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육등시위 오진해
잠춘동에서 좀 떨어진 어느 거리, 해가 진 지 오래건만 거리의 불빛은 꺼질 줄을 몰랐다. 그리고 이 탐화가에서 그리 구석지지 않은 곳, 그렇다고 아주 많이 드러난 곳도 아닌 어느 건물에서 데구루루 구르는 소리와 함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새로 지은 듯 나무 냄새가 다 가시지 않은 건물은 이름을 여해루(麗諧樓)라고 했다.
“자, 갑니다, 갑니다, 갑니다!”
여해루에서는 여흥이 한창이었다. 네 귀퉁이에 놓인 큰 향로에서는 연기가 쉬지 않고 피어오르고, 향기로운 연기 사이로 곰방대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섞여 들었다. 사방이 자욱한 가운데 하인들이 모시는 공자에게 바람을 부쳐 주거나, 땀을 닦아 주는 등 충실히 시중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오진해가 그릇 세 개를 민첩하게 섞는 중이었다. 그릇이 아니라 하얀 표면에 서역에서 수입한 푸른 안료로 그림을 그려 넣은 값비싼 술잔들이었다. 그릇을 복잡하게 섞던 진해는 어느 순간 손을 딱 멈춰 버렸다. 손을 멈추고 그것들을 수평으로 식탁의 가운데로 밀어 놓았다.
“옥 사령님, 어느 쪽으로 하시겠습니까?”
진해가 눈을 빛내며 탁자의 제일 상석에 앉은 누군가에게 물었다. 상아로 만든 긴 곰방대를 물고 있던 이가 두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얼굴은 이미 주삿빛이었다. 연기를 뿜는 입에서는 담배 냄새가 아니라 술의 냄새가 났다.
“신중하게 고르셔요, 나리. 나리가 지시면 제가 오늘 망신 톡톡히 당하게 된다구요.”
그리고 그 옆에 앙증맞은 외양의 소년 하나가 옥 사령으로 불린 사내의 팔에 달라붙어 있었다. 사실 소년이 아니라 눈가의 점이 고혹적인, 소년 같은 외양의 청년이었다.
“흐흐, 걱정하지 마라. 내가 아무리 취했어도 이 정도는 끄떡도 없어!”
“피, 거짓말! 나리가 두 판만 더 지시면 저 완전히 발가벗게 생겼는걸요? 나리, 거짓말쟁이야, 거짓말쟁이야!”
“흐하하, 이 녀석! 살살이라더니 정말 애간장을 살살 녹이는구나!”
“살살이 아니라 세살이!”
“오냐, 살살아~”
“아, 정말! 이게 다 오 형 때문이야! 왜 멀쩡한 남의 기명을 이상하게 불러 가지구!”
청년은 술에 취한 공자의 팔을 제 옆구리 끼고선 진해를 뾰족하게 흘겨보았다. 진해가 청년을 소개할 때 애간장을 녹이는 살살이라고 장난을 친 게 옥 사령의 머릿속에 딱 달라붙은 모양이었다. 진해는 유쾌한 듯 크게 웃는 동시에 반쯤 헐벗은 세살에게 슬그머니 손짓을 해 보였다. 뭔가를 기울이는 듯한 동작이었고 세살은 진해에게 불평을 하면서도 나긋나긋하게 움직여 옥 사령의 입에 자연스레 술잔을 대어 주었다.
“옥 사령님?”
“크허, 어, 으응?”
“어느 쪽으로 할까요? 우리 살살이 옷 한 겹에 천 냥씩인 거 기억하고 계시지요?”
“그럼, 그럼…….”
“아이고, 벌써 취하셨네. 그냥 오늘은 판 접고 다음에 할까요? 쯧, 해국 분들이 보기보다 술이 약하신가 봅니다. 같이 오신 일행들은 진작 뻗으시고. 에잉, 옥 사령님은 그래도 좀 다르신 줄 알았는데.”
“이놈이! 내가, 어! 내가 사령이야! 서해 옥가의, 어! 가주님이 내 백부님이시라고! 가운데, 가운데로 해!”
“옙, 그럼 열어 봅니다. 우리 세살이가 옷을 벗나 안 벗나. 자, 개봉 박두~!”
* * *
진해가 관직을 받게 된 건 지금으로부터 반년 전이었다. 탈정고 사건, 일명 낭중 피살 사건이 마무리된 지 한 달 후 동십사가 진해를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였다.
“오 제, 오늘부터 별채에 들어와 살게.”
“네? 싫어요!”
동십사는 진해가 거절할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한 듯했다. 뱉을 뻔한 찻물을 겨우 집어삼켰다. 그는 찻잔이 터질 것처럼 진중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부리부리한 눈매를 빛내며 진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니, 그게, 아, 진짜, 안 되는데…….”
“출입이 번거로워 그런 거라면 뒷문에 최대한 가까운 별채를 거처로 내어 줌세. 사람들도 자네가 마음에 드는 이로 골라 써. 영 집사 하는 말이 자네가 바깥채 하인들과 꽤 친하다고 하던데.”
“친하고 자시고 멀쩡한 제 집을 두고 어찌 동 형께 폐를 끼쳐요? 멀쩡한 집을 두고 남의 집에 주저앉으면 사람들이 절 얼마나 손가락질하겠습니까? 제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벌레가 뭔 줄 아세요? 바로 빈댑니다, 빈대! 저 빈대 되기 싫습니다!”
탈정고 사건 이후로 진해를 알아 온 동십사는 진해가 생각보다 담이 작다는 걸 알고 있었다.
“누구는 자네를 들이고 싶어 들이는 줄 알아!”
가끔 간이 부어 예상치 못한 사고를 치기도 했지만 진해는 꽤 겁이 많은 성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동십사는 성대에 힘을 주고 소리치듯 큰 소리로 말을 뱉었다.
“에구구!”
아니나 다를까 진해가 꼬리 밟힌 강아지처럼 움츠러들었다.
“휴, 오 제. 나라고 어찌 자네 심정을 모르겠나. 너른 바깥에 있다가 이 좁쌀만 한 집에 들어오려니 성에 안 차지?”
“세상에 어느 좁쌀이 이렇게 크다고…….”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나는 마마께 자네를 지킬 것을 명 받았어. 내가 자네의 후견이 되어 자네를 든든히 받쳐 주기로 약조했단 말이야. 자네가 갈 길이 멀어. 마마께서는 자네를 당장 해원공부에 데려다 놓고 싶으신 모양이지만, 그것만큼은 절대로 찬동할 수 없었지.”
해원공부, 즉 황자부란 이야기가 나오자 진해의 눈이 번쩍 뜨였다. 동십사가 반대했다는 말을 듣자 눈동자가 살짝 떨리기까지 했다. 동십사는 그것이 진해가 해원공부에 들어가지 못해 충격을 받은 거라 생각했지만―
“솔직히 자네는 아는 것이 너무 없어. 지금부터라도 우리 집에서 선생을 모셔서―”
“아이고, 감사합니다! 형님! 역시 동 형밖에 없어요! 동 형만이 제 살길을 열어 주시는군요!”
……사실은 그 반대였다. 진해는 해원공부에 들어갈 생각이 추호도 없었기 때문이다. 진해는 해산의 정체를 알게 된 후부터 감히 해산으로부터 떨어져 나갈 생각만을 하고 있었다. 진해는 누군가의 처음을 가지는 것도 부담스러워하는 소탈하기 그지없는 성격이었다.
“형님 말이 맞습니다! 저 같은 무지렁이가 어찌 황자부에 들어가겠어요! 괜히 애쓸 것도 없고 빈대 붙을 것도 없고 저는 그냥 이때까지 그랬던 것처럼 조용히~ 길게~ 평화롭게~ 살아가겠습니다! 세금도 꼬박꼬박 내고 이제부터는 그냥, 월국의 준법 국민으로 의무를 다하면서 살겠습니다!”
“뭐, 뭣?”
“이얏호, 해방이다!!”
동십사가 당황한 사이 진해가 이상야릇한 곡조의 콧노래와 함께 엉덩이를 흔들었다. 어찌나 신나고 즐거워 보이는지 동십사는 자신이 진해에게 뭔가 큰 선물이라도 한 줄 알았다.
하나 그것도 잠시, 동십사의 관자놀이에 크고 굵은 핏줄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동십사는 빈민에 가까운 진해가 해산의 곁에 있는 게 못마땅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진해 따위가 감히 자신의 주군을 거부하는 것 역시 마땅치 않았다. 아니, 전자보다 후자가 훨씬 괘씸했다. 자손 대대로 영광스럽게 여기고 기억해야 할 일을 재난처럼 취급하는 진해를 쥐어박고 싶어 손에 쥐가 다 날 지경이었다.
“이놈!! 감히 황실을 우습게 보는 게냐!!”
“헉! 아니, 그게 아니라, 갑자기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러세요! 동 형도 방금 제가 해원공부에 들어가는 걸 반대했다고 하셨잖아요!”
“반대했다는 게 아니라 당장은 아니라는 거지, 당장은!”
“그거나, 그거나! 어쨌든 전 해원공부에 들어갈 생각 없습니다! 저는 독자라서 남편을 들여 대를 이어야 된단 말이에요!”
“흐, 흐음. 그건 확실히 생각해 봐야 할 문제로군.”
그런데 마냥 괘씸하게만 여겨질 진해의 의견에 나름대로 합당한 근거가 있었다. 동십사는 진해가 독자라는 말을 듣자 그만 큰 고민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동십사는 겉보기엔 우락부락한 무관이었지만 예법에 정통한 이였고, 그렇기 때문에 가법과 가례에도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확실히 승은을 입고 황적의 끄트머리에나마 이름을 올리는 것은 개인에게 있어서 가장 크고 복된 일일 터였다. 하지만 겨우 측실이 되기 위해 이어야 할 가문을 팽개친다는 건 천륜에 어긋나는 패륜이 아닐 수 없었다.
동십사는 난관을 헤쳐 나가기 위해 입수했던 진해의 호적을 떠올려 보았다. 좌부란은 공석이고, 우부란에는 오씨가 적혀 있으며 강아지라는 이름의 어이없는 이름의 동생이 적혀 있던 호적을. 게다가 그 강아지라는 동생은 몇 년 전에 이미 다른 집의 양자로 들어가 있었다. 양부는 유랑이 잦은 이인지, 그것도 아니면 월국 사람이 아닌 건지 진해의 호적에는 적혀 있지 않았다.
어쨌거나 확실한 건 진해의 말대로 오씨 가문의 호적에는 진해 한 사람만이 남았으므로 대를 잇기 위해서는 진해가 반드시 남편을 호적에 들여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음, 그럼 이렇게 하도록 하지. 자네가 별채에 들어오는 게 싫다고 하니 그건 관두고 대신 우리 집으로 출퇴근을 하는 것으로.”
“에이, 싫어요! 내가 왜 동 형네 집 하인을 해요!”
진해는 동십사의 말에 즉각 항의했다. 이때까지 많은 사람이 진해의 손재주와 싹싹, 공손, 비굴한 성격을 높이 사 여러 대갓집의 하인 자리를 주선해 줬었다. 그중에는 무려 장군의 집도 섞여 있었다. 들어가기만 하면 평생 입고 먹을 걱정이 없는 그런 집도 있었었다.
“어허, 하인이라니! 자네는 해원공 마마의 크흠, 크흠! 그, 자네는 내 아우가 아닌가! 그런데 내가 어찌 자네를 하인으로 부려!”
“그럼요? 하인이 아니면 왜 출퇴근을 해요? 그냥 놀러 오는 거지.”
“자네가 아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부리는 이들이 모두 우리 집 사람인 것은 아니네. 내 사람인 건 확실하나 하인과는 다른 이들이지.”
“호오.”
“나는 자네를 그 사람들과 같게 만들 셈일세. 해원공 마마께 청을 드려 자네에게 구, 아니 팔품의 품계와 그에 맞는 관직을 하사해 달라 할 걸세. 자네는 내 밑의 시위가 되는 거지!”
“과, 과, 관직이요!?”
동십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해의 눈이 동그래졌다. 관직이라니, 벼슬이라니! 관직이라는 것은 오진해의 인생과는 거리가 먼 휘황찬란한 것이었다. 게으름뱅이 포교가 잠춘동에서 게으름을 피우면서도 잘 먹고 잘사는 게 다 관직이라는 걸 하고 있어서였다. 미려방에 찾아오는 조 공자가 다른 부잣집 자식들보다 대우받는 것 역시 그가 관직에 몸담고 있어서였다. 진해에게 있어서 관직이라는 건 밤하늘에 빛나는 별과도 다름없는 것 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동십사는 진해와 헤어지자마자 해원공 안해산을 만나 진해에게 관직을 내려 줄 것을 청하였다. 해산과 동십사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해산은 자신이 가진 임명장 중 하나를 써 진해에게 동십사가 청했던 팔품이 아닌 칠품의 품계와 육등시위 자리를 내려 주었다.
그리하여 오진해는 단번에 칠품 관리가 되어 하급 시위의 감색 관복과 녹색 수건을 걸치는 걸 허락받았다. 진해는 동십사의 집에서 관복으로 갈아입고 위풍당당하게 길가를 거닐었다.
비단 관복은 햇빛 아래서 찬란하게 광채를 뿜어냈다. 거드름을 피우며 걷던 진해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급히 어딘가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진해가 도착한 곳은 익숙한 동네의 입구, 잠춘동에서도 가장 번화한 골목이었다.
“엣헴!”
“진해 형? 오랜만이네, 얼굴 좀 자주 보여! 국수는 언제 사 줄 건데?”
“후후, 그깟 국수! 열 그릇이든 백 그릇이든 사 주지! 지금 국수 따위가 문제가 아니야!”
“응? 웬일이래? 오늘은 판을 좀 크게 벌렸어?”
“어흠, 어흠!”
오늘은 이단과 사생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진해는 문지기 형제 중 가장 친한 이단의 앞에서 한껏 으스대며 걸어 보였다. 먼저 눈치챈 건 사생이었다. 일도가 사람의 감정에 둔하다면 이단은 사람의 복장에 둔한 이라 사생이 아니었다면 진해는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한참을 돌고 나서야 자신의 출세를 알릴 수 있었을 것이다.
“형, 설마 집 팔았어?”
이단은 진해가 관복을 입고 있는 것을 알아챘음에도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진해 자신이 인정했듯이 잠춘동의 막일꾼 오진해가 관직에 오를 가능성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단은 진해에게 너 설마 뇌물 주고 관직 샀냐라고 아주 점잖게 돌려 묻고 있었다. 집을 팔아서 관직을 샀냐고 그렇게 말이다.
“야! 내가 멀쩡한 집을 왜 팔아!”
“쥐콩만 하지만 잠춘동에서 그나마 멀쩡한 집이니까 팔면 어떻게 병졸 자리 하나쯤은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망할 녀석을 보았나, 내가 잠춘동 만재야, 만재! 재주가 만 가지는 넘어! 관직쯤이야 누워서 떡 먹기지!”
“뭐, 그렇다고 치고. 어쨌든 축하해, 진해 형. 아니 이젠 오 대인이시지.”
이단과 사생은 진해가 생각했던 것만큼 성대히 환영해 주지 않았다. 오히려 진해가 관직을 얻기 전이 훨씬 더 기꺼운 듯했다. 진해는 망할 녀석들이라고 시부렁대며 미려방으로 발을 들였다. 곰탱이 일도의 동생이라 그런지 다들 무심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미려는 다를 터였다. 형인 진해가 관리가 되었으므로 진해의 동생인 미려 역시 관리의 동생이 되었다. 피가 이어지지 않았지만 미려는 진해의 유일한 가족이었다. 미려가 생부에게 간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미려가 이 월국에 있는 한 미려는 진해의 하나밖에 없는 사랑스러운 강아지였다.
“미려야! 미려야!”
진해가 방정맞게 층계를 오르자 쉬고 있던 기생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것도 잠깐, 진해를 발견하자마자 한숨을 쉬며 안고 있던 비파며 이호(二胡)를 그러쥐었다. 진해가 층계를 거의 다 올랐을 무렵 아래층에서부터 쓸쓸하고 서글픈 선율이 울려 퍼졌다. 애틋한 선율은 듣는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듯했다.
“오 형.”
일패의 방 앞에는 일도가 서 있었다. 일도는 흰 사발이 받쳐진 향목 쟁반을 들고 있었는데 그 뒤로 눈 밑이 새까만 집사와 부집사가 함께 서 있었다.
“왜들 이러고 서 있어? 왜 그래? 미려 어디 아파?”
“그야 저희도 모르죠! 안에 계신 게 저희 일패 어르신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진해가 조심스럽게 묻자 시체 같은 안색의 부집사가 꽥 소리쳤다. 진해는 더욱더 영문을 알 수 없어졌다.
“미려 방에 미려가 없으면 누가 있는데?”
“물론 일패 어르신의 방에는 일패 어르신이 계시지요. 어르신의 방에는 어르신의 명 없이 누구도 드나들 수 없습니다. 하나 지금 안에 계신 것은 평소의 근엄하신 일패 어르신이 아니십니다. 그러니까 안에는 지금…… 소구(小狗) 공자가 자리하고 계십니다.”
“아하…….”
소구 공자, 일명 강아지 공자. 미려방 사람들은 기생들의 우두머리이자 방주의 대리인 미려를 함부로 강아지라 할 수 없어 소구 공자라 돌려 말했다. 그리고 소구 공자가 나오는 날은 미려방에 있어 흉일이나 다름없는 날이었다. 정미려는 미려방 사람들의 존경과 복종을 한 몸에 받는 훌륭한 일패였지만 진해의 동생인 강아지 공자는 일패와는 꽤 거리가 먼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에구, 아직도 화가 안 풀렸나 보네. 밥은 먹었고?”
강아지 공자는 응석받이에다 기분파였다. 고집도 세고 삐지기도 잘했다. 거기다 울기는 또 얼마나 잘 우는지 한번 울기 시작하면 진해의 혼이 쏙 빠질 정도로 불쌍하게 울어 댔다. 진해는 일도가 고개를 가로젓는 것을 바라보며 거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거 이리 줘. 내가 가서 달래 볼게. 애초에 나 때문에 화가 난 거니까. 집사 어르신이랑 부집사 어르신은 급한 서류 있으면 쟁반 위에 같이 올려 두고.”
집사와 부집사는 진해의 말을 듣자 어둠 속에서 광명을 찾은 것처럼 눈을 빛냈다. 두툼한 서류 뭉치 중 가장 위의 것을 향목 쟁반 위에 올려놓았다.
“오 형. 다른 건 몰라도 죽은 꼭 드시게 해.”
“알았어. 이 진해 대인만 믿어. 내가 당장에 일패 어르신을 모셔 올 테니까.”
진해는 미려가 집을 뛰쳐나간 이후로 보지 못했다. 여러 가지 일이 겹쳐 미려를 찾아올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곰탱이 일도의 얼굴이 까칠한 걸 보니 아무래도 미려는 그때부터 줄곧 방에 처박혀 있었나 보다.
“강아지야, 우리 강아지 자니?”
일도가 문을 열어 주자 진해는 쟁반을 받쳐 든 채로 조금 과장된 어조로 지껄였다. 정오의 햇빛처럼 밝은 웃음을 지으며 성큼 어두운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은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찢어진 옷가지며 집어 던진 듯한 서책 등이 방 구석구석에 널려 있었다.
‘화장실은 어떻게 간 거지?’
진해는 꼭 저 같은 생각을 하며 성큼성큼 미려의 침상으로 다가갔다. 가는 도중 옷가지에 발이 걸려 한 번 넘어질 뻔했다. 진해 특유의 기민함이 없었다면 죽 그릇을 내동댕이치고 말았을 것이다. 난장판에 또 하나의 얼룩을 더해 주었을 것이다.
“우리 아기 강아지 자나요~?”
침상 가까이 다가갈수록 화사한 향이 진해졌다. 꽃이 만개하는 듯한 향내가 진해의 코를 간질였다. 언제 맡아도 근사한 향이었다. 미려는 외양뿐만 아니라 향만으로도 가히 월국 제일 미인 자리를 차지할 터였다.
“……안 자요.”
진해가 휘장을 걷자 도톰한 이불 아래서 자그마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꿈지럭거리더니 이불 위로 새까맣고 윤기 나는 머리채가 죽순처럼 천천히 솟아올랐다.
“안 자면 밥 먹어야지, 응? 왜 밥도 안 먹고 자고 있어. 밥을 안 먹으면 기운이 나질 않잖아.”
진해는 발긋발긋하게 물든 눈가를 외면하며 죽을 한 숟갈 크게 떴다. 죽은 공복이 아닌 진해가 보는 것만으로도 군침이 돌 정도로 맛있는 냄새가 났다.
“……싫어.”
산발이 된 긴 머리채가 죽을 보다 고개를 흔들었다. 평소라면 진해가 이렇게 아기처럼 다독여 주는 것만으로도 화가 풀리는데 오늘은 평소보다도 배는 화가 난 듯했다.
‘하긴. 하필이면 삼랑이랑 그런 야릇한 분위기를 만들다 걸렸으니.’
다른 때라면 몰라도 이번만큼은 진해가 정말로 잘못한 것이었다. 삼랑은 강아지를 돈 많은 노친네의 첩실로 팔아넘기려던 한씨 형제의 동생이었다. 게다가 한씨 형제를 말리면서 진해가 제법 많이 다쳤었다.
한이는 진해가 격렬하게 버둥거리자 화를 내며 팔을 비틀었고, 진해는 비틀린 팔로도 버둥거리다가 그만 팔이 어긋나고 말았다. 한 팔로 한일을 잡은 진해는 제 몸이 질질 끌려가자 이로 한일의 바짓가랑이를 물고 늘어졌었다. 미려는, 아니 강아지는 진해에게 그냥 자신을 포기하라고 외쳤었다. 당시 잠춘동의 두목이었던 한일이 진해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제발 더는 다치지 말라고 했었다.
그래도 진해는 놓지 않았었다. 진해는 제 이가 몽땅 빠질 것처럼 흔들려도 한일에게 손을 밟혀도 결코 강아지를 포기하지 않았었다. 기적처럼 나타난 정 방주 일행이 아니었다면 진해는 합죽이가 된 채로 한씨 형제의 부엌데기로 살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휴, 그럼 이 죽은 어떡하지? 형아가 우리 강아지 주려고 가져온 건데. 어쩔 수 없지. 보니까 일도가 밥도 못 먹고 서 있던데 일도한테나 줘야겠다. 에휴, 아까워라, 아까워.”
“……잠깐만.”
진해가 죽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미려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진해를 불러 세웠다. 진해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로 미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네가 먹기 싫으면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먹여 줘…….”
며칠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은 탓인지 미려의 목소리가 완전히 쉬어 있었다. 진해의 가슴 깊은 곳에서 애틋한 것이 샘솟았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다고 해도 젖먹이 시절부터 진해가 기른 아이였다. 월국 제일의 미인이라 칭송받고, 미려방의 우두머리나 마찬가지인 일패 어르신이 되었음에도 진해에게 있어 미려는 아이나 마찬가지였다. 덜 자라고 덜 성숙한 풋내 나는 어린것이었다.
“그럼! 당연히 먹여 줘야지. 이 형아가 우리 강아지 먹여 주려고 갖고 온 거라니까? 우리 미려가 밥을 안 먹으면 형아도 밥을 먹어도 먹은 것 같질 않아. 우리 강아지가 아프면 이 형아 가슴속이 바싹바싹 타들어 간다구.”
진해가 호들갑을 떨며 죽을 뜨자 미려는 그제야 한술을 받아먹었다. 진해는 미려가 죽을 씹는 동안 손을 뻗어 산발이 된 머리칼을 쓸어 올려 주었다. 다른 사람이 며칠 동안 이러고 있었다면 거지꼴이 따로 없었을 텐데 미려는 선인이 실수로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가냘프고 서글프고 처연하며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미려에게 목매는 조관림이 이 모습을 본다면 철철 울면서 온갖 것을 다 해 바쳤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그러고 있긴 하지만.
“아이구, 잘 먹는다. 우리 강아지! 귀여운 내 새끼! 옳지, 옳지!”
진해가 정말 어린애를 어르듯 죽을 떠 주자 미려의 귓불이 새빨갛게 물이 들었다. 진해를 밉지 않게 흘겨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절대로 받아먹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방금까지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고 있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가뿐하게 죽 한 사발을 다 비워 버렸다.
죽 한 사발을 다 비우자 그제야 미려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왔다. 영근 꽃봉오리에 물이 드는 것처럼, 덜 익은 열매에 색이 드는 것처럼 발긋한 기운이 백옥처럼 하얀 뺨 위에 맺히기 시작했다.
‘응? 뺨에 저게 뭐지?’
진해는 흐뭇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는 와중 미려의 뺨에 희미하게 그어진 굴곡을 발견했으나 미려의 체면을 생각해서 그것을 모른 척하기로 했다. 다른 쪽 뺨에 머리칼 뗀 자국과 베개 눌린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야, 다 먹었네! 잘했어, 이건 상!”
대신 자국이 남은 곳에 쪽 소리를 내며 입을 맞췄다. 미려는 진해가 자국 위에 입을 맞추자 간지러운 듯이 어깨를 움츠렸다. 방금 밥을 먹은 애한테 일거리를 줄 생각이 없어서 진해는 미려를 돌려 앉히고 머리를 빗겨 주기로 했다. 옛날부터 미려의 머리를 빗기는 건 오롯이 진해 한 사람만이었다. 진해 자신의 머리는 대충 묶었으면서 미려의 머리는 온갖 정성을 다해 곱고 예쁘게 묶어 주었다. 좌부우부 없다는 소리를 듣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기름, 기름이. 아, 여기 있네. 미려야, 상아 빗이 좋아? 향목 빗이 좋아?”
미려 역시 진해에게 머리 맡기는 걸 가장 좋아했다. 어릴 적에는 양 갈래로 묶어 뭉친 뒤 자잘한 무늬가 든 천으로 감싸 묶어 주었었다. 세간에서 흔히 만두 머리라 불리는 머리 모양이었었다. 진해는 미려의 머리 위에 봉긋하게 솟은 만두 두 덩어리를 볼 때마다 참을 수 없는 깜찍함에 몸부림쳤었다.
“형아가 좋은 거로.”
“상아는 내가 안 써 봤으니까 향목으로 하자. 그냥 빗고 묶기만 할게. 나중에 다른 사람 불러서 다시 정돈해?”
이제는 미려의 덩치가 커지고 몸가짐에 더욱 신경 써야 하는 위치에 이르게 되어 진해가 미려의 머리를 손질할 일이 없어졌다. 그래도 왕년의 솜씨가 어디 가지 않는다고 진해는 미려의 길고 매끄러운 머리칼에 향유를 바르고 빗고, 또 바르고 빗어 윤기 나는 비단처럼 만들어 놓았다. 빽빽하게 들어찬 가닥들이 빗살 사이로 지나갈 때마다 진해는 농작물을 수확하는 농부처럼 신이 났다. 저도 모르게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런 진해의 콧노래를 들으며 미려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정미려는 한삼랑과 새롭게 나타난 골칫덩이를 생각하고 있었다. 미려 본인 입으로 말했던 것처럼 그는 이 잠춘동을 철저히 통제하고 정비하고 있었다. 미려방을 세운 것도 그 계획의 일환이었다. 실제로 미려방이 생긴 후로 잠춘동의 생활이 몰라보게 좋아졌던 것이다.
그런 정미려가 한씨 형제 놈들이 미려방에 기웃거리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 오진해가 따르는 낭중 형제와 접선한 걸 모를 리도 없었다. 정미려는 처음부터 한씨 형제들이 미려방에 탈정고를 반입하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두고 있었다. 미려방에 신분을 속인 손님이 들어오는 것까지도.
평소의 정미려를 생각하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 일의 가운데에 오진해가 자리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정미려가 무엇을 하든 그것은 모두 오진해를 위한 일이었고, 어떤 것을 하던 그것 역시 오진해를 위한 것이었다. 정미려는 오진해의 것이었다. 오진해가 정미려를 받아 주지 않아도 정미려에게는 오진해 한 사람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의 뜻대로 결국 한씨 형제는 성공적으로 제거되었다. 어차피 진해 때문에 목숨을 붙여 둔 놈들이었다. 추피동 근처에서 모은 소문 속에서 한삼랑이 예물이 될 만한 것들을 보고 다닌다는 소문만 듣지 않았더라도 미려도 이렇게 모질게 굴지 않았을 터였다. 소중한 진해를 꼭꼭 숨겨 두고 귀찮은 것들이 알아서 부딪치고 부서지도록 두었을 것이다.
하나 모든 것이 미려의 뜻대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해원공 안해산은 미려방에서 필사적으로 도망쳤고 이윽고 잠춘동에서 오진해를 만나게 되었다. 또 그곳에서 그대로 진해와…….
“우왓, 이게 갑자기 왜 이래!?”
정미려의 심기가 불편해진 것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진해의 손에 들려 있던 향유병이 박살 났다. 진해가 든 것이 상아 빗이었다면 그것 역시 같은 꼴을 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형아! 괜찮아?”
정미려는 들끓었던 기를 정돈하고 급히 오진해를 향해 돌아앉았다. 진해는 미려에게 병 조각이라도 묻을까 황급히 깨진 조각들을 바닥으로 털어 냈다. 털어 내는 와중에 작은 조각이 그의 손가락 마디에 박혔다. 딱딱하고 거친 손에서 몇 안 되는 부드러운 부분이었다. 미려는 진해의 거친 손을 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동시에 뜨거운 숨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형아, 손이!”
“아, 괜찮아. 뭘 이 정도를 가지고.”
진해는 미려의 놀란 얼굴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입으로 병 조각을 빨아내 바닥에 뱉어 냈다. 향유에 젖은 손이 번들번들하게 윤이 났다. 손이 닿은 진해의 입술도 번들번들하게 젖어 광이 났다. 씩 웃는 입술을 바라보는 미려의 숨에 뜨거워졌다. 미려는 진해의 웃는 얼굴을 볼 때마다 바닥이 통째로 흔들리는 듯한 감각에 휩싸였다.
아, 역시 이 남자가 좋았다. 이 사내가 좋았다. 아무것도 모르던 무지한 시절부터 저를 다듬어 온 이 사내를 사랑했다. 오진해와 정미려는 운명이었다. 그와 자신이 남이라는 사실이 이것을 증명했다. 이게 운명이 아니라면 무엇이 운명일까. 억눌러 온 마음을 숨길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을 때 정미려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오진해와 맺어지기로 결심했다.
“하나도 안 괜찮아. 형아 손 다치는 거, 나한테 하나도 안 괜찮아.”
그러나 미려는 진해를 순순히 손에 넣을 수 없었다. 정미려 자체가 오진해에게 너무나 무른 생물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의 팔을 부러뜨리라 명하면서도 진해 앞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이가 되고 싶었다. 진해가 그의 뺨을 어루만질 때마다 이렇게 머리칼을 만질 때마다 정미려는 날카롭게 벼려졌던 신경 줄이 느슨하게 풀어지는 걸 느꼈다. 진해를 당장 손에 넣을 힘이 있음에도, 정미려 자신이 그럴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미려는 진해에게 져줄 수밖에 없었다.
“난…… 형아가 다치는 게 싫어. 정말 싫어. 내가 꼭…… 벌레가 된 것 같아.”
방주 일행이 무력행사로 한씨 형제를 쫓아내고, 방주는 울고 있던 정미려의 얼굴이 정미려의 생부와 똑 닮았다는 걸 눈치챘다. 나이 역시 그들이 찾고 있던 아이와 비슷했다. 방주는 절을 하며 감사를 표하는 오진해에게 품속에 간직하던 증표를 꺼내 보였다. 그것은 정확히 반으로 갈린 보(褓)였다. 서해 옥가의 옥을 가운데에 커다랗게 수를 놓고 주변에 장수를 뜻하는 십장생과 갖은 기화요초를 수놓은 호화로운 것이었다.
또한 정미려의 좌부가 정미려의 우부와 헤어질 때 나눠 가진 것이기도 했다. 이것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아는 이가 거의 없는 물건이었다. 정미려의 좌부와 우부는 더는 맺어질 수 없는 사이였다. 정미려의 좌부는 정미려가 태어나고 나서야 겨우 정미려의 존재를 알아챘다.
진해는 미려를 등 뒤에 숨기며 방주 일행을 경계하다 미려의 생부가 미려를 맡고 있던 이에게서 서신을 받았다는 사실과 오랫동안 찾아 헤맸다는 사실, 죽었다면 시신이나 무덤이라도 찾길 원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겨우 꼭꼭 숨겨 두었던 보의 반쪽을 들고 나왔다. 그것은 어린 정미려를 감싸던 강보이기도 했다. 나중에 강아지가 장가를 갈 때 고쳐서 혼수로 보내려고 진해가 곱게 간직하던 물건이기도 했다.
“에이, 왜 그래. 겨우 이 정도를 가지고.”
진해는 미려가 상념에 잠긴 걸 미려가 자신의 상처를 보고 울려 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듯했다. 미려가 자신이 가장 비참하고 무력한 시절을 떠올리고 있다는 걸 꿈에도 모르는 듯했다. 하긴 알아도 별로 달라질 것은 없었다. 미려가 해국으로 가는 수레에서 뛰어내려 집으로 돌아온 후로 진해는 미려가 뭘 하든 오냐오냐해 주었으니까.
“손 보여 줘.”
“괜찮다니까~”
“보여 줘.”
“어휴, 괜찮다니까 그러네.”
미려가 입을 한일자로 다물자 진해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미려에게 손을 보여 주었다. 조각이 생각보다 깊게 박혔는지 자그마한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미려는 열매처럼 맺힌 것을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다. 머리칼을 묶지 않아 비단처럼 매끄러운 것이 고개 숙인 방향으로 차르르 흘러내렸다.
“읏!”
미려의 입술이 진해의 손가락에 닿는 순간 진해가 짧게 신음했다. 미려가 맺힌 피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동시에 매끄러운 혓바닥으로 조각이 박혔던 상처 위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미려의 혀가 닿기 전까지 진해는 저 상처가 그리 깊은 줄 몰랐었다.
맺혔던 피가 사라졌음에도 미려는 진해의 손가락을 입에서 떼 놓지 않았다. 젖을 먹는 강아지처럼 진해의 손을 꼭 붙들고 절박하게 진해의 손을 핥아 올렸다. 꽃이 만개하는 것처럼 화사한 향이 물씬 풍겼다. 길고 짙은 속눈썹이 차양처럼 드리웠다. 진해가 부르르 몸을 떨자 짙은 차양 아래서 흑요석처럼 검은 눈동자가 물기를 머금은 채로 올려다보았다. 눈과 눈이 마주치자 짜릿한 것이 진해의 등줄기를 자극했다.
“하하, 하, 피, 멎은 것, 같은데?”
목소리가 어긋나 이상해졌다. 손끝이 싸하게 저리는 것 같았다.
“……정말?”
참으로 위험한 아이였다. 진해가 기저귀까지 갈아 주며 키운 아이건만 순간순간 진해를 긴장하게 했다. 젖은 손가락에 끼얹어지는 속삭임마저도 지독하게 요염하기 그지없었다.
“그럼! 봐, 봐! 다 멎었잖아, 우리 강아지가 소독해 준 덕분에 싹 나았다구!”
분위기가 묘해지기 전에 진해는 손가락을 빼내려 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붙잡힌 손이 도무지 빠질 줄을 몰랐다. 진해가 당황하자 미려가 눈을 접어 가며 한껏 미소지었다. 보는 이가 넋을 잃을 만한 고혹적인 미소였다. 달이 숨고,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을 잊게 할 만한 그런 미소.
“형아는 못 믿겠어. 그러니까 내가 살펴볼 거야.”
진해가 잠깐 넋이 나간 사이 미려가 진해의 팔로 손을 뻗었다. 긴 손가락이 교묘하게 움직여 진해의 소매를 걷어 올리고 다른 손으로는 향유가 흘러내리는 손목을 그러쥐었다. 반쯤 눈을 내리감고는 자그마하고 촉촉한 혓바닥으로 진해의 손 위를 유영하기 시작했다. 딱딱한 살 위를 위로하듯 문지르다 굽어진 손마디 사이로 파고들고, 접힌 손금 위를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움직였다.
“미, 미려야…….”
움푹 팬 손바닥 사이에 입을 맞추자 진해의 어깨가 크게 떨렸다. 입술이 향유와 맞닿는 소리가 자극적이었다. 미려는 그런 진해의 부름에 대답하지 않고 향유를 닦아 내듯 천천히, 천천히 진해의 손목으로 향했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는 광경에 진해는 살짝 도취하였다.
이윽고 반질반질하게 젖은 입술이 손바닥을 넘어 손목에 도달했다. 불거진 핏줄에 하나하나 입 맞추고 핥고, 살그머니 이를 박았다. 그때가 되어서야 겨우 진해의 정신이 되돌아왔다. 진해의 이성이 위험하다고 온 힘을 다해 소리치고 있었다.
“미려야, 미려, 강아지야! 강아지!”
강아지 소리가 나오자 미려가 아쉬운 티를 내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팔뚝을 빨아 자그맣게 자국을 남긴 후였다.
“왜 그래, 형?”
“하하, 하, 그게, 형 이제, 완전, 괜찮아, 하나도 안 아프거든?”
“형은 원래 아플 때도 괜찮다고 하잖아.”
“아유, 이젠 안 그래! 우리 강아지가 다 컸는데 내가 왜 아픈 걸 숨기겠어? 여기 잘생기고 돈 많이 버는 훌륭한 동생이 있고, 이젠 내가, 아 맞다!”
그런 진해의 머릿속에 번뜩 한 줄기 번개가 내리쳤다. 진해는 자신이 미려방에 왜 왔는지 기억해 냈다.
“맞아, 맞아! 이것부터 이야기한다는 게!”
“응?”
“미려야, 너 이제 조관림이랑 억지로 만나지 마라. 어험, 험! 이 형이 칠품 관리가 되었다는 거 아니겠니!”
“칠품?”
“흐흐, 그래. 놀랐지? 눈 동그래진 거 봐. 그러니까 너도 이젠 싫은 손님한텐 노래 부르지 마. 넌 이제 어엿한 관리의 동생이니 반편이 같은 조관림 새끼 말고도 얼마든지 좋은 혼처를 구할 수 있어! 그렇지, 아예 이참에 형아가 아는 형님네 집에 갔다 올까? 그 형님이 조관림이보다 관품이 높은데 아직 홀몸이라는 거 아니겠니!”
“……칠품이란 말이지.”
“솔직히 생긴 건 좀 거칠고 투박하게 생겼는데 성격이 아주 괜찮아. 나름 자수성가한 거 같고, 또 몸매가 탄탄하고 튼실한 게 아이를 아주 잘 낳겠더라구!”
“…….”
진해는 미려의 입술이 길을 남긴 팔뚝을 휘둘러 대며 미려에게 동십사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진해의 말이 이어질수록 미려의 눈매가 싸늘하게 식어 갔지만 진해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미려의 마음을 돌려 보려 했다. 동십사의 소개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이젠 진해의 모험담으로 이어졌다. 진해는 미려에게 자신이 얼마나 용감무쌍하게 활동했는지 구구절절 늘어놓았는데 정미려는 그것이 이미 거짓임을 알고 있었다.
진해가 관품을 얻게 된 계기가 동십사를 도와줘서가 아니라 해원공을 도와줘서라는 것도, 증언을 해서가 아니라 탈정고의 해독을 도와주어서라는 것도, 그리고 공을 인정받은 것이 아니라 승은을 입어 그런 것이라는 것도. 또한 칠품은 인지 받은 후궁의 최소 품계이며 육등시위라는 관직은 진해 이전에는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 역시.
진해는 아무것도 모르고 위풍당당하게 주먹을 휘두르는 시늉을 해 보였다. 납치를 당해서 위협받았는데도 당당하게 행동했다는 식이었다. 미려는 그런 진해를 보며 쓸쓸하게 미소 지었다. 아무래도 해원공이 진해를 꽤 마음에 들어 한 모양이다. 꽤가 아니라 아주 마음에 든 게 분명했다. 바로 후궁에 들이지 않고 관직을 준 걸 보아 진해에게 공을 쌓게 한 뒤 좀 더 높은 품계를 줄 모양이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형아.”
“어, 응?”
“사랑해.”
―사랑해, 오진해.
“얘도 참, 이 형아도 당연히 우리 미려 사랑하지! 새삼 형한테 반하지 마?”
진해는 그런 미려의 속도 모르고 벌렁 미려의 옆에 누워 버렸다. 신나게 이야기를 하다 보니 조금 나른해진 모양이었다. 미려는 그런 진해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문득 이대로 입을 맞추고 진해의 몸을 취하면 어떻게 될지 궁금해졌다. 발끝이 짜릿해질 정도로 끌리는 충동이었지만 미려는 한삼랑과는 달랐다. 얼떨결에 몸이 맞은 해원공과도 달랐다. 진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해원공과는.
“형아, 나도 옆에 누워도 돼?”
“뭐? 아, 미안. 형이 너무 가운데 누웠지?”
미려는 진해가 빗어 준 머리칼이 헝클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서 자리에 누웠다. 진해는 묘하게 눈치가 느려서 미려가 의기소침해진 걸 모르는 듯했다. 동시에 이상하게 감이 좋아서 미려가 기운이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은 듯했다. 진해는 조심스레 몸을 눕히는 미려에게 제 팔을 뻗어 보였다.
“에구, 언제 이렇게 컸담. 아직도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싶은데.”
“창고에 자루 큰 거 있어.”
“헉, 농담이야, 농담!”
미려는 내민 팔 위에 망설이지 않고 머릴 눕혔다. 어릴 때부터 진해의 곁에서 잠을 잔 미려에게 진해의 향은 우부나 유부 의 젖 냄새와 비등한 것이었다. 솔솔 풍기는 향에 잠겨 진해가 제 이불을 나눠 덮는 것도 인식하지 못했다. 그저 진해의 향에 잠긴 이 시간이 변치 않고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싶은 마음뿐이었다.
“미려야! 너 옷 안 입고 있었어!?”
미려는 기겁하는 목소리를 무시하고 팔을 뻗어 진해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꽉 껴안긴 진해가 작게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 * *
진해는 단번에 칠품 관리가 되어 어깨가 으쓱해졌지만 애석하게도 진해가 칠품 관리라는 것을 알아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관복을 입고 있어 관리라는 것을 알아보는 이가 다였다. 그리고 진해 역시 자신이 관리라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왜냐면 진해에게 맡겨진 일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오 대인! 어디 가십니까!”
진해가 슬그머니 방을 빠져나가려 하자 영 집사가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영 집사는 진해가 개구멍으로 빠져나가 삼랑과 돌아온 뒤로 진해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감시하였다.
“벼, 변소 갑니다! 변소!”
“어허, 변소가 아니라 해우소!”
“해우소…….”
“그리고 허리를 펴고 어깨도 당당하게! 해우소를 그렇게 가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설령 볼일이 급하다고 해도 걸음만 살짝! 아주 살짝 서두르십시오! 어디까지나 기품 있고 당당하게!”
“…….”
게다가 무슨 잔소리가 그렇게 많은지. 진해는 녹봉이 나오면 좀 떼서 영 집사 입에 넣어 줘야 하나 싶었다. 저번 일로 단단히 앙심을 품은 모양이었다.
“아니, 온종일 여기서 뭘 하라는 거예요! 나도 숨 좀 쉬고 삽시다, 숨 좀!”
“지금 오 대인께서 숨을 쉴 때가 아닙니다. 숨을 들이마시고 허리띠를 바짝 조이신 뒤 조금이라도 더 머리에 집어넣으셔야 합니다. 일각 안에 서화 선생이 오실 테니 자리에 앉아 심신을 진정시키십시오. 미시쯤에 주인 나리께서 특별히 오 대인께 수업을 하신다고 합니다.”
“뭐!? 싫어!!”
거기다가 일은 안 주고 뭔 놈의 공부를 그리 시켜 대는지. 진해는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단번에 칠품 관리가 되어 신이 났는데 그에 맞는 품위와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며 진해를 앉혀 놓고 팔고문이며 서화, 음률, 다도 등 온갖 것들을 가르쳐 댔다.
입에 풀칠을 하며 바쁘게 살아온 진해가 그런 것들을 알 리가 없었다. 팔고문을 보면 눈앞이 새하얘졌고 붓으로는 미꾸라지를 그렸으며 음률은 차라리 미려한테 배우는 게 백배 나을 듯했다.
그리고 그 수업 중 가장 끔찍한 것이 바로 동십사의 무술 수업이었다. 다른 선생들은 진해가 잘하거나 못하거나 혀나 차고 말았는데 동십사는 달랐다. 동십사는 수업 첫날에 진해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쳐 하마터면 진해를 그대로 하늘에 계실지도 모르는 우부의 곁으로 보낼 뻔했다. 분명히 봐준다고 말해 놓고 그딴 짓을 했다.
“싫어요! 아직도 허리가 욱신거린단 말이에요! 보세요, 여기, 여기 멍든 거 보이죠?”
“어, 어허! 오 대인! 칠품 관리씩이나 되신 분이 어찌 바깥에서 맨살을 보이십니까! 아무래도 주인 나리께 청해 예법 선생을 더 모셔야겠습니다. 주인 나리가 고르신 분이라면 천하의 오 대인도 기품 있게 만드실 분이시겠지요.”
“무술쟁이 동 형이 어떻게 예법 선생을 안다고!”
“하하, 오 대인. 저희 주인 나리께서는 사정이 있어 무관을 하고 계신 것이지 결코 그 지식이 문관에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예법이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가문인 동가의 열넷째시지요!”
“미친, 설마 한 명이 다 낳은 건 아니겠지…….”
“주인 나리의 우부이신 큰 어르신께서 바로 예부상서이신 동가대(架臺) 어르신이십니다. 해원공 마마의 후견인이시기도 하시지요.”
“아니, 그래서 진짜 열넷을 그 사람 혼자서 낳았어요?”
진해는 예부상서가 얼마나 높은 자리인지 몰랐다. 각 부의 상서는 일품에 이르는 자리이며 황제를 독대할 수 있는 그런 자리였다. 모르면 용감하다고 진해는 영 집사에게 동십사가 진짜 열넷째인지를 캐물었다. 예부상서씩이나 되는 양반이 정말로 애를 열넷이나 낳았는지 말이다.
“주인 나리께서는 실제로는 육남이십니다. 열넷째라고 하는 것은 큰 어르신께서 태어나지 못하고 돌아가신 분들에게 일일이 다 이름을 주시고 족보에 올려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나 진해는 영 집사의 경건한 표정과 열넷째라는 호칭에 얽힌 비화를 듣자 저도 모르게 숙연해지고 말았다. 얼굴도 보지 못한 동십사의 우부는 슬프면서도 참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이런 사람이 해원공 마마님, 즉 해산의 후견인이라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예부상서가 단순히 해산이 적자여서 지지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라고 막연한 추측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공포의 시간이 도래했다. 진해는 동십사가 도착해 집 안에 마련된 연무장에서 기다린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꼬리가 오그라든 개처럼 달달 떨기 시작했다. 이럴 때 해원공 마마님이 와 주시면 참 좋으련만, 만약 이때 와 주신다면 혀가 닳아지도록 온몸을 핥아 드릴 텐데!
“오 제, 나쁜 소식이 있네.”
진해는 이미 나쁜 소식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좋은 소식도 있지.”
동십사의 좋은 소식이란 건 보통 진해에게 좋지 못한 일이었다. 수업 시간을 늘린다거나 자네에게 맞는 체력 단련법을 찾아냈다는 것 등등.
“후, 나쁜 소식부터 알려 주세요. 전 맛있는 건 나중에 먹는 편이라서.”
“그래? 그럼 바로 말하도록 하지. 오 제, 애석하게도 오늘부터는 내가 자네를 가르치지 못할 것 같네.”
“허억!”
세상에, 저게 나쁜 소식이라니!
“하나 좋은 소식도 있어. 나보다 자네를 잘 알고 자네에게 실용적인 호신술을 가르쳐 줄 만한 새 선생을 모셔 왔다는 걸세. 이리 나오거라.”
진해가 동십사의 수업에서 해방되었다는 기쁨에 어쩔 줄을 모르는 동안 동십사가 어딘가를 향해 소리쳤다. 진해의 뒤편인지라 진해는 돌아보기 전까지 누가 와 있는지 몰랐다. 어떤 선생이건 동십사보단 나으리라는 생각만 했다.
“오랜만이다, 창놈아.”
“응? 어라, 어, 허어억!!!”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 순간 진해는 하마터면 심장이 터져 버릴 뻔했다. 그간 보지 못했던 삼랑이 팔짱을 낀 채로 진해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사, 사, 삼랑, 삼랑이!”
“어허, 한삼랑! 내가 말을 조심해라 몇 번을 이야기했느냐!”
“거 죄송하게 됐수다, 사부나리.”
“사, 사, 사부, 사부!”
“오 제, 이제부터는 삼랑이 나를 대신해서 자네를 가르칠 걸세. 더불어 자네의 호위를 겸할 예정이지. 허허, 이 사람.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는군. 자네가 삼랑이를 오랫동안 걱정했다는 거 내가 다 알고 있었네. 동생처럼 귀여워하는 아이니 얼마나 걱정했겠는가. 이제부턴 걱정 툭 털어놓게. 자질이 있는 아이라 내 제자로 자네와 함께 훌륭히 키워 볼 생각이니!”
“마, 말도 안 돼!”
씩 웃는 한삼랑은 진해와 똑같은 감색 관복을 입고 있었다. 다른 점은 진해가 걸친 녹색 수건이 아닌 백색 수건을 걸쳤다는 점이다. 백색 수건은 백의종군을 뜻하는 의미로 딱히 벼슬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언제든지 등용될 수 있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도 했다.
“동 형! 동 형!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그동안 너무 게으름 피웠지요! 앞으로 백 번을 패대기쳐도 되니 저를 버리지 마십시오, 동 형!!”
진해는 저 난폭한 놈과 딱 붙어 있어야 한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동십사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체면이고 뭐고 다 던져 버렸다. 동십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삼랑을 바라보았으나 삼랑은 그저 피식 웃어 보일 뿐이었다. 잠깐 생각에 잠긴 동십사는 진해의 이것을 아는 동생에게 수업을 받는 형의 민망함으로 결론지었다.
“오 제, 힘내게. 부끄러움은 잠시뿐일세. 자네도 자질이 없지는 않으니 가벼운 초식 정도는 금방 구사할 수 있게 될 걸세. 그럼 나는 다시 등청해 봐야 해서 이만.”
“동 형, 잠깐만, 동 혀엉!!!”
엉금엉금 기어 동십사를 쫓아가려는 진해의 목덜미를 삼랑이 잡아챘다.
“야, 너 안 본 새 많이 컸다? 뭐? 백 번을 패대기쳐도 되니 저를 버리지 말아 달라? 씨발, 내가 쓰레기통이야? 네놈 새끼가 버려지면 나한테 떨어지냐?”
“끄응…….”
동십사는 걸음 폭이 커서 금세 진해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진해는 싫어도 이제 현실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당분간 미려방에는 다 갔구나. 진해는 철철 눈물을 흘리며 삼랑의 손에서 늘어졌다. 삼랑은 그런 진해를 질질 끌어 연무장 가운데로 끌고 갔다.
그런데 예상했던 것과는 반대로 삼랑은 의외로 진해를 잘 가르쳤다. 동십사처럼 무조건 패대기를 치는 것도 아니었고 고루하게 체력 단련만 반복하는 것도 아니었다. 한삼랑은 그야말로 실용적인 무술을 가르쳤다. 사실 무술인지 암살인지 애매한 수준의 것들이었다.
“네가 긴 칼을 어떻게 쓰겠냐. 짧은 게 딱 맞지. 숨기고 있다가 슬쩍 미끄러뜨려서 손에 쥐고.”
“응, 응.”
“저 새끼가 살짝 틈을 보인다 싶으면 잽싸게 찌르고 돌려. 아, 물론 캐낼 게 있으면 돌리지 말고 찌르기만 해. 돌리면 잘못하다 뒈질 수도 있거든.”
“뒈…….”
“왜, 뭐?”
“아니, 정말 금 같은 가르침이라구…….”
실은 사람을 죽였다는 건 한일과 한이가 아니라 삼랑이 아닐까. 진해는 예부상서의 아들이자 근엄한 무인인 동십사가 어떻게 삼랑을 제자로 맞을 생각을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이 녀석을 제자로 받아 자신을 난관에 빠뜨리는지 정말로 납득이 가지 않았다. 동십사에게 딱히 나쁜 짓을 한 적은 없는 것 같았다.
‘혹시 해원공 마마님한테 손을 대서? 아니면 저번에 해원공부에 들어가기 싫다고 해서?’
잘못한 게 없는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잘못한 게 많았다. 진해는 동십사를 보게 되면 차라리 자신도 동십사의 제자로 받아 달라고 빌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에휴…….”
“지치냐? 약골 새끼. 좀 앉아서 쉬자.”
젊어서 좋겠다, 나쁜 자식아. 진해는 절대 뱉지 못할 말을 꾸역꾸역 집어삼키며 힘없이 그늘로 걸어갔다. 커다란 기둥 옆은 적당히 높이가 있어 걸터앉기 편한 장소였다. 삼랑은 느긋하게 그런 진해의 뒤를 쫓아왔다. 동십사의 제자가 되어서 그런지 삼랑은 이전과는 조금 달라진 것 같았다. 진해는 자리에 먼저 앉아 걸어오는 삼랑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삼랑과 진해의 눈이 딱 마주쳤다.
“밥은 잘 먹지?”
“참 나. 누가 밥쟁이 새끼 아니랄까 봐.”
“좀 마른 것 같은데? 장례는 못 도와줘서 미안해. 부조라도 해야 했는데.”
“할 거 없어. 화장해서 뿌려 버렸으니까.”
“응?!”
“묻을 땅뙈기도 없는데 모셔 둘 줄 알았냐. 별로 좋은 꼴도 아니고.”
“아아…….”
잘린 목을 떠올린 어깨가 축 늘어졌다. 삼랑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지만 진해는 형들 이야기가 나오자 삼랑의 옅은 눈 속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뭔가가 일렁이는 것을 보았다. 저것은 뜨거울까, 차가울까. 어딘가를 응시하는 삼랑은 명백히 야위어 있었다. 진해는 삼랑의 전신을 훑어보다 문득 삼랑에게서 달라진 점을 눈치챘다. 놀랍게도 삼랑이 단정하게 앞섶을 잠그고 있었다!
“삼랑아.”
“왜, 또.”
“혹시 어디 아프면 지체 말고 말해야 한다, 알겠지?”
“미쳤나. 네 눈깔에는 내가 어디 아픈 거로 보이냐?”
진해의 시선이 삼랑의 가슴팍에 닿자 삼랑은 그제야 진해가 뭘 보고 있는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삼랑은 진해의 발칙한 꼬락서니에 기가 막혀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역시, 이놈은 자신의 것이 되어야 했다. 여기저기 꼬리를 흔들며 떠돌아다니게 둘 것이 아니라 목줄을 매서 단단히 자신의 곁에 묶어 둬야 했다. 목줄을 맨 뒤에는 고기와 매로 교육해 줄 셈이었다. 삼랑은 언젠가 뒷골목에서 보았던 음습한 장면을 떠올렸다.
삼랑은 당시 강아지라 불리던 정미려가 정말 싫었다. 양인 새끼 주제에 비리비리하게 생겨서 사사건건 형아를 외치며 울먹거렸다. 웃기는 건 정미려의 그 짓이 오진해에게 아주 잘 먹혔다는 점이다. 오진해는 장작을 패다가도 형아 소리가 나면 도끼를 던져두고 달려왔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다가도 형아 소리가 나면 휙 뒤돌아봤다. 두 양인 놈이 서로를 얼싸안고 오냐오냐하는 꼴이 보기 싫어 삼랑은 제 형들이 일에서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밥이 맛있는 것과 별개로 삼랑은 약한 것들이 뭉쳐 있는 모습이 보기 싫었다.
정미려는 삼랑에게 한 톨의 관심도 없었기 때문에 오진해가 일을 나가면 삼랑 역시 즉시 집을 나섰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마음에 안 드는 놈을 쥐어 패거나 곯아떨어진 사람의 주머니를 털거나 했다.
그날도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인간의 주머니를 턴 날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망설이는 일도 주먹이 앞서는 형들 밑에서 자란 삼랑에게는 누워서 떡 먹기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동전을 많이 얻어서 기분이 좋아진 삼랑은 군것질거리를 사서 돌아가기로 했다. 거지 같은 개새끼 앞에서 보란 듯이 먹어 치울 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진해의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골목에 들어선 순간, 삼랑의 귀에 묘한 소리가 걸려들었다. 방음이 전혀 되지 않는 동네에서 자란 터라 삼랑은 당연히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알고 있었다. 저한테 그 짓을 하려는 인간들의 가랑이를 걷어차는 건 삼랑이 제법 좋아하는 취미이기도 했다.
평소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칠 그 소리가 그날은 이상하게 신경 쓰였다. 헉헉거리는 숨소리 사이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야, 오진해.”
“응?”
“너 아직도 궁둥짝 때리는 거 좋아하냐?”
“어, 어? 어흠, 음, 그게…….”
어린 삼랑이 보게 된 장면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집 안에서는 순둥하게 웃으며 다 큰동생의 뺨에 제 뺨을 비비는 오진해가 누군가를 돌려세운 채 매섭게 엉덩이를 내리치고 있었다. 오진해의 손바닥과 엉덩이가 부딪칠 때마다 맞는 이의 입에서 새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니, 그건 비명이 아니라 명백한 교성이었다.
“넌 모르나 본데. 네 눈깔 나 볼 때마다 맨날 가슴팍에 와 있더라. 눈깔 파이는 게 희망 사항은 아닐 테고.”
삼랑의 회상보다 훨씬 나이를 먹은 진해가 격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붕붕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그래? 그럴 줄 알았다. 네가 그 정도로 병신일 리는 없지.”
삼랑은 거친 숨을 내쉬던 입술이 사납게 휘어지던 장면을 떠올리며 천천히 자신의 입술을 핥아 올렸다. 그 장면은 삼랑이 생전 처음 마주친 욕정이었었다.
삼랑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있는 진해의 허벅지 위에 엉덩이를 걸쳤다. 천진하게 올려다보는 눈과 마주치자 가슴속에서 얌전히 똬리를 틀고 있던 것이 거세게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가늘게 잘 빠진 눈매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색이 옅은 눈동자 속에서 좌절과 분노에 억눌렸던 감각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어이, 오진해, 너 문신 해 본 적 있냐?”
이 감각이 피어날 때면 삼랑은 진해의 거죽을 벗기고 싶어 온몸이 근질근질했다. 손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자그마한 벌레가 달라붙어 꿈틀거리는 것만 같았다. 골목에서 훔쳐본 사나운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 입술을 물어뜯으며 짐승처럼 나뒹굴고 싶었다. 이 멍청한 가죽 속에 그런 걸 숨기고 있다는 게 참을 수 없었다. 삼랑은 진해의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다면 진해에게 제 살을 떼어 먹여도 좋다는 생각을 했다. 생전 처음으로 짝에 대한 생각을 했다.
“지독하게 아프거든. 유배를 보낼 때 괜히 얼굴에 먹을 뜨겠냐. 나도 그때 제정신이 아니었지. 무슨 생각으로 이런 걸 뜰 생각을 했을까.”
“그, 글쎄.”
“몰라? 모르긴 뭘 몰라. 이 씨발 새끼야.”
어두컴컴한 골목 안에서 진해의 입맞춤을 받던 엉덩이 위엔 자그마한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무슨 문양인지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새빨갛게 부은 엉덩이에 새겨진 것을 진해는 귀한 금붙이를 어루만지는 것처럼 경건하게 어루만졌었다.
“넌 변태라서 이런 거 좋아하잖아. 피는 무서워하는 주제에 누가 해 가지고 오면 정신을 못 차리고 달려들잖아. 지금도 봐. 눈깔 굴리면서 내 몸을 보려고 온갖 지랄을 하고 있지. 오진해, 내 앞에서 위선 떨지 마. 개새끼야. 난 너네 집 작은 개새끼랑 달라서 가증 떠는 건 딱 질색이야. 보고 싶으면 보고 싶다고 말해, 씨발 놈아.”
삼랑이 으르렁거리자 진해는 뒤통수를 맞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 눈 속에 든 것은 삼랑이 그렇게나 갖고 싶어 하던 오진해의 본모습이었다. 삼랑은 제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면서 손을 뻗어 천천히 흰 수건을 끌러 냈다. 바닥에 아무렇지도 않게 던져 버리고 감색 관복의 고름을 풀어 버렸다.
어두운색의 관복과 흰 피부가 지독한 대비를 이루었다. 헤프게 풀어헤치자 진해의 시선이 흰 피부 위에 도드라진 선 위로 달라붙었다.
“빨고 싶지?”
삼랑은 관복을 양손으로 쫙 펼친 뒤 그것으로 진해를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진해의 양옆을 가려 버렸다. 감색 관복 사이로 삼랑의 향이 나비처럼 아찔하게 날아올랐다. 향긋하고 새콤하면서도, 위험하고 고혹적인 향기였다. 겨울날 맹수가 눈 속에 숨어 있다가 조용히 몸을 일으키는 듯한 향.
“아니면 네가 새겨도 돼. 네가 그리고 싶은 대로 내 몸 위에 아무렇게나 그려도 된다고. 뭘 그리고 싶어, 어디 그리고 싶어?”
저도 모르게 기울어진 진해의 정수리를 바라보며 삼랑의 가슴이 크게 오르락내리락했다. 지척에 다가온 진해의 입술에서 뜨뜻한 열기가 퍼지는 것 같았다.
“하아.”
삼랑이 허리를 뒤치자 하의의 겹쳐진 부분이 진한 색으로 물이 들었다. 진해의 손이 허리에 닿자 삼랑은 짜릿한 전류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관통하는 것을 느꼈다. 마치 뾰족한 바늘이 살갗을 관통하는 듯한 감각이었다.
“오진해―――!!!!!”
그러던 그때, 온 천지를 뒤흔드는 듯한 큰 소리가 들려왔다. 진해는 화들짝 놀라 삼랑을 밀어냈고 삼랑은 거센 손놀림에 하마터면 바닥에 엉덩이를 찧을 뻔했다.
“헉! 해, 해산 도련님!”
어찌나 놀랐던지 마마가 아니라 도련님이 튀어나왔다. 진해는 먼지를 털듯 온몸을 털어 제게 묻은 삼랑의 향을 털어 냈다.
“오셨습니까.”
삼랑은 서늘한 낯으로 벌어진 옷섶을 정리했다. 옷고름을 맨 후엔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진 수건을 주웠다. 흰 수건에 누런 흙먼지가 묻어 있었다.
“한삼랑, 참으로 대단한 호신술을 가르치는구나.”
“삼십육계가 줄행랑이듯 미인계도 적절한 수단 중 하나가 아닙니까. 저 얼빠진 정신머리를 고치려면 가끔은 세게 나가야 할 필요가 있지요.”
불뚝불뚝 튀어나오려는 성질머리를 집어삼키며 삼랑은 침착하게 대꾸했다. 저를 노려보는 단단한 눈이 자신에게 무언의 경고를 하고 있었다. 죽고 싶지 않다면 절대 약조를 잊지 마라. 내가 네게 무엇을 주었는지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헤헤, 헤, 마마! 왜, 왜 이렇게, 오랜, 오랜만에 오, 오셨어요!”
오진해는 그새 말더듬이가 되었는지 하는 말 마디마다 버벅버벅 더듬어 댔다. 삼랑을 바라보던 시선이 대번에 진해 쪽으로 옮겨 갔다. 꼬락서니가 참으로 가관이었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게 온몸으로 나 잘못했습니다, 라고 말하는 듯했다. 삼랑에게는 가볍게 손질하고 싶은 모습이었지만 오진해와 붙어먹는 변태 새끼라 그런지 해원공은 진해의 그런 모습을 퍽 귀엽게 본 모양이었다. 짐짓 화난 표정을 짓는데 입술은 가늘게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속으로 성기를 뜻하는 저속한 욕을 반복하며 삼랑은 그 꼴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삼랑의 목줄을 쥐고 있는 주인이 삼랑의 뼈다귀를 가로채는 모습을 말이다. 해원공 안해산은 삼랑을 거두는 대신 오진해에게 함부로 접근하지 말 것을 명했다. 어디까지나 오진해의 방패가 되는 것만을 허락했다.
두 눈 멀쩡히 뜨고 생으로 제 것을 뺏긴다는 사실이 원통했지만, 형들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원공의 도움이 필요했다. 실제로 안해산은 이 일의 흑막에 대해 알고 있는 눈치였다.
“어이, 오진해.”
“으응?”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고 숙제 하나만 해 와라.”
“숙제라니?”
“별건 없고 좋아하는 모양이나 도안 생각해 오라고.”
삼랑이 히죽 웃자 진해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조금 전 자신이 삼랑에게 뭘 하려고 했는지 떠올린 모양이었다. 살짝 이를 가는 걸 보니 어쩌면 삼랑의 몸에 이를 박았을지도 모른다. 탄탄한 살갗 위에 단단한 것을 박아 넣고 적절한 색이 떠오를 때까지 지그시 물고 있었을지도.
“그럼 소인은 이만 물러갑니다, 해원공 마마.”
“오냐, 살펴 가거라.”
해원공은 당연히 표정이 안 좋았다. 어쩌면 자신의 사감을 다스리지 못했던 걸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삼랑은 진해에게 손을 대지 말라는 해산의 조건을 듣자마자 사납게 이를 드러냈었다. 추호도 형들을 저버릴 생각이 없으면서 내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쩔 것이냐고, 이대로 나가 오진해에게 울고불고 난리를 쳐서 혼인 계약서에 수결(手決)이라도 하게 하면 어찌 되는 것이냐고 공갈을 쳐 댔다.
절차탁마와 같이 갈고 닦아진 황자였지만 해산은 삼랑보다 고작 한 살이 많을 뿐이었다. 한 마디로 젊다 못해 푸르뎅뎅하단 말이었다. 처음 맛본 양인의 애틋함에 눈이 먼 해산은 삼랑의 말에 크게 코웃음 치며 만약 진해가 네게 손을 대 선을 넘는다면 자신은 삼랑과 진해 사이에 더는 관여치 않겠다고 이야기했다.
삼랑은 해산과 몇 번의 입씨름 끝에 마침내 해원공의 수하로 들어가기로 했다. 해산은 그에게 흰 수건과 검은 수건을 동시에 하사했고, 삼랑의 기개를 높이 산 동십사가 삼랑을 제자로 삼았다. 그것이 바로 삼랑이 해원공의 기무위사(機務衛士)가 된 경위였다.
“문양이라니. 한 위사가 생각보다 재주가 많은 이로구나. 네게 서화를 가르치려 하는 게냐.”
“아하, 아하하, 하하! 그게, 그러니까―”
삼랑이 휘적휘적 자리를 벗어나는 모습을 보며 진해는 연신 진땀을 흘려 댔다. 해산의 향이 사납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대나무처럼 청량하면서도 그윽한 향기에 예리하게 날이 서 있었다. 진해는 이 난관을 어찌 넘겨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헤헤, 실은, 제가 문신에 좀 관심이 있어서 말입죠!”
그래서 되는 대로 주워 던지기 시작했다. 삼랑의 말대로 진해는 몸에 그려진 건 좋아했지만 그것을 막 새긴 후나, 새기는 장면은 간 떨려서 쳐다보지도 못했다.
“문신? 절대 아니 된다.”
아니나 다를까, 해산이 진해가 던진 미끼를 물었다. 해산은 진해가 삼랑에게 조언을 얻어 문신을 새기려 한다고 생각한 듯했다.
“혹여 벌써 새기거나 전에 새겼던 문신이 있는 건 아니더냐?”
“왜요?”
“있다면 당장 불로 지지려 그런다.”
“허억!?”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해산은 문신이 어지간히 싫은지 불에 지질 것이라는 끔찍한 소리를 내뱉었다. 진해는 있지도 않은 문신 탓에 살을 지질 것이라는 소릴 듣자 저도 모르게 양팔로 제 몸을 감싸 안았다. 입이 떡 하니 벌어진 건 물론이었다.
“걱정 말거라. 동십사의 수하가 이런 일에 능통한 기술자를 하나 데리고 있다더구나. 다행히 근래 그자와 얼굴을 마주할 일이 없어 기술이 녹슬었는지 어찌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듣자 하니 금전을 쥐여 주면 지지더라도 흉이 남지 않게 지지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지 않더냐. 천한 기술이지만 극에 달하면 그것 역시 신기(神技)가 되는 법이지.”
게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고문 기술자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진해는 그자가 흉이 남지 않게 지지는 재주를 터득할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의 살을 지졌을지에 대해 상상했다. 그리고 그 상상의 끝에서 형틀에 묶여 있는 사람의 얼굴이 진해의 것으로 바뀌었다. 진해는 어서 자신을 구원해야만 했다.
“사실 제가 문신 보는 걸 좋아합니다! 하는 거 보는 건 싫구요, 다 해서 자리 잡은 거요! 그랬더니 삼랑이가 새로 새긴다고 저 좋아하는 문양을 물었습니다! 절대로 제가 새기려는 게 아닙니다! 전 아픈 게 싫습니다!”
진해는 각이 잘 잡힌 군인처럼 절도 있게 척척 잘도 내뱉었다. 해산은 그런 진해를 바라보며 피식 웃음 지었다. 필사적인 변명 속에서 진해가 방금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읽어 냈던 것이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황적에 오르려면 몸에 먹을 새겨서는 아니 되거든. 예전에 황친이 많았을 때는 내관들이 호기심 많은 황자들의 몸을 살피는 게 일과 중 하나였다는구나.”
“아하~ 황적에 오르려면 몸이 깨끗해야 하는군요? 아하~ 황적 에 오르, 려면?”
하지만 여우 피하려다 호랑이 굴 들어간다고. 진해는 더욱 큰 난관에 봉착했다. 해산은 진해에게 문신이 있으면 불에 지져야 한다고 했고, 문신이 없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황적에 오르기 위한 요건이라서 그렇다고 했다. 그 말인즉, 해산은 진해를 황적에 올릴 생각을 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관품과 관직으로 계산이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이건 그냥 맛보기에 불과했다.
‘아뿔싸, 그럼 그 엿 같은 수업들이 전부 다!’
진해는 이제야 영 집사가 제 옆에 딱 달라붙어 저를 감시하는 이유를 알아냈다. 동십사가 저를 이 집 별채에 놔두려고 했던 이유도. 세상에, 해산 마마님은 진해에게 질린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빠져든 듯했다. 탈정고의 독이 다 빠져나갔음을 알면서도, 진해가 그를 속였음을 알면서도 진해를 그의 옆에 두려고 했다. 진해는 조금 골치가 아파졌다.
동십사에게 말했듯이 진해는 누군가의 남편으로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근본 없는 집안이었지만 진해는 누군가를 남편으로 데려와 그와 함께 오순도순 살면서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를 우부의 제도 지내 주고, 토끼 같은 아이들을 낳으며 소박하고 평화롭게 살아가고 싶었다. 그런 진해에게 차기 황제의 옆자리는 무겁고 부담스러웠다. 더욱 곤란한 건 바로, 진해가 절대로 누군가의 측실로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차라리 노비를 사서 결혼을 하고 말지. 곁방살이는 절대로 사양이야! 아무리 휘황찬란한 황궁이라도 아랫목 윗목이 나뉘어 있겠지! 내가 괜히 미려를 정실로 보내려고 고생을 하고 있겠어?!’
해원공이 진해를 아무리 좋게 본들 진해가 차기 황제의 정군(正君: 음인 황족의 정실)이 될 수는 없을 터였다. 좌부우부도 제대로 알 수 없으니 윤(尹)으로 봉해지는 게 고작일 것이다. 그것도 해원공이 황제가 될 때까지 진해에게 질리지 않았다면 가능한 일이었다. 현 황실은 일개 백성인 진해가 알 정도로 핏줄이 적었다. 아마 수많은 측실들을 진상 받고 그들에게 안길 것이다. 고운 손과 고운 얼굴, 훌륭한 핏줄을 가진 이들이 해원공을 따르게 될 것이다.
―버려지는 건 질색이었다. 한 번, 두 번은 어쩔 수 없었다지만 피할 수 있는 세 번째를 그냥 맞이할 수는 없었다. 진해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헤프게 웃음 지었다. 그는 해원공과의 거리를 벌리기로 마음먹었다.
“진해야.”
그런 진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해산이 다가와 진해의 뺨에 손을 얹었다. 해산의 손은 길고 잘 뻗었으며, 검과 붓을 잡는 부분에 인이 박여 있었다. 궂은일로 거칠어진 손과는 다른 감각이었다. 검을 잡는 게 익숙한 손이 진해의 뺨이 부서지기라도 할 것처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미안하구나. 지금이라도 너를 내 궁으로 데려가 내게 합당한 대우를 해 주어야 하거늘 내 힘이 미력하여 너를 이대로 데려갈 수가 없구나.”
“전 이대로도 좋은데요, 뭘.”
“아니다. 넌 어떨지 몰라도 내가 좋지 않아. 동십사는 반대했지만 고는 네게…… 원(元)을 줄 생각이란다. 단순히 네가 고의 처음이라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심정이 네게, 후우…….”
해산은 말을 다 잇지 못하고 고개를 틀었다. 해산은 언젠가 진해가 멋지다고 감탄했던 옷을 입고 있었다. 붉은 깃을 단 옷이었다. 그리고 해산의 목덜미가 그 깃의 색을 똑 닮아 있었다. 손 역시 숯불에 담갔다 뺀 것처럼 뜨겁게 달아 있었다. 진해는 상처 없이 살을 지지는 기술자가 사실 해산 자신을 이르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
진해는 아무 말 없이 그런 해산을 응시했다. 저런 표정은 꽤 익숙했다. 사랑하는 표정, 연모하는 감정. 희미해진 꿈속에서 수십 번을 반복해 보았던 것들이다. 파각의 고통이 앗아 가 버린 아련한 추억들이었다.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고, 옆에 있기만 해도 저절로 따스해지는 감정들, 그것들이 그립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혈육이 아닌 타인과 가장 깊숙이 뒤섞이는 애달픈 감각을 누가 감히 거부할까.
“마마, 그런데 원이 뭔가요? 동 형이 반대한 걸 보니 꽤 귀중한 건가 봐요? 그럼 서두르지 말고 동 형 없을 때 살짝 보여 주세요! 제가 보고 탐이 나는 물건이면 마마께 당장 말씀드릴게요!”
그러나 세상이 모두 감정만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는 법이었다. 미려가 장성하기 전까지 진해는 몇 번이고 자신이 잃어버린 그것들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그것과 같지 않더라도 저의 외로움을 달래 줄 이라면 언제나 성의를 다해 구애했다. 그와 동시에 진해는 사람들과 어울리면서도 끊임없이 그들을 살피고 계량했다. 사람들이 모두 바보는 아닌지라 몇몇은 진해와 깊은 관계가 되기 전에 손을 털었고, 진해와 정이 통한 이들은 진해의 그런 면에 환멸을 표했다.
오로지 미려만이, 진해의 첫 각인을 알고 있는 미려만이 진해를 이해했다. 어린 미려는 파각의 고통에 죽어 가는 진해의 옆에서 자신이 성공하여 진해를 그놈보다 귀한 이로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어마어마한 부잣집의 도련님이었던 그놈을 반드시 진해의 앞에 꿇려 놓겠노라고 조용하게 이를 갈았었다.
“원이라는 것은 내 처음이라는 말이다. 원은 황족이 인지한 첫 남편만이 가질 수 있다.”
진해가 상념에 빠진 사이 해산이 진해의 이마에 이마를 갖다 댔다. 습한 숨이 진해의 콧등을 물들였다.
“…….”
평범한 이라면 듣는 순간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격할 말이건만 진해는 꿈속을 헤매는 것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해산은 그제야 진해가 자신의 말에 단 한 톨도 감동하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조금 충격받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해산은 황족이었다. 황제의 유일한 자식이고, 적통 후계자였다. 남들은 뒤에서라면 몰라도 해산의 앞에서는 한껏 굽실대며 황송해했다. 해산이 뭐라도 해 주면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보통의 사람이라는 족속이었다.
“진해?”
“아, 네……. 처음이요…….”
어딘지 모르게 싸늘한 표정의 진해가 시선을 돌리자 해산은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 동시에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어졌다. 해산에게 먼저 손을 내밀고 해산에게 애틋한 연모를 싹 틔우게 만든 건 바로 진해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의 몸에 뜨거운 것을 욱여넣고 꺼지지 않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진해는 마치 싫어하는 이를 잡아다 강제로 원군으로 만드는 것처럼 행동했다. 해산은 혼란스럽고, 또 혼란스러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이냐? 혹여 나의 원군이 되는 것이…… 싫은 것이냐?”
해산은 적어도 진해가 자신을 싫어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최소한 자신의 몸만큼은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곁에 둬 마음까지 자신을 좋아하게 만들자고 결심한 것이었다. 진해가 자신의 남편이 되기에 터무니없이 부족한 이라는 걸 알면서도 강행한 건 모두 해산 자신의 의지였다. 진해의 마음까지 손에 넣으면 해산은 평생 쓸쓸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럴 리가요. 그냥, 황송해서 그렇지요, 뭘!”
한편 진해는 여전히 해산을 바라보지 않았다. 목소리만큼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어딘지 모르게 신이 난 목소리였지만 그것을 코앞에서 보고 있는 해산이 지금의 진해와 평소의 진해가 다르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진해의 얼굴을 감싸고 있던 손에서 서서히 힘이 빠졌다.
“……싫은 게로구나.”
목소리 역시 천천히 가라앉았다. 침중한 속삭임이 간신히 새어 나왔다. 손이 완전히 떨어질 때쯤 진해가 슬그머니 해산을 바라보았다. 바라본 해산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늘이 잔뜩 져 있었는데 진해는 그 얼굴을 보자 갑자기 가슴이 따끔거렸다.
지금의 진해와 평소의 진해와 다른 이이듯, 지금의 해산 역시 평소의 해산과 다른 이였다. 불경한 말이었지만, 진해는 지금 제 눈앞에 있는 해산이 해원공 안해산이 아닌 그냥 해산 본인으로 보였다. 저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 주제에 신분이 높다고 반말이나 찍찍해 대는 시건방진 어린것 말이다.
‘어린애들은 곤란해……. 쉽게 좋아하고, 쉽게 질리고, 쉽게 상처받아……. 그리고 멍청한 오진해는 어린애한테 사족을 못 쓰고.’
진해의 눈앞에 보이는 어린것은 첫사랑에게 거절당한 상처를 고스란히 내놓고 있었다. 단 한 사람이라도 다른 이가 옆에 있다면 결코 이런 표정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 이것은 안해산이 오진해와 단둘이 있기 때문에 내보이는 표정이었다. 진해가 관찰한 해산은 다른 이에겐 절대로 이런 표정을 짓지 않았다.
“솔직히 말씀 올리자면 좀 부담스럽긴 해요. 마마께서 저 말고 다른 이와 함께하신 적이 있다면 저 역시 마마의 마음을 받아들이겠지만 마마는 제게 처음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래, 아주 엉망진창인 처음이었지.”
“어흠, 흠! 어쨌거나 그러니까, 마마는 어쩌면 절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게 아니라 제가 드리는 몸의 쾌락이 좋은 걸지도 모른단 말이에요. 원이라는 게 어마어마하게 귀한 것 같은데 그런 건 몸도 마음도 통한 상대에게 줘야 옳지 않겠어요?”
“…….”
“아이구, 그러니까! 제 말은 제게 조금만 더 유예를 달라는 말이에요! 마마도 저와 좀 떨어져 계시면서 마음을 좀 추스르시고요! 혹시 아나요? 떨어져 있는 와중에 제가 마마께 홀딱 반해서 나중에는 함께 있게 해 달라고 매달리게 될지?”
그러니까 표정 짓지 마세요. 진해는 그리 말하며 해산의 귀 언저리를 어루만졌다. 한번 어두워진 해산의 표정은 좀체 밝아지는 일이 없었다. 더욱더 어둡고, 어둡고, 어두워지더니 고아한 두 눈동자에만 형형한 불을 켜 놓았다. 제 귀를 매만지는 진해의 손을 꽉 붙잡고 으르렁거림이 섞인 말을 내뱉었다.
“좋다. 네 말대로 하마. 네가 괘씸해 지금 당장이라도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 놓고 싶다만,”
진해의 손이 움찔 경련했다.
“네게 믿음을 주지 못한 내 잘못이 더욱 크니 죄를 묻진 않겠다. 다만 네가 고의 원이 되었을 때 이때 받은 수모와 치욕을 곱절로 다 받아 낼 것이야.”
“하하, 그래서 일단 얼마나 떨어져 있을까요?”
“기한은 필요 없다. 네가 육품이 되는 날, 그날 정식으로 청혼할 테니. 그때가 될 때까지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있거라. 고 역시 네놈이 매달리지 않고는 못 배길 사내가 되어 볼 터이니.”
해산은 말을 마친 뒤 진해의 손을 놓고 밖으로 나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는 것이 단단히 삐진 듯했다.
“휴― 일단 한숨 돌리긴 했지만 이를 어찌한다. 물리적인 거리는 멀어졌는데 심적인 거리는 오히려, 어휴―.”
마른 짚에 불을 붙였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으리라. 진해는 제 머리를 쥐어박으며 왜 좋은 생각을 못 짜냈느냐고 자책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벅벅 머리를 긁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누가 본다면 웬 미친놈이 있냐고 경악을 할 몰골이었다. 일이 도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잠춘동의 가난뱅이 막일꾼인 자신이 어쩌다가 황자마마의 청혼을 받게 되었는지.
처음에는 그냥 마음에 꼭 드는 표정을 한 음인이 있어 살짝 장난을 치려던 것뿐이었다. 맞춘 몸이 자신의 취향을 찍어 낸 것처럼 훌륭해 욕정이 샘솟은 것뿐이었다. 그래서 의지할 데 없는 음인이라면 자신이 데리고 살 생각도 했었다. 빚이 있다면 모아 둔 돈으로 갚아 주고, 모자라면 미려에게 빌려서라도 서방으로 삼으려 했었다.
그런데 음인은 저보다 훌륭한 집안의 자제였고 돈도 많았다. 탈정고가 아니었다면 진해 같은 건 코끝으로도 쳐다보지 않을 이였다. 옛날 기억이 나 주눅이 들었지만 가끔 맛보는 몸은 선계의 복숭아와도 다름없는 맛이었다. 피해야지, 피해야지 되뇌면서도 탄탄한 허벅지 사이에 입을 묻었다. 황자마마라는 걸 알기 전까지 진해는 도련님과 놀이 동무 정도는 되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진해는 처음도 아니면서 안해산에게 잔뜩 혹하고 있었다.
‘아니야, 잘했어, 오진해. 조금만 떨어져 있으면 금방 원래대로 돌아갈 거야. 관직에 있을 때 적당히 긁어모으자. 고급 관리랑 안면을 트게 됐으니 잘됐지 뭐. 뭘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어! 혹시 알아? 떨어진 동안에 해산 마마님이 천생연분을 만나게 되실지!’
주저앉아 있던 진해는 양손으로 뺨을 소리 나게 짝짝 두드렸다. 그 후에는 힘차게 일어나 흐트러진 머리도 바로 하고 옷매무새도 정돈했다. 그리고는 가슴을 쫙 펴고 당당하게 방 밖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칠품 관리직을 지금이라도 한껏 만끽해야 했다.
“오 대인, 여기 계셨군요! 무술 수업이 끝난 지가 언젠데 왜 이제 나타나시는 겁니까!”
“악! 영 집사!”
그런 진해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영 집사는 복도 저편에서 진해를 발견하고 득달같이 달려왔다. 진해는 우선 영 집사를 피해서, 엿 같은 수업을 피해서 이 집을 벗어나기로 했다.
* * *
한편 삼랑은 숙소로 돌아가기도 전에 다시 해원공에게 불려 왔다. 삼랑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해원공의 발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둘만의 독대는 오랜만이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해원공은 호위무사며 기무위사들을 달고 다녔고 동십사 역시 급한 업무가 없을 땐 해원공의 곁에 있는 걸 우선시했다.
“삼랑.”
“예.”
삼랑은 뒤틀리는 속을 간신히 추스르며 대답했다. 마지막으로 본 해원공은 진해를 데리고 객실로 가고 있었다. 당분간 해원공을 보지 않을 줄 알았는데 해원공은 무슨 수작인지 삼랑을 급히 불러들였다. 속으로 욕을 시부렁거리던 삼랑은 문득 머릿속이 환해지는 듯했다. 해원공과 오진해가 같이 있지 않고 금방 헤어졌다. 오진해를 훔쳐보기 바쁘던 해원공이 지금 오진해와 떨어져 있다! 그렇다는 건 오진해와 해원공 사이에 뭔가가 틀어졌다는 말이었다. 해원공에게 오진해의 향이 섞이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너 진해와 꽤 오래 안 사이라지?”
“처음 본 이와 혼담이 오고 가진 않잖습니까?”
“얼마나 알고 지냈느냐?”
“큰 형님은 오진해의 아비가 오진해를 데리고 잠춘동으로 온 걸 기억하고 있더이다. 좀 멀리 살다가 제 형들이 저를 오진해에게 맡기기 시작한 것이 대충 열 살쯤 되었으니 대충 십 년 정도는 되었지요.”
“그래? 그럼 넌 진해가 뭘 좋아하는지 알고 있겠구나.”
“예?”
사이가 틀어진 줄 알았더니 저를 불러 묻는다는 게 진해가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삼랑은 대번에 속이 뒤틀리며 열불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굴러 들어온 돌 새끼가 지금 어디에 침을 묻히려는지, 신분만 아니었다면, 형님들의 원수만 아니었다면 당장에 사생결단을 내었을 것이다.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다 압니다.”
“잘됐군.”
열 받으라고 퉁명스레 뱉은 말에 해원공은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았다.
“적거라.”
오히려 네가 아는 거 다 적으라고 붓과 종이를 던져 주었다. 데구르 굴러가는 붓을 움켜쥐고 삼랑은 벅벅 이를 갈았다. 손에 힘을 주자 붓이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휘어졌다.
“죄송하지만 그리는 못 하겠습니다만.”
그리고 그것을 들어 그대로 바닥에 내려놓았다. 탁 소리를 내며 고개를 들어 해원공을 노려보았다. 해원공은 그런 삼랑을 아주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삼랑은 해원공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타고난 천성이 늑대 같은 이였다. 노리는 게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손에 넣는 이였다. 만약 삼랑이 조금이라도 형들에 대한 우애가 덜했다면 해원공은 오진해를 다시는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삼랑은 진해를 어르고 협박하고 쥐어패 국경을 넘었을 것이다. 영리한 삼랑은 전쟁 전의 월 황실이라면 몰라도 지금의 월 황실이 국경 밖까지 손을 뻗칠 여유가 없다는 걸 간파하고 있었다.
“한 시위. 다시 말해 보거라. 고가 방금 바람 소리를 자네가 한 말로 오인한 듯하군.”
“맨입으로는 못 하겠다고 말씀 올렸습니다, 해원공 마마님.”
그렇기 때문에 삼랑은 순순히 해원공의 밑으로 들어오는 듯하면서도 끊임없이 해원공과 반목하였다. 동십사가 부여한 임무를 우수한 성과로 통과하지 못했다면 해원공은 지금 당장 삼랑을 내쳤을 것이다.
“하하, 재미있군. 재미있어. 그래, 진해를 노리려면 그 정도의 기개는 있어야지. 진해는 숨겨 놓은 옥과 같은 아이니까.”
“…….”
다만 삼랑이 예상하지 못한 것은 해원공이 생각보다 진해에게 푹 빠졌다는 점이다. 삼랑은 진해를 옥이라 칭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미간을 잔뜩 찡그렸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조약돌이면 모를까 옥은 무슨 놈의 옥, 게다가 삼랑보다 고작 한 살이 많으면서 진해를 아이라 칭하는 건 뭐 하는 짓거린지.
“하나 고의 수하가 고의 명에 복종하지 못하는 건 그와 다른 문제지. 한 시위, 자네는 자네가 내 사람이 되었음을 똑똑히 알고 있어야 해.”
“충분히 마마의 사람으로 일하고 있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만? 사부께서 보고를 아주 게을리하시나 봅니다? 아니면 북쪽으로 가서 목이라도 하나 따 올까요? 성공할지는 장담 못 드리겠지만.”
“…….”
삼랑은 해원공을 자극하기 위해 일부러 북쪽이란 단어를 입에 담았다. 현재 월국의 가장 최북단에는 수도에는 간간이 몇 마디만 흘러 들어올 정도로 작은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원래는 그곳에 해원공이 갈 예정이었다. 황제의 유일한 적통 후사가 군의 사기를 북돋우고 군공을 세워 자신의 자리를 공고히 할 셈이었다.
“원하는 게 뭐냐.”
“말한다고 주실 것도 아니시잖습니까. 적당히 값을 치러 주시지요. 그럼 이 개잡놈이 마마님께서 내려 주신 뼈다귀 크기를 보고 술술 적든지 말든지 하겠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해원공의 표정은 살얼음이 낀 것처럼 살벌했다. 해원공이 제 수하를 중히 여기는 이가 아니었다면 삼랑의 목이 날아갔을지도 모를 정도로 차가운 분노였다. 삼랑은 해원공의 이 분노를 잘 새겨 두었다. 해원공의 가장 큰 적이 누군지 똑똑히 확인했다.
“네 형들이 내게 지었던 죄를 사해 주마.”
“이미 죽어 나자빠진 인간들의 죄를 사하는 게 마마님께서 내려 주시는 은덕입니까?”
“그럼 죽은 몸을 끌어내 다시 참하는 걸 원하느냐? 착각하지 마라, 한삼랑. 네 형 놈들은 대역 죄인이다. 고에게 감히 극약에 이를 만한 것을 복용시켰지. 내가 네놈을 거둔 건 네놈은 이 일에 연루되지 않은 깨끗한 목숨임을 알아서이다. 네 형 놈들이 누명을 쓰고 죽은 걸 가엾게 여긴 내 자비란 말이다.”
“…….”
“네가 진범을 잡더라도 내게 범한 죄를 용서받지 못한다면 그놈들은 여전히 죄인이란 말이지. 이젠 내가 얼마나 커다란 뼈를 네놈에게 내밀었는지 알겠느냐? 네놈이 가진 알량한 지식에 얼마나 큰 값을 제시했는지 알겠느냔 말이다.”
“시발!”
썩어도 준치라고 엄격하게 교육받은 해원공은 삼랑보다 세 수 정도는 위에 머물러 있었다. 고귀한 혈통이 한 수요, 방대한 정보가 두 수요, 삼랑과는 달리 아무것도 짊어진 것이 없다는 게 세 수였다. 삼랑은 으드득 이를 갈며 던져 버린 붓을 움켜쥐었다. 움켜쥐고는 기억나는 대로 갈겨쓰기 시작했다.
맨 처음 쓴 것은 밥이었다. 진해는 국수보다 하얀 쌀밥 먹는 것을 좋아했다. 두 번째로 쓴 것은 홍소육이었는데 솔직히 이 세상에 절간의 중을 빼고 홍소육을 싫어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진해는 홍소육을 먹는 것도 좋아했지만 명절 때 강아지와 삼랑을 앉혀 두고 홍소육을 만들어 먹여 주는 것도 좋아했다.
‘가만. 그렇지, 오진해 새끼가 제일 좋아하는 게 있었지.’
삼랑은 고개를 숙이고 소리 없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자신이 손을 대지 않고도 해원공을 엿 먹일 좋은 계책이 생각났던 것이다. 오진해는 이 세상에서 자기 동생을 제일 좋아했다. 삼랑이 집에 있을 땐 삼랑에게도 신경을 썼지만 역시나 제 피붙이인(인 줄 알았지만 아니었던) 정미려에게는 사족을 못 썼다. 머리 하나를 빗겨 주면서 이마에 대체 뽀뽀를 몇 번이나 하는지, 삼랑은 제 머리가 길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머리를 조금 기르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다 썼습니다.”
해원공은 어지간히 고대했던지 가져오란 소리를 안 하고 자신이 직접 일어나 종이를 가져갔다. 쌀밥, 홍소육, 새 옷, 맑은 날 등등 시시콜콜한 것들을 읽으며 미소를 짓던 해원공은 삼랑이 힘을 줘 커다랗게 눌러쓴 세 글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진해가 강아지를 좋아하느냐?”
“좋아하지요. 목숨은 모르겠는데 팔 한 짝이랑 이빨 여러 개는 너끈히 걸 정도로 좋아합니다. 잠춘동에 사는 놈들 중 오진해를 아는 놈이라면 다 아는 이야기지요.”
“개를 그리 좋아한단 말인가…….”
해원공은 종이를 들고 천천히 거닐며 개를 먹는 걸 좋아한다는 말인가, 그도 아니면 데리고 노는 것을 좋아한단 말인가 하고 읊조렸다. 아마 진해에게 개의 새끼 여럿을 안겨 줘 마음을 살 고민을 하는 듯했다.
“아 참. 이젠 강아지가 아니지.”
그리고 해원공이 잔뜩 신이 난 틈을 노려 삼랑이 날카로운 일격을 박아 넣었다.
“이름이 그래, 정미려라고 했던가.”
“무슨 소리냐? 강아지가 아니라니?”
해원공은 자신에게 날아드는 공격이 공격인 줄도 눈치채지 못하였다. 삼랑은 오진해가 본다면 뜨악할 정도로 천진하고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배시시 미소 지었다. 삼랑에게 숨이 넘어가기 직전까지 맞은 이들만이 볼 수 있는 표정이었다.
“정미려. 오진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아끼는 놈입니다. 예전에는 아명을 강아지라고 했지요.”
“아, 혹시 이 강아지가 진해의 동생이라는―”
“예,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동생이지요. 오진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동생. 틈만 나면 오진해와 한 침상에서 누워 자는 색기 줄줄 흘리는 동생이라는 놈. 오진해가 저와의 혼담을 왜 피했는지 아십니까?”
“설마.”
“예, 바로 이놈 때문입니다. 이놈이 저를 아주 잡아먹으려 하지요.”
삼랑은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고 해원공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종이를 쥔 해원공의 손이 잘게 떨리더니 곧 핏줄이 설 정도로 잔뜩 힘이 들어갔다. 손부터 시작해서 온몸에서 흉흉한 기세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해원공은 평정을 가장하려 했지만 해원공의 관자놀이에 불뚝 솟아난 것은 해원공의 심정을 고스란히 드러내 주었다.
“미려방에 발을 걸쳤다는 게, 바로 이 뜻이었나. 그래, 미려방에서 잤으니까 뒷문으로, 그래서 그때 뒷문으로, 미려방 사람들만 아는 뒷문, 으로.”
종이는 이제 형체를 잃고 참혹하게 구겨져 있었다. 삼랑은 한 번에 두 명의 적, 적어도 한 명의 적을 없애게 되었다는 생각에 속으로 신나게 휘파람을 불어 댔다.
* * *
한편 진해는 오늘따라 이상하게 홍소육이 당겼다. 가게에 파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한 그 홍소육이었다. 어려서는 고기를 살 만큼 넉넉지 못해 마련하지 못했지만 진해의 머리가 굵어지고 어느 정도 살림이 잡히자 진해는 명절 때는 무슨 일이 있어도 고기를 사 왔다. 눈을 반짝이는 강아지를 앉혀 두고 갖은 솜씨를 부려 그럴싸한 홍소육 한 덩이를 만들어 냈다.
“아~ 그때는 우리 강아지 입에 고기 넣어 주는 재미로 살았는데~”
홍소육이 완성되면 강아지는, 미려는 신이 나서 손뼉을 치고 난리였다. 어설프게 얻어들은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비파를 배우기 시작하자 진해가 홍소육을 만들 동안 쉬지 않고 노래를 불러 주기도 했다. 어쨌거나 홍소육은 남녀노소 좋아하는 요리였지만 진해에겐 그 이상으로 각별한 요리였다. 진해는 룰루랄라 노래를 부르면서 정육점으로 들어갔다.
“이건 나랑 미려랑 먹고, 이건 미려방 식구들이랑 주방장 아저씨 먹으라고 하자!”
관복을 입은 대인이 들어서자 정육점의 사장이 직접 나와 고기를 썰어 주었다. 일반 병졸이 아닌 칠품씩이나 되는 어르신이 어험어험 기침을 하니 특별히 좋은 고기만 골라내 연잎에 다소곳이 싸 주었다. 다음에 또 와 주십사 특별히 반 근을 더 내어 드렸다. 진해는 당장이라도 날아갈 것만 같았다.
“이보거라! 이보거라! 뭐야, 왜 아무도 없어?”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두 손 무겁게 찾아온 미려방이 휑하기 그지없었다. 평소라면 철통같이 문을 지키고 있어야 할 문지기들이 한 명도 자리에 없었다. 진해는 오늘이 며칠인지 꼽아 보았다. 미려방이 대청소하는 날인가 싶어서였다.
“아니, 그럼 다 문밖으로 나와 있지 이렇게 닫아 놓고 있진 않은데? 다 어디로 간 거야? 일도야! 이단아!”
주로 바깥에 서 있는 일도와 이단이를 목청 높여 부르짖자 그제야 안에서 자그맣게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대문 옆의 쪽문이 끼익 소리를 내더니 앳된 기가 가시지 않은 오호가 얼굴을 내밀었다. 오호는 다른 형제들과는 다르게 미려방의 이패 기생으로 기명은 세살이라고 했다.
“오 형? 정말 오 형이야?”
“그럼 나 말고 다른 오진해가 있어?”
“그게 아니라, 아이참!”
오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살그머니 밖으로 빠져나왔다. 사방이 고요해서 쉬는 날인 줄 알았더니 평소보다 더욱 화려하게 치장하고 있었다. 마치 신년을 맞이한 듯한 모습이었다.
“평소에 오라고 할 때는 안 오더니 왜 지금 오고 난리야!”
“이 녀석이? 내가 너네 집 똥개냐? 오랄 때 오고 가랄 때 가게? 나 한가할 때 가끔 오는 거지! 이거 안 보여, 이거! 나 칠품, 육등시위 오진해야! 옛날의 나로 보면 섭하지!”
“피, 고작 칠품 가지고 유세는.”
“뭐? 고작 칠품?!”
말로 투닥거리면서도 오호와 진해는 서로를 정답게 마주 보았다. 오호는 삼랑이와 동갑인데도 세 살은 어려 보이는 신기한 외양을 갖고 있었다.
‘변태 거르기에는 딱이지!’
오호에게는 미안한 말이었지만 진해는 오호, 즉 세살이에게 들러붙는 음흉한 작자들을 관찰하며 미려방의 손님들을 정리했다. 세살이를 좋아하는 손님들은 크게 세 분류였는데 하나는 세살이의 노래와 춤이 마음에 드는 손님이었고, 두 번째는 세살이에게서 죽은 손자나 아들을 보는 이였으며, 세 번째는 어린애들을 좋아하는 흉한 변태들이었다. 진해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손님들은 미려의 신랑감 후보에서 멀찌감치 밀어 놓았다.
“오 형, 오늘은 그냥 가면 안 돼?”
굳이 따지자면 진해는 두 번째 손님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진해는 오호를 볼 때마다 막 비파를 배우기 시작하던 강아지가 생각났다. 그래서 오호를 볼 때마다 쓱쓱 머리를 어루만져 주었다. 오호는 머리가 망가진다고 짜증을 내면서도 진해가 오면 오 형, 오 형 부르며 반갑게 맞이하였다.
“왜 그래? 안에 무슨 일 있어? 오늘 한턱 쏘려고 내가 고기를 이만큼이나 사 왔는데.”
“맛있겠다……. 그런데 오늘은 진짜 곤란해. 실은 말이야…….”
세살이는 가느다란 손목을 나긋나긋하게 움직여 진해에게 바싹 달라붙었다. 진해가 허리를 숙여 높이를 맞춰 주자 고운 손을 귓가에 대고 둥그렇게 만들었다.
“안에, 손님이 있어. 어마어마하게 높으신 손님.”
은밀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간지러웠다. 진해는 솜털로 발바닥을 간질이는 듯한 기분에 부르르 잘게 경련했다. 피부에 어느덧 소름이 돋아 있었다.
“진짜? 대체 얼마나 높은 손님이기에 이 난리들이야?”
“미려방을 통째로 빌릴 정도로 높은 손님이야. 형도 알잖아. 일패 어르신이 웬만하면 그런 요청을 안 받아들인다는 거. 엄청, 엄청! 높으신 분인 거지! 제후나 재상의 아드님일지도 몰라! 후후, 어쩌면 황자마마님일지도 모르지!”
“화, 황자마마님!?”
황자라는 소리가 나오자마자 진해의 손에서 고기 꾸러미가 떨어졌다. 정육점 주인이 성심껏 썬 고기가 연잎에 싸인 채 바닥으로 낙하했다.
“으헉, 고기가!”
문지기 형제 중에서도 고기반찬을 각별하게 좋아하는 오호가 험상궂은 비명을 질렀다. 오호는 평소에는 새침한 듯 깜찍한 듯한 얼굴로 서 있다가 급한 상황이 되면 저도 모르게 아주 듬직한 사내 소리를 냈다. 오호와 시비가 붙어 말다툼을 벌인 손님이 충격을 받아 성공을 기원하고, 발전을 기원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
“아, 아이, 아이참! 아까워! 오 형, 뭐 죄지은 거 있어? 왜 황자마마 소리에 그렇게 경기를 하고 그래? 아이, 아까워! 고기 너무 아까워!”
“……연잎에 싸 놨으니까 괜찮아. 흙 묻은 건 물로 씻으면 되지.”
“그렇지? 하아, 손님 어서 갔으면 좋겠다. 이건 노는 것도 아니고, 일하는 것도 아니고.”
진해는 떨어진 고기를 주워 들고 오호의 충고를 받아 얼른 이 자리를 벗어나기로 했다. 진해의 직감이 진해에게 날카롭게 경고를 던지고 있었다. 하필 황자마마로 추정되는 귀한 손님이, 하필 진해가 황자마마에게 본의 아닌 도발을 했을 때, 하필 미려방에 와 미려방을 독점하고 있을까. 하필이 아니다. 이건 필연이다. 분명 황자마마가 어디서 미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온 것이다!
“오호야.”
“일하고 있을 때는 세살이!”
“그래, 세살아. 손님 앞에서 목소리 실수하지 말고 나중에 손님 가시거든 미려한테 집으로 오라고 해. 미려방 사람들 몫도 있으니까 가지러 올 사람도 같이 오고. 알겠지?”
“응!”
그래서 진해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미리 미려 몫의 홍소육을 만들어 두기로 작정했다. 오랜만에 미려방 식구들과 잔치를 벌이지 못하는 건 아쉬웠지만 미려와 둘이 오붓하게 먹는 것도 각별할 터였다.
“그럼 나 이제 간―”
“이보시오, 문을 왜 이리 오래 열어 두는 것이오. 허, 그대는?”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오호가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운 탓인지, 그도 아니면 쪽문을 너무 오래 열어 둔 탓인지(겨우 한 뼘 정도였다) 안에서 사람이 나와 버렸다. 진해와 비슷한 관복을 입고 황색 띠가 들어간 수건을 걸친 이였다. 그리고 언젠가 진해가 해산 마마님을 해산 도련님으로 부를 때 해산 도련님의 문을 지키고 있던 이, 험상궂은 얼굴을 했던 바로 그 이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음, 어, 우리가, 구, 구면이던가요?”
“하하, 스쳐 지나가셨으니 모르는 것도 당연하십니다. 저는 해원공부 일등시위이자 내무부 사등시위인 황아무(愰雅舞)라고 하옵니다.”
“아무? 이름이 아무개야? 참 특이한 이름이네?”
“세, 세살아!”
내무부 사등시위면 진해보다 훨씬 관품이 높은 인물이었다. 해원공의 방문 앞을 지키고 있는 걸 보면 무공도 보통 수준이 아닐 터였다. 그런데 오호는 그런 어르신의 이름을 가지고 장난을 쳤다. 진해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어린아이가 철이 없어서 그런 것이니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황 대인! 세살이 너 뭐 하고 있어! 어서 나리께 잘못했습니다 안 하고!”
“아잉.”
“아잉은 뭔 놈의 아잉이야!”
“괜찮습니다. 저도 늦둥이 동생이 있어 다 이해합니다. 사내라면 이렇게 톡 쏘는 맛이 있어야지요.”
황아무, 아니 이 아무개 자식은 세살이에게 이미 반쯤 넘어간 모양이었다. 어쩌면 세살이가 자리에 없어 쪼르르 쫓아 나온 걸지도 모르겠다.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어! 마마님 곁에서 한시도 안 떨어지고 지켜 드려야지! 뭐 톡 쏘는 맛이 있어야 해? 이런 천하의 변태 자식을 보았나! 너 이놈, 오늘 잘 걸렸다. 오호가 어떻게 이패를 차지했는지 똑똑히 보여 주마!’
저보다 높은 관료가 자신을 아는 척하고 너그럽게 대했음에도 진해는 속에서 부글거리는 감각을 참을 수 없었다. 세살이를 잡아채 사과시키는 척 세살이의 손바닥을 불규칙하게 압박했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황아무개 놈을 가리켜 보았다.
“이것 놔! 황 대인이 괜찮다잖아! 괜찮죠~? 황 대인~?”
세살이는 고개를 숙이게 하는 진해를 뿌리치고 황아무에게 쪼르르 달려가 팔짱을 꼈다. 자그마한 몸으로 건장한 팔을 껴안고는 깜찍한 눈으로 황아무를 올려다보았다. 긴 속눈썹을 털듯이 깜박이자 황아무개가 눈에 띄게 당황한 모습이 보였다. 황아무의 손끝이 세살이의 비밀스러운 곳에 은근슬쩍 걸쳐 있었다.
“그, 그럼, 그럼! 하하하! 내가 겨우 그 정도에 노할 소인배로 보이는가?”
“아이, 역시 황 대인이 최고야!”
세살이, 아니 오호는 노래나 춤은 다른 기생들과 별 차이가 없었지만 사람 털어먹는 재주가 탁월했다. 털어먹은 액수만 따지면 미려와 비등비등할 정도였다. 게다가 오호에게 털린 사람들은 결코 오호를 원망하지 않았다. 어찌나 야금야금 표 나지 않게 홀랑 벗겨 먹는지 그들은 지금도 오호를 보면 눈물을 글썽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황 대인~ 저 배고파요~ 있잖아요, 제가 부엌으로 가는 지름길을 알거든요? 우리 둘만, 응? 우리 둘만 가요. 우리 둘이서 맛있는 거 먹어요~”
“하하, 그렇게는 아니 되는데, 하, 하하!”
“황 대인~”
하는 꼴을 보아하니 벌써 집 한 채는 날려 먹었다. 진해는 비뚤게 미소 지으며 떨어진 고깃덩이들을 갈무리했다.
“그럼 전 이만.”
찾아온 위기를 넘겼으니 이젠 빠르게 후퇴할 일만 남았다. 진해는 황아무개에게 넙죽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얼른 잠춘동의 골목으로 빠지려고 했다.
“잘한다. 참 잘하는 꼬라지다.”
그러나 세상일이 어디 하나 쉬운 게 있던가. 누군가 재빨리 사라지려던 진해의 어깨를 턱 움켜잡았다.
“헛, 기무위사!”
“동 대인이 아시면 참 좋아하시겠어. 제 임무를 팽개치고 기생을 팔에 낀 채 희희낙락. 그 새끼 나랑 동갑인 건 알고 그러지? 아니면 어린애한테만 서냐? 변태야?”
“어이, 추피동 깡패. 말조심 안 하냐?”
“세살아…….”
“봐라. 저거 본성 드러내는 거. 저 새끼 별명이 간 빼먹는 살살이야. 한번은 눈감아 줄 테니까 얼른 자리로 꺼지시지, 황 시위.”
오호가 다 잡은 고기인 황 시위를 팽개치게 할 정도의 인물이 몇이나 될까. 미려방의 문지기 형제들과 사이가 안 좋은 이가, 동시에 동십사를 입에 담을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
“오진해. 요새 우리 자주 본다? 이런 걸 운명이라고 하던가?”
미려방의 뒷문 쪽에서 나와 진해의 어깨를 움켜쥐었던 건 다름 아닌 삼랑이었다. 미려방에 파란을 끌고 온 장본인이었다.
진해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몸을 굳혔다. 삼랑은 그런 진해의 곁으로 다가가 진해의 허리를 움켜쥐었다. 움켜쥐는 것도 모자라 제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관복과 관복이 맞닿자 세살이의 눈매가 세모꼴로 뾰족해졌다. 황아무는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하고 그저 쩔쩔맬 뿐이었다.
“하하, 그, 한 위사와 오 시위가 아시는 사이셨, 구려!”
“알기만 할까. 알다 못해 아주 밀접한 사이지. 딱 보면 모르겠어?”
황아무는 삼랑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한 사람은 웃고 있고 한 사람은 굳어 있었다. 거리는 밀접했지만 심리는 밀접하지 못한 것 같았다. 황아무는 머리를 굴리다가 둘의 사이를 설명할 가장 적절한 단어를 찾아냈다. 채권자와 채무자. 빚쟁이와 빚쟁이.
“참 잘 어울리시는 듯하오.”
“그렇지? 황 시위 제법 보는 눈이 있네? 한마디만 더 하면 저 새끼 데리고 가는 것도 못 본 척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두 분 사이가 원만히 해결되길 천지신명께 기원하리라!”
황아무는 눈 딱 감고 오진해를 외면했다. 오진해는 해원공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으니 빚 정도는 금방 갚을 수 있을 터였다. 지금의 황아무가 두려운 건 무관들에게 죽음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검은 수건의 주인이었다. 황아무가 삼랑이 모시는 주인을 아는 건 천행이나 마찬가지였다. 삼랑이 해원공이 사람이 아니고 해원공을 실각시키려는 이의 기무위사였다면 황아무는 그의 눈에 띄는 순간 뇌옥으로 끌려갔을 것이다.
“세, 세살 공자, 갑시다!”
“뭐? 저걸 보고 그냥 간다고?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어? 무관은 똥구멍으로 달았나! 저걸 보고 그냥 가? 저 양아치 새끼가, 읍, 으읍!!”
“그럼 다음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한 위사!”
황아무는 어지간히 급했는지 욕을 폭포수처럼 쏟아 내려는 세살이의 입을 틀어막고 반쯤 들어 올렸다. 미려방의 구조도 모르면서 후다닥 사라지는 게 어지간히 급한 듯했다. 오진해는 그런 황아무를 바라보며 세살에게 다 보이도록 손짓을 했다.
‘그 새끼 다 털어 버려.’
세살이는 진해의 손 쪽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일패이자 형제의 주인인 정미려가 이 사실을 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어서였다. 정미려가 화를 낸다면 이 자식을 알거지로 만들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터였다. 세살이는 덜렁 들려 가면서 이놈의 집구석 먼지 하나마저도 털어먹겠다고 다짐했다.
“오진해. 황아무 저 둔탱이가 봐도 우리가 참 잘 어울린다고 하네. 응? 손에 든 건 뭐냐? 고기?”
“오랜만에 홍소육이나 해 볼까 해서…….”
“아~ 홍소육 좋지. 이 서방님은 홍소육보다 배골(排骨:갈비)을 더 좋아하는데. 그래도 이 아랫도리 가벼운 창놈 자식이 낭군을 그리워하며 만든다는데 그걸 또 외면할 수는 없지. 자, 가자.”
“가다니?”
“어차피 집으로 가려던 거 아니었냐? 오입 새끼가 말 안 하던? 미려방에 중요한 손님이 있다고.”
“오입 새끼가 아니고 오호야. 일할 때는 세살이고!”
“흐음, 내가 네 낭군인 건 부정 안 하네?”
“아닌 걸 굳이 부정할 필요가 있을까……?”
“방금 뭐라고 말했냐?”
진해가 달달 떨면서도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자 삼랑이 진해의 옆구리를 콱 틀어쥐었다. 이놈의 음인들은 왜 이렇게 옆구리 틀어쥐는 걸 좋아하는지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아야야, 아야야!! 빠르다고! 낭군은 너무 이르다고!! 아야!!”
해산은 진해를 잡아끌기 위해서 옆구리를 붙잡았었지만 삼랑은 진해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서 옆구리를 틀어쥐었다. 고통의 정도로 치면 삼랑이 세 배는 더 심한 것 같았다. 역시 추피동을 주름잡았던 두목다웠다. 추피동에서는 정말로 잘 통할 듯한 참된 대화법이었다.
“그럼 넌 언제가 되어야 낭군이란 말이 적당하다고 보는데? 네가 아는 음인 중에서 나보다 더 진도 빠른 놈이 있냐?”
“…….”
물론 있다, 각인이랑 결 빼고 다 해 본 음인이.
“멍청한 놈. 내가 씹질 말하는 거 같냐?”
“씹…….”
“네놈 새끼는 아랫도리가 새털처럼 가벼워서 눈 맞는 새끼만 있으면 씹질부터 하잖아. 그런 씹질에 무슨 가치가 있어?”
진해는 삼랑의 말에 대꾸하려고 했으나 이번에도 대꾸하면 삼랑이 옆구리에 구멍을 내 버릴 것 같아 끙끙 앓는 소리만 냈다. 하지만 속으로는 삼랑의 말을 백번 부인하였다.
우선 진해의 아랫도리는 새털처럼 가볍지 않았으며 갓 베어 낸 돼지고기처럼 묵직했다. 또 진해는 아무 음인과 눈이 맞지 않았으며 눈이 맞은 이들과는 나름 진지한 관계였었다. 다만 진해와 눈이 맞은 음인들이 하나같이 현명한 이들이라 진해와 더 이상 연을 잇지 않기로 결정한 것뿐이었다. 진해는 그들의 결정을 존중했으며 그들 역시 진해가 어울리는 짝을 만나 행복하기를 기원해 주었다.
“씹질만 줄곧 해 댄 놈들보단 너랑 혼담이 오간 나야말로 네 낭군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지. 서로 집안 사정 다 알고 혼수도 오간 적 있으면 말 다 한 거 아니냐? 다른 사람 같으면 벌써 합쳤지. 암, 그렇고말고.”
진해가 속으로 대꾸하든지 말든지 삼랑은 제 할 말 다 하고는 만족스럽게 씩 미소 지었다. 정말로 밉살스럽기 그지없는 미소였다. 진해는 삼랑이 옆구리를 놓아주자 그 위를 불이 나도록 문지르며 아주 얄미워 죽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혼담은 그렇다 치고 우리가 언제 혼수를 주고받았어?”
“형들이 네 입에 풀칠할 곡식을 갖다 줬잖아. 실컷 먹고 입 닦기냐?”
“그건 널 돌봐 준 값이었잖아?!”
“참 나, 나같이 멀쩡한 음인이랑 한 침상에서 잤으면서 거저먹으려고?”
“거, 거저! 거저먹다니! 누가 거저먹어?! 동열넷한테 얻어맞아 기억 상실에 걸렸나! 야! 내가 너 밥 먹이고 씻겨 주고 다 했잖아! 네 형들이 준 건 그 값이잖아!”
“와. 굉장하다, 오진해. 내 알몸을 봤다는 걸 술술 잘도 자백하네?”
“엥?”
삼랑은 기무위사인지 나발인지가 되더니 머리가 살짝 돌아 버렸는지 보모 삯으로 받은 곡식을 혼수로, 저를 씻겨 주고 재워 준 일을 파렴치한 행위로 둔갑시켜 버렸다. 그 곡식은 미려도 같이 먹고, 삼랑이 씻는 옆에서 미려도 같이 머리를 말리고 있었는데 잘도 저딴 식으로 나불거리는 것이다.
정말로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일이었다. 진해는 처음으로 말문이 턱 막히는 희귀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어이가 없으면 이런 식으로 말이 안 나온다는 걸 깨달았다. 도대체 삼랑이 왜 이렇게 저한테 집착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제 말마따나 사지 멀쩡하고 멀끔하게 생겨 양인이라면 마음대로 골라잡을 수 있는 녀석이 대체 왜 이러는지.
“삼랑아.”
“응? 왜, 이제 집에 갈 마음이 들었어?”
“아니, 그게 아니라. 중매 서 줄까?”
“뭐? 이 새끼가 돌았나.”
“아니, 네가 깨진 혼담에 집착하니까 그렇지! 자꾸 결혼 이야기를 꺼내는 걸 보아 네가 가정을 꾸리고 싶은 모양인데 그럼 내가 책임지고 괜찮은 놈 하나 구해 줄게! 관직도 생겼겠다 너 정도면 괜찮은 집에 정실로, 켁!”
진해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앞이 깜깜해졌다. 손에 쥔 고깃덩이가 어디론가 날아가고 등과 뒤통수가 강한 충격이 가해졌다. 끌린 발끝이 아렸다. 날아갔던 정신이 돌아오자 눈앞에 보이는 건 삼랑 특유의 옅은 눈동자였다.
“야.”
삼랑은 진해와 코와 코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진해는 그제야 자신이 담벼락에 등을 대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아마 삼랑이 진해를 벽에 처박은 것이리라. 그래서 이렇게 삼랑의 향이 위험하게 진해를 압박하는 것이리라.
“네 눈에는 내가 그렇게 못 미덥냐? 내가 그렇게 우스워 보여?”
삼랑은 평소와 달리 윽박지르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낮고 조용하게 진해의 숨을 집어삼켰다. 그늘 속에서 빛나는 눈은 풀숲에 숨어 있는 야수의 것과 닮아 있었다. 눈을 돌리면 순식간에 달려들어 잡아먹힐 것만 같았다.
“내가 정미려 그 새끼만은 못해도 너에 대해 꽤 잘 알아. 넌 남의 엉덩이 때리는 거 좋아하는 변태 자식이고, 문신이나 점에 아주 환장을 하지. 어린놈보다는 늙은 놈을 좋아하고 처음인 놈이랑은 절대 안 자지.”
더는 가까워질 수 없을 것 같던 숨이 점점 진해의 입술에 달라붙었다. 삼랑이 살짝 고개를 틀자 진해 역시 저도 모르게 삼랑의 고개에 맞춰 고개를 틀었다.
“난 네가 왜 그러는지 알아.”
입술과 입술이 맞닿았다.
“넌 버려지는 걸 싫어해. 진지해지는 걸 무서워해.”
삼랑의 향을 이렇게 가까이서 들이마신 적은 처음이었다.
“오진해.”
마냥 어린아이인 줄로만 알았는데. 미려보다도, 제 동생보다도 어린것인 줄로만 알았는데.
“난 절대 널 버리지 않아.”
그냥 한때의 소동으로 지나갈 연으로 여겼는데.
먼저 눈을 감은 건 진해였다. 진해는 눈을 감고 제 입술에 닿은 것을 부드럽게 빨아들였다. 삼랑은 정말로 진해를 잘 알고 있었다. 진해는 삼랑이 뱉은 말에 순식간에 유혹당했다. 버리지 않는다는 말, 진해를 혼자 두지 않겠다는 말. 그 말만큼이나 진해에게 달콤하게 작용하는 것이 어디 있을까, 진해의 이성을 앗아 가는 말이 어디 있을까.
숨과 숨이 섞이고 향과 향이 뒤섞였다. 온기와 온기가 이어졌다. 거부가 없는 입맞춤은 뜨거웠다. 삼랑 역시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있었다. 그저 점막과 점막이 닿는 것뿐인데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짜릿한 전율이 내달렸다. 탁탁 튀는 감각은 강한 정전기를 닮은 듯도 했다.
“흐읏…….”
입을 열자 혓바닥이 분명한 살덩이가 매끄럽게 삼랑의 입 속으로 파고들었다. 신체의 일부건만 저 혼자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매끄럽고 생생하게 삼랑의 입 속을 유영하였다. 섞이는 타액에서 진해의 맛이 났다.
“씨발, 존나 좋네.”
삼랑이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잠깐 떨어진 입술 사이로 삼랑의 가감 없는 평가가 튀어나왔다. 진해 이 개놈은 여러 놈을 전전한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훌륭한 기술을 갖고 있었다. 궁 안에서 곱게 자란 해원공이 진해에게 목을 매는 것도 당연했다.
삼랑의 감상이 끝나자마자 진해가 다시 삼랑의 입술을 덮었다. 삼랑의 양 뺨을 감싸 쥐고 열렬히 서로의 혀를 섞었다. 물컹한 살덩어리들이 얽힐 때마다 몸이 뜨거워지고 눈앞이 어찔해지면서 땅이 뒤흔들리는 듯한 감각이 솟아났다. 어느 순간 벽 쪽에 있던 진해가 삼랑을 돌려세웠고, 삼랑이 벽에 기댄 채로 진해에게 접문을 받고 있었다. 빼기만 하던 놈이 제 스스로 삼랑에게 입을 맞추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진해의 기술이 별로였더라도 지금의 삼랑에겐 큰 문제가 아닐 터였다. 오랫동안 노리던 것이 제 손에 들어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삼랑은 지금 당장 절정에 이를 것만 같았다. 억지로 빼앗다시피 했던 진해와의 첫 뽀뽀를 떠올리면 손뼉을 치며 감격의 눈물이라도 흘려야 할 것 같았다.
“하아, 빨리, 빨리해, 빨리…….”
머릿속이 이러하니 몸은 오죽할까. 삼랑의 몸은 입맞춤만으로도 잔뜩 흥분해 있었다. 넉넉한 관복에 훌륭한 융기가 생겨났고, 흐트러진 옷자락 사이로 음인의 향기가 물씬 피어올랐다. 접문만 하다 싸 버릴 것 같아 삼랑은 진해를 재촉하기 시작했다. 진해는 그런 삼랑을 혼내는 것처럼 아랫입술을 지그시 베어 물었다.
“읏!”
솟아난 융기의 끝이 슬그머니 젖어 들었다.
“난 거친 거 별로 안 좋아해. 빡빡한 건 더 안 좋아하고.”
“지랄하고 있네, 변태 새끼, 흐으…….”
진해는 삼랑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갖다 댄 채로 작게 속삭였다. 젖은 입술이 스칠 때마다 삼랑의 피부에 다닥다닥 소름이 돋아났다. 남은 애가 타서 죽겠는데 진해는 삼랑의 눈을 뚫어지라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내뱉었다.
“그중 제일 싫어하는 건 피를 보는 거야.”
피라는 단어를 말하는 동시에 삼랑의 허리를 제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서로의 샅을 뭉근하게 비벼 댔다. 삼랑의 입에서 작게 욕설이 튀어나왔다. 진해는 이번엔 삼랑의 코끝을 깨물었다. 마치 새끼 개를 혼내는 큰 개와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거친 것 대신 축축하게 적시는 걸 좋아해. 좁은 곳을 천천히 길을 들여서 내 손가락이 불 정도로 젖게 만들고, 내 목을 적실 정도로 흘리게 만드는 거. 미끄덩거리는 속에 넣고, 천천히, 빠르게, 천천히, 빠르게, 빠르게―”
진해는 말을 이으면서 허리를 흔들었다. 천천히를 말할 때는 천천히, 빠르게를 말할 때는 빠르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움직임을 그대로 재현해 보였다.
“윽, 씹, 하윽, 빌어, 먹을―”
삼랑은 피부가 하얘서 그런지 얼굴이 물드는 속도도 남들보다 빠른 것 같았다. 진해가 허리를 움직인 지 얼마 되지 않아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더니 목덜미까지 새빨간 물이 들었다. 정수리까지 새빨갛게 붉히고는 헐떡헐떡 숨을 몰아쉬었다. 제 버릇 남 못 준다고 연신 거친 욕설을 토해 냈다. 저런 얼굴을 하고 욕을 해 봤자 귀엽기만 할 뿐이거늘.
삼랑의 눈가에 눈물이 찔끔 비치는 걸 본 진해는 삼랑을 꼭 끌어안아 샅을 빈틈없이 맞붙이더니 손을 뻗어 삼랑의 등을 어루만졌다. 검은 수건 아래로 손을 밀어 넣어 천천히 쭉 뻗은 척추를 타고 내려왔다. 움푹 들어간 곳을 꾹꾹 누르자 미끈한 몸이 잘게 경련했다. 진해의 귓가로 헉헉 뜨거운 숨이 쏟아졌다.
“흐앗!”
“여긴 처음이야? 희락기 때는 어떻게 했어? 뭘 넣어 봤어? 몇 개나 넣어 봤어?”
척추를 따라 미끄러지듯 하의 속으로 들어온 손이 도장을 찍듯 양 엉덩이를 콱 움켜쥐더니 곧이어 갈라진 틈 사이로 파고들었다. 삼랑의 뒤는 훈기와 습기가 잔뜩 엉켜 있었다.
“씨발, 하나…….”
“하나? 어느 하나? 도구 하나를 말하는 거야? 아니면 손가락 하나를 말하는 거야?”
더는 새빨개질 수 없을 줄 알았던 얼굴이 더 진한 색으로 물들었다. 삼랑이 고개를 틀자 진해가 킬킬 웃으며 삼랑의 귓구멍에 혀를 밀어 넣었다. 솜털과 젖은 살이 스치자 삼랑의 어깨가 파드득 움츠러들었다. 삼랑은 끝내 대답하지 않았고 진해는 나쁜 놈팡이처럼 웃음 지으며 삼랑의 젖은 틈 위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삼랑아, 힘 빼자~”
“윽!”
중지 끝으로 한참을 문지르다가 천천히 젖은 속으로 밀어 넣었다. 머뭇거리면서도 조금씩 받아 삼키는 모양새가 아무래도 삼랑이 넣어 봤다는 하나가 손가락을 이야기하는 듯했다.
“아, 아으으…….”
“잘 젖네. 착한 구멍이야. 난 이런 구멍이 좋더라.”
긴 중지를 쉬지 않고 마디 끝까지 밀어 넣은 뒤 앞뒤로 흔들자 벌어진 하의 사이에서 끈적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축축하고 끈적거리는 점액질이 진해의 손가락을 적실 때마다 삼랑은 입술을 짓씹으며 진해의 어깨에 이마를 비볐다. 때로는 손마디가 하얘지도록 진해의 옷자락을 그러쥐기도 했다.
“진, 해, 아읏, 오, 진해……!”
“그래, 그래. 여기가 좋지? 여길 문지르니까 막 싸고 싶지?”
“아, 아……!”
속도는 느렸으나 손가락은 쉬지 않고 삼랑의 뒤를 넓혔다. 하나였던 손가락이 둘이 되고, 셋이 되는 데까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진해의 손가락이 어딘가를 문지를 때마다 삼랑의 속에서 액이 왈칵 쏟아져 내렸으니까, 어딘가를 꾹 누를 때마다 삼랑의 무릎에서 힘이 빠지고 눈앞이 새까맣게 흐려졌으니까.
삼랑이 혼자서 미숙하게 위로하던 때와는 차원이 다른 쾌감이었다. 부리던 놈들에게 앞을 빨게 시키던 것이 삼랑이 알던 가장 큰 쾌락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감각은 무엇일까. 단지 오진해와 하는 것만으로 이런 기분이 든단 말인가. 아니면 오진해 저 새끼가 다른 사람이랑 경험이 풍부해서, 그래서 그런 것일까?
삼랑은 대체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눈앞의 양인과 하나가 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저놈의 물건을 받아들이고, 정액을 집어삼키고, 결을 받고, 각인을 해서 오로지 자신만 보도록 만들 생각뿐이었다. 운이 좋아 단번에 애라도 배면 오진해는 빼도 박도 못하고 삼랑의 사내가 되는 것이었다. 삼랑은 자신이 애새끼처럼 보인다는 것을 알면서도 진해에게 연신 그의 물건을 졸라 댔다. 평소의 삼랑과는 퍽 다른 모습이었다.
“응. 알았어, 알았어. 우리 삼랑이 보채지 말고, 자, 뒤로 돌아봐. 처음에는 뒤로 하는 게 편하니까.”
그렇기 때문에 삼랑은 오진해의 얼굴을 보고 싶으면서도 선뜻 뒤로 돌아섰다. 오진해의 얼굴에 떠오른 욕정을 한 점도 놓치지 않고 눈에 담고 싶으면서도 꾹 참고 오진해가 시키는 대로 벽을 짚고 섰다. 오진해의 변태적인 성정을 생각하면 단번에 밀고 들어올 게 분명했다. 실컷 풀어 줬다고 말하면서 말만 한 거시기를 배가 터지도록 집어넣을 것이다.
아, 생각만 해도 아랫배가 뻐근해졌다. 삼랑은 서늘한 공기가 아랫도리를 간질이는 것을 느끼며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아무래도 좋으니 어서 제 속을 채워 주길 바랐다. 오진해를 자신의 것으로, 자신이 오진해의 것이 되기를 바랐다.
“야, 하아, 뭐가 이렇게, 오래……?”
그런데 밀고 들어와야 할 물건이 한참이 지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삼랑이 아는 오진해는 고자가 아니었다. 삼랑과 함께 살 적에도 아침마다 우람한 물건이 삼랑에게 자신의 건강함을 고하곤 했던 것이다. 게다가 방금 맞닿았던 샅은 삼랑이 살짝 걱정이 될 정도로 묵직한 부피를 갖고 있었다. 삼랑에게 욕정이 솟지 않는다면 그렇게 부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이 씹새끼가…….”
진해의 물건이 이상이 없는데 넣지 않는다면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그것은 바로 진해가 이 자리에 없다는 것이었다. 진해의 물건이 진해와 함께 이 자리에서 이탈했다는 것이었다.
“오진해, 이 개새끼야!!!!!!!!!!!!!!!!!”
과연 삼랑이 뒤를 돌아보자 진해가 사 왔던 고기 두 덩어리만 덩그러니 바닥에 놓여 있었다. 어디선가 싸늘한 바람 한 줄기가 불어닥쳤다.
“이 씨발 새끼가! 이 개씨발 새끼가!!!!”
삼랑은 치밀어 오르는 분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고깃덩이를 걷어찼다. 연잎에 싸인 고깃덩이는 담벼락에 부딪히자 형체를 잃고 순식간에 완자처럼 으깨졌다. 이 시발놈이 골목 사이로 끌고 들어오더니 이런 속셈이 있었다. 삼랑은 자리에 주저앉아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 * *
그렇다면 삼랑을 엿 먹인 오진해는 어디로 갔느냐. 놀랍게도 오진해는 자신의 집으로 간 것이 아니라 바로 옆의 미려방으로 숨어들었다. 삼랑이 자신의 집을 알고 있으니 거기 숨어 봤자 소용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해원공 마마님이 자신을 지켜 줄 것이란 기대도 있었다. 해원공에게 더 이상 무술 수업을 받기 싫다고 징징댄 뒤 미려의 방에서 한숨 돌리는 것이 오진해가 세운 계획이라는 놈이었다 .
“미쳤지, 미쳤어! 어디 손댈 애가 없어서 삼랑이한테 손을 대! 으이구, 오진해, 이 덜떨어진 새끼!”
미려방의 후미진 곳까지 달음박질친 진해는 자신의 머리를 연신 쥐어박았다. 쥐어박는 손가락에 끈적끈적한 체액이 남아 있었다. 자신의 것이 아닌 타인의 것이었다. 진해의 후각은 저도 모르게 향기로운 음인의 자취를 쫓았다. 정말 환장할 노릇이 따로 없었다. 진해는 이때까지 삼랑을 미려보다도 어린 젖먹이로만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 젖먹이와 하마터면 선을 넘을 뻔했다. 피붙이를 잃은 지 일 년도 되지 않은 가여운(전혀 가여워 보이지 않지만) 아이에게 하마터면 넣고 싸 버릴 뻔했다. 삼랑이 아무리 매력적인 음인이라도 그래서는 아니 되는 일이었다. 삼랑이 아무리 끌리는 말을 해도 진해가 어른답게 삼랑이를 먼저 밀어내야만 했었다.
“……몸은 어른이 아니라 어르신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지.”
하지만 진해도 자신에게 항변할 말이 있었다. 그건 바로 삼랑이 이젠 어린애가 아니라는 말, 진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겐 충분히 어른으로 대접받을 정도로 성숙했다는 말이었다.
삼랑은 진해의 취향에서 살짝 비껴갔으나 남들이 한 번쯤은 뒤돌아볼 정도로 잘생긴 음인이었다. 옅은 색의 체모와 흰 피부가 무료한 표정에 신비로움을 더했다. 훤칠하고 후리후리한 몸에 관복을 걸치자 어느 집 영식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준수해 보이기도 했다.
마른 듯했으나 벗겨 보면 근육이 꽉 들어찬 알짜배기 몸에 제 한 몸 지킬 줄 아는 주먹까지. 삼랑이 욕만 좀 덜했어도 진해는 삼랑의 형님들에게 일보 삼배를 올리며 삼랑이가 관례를 치르기만을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으으……, 진짜 위험해! 아직 해원공 마마님과 완전히 끝나지도 않았는데 삼랑이에게 손을 댔다는 게 들키기라도 하면……!”
그러나 진해는 삼랑이 아무리 잘 빠지고, 아무리 온순해져도 지금 당장 선을 넘을 수는 없었다. 삼랑이 제 맘에 쏙 드는 말을 해도 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삼랑과 어쩔 수 없이 거리를 둬야만 했던 것이다.
“해원공 마마님도 날 좋아하시지……. 원이라는 게 뭔진 모르겠지만 평범한 측실에게 주는 건 아닐 거야. 거기다가 해원공 마마님의 첫 시침을 모셨으니 다른 상대가 생기기 전까지 계속 날 찾으실 테고.”
삼랑이와 선을 넘을 뻔했다는 사실에 혼란스러웠던 것도 잠깐. 진해는 현재 자신과 교제 비슷한 관계에 놓여 있는 해원공 안해산을 떠올렸다. 진해가 기억하는 안해산의 얼굴은 남들이 기억하는 안해산과는 썩 다른 것이었는데, 진해는 언젠가 해산이 자신을 품에 꼭 끌어안아 줬을 때를 떠올리고 있었다.
해산의 품은 진해가 안긴 것 중 가장 일품이었다. 너른 폭하며 푹신한 두께까지 어느 하나 빠질 것이 없었다. 진해를 내려다보며 살짝 휘어진 입술은 보는 것만으로도 따스한 온기를 전해 주었다. 분명히 해원공도 진해를 좋아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랬기 때문에 벼슬을 주고 일자무식인 그에게 이것저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삼랑이는 어떡하지? 삼랑이한테 벌써 손을 대 버렸는데! 아니, 아직 안 넣었으니까 상관없나? 아냐, 손가락은 넣었잖아! 아니지, 이 사람아. 손가락이 거시기도 아닌데 무슨 놈의 손가락이야. 아냐, 아냐! 넣는 게 문제가 아니라 삼랑이랑 응응한 분위기가 된 게 문제라고!”
미려방의 후미진 곳, 주방 근처의 난간에서 진해는 마침내 자아 분열의 경지에 도달하고 말았다. 놀랍게도 진해는 동시에 두 음인의 구애를 받고, 두 음인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듯했다. 못생기진 않았지만(미려는 엄청난 미남이라고 말해 줬다) 아주 빼어난 미남도 아니고, 할 줄 아는 것이라곤 장 담그기, 수놓기, 옷 짓기, 머리 빗기, 무두질, 요리, 청소, 시체 매장 등밖에 없는 하잘것없는 오진해가 빠질 것 하나 없는 음인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오진해가 두 음인 중 누구를 버리질 못한다는 점이었다. 사실 오진해는 둘 다 저를 놔두고 제 갈 길을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두 사람이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게 기쁘기 그지없었다. 관례를 치르고도 다섯 해. 오진해의 인생에서 이렇게 사랑이 넘칠 때가 있었던가 절로 회고하게 되었다.
“끄응, 버리는 건 싫어. 버려지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면 간단한 일이었지만 진해는 둘 중 누구도 선택하지 못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면 남은 하나는 버려지는 것이었다.
―진해는 버려지는 게 싫었다. 버리는 것도 싫었다.
버려지는 게 어떻다는 건 진해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희미하게 남은 우부의 그림자가 금방 돌아올게, 라고 말했던 것을 아직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다.
“에이, 모르겠다! 일단 미려방에서 머릴 좀 식히자. 마마님도 삼랑이도 너무 과열돼 있어서 그런 거야. 시간이 지나면 둘 다 정신을 차리겠지!”
진해는 마지막으로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감각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썼다.
자그마한 미려는 요람에서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었고, 우부는 진해가 먹을 주먹밥과 물, 작은 간식을 차려 주었었다. 나가기 전 조금 망설이는 것 같기도 했다. 망설이다가 걸고 있던 패옥을 어린 진해의 목에 걸어 주었다.
‘금방 갔다 올게. ―― 기다리면, ――지와 만날 수 있어. 그러면 할――지와 만나는 것도 금방이야. 얌전히 있으렴, 해아. 만약 내가 오지 않으면 ―집의 오씨――’
진해가 아무리 벗어나려 애를 써도 우부에 대한 애틋한 감각은 끝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먹었던 주먹밥은 따뜻했었다. 진해가 싫어하는 건 하나도 들지 않은 주먹밥이었다. 주먹밥을 먹어도 우부는 오지 않았고, 물을 다 마셔도 우부는 오지 않았다. 아기가 깨어나 울어도 우부는 오지 않았다. 진해가 요람을 기울여 아기를 힘겹게 꺼내 줘도, 우는 아기를 안고 달래 줘도, 진해의 배가 고파져도, 진해가 목이 말라져도, 누군가가 문을 부수고 집 안의 진해와 아기를 데려가도 결코 진해의 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휴…….”
진해는 어쩐지 미려가 무척이나 보고 싶어졌다. 우부가 진해를 버린 후부터 진해와 함께 있어 준 건 진해의 하나밖에 없는 동생인 강아지뿐이었다. 십여 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 한 정미려뿐이었다. 세살이가 새해맞이 차림으로 있는 걸 보아 미려 역시 만만찮게 치장하고 있을 터였다.
진해는 미려의 방으로 올라가기 전에 미려가 꾸민 것만 살짝 훔쳐보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진해가 보고자 한다면 미려는 얼마든지 새 옷과 장신구를 꺼내 치장을 하겠지만 미려가 일부러 치장을 하는 건 진해 쪽에서 사양이었다. 미려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진해가 아닌 미려를 행복하게 해 줄 사람이 보아야만 했다. 진해에게 미려가 소중하기 때문에 진해는 미려가 좋은 짝을 만나길 바랐다.
미려가 친부를 따라가지 않고 저와 같이 있어 주기로 결정한 것이 고마워 더욱 행복한 삶을 살길 바랐다. 아마 미려 역시 진해가 행복하길 바랄 터였다.
양손으로 아프지 않게 뺨을 두드린 진해는 정신을 차리고 슬그머니 미려방의 복도를 헤쳐 나갔다. 해원공이 자리했으니 경비가 삼엄한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미려방이 세워질 때부터 들락날락한 진해만큼 미려방을 잘 알진 못했다. 진해는 엉금엉금 기기도 하고 슬금슬금 벽에 붙어 가기도 하면서 교묘하게 호위며 시위들을 따돌렸다.
그리고 마침내 미려방의 대공연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 미려의 방과 바로 통하면서도 남들의 눈에 띄지 않는 커다란 기둥 뒤에 도착했다. 진해는 미려방의 온 기생(세살이는 없었다)이 모여 있는 아래를 내려다보게 되었다. 연통을 했는지 평소에는 잘 오지 않던 도도하고 싸가지 없는 악공까지 자리하고 있었다. 악공은 콧대가 높던 평소와 다르게 슬쩍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진해는 속으로 저 양반이 저런 얼굴도 한다며 적이 놀라고 말았다.
“새로 난 버들은 싱그럽고, 뒷산의 복사꽃은 희디희구나. 산에는 꾀꼬리가, 강에는 원앙새가, 만물이 쌍쌍이 노니는 계절이 되었네. 접은 수건을 가만히 담 너머로 던져 보네.”
그리고 창기(倡妓)가 노래하고 악공이 연주하는 가운데 미려가 유연하게 춤을 추고 있었다. 미려는 길고 까만 머리채를 구름처럼 틀어 올리고 옥이며 호박, 산호며 단백석 같은 것들을 꽂고 있었는데 미려가 몸을 돌릴 때마다 그것들이 불빛에 찬란하게 광채를 내고 있었다. 어찌나 영롱하게 반짝이는지 하늘의 별이 따로 없었다.
게다가 오늘 입은 옷은 미려가 가진 옷을 대강 알고 있는 진해조차 처음 보는 옷이었다. 어떻게 만들었나 싶을 정도로 여러 색의 깃이 겹쳐진 옷이었는데 진해는 색이 알록달록할수록 환장을 하는지라 그만 눈이 화등잔만 해지고 말았다. 그리고 잠시 뒤, 진해는 옷깃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미려가 미풍처럼 가볍게 춤을 추며 팔을 어찌 움직이자 바닥에 안개처럼 얇은 천 한 겹이 떨어진 것이다.
벌써 몇 겹을 벗었는지 미려가 발을 옮긴 자리마다 떨어진 꽃송이처럼 얇고 고운 옷들이 떨어져 있었다. 연회장이 큰 덕에 미려는 떨어지는 옷을 신경 쓰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춤을 추었다. 틈을 봐 다른 기생이 미려의 옷자락을 거둬들였다. 기생들은 거둬들인 옷자락을 움켜쥐고 미려에게 연신 감탄과 선망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와아, 세상에…….”
평생 춤과 노래 속에 사는 기생들이 저럴 정도니 오진해는 말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진해는 자신이 숨어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입을 헤 벌린 채 미려가 춤을 추는 모습을 구경하였다.
미려가 고개를 이쪽으로 기울이면 옥색이 반짝거리고, 저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면 적색이 반짝거렸다. 내려앉으면 은조사 옷이 사르르, 뛰어오르면 금비녀가 짤랑짤랑. 예쁜 것을 좋아하는 진해에게는 지나칠 정도로 강한 자극이었다. 특히 위쪽에서 지켜보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강렬한 반짝거림이었다.
“악, 내 눈!”
금강석인지, 수정인지, 아니면 거울 조각인지. 투명한 것이 연회장의 불빛을 머금었다 토해 내었다. 은빛 광선이 진해의 눈을 날카롭게 들쑤셨다. 진해는 따가운 눈을 움켜잡고 엉덩방아를 찧었는데, 하필이면, 하필이면 미려방의 복도에서 제일 낡고 부실한 마루에 엉덩이를 부딪치게 되었다.
재수가 없으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진해가 넘어지는 순간 악공이 손을 멈추었다. 미려 역시 잠깐 숨을 돌렸다. 연회를 진행하는 이도, 즐기는 이도 한 박자 쉬어 가는 시간이었다.
[삐걱!]
바로 그 시간에 진해의 엉덩이와 마루가 자아낸 불협화음이 미려방의 대연회장에 공허하게 메아리치게 되었다.
“누구냐!”
“침입자다!”
“마마를 호위하라!”
촘촘하게 서 있던 호위들이 대번에 소리의 진원지를 바라보았다. 공들여 숨은 게 무색하게 순식간에 진해를 찾아냈고 흉흉한 눈빛을 빛내며 진해를 잡으러 쫓아왔다.
“허억!”
그렇다고 그들 손에 순순히 잡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애초에 진해가 그들의 거친 손놀림에 몸을 맡길 이유가 없었다! 진해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계단의 손잡이에 엉덩이를 걸쳤다. 미끄럼틀처럼 타고 내려가 엎어지듯 착지한 뒤 후다닥 연회장의 상석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당황한 호위들이 진해를 저지했으나 위기에 처한 몸놀림은 나무 위의 다람쥐를 방불케 했다. 진해는 기고 구르고, 서고 앉고, 온갖 묘기를 부리며 호위들을 피해 마침내 해원공 안해산이 앉아 있는 상석에 도착하고야 말았다.
“도, 도련님!”
“너? 네가 여긴 무슨 일이냐?”
해원공의 호위들은 황아무와 마찬가지로 진해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진해를 쫓던 호위들도 진해가 관복을 입고 있는 걸 눈치채고 추격의 끈을 늦춘 후였다. 해원공 안해산 역시 침입자가 진해라는 것을 확인하자 손을 들어 호위들의 움직임을 멈춰 주었다.
“홍, 홍소육!”
“……뭐?”
진해는 해산에게 동생과 미려방 식구들과 오랜만에 홍소육을 만들어 먹으려다가 무산되었고, 집으로 돌아가서 홍소육을 만들려고 했는데 황아무 자식이 책무에 소홀한 게 화가 나서 좀 골 려 주려 했으며, 황아무를 오호의 마수에 밀어 넣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삼랑이와 만나 하마터면 삼랑이와 응응앙앙한 짓을 할 뻔했으나, 넣기 바로 직전에 정신이 들어 그대로 튄 뒤 미려방에서 한숨 자려다 미려가 춤추는 걸 보고 싶어서 숨어 있다가 장신구가 번쩍거리는 바람에 넘어져서 마루에 엉덩이를 부딪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하려 했다.
“고기, 홍소육, 허억, 홍소육을……!”
그런데 호위들을 따돌리며 뛰다 보니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홍소육 이후로는 한 마디도 뱉을 수 없었다. 진해가 홍소육을 반복하자 해산을 괴이쩍은 표정을 짓더니 손짓으로 미려방의 총관 집사를 불러들였다.
“홍소육이 있느냐?”
“예.”
“이리 가까이 가져오너라.”
그리고는 웬만한 방 너비만큼 널따란 식탁 위에서 홍소육을 가져오게 명해 친히 한 젓가락 집어 들었다.
“어이 된 영문인진 모르겠지만 네가 찾는 홍소육이다. 한 입 먹고 천천히 이야기해 보거라.”
해산이 입가에 가져다 대자 진해는 헐떡거리면서도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먹었다.
“음~, 으음~!”
과연 미려방의 주방장은 솜씨가 일품이었다. 단맛과 짠맛, 고소한 기름 맛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최상의 맛을 끌어냈다. 고기 한 점이 지쳤던 심신을 순식간에 풀어 주었다. 진해가 냠냠 받아먹자 해산이 웃으며 진해에게 한 점 더 집어 주었다.
“잘 먹는구나. 허기가 졌던 모양이지.”
“안 그래도 끼니때를 맞춰 고기를 사 들고 오던 참이었지요.”
“그래? 고가 온 것을 듣고 오던 게 아니었구나.”
“냠, 네. 마마님이 오신 건 오고 나서 알았습니다. 동생이랑은 나중에 집에서 보려고 돌아가려는 삼랑이를 만나서, 아.”
“한 시위를 만나서?”
고기 한 점을 얻어먹을 때마다 술술 털어놓던 진해는 삼랑이 이야기가 나오자 해산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진 걸 발견했다. 입꼬리가 유연하게 올라가 얼핏 보면 웃는 듯했으나 진해는 웃는 것과 웃는 모습을 가장하는 것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바보가 아니었다.
“고기를 뺏길래 화가 나서 바지를 내려 버리고 그대로 도망쳐 왔습니다!”
“저런.”
자신을 좋아하는 해산 도련님에게 삼랑이에게 홀랑 넘어가 하마터면 선을 넘을 뻔했다고 이야기할 정도의 멍청이는 더욱 아니었다. 진해는 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삼랑이의 체면과 결백을 넝마 조각으로 만들어 버렸다. 삼랑은 졸지에 길 한복판에서 바지가 홀랑 벗겨진 이가 되어 버렸다. 이미 반쯤 벗기긴 했지만.
“그래서 내게 도망쳐 온 게로구나. 한 시위가 무서워서.”
“네! 삼랑이가 무서워서 집으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미려 춤도 보고 싶었고!”
“그래? 네가 춤 구경을 좋아하는 줄은 미처 몰랐구나.”
“사실 별로 안 좋아하는데 미려가 추는 춤은 각별합니다. 저 같은 무지렁이도 감탄하게 하거든요. 노래는 또 얼마나 잘하는지! 꼭 한번 들어 보세요. 비파 연주할 때는 손가락이 안 보인답니다!”
“그렇군. 춤은 이제 되었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해산은 진해에게 먹이던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근엄한 목소리로 미려를 불러들였다. 미려의 몸에는 다섯 겹의 옷자락이 남아 있었는데 비칠 듯 말듯 몸의 굴곡을 드러내는 것이 묘하게 요염한 분위기를 풍기었다. 하얗고 반듯한 이마에 붉은색으로 작은 꽃 모양을 그려 놓았다. 시울이 긴 눈매가 가만히 바닥에 드리우자 미려를 키운 진해조차도 모르는 얼굴이 드러났다. 사실 진해가 상석에서 미려를 볼 일이 없었으므로 무대 위의 미려는 진해와 처음 만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우와…….’
지금 이 순간 미려를 앞에 둔 이라면 미려가 월국 제일이라는 말에 절대로 토를 달지 못할 터였다. 토를 다는 이가 있다면 진해는 당장 그 귀싸대기를 후려칠 용의가 있었다. 양인이고 음인이고를 따질 필요가 없을 정도의 미모였다. 성숙한 외양을 좋아하는 진해의 취향마저 동강 내 버릴 정도로 미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네 동생이라는 게 미려방의 일패일 줄이야. 재주가 많다는 게 팔불출의 자랑인 줄 알았더니 참이었구나. 이런 이가 있는 곳이 삼급 기루라는 게 믿기지 않는군. 먹는 것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반면 해산은 미려에게 그리 혹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오히려 미려를 처음 본 순간 가슴 한쪽에서 묘하게 켕기는 감각이 있었다. 미려가 진해의 동생이라서? 저 아리따운 외모가 진해와 한 침상을 써서? 차라리 그런 단순한 이유면 좋으련만 정미려가 양인임을 확인한 순간 안해산은 삼랑이 자신을 이용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진해가 전부터 삼랑과 제 동생의 사이가 좋지 않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해산은 미려가 최상의 대우로 자신을 대접해도, 몇 곡이나 춤을 춰도 자신이 느끼는 감각을 정의 내리지 못했다. 홀렸다거나, 반했다거나 하는 감각과는 상당히 상반된 감각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불쾌한 쪽의 감각이었다. 위화감이나 기시감과 상당히 닮아 있었다. 아름답지만 끌리지 않는 양인, 자신이 마땅히 경계해야 할 양인. 안해산은 미려를 그렇게 결론지었다.
“흑흑…….”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해산이 미려를 관찰하며 없는 공치사를 짜내고 있는 이때, 진해가 갑자기 훌쩍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해산은 난데없는 상황에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진해, 왜, 왜 그러느냐?”
정말로 왜 그러냐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해산이 누구를 혼낸 것도 아니고, 진해의 신변에 이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더욱 해산을 환장하게 만든 것은 진해 쪽으로 머리를 두고 있던 정미려 역시 소리 없이 울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상황이 참으로 묘했다. 해원공이 오냐오냐 고기를 먹여 주던 양인이 갑자기 아름다운 양인을 바라보며 울기 시작했다. 그 아름다운 양인 역시 양인을 바라보며 눈물을 떨구기 시작했다. 진해와 미려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두 사람이 왜 우는지 짐작할 수 있지만 두 사람을 모르는 낯선 이들이 보기에는 정말로 사연이 많아 보이는 장면이었다. 해산이 머뭇거리며 진해를 달래기 시작하자 정말로, 정말로 사연이 깊은 듯한 모습이 연출되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호위들의 표정이 갈수록 미묘해졌다. 상상력이 풍부한 호위들은 벌써 머릿속으로 온갖 기쁘고 슬픈 연애담을 지어내는 중이었다. 그중에 가장 그럴듯하고 자극적인 이야기를 꼽아 보자면 이랬다.
사실 정미려라는 일패 기생과 해원공 옆의 양인은 해원공과 알기 전부터 몰래 좋아하던 사이였다. 그러나 양인과 양인의 사랑은 세간에 환영받기 힘든 것이었다. 두 사람이 몰래 사랑을 키우던 중 그만 한쪽이 해원공의 눈에 들어 버리고 말았다. 황족의 지엄한 명령을 어찌 거부할까. 두 사람은 결국 눈물을 머금으며 이별했으나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해원공이 자리한 곳에서 그만 다시 만나 버리고 만 것이다. 해원공이 보고 있음에도 쌓인 감정이 북받쳐 그만 눈물이 터져 나오고 만 것이다.
“어흐흑! 세상에, 세상에!”
그런 것치고 좀 웃기게 울었지만 우는 모양이 뭐 그리 대수일까. 호위들은 불경스럽게도 흥미진진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정미려와 오진해, 그리고 안해산을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잠깐의 짬만 있다면 동료들끼리 셋을 두고 내깃돈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마마님!”
“응, 그래. 진해야, 대체 왜 우는 게냐? 일패는 또 왜 저러고?”
“흑흑, 미려는 왜 우는지 모르겠는데 전, 전……!”
그러나 흥미진진한 호위들과 달리 해산은 진해가 울기 시작하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불현듯 삼랑의 이죽거리는 표정이 떠올랐다. 한 침상에 잔다는 이야기도, 진해와 혼담이 있던 삼랑과 원수처럼 지낸다는 이야기도.
정미려가 양인임을 확인하자마자 들끓었던 감정은 순식간에 식어 버렸지만 가슴에 남은 한 점 의혹을 몽땅 씻어 내릴 수는 없었다. 해산은 자신의 그릇이 이렇게 작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고 말았다. 사발 정도는 될 줄 알았는데 간장 종지도 감사해야 할 판이었다. 그리고 해산의 간장 종지는 진해의 눈물이 떨어지자 속에 든 것이 넘칠까 봐 어쩔 줄 몰라 했다. 해산은 지금 당장 이 자리의 모든 이들을 물리고 진해를 끌어안고 오냐오냐 달래 주고 싶었다.
“너무 감격스럽습니다!”
“응……?”
“저렇게 고운 걸 제가 키웠다니! 저렇게 예쁜 것을 제 손으로 먹이고 입히고 씻겼다니! 믿기지 않습니다, 세상에! 하늘의 선인도 내 동생만큼은 못할 거야! 어흐흑, 너무 곱다! 너무 고와서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아!”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해산은 진해의 말을 듣자 자그마했던 간장 종지가 순식간에 대야 크기로 넓어지는 것을 느꼈다. 어이없는 표정을 짓지 않고 황족의 품위를 유지하는 중인 얼굴 가죽이 해산의 그릇을 너끈히 증명해 주었다. 귀를 기울이던 호위들의 표정은 이미 처참하게 무너진 지 오래였다.
“그렇구나. 고와서 그렇단 말이지.”
“엉엉, 최고! 우리 강아지 최고!”
엄지를 쌍으로 휘두르며 징징 우는 진해는 보는 사람에게 주먹을 치켜들게 하고픈 신기한 재주를 지녔다. 해산은 삼랑이 진해를 볼 때마다 한 대씩 때리는 걸 이해하지 못했는데 비로소 지금 그 심정을 이해하고 말았다. 정미려는 왜 우는지 모르겠지만 진해와 대충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익숙한 표정의 미려방 사람들을 보니 미려가 공연을 끝마칠 때마다 서로를 지나치게 아끼는 형제 놈들이 이 같은 행동을 반복했음을 알 수 있었다.
“총관.”
“예.”
“술 가져오게. 자리에 있는 이들 모두에게 돌리도록 하게.”
허탈해진 해산은 술이 당겼다. 술 특유의 알싸한 맛을 좋아하지 않는 그였지만 오늘을 왠지 배 속에 술을 넣어야 할 것 같았다. 해산이 자리의 모두에게 술을 사겠다 말하자 총관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미려방의 기생들과 하인들만 쳐도 오십 잔이 넘어갔다. 황자가 쩨쩨하게 한 잔만 사지는 않을 테니 백 잔, 어쩌면 이백 잔이 넘어갈지도 모른다. 총관은 눈을 빛내며 하인들에게 지하에 놔둔 술독을 아예 통째로 들고 오게 했다.
그사이 진해는 해산의 곁에서 떨어져 미려의 곁으로 갔다. 해산은 이패 기생들이 채워 주는 술잔을 든 채 진해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정미려의 앞에 선 진해는 정신 나간 앵무새처럼 입만 열면 예쁘다, 예쁘다를 남발해 댔다. 정미려는 수줍게 웃으며 그런 진해의 손을 잡았고 진해도 정미려의 흘러내린 머리칼을 정돈해 주었다.
“과연. 삼랑이 불을 토할 만하군.”
확실히 오진해는 그렇다 쳐도, 정미려의 반응은 보통 형제의 것을 훨씬 넘어선 것이었다. 긴 속눈썹을 내리깔고 볼을 발긋하게 물들이는 모양새는 사람을 유혹하는 그것이었다. 해산은 그 모습을 본 자신의 속에서 불길이 치솟을 줄 알았으나 지금 해산의 속은 태평 그 자체였다. 삼랑과 오진해가 붙어 있을 때와 비교하면 극과 극이라 할 만했다.
“기이하구나.”
우연하게도 총관이 내어 온 술은 진해가 해산에게 가져왔던 것과 똑같은 여지주였다. 해산은 새콤한 향이 밴 술을 머금으며 묘한 감상에 휩싸였다. 아마 해산이 정미려에게서 받은 꺼림칙함이 그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해산은 제 감정을 모두 헤아리지 못하고 그저 양인과 양인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정미려가 아무리 오진해를 좋아해도 오진해와 한 호적에 들어갈 수 없고, 그의 자식을 낳아 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딜 갔다 왔는지 멀리서 삼랑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바지를 내렸다는 게 정말이었는지 진해를 보자 눈매가 뾰족해졌다. 어쩌면 정미려가 진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약간 핼쑥해진 진해가 휘휘 고개를 젓다가 급작스레 해산의 쪽으로 고갤 틀었다. 다급한 눈빛이 해산에게 강렬히 내리꽂혔다. 제 동생을 옆에 두고도 해산에게 구원을 청하고 있는 것이다.
“하하, 고얀 녀석!”
그 눈빛을 받자 흐리멍덩해진 머리가 개운하게 맑아지는 듯했다. 해산은 진해에게 손짓했고 진해는 미려의 손을 그러쥐고 허둥지둥 해산 쪽으로 왔다. 그리고 미려를 해산의 오른쪽에 앉히고서 자신은 해산의 왼쪽에 앉아 버렸다. 삼랑은 명이 없으면 가까이 올 수 없기에 멀리서 이를 갈 수밖에 없었다.
“마마, 제가 한잔 따라 드릴게요!”
해원공에게 술을 따를 기회가 사라진 이패 기생이 샐쭉한 표정을 지었지만 진해는 이패 기생을 밀어내고 자신이 직접 해산의 잔에 술을 따랐다. 잔이 찰수록 해산의 마음 역시 뿌듯해졌다. 약간 얼큰한 기분으로 해산은 진해의 나쁜 버릇을 조금만 못 본 척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삼랑은 진해가 아주 한량 호색한인 것처럼 이야기했는데 해산이 보기에는 진해는 그저 마음이 여려 이리저리 휘둘리는 것뿐이었다.
“진해야.”
“네?”
“혼례 전까지다. 고의 원이 되기 전까지 조금씩 줄여 나가야 한다. 알겠느냐?”
“술을요?”
“후후, 귀여운 녀석.”
얼큰하게 달아오른 해산이 팔을 뻗어 진해를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미려방 기생들의 낯이 창백해졌지만 정작 그 옆의 정미려는 여전히 담담한 낯빛이었다. 정미려는 그 후에도 줄곧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술에 취한 해산이 진해의 귓불을 어루만지고 진해에게 술을 먹이고, 진해 역시 알딸딸하게 취해 해 롱거릴 때까지, 하인들이 비틀거리는 두 사람을 부축해 수레에 태울 때까지 절대로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 * *
사람이 떠난 연회장은 어수선하고 쓸쓸했다. 꽃잎과 색종이, 여러 가지 향취들이 남은 연회장 가운데서 미려는 진해가 떠난 대문 쪽을 보고 서 있었다. 요염하고 하늘하늘하게 웃던 일패 기생은 그 자리에 없었다. 가면을 쓴 것처럼 무표정하고 서늘한 얼굴이었다.
“아직 안 가고 남아 있다니. 별일이로구나?”
그리고 그 뒤쪽에 삼랑이 자리하고 있었다. 삼랑은 무척 쓴 것을 씹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커다란 기둥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낀 채였다.
“지랄하네. 먼저 남으라고 사람을 보낸 게 누군데.”
“네가 일을 귀찮게 만드는 것 같아서 말이지.”
“왜, 쫄았냐? 해원공 마마한테 상대도 안 되는 거 같아서?”
“하하, 상대라.”
삼랑은 미려에게 대놓고 이를 드러냈으나 미려는 평소와 달리 피식 웃기만 했다. 삼랑은 미려의 그 미소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저놈은 옛날부터 예쁜 얼굴로 방긋방긋 웃다가도 기회가 생기면 서슴없이 주먹을 날리던 놈이었다.
“글쎄, 상대가 되지 않는 건 오히려 해원공 아닐까? 형은 언제나 내게 돌아왔으니까 말이지.”
“아, 그러세요? 그러세요, 우리 강아지 씨?”
“한삼랑.”
“뭐.”
“너는 어떨지 몰라도 나는 형이 행복하길 바라. 내 형의 행복에 방해가 된다면 누구든지 가리지 않고 없애 버릴 생각이야.”
너무나도 진심이 가득한 소리라 삼랑은 순간 대꾸할 말을 잃어버렸다. 저놈 평소에 하는 짓이 그 짓거리라 그럴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저렇게 대놓고 말한 적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저놈의 없애 버릴 대상에 포함될지도 모르는 자신에게.
미려는 잠깐 고요한 틈을 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꽉 조여 놓았던 머리칼이며 비녀, 뒤꽂이들이 나태하게 늘어지고 있었다. 미려가 숨을 쉴 때마다 그것들도 함께 숨을 쉬었다. 숨을 쉬며 땅으로, 땅으로 향하려고만 했다. 드러난 이마는 꺼지지 않은 우각등(牛角燈)의 불빛을 받아 반지르르하게 윤을 냈다. 연지가 흐려진 입술에 초승달 같은 미소가 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 당장 너를 네 형들 곁으로 보내 주고 싶어. 하지만 우리 형은 널 꽤 좋아하지. 네 향을 묻히고 서슴없이 이곳으로 들어올 정도로 말이야.”
“…….”
“해원공을 이용해서 형에게서 날 떼 내려 했지?”
“…….”
“하지만 해원공은 생각보다 날 경계하지 않았고. 아니, 오히려 다른 쪽의 경계가 심해서 그쪽을 신경 못 쓴다고 하나?”
“시발, 그래서 할 말이 뭐야! 왜, 내가 황자마마를 모셔 와서 꼽냐? 오진해랑 그 작자랑 술 처마시는 꼴을 보게 해서 좆 같냐고!”
계속 알 수 없는 소리를 늘어놓는 게 짜증 나 삼랑은 제 성질대로 빽 소리 질렀다. 차라리 서로 욕을 하며 주먹을 주고받는 게 훨씬 시원할 것 같았다.
“아니.”
그러나 정미려는 여전히 느긋했다. 한 계단 위에서 굽어보고 있는 사람 같기도 했다.
“내가 말했잖아. 형은 내게 돌아올 거라고.”
“미친 것도 저 정도면 경지지. 씨발, 할 말 없으면 집어쳐, 개새끼야. 존나 바쁘니까.”
“그런데, 내가 형한테 딱 하나 못 해 주는 게 있거든?”
“한 개 좋아하시네. 졸라 많으면서.”
“우리 형은 아이를 좋아해. 아마 훌륭한 좌부가 될 테지.”
이쯤 되면 삼랑도 정미려가 하고 싶은 말을 알 것 같았다. 속사포같이 욕을 쏟아 내려던 입을 조개처럼 다물었다. 정미려는 들었던 고개를 들 때와 마찬가지로 천천히 내렸다. 그리고 숯불처럼 뜨거운 눈동자를 한 채 삼랑 쪽으로 돌아섰다. 미의 극치를 달리는 외양은 의지가 더해지자 마치 잘 벼려진 단검처럼 예리한 기운을 뿜어냈다.
“삼랑, 네게 손을 잡을 상대는 해원공이 아니라 나야. 형의 옆자리를 줄 순 없어도 아이의 우부 자리 정도는 비켜 줄 수 있어. 왜냐면 난 형이 행복하길 원하니까. 형이 원하는 건 뭐든지 해 주고 싶으니까.”
“……미친 새끼.”
“미쳤는지 안 미쳤는지는 두고 볼 일이지. 하지만 해원공의 부군이 되는 것보다 나와 네가 형을 공유하는 게 훨씬 더 가능성 있어 보이지 않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파격적이었다. 저 정미려가 무려 오진해의 옆자리를 공유하자고 하고 있었다. 단순히 씨받이가 되라는 것도 아니고 공유를 하자고. 무척이나 유혹적인 제안이었으나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삼랑은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 잘못하다간 오진해도 뺏기고 형들의 원수도 갚지 못할 수도 있었다.
“겁이 나는 거라면 듣고 잊어버려.”
그런 삼랑을 바라보며 미려는 그저 빙긋 미소 짓기만 할 뿐이었다. 웃으면서 천천히 삼랑의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삼랑과 서로의 숨소리가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 삼랑의 귓가에 연지가 묻은 입술을 가져다 댔다. 무슨 개수작인가 싶어 미간을 찡그리던 삼랑은 미려가 속삭인 몇 마디에 두 눈이 커다래졌다.
“씨발, 진짜야?”
미려의 말을 들은 삼랑은 번개처럼 미려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성이 난 짐승처럼 연신 으르렁거렸다. 미려는 옷깃이 틀어지고 머리가 흐트러져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삼랑의 대답에 고개를 한번 끄덕이는 것으로 물음에 대한 답을 대신했다. 답을 듣자마자 삼랑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씨발, 거칠게 외치더니 미려를 던지듯 밀어 버렸다.
“어떻게 할래?”
미려의 물음에 삼랑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잔뜩 일그러진 미간과 관자놀이에 솟아난 핏줄이 삼랑이 어찌할 거라는 걸 이야기해 주었다. 텅 빈 연회장에서 삼랑과 미려는 서로의 손을 잡았다. 아름답지만 일개 기생에 불과한 정미려와 준수하지만 일개 호위에 불과한 삼랑이 적통 황자를 상대로 맞서 싸우기로 결정하였다.
미려가 삼랑에게 말해 준 것은 단 세 글자였다. 단출한 세 글자는 다름 아닌 오진해의 첫 정인이자, 첫 정각인의 이름이었다.
해원공 안해산은 삼랑이 제게 돌아선 것도 모르고 진해를 끼고 달게 오수에 빠져 있었다. 제게 다가오는 위기도 예견하지 못한 채 평온한 숨을 뱉어 냈다. 위기는 이미 지척에 다가와 있었다. 월국과 해국을 잇는 관문 사이로 화려한 행렬이 도성을 향해 오고 있었다. 오진해와 안해산 사이에 처음으로 불어닥친 시련의 바람이었다.
* * *
진해의 필사적인 애교가 먹혀들어 삼랑과의 무술 수업은 없던 일이 되었다. 진해는 삼랑 대신 황아무를 자신의 무술 선생으로 지목했는데 일련의 일을 통해 황아무의 약점을 틀어쥐게 되었던 것이다.
“어흠. 우리 세살이가 뭘 좋아하드라.”
약점이란 다름 아닌 세살이, 즉 오호였다. 문지기 형제 중 막내이며 취미로 가끔 이패 기생 일을 하고 있는 미려방 사람이었다.
“오 형님, 날도 더운데 오늘 수업은 이만하시죠.”
그리고 황아무는 해산이 연 연회 이후로 오호에게 푹 빠져 있었다. 진해가 저를 지목하자 찔리는 기색도 없이 춤을 추며 달려왔다. 무력은 어떨지 몰라도 머리는 좀 떨어지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오호가 이 자식을 털어 버리라는 진해의 명을 충실히 이행했을지도 모른다.
“형님은 무슨. 나 같은 칠품짜리가 황 시위 같은 분에게 그럴 군번이나 되나.”
“아이구, 아닙니다! 관품이 뭐가 그리 중요하다구요! 오 형님은 해원공 마마님의 신임을 듬뿍 받으시는 분인데 어찌 제가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흠, 흠! 그, 세살 공자도 오 형님을 형님으로 모시고 있고 말이지요.”
“뭐, 나도 세살이를 친동생처럼 여기고는 있지.”
“그렇습니까? 그, 그러면 세살 공자가 뭘 좋아하시는지 어떻게 조금만 좀…….”
동십사 가 알면 뒤로 넘어갈 정도로 방만한 수업이었다. 황아무는 진지하게 수업에 임하려다가도 진해가 오호의 이야기를 흘리면 순식간에 봄날의 나비가 되어 버렸다. 정신이 주체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날아다닌다는 뜻이었다.
진해는 황아무의 이런 점을 십분 이용하여 무술 수업 시간을 한가한 휴식 시간으로 바꿔 버렸다. 그렇다고 아주 논 건 아니고 자신보다 해원공부의 사정에 밝은 황아무와 이야기를 함으로써 해원공부의 일에 대해 좀 더 깊이 알려고 했다.
“호오, 그럼 원래 황자마마님들은 성년이 되고도 얼마간은 황궁에서 사신다구?”
어느새 반말이었다.
“예. 총애받는 황자님일수록 더 오래 궁에 머무십니다. 태자마마는 당연히 태자궁에 사시고 황상께서 보내시기 싫은 황자마마는 아예 별궁을 하사받아 다음 황상께서 오르실 때까지 머문 전례도 있답니다.”
“근데 해원공 마마는 궁 밖에 해원공부가 있으시잖아? 하나밖에 없는 황자님이신데.”
“으음, 그건 그런데 형님도 아시다시피 황후마마와 황상께서 좋은 상황에 맺어지신 건 아니시잖습니까.”
“그랬나?”
“설마 모르시고 계시는 겁니까?”
“구차하게 들릴진 몰라도 내가 고아가 되고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는 데 바빠서 나라 사정을 잘 몰라. 내 주변이나 좀 아는 정도지.”
다행스럽게도 황아무는 진해의 무신경함을 이해해 주는 듯했다.
“실은 저도 역병으로 아버지들을 잃고 힘들었습니다. 물려받은 가산이 없었다면 대대손손 살던 집도 팔아야 했을 겁니다.”
그냥 이해하는 게 아니라 생각 이상으로 깊이 이해해 주었다. 황아무는 가족을 역병으로 잃었다고 했다. 온 나라를 휩쓸었던 역병은 진해 같은 평민뿐만 아니라 황아무 같은 귀족에게도 평등하게 그 손을 뻗친 모양이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일단은 해국이 황좌를 넘봤었다는 건 아시지요?”
“그래서 한바탕 전쟁이 있었잖아?”
“예, 행인지 불행인지 도성 정복을 최우선으로 노리고 진격한 덕에 지방의 피해는 경미했다더군요.”
“오, 그건 몰랐는데.”
“정말 위험했다더군요. 해국에 뛰어난 장수가 있어 도성을 그대로 빼앗길 뻔했다고 합니다. 그…… 도성의 길목을 수비하던 와중에 선황도 붕어하시고요.”
“헉! 선황이면 해원공 마마님의 할아버지잖아?!”
구구절절 긴말 필요 없이 저 말 하나면 현 황제가 해원공을 왜 좋아하지 않는지 알 수 있었다. 해국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도성을 손에 넣어 월국 전체를 장악하려고 했고, 월국의 다른 봉국들은 어찌 된 영문인지 봉화를 올려도 월국을 도우러 오지 않았다. 원래부터 성정이 댕댕하고 무인 기질이 다분했던 선황은 분기탱천하여 당시의 태자와 함께 직접 해국군을 치러 나갔다. 자신을 뜯어말리는 강절곤(당시 대장군)을 뇌옥에 처박아 둔 채 직접 말을 몰았던 것이다.
결과는 대참패였다. 해국은 어디서 얻어 왔는지 모를 각종 진법과 기이한 함정, 무기들을 이용해 월국을 말 그대로 유린했다. 깔끔하게 잘려 나간 목들을 쌓아 놓은 담은 보는 것만으로도 월국 병사들을 공포에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탈영하는 병사들, 함정들, 미로 같은 진 속에서 선황은 무리하게 전투를 끌었다. 결국은 해국군 총령 장군인 옥길합에게 붙잡혔고,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잡힌 자리에서 자결하였다.
옥길합은 황실에 대한 예를 지키기 위해 선황의 시신을 빈사의 태자와 함께 도성으로 보내 주었다. 태자는 도성의 문을 넘자마자 숨을 거뒀고 월국은 말 그대로 붕괴의 위기에 빠지고 말았다.
“그런 상황에서 힘을 발휘하신 것이 바로 지금의 황상이십니다. 황상께서는 양인이셔서 혼인 후에는 출궁하실 예정이었지요. 황상께서는 월국 황실을 지키기 위해 해국군과 동귀어진 하실 작정이었다고 합니다. 황실에 유일한 적통 음인이신 황태공 지순 전하를 피신시키시고 용감히 전사하실 생각이셨다지요.”
“와…….”
“하지만 하늘은 저희 황상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운 좋게도 당시 대장군이셨던 창명후 합하의 막내 아드님이 지금의 고산국에 유학 중이셨던 겁니다!”
“오오!”
“소문에 의하면 창명후께서는 자신도 목숨을 버리실 각오로 영랑께 돌아오지 마시고 지순공 전하를 도와 새 황실을 일으키라는 서신을 보내셨다고 합니다만, 영랑께서는 창명후의 위기를 전해 들으시고 스승과 벗들의 도움을 구하셨습니다. 영랑의 스승께서는 당시 고산의 맹주셨다고 하더군요.”
이야기는 길었지만 진해는 이미 이 이야기의 결말을 알고 있었다. 당시 나라가 아닌 고산맹이었던 고산국이 참전하자 월국과 해국의 전쟁은 끝을 알 수 없게 길어졌고, 해국은 작전이 어그러지고 창명후 강절곤에 의해 보급로까지 끊기게 되자 월국에게 얼른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러면서도 결코 제 이득을 챙기는 걸 잊지 않았는데, 해국은 다시 봉국의 위치로 돌아가는 대신 월국이 양인 황제를 세우고 황후로 해국의 궁주를 맞을 것을 주장했다. 애초에 월국 황실이 쇠퇴한 것이 음인 황제를 세웠기 때문이라면서.
말도 안 되는 주장이었지만 월국은 그 주장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지방의 피해는 경미하다지만 도성의 백성들은 동귀어진을 각오했을 정도로 피해가 심각했다. 게다가 무엇보다 중요한 건 황위가 공석이라는 점이었다. 지순공은 황실의 적통 음인이었지만 막 성년이 되었고 무엇보다 마음이 여렸다. 선황과 태자의 연이은 죽음 중에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이번 사태만 봐도 지순공은 황위에 전혀 적합한 인물이 아니었다.
거기다 황위가 공석이 되자 주변 봉국들의 분위기도 심상찮았다. 제이, 제삼의 해국이 나오지 말란 법이 없었다. 몇 년의 정전 기간을 두고 월국은 결국 해국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큰 활약을 펼친 양인 황자 회순을 황제로 옹립하고 해국의 궁주를 황후로 맞아 건평이라는 봉호를 내렸다. 건평황후는 이듬해 건강한 황자를 출산하였다. 월국과 해국, 두 나라의 피로 얼룩진 정략혼 아래 태어난 것이 바로 해원공 안해산이었다.
‘전에 동열넷한테 했던 너까지 날 무시하냐는 말이 설마 이것 때문이었나…….’
황아무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해 주었지만 해산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진해의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해산이 황자임에도 아직까지 상대가 없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아무리 황자라도 황제에게 기피받는 황자였다. 현 황제는 젊었고 얼마든지 새 후사를 볼 가능성이 있었다. 월국의 원로들이라면 해국의 피가 섞인 적통보다 타국의 피가 섞이지 않은 측실의 후사를 선호할 터였다. 그렇기 때문에 머리가 있는 자라면 해원공에게 함부로 줄을 대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저, 형님. 이제 세살 공자가 뭘 좋아하시는지 좀 가르쳐 주시면…….”
“아 참, 그랬지. 이야, 황 동생 이야기 솜씨가 장난이 아니야! 솔직히 내 글 선생보다 자네가 더 잘 가르쳐 주는 것 같아! 그 사람은 말을 너무 어렵게 하거든.”
“과찬이십니다.”
“우리 세살이가 좋아하는 건 바로 고기야.”
“혹시 완자도 좋아하시는지요?”
“없어서 못 먹을걸?”
황아무는 심각한 이야기를 늘어놓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오호가 좋아하는 걸 물어 왔다.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황아무가 어깨에 힘만 들어간 귀족 도련님인 줄로만 알았는데, 해원공이 황제에게 등한시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자 그 해원공의 호위를 서는 황아무도 좀 안되게 보였다. 원래 빈민인 진해와 달리 황아무는 무과를 거쳐 들어왔을 것이 아닌가. 어쩌면 황아무의 뒤를 밀어줄 부모가 없어 실력이 있음에도 재수 없이 해원공부의 호위로 굴러떨어졌을지도 모른다.
“잘됐군요! 저희 집 유부(乳父)가 완자를 참 잘 빚는답니다. 막냇동생이 그걸 좋아했거든요.”
철없이 좋아하는 황아무를 바라보며 진해는 이제 조금 진지하게 무술 수업을 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간장 말고 고추기름을 쓴 매운 걸 좋아하니까 그걸 준비해 가라구.”
많이는 아니고 아주 조금만.
오호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으면서 진해와 황아무는 친해졌다. 나중에는 황아무 스스로가 수업을 중단하고 진해에게 하소연을 할 정도였다. 주로 오호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가끔은 황아무 자신에 대한 것도 있었다. 황아무는 적응한 듯 덤덤하게 이야기했지만 진해는 저와 비슷한 연배인 황아무가, 그것도 저보다 훨씬 번듯하고 출신이 좋은 황아무가 미래를 체념하고 있다는 사실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 형님! 오 형님!”
그러던 어느 날, 황아무가 수업 시간이 되지 않았는데도 허둥지둥 달려왔다. 진해는 서화 선생이 숙제로 내 준 난을 치고 있는 중이었다. 서화 선생의 몸값이 얼마라는 걸 전해 듣고 진해는 공돈을 버리기 싫어서 열심히 연습했다. 덕분에 이제는 지렁이가 아니라 작대기를 그을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뭐야, 왜 그래? 무슨 일이길래 그리 숨넘어가게 뛰어와?”
“크, 큰일 났습니다!”
“해원공부에 불이라도 났나.”
진해는 황아무가 숨을 고르게 하기 위해 일부러 천천히 붓을 정리했다. 황아무는 얼마나 다급하게 뛰어왔는지 체력이 강철 같으면서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고 있었다.
“해국, 해국에서! 해국에서 사절이 오고 있답니다!”
“응?”
진해는 황아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들었지만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황제는 해국을 갈아 마시고 싶을지 몰라도 진해는 해국과 우호적으로 지내는 게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해국의 사절이 오는 것도 그저 정치적인 우호를 보이겠거니 여겼다. 현 황제는 원수의 나라와도 혼교했으니 그깟 사절이 와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냥 사절이 아니라 구혼 사절입니다! 제가 살짝 엿들었는데,”
“아니, 황 시위, 시위라는 양반이 말을 엿들어?”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황후마마의 궁인이 하는 말을 살짝 엿들었는데 이번에 서해 옥가의 사람이 사절로 온답니다, 해원공 마마와 나이가 맞는 양인을 해국에서 일부러 선발해서 보냈답니다! 황후마마께 미리 전갈이 온 모양이에요!”
확실히 큰 사건이긴 했다. 현재 해원공에게 정실이 없었고, 우부인 황후의 나라에서 직접 선발해서 보낸 양인이라면 정실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신분과 지위를 가졌을 것이다. 어쩌면 해원공이 정실을 맞이하게 될지도 몰랐다. 구혼 사절이라고 하니 그리될 것이다.
“흠.”
“형님…….”
황아무는 헐레벌떡 뱉어 놓고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황아무와 호위들은 해원공과 진해가 어떤 사이인지 알고 있었다. 해원공이 진해에게 원의 봉호를 내리고 싶어 한다는 것도 은연중에 퍼져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진해에겐 아무런 뒷배도 없었다. 유서 깊은 귀족의 자제이자 지위 높은 관료인 동십사가 후견인이라고는 하나 미색이 빼어난 것도 아니고 지식이 풍부한 것도, 무에 탁월한 것도, 심지어 아직 풀 한 포기도 제대로 못 그렸다. 차라리 진해의 양동생이라는 정미려가 원의 봉호를 받는 게 현실성 있을 것이다.
“언제 온대?”
“예?”
“그러니까 그 서해 옥가의 공자님이 언제 오시냐고?”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진해의 입가가 미소를 참지 못하고 씰룩거리고 있었다. 황아무는 자기가 보는 게 현실인지 의심이 갔다. 정을 통하는 이가 혼인한다고 하면 슬퍼하고 질투하는 것이 보통 아니던가?
“그, 글쎄요. 국경을 넘었다는 소리를 듣긴 했는데……?”
“그래? 그럼 지금부터 준비를 해야겠네! 해원공 마마님께서 무사히 정실을 맞으시도록 말이야!”
게다가 한술 더 떠 정실을 맞도록 준비를 하자고 했다. 황아무는 자신이 모르는 새 어딘가를 얻어맞은 게 아닌가 싶었다.
“그건 아니 될 말이지요, 오 형님!”
황아무는 뱉어 놓고 자기가 왜 큰소리를 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건 진해도 마찬가지였다.
“왜 안 되는데?”
“그건, 그건, 그, 해국 사람이잖습니까! 지금도 황상께 신임받지 못하고 계시는데 해국인과 혼인하면 아예 멀어지실 겁니다! 절대로 해국인과는 혼인해선 안 됩니다!”
“그럼 더 해야지.”
“예?”
“어차피 밉보인 거라면 차라리 자기를 환영하는 쪽이랑 손잡는 게 이득 아니야? 이런 말 하기 싫지만 봉국 중에서는 아직도 해국이 좀 알아주잖아.”
그릇이 크다고 해야 할지 좁다고 해야 할지. 황아무 주변의 누구도 해원공에게 황상께 등을 돌리고 해국과 손을 잡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어쩌면 못 했다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황상은 해원공의 좌부였고, 또 이 나라의 가장 지고한 이였으니까.
그런데 진해는 아무렇지도 않게 황상을 버리자고 했다. 해원공에게 충성하고, 나아가 황제에게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한 황아무에게는 너무나도 참신한 의견이었다. 너무 참신해서 순간 숨이 안 쉬어질 정도였다.
“여, 역,”
“에헤이, 위험한 소리! 누가 언제 나라를 뒤집자고 했어? 그냥 미리 자리를 굳혀 놓자는 거지.”
겸사겸사 해원공 마마님과 떨어져 자신도 새 삶을 살고. 황아무는 해원공부 사람이라 핑계를 댔지만 사실 진해의 가장 큰 목적은 바로 이것이었다. 해원공에게 정실이 생기고 진짜 마음이 통한 상대가 생겨 홀가분하게 해원공과 이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해의 목적이었다.
“특별히 선발했다니까 잘생겼겠지? 해국 사람들은 목이 길고 늘씬하다던데.”
“허, 허어…….”
“살짝 벗겨 볼 기회도 있으면 좋으련만. 거기가 작으면 회임하기가 힘이 들잖아. 재미도 없고.”
얼굴이 허예진 채로 주저앉은 황아무를 옆에 두고 진해는 해국에서 온다는 서해 옥가의 공자에 대해 생각했다. 황후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 해원공의 정실이 될 그에 대해. 물론 섭섭한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황아무에게서 해원공부의 자세한 사정을 듣고 난 뒤부터 진해는 해산이 어서 빨리 혼인해야 한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
해산에게는 자신 같은 미천한 양인이 아니라 든든한 뒷배가 될 양인이 필요했다. 월국의 원로들은 해산을 등한시하고 있을 테니 그들의 입을 다물게 할 정도로 정통하거나, 혹은 그들을 아예 뭉개 버릴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가문의 양인이.
해국에서 선발되었다는 옥가의 공자는 앞의 조건은 만족하지 못했지만 뒤의 조건은 어느 정도 만족했다. 황제와 사이가 멀어지겠지만 더 이상 무시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뒤늦게 정신을 차려 해산 마마님을 해국을 누를 정도로 굉장한 가문과 혼인시켜 줄지도 모른다.
‘주변에 사람이 많아지시면 쓸쓸하지 않으시겠지. 나는 미려라도 있었지만 해산 도련님에겐 아무도 없었어. 체면 때문에 꾹 참고 계셔야 했겠지.’
생각에 잠긴 진해는 문득 해산이 보고 싶었다. 어쩌면 헤어지게 될지도 모른다니까 피해 왔던 해산이 그리워진 것이다. 진해는 자신의 간사함이 우스웠지만 어쩔 것인가, 진해는 타고난 성품이 이런 자였다. 칼같이 끊어 내고 싶으면서도 냉철하지 못해 너덜너덜한 가장자리를 그대로 안고 사는 이였다.
“황 시위도 마마를 진정으로 위한다면 잘 생각해. 마마님께 어느 쪽이 이득이 될지 말이야.”
“……오 형님.”
황아무는 충격이 가시자 오진해를 조금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냥 사귀기 편한, 황자에게 총애받는 이로만 보았는데 생각 외로 과감하고 충심이 깊었다. 황상에게는 괘씸했지만 해원공에게는 기특한 이였다. 해원공의 아래에 있는 황아무는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아, 맞아. 황 시위.”
“예, 오 형님.”
그래서 진해의 물음에 뭐든지 대답해 줄 생각으로 진중하게 응했다. 진해가 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해원공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으로.
“혹시 목 좋은 땅 아는 거 없어?”
그러나 안타깝게도 황아무는 진해가 묻는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차라리 역사나 해원공부의 사정에 대해 물으면 쉬웠으련만 진해가 물은 말은 나름 청빈한 관료인 황아무에게 너무나 어렵고 복잡한 질문이었다.
* * *
관복을 입은 진해는 어디서나 환영받았다. 특히 켕기는 구석이 있는 곳에서는 광적일 정도로 진해를 환대했다. 진해는 맡은 책무도 없으면서 주머니를 채우는 법을 알게 되었다. 건네는 돈을 받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하게 바라봐서 반쯤은 어쩔 수 없이 받는 것이기도 했다.
‘동십사와 해산 마마님이 편법을 왜 이렇게 질색하나 했더니.’
처음에는 자주 오는 진해를 아니꼬운 눈으로 바라보던 상인들도 진해가 돈을 챙기며 한가하게 빈둥거리는 모습을 보자 점차 경계를 풀었다. 그리고 한 바퀴도 아니고, 두 바퀴도 아니요, 서너 바퀴쯤 돌려 진해에게 뭘 원하냐고 물어 왔다. 진해는 바로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목 좋은 자리를 아는 건 그 목이 필요한 자들밖에 없었고, 켕기는 일을 하면서 돈을 긁어모으는 상인이야말로 목에 대해 빠삭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 괜찮은 자리가 났긴 한데 대인께 추천하기는 좀 그래.”
“에이, 왜 이래요. 평소에 어떤 놈들이랑 안면을 트셨는지는 몰라도 나는 그런 놈들이랑 달라요. 내가 누군지 알아요? 나, 육등시위 오진해야! 시위란 말이에요, 시위!”
진해는 상인이 뜸을 들이자 주먹을 꽉 쥐고 황아무에게 배웠던 초식을 몇 개를 펼쳐 보였다. 모르는 이에겐 그럴듯해 보였지만 스승인 황아무나 동십사, 삼랑이 본다면 코웃음을 칠 정도로 허술한 동작이었다.
“흠, 하긴! 시위씩이나 되는 양반인데 별일 있겠어? 실은 말이야, 그 자리가 목이 정말 좋은데 근방이 다 기루거든. 낮에는 사람이 없고 밤에는 시끄러운 데다가 치안이 영 엉망이야. 무슨 장사를 할지 잘 골라야 할걸?”
뇌물을 껄끄러워하는 진해를 보고 상인은 진해를 관리 집안의 자제로 어림잡는 듯했다. 진해는 속으로 저 안목으로 어찌 장사를 했는지 궁금할 지경이었지만 동시에 그동안 자신을 가르친 선생들의 성과가 빛을 발한다고 생각했다. 하긴. 그동안 선생들에게 들어간 돈만 해도 수백 냥이 넘었다. 잠춘동에서는 한 냥만 있으면 한 달은 족히 먹고살 정도였다.
드디어 목 좋은 자리를 알아낸 진해는 신나게 동십사의 집으로 돌아왔다. 동십사가 예부상서 동가대의 아들이기 때문에 동십사 집 하인들은 남에게 이 집을 이를 때 동가소택이라 말하는 듯했다. 전에는 무슨 화석(和晰)정군 댁인가 뭔가 하는 이름으로 불렸다나 뭐라나.
어쨌든 동십사의 집으로 돌아온 진해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영 집사를 찾아 나섰다. 평소에는 영 집사를 죽어라 피해 다니던 진해와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영 집사 역시 자신을 찾아온 진해가 퍽 놀라운 모양이었다. 진해의 모든 수업이 휴강인 덕에 영 집사는 아주 오랜만에 남편과 오붓한 시간을 보냈다. 장인인 노집사는 사위인 영 집사를 여간 걱정하지 않았는데 노집사는 오랜 경험으로 인해 진해가 원윤에 그치지 않고 원군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니, 오 대인! 해가 서쪽에서 나려는가 봅니다?”
“아이, 왜 이래요~ 영 집사! 내가 영 집사한테 그리 서먹하게 굴었나?”
저리 콧소리를 낼 정도로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다. 영 집사의 눈이 가늘어졌다.
“깨뜨리셨습니까?”
“응? 깨다니?”
“그럼 그건 아니고, 엎으셨습니까?”
“엥?”
“이것도 아니고. 불이 났다는 소리는 안 들리던데.”
“아, 영 집사!”
진해가 사고를 쳤다는 걸 전제로 두는 영 집사를 향해 진해가 꽥 소리를 질렀다. 영 집사는 도대체 자신을 어찌 보는 것일까. 진해는 입을 삐죽하게 내면 자신이 사고를 친다면 영 집사 선에서 해결되지 않을 아주 크고 묵직한 놈일 것이라 이죽거렸다.
“사고 말고 돈! 쓸 데가 있으니까 녹봉 좀 달라구. 내 녹봉은 다 영 집사가 모아 두고 있다면서?”
“역시 사고 치셨군요. 돈으로 해결되는 선이라 다행입니다. 얼마면 될까요?”
“아, 진짜 아니라니까!”
영 집사의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없애기 위해 진해는 결국 자기가 목 좋은 땅을 발견했다는 소릴 털어놓았다. 뜬금없이 나온 땅 소리에 영 집사는 의심 어린 표정 대신 어리둥절한 얼굴을 해 보였다. 아니, 갑자기 무슨 땅이란 말인가. 해원공부로 들어가면 거기서 실컷 먹고 자고 싸고 할 양반이.
그러나 의문도 잠깐 영 집사는 진해의 출신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춘동 빈민가에서 운 좋게 관리가 되었다. 하지만 이때까지 진해가 녹봉을 제대로 써 볼 기회가 없었다. 해원공이 진해를 총애한 덕에 먹고, 입고, 가르치는 것 전부를 해원공이 대 주었기 때문이다.
“땅이 하나쯤 있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요. 저는 제 땅이 생기면 작약을 심을 거랍니다. 저희 집사람이 작약을 좋아하거든요.”
해원공부에 완전히 들어가기 전에 돈을 좀 써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영 집사는 진해를 데리고 자신이 관리하는 창고로 갔다. 큰일에 쓸 돈은 노집사가 관리했지만 하인들의 세경이나 그들을 의식주 비용은 영 집사가 관리하고 있었다.
“자, 여기 오 대인의 봉록입니다.”
“엥? 뭐야, 겨우 이것밖에 안 돼?!”
“오 대인이 관리가 되신 지 얼마나 되셨다구요. 본래 내년에 받아야 할 것을 동 대인이 잘 말씀해 주셔서 상반기 몫을 온전히 받게 된 것입니다. 나중에 대인께 잘 말씀드려야 합니다?”
영 집사가 보관해 둔 진해의 봉록은 은 백이십 냥과 무명 열두 필, 비단 한 필이었다. 칠품 관리의 한 해 녹봉은 은 이백사십 냥과 무명 스물네 필, 비단 두 필인 모양이었다. 물론 잠춘동에 살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큰 금액이었다. 하지만 도성의 목 좋은 땅을 사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돈이었다. 진해는 조금 실망했다.
“하아, 이 정도 가지고는 택도 없어.”
“응? 오 대인 백 냥이면 제법 그럴듯한 밭뙈기를 살 수 있잖습니까?”
영 집사는 그런 진해 속도 모르고 백 냥짜리 은표와 한 냥짜리 은전 세 덩이를 손에 쥐여 주었다. 처음부터 펑펑 쓰면 좋지 않다는 소리와 함께. 생각보다 녹봉이 적어 실망했지만 돈은 돈이었다. 그것도 자신이 이때까지 번 것 중 가장 큰돈이었다. 진해는 은표를 바라보며 배시시 웃음 지었다. 이 정도면 우아하고 요염하면서 앙칼진 남편을 구해 새살림을 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헛, 아니야! 언제 없어질지 모르는 관직인데!”
해산이 몸정이 아닌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는 이가 생기고, 정식으로 혼인을 하게 되면 진해는 당연히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쯤 되면 충동적으로 관직을 준 걸 후회하게 될지도 몰랐다. 진해가 목 좋은 땅을 찾은 건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진해는 자신이 규칙적인 수입이 있을 때 해산과 헤어져도 먹고살 만한 기반을 마련해 놓고 싶었다.
“진해!”
그런데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진해의 귓전을 때렸다. 진해가 황아무로부터 혼인 사절의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이상하게 오랫동안 들을 수 없던 목소리였다. 목소리의 주인은 진해가 안전하고 깔끔하게 이별을 하고 싶은 상대였다.
“해원공 마마! 아니,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입궁 안 하셨어요?”
“대충 마무리 지었다. 너를 너무 오랫동안 버려둔 것 같아 일이 손에 잡히지 않더구나.”
“에이, 저 같은 거한테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가 봤자 어딜 가겠어요.”
“그래? 고는 꼭…… 몇 년은 떨어져 있는 기분이었단다.”
그러나 막상 해산을 보자 진해는 가슴 언저리가 제 의사와는 관계없이 제멋대로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참으로 신비롭고 엿 같은 기분이었다. 겨우 아물어 딱지가 앉은 부분을 가볍게 긁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검게 아문 딱지 아래 있는 것이 상처일지 새살일지는 당사자인 진해 자신조차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렇게 마주친 해산이 진해도 참 반갑다는 사실이다.
“동십사가 하는 말이 이 시간쯤엔 네가 서화 수업을 받고 있을 거라더구나. 네가 그리는 그림이 어떨지 참으로 궁금해. 그래, 사군자는 다 칠 수 있게 되었겠지? 진해 너는 재주가 비상하니 분명 누구보다도 뛰어난 작품을 그릴 테지.”
“어, 음…….”
아직 난도 제대로 못 친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면 해산은 무슨 표정을 지을까. 진해는 솔직히 털어놓으려다가 고아하게 휘어지는 눈매를 바라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고아한 눈매 속에 수만 가지 기대가 반짝이고 있었다. 저 기대를 저버리려니 속이 쓰라렸다. 진해는 그냥 눈 딱 감고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언젠가 그럴듯한 그림을 그리면 그때 보여 주면 될 일이 아닌가.
“에이. 오늘은 휴강이에요, 해산 도련님!”
그래서 일부러 해원공 마마가 아닌 해산 도련님이란 호칭을 입에 담았다. 해원공은 안 그래 보여도 진해가 제 이름을 부를 때마다 좀 많이 기꺼워하는 눈치였다. 하긴 진해 말고 이렇게 불러 주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래? 하지만 도구는 갖춰져 있을 것이 아니더냐?”
“실은 제가 너무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바람에 붓의 털이 다 빠져 버렸어요.”
“그럼 다른 붓으로―”
“전 그 붓이 아니면 그림이 안 그려지는데 어쩌겠어요. 장인은 도구를 가리지 않는다지만 전 선생님의 발뒤꿈치에도 못 따라가는 초보 중의 초보, 즉 도구를 아주 많이 탄다는 거지요! 저도 해산 도련님께 제 그림을 못 보여 드린다는 게 무척 아쉬워요. 하지만 이왕이면 해산 도련님께 보여 드릴 첫 그림은 제가 모든 것을 갖추었을 때 그때 비로소 보여 드리고 싶어요. 해산 도련님은 제…… 남편이 되실지도 모르잖아요.”
“진해…….”
대충 둘러대다가 해산이 더 말꼬리를 잡을 것 같아 두 눈 질끈 눌러 감고 남편이란 말을 나불거렸다. 진해의 예상대로 해산은 진해의 남편이라는 말에 무척이나 감명받은 듯했다. 해산을 밀어내던 진해가 그를 인정하는 듯한 말을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진해는 차라리 벼루가 박살 났다고 말할 걸 그랬다며 후회하기 시작했다. 감명받은 해산의 표정이 너무나도 감미롭고, 애틋하고, 농밀했기 때문이다.
‘에라, 모르겠다!’
하지만 후회도 잠깐 진해는 흘러나오는 향기를 따라, 제 본능을 따라 몸을 움직였다. 발을 돋워 해산의 입에 제 입을 맞춘 것이다. 해산은 진해가 입을 맞추자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안타까운 점은 진해도 눈을 감아 해산이 눈을 감았다는 사실을 알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해야…….”
짧게 입을 맞추고 떨어져 나온 입술에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황실의 지고함에 담갔다 뺀 듯한 근엄한 목소리였지만 동시에 진해의 어리광쟁이 동생과 동갑인 목소리였다. 또 쾌락에 쉽게 달궈지는 목소리기도 했다.
“……저도 해산 도련님이 조금 보고 싶었어요.”
“조금이더냐?”
“저는 아는 사람이 많아서 조금이면 엄청 큰 거예요.”
“네 동생보다도?”
“여기서 미려가 왜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미려는 언제나 제 곁에 있으니까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마마님은 항상 제 곁에 있는 게 아니니까.”
입술에 입술을 댄 채로 진해가 읊조리자 해산은 작게 웃음 지었다.
“처음으로 너와 떨어져 있길 잘한 것 같구나.”
그리고는 이번에는 자신이 고개를 숙여 진해의 입술을 빨아들였다. 해산이 입술을 빨고 나면 진해가 해산의 입술을 빨았고, 진해가 입술을 빨고 나면 해산이 진해의 입술을 빨아들였다. 두 사람은 열기를 가득 담은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무아지경으로 서로의 입술을 탐하였다. 어느새 해산의 팔이 진해의 허리를 감고 있었다. 커다란 손이 머뭇거리자 진해가 뒤로 손을 뻗어 제 엉덩이에 착 갖다 붙였다. 그 와중에 진해의 손에 들린 은자가 해산의 손등을 지그시 압박했다. 은표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났다.
그러나 진해와 해산은 그 모든 것을 무시한 채 열렬히 서로의 입술을 맛보았다. 혀와 혀가 얽힐 때마다 해산은 언제 그랬냐는 듯 진해의 엉덩이 위쪽을 꽉 움켜쥐었고 진해는 해산이 제 몸을 움켜쥘 때마다 눈빛에 예리한 기운이 엉기기 시작했다.
해산의 엉덩이를 치고 싶었다. 이 우아하고 아름다운 사내를 네발짐승처럼 엎어 놓고 거칠고 야만스럽게 뒤를 범하며 울음을 울 때마다 소리에 맞춰 엉덩이를 가격하고 싶었다.
[쿵.]
그러던 그때, 진해의 손에서 은자 한 덩이가 굴러떨어졌다. 해산은 바닥과 은이 맞부딪치는 둔탁한 소리를 듣자마자 화들짝 놀라 진해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소매 한쪽을 들어 달아오른 얼굴을 가린 뒤 미끌미끌하게 젖은 입술을 황급히 문질러 댔다. 진해는 제 입술에 묻은 것을 혀로 핥으며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조금만 더하면 상상이 현실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이게, 웬 은자더냐.”
해산은 짙게 깔린 제 향을 맡으며 얼굴이 더욱 붉게 달아올랐다. 당장이라도 손을 휘둘러 드문드문 엉켜 있는 향을 흩어 버리고 싶은 듯했다. 하지만 황족의 체통이 있어 차마 그러지 못하였다. 진해는 딱히 제 향을 숨길 생각이 없는 듯했다. 우유와 닮은 것이 해산의 향과 섞여 새로운 향기를 자아냈다. 해산은 그것이 어딘지 모르게 위험한 향이라고 생각했다.
“제 녹봉입니다.”
그것은 아마 진해가 해산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어서일 것이다. 가느스름하게 좁혀진 눈 속에 짐승의 송곳니 같은 것이 빛을 발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네 녹봉? 네 예산은 내 봉록에서 가져가게 명하였는데 갑자기 녹봉은 왜 찾은 것이냐?”
해산에게 있어 진해의 녹봉은 있으나 마나 한 물건이었다. 해산에게 있어 진해는 귀인, 즉 자신의 측실이나 다름없는 몸이었으므로 진해에게 녹봉이 제대로 나오는지 확인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돈이 필요하면 자신이 주면 되니까.
“실은 땅을 좀 사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향이 어느 정도 가시자 진해 역시 서서히 평소의 진해로 돌아오는 듯했다. 진해는 떨어진 은자를 주워 후 입김을 불었다. 흠이 난 것 같아 소매로 표면을 벅벅 문지르기도 했다.
진해는 굳은살이 가득 박인 거친 손가락으로 은자의 모서리를 비비며 윤을 냈다. 적당한 크기의 덩어리를 들어 올려 지그시 노려보기도 했다. 별건 아니고 생전 처음 받은 녹봉인데 쓰기 전에 되도록 깨끗하게 보관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험, 험, 어험!”
그런데 진해의 세심한 손놀림이 은자 외에 다른 이에게도 커다란 효험을 보였다. 해산은 진해의 섬세한 손놀림을 바라보며 귀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아무래도 희락기가 다가오는 모양이었다. 은자를 닦는 걸 보고 이렇게 흔들리는 걸 보며 그런 것이 틀림없었다. 해산은 정향탕(靜香湯: 월국에 통용되는 희락기 억제제)을 마셔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크게 심호흡했다. 진해는 해산이 왜 그런지 알 수 없어 멀뚱멀뚱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무슨 땅을 사고 싶어 그러느냐?”
해산은 간신히 속을 진정시키고 진해에게 넌지시 물었다. 해산이 보는 진해는 궁핍한 것치고 물욕이 거의 없는 이라 땅을 사려는 게 의외로 생각되었다. 그리고 진해의 머리는 또다시 비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제가 마마께 독립하기 위해서 가게를 차리려고 합니다.”라고 하면 해산의 얼굴이 어찌 될지는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게다가 해산에게 이미 남편이니 뭐니 하며 입을 털어 놓았다. 궁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고 있는 (아니지만) 인간이 장사를 한다고 하면 그것 역시 좋게 보이지 않을 터였다.
“땅을 사서, 땅을 사서 꽃을 기르려 합니다.”
그래서 진해는 영 집사의 소망을 훔쳤다.
“영 집사의 작약 이야기에 감동했어요. 남편을 위해 작약밭을 만들 생각을 하다니.”
“그럼 네가 땅을 사 꽃을 기른다는 게, 바로?”
“예, 저도 제 남편이 되실 분을 위해 꽃들을 기르려 해요. 부지런히 키우면 분명 좋아해 주시겠지요.”
나중에 해산이 영 집사에게 물어도 영 집사와 말이 다르지 않도록 진해는 세심하게 영 집사의 이야기까지 갖다 집어넣었다. 남편이란 말 역시 들먹였다.
“진해야. 고는 네게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고보다 열 배나 낫구나. 과연 고의 원이로다.”
하지만 진해는 저 남편이 해산이란 것을 확정 짓지 않았다. 해산을 봐서 흔들렸지만 이내 마음을 바로잡았다. 감동하는 표정을 보니 더욱 양심이 찔렸지만 진해가 독립하면 해산 역시 진해에게 쓸데없이 신경을 안 써도 되고, 장사가 잘되면 푼돈이나마 해산에게 약간의 금전적인 지원 역시 할 수 있을 터이다. 그러다 진해도 혼인을 하게 되면……, 그러면…….
“이리 가까이 온.”
자신이 다른 누군가와 혼인하는 생각에 이른 진해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이별은 몇 번을 거듭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특히나 진해가 반한 경우에는 더욱 그랬다. 진해는 시무룩한 기분으로 해산에게 다가가 실수로 가슴에 이마를 부딪힌 척했다.
“조심해야지.”
“…….”
“고가 지금 당장은 가진 것이 없어 많이 주지는 못하겠구나. 혹여 쓰고 모자라면 고에게 다시 오거라.”
해산은 그런 진해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소매 속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은자를 쥐지 않은 진해의 손에 떨어뜨리지 않도록 꼭 쥐여 주었다. 크기를 보니 은자보다 살짝 큰 정도였다. 해산이 돈을 더 준다고 했으니 지금 당장 확인하고 모자라면 더 달라고 해야 할 텐데 진해는 그냥 해산의 품에서 이대로 푹 안겨 있고 싶었다.
“후후, 난을 치는 걸 보러 왔더니 더한 것을 선물 받았구나. 네가 기를 꽃이 벌써부터 기대가 돼.”
해산은 그런 진해의 속도 모르고 진해와 부둥켜안은 채 한참이나 저택의 복도에 서 있었다. 기쁘면서도 쓸쓸한 하루가 지나갔다.
그리고 다음 날, 진해는 기쁘면서도 쓸쓸한 하루라는 평을 거둬들였다. 기쁘면서도 쓸쓸한 하루가 아니라 엄청나게 굉장한 하루였었다! 어마어마하게 행복하고 짜릿한 날이었음이 틀림없었다!
“샛노란 은이라니……!”
그 뒤에 해산을 부르러 사람이 오는 바람에 해산과 진해는 마지못해 헤어져야 했었다. 진해는 땅을 사서 뭘 하게 되어도 자그맣게라도 꽃밭을 만들자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집에 와서 손을 펴 보니 샛노란 것이 휘황찬란하게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다. 진해는 제 눈이 잘못된 것 같아 그것과 은자, 은표를 식탁 위에 올려 두고 두 눈을 비볐다. 그러나 다시 봐도 해산이 준 것은 농밀하고 정밀한 황색을 띠고 있었다.
“월 황실 만세!”
해산이 준 것은 은이 아니라 무려 금덩이였다. 그것도 진해가 지닌 한 냥짜리 은자와 무게가 꼭 같은 녀석이었다. 생긴 것도 반들반들하니 관에서 주조한 티가 났다.
“아이고, 이게 꿈이냐, 생시냐!”
진해는 식탁 주변을 몇 번이나 돌며 금을 온 사방에서 구경했다. 금 한 냥이면 은 천 냥과 맞먹는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관에서 주조했으니 천 냥보다 더 나갈지도 몰랐다. 진해는 동십사나 영 집사가 보면 관리의 체통을 지키지 않는다고 한바탕 잔소리를 퍼부을 정도로 경망스럽게 행동했다.
“으으, 너무 눈부셔서 심장이 다 아프네!”
저 정도면 도성의 어느 땅이든 살 수 있었다. 고관대작이 사는 커다란 저택은 어림도 없었지만 상인이 귀띔해 준 그 땅은 확실히 살 수 있었다. 진해는 차오르는 기쁨에 어쩔 줄을 몰랐다. 해산에 대한 슬픔과 서운함이 일시에 사라지고 기쁨과 존경, 애정이 샘솟았다. 간사했지만 사람이란 게 원래 다 이런 법이었다. 진해는 가게에 아주 큰 꽃밭을 만들자고 결정했다.
“잠깐만, 꽃이란 말이지.”
그러던 중 진해의 머릿속에서 몇 가지가 착착 맞물렸다. 목은 좋지만 주변에 술집이 즐비해 치안이 별로라는 상인의 이야기, 아름다운 꽃, 진해가 잘 아는 몇 가지 품목들.
“역시 꽃은 뭐니 뭐니 해도 인화초(人華草)지!”
벼락같이 떠오른 생각에 진해는 금덩이와 은자, 은표를 싸 들고 후다닥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진해가 부리나케 달려간 곳은 슬슬 장사 준비를 하고 있던 미려방이었다. 미려방의 문지기 형제들은 진해를 보자 미간을 살짝 찌푸렸으나 곧 평소처럼 진해를 향해 아는 척을 해왔다.
“안에 미려 있지?”
진해는 어지간히 급한지 문지기 형제들의 인사도 대충 받아넘겼다. 후다닥 문을 넘으면서 온갖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마침 미려가 한 바퀴 둘러보는지 중앙의 층계를 오르고 있었다.
“미려야!”
바닥을 끄는 기다란 옷자락을 바라보며 진해가 크게 제 동생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미려는 진해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꼭 화폭에서 걸어 나온 것처럼 우아하고 미려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우리 이사 가자!”
그러나 진해의 말에 당황하는 모습은 화폭의 그림과 달리 생기가 철철 흘러넘쳤다.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미려방 사람들 역시 단번에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물론 사람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진해는 아주 열성이었다. 두다다 층계로 달려가 미려의 손목을 그러쥐고 얼른 미려의 방으로 데려갔다. 진해는 앞만 보고 달려가 몰랐지만 다른 이들은 미려의 뺨에 얼룩진 황홀한 홍조를 볼 수 있었다. 진해를 향해 차마 말하지 못하는 그들의 처지를 한탄했다. 그리고 일각 뒤, 미려방의 일패가 당당하게 층계 중간에 섰다.
“오늘은 방의 문을 열지 마.”
미려방 식구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자신 있는 미소를 입에 걸었다. 미려의 저 미소는 미려방 식구들에게 종교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특히나 문지기 형제들에게는 절대로 거부할 수 없는 엄명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내가 호명하는 이들은 짐을 싸고 이사 준비를 하도록 해. 내일부터 미려방은 본점이 아니라 분점이야. 우리는 이제부터 더 큰물에서 놀게 될 거야.”
난데없는 말에 사람들이 웅성거렸으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그들은 예전부터 미려방이, 일패 정미려가 이런 빈민가의 삼급 기루에 머무르기에는 아깝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근래 높으신 분이 다녀간 것이 영향을 미쳤으리라. 그리고 오진해가 그 높으신 분께 해롱거렸던 것이 영향을 미쳤으리라.
자세한 건 알 수 없지만 미려방에서 일패의 명은 황명과도 진배없는 것이었다. 모두 다 이사에 대한 것을 받아들이고 정미려가 누구를 호명할지를 궁금해했다.
* * *
그리하여 차리게 된 것이 바로 여해루였다. 진해는 미려에게 금을 주며 이러저러한 말을 했고, 진해가 계획하는 것을 들은 미려는 만면에 꽃보다도 화사한 미소를 띠며 당장에 진해의 말에 따르겠다고 했다. 관리는 함부로 가게를 차리면 안 된다는 규칙을 뒤늦게 알게 되었으나,
“그럼 가게를 새로 짓고 내가 점주, 형이 전주(錢主)를 하면 되잖아. 그러면 형 가게는 아니지만 형도 가게의 지분을 가진 게 되겠지? 남편의 것이 다른 남편의 것인 것처럼.”
라는 미려의 말에 토를 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진해는 남편과 다른 남편이라는 비유가 걸렸으나 저것을 대체할 수 있는 다른 비유를 찾지 못해 그냥 수긍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여해루는 미려방과 큰 차이점이 있었는데 미려방이 춤과 음악, 요리에 중점을 두었다면 여해루는 규모가 큰 만큼 손님들이 즐길 거리를 더 추가했다는 점이었다. 추피동의 도박판 두목이었던 삼랑이 인정하는 주사위 고수인 진해가 전주였으니 즐길 거리가 무엇인지는 말 안 해도 알 수 있었다. 진해는 미려와 상의해 합법적인 주사위 놀이판과 골패 놀이판을 차렸다. (진해의 주장에 의하면 결코 도박판이 아니었다.)
“이봐, 친구들. 맨날 저택 안에서 아는 얼굴들이랑만 패 돌리기 심심하지 않아?”
돈과 사람을 아낌없이 써 빠르게 완공된 여해루의 첫 손님은 동십사의 바깥채 하인들이었다. 그들은 진해가 관직에 올랐음에도 그들을 잊지 않고 함께 어울리자 속으로 진해의 그릇에 감탄하고 있었다. 진해는 언제든지 없어질 수 있는 관직이라 별생각 안 하는 것뿐이지만.
그러나 진해의 이 생각 없는 행동이 여해루의 흥성에 크게 일조했다. 같은 하인이라도 벼슬아치의 하인들은 바깥에 돌아다니는 사람과 차이가 있었다. 그것이 예부상서의 아들이자 이등시위인 동십사의 하인이라면 더했다. 벼슬아치의 하인들은 그들끼리 어울렸으며, 그들끼리 친했고, 심지어 그들끼리 혼인하기도 했다.
새로 개장한 여해루에서 진해와 여해루 사람들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은, 심지어 노는 돈도 모두 진해가 대 준 동가소택 바깥채 하인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그들은 그들이 아는 모든 하인에게 여해루가 얼마나 규모가 있는지, 얼마나 장식이 뛰어난지, 얼마나 기생들이 아름다우며 예의가 있고 음식이 맛이 있으며 술이 향기로운지에 대해 말했다. 물론 놀이판의 즐거움 역시 빼놓지 않았다.
바깥채 하인들 다음으로 여해루에 찾아온 손님은 바로 조관림이었다. 조관림은 현재 진해가 가장 피하고 싶은 인물 삼 위쯤에 속하는 이였다.
“미려 공자, 오늘도 그대의 우아함은 수미산의 운해와 다름없고, 눈은 밤이슬을 머금은 만월과도 다름없소.”
앞서 말했듯이 조관림은 정미려에게 간이라도 빼 줄 기세였다. 진해가 조관림을 처음 데려올 때 미려에게 동무라고 거짓말을 한 탓에 미려가 정성 들여 공연했는데 책상물림인 문관에게는 너무나도 자극적이고, 강렬했었다.
“헤헤, 헤, 조 대인. 오랜만에 뵙습니다!”
“자네도 있었나?”
물론 조관림도 진해를 엄청나게 싫어했다. 미려를 볼 때는 세상 멍청한 얼굴이 따로 없는데 진해를 볼 때는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것보다 서늘한 얼굴로 변모했다. 괜히 젊은 나이에 육품을 하는 게 아니었다.
“조 대인.”
진해가 그 시선을 받고 어깨를 움찔 떨자 미려가 진해의 앞으로 나서서 조관림의 시선을 대신 받았다. 조관림은 미려를 가까이서 보게 되어 기쁘면서도 미려가 진해를 감싸는 것이 속상하기도 했다.
“그래, 그대를 보는 경사스러운 날에 소리를 높일 순 없는 일이지.”
진해를 당장이라도 쫓아 버리고 싶었지만 조관림이 미려를 직접 만날 수 있는 날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첫째로는 미려방의 일패인 미려가 바쁘기 때문이며, 둘째는 조관림도 제 맡은 책무가 막중했기 때문이고, 셋째로는 미려가 웬만하면 조관림의 방문을 받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즉, 오늘 미려를 이렇게 볼 수 있는 건 조관림에게 있어서 행운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내 오늘 그대에게 감히 청하고자 싶은 것이 있네.”
그리고 오늘의 조관림은 미려에게 할 말이 있었다. 사실 조관림은 지금 상당히 조급해하고 있었다. 미려방이 언젠가 이사할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번화가에 그것도 이렇게 번듯한 건물을 세워 한 번에 이사할 줄은 몰랐다. 혹여 빚을 낸 게 아닌가 걱정했는데 웬걸, 빚은커녕 사람을 더 고용해 그들에게 세경을 선지급할 정도로 여유가 있는 듯했다.
사람들의 이목이 끌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학자 출신이 대부분인 조관림의 동료들 사이에서도 여해루에 대한 소문이 들려올 정도였다. 미간을 찡그리며 사치를 비난하는 이들이 대부분이긴 했으나 호기심을 드러내는 이도 있었다. 놀기를 좋아하는 다른 관료들이라면 대번에 여해루를 방문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아름다운 미려를 그들이 보게 될 것이다. 잠춘동에서는 지체 높은 관리였으나 관료들 사이에서는 그냥저냥인 조관림에게서 미려는 더욱 멀어져 버릴 것이다. 그러기 전에, 조관림은 미려와 좀 더 밀접한 관계가 될 생각이었다. 그는 미려에게 자신이 여해루의 뒷배가 되어 주겠다고 할 계획이었다. 그는 젊었지만 꾸준히 승진하고 있었으며, 그의 가문은 부유했고 조관림은 그 가문의 후계자로서 재산의 얼마간을 자유롭게 융통할 수 있었다.
“뭐, 필요, 없다고?”
그러나 조관림의 계획은 어그러지고 말았다.
“예, 여기 계신 오 대인께서 저희 여해루의 든든한 동반자시니 조 대인께서 굳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된다는 말입니다.”
저놈의 오진해가 또, 또! 하루 벌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좌부우부도 없는 한량 자식이 미려를 자신에게서 가로채 버렸던 것이다!
“거짓말이다! 저놈이 어떻게 관리를, 그것도 단번에 칠품에 오른단 말이야!”
“어, 음. 그러니까 이야기가 좀 긴데…….”
“듣기 싫다! 되먹지 않은 수단을 써서 부당하게 관직에 오른 것이겠지! 내 당장 형부에 달려가 정당치 못한 더러운 짓거리를 밝혀낼 것이야!”
“과, 과거를 본 건 아니지만 나쁜 짓은 하나도 안 했어요!”
조관림이 불같이 화를 내자 조관림에게 짝사랑의 멍에를 지게 한 진해는 쩔쩔매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진해는 미려보다 아름다운 이가 없으니 조관림이 평생 짝사랑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걸 생각할 때마다 뜨거운 재를 깔고 앉은 기분이었다.
“조 대인, 오 대인의 등용에 의문이 있으시다면 오 대인을 추천하신 동 시위 대인을 찾아가시지요.”
“설마 예부상서 동가대 대인의 영식이시며 내무부 이등시위이신 동십사 대인을 말하는 건가?”
“예. 여기 오 대인께서는 동십사 대인께서 직접, 등용하셨으니까요.”
“허어…….”
진해는 몰랐지만 동십사는 문관들 사이에서도 제법 이름이 높은 무관이었다. 황제에게 직언을 했다가 목이 잘릴 뻔한 것을 해원공이 탄원해 준 뒤로 무과에 급제해 승승장구했고, 우부인 예부상서와 함께 해원공의 오른팔이 된 인물이기도 했다. 본래 문관이었으니 다른 무관과 달리 조관림과도 제법 말이 통하는 이였다. 조관림은 그런 동십사가 진해를 등용했다고 하자 그만 할 말이 없어져 버렸다.
“……다음에 보지.”
가엽게도 조관림은 어깨를 늘어뜨린 채 오늘도 쓸쓸히 집으로 돌아갔다.
“미려야, 너 대체 조 대인은 왜 부른 거야? 으으, 나는 조 대인을 볼 때마다 가슴이 그냥!”
“형아도 참. 조 공자랑 형아는 이제 일품 밖에 차이가 안 나. 형아도 당당한 관리라구.”
“그래, 그렇지. 하지만 나랑 달리 조 공자는 관리들 사이에 연줄이 있고, 넌 그걸 이용하려고 일부러 사람이 많은 시간에 조 공자를 부른 거 아냐?”
진해가 흘겨보자 미려는 소리 없이 눈을 휘며 웃었다. 진해는 미려의 철두철미한 수단에 오한이 들면서도 대견하기 짝이 없었다. 큰일을 하는 사내에겐 이런 단호한 면도 있어야 했다. 그리고 조관림보다 높은 관직에 있으면서도 미혼인 사람이 진해의 주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진해는 그 동생에 그 형답게 조관림을 마음속에서 멀리 치워 버렸다.
그리고 미려와 진해의 계략은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마침 여해루에 있던 관리의 하인이 마침 퇴청하고 돌아온(음서로 관리가 되었고 조관림에게 약간의 열등감을 품고 있었다) 주인에게 그 사실을 고했으며, 마침 파락호 동지들과 모임이 있던 그가 아주 공교롭게도 친구들과 새로운 곳에서 놀고 싶어졌다. 고관대작의 자제들로 이루어진 파락호 모임이 최근 골패 놀이에 열을 올리는 중이라는 건 참으로 공교롭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이 모든 것이 빠르고 재빠르게 이루어졌기에 영 집사가 진해의 행각을 알게 된 건 진해가 여해루의 뒷배이자 전주로 도성에 소문이 자자하게 난 뒤였다. 석 달이 넘게 망하지 않고 장사를 계속했으므로 곧 기루의 급을 매길 심사관이 방문할 예정이었다.
“너희들은 뭐가 좋다고 오 대인이 그렇게 허랑방탕하게 굴도록 놓아둔 거냐!”
영 집사는 그날도 희희낙락 여해루의 놀이판에 끼려는 바깥채 하인들을 붙잡아 동가소택의 튼실한 나무에 꽁꽁 매어 놓았다. 하인들을 서슬 퍼런 영 집사의 기세에 대꾸 하나 하지 못했다. 영 집사는 집 안에서 조용히 노는 건 봐줘도, 바깥에서 동십사의 명예를 떨어뜨릴 만한 곳에 출입하면 그 길로 땡전 한 푼 없이 내쫓아 버렸기 때문이다.
“저, 그것이, 오 대인의 아우가 가게를 열었다는데 어찌 초청을 거부합니까.”
“그렇구말구요! 오 대인이 얼마나 잘해 주셨는데요!”
“영 집사님, 오 대인 말고 다른 어르신들도 돈 될 만한 곳에 많이 투자들 하시잖아요. 우리 오 대인은 귀하게 되실지도 모르는데 반년 받은 녹봉으로 입이나 축이시겠어요?”
다른 가게가 아닌 오진해가 돈을 댔다는 가게에 출입했기 때문에 영 집사는 이들을 내쫓지 않고 그냥 매질을 몇 대 안기고 말 셈이었다. 하지만 진해에게 돈이 필요하다는 말이 매질을 명하려는 영 집사의 입을 다물게 했다.
확실히 진해에겐 돈이 필요했다. 영 집사는 궁 안에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었지만 뼈대 있고 부유한 관리의 하인인 만큼 귓등으로 정실과 측실의 일에 대해 들은 게 많았다. 가문이 비루하고, 가진 게 없으면 정실이라도 가을 부채 꼴을 면하지 못했다. 측실이라도 가진 게 많다면 정실 못지않은 대우를 받았다.
“분명히 오 대인이 아니라 오 대인의 아우가 연 기루라고 했겠다?”
“예! 아주 눈이 멀어 버릴 것같이 아름다운 양인이었습니다!”
“선인이 지상에 강림하신 것 같았습죠…….”
“아이구, 우리 남편 놈이 백 분의 일만 닮았으면 좋겠네!”
하인들의 말을 들으며 영 집사는 가만히 머리를 굴렸다. 그가 진해에게 준 반년 녹봉이 열 배, 백 배로 불어난다면 진해에게 그보다 좋은 일이 없었다. 진해의 동생이 가게를 한다니 떼먹힐 일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가게가 기루라는 점이었다. 물론 관리 중에는 제 측실이나 정부에게 돈을 줘 그런 가게를 운영하는 자가 많았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동십사는 결코, 그런 풍기 문란한 일을 허용할 사람이 아니었다.
“나리가 아시면 사달이 나도 크게 날 텐데. 그렇다고 보고를 아니 할 수도 없고.”
영 집사는 고민했으나 여해루가 온 도성에 소문이 날 만큼 흥성한 마당에 언제까지 숨길 수는 없는 법이었다. 결국 영 집사는 동십사가 퇴청한 뒤 그를 찾아가 조용히 진해가 새로 투자한 여해루에 대해 말을 꺼냈다.
“지금 뭐라고 했느냐! 영 집사, 자넨 오 제를 안 보고 뭘 하고 있었어!”
“나리께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하나 해원공 마마께서 오 대인이 싫어하시는 일은 강요하지 말라 하시어…….”
“힘들어하는 것 같아 수업을 쉬게 해 줬더니 이런 일을 벌여! 내 당장 가서 오 제를 데려와야겠네! 예법 선생은 더는 올 필요가 없다 전하게! 내가 이제부터 오 제에게 직접 삼강오륜과 예식을 가르칠 테니!”
동십사는 영 집사가 예상한 대로 자리에서 펄쩍 뛸 정도로 화를 냈다. 가게가 음식점이나 찻집이었으면 동십사도 저렇게까진 화내지 않았을 것이다. 동십사는 관복을 갈아입지도 않고 당장 청루와 홍루, 각종 기루며 찻집들이 즐비한 거리로 말을 달렸다. 명마를 타고 사품 관리의 홍색 수건을 맨 동십사가 거리를 달리자 사람들의 눈이 대번에 휘둥그레졌다.
“허.”
그러나 분기탱천했던 동십사의 기세는 여해루에 도착하자 한풀 꺾여 버렸다. 진해가 돈을 보탰다고 해서 미려방보다 조금 더 큰 기루일 줄 알았는데 동십사의 예상보다 훨씬 컸다. 어찌나 큰지 입구의 꽃밭이 근방의 작은 가게들을 합친 것만큼이나 너르게 퍼져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대인.”
“말은 저희가 매어 놓겠습니다.”
그리고 그를 맞이하는 하인들의 태도도 주변의 다른 기루와 달리 정중하기 짝이 없었다. 어찌나 절도 있는지 동십사는 순간 자신이 다른 관리의 저택에 발을 들인 줄 알았다. 물론 건물에서 흘러나오는 왁자지껄한 웃음소리며 음악 소리가 이곳이 기루임을 잊지 않게 해 주었다.
하인들은 동십사를 정중히 빠르게 안내하면서도 전주인 진해에게 그가 왔다는 사실을 알렸다. 진해는 관리인 손님이 오면 특별히 자신이 나가 맞이하였다. 미려는 여해루와 미려방을 번갈아 가며 바쁘게 일을 하니 관리인 손님 정도는 전주인 자신이 맞아도 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동 형님!”
또한 동십사의 성정을 생각해 볼 때 진해가 피한다고 그 분노가 사그라질 것 같지도 않았다. 물론 진해는 동십사의 분을 삭일 준비를 해 놓았다. 먹힐지 안 먹힐지는 몰랐지만 이 준비를 한다고 피하고 싶은 인물 일 위에 등극한 삼랑을 찾아갔었다. 눈이 세모꼴로 찢어지는 것을 본 순간 바닥에 엎드려서 이마를 찧으며 혼신의 사죄를 했었다. 삼랑은 자신이 도와주는 대가로 혼인 신고서의 공란에 진해의 이름 한 글자를 제 손으로 적어 넣게 했다.
“오 제, 내 자네에게 할 말이 있네, 예로부터 관리는 청빈하고―”
“아이고, 마침 잘 오셨어요! 안 그래도 동 형을 꼭 모시고 싶었거든요!”
동십사가 감정을 다스리고 진해에게 한바탕 훈시를 하려고 하자, 진해는 동십사의 팔을 꽉 껴안고 동십사를 여해루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살아생전 기루는 물론이요, 찻집에도 발 한 번 들여놓지 않았던 동십사는 어, 어 하는 소리와 함께 휘황찬란한 건물 안에 몸을 쑥 들여놓았다.
“오늘은 특별 공연이 있는 날이라구요! 내가 동 형에게 초청장을 보냈는데 못 받으셨어요?”
“초청장이라니?”
“에헤이, 이러면 안 되지! 이보거라, 동 대인 댁에 초청장을 보내라고 했는데 어찌 된 것이냐?”
“죄송합니다, 전주 어르신. 아무래도 초청장을 발송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 모양입니다.”
“저런!”
물론 동십사에게 보낼 초청장은 먹물 한 방울도 튀기지 않았다. 진해가 정신이 나갔다고 제 스스로 잔소리를 들을 일을 만들겠는가. 그러나 진해도, 하인도 그 사실을 알면서 천연덕스럽게 거짓을 주고받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동십사는 속으로 진해가 저를 꽤 위해 준다고 생각했고 일단 진해의 체면을 세워 준 뒤 집으로 돌아가 진해와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어야겠다고 결정했다.
“오 제, 마음은 고맙네만 나는 주색을 즐기지 않아. 주사위나 골패도 우리 가문에서 엄히 금하는 바이네.”
“아유, 제가 설마 그걸 모르겠어요? 당연히 그런 오 형님의 입맛에 딱 맞춰서 준비해 놓았지요!”
이 말은 반은 거짓말이고 반은 사실이었다. 눈치 빠른 하인은 기생 중 겉모습이 제일 얌전하고 어려 보이는 아이들을 데려와 동십사의 시중을 들게 했다. 강한 자에게 강하고 약한 자에게 약한 동십사는 어린 티가 가시지 않은 기생들이 제 옆을 따르자 끙 소리를 내며 어쩔 수 없이 진해의 뒤를 따랐고 어색하게 그들이 팔에 매달리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여해루의 대연회장이었다. 평소에는 주사위 판과 골패 판이 잔뜩 널려 있고 악사들이 노래를 부르는 곳이 깨끗하게 싹 비어 있었다. 더군다나 대연회장의 한가운데는 눈이 시릴 정도로 깨끗하고 고운 모래들이 푹신하게 깔려 있었다. 동십사는 예상치 못한 광경에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헤헤, 오늘의 볼거리는 수박(手搏) 대련입니다!”
놀랍게도 여해루에서는 일주일에 두 번 주먹깨나 쓴다는 이들을 모아 상금을 걸고 작은 무술 경연을 열었다.
“놀랍군! 기루에서 이런 걸 한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듣지 못했어!”
“그러니까 동 형님을 모시려고 특별히 준비했다니까요? 동 형님은 피가 끓으시는 의협 무인이신데 매일 궁중에 매여 계시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세요. 가끔 이렇게 공연을 보시면서 하루의 피로를 푸시면 인생이 훨씬 살맛 날 거예요!”
오늘은 미려가 미려방에 있는 날이라 동십사와 선을 보게 하지 못하는 게 아쉬웠지만 동십사가 다른 날을 피해 수박 대련 날에 찾아온 건 천운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오늘은 진해가 삼랑에게 빌고 빌어서 데려온 특별한 이들이 대련장에 오르는 날이었다.
“저, 그런데 동 형.”
“왜 그러는가?”
진해의 말대로 오랜만에 수박 대련을 보게 된 동십사는 기분이 좋았다. 무인이라면 자신의 대련뿐만 아니라 남의 대련에도 흥미가 많은 법이었다.
“사실 오늘 대련장에 올라오는 이들한테 쪼오끔 문제가 있는데, 제 체면을 봐서 이번 한 번만 눈감아 주시면 안 될까요?”
“응? 무슨 문제길래 자네의 체면씩이나 걸어? 뭔지는 모르겠지만 자네는 귀히 될 몸이야. 함부로 체면을 걸거나 하지 말게. 내 이곳에서 본 것은 좋은 것만 기억할 테니.”
“역시 동 형님이십니다!”
하지만 동십사는 대련할 이들이 대련장에 오르자 저도 모르게 얼굴이 굳어졌다.
“헤헤, 봐, 주실 거죠……?”
“…….”
대련장에 오른 이들은 하나같이 상반신을 벗은 채로 등판했는데 뺨이며 이마에 작게 먹으로 그린 문신을 하나씩 달고 있었다. 진해가 삼랑에게 빌고 빌어 데려온 이들은 바로 추피동의 주민들이었다. 평소라면 전과가 있는 이들이 추레한 빈민가를 벗어나 도성의 가장 흥성한 곳에 올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나 진해는 다른 기루와 획기적인 차별을 두고자 했다. 그냥 아무 무인이나 데려다 툭닥거리면 보통의 씨름판과 다를 게 없었다. 손님들도 눈이 있는데 물릴 테고.
그래서 진해는 삼랑과의 혼인 신고서에 제 이름 한 자를 새겨 넣는 고난을 감수하며 아직까지 삼랑의 영향력 아래 있는 추피동의 주민 몇을 여해루에 데려왔다. 목숨에 지장이 있거나 장애가 없는 한 마음대로 싸우라는 여해루의 규칙 아래서 주먹 하나만을 믿고 살아온 이들은 사정없이 이와 손톱을 드러냈고, 그 야성적이고 본능적인 모습에 관객들은 돈을 뿌리며 환호했다.
“저희 집에 문지기가 적어서 평소에는 얼굴을 가리고 문을 지키게 하고 있어요. 그, 저도 아무나 데려다 쓰는 건 아니고 피치 못할 사정으로 형을 받은 이들이랑 손을 씻고 싶은 사람들을 데려다가…….”
“……그렇군.”
딱딱하게 굳은 동십사의 얼굴을 외면하며 진해는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렸다. 하지만 동십사는 뼛속까지 무인이었고, 강함을 추구했으며 진해는 도박의 신의 가호를 받고 있었다.
“시작해!”
전과범 둘이 손님들에게 고개 숙여 예를 표하고, 심판이 설명이 끝나자마자 진해가 소리 높여 대회의 시작을 알렸다. 동십사는 굳은 얼굴로 차를 마시며 슬그머니 관객석을 훑어보았는데 놀랍게도 동십사가 아는 얼굴들이 제법 많았다. 부채로 얼굴을 가렸지만 하나같이 고관대작의 후사이거나, 또는 아예 본인이 고관대작인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와아!!”
“쳐!! 쳐 죽여 버려!”
그리고 진해의 말이 끝나자마자 전과범 두 사람은 짐승같이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두 사람이 서로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자 관객석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벗은 몸에 근육이 도드라졌다. 모래가 두 사람의 발아래 짓이겨졌다. 동십사 역시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놀랍군! 기초는 없지만 자질이 있어. 형식만 지킨다면 무과의 수박 항목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둘지도 모르겠어.”
“그렇지요? 사실 저치는 원래 추피동에 사는 이가 아니에요. 조부가 궁중의 호위였는데 무슨 사건에 휘말려서 참형을 당했다나 봐요. 후궁이 어쩌고저쩌고하던데.”
“……원귀비 저주 사건.”
“아, 맞아! 그거예 요! 그거 때문에 저 친구 빼고 집안사람이 싸그리 참형을 당했대요! 황상께서 특별히 관례를 치르지 않은 이는 살려 두라고 하셨다나.”
“…….”
“어쨌든 그래서 어려서부터 고생을 많이 했대요. 저는 우부가 남겨 주신 집이라도 있었지 저치는 아무것도 없어서 빌어먹기도 하고, 싸움질도 하고, 입에 풀칠하려고 깡패짓도 좀 하고.”
진해가 이야기를 할수록 동십사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침중하고 진지한 눈으로 두 사람의 대련을 지켜보았다. 관객들의 함성이 높아질수록 동십사는 흥분과 참담함의 양측에서 괴로워했다. 동십사가 죽을 뻔한 것도 바로 그가 입에 담은 원귀비 저주 사건 때문이었다.
“…….”
동십사는 아직도 황상이 그 사건을 지나치게 가혹하게 처리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지나치게 많은 피를 흩뿌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해원공이 제법 장성하고 그가 어사 자리에 이르렀을 때 죽은 이들의 죄를 조금이라도 덜어 주기를 청하였다. 자신의 궁에 갇혀 처참한 죽음을 맞이한 원귀비 , 궁인 연씨에게 약간의 자비를 베풀어 주기를 바랐다.
“수박이 끝나면 저자를 보고 싶군.”
“응? 그러지요, 뭐. 술도 몇 잔 넣어 드릴까요?”
“좋네.”
하지만 황제의 태도는 동십사가 생각한 것보다 완강했다. 황제는 동십사가 몇 번이고 청을 올리자 대노하여 동십사를 그 자리에서 바로 형장으로 끌고 가게 명하였다. 동십사의 우부인 예부상서 동가대의 체면을 본다면 한 번쯤은 봐줄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분노한 황제는 노련한 관리인 동가대도 말을 붙이기 힘들 정도로 격분했었다.
“역시! 오늘도 저치가 이겼네요! 과연 핏줄은 못 속인다니까!”
“……음.”
동십사가 해원공이 나서서 저를 탄원해 줬을 때를 떠올리고 있을 때 진해가 하인을 불러 귓속말을 했다. 동십사의 시선은 땀에 젖은 채 헐떡이는 청년에게 꽂혀 있었다. 확실히 원귀비 궁의 호위 중에 저 얼굴과 닮은 이가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동십사는 불운한 사건으로 인해 순식간에 나락으로 굴러떨어진 청년에게 깊은 연민을 느꼈다. 삼랑을 제자로 삼았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기도 했다.
진해는 동십사가 자리를 뜸과 동시에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입이 찢어지도록 씩 웃음 지었는데 왜냐면 이번 기회에 동십사가 제가 가게를 하는 것에 대해 뭐라 말하지 못하도록 제대로 못을 박을 심산이었던 것이다.
“음. 그런데 미려를 선보이기 전에 이래도 되려나 모르겠네. 설마 동열넷 같은 딱딱한 사람이 전과범을 제 사람으로 들이겠어? 에이, 같이 술이나 몇 잔 들고 말겠지.”
진해는 여해루 수박 대련의 일 등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이를 동십사가 기다리고 있는 방에 보내면서 진한 맛의 곡주와 기름진 육류 요리, 기운이 솟는 각종 보양식을 들려 보냈다. 하인에게 동십사 대인을 극진히 모시라는 말을 전하도록 함은 물론이었다. 수박 대련의 일 등이 양인이라는 점이 뒤늦게 생각났으나 설마 일이 그런 식으로 흘러가겠는가. 진해는 동십사가 강한 무인이 가까이서 보고 싶은가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세상일은 정말로 모를 일이었다! 여해루를 탐탁지 않게 여길 동십사가 뻔질나게 여해루를 드나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진해는 아차 싶어 수박회 여는 날을 바꾸었으나 동십사는 아예 진해에게 올 때마다 그이를 불러 술자리를 가졌다. 진해는 그치에게 거절의 의사를 표하라 했으나, 웬걸! 그자도 동십사가 그리 싫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런 젠장.”
미려는 월국에서 가장 아름다웠지만 미려에게 넘어가지 않는 종류의 사람이 있었다. 사랑에 빠진 이들은 미려가 아무리 아름답게 춤을 춰도 미려에게 시선 하나 주지 않았다. 사랑의 힘은 참으로 위대해서 때로는 신분도, 양음도 넘어서게 했다. 흔치 않은 일이었지만 주인댁 도련님과 하인이 추격을 피해 잠춘동으로 숨어드는 일도 있었다.
어쨌거나 동십사는 최소 삼 일에 한 번은 여해루에 와 어흠, 어흠 헛기침을 했다. 진해는 미려를 동십사에게 장가보내려던 일이 틀어지게 되어 속이 쓰렸지만 동십사가 더 이상 진해의 일을 저지하지 않게 되어 좋기도 했다.
그런데 일이 점점 이상하게 흘러갔다. 동십사가 수박회의 일 등과 함께 있는 걸 본 어느 귀한 집 도련님이 귓불을 붉히며 수박회의 삼 등을 불러 달라고 했다. 진해가 거절하려는데 도련님이 소매를 나붓나붓 펄럭이며 탁자에 종이 한 장을 떡하니 올려놓았다. 일, 이, 삼, 사, 오. 무려 은 오백 냥 가치의 전표(錢票)였다. 진해는 자신이 직접 뛰어가 순찰을 돌고 있던 삼 등을 씻기고 입혀 도련님 앞에 대령해 놓았다.
행인지 불행인지 도련님은 삼 등의 취향에 꼭 맞는 얼굴을 갖고 있었고 삼 등은 도련님의 아래에 꼭 맞는 거시기를 갖고 있었다. 삼 등은 성격도 나쁜 편이 아니었는데 죄를 짓게 된 것도 변태 호색한이 제 좌부를 희롱하려던 것을 막으려다 홧김에 그 변태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은 탓이었다. 변태의 사촌이 관리인 탓에 삼 등은 죄에 비해 과중한 처벌을 받은 셈이었다.
“잠깐만 뭐야. 이건?”
“네, 수박회 선수들과 저희 여해루의 기생들을 전속으로 삼고 싶다는 손님들의 예약 목록입니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내가 무슨 매파인 줄 알아?”
“선수들은 별소리 안 하던데요? 오히려 가볍게 즐기고 끝내려는 사람이 많지요.”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그러나.”
진해는 여해루의 총관이 내민 서류를 넘기며 끙 소리를 냈으나 손님들도, 기생들도, 심지어 수박회 선수들도 은근히 서로를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일 등과 삼 등이 고관과 부잣집 도련님의 눈에 든 게 순위가 높아서 그렇다고 생각한 듯 수박 대련이 더욱 치열해지기도 했다. 진해는 서로의 정인을 잘 봐달라는 이들의 뇌물로 마련한 금고가 꽉 찰 지경이었다. 여해루를 지을 때 투자한 금 한 냥의 열 배가 넘는 돈이 모두 다 진해의 것이었다.
“사랑하는 이들을 막는 건 너무해, 형아.”
미려가 눈시울을 적시며 진해를 바라보자 진해는 마침내 마음을 정리하고 사랑의 작대기인지 중매인지를 서는 일은 열 일을 제쳐 두고 자신이 직접 나서기로 했다. 서로를 관찰한 뒤 서로의 목적에 맞는 이들과 만남을 주선한 것이다.
“여, 오진해.”
그렇게 바쁜 나날을 지내던 어느 날, 빚쟁이가 찾아왔다.
“우리 애들이 잘 지낸다며? 참 나, 사부랑 배를 맞게 하다니 너도 제법이야. 안 본 새에 살이 좀 찐 거 같다?”
동십사가 시킨 임무인지 뭔지를 하느라 분주히 돌아다니던 삼랑이 조금 야윈 얼굴로 여해루를 찾아온 것이다.
“헉, 여, 여기가 어디라고!”
“뭐, 왜, 뭐. 난 여기 오면 안 되냐? 너 내가 쟤네 안 데려왔으면 이렇게 잘 벌 수 있었을 거 같아?”
“그건 아니지만, 오늘은 미려가…….”
“아, 정미려 때문에?”
미려가 오면 보나 마나 수박회에 버금가는 화려한 주먹 난투가 벌어질 게 뻔했다.
“안타깝게도, 아니,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네 동생 새끼는 오늘 이쪽으로 행차를 안 하신단다!”
“엥?”
“우리가 너 모르는 새 쪼오끔 친한 사이가 됐거든.”
삼랑은 씩 웃으며 진해의 전용 탁자 위에 손을 뻗었다. 탁자 위에는 부지런한 하인이 진해를 위해 가져다 둔 자그마한 과일 소반이 있었다. 꿈에도 상상해 보지 않은 말을 들어 잠깐 멍하니 있던 진해는 하얗고 길쭉한 손가락이 작은 사과를 가져가 한입 베어 무는 것을 보며 숨을 가다듬었다.
“미려는 안 돼! 절대 못 줘!”
진해에게서 보기 힘든 근엄하고 진중한 표정이었다. 그래 봤자 삼랑에게는 강아지가 이를 드러내는 거나 다름없었지만.
“이 새끼가 대갈통에도 기름이 꼈나. 줘도 안 가져 씨발 새끼야.”
“그렇다고 그렇게 단호하게 말하는 것도 좀 기분 나빠!”
삼랑은 더러운 성질머리를 숨기지 않고 한입 베어 문 사과를 그대로 진해에게 집어 던졌다. 진해는 삼랑이 미려와 음양 사이의 관계가 없었다는 것에 안심하면서도 삼랑이 미려를 단호하게 내치는 게 묘하게 기분 나빴다. 진해가 몸을 틀자 사과는 진해의 곁을 지나 열린 창밖으로 날아갔다. 진해의 집무실은 이 층이었는데 날아간 사과가 누구의 머리통에 맞았는지 “아얏!” 소리가 들려왔다.
진해가 누가 맞았는지 보려고 창밖으로 고개를 빼려 하자 삼랑은 책상에 반쯤 걸터앉은 채 진해 쪽으로 팔을 뻗었다. 그리고는 진해의 녹색 수건을 그대로 잡아채 자신의 쪽으로 세게 잡아당겼다. 과일 소반이 떨어지고 속에 든 것이 바닥 위를 굴렀다. 여린 표면에 금이 가고 멍이 들었다. 진해의 입술에도 짐승의 치열 같은 자국이 새겨졌다.
“존나 얼굴 까먹는 줄 알았다.”
짐승이 상처를 핥는 것처럼 삼랑은 자신이 자국을 낸 진해의 입술 위를 핥았다. 진해는 일부러 상처를 내놓고 핥는 행위를 무엇으로 정의해야 할지 고민했다. 병 주고 약 주는 건가?
“살이 좀 빠진 것 같네. 일이 많이 힘들어?”
“힘? 설마! 크기만 커졌지 추피동에서 하는 거랑 똑같아. 기무위사인지 나발인지가 딱 내 적성이거든. 진짜배기거나 아주 쓰레기인 놈들만 모여 있지. 들키지만 않으면 주먹을 쓰든 칼을 쓰든 개의치도 않더라고.”
주먹과 칼이라는 말에 진해는 슬그머니 삼랑의 얼굴을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삼랑의 하얀 얼굴에는 멍 자국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몸에 상처가 난 것일까. 진해는 속으로는 망설이면서 그러나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삼랑의 허리에 손을 감았다. 후리후리한 선이 진해의 손바닥에 착 달라붙었다.
“허리도 좀 마른 것 같기도 하고……. 밥은 잘 먹고 있어?”
“이 새끼는 누가 부엌데기 아니랄까 봐 맨날천날 밥걱정이네.”
“말 돌리지 말고.”
진해가 지압하듯 부드럽게 꾹꾹 문지르자 삼랑의 표정이 나른해졌다. 탁자를 제 옆으로 치운 뒤 아예 진해의 허벅지 위에 앉아 버렸다. 삼랑이 사정 봐주지 않고 푹 주저앉자 진해의 입에서 흡! 하는 신음 소리가 새 나왔으나 삼랑은 킬킬대며 제 허리에 놓인 진해의 손을 거머쥘 뿐이었다. 먹이는 노리는 맹수처럼 눈을 빛내면서 흰 수건으로 말아 놓은 검은 수건을 목에서 풀어낼 뿐이었다.
“내가 뭐가 아쉬워서 서방 새끼한테 말을 돌리냐? 나한테 무려 사람 빚을 지고 있는 서방인데. 그런데 너 뒷감당할 자신이 있어서 일을 벌이냐?”
“뭔 일 말이야? 여해루? 순조롭게 잘되고 있는 것 같은데? 심사관은 어떻게 볼지 모르겠지만.”
“으이구 등신 새끼. 누가 그걸 말하냐. 너 동 사부 말고 다른 놈들이랑도 짝지어 줬지?”
“헉, 어떻게 그걸…….”
“이렇게 멍청한 걸 전주로 두고 어떻게 잘 굴러가고 있나 몰라. 내가 빌려준 놈들, 그놈들이 네 밑에 있다고 착각하는가 본데 그놈들은 다 내 거야. 내가 그놈들 두목이라고.”
에라이 젠장, 홀몸인 놈이 다 불었구나. 진해는 여해루에서 재미를 보지 못하는 놈들을 떠올리며 혀를 찼다. 속 좁은 놈들이라 욕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편 진해가 입술을 꼼지락거리며 누구 놈, 누구 놈 가만 안 두겠다고 욕하는 걸 구경하던 삼랑은 오랜만에 만났던 자신의 사부이자 직속 상관인 내무부 이등시위 동십사를 떠올렸다. 동십사는 삼랑을 부르자마자 네가 진해의 기루에 사람을 댔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숨길 이유도 없어서 그렇다고 했더니 동십사는 갓 면도해 까칠까칠한 수염을 문지르며 잠깐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삼랑을 마주 보며 네 아래에 있는 인물 중 수박회의 일 등, 성이 심씨와 같은 이처럼 사연 있는 이가 몇이나 있냐고 물었다. 삼랑과 성향이 비슷한 동료 위사가 근래 동십사가 기루에 드나든다고 수상하게 생각하더니 그 이유가 저것이었다. 삼랑이 킬킬 웃으며 맘에 들면 침소로 보내 드리겠다고 했더니 동십사는 정색을 하며 자신의 측실이 아닌 수하로 기를 것이라고 했다.
‘해원공 마마님께서 황위에 오르실 때 나는 다시 원귀비 의 사건에 연루된 자들의 죄를 경감시켜 달라 청할 것이다. 그리되면 아심도 다시 가문을 일으킬 수 있을 터. 나는 아심을 비롯한 연좌제로 고통받는 이들을 도울 생각이다.’
아심이라는 낯간지러운 호칭에 삼랑은 하마터면 토할 뻔했지만 심씨가 가진 이름 중에는 제일 나은 이름이었다. 삼랑을 비롯한 이들은 이 새끼, 저 새끼가 일상다반사였으니까.
“아심은 둘째치고.”
“아심? 아심이 누구야?”
“곽열 그놈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정신 나간 거 아냐? 그놈이랑 어울리는 도련님이 누군지 알고나 있어?”
“응? 그냥 돈 많은 집 아드님 아냐? 사거리에 큰 비단 가게를 갖고 있는.”
“멍청아. 알려면 제대로 알아야지. 비단 장사는 그 도련님네 숙부 집이야. 그 집에 애가 안 생겨서 호적에 아들로 올려놓은 거고 생부는 호부시랑이란 말이야. 동사부랑 관품은 같지만 경험은 훨씬 많은 너구리 같은 영감탱이지! 게다가 도련님은 호부시랑이 늘그막에 힘겹게 낳은 막내아들!”
“헉!”
“늙은 나이에 배 아파 낳은 애라 아비들도 형들도 오냐오냐해 준다더라. 호부시랑네 안방 어르신이 자기 죽기 전에 막내를 좋은 집에 장가보내 달라고 호부시랑을 그렇게 졸라 댄다던데, 넌 그런 도련님한테 문신한 놈을 붙여?”
“아니, 그건, 도련님이!”
“너 이제 큰일 났다. 호부시랑은 상서가 될 수 있으면서 일부러 시랑 자리를 지키고 있는 양반이야. 숨겨 놓은 재산이 황상만큼 많다는 소리가 있는데 그 양반 눈에 나면 이 가게가 과연 무사할지 모르겠네.”
삼랑의 이야기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진해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숙소를 치우는 하인 하나가 삼 등(이름이 열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과 도련님이 묵은 방을 치우러 들어갈 때마다 비장한 얼굴을 하고 들어가는 걸 몇 번이고 목격했었다.
잠춘동에서야 누구랑 몇 번을 자든, 심지어 딸린 애가 있든 개의치 않고 합쳤다가 헤어졌지만 높으신 분들은 사정이 다른 모양이었다. 진해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해원공이 진해 이전에는 경험이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막내 도련님 역시 아버지들이 정해 준 상대와만 몸을 섞어야 함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진해가 곽열과 도련님의 불꽃에 기름을 부어 버렸다. 불꽃은 활활 타오르다 못해 여해루를 통째로 태워 버릴 것처럼 뜨거웠다. 만약 진해 자신이 호부시랑이라면 이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곱게 곱게 길러 온 막내아들이 험악한 전과자와 엮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리고 그 관계를 기루의 전주라는 놈이 주선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고, 곧, 심사관이 올 텐데!”
“그리고 그 심사관은 호부에 속해 있지.”
“어떡하면 좋지…….”
삼랑의 엉덩이 아래 탱탱한 탄력을 자랑하던 허벅지가 축 늘어졌다. 삼랑은 피식 웃으면서 그런 진해의 뺨을 아프지 않게 툭툭 치고 갖고 놀았다. 사실 삼랑도 도련님이 호부시랑의 아들이라는 것까지는 몰랐는데 정미려가 자신을 불러 알려 준 것이었다.
하긴 어느 놈이 간이 부었다고 호부시랑의 막내아들 일을 함부로 캐겠는가. 양자로 보내야 명이 길다는 중놈 말에 동생에게 비단 가게를 차려 주며 헐레벌떡 일을 진행할 정도로 총애하는 아들인데. 정미려같이 싸가지 없는 놈 정도는 되어야 이렇게 귀띔이라도 해 주지.
“장사 접기 싫냐?”
삼랑은 정미려가 물어 준 정보를 십분 활용하여 오진해를 붙잡을 함정을 만들었다. 무서운 것이, 미려는 삼랑이 생각지도 못한 부분까지 속속들이 다 알고 있었다. 예들 들면 정미려는 오진해가 자신에게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 예언했는데 이는 오진해가 깊은 관계, 특히나 정인 사이가 되면 오진해에게 큰 상처를 입힌 첫사랑이 떠올라서 그렇다고 이야기했다.
가뜩이나 그러한데 신분이 저만큼 높은 해원공이 오진해에게, 정확히 말하자면 오진해의 몸에 홀딱 반했다. 오진해는 곤경에 빠진 가련한 음인에게는 혹했으나 저를 옭아맬 수 있는 귀한 분은 부담스러워했다. 분명 무슨 수를 써서든 그가 저에게서 떨어져 나가게 할 터였다. 쉽게 혹하는 듯싶으나 알고 보면 누구보다도 두꺼운 벽을 가진 것이 오진해. 미려는 삼랑과 그가 조금만 손을 보태면 진해와 해원공은 금방 헤어질 것이라 했다. 그리고 지금이야말로 그 적기라고 했다.
“당연하지, 여기 내 전 재산을 다 털어 넣었다구!”
진해가 울먹거리는 시늉을 하자 삼랑은 킥킥 웃으며 다시 한번 진해의 입술을 빨아들였다. 진해는 이 심각한 상황에 무슨 짓인가 싶었지만 삼랑이 뭔가 묘수를 가진 듯하여 가만히 그의 행동을 내버려 두었다.
“신고서에 한 자 더 적어.”
“…….”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냐?”
아니나 다를까, 삼랑은 혼인 신고서에 진해의 이름 한 자를 더 적어 넣을 것을 요구했다. 혼인 신고서 에는 삼랑과 오진해의 오 자가 적혀 있었다. 성을 적을 때에는 까짓것 한 자 적는다고 뭐 그리 큰일이 있겠냐 싶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진해의 인생에서 몇 안 되는 크나큰 실수였다. 삼랑은 혼인 신고서의 빈 곳이 줄어들자마자 툭하면 진해에게 나머지 이름도 신고서에 적을 것을 종용했다. 이유도 여러 가지였다. 문지기들의 삯이 일각이라도 밀리면 찾아왔고, 진상 손님을 선심 쓰듯 쫓아낸 후에도 그러했다. 진해에게 다과 한 쪽을 갖다 주면서도, 흐트러진 옷을 바로잡는 척하면서도 그랬다!
미려가 있으면 미려에게 뛰어가 저놈 좀 내쫓아 달라고 할 텐데 공교롭게도 삼랑은 미려가 없을 때만 찾아왔다. 해원공을 찾아가도 될 일이었지만 진해도 사람이었다. 낯짝이 있었고 양심이 있었다. 해산에게서 독립하기 위해 벌인 일을 수습해 달라고 해산을 찾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신고서만은…….”
진해의 머리는 민첩하게 돌아갔다. 진해는 아직 호부시랑이 이 일을 모른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렇지 않으면 삼랑이 거래를 제시할 리 없었다. 아직 무마할 단계니까 이렇게 찾아온 것이다. 정 안 되면 아심인지 누군지를 찾아 동십사에게 청탁을 넣으면 될 일이었다. 관품이 같다니까 원한은 사도 목숨은 어쩌면 가게도…… 부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직 덜 급하구만? 나 간다. 나중에 사부네 집에서 보자. 폐업하고 난 다음에.”
“잠깐만!!”
진해는 제 허벅지에서 일어나려는 삼랑을 꽉 끌어안았다. 후리후리한 몸에 코가 푹 파묻히자 오싹하면서도 시원하고 달큼한 향이 맡아졌다. 진해는 해원공에게 써먹던 필살의 기술을 삼랑에게도 유감없이 발휘했다. 제 향을 퐁퐁 뿜으면서 미려를 흉내 내며 눈가를 촉촉이 적신 것이다.
“신고서 말고, 신고서 말고 다른 건 다 할게! 나 이 가게 망하면 안 돼! 나중에 장가는 어떻게 가라구!”
해원공은 이런 표정의 진해를 가엽게 여기며 뺨을 쓸어 주었지만 지금 마주하고 있는 이는 해산이 아닌 삼랑이었다.
“참 나, 이 새끼 끼 부리는 거 보세? 창놈창놈 불렀더니 진짜 창놈이 됐나. 뭐? 다른 건 시키는 건 다 해? 야 이 새끼야. 내가 너한테 뭘 시킬 줄 알고 시키는 대로 다 해?”
삼랑은 일 없다는 듯 끌어안은 진해를 떼 내려 했다.
“진짜 다 한다니까! 뭐든 말만 해, 내가 뭐든지 네 맘에 들도록 열심히 할게!”
진해는 삼랑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더욱 절박한 심정이 되었다. 솔직히 밥이나 빨래 정도를 예상하고 매달린 거였다. 삼랑은 제 요리를 좋아하니까 그걸로 바꿔 치자고 생각한 것도 있었다.
“진짜 다 할 거냐?”
“응!”
“내가 구라 치는 놈들을 어떻게 했지?”
“……손목.”
“기억하고 있네? 까먹고 그 지랄을 떨며 입을 터는 줄 알았는데 말이야.”
그런데 아무래도 삼랑이 원하는 건 요리나 빨래 등이 아닌 듯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삼랑이 아무리 진해의 요리를 좋아해도 혼인 신고서와 요리 따위를 같이 생각하진 않을 터였다. 주먹을 쥐고 눈을 부라리면 고분고분하게 부엌으로 들어가는 것이 바로 오진해라는 인물이었으니까.
“어디 보자. 그럼 뭘 시켜 볼까.”
삼랑은 진해의 낯빛이 희게 질리자 기세등등하게 웃음 지었다. 진해가 이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것 같아서였다. 삼랑은 빼려던 몸을 돌려 진해의 허벅지 위에 다시 걸터앉았다. 진해의 귀를 매만지며 진해의 허벅지에 둔부를 은근슬쩍 문지르기 시작했다. 가랑이 사이로 느껴지는 두툼함이 삼랑을 흐뭇하게 만들었다.
“넣어.”
“응?”
“넣고 싸라고. 하, 이거 너무 조건이 좋아서 내가 밑지는 거 아닌가. 세상에 어떤 선인 놈이 공짜로 구멍을 대 주고 안에 싸라고까지 해 주냐?”
삼랑은 자신의 선량함에 심히 감격한 듯했다. 그와 대조적으로 진해는 미간을 찌푸리고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다른 이가 저리 말했다면 네! 하며 신나게 물건을 세우겠지만 상대는 삼랑이었다. 진해와의 혼인에 집착하는 삼랑이, 호시탐탐 혼인 신고서를 완성할 기회만을 노리는 삼랑이. 넣고 싸면 책임지라면서 억지로 신고서에 서명하게 만들지도 몰랐다. 어쩌면 손끝을 따 피로 지장을 찍게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넣는 건 안 돼.”
삼랑이는 매력적인 음인이었지만 어렸고, 어렸고, 또 어렸다. 남들이 보기엔 성숙했지만 진해가 미려와 함께 먹이고 씻기고 재우기까지 한 애였다.
“이야, 오진해는 손가락이랑 좆을 차별하나 보네. 오진해 좆 서러워서 제대로 서기나 하겠어. 손가락은 쑥쑥 집어넣으면서 좆대가리는 못 넣고. 내가 좆이면 콱 죽어 버린다. 콱 죽어서 땅콩처럼 알만 달고 산다.”
“그, 그건…….”
삼랑은 진해가 거절하자 해원공이 미려방을 찾아갔던 때의 일을 끄집어냈다. 새삼 분이 치미는지 옅은 색 눈동자에 숯불 같은 것이 일렁거렸다. 그리고 진해 역시 그때는 자신이 정말 미쳤음이 틀림없었다고 생각했다. 진해는 듬직한 사람에게 한없이 약했고, 자신을 버리지 않겠다는 말에는 거의 엎어지다시피 했다.
솔직히 지금 생각해도 그 당시의 삼랑이는 정말 매력적이었다. 진해는 성숙한 미인을 좋아했지만 젊고 후리후리한 몸의 근사함 역시 그에 뒤지지 않는 것이었다. 특유의 옅은 눈동자가 저에게 욕망을 드러내자 그에 혹할 수밖에 없었다. 진해는 이제야 겨우 자신 역시 삼랑이 짝으로 싫지는 않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절대로 쌍수 들고 환영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럼 입! 입으로 해!”
“입?”
“그래, 해원공 마마님이랑 처음에는 입으로 했어. 그러다가 천천히 진도를 뺐다고! 내가 좀 밝히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변태는 아니야!”
갓 잡은 생선처럼 펄떡거리는 거짓말이었다.
“오, 입에 겁나 자신 있나 보지?”
“못 믿겠으면 당장 나가서 내 전…… 정인들한테 물어보고 오던지! 아마 지금도 내가 해 준다면 싫은 척 속고쟁이 바람으로 달려올 테니까!”
“하하, 이 개새끼가 오늘 정말 끼 많이 부린다, 정말. 어?”
싱글싱글 웃던 삼랑은 전 정인 이야기가 나오자 눈매가 서늘해졌다. 잘 갈아 놓은 단도처럼, 삼랑이 즐겨 쓰는 주머니칼처럼 예리한 눈빛이었다. 잘못하면 산 채로 숭덩숭덩 썰릴 것 같았다. 그러나 큰 도박에는 큰 판돈이 필요한 법이었다. 진해는 일부러 입을 느슨하게 벌리고 삼랑이 자국을 내놓은 입술 위를 날름 핥아 보였다. 침을 듬뿍 묻혔기 때문에 아마 반짝반짝 윤을 냈을 것이다.
“그래, 씨발. 오늘 어디 오진해 혓바닥 맛 좀 보자. 대신 별로면,”
“별로면?”
“넣고, 싸고, 결까지 해라.”
“겨, 결?! 말도 안 돼! 결하면 아기가 생기잖아!”
“아, 그건 내 사정이니까 네 알 바 아니고. 할 거야, 말 거야. 싫으면 지금 당장 서명해.”
삼랑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지만 진해는 더 이상 희게 질릴 수 없을 정도로 창백해졌다. 진해는 제 아이가 생기면 도저히 외면할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좌부 없이 우부와 둘이 살게 하는 것도 싫었다. 진해는 아기가 생기면 누구보다도 행복하고 잘 웃는 아이로 기르고 싶었다. 자신과 달리 성년이 될 때까지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기를 셈이었다.
“……일어나. 일어나서 의자에 앉아.”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식으로 혼례를 치러야 했다. 정식으로 혼례를 치러 떳떳한 좌부가 되어야만 했다. 진해는 진지한 표정으로 삼랑의 허리를 번쩍 들었다. 삼랑은 살짝 놀라는 표정이었으나 순순히 바닥에 발을 디뎠고 진해의 체온이 가시지 않은 의자에 엉덩이를 걸쳤다.
“한 가지 확실히 하자. 이걸로 나한테 거짓말하기 없기. 싸면 그걸로 계산 끝내기.”
“그건 네가 싸게 할 수 있을 때 이야기고―”
“그럴 거야, 말 거야? 싫으면 관둬. 호부시랑 일은 동 형님한테 가든가 할 테니까.”
진해는 삼랑의 다리 사이에서 무릎 꿇은 채 삼랑을 올곧게 올려다보았다. 사람 가랑이 사이로 기어들어 가려는 이의 얼굴로는 보이지 않았다. 어딘지 모르게 매서운 얼굴이었다. 진지한 오진해의 얼굴은 신선했다.
“좋아. 싸면 그걸로 계산 끝내 주지. 대신 내가 식거나 못 싸면, 알지?”
진해는 대답하는 대신 삼랑의 상의를 조금 걷어 올렸다. 정교할 때의 진해는 개새끼에 가까운 놈이었다. 삼랑은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진해가 무뚝뚝하게 굴면 굴수록 피부 위에 소름이 돋아나는 것 같았다. 이 빌어먹을 놈이 진지하게 자신의 좆을 빨 생각을 하자 진해의 입이 닿기도 전에 서 버릴 것 같았다.
결심을 굳힌 진해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삼랑의 다리 사이에 몸을 파묻었다. 삼랑의 관복 무릎 부분이 조금 해져 있었다. 관리해 주는 사람이 없는 탓이다. 구김이 간 모양새 역시 삼랑이 그의 의복에 별다른 관심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진해는 그 해진 무릎 부분에 손을 얹었다. 양 손바닥으로 둥근 무릎 부분을 잔뜩 그러쥐었다. 매끄러우면서도 단단한 무릎이었다. 뼈에 붙은 고깃점처럼 질기면서도 부드러웠다. 손바닥과 무릎 사이가 체온으로 뜨겁게 젖어 드는 것을 느끼며 진해는 마침내, 고개를 숙였다.
“하, 미친…….”
그런 진해를 바라보며 삼랑의 입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소리보다는 바람이 많이 섞인 자그마한 목소리였다. 눈을 내리깐 진해는 삼랑의 무릎을 기둥처럼 붙잡은 채 입술을 삼랑의 허리에 대고 있었다. 고개를 살짝 기울이면서 오로지 입술로만 삼랑의 허리띠를 풀고 있었다. 대담하면서도 교묘한 기술이었다. 순진한 놈이라면 누군가 이렇게 해 주는 순간 발딱 세우고 질질 흘려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삼랑은 순진한 놈이 아니었고 손에 쥔 것을 덧없이 낭비할 얼뜨기도 아니었다. 삼랑은 눈가를 붉게 물들인 채 바싹 마른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단 한 장면도 놓치지 않고 보고, 맛볼 셈이었다. 어쩌면 이 순간이 삼랑의 비원을 이룰 주춧돌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씨발, 옷은 존나게 잘 벗기네. 네가 얼마나 굴렀는지는 잘 알겠다.”
진해는 삼랑이 뭐라 지껄이거나 말거나 충실히 자신의 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삼랑의 살에 이가 닿지 않게 입술로 물어 끌어 내리고, 삼랑과 어울리지 않는 깨끗한 색의 속곳 역시 정중하게 벗겨 냈다. 훤히 드러난 삼랑의 가랑이 사이에는 삼랑이 어른일 수밖에 없는 증거가 자리 잡고 있었다. 삼랑의 머리칼과 같은 색의 옅은 빛깔이 부드럽게 윤을 내고 있었다.
꽤 인상적인 광경이었다. 아직 가공이 끝나지 않은 비단 같기도 했다. 자수를 새겨 넣어도 좋을 것이고, 무늬를 그려 넣어도 좋을 것이다. 상반신의 그것처럼 아예 색을 입혀 버려도 아름다울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진해가 선택할 수 있는 수단은 한 가지뿐이었다. 진해는 저도 모르게 뜨뜻하게 달아오른 숨을 불었고, 옅은 색 체모가 바람에 일렁이는 것을 바라보다 천천히 그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읏…….”
살과 살이 겹쳐진 부분에서는 삼랑의 냄새가 진하게 피어올랐다. 진해는 젊고 산뜻한 음인의 냄새를 들이마시며 삼랑의 가랑이 사이를 제 입김으로 적셨고, 옅은 색의 체모가 눅눅하게 젖어 들었을 때쯤 혀를 내어 곧게 뻗은 기둥에 갖다 댔다. 손은 단 한 순간도 삼랑의 무릎을 떠나지 않았다. 진해는 이미 삼랑에게 한 차례 실수할 뻔한 적이 있었다.
이것은 거래였다. 거래여야만 했다. 거래여야만 진해의 가슴에서 안개처럼 혼란스럽게 피어나는 감각과 정전기처럼 따끔거리는 감각에서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복잡한 진해의 머릿속과는 별개로 진해의 혓바닥은 제 몸뚱이에 닿은 살의 감각을 즐기고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맛보는 음인의 살갗에 혀 밑에 웅덩이가 생길 정도로 기뻐하고 있었다.
“오진해…….”
삼랑이는 정말로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진해가 가장 아름답다고 여기는 미려와는 다른 방향으로 완성된 음인이었다. 그리고 그 음인은 진해보다 여섯 살이나 어린 주제에 발칙하게 진해의 몸을 거래할 것을 요구했다. 진해는 혓바닥을 삼랑의 기둥에 감으면서 어쩐지 삼랑의 무릎을 쥔 손가락 사이가 근질거리는 것 같았다.
“읏, 더, 더 세게, 더 세게 해…….”
진해가 본격적으로 입을 놀리기 시작하자 아담한 진해의 집무실 안이 물에 젖은 난잡한 소리로 가득해졌다. 진해는 입을 쓰는 걸 잘했고 또 그것을 즐기기도 했다. 동십사에게 납치되다시피 동가소택에 끌려갔던 날 해산이 진해를 단번에 침소에 끌어들일 정도로 뛰어난 솜씨였다. 가장 굴욕적인 것 같으면서도 상대의 반응을 가장 쉽게 끌어낼 수 있는 모순적인 행위였다.
“아, 아으, 아……!”
그렇기 때문에 집중했다.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려다가도 입 안에 섞여 드는 미지근한 체액 맛을 보자 저도 모르게 이성이 흐려졌다. 빨리 사정시킨다는 목표는 저만큼 멀어지고 이 음인의 물건을 가장 맛있게 맛볼 생각만이 남아 버렸다. 입술로 꼭 조인 채 고개를 흔들자 삼랑이 제 입술을 짓씹으며 발로 바닥을 긁었다. 그의 무릎을 쥔 진해의 손등에 굵은 핏줄이 붉어졌다.
“이 씨발 새끼, 아, 이 개새끼, 이걸, 다른 놈들, 아윽, 이랑, 아, 다른, 새끼들, 아, 아아!”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삼랑이 진해의 머리칼을 움켜쥐어도 진해는 삼랑의 가랑이 사이에 고개를 묻은 채 충실히 제 욕구를 충족시킬 뿐이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진해의 향과 삼랑의 향이 난잡하게 얽히기 시작했다.
“아, 빌어먹을, 좋아, 씨발, 좋다고!”
그리고 마침내 진해가 삼랑의 물건을 목 끝까지 집어삼키자 삼랑은 욕설인지 흐느낌인지 모를 것을 뱉으며 진해의 머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진해가 목울대를 움직일 때마다 삼랑은 진해의 목과 하나가 된 것처럼 등을 잘게 경련시켰다.
“으응……!”
꿀꺽꿀꺽 삼키는 소리가 날 때마다 혼까지 다 딸려 가는 것 같았다. 삼랑은 자신이 만든 후덥지근한 동굴 속에서 진해가 목구멍 깊이 밀어 넣었던 물건을 입술로 감싼 채 천천히 빼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기둥과 대가리 사이의 잘록한 부분을 감싼 채 혓바닥으로 갈라진 부분을 쑤셔 댔다. 등줄기가 아릿하고 눈앞에 하얀 번개가 내리쳤다.
자신이 무엇 때문에 진해와 이러고 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눈앞에 보이는 거라곤 오진해였으며, 느껴지는 것 역시 오진해뿐이었다. 참아야 된다는 생각이 희미하게 떠올랐으나 이렇게 좋은데 뭘 어떻게 참느냐는 반론이 터져 나왔다. 더, 더 좋아지고, 더 기분 좋아져서 진해의 입 속에 잔뜩 싸지르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진해, 오진해, 아……! 진해……!”
입을 이렇게 잘 쓰는데 앞은 얼마나 잘 쓸까. 오진해가 오롯이 자신의 것이 되어 오롯이 자신에게만 입을 쓴다면 얼마나 짜릿할까. 삼랑은 흥분으로 새어 나온 눈물을 눈꼬리에 매단 채로 진해가 어린 강아지에게 말린 고구마 조각을 쥐여 주던 것을 떠올렸다. 해원공이 그를 끌어안자 포근한 표정으로 웃던 것도 떠올렸다.
“아, 아!! 아아……!!”
삼랑은 그 두 놈처럼 하지 못했다. 삼랑이 할 줄 아는 거라곤 오로지 힘으로 빼앗아 제 밑에 두는 것뿐. 형들이 삼랑을 그렇게 가르쳤다. 지켜 줄 아버지들이 없는 그들에게는 그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삼랑은 진해가 갖고 싶었다. 진해의 웃음이 자신에게 향하길 바랐고, 진해가 제 품 안에서 멍청한 웃음을 짓길 바랐다. 일단 손에 넣어야 했다. 오진해에게 파각의 낙인을 새긴 그놈이 돌아오기 전에, 얼른 손에 넣어서, 그래서 자신의 양인으로―
“아윽!”
삼랑은 올려다보는 눈동자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순식간에 사정했다. 번개를 맞은 것처럼 온몸이 벌벌 떨렸다. 자신이 숨을 쉬고 있는지 아닌지도 분간하기 힘들었다. 뭍으로 내던져진 생선처럼 허파를 부풀리고 꺼뜨리며 입을 벙긋거릴 뿐이었다.
“좋았어?”
진해는 예민해진 삼랑에게 자극이 되지 않도록 솜털처럼 부드럽게 삼랑의 물건을 닦아 냈다. 귀한 관복을 더럽힐 순 없었으므로 혀와 입술을 이용해 청소했다. 정욕이 덕지덕지 묻은 눈과 달리 퍽 다정한 손길이었다.
삼랑은 진해가 고개를 드는 순간 진해의 옷깃을 잡아당겨 진해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갖다 댔다. 좋게 말해 갖다 대는 것이지 박치기와 다를 바 없는 행동이었다. 삼랑은 진해의 눈 속에 남은 것을 빨아들이고 싶은 것처럼 진해의 입술을 거칠게 물어뜯었다. 진해 역시 거부하지 않고 입을 열었고, 두 사람의 혓바닥 사이로 삼랑이 토해 낸 끈적끈적한 액의 잔해가 뒤섞였다. 진해는 나른한 표정으로 삼랑의 뺨에 손을 갖다 대려 했다.
[쾅!]
그러던 그때, 진해의 집무실 문이 부서질 것처럼 세게 열렸다. 미닫이문은 반쯤 제 기능을 상실한 듯했다.
“진해, 너, 오진해, 네 이놈!!!!”
문 앞에서 흉흉한 기세를 발산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닌 해원공 안해산이었다. 현재 진해와 가장 교제 비슷한 관계에 있는 이였다.
<『환태자사건』3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