주를 쫓아가냐고. 방 도련님이 정말 회임했다면 그 집 하인들이 주인 귀에 들어가기 전에 어련히 알아서 처리하겠다만…….”
아무래도 찝찝한 기분은 방 도련님의 회임 때문인 듯했다. 양인이 음인에게 결을 해도 확실하게 회임하는 건 아니었지만 혹시라는 것이 있었다. 방 도련님과 곽열이 서로에게 첫눈에 반한 것처럼 둘의 몸 역시 첫 결에 결실을 이루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허락받지 못할 아이는 존재가 드러난 순간 세상에서 지워질 터였다. 방 도련님이 아무리 고집을 부려도 방 도련님의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만들 터였다.
그걸 생각하면 가만히 있다가도 우울해졌다. 진해는 한순간의 돈에 정신이 팔려 방 도련님과 곽열에게 상처를 줬다는 사실을 후회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동십사한테도 아심을 소개해 주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면 아심이 동십사한테 가는 장면을 아무한테도 보여 주지 말았어야―
“헉, 흥기단!”
번개가 내리치는 것처럼 진해의 머릿속에 한 줄기 섬광이 내리쳤다. 진해는 자신이 줄곧 무엇을 잊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흥기단이 아무리 효험이 좋아도 이렇게 긴 시간을 끌 순 없었다.
“아심,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어디 숨었는지 아무도 모른다던데!”
흥기단의 효력이 끝내주기는 했지만 몇 주를 질질 끌 수는 없었다. 만약 흥기단이 그런 식의 효험을 발휘했더라면 탈정고와 마찬가지로 관의 수배에 오른 약물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동십사는 몇 주가 되도록 여해루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추피동의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아심 역시 동십사와 마찬가지로 오리무중 상태라고 했다.
진해는 십중팔구 둘 중 하나가 죽어 시체를 은닉하고 도망친 게 분명하다 생각했다. 그 생각을 하자 등에서 식은땀이 쫙 뿜어졌다.
“아야, 아야야―”
설상가상으로 배 속까지 콕콕 쑤셔 오기 시작했다. 의원을 부를 정도로 아프진 않아서 진해는 배를 움켜잡고 작게 앓는 소리만 냈다. 옥 사령 그놈은 술을 짝으로 마셔도 멀쩡하던데 진해는 왜 속이 아픈지 모를 일이었다. 이러다간 옥첩려를 보내기 전에 진해가 먼저 저승에 갈 것 같았다.
“차를 줄인 다음에는 뭘 줄이겠어. 흐흐, 조금만 더 하면 돼. 조금만…….”
진해는 따끔거리는 속을 차로 달래며 오늘은 어떤 놀음을 할 것인지 고민했다. 오늘에야말로 옥첩려의 재산을 단번에 줄여 버리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마침내, 진해가 고대하고 기다리던 밤이 찾아왔다. 근래 수입이 는 여해루는 새 나무를 심고, 새 등을 달고 새 종이 장식을 들여와 마치 신선의 연회장처럼 아름답고 풍성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아직 심사관이 오지 않았지만 심사관이 오게 된다면 이급은 떼 놓은 당상이라고 근처의 사람들이 쑥덕댔다. 과거 진해가 그토록 바라던 이급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진해에겐 여해루가 이급이 되든, 일급이 되든 상관없었다. 진해의 목표는 오직 옥첩려를 몰락시키는 것뿐이었다!
“그렇군. 황실은 아직도 해국에 앙금이 남아 있는 거로군.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까지 집요하고 교묘하게 나를 몰아세울 리 없어.”
옥첩려는 여전히 뜻 모를 말을 지껄여 댔다. 진해는 황실이고 나발이고 상관없이 네가 못나 나에게 휘둘리고 있는 것이라 말하고 싶었다.
“금 이십 냥.”
하지만 옥첩려가 묵직한 금덩이 스무 개를 탁자에 올려놓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자리에 있던 여해루 사람들의 시선이 모조리 금에 달라붙었다. 옥첩려에게서 팔십 냥을 뜯긴 했지만 그것은 시간을 들여 야금야금 뺏은 것이었다. 금 이십 냥이라는 거금은 이 거리에서 가장 번화한 기루라 할지라도 함부로 다룰 수 없는 금액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사신단의 우두머리라는 사령이라 할지라도 그 정도의 돈을 함부로 다룰 수는 없을 터였다. 옥첩려 개인의 재산이라 할지라도 해국 밖으로 나온 이상 그것은 단순히 옥첩려 개인의 것이라 하기 힘들었다. 해국 사신단의 이름을 단 이상 그것은 해국의 재산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런데 옥첩려는 그것을 단번에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찬란히 번뜩이는 금을 보자 진해도 잠깐 넋을 잃고 말았다. 여해루를 세우고 사람을 고용하는 데 금 한 냥 하고도 반이 들었었다. 그만큼이나 어마어마하게 큰 금액이었다. 망나니짓도 이 정도가 되면 사람이 달라 보였다. 진해는 어쩌면 함정에 걸린 건 옥첩려가 아닌 자신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무엇 때문에 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십 냥을 담보로 놀음을 하세. 자네의 뒤를 캐느라 팔십 냥을 건넸으니 불만은 없겠지?”
“그건 그렇지요. 그러면 저도 이십 냥을 꺼내 와서―”
“아니. 자네는 판돈으로 다른 것을 걸게.”
일단 진해의 방 안에 사십 냥이 보관되어 있으니 진해는 그중 반을 꺼내 와 판돈으로 걸려고 했다. 옥첩려가 무시무시하게 따라잡기는 했으나 이십 냥 안에서 놀음을 끝낼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옥첩려가 원하는 판돈은 이십 냥이 아니었다. 옥첩려는 판돈으로 다른 것을 원하고 있었다.
“자네는 판돈으로 자네를 걸어.”
“―네?”
“자네와 자네가 가진 모든 것들을 이십 냥을 주고 사겠네. 물론 내가 이 판에서 이긴다면 말이지.”
옥첩려의 말이 끝나자 여해루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진해는 저도 모르게 입을 헤 벌리고 있었다. 가장 먼저 움직인 건 세살이었다. 세살이는 소리 없이 여해루 밖으로 나갔고, 기생들은 뜨악한 표정을 지으며 진해를 바라보았다. 하인 중 하나가 놋쇠 주전자를 떨어뜨리자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쩐지 입만 열면 음인 욕을 해 대더니.”
“바보가 아니면 금 팔십 냥을 그냥 내줄 리가 없지. 홀렸네, 홀렸어.”
하나같이 진해를 경악하게 만들 소리였다.
“다들 조용히 못 해! 큰 손님 계신 곳에서 무슨 소란들이야!”
결국, 듣다 못한 진해가 빽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지만 진해를 향한 시선을 거두진 못했다. 기생들은 걱정 어린 눈길을, 도박꾼들은 똥 밟았다는 듯한 시선을, 마침 경비를 서려고 들어온 추피동의 주민들은 조금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곽열을 비롯한 추피동의 주민들은 진해가 누구에게 구애받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진해의 말에 고분고분 따른 것이기도 했다.
“전주 어른!”
“아니 넌 미려방에 있으라고 했더니 왜 여기 왔어?”
진해와 그나마 말을 많이 섞어 본 곽열이 추피동의 주민들을 대신해서 진해에게 말을 걸었다. 미려방에 있던 곽열은 몸이 안 좋은 다른 이를 대신해 여해루에 왔다고 했다.
“응하지 마십시오! 혹시라도 지게 되면 어찌합니까! 두목이 아는 날엔 저흰 다 죽은 목숨입니다, 저희를 가엽게 여기셔서 제발 물리십시오!”
“호오, 두목이라. 역시 뒷배가 따로 있었군.”
옥첩려는 진해의 속도 모르고 또 마음대로 헛다리를 짚고 있었다. 진해는 삼랑이와 진해의 오랜 인연을 옥 사령에게 말할 이유가 없었고 하기도 싫어서 그냥 지껄이도록 내버려 두었다.
“걱정 마. 걱정하지 말고 넌 경비나 잘 서. 혹시 모르니까 이 층에서 절대 내려오지 말고. 알겠어? 절대 이 층에서 내려오지 마.”
진해는 더 말하려는 곽열을 억지로 물렸다. 물리고 나서 잠깐 생각에 잠겼다. 저놈이 자신에게 욕정이 일어 그러는 것 같진 않았다. 욕을 하면서도 어리고 반반한 기생들을 틈만 나면 주물러 댔으니까. 그렇다면 저놈이 진해를 사려는 이유는 바로 저놈이 지껄이는 헛소리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진해는 저놈이 누군가가 진해에게 명하여 진해가 그를 털고 있다고 착각한다는 걸 깨달았다.
“좋~ 습니다! 이십 냥이면 이 몸 하나 팔아도 될 만한 금액이지요! 까짓것 해 봅시다.”
“어르신!”
“전주 나리!”
어차피 질 생각도 없었고 지지도 않을 거였다. 진해가 승낙하자 미려방의 일패 어르신과 추피동의 전 두목을 두려워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샘솟았으나 진해는 그들을 물리치고 솜씨 좋게 쫙 패를 깔아 버렸다.
“대신 제가 이기면 이십 냥은 물론이고 옥 사령께서도 제 소원을 하나 들어주셔야 합니다. 이왕 하는 놀음인데 크게 놀아야 하지 않겠어요?”
옥첩려는 진해가 패 위에 손을 얹은 채 의기양양하게 웃자 진해를 마주 보며 함께 웃음 지었다. 술과 방탕한 생활로 많이 상했으나 여전히 단정하고 미려한 얼굴이었다.
“좋아. 무슨 소원이든지 하나 들어주도록 하지.”
계약이 성사되자 진해는 옥 사령이 그렇게 노래를 부르던 뱀술을 가져와 커다란 그릇에 가득 부었다. 소매를 과장되게 펄럭이며, 새끼손가락을 집어넣더니 좋은 기운이 섞이도록 휘휘 젓기까지 했다. 옥 사령이 먼저 마시고 남은 것을 진해가 마셨다. 진해는 그릇을 던져 깨는 것으로 자신을 건 놀음의 개막을 선포했다.
총 세 판을 놀기로 했다. 진해는 다섯 판을 제안했지만 옥 사령은 무슨 자신감인지 세 판만 놀기를 원했다. 뭔가 미심쩍었다. 옥 사령은 바보였지만 아주 멍청이는 아니었고 자신이 진해에게 이길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도 저런 표정이었다. 마치 진해가 자신의 것이 되리라고 확신하는 오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천지가 개벽해도 그럴 일은 없을 테지만 손을 써서 나쁠 건 없지.’
진해는 이젠 제 실력을 숨기지 않고 패를 돌렸다. 진해가 패를 섞자 구경하던 관중들 사이에서 감탄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손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한 장 한 장 정확하게 패를 섞고 있었다. 도박꾼 하나가 경박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첫판입니다. 옥 사령님.”
끝수를 삼의 배수로 만들어 가장 큰 숫자를 만드는 이가 이기는 놀이였다. 예전에 동가소택의 하인들과 즐기던 놀이기도 했다. 옥 사령 역시 이 놀이에 제법 익숙해져 있었다. 옥 사령은 진해가 내준 패를 진지하게 받아 들었다. 표정은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나쁘지 않은 패군. 최악을 기대했는데 말일세.”
“옥 사령님을 상대로 속임수를 쓰진 않습니다. 저희 여해루는 속임수를 써서 손님 돈을 뜯을 정도로 저급한 가게도 아니고요.”
문제는 옥첩려가 여해루의 손님이 아니라는 점이었지만.
“그래? 진지한가 보군. 점점 마음에 들어. 해국에는, 아니 우리 서해 옥가에는 자네 같은 충직한 이가 필요해. 내가 가주가 된다면 내 아우와 자네를 혼인시키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서해 옥가의 이름에 흠을 낼 정도로 박색은 아니니 그럭저럭 데리고 살 만하다고 보는데.”
“구입니다. 옥 사령님.”
진해가 마음에 든다는 옥 사령과 반대로 진해는 가면 갈수록 옥첩려가 싫어졌다. 아우를 자신에게 장가보내려고 해서 더욱 그랬다. 자신이 형이라면 출신이 분명하고 배경이 튼튼하며 재산이 든든한 이에게 보낼 터였다. 다른 게 모자라도 선하면서 다정한 이를 물색할 터였다. 그런데 저놈은 자기랑 놀음이나 하고 기루나 운영하는 수상쩍은 놈에게 동생을 장가보내겠다 하고 있었다. 미려를 좋은 집에 장가보내려 전전긍긍하는 진해와는 상극이나 다름없었다.
진해는 옥첩려의 동생을 위해서라도 저놈을 따끔하게 혼을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 망할 놈의 금 이십 냥을 모두 빼앗은 뒤 점원복으로 갈아입히고 변소 청소를 시키기로 결정했다. 변소 청소를 거부한다면 홀딱 벗긴 뒤 이마에 패가망신이라는 종이쪽지를 붙이고 여해루 문 앞에 서 있게 할 셈이었다. 이 소문이 퍼지면 아무리 황제라도 해원공과 옥첩려를 혼인시키라는 말은 못 할 터였다. 체면을 구긴 황후는 물론이고.
진해에게 불똥이 튈 수도 있었지만 진해는 언제나 그렇듯이 능청스레 넘어갈 셈이었다. 아무리 친한 이라도 놀음 빚을 진 건 어찌하냐며 오리발을 내밀다가 적절한 때에 여해루를 팔아넘길 셈이었다. 힘겹게 기회를 얻은 잠춘동과 추피동의 주민들에게는 좀 미안했다. 그러나 지금의 진해에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옥첩려를 내쫓아 버리겠다는 생각만이 진해를 움직이고 있었다.
예상한 순서대로 옥첩려는 제 실력을 발휘한 진해의 발끝에도 못 따라왔다. 초심자치고는 빠른 속도로 패를 맞췄지만 옥첩려가 좋은 패를 맞췄다 싶으면 진해가 판을 나 버리고, 또 좋은 패를 잡았다 싶으면 진해가 더 좋은 패를 갖고 있었다. 어느새 두 번째 판의 막바지였다. 이번 판만 이기면 진해의 승리였다. 진해는 패를 바라보다 눈을 들어 옥첩려를 쳐다보았다.
“옥 사령님. 계속하시렵니까?”
패로 맞출 수 있는 수에는 한계가 있었고 진해는 그중에서 가장 좋은 패를 갖고 있었다. 진해는 아버지 운도 없고 연애 운도 없었지만 딱 한 가지 도박 운은 따라 줬다. 주사위를 손에 처음 쥐었을 때부터 진해는 자신이 도박 신의 가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물론. 황금 백 냥쯤이야 가주가 되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니까.”
그러나 진해는 어쩐지 자신이 점점 수렁으로 끌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진해의 말을 증명해 주듯이 옥 사령은 자신이 들고 있던 패를 뒤집더니 가볍게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옥 사령이 만든 숫자는 진해보다 턱없이 적은 숫자였다.
어쩐지 소름이 돋았다. 솜털이 바짝 곤두서는 감각이었다. 옥첩려는 그런 진해를 마주 보며 여유롭게 웃었다. 그리고는 소매 속에서 작은 호각을 꺼내 들었다.
“지금도 늦지 않았어. 자네 자신의 의지로 내 밑으로 들어오게. 자네가 내게 들어온다면 자네의 뒤를 봐주는 이를 알 수 있을 테고 그럼 우리 쪽에서 역공을 가할 수도 있어. 그렇게 된다면 해국, 아니 월국 전체를 우리 손에 넣는 것도 가능해. 나아가 이 대륙 전체를―”
“이 새끼 이거 단단히 미친놈 아냐!”
서해 옥가가 얼마나 대단한 가문인지는 몰라도 자식 농사를 망친 것은 분명했다. 진해는 가주가 되기 위해 해산과 혼인할 거라는 허황한 망상은 어찌 참아 넘겼지만 저놈이 월국을 손에 넣을 거라는 말은 도저히 참지 못했다.
진해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역병이 돌기 시작하자 나라에서 마련한 구호소에 보내졌고, 그 구호소에서 빈궁하게나마 의복과 식량을 챙겨 줬기 때문에 젖먹이인 미려를 데리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만약 현 황제가 구호소를 설치하지 않았다면 진해는 무관심 속에서 우부를 기다리다 미려와 함께 굶어 죽었을 것이다. 어쩌면 거지가 되어 떠돌고 있을지도 몰랐다. 어려운 팔고문은 몰랐지만 좋은 황제가 있어야 진해 같은 백성들이 살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적어도 옥첩려 같은 자식이 황제가 되어선 안 되는 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야 이, 반역자 새끼야!”
진해가 패를 집어 던지고 욕을 하자 옥첩려는 비뚜름하게 미소 짓고는, “나를 원망하지 말게.”라고 말하며 호각을 불었다. 높고 날카로운 소리가 허공을 가르자 구경꾼인 줄 알았던 손님들이 숨겨 놓았던 날붙이를 꺼내 들었다. 창과 문에서도 수상한 차림의 사람들이 불쑥불쑥 치고 들어왔다. 번쩍거리는 칼을 보자 심약한 기생 몇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
“아악!”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입구 쪽에서 익숙한 듯 낯선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진해는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었는데 왜냐면 지금 그 목소리는 도성을 떠나 자신의 별장에 가 있어야 할 목소리였고, 또 곽열에게 자신이 회임했다고 말했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목소리의 주인은 방 도련님이었다. 방 도련님은 별장에서 막 돌아와 여해루에 온 참이었는데 하필 그때 진해와 옥첩려가 대결을 벌였고 옥첩려가 판을 엎기 위해 호각을 분 순간 여해루의 연회장에 발을 들였다. 하인들이 놀란 도련님을 보호하기 위해 겹겹이 둘러쌌다.
“도, 도련님!”
진해가 정말로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옥첩려도 마찬가지였고 옥첩려는 잠깐 당황하다가 수하들에게 손짓해 도련님을 놀음판에 끌고 오게 했다. 진해는 창백해진 얼굴을 보자 옷깃이 빠르게 젖는 것을 느꼈다. 방 도련님의 얼굴이 창백해진 건 단순히 놀라서만은 아닌 것 같았다.
“제발, 살, 살려 주세요. 돈은 얼마든지 드릴 테니까……!”
“방 도련님, 괜찮아요. 괜찮으니까 숨 편안하게 쉬시고.”
“전주,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야. 이게 다 무슨…….”
진해는 끌려온 방 도련님을 진정시키려고 했다. 그러면서 흘끗 방 도련님의 배를 바라봤는데 세상에, 방 도련님이 끌려오는 와중에 양손을 자기 배에 얹고 꼭 감싸 쥐고 있었다. 회임하지 않았다면 굳이 저렇게 자기 배를 지킬 이유가 없을 터였다.
“옥 사령님, 제가 따라갈 테니까 다른 사람은 아무도 해치지 마세요. 네? 무슨 오해를 하시는지 모르겠는데 저희 좋게 이야기합시다.”
다른 나라의 사신보다 이 나라의 호부를 쥐락펴락하는 고관이 더 무서웠다. 그 고관이 해산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면 더욱 그랬다. 진해는 양손을 펼쳐 옥첩려에게 항복의 뜻을 표했다. 여해루에 모인 사람들은 옥첩려의 수하들에게 둘러싸인 채 덜덜 떨며 진해가 하는 양을 바라보았다.
“방금까진 날 따라가지 않겠다고 하더니 이 음인 놈이 오니 표정이 달라지는구나.”
옥첩려는 수하들에게 붙잡혀 있던 방 도련님을 거칠게 끌었다. 방 도련님의 입에서 새된 비명이 터지고 방 도련님의 하인들의 안색이 희게 변했다. 진해는 저 시발 놈이 또 헛다리 짚는다고 욕을 하려다가 옥첩려가 기분이 상해 방 도련님에게 손찌검이라도 할까 봐 유순한 태도를 보여 주었다. 방 도련님의 앳된 눈매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좋아. 이놈도 같이 데려가지. 얼굴도 반반한 것이 제법 어려 보이는구나. 오 시위와 얼마나 깊은 사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얌전히 굴면 하룻밤 은혜를 베풀어 줄 수도 있다. 명기를 가졌다면 측실로 삼아 주마.”
그런데 옥첩려 이 자식이 더러운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방 도련님의 턱을 들어 올렸다. 방 도련님은 겁에 질려 이젠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 진해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러다가 이 층의 난간 위에, 정확히 말하자면 난간의 기둥 뒤에 숨어 있던 곽열과 눈이 마주쳤다.
곽열의 눈은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추피동의 주민들이 제법 많이 포집해 있었다. 얌전히 투항한 듯했지만 추피동의 주민들이 무서워하는 것은 옥첩려 같이 곱게 자란 공자가 아니라 추피동에서 그들을 때려잡아 길들인 한삼랑이었다. 날붙이보다도 예리하고 날카로운 그들의 두목이었다.
그리고 진해 역시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삼랑이 자신에게 집착하는 것도 알았고, 자신이 끌려간다면 누구보다 이들이 큰 고초를 겪을 것 역시 알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진해는 큰 소리를 내지르며 노름판을 냅다 뒤엎어 버렸다. 진해가 노름판을 뒤엎자 옥첩려가 방비하기 위해 방 도련님을 멀리 밀어 버렸고, 방 도련님이 비명을 지르며 넘어지는 사이 곽열이 이 층에서 뛰어내려 옥첩려의 수하 하나를 깔아뭉갰다. 곽열이 움직이자 추피동의 다른 주민들도 주변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박치기, 발차기, 눈 찌르기 등 온갖 수단을 써 상대를 쓰러뜨린 뒤 무기를 빼앗아 즉시 반격에 나섰다.
무기가 없는 이들은 포위가 느슨해지자 비명을 지르며 여해루 바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아비규환을 연상시킬 정도로 혼란스러운 공간에서 진해는 사람들을 피해 엉금엉금 기어 넘어진 방 도련님에게로 다가갔다.
“방 도련님!”
“으아, 아, 칼이, 진짜 칼이…….”
“다 가짜예요! 다 가짜니까 제 곁에 꼭 붙어 계세요!”
진해는 바닥에 웅크린 채 배를 끌어안은 방 도련님을 보호했다. 방 도련님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고 싶었으나 안타깝게도 도저히 출구로 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여해루를 덮칠 작정을 하고 온 이들이었다. 여해루의 경비보다 훨씬 많은 수를 데리고 온 터라 추피동의 주민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그들을 모두 물리칠 수 없었다. 어느새 진해와 방 도련님, 추피동의 주민들은 옥첩려의 수하들에게 겹겹이 둘러싸이게 되었다.
비록 포위당했지만 추피동의 주민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팔을 다친 이도 다리를 다친 이도, 심지어 얼굴의 반을 피로 물들이고 있는 이도 있었으나 단 한 사람도 뒤로 물러나려는 이가 없었다. 오히려 옥첩려에게 보라는 듯이 피 섞인 침을 탁 뱉어 냈다.
겨우 추피동이라는 바닥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다른 이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기루 주변을 서성거리며 경비를 서는 일이었지만 다른 이의 피가 묻지 않은 깨끗하고 정당한 금전과 언젠가는 추피동에서 완전히 벗어나 새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얻었다. 그들이 이곳에서 버티고 있는 건 삼랑이 두려운 것도 있었지만 여해루라는 희망이, 그 여해루를 세운 진해라는 인물이 이 자리에 있기 때문이었다.
“…….”
“자기…….”
그리고 곽열은 이 자리의 누구보다도 굳건히 버티고 서 있었다. 곽열의 뺨 위로 뜨끈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곽열의 뒤에는 하인들과 떨어져 홀로 남은 방 도련님이 있었다. 다리를 후들거리며 겨우 버티고 선 방 도련님은 손을 뻗어 조심스레 곽열의 팔뚝을 그러쥐었고, 곽열도 머뭇거리다 자신 역시 손을 뻗어 방 도련님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방 도련님은 이제 두려움이 아닌 다른 의미의 눈물을 맺었다.
“좋게 좋게 이야기할 때 따라갈 것이지.”
옥첩려는 느긋한 태도로 양팔을 벌렸다. 그가 팔을 벌리자 얼굴을 가린 수하 몇이 기민하게 그의 구겨진 옷자락을 바로 해 주었다. 묻은 먼지를 털어 냄은 물론이다.
“어디 보자. 하나, 둘, 셋, 넷……. 제법 많구만. 데려가서 심문하면 한 놈 정도는 입을 열 수도 있겠어. 특히 저 비리비리한 음인 놈은 내가 직접 손봐 주도록 하지. 오 시위의 소중한 이인 듯하니 말이야.”
옥첩려의 시선이 방 도련님에게 꽂히자 곽열이 사납게 이를 드러냈다. 곽열은 방 도련님을 온몸으로 가려 버렸다. 옥첩려가 실실 미소를 짓는 시간만큼 진해를 비롯한 여해루 사람들의 가슴이 옥죄었다. 옥첩려가 언제 그들을 덮쳐 끌고 갈지 몰라 심장이 크게 두방망이질 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옥첩려가 신호를 하려는 것처럼 한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진격을 알리는 깃대처럼 옥첩려의 손은 여해루의 조명 아래서 번드르르하게 빛을 냈다. 꿀꺽, 누군가 크게 침을 삼켰다. 추피동의 주민들, 아니 여해루의 경비들이 무기를 쥔 손에 힘을 주었고 곽열과 방 도련님이 서로의 손을 빈틈없이 맞잡았다. 이들을 바라보는 옥첩려의 수하들 역시 굶주린 짐승처럼 눈을 빛냈다.
“하하하하!!”
그러던 그때, 진해가 아주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어찌나 크게 웃던지 모여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진해에게 쏠렸다. 광기가 든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즐겁고 명랑한 웃음소리였다. 옥첩려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신호를 보내려던 손을 내렸다.
“두려움에 미쳐 버린 건가. 곤란하군. 저놈이 가장 핵심인데.”
“하하, 미치긴 누가 미쳤다고 그래! 즐거워서 그런다, 너무 즐거워서 배가 터지려 해서 웃는다!”
진해는 여해루의 경비들이 만류하는 것을 뿌리치고 성큼성큼 두 걸음 정도 나아갔다. 그리고는 아주 당당하고 오만한 표정을 지으며 뒷짐을 지고 섰다. 그러나 당당한 태도와 달리 진해의 얼굴은 희게 변해 있었다. 얼굴은 창백한데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모양새가 척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옥첩려, 이 멍청한 놈! 제 몸이 불타는 것도 모르고 잘도 지랄을 하고 있구나! 내 비록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네놈에게 죽을지언정 절대 혼자 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 어찌 즐겁지 아니하겠느냐!”
“재미있군. 이 상황에서도 입만큼은 잘도 살아 움직이고 있어. 썩으면 아까우니 그 혀는 맨 마지막에 잘라 내도록 하지. 절여 두면 좋은 보신이 될 것 같구나.”
“그건 네가 그때까지 살아 있을 때 이야기지 이 멍청한 놈아. 옥첩려의 졸개들아, 잘 봐라! 지금 네 두목의 얼굴이 무슨 색인지를!”
옥첩려는 진해가 자신의 협박에 겁을 먹기는커녕 자신에게 삿대질을 해 대자 살짝 놀라고 말았다. 그러는 동시에 수하들의 시선이 꽂힌 얼굴을 만졌는데, 놀랍게도 옥첩려의 얼굴은 숯을 부어 놓은 것처럼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이 맹렬히 솟구치고 있었다.
“너, 너 이놈!! 이 천한 놈이 감히 이 몸에게 독을 써!!”
전투의 흥분인 줄 알았던 것은 인식하자 갓 피어난 불씨처럼 야금야금 옥첩려의 혈도를 잠식했다. 온몸의 신경들이 뜨끈뜨끈하게 달아올라 옥첩려로 하여금 제 향을 주체하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그에게 수하들 앞에서 아랫도리를 불룩하게 만들도록 하고 있었다.
“그럼 내가 네 허술한 함정을 앞에 두고 그냥 있을 줄 알았냐? 어떠냐, 내가 직접 탄 뱀술 맛이! 그렇게 뱀술뱀술 노래를 부르더니 독을 탄 줄도 모르고 꼴꼴 잘도 들이마시더구나! 꼴좋다, 옥첩려! 해독제가 없으면 넌 이제 죽은 목숨이야!”
“이, 이……!!”
옥첩려가 독을 당했다는 소리를 듣자 의술을 아는 듯한 수하가 서둘러 옥첩려의 맥을 짚었다. 그러나 그는 당황한 얼굴로 옥첩려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는데 옥첩려가 당한 독이라는 물건은 그가 생전 처음 접하는 물건이었던 것이다. 어찌나 맹렬하고 격렬한지 옥첩려의 양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크게 팽창하고 있었다. 향도 진하게 뿜어지는 것이 척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더욱 무서운 점은 이 독을 상쇄할 만한 게 없다는 것이었다. 수하는 옥첩려를 향해 황급히 고개를 저어 보였다.
“교활한 놈! 내 진작 네놈을 끌고 가 주리를 틀었어야 했어!”
“후회해 봤자 이미 늦었으니 염라대왕 볼 준비나 하시지. 나는 돌아가신 우부를 만날 준비를 할 테니 말이야.”
진해는 얼굴이 붉어져 씩씩 콧김을 뿜은 옥첩려를 향해 능청스럽게 웃어 보였다. 반면 진해가 옥첩려와 독을 먹었다는 것을 들은 여해루의 사람들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짓고 말았다. 긴박한 상황에서도 진해를 돌아보는 이가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들의 걱정과 달리 진해는 독이라고는 한 톨도 삼키지 않고 있었다. 옥첩려와 술을 마신 진해가 그러니 사실 옥첩려 역시 중독된 상태가 아니었다. 다만 옥첩려의 수하가 해국 사람인지라 월국의 낭중이 제조한 흥기단이라는 것의 존재를 몰랐을 뿐이었다. 진해는 아심에게 주고 남은 흥기단 가루를 뱀술에 슬쩍 섞어 넣었을 뿐이었다.
완전한 단의 상태가 아니고 미량의 가루인지라 약효가 나타나는 게 늦었지만 옥첩려를 당황하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문제는 옥첩려가 아닌 진해였는데, 진해는 옥첩려와 달리 흥분되기는커녕 이상하게 속이 콕콕 쓰려 왔다. 그 덕택에 옥첩려를 속이기는 쉬워졌지만 시간을 오래 끌면 진해 자신에게 위험이 닥칠 것 같았다. 진해는 이를 악물고 온 힘을 다해 자신이 동경하던 충열지사의 연기를 펼치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오진해! 해독제는 있는 거냐!”
“있기야 하지. 너한테 줄 건 없지만. 내가 약효가 빨라 네놈이 뻗는 걸 보지 못하는 게 참으로 아쉽기 그지없군. 반역자가 뒈지는 걸 보는 거야말로 내 평생소원이었는데 말이야!”
“젠장, 젠장!!”
여유롭게 웃는 진해와 대조적으로 옥첩려는 자신이 생전 처음 보는 독에 걸렸다는 걸 알자 급격하게 이성을 잃어 갔다. 뒤늦게 서해 옥가의 운기 조식법을 운용해 보려 해도 부풀어 오른 양물이 옥첩려의 집중을 방해했다. 망측하고 끔찍한 독이었다. 이대로 뒀다가는 혈관이 다 터지고 칠공으로 피를 뿜을 것만 같았다.
가주가 되는 것도, 해국을 손에 넣는 것도, 월국을 손에 넣고 대륙의 군주가 되는 것도 다 옥첩려가 살아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옥첩려 본인이 죽으면 모두 다 허사인 것이다. 물러나면 언젠가 또다시 기회가 올 터였다. 해독만 하게 된다면 준비를 단단히 해서 저 빌어먹을 오진해를 찢어 죽이고 뒤에 숨어 있는 놈도 끌어내 단번에 목을 칠 터였다.
“거래를 하자!”
옥첩려는 이를 득득 갈다 씹듯이 내뱉었다. 진해는 딱히 내키는 표정이 아니었다.
“저 음인 놈! 저놈의 목숨과 해독제를 바꾸자! 네가 그리 애지중지 싸고도는 걸 보니 분명 네 정인이겠지. 너도 피가 흐르는 인간이면 네 정인 놈이 불쌍할 것이 아니냐! 네가 벌인 판에 휩쓸려서 저리 고생하고 있는 게 말이다!”
옥첩려가 곽열의 뒤에 숨어 있던 방 도련님을 가리키자 곽열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방 도련님은 덜덜 떨리는 몸을 참지 못하고 이를 악물 뿐이었다. 진해는 미려와 비슷한 나이인 방 도련님을 바라보다 곽열과 눈을 마주쳤다. 곽열의 눈은 혼란스럽게 흔들리고 있었는데 진해에게 애원하고 싶은 마음 반과 진해에게 거절하라 하고 싶은 마음 반이 혼재해 있었다.
“좋아.”
진해는 약간의 시간을 두고 대답했다. 진해는 이 자리에서 가장 여리고 무고한 방 도련님을 살리기로 결심했다. 게다가 방 도련님은 한 목숨이 아닌 두 목숨이 아니던가.
“나, 난 안 갈 거야! 어떻게 나 혼자 밖으로 나가! 이러다가 자기가 다치기라도 하면, 그러면 나는, 우리 아기는……!”
진해는 방 도련님을 부축하며 천천히 여해루의 입구로 이동했다. 여해루 밖에는 도련님을 기다리며 하인들이 동동 발을 구르고 있을 터였다. 일단 밖으로만 나가면 방 도련님은 사람들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호부시랑의 조카(사실은 아들이지만)라는 명패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보호를 끌어내기에 모자람이 없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도련님은 진해에게 끌려가면서도 연신 뒤를 돌아보려 했다. 진해는 방 도련님이 뒤를 돌아보려 할 때마다 그러쥔 팔뚝에 힘을 주었다. 방 도련님이 진해와 아무 관계가 없다는 걸 옥첩려 저 비열한 놈이 알기라도 하면 이 거래는 순식간에 무용지물이 될 터였다. 진해가 일생일대의 연기를 펼쳐 얻어 낸 기회가 다 허사가 되는 것이었다.
“도련님, 뒤돌아보지 마세요. 그냥 이대로 쭉 가셔서 집으로 돌아가시는 겁니다.”
“그럼 우리 자기는? 우리 자기는 괜찮은 거야?”
“……만약 다시 만나게 된다면 제게 주신 소개비는 배로 돌려 드리겠습니다.”
“싫어, 난, 싫어, 내가 그동안 어떤 심정으로 살았는데, 그런데 여기 와서 이렇게 헤어지라구? 이게 마지막이라구?”
방 도련님이 발끝에 힘을 준 탓에 도련님을 부축하는 진해의 손끝에도 힘이 들어갔다. 옥첩려의 앞을 지나가는 것도 가슴 떨리는데 도련님까지 고집을 부리니 참으로 환장할 노릇이었다. 진해는 배 속이 시간이 지날수록 거세게 요동치는 것을 느끼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방심했다가는 메슥거리는 속을 다 토해 놓을 것만 같았다.
“자기!!”
결국 방 도련님은 긴장이 가장 극도에 달했을 때 진해의 손을 뿌리치고 곽열에게 달려가려 했다. 진해는 도련님의 손을 놓치는 순간 손끝이 차갑게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진해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터져 나왔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옥첩려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옥첩려는 진해에게서 벗어난 방 도련님에게 손을 뻗었고 그를 인질로 삼아 진해에게서 해독약을 얻어 내려 했다. 물론 화풀이 역시 참지 않을 셈이었다.
“으윽!!”
옥첩려가 진해에게 화풀이를 하기 위해, 진해에게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되는 이에게 상처를 입히려 검을 치켜든 순간 누군가가 방 도련님을 온몸으로 감싸 안았다. 굳건한 팔로 끌어안고 옥첩려의 검에 등을 내 주었다.
“안돼――!!”
방 도련님이 진해의 손을 놓는 순간 멀리서 옥첩려의 움직임을 감지한 곽열이 달려와 도련님을 감싸 안은 것이었다. 도련님과 지척에 있던 진해는 곽열이 달려오는 서슬에 바닥으로 사정없이 고꾸라지고 말았다. 눈앞에서 터지는 붉은 핏방울을 보는 순간 진해는 메슥거리던 속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뒤통수에 가해지는 충격과 뒤집히는 속이 진해의 정신을 한없이 혼란스럽게 했다.
“허엉, 자기, 죽지 마!! 내가 잘못했어, 자기, 제발 죽지 마……!”
바닥에 쓰러진 진해의 시야에 등을 붉게 물들이는 곽열을 끌어안은 방 도련님이 보였다. 방 도련님은 곽열을 끌어안고 오열했고, 여해루의 경비들이 쓰러진 진해를 보호하기 위해 달려왔다. 옥첩려가 뭐라 소리치는 게 들리는 것 같았다. 정신이 혼몽해 뭐라고 말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깜박깜박 점멸하는 의식 속에서 진해는 봉쇄되었던 여해루의 문이 부서지고, 어둑어둑했던 연회장이 환하게 밝아지는 것을 보았다.
“도련님을 구해라!!”
“화적을 잡아라, 오 대인을 반드시 구해야 한다!!”
간신히 뜨고 있던 눈이 감기기 직전, 각기 다른 군복을 입은 무리가 여해루 안으로 물밀듯 쏟아졌다. 한쪽은 진해가 알 수 없는 곳의 군복이었고 다른 한쪽은 진해가 익히 알고 있는 쪽의 군복이었다. 선두에 선 이는 진해가 아주 살짝 걱정하고 있던 이였다. 숯 검댕 같은 눈썹을 사납게 부라리며 옥첩려에게 달려드는 이는 내무부의 이등시위이자 진해의 후견인인 동십사였다.
“아, 살아 있었네…….”
진해는 방 도련님의 울음소리와 칼 부딪치는 소리를 뒤로하고 완전히 의식을 잃고 말았다. 눈을 감자 속을 난도질하는 듯한 고통도 물에 탄 듯 천천히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극도의 안락함 속에서 진해는 아주 오랜만에 잠에 취했다.
* * *
눈을 뜬 진해는 생전 처음 보는 천장에 조금 어리둥절해졌다. 삭막한 천장은 잠춘동의 집을 닮은 듯했다. 설마 이때까지 자신이 잠춘동 집에 누워 꿈을 꾼 것인가. 그 모든 것이 모두 일장춘몽이었는가.
“무슨 꿈이 이렇게 괴상망측하지?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꿈이야? 설마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 꿈이었던 건……?”
진해는 눈을 깜박이며 자신이 어떤 꿈을 꾸었는지 회상했다. 미려를 피해 도망갔다가 자신의 이상형에 딱 맞는 끝내주는 음인을 만나 아랫도리가 녹을 정도로 즐겁게 몸을 맞추던 기억이 났다. 그런데 그 음인이 알고 보니 황실의 유일한 황자마마셨고 자신과 몸 정이 들어 측실로 삼겠다고 말씀하셨다.
진해는 측실이 되기 싫어서 이리저리 잔머리를 쓰다가 삼랑이가 다 까발리는 바람에 마마가 화가 나서 돌아가셨고, 마침 마마에게 구혼하러 해국의 명문 귀족이 찾아왔고, 그런데 그놈이 쓰레기였고―
“개꿈도 이런 개꿈이 다 있네.”
진해는 손을 들어 제 뺨을 아프지 않게 두드렸다. 이젠 잠에서 깨어나 오늘 할 일을 찾아봐야 할 터였다. 열심히 일해서 혼수를 마련하고 그래서 진해에게 꼭 맞는 남편을 찾아야 할 터였다.
“응?”
그런데 이상하게도 진해의 발목에 묘한 물건이 달려 있었다. 진해는 보드라운 이불을 떨치고 제 발목을 물고 있는 물건의 정체를 확인하였다.
“뭐야, 이거?!”
진해의 발목을 감싸고 있는 물건은 참으로 투박하고도 못난 생김새를 자랑하고 있었다. 두껍고 단단한 것이 열쇠가 없으면 망치로 백번 두드려도 부서지지 않을 듯했다. 그것의 이름은 족쇄라고 했다. 하는 일도 생긴 대로 투박했는데 주로 죄수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할 때 쓰는 물건이었다.
“헉, 침상도 이상하잖아?!”
진해는 발에 족쇄가 달린 것을 보자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잠춘동의 집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상은 푹신했으나 딱딱한 돌로 만들어진 것이었고, 이불 역시 자신이 못 보던 낯선 물건이었다. 멀리 변기로 추정되는 큰 도자기와 식탁, 의자가 놓여 있었다. 벌떡 일어나 주변을 살피자 창살을 몇 배로 늘려 놓은 것처럼 커다란 나무 막대가 가로로, 세로로 박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놀랍게도 진해가 갇힌 곳은 감옥인 듯했다. 죄수치고 말끔한 옷과 푹신한 침상, 폭신한 이불을 받았지만 감옥 특유의 삭막하고 싸늘한 분위기를 숨길 순 없었다. 게다가 발에 달린 족쇄가 진해가 지금 어떤 신분인지를 말해 주었다. 진해는 온몸의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아얏!”
놀라서 그런지 배 속이 또다시 쑤셔 왔다. 농도가 옅어지긴 했지만 진해가 정신을 잃기 전과 똑같은 고통이었다.
“일어났느냐.”
“헉!”
그런 진해를 더욱 놀라게 한 건 창살 근처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장소 탓인지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음침한 빛을 띠고 있었다.
“해, 해산 도련님?”
“도련님이 아니라 마마겠지.”
창살 근처로 다가가자 창살 너머에 의자를 갖다 놓고 앉아 있는 해산이 보였다. 해산은 피곤한지 손가락으로 눈가를 문지르고 있었다. 정말로 오랜만에 보는 해산이었다. 콕콕 쑤시는 고통은 해산을 보자마자 씻은 듯이 말끔히 사라졌다. 진해는 꼭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양손으로 창살을 잡고 해산에게 바짝 다가붙었다.
“잘 못 주무셨어요? 좀 마르신 것 같아요!”
“이게 다 누구 때문, 아니, 됐다. 말해서 무엇하겠느냐.”
“식사는 제대로 하고 계시죠? 끼니는 거르지 말고 드셔야 해요. 그래야 속이 든든하지요.”
“…….”
해산은 창살에 매달린 채로 제 안부를 묻는 진해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듯싶더니,
“빌어먹을!”
앉아 있던 의자를 있는 힘껏 걷어차 버렸다. 의자는 진해의 맞은편 감옥에 부딪혀 박살이 났다. 동가소택의 것보다 허술한 싸구려인 모양이었다.
“너, 너!! 지금 그 꼴을 하고 내 밥걱정을 하고 있느냐?! 그 꼴을 하고 내 걱정을 하느냔 말이다!! 내게서 벗어나려 했으면 잘 먹고 잘살아야지 왜 그런 비루먹은 꼴을 하고 있어!! 무엇 때문에 쓰러질 때까지, 뭣 때문에 기절할 때까지 네 몸을 깎고 있어!!”
까칠한 얼굴을 한 해산은 진해를 바라보며 있는 힘껏 소리 질렀다. 해산이 저렇게 소리치는 걸 처음 본지라 진해는 무서움을 느낄 새도 없이 꽁꽁 얼어붙었다. 해산은 입술을 질겅거리다 세게 짓씹었다.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걸 참으려고 부단히 애쓰는 듯했다.
“해산 도련님…….”
결국 보다 못한 진해가 창살 밖으로 손을 뻗었다. 해산은 저를 향해 애타게 뻗어진 손을 외면하다가, 외면하다가 천천히 그 손을 향해 다가왔다. 진해는 손을 뻗어 가칠해진 뺨을 감싸 쥐었다.
“너 그간 대체 무슨 일을 벌이고 다닌 게야. 옥첩려와는 어찌 된 일이며, 호부시랑과는 또 무슨 일이야. 동십사랑은 또 무슨 일이고.”
“이야기가 좀 긴데…….”
“그런 것보다, 너야말로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는 게냐?”
“물론이죠, 여해루에 널린 게 산해진민데.”
“그럼 의원이 왜 네 속이 말이 아니라는 게냐.”
“네?”
“의원이 네가 쓰러진 이유가 예민해진 속에 강한 약물을 복용한 탓이라더구나. 과로와 속병이 겹쳐 쓰러지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라고 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아느냐? 네가 내 손을 떠나 그런 식으로 함부로 살 걸 알았다면 차라리 내 궁에 가둬 두고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도록 할 것이라고 몇 번을 후회했다.”
아하, 쓰러진 게 그것 때문이었군. 진해는 자신이 뒤통수를 부딪혀 쓰러진 줄 알았지만 사실은 속병이 그 이유인 듯했다. 진해는 살면서 한 번도 속병에 걸려 본 적이 없었지만 속병 걸릴 뻔한 적은 여럿 있었다. 어릴 적에 미려와 배급소에 갔다가 미려를 잃어버렸을 때라거나, 자신의 문제 때문에 사귀던 정인과 헤어졌을 때라거나.
가만 생각해 보니 이번에는 정말로 짚이는 게 많았다. 진해는 옥첩려를 상대하느라 밤을 새우는 일이 잦았고, 줄곧 술도 마셨으며 안주도 기름진 것이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눈을 뜨고 있을 때는 해산에 대해 생각했었다. 해산을 생각하며 줄곧 슬프고 애잔한 감정에 잠겨 있었었다.
저 중 한 가지만 있어도 속병이 날 텐데 저것을 몽땅 한꺼번에 겪었으니 속병이 나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진해는 속병 때문에 흥기단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었다. 흥기단이 효과를 발휘했다면 해산을 제정신으로 보지 못했을 것이다.
“으음, 확실히 속병에 걸릴 만했네요.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반드시 해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요.”
“반드시 해내야 하는 일이라는 게 혹시 옥첩려에 관한 일이더냐.”
“…….”
진해는 해산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입을 열면 자신이 옥첩려에게 가졌던 저열한 감정이 튀어나오고, 그걸 본 해산이 자신을 향해 미간을 찌푸릴 것만 같았다.
“안 그래도 네게 그걸 먼저 묻고 싶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으로 옥첩려에게 획책을 꾸민 것이냐? 그가…… 내 정군이 될지도 모른다는 걸 알고 있었잖느냐. 옥첩려 그자가 호부시랑의 조카를 겁박하는 바람에 호부시랑이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앞뒤 가리지 않고 사병을 풀어 여해루로 쫓아갔다가 너를 찾아온 동십사를 만나 같이 밀고 들어갔던 모양이야.”
도련님을 구해라고 외치길래 혹시 싶었는데 역시나 호부시랑이 방 도련님을 구출하기 위해 병사를 보낸 모양이었다. 진해는 문득 쓰러져 있던 곽열이 생각났다. 도련님을 대신해 칼을 맞았으니 죽지 않도록 적절한 치료를 해 줄 터였다. 문제는 도련님의 배 속에 든 것이었는데, 진해는 방 도련님의 아기가 떠오르자 뒤집힌 속이 또다시 요동치는 듯했다.
“무엇이 네게 그런 큰일을 벌이게 했느냐. 너는 그런 일을 벌일 정도로 고가 마땅치 않았느냐? 고의 정군이 될지도 모르는 자를 실각시킬 정도로 고가…… 미웠냐는 말이다.”
“엥?”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해산이 이상한 말을 내뱉었다. 진해는 깜짝 놀라 저도 함께 이상한 소리를 뱉고 말았다.
“누가요? 제가요? 제가 해산 도련님을 미워해요?”
“그게 아니면 네가 무엇 때문에 해국 사신단의 총령을 실각시켰겠느냐. 너는 해국과 한 점의 접점도 없는 몸이잖느냐. 고가 널 구속하려 해서 귀찮아졌던 게지. 그래서 고가 너를 잡을 수 없도록 해국의 총령을 실각시키고 고 역시 함께 실각시키려 했던 게지…….”
해산을 말을 하며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어찌나 쓸쓸한 표정인지 진해는 자신이 해산에게 뭔가 몹쓸 짓을 한 것 같았다. 물론 몸으로는 몹쓸 짓을 하긴 했었다. 하지만 해산의 곁을 떠나려 한 것은 해산의 지위가 부담스러웠고, 또 해산이 저보다 나은 짝을 만나길 바라서였지 절대 해산에게 해를 끼치려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손부터 잡았다면 조금 달라졌을까. 그러면 몸 정이 아니라 마음 정부터 들었을까.”
진해가 말을 잃자 해산은 손을 뻗어 제 뺨을 감싸 쥔 진해의 손을 덮었다. 인이 박일 곳만 박인 부드러운 손이 진해의 손을 귀한 것 다루듯 감싸 쥐었다. 이렇게 함께 있는데도, 서로의 체온을 나누고 있는데도 해산은 마치 다른 세상에 저 홀로 떨어져 있는 것만 같았다. 진해는 해산의 그 표정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게 여겨졌다.
“……부터 잡으면 뭐가 어때서요,”
“응?”
“손보다, 좆부터 잡으면 뭐가 어때서요! 그까짓 손보다 좆 잡기가 더 힘들거든요! 우리는 남들이 어려워하는 것부터 먼저 해결한 것뿐인데, 그래서 그런 것뿐인데 무슨 몸 정이 어떻고, 마음 정이 어떻고를 따져요!”
해산의 뺨을 감싸고 있던 진해의 손이 제 손을 감싸던 것을 떨어낸 뒤 이번엔 자신이 먼저 해산의 손을 잡았다. 제 손과 크기가 비슷한 손을 붙잡고 손가락 사이에 제 손가락을 빈틈없이 채워 넣었다. 그리고는 있는 힘껏 주먹을 쥐었다. 해산이 아픔을 느낄지도 모를 정도로 움켜잡아 빈틈이라고는 없게 만들었다. 진해의 손등에 굵은 핏줄이 불거졌다.
“자요! 자! 내 손! 참 나, 내가 도련님을 미워해서 옥첩려 그 새끼를 실각시켰다고요?”
“진해야―”
“그 새끼가 얼마나 쓰레기인 줄 마마님은 알고 계셨어요? 그놈은 술 좋아하고 떡 좋아하고 도박 좋아하는 인간 말종 자식이에요! 거기다가 도련님을 출세를 위한 도구로만 여기고 있었다구요! 내가 그런 놈이 어떻게 도련님과 혼인하게 그냥 둬요? 도련님 말대로 몸 정이 듬뿍, 든 도련님을 어떻게 그런 자식에게 그냥 내어 줘요? 차라리 죽고 말지, 절대로 그렇겐 못 해요! 도련님은 정실은 저보다 백 배, 아니 만 배는 훌륭한 사람이어야 해요! 그래서 도련님을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해 줘야 한다구요!”
진해는 그 뒤로도 한참 동안 옥첩려의 욕을 늘어놓았다. 해국은 사람 보는 눈이 똥이라느니, 서해 옥가의 자식 농사는 망했다느니, 그 핏줄을 그렇게 쓸 거면 날 달라느니 오만 가지 잡소리를 늘어놓기도 했다. 진해가 열심히 침을 튀기는 동안 쓸쓸한 표정을 짓고 있던 해산의 얼굴이 조금씩 밝아졌다. 해산은 제 손을 아프게 쥐고 있는 진해의 손을 자신 역시 힘 있게 그러쥐었다.
“그 썩을 놈, 고작 이십 냥 가지고 뻐기기는! 난 해산 도련님한테 더 드릴 거거든?! 한 해만 있어 봐라, 백 냥은 아주 우습게―”
“해야.”
“네?”
그리고 진해가 잠깐 틈을 보이는 순간 해산은 창살 사이로 손을 넣어 진해의 뒤통수를 끌어당겼다. 두꺼운 창살 사이로 간신히 드러난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대었다. 잠깐 머뭇거리던 진해도 다른 쪽 팔을 뻗어 해산을 끌어당겼다. 두 사람은 창살을 사이에 두고 오랫동안 굶은 것처럼 서로의 입술을 탐하였다.
“역시, 네가 아니면 안 되겠다. 네가 내 원군이 되거라.”
“……전 측실은 되기 싫어요.”
“원군의 자식은 정군의 자식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 걸 알고 있느냐? 원군은 정군과 마찬가지로 남편의 곁에 묻힐 특혜를 누릴 수 있다.”
“그래도…….”
“내 마음 같아서는 너를 정군으로 삼고 싶다. 오로지 너 하나만을 내 곁에 두고 너 하나만을 사랑하고 싶다. 그러나 고에게 얽힌 것들이 고에게 그것을 허락하지 않아. 고가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야.”
“…….”
“그러니 네게 약속을 하나 하마. 고는 네가 내 원군이 된다면 절대로 너에 대한 마음을 변치 않을 것을 약조하마. 만약 고의 마음이 변한다면…… 그땐 네가 고를 버리거라. 고를 세상에서 제일 비참하고 무참하게 버려 버리거라.”
“…….”
청혼을 받은 건 기뻤지만 진해는 역시 측실이 되기가 망설여졌다. 그러나 원군이라는 것이 보통의 측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특별한 위치이고, 또 해산이 해산의 마음이 변했을 때 그를 버리라는 말을 하자 그만 마음이 흔들리고 말았다.
“고는 앞으로도 이렇게 네 손을 잡고 있고 싶어. 절대로 네가 버림받았다는 기분이 들지 않도록 하마. 네가 절대로 측실이라는 기분이 들지 않도록 하마. 부디 고와 혼인해다오, 진해야.”
그리고 마침내, 해산이 진해가 거부하지 못하는 절대적인 말을 뱉었다. 버리지 않겠다는 말, 버림받았다는 기분이 들지 않게 하겠다는 말, 바로 그 말이 진해의 마음을 자극했다. 그것은 참으로 묘한 기분이었다. 진해는 자신을 버리지 않겠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었지만 그것을 완전히 믿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믿는 척하면서도 의심했고, 버려졌을 때는 결국 이리되었다며 쓰게 웃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해산의 말은 무턱대고 믿고 싶었다. 다른 이들보다 해산이 저를 버릴 가능성이 무궁히 큼에도 불구하고, 또 해산의 말이 비록 거짓이라도 모른 척 해산의 말에 넘어가고 싶었던 것이다.
“……좋아해요, 해산 도련님.”
온갖 일이 일어나는 잠춘동에서는 매일매일 온갖 일이 일어났고 때때로 사람의 논리로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일어났다. 특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 그랬다. 서로를 죽이고 싶으면서도 죽이지 못하고, 서로를 좋아하면서도 해치고, 서로와 함께 있고 싶으면서도 떨어지는 일들.
복잡하고 미묘하며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잡탕 같은 것이 바로 사랑이었다. 잠춘동 주민들은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아리송한 표정을 짓다가도 서로 좋아하는 사이란다, 라는 말 한마디에 모든 걸 납득하고는 했다.
그렇기 때문에 진해는 자신이 해산을 사랑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닳고 닳아 약삭빠른 오진해가 보신이며 이해며, 신념이며 규칙을 버릴 이유는 오로지 이것밖에 없다는 걸 순순히 인정하였다.
수천 가지 감정이 충만한 눈을 바라보며 진해는 다시 창살 사이로 해산의 입술에 입술을 맞붙였다. 맞잡은 손바닥 사이로 서로의 체온이 섞여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솜털처럼 부드러운 입맞춤이 끝나고 해산이 붉게 변한 이마를 차가운 창살에 기대었다. 그리고는 붉어진 입술을 열어 진해에게 말을 건넸다.
“그, 럼 이제부터 상소를 쓰는 걸 도와주마.”
“네……?”
“황상께 올리는 것이니 신경 써서 또박또박 써야 한다, 알겠지?”
그러나 달콤한 입술에서 나오는 말은 청천벽력과 같은 것이었다. 진해는 청천벽력과 같은 말에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고, 해산은 간수를 불러 옥을 열게 했다.
그 뒤로 진해는 해산의 감독 아래 자신이 쓸 수 있는 가장 반듯한 서체로 해산이 불러 주는 격식에 맞춰 또박또박 상소문을 적어야 했다. 해산은 진해의 글자가 비뚤어지자 사정없이 새 종이를 가져왔고 진해는 눈물을 흘리며 또다시 처음부터 새로 써 내려가야 했다. 결국 파김치가 된 진해를 보다 못해 해산이 진해의 글씨를 모사해 썼다. 진해는 침상 위에 누워 픽 고꾸라지고 말았다.
* * *
일이 처리되는 동안 진해는 여해루 사건의 책임을 물어 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다. 죄목은 관리가 기루에서 놀음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두침침한 감옥 안에서 진해는 두 가지 경사를 맞이하였다. 두 경사 모두 혼인에 관한 것이었는데 첫 번째는 곽열과 방 도련님의 혼인이었으며, 두 번째는 동십사와 아심의 혼인이었다.
“동 형,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진해는 동십사가 창살 밖에 선 걸 보자마자 침상에서 뛰어내려 땅바닥에 이마를 갖다 댔다. 동십사는 진해를 아주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내 자네에게 큰 실망을 했어. 오 제, 자네 어찌 내게 이럴 수 있는가!”
“이 동생 맹세코 동 형에게 누를 끼치려 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냥 아심이 동 형을 좋아하는 눈치라서 겸사겸사―”
“옥첩려 그자가 역심을 품고 있는 걸 알았으면 내게도 눈치를 줬어야지!”
“―응?”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그자를 해원공 마마의 정군으로 대우했지, 자네도 눈치챌 정도로 역심이 철철 넘쳐흐르는 자였는데 말일세! 하긴 이러니 자네가 나 몰래 일을 추진했겠지!”
일이 어찌 되었는지 진해는 역심을 품은 옥첩려를 잡기 위해 법에 다소 어긋난 수단을 쓴 것으로 되어 있었다. 양가죽을 쓴 늑대 같은 놈의 가면을 벗기기 위해 기지를 발휘해 그놈이 먼저 실토하게 했다는 식으로.
“흠, 흠! 그리고, 아심 일은 그― 고맙네. 나라는 놈은 눈치가 없어 아심이 나를 어흠! 그렇게 좋아하고 있는 줄은, 어흠, 흠!”
“…….”
어지간히 좋았구만. 진해는 동십사의 붉어진 귀를 어이없이 바라보았다. 아심이 무슨 수를 썼는진 몰라도 동십사의 몸과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은 모양이었다. 동십사는 진해의 어이없는 표정을 외면하고 자신과 아심의 혼례 소식을 통보했다. 놀라운 것은 아심을 측실이 아니라 정실로 맞이한다는 것이었으며 무려 보름 후에 혼례를 올린다는 점이었다.
동십사가 번듯한 명문 출신인 걸 생각하면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였다. 진해는 아심이 순식간에 출세했다고 생각하는 반면 동십사의 우부인 예부상서가 이 혼인을 순순히 허락해 준 것이 신기했다.
“하하, 그건 오 대인께서 저희 나리가 하시는 걸 못 보셔서 그렇습니다. 관에서 사람이 나올까 봐 겁이 난다니까요.”
“아니, 왜?”
동십사를 따라와 진해에게 각종 먹을거리를 넣어 주며 영 집사가 어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환한 미소였는데도 어딘지 모르게 그림자가 져 있는 미소였다.
“음……. 저희 나리의 체면 때문에 길게 말을 못 하겠지만 새 안방 나리께서 이 혼례를 처음부터 원하셨던 것은 아니라고만 말씀드리지요. 그리고 지금 오 대인과 비슷한 처지로 안채에 계시다는 것도.”
“헉.”
놀랍게도 동십사는 아심에게 상당히 집착하고 있는 모양이었 다. 진해가 전에 흥기단의 효과가 길어 의아해했었는데 사실 흥기단은 제대로 효험을 드러내고 사라졌으며, 아심은 진해의 말대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고 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는데 아심의 절절한 마음에 감화된, 사실은 자신도 아심에게 살짝 마음이 있었던 동십사가 정신 나간 맹견처럼 사라진 아심을 찾아 헤매기 시작한 것이었다. 동십사는 여해루에 발걸음을 하지 않는 동안 병졸들을 풀어 추피동이고 잠춘동이고 할 것 없이 샅샅이 뒤집어엎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아심은 거미줄 같은 추격을 피하지 못했고 동가소택에 잡혀 와 동십사와의 혼인을 강요받게 되었다! 아심은 진해와 비슷한 마음가짐으로 동십사와의 혼인을 거절했으나 동십사는 생각 외로 집요했다. 동십사는 아심의 입에서 좋다는 말이 나올 때까지 밤이고 낮이고 아심과 함께 있었다고 했다.
“나리께서 저러시니 큰 주인님께서 어찌 반대를 하시겠습니까. 솔직히 큰 주인님은 나리의 혼인을 반쯤 포기하고 계시기도 하셨답니다. 나리께서 일만 하시고 큰 주인님이 살짝 선보이는 양인들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으시니 저 애는 생전 혼인하긴 글렀다는 말씀까지 하셨다니까요.”
동십사가 평소에 얼마나 양인을 멀리했으면 그 꼬장꼬장한 예부상서가 허락을 했다. 동십사의 다른 형제들 역시 두말하지 않고 혼인에 찬성했다고 한다. 아심의 가문이 모종의 사건이 있어 몰락하긴 했지만 나름 뼈대 있는 가문이니 괜찮지 않겠냐면서.
진해는 아심에게 미안해해야 할지, 축하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돌아가는 동십사가 진해에게 자신의 혼례에 참석할 수 있도록 힘쓰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도 순수하게 기뻐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아심이 동십사를 좋아한다는 게 작은 위안이 되었다. 진해는 이제 아심과 동십사에 대한 생각을 관두기로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진해에게 의외의 손님이 찾아왔다. 간수가 허리를 굽실거리며 모신 손님은 아주 태연하게 간수가 대령한 의자에 걸터앉았다. 번쩍거리는 관복이 눈이 부셨다. 관모 위에 장식한 홍옥 역시 상급이었다. 척 봐도 부와 귀가 철철 넘쳐 흐르는 고관이었다. 진해는 이런 이가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알 수 없었다.
“소인은 감히 호부의 시랑직에 있는 자이올시다. 오 시위께서 간악한 역적놈에게서 제 조카를 지켜 주셨다고 하여 작게나마 감사를 하러 왔소이다.”
손님은 바로 방 도련님의 생부이자 백부인 호부시랑이었다. 호부시랑은 언뜻 푸근한 인상을 가진 듯했으나 눈매에는 노련함이 가득 고여 있었다. 진해는 손바닥에 식은땀이 쥐어지는 듯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인데 대인께서 이 누추한 곳에 발걸음을 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지요.”
“허허, 참으로 겸손하시오. 역적이 제 발로 기어 나오게 할 정도로 영특하신 분이 겸손하시기까지. 과연 해원공께서 사람을 허투루 두지는 않으시는 모양이오.”
그리고 다음 순간 진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진해는 동십사가 추천해 관직에 오른 것으로 되어 있는데 호부상서는 동십사의 동 자도 꺼내지 않고 곧바로 해원공, 즉 해산의 말을 꺼냈던 것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해원공보다는 동십사가 진해를 등용했다 생각할 터였다.
“그리 긴장하실 것 없소이다. 이 늙은이는 누구의 편도 아니오. 그저 남은 생을 편히 살고 싶은 것뿐.”
“…….”
“하지만 입은 은혜를 모른 척할 정도로 후안무치한 이도 아니올시다. 자식의 목숨을 구해 주시고, 훌륭한 측실과 귀여운 손자까지 보게 해 주었으니 어찌 이 은혜를 갚지 않을 수 있겠소.”
“츠, 측실 말입니까? 방 도련님이랑 곽열이 혼례를!?”
진해는 측실이라는 소리에 덜컥 내려앉은 가슴이 쑥 솟아오르는 걸 느꼈다. 귀여운 손자 이야기를 꺼내는 걸 봐서 아무래도 호부시랑이 말하는 측실은 곽열을 이르는 듯했다.
“이 늙은이는 과거 선황이 출정하는 것을 배웅하였소이다 . 황상과 함께 도성 안에서 동귀어진을 맹세했던 이이기도 하오. 후후, 그리고 그때 이 늙은이는 정말 귀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소. 아무리 큰 은혜를 베풀어도, 아무리 깊은 감정을 가졌어도 죽음의 위기 앞에서 사람은 손바닥 뒤집듯 변한다는 것을, 누군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큰 각오를 필요로 한다는 것 말이오.”
“…….”
“그 아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자식을 지켜 주겠지. 아이가 있다면 더욱 그럴 것이고. 그런 사람은 천만 금으로도 사기 힘든 법이오.”
머리가 허옇게 센 호부시랑은 그렇게 말하며 넉살 좋게 웃음 지었다. 도성에서 손꼽히는 부자인 호부시랑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선황이 붕어하고 태자의 시신이 도착하자 성 밖으로 도주하거나 항복을 권하던 수많은 대소 신료들을 알고 있었다. 그 역시 동귀어진을 맹세했지만 속으로는 두려움에 떨었던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자식을 위해 누군가 몸을 바쳤다. 정신없이 울고 있는 그 애에게 자신을 잊고 행복하라고 중얼거렸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늦둥이 막내아들이 통곡하는 것도 가슴 아팠지만 죽어 가면서도 아들의 행복을 비는 마음이 호부시랑의 심금을 울렸다. 그가 유배를 가게 된 것이 좌부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것도, 관리의 노여움을 사 쓸데없이 과도한 형벌을 받았다는 것도 참작했다.
“혼례식 때 오실 수 있도록 벗들에게 연통해 보겠소이다. 해원공 마마님께서도 참석해 자리를 빛내 주셔도 좋을 것 같소.”
호부시랑은 올 때와 마찬가지로 인자한 웃음과 함께 자리를 떴다. 진해는 가장 큰 문제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순조롭게 해결되자 조금 얼떨떨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진해는 방 도련님과 곽열의 아기가 무사히 세상에 나올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곽열이 죽지 않고 방 도련님과 혼례를 치른다는 사실이 즐거웠다.
쑤셨던 위장도 의원의 치료와 약 덕분에 거의 나아 가고 있었다. 진해는 어두침침한 감옥이 이젠 제법 안락하게 느껴졌다.
* * *
“빌어먹을, 빌어먹을!”
진해가 감방에서 각종 편의를 지원받으며 안락하게 지내는 한편, 옥첩려는 월국 관군에게 쫓기며 긴박한 상황을 이어 가고 있었다. 옥첩려를 도성 밖으로 빼내기 위해 그를 따르던 수하들 대부분이 목숨을 바쳐야 했다.
이대로 도망치면 해국의 사행단 역시 그 책임을 면치 못할 터였다. 사행단의 총령이 옥첩려였으니 그들은 분명히 고초를 겪게 될 터였다. 그러나 옥첩려는 해국이나 사행단에 대한 어떠한 생각도 하지 않고 그대로 도성 밖으로 달아났다. 자신의 야심을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이 다 들었으니 잡힌다면 역모의 죄를 물어 비참하게 죽게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일단 해국으로 돌아가자, 돌아가서 백부님께 목숨을 구명하는 거다, 그래! 그러면 돼!”
옥첩려는 일단 해국으로 돌아간 뒤 서해 옥가의 가주이자 자신의 백부인 옥길합에게 목숨을 구걸할 셈이었다. 옥길합은 조카들을 꽤 귀여워했고 웬만하면 그들의 요구를 다 들어주었다. 왜냐면 옥길합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해국 밖으로 오랫동안 유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국으로 돌아오지 못할 정도로 병약했기 때문에.
“총관이 돌아오면 길을 떠나자. 총관만 챙기면 가문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옥첩려는 겨우 서너 명의 수하만을 데리고 서해 옥가의 집사 중 하나이자 사행단의 수행 총관이 자신에게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총관은 서해 옥가에 목숨을 바칠 정도로 충성스러운 자였으므로 백부에게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빌어 줄 터였다.
“도련님.”
그리고 마침내, 옥첩려가 그리도 기다리던 수행 총관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옥첩려가 보낸 전갈의 내용대로 정말로 옥첩려를 찾아 홀로 도성 밖으로 나온 듯했다. 그 많은 인원들을 내버려 둔 채로.
“오오, 총관!”
옥첩려는 그가 자신을 찾아온 것을 확인하자 가슴속에서 뿌듯함이 차오르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 이번 일을 망쳤어도 자신은 여전히 고귀한 이이며 장차 서해 옥가의 가주가 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기대는 수행 총관의 뒤에 비치는 그림자를 보자 산산이 깨어지고 말았다. 수행 총관은 그의 기대를 저버리고 다른 이와 함께 옥첩려를 찾아왔다.
“처음 뵙던가요, 종형?”
총관의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마치 옥구슬이 구르는 듯 매끄럽고 영롱했다. 노래를 부르면 딱 맞을 듯한 목소리였다. 키가 크고 후리후리했으며 새까맣고 긴 머리칼을 갖고 있었다. 눈매는 옥첩려의 것과 닮았으나 훨씬 미려하고 도도했다.
“뭐야, 넌 누구냐! 누구길래 감히 날 형이라고 부르는 게냐! 서해 옥가에는 너 같은 놈이 없다! 내 종형제 중 너 같은 놈은 없었어!”
“도련님, 목소리가 너무 크십니다. 예의를 갖추십시오.”
“초, 총관!”
수행 총관은 옥첩려가 정체불명의 인물에게 소리를 지르자 미간을 찌푸리며 옥첩려를 제지했다. 사행길 내내 옥첩려를 극진히 모시던 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죄송합니다, 소가주. 첩려 도련님은 성정이 급하신 편입니다.”
“아니, 총관이 사과할 것 없어. 타고나길 저리 타고난 것을.”
“……소가주라고?”
“그런데 아무리 타고나길 저리 타고났어도 이번은 좀 심했어. 월국 정세를 살피고 사람을 사라고 준 돈을 놀음에 탕진하고, 기생을 끼고 희희낙락하고, 거기다가 함부로 월국 백성들을 겁박까지 하고.”
미려한 이가 옥첩려를 바라보며 옥첩려의 죄를 늘어놓는 동안 옥첩려의 뒤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나이보다 훨씬 어린 얼굴을 가지고 여해루에서 옥첩려의 시중을 들었던 기생이었으며 기명은 세살, 이름은 오호라고 했다. 오호는 물이 빠진 것처럼 무덤덤하고 냉정한 표정으로 옥첩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옥첩려를 호위하던 가솔들이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언제 다가온 것인지 그들의 뒤에 사람이 한 사람씩 붙어 있었다.
“서, 설마, 정말로 소가주? 백, 백부의 아들인, 오, 옥정려라고? 그럴 리가, 병약해서 못 움, 직인다고 들었는데……!”
옥첩려는 정확히 다섯 명의 수하들, 대대로 가주의 그림자가 되어 왔던 가신들의 숫자를 확인하자 눈앞에 선 이가 소가주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옥길합이 누구와 혼인해서 얻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옥길합과 장로들이 인정한 서해 가주의 단 하나밖에 없는 적자이자 후계자인 옥정려라고.
“그래야 잡석들을 골라낼 수 있으니까. 보세요, 당장에 이렇게 하나가 굴러 나왔잖아요?”
옥첩려가 상상치도 못한 상황에 덜덜 떨고 있는 동안 옥정려가 수행 총관의 앞으로 걸어 나왔다. 수행 총관은 가주가 없는 자리에서는 소가주인 옥정려를 가주와 같게 대하였고 허리를 조아리며 극진한 예를 갖추었다.
“흐억, 그, 그 얼굴은!!!”
그리고 옥첩려는 옥정려의 얼굴을 본 순간 비명을 참지 못했다. 옥정려의 눈은 서해 옥가 사람들의 그것이었으나 눈 외의 다른 부분은 절대로 옥정려가 닮아서는 안 되는 사람을 똑 닮아 있었다. 옥첩려의 부친은 입이 가벼운 자였고 때때로 장자인 옥첩려와 대화를 나누기도 했었다. 옥길합의 와병이 길어지자 가주의 무서움을 모르고 방자하게 옛이야기를 꺼내기도 하였다.
옥정려의 얼굴은 옛이야기 속에 나오던 이의 것을 빼다 박았다. 그를 아는 이가 본다면 기시감을 느낄 정도로 쏙 닮아 있었다. 옥첩려가 이럴 정도니 그를 아는 이가 본다면 옥정려가 그의 피를 이었음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옥첩려는 장로들이 어째서 알지도 못하는 이의 태에서 난 아이를 후사로 인정했는지 이해하고 말았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네가 태어났을 리가 없어, 네가 태어났을 리가 없다고!! 넌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 놈이야!!!”
태어나서는 안 되는 아이. 서해 옥가를 멸문으로 이끌 수도 있는 아이. 옥첩려는 자신의 백부인 옥길합이 얼마나 큰 모험을 했는지 알게 되었다. 오로지 가문만을 위할 줄 알았던 그가 사실은 이미 오래전에 가문에 미련이 없어졌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아마 종전과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을 것이다. 비극으로 분류될 만한 것이 마침내 꽃을 피운 것이다.
“말도 안―”
옥정려는 옥첩려가 발광하는 것을 보자 우아하게 소매를 펄럭였다. 긴 소매가 펄럭이는 사이로 은빛의 가느다란 실이 번뜩였다. 서해 옥가의 직계만이 가질 수 있는 금강사는 사냥하는 뱀처럼 빠르고 민첩하게 옥첩려의 목에 감겨들었다. 옥정려가 춤을 추듯 몸을 돌리자 옥첩려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새빨간 핏방울이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따르겠느냐, 죽겠느냐.”
옥정려는 흐트러진 머리를 바로 하며 일도와 이단 등 서해 옥가의 다섯 그림자에게 붙잡힌 이들에게 물었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이들이 무슨 대답을 했는지는 듣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옥정려, 아명은 강아지, 혹은 정미려라고 하는 이는 제 그림자를 비롯한 이들을 데리고 유유히 도성으로 돌아갔다. 옥첩려의 시신은 사흘이 지난 후에야 발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