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태자사건
2권
차 례
* * *
1부 탈정고 소동 (2)
2부 육등시위 오진해
1부 탈정고 소동 (2)
그로부터 며칠간 해산과 진해는 전혀 얼굴을 마주치지 못했다. 진해는 동십사의 집에서 빈둥거리기가 뭣하여 영 집사를 졸라 허드렛일을 돕기로 했다. 영 집사가 진해에게 부탁한 일은 정말 이게 일인가 싶을 정도로 편하고 간편한 일이었다. 영 집사는 진해에게 집을 돌아다니며 어디에 어떤 나무가 몇 그루 있는지 세어 달라고 했다.
“저건 화살나무인가? 빨간 열매는 낙상홍이라고 했었지. 동쪽 별채 마당에 낙상홍 다섯 그루.”
처음에는 별일 같지도 않은 걸 시킨다 생각했었는데 집의 규모가 규모인지라 생각보다 많은 나무가 심겨 있었다. 하인들이 심혈을 기울여 돌보는지라 하나같이 단정하고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하얗게 꽃이 핀 복숭아나무 아래서 진해는 자신의 집 마당에도 이런 나무를 심고 싶다고 생각했다. 진해는 복숭아꽃보다 배꽃을 더 좋아했지만 배꽃은 이별을 뜻하니 마당에 심기엔 좋지 않았다.
동쪽 별채를 지나자 어느새 저택을 반 바퀴 정도 돌게 되었다. 하인들은 진해를 볼 때마다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고, 진해도 그들에게 가볍게 목례로 답하였다. 진해는 몰랐지만 진해는 지금 안채를 드나드는 하인들에게 가장 중요시되는 인물이었다. 주인 나리와 의제를 맺었으며, 차석 집사인 영 집사에게 시중을 받는 귀하기 그지없는 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깥채의 하인들은 문지기를 제하곤 진해의 얼굴조차 알 수 없었다. 그들은 동십사의 의제가 호기롭고 용감한 청년이라고만 들었기 때문에 빈둥거리면서 한가하게 돌아다니는 진해를 감히 안채의 귀빈이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애초에 마당 구석에 모여 도박판을 벌이는 이들의 생각이란 뻔한 것이었다.
“오.”
“칠이야.”
“십이로구만.”
익숙한 분위기에 끌려 슬그머니 훔쳐보니 투전(鬪牋) 놀음을 하고 있었다. 숫자를 읊는 모습을 보아 끝수를 맞춰 이기는 놀이인 듯했다. 투전 패의 구수한 냄새에 끌려 진해는 저도 모르게 그들 사이에 끼게 되었다.
“헉, 자네는 누군가? 못 보던 얼굴인데?”
“헤헤, 지나가는 길에 재미난 놀이를 하는 듯하여.”
“뭐야, 새로 온 자인가? 바깥채엔 누가 온다는 이야기가 없었는데. 아, 혹시 안채에?”
“넵. 영 집사님이 제게 나무를 세는 일을 맡기셨습죠!”
“나무를 센다고?”
하인들은 투전 패를 슬그머니 숨기면서 진해를 살펴보았다. 진해는 안채에 일하는 자답게 깔끔한 옷을 입고 있었으나 손에는 굳은살이 가득한 것이 빈말로도 귀한 집 자제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게다가 투전 패를 보자 초롱초롱 빛나는 눈동자는 꾼들만이 알 수 있는 도박판의 그것이었다. 하인들을 눈빛을 교환하며 숨겨 뒀던 투전 패를 끄집어냈다.
“자네 그 눈을 보니 패 좀 돌릴 줄 아는 모양이군그래?”
“제가 한때는 투전으로 좀 날렸답니다. 일육거, 삼육구! 던지면 육을 가고, 꽉 쥐면 삼육구!”
“푸핫, 이 친구 아주 웃기는 친구야? 안채 놈들은 다들 소심한 줄로만 알았는데.”
“안 그래도 이 집에 들어온 후로 놀음을 못 해서 손이 근질근질합니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 테니 이 아우도 한판 끼게 해 주십쇼!”
“그래, 그래. 근데 걸 돈은 있고? 우리는 빈손으로는 놀이 안 해. 이곳은 내무부 이등시위이신 동십사 대인의 집이 아니던가. 대인의 품격만큼 크게 놀아야지. 그래야 밖에서도 나리 얼굴에 먹칠을 안 하지!”
진해는 내무부의 이등시위가 얼마나 높은 자리인지 알지 못했다. 내무부의 일등시위는 황제의 곁을 호위하는 최측근이라는 것도, 내무부의 삼등시위부터는 실력뿐만 아니라 신분과 혈통을 따지는 것도 알지 못했다. 조관림이 육품 무슨 학사라고 했으니 조관림보다도 조금 높은 자리인가 보다 했다.
“저, 제가 돈을 집에 다 놓고 와서 그런데…….”
“참 나. 어쩔 수 없구만. 새 식구니까 특별히 꿔 주는 거야? 급료일 되면 반드시 갚아?”
“넵! 감사합니다, 형님!”
“그놈의 형님 소리는.”
바깥 하인 중 가장 오래 묵은 자가 진해에게 삼십 푼을 빌려주었다. 과연 부잣집 하인이라 그런지 가볍게 빌려주는 돈이 잠춘동의 사람들의 일주일 생활비와 맞먹었다. 진해는 삼십 푼의 동전을 버릇대로 익숙하게 쌓아 두고 뒤섞이는 투전 패를 바라보았다. 투전 패는 몇 번을 썼는지 손때가 묻어 반들반들했다.
그리고 마침내, 놀음이 시작되었다. 진해는 투전 패를 나눠 주는 하인의 손길을 가만히 바라보았고 제 패를 쥔 뒤 몇 개를 뽑아 바닥에 늘어놓았다. 척 봐도 패가 썩 좋지 못했다. 다른 이들의 패도 아주 좋은 건 아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쌓아 놓은 투전 패에서 패를 뽑기를 네 번인가, 다섯 번인가. 진해의 패가 점점 모습을 갖춰 가기 시작했다. 무슨 조화를 이루었는지 진해가 뽑는 패마다 진해의 패에 척척 달라붙었다.
“십팔입니다~”
진해는 참 뭐 같은 숫자로 첫판을 이겨 버렸다. 진해에게 빌려주었던 돈은 고스란히 진해의 몫이 되었다. 하인들은 눈 뜨고 코 베인 기분이었다.
“이야, 자네 놀아 봤다는 게 거짓은 아니었구만?”
“다시, 다시 해!”
“하하, 전 밑천이 얼마 없는데요?”
“우리는 있어!”
하인들은 이번에는 진해에게 패를 섞게 했다. 진해가 속임수를 쓰는 게 아닌가 싶어 지켜보려고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받은 패는 그들이 섞었을 때보다 오히려 더 좋은 패들이었다. 그에 반해 진해의 패는 형편없을 정도였다.
“휴, 큰일 날 뻔했네. 이십사입니다!”
게다가 진해는 이번에는 아주 아슬아슬하게 판을 났다. 하인들은 진해에게 판돈을 모두 다 내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몇 판을 더 하자 진해의 앞에 동전의 벽이 쌓이기 시작했다. 대갓집의 하인들이 아무리 놀아 봤자 빈민, 거지, 사기꾼과 도박꾼들의 동네인 잠춘동의 주민을 이겨 낼 순 없었다. 진해는 나중에는 콧노래를 부르며 하인들의 주머니를 몽땅 털어 버렸다.
“형, 형님! 그 돈은, 그 돈은!”
“어허, 누구더러 형님이래. 늙어 보이게!”
“잠깐만, 오늘 내 남편 놈 생일이야! 생일상 차려 주려고 여퉈 뒀던 돈이라고!”
“그럼 걸질 말았어야지!”
놀음판의 끝자락은 어딜 가나 익숙한 광경의 반복이었다. 진해는 능숙하게 동전을 쓸어 담고는 발걸음도 가볍게 다시 자기 갈 길을 가려 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진해가 아무리 돈이 많아도 이 집에선 돈을 쓸 곳이 없었다. 더욱 곤란한 건 이 집은 진해의 집이 아니었고, 진해의 방을 청소하는 것도 진해가 아니었으므로 이 돈을 숨겨 둘 곳이 아무 데도 없다는 점이었다.
“흠.”
진해는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하인들을 버려둔 채 하늘을 바라보며 턱을 긁었다. 당분간 이 집에 머무를 텐데 친구를 몇 만들어 두어 나쁠 것도 없을 듯했다.
“참 나. 나도 사람이 너무 좋아서 큰일이라니까. 총각 바지 벗기지 말고 다들 일어나! 이거, 자기 돈 갖고 가라고.”
“헉, 전부 다?”
“그래, 이 친구들아. 전부 다 가져가. 내가 돌았다고 한 식구들을 등쳐 먹겠어?”
진해는 아주 너그러운 표정을 지으며 자기가 딴 돈을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하인들은 그런 진해의 태도에 무척 놀란 듯했다. 도박판에서 딴 돈을 돌려주다니. 그런 사람은 생전 듣도 보도 못했다. 싸움이 나지 않는 적은 금액을 거는 게 그들이 생각해 낸 평화로운 도박의 최선이었다.
“그래, 우린 한 식구지! 자네 말이 맞아! 내 이제부터 자네를 우리 바깥채 식구들과 같이 여기겠어! 바깥채 일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부르라고!”
그리하여 진해는 동십사 집에 온 뒤 며칠 만에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다. 진해는 영 집사에게 길을 잃어 나무를 다 세지 못했노라 거짓으로 고해바쳤다. 영 집사 역시 진해가 나무를 세지 못한 걸 개의치 않는 듯했다. 오히려 반색하며 그럼 다음 날에도 나무를 세어 달라 부탁해 왔다. 눈치 빠른 진해는 영 집사의 태도에서 영 집사가 자신에게 일을 시키지 않고 싶어 한다는 걸 깨달았다.
“이봐, 오늘 그거 들었어? 오늘 사거리에서 사형 집행을 한다는구만.”
“사형?”
“살인이라서 참형이라던데? 나도 잘 모르겠는데 도성 어디서 연쇄 살인이 일어났다더만 .”
“아이구, 어쩌다가 그리되었대?”
“무슨 약을 유통하는 건이 계기가 되었다던데. 여간 무시무시한 놈이 아니야. 낭중이랑 뭐가 틀어졌는지 낭중 부부를 살해하고, 그 후에는 제 동생 놈까지 목을 그었다지 않겠어?”
“아편이네, 아편.”
“아무래도 그렇겠지. 이렇게 급하게 판결을 한 걸 보면. 어쩌면 그쪽 동네에는 살짝 유통되었던 걸지도 모르겠어.”
평소처럼 패를 돌리던 진해의 손이 우뚝 멎었다. 한가롭게 얘기하는 화제가 어쩐지 자신이 아는 이야기와 조금 닮아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형이 동생을 죽였다는 부분은 진해가 전혀 모르는 이야기였다. 진해는 살짝 떨리는 손으로 패를 움켜잡았다.
“아~ 그 낭중 피살 사건 말이지?”
그러나 떨리는 손과 달리 입만은 자유로웠다. 진해는 침착하게 투전 패의 끝수를 맞추려고 했다.
“아마도 그럴걸?”
“아니, 그럼 판결이 너무 빠른데? 그게 일어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거 같은데.”
“아편이라니까!”
“에이, 아냐. 참형이니까 아편은 아냐. 아편이었으면 요참을 했을걸?”
바깥채 하인들은 진해의 속도 모르고 온갖 끔찍한 사형법들을 열거했다. 교형, 참형, 요참, 거열, 능지. 사거리의 형장 위에서 벌어졌던 온갖 형들이 이 자리에 모여들었다. 진해의 손끝이 새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 사형을 당하는 놈의 성이 한씨라는 말을 듣자 진해는 마침내 들고 있던 투전 패를 떨어뜨리기에 이르렀다.
“이봐, 괜찮아? 얼굴이 새파랗잖아?”
“속이, 속이 다…….”
“어허, 이 친구 보기보다 약하구만? 그걸 왜 또 상상하고 그러나. 비위도 약한 양반이. 아무래도 이 친구 급체했나 보다. 오늘은 이만하고 약이나 얻어 주지? 새로 온 양반이라 약 얻는 법도 모를 텐데.”
하인들은 그간 진해와 정이 많이 들어 진해를 꽤 걱정해 주었다. 돈을 따고도 매번 돌려주는 호인을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인들이 자리를 정리한다고 일어서자 진해는 정말로 뭣이 급한 사람처럼 냅다 대문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한씨 형제는 진해에게 그들이 죽이지 않았다고 말했었다. 게다가 한일이 한이를 죽이다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진해는 어려서부터 그들을 쭉 봐 왔고, 다른 건 몰라도 그들의 우애만큼은 높이 사고 있었다. 진해가 미려를 필사적으로 기른 것처럼 한일도 한이와 한삼랑을 필사적으로 돌보았고, 한삼랑이 장성하고 나서는 지긋지긋한 빈민 생활을 청산해 보려 갖은 애를 다 썼었다.
다만 타고난 성질이 난폭하고 못되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을 뿐이었다. 잠자리 외 다른 문제에서는 물렁물렁한 진해와 달리 온갖 일에 날을 세우고 살아 그런 것뿐이었다. 정말로 사람을 죽였다면 사형을 받아 마땅하지만 한일이 한이를 죽일 리 없었다. 한일과 한이는 낭중을 죽이지 않았다.
대문가에 다다른 진해는 허겁지겁 바깥으로 뛰쳐나가려고 했다. 지금이라도 관아에 가 자신이 들은 것을 고한다면 사형을 조금이라도 미룰 수 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진범을 찾게 될지도 몰랐다.
“오 공자님, 나가시면 안 됩니다.”
“왜요!”
“영 집사 어르신의 명입니다. 주인 나리의 뜻이시기도 합니다.”
“아니, 내 발로 나간다는데 왜 막는 거야!”
그런데 진해의 얼굴을 아는 문지기들이 진해를 나가지 못하게 가로막았다. 건장한 문지기들이 봉으로 가로막자 진해는 제자리에서 발만 동동 굴러 댔다. 결국에는 가로지른 봉 사이로 기어 나가려고까지 했다. 문지기들은 조금 황당한 표정으로 진해를 다시 문안으로 던져 넣었다.
“형님들, 제발 나가게 해 줘요! 나 진짜 급하다구요!”
“안 됩니다.”
“아, 제발 좀!”
문지기들은 돌로 만든 사람들처럼 제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진해가 별소리를 다 해도, 나중에는 욕을 해도 그냥 눈썹만 꿈쩍거리고 말 뿐이었다. 남은 건 부친들 욕밖에 없었는데 그 말을 꺼냈다가는 몸이 성치 못할 것 같아 진해는 어쩔 수 없이 집 안으로 돌아왔다.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온 마당 주변을 서성거렸다.
“어이, 오 씨! 아직도 여기 이러고 있어? 아까 급하게 뛰어가더니. 약은 좀 얻었고?”
바깥채의 도박 친구 중 하나가 그런 진해를 불러 세웠다. 진해의 눈가가 초조함으로 붉어져 있었다.
“어쩌면 좋소. 문지기들이 나를 내보내 주지 않아!”
“뭐? 약을 얻으려면 안채로 가야지 왜 바깥으로 가?”
갑자기 진해의 머릿속에 반짝 불이 켜졌다. 하인들은 투전 패를 어떻게 들여왔을까.
“실은 내가 지병이 있거든. 병이 있으면 날 안 써 줄 것 같아서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어. 거의 다 낫기도 했고. 그런데 사형 이야기를 듣는 순간 단전에서 음기가 오소소 돋아나며 오한이 끼치고 머리털이 뻣뻣하게 굳어지는 게 아무래도 지병이 다시 도지는 것 같아. 이 지병은 우리 아버지들이 날 가질 때 치성을 드린 절의 주지 스님이 약초를 말려 배합해 준 특효약을 먹어야만 낫는데 내가 이 집에 들어올 때 그걸 그만 집에 놔두고 왔지 뭐야.”
“허어. 그렇게 중요한 걸 집에다 두고 오면 어떡해, 이 사람아!”
“정말로, 정말로 다 나아서 그런 거였다고! 사형 이야기를 들어 부정이 탄 게 틀림없어. 어서 그 약을 먹지 않으면 발작을 할 테고, 그럼 세 시진 동안 토사곽란을 일으키다 집사 어르신의 눈 밖에 나고 말 테야. 분명히 잘리게 되겠지. 내가 잘리면 늙으신 우부와 어린 아우는 누가 먹여 살리나! 빈털터리로 살게 되면 내게 장가올 사람도 없을 테고 어두침침한 집에서 결국 홀로 눈을 감게 될 거야. 젯밥을 못 얻어먹으니 굶주린 아귀가 되어 이 집 저 집 전전하며 해를 끼칠 테고, 그러면 저승사자가 나를 염라대왕의 앞으로 끌고 가서 심판을 할 테고, 소란을 피웠으니 분명히 지옥에―”
“그만, 그만! 이 친구는 발작을 입으로 하나. 뭔 말이 그렇게 많아?”
진해가 진중한 표정으로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르는, 전적으로 진해가 꾸민 거짓인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자 하인이 질겁을 하며 손사래를 쳤다. 약 한 번 못 먹어서 얻게 되는 결과치곤 참으로 궁색하고 비참하기 짝이 없는 말로였다. 하인은 문지기들을 흘끔 바라보더니 진해의 팔뚝을 잡고 조심스레 뒷마당 쪽으로 향했다. 진해를 왜 못 나가게 하는진 알 수 없었지만 하인들이 출입하는 뒷문에도 문지기가 있어 진해가 문으로 나갈 일은 요원한 듯했다.
그러나 궁하면 통한다고 진해가 예상한 대로 몇몇 하인들 사이에서만 통하는 비밀 문이 있었다. 이 집의 어르신이 무관인지라 군기가 바짝 들어 있는 문지기들에게 보여 줄 수 없는 물품을 들일 때 쓰는 문이었다. 그 문으로 건너편에 있는 동료에게 물건을 건네주고 자기는 다시 문으로 들어오는 식이었다. 하인은 주변을 살피며 진해를 데리고 낙상홍이 특별히 무성히 우거진 마당 쪽으로 갔다. 진해를 먼저 웅크리게 하고 하인도 슬그머니 몸을 웅크렸다. 엉금엉금 나무 사이를 기어가자 담벼락 아래를 커다란 나무판자로 가려 놓은 곳이 있었다.
“끼니 시간 안에는 돌아와야 해? 안채에 손님이 드신 후론 석반 이후에는 경비를 서니까. 내 말 알겠지?”
“정말 고마워, 내가 진짜, 이 은혜 꼭 갚을게! 혹시 나한테 무슨 일이 있거든 화살나무 옆 세 번째 담벼락 아래에 묻어 놓은 동전은 자네가 가져! 어차피 자네들 돈이니까.”
“재수 없게 왜 그딴 소릴 하고 그래! 시끄럽고, 급료 받은 다음에 그 돈이랑 합쳐서 한판 크게 벌이기나 하자고. 이번에는 진짜로 다 쓸어 버릴 테니까!”
하인은 진해에게 눈을 부라리며 나무판자를 치워 주었다. 몸을 움츠려야 겨우 들어갈 수 있을 만한 크기였다. 어깨가 끼는 듯했으나 좌우로 비비며 기어가자 조금씩 몸이 빠지기 시작했다. 진해의 발이 보이지 않게 되자 하인은 구멍을 다시 판자로 덮어 놓았다.
* * *
동십사의 집은 사거리에서 한 구역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개구멍이 그늘진 곳에 나 있어서 진해는 처음엔 이곳이 어딘지 알 수 없었으나 길눈 하나는 기똥차게 밝은지라 곧 지리를 파악하고 사거리 사형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형!! 형!!! 큰형!!!”
아니나 다를까, 진해가 거리가 도착하자마자 사형수 행렬이 지나가고 있었다. 머리가 산발이 된 채 함거(轞車)에 실려 가는 한일과 사람들을 헤치며 그 뒤를 쫓아가는 삼랑이 보였다. 삼랑은 옷고름이 아예 떨어졌는지 윗도리가 거의 다 풀어 헤쳐져 있었는데 그 사이로 누렇고 퍼런 멍들이 보였다. 함거를 호송하는 관군들이 삼랑이 다가올 때마다 사정없이 몽둥이질을 했다.
“마내야! 마, 내야!!!”
삼랑이 얻어맞다 고꾸라지는 걸 보자 함거에 실려 가던 한일이 크게 울부짖었다. 한일이라는 걸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는데 더욱 끔찍한 건 한일의 말을 알아듣기가 힘들다는 점이었다. 입가에 시커멓게 달라붙은 핏자국을 보는 것과 동시에 진해는 사람들 사이로 미꾸라지처럼 파고들며 삼랑의 곁으로 달려갔다. 입 안이 터졌는지 삼랑은 피 섞인 침을 뱉어 내고 있었다.
“지내, 나, 아냐, 아냐!!!”
“커헉, 헉, 큰형!!!”
그 많던 수하들이 지금은 다 어디 갔는지 모를 일이다. 진해는 삼랑을 감히 말리지도 못하고 그저 뒤를 쫓아가기만 했다. 그리고 마침내, 함거가 형장에 도착하였다. 관군이 일어서지 못하는 한일을 함거 밖으로 끌어내자 구경꾼들이 크게 함성을 질렀다. 남의 불행은 무료한 자들에게 좋은 구경거리였다.
“큰형!! 형, 아니잖아!! 형 아니잖아!!!”
“이 자식이!!”
삼랑은 한일이 관군에게 양팔을 붙들린 채 질질 끌려가자 한일에게 쫓아가려다 다시 관군에게 밀려나고 말았다. 삼랑이 그래도 포기하지 않자 관군도 이젠 본격적으로 삼랑에게 손을 대려 했다. 몽둥이로 가볍게 내려치려던 것과 달리 날이 선 창을 든 것이다.
“아이고!!”
그런 삼랑을 진해가 덮쳐 바닥에 내리눌렸다. 천만다행으로 찔리지는 않고 창대로 등을 얻어맞았다.
“아이구, 나리 봐주세요! 애가 아직 어려서 그래요! 아이고, 한 번만 봐주세요!”
“형, 안 돼, 형!! 씨발, 놔!!! 오진해, 놓으라고!!!!!”
“아구구, 아구구!!”
진해와 한삼랑이 얻어맞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한일에게 욕을 퍼붓던 관중들에게서 또다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진해의 등을 난타하던 관군들의 창대가 뚝 멎어 버렸다. 삼랑이 신음하는 진해를 밀치고 형장으로 달려가자 한일의 몸이 사형대에 몸을 굽히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한일의 머리는 통 속에 담겨 있었다.
“형…….”
삼랑이 신음하자 진해가 욱신거리는 몸을 이끌고 삼랑을 제 쪽으로 돌려세웠다. 돌려세우고는 그가 앞을 보지 못하도록 꼭 끌어안았다. 삼랑은 미려보다 한 살이 적었다. 통 속에 담긴 머리가 그런 진해와 삼랑을 바라보는 듯했다. 진해는 텅 빈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질끈 눈을 눌러 감았다.
* * *
진해는 삼랑을 데리고 잠춘동 집으로 돌아왔다. 옷을 다 풀어 헤친 채 넋이 나간 삼랑을 도저히 혼자 둘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독기가 다 빠진 삼랑은 정말로 가련하고 애처로우며 위험했다. 아직 애티가 가시지 않은 눈매며 흰 피부, 탄탄한 몸, 산뜻한 향 등. 한삼랑은 더러운 성질머리를 제하면 남들이 탐을 낼 만한 음인이었다. 그리고 세상에는 좋은 사람이 많은 만큼 나쁜 사람 역시 많았다. 넋을 잃은 삼랑을 흘끗흘끗 훔쳐보는 이들이 있었다. 처음에는 삼랑을 추피동에 데려다주려 했던 진해가 자기 집으로 데려온 것도 그 탓이었다. 추피동은 이 길거리보다 못하면 못했지 결코 나은 동네가 아니었다.
“삼랑아.”
“…….”
“에휴.”
참수를 당한 시신은 한 달이 지나거나, 혹은 그에 준하는 금액을 내지 않으면 거둘 수가 없었다. 형장에 버려진 채 사람들에게 멸시당하며 본보기가 되어야 했다. 얼마나 내야 하는지는 몰랐지만 결코 적은 금액은 아닐 터였다. 어쩌면 삼랑이 갖고 있는 여유 자금을 몽땅 털어야 할지도 몰랐다. 한삼랑은 추피동의 부자였지 바깥 거리의 부자가 아니었다.
“집에 먹을 게 없을 텐데.”
진해는 삼랑을 침상 위에 앉힌 뒤 담요를 둘러 주었다. 그 뒤에 바닥 저장고를 열어 뭔가 쓸 만한 게 있는지 살펴보았다.
“한 끼 정도는 먹을 수 있겠는걸?”
종종 집을 비우는 터라 저장고 안에는 잘 상하지 않는 재료들을 넣어 두었다. 진해는 싹이 난 감자와 자그마한 쌀 항아리, 아껴 먹는 육포 조각과 나뭇가지 한 더미를 꺼냈다. 그 후에는 먼지가 쌓인 화덕을 쓸어 깨끗하게 만든 뒤 빗물을 모은 항아리에서 물을 떠 왔다. 물이 끓자 진해는 우선 쌀을 안쳤다. 밥이 되는 동안 찬장 아래서 장아찌와 간장을 꺼냈다.
흘끗 돌아보니 삼랑의 입술에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넋 나간 눈동자는 공허하게 진해가 알 수 없는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진해는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다 밥 냄비에 물을 한 바가지 더 퍼 넣었다. 아무래도 밥보단 죽이 좋을 듯했다.
“삼랑아, 자, 아―”
감자와 육포를 잘게 찢어 넣고 간장으로 간을 한 쌀죽이었다. 진해는 후후 불어 아비 새처럼 삼랑의 입가에 죽을 대 주었다. 삼랑이 입을 벌리지 않자 엄지로 입술을 살짝 연 뒤 조금씩 흘려주었다. 따스한 것이 입술을 채우고 목구멍을 넘어가자 삼랑의 눈가에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우리 이러고 있으니까 꼭 옛날로 돌아온 것 같다, 그치? 예전에 너 어렸을 때 내가 이렇게 밥을 떠먹여 줬잖아. 네가 안 먹는다고 그래서.”
한일과 한이는 머리가 굵어지기 시작하자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집을 떠나 있는 일이 잦아졌다. 험한 일인지라 어린 삼랑을 데려갈 순 없었다. 그래서 삼랑을 혼자 두고 일을 갔다 돌아오니 어린 삼랑이 생쌀을 씹어 먹고 있었더랬다. 혼을 내려다가 문득 이 어린 것이 밥을 하려다 집에 불을 내면 어찌 되는 것인가라고 생각했더랬다.
“생각해 보면 참 웃기지. 너랑 미려가 나이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우리 집에 널 맡겨 놓고 가다니. 뭐, 그래도 나쁘진 않았어. 빈손으로 맡긴 것도 아니고. 나도 바깥일 하는 것보단 너희 둘을 보는 게 더 좋았으니까.”
진해가 해산에게 보모 일을 해 봤다고 이야기한 것은 바로 한씨 형제들로부터 곡식 자루와 한삼랑을 떠맡은 일이었다. 곡식 자루에 든 것은 삼랑이 먹을 양보다 조금 많은 분량의 곡식이었다. 일의 대가치고는 헐값이었지만 그래도 즐거운 추억이었다. 한씨 형제가 삼랑을 진해와 혼인시키기 위해 진해에게 혹처럼 달려 있던 강아지를 강제로 팔려 하기 전까지 진해는 삼랑과 꽤 잘 지냈었다.
밥을 다 먹인 후 진해는 면을 적셔 삼랑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얼굴만 닦아 주려고 보니까 손이랑 발도 엉망이었다.
“삼랑아, 너 손 참 예쁘구나. 형들이…… 너 예쁘다, 예쁘다 할 때는 몰랐는데.”
이제는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을 외면하며 진해는 삼랑의 손과 발도 다 닦아 주었다. 이왕 하는 김에 헐벗은 등이랑 배도 닦아 줬다. 어찌나 구르고 얻어맞았는지 면이 순식간에 흙투성이가 되었다. 진해는 면을 물에 담가 헹군 뒤 삼랑의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문신이 덩굴처럼 엉겨 있는 부분이었다. 진해가 가슴을 닦아 내려 하자 하얗고 잘 뻗은 손가락이 진해의 손목에 가닥가닥 엉겨들었다.
“…….”
“…….”
발갛게 충혈된 눈이 진해의 눈을 마주 보고 있었다. 머리칼처럼 색소가 옅은 눈동자 속에 깊은 상실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낭패였다. 진해는 사람을 잘 위로하지 못했다. 진해가 위로하면 위로할수록 사람들은 더 슬프게 울었다. 진해는 사람들이 우는 게 싫었다. 특히 자신이 아는 얼굴들이 상처 입는 게 싫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진해도 상처 입었다.
진해는 자신을 난도질하는 예리한 감각들이 무서웠다. 진해처럼 배워 먹지 못한 겁쟁이는 맞서지 못하고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가슴속에 고여 있던 것이 슬그머니 끓어올랐다. 비뚤어진 변태성을 끌어내 가면처럼 덮어썼다. 삼랑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한삼랑은 진해의 취향을 알고 있었다.
진해는 누렇게 멍 자국이 피어난 목덜미에 손을 올리고 손가락으로 그것을 지긋이 내리눌렀다. 아플 것이 분명한데도 삼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상처 입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진해의 몹쓸 취향은 가련하기 짝이 없는 모습에 환호하다가도, 이것이 정녕 맞는 일인가라는 고민을 반추했다. 마침내, 결심한 진해가 이를 악물었다.
[쾅!]
그러나 진해의 결심은 헛일이 되고 말았다. 진해가 한삼랑에게 고개를 숙이려는 순간 문짝이 부서질 것처럼 큰 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사실 반쯤 부서지기도 했다. 경첩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문짝 가운데로 도도하면서도 화려한 향이 불길처럼 거세게 솟아올랐다.
“한삼랑, 이 도둑고양이 같은 놈이……!”
화사한 향의 주인은 향에 버금가는 화려하고 요염한 외양을 갖고 있었다. 쇄골이 드러난 옷자락 사이로 사슴처럼 매끈한 목덜미가 돋보였다. 넉넉한 옷자락을 펄럭거리며 진해와 함께 이 집에서 가장 오래 살았던 양인이 화가 난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다짜고짜 소매를 걷어붙이더니 있는 힘껏 삼랑을 주먹으로 후려갈겼다.
“큭……!”
“악, 삼랑아!”
“이 개자식이, 어딜 기어들어 와! 이 집은 형이랑 내 집이야!! 너 같은 게 들어올 집이 아니란 말이야!!”
진해가 미처 말릴 새도 없이 이번엔 삼랑의 다른 쪽 뺨으로 미려의 주먹이 꽂혀 들었다. 두 대째 맞자 삼랑도 제정신이 들었는지 세대 째는 손을 들어 미려의 주먹을 막아 냈다.
“네 집? 하하, 뻐꾸기 새끼가 염치를 알아야지! 남의 초야를 망쳐 놓고 염치도 없냐, 하하! 하하하!”
“닥쳐!! 당장 나가!! 형한테서 떨어져서 추피동이건 어디건 당장 꺼지라고!!”
미려와 삼랑이 상당한 장신인지라 둘이 엎치락뒤치락 싸우기 시작하자 침상은 순식간에 엉망이 되기 시작했다. 진해는 얼떨떨한 채로 침상 밖으로 굴러갔다가 삼랑이 아직 상중이라는 걸 떠올렸다. 또한 삼랑이 제 형들만큼이나 주먹질에 소질이 풍부하다는 것 역시 떠올렸다.
“얘, 얘들아! 싸우지 마라!! 싸우지 마!!”
누가 누구를 때리는지 모를 만큼 엉망이었다. 미려가 팔다리를 휘두를 때마다 넉넉한 옷자락이 진해의 시야를 가렸다. 진해는 허겁지겁 두 사람을 말리려 들었다.
그런데 이놈들은 저랑 똑같은 걸 먹고 자랐으면서 어려서부터 기운이 장사 저리 가라였다. 같이 살 적에도 묘하게 신경전이 잦았었다. 육탄전을 벌이면 진해가 대여섯 살이나 연상인데도 말리기 힘들었다. 하물며 다 큰 지금은 어련할까.
“아이고, 미려야! 얼굴 맞으면 안 돼!! 삼랑아, 허리, 허리 조심해라! 아까 멍이 심하게 들었던데!”
풍문에 의하면 개들은 주인이 제 이름을 부르면 저를 응원하는 줄 알고 더욱 심하게 싸움에 임한다고 하였다. 삼랑은 그렇다 치고 미려는 아명이 강아지라 그런지 진해가 제 이름을 부르자 안광을 빛내며 삼랑에게 죽일 듯이 달려들었다.
“얘들아, 제발, 그만, 그만 싸워……! 아이쿠!!!!”
결국 둘을 뜯어말리려 다가간 진해가 삼랑인지 미려인지 모를 누군가의 다리에 걷어차이고 말았다. 길게 잘 뻗은 다리에 힘이 실리자 진해는 짐짝처럼 저 멀리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혀, 형아!! 큭!!”
진해가 비명과 함께 넘어지자 미려가 당황해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그사이에 삼랑이 미려의 뺨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미려는 반동으로 삼랑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아구구, 아구구…….”
어찌나 세게 걷어차였는지 진해는 애벌레처럼 몸을 웅크린 채 아픈 신음만 토해 냈다. 미려는 삼랑을 거칠게 밀치고 찢어진 옷자락을 휘날리며 급히 진해에게 달려갔다.
“형아, 형아 괜찮아? 아, 어떡해. 우리 형아 아파서.”
“퉷, 그러기에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게 괜히 껴 가지고.”
“한삼랑, 그 입 안 닥쳐?”
“꼬우면 닥치게 해 보든가. 뻐꾸기 새끼야?”
“이 자식이.”
“아고고, 아고고, 미려야. 형아 배 아프다, 배 아퍼.”
“형아……!”
다행히 급소는 피해 갔는지 통증은 시간이 지나자 가라앉았다. 그러나 진해는 미려가 다시 삼랑과 싸움이 붙을까 봐 일부러 아픈 척 미려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미려는 진해가 끙끙 앓는 소리를 내자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을 달며 진해의 등을 끌어안았다. 침상 위에 앉아 있던 삼랑이 크게 코웃음 쳤다. 그제야 평소의 한삼랑 같았다.
“에구구, 에구구, 미려야.”
“응, 나 여기 있어. 형아.”
“아이구, 아무래도, 에고고.”
“응, 듣고 있어.”
“아이구구구, 삼랑이를, 아이고오오오.”
“…….”
“우리 집에, 아야야야야, 당분간 둬야, 아야야, 할 것 같은데…….”
“…….”
“아이구우우우, 어떻게, 안…… 될까?”
미려의 팔뚝을 꼭 쥔 채로 진해는 슬그머니 눈을 들어 올렸다. 아니나 다를까 진해가 말을 끝내자마자 방금까지 조롱조롱 눈물을 달고 있던 눈매에 겨울 한파와 같은 것이 휘몰아쳤다.
“저, 삼랑이가 아직 어리고 상도 치러야 하고…….”
“혼자서 하라 그래. 반년 후면 성년이야. 추피동에 모아 둔 것도 많잖아.”
“시신을 두 구나 인수하고 장례도 치러야 해, 응? 쟤가 형들 있을 때는 괜찮았지만 혼자서는 좀 그렇잖아.”
“무슨 소리야. 추피동은 쟤 혼자 일군 건데. 그리고 형이 왜 한씨 장례를 신경 써? 형, 쟤랑 우리는 남이야. 형은 형 동생인 나만 신경 쓰면 되는 거야.”
“아니 또 어떻게 사람이 아는 얼굴을 그렇게 매몰차게 모른 척하니.”
“……한삼랑한테 형들이 없어져서 혹한 게 아니고?”
“어, 뭐?”
“형은 전부터 쟤 좋아했잖아. 많이 먹으라고 형 먹던 거 덜어서 쟤 주고 그랬잖아. 그리고 형은, 음인 좋아하잖아.”
“아니 언제부터 싫어하지 않는다는 게 좋아하는 게 된 거야?! 덜어 준 건 삼랑이가 어릴 땐 워낙 말라서 안쓰러워서 그런 거였고, 음인이라고 무조건 좋아하는 것도 아니야……!”
진해가 의견을 굽히지 않자 차갑게 언 미려의 눈매가 서서히 일그러졌다. 그 일그러짐은 미려의 분노가 극에 달할 때 생기는 것이었는데 진해가 가장 참혹하게 여기는 현상 중 하나이기도 했다.
“형아는, 어떻게, 어떻게, 우리 집에…….”
일그러진 눈매에 빠르게 습기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요염한 눈매가 서글프게 떨리고 흑요석처럼 맑은 눈동자에 잘랑잘랑 물이 맺혔다.
“미, 미려야, 잠깐만, 내 말 아직 안 끝났어, 응? 잠깐만 내 말 좀……!”
“미워, 형아, 정말 미워……. 형아, 맘대로 해!! 나, 이젠 다시 집에 안 올 거야!!”
“미려야, 미, 강아지야!! 강아지야!!!”
미려는 말을 마치자마자 눈물을 흩뿌리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아, 아아……. 큰일 났네. 진짜 화났나 보다…….”
미려가 나가자마자 부서진 문짝이 쿵 소리와 함께 차례대로 바닥에 널브러졌다. 부서진 문짝도 문제였지만 미려가 화가 난 게 더 문제였다. 미려는 화가 극에 달하면 분을 못 이겨 엉엉 울곤 했는데 식음을 전폐하고 삼 일을 넘게 운 적도 있었다. 어린 것이 밥도 먹지 않고 우는 모습은 진해를 미치기 일보 직전까지 몰고 갔었다. 그 울음이 대개 진해를 위해 우는 울음이라 더욱 그랬다.
“참 나. 오진해 너도 참 어지간하다. 저 뻐꾸기 새끼는 아비도 찾았다면서 왜 우리 강아지 이 지랄을 하고 있는 거야?”
허망하게 앉아 있는 진해를 보며 삼랑이 침상 아래로 발을 뻗었다. 목을 우두둑거리며 몸을 푸는 듯하더니 팔이 짧은 진해의 옷을 걸쳐 입었다.
“나 간다. 서방님은 간이 센 걸 좋아하니까 다음엔 소금 좀 더 치고.”
“뭐? 가긴 어딜 가? 너 혼자 뭘 어쩌려고!”
“저 새끼가 이 집에 나 있는 거 싫다잖아. 너 저 새끼 내칠 수 있냐? 그리고 나랑 아무 일도 없을 자신 있어?”
“응.”
“씨발 새끼가. 너 저 새끼 들어오기 전까지 나한테 뭐 하려 했는지 기억 못 하냐? 대가리는 장식인가.”
진해는 삼랑의 몸을 닦던 때를 떠올리고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냥 삼랑이 다 잊어버렸으면 해서 그런 거였는데 지금 생각하니 여간 미친 짓이 아니었다. 삼랑이는 아직 성년이 되지도 않았는데, 그리고 진해는 지금 해산 도련님과…….
‘응? 그러고 보니 도련님한테 뭐가 있었던 거 같은데 기억이 안 나네. 이것도 수면침 때문인가. 아니, 것보다 나랑 도련님은 뭐지? 놀이 동무? 놀이 동무지? 그런 거지?’
한일의 처형 때문에 잊고 있던 도련님이 떠오르자 진해는 갑자기 심사가 복잡해졌다. 어쩐지 큰 잘못을 저지른 것만 같았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진해와 해산 도련님은 무어라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었다. 해산 도련님을 만나기 전까지 진해는 자신과 비슷한 취향의 놀이 동무들을 만났었고, 그들 사이에서 이런 놀이는 그저 어른의 놀이에 불과할 뿐이었다.
‘놀이치곤 자주 넣은 것 같기도 해. 보통은 안 넣고 놀기만 하니까. 으으. 뭐지, 뭐지?’
그런데 지금 진해는 해산 도련님을 떠올리며 죄스러운 감정에 시달리고 있었다. 해산 도련님과 정식으로 교제하는 것도 아니고, 놀이 상대를 하기로 한 것도 아니면서, 그저 해산 도련님을 속여 그 몸을 맛본 것뿐이면서 바람을 핀 듯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 그래야 오진해지. 꼴리는 창놈 새끼. 상 치르면 그때 다시 보자. 그땐 네 변태 같은 짓거리를 참아 주지.”
“으으……, 그래도 혼자 가는 건!”
그사이에 삼랑은 벌써 문가에 서 있었다. 누렇게 멍이 든 피부가 잊히지 않아 진해는 삼랑의 뒤를 쫓아갔다. 한삼랑은 진해를 쓱 보는가 싶더니 마당으로 발을 디뎠다.
“같이 가!”
진해는 화덕에 물을 부으랴, 부서진 문짝을 세워 놓으랴 바빠졌다. 삼랑은 진해가 따라오거나 말거나 제 갈 길을 가는 중이었다. 다리가 길어서 그런지 빠르기도 엄청 빨랐다. 진해는 허겁지겁 삼랑의 뒤를 따라잡았고 삼랑은 그런 진해를 쫓아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네 똘, 그, 부하 양반들은 다 어디 갔어? 난 네가 혼자 있어서 깜짝 놀랐어.”
“걔들? 몰라, 나도. 도련님인지 나발인지가 광에 가둬 놓고 아는 게 있으면 다 털어놓으라고 하더라. 내가 아는 게 없으니까 손을 대진 않더만. 그놈들도 그때 몇 놈 잡혀 들어갔는데 재수 없으면 저지른 게 뽀록나서 갇히거나 했겠지 뭐.”
확실히 그 양반들이라면 그럴 법도 했다. 진해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라리 지금은 삼랑이 곁에 없는 게 나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막말로 배은망덕한 놈들이 나쁜 마음을 먹고 삼랑이의 뒤통수를 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으니까.
[똑, 또독, 똑, 똑, 또옥.]
그런 진해의 소원을 하늘이 들어준 것일까. 삼랑이 진해가 두드렸던 것과 다른 방식으로 담을 두드렸는데 문지기는커녕 구멍으로 내다보는 인기척 하나 없었다.
“이 새끼들이 빠져 가지고. 실컷 먹이고 입혀 줬더니 집구석엘 안 기어들어 오고 어딜 도망친 거야?”
한삼랑은 짜증 섞인 소리를 뱉으면서 바닥을 더듬기 시작했다. 원래는 안에서 여는 문을 밖에서 열 생각인 듯했다. 하긴 토실에 항상 사람이 있으란 법은 없었다. 드물었지만 이런 식으로 다 잡혀갈 일도 있을 것이고 단체로 회식을 가는 일도 있을 것이고.
“어……?”
삼랑이 손을 더럽히며 흙을 파내 문을 찾아내고, 아는 사람이나 겨우 알 법한 작은 틈에 손가락을 넣어 문을 들어 올리려는 그때였다. 묘한 기운이 진해의 등줄기를 훑었다. 근래 진해의 코를 강렬히 자극했던 냄새가 자그마한 문틈 사이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을 법한 매캐한 냄새가 진해의 육감을 강하게 자극했다.
“피해!!!!”
진해는 문이 열리는 순간 삼랑을 끌어안고 납작 엎드렸다. 문이 제 무게를 못 이기고 아가리를 벌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불기둥이 거세게 솟구쳤다. 농염한 열기가 진해의 등을 녹여 버릴 듯했다. 불기둥이 사라지자마자 시커먼 연기가 온 사방을 메우기 시작했다. 삼랑은 쿨럭쿨럭 기침을 하는 진해를 일으켜 세우곤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제 본거지였던 구멍을 들여다보았다.
“씨발, 씨발……!”
매캐한 연기 속에 살 익는 냄새가 섞여 있었다. 삼랑은 물론이고, 정신을 차린 진해도 맡을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한 냄새였다. 만약 진해가 삼랑을 데리고 오지 않았다면 삼랑 역시 저 속에 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사, 삼랑아! 가자, 여기 있으면 안 돼! 얼른, 얼른!”
“가긴 어딜 가! 야 이 시발 새끼들아!! 한삼랑이 여기 있다!! 죽이고 싶으면 죽여, 이 개새끼들아!!!”
“삼랑아!”
불이 나자 인적이 드문 추피동에도 슬금슬금 인기척이 나기 시작했다. 진해는 발광하는 삼랑의 입을 틀어막으며 있는 힘껏 추피동 밖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잠춘동 집은 문짝이 부서졌고, 또 미려가 올 수도 있었다. 미려가 화를 내면 화가 풀릴 때까지 빌면 되지만 혹시라도 미려가 이 일에 얽힐 수도 있었다. 진해는 식은땀을 흘리며 삼랑을 데리고 최대한 복잡하고 좁은 길로만 파고들었다.
추격이 있더라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돌고 또 돌아 진해가 도착한 곳은 사거리에서 좀 떨어진 어느 한적한 골목이었다. 하늘에 어느새 주홍빛이 어리고 있었다. 삼랑은 담벼락에 주저앉아 머리를 끌어안고 있었는데 마지막으로 본 한이의 모습과 조금 닮아 있었다.
진해는 입술을 질겅거리다 담벼락 앞에 무릎을 꿇었다. 으슥한 담벼락의 구멍에는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법한 구멍이 나 있었다. 진해는 손을 넣어 구멍을 막은 판자를 치우고 삼랑을 구멍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자신 역시 구멍 속으로 파고들었다.
진해가 삼랑을 데려온 곳은 다름 아닌 동십사의 저택이었다.
* * *
“그래서 내 허락도 없이 밖을 나갔단 말이냐? 납치당하고 수면침도 맞았던 녀석이 겁도 없이 함부로 밖을 싸돌아다녀!”
저녁이 되면 경비가 강화된다는 게 거짓이 아니었는지 진해는 안채에 들어가기도 전에 붙잡혔다. 개구멍은 안 들켰지만 한삼랑이 경비를 때려눕히는 바람에 온 집안 하인들이 다 몰려들었다. 난폭하게 날뛰는 삼랑과 삼랑을 말리던 진해는 침입자로 몰려 재갈을 물고 포박당한 채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야 했다. 진해는 왜 이 집 나무들이 굵고 튼실한지 그 이유를 알게 된 것 같았다.
“전 그냥 관아에 가서 제가 보고 들은 것을 고하면 사형은 면할 것 같아서…….”
“넌 내가 지금까지 어디 있었다고 생각하는 거냐?”
“……모르겠는데요!”
“후우. 됐다. 너한테 좀 더 신경을 쓰지 못한 고의 잘못이다. 너를 차라리 내 궁으로 데리고 갔어야 했어.”
몽둥이 타작을 당하기 직전에 노집사 가 진해를 알아보고 동십사와 함께 있던 해산 도련님을 모셔 왔다. 영 집사 역시 해산 도련님과 함께 왔는데 진해가 없어진 탓에 해산 도련님과 동십사에게 극심한 문초를 받고 있던 참이었다.
“그나저나 한삼랑과 꽤 돈독해진 모양이로구나. 분명 한삼랑과는 혼인하기 싫다고 이야기한 것 같았는데.”
“혼인은 하기 싫지만―”
“읍, 으읍!!”
“아직 성년도 되지 못한 것이 혼자 장례를 치르게 둘 수는 없지요. 게다가 이젠 돌아갈 집도 없구요…….”
진해는 해산 도련님의 얼굴을 처음 보았을 때 다시는 도련님에게 개기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화가 난 해산 도련님의 얼굴은 망치로 쳐도 부서지지 않을 만큼 단단하기 그지없었다. 꼭 성벽의 제일 단단한 부분처럼.
어쨌거나 해산 도련님은 너그러우신 분이라 진해에게 변명할 기회를 줬다. 진해는 도련님의 마음이 변해 저를 몽둥이질할까 봐 있는 거 없는 거 몽땅 털어놓았고 해산 도련님은 추피동에 일이 생겼다는 소릴 듣자 그제야 얼굴이 좀 풀어졌다.
“그럼 넌 아는 동생을 착한 마음으로 도와준 것뿐이지. 그렇지?”
“네! 그렇습니다! 확실합니다!”
“가여운 것. 그런 줄도 모르고 다들 널 침입자로 오인했구나. 이보거라, 진해를 내려 주거라.”
“예, 마마.”
해산 도련님은 진해의 우렁찬 대답이 마음에 든 것 같았다. 빙긋 웃으며 하인들에게 진해를 내리라고 명했다. 얼굴에 피가 쏠린 진해는 바닥에 발을 딛자 시야가 어지러웠다. 비틀거리고 있자 도련님이 손을 내밀었고 진해를 다른 이들이 보는 앞에서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조심해야지.”
“감사합니다, 도련님. 좀 어지럽네요.”
“그래, 얼른 방으로 들어가서 시원한 걸 마시자꾸나. 연기를 마셨느냐? 목이 쉰 것 같은데.”
“네, 좀 마셨어요.”
“저런. 그럼 아니 되지.”
해산 도련님의 품에서 머리를 쓰다듬어지자 진해는 저를 감싸던 모든 근심이 일시에 사라지는 듯했다. 해산 도련님의 가슴은 넓고 탄탄하면서도 굴곡이 있어서 종일 베고 있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진해는 저도 모르게 헤벌쭉 웃으면서 고개를 비볐다. 해산 도련님은 마치 누구에게 보여 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진해를 더욱 깊게 끌어안았다.
“…….”
그 모습을 뒤에 매달린 삼랑이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삼랑의 눈동자 속에 온갖 욕설이 휘몰아치는 듯했다. 분명 오진해 이 아랫도리 가벼운 놈으로 시작하는 욕설일 것이다.
“아, 도련님!”
“응? 왜 그러느냐?”
“저, 청이 하나 있는데 들어주시면 안 될까요?”
“네가 청을? 후후, 말해 보거라. 네가 말하는데 무얼 못 들어주겠느냐.”
하지만 도련님의 부드러움이 평소보다 과하다 싶을 정도가 되자 진해가 그것을 눈치채고 도련님의 품에서 빠져나오려 했다. 물론 도련님이 진해의 뒤통수를 틀어쥔 덕에 향내 풀풀 나는 가슴팍에 턱을 묻고 있어야 했지만.
“음, 그게……. 헤헤, 저기 당분간 삼랑이를 제 방에 재우면 안 될까요? 공짜로 먹이시는 게 싫으면 제 일당으로 삼랑이 밥값을 해 주세요! 저야 뭐 알아서 찾아 먹지요!”
“…….”
“헤헤, 안, 될까요?”
“…….”
진해는 자신을 순식간에 나무에 매다는 군졸들을 보며 이 집이야말로 삼랑이를 숨기기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바글바글한 집이니 수면침을 쏴도 누가 금방 발견해 줄 터였다.
해산 도련님은 진해의 부탁을 듣자 꼭 미려 같은 눈을 했다. 미려랑은 온도가 다른 서늘함이 해산 도련님의 입매를 굳혀 놓았다. 진해는 해산 도련님의 마음이 바뀔까 봐 얼른 손을 뻗어 해산 도련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끌어안고는 아주 적극적으로 제 뺨을 도련님의 가슴에 비벼 댔다. 개라면 꼬리를 흔들어 애교를 부리겠지만 진해에겐 꼬리가 없어 그런 것이었다.
“……요망한 놈.”
미려가 저를 올려다보던 걸 흉내 내며 올려다보고 어린애처럼 뺨을 비비자 해산 도련님의 입매가 슬그머니 휘어졌다. 진해의 정수리에 살짝 입을 맞추더니 아프지 않게 볼을 꼬집었다. 부탁을 위해 부린 애교건만 볼을 집힌 진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진해는 어딘지 모르게 충족되는 감각에 잠겨 마냥 도련님에게 응석인지 애교인지 모를 것을 부려 댔다.
“동십사.”
“예.”
“저놈을 내려 일단 네가 데리고 있거라. 저리 봬도 주먹깨나 쓰는 놈이니라.”
동십사는 도련님의 명을 받자마자 병졸을 시켜 삼랑을 끌어 내렸다. 그러나 진해와 달리 재갈과 포박을 풀어 주지 않았고 그 결정은 백번 맞는 것이었다. 삼랑이 땅에 발을 딛자마자 군졸 하나에게 박치기를 했던 것이다.
“헉, 삼랑아!”
“뭣들 하느냐! 마마 앞에서 소란스럽게!”
다행히 한삼랑보다 동십사가 한 수 위였다. 동십사는 날뛰는 닭을 잡는 닭 장수 처럼 능숙하게 삼랑의 뒷덜미를 잡아챘고 쩔쩔매는 군졸들을 대신해 자신이 직접 삼랑을 끌고 가기 시작했다.
“아이고, 살살, 조금만 살살 끌고 가지. 아직 장가도 안 간 애 몸에 상처가 나면 안 되는데! 쟤는 속살이 하얘서 흉이 유독 잘 보이는데!”
“…….”
“아야야! 도련님, 저 허리, 저 허리!!”
삼랑이 시야에서 멀어지기도 전에 해산 도련님이 진해의 허리를 콱 틀어쥔 채 방으로 향했다. 손아귀 힘이 어찌나 세던지 허리가 몽땅 뜯어지는 줄 알았다. 하긴 이렇게 손힘이 세니까 그 괴상한 채찍도 다룰 수 있을 것이다. 진해는 죽는소리를 반복하며 해산에게 반쯤 들려 갔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한참 말이 없었다. 진해는 아픈 허리춤을 문지른다고 할 말이 없었고, 도련님은 다른 이들 앞에서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이제야 알게 된 것 같았다.
이 집의 사람들은 자신이 해원공 안해산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 앞에서 외간 양인을 끌어안고 한껏 귀여워했다. 부지불식간에 귓불이 후끈 달아올랐다. 제 가슴 사이에서 저를 올려다보던 올망졸망한 눈동자를 바라볼 때는 그것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었다.
“저 근데 도련님 아까부터 궁금했는데요.”
“……뭐냐.”
“사람들이 왜 도련님한테 마마라고 그러는 거예요? 도련님 성함은 해자, 산자잖아요. 혹시 마마가 도련님 애칭이세요? 무슨 황자마마님 같네요.”
“…….”
해산은 진해의 말을 듣자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진해 저 녀석은 어떨 때는 짐승 같은 육감을 발휘하면서 이럴 때는 무슨 청맹과니보다 못하게 굴었다. 해산은 말똥말똥 바라보는 눈을 들여다보며 고민했다. 그리고 잠깐의 고민 후 해산은 진해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이야기해 주기로 했다. 언제까지 숨기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자신의 정체를 들어야 이 녀석의 엉덩이가 좀 얌전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진해야.”
“네.”
“내가 이름을 가르쳐 줄 때 했던 이야기를 기억하느냐.”
진해는 아리송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가 켕기는 표정이었다.
“그때 내가, 아니 고가 네게 성은 나중에 가르쳐 주겠다고 한 것을 기억하느냐?”
“예에…….”
찜찜한 표정을 한 진해를 마주하며 해산이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고의 성은 안이고, 봉호는 해원을 쓰고 있다. 대월국의 천자가 바로 나의 좌부시니라.”
해산이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진해는 반쯤 넋을 놓아 버렸다. 천자라는 단어가 나오자 자리에 스르륵 주저앉아 버렸다. 진해가 놀랄 줄은 알았지만 저 정도로 놀랄 줄은 몰라 해산은 조금 멋쩍어졌다. 동시에 진해가 저를 너무 겁을 내면 어쩌나 걱정이 됐다.
“우와아아……. 굉장해, 황자마마처럼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도련님이 정말 황자마마셨다니…….”
그리고 해산이 예상한 대로 진해는 해산과의 거리를 순식간에 훅 벌려 버렸다. 진해는 비척비척 일어나 바닥에 납작 엎드리며 황족인 해산에게 예를 갖춰 보였다.
“천세 천세 천천세! 소인이 감히 태자마마를 몰라뵙고 불경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아둔하고 무식한 소인을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소인은 그냥…….”
예상한 광경 그대로였지만 해산의 기분은 착잡하기 짝이 없었다. 해산은 진해의 등을 보는 게 어색했다. 진해 같은 평민과 해산이 얼굴을 마주할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단, 그것은 진해가 어디까지나 평민으로 있을 때의 이야기.
“일어나라. 그리고 태자마마가 아니라 황자다. 고는 공식적으로 해원공에 봉해져 있다. 앞으로는 실수하지 않도록 해라. 그리고 흠, 흠! 너는 고의 첫, 시침을 들었으니…… 고와 둘만 있을 때는 특별히 예를 갖추지 않아도 좋다.”
“네!? 첫 시침이요?!”
“……그래.”
해산은 진해를 비롯한 모두에게 숨겨 온 사실을 토해 냈다. 진해는 자신이 황제의 단 하나뿐인 자식의 첫 시침을 들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예고 자시고 할 것 없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황자가 아니라 평민이라 할지라도 처음을 함께했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진해는 놀이를 할 때도 절대 처음인 자와 함께하지 않았다. 제 마음이 물렁한 걸 알아 책임을 지라 하면 그대로 책임을 질 걸 알고 있었으니까.
“우와, 거, 거짓말! 거짓말이야!”
“네 이놈!”
“헉.”
“지금 고의 말을 거짓이라 한 것이냐!”
“아니, 그건 아니고요……. 아니, 황자님인데 왜 저 말고 다른 상대가 없어요? 보통 황족이라고 하면 측실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거 아니에요? 부자들은 다 그렇게 하던데!”
“이런 고얀 놈을 봤나. 감히 고를 그런 허랑방탕한 놈들과 비교하는 것이냐? 그게 아니면 고의 시침을 든 게 불만이라는 게야!”
“아니요……. 그냥, 깜짝 놀라서…… 그냥 놀라서 그렇습니다. 네, 그렇구말구요…….”
물론 해산의 시침을 든 게 불만은 아니었다. 해산은 진해가 본 것만으로도 품고 싶어질 정도로 훌륭한 사내였고, 그와의 잠자리 역시 진해가 자 본 것 중 손에 꼽힐 만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다짜고짜 황족이라니. 그것도 음인 황족이라니!
지금의 황제는 양인이었지만 해국과의 전쟁 전에 월나라는 무조건 음인 적장자 계승 원칙의 국가였다. 태를 통해 태어난 자식만이 적법한 황통을 이었다고 보았다. 지금의 황제는 해국과의 혼교 때문에 오른 것이었다. 황제는 물론이고 위로는 대소 신료부터 아래로는 평민들까지 다음 황제는 당연히 음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으으…….”
무거워도 너무나 무거운 현실 앞에 진해가 신음하고 있자 그를 바라보는 해산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 발랑 까진 놈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아서였다. 한삼랑의 말에 의하면 이때까지 묶이지 않고 자유롭게 팔랑팔랑 아랫도리를 휘두르고 다녔으니 필시 몸이 묶이게 되어 망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해산에게서 벗어날지 잔머리를 굴리고 있을 것이다.
“진해, 일어나거라. 일어나서 이리 가까이 오너라.”
해산은 다가온 진해를 정원에서처럼 꼭 끌어안았다. 꼭 끌어안고 진해의 어깨에 뺨을 비볐다. 진해는 좀 망설이는가 싶더니 자신 역시 정원에서처럼 해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맞닿은 체온은 아까 전과 똑같았고, 풍기는 향도, 폭신한 가슴팍도 아까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해산은 변한 것이 없었다.
“고가 무서우냐?”
“모르겠습니다. 아까는 무서웠는데 지금은 아니에요. 해원공 마마는 해산 도련님이고, 해산 도련님은 절 지켜 주신다고 하셨으니까요.”
“너는 정말……. 그래, 진해. 고는 변한 것이 하나 없다. 고는 네게 영원히 정체를 숨길 수도 있었어. 고의 신분을 밝힌 까닭은 네가 단지 조심하길 바라서였다. 이번 일 역시 고를 노린 것이니 다음에도 이런 일이 없을 거란 보장이 없어. 거기다 고는 본의 아니게 너를 연루시켜 버렸지.”
“본의 아니게 제가 마마께 오지랖을 부린 거지요. 마마는 아무것도 안 하셨어요.”
진해는 해산이 자신을 자책하는 듯해 보이자 얼른 소릴 높여 대꾸했다. 해산을 위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해산이 나중에 해독법을 속인 괘씸죄를 물어 진해를 벌할까 그게 겁이 나서였다. 해산은 내뺄 줄 알았던 진해가 저를 감싸자 눈매가 한껏 부드러워졌다.
둘은 그렇게 한참을 안고 있었다. 진해는 머릿속으로 망했다와 어쩌지라는 생각을 반복했고, 해산은 자신을 둘러싼 여러 가지 상황들과 진해의 안위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밤이 늦자 진해는 해산과 함께 한 침상에서 잠이 들었다. 동십사가 해산에게 저녁 문안을 와도 해산은 진해를 보내지 않고 가만히 곁에 세워 놓았다.
동십사는 그것만으로도 진해가 해산에게 어떤 위치인지 아는 듯했다. 해산이 진해의 손을 그러쥐자 동십사의 눈동자가 근심으로 잔뜩 얼룩졌다. 진해는 그것도 모르고 침상의 푹신함에 감탄할 뿐이었다. 해산의 첫 양인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자 어쩐지 해산에게 잘해 줘야 할 것 같아 해산에게 베고 자라며 불쑥 제 팔을 내밀기까지 했다.
‘마마 머리 단단하시구나.’
팔베개는 생각 외로 힘든 일이라 진해는 새벽이 되자 슬그머니 베개와 제 팔을 바꿔치기했다. 미려가 아닌 누군가와 잠만 자는 밤은 오랜만이었다. 진해는 새벽빛에 물든 해산의 얼굴을 구경하다 깜박 잠이 들고 말았다.
탈정고로 인한 소동은 그렇게 마무리되는 듯했다. 탈정고를 제조한 낭중은 죽고, 탈정고를 반입한 한씨 형제도 죽었다. 해원공은 탈정고를 복용했으나 변변한 추문 없이 평소의 본인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다만 달라진 것은, 잠춘동에서 빈둥빈둥 한가하게 살아가던 오진해가 소용돌이와 같은 운명의 급류에 휩쓸렸다는 점이었다. 오진해가 귀애하는 정미려와, 오진해가 친애하는 한삼랑, 오진해가 연애하는 안해산의 운명 역시 달라지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이 시각, 한이의 목을 벤 괴한이 어느 대갓집 앞에 도착하였다. 커다란 저택은 규모와 달리 괴괴하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때가 탄 삼베 조각이 그 원인이었다. 저택의 구석구석에 상을 뜻하는 하얀 천 조각들이 깃발처럼 거칠게 나부꼈다.
복면을 쓴 채 허리를 약간 구부정하게 구부리고 있던 괴한은 대문에 들어서자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한일과 한이는 이 괴한이 자신들에게 일을 사주한 의뢰인의 감시역이라고 생각하였는데 그것은 그들이 아주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버님.”
미려와 대결할 때는 늙은이처럼 쉰 목소리가 누군가의 앞에 서자 명료한 중년인의 것으로 변모했다. 괴한이 마주한 누군가가 바로 한씨 형제에게 일을 사주한 장본인이었다. 이 탈정고 소동의 배후라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살아 있었군, 자네.”
수염과 머리칼이 하얗게 센 노인이었다. 하나 젊은이 못지않은 체격과 형형한 안광을 하고 있었다. 노인의 뒤에는 커다란 창과 검이 걸려 있었다. 그것 외에도 여러 가지 무기가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무려 황금 날을 가진 도끼였다. 황금 날의 도끼는 황제의 상징. 이 노인은 황제에게 황금 도끼를 하사받은 공신이었으며 이름을 강절곤(姜切坤)이라 했다.
강절곤은 해국과의 전쟁 당시 월국의 농성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그는 고산국과 연합해 해국군의 보급을 끊었으며 극히 적은 병력으로 몇 배는 넘는 해국군을 섬멸했다. 강절곤이 없었다면 월국은 진작 황제 자리를 해국에게 넘겨주었을 것이다. 현 황제 안회순이 가장 신임하는 무관이 바로 장강성주이며, 호국대장군인 창명후(彰明侯) 강절곤이었다.
“사제는 고국에 돌려보냈습니다.”
“그랬군. 어쩐지 돌아오지 않는다 했어.”
“제가 사제를 이곳에 둔 것은 아버님의 호위를 위해서였습니다. 살수 따위를 하라고 둔 것이 아닙니다.”
“그러는 자네가 남 말할 처지가 아닐 텐데? 방금 형조에서 사람이 왔다 갔어. 혀가 잘렸다던데 자네가 한 짓이지? 크흐흐, 쓸데없는 짓을, 나는 이 천지에 부끄러울 것이 하나 없는 사람이야!”
강절곤은 괴한이 자신을 아버님이라고 부름에도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오히려 오랫동안 알던 이를 대하는 것처럼 슬쩍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물론 소리치는 강절곤의 목소리와 눈에서는 귀기가 뚝뚝 흘러내렸다. 강절곤은 월국에서 대표적인 반해국파이며 해원공의 태자 책봉을 가장 극렬히 반대하는 자였다.
“나는 늙은 몸이라 자네처럼 하지는 못해, 이 늙은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기를 쓰고 더러운 변절자 놈들과 다투는 것뿐이야! 다행히 영명하신 황상께서 이 늙은이의 뒤를 봐주고 계시지! 이 늙은 멍청이는 죽어도 비열하고 잔학한 해국 놈들에게 이 월국을 넘겨주지 않을 것이야! 그래, 넘겨주지 않을 것이야……. 내 아들, 내 핏줄을 몰살한 그자의 소생이 태자가 되는 걸 내 어찌 그냥 두고 볼 수 있나!! 윽!”
강절곤은 피를 토하는 것처럼 절절히 소리치다 미간을 찌푸리며 가슴을 꽉 움켜잡았다. 강절곤은 전장에서의 생활로 인해 몸이 많이 상하였고,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오랫동안 심적인 고통을 받아 왔다. 괴한은 강절곤이 비틀거리자 그에게로 다가가 서탁 옆의 환약을 꺼내 먹였다. 그리고는 환약이 잘 내려가도록 연신 등을 쓸어내렸다.
“하아, 하아……. 그러니까, 자네는, 돌아가, 고산국으로, 돌아가……. 복수는 이 늙은이가 할 테니, 자네는 더는 피를 묻히지 말고, 돌아가…….”
한참 동안 가슴의 통증에 시달리던 강절곤은 통증이 가라앉자 제 옆에 선 괴한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광인처럼 빛나던 눈동자에 혈육에 대한 연민이 그득 고여 있었다. 하나 괴한은 강절곤의 말에 고개를 가로젓는 것으로 답을 했다. 괴한 역시 강절곤과 같은 목적이 있었다. 괴한 역시 강절곤과 마찬가지로 복수하고 싶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저 역시 결심을 굳혔을 때 무인의 길을 버렸습니다. 지금의 저는 아버님과 마찬가지로, 아니 아버님보다 더한 복수귀입니다. 저는 아버님과 달리 이 월국이 멸망해도 개의치 않습니다. 저는 오로지, 제 혈육의 복수를 할 뿐입니다. 아버님이야말로 손을 떼시고 편안히 여생을 보내십시오.”
“크크, 역시, 역시 자네야. 내 새끼가 사람 하나는 잘 보았어……. 우리 백서(栢誓)가 제대로 짝을 골랐어……. 미안하이, 자네에게 미안해……. 내가 마무리를 못 해서 자네를 귀찮게 했군…….”
괴한은 강절곤의 기세가 잦아들자 강절곤을 부축해 침실로 이끌었다. 강절곤은 다 죽고 하나 남은 막내아들이 실종되자 믿을 수 있는 하인을 제하곤 모두 다 내보냈다. 지금 이 집에 남아 있는 하인이라고는 대를 이어 장강 강씨 가문을 모신 자들뿐. 괴한의 정체를 알고, 괴한이 어디에 있으며, 심지어 강절곤이 어떤 짓을 했는지 알면서도 굳게 입을 다물 수 있는 자들뿐이었다.
“서야, 귀여운 내 새끼, 제발 시체라도 좋으니 내 새끼, 딱 한 번만 보고 싶구나…….”
괴한이 강절곤을 침상에 눕히자 강절곤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괴한은 강절곤이 잠들 때까지 한참 동안 침실을 지키고 서 있었다.
“백서…….”
괴한은 강절곤이 눈 감기 직전 단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은 자의 이름을 읊조리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강백서라는 이름은 괴한에게 있어 일생의 단 한 번뿐인 사랑이고 반쪽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괴한은 해원공에게 추문을 일으키려는 강절곤의 모략을 그냥 두고 보았다. 같은 고산국 출신인 사제를 시켜 낭중의 입을 막게 해도 , 강절곤이 출신도 알 수 없는 양아치를 고용해도, 그들을 감시하며 그저 일의 진행을 두고 보려 했다. 하나 양아치들이 고른 장소가 나빠도 한참 나빴다. 괴한은 이 나라 출신이 아니었고, 양아치들이 고른 곳은 월국 토박이들도 길을 잃는 미로 같은 동네였다.
“이름이 진해라고 했었나.”
그리고 그곳에서 괴한은 자신이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 여겼던 물건을 발견했다. 백서의 마지막 이름자가 새겨진 물건은 괴한이 강백서에게 정표로 건넸던 물건이고 강백서가 실종되기 전까지 지니고 있던 물건이었다. 결정적으로 진해라는 이름, 해라는 이름.
“…….”
괴한은 가무잡잡한 목덜미를 가진 청년을 떠올리다 창명후 저택을 나왔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후 바람처럼 빠르게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어딘가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해라는 이름은 강백서와 괴한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의 아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