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1부 탈정고 소동 (1/18)

환태자사건

1권

1부 탈정고 소동

회순(恢順) 이십 년, 사월 모일.

“났구나~~!”

“에이, 시부럴!”

“저놈은 꼭 중요할 때 나더라.”

“됐고, 가진 거 빨랑 다 내놓으쇼. 없으면 아버지 속바지라도 팔아 오라고!”

오늘은 끝장나게 운수가 좋았다. 요 며칠 푼푼이 벌던 걸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이 대박이 터져 버린 것이다.

“옜다! 오진해 이 독한 새끼, 어떻게 눈치 한 번을 안 주고 저 혼자 다 터뜨려 버리냐! 에이, 이 좌부우부(左父右父)도 없는 새끼!”

“나 좌부우부(左父右父) 없는 거 아니거든?! 잠깐 안 계신 거뿐이거든!? 한두 해 안 것도 아니면서 쪼잔하게 왜 이래, 정말!”

“아버지 속고쟁이 사 드릴 돈이라서 그런다, 왜!”

무려 여섯 명이라는 대인원의 쌈짓돈이 걸린 도박판이었다. 어차피 그 살림이 그 살림인지라 내놓은 돈도 그 나물에 그 밥이었지만 변변찮은 푼돈이라도 여섯 명 몫이 모이면 제법 탐이 나는 금액이 되었다.

“형님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형님들도 이만 집에 돌아가셔서 할아버님, 백부님, 숙부님한테 슬슬 문안 인사드려야지요~?”

“저 개놈 자식 보게. 싹 쓸어 놓고 이제 와서 가겠다고?”

“원래 화려할 때 떨어지는 꽃이 제일 예쁘지 않습니까. 전 문안드릴 좌부우부도 없으니까 요 귀여운 은전들을 모셔 놓고 문안을 드려야죠!”

그리고 오늘의 행운을 거머쥔 사내는 성을 오, 이름을 진해(眞諧)라고 했는데, 이 잠춘동(暫春洞)에서 이십 년을 넘게 산 터줏대감이었다. 툴툴대는 사내들의 말에 나온 것처럼 오진해는 정말로 좌부(부)와 우부(모)가 없었다. 좌부는 처음부터 기억에 없었고 우부는 진해가 예닐곱 살 될 때쯤 행방을 감추어 버렸다.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일정한 수입이 있던 걸 보면 진해의 좌부와 우부는 떳떳한 관계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진해 형, 여기 있어?”

미련을 버리지 못한 사내들이 진해를 붙잡아 도박판에 다시 앉히려던 그때. 미려방의 문지기 중 하나가 장막 아래로 머리를 쓱 들이밀었다. 문지기 역시 비번일 때는 이곳의 단골 중의 하나인지라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에도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뭐야, 한판 벌이려고? 오늘은 사람이 제법 많네. 근데 진해 형은 여기서 이렇게 얼쩡거릴 때가 아니야. 미려 형이 눈이 벌게져서 찾고 있더라. 또 어떤 멍청한 놈이 형의 성질머리를 긁어 놓은 모양이지.”

“헉, 또?! 이번엔 대체 뭔 일이야?!”

“나도 잘 모르겠는데 아무래도 조 공자 때문인 거 같어. 조 공자가 미려 형이 연주하는데 손을 잡으려 한 모양이지. 얼굴이 벌게져서 들어온 걸 봐서 오늘은 샌님답지 않게 한잔한 모양이야. 제 딴에는 사내답게 군다고 군 게 그만.”

“아오! 조관림 이 멍청한 새끼! 대체 몇 년을 미려방에 들락날락하면서도 미려 비위 하나를 못 맞추냐! 그 새끼 급제한 거 맞아?! 음서로 들어간 거 아냐?!”

이름이 이단(二斷)이라는 문지기는 아무렇지도 않게 꾼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다. 자주 얼굴을 내미는지라 도박꾼들도 자연스레 이단이 앉을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킬킬, 진해 자식! 오늘 어쩐지 끗발 이 좋더라니!”

“야, 가라, 가. 미려 오면 시끄러워지니까 얼른 가~!”

이단이 자리를 잡자 진해의 도박 지기들은 킬킬대면서 서로의 버선이며 방석, 돗자리 아래를 휘저었다. 방금까지는 아버지 고쟁이 사 드릴 돈도 없다는 작자들의 손에 순식간에 동전 몇 푼이 얹혀 있었다. 일렁이는 촛불에 몸체를 드러낸 동전들은 낡고 녹이 슬어 이 잠춘동에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모양을 띠고 있었다. 동전을 손에 든 이들이 이 잠춘동의 주민들이었다. 퀴퀴한 도박꾼들과 삼급 청루의 문지기, 살인 빼고 다 해 본 잔뼈 굵은 잡일꾼 오진해 역시 잠춘동의 주민이기도 했다.

“이단아, 고맙다! 오늘 네 덕분에 살았어!”

“가끔은 이래 줘야 진해 형이 날 아는 체를 안 하겠어?”

“자식, 나중에 국수나 한 사발 말자. 언제 한가할 때 가 볼 테니까, 응?”

“알았어. 아, 근데 형.”

“왜?”

“미려 형, 아까 형네 집 쪽으로 가는 거 같던데.”

“빌어먹을!”

오진해가 크게 욕을 뱉자 이단과 도박꾼들이 크게 웃었다. 웃음 사이로 골패 섞는 소리가 요란했다. 오진해는 두둑해진 주머니를 챙겨 넣으며 아주 잠깐 아쉬운 얼굴로 뒤섞이는 골패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미려의 새침한 눈매를 떠올리기 전까지였고, 백 리 밖에서도 구분할 향이 바람결에 실려 오자 진해는 머리가 쭈뼛 곤두서는 것을 느끼며 후다닥 미려와는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미로처럼 얽힌 골목을 시궁쥐처럼 헤집고 다니던 오진해는 구석진 골목에 도착하고 나서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미려 역시 오진해와 같은 세월을 잠춘동에 살았지만 묘하게 길눈이 어두운지라 진해만큼 길을 잘 알진 못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오진해는 미려가 어디서 출발한다는 것만 알면 어떻게든 미려가 오기 전에 몸을 숨길 수 있었다.

“에이, 조관림 쪼다 새끼. 그 자식이 일을 제대로 못 하니까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아니야.”

잠춘동에서도 가장 그늘지고 한적한 골목에서 오진해는 때 묻은 동전 주머니를 던졌다 받았다. 짤랑거리는 주머니 속에서 오늘 딴 돈들이 부딪치며 맑고 영롱한 소리를 냈다.

“멀쩡한 서생 같아서 소개한 내가 병신이지, 병신이야! 그런 반편이인 줄 알았으면 절대로 소개해 주지 않는 거였는데! 아이구, 내 팔자야! 미려 그 녀석이 빨리 장가를 가야 나도 속 편히 혼처를 알아볼 텐데, 아이구, 아이구!”

싸구려 연기를 푸― 내뱉으면서 진해는 몇 번이고 조관림, 이 잠춘동에서는 조 도련님, 혹은 조 공자라 불리는 이에 대한 욕을 내뱉었다. 조관림은 관복을 입고 관모를 썼다는 것만으로도 잠춘동에서는 왕공제후 같은 대접을 받았다. 사실 이곳에서 말단이나마 관리인 조관림보다 귀한 신분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고.

그래서 진해는 일을 꾸며 조관림에게 삼급 청루인 미려방에서 가장 이름난 가수인 정미려를 보여 주었다. 정미려는 음인 양인을 초월한, 정말로 이름값을 하는 미려한 외양을 하고 있었으며 악기를 다루는 솜씨는 잠춘동 밖에까지 소문이 나 있을 정도였다. 그런 미려에게 순진한 조관림이 반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진해는 미려를 좋은 집에 장가보낼 꿈에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듯했다.

“어휴, 집에 가 있다니까 오늘 안에 돌아가기는 글렀네……. 단단히 화가 났을 테니까 눈이나 붙이다가 간식이나 좀 사서 들어가자.”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사자인 미려가 조관림을 단번에 걷어찼다.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보며 다시는 보기 싫다고 축객령을 내려 버렸다. 멍한 표정으로 이유를 묻는 조관림에게 정미려는 아름답고 서늘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읊었었다. 자신은 어릴 적부터 오진해와 정혼한 몸이므로 절대로 다른 이와 혼인할 생각이 없다고. 오로지 오진해만이 이 몸을 가질 수 있다고.

―진해는 정말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머리가 아파진 오진해는 정말로 눈이나 붙일 요량으로 주머니를 정리하고 근처에 잘 만한 곳으로 기어들어 갔다. 잠춘동의 가장 그늘진 곳에는 집이라 부를 만한 것 대신 얼기설기 엮은 천막들이 즐비했는데 주인이라 부를 만한 이가 없는 물건들이었다.

진해는 그중에 가장 두껍고 낡은 천이 덮인 천막을 선택하였다. 얼마 전 주먹밥 한 덩이를 받고 연고 없는 시신을 거뒀던 곳이기도 했다. 미려는 담이 약하므로 이곳까지 오더라도 절대 저곳에는 접근치 않을 터였다. 진해는 오늘 운수가 좋은지 나쁜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느긋하게 천막의 천을 걷어 올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비어 있어야 할 천막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이 겨우 누울 천막인지라 전혀 달갑지 않은 손님이었다. 게다가 더욱 큰 문제는 누운 사람이 다름 아닌 음인이라는 점이었다. 그것도 향이 진동해서 코가 시큰거릴 정도로 달아오른 희락기의 음인.

그러나 잠시 후, 진해는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 진한 향기는 평범한 음인이 낼 수 있는 향이 아니었다. 가늘고 길고, 평화롭게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인 양인 오진해는 당장이라도 천을 덮고 뒤돌아서고 싶었다. 문제에 휘말리느니 차라리 미려에게 가서 하루 종일 혼인 타령을 듣는 게 백배 천배 나은 선택인 것이다.

“하아, 하아―”

그런데 이상하게도 진해는 도저히 천막 앞을 떠날 수 없었다. 비정상적으로 향긋하고 강렬한 향기도 향기였지만, 천이 들춰진 순간 진해와 마주친 눈동자가 기이할 정도로 달고 애틋했다. 잔뜩 경계하고 있는 짐승의 눈동자였다. 달아오른 채 슬쩍 눈물이 고이고, 미간을 모은 채 입술을 문 모양은 감미로운 희락기와는 백만 광년 정도 거리가 있어 보였다. 마치 이를 드러내는 짐승과 진배없는 것이다. 거시기 뜯기고 싶지 않은 놈이라면 입맛만 다시며 뒤로 물러나리라.

“힘들지? 예쁜이가 어쩌다가 탈정고(奪精膏)를 먹었어~?”

하지만 진해는 보통 양인들과 조금 다른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양인들에게는 선호하는 몸매와 향, 눈매가 있었지만 오진해에겐 그런 것은 모두 다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했다.

“탈, 정고……?”

“에헤이, 그런 것도 모르고 집어 먹은 거야? 이거 나쁜 어린이네. 아무거나 막 집어 먹으면 탈 난다는 거 아무도 안 가르쳐 줬어?”

오진해가 천막의 천을 덮자 천막 안의 음인은 이를 악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땀을 어찌나 흘렸는지 옷이 물에 젖은 것처럼 몸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제대로 몸 가누기도 힘들 텐데 동작 하나하나에 절도와 기품이 배어 있었다. 오진해를 노려보는 눈동자 역시 반듯하게 날이 서 있었다.

“그래, 탈정고. 좀 질 나쁜 미혼약이지. 관아에서 단속을 해서 요즘엔 여기서도 보기 힘들걸?”

“미혼약이란, 말이군…….”

오진해의 몸에서 풍기는 양인 향 때문에 욕정이 일 텐데도 눈앞의 음인은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나 달라붙은 옷은 음인의 몸 상태를 여실히 드러내 주었고 오진해는 쭉 뻗은 음인의 팔다리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마치 잘 훈련된 사냥개의 몸을 보는 듯했다.

오진해가 말없이 몸을 훑어보자 음인 사내는 미간을 더욱 찌푸리며 근처에 널브러진 담요 쪼가리로 몸을 가렸다. 악명 자자한 탈정고를 먹고도 저 정도라면 평소에는 몸이 시릴 정도로 고고하고 단정한 몸태를 보여 줄 것이다.

그런데 그 단정하고 깨끗한 음인이 지금 저의 앞에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이 더럽고 낡은 천막 안에서 오진해와 단둘이 자리 잡고 있었다. 조금 냉정해 보이는 얼굴 위에 열기가 잔뜩 고여 있었다. 헐떡이는 것만으로도 저렇게 헤퍼 보이는데 울게 되면 저 얼굴이 얼마나 심하게 무너져 내릴까. 저 건장한 음인의 뒤를 단번에 꿰뚫으면 어떤 소리로 비명 지를까.

“도와줄까?”

오진해는 제가 만난 음인들 중에서 가장 저의 욕구를 자극하는 음인을 내려다보며 빙긋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잘생기진 않았지만 꽤 귀염성 있는 얼굴이라 오진해는 이 미소로 여러 선량한 사람들을 (가볍게) 등쳐 먹을 수 있었다.

“그쪽이 싫으면 강요할 생각 없어. 난 지나가다가 그쪽이 하도 딱해 보여서 이러는 것뿐이니까.”

“…….”

“그만큼 탈정고가 무서운 물건이라는 거야. 생전 처음 보는 양인이 곱게 지켜 온 정조를 빌려주겠다고 말할 만큼 지독한 약이라는 거야. 당신, 탈정고가 왜 탈정고인 줄 모르지?”

“…….”

“탈정고는 내버려 두면 정말로 정을 싹 털어 가. 사람의 정기를 탁탁 털어 가 버린다니까. 탈정고가 한창 유행할 때는 세 집 건너 한 집 정도 장례를 치렀어. 불끈 설 때는 좋았는데 이게 멈추질 않고 싸고 싸고 또 싸고, 계속 이러거든. 그러다가 그대로 배 위에서 캑!”

“…….”

“그런데 당신은 참 운이 좋아. 당신을 도와주겠다는 사람이 욕정이 눈이 먼 양인이 아니라 당신을 정말로 돕고 싶어 하는 무려 탈정고의 해독 방법을 아는 이, 나라서 말이야! 나한테 믿고 맡겨 주면 탈정고의 독기를 싹 빼 줄게. 눈 딱 감고 있으면 절대로 잊지 못할 즐거운 추억으로만 남겨 준다니까?”

결론만 간추리자면 오진해와 떡을 치자는 소리였다. 음인은 앉고 진해는 선 터라 진해의 그늘 속에서 어둡게 윤을 내고 있었다. 진해의 말이 끝나자마자 속에서 욱하는 기운이 치밀어 음인 사내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짓씹었다. 열기에 가칠하게 변한 입술에 피가 맺히자 오진해는 제 혀뿌리가 그득 침이 고이는 걸 느꼈다.

“싫어? 그럼 어쩔 수 없지. 만나서 즐거웠어. 아침나절에 시신 정도는 치우러 와 줄게. 남길 유언이 있으면 옆에 대충 적어 둬. 친지한테 전하도록 노력은 해 볼게.”

그러나 오진해는 제 속이 홧홧하게 타오르는 걸 내색하지 않고 어느 때보다도 개운하고 산뜻하게 뒤돌아섰다. 그는 속으로 절간의 중놈들이 이 모습을 본다면 저를 당장에 형님으로 모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는 한편 저 음인이 저를 잡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다. 탈정고의 악랄한 마수 아래서도 이성이 남아 있는 사람이었다. 절벽 위의 사슴처럼 고고하고 재수 없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음인을 울리는 것이 바로 오진해의 ‘취향’이었다. 얼굴은 예쁘거나 귀엽거나, 아니면 아예 박색이라도 상관이 없었다. 단지 얼마나 잘 꼴리게 우는가가 관건이었다. 얼마나 애틋하고 가련한 표정을 지어 오진해의 심금을 울리는지가 중요했다. 오진해가 괜히 이 나이가 되도록 혼자 있는 게 아니었다.

“……잠깐.”

오랜만에 오진해를 달아오르게 한 음인이 오진해를 불러 세웠다. 오진해는 입 끝이 쭉 올라가려는 걸 간신히 참아 내며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 이럴 때는 살짝 연민을 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진해는 음인을 마치 죽을병 걸린 환자처럼 내려다보았다.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끝까지 쭉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왜? 지금 당장 전해 줄 말이 생각났어?”

“……해독법을 안다는 말, 참이겠지?”

“참 나. 평생을 속고만 살았나. 곧 죽을 사람 두고 거짓부렁이나 할 놈으로 보여, 내가?”

사실 탈정고를 먹는다고 곧 죽지는 않았다. 떡 한번 잘 치자고 죽는 약을 집어삼키는 미친놈이 어디 있겠는가. 그냥 짐승처럼 박고 싸는 쾌감을 잊지 못해 먹고, 먹고, 또 먹다가 마침내 탈정고에 환장하는 약쟁이가 되어 남들보다 좀 많이 일찍 세상을 마감하는 정도였다.

“처음 보는 자를, 흐으, 어찌, 믿으란, 말이냐.”

그리고 그런 약쟁이들의 시체를 여럿 치워 본 경험이 있는 오진해였기에 오진해는 눈앞의 음인에게 꽤 감탄했다. 만약 오진해 자신이 탈정고를 먹었다면 아무나 붙잡고 닥치는 대로 욕정을 해소하는 것이 우선이었을 터였다. 기적적으로 탈정고에서 벗어난 이 중 하나가 차라리 살가죽을 뜯어내는 게 덜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말한 걸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긴. 그것도 그렇네. 근데 지금 예쁜이가 그걸 가릴 처지야? 그걸 해독 못 하면 죽는데 처음이고 나발이고 가릴 여유가 있어? 생각보다 목숨이 별로 안 소중한가 보지?”

“…….”

“뭐……. 예쁜이가 목숨을 소중히 여기든가 말든가 그건 예쁜이 자신의 문제일 테니 넘어가고. 일단 나는 예쁜이를 도와줄 의지가 충만해. 왜냐면 난 오늘 무조건 이 주변에서 밤을 나야 되거든! 그런데 이 주변에서 사람이 밤새 죽어 봐. 근처에서 그걸 알고도 잔 내 기분이 얼마나 더럽겠어?”

“그런…….”

“게다가 근래 날씨가 낮에는 따뜻하고 밤에는 쌀쌀하잖아. 예쁜이의 독을 풀어 주면서 같이 체온을 나누면 예쁜이는 독을 풀어 좋고, 나는 따뜻해서 좋고. 형님 좋고, 아우 좋고, 뽕도 따고, 임도 보고? 알겠어?”

오진해는 자신이 말하면서도 참 아무 말이나 잘 지껄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진해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열혈남아였다! 만약 저 음인이 화대를 내라고 하면 오늘 딴 돈을 다 내어 줄 생각을 하고 있을 정도로 욕, 아니 의지에 활활 불타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탈정고를 먹은 사람 앞에서 논리정연하게 논박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오진해는 그냥 이말 저말 길게 해서 시간을 끌었고, 천막 안에서 저와 음인의 향이 어지럽게 얽히는 감미로운 감각을 즐길 뿐이었다. 이젠 음인의 살과 저의 살이 얽히기만 하면 만사형통이었다.

“확실한, 해독, 이겠, 지……?”

음인은 이제 목이 마르는지 마른 입술을 연실 핥아 올렸다. 목소리가 다 갈라진 게 안쓰러우면서도 참으로 간사하기 그지없었다. 아, 더 울려 보고 싶다. 저 고아한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게 하고 싶다. 둥근 엉덩이를 때리면 무슨 소리가 날까. 어떤 표정으로 저를 바라볼까.

“응, 확실해. 탈정고를 만든 의원 옆에서 일을 거든 적이 있어서 다른 건 몰라도 이건 확실히 알고 있어!”

오진해는 자신의 속에서 익숙한 감각이 고양되는 것을 느끼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있으면 그가 궁금해하던 모든 것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음인은 망설임 한 점 없는 오진해의 얼굴을 바라보다 고개를 푹 내리 숙였다. 그러다가 아주 살짝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오진해가 그를 주의 깊게 바라보지 않았다면 절대로 알 수 없을 정도로 미약한 움직임이었다. 오진해는 이 순간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한 것이 무척이나 아쉬웠다.

그리고 허락이 떨어진 순간 오진해는 번개같이 음인의 몸으로 달려들었다. 멀쩡한 척하고 있었지만 천막 안에 가득 찬 음인의 향기 때문에 그 역시 이미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상태였다.

“윽!”

오진해는 음인의 어깨를 밀어 넘어뜨린 후 재빠르게 음인의 배 위에 걸터앉았다. 어찌나 줄줄 흘려 댔는지 맞닿은 엉덩이에 축축한 감촉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쌌어?”

음인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음 짓자 음인이 이를 악물며 고개를 한쪽으로 돌려 버렸다. 부들부들 떨리는 눈초리가 황홀해서 이뿌리가 시큰거려 올 지경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마주한 수치심이었다. 잠춘동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오진해와 밤을 보내곤 하는 이들에게서는 더는 찾아볼 수 없는 정밀하고도 섬세한 감정이었다.

“아껴 싸지 그랬어. 나랑 있으면 한참을 더 싸야 되는데.”

일부러 저급한 말을 읊조리자 음인의 눈동자에 사나운 기색이 어리며 오진해를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지금 자기가 누구 밑에 깔려 있는지도 잊은 듯했다. 그러나 오진해는 음인에게 박수를 쳐 주고 싶으면 싶었지 음인을 욕하고 싶진 않았다. 사실 음인의 태도야말로 정상적인 사람의 반응이었다.

“뭐, 하는 거냐!”

“벌써부터 이렇게 노려보는데 나중에 본격적으로 치료를 시작하면 어쩌려나 싶어서. 남이 베푸는 선의를 엉겁결에 폭력으로 갚게 되면 너도 곤란하잖아, 그치?”

“하아, 폭력, 이라니.”

“치료라는 게 항상 안 아플 수만은 없다는 거지. 그러니까 살짝 묶을게. 분위기도 살릴 겸.”

하지만 음인에겐 안타깝게도 음인이 처한 상황은 보통 사람이라면 맞닥뜨릴 일이 없는 특이한 상황이었다. 관에서 단속하는 미혼약을 들이마신 채 냄새나는 천막에서 이름 모를 양인에게 몸을 맡겨야 하는 상황이다. 그것도 제가 치료법을 안다고 주장하는 꾀죄죄한 양인에게.

그러나 음인에게는 안타깝기 그지없는 상황이 오진해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감미료가 되었다. 오진해는 ‘이런’ 식의 놀이보다 상황극을 하는 것을 즐기는 편이었지만 오늘은 오진해와 음인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진해에게 음인을 겁간하는 척하는 놀이를 즐기라 속삭였다. 음인이 동의한 이상 겁간은 아니었지만 오진해는 엄밀히 따지자면 이 상황 역시 겁간의 영역에 발을 걸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음인에게 묻고, 또 묻는 것이다. 그의 허리띠를 풀어 그의 손목을 묶어도 되겠냐고.

“제기, 랄……!”

그리고 음인은 오진해에게 저의 몸을 허락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진해가 그의 손을 묶는 것 역시 허락해 주었다. 거친 욕설이긴 했지만 충분히 허락의 효과를 가지고 있는 말이었다. 오진해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음인의 허리띠를 천천히, 아주 천천히 끌러 냈다. 허리띠가 허리를 쓸자 음인이 욕설을 뱉던 입술을 황급히 사리물었다. 단지 이것만으로도 느끼는 모양이었다.

오진해는 음인의 손 위에 예쁜 나비 모양 매듭을 지어 주었고, 매듭을 짓는 것을 끝내자마자 음인의 옷자락을 거칠게 풀어헤쳤다.

“귀찮게 왜 이렇게 옷을 많이 껴입고 지랄이야.”

방금까지 상냥하게 매듭을 지어 주던 사람과는 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 거칠고 무례한 말투에 달아올라 있던 눈동자가 의문으로 물들었다.

“으이구, 싸기는 어지간히도 쌌네. 이 음탕한 놈! 내가 이러기를 기다리고 있었지? 사실은 온갖 양인이 와서 네 뒤를 뚫어 주길 원하고 있었던 거 아냐!”

“뭐, 뭣―”

“이 천한 놈!”

그리고 다음 순간, 오진해의 손이 음인의 허벅지 옆을 세게 내리쳤다. 철썩, 살과 손바닥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음인의 살 위에 붉게 자국이 도드라졌다.

“이 음탕한 놈! 이 창기 같은 놈!”

“윽, 뭐, 대체―”

찰싹찰싹 부딪치는 소리가 시원스러운 것이 참 마음에 들어서 오진해는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으면서 음인의 허벅지를 연신 내리쳤다. 몇 대를 때리자 음인은 저도 모르게 묶인 손으로 오진해의 옷깃을 붙잡고 있었다.

“아윽, 그만, 그만―”

살결이 빨갛다 못해 붉게 변하자 오진해는 마침내 내리치던 손길을 거두고 음인의 다리 사이에 손을 넣어 두 다리를 젓가락 가르는 것처럼 쫙 펼쳐 보였다. 속옷은 벗겨 둔 지 옛날이었고 그 덕에 탈정고의 독을 빨고 커다랗게 부푼 물건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끈적끈적한 액에 젖어 번들거리는 구멍까지도. 그런데 이 상황에서 오진해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음인의 물건이 오진해가 살을 때릴 때보다 더욱 크게 부풀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오진해는 살짝 죽어 있으리라 생각했고, 그래서 한번 빨아 줄 참이었던 물건이 크게 부풀어 있자 속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만은 뭔 놈의 그만. 사실 탈정고를 먹었다는 건 거짓말이지? 그냥 뒤가 간질거려서 아무 놈이나 쑤셔 줬으면 좋겠는데 핑계가 없어서 꾸며 댄 거지? 응?!”

“그럴 리가…….”

“그럴 리가는 무슨! 네 눈으로 똑똑히 봐라. 네 거시기가 지금 무슨 꼴을 하고 있는가. 엉덩이를 맞았으면 정신이 좀 들어야지 줄줄 싸면서 흐물흐물 풀어져 가지고는!”

“아, 으앗!”

“어이구, 구멍에 쑥쑥 들어가는 거 보게? 너 몇 놈이랑 놀아 봤어? 사실 내가 처음이 아니지? 사실 여기서 장사하는 창놈이지?”

“아니, 이럴 리가, 이건 전부, 다, 탈정, 고, 탈, 정고가……! 으앗, 아!”

오진해가 시치미를 뚝 뗀 채 잔뜩 젖은 구멍에 손가락을 밀어 넣자 사내는 무척 당황한 듯했다. 오진해는 사내에게 보란 듯이 손가락 두 개를 한꺼번에 사내의 구멍에 밀어 넣었다. 다소 뻑뻑한 감이 있었지만 미혼약의 효과 때문인지 그럭저럭 잘 밀려 들어갔다. 오돌토돌하고 촘촘한 주름들이 손가락을 환영하는 것처럼 촉촉하게 감싸 안았다. 쑥쑥 쑤시면서 안팎을 오가자 음인 사내는 참지 못하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의 미간에 새겨진 주름이 깊어질수록 구멍에서 흘러나오는 액체 역시 그 양이 많아지고, 진해지고 있었다.

“지랄하네. 이렇게 홍수를 내놓고 탈정고는 무슨.”

손가락을 고리처럼 휘어 내벽을 쑥 긁어내리자 사내는 오진해의 말에 대꾸도 하지 못하고 뒤로 쓰러졌다. 신음을 참을 모양인지 건조해진 입술을 피가 나도록 물고 또 물고 있었다.

“으긋, 읏, 으응……!”

그렇다고 입 밖으로 새 나오는 신음을 모두 삼킬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야, 창놈! 정신 똑바로 못 차려!”

음인의 앞을 꼬집듯 집어 올리자 음인의 허리가 크게 경련하며 한 차례 정액이 쏘아졌다. 오진해는 제 얼굴에 튄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닦으며 음인의 물건 위를 아프지 않게, 찰싹 내려쳤다.

“흐앗, 하아, 하아―”

음인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오진해가 물건을 때리자 그제야 정신을 되찾았다. 그는 자신이 이런 상황에서 절정에 이른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탈정고 때문이라니까, 탈정고.

오진해는 그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오랜만의 놀이를 망치고 싶진 않았다. 사내에겐 비겁하고 잔인한 일이었으나 오진해는 아주 조금만 더 놀고 싶었다. 탈정고를 해독해 주는데 이 정도쯤은 해도 되지 않겠냐는 얄팍한 논리를 앞세워서.

“창놈 주제에 손님보다 먼저 가?!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너―”

“너? 아쭈? 손님한테 너? 이런 버릇없는 새끼를 봤나!”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아무것도 모르는 사내는 오진해의 놀이를 아주 수월하게 끌어 주었다. 절정이 가신 눈에 활활 타는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오진해는 사내의 불타는 눈빛에도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탈정고의 효과를 믿는 것도 있었지만, 사내가 이미 자신에게 맞으면서 물건을 세우는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이놈, 이놈!”

그래서 오진해는 사내에게서 떨어져 줄행랑을 치는 대신 사내의 구멍에 손가락을 마구잡이로 밀어 넣고 마구 흔들었다.

“아, 아아!! 아!! 이, 네, 놈!! 아으, 아, 아아!!”

역시나 사내는 오진해를 욕하면서도 충실히 물건을 세워 주었다. 오진해는 오랜만에 진짜배기와 놀이를 즐긴다는 기쁨에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를 지경이었다. 물론 사내는 이런 놀이가 있다는 것 자체를 모를 테니 오진해는 음인의 독을 풀어 준 후에 사내에게 정중히 그의 성향을 알려 줄 작정이었다. 아무래도 당신은 아픈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말이다.

“으응, 아, 그마, 안, 아응, 그만―”

오진해가 이를 악물면서 작정하고 쑤신 탓에 사내의 뒤는 흐물흐물 풀어지다 못해 잔뜩 녹아 헤프게 속을 보일 정도가 되었다. 오진해는 사내가 좋아하는 곳을 손가락으로 긁어내리는 한편 다른 손으로는 자신이 안고 있던 허벅지를 피가 나지 않을 정도로 세게 깨물어 댔다.

“아!! 아아―!!”

과연 오진해가 짐작한 대로 음인 사내는 오진해에게 깨물릴 때마다 녹아 있던 뒷구멍이 잔뜩 조여들 정도로 느끼는 듯했다. 오진해가 입을 뗄 때마다 사내의 눈동자에서 분노가 흐려지고 그 자리를 수치와 혼란이 대신했다. 탈정고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테지만 오진해의 눈과 그의 눈이 마주한 순간 그 역시 뭔가를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그를 괴롭히고 귀여워해 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 찬 눈동자를 거울삼아 자신의 모습을 고스란히 비춰 봤을지도 모른다.

“에이, 오히려 내가 돈을 받아야겠구만.”

오진해는 음인에게서 두 번째의 절정을 끌어낸 후 음인의 액에 젖은 손을 보란 듯이 탈탈 털어 냈다. 굳은살이 박인 손끝이 액에 불어 잔뜩 주름이 져 있었다. 털어 냈는데도 손등을 타고 몇 방울이 끈적하게 흘러내렸다.

“빨아.”

오진해는 음인의 볼을 잡아 입을 벌리게 한 뒤 젖은 손을 그대로 밀어 넣었다.

“우으―”

오진해가 제 입술을 핥아 올리자 뱉어 내려던 음인이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핥기 시작했다.

“바닥 창놈은 혓바닥도 바닥이구만. 잘 좀 핥아 봐. 그래, 그렇게. 옳지, 옳지. 핥으니까 좋지? 어르신께 봉사하니까 기분이 좋지? 응?”

손가락이 목구멍 깊숙이 들이박히자 사내는 헛구역질을 하는 것처럼 몸을 떨었다. 어디선가 쪼르륵 물소리가 났다. 사내의 물건에서 나는 소리인지, 구멍에서 나는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괜찮아. 좋다고 말해도. 지금은 치료 중인 거잖아.”

눈물이 맺히는 게 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사내의 눈에 눈물이 맺히자, 괴로움이 분명한 눈물이 맺히자 오진해는 마음이 좀 약해졌다. 이 음인은 놀이 상대라기보다 환자에 가까운 상태가 아니던가. 그리하여 오진해는 손가락으로 음인의 앞니 뒤 오돌토돌한 부분을 살살 문질러 주며 방금까지 힐난하던 어조를 바꿔 상냥하게 속삭였다. 혼란에 휩싸여 있던 음인의 눈이 오진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눈을 마주친 순간 오진해는 하마터면 넣지도 않고 쌀 뻔했다. 고아하면서도 매서운 눈매가 눈물에 젖은 채로 매달리듯 저를 올려다보는 모습은 천만금과도, 물론 오진해는 천만금이 없지만, 천만금과도 바꿀 수 없는 절경이었다.

“예쁜아~”

오진해는 사내의 입에서 손가락을 빼낸 뒤 젖은 손가락으로 사내의 가슴 끝에 문질러 닦았다. 바깥에 드러난 짙은 살점은 사내가 느낀 절정만큼이나 바짝 솟아 있었다.

“어디서 이렇게 예쁜 게 굴러왔어, 응? 나 가지라고 요렇게 예쁘게 태어났나? 어디 한 군데 안 예쁜 곳이 없네. 구멍도 쫄깃하고 물건도 실한 게 꼭 내 색시가 되려고 태어난 것 같어.”

“으응…….”

“싫어? 아니면 다시 창놈 새끼 할래?”

위에서 내려다볼 때는 몰랐는데 품에 안고 보니 사내가 생각보다 덩치가 컸다. 어쩌면 진해보다도 키가 클지도 모르겠다.

“아니야, 나는, 창기가, 아니야, 아니야…….”

“그래? 그럼 넌 예쁜이로구나. 내 색시야. 그렇지? 서방님 말 잘 듣는 착한 색시. 그치?”

“……읏, 으응.”

오진해가 가슴 끝을 집어 올려 세게 문지르자 음인의 입에서 괴로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꼬집어 새빨갛게 심이 오른 것을 놓아준 뒤 가볍게 입김을 불자 사내의 입술이 눈꼬리와 함께 떨렸다.

“서방님, 하고 불러 봐. 서방님, 엉덩이 떼찌 해 주세요. 서방님 큰 물건으로 크게 휘저어 주세요, 말해 봐.”

“치료, 치료인, 거지, 이건, 치료인…….”

이 상황이 됐으면 모른 척 넘어가도 되련만 음인 사내는 오진해의 옷깃을 붙잡고 절박하게 물어 왔다. 쾌락과 고통, 수치와 혼란에 녹진녹진하게 녹은 눈매를 하고 허벅지와 가슴 끝을 시뻘겋게 붉힌 채 오진해의 옷깃을 생명 줄처럼 붙들었다. 아, 아무래도 반한 것 같아. 오진해는 자기도 모르게 사내의 뺨을 붙들고 입술을 갈랐다. 빨아 주는 건 괜찮아도 입을 맞대는 건 인색한 사내가 자신이 먼저 음인의 입술을 빨아 삼켰다.

“그렇다니까, 예쁜아.”

혀와 혀가 미끌미끌하게 마찰하고 끈적한 실을 이으며 떨어졌다. 오진해는 자그맣게 속삭이고는 음인의 향이 나는 살을 몇 번이고 제 입으로 빨아들였다. 입맞춤이 깊어지자 어느덧 음인 사내를 깔듯이 하고 있었다. 음인 사내의 묶인 팔 사이에 머리를 다 넣고 있었다. 음인 사내의 다리가 오진해의 허리를 감고 있었다.

“서방, 서방님……. 으응, 서방, 니임…….”

오진해의 확답을 받자 탈정고를 먹고도 기세를 세우던 사내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오진해의 인내도 완전히 무너졌다. 가장 사랑하는 순간이었다. 그가 가장 사랑하는 모양이었다. 누군가가 완전히 손바닥으로 떨어질 때, 누군가의 온전한 신뢰를 받는 순간. 오진해는 사내의 엉덩이 살을 잡아 벌리고 힘껏 물건을 들이박았다.

“아아, 아!!”

손가락을 충분히 풀어 줬건만 사내의 속은 여전히 좁고 탄탄했다. 꾸우욱 밀어 넣을 때마다 사내의 벽이 오진해의 것을 빈틈없이 어루만졌다.

“허억!”

반쯤 밀어 넣고 이를 악물고,

“서방님, 엉덩이, 크게, 아, 커, 아, 아!!”

다시 입술을 짓씹으며 단번에 밀어 헤쳤다. 사내와 오진해가 한 조각의 빈틈없이 꽉 맞물려 버렸다. 진해가 눈앞이 새까매지는 쾌감을 참아 낼 동안 진해 밑의 사내는 자신이 파정한다는 자각도 하지 못한 채 진해와 자신의 배 사이를 허옇게 적시고 있었다. 사내의 입에서 삼키지 못한 침이 흘러내렸다.

“응앗, 앗, 좋아, 거기, 아!! 서방님, 서방님!!”

“좋아? 응? 흐으, 밝히기는! 예뻐 가지고, 하아, 발랑, 까져서!”

퍽퍽 쳐올리자 사내가 길게 교성을 지르며 오진해의 목에 매달렸다. 묵직한 무게감이 오진해의 몸을 잡아당겼다. 오진해는 서방을 연호하는 입술을 개처럼 핥아 댔다. 허벅지 하나를 바닥에 억누르고는 아래는 개보다 더 난잡하게 들쑤셔 댔다. 정신없이 우는 얼굴이 어찌나 예뻐 보이는지 꽉 깨물어 제 것이라 표시를 내고 싶었다. 그러나 사내는 진해의 상대가 아니었고, 진해는 아쉬운 마음을 담아 얼굴을 깨무는 대신,

“아으, 아!!!”

사내의 귓불에 제 잇자국을 새겨 넣었다.

한참을 퍽퍽 치고 있자니 음인 사내가 다시 한번 묽은 액을 쏟아 냈다. 오진해 역시 저를 조이는 살 벽을 참지 못하고 사내의 속에 한 번 쏟아 냈다. 그러나 치솟은 욕정은 가라앉지 않고 더욱 기세를 불렸고, 오진해는 손을 뒤로 뻗어 저를 감싼 사내의 팔에서 빠져나와 사내를 거칠게 뒤집었다. 밭 가는 짐승을 다루듯 허벅지를 치자 발긋했던 사내의 귀가 더욱 시뻘겋게 물이 들었다.

전처럼 무작정 내리친 게 아니라 의도가 잔뜩 함의된 내리침이었다. 쓱 문지르는 듯한 손길은 사내에게 오진해의 뜻을 충분히 전달해 주었고, 사내는 벌벌 떨리는 사지를 움직여 힘겹게 등을 내보였다. 한참을 시달린 등에는 담요 나부랭이와 옷, 자갈의 자국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익!”

엎드린 사내가 미처 준비도 하기 전에 오진해는 다시 한번 깊게 밀어 넣었다. 가뜩이나 떨리던 몸은 오진해의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푹 엎어져 버렸다. 사내는 정신없이 흔들리면서 저 역시 함께 허리를 흔들어 댔다. 오진해가 손으로 엉덩이를 세게 쥐어뜯어도 열에 들뜬 신음만을 흘리며 허릿짓에 맞춰 찍찍 묽은 액을 쏘아 보냈다. 누가 보더라도 완벽한 절정이었다.

“으, 서방님……?”

그리고 오진해의 물건이 크게 부푸는가 싶던 그때, 오진해가 사내의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넣어 사내의 상체를 들어 올렸다. 과연 일으켜 세워 보니 사내는 오진해보다 키가 반 뼘은 큰 듯했다.

“아래 봐. 빨리 밑에 봐.”

저를 찾는 사내의 부름을 무시한 채 오진해는 사내의 땀으로 입술을 적시며 낮게 으르렁댔다. 열에 들뜬 사내는 오진해가 시키는 대로 순순히 제 아래를 내려다보았고 하마터면 다리가 풀려 그대로 쓰러질 뻔했다. 아마 오진해가 그를 붙잡고 있지 않았다면 분명히 그러했을 것이다.

“서, 서방님, 놔주세요, 제발, 놔주세요……!”

내려다본 아래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실한 물건이 곧추선 채로 질질 묽은 액을 흘리고 있었다. 배와 거웃도 희멀건 점액으로 엉망이었다. 묽은 것과 희멀건 것이 뒤섞여 다리 사이를 번들번들하게 만들고 있었다.

“으으, 으, 으…….”

창놈이라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는 치태였다. 사내의 머리 한쪽에서 탈정고라는 울림이 들리는 듯도 하였지만 사내는 단지 박히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이렇게 더러운 짐승의 몰골을 하고 있다는 게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사내의 수치심과는 별개로 사내의 물건은 사내의 시선을 즐기는 것처럼 울컥 멀건 액을 분수처럼 쏟아 냈다. 사내의 입술이 슬그머니 호선을 그렸다.

“아, 서방, 서방님? 잠깐, 아, 잠깐만……!”

그리고 사내가 충분히 여운을 맛보는 동안 움직이지 못한 것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이 오진해가 힘껏 허리를 흔들어 댔다. 사내의 상체에 매미처럼 달라붙어 난잡하고 저속하게 허리만을 흔들어 댔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이상, 거기, 아니야, 서방님!! 아니야, 거긴, 아, 잠깐, 아흑, 아!! 안 돼, 아, 안 돼!!”

문제는 오진해의 물건이 두드리는 사내의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오진해의 물건은 이때까지와는 다른 각도로 사내의 속을 헤집고 있었다. 오진해의 허리가 앞뒤로 움직일 때마다 사내의 버둥거림이 점점 심해졌다. 사내의 안색이 살짝 창백하게 변했다.

“안 돼, 안 돼!! 아, 싫어, 거긴, 싫어!! 싫, 싫어――――!!!!!”

사내는 묶인 양손으로 황급히 제 물건 끝을 감싸 쥐었지만 오진해가 하는 바를 막을 순 없었다. 오진해가 어깨가 아파져 올 정도로 그를 껴안자 사내의 비참한 비명 사이로 파정의 소리와는 다른 우렁찬 물소리가 섞여 들기 시작했다.

“아, 아, 아…….”

뜨끈한 액체는 깍지 낀 사내의 손가락 사이로 서슴없이 흘러넘쳤다. 사내는 오진해가 그의 귀를 핥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뾰족하게 변한 혀가 귓구멍을 쑤시자 칼에 찔린 것처럼 흠칫 몸을 떨 뿐이었다. 어쩌면 배설의 쾌락 탓에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아이구, 많이도 싸네.”

“으으…….”

“예쁜아 대체 뭘 얼마나 마신 거야, 응? 아주 폭포수네, 폭포수야.”

멈추려 해도 멈춰지지 않았다. 아무리 힘을 줘도 한번 싸기 시작한 건 멈춰지지 않았다. 사내는 어느새 다시 울고 있었다. 입술은 헤 벌린 채로 줄줄 눈물을 떨구고 있었다.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은 다 동원해서 싸고 있는 것만 같았다.

* * *

사내는 오줌을 잔뜩 싼 뒤 힘없이 널브러졌다. 오진해는 기겁하며 사내를 안아 들었다. 미리 준비된 곳에서라면 오줌 위를 뒹굴든 말든 상관없었지만 이곳은 잠춘동의 가장 외진 곳이었다. 몸을 씻으려면 일각 정도 거리에 있는 공동 우물에서 물을 길어 와야 했다.

진해는 기절하듯 잠이 든 사내를 잠깐 옆에 치워 놓은 뒤 손을 풀어 주고 피가 통하도록 꼭꼭 주물러 주었다. 그리 세게 묶진 않았지만 안 주물러 주는 것보단 나았다. 놀이가 끝난 후 이렇게 주물러 줘서 싫어하는 상대는 없었다.

그 후에 오진해는 깨진 사발 조각으로 흙을 파 사내의 오줌이 스며든 땅을 덮었다. 젖은 담요 쪼가리도 대충 치워 둔 뒤 사내를 둘러업고 조금 떨어진 다른 천막으로 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하늘에 어느새 별이 총총히 떠 있었다. 잠이 든 사내에게 고뿔이 들세라 진해는 서둘러 천막으로 들어갔고, 그나마 깨끗한 천으로 사내를 닦은 후 사내의 머리를 제 팔에 얹어 놓았다.

“헤헤, 귀엽다.”

그런데 이상하게 진해는 영 잠 들지를 못하였다. 잔뜩 파정하고 가라앉은 사내의 향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사내의 머리가 무거워서인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붉게 물든 눈가가 쓰려 보여 오진해는 침을 묻혀 눈가의 소금기를 닦아 주려 했다. 엄지로 눈가를 문지르다가 무심히 내리 앉은 속눈썹도 어루만졌다.

“진짜 내 색시 할래? 내 색시 되면 지금보다 더 잘해 줄게.”

오진해는 잠이 든 사내 앞에서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오진해는 행동거지가 좀 발랄했지만 정신까지 발랄하지는 않았기에 깨어 있는 사내 앞에서는 절대로 이 말을 하지 못할 터였다. 어쩌면 깨어난 사내는 오진해의 멱살을 쥘지도 몰랐다. 경멸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힁허케 가 버릴지도 몰랐다. 아주아주 일이 잘 풀렸으면 놀이 상대로 몇 번을 더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인사 정도는 하고 갔으면 좋겠네.”

실컷 놀고 나서 갑자기 웬 청승인지 오진해는 문득 제 앞에서 휙 사라져 버린 누군가를 떠올려 버렸다. 오진해가 이 잠춘동에서 절대로 떠나지 못하게 하는 누군가였다. 어쩌면 오진해의 이 이상한 취향은 그의 상실로 인해 생긴 것일지도 몰랐다. 어차피 헤어질 이라면 다시는 잊지 못하게 해 줄 거라는 소박한 바람이 미로같이 복잡한 잠춘동에서 알 수 없는 취향으로 개화한 것일지도 몰랐다.

어쩐지 쓸쓸해진 오진해는 사내의 향을 들이마시며 자신도 꾹 눈을 눌러 감았다. 내일은 간식을 사서 토라진 미려를 달래자는 계획을 세워 보았다.

그러나 세상이 모두 다 오진해의 바람대로 흘러가는 건 아니었다. 달게 잠들었다 깨어난 오진해는 자신의 옆이 텅 비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오진해가 사내에게 말 한마디 건네기도 전에 사내는 머리털 한 올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가 버렸네…….”

오진해는 자리에서 부스스하게 일어나 천천히 두 눈을 끔벅였다. 그리고는 사내의 팔이 벴던 자신의 팔 위를 어루만졌다. 인사조차 하지 않고 사라진 사내에게 섭섭한 마음이 들었지만 자신이 사내에게 한 짓을 떠올린 오진해는 사내가 그럴 법하다고 결론 내렸다. 치료라는 명목으로 멀쩡한 음인에게 얼마나 많은 수치와 창피를 주었는가.

“에휴. 이렇게 혼이 났으니까 다음엔 탈정고에 안 걸려들겠지. 몸 건강히 잘 지냈으면 좋겠네. 그런데 가만히 있어 봐. 이상하네. 우리 동네에서 탈정고 쓰는 기방이 있던가?”

저와 하루 잘 놀아 준 사내의 건강을 빌던 오진해는 문득 이상한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제 사내에게 정신이 팔려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인데 탈정고가 유행했던 것은 십여 년도 전의 일로, 오진해가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했던 소년 시절의 일이었다. 물론 오진해는 이 잠춘동 주민이라 알 거 다 알았고, 탈정고에 중독된 사람들의 시신을 묻어 주고 짭짤하게 한몫 벌었었다.

“게다가 탈정고는 딱 일백팔 정만 만들었단 말이지. 낭중 선생이 장가갈 돈 모으느라 잠깐 만들었던 약이고, 부작용이 너무 심해서 그것만 만들고 다시는 안 만들었단 말이지. 그런데 그게 지금 어디서 굴러 나온 걸까?”

또한 오진해는 음인 사내에게 말했던 것처럼 정말로 탈정고를 만들었던 떠돌이 의원 곁에서 잠깐 시중을 들기도 했었다. 오진해의 손이 야무진 걸 높이 산 의원이 오진해를 잠깐 고용했던 것이다. 그리고 덕분에 오진해는 공짜로 탈정고의 해독 방법을 알게 되었다. 떠돌이 낭중의 비법답게 탈정고는 따로 해독약이 있는 게 아니었다. 낭중은 탈정고에 중독돼 죽은 사람이 생기자 혀를 내두르며 쟤들은 대체 왜 죽었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했었다. 해독법을 아는 오진해 역시 그 말에 동의했었다.

“음, 음~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도 되겠지만 역시 미려에게 가는 게 제일 낫겠지? 안 그래도 달래 주러 가야 되니까.”

결정을 내린 오진해는 쭉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덮고 잤던 천 쪼가리들을 대충 치워 둔 뒤 미련 없이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런데 이게 웬걸. 간밤에 진해가 열심히 뒤처리를 해 뒀던 천막이 폭삭 무너져 있었다. 무너진 정도가 아니라 어찌나 힘껏 밟고 뭉갰는지 천을 받치던 기둥이 작살나 다시는 천막을 세울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헉, 생각보다 많이 화났나?!”

누가 그랬는지는 보나 마나였다. 아마 저 천막에서 입 밖으로 꺼내기 힘든 경험을 한 사람일 것이다. 진해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황급히 먹거리 골목으로 줄행랑쳤다. 그 와중에도 도박판에서 딴 돈주머니를 챙기는 건 잊지 않았다.

미려가 진해를 쫓아갔다는 소문이 돈 다음 날에는 간식거리의 간식들이 한층 더 풍부해졌다. 진해가 없는 돈을 털어서라도 간식을 사러 올 것을 다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뭘 실실 쪼개요! 나한테 뭐 묻었어!?”

“내가 뭘~ 그런데 너 어제 어디서 잤냐.”

“왜요.”

“향내가 진동을 한다. 진동을 해. 누구 향인지는 모르겠는데 초상 치르기 싫으면 대충 물이라도 묻히고 가. 누군지 알면 미려가 그냥은 안 둘걸?”

“우리 미려가 댁네 서방이랑 같은 줄 아쇼? 신경 끄고 이거랑, 저거. 그리고 안쪽에 저거로 줘요. 넉넉하게 삼십 푼어치.”

“평소보다 많이 사 가네?”

“미려방 식구들한테도 좀 주려고.”

단골인 진해와 시시껄렁한 잡담을 나누면서도 주인은 능숙하게 간식거리를 담아냈다. 그리 넉넉지 않은 골목인지라 봉밀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고 밀가루를 여러 번 쓴 기름에 튀겨 멀건 설탕물에 담가 두거나 콩가루에 굴리거나 한 게 다였다. 그래도 이 골목에서는 제일로 맛난 간식들이었다. 진해는 고소한 기름 냄새를 맡자 입에 침이 고이는 걸 느꼈다.

그러나 오늘은 막말로 재수가 겁나게 없었다. 오진해는 미려방 근처에 다다랐을 때 익숙한 목소리들이 큰 소리로 다투는 것을 듣게 되었다.

“이런 젠장! 한씨 깡패들이잖아?!”

오진해는 특별히 원수진 사람 없이 잠춘동 주민들과 두루두루 잘 지내는 편이었지만 그런 그에게도 피하고 싶은 이들이 몇 있었다. 그 중 첫 번째는 미려였지만 오진해는 미려와 저 한씨 형제 놈들을 절대로 같은 선상에 놓지 않았다. 왜냐면 한씨 형제 놈들은 돈만 주면 뭐든지 다 하는 그야말로 극악한 깡패 놈들이었기 때문이다. 풍문에 의하면 어디 돈 많은 양반의 위세를 업고 살인을 한 적도 있다고 했다. 범죄가 되지 않는 선에서 되는 대로 일하는 오진해와는 그야말로 대조적인 인물들이었다.

“야! 정미려! 당장 안 나와!”

“이 천한 창기 새끼야!! 남의 일에 초를 쳤으면 책임을 져야지!!”

얼굴에 길게 흉이 나 있는 한씨 형제 중 맏이가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오진해는 기둥 뒤에 숨어 한씨 형제를 향해 마구 욕을 해 댔다. 물론 그들의 귀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닥쳐라!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지껄여!”

“미려방에는 미려방의 규칙이 있다. 일패 어른을 뵈려면 마땅한 자격을 지녀야 해. 너희 같은 무지렁이들이 함부로 만나 뵐 수 있는 분들이 아니다!”

하지만 오진해는 이 일촉즉발의 상황에도 전혀 미려방을 걱정하지 않았다. 미려방의 문지기들은 이 잠춘동에서도 이름 높은 싸움꾼들이었다. 미려방의 방주가 거둬 기른 이들이었는데 다섯 명이 번갈아 가면서 문을 지켰다. 이름은 각각 일도, 이단, 삼략, 사생, 오호였다. 오진해는 그중 이단과 제일 친했다.

“씨벌, 두고 보자! 언젠가 그 반반한 얼굴을 죽도 밥도 안 되게 갈아 버릴 테니까!!”

한씨 형제가 미려의 욕을 하자 다섯 명의 문지기 중 맏이인 일도가 봉을 비스듬히 움켜잡으며 한씨 형제를 제재할 준비를 했다. 일도는 맨손으로도 열댓 명의 깡패들을 너끈히 때려잡은 전적이 있었다. 한씨 형제 역시 사람 패는 거로 유명했지만 그건 주로 그들의 잔혹한 행적 때문에 유명한 것이었지 주먹이 센 거로 유명한 건 아니었다. 한씨 형제는 일도와 맞붙어 좋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입에 담기도 더러운 욕설을 지껄이며 미려방에서 멀어져 갔다.

“응? 오 형.”

한씨 형제의 모습이 사라진 뒤 진해가 슬금슬금 미려방 대문으로 다가가자 일도가 진해에게 아는 체를 해 왔다. 삼략은 살짝 손을 흔들었다.

“뭔 일 있어? 왜 저 자식들이 미려방에 와서 지랄이야?”

“글쎄. 난 안의 일은 잘 몰라서.”

“그렇겠지. 일도 형은 우직한 사람이라서 자기 맡은 일에만 충실하니까 말이야!”

오진해는 넌 곰탱이라는 말을 예의 바르게 돌려 말했다. 일도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삼략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씰룩하였다.

“그럼 난 안에 들어가 볼게. 이거 별거 아닌데 근무 마치고 삼략이랑 다른 사람들이랑 나눠 먹어. 특히 오호한테는 꼭 좀 먹이라고. 오호가 군것질 좋아하잖아.”

“그렇게 하지.”

한씨 형제를 못 들어가게 막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일도와 삼략은 오진해가 지나가도록 순순히 문을 열어 주었다. 진해는 들어가면서 간식 보따리 하나를 삼략의 품에 안겨 주었다.

“앗, 진해 형!”

“진해 형이네?”

“오 형~!”

들어온 미려방은 문 바깥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문을 닫자마자 세상의 온갖 향긋한 향기들이 오진해를 향해 몰려들었다. 삼 층으로 이루어진 미려방의 난간마다 온갖 미인들이 진해를 향해 한마디씩 아는 체를 했다. 진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아름다운 소리가 웃음소리와 함께 흘러나왔다. 일급도 아니고 이급도 아닌 겨우 삼급 기루였지만 이 잠춘동에서 가장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건물이었다. 잠춘동의 주민들보다 잠춘동 바깥의 부자들이 더 많이 드나드는 그런 장소였다.

“응, 다들 잘 있었어?”

“형,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와. 일패 어르신이 형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으, 응…….”

“야, 기다리긴 뭘 기다려? 어제 미려 형이 오 형 찾으러 나갔다 온 거 모르니? 물론 올 때는 혼자 돌아왔지만!”

“정말? 아하하, 진해 형 이제 큰일 났다!”

평소에는 보는 것만으로도 눈 호강이 되는 미인들이 오늘은 하나도 달갑지 않았다. 오진해는 그들의 말 속에서 시시각각 다가오는 어두운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일패 어르신 납신다!!”

그러던 그때, 미려방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계단 한가운데서 목청 큰 사환이 큰 소리로 일패, 즉 미려방 기생들의 우두머리가 납신다고 고해 왔다. 미려방의 우두머리가 누구인지는 미려방의 이름만 봐도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었다.

“형아!”

옥구슬이 굴러가는 것처럼 청명한 목소리가 층계를 내려오고 있었다. 호사스러운 비단 옷자락을 나풀거리면서 서둘러 내려오고 있었는데 천이 흩날릴 때마다 우아한 목선이며 매끈한 발목, 손목이 드러나는 것이 참으로 요염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미려방의 일패, 정미려가 내려올 때마다 사환들이 바구니를 옆구리에 끼고 아낌없이 꽃잎을 뿌려 대고 있었다. 미려방에서 손님을 맡지 않은 모든 이들이 일패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형아!”

“으응, 미려야. 그동안 잘 있었어?”

“잘 있을 리가 없잖아! 형아가 날 보러 오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잘 있을 수 있겠어?”

“그래, 그래. 내가 잘못했다. 일단 방으로 올라가자. 울지 말고, 응?”

쇄골이 드러날 정도로 허술한 옷자락을 여며 주며 진해는 제 품에 안겨 든 정미려의 등을 토닥였다. 그러면서 사환들에게 잔뜩 눈을 부라려 보였는데 이 눈치 없는 놈들이 아직도 미려와 자신을 향해 꽃잎을 뿌려 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해는 머리가 빨간 꽃잎으로 잔뜩 덮이고 나서야 겨우 미려의 방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미려야.”

“으응~ 우리 둘만 있을 땐 그렇게 부르지 말아 줘.”

“그, 그래……. 우리 강아지…….”

“헤헷, 형아~”

“그래, 그래.”

밖에서도 스스럼없이 껴안길 정도의 미려였다. 방으로 들어오자 미려는 아예 진해의 허리를 껴안으며 어깨에 제 머리를 얹어 버렸다. 진해는 그런 미려를 보며 푹 한숨을 쉬다 팔을 뻗어 자신도 미려의 어깨를 안아 주었다. 미려는 진해를 올려다보며 정말로 기쁘게 미소 지었다.

“아이구, 아직도 아기구만. 응? 이래서 어떻게 장가가려고 그래!”

“형아가 나 데려가 줄 거잖아?”

“아직도 그 소리야?”

“아직도 그 소리냐니. 난 형아밖에 없는데 왜 형아는 자꾸 나보고 다른 사람이랑 결혼하라고 그래. 형아, 내가 지겨워졌어? 이젠 내가 미워? 나 보기 싫어?”

“아, 아니 내가 언제 그런 소리를 했다고, 난 그냥 네가 좋은 사람이랑 혼인해서 알콩달콩―”

“난 형아랑 알콩달콩 살고 싶다니까!”

“야, 정미려!”

오진해가 참다못해 소리를 높이자 정미려의 눈가가 순식간에 촉촉해지기 시작했다. 눈이 크고 맑은 미려는 옛날부터 눈물이 많았다. 그리고 그 눈물은 언제나 오진해를 당황하게 했다. 오진해는 미려가 우는 게 정말로 가슴 아팠고 이번에도 역시나 가슴 한구석이 아려 오는 것을 느끼며 얼른 미려에게 자신을 굽혀 보였다.

“미려야, 형이 잘못했다. 혼인 그게 뭐라고 쓸데없이 큰 소리를 내냐. 울지 마, 응? 형이 잘못했어.”

“형아, 나 정말 형아가 좋아. 형아 아니면 결혼하기 싫어. 그러니까 이제 조 공자랑 만나라고 하지 마. 내가 잘할게. 형아 맨날 도박하러 가도 뭐라 안 할게.”

“야 내가 무슨 도박 중독자인 줄 알아?”

“형아, 형아―”

“아이구, 내 팔자야.”

남들이 보면 오진해에게 배가 불렀다고 욕할지도 몰랐지만 오진해는 정말로 정미려와 혼인할 생각이 없었다.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첫 번째는 정미려가 오진해와 같은 양인이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정미려가 오진해가 업어 키운 동생이었기 때문이다.

정미려가 열네 살이 되기 전까지 오진해는 정말로 미려를 자기 친동생으로 알고 있었다. 친동생이 아니면 최소 아버지만 다른 형제라거나. 하지만 그 무렵 미려와 오진해에게 일이 생겼고, 오진해는 그때가 돼서야 미려가 자신과 생판 남임을 알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오냐오냐 온갖 애정을 다해 길러 온 동생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었던 것이다.

“이놈의 강아지, 으이구, 이놈의 강아지…….”

정미려는 미려방의 방주가 이름을 주기 전까지 딱히 이름이라 할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오진해는 미려를 강아지라는 애칭으로 부르고 있었다. 사라진 우부가 이름을 지어 주지 않아 자신이 언젠간 좋은 이름을 사서 붙여 주려고 마음먹었었다. 이젠 모두 다 옛일이 되었지만.

그런데 문제는 그 후에 발생했다. 정미려가 미려방 방주의 양자가 되자마자 온 힘을 다해 오진해에게 연정을 고해 왔던 것이다. 미려가 업어 키운 동생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오진해에게는 횡액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오진해와 미려의 유서 깊은 술래잡기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다.

“아 참. 근데 미려야 밖에 한씨 놈팡이들이 시끄럽게 굴던데 무슨 일이야? 혹시 큰일 생긴 건 아니지?”

“한씨?”

“얼굴에 이렇게, 이렇게 흉이 나고, 눈이 이렇게 찢어진 애들 있잖아.”

“그런 놈들이 있었나? 잘 모르겠는데? 형아는 그런 놈들이 취향이었어? 나보다 좋아? 나랑 있을 땐 내 생각만 해 줘!”

“휴, 말하는 거 보니까 별일 아닌가 보네. 밖에서 하도 지랄을 떨어 대서 너한테 큰일 생긴 줄 알고 걱정했어, 이 녀석아.”

미려가 깜찍하게 시치미를 떼는 모습을 보며 진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미려는 방주의 양자이기도 했지만 방주도 무시할 수 없는 일패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 일패라는 자리는 단지 고운 미색만으로 차지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어릴 때는 말랑말랑하고 순진한 아이였는데 언제 이런 여우가 된 건지. 진해는 나른한 표정을 한 미려에게 제 허벅지를 내어 주며 어쩐지 복잡미묘한 심정에 휩싸였다.

“사환이 잠깐 실수를 해서 생긴 일이니까 형아는 걱정할 거 없어. 내 허락 없이 손님을 받은 것도 모자라서 우리 집에 들이면 안 되는 걸 들여놨더라구.”

“방주는 뭐라디?”

“방주야 항상 출타 중이니까 내가 처리했지. 애들더러 깨끗이 쓸고 닦으라고 했으니까 문제 될 거 없어. 후후, 하지만 가끔은 이런 것도 좋은데? 형아가 날 걱정하고 있잖아.”

“난 항상, 항상! 네가 걱정이거든?”

“아이, 상냥한 형아. 진짜 사랑해.”

“야, 말 돌리지 말고!”

말과 다르게 미려는 꽤 피곤했는지 진해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천천히 느릿하게 두 눈을 깜박였다. 그러면서 진해가 어딜 갈까 봐 겁이 나는지 고운 손을 뻗어 진해의 투박한 손을 감싸 쥐었다. 거칠거칠한 손을 끌어당겨 제 뺨에 대고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대하듯 입을 맞췄다. 요염한 눈매가 오진해의 손가락 사이에서 반짝이는 모습은 같은 무게의 옥이나 금보다도 귀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남이라면 넋을 빼놓고 응시할 모습을 진해는 애틋하고 아련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정미려가 제 손가락을 가지고 놀다가 잠이 들 때까지 쉬지 않고 정미려의 머리칼을 어루만져 주었다. 방을 나오자 희미했던 음인의 향이 사라지고, 미려의 향이 온몸을 덮고 있었다.

“아이고, 미려한테 물어본다는 게 그만!”

뒤늦게 탈정고에 대한 것이 생각났지만 이제 와서 잠든 미려를 깨울 순 없는 법이었다. 미려는 도도한 장미 같아 보여도 속은 새싹처럼 여리디여리기 그지없는 아이였다. 심성이 고와 남들에게 피곤한 티를 안 내서 그렇지 출타 중인 방주를 대신하느라 언제나 피곤할 것이다. 저를 쫓아오던 녀석이 저렇게 곤히 잠든 걸 보면 말 안 해도 알 만했다.

“몇 년 전에 처박아 둔 걸 꺼내 썼겠지, 뭐.”

게다가 어차피 그 음인과 자신은 하룻밤의 인연일 뿐이었다. 탈정고가 없었다면 스쳐 지나갈 수조차 없었던 인연. 탈정고의 독이 사라져 음인은 집으로 돌아가고, 자신은 잠춘동에 남아 언제나처럼 일거리를 찾아 어슬렁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오진해는 별안간 쓸쓸해져 위험을 무릅쓰고 미려방에서 하룻밤 묵어갈까 하는 생각마저 했다.

“안 되지, 안 돼. 그러다가 진짜 미려한테 잡아먹힐라. 저번엔 진짜 큰일 날 뻔했잖아!”

그러나 과거의 기억이 오진해를 쓸쓸한 상념에서 끌어내 주었다. 오냐오냐 키웠던 동생이 새벽에 제 몸 위에 올라타고 있던 기억은 오진해가 세상에서 가장 잊고 싶은 악몽 중 하나였다. 돼지 멱 따는 소리를 내지르며 도망쳐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꼼짝없이 미려를 책임져야 했을 것이다.

“평소엔 얌전하니까 더 분간할 수가 없어, 요망한 녀석.”

미려의 방문 앞에서 담배를 물려던 진해를 지나가던 사환이 만류했다. 바람도 안 부는데 하늘하늘 날리는 색종이들을 보니 확실히 여기서 담배를 피웠다간 큰일이 날 것 같았다. 한두 해 다니는 것도 아닌데 오늘따라 왜 이리 허술하게 구는지.

오진해는 사환에게 허술하게 웃어 보이며 미려방의 가운데 계단이 아닌 우측에 난 자그마한 계단을 타고 느릿느릿하게 내려왔다. 껄렁껄렁하게 걷는 모습이 영락없는 한량이었다. 이미 미려의 기둥서방이라는 헛소문이 자자한지라 손님들도 그런 진해의 모습을 흩날리는 벽화나 꽃잎처럼 자연스레 무시하고 있었다. 진해는 먹이를 물고 집으로 돌아가는 생쥐처럼 익숙하고 날렵하게 미려방의 뒷문으로 향했다.

끼익, 미려방의 뒷문은 앞문과 달리 꽤 추레한 몰골이었다. 오진해는 뒷문을 볼 때마다 이곳을 수리하지 않으면 미려방이 이급 기방이 될 일은 요원할 것이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해 댔다. 문을 열고 나서자 사람 둘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갈 정도로 좁은 골목이 나왔다. 진해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등을 구부정하게 굽힌 채로 쫄래쫄래 집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미려가 왔다 갔으니 햇볕에 잘 말린 깨끗한 새 이불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오진해는 정말로 재수가 없어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오진해는 골목에서 나오자마자 거친 천 조각이 제 코를 틀어막는 것을 느꼈다.

“으븝!!! 읍!!!?”

솥뚜껑만 한 손이 눈을 가리고 목을 억눌렀다. 매캐한 연기 냄새 같은 것이 자꾸만 목구멍을 따갑게 했다. 시시각각 의식이 흐려지는 오진해의 머릿속에 미려방을 향해 욕을 해 대는 거친 깡패 형제 놈들이 떠올랐다. 그놈들이 뒷문을 알 리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좀 더 조심하지 않은 자신이 한심해 온갖 욕설이 터져 나왔다.

‘으으, 씨발! 아직 장가도 못 갔는데!’

웃기게도 흐려지는 머릿속에서 마지막으로 떠오른 건 하지도 못한, 어쩌면 하지도 못할 혼인에 대한 미련이었다. 오진해는 짚신도 짝이 있는데 나는 왜 이 모양 이 꼴이라며, 돈이라도 없으면 아무한테나 꼴리는 몸으로라도 태어났어야 좋았을 것이라고 온갖 헛생각을 일삼다가 마침내 시야가 새까맣게 변하며 까무룩 정신을 잃어버렸다.

* * *

“……의 향이 희미하게나마…….”

“……했다. 이놈이 틀림…….”

“어떻게 할…….”

몇 시진이나 지났을까. 진해는 머리통이 깨지는 듯한 아픔에 억지로 두 눈을 치켜떴다. 온몸이 아픈 것이 몸살이라도 났나 싶었는데 시선을 아래로 내려 보니 몸살이 난 게 아니라 온몸이 꽁꽁 묶여 있었다.

‘오, 제법 쓸 만한데? 급하게 묶었는데도 예쁘게 잘 묶었어. 무력화시키면서도 숨이 막히지 않게 묶은 게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군! 하지만 우리 동네 사람이 묶는 거랑은 달라. 애정이 없네, 애정이. 이건 진짜 묶은 거야! 나, 진짜로 잡힌 거라고!’

게다가 온몸이 묶인 거로 모자라 커다란 자루에 통째로 들어가 있는 듯했다. 오진해의 기억 어딘가에서 한씨 형제들이 사람을 토막 쳐 마른 우물에 버렸다는 소문이 떠올랐다. 설마 지네 기분이 나쁘다고 사람을 토막 치진 않겠지?! 오진해는 피부에 다닥다닥 소름이 돋는 걸 느끼며 미려와 한씨 형제 사이의 갈등이 제발 별것 아니길 빌었다. 미려방에서 파는 술이 아니라 외부에서 파는 술을 들여왔다든 가, 아니면 질 나쁜 춘약을 들여왔다든 가.

‘응? 잠깐, 춘약?’

미려방에서 판매하는 춘약은 잠춘동뿐만 아니라 바깥에서도 정력제로 사용하는 건전한 물건이었다. 미려방의 방주는 금전에 관심이 없는지 삼급 기루에 불과한 미려방에서도 절대로 질 나쁜 춘약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어쩌면 미려방의 일패이자 양자인 미려를 위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미려는 창기가 아니라 가기라서 춘약을 사용할 일이 없었지만 멍청한 손님들 눈에는 창기나 가기나 그게 그거였고 미려에게 섣불리 약을 사용하려 할 수도 있었다.

‘헉, 설마?!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아니지? 설마, 진짜 아니지?!’

오진해는 답답한 자루 속에서 불편하게 누운 채로 상황이 제 마음대로 아귀를 맞춰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모든 것이 오진해의 추측이고 억측이면 좋으련만 우연이라고 하기에 모든 것이 너무나 딱 맞아떨어졌다. 확실히 한씨 형제 놈들이라면 어디선가 탈정고를 구해 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간땡이가 부은 놈들답게 그것을 미려방에 넣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진해는 식은땀으로 등이 축축해진 걸 느꼈다. 탈정고라면 사람을 죽일 정도는 아니라도 사람을 잡아 몇 대 때려서라도 입막음을 할 가치가 충분한 물건이었다. 아무래도 한씨 형제들을 고용한 높으신 분이 재미를 보려다가 미려의 방해 탓에 실패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분의 분을 풀기 위해 복수 차원에서 끌려온 것이고.

“깨워라.”

그리고 잠시 후, 울림이 굵은 목소리가 호명함과 동시에 자루가 쑥 벗겨졌다. 진해를 끌고 온 사내는 힘이 어지간히 장산지 그리 작은 체구가 아닌 진해를 마치 짐짝 다루듯 가볍게 끌어냈다.

“아이구!!”

휙 굴리는 바람에 턱을 찧고 말았다. 이 망할 자식이 누구 얼굴에 상처를 내려는지 모를 일이었다. 미려방 일패인 미려가, 귀여운 내 동생이 홀딱 반한 얼굴에 생채기를 내다니 우부(母)가 바람이 나 새 서방과 천 리 밖으로 도망갈 놈이었다.

아픔이 가시자 눈앞에 보이는 건 검은 가죽에 금빛 실로 수를 놓은 엄청나게 비싸 보이는 신이었다. 잠춘동에서는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을 고급품이었다. 오진해는 입을 헤 벌리고 촛불에 번쩍번쩍 광이 나는 신을 쳐다보다가 눈을 들어 슬그머니 신의 주인을 훔쳐보려 했다.

“네놈. 뭐 하는 놈이냐. 누구의 사주를 받았는지 바른대로 고하거라.”

그리고 목소리에서 서릿발이 뚝뚝 떨어지는 신의 주인은 그야말로 옥을 깎아 만든 듯한 호남이었다. 후리후리하게 큰 키며 떡 벌어진 어깨, 늘씬하게 잡힌 허리에 귀티 나는 봉의 눈까지. 내가 바로 용자봉손이다라고 얼굴로 말하는 듯했다.

“이놈이, 어서 도련님 묻는 말씀에 대답하지 못해!”

“아이쿠!”

오진해가 잠깐 넋을 뺀 사이 도련님이라 불린 이의 시종인지 하인인지 나발인 놈이 오진해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세게 걷어차진 않았지만 예기치 못한 공격인지라 오진해는 온갖 엄살을 부리며 크게 소리쳤다.

“아야야, 나 죽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놈이 오늘 이 자리에서 덧없이 뒈지는구나! 아버지, 가실 거면 나도 같이 데려가시지 왜 날 두고 혼자 가셨소! 아고고고, 나 죽는다! 나 죽어!”

“허, 이놈 보게? 어느 안전이라고 이렇게 엄살을 부려?! 뚝 그치지 못해!”

“사람 살려!!! 게 아무도 없소!! 여기 사람 때려죽인다!! 사람 살려!!”

“이놈이!”

눈썹이 숯을 붙여 놓은 것처럼 진한 사내는 진해가 발버둥 치며 소리치자 진해의 옆구리를 한 번 더 걷어차려 했다. 사내가 다리를 드는 순간 진해가 목청을 돋우며 더욱 크게 비명을 질러 댔다. 목청이 어찌나 좋은지 봉목의 호남, ‘도련님’이라 불리던 이의 미간에 옅게 주름이 졌다.

“그만.”

도련님은 숯 검댕이 눈썹을 말 한마디로 멈췄고 진해 역시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너무 시끄럽게 굴지 말고 적당히 닥쳐 줘야 나갈 방도가 생기는 법이었다.

“이놈은 내가 심문할 테니 넌 나가 보거라.”

“하지만, 마, 아니 도련님!”

“내가 이런 놈 하나 다루지 못할 성싶으냐? 하긴. 고작 그깟 저급한 수에 넘어간 주인이 얼마나 우습게 보이겠느냐. 내게 실망했다면 억지로 붙어 있을 필요 없다. 지금 당장 너 좋을 대로 썩 가 버리거라.”

“아, 아닙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오직 도련님께만 충성하는 도련님만의 종복입니다! 부디 못난 놈을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해 주십시오!”

게다가 도련님과 종복의 사이가 묘하게 어긋나 보였다. 저 못된 숯 검댕보다 이 도련님 쪽이 훨씬 말이 잘 통할지도 몰랐다. 숯 검댕은 진해를 찌릿 노려보다가 덩치에 맞지 않는 공손한 태도로 절을 하며 물러났다. 진해는 끙 소리를 내며 차이지 않은 옆구리 쪽으로 누우려 했다.

“켁!”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아무래도 오진해가 패를 잘못 집어도 한참 잘못 집은 듯했다. 차라리 옆구리를 걷어차던 숯 검댕이 훨씬 더 좋은 선택인 것 같았다. 도련님은 숯 검댕이 나가자마자 진해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이 집 사람들은 힘이 다 장산지 숯 검댕은 물론이요, 도련님마저 진해를 가벼운 짐짝 다루듯 했다. 진해는 목이 졸려 캑캑 숨넘어가는 소리를 했다.

“이 천한 놈아, 당장 바른대로 고하거라! 입을 찢어 놓기 전에 바른대로 말하지 못해! 대체 내 몸에 무슨 짓을 한 거냐, 어서 빨리 말하지 않으면 너는 물론이고 일가의 씨를 말려 버릴 것이다! 어서 말해, 빨리 말해!!!”

“켁, 잠깐만, 잠깐, 도련님, 잠깐만, 좀 놓고, 놓고 말합시다!”

진해의 멱살을 쥐고 짤짤 흔들던 도련님은 분을 이기지 못했는지 진해를 바닥에 팽개쳐 버렸다. 숨을 고른 진해가 꿈틀거리며 올려다보자 도련님은 이마를 짚은 채 뒤로 서 있었다. 어지간히도 화가 났는지 진해에게 들릴 정도로 숨이 거칠었다. 진해는 애벌레처럼 꿈틀꿈틀 기어가 도련님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도련님을 가만히 올려다보는데,

“응……?”

입술을 질끈 깨문 얼굴이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틀어 올린 머리칼이며 화려한 옷, 서늘하고도 강건한 기세 탓에 알아보지 못했었는데 저 열 오른 얼굴은 탈정고를 먹고 저와 뒹굴었던 바로 그 음인이 아니던가!

“헉, 예쁜이!?”

“닥쳐!”

“넵.”

오진해는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엿 됐다는 생각을 했다. 아까는 불쌍한 척하느라 행방불명된 (아마도 비명횡사했을) 우부를 불렀는데 이번엔 정말로 우부에게 저를 지켜 달라 빌어야 할 것 같았다. 그냥 양갓집 음인이어도 뺨을 맞을 판인데 이런 으리으리한 댁의 도련님이라면 뺨이 아니라 맞아 죽어도 말 한마디 못 꺼내 볼 터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진해는 총각 귀신으로 생을 마감할 판인데도 가슴속 깊은 곳에서 참을 수 없는 기쁨이 솟구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기쁨은 반가움의 색채를 띠고 있었다. 오진해는 자신의 추억으로만 남을 줄 알았던 음인과 다시 만났다는 기쁨에 당장이라도 덩실덩실 춤을 추고 싶었다. 현실은 바닥에 누워 꿈틀거리는 게 다였지만 어쨌든 오진해는 이 도련님과 다시 만난 게 너무나도 기쁘고 감동적이었다.

“저, 도련님?”

“…….”

“근데 제게 뭘 말하라는 건지 자세히 좀 이야기해 주시면 안 될까요? 이왕이면 이것도 좀 풀어 주시구요. 전 묶는 건 좋아하지만 묶이는 건 영 별로라서.”

“……하, 미친놈.”

도련님은 오진해를 풀어 주는 대신 헤실헤실 웃는 그를 끌어 의자에 앉혀 놓았다. 그리고는 상한 음식을 먹는 것처럼 우거지상을 한 채 손을 뻗어 오진해의 손목을 묶은 끈을 풀어 주었다. 발을 풀어 주면 오진해가 도망칠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오랫동안 묶여 있던 팔이 자유를 되찾자 찌릿하면서도 날카로운 감각이 오진해의 신경을 자극했다.

“네놈, 그때 날 속였겠다. 분명히 해독법을 안다지 않았느냐.”

“당연히 알죠! 잠춘동에서 짬밥 좀 먹은 사람이면 다 알고 있을걸요? 낭중한테 돈을 받고 시범 삼아 먹어 본 사람들도 있었는데요, 뭘. 그중 하나는 그때 그걸 먹고 씨를 어찌나 옴팡지게 뿌렸는지 서방이 단번에 쌍둥이를 임신했지 뭡니까. 사람이라 망정이지 고양이나 개였으면 백 쌍둥이를 낳았을 거라고―”

“거짓말하지 마라! 그렇다면 어찌하여 내 몸이……!”

“도련님의 몸이?”

“내, 몸이……!”

“몸이?”

“이런 제기랄!”

어리둥절한 표정을 한 진해와 눈을 마주친 도련님은 어울리지 않는 욕설을 뱉으며 오진해 옆의 의자를 세게 걷어찼다. 의자는 잠춘동의 것과 다르게 제대로 된 목재로 만든 듯했는데 도련님이 걷어차자마자 순식간에 방 저편으로 날아가 버렸다.

“헉! 도련님 몸이 어떠시길래 그러세요?! 제가 왕년에 그 낭중의 조수 노릇을 했었답니다, 네, 그렇고말고요!”

저렇게 걷어차였다가는 갈비뼈가 단번에 딩동댕동 부러질 게 분명했다. 오진해는 침 한번 놓을 줄도 모르면서 알량한 제 목숨을 살리기 위해 절박하고도 애타는 목소리로 도련님을 연호했다.

“후…….”

그런 진해의 정성이 통한 것인지 도련님은 자신의 화를 가라앉히려 노력하는 것 같았다. 최소한 진해의 갈비뼈를 동강 낼 생각은 아닌 듯했다. 진해가 침을 꼴깍 삼키고 있자 옆구리를 짚은 도련님이 거한 한숨과 함께 읊조렸다. 개미처럼 작은 목소리라서 진해는 도련님의 말을 듣기 위해 토끼가 된 것처럼 귀를 쫑긋거려야 했다.

“……풀리지 않았다.”

“예?”

“탈정고의 독이, 아직 풀리지 않았다. 탈정고의 기운이 가시기 않아서, 자꾸, 자꾸, 몸이…….”

아하.

진해는 그제야 일이 어떻게 돼 가는지 알 것 같았다. 이쪽 동네에 처음 들어온 이들에게 흔히 벌어지는 일이었다. 진해는 저도 모르게 헤벌쭉 웃었다가 서릿발 같은 시선을 받고 급하게 진지한 표정을 꾸며 냈다. 탈정고의 독이 풀리지 않았다면 저를 붙잡아 올 게 아니라 아무 사내나 붙들고 방아를 찧고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아닌 걸 보아 십중팔구 진해가 예상한 그 상황이 맞는 듯했다.

‘이히힛, 귀엽게도! 처음이 너무 강렬해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잖아!’

진해는 커다란 사내를 보며 너무나 어려 눈도 채 뜨지 못한 강아지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런 강아지를 보면 골려 주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아닐지 몰라도 오진해는 어린 강아지를 골려 주며 잔뜩 귀여워해 주고 싶었다. 낑낑대며 울던 어린 것이 제 손을 핥았을 때의 사랑스러움은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알 수 없는 극상의 사랑스러움이었다.

“탈정고의 독이 풀리지 않으셨다고요? 그걸 왜 이제 말하세요! 그거 참으로 큰일입니다, 탈정고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들어 나중에는 화타가 와도 손을 쓸 수가 없다구요!”

“아니, 시간이 지나니까 좀 나아지는 것 같기도 한데―”

“그게 바로 탈정고가 속으로 파고들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잠을 자지 않고 지켜보는 거였는데! 아, 제 불찰입니다! 제 잘못이에요!”

그리고 오진해는 그 사랑스러움의 향기에 취해 제멋대로 입을 놀리기 시작했다. 욕망에 충실한 사내인 오진해는 자신이 방금까지 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는 사실을 몽땅 잊어버리고 말았다. 잠춘동에서 이리저리 굴리느라 반사기꾼이라는 별명을 얻은 혓바닥이 그런 진해를 힘껏 도와주었다. 진해의 얼굴 가죽은 그런 혓바닥이 내뱉는 곡조에 맞춰 찌푸렸다가 펴지고, 펴졌다가 다시 찌푸려지기를 반복하였다.

눈앞의 도련님은 예상과는 다른 진해의 태도에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다. 도련님이 바라보는 진해는 마치 손안의 자식을 잃은 것처럼 애통하기 그지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잡아 오기 전까지는 산 채로 포를 뜰 생각이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놈은 처음 만난 그때도 자신을 덮어 놓고 범하려 한 것이 아니라 독에 관해 설명을 해 주며 자신의 동의를 구해 왔었다. 자신이 망설이자 미련 없이 돌아서기까지 했었다.

물론 치료라는 명목으로 행했던 파렴치한 행위들이 용납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눈을 뜨고 난 다음에는 사시나무처럼 떨리며 오한이 일던 몸도 따뜻해졌고, 미친 듯이 흐르던 액도 잦아들었으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우뚝 섰던 양물도 얌전히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었다.

그러나 몸이 괜찮아졌다고 마음까지 괜찮아진 건 아니었다. 사내는 자신이 미혼약을 먹고 이름도 알지 못하는 잡것과 몸을 겹쳤다는 사실이 몸서리치게 끔찍했다. 그리고 더욱 끔찍한 건 이 끔찍한 사실이 사내의 기억 속에서 가장 강렬한 쾌감으로 자리 잡았다는 점이었다. 사내는 더럽고 너절한 바닥 위로 뜨끈한 오줌 줄기를 쏟아 내는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아래가 지끈거리고 숨이 더워지며 발끝이 절로 오므라들었다.

그런 추잡한 짓을 하고 쾌락을 느끼다니. 독의 영향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분명 이놈이 자신에게 뭔가 사특한 술수를 부린 것이다. 그 증거로 이놈은 자신이 탈정고라는 미혼약을 먹은 기방의 뒷문으로 기어 나왔다.

“흥, 제법이로구나.”

사내는 손을 뻗어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진해의 턱 끝을 들어 올렸다. 들어 올린 얼굴은 빈말로도 미인이라 할 수 없는 모양새였다. 까무잡잡한 피부는 말할 것도 없고 콧대와 입술에는 가느다란 흉터가 자리 잡고 있었다. 머리칼도 거칠거칠해 보이는 게 꼭 잡종 개의 터럭을 갖다 붙여 놓은 듯했다. 볼만한 것이라곤 또랑또랑한 눈동자뿐이었다.

“탈정고에 대해 나도 좀 알아보았지. 이 약이 주는 쾌락 때문에 중독되는 이가 많다더군.”

“그랬지요?”

“쾌락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미진의 열이 끝없이 커져만 간다. 관의 기록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어쩌면 네놈 말대로 탈정고가 속으로 파고드는 현상을 기록한 것일지도 모르지.”

“아, 그렇게 적어 놨습니까? 역시 먹물깨나 먹은 양반들이라 그런지 표현하는 것도 참 멋들어지게―”

“그리고 넌 바로 탈정고의 이 점을 노린 것이 아니냐. 대충 해독을 해 주는 척 안심시키고 탈정고가 내 속으로 파고들게, 그래서 내가 중독되어 힘을 쓰지 못하게 그렇게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냐, 이 말이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나는 네놈에게 감탄하지 않을 수 없군. 하마터면 완전히 넘어갈 뻔했지 않느냐. 이대로 약에 몸을 해할 뻔했어.”

말을 마친 사내는 목이 마른지 혀를 내어 살짝 입술을 적셨다. 진해는 사내의 말이 끝나자마자 저도 모르게 입을 떡하니 벌리고 있었다. 침통한 척 꾸미던 표정이 싹 사라져 있었다. 그 표정을 바라보며 사내는 자신이 크나큰 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동시에 자신이 생각보다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 그리고 이성적이지 않다는 점 또한.

“그으― 러려고 한 건 아닌데 결과적으로 그리된 것 같죠?”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사내의 말도 안 되는 비약을 부인해야 할 진해가 고개를 힘차게 위아래로 끄덕였다. 사내는 하마터면 얼굴 위로 표정을 다 드러낼 뻔했다.

“제가 참으로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예, 그렇고말고요! 귀하신 분께서 제 어설픈 처치로 얼마나 큰 고난을 겪으셨을지 상상도 가지 않습니다. 혹여 아프거나 불편하신 곳은 없으셨는지요? 손목이라든가?”

“……없었다.”

“휴. 그럼 아직 늦지 않은 겁니다! 지금이라도 치료를 서두르면 탈정고를 완전히 뿌리 뽑을 수 있어요! 자, 도련님! 어서 절 풀어 주세요! 제가 이번에야말로 도련님의 독을 완전히 해독해 드리겠습니다!”

“뭐……!?”

게다가 진해는 한술 더 떠 자신이 먼저 사내의 독을 다시, 해독해 주겠다고 했다. 사내가 진해를 잡아 온 목적과는 정반대의 대답이었다. 사내는 진해를 심문하면 진해가 잘못을 빌며 그에게 미혼약을 먹인 배후나 해독약의 위치 등을 실토할 줄 알았다. 그의 측근 역시 그것을 위해 충성스럽게 진해를 납치해 왔다. 그런 측근의 정성을 봐서라도 사내는 진해에게 어떻게든 원래의 목적을 쥐어짜 내야 했다. 이 일의 배후를 밝혀내 완전히 뿌리를 뽑지 않으면 자신에게 또다시 이런 일이 없으리란 법이 없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사내는 진해의 말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 치부하고 뺨을 때리든 주리를 틀든 해서 심문을 이어 가야 했는데 이상하게 자꾸만 진해의 손만 바라보았다.

―찝찔한 맛을 가진 손이었었다. 굳은살이 박인 거친 손가락이었었다. 손가락이 입천장을 문지를 때마다 입천장이 녹아 사라지는 것 같았다. 거친 사포로 문지르는 것처럼 불꽃이 튀는 듯했다. 섬세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보이는 손이 종횡무진 제 몸 위를 기어 다녔다. 짧게 깎은 손톱 끝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사내는 제 가슴 끄트머리로 베는 듯한 예리한 감각이 스쳐 지나감을 느꼈다.

이것을 독이라 말하지 않으면 뭐라고 말할 것인가. 독이다, 참으로 지독한 독이다. 말을 말리고, 피를 말리는 몹쓸 놈의 독이다.

사내는 몇 번을 다잡았지만, 사내의 몸은 이미 사내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사내의 시선은 진해의 손톱 끝을 지나 손가락, 손마디, 팔목이며 정강이, 두둑한 샅과 마침내 둔중하게 빛나는 두 눈동자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눈동자를 바라본 사내는 진해에게 이제 막 내렸던 평가를 철회하기로 했다. 저놈의 눈동자는 볼만한 것이 아니라 그가 봐 왔던 눈동자 중 가장 날카롭고 예리한 눈빛을 띠고 있었다.

헤실헤실 웃는 눈매를 검집 삼아 숨기고 있던 검이었다. 어쩌면 검이 아니라 이빨이 어울리는 표현일지도 몰랐다.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찌르고, 물어뜯을 것만 같았다. 사내는 진해의 눈동자 속에서 다리를 벌린 채 힘없이 널브러진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눈 속의 자신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뭔가에게 뱃구레를 뜯어먹히는 중이었다.

“이번 한 번만,”

말하는 입술 사이로 더운 숨이 새어 나왔다. 사내는 자신의 숨이 지나치게 뜨거워 입술이 녹아내리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지경이었다.

“딱 한 번만 기회를 더 주마. 생목숨을 함부로 거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네가 나를 치료하려 함이 진심인 듯하여 특별히 한 번만 기회를 더 주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도련님!”

벙실거리며 웃자 진해의 눈동자를 덮고 있던 예리한 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러나 사내는 그 기운이 사라지지 않고 기회를 엿보며 맴돌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물론 점쟁이나 도사도 아닌 사내가 진해의 머릿속을 훤히 알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진해가 아닌 사내 자신만의 감각일 것이다. 눈앞의 이 파렴치하고 하잘것없는 것에게 투영된 그의 마음일 것이다.

“도련님, 여기 앉으세요.”

진해는 발이 묶인 채로도 잘 걸어 다녔다. 사실 걷는 게 아니라 외발이 허수아비처럼 한 발로 콩콩 뛰어 일어난 것이다.

“흥.”

진해가 제 손으로 발목을 푸는 걸 보며 사내는 뱃속 깊은 곳에서 낯설고도 생경한 감각이 꿈틀대는 것을 느꼈다. 탈정고였다. 필시 탈정고가 또다시 독을 뿜고 있는 게 분명했다.

“엇차, 좋은 의자라 그런지 꽤 무겁네요. 이 단단한 걸 어떻게 그리 가볍게 차 날리셨대.”

“뭘 하는 거냐.”

진해는 발이 자유로워지자 사내가 저만치 걷어찬 의자를 가져와 다시 제대로 놓아두었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모습이라 사내는 하마터면 진해를 집의 하인으로 착각할 뻔했다.

“저는 거사를 치르기 전에 정리를 해 두는 버릇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어떠세요? 이 의자 평소랑 똑같이 보이십니까?”

“의자 따위가 뭐가 그리 중하다고. 그래, 잘 놓았구나. 평소에도 바로 그런 식으로 놓아두었다.”

“다행입니다. 그럼 도련님.”

진해는 의자를 놓아두고 주변을 주섬주섬 정리해 사내가 아는 평소의 내실과 비슷하게 만들어 놓더니, 바닥에 떨어져 있던 포승줄을 주워 들고 사내의 앞에 쭈그렸다.

“해독에 앞서 진찰을 할까 하는데 괜찮으세요?”

“진찰을?”

“예, 아무래도 탈정고가 속으로 얼마만큼 파고들었는지 확인을 해야 어떻게 해독을 할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리고 해독이라는 말을 듣자 사내는 제 몸이 급격히 긴장하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목이 타는 듯하기도 했다. 해독을 하든 뭘 하든 의술을 펼치기에 앞서 진찰을 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임에도, 이때까지 의원에게 수십 수백 번을 진찰을 받았는데도, 진해가 입에 담은 진찰이라는 단어는 이때까지 사내가 알고 있던 진찰이라는 단어와는 다른 글자를 가진 것 같았다. 아마도 진해가 의원과는 백만 광년 동떨어진 작자라 그럴 것이다.

“이거, 마음에 안 드시나요?”

“어, 응?”

“싫지는 않으신 것 같은데요 ? 아까부터 계속 보고 계시잖아요.”

게다가 사내를 더욱 당황케 했던 것은 자신이 저도 모르게 진해의 손에 들린 포승줄을 보고 있었다는 점이다. 사내는 진해가 그것을 지적하기 전까지 자신이 그러고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묶, 을 것이냐?”

“아무래도 묶는 쪽이 수월하죠? 잘 묶으면 평소엔 안 보이는 곳도 훤히 볼 수 있거든요. 물론 오늘은 그렇게까진 안 할 거예요. 오늘은 진찰이니까 이렇게 살짝,”

“읏―”

“의자랑 다리를 고정할 겁니다. 손은 도련님이 편하신 대로 하세요. 붙잡으시든지, 문지르시든지. 도련님, 이렇게 해도 괜찮을까요?”

진해는 말과 동시에 사내의 정강이를 각각 의자의 다리에 붙여 놓았다. 진해가 사내의 다리를 밀자 진해의 손바닥에 감겨 있던 포승줄이 사내의 다리에 묵직하게 들러붙었다.

“……그리하거라.”

붉은 포승줄은 진해가 붙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생명을 얻고 제 맘대로 사내의 다리를 옥죌 듯했다. 사내는 진해가 줄로 다리를 감고, 슬그머니 옥죄며 허락을 구하자 한숨을 쉬는 것처럼 가볍게 진해의 진찰을 허가해 주었다.

사내의 허락이 떨어지자 진해는 사내의 다리를 단단한 흑단목 의자에 갖다 붙이고 붉은 포승줄로 사내의 다리를 의자의 기둥에 단단히 동여매기 시작했다. 앞의 두 기둥뿐만 아니라 뒤의 두 기둥까지 교차해 가면서 팽팽하고 튼튼하게 사내를 의자에 옭아매었다.

사내의 다리를 감지 않은 줄은 허공에서 피를 머금은 거미줄처럼 기이한 문양을 그려 내었다. 진해가 줄을 한번 잡아당길 때마다 사내는 그에 맞춰 거친 숨을 토해 냈다. 포승줄이 교차하는 소리 탓에 거의 들리지도 않을 정도였지만 사내의 아래에 자리 잡은 진해에게는 고스란히 전해지는 그런 숨소리였다.

“단단해졌네요.”

“읏?!”

그리고 진해는 예고도 없이 갑작스레 사내의 정강이를 눌러 버렸다. 손가락으로 누르자 감긴 줄 사이로 볼록하게 솟아오른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인지하지 못했던 저릿한 감각이 손가락이 붙었다가 떨어지자 강하게 솟구치기 시작했다. 쥐가 난 것과 유사하면서도 다른 감각이었다.

“자, 그럼 진찰을 시작하겠습니다.”

사내가 생전 처음 느끼는 감각에 당황하는 동안 진해는 아주 태평하게 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진해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내의 가까이 다가오더니,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도련님~”이라 말하며 사내의 눈이며 코, 입이나 귀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설마 이놈 정말로 낭중의 조수였던가. 반쯤은 진해의 말을 믿지 않고 있던 사내는 진해가 제법 진지한 눈으로 바라보자 살짝 믿음이 생기려고 했다. 진해가 자신의 귓바퀴를 문지르자 시원한 느낌마저 드는 것이다.

“역시 겉으로 봐서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실컷 얼굴 여기저기를 매만지던 진해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내는 그만 어이가 없어졌다.

“역시나 속을 봐야 알 것 같습니다.”

“속이라니?”

“속이라면 아무래도 거기지요.”

“무슨 말이냐, 거기가 어딘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겠느냐!”

“거기가 거기가 아니면 또 어디가 있겠습니까. 탈정고가 도련님의 거기에 영향을 미치잖습니까. 그러니까 겉으로는 보이지 않아도 거기를 보면 탈정고가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훤히 보이지 않겠습니까?”

자못 진지한 듯 말하고 있었지만 진해의 손바닥은 그리 진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진해의 손바닥이 사내의 허벅지를 슬금슬금 문지르자 사내도 이젠 진해가 말하는 거기가 어딘지 어렴풋이, 아니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크윽…….”

막상 진해에게 진찰을 하라고 했지만 또다시 그런 수치스러운 꼴을 겪게 될 거라고 생각하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제 입으로 진해에게 거기를 봐 달라고 말하려니 모욕감에 눈물이 다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사내의 거기는 탈정고에게 완전히 점령당했는지 진해의 체온이 가까이 다가온다는 것만으로도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옷자락이 덮여 드러나지 않았지만 사내의 거기는 진해가 사내의 다리를 묶고, 불거진 근육을 쿡 찔러 자극을 주는 순간 진해의 부름에 응하듯이 번쩍 고개를 치켜들었다.

“보, 보거라. 내, 거기를, 거기를 봐도, 좋다.”

간식을 기다리는 순한 강아지처럼 저를 올려다보는 눈을 외면하며 사내는 씹듯이 내뱉었다. 그런 사내의 귀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예! 그럼 사양 않고.”

진해는 사내를 재촉하지 않고 기다리다가 사내의 앞을 가린 상의 자락을 번쩍 들어 올렸다. 어찌나 망설임 없이 쉽고 빠르게 들어 올리는지 옷자락이 아니라 변소의 문짝을 걷어 올리는 듯했다. 탈정고에 중독된 가여운 일부가 두 겹의 얇은 천 아래서 야트막하게 융기를 이루고 있었다.

“흠, 흠.”

진해는 상의 자락을 제 손으로 붙잡고 도톰하게 솟은 부분을 감상했다. 사내는 이번이 두 번째인데도 훌륭하게 진해의 인도를 따라오고 있었다. 어쩌면 묶이는 게 좋은 걸지도 몰랐다. 진해는 사내가 묶이는 걸 좋아한다고 기억해 두었다.

“도련님, 맨살을 보겠습니다.”

소리는 없었지만 도련님의 그곳이 진해의 말에 충분히 답해 주었다. 천으로 덮여 있는 데도 진해의 눈에 보일 정도로 급격히 덩치를 키워 나갔다. 바지를 끌어 내리자 가볍게 느꼈는지 파르르 한 차례의 경련이 쓸고 지나갔다. 그때는 정신이 없어 잘 보지 못하였는데 이렇게 본 사내의 거기는 크기도 좋고, 모양도 좋고, 색도 좋은 상등품에 속하는 물건이었다.

“후―”

“하읏!”

게다가 감도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완만하게 치켜 올라가는 물건을 바라보며 진해는 혀 밑에 침이 고이는 걸 느꼈다. 살짝 시선을 돌려 보니 사내는 의자의 손잡이를 부서져라 꽉 움켜잡고 있었다.

“이거, 이거 보통 큰일이 아닌데.”

정말 큰일이었다.

“보기만 해도 이 꼴이라니. 일상생활은 가능한가? 막 남들 보는 곳에서 비비고 이러는 거 아냐?”

“뭣,”

“아니야? 그럼 아직 그까진 아닌가 보네. 참을 만하구만 뭘~?”

사내가 어리숙하게 구는 점이 진해의 가학심에 불을 지폈다. 이렇게 누군가에게 몰두하는 건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마치 처음으로 놀이를 배울 때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그래도 계속 생각났을 거야. 손목을 쓸 때나 변소에 갈 때나. 어떤 때 제일 많이 생각났어? 역시 오줌?”

사내는 진해가 말을 낮추자 눈을 부릅뜨고 진해를 노려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진해를 덮고 있는 옷자락을. 그러나 사내는 진해를 멈추는 대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진해가 그의 속옷을 벗기고 맨살갗을 드러내게 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데도 물건의 끝이 축축하게 젖어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진해를 보자마자 되살아난 기억이 심지에 불을 붙이는 것처럼 그의 몸에도 작은 불길을 일어 놓았다.

“읏―”

그리고 그 불길에 진해의 콧김이 닿았다. 진해의 이가 사내의 물건과 천 사이에 닿아 있었다. 손이 아닌 입으로 벗겨 내는 듯했다. 사내와 동침했던 누구도 사내의 옷을 입으로 벗기는 자는 없었다. 사내의 물건을 이렇게 외설스럽게 다루는 자도 없었다.

“하아, 하―”

그 점이 사내를 참을 수 없게 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홀대를 당해 본 적 없는 사내였기 때문에 누군가가 자신을 막 다룬다는 사실이 더할 나위 없이 자극적으로 다가왔다. 이것이 탈정고의 독 때문이라면 어쩌면 사내는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 단지 이렇게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오한이 일고 숨이 가빠지는 경지를 무슨 수로 치료해 낸단 말인가.

“아, 아아!”

그리고 갑자기 뜨거운 진흙탕 같은 것이 사내를 한꺼번에 집어삼켰다. 한 번에 꿀꺽 삼키더니 사내의 몸이 굳어지자 다시 뱉어 내고, 끄트머리를 매끄럽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응, 아, 거긴, 하으, 읏!”

몸을 뒤틀자 다리가 고정된 의자가 사내와 함께 요동쳤다. 지익, 의자가 바닥을 끄는 소리가 요란했다. 손잡이를 잡은 손마디가 새하얗게 변했다. 진해는 한마디도 없이 사내의 옷자락 아래서 충실하게 진료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너른 방 안에 울려 퍼지는 것은 삐걱대는 의자 소리와 사내 혼자만의 신음뿐이었다.

“크윽……!”

조금만 더 소리를 높이면 메아리가 칠지도 몰랐다. 어쩌면 바깥의 누군가가 사내의 신음을 들을지도 몰랐다. 이곳은 진해와 처음 만났던 빈민가의 골목이 아닌 수하 중 하나의 집이었다. 한두 번 드나든 게 아니라 집안사람 대부분이 사내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들어와서 지금 이 모습을 보게 되면 어떻게 될까. 다리를 묶인 채 다리 사이에 사내를 끼고 있는 모습을 보면 어떻게 될까.

비명을 지를 것이다. 온 집안의 사람들이 몰려들고, 더 많은 이들이 보게 되고, 이윽고 온 나라로 소문이 퍼져 나갈 것이다. 모두가 사내를 혐오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볼지도 모른다.

“아!”

가식적인 선망이나 동경이 담기지 않은 순수한 감정이 담긴 눈으로 볼지도 모른다. 무능력하고 무가치한 사내를 그제야 알아볼지도 모른다.

“읏, 하윽, 응……!”

그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몸속의 열이 가파르게 달아올랐다. 자유로운 손으로 진해의 머리를 떼 내는 대신 길쭉한 손가락으로 의자의 손잡이를 긁듯이 세게 어루만졌다. 익숙한 옷자락이 서서히 위아래로 움직이고 있었다. 쭉쭉 빠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어느덧 엉덩이 아래도 젖어 있었다. 앞쪽이 빨릴 때마다 뜨끈하게 달아오른 살이 저 혼자 물렁물렁하게 풀어졌고, 풀어진 틈으로 액이 흘러나온 것이다.

‘잘 먹고 잘 자란 도련님 건 맛이 다르구나.’

그러는 한편 사내의 옷자락 아래에서 진해는 사내가 알면 기겁할 만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전에 한번 빨아 주려던 게 생각나서 정성껏 빨아 주는데 도련님의 액은 진해가 먹어 왔던 액 중에서 가장 먹을 만한 맛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천 너머로 들리는 신음 소리는 사시사철 듣고 싶을 정도로 야하기 짝이 없었다. 도련님이 새였다면 도련님 새를 잡으려고 온 나라의 사냥꾼들이 총출동했을 것이다.

‘그리고 변태 중 제일 돈 많은 놈이 데려다 키웠겠지.’

진해는 도련님이 새가 아니라 사람이라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도련님이 새였다면 진해는 도련님 새의 응가도 구경하지 못했을 터였다. 그 생각을 하자 의욕이 마구 솟구치기 시작했다. 첫 경험은 강렬했지만 그 끝까지 강렬하진 못하다는 것이 진해가 가진 삶의 교훈이었다.

그렇다면 최소한 첫 경험의 여운이 가시기 전에 열심히 하자, 그래서 최소한 그놈 뭐 하나는 쓸 만했었지라는 기억을 남겨 주자!

“응, 아, 거긴…….”

진해는 도련님의 물건을 빨던 것을 멈추고 기둥 아래의 주머니로 입을 옮겼다. 입술로 하나씩 빨아들이자 도련님의 종아리에 잔뜩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단단하게 긴장한 종아리를 터뜨리듯 꽉 움켜쥐자 마치 도련님과 하나로 연결된 기분이 들었다.

삼켰다가 뱉고, 또 삼켰다가 뱉고. 진해는 얇은 가죽 주머니가 다치지 않도록 오로지 입술과 혀로만 그것을 갖고 놀았다. 진해는 자신이 가진 잔재주 중에서 이것이 가장 쓸 만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아무에게나 보일 수 없는 재주였기에 돈이 되는 일은 없었다. 미려가 장성하기 전에는 그럭저럭 쓸 일이 많은 재주였는데, 미려가 장성하여 그와 어울리던 이들을 몽땅 내쫓아 버리는 바람에 오랫동안 거미줄을 치고 있던 재주였다.

“그만할까?”

가느다랗게 앓는 소리 사이로 사내의 망설임이 섞여 들자 진해는 천 위로 빠끔 두 눈을 드러냈다. 코 아래는 별로 보여 줄 꼴이 못 되었다.

“…….”

진해가 멈추고 빤히 쳐다보자 사내는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두 눈을 굴렸다. 더운 숨으로 달아오른 입술을 잘근거리며 진해에게 몇 번이고 뭔가를 말하려 했다.

“치료, 그만할까?”

“……아니.”

물론 진해는 사내가 무엇을 말할지 알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달아올랐는데 멈출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진해는 그자의 앞에서 세 번을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며 당장 그 집의 종으로 들어갈 용의가 있었다.

“잘했어. 이번에야말로 끝까지 뿌리 뽑아야지.”

진해는 사내에게 실쭉 웃어 보이며 다시 사내의 다리 사이로 기어들어 갔다. 사내는 몰라도 진해는 애초에 사내에게서 뽑을 뿌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쩌면 진해가 사내에게 지금 뿌리를 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흐아……!”

그리고 진해는 이제 주머니를 갖고 놀던 것을 그만두고 질척질척하게 젖은 채 겹쳐져 있는 은밀한 부분으로 향했다. 어떤 곳보다 사내의 체취가 진하게 고여 있는 곳이었다. 음인 특유의 앙큼한 냄새가 났다.

“응?”

그런데 그때, 진해는 자신이 혀를 대려는 부분에 뭔가 이상한 문양이 있는 걸 발견했다. 그것은 오른쪽 허벅지의 안쪽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액으로 젖어 번들번들하게 윤을 내고 있었다.

“꽃이 폈네, 꽃이 폈어.”

농이 아니라 정말로 꽃이 펴 있었다. 번들거리는 표면 위에 타원형의 작고 하얀 점 다섯 개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흰색 점도 처음 보는데 꼭 누가 찍어 놓은 것처럼 꽃 모양으로 찍혀 있었다. 그것도 이렇게 코를 바짝 대야 겨우 알 수 있는 곳에.

“으응…….”

그리고 이 점의 주인인 사내도 자신의 몸에 이런 점이 있는 걸 모를 터였다. 꽃이 폈다는 진해의 말을 다른 것으로 알아들었는지 작게 신음하며 몸을 떨었다.

“아앗, 아!! 아!!”

저를 보라고 피어난 꽃을 어찌 외면할까. 진해는 꽃을 핥는 대신 사내의 허벅지를 벌리며 하얗게 피어난 꽃 위에 이를 박았다. 손가락 두 마디나 될 법한 면적을 집요하게 깨물고 핥아 올렸다. 할 수만 있다면 입 속으로 옮겨 놓고 싶을 정도로 앙증맞은 꽃이었다. 쭈욱 빨아올리자 입술에 닿은 허벅지가 부들부들 경련하기 시작했다. 의자도 함께 신음을 흘리는 듯했다.

‘입에 싼 사람은 있어도 귀에 싸는 사람은 처음이네.’

귀 옆이 축축하게 젖어 드는 것을 느끼며 진해는 다시 한번 흰 점 위에 입을 문댔다.

“하아―!”

그에 호응하듯이 사내의 물건 끝에서 또다시 흰 액이 주르륵 쏟아졌다. 바로 일어났다가는 길이길이 지저분한 인상을 남길 터였다. 진해는 사내의 옷자락 아래서 소매로 대충 입술과 귓가를 닦아 냈다. 완전히 깨끗이 닦아 낼 순 없었지만 안 닦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쑥 빠져나온 진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묶어 놓았던 사내의 다리를 풀어 주는 일이었다.

그러나 진해가 미처 도련님의 다리를 풀어 주기 전, 방 안의 미심쩍은 기색을 눈치챈 누군가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진해는 도련님의 발에 묶인 줄을 푸느라 알아채지 못했지만 그 인물과 눈을 마주친 도련님은 그만 뻣뻣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네 이놈!!!!!!”

“우왓!”

들어온 인물의 정체는 진해를 납치해 온 숯 검댕이 눈썹이었다. 숯 검댕은 도련님이 의자에 앉아 있고, 진해가 도련님의 다리 근처에서 줄을 들고 꼼지락거리는 모습을 보자마자 귀신 같은 얼굴을 하고 달려들었다.

“이놈이 감히 도련님을!”

“꺄악, 꺄악!! 사람 살려!! 살려 줘!!!”

가까스로 피하긴 했는데 주먹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입으로 낸 소리가 아니라 진짜 공기가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저 주먹에 맞았다가는 뼈도 못 추릴 것이 분명했다. 진해와 숯 검댕이 방 안의 기물들을 파손하며 서로를 쫓고 쫓는 동안 도련님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제 발의 줄을 풀어냈다. 진해가 아슬아슬하게 숯 검댕의 팔 아래로 기어 도망치는 동안 흘러내린 속옷과 바지를 단숨에 끌어 올렸다. 축축한 바지를 입는 건 꽤 불쾌한 일이었다.

“동십사(棟十四)! 멈춰라!”

그 후 손으로 붉어진 얼굴을 몇 번 문지른 사내는 숯 검댕의 이름을 크게 연호하였다. 진해는 숯 검댕, 이름을 동십사라고 하는 사내에게 붙잡혀 얼굴을 맞기 직전이었다.

“허엉, 도련님, 살려 주세요, 저치가 절 때려죽이려 합니다!”

동십사가 우뚝 멈춘 동안 진해가 그의 손을 뿌리치고 도련님에게로 달려와 찰싹 달라붙었다.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지는 통에 사내의 미간에 옅은 금이 생겨났다. 젖은 천이 스쳐 불쾌해진 탓이다.

“동십사, 네놈은 날 어디까지 우습게 볼 작정이냐. 내가 언제 너더러 들어오라고 했지? 어디서 버릇없이 고하지도 않고 함부로 고개를 들이밀어!”

“송구합니다!”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소리치자 동십사는 무릎이 부서지라 세게 꿇어앉았다. 무릎을 꿇고 큰 소리가 나게 바닥에 머리를 들이박았다.

바로 옆에서 사내의 일갈을 들은 진해 역시 저도 모르게 동십사의 옆에서 고개를 박을 뻔했다. 소리치는 사내의 목소리에서 숨길 수 없는 위엄이 줄줄 흘러넘쳤기 때문이다. 진해와 놀이를 할 때는 절대로 들을 수 없던 목소리였다.

“송구? 송구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냐? 동십사, 너는 근래 실망만 안겨 주는구나. 너는 내 몸을 지키지도 못했고, 행적도 파악하지 못했으며, 이제는 내 명까지 거역하고 있다. 그런 너를 내가 곁에 둬야 할 필요가 있느냐? 혹여 네게 다른 주인이 생겼는데 내가 아둔하게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아닙니다,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너마저 나를 무시하는 것이야!!”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사내와 동십사 간의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욕정으로 상기되었던 사내의 얼굴이 이제는 화로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물론 그 모습도 보기 좋았지만 화를 내는 사내의 앞에 꿇은 동십사는 빈말로도 전혀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었다. 시커멓던 낯빛이 허옇게 질려서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게 꼭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하늘에 맹세코 제 주인은 당신 하나뿐이십니다, 당신께서 저를 구해 주신 순간부터 저의 목숨은 당신의 것입니다!”

또한 동십사가 내뱉는 음성이 진해의 마음을 약하게 했다. 놀랍게도 진해는 어려서부터 용맹한 무장이나 충성스러운 문신을 마음속 깊이 동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것은 진해의 고국인 월나라가 이제 막 전화의 상처를 씻어 내고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허름한 잠춘동에서는 보기 힘든 인물이라 그런 걸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냥 진해 자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 할 수가 없어서 그런 걸지도.

어쨌거나, 동십사는 심문하는 소리가 없자 혼자 있을 도련님이 걱정되어 명을 어기고 들어온 것이 틀림없었다. 도련님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면 그냥 도련님이 부를 때까지 빈둥빈둥 놀고 있으면 그만이 아닌가. 그리고 진해가 진해가 아닌 정말로 무슨 자객 같은 거였다면 동십사의 결정은 백 번 천 번 옳은 것이었다. 진해는 그 마음을 갸륵히 여기며, 동십사가 저를 걷어찬 것을 용서하고 그를 살짝만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

“도련님, 그만 용서해 주시지요. 보아하니 저 형님께서 살짝 오해하신 듯합니다.”

“네가 낄 일이 아니다.”

“에이, 그러지 마시고 어여쁜 저를 봐서 한 번만 용서해 주시어요.”

“뭐?”

“저 형님을 용서해 주시면 제가 나중에 특급 안마로 시원하게 주물러 드리겠습니다!”

도련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은 채로 진해는 제 가슴을 주먹으로 탕탕 두드려 보였다. 씩 웃는 입가에 아직도 번들거리는 기운이 남아 있었다.

사내는 그제야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되돌아볼 수 있었다. 자신은 지금 오진해와 괴상망측한 짓을 하다가 들킨 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동십사에게 처벌을 내린다면 사람들은 자신이 한낱 정사에 넋이 나가 충성스러운 가신을 벌했다고 수군거릴 터였다. 아니, 동십사는 아직 눈치채지 못한 듯했으니 상황이 더 나빠지기 전에 얼른 마무리 지어 이 일이 새 나가지 않도록 하는 게 좋을 성싶었다.

“웃긴 놈 같으니. 됐다. 안마는 다음에 받도록 하고 이야기나 계속하지. 동십사, 너도 그만 일어나도록 해라. 다음에 또 마음대로 들어왔다가는 벌을 줄 테니까 그리 알고.”

“황공합니다!”

도련님은 그리 말하며 젖은 자국이 여실한 의자 위에 다시 주저앉았다. 진해는 도련님과 자신이 뭔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는지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하였으나 여기서 그 이야기가 뭔가요, 라고 물을 만큼 눈치가 없지는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진해는 도련님에게 쓸데없는 질문을 건네는 대신 포승줄을 주워 들고 얌전히 그의 곁에 다가섰다.

그러는 한편 일어나는 동십사를 가만히 구경했는데 동십사는 이마를 정말로 찧었는지 피부가 찢어져 살짝 피가 나고 있었다. 진해는 정말 독학 작자라고, 저런 독한 작자의 주먹에 맞으면 진짜 아플 거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혀를 내두르고 있었는데 동십사는 그런 진해와 정반대의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진해를 보는 눈빛이 훨씬 부드러워져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도련님을 말려 준 진해를 은인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결론적으로 묶는 법으로는 나를 납치하려 한 놈들을 알 수 없다는 거군.”

“네? 아, 네. 묶는 법이 워~ 낙 천차만별이라서요! 굳이 알아보려면 못 알아볼 것도 없겠지만 이리저리 쑤시고 다니면 금방 소문이 나겠지요?”

“그렇군, 확실히 네 말대로다.”

그리고 도련님 역시 눈치가 빠른 진해가 무척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자신이 던지는 말에 임기응변으로 막힘없이 대답하는 진해를 조금 감탄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도련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그자는 심문을 하려 데려온 것이 아니었습니까?”

동십사는 도련님과 진해가 대화하는 것을 바라보다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처음에는 그랬지. 의심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의심은 역시 의심일 뿐이었다. 동십사, 다시 소개하도록 하지. 이자는 내가 불온한 일당에게 사로잡히기 전에 내 몸을 숨겨 준, 그러니까 은인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예?!”

“내가 탈정고에 중독되었다는 걸 알려 준 것도, 해독해 준 것도 다 이자이지. 내가 의심을 했던 건 나를 너무나 적절한 시기에 구해 줘서였다.”

“아, 그런! 제가 그런 것도 모르고 공자 에게 무례한 언동을 일삼았군요!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공자 ! 제 주군의 은인은 제게도 은인이죠!”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요, 뭘!”

생전 처음 듣는 공자 소리에 진해의 입술이 둥근 곡선을 그렸다. 동십사가 진해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예를 차리자 눈매마저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조금만 놔두면 입에서 헤헤하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올 것 같았다.

“그럼 이제 남은 건 미려방을 조사하는 것밖에 없겠군. 그나저나, 넌 왜 하필 미려방에서 나온 거냐? 혹시 정말로 미려방의 사람인 것이냐?”

“음― 미려방에 속한 건 아니지만 미려방에 발을 걸치고 있기는 합니다. 제 동생이 미려방에 살거든요.”

오진해의 동생 강아지의 집은 함께 살던 잠춘동의 오두막이었지만 미려방의 일패인 정미려가 사는 곳은 당연히 미려방의 내실이었다. 미려는 방주의 양자가 된 후로 정든 집을 떠나 쭉 그곳에서 살고 있었다.

“동생이 미려방의 기생인가 보구나.”

“예, 미려방이 세워진 후로 줄곧 그곳에서 살고 있습죠. 제 동생은 저와 달리 여간 곱게 생긴 게 아니랍니다! 춤도 노래도, 아주 그냥 못하는 게 없어요!”

“그렇겠지. 삼급 기루치고는 꽤 신경을 쓴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미려방의 뒷문으로 나온 거였군. 한패가 아니라 그냥 발을 걸친 것뿐이었어.”

사내는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동십사는 조금 미심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는데 도련님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방 안에 도련님의 향이 지나치게 많이 퍼져 있어서 그런 거였다. 하지만 진해의 손에 들린 포승줄을 바라보며 동십사는 긴박했던 그 상황이 생각나서 그러신 모양이라고, 조사에 완전히 몰두하셔서 그러신 거라고 제 마음대로 납득해 버리고 말았다.

“근데 도련님. 혹시 탈정고를 드신 것 때문에 미려방을 조사하시는 거라면 별로 소득이 없을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얌전히 있던 진해가 도련님과 동십사가 눈이 둥그레질 소리를 내뱉었다. 충격적인 소리를 뱉은 것치고는 참으로 태연자약한 모습이었는데 어찌나 태연했는지 포승줄을 매듭지으며 연신 손장난을 치고 있었다.

“어째서 그리 말하는 것이냐? 혹여 네 동생이 걱정되어 그러는 거라면 염려할 것 없다. 무고한 자에게는 해가 가지 않게 할 테니 말이다.”

“아니, 제 동생은 알아서 잘하니까 별로 걱정은 안 되구요. 미려방의 일 처리가 워낙 빨라서 그럽니다. 미려방이 저 빈민가에서 성업하고 있는 비결이 바로 이 일 처리 때문이거든요. 지금 가서 캐 보셔도 아무것도 안 나올 거예 요. 미려방은 방규(房規)를 어긴 자를 용서치 않으니 도련님께 탈정고를 먹인 놈 자체가 이미 그곳에 없을 겁니다.”

“허어, 그런! 그럼 주군께 마수를 뻗친 놈을 영영 찾아낼 수가 없단 말인가!”

도련님이 하는 말을 보아하니 탈정고는 역시나 미려방에서 나온 물건인 모양이었다. 어떤 개놈인지는 몰라도 간이 배 밖으로 단단히 튀어나온 놈인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다 옛일이었다. 미려가 직접 쓸고 닦도록 지시한 이상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미려방의 방규에 의하면 금지 물품을 허가 없이 들였을 때는 두 팔 중 하나를 부러뜨리게 되어 있고, 손님에게 큰 해를 끼쳤을 때는 두 다리 중 하나를 부러뜨리게 되어 있으니 지금쯤이면…….

‘어떤 시부럴 놈이 우리 예쁜 강아지한테 자꾸 업을 쌓게 만드는 거야!’

진해는 해사하게 웃는 미려의 얼굴을 떠올리며 알지도 못하는 놈에게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그 천진하고 귀여운 것이 제 입으로 팔다리를 부러뜨리라고 말하는 장면을 상상하니 마음 한구석이 묵직하게 아파 왔다. 그러나 그 썩을 놈을 마냥 욕할 수는 없었는데 그놈이 도련님에게 탈정고를 먹인 덕분에 자신과 도련님이 이렇게 흐뭇한 만남을 가질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꼭 그놈을 잡으셔야 합니까? 탈정고는 해독되고 있고, 다친 곳도 없으시니 이대로 넘어가도 되잖아요?”

그놈은 반병신이 되어 응분의 대가를 치렀을 테니 진해는 되도록 이 일을 매끄럽게 덮고 싶었다. 왜냐면 도련님이 미려방에 가게 되면 미려와 대면하게 될 테고, 진해의 상대를 귀신같이 알아맞히는 미려가 분명히 도련님을 알아볼 터였다.

진해가 향을 덕지덕지 바르는 편이 아닌데도 미려는 진해의 놀이 친구를 척척 잘도 알아맞히었다. 보지도 않고 너구나, 라고 말하면서 아름다운 미소와 함께 강렬한 따귀를 선사해 주었다. 진해가 그렇고 그런 동네에서 따돌림당하게 된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건 아니 될 일이오! 도련님께 독을 먹이려 한 놈이 있는데 가만히 있으란 말인가!”

분개하는 동십사와 달리 도련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딱 봐도 전혀 좋아 보이지 않는 눈치였다.

“물론 도련님께 독을 먹인 건 잘못한 일이죠…….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는 게 맞구요. 근데 제가 미려방에 발을 걸치고 있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미려방은 진짜로 철두철미한 곳이란 말입니다. 어쩌면 도련님이 미려방에 오신 것 자체를 없던 일로 해 놓았을지도 몰라요…….”

진해는 도련님이 차라리 아무 말이나 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무슨 말이라도 하면 거기 맞춰서 지어내면 되는데 저렇게 입을 다물고 있으니 도통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도련님과 틀어지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도련님이 미려에게 따귀를 맞는 일 따위는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취향이 맞는 상대를 만난 참이었다. 온 동네 동무들에게 외면받는 진해에게는 가뭄 끝에 내린 단비나 마찬가지인 존재였다.

그러던 그때, 진해의 머릿속에 번쩍 한 줄기 빛이 내리쳤다. 미려방에 가지 않고도 도련님에게 탈정고를 먹인 놈을 알 방법이 떠오른 것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더니 어떻게 이런 생각을 다 해냈을까! 진해는 자신의 영특함이 대견해 스스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을 정도였다. 보는 이가 없다면 실제로 옳지, 옳지 개털 같은 머리를 어루만졌을지도 모른다.

“그럼 미려방에 가는 대신 탈정고를 만든 낭중에게 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탈정고를 만든 낭중? 아직 그자가 도성에 남아 있단 말이냐?”

“네, 잠춘동에서 제법 가까운 동네에 살고 있습니다. 잠춘동보다 쪼끔 살기가 나은 동네죠. 신접살림 차린다고 잠춘동에서 그쪽으로 이사 갔어요. 듣자 하니 요새는 고약을 만들어 입에 풀칠을 한다 합니다. 저도 그 고약을 써 봤는데 효과가 어찌나 좋은지 엉덩이가 생긴 종기가 하루 만에―”

“공자 , 뭔가 잘못 안 거 아니요? 탈정고인지 뭔지 하는 그 미혼약은 분명 관에서 단속을 할 정도로 지독한 약물이거늘 그 약을 만든 의원이 아직 도성에 살고 있다니?”

“의원이 아니라 낭중이라니까요.”

“낭중이건 뭐건! 관의 기록에는 분명히 장을 맞고 백 리 밖으로 유배를 갔다고 적혀 있었단 말이오!”

그러나 도련님과 동십사는 진해의 묘수에 오히려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칭찬을 기대하고 있었던 진해는 조금 속이 상해 버렸다. 이 양인 사나이 오진해가 진흙 속에서 진주를 건져 냈거늘 어찌 저런 표정을 짓는단 말인가.

“장? 유배? 그런 건 돈을 써서 사람을 사면 금방 해결될 문제잖아요. 탈정고로 번 돈이 얼만데. 자백할 놈 하나, 장 맞을 놈 하나, 유배 갈 놈 하나. 그리고 포교(捕校)한테 사례할 돈 조금이면 금방 해결될 일이구만 뭐.”

“허.”

잠춘동 일대에서는 흔해 빠진 일이기도 했다. 워낙 지리멸렬한 동네인지라 은전 한 푼에도 별일을 다 했고, 제 목숨 보전을 위해서도 별짓거릴 다 했다. 잠춘동을 담당하는 포교도 아랫동네인 잠춘동 일에는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가벼운 절도 사건은 받아 주지도 않았고 주먹다짐은 말 몇 마디로 해결 보았다. 조서를 꾸미려면 한쪽이 반신불수는 되어야 했다. 살인 정도는 되어야 포교의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 올릴 수 있었다.

터무니없을 정도로 해이한 치안이었지만 그나마 이것도 진해가 태어날 무렵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나아진 것이라고 했다. 진해가 태어나기 전에는 옆 나라 해국과 피 터지게 싸우느라 온 나라에 거지가 넘쳐 나고 살인과 절도가 불 일듯 일어나곤 했다고 하니 .

“월국 각지에 대월률이 닿지 않는 곳이 없거늘 어찌 그리 방자하게…….”

심드렁하게 말하는 진해 앞에서 동십사는 침울함을 감추지 못했다. 진해는 동십사가 소도둑놈같이 생긴 겉모습과 달리 좋은 집에서 잘 먹고 잘살았나 보다 생각했다. 하긴 미려는 저와 같이 잠춘동에서 자랐는데도 꽃보다도 더 어여쁘게 자라났지 아니한가.

“에이, 너무 그렇게만 보지 마세요. 장 맞은 놈은 그 돈으로 새장가를 가고, 유배 간 사람은 그 돈으로 아들을 장가보냈으니까요. 포교도 한 건 올렸고.”

“……그런 게냐.”

“네, 그렇다니까요! 낭중도 탈정고를 판 돈으로 좋아하던 노비를 사서 결혼을 했답니다. 그냥 노비로 둬도 될 걸 평인으로 만들어 줬어요. 팔불출이죠, 뭐.”

진해가 우중충해진 분위기를 바꾸려 밝은 어조로 말을 이었건만 도련님과 동십사는 여전히 뭐 씹은 표정이었다. 진해는 그들의 어두컴컴한 표정을 바라보다 순간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편법, 아니 불법 행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그들에게서 옅은 관(官)의 냄새를 맡은 것이었다.

‘이상한데. 같은 관리인 조 공자 놈은 먹물 내를 풀풀 풍기는데 도련님이랑 동열넷은 전혀 그런 냄새가 안 나잖아. 혹시 무관인가? 흠, 가만히 보니 동열넷은 좀 그런 거 같기도 하네. 하지만 도련님은 상처 하나 없던데. 손도 꽤 고운 축이었고.’

진해는 도련님과 동십사를 훑어보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우습게도, 도련님이 냉정하지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진해 역시 꽤 냉정하지 못한 상태였었다. 평소의 진해라면 상대의 옷매무새와 향기, 표정 등을 살펴 그들에 대해 어느 정도는 파악해 놓을 터였다. 그러나 오늘의 진해는 그것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파악해 놓지 못하고 있었다.

미쳐도 제대로 미친 모양이었다. 하마터면 죽을지도 모르는 위기였는데 일면식도 없는 이를 무작정 반가워하기만 했다. 그걸 생각하니 갑자기 뱃속이 서늘하게 시려 오는 듯했다. 새삼스레 저를 어린아이 들듯 한 동십사의 괴력이 신경 쓰였다. 저 정도라면 미려방의 일도와 비견될 정도의 무공이었다. 진해는 자신이 도련님을 만난 일이 행운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전화의 상처가 그리 쉽게 아물지는 않는 법이니 말이다.”

진해가 삐진 척을 해야 할지, 그렇지 않으면 두 사람처럼 침울한 척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그때 도련님이 가볍게 웃음 지었다. 그것은 진해가 본 것 중 가장 이상한 웃음이었다. 기이하게도 그 웃음은 웃음 짓는 사람을 쓸쓸해 보이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너. 가만히 보니 이 근방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 것 같구나.”

“그럼요! 제가 여기서 몇 년을 살았는데요. 제 동생이 젖먹이 시절부터 줄곧 잠춘동에 붙박여 살았습죠. 저를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제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아마도.”

“그래? 그래서 그 낭중을 기억한 거군.”

“그것도 그렇고 탈정고를 만들 때 제가 옆에 있었으니 잊으래야 잊을 수가 없는 거지요.”

도련님과 미려를 안 만나게 하려고 머리를 굴리다 보니 기억해 낸 거지만 진해는 자신을 부풀리고 과시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진해는 허세라는 게 생각보다 꽤 유용한 물건임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진해가 아주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진해는 정말로 이곳에서 오래 살았고, 정말로 잠춘동의 주민들 대부분을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천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는 법이었다. 진해는 잠춘동의 이웃들과 동고동락했지만, 그들이 진해가 모르는 곳에서 어떤 일을 벌이는지 알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반쯤은 모른 척하고 있는 것에 가까웠다.

도련님의 말처럼 월나라는 아직 회복 중이었고, 나라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동안 진해처럼 힘없는 백성들은 짓밟히고 으깨지기 십상이었다. 죽지 않으려면 눈을 딱 감고 어두운 구멍 속에 파묻혀야 했으며, 가난과 역병의 홍수 속에서 도덕은 힘을 잃고, 생존의 본능만이 강하게 발현되었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또한 진해 역시 그 홍수 속에서 간신히 살아남았기에 진해는 이웃들이 무얼 하건 절대로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진해가 그들처럼 행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단순히 진해의 운이 좋아서였다.

“탈정고는 딱 백팔 개를 만들어 팔았으니 낭중 양반을 탈탈 털면 누가 그걸 사 갔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그 백팔 개가 아니라면 새로 만든 것이니 더욱 확실히 알 수 있구요.”

“누군가 탈정고의 비법을 베꼈을 가능성은 없느냐?”

“그럴 가능성이 없진 않은데 아마 안 그럴걸요? 제가 듣기로는 낭중들끼리도 모임이니 회합이니 하는 게 있어서 남의 비방은 함부로 훔치지 않는다 하더라구요. 설사 누군가 베꼈다 하더라도 좁은 바닥이니까 금방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과연.”

침울해하던 도련님은 진해의 이야기를 들으며 서서히 본래의 침착함을 찾기 시작했다. 망설이거나 동하거나 하지 않는 도련님은 참으로 맑은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도련님이 그 ‘예쁜이’라고 눈치채기 전에 보았던 눈동자였다. 떨어져 있으면 냉큼 주워 주머니에 넣고 싶은 그런 눈동자.

“좋다. 그럼 날이 밝는 대로 그 낭중에게 찾아가도록 하지. 우리는 이곳의 지리를 잘 모르니 아무래도 네가 안내를 해 줘야 할 것 같구나.”

“그러죠, 뭐! 그까지 가는 게 뭐 그리 큰일이라구요.”

진해는 제 뜻이 이루어지자 마음속으로 신나게 쾌재를 불러 댔다. 처음에는 도련님에게 약간의 흑심이 있어서 미려와 만나지 않기를 바랐는데 이제는 미려의 안전을 위해서 도련님과 미려가 만나질 않기를 원했다. 도련님이 정말로 관의 사람이라면 미려가 도련님의 따귀를 때렸을 때 진해가 도련님에게 팽당하는 거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었다.

‘휴, 우리 미려가 감방에 갇히게 둘 수는 없구말구.’

미려를 피해 도망다니기는 했지만 미려는 여전히 진해의 금지옥엽이었다. 진해보다 키도 크고 훤칠했지만, 또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라지만 진해가 젖먹이 시절부터 소중히 키워 온 사랑스러운 동생이기 때문이었다.

‘도련님이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미려가 이곳에 남기로 결정한 이상 내가 책임지고 미려를 행복하게 해 줘야 해. 미려는 나 때문에 여기 남으려는 거니까.’

꼬리 내린 개처럼 축 늘어져 있던 동십사는 도련님이 진해와의 이야기를 마무리 짓자 그제야 기운을 차린 듯했다. 동십사는 겉보기와 달리 생각보다 속이 부드러운 인물인 듯했다.

“그럼 공자 께서 하룻밤 주무셔야겠군요. 번거롭게 댁에 다녀가시는 것보단 그편이 훨씬 낫지요.”

“엇? 자고 가라구요?”

“도련님의 은인이시고 길 안내를 해 주실 텐데 섭섭하게 그냥 보내 드릴 수 있겠습니까.”

“허― 난 잠은 꼭 집에 가서 자는데.”

일터에서 자야 하거나, 미려가 화가 나서 쫓아오지 않는 이상 진해는 꼭 집에 가서 잠을 잤다. 낡고 허름한 오두막이었지만 진해가 어릴 적부터 살아온 정든 집이었다. 물론 그것 말고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남들 앞에서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이유는 저것뿐이었다.

“보기와는 달리 꽤 섬세한 체질인가 보구나.”

“아니, 그건 아닌데, 음.”

“그게 아니라면 굳이 이렇게까지 거절할 이유가 뭐 있느냐. 거창한 살림살이는 아니지만 그리 빈한한 살림살이도 아니니 개의치 말고 머물다 가거라. 고가 언제 출발할 줄 알고 집에 다녀오려고 그러느냐.”

망설이는 진해를 도련님이 권유를 가장한 명령으로 붙들어 맸다. 도련님은 말을 하면서 한쪽 다리를 꼬았는데 진해는 그 우아한 꼬임 사이에서 묘한 향취를 맡아 냈다. 동십사는 같은 음인인지라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지만 조금 전까지 도련님과 응응하고 앙앙한 짓거리를 한 진해는 도련님의 상태를 기민하게 눈치챌 수 있었다.

도련님은 명백히 찝찝해하고 있었다. 젖은 옷을 입고 그대로 앉았으니 말 안 해도 알 만한 일이었다.

“도련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 제가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지요.”

잠춘동 한구석에 어두컴컴하고 쓸쓸히 남겨져 있을 집이 걱정되었지만 진해의 본능이 진해의 걱정을 이겨 버렸다. 진해는 어른의 놀이를 하는 것도 좋아했지만 놀이 후에 그것을 정리하고 치우는 것도 꽤 좋아했다. 전에 같이 놀았던 상대 왈, 진해의 그런 점이 일상에서 진해와의 놀이를 더욱 생각나게 한다고.

“안 그래도 도련님께 더 드릴 말씀도 있구요. 아무래도 말이 길어질 것 같으니 간단히 씻을 준비를 해 주시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아, 그러면 시종을 들여서―”

“어허! 도련님께 드릴 말씀이라니까요, 동 형!”

“도, 동 형?”

“동씨시니 동 형이라 부르고 싶은데 아니 되나요?”

진해가 넉살 좋게 웃어 보이자 동십사는 조금 고민하는 표정을 짓는가 싶더니,

“좋소, 은인이 나를 형이라 불러 준다는데 내 어찌 마다할까. 그럼 나는 은인을 어, 음, 그러니까 성함이……?”

“아, 저는 성을 오, 이름을 진해라 합니다.”

“좋은 이름이구려. 그럼 나는 이제부터 은인을 오 제(弟)라 부르리라!”

그냥 농으로 해 본 소리였는데 동십사는 진해의 호형을 꽤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진해는 졸지에 관리일지도 모르는 괴력의 사내와 호형호제하게 되었다. 동십사는 껄껄 호탕하게 웃으며 진해의 등을 툭툭 쳐 댔다. 툭툭 치는 건데도 마치 방망이에 두들겨 맞는 것 같았다.

“아, 그런데 도련님. 도련님은 성함이 어찌 되시는지요? 잠깐이나마 모시게 되었는데 한 자라도 알아야 편하게 모실 수 있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이 집은 동십사의 집이었는지 도련님 대신 동십사가 하인들을 부르러 갔다. 도련님의 집이었다면 도련님이 사람을 부르거나 했을 터였다.

“…….”

그저 이름을 가르쳐 달라는 가벼운 청인데도 도련님은 진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도련님의 눈매가 단단해서 그런지 가만히 바라봐지는 것뿐인데도 등골이 오싹하고, 꼴깍 침이 넘어갔다. 웬만큼 간이 크지 않고서야 저 눈앞에서 거짓말을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물론 진해는 이미 수도 없이 거짓말을 해 댔다. 사실 지금도 하고 있는 중이었고.

“해산(海㦃). 고는 이름을 해산이라고 한다. 성은 너 하는 거 봐서 알려 주마. 너를 얕보아 그런 것이 아니라 알아서 좋을 것이 없어 그런다.”

“엥? 보통은 성을 먼저 알려 주던데 도련님은 참 특이하시네요. 아, 제 말은 무척 비범하시다는 말입니다.”

관리가 아니라 역도의 자식인 건 아니겠지? 보통은 성을 먼저 알려 주는데 도련님은 이상하게 진해에게 자신의 이름만을 가르쳐 주었다. 성을 알아서 좋을 것이 없다는 것 또한 무척 기이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힘없는 진해가 부유하고 힘센 도련님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진해는 하인이 따뜻한 물이 담긴 대야와 수건을 가져오자 자신이 그것을 대신 받아 들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으니 제가 나갈 때까지 근방의 사람을 물려 주셨으면 합니다. 동 형께도 이리 말을 전해 주시오.”

진해가 진지한 어조로 말을 건네자 하인은 부잣집의 하인답게 유순한 태도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리고는 진해가 보았던 어떤 사람보다도 공손한 자세로 물러 나갔다.

“자, 도련님. 많이 답답하셨지요?”

하인이 물러가자 진해가 대야의 물이 찰랑거릴 정도로 촐랑대며 도련님에게로 달려왔다. 도련님은 덩치에 맞지 않는 경박함에 조금 질린 표정이었다. 하지만 진해가 따스한 물을 묻힌 수건을 들자 더 이상 덤덤한 낯빛을 하지 못했다. 진해는 도련님이 그러거나 말거나 싱글싱글 웃으며 망설이지 않고 도련님의 다리를 벌렸고, 도련님은 입술을 꽉 깨물며 진해의 세심하고도 극진한 시중을 받아야만 했다. 하얀 새벽달이 뜰 때까지.

다음 날 아침. 사실 아침이라기에는 조금 늦은 오전의 한때. 진해는 객실에서 하품을 하며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도련님과 이런저런 한담을 나누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기 때문이다.

도련님은 정말로 진해와 죽이 잘 맞는 상대였다. 백지장과 같은 상태인지라 진해가 가르치면 가르치는 대로 잘도 따라 했다. 진해는 도련님에게 사실대로 말하려다가 끙끙대는 도련님이 귀여워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도련님의 독은 도련님이 진해에게 질리게 되면 자연스레 풀어질 터였다.

“공자님, 도련님께서 부르십니다.”

“예, 곧 나갑니다!”

도련님이 진해에게 언제 질리게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진해는 도련님과 교류가 있는 동안에는 도련님에게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잠춘동에서는 미려의 눈치를 보느라 진해와 어울리는 이가 없었으므로 진해는 도련님과 되도록 오래 알고 지냈으면 싶었다.

“동 형은 아직 기침 안 하셨소? 그리 안 보이시는데 의외로 아침잠이 많으신가 보네.”

“아, 주인 나리께서는 등청하셨습니다. 정기 보고가 있는 날이라 다른 날은 몰라도 오늘은 꼭 등청하셔야 하지요.”

“오, 그렇소?”

그리고 진해의 예상대로 동십사는 역시나 관모를 쓴 양반이었다. 관직은 딱 봐도 무관일 터였다. 어디 소속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범상치 않은 무공 실력을 볼 때 포도청에 근무하는 잡졸은 아닐 것이다.

“근데 동 형이 이미 혼인을 하셨던가?”

“아닙니다. 저희 나리께서는 아직 홀몸이세요.”

“아차, 그랬지. 내가 근래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진해는 동십사의 관직이 괜찮으면 반편이 같은 조관림 대신 동십사를 미려에게 소개해 주는 건 어떨까 생각했다. 겉보기는 조관림이 매끈하니 괜찮았지만, 아이는 체구가 듬직한 동십사가 더 잘 낳을 것 같았다.

“역시 아이는 많은 편이 좋지!”

“예?”

“앗, 아닙니다.”

당사자인 미려의 의견은 듣지도 않고 진해는 당장에 동십사를 미려의 남편으로 결정지었다. 동십사가 미려를 거절할 것이란 생각은 애초에 염두조차 두지 않았다. 왜냐면 미려는 월나라 최고 미인이었고, 그러므로 미려를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미려에게 반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내실에서 본 도련님은 좀 피곤해 보였다. 진해를 안내한 이와는 다른 하인이 도련님에게 약탕으로 보이는 잔을 올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흘끗 보던 진해는 하마터면 모르는 이들 앞에서 체통 없이 크게 웃을 뻔했다. 왜냐면 도련님이 어제 진해의 시중을 받았던 의자와는 다른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참는다고 참았는데도 목 끝까지 차오른 걸 막을 순 없었다. 진해는 도련님께 예를 차리는 척 고개를 숙이면서 입으로 소리 없이 킥킥 웃어 버렸다.

“간밤엔 별일 없었느냐.”

도련님은 진해가 웃고 있는 것도 모르고 근엄하게 안부를 물어 왔다.

“예, 제 집보다도 훨씬 편하고 안락하여 하마터면 오후까지 자 버릴 뻔했지 뭡니까.”

“그렇다면 다행이군. 의복도 급히 마련한 것치곤 잘 맞아 보이는구나.”

“미천한 몸에게 이리 신경을 써 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공치사는 되었다. 뭐가 어찌 되었든 네가 날 구해 준 건 사실이니 말이다. 일이 마무리되면 더욱 합당한 보상을 내려 주도록 하마.”

그러면서 도련님은 원래는 동십사에게 이 일을 맡기려 했다 하였다. 자신이 나선다면 꼴이 꽤 우습게 보인다는 것이다. 진해는 왜 당사자가 나서는 게 우스운지 알 수 없었지만 도련님이 그렇다니까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도련님이 약탕을 마시는 걸 구경한 후에 진해는 도련님과 느지막이 길을 나섰다. 낭중은 눈치가 빠르고 잠춘동 주민답게 제 보신을 잘 챙기는 이였으므로, 도망쳤을 거라면 벌써 도망쳤을 거라는 게 진해의 주장이었다. 게다가 약탕을 후후 불어 마시는 도련님의 모습은 둘이 보다 하나 죽어도 모를 정도로 깜찍했다. 도련님은 뜨거운 걸 못 마시는지 탕이 미지근하게 식고 난 후에야 겨우 그것을 입에 댈 수 있었다.

“여기는 대체―”

그렇게 길을 나선 건 좋았는데 알다시피 잠춘동의 길이 좀 복잡한 게 아니었다. 잠춘동에서 자란 미려도 헷갈릴 정도로 미로와 같은 동네였다. 어떤 이는 잠춘동에 생명이 있어 길이 변한다는 헛소릴 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헛소리였고, 오가는 이가 많은 데 비해 치우는 사람이 없어 날이 갈수록 더럽고 복잡해지는 것뿐이었다.

“길이 좀 더럽죠? 아, 거기 움푹 팬 곳이 있으니 발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그쪽 집은 지붕이 부실하니 조심하시구요, 어이쿠!”

좁다란 골목을 구불구불 가던 도련님의 어깨가 스치자 오두막에서 나무로 된 기왓장 하나가 떨어졌다. 집주인이 동네에서 알아주는 수전노인지라(사실 돈이 없기도 했다) 제 돈 들여 지붕을 고치는 일이 없었다.

“도대체 이 동네는 어떻게 돼먹은 곳이냐? 도성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구나. 여기서 한 발짝만 나가도 평탄한 대로가 이어진다는 게 믿을 수가 없어!”

“믿을 수 없으셔도 어쩌겠습니까. 여기는 원래 이런 동네인걸요. 자, 자.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옆 동네로 건너갑니다.”

“옆 동네? 표찰도 안 보이는데 옆 동네라고?”

“하하. 표찰이 낡아 떨어져서 그렇지 정말로 옆 동네예요. 여기보단 조금 더 깨끗하니까 기운을 내세요, 도련님!”

“난 지치지 않았다!”

“오, 굉장하시네요! 전 오래 걸으면 좀 힘든데.”

“……지치진 않았지만 좀 어지럽기도 하구나.”

“그렇죠? 처음 오는 사람은 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만 믿고 따라오시면 금방이에요.”

도련님에게 손을 내밀면서 진해는 자신의 멋짐에 감탄했다.

‘캬, 오진해 멋지다!’

미려와 그 외에 약간의 문제가 진해를 가로막아서 그렇지 상대가 진해를 싫어해서 연애를 못 하는 건 아니었다.

“내가 어린아이인 줄 아느냐. 치워라.”

그런데 진해의 이 멋짐이 도련님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도련님은 생기가 넘치다 못해 화르륵 불타오르는 듯한 얼굴로 진해가 내민 손을 가볍게 밀어냈다. 확실히 잠춘동이 아니라면 진해는 도련님에게 상대도 되지 않을 터였다. 도련님은 진해보다 키도 크고 어깨도 단단해 보이고, 허리는 날씬하지만, 근력도 제법 있었으니까. 얼굴도 미남의 축에 겨우 들어가는 진해와 달리 도련님은 미남의 축에 들다 못해 미남의 선두 주자를 달리고 있었다.

“헤헤, 그렇죠. 아무렴요, 도련님은 어른이시고말구요.”

진해는 민망해진 손을 꼬리 내린 강아지를 어루만지듯 쓰다듬으며 도련님의 귀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구시렁댔다.

‘하긴 어른이니까 나랑 그 짓을 했지.’

처음 잡혀 왔을 때는 무서웠던 도련님이었지만 몇 번 살을 맞대고 나니 좀 덜 무서워졌다. 담은 작지만 간은 큰 진해는 입 밖으로 내면 도련님에게 혼이 날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해 댔다. 그렇게 구불구불 난 길을 걸어 마침내 잠춘동의 옆 동네인 하찰동(夏刹洞)에 도착하였다. 도련님은 발에 걸리는 쓰레기를 치우면서 진해를 미심쩍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는데, 그 눈빛이 꼭 정말 이 동네가 잠춘동보다 살기가 나은 동네란 말이더냐 이렇게 묻는 것만 같았다.

물론 동십사의 저택이 있는 거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한 동네였다. 하지만 잠춘동보다는 훨씬 살기가 좋은 동네였는데 왜 살기가 좋은 동네냐면 이 동네에는 우물이 두 개나 더 있었으며, 동네를 담당하는 포교가 동네에 살고 있었고, 시장이 근처에 있어 일 구하러 가기가 더 수월했다. 시전 상인들이 모여 제를 지낼 때도 있었는데 운이 좋으면 그 자리에 끼어 다과라든가 여러 가지 맛난 것들을 공짜로 맛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일각 정도를 더 가면 동반동이 있는데 그곳에는 그, 이름이 뭐더라. 여하튼 국립 학당이 있습지요. 낭중도 원래는 거길 가고 싶어 했는데 그 동네는 혈연이 없으면 정착하기가 좀 힘들어요. 학당의 하인들이 대를 이어 사는 경우가 많아서.”

“음, 고도 균여관(均如官) 하인들이 오가며 일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었다. 균여관의 유생 중 사정이 있는 자는 아예 밖에 나와 지낸다더구나.”

“잘 아시네요? 그곳의 학생이셨어요?”

“잠깐. 원래는 길게 머무르려 했는데 사정이 있어 금방 나올 수밖에 없었다.”

“왜요? 도련님이라면 잘 지내실 것 같은데.”

호기심을 보이는 진해를 바라보다 해산은 잠춘동보다도 지붕이 멀쩡해 보이는 오두막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해산 역시 균여관에 좀 더 머무르고 싶었었다. 그러나 주변의 시선이 그런 해산을 가만두지 아니하였다. 영특하진 않지만 그럭저럭 굴러가는 해산의 머리가 해산에게 이대로 있다가는 더욱 명을 재촉하게 될 것이라 강하게 경고했던 것이다.

이유도 모르고 죽기를 원하지 않아 해산은 균여관을 넘겨주고 본래의 주거지로 돌아왔다. 해산을 안타깝게 여긴 균여관의 학동 하나가 남들 몰래 강의의 필사본을 넘겨주었다. 성이 조씨였던 학동은 후에 과거에 합격한 뒤, 균여관에 남아 학문을 연구하는 학사 관리가 되었다. 지금도 해산과 마주치면 안부 정도는 묻는 사이였다.

“아, 저기 보이네요!”

눈치가 빠른 편인 진해는 해산이 입을 다물자 더 캐묻지 않았다. 걸음을 빨리하더니 조금 들어간 골목의 어떤 지붕을 손으로 가리켜 보였다. 낭중이 고약으로 돈을 만졌다더니 사실인 모양이었다. 근방에서 제일 멋들어진 지붕을 이고 있었다. 지붕이 저럴 정도니 처마나 그 밖의 것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해산은 드디어 자신에게 뻗친 마수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응?”

그런데 낭중의 집으로 들어가기 앞서, 진해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왜 그러느냐?”

해산은 진해의 의중을 알지 못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햇볕이 진해의 옷 위에 다사롭게 내리쬐고 있었다. 확실히 잠춘동보다 살기가 괜찮다는 말이 참이었는지 잠춘동보다 훨씬 고즈넉한 동네였다. 온 동네에 평화가 잔뜩 고여 있었다.

“냄새가 좀…….”

낭중의 집 문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진해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진해의 말에 해산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으나 맡아지는 것이라고는 진해에게서 나는 양인의 향취뿐이었다. 진해는 오종종한 겉보기와 달리 꽤 근사한 향을 갖고 있었다. 웃기게도 해산은 진해에게서 타락죽 비슷한 냄새가 난다고 생각하였다. 이 손도 쓰지 못할 해괴망측한 변태 놈에게서 우유 향이 난다니.

도저히 믿지 못할 사실이었지만 해산의 코가 그렇다는데 어찌할 것인가. 해산은 어젯밤 진해의 해독을 빙자한 진찰인지 시중인지 모를 것을 받으며 진해야말로 양의 거죽을 뒤집어쓴 늑대가 아닌가 싶었다.

“피 냄새가 나네요. 그것도 살짝 맛이 간 피 냄새가. 수술을 했으면 환기를 했을 텐데.”

“피 냄새? 그걸 네가 어찌 안단 말이냐?”

“옛날에 시체 치우는 일을 좀…….”

“뭐!?”

“항상 하는 건 유행병 돌 때만 하는 겁니다! 돈 때문에 하는 거지 좋아서 하는 건 아니구요!”

해산은 저도 모르게 진해에게서 한 발짝 떨어졌다. 이상한 녀석인 건 알고 있었지만 저리 희한한 직업을 갖고 있었다니.

“무엄한 놈, 시체를 옮긴 손으로 고의 몸을……!”

“도, 도련님은 변소 안 가세요?! 변소 가셔서 손으로 안 닦으시냐구요!”

“여기서 해우소 이야기가 왜 나오는 게냐!”

“변이나 시체나 사람들이 만지기 싫어하는 건 매한가지니까요! 그리고 그거 치워 주면 돈을 더 받는 것도 사실이니까요! 여하튼! 제 손은 아주 깨끗합니다!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더럽게 쓰기도 하지만……, 보통 때는 아주 깨끗해요! 저는 보모도 해 봤고, 낭중의 조수 노릇도 했다구요!”

해산이 한 발짝 멀어지자 진해는 해산에게 필사적으로 해명을 했다. 변소라는 너무나도 노골적인 예시에 해산은 머리가 띵해질 뻔했으나 가만히 보니 아주 어긋난 비유도 아닌 것 같았다. 기이하게도 해산은 진해의 필사적인 태도에 귓불이 살짝 달아올랐다. 누군가가 저를 절실하게 원한다는 감각은 상상외로 기분 좋고 짜릿한 것이었다.

“넌 생각 외로 험난한 생을 살았구나. 아직 젊은 나이인데도 별일을 다 했어.”

“아버지들 없이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지요, 뭐. 딸린 동생을 굶겨 죽이지 않으려면 무슨 일이든 힘껏 해내야 했습니다. 운 좋게도 일거리가 끊기지 않아 무사히 살아남았습죠.”

해산에게 필사적으로 변명할 때는 언제고 진해는 해산을 바라보며 씩 웃어 보였다. 진해가 힘겹게 살아온 것을 알게 되자 해산은 진해의 얼굴에 난 자잘한 상처가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흉하다고 생각했는데 진해의 말을 듣고 나니 그것이 마치 진해가 넘어온 역경의 훈장같이 보였다.

“기특하구나.”

해산은 진해에게 경탄했으나 그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겨우 기특하다는 말 한마디뿐이었다. 동시에 진해에게서 풍기는 묘한 예리함의 정체를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마도 그것은 역경을 넘을 때마다 거듭 단련된 생존 욕구일 것이다. 잘 단련된 그것은 진해가 고조될 때마다 저도 모르게 튀어나올 것이다.

저를 응시하던 눈빛을 떠올린 해산은 갑자기 아랫배가 아릿하게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서 달아올랐던 귓불이 새빨갛게 변하고 숨이 조금 거칠어졌다. 진해의 눈빛이, 저 손이 저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떠올렸기 때문이다.

―탈정고, 이게 다 탈정고 탓이다!

저에게 쾌락을 주었던 주체가 앞에 있으니 끌리는 게 당연한 본능이건만 해산은 자신의 욕구를 모두 다 탈정고 탓으로 밀어 놓았다. 진해는 해산의 짝이 될 뻔했던 그 누구보다도 뒤떨어지고 초라한 몰골을 하고 있었는데, 그런 진해에게 욕정 한다는 사실을 어찌 인정할 수 있을까.

심지어 진해가 자신의 첫 교접 상대라는 것마저 인정할 수 없었다. 더러운 바닥에서 미혼약에 얼룩진 채 얼렁뚱땅 치렀던 정교를 누가 첫 경험이라고 치고 싶겠는가.

“헤헤, 도련님이 칭찬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하지만 이상하게도 해산은 진해가 물렁하게 웃을 때마다 그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졌다. 어디서 뭘 하고 살았는지, 뭘 처먹고 살면 이런 변태 같은 짓거리들을 알게 되는지, 어떻게 자신을 무참하고 비참하며, 짜릿하게 다룰 수 있게 되는지.

“흠, 흠! 그럼 일단 들어가 보도록 하지! 피 냄새는 분명 수술 때문이겠지.”

“그런 거면 좋겠지만…….”

해산은 얼굴까지 달아오르기 전에 자신이 먼저 낭중의 집으로 걷기 시작했다. 진해는 여전히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저를 만질 때에는 대담하게 굴던 진해가 소심하게 굴자 해산은 묘한 감각이 솟아나는 것을 느끼며 손때 묻은 손잡이에 손을 걸었다. 낭중의 집은 관리를 잘했는지 낡은 손잡이 하나도 매끈매끈하고 반들반들하게 윤을 내고 있었다. 마치 해산이 찾아올 것을 예지라도 한 것처럼 지나치게 깨끗하게 광을 내고 있었던 것이다.

[끼익.]

그러나 경첩에 기름을 칠할 여유는 없었는지 해산이 문을 잡아당기자 뼛골 시린 불협화음이 들려왔다. 문을 열자마자 해산이 가장 먼저 느낀 건 코를 도려내는 듯한 지독한 비린내였다.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쇠 비린내가 해산의 얼굴 위로 훅하고 덮쳐들었다.

“큿.”

치밀어 오르는 역함을 견디지 못하고 물러서자 진해가 고개를 얼른 들이밀었다.

“헉, 낭중 양반!”

방 안의 광경을 확인하자마자 해산이 뭐라 할 새도 없이 재빠르게 안으로 달려들었다.

“낭중 양반! 이보쇼, 낭중 양반! 낭중 아저씨! 이런 시부럴……!”

해산은 진해의 욕설을 듣고 난 뒤에야 겨우 정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이를 악물고 방 안의 광경을 직시하니, 온 바닥에 낭자한 피 웅덩이와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는 몸 두 개를 볼 수 있었다. 진해는 그중 좀 더 나이가 많아 보이는 쪽에 달라붙어 있었다. 손목을 짚어 맥을 보는가 싶더니, 낭중의 코끝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낭중이 숨을 쉬지 않자 진해는 황급히 달려들었던 때와 마찬가지로 낭중에게서 황급히 떨어져 나왔다. 그 후에는 낭중의 옆에 누워 있는 다른 이에게 다가가 낭중에게 했던 행동을 반복하였다.

“사, 살아 있어! 아저씨, 아, 아니, 숙부! 정신 차려 봐요! 나 진해예요, 전에 숙부가 아들 하라고 했던 오진해!”

“끄으―”

진해가 피범벅이 된 이를 둘러업고 나올 동안 해산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진해가 낭중의 남편을 바닥에 눕히고 정신을 차리게 할 동안 해산은 부릅뜬 눈으로 그 장면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 살았느냐?”

해산은 죽은 이를 본 것이 처음이었다. 해산은 단 한 번도 전장에 나가 본 적이 없었다. 전장을 없애기 위해 만들어진 해산이었다. 그러기 위해 존재하는 해산이었다.

“진, 해…….”

“네, 저예요! 저 진해예요! 혼례식 때 저한테 국수 말아 주셨잖아요? 기억나요?”

“경고, 허억, 경고를…….”

“누구한테요? 뭘 경고해요?”

진해가 낭중의 남편을 안고 그 말을 듣는 동안 이웃에서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꼈는지 조금씩 밖으로 나와 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마당을 들여다본 이는 진해가 안고 있는 피가 낭자한 이를 보자마자 작게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다음으로 낭중의 집에 도착한 이는 그나마 담이 센 자라서 바닥에 주저앉는 대신 얼른 포교의 집 쪽으로 달려갔다.

“한, 씨, 한…….”

“한씨? 한씨 양아치들?”

“도망, 가…….”

“숙부! 숙부, 정신 차려요!”

낭중의 남편은 도망이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다시 정신을 놓아 버렸다. 얼굴은 백지장처럼 새하얗고, 입술 역시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잘게 경련하는 모습이 금방이라도 죽을 것만 같았다. 해산의 얼굴 역시 새하얗게 부예지기 시작했다. 그는 그저 자신에게 미혼약을 먹인 원흉을 알고 싶을 뿐이었다.

“비켜라!”

소식을 들은 건지 포교가 관복의 고름을 다 매지도 못한 채 뛰어왔다. 포교는 진해를 지나 방 안을 들여다보더니 윽, 소리와 함께 문을 닫았다. 현장을 보존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기도 하고, 현장의 참혹함이 그가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그런 것도 있었다.

곧이어 포졸들이 연이어 달려와 진해의 품에 안겨 있던 낭중의 남편을 들어 옮겼다. 사건을 해결을 위해서는 반드시 그의 증언이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가까운 의원으로 데려가 어떻게든 숨을 붙여 놓아야 했다.

진해는 피가 얼룩진 옷을 입은 채로 포교에게 자신이 본 것을 증언했다. 포교가 가만히 서 있는 해산을 바라보자 진해는 해산을 제 뒤에 숨기며 기가 허한 이라 약 한 첩을 달여 먹이러 온 것이라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을 고하였다.

말 한마디 하지 못하는 태도며, 얼굴이 부옇게 질린 모양새가 진해의 말을 증명하는 것 같아 포교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비하던 목판에 발견자 오씨와 해씨라고 둘을 적어 놓았다. 진해는 진술이 끝나자 해산을 끌고 서둘러 구경꾼 사이를 헤쳐 나갔다.

* * *

허옇게 질린 해산을 데려다주고 진해는 홀로 집으로 돌아왔다. 동십사는 아직 퇴청하지 않은 듯했다. 마음 같아서는 해산 도련님 곁에 남아 도련님을 달래 주고 싶었지만 진해는 해산 도련님을 위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으리으리한 대문 앞에 서는 순간 해산 도련님과 자신 사이에 까마득한 낭떠러지가 자리함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이번 일만 해도 그랬다. 해산 도련님은 진해에게 “넌 보기와 달리 강심장이로구나.”라고 말했지만 사실 진해는 절대로, 남들보다 담이 크거나 용감한 게 아니었다. 단지 진해가 자란 곳이 잠춘동이었을 뿐이다. 피난민들의 주거지였으며 그 자손들이 역병에 몇 차례 물갈이당한 곳, 온갖 욕지거리와 도둑질이 일상인 동네인 바로 그 잠춘동.

앞서 말했듯이 진해가 시체에 익숙한 까닭은 관원으로부터 약간의 돈을 받고 역병으로 시체를 화장터로 옮기는 일을 했었기 때문이었다. 도련님이 역겹게 여기는 것처럼 열세 살의 진해 역시 그 일을 진저리 치게 싫어했지만, 진해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일거리를 줄 어른들은 죽어 버렸고, 가뜩이나 마른 동생은 날이 갈수록 더 가벼워졌다. 낭중과의 연은 그때 생긴 것이었다.

낭중은 이를 악물고 시신을 옮기는 진해에게 코를 막을 약쑥과 입을 가릴 수건, 기운을 돋울 약간의 술을 줬었다. 낭중은 진해에게 호의를 베푼 몇 안 되는 어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 일을 기억조차 못 했지만 진해는 자라서 어른이 될 때까지 그 일을 쭉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수배가 떨어진 낭중을 위해 자백할 이, 장 맞을 이, 유배 갈 이를 알선해 줬던 것이다.

“낭중 아저씨한테 해 줄 수 있는 건 그런 것밖에 없었지. 도련님이 아시면 나중에 경멸하실까? 죄로 죄를 덮는 꼴이라고 화를 내시는 건 아니겠지?”

집으로 가는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걸어가며 진해는 나지막이 한숨 쉬었다. 해가 지는지 그림자가 골목길 사이로 길게 늘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축 늘어진 진해의 어깨처럼.

“에이, 알게 뭐람! 도련님이랑 나랑은 아무 관계도 아닌데! 내가 도련님한테 사기 치고 있는 중인데! 어차피 욕 들어 먹을 거 한두 마디 더하는 게 뭐 그리 큰일이라고!”

진해는 편법을 질색하던 해산 도련님의 얼굴을 지워 버리려는 것처럼 고개를 크게 가로저었다. 마치 누구에게 보라는 것처럼 손을 들어 옳지, 옳지 제 머리를 쓰다듬었다. 진해야, 참 잘했다. 넌 잘해 오고 있어. 다들 너더러 고맙다고 했잖느냐, 덕분에 장가 잘 갔다, 덕분에 아들 장가보냈다, 라면서.

진해는 꼭 억지를 부리는 것처럼 낭중과 다른 이들로부터 들은 칭찬을 떠올리려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진해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낭중 부부와 다른 이들이 칭찬이 아닌 하얗게 질린 해산 도련님의 얼굴이었다. 강건한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채 구역질을 삼키는 것처럼 입술을 꼭 깨문 바로 그 얼굴 말이다.

“……또 나쁜 버릇이 도지려고 하네.”

그 얼굴을 떠올리며 진해는 자신이 싫어하는 괴질이 도지려는 걸 느꼈다. 모순되게도 이 버릇은 진해의 성적 취향과는 정반대 쪽에 위치한 것이었는데 진해는 이 버릇 때문에 하마터면 미려와 영영 생이별할 뻔한 적도 있었다.

“죽을 좀 싸 갈까? 아니, 놀란 속에는 죽보다 과실주가 낫지. 집에 남은 게 좀 있던가?”

한씨 양아치 중 막내가 이 괴질을 명명하길 보부(保父) 병, 혹은 유부(乳父)병.

진해의 여러 가지 그릇된 것 중 가장 악독하다 칭해지는 이것은 바로 ‘상처받은 이가 있으면 반드시 돌봐 주게 되는 버릇’이었다. 정말 하늘의 안배라고밖에 할 수 없는 버릇이었다. 상대를 몰아세우며 쾌감을 느끼는 진해에게 상처받은 이를 돌봐 줘야 직성이 풀리는 병이 있다니.

성적인 기호와 일상의 버릇 사이에서 괴로워하자 미려는 빙그레 웃으면서 진해를 위로해 줬었다.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모습이 있으며 진해의 괴상한 성적 기호도, 물렁물렁한 일상의 버릇도 모두 다 진해를 이루는 부분이라고. 그리고 자신이야말로 진해가 괴질이라고 일컫는 상냥함의 가장 큰 수혜자라고.

“응? 미려가 왔다 갔었나?”

이젠 고치기를 포기한 괴질의 감각에 잠긴 채 진해는 자신의 집 마당으로 들어섰다. 화초인지 잡초인지 모를 것이 나 있고, 손바닥으로 가려질 만큼 작은 마당이 진해를 맞이했다.

그런데 눈에 익숙한 마당이 오늘따라 유난히 낯설었다. 물론 이삼 일을 떠나 있었으니 바람이 불거나 고양이가 들거나 해서 바뀔 수도 있다. 그러나 바람이 불거나 고양이가 든 정도로 이런 위화감이 들 리가 없었다. 진해는 이 집에서 근 이십 년을 살아온 것이다.

“미려가 어딜 잘못 건드렸나? 깡마른 애가 기운은 장사라서 툭하면 어딜 부러뜨린단 말이지. 흐음, 달리 부서진 곳은 안 보이는데. 기분 탓인가?”

미려가 문고리를 박살 내거나, 창살을 부러뜨리거나 한 줄 알았는데 다행히 부서진 곳은 없는 듯했다. 집을 이리저리 살피던 진해는 마침내 위화감이 드는 곳을 발견했는데 그곳은 바로 발을 디디는 섬돌 옆이었다.

“뭐야~! 나도 참, 너무 예민해졌다니까. 겨우 이런 풀 쪼가리 때문에 놀라고 말이야. 어휴. 과실주는 도련님이 아니라 내가 마셔야겠구만!”

섬돌 옆에는 나뭇가지인지 풀잎인지 모를 것이 떨어져 있었다. 금목서 꽃 내를 닮은 향긋한 냄새가 나는 듯도 하였다. 평소라면 보지도 못했을 쓰레기였다. 아무래도 낭중 부부의 참상과 그들과의 연을 생각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새 무척 예민해진 모양이었다.

진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열쇠를 꺼내 자물쇠에 매끄럽게 꽂아 넣었다. 이 집의 열쇠는 두 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진해가, 하나는 미려가 갖고 있었다. 열쇠와 자물쇠가 맞물리는 감각이 어색했으나 진해는 이것 역시 자신이 예민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진해와 비슷한 연배의 자물쇠였으니 언제 고장 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과연 낯설게 느낀 것은 진해의 기분 탓이었는지 집 안은 사람의 흔적 없이 괴괴하기만 했다. 집으로 돌아온 진해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뻐근했던 목을 주물렀다. 목을 주무르면서 과실주를 넣어 둔 찬장으로 걸어갔다. 찬장 역시 자물쇠와 마찬가지로 진해가 어릴 때부터 이 자리에 붙박여 있던 물건이었다.

선반 아래의 쪽문을 열자 자그마한 간장병이며, 기름병, 장아찌 항아리들이 옹기종기 줄을 서 있었다. 과실주는 가장 그늘진 곳에 자리했는데 여지(荔枝:리치)가 제철일 때 따서 담가 놓은 것이었다.

“흐흐, 잘 익었네. 이걸 배운다고 미려방 주방에 몇 번을 들락날락거렸는지!”

어려서부터 미려를 먹이고 입힌지라 진해는 가사 전반에 능숙했다. 간장 철이 되면 공장에서 사람을 보내 잠깐 일해 보지 않겠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어떤 이는 부잣집에 줄을 대 줄 테니 하인으로 들어가는 게 어떻겠냐고 권하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진해는 어린 미려를 핑계 삼아 모든 제안을 거절했었다. 보수가 짭짤하더라도 숙박을 해야 하는 일거리는 무조건 밀어 두었다.

“……우리 아빠도 여지주를 담글 줄 알았을까?”

그러나 미려가 어리다는 건 핑계였고, 사실 진해가 집을 떠나지 않으려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우습게도 진해는 자신이 어릴 적에 사라진 우부가 언젠가 돌아올 것이라는 괴이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젖먹이였던 미려가 어른이 될 때까지 돌아오지 않은 우부를 그와 함께 살던 집에서 아직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 외에도 여러 가지 자잘한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우부 탓이었다. 금방 다녀온다면서 아기를 잘 보고 있으라고 해 놓고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은 우부 때문이었다.

“에이, 꿀꿀할 때 마시면 맛이 덜한데.”

이제는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우부였지만 상냥한 손길만큼은 잊을 수 없었다. 우부 보라고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며 넘어진 적도 있었다. 별로 아프지 않은 상처인데도 우부는 화들짝 놀라며 달려와 진해를 안아 올렸었다. 너르고 따스한 품이 좋아서 진해는 우부의 목을 안고 한참을 달콤한 냄새를 들이마셨었다…….

진해는 입구를 봉해 놓은 종이를 홀랑 벗겨 버리곤 항아리째 꼴꼴 들이마셨다. 작은 항아리라 망정이지 큰 항아리였으면 진해의 옷이 온통 젖었을 것이다. 미려방의 주방장에게 알랑거리며 배운 비법은 그 값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여지의 맛과 향이 잘 배어든 여지주는 순식간에 진해의 목구멍 속에 스며들었다.

“흐흥~ 가만히 있어 봐. 그게 어디 있더라~? 우리 아빠가 주고 간 거, 그거, 그거 말이야.”

연이 있던 낭중이 죽어서 그런지 머릿속에서 우부의 생각이 떨어지질 않았다. 진해는 열심히 우부의 그림자를 지우려 했으나 여지주는 오히려 진해에게 우부에 대한 그리움만을 더해 줄 뿐이었다. 진해는 가벼워진 여지주 항아리를 안은 채로 비틀비틀 벽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 진해의 뒤에 소리 없이 낯선 그림자 하나가 달라붙었다.

진해는 자신의 느꼈던 위화감이 정체를 드러낸 것도 모르고 어기적어기적 구석진 벽으로 다가갔다. 엄청나게 낡은 벽의 여기저기를 더듬더니 조심스레 벽돌 하나를 빼내었다. 그림자는 숨소리도 내지 않은 채 그런 진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진해는 술에 취해 옷깃이 스치는 소리조차 자신이 낸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이제 그림자의 손에는 종잇장처럼 얇은 암기가 들려 있었다. 날이 예리한 것이 사람 한둘은 능히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낭중을 죽인 무기도 이것과 같은 종류였다. 손에 든 이는 달랐지만.

“아빠…….”

그런데 그 순간, 진해를 내려다보던 그림자가 어깨를 흠칫했다. 그림자의 시선이 진해의 목덜미가 아닌 손바닥으로 옮겨가 있었다. 진해의 손바닥 위에는 손가락 두 마디는 될까 싶을 정도로 작은 패물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옥과 비슷하게 생겼으면서도 특이하게 녹색이 아닌 연한 분홍빛을 띠고 있었다.

“왜 날 두고 간 거야……. 내가 그렇게 귀찮았어……? 다른 우부들은 이혼해도 애는 챙겨 가던데 아빠는 왜 날 두고 갔어……. 아니면 정말로, 어디서 죽어 버린 거야……?”

연한 분홍빛 위에 서(誓)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진해는 글자가 낡을세라 함부로 위를 쓰다듬지도 못하였다. 진해는 이 집에 들어오던 날, 우부가 제 목에 걸어 주었던 분홍빛 장식물을 쓰다듬는 대신 장식물을 꿴 생사(生絲)만 하릴없이 어루만졌다. 어찌나 만져 댔는지 끈은 손때가 묻어 색을 잃고 반들반들하게 윤을 내고 있었다.

진해는 제 우부가 남긴 유일한 흔적을 내려다보다 급작스레 몰려오는 술기운에 그것을 얼른 제자리에 돌려 놓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건 절대로 도둑맞아서는 안 되었다.

진해가 벽돌을 다시 제자리에 꽂아 넣고 뒤로 돌아봤을 땐 이미 그 자리엔 아무도 자리하지 않고 있었다. 진해는 자신이 위기를 넘겼다는 사실도 모른 채 여지주를 더 마시다 잠이 들었다.

* * *

다음 날 아침. 술기운에 얼룩진 채 곤히 잠들었던 진해는 난데없는 방문에 잠이 깨고 말았다. 동십사의 집에서 보낸 하인이 마당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진해를 깨웠던 것이다.

“공자님! 오 공자님! 혹시 오 공자님 안 계십니까!!”

어찌나 목청이 큰지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침상에서 굴러떨어진 진해는 어기적어기적 일어나 문을 열었다.

“내가 오진핸데 무슨 일이요?”

“아, 오 공자님! 제 주인이신 동 대인께서 공자님을 모셔 오라고 하셨습니다.”

“동 형이? 아, 어제 일 때문에 그런가. 거, 소세 좀 하게 잠시만 있어 보쇼.”

“아니요, 화급한 일이니 되도록 빨리 공자님을 모셔 오라고 하셨습니다. 필요한 건 이쪽에서 다 준비를 해 놓을 터이니 얼른 몸만 오시라 말씀하셨습니다.”

“뭘 자꾸 필요한 걸 준비한대……. 물론 주면 좋지만.”

진해는 하품을 쩍 하며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검은 가루에 부스러진 침상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는데 그 가루는 어제 피 묻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자서 생긴 핏자국들이었다.

“아 참, 공자님!”

“뭐요?”

“동 대인께서 혹시 안부를 전할 분이 있으면 미리 전하시라셨습니다. 아버님들이나 형제분들께요.”

“뭐, 왜?”

“음, 소인의 생각으로는 아무래도 오 공자님을 며칠 저희 댁에서 모시려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해산 도련님에게 여지주를 갖다 주기 위해 들를 참이긴 했지만 저 집에서 며칠씩이나 머무를 생각은 없었다. 어쩌면 오늘내일 중으로 미려가 올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십중팔구 미려의 귀에도 살해당한 낭중의 이야기가 들어갔을 터였다. 진해가 첫 목격자라는 것도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다. 집에 오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리 일이 바빠도 미려는 무슨 수를 써서 진해를 보러 올 터였다.

“며칠씩은 곤란한데. 나도 할 일이 있는 사람이란 말이야. 아니, 것보다 용케 우리 집을 찾아왔네? 내가 도련님이랑 동 형한테 우리 집을 이야기한 적이 있던가?”

“포교 대인께 여쭈어보니 가르쳐 주시더이다. 원래 아침나절에 모시러 오려 했는데 소인이 아둔하여 길을 좀 헤매었습니다.”

하인은 진해가 묻는 말에 차분히 대답하면서도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꼿꼿하게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보아하니 동십사가 하인에게 진해를 데려오기 전까진 절대로 돌아오지 말라고 한 것 같았다.

“으음, 진짜 곤란한데. 진짜 곤란해! 동생이 날 보러 올지도 모른다고!”

“동생분을 주인 나리 댁으로 부르시면 되지요.”

“하, 이것 참!”

진해는 입으로는 거절의 말을 흘리면서 속으로 포교 그 양반이 이렇게 입이 쌌었나라고 생각했다. 포졸도 아니고 포교가 일개 하인의 물음에 답했다는 것도 이상했다. 그렇다는 말은 동십사가 최소 포교 이상 가는 무관이라는 뜻이었다. 그 단순무식한 포교가 순순히 협조할 정도라면 상당히 높은 지위의 무관이라는 말이었다.

‘오진해, 이 멍청아! 그 으리으리한 집만 봐도 알 수 있잖아! 조 공자네 집도 크지만 그 집은 진짜 어마어마하게 컸다고! 그래, 미려를 그 집으로 부르자! 미려를 그 집으로 불러서 단번에 동열넷의 혼을 빼 버리는 거야!’

진해는 자신의 명석함에 감탄해 하마터면 하인의 앞에서 제 머리를 옳지, 옳지 쓰다듬을 뻔했다. 진해가 씩 웃음 짓자 영문을 모르는 하인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까지 말하시는 데 내가 거절할 수가 있나. 짐을 싸야 되니까 잠깐만 나가 있으쇼.”

“제가 도와 드릴―”

“순결한 내 살을 볼 생각 말고 잠깐만 나가 계시라구. 뭐 굳이 보시겠다면 거절은 않겠지만. 혹시 올해 춘추가 어찌 되시는가? 아버님들은 뭐 하시고? 홀몸은 맞지?”

하인은 진해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바람처럼 방을 나갔다. 정중한 태도로 방문을 닫아 주기까지 했다. 진해는 킬킬 웃으면서 여지주를 옮겨 담고 입구를 봉했다. 그런 다음 갈아입을 옷 몇 가지를 챙겨 보따리를 쌌다.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니까.”

그 후엔 벽을 더듬어 숨겨 뒀던 패옥을 끄집어냈다. 평소에는 잃어버릴까 봐 집에 숨겨 두고 다녔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그것을 가지고 가야 할 것만 같았다. 진해는 그것을 만지작거리다가 때가 낀 줄 사이로 머리를 통과시켰다. 어렸을 땐 진해의 가슴께에 달랑거렸던 것이 이젠 진해의 쇄골 사이에 자리 잡았다.

짐을 챙긴 진해는 집을 간단히 정리해 둔 뒤 밖으로 나왔다. 그 후에는 조금 뻣뻣한 자물쇠를 억지로 잠가 두었다. 이번 일이 해결되고 돌아오는 길에 새 자물쇠를 마련해야 할 듯했다. 어쩌면 미려방에 남는 자물쇠가 하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진해는 자신에게서 시종일관 세 발짝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는 하인과 함께 동십사의 저택으로 출발했다.

골목의 모퉁이 너머로 낯선 그림자가 진해의 뒷모습을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진해의 집에서 암기를 꺼내 들었던 바로 그 그림자였다.

그림자는 진해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진해의 집으로 가 자물쇠를 움켜잡았다. 가느다란 바늘로 몇 번을 쑤시자 자물쇠는 어색한 소리를 내며 입을 벌렸다. 억지로 연 흔적이 남았지만 워낙 낡은 탓에 잘 표가 나지 않았다. 아마 자연스러운 고장으로 보일 것이다.

그림자는 소리 없이 들어와 어젯밤 진해가 패옥을 숨겨 두었던 벽을 더듬었다. 그러나 패옥은 이미 진해의 목에 걸린 후였고 그림자는 소득 없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

자신의 목적이 없다는 걸 확인한 그림자는 벽을 원래대로 해 둔 뒤 가만히 방 안을 둘러보았다. 은신을 위해 살피던 것과는 다른 눈빛이었다. 그림자는 진해가 반듯하게 개어 놓은 이불 위를 살짝 쓰다듬더니 조용히 방을 나섰다. 자물쇠를 채운 그림자는 남들 눈에 띄지 않고 바람처럼 소리 없이 몸을 감췄다. 잠춘동은 평소처럼 요란스럽기만 했다.

* * *

“오오! 오 제!”

본채의 응접실에 다다르자 동십사가 진해를 열렬히 환영했다. 조금 소란스럽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동 형, 공사다망하신 분께서 저를 이리도―”

“인사는 됐고, 앉도록 하지. 내 어제 마, 아니 도련님께서 흉사를 당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다 철렁했다네!”

진해는 흉사를 당한 건 낭중 부부고 도련님은 흉사를 목격한 것이라고 고쳐 주려다가 일이 귀찮아질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휴, 대체 일이 어찌 된 것인지 모르겠네. 탈정고를 만든 낭중이 죽다니! 얼마나 흉악한 놈이기에 서슴없이 살수를 뻗친단 말인가!”

동십사는 낭중 부부의 흉사를 명백히 도련님에 대한 위협으로 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진해는 그런 동십사를 보며 의문이 들었는데 낭중과 남편이 꼭 탈정고 때문에 죽었다고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연히 강도가 들었을 수도 있잖은가.

“동 형, 해산 도련님께서 위협을 당하신 게 한두 번이 아닌가 봅니다?”

“엇.”

“강도일 수도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확실하게, 도련님과 연관된 일이라고 장담하세요?”

“그건―”

“그리고 저 보고는 왜 며칠 머무르라는 거구요. 아, 알겠다.”

“뭐, 뭘 알겠단 말인가?”

“뭐긴 뭐예요. 내 감이 맞다는 거지. 동 형, 도련님이 탈정고를 드신 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죠? 누군가에게 상습적으로, 음, 아마도 후사 문제? 그거 때문에 위협받고 계신 거죠?”

얼핏 논리적으로 보였지만 사실은 다 때려 맞춘 이야기였다. 도련님이 성을 이야기하지 않는 점이나 다른 독을 다 놔두고 미혼약을 먹인 점, 해산 도련님의 곁에 있던 진해를 동십사가 발 빠르게 보호하려고 한 점 등을 짜 맞춰 아무렇게나 지어낸 이야기였던 것이다.

“허. 자네는 정말 알면 알수록 놀라운 사람이로군.”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동십사는 잠깐 숨을 멈추는가 싶더니 이때까지 본 동십사의 얼굴 중 가장 진중한 얼굴을 해 보였다.

“사람을 풀어 뒤를 캤을 땐 특별한 것이 없어 보였는데. 알고 보니 진흙 속의 진주로구만. 탄복했네.”

“예? 누구 뒤를 캐요?”

“그래, 자네 말이 다 맞아. 도련님께서는 지금 후사 문제로 곤경에 처해 계시네.”

“진짜, 아니, 그것보다 정말 내 뒤를 캤다고요?!”

진해는 농으로 던진 말이 딱 맞아떨어지자 하마터면 입을 쩍 벌릴 뻔했다. 그러나 허세를 아는 사내인 오진해는 놀라는 것도 잠깐, 짐짓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꾸며 보였다. 동십사의 진중한 눈빛 앞에서 경거망동하면 꼴이 좀 우스워질 것 같기도 했고.

“해산 도련님께서는 나시고부터 후사 문제로 줄곧 골치를 썩여 오셨네. 사실 골치를 겪을 문제가 아닌데도 골치를 겪고 계신단 말일세, 에잇!”

“도련님은…… 적자신데도요?”

“그러니까 말일세! 아니, 그건 또 어떻게?”

혹시 도련님이 후사 문제로 곤란을 겪고 있는 게 동십사가 옆에 있어서 그런 건 아닐까? 진해는 동십사가 알면 통곡할 생각을 하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제가 다 말해 줘 놓고선 어떻게 알았냐니.

이 월국에서 귀한 집 음인으로 태어났는데 후사가 되지 못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첫 번째로는 서출인 경우였고, 두 번째로는 몸에 장애가 있는 경우였다. 도련님의 몸에 장애가 없다는 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장애가 있기는커녕 도련님의 몸은 강건하고, 신선하고, 또…… 입맛을 당겼으니까.

게다가 동십사는 도련님이 후사가 되는 것이 전혀 골치를 썩일 문제가 아니라고 말했다. 사실 진해가 도련님이 적자임을 확신한 건 바로 저 말 때문이었는데 서출이라면 정실의 양자로 입적하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빈말로라도 후사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도련님은 적자, 아마도 장자나 독자로 태어났는데도 후사가 되지 못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죽이지 않고 미혼약을 먹여 범하려 한 것을 보아 장자보다는 독자에 가까워 보였다.

“그냥 대충 넘겨짚은 겁니다.”

“겸손하구만. 그게 대충 넘겨짚은 거라면 거리의 점쟁이들은 자네 앞에서 모두 다 꼬릴 말고 사라질걸세. 어쩌면 자네가 도련님의 목숨을 구한 건 하늘이 안배한 운명일지도 모르겠어!”

동십사는 이제 진해를 한때의 은인이 아닌 한때의 똑똑한 은인으로 보는 듯했다. 똑똑한 게 아니라 이런저런 일을 겪다 보니 생긴 눈치였지만 진해는 자신이 동십사보다는 똑똑한 것 같았으므로 동십사 앞에서는 똑똑한 오진해인 척하기로 마음먹었다.

“후! 어쨌거나 참으로 통탄할 일일세! 해가 거듭될수록 도련님께 뻗치는 마수는 더욱 흉악해져만 가니!”

“사람이 죽은 건 이번이 처음인가 보네요?”

“그렇지……. 이때까진 타던 말이나 수레에 문제가 생겼던 게 가장 큰 문제였지. 도련님께서 무공에 자질이 없으셨다면 제대로 걸어 다니실 수도 없었을 게야.”

“그게 더 큰일이잖아요!?”

진해는 도련님이 반신불수가 될 뻔했다는 말에 기겁했다. 그러나 동십사는 고개를 가로젓는 것으로 진해의 말을 부정했고, 목이 타는지 찻잔을 들어 내용물을 단숨에 들이마셨다.

‘아이고, 이것 참! 아무래도 미려를 이 집으로 부르는 건 미뤄 둬야겠어! 동십사 저 작자가 도련님의 후사 문제에 생각보다 많이 열중하고 있잖아? 미려를 엄한 일에 끌어들일 수는 없고말고. 짜증 나지만 조관림 그놈한테 기회를 한 번 더 줘야겠어. 얌전한 작자라 쓸데없는 곳에 끼어들지는 않으니까.’

동십사가 비운 찻잔에서 식지 않은 김이 피어올랐다. 동십사는 뜨겁지도 않은지 빈 찻잔에 다시 새 차를 채워 넣었다. 그것을 세 번을 반복하고 난 뒤 동십사는 무거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피로에 전 숯 검댕 눈썹이 진해 쪽을 향해 있었다.

“원래 이리 길게 말할 생각이 없었지만 어찌 보면 잘된 일일지도 모르겠어. 자네도 영문도 모른 채 이 집에 있기는 싫을 것 아닌가.”

“그야 당연하지요. 아니, 그것보다 전 언제까지 이 집에 있어야 하는 겁니까? 오늘이나 내일 중으로 동생이 올 수도 있다구요. 눈물이 많은 애라서 제가 집에 없는 걸 보면 하루 종일 울 수도 있는데!”

“동생이랑 우애가 깊구만. 부러운 일일세. 미려방에 기생으로 있다고 해서 자네가 생활고에 못 이겨 동생을 판 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누, 누가 우리 귀염둥이를 팔아넘겨요! 우리 강아지는 팔려 간 게 아니라 미려방에서 모셔 간 거거든요?!”

“그래? 형제가 나란히 재주가 많은 모양이로군. 어쨌거나 자네는 당분간 이 집에 있어 줘야겠어. 자네 동생에겐 미안하지만 일이 해결될 때까진 만나는 것도 자제하는 게 좋을걸세.”

“허어?”

미려를 부른다는 계획이 어그러지자 진해는 당장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도련님의 상태를 본 뒤 여지주를 주고 앞으로 독이 오를 것 같으면 사람을 보내라고 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동십사는 진해를 보내 줄 생각이 추호도 없는 듯했다. 미려가 우는 게 세상에서 제일 싫은 진해에겐 청천벽력과도 다름없는 말이었다.

“이건 자네를 위한 일이야.”

게다가 저 망할 주둥이로 진해를 감금하는 것이 진해를 위한 일이라는 거짓부렁까지 치지 않는가. 진해는 동십사에게 몇 번 알랑거리며 집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조를 셈이었다. 똑똑한 오진해와 도련님의 은인 오진해를 번갈아 사용해서 동십사를 혼을 빼 놓을 생각이었다.

“이 집에서 도련님이 드신 약이 탈정고라는 걸 아는 사람은 도련님과 나, 자네. 셋밖에 없네. 즉, 낭중이 죽은 게 도련님과 관련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도―”

“이런 빌어먹을!”

그러나 동십사의 말을 들은 순간 진해는 자신이 결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달았다. 탈정고를 만든, 아마도 그 탈정고가 도련님에게 갔다는 걸 알지도 못할 낭중을 죽였다. 낭중뿐만 아니라 낭중의 남편까지 해를 입혔다. 두 다리, 세 다리 건너 있을 무고한 이까지 입을 막았던 것이다.

만약 도련님이 먹은 약이 탈정고라는 게 알려진다면 어찌 될 것인가. 관에서 금지된 약품을 귀한 댁 도련님이 드셨다, 범인을 찾아야 한다. 그렇다면 분명 관의 사람들이 탈정고를 만든 이를 찾아 나설 것이고, 오랜만에 탈정고를 만든 의원은 일이 생각보다 커짐을 눈치챌 것이다. 이번엔 사람을 사서 모면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될 터.

“그래서 한씨 형제한테 경고를 해 달라고 했구나!”

낭중은 관아에 자수하며 자신에게 탈정고를 의뢰한 이를 실토할 가능성이 컸다. 이때까지의 정황을 따져 보자면 낭중에게서 탈정고를 받아 미려방에 밀어 넣은 건 한씨 양아치들인 게 분명했다.

어쩌면 그들이 다른 이에게 명을 받아 낭중에게 탈정고를 주문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낭중의 남편은 죽어 가면서 그것을 깨달았을 것이고, 믿을 수 있는 이인 진해에게 한씨 형제에게 경고를 전해 달라 부탁한 것이리라. 꼴도 보기 싫은 양아치 패거리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봐 온 얼굴이니까. 타인에게 죽임당하는 게 싫을 정도의 정은 있으니까.

“에휴, 동 형. 당분간 신세 좀 져야겠습니다.”

“그래, 잘 생각했네.”

해산 도련님과 진해가 함께 있는 모습을 온 잠춘동 주민이 다 보았다. 게다가 진해는 탈정고를 만든 낭중과 연이 있었다. 참상을 처음으로 목격한 이이기도 했으니 살수의 목표가 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진해는 미려의 울망울망한 눈을 떠올리며 크게 한숨지었다. 아무래도 범인을 잡을 때까지 동십사의 집에 머물러야 할 것 같았다.

“자네가 원한다면 동생도 불러 데리고 있어도 좋네. 내 사람 몇을 미려방으로 보내도록 하지.”

“아뇨, 괜찮습니다. 미려방의 문은 생각보다 튼튼하거든요. 그냥 말이나 전해 주십쇼. 당분간 제가 이 집에 일을 와 있는 것으로. 꼭! 반드시! 일하러 와 있다고 전해 주세요!”

진해를 죽이지 못한다면 입막음을 하기 위해 미려를 인질 삼을지도 몰랐다. 하나 진해는 미려를 부르는 대신 미려에게 자신의 안부나 전해 달라 부탁했다. 왜냐면 미려방의 보안이 생각보다 철저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해는 미려에게 자신의 위험을 알리지 않길 원했다. 미려가 자신이 위험하단 걸 안다면 춤을 추며 달려와 자신을 미려방의 특실에 가둬 놓을지도 몰랐다. 형아를 지킨다느니 뭐느니 하는 말을 일삼으면서. 그럴 바에야 차라리 동십사의 집에 머무르는 게 나았다. 그러면서 도련님도 돌봐 주고, 틈을 봐서 몸도 살짝 만져 주고. 여러모로 일석이조였다.

동십사는 진해가 이 집에 있는 동안 자신이 한씨 형제를 찾겠다고 말했다. 진해가 다른 곳에 갈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진해는 동십사에게 한씨 형제들이 어떤 이들인지에 대해 대충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비 놈들이 어떤 놈들인지는 몰라도 애들 이름을 아주 대충 지어 놓았습니다. 첫째가 일, 둘째가 이, 셋째가 삼이라니까요.”

“한일, 한이, 한삼이란 말이군.”

“막내는 이름이 좀 다르긴 한데, 어쨌든 앞의 두 놈은 그렇습니다. 아마 도련님을 납치하려 한 놈들도 한일, 한이일 거예요. 꼴에 형 노릇 한답시고 막내 손에는 피를 잘 안 묻히려고 하더라구요.”

진해는 한씨 형제들이 저질렀다고 알려진 악행 중 이번 일과 비슷한 유형의 사건들만 꼽아 주었다. 동십사는 한씨 형제들의 전적에 제법 놀란 눈치였다. 어릴 때부터 저질렀던 자잘한 사건들은 빼놓고 말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쨌거나 동십사는 진해의 말을 잘 새겨들었다. 동십사는 이제 자신이 관원이라는 걸 숨길 생각이 없는지 진해 앞에서 군복을 입은 포졸을 불러들였다. 포졸이라도 다 같은 포졸이 아닌지 동십사가 부리는 포졸은 각이 잡힌 반듯한 관복을 입고 있었다. 가뭄에 콩 나듯이 골목을 어슬렁거리는 잠춘동의 포졸과는 차원이 달라 보였다.

“저, 동 형. 이제 바쁘신 듯한데 저는 물러나도 될까요? 도련님께 드릴 것도 있고.”

“아, 그래. 그러도록 하게. 안 그래도 도련님께서 자네 걱정을 하고 계셨어. 왔으니 가서 문안을 드리게. 내 나중에 시간이 나거든 다시 한번 자네를 부르도록 함세.”

관졸에게 뭔가를 지시하던 동십사는 하인을 불러 진해를 도련님의 방으로 안내하도록 했다. 진해가 짐을 찾자 하인이 말하길 진해가 머물 방은 도련님의 방으로 가는 길목에 있으니 그때 들러 찾아가면 될 것이라 했다. 살짝 들러 본 진해의 방은 잠춘동에 있는 진해의 집보다 훨씬 좋았다. 진해가 아무리 쓸고 닦아도 대갓집의 휘황찬란함을 따라잡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진해는 어쩐지 기가 죽는 것을 느끼며 여지주가 든 병만 챙겨 들고 얼른 방을 나왔다.

한참 동안 회랑을 걷던 하인은 이번엔 아예 층계 아래로 내려와 진해가 머무는 객실과 응접실이 있던 건물과는 다른 곳으로 진해를 데려갔다.

“잠깐만, 도련님이 계신 곳으로 가는 거 아닌 게요?”

“맞습니다.”

“아예 다른 집으로 가는 거 같은데?”

하인은 진해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살며시 미소 짓기만 했다. 진해는 하인이 저를 별채로 안내하나 싶었는데 하인은 진해를 동십사의 집 별채가 아니라 아예 다른 집으로 데려가려는 듯했다. 왜냐면 하인과 진해가 멈춰 선 곳이 으슥한 담벼락 한구석이었기 때문이다.

“이 댁에서는 주인 나리와 저, 집사 어르신만 아시는 길이니 공자께서도 함부로 누설하지 않도록 조심해 주십시오. 주인 나리께서는 이 길 때문에 일부러 이 낡은 집에 거하시는 것이니까요.”

“뭐, 낡아?”

이런 휘황찬란한 집이 낡았다니. 대갓집 하인이라 씀씀이가 다른 모양이었다. 진해가 전혀 동의할 수 없는 하인의 말에 얼굴을 찌푸리는 동안 하인은 덤불로 가려진 벽의 어딘가를 누르며 뭔가를 찾는 듯했다. 다른 이들이 본다면 놀랄 일이었지만 아쉽게도 진해는 잠춘동보다 더 못 사는 동네인 추피동(秋避洞)에서 이것과 비슷한 장치를 본 적이 있었다. 물론 추피동의 것은 이것과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조잡했지만.

길을 낸 하인은 진해를 먼저 들여보낸 뒤 꼼꼼히 길을 닫아 놓았다. 미행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였다. 층계를 내려가자 어두컴컴한 복도 안쪽에서 희미하게 불빛이 비쳐 왔다. 하인은 스스럼없이 그쪽으로 향했고 진해는 곧 커다란 횃불이 세워진 광장에 도착했다.

“혹시 이거 말로만 듣던 미로인가?”

“하하, 공자님도 참 겨우 세 갈래 길로 어찌 미로가 되겠습니까. 게다가 현재 쓸 수 있는 길은 저희가 다니는 이 길 하나뿐입니다. 나머지 두 길은 반대쪽에서 막혀 있다고 하더라구요.”

“호오. 어디로 향하는 길이길래?”

“그건 저도 모릅니다. 제게 이 길을 알려 주신 분도 그건 알려 주시질 않았어요. 알고 싶으면 이 집에 뼈를 묻을 각오를 하라더군요.”

“헉!”

하인은 진해를 가장 왼쪽 길로 안내했다. 놀라는 진해가 재미있는지 진해 쪽으로 돌아보면서 음산하게 웃어 보였다.

“공자께서 알고 싶으시면 제가 어르신께 여쭈어보겠습니다. 만약 제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면 그건 다 공자의―”

“안 궁금해! 하나도 안 궁금하오! 도련님이 기다리시는데 어서 갑시다! 난 어두운 곳이 아주 질색인 사람이오!”

동십사의 집에 뼈를 묻을 생각일랑 추호도 없는 진해는 여지주병을 들지 않은 손으로 하인의 등을 떠밀었다. 하인은 소리 내 웃으면서 진해와 함께 앞으로 나아갔다.

진해는 몰랐지만 사실 하인은 진해가 원치 않아도 언젠가는 이 통로의 비밀을 알게 될 사람이었다. 왜냐면 하인은 이 집 집사의 사위이자 후임이 될 몸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일개 하인이 이런 중요한 비밀 통로를 알 리 없었다.

마침내 올라가는 층계 앞에 도착한 하인은 진해를 층계 아래 대기 시킨 뒤 올라가 구멍으로 조심스레 밖을 내다보았다. 통로가 제법 긴지 어느새 하늘의 빛깔이 달라져 있었다.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 것을 확인한 하인이 문을 열고 진해를 불러냈다. 신중히 문을 닫은 하인은 문 앞에 작은 돌을 놓아두었는데 혹시나 자신 외에 다른 이가 드나들면 알 수 있도록 표를 해 놓은 것이었다.

“우와!”

“공자님, 여긴 주인 나리 댁이 아니라 저도 길을 잘 알지 못하니 잘 따라오셔야 합니다.”

통로를 하나 지났을 뿐인데 진해는 자신이 새로운 세상에 도달했다 여겼다. 이곳은 아마 도련님의 집인 듯했는데 그 웅장함이 마치 황궁을 연상케 하는 듯했다. 높게 쌓은 가산(假山) 사이로 폭포가 떨어지고 있었는데 은은하게 물안개가 피어난 것이 마치 선계를 연상케 했다. 기이한 향기를 풍기는 기화요초 역시 진해의 혼을 빼 놓았다. 바람이 불자 어디선가 맑은 종소리가 났는데 그것은 높다란 지붕 아래 매달린 풍경에서 울려 퍼진 소리였다.

“우와, 우와…….”

진해는 시장통에 처음 나온 어린아이가 된 기분으로 입을 떡 벌린 채 하인의 뒤를 따라갔다. 동십사의 집이 낡았다는 하인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도련님의 집에 오니 하인이 왜 동십사의 집이 낡았다고 했는지 이해가 갔다. 확실히 이런 집을 보다가 동십사의 집을 보게 되면 낡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뭐로 닦았는지 번쩍번쩍 광이 나는 기둥은 진해가 비법을 알고 싶을 정도였다.

“동 대인 댁에서 왔습니다. 고해 주십시오.”

그 으리으리한 집의 여기저기를 지나온 곳은 이 집의 가장 심층부인 듯한 별채였다. 딱딱한 인상의 하인들이 서 있었는데 하나같이 기골이 장대하고 근엄하였다. 낯이 익은 듯 하인들은 동십사의 하인을 경계하지 않았다. 진해에게 경계의 시선이 꽂혀 주눅 들 뻔했지만 진해가 안고 있는 여지주병이 진해에게 용기를 주었다. 진해는 이 집 주인인 도련님과 응응하고 앙앙한 사이였다. 진해는 파렴치한 상상을 하면서 하인들에게 씩 웃어 보였고, 가장 문 가까이에 있던 하인의 미간이 살짝 꿈틀거렸다.

“모셔 왔습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무릎을 꿇은 하인과 달리 진해는 여지주병을 들고 도련님을 향해 쪼르르 달려갔다. 하인은 제 옆을 달려가는 발을 보자 엎드린 채로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헤헤, 도련님!”

“너 왔느냐…….”

해산 도련님은 방에 홀로 있는 듯했다. 진해는 도련님이 우두커니 앉아 있는 모습을 보자 역시 자신이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적자인데도 자리를 위협받는 도련님이었다. 아버지들은 물론이요, 친척들과도 좋은 사이일 리 없었다. 진해는 도련님을 바라보며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밝고 천진하게 웃어 보였다. 멍청해 보이면 더욱 좋을 일이다.

“데려오느라 수고했다. 볼일이 끝나면 부를 터이니 적당히 쉬고 있거라.”

해산 도련님이 하인에게 말하자 하인은 고개를 숙인 그대로 방을 물러 나갔다. 이제 방에는 진해와 해산 도련님 두 사람이 남게 되었다.

“도련님, 안색이 안 좋으세요.”

“그래 보이느냐?”

“꼭 분을 바르신 것 같아요. 혹시 화장에 흥미 있으세요? 도련님은 그렇게 검게 보이진 않으신데요? 물론 그렇다고 아주 하얀 건 아니시지만!”

“웃긴 놈. 내가 광대 패도 아니고 뭐 하러 화장을 하느냐.”

“그럼 안색이 안 좋으신 거네요. 솔직히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죠. 저도 집에 돌아가서 한바탕 쏟아 냈다니까요.”

“네가? 전혀 그리 보이지 않았는데.”

“아이고, 말도 마세요. 그날 밥도 안 먹었다구요!”

진해는 도련님이 자리를 권하지 않았음에도 의자를 끌어와 도련님 옆에 자리 잡았다. 초췌한 얼굴의 도련님은 그런 진해를 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 미소를 짓자 시체 같던 얼굴에 겨우 안색이 돌아오는 듯했다. 진해는 부서질 것처럼 여린 미소에 마음이 엄청나게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꼭 안아 주고 오냐오냐 달래 주고 싶은 미소였다. 물론 해산 도련님은 진해의 품에 안기기엔 터무니없이 큰 장신이었지만.

그렇다면 최소한 도련님의 얼굴에 미소를 띄워 주고 싶었다. 오랜만에 자신과 합이 맞는 음인, 딱딱한 껍질과 달리 야들야들한 속을 가진 그런 음인. 해산 도련님은 거칠거칠하고 볼품없는 진해와 달리 대리석처럼 우아하고 수려했다. 대리석은 깎아서 다듬는 것도 좋지만 진해는 웬만하면 대리석 고유의 아름다움이 부서지지 않고 지켜지길 원했다.

“그래서 제가 도련님을 위해 이런 걸 준비했답니다~!”

“뭐냐, 이건? 설마 이상한 미혼약인 건…….”

“네? 미혼약이요? 제가 왜요?”

“아, 아니다. 실언이었다.”

진해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귓불이 슬쩍 붉어진 도련님을 바라보다 비장의 여지주병을 들어 올렸다. 뽕, 소리와 함께 마개를 뽑자 여지와 술이 섞인 향기로운 내음이 진해의 코밑을 간지럽혔다. 여지는 싫어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과일이라 여지주도 잠춘동 같은 빈민가에서부터 감히 올려다보지도 못할 황궁까지 두루두루 쓰이는 술이라 들었다. 미려방의 여지주는 외부의 부호들도 사 간다고 하니 도련님도 미려방의 비법으로 만든 여지주를 싫어하진 않을 터.

“하~ 냄새 좋다~!”

“술인 게냐?”

“네, 여지주입니다! 제가 도련님을 위해 직접 담갔지요!”

여지주는 익으려면 최소 일주일이 걸렸다. 도련님을 위해 담갔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술을 담글 줄도 알다니 넌 보면 볼수록 재주가 많구나.”

“제가 어릴 때는 재주가 하도 많아 만재(萬材)라고 불렸습죠! 간장 공장, 된장 공장, 부채 공장, 신발 공장! 잠춘동에 있는 공장이란 공장에선 다 일해 봤다니까요?”

“호오.”

“하지만 공장에서 붙박이로 일하려면 숙박을 해야 한대서 품앗이로만 하고 말았습니다. 어린 동생을 홀로 집에 남겨 둘 수는 없는 법이지요.”

진해는 길거리 약장수처럼 제 이력을 줄줄 읊어 대며 여지주를 따를 잔을 찾았다. 그런데 이놈의 방엔 찻잔만 즐비하지 술잔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었다.

“흠, 술이라…….”

게다가 도련님의 태도도 묘하게 미적지근했다. 술을 아는 사람이라면 입맛이 당길 향기가 폴폴 풍기는 데도 그냥 멀거니 여지주를 바라보기만 했다.

‘응?’

진해는 문득 느껴지는 기시감에 몸을 멈췄다. 술을 앞에 두고 느껴지는 미묘한 감각, 이 감각은 예전에 진해가 딱 한 번 겪어 본 적 있는 감각이었다. 미려에게 처음으로 술을 나눠 줄 때의 기분이었다.

“저, 근데 도련님…….”

“왜 그러느냐?”

“제가 이렇게 묻는다고 화내지 마시고 그냥 너그럽게 답을 내려 주세요.”

“또 무슨 고얀 생각을 하는 게야?”

“고얀 생각이라니!”

“양인 놈들이 하는 생각이야 뻔하지. 고에게 또 언제 탈정고의 독이 오르나 기다리는 것이 아니냐.”

“아니거든요! 최소한 지금은 절대 아닙니다!”

진해는 가소롭다는 미소를 입에 건 도련님에게 빽 소리쳤다. 물론 도련님이랑 즐겁게 노닐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도련님의 엉덩이 사이는 진해가 정말로 오랜만에 맛보는 음인의 몸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진해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절대로 음란하다거나 음탕하다거나 하는 것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도련님, 올해 춘추가 어찌 되세요?”

진해는 해산 도련님이 몇 살인지 알고 싶을 뿐이었다.

“뭐?”

“올해 나이가 어찌 되시냐구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 관례를 치르지 않은 분께 술을 드리면 안 되잖아요.”

미려랑은 관례를 치르기 전에 술을 나눠 마셨다. 별다른 약재가 없는 잠춘동에서 진해는 감기가 잦은 미려를 위해 온갖 열매를 주워 모아 어설픈 약주를 담갔었다.

“누, 누굴 어린아이로 보는 게냐!”

“왜 화를 내시고 그러세요. 그냥 춘추가 어찌 되시는지 여쭸는데.”

“나, 아니, 고, 고(孤)는 올해 관례를 치렀다! 술 따위는 얼마든지 마실 수 있어!”

“헉, 올해요?!”

이럴 수가! 진해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병을 떨어뜨릴 뻔했다. 놀라게도 해산 도련님은 미려와 동갑인 듯했다. 미려는 아직도 애티를 벗지 못해 형아형아 부르고 다니는데 해산 도련님은 저렇게 삭, 아니 성숙한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넌 나이가 몇이냐?”

당황하던 해산 도련님은 곧 침착을 되찾았다. 눈을 가느스름히 뜨고 진해를 마주 보았다. 처음에는 오만하고 거만해 보였던 저 얼굴이 올해 관례를 치렀다는 것을 알게 되자 진해는 어딘지 모르게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전 관례를 치른 지 다섯 해가 지났습니다.”

“……뭐?”

“남들이 다 절 어리게 보더라구요! 하하, 젊게 살고 좋지요, 뭐!”

충격받은 얼굴을 보아하니 해산 도련님은 진해를 자신의 또래로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진해는 오밀조밀하게 생겨 예전부터 꽤 어려 보인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어려 보이는 탓인지 묘하게 어린 것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흠, 흠. 어쨌거나 도련님은 술도 혼인도 가능한 나이신 거지요. 아무렴요.”

해산 도련님은 어쩐지 진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깜짝 놀란 탓인지 창백했던 낯에 혈색이 돌아와 있었다. 이제야 조금 진해가 아는 해산 도련님인 것 같았다.

“그래. 고, 아니, 나는 혼인도 술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나이지. 이리 내라!”

“아이구, 제가 적당히 따라 드릴게요!”

“이리 내라니, 엇!”

미려와 동갑인 도련님에게 병나발을 불게 할 수는 없어서 잔을 찾으려던 진해는 결국 도련님에게 병을 뺏기고 말았다.

“앗, 내 비법 여지주가!”

문제는 도련님의 빼앗는 힘이 지나치게 강해서 여지주병이 진해의 손을 떠나다 못해 공중을 날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마개가 빠진 병은 공중에서 한 바퀴 회전하더니 끌어당긴 도련님의 어깨를 한번, 가슴을 한번 적시더니 마침내 허벅지 위쪽에 안착했다. 기울어지자 꼴꼴 소리를 내며 분홍빛 액체가 옷 위를 적시기 시작했다.

“헉, 안 돼! 비단은 손질이 어려운데!”

빨래방에서도 일해 본 적이 있던 진해는 도련님의 비단옷 위에 분홍빛 얼룩이 지기 시작하자 번개처럼 달려가 여지주병을 치우고 얼른 도련님의 옷 위를 제 옷으로 팡팡 두드리기 시작했다. 완전히 마르기 전에 최대한 여지의 색을 빼야 더 이상 물들지 않을 터였다.

“…….”

진해는 비싼 비단에 정신이 팔려 몰랐지만 진해는 저도 모르게 도련님의 고간에 자극을 주고 있었다. 아찔한 향기와 함께 해산 도련님의 다리 사이에 세지도 않고 약하지도 않은 미묘한 타격이 가해졌다.

진해와 가까이 있어서 그런지 달콤하고 알싸한 향 사이로 진해의 향내가 섞여 드는 것 같았다. 어쩐지 취하는 기분이라 도련님은 혀를 내어 제 입술 위에 튄 여지주를 빨아 삼켰다.

“아이구, 아이구! 이 좋은 비단이! 어서 빨리 헹궈야겠습니다, 도련님 얼른 벗으세요!”

“…….”

진해는 이 집 하인들을 다 놔두고 제가 빨래터로 달려갈 기세였다. 도련님은 진해의 말에 따라 옷고름에 손을 대고 느릿하게 그것을 풀러 내렸다. 일부러 느릿하게 푼 것은 아니었다. 저도 모르게 숨이 가빠지고 손이 떨리고 있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진해의 향이 자꾸만 해산 도련님의 비강 속에 쌓여 갔다. 오롯이 저만이 담겨 있는 눈동자를 보자 해산 도련님의 몸 중심에서 알 수 없는, 그러나 모른 척할 수 없는 불길이 거칠게 솟구치기 시작했다.

“하아…….”

독이었다. 또 탈정고의 독이 오르고 있었다. 해산 도련님은 자신에게 독이 오르는 것을 인지한 순간 제 향을 제어하지 못하고 몽땅 쏟아 버리고 말았다. 왈칵 쏟아지는 향을 맡은 진해가 좀 어이없는 얼굴로 해산 도련님을 올려다보았다.

“뭐야, 겨우 옷 벗는 거 가지고 느낀 거야?”

진해의 말이 순식간에 반토막 났다. 얼빠진 표정은 곧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해산은 부끄러웠다.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하지만 눈앞의 사내는 자신의 더 부끄러운 모습을 알고 있었고,

“귀엽긴.”

또 그런 자신을 얼마든지 수용하고 유린할 수 있었다.

“예쁜아. 어린 것이 벌써부터 색을 밝히면 앞으로 어떡하려고 그래. 이렇게 헤프게 굴면 올 서방도 안 와. 응? 아니면 서방 하나로 만족 못 해서 그래? 그래서 어려서부터 이렇게 싸게 구는 거야?”

해산의 떨리는 손 위에 제 손을 겹치고 진해는 해산의 옷고름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풀어 내렸다. 옷고름이 풀릴 때마다 천 아래의 융기가 가파르게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해산은 술 한 모금 마시지 않았는데도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희락기가 온 거로 착각할 것이다.

매도하는 말에 반박해야 되는데 어쩐지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천이 몸에서 다 떨어지지 않았는데도 발가벗은 기분이었다. 유쾌한 어조로 힐난하는 얼굴을 보자 숨이 떨렸다. 진해의 눈으로 응시당하는 동안에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온 방을 새빨갛게 물들이던 핏자국들이나, 굳은 몸뚱어리, 죽어 가는 이의 신음을 깨끗하게 지워 낼 수 있었다.

“아이, 착해라. 혼자서 잘 서 있네. 어린 것이 벌써부터 혼자 서 있고. 기특하니까 뽀뽀나 해 줄까.”

“흐읏!”

“싫어? 어린애 아니야? 그럼 어떻게 해 줄까? 형이랑 어른답게 놀아 볼래?”

진해는 짙게 웃으며 해산의 옷을 벗겨 버렸다. 하의 후에는 속옷, 속옷 후에는 상의. 이상한 방식으로 해산을 벌거벗게 했다. 그러나 이 기묘한 순서는 해산을 부끄럽게 만들기에는 탁월하기 그지없는 방법이었다. 상의를 입은 채 곧추선 아랫도리를 내보이자 해산은 자신이 정말로 똥오줌 못 가리는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진해의 콧노래가 그런 해산의 열감을 부채질했다. 해산은 부끄러워 쥐구멍에라도 처박히고 싶은 심정인데 진해는 아기를 대하는 것처럼 해산의 옷을 담백한 태도로 스스럼없이 벗겨 냈다. 발가벗은 해산이 이를 악물었다. 허벅지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어디 보자, 우리 아기. 형아 좀 볼까요? 아이구, 잘 참고 있네. 이렇게 선 걸 잘도 참고 있네. 아이, 착해. 아이, 잘했어.”

“읏!”

진해가 목덜미를 쓰다듬자 등줄기로 오싹 소름이 끼쳤다. 단정히 올려 묶은 머리칼을 엉망으로 쓰다듬고 떨리는 뺨을 꼬집는 동안 해산의 몸 위로 오한과 같은 감각이 퍼져 나갔다. 진해의 손은 해산의 몸에 닿은 손 중 가장 거친 감촉을 갖고 있었다.

“그럼 형아가 이제부터 착한 해산 아기한테 상을 줄게요. 형아가 해산 아기 주려고 갖고 온 여지주를 마시는 거야. 여지 좋아하지?”

“응…….”

“이런 나쁜 아기! 형아한테는 네라고 해야지!”

“그런…….”

“싫어? 싫음 형아는 그냥 갈게. 형아는 나쁜 아기랑은 안 놀 거야. 착한 아기랑 놀러 가야지.”

해산은 진해가 간다는 소릴 듣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진해는 정말로 가려는 모양인지 여지주병을 챙기고 있었다. 그 순간, 해산의 눈앞에 맥없이 흩어지던 여러 가지가 신기루처럼 떠올랐다. 해산의 것임에도 해산이 가질 수 없던 것들. 해산에게는 주어지지 않던 그런 온기들.

“혀, 형님!”

진해는 그런 해산이 (자의는 아니었지만) 제 몸으로 피워 낸 불씨였다. 처음에는 무도한 자였던 진해가 지금은 해산의 부싯돌 같은 자가 된 것이었다. 단지 해산의 처음을 가져갔기 때문이 아니었다. 해산에게 쾌락을 안겨 주어 그런 것도 아니었다. 언젠간 해산도 혼인할 것이고 남편을 맞이할 터였다. 해산이 원한다면 지금도 처첩 한둘쯤은 얼마든지 둘 수 있었다.

그러나 해산은 어느 때가 되어도 절대로 진해를 잊지 못할 것을 알 수 있었다. 해산은 이제 막 관례를 치른 풋내기였지만 다른 이들은 결코 이런 식으로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자신과 진해의 정교가 해독이 아니라는 것도.

“응? 아기치고 말이 좀 어렵네. 뭐, 좋아. 형님도 나쁘지 않아.”

진해는 해산과 있을 때는 오롯이 해산 한 사람만을 봐 주었다. 해산이 뭘 걸치고 있던 오로지 해산에게만 관심이 있었다. 해산은 진해의 저 시선이 정말로 좋았다. 저 시선을 받고 있으면 저를 옥죄는 껍데기를 벗고 무언가 다른 생명체로 우화하는 것만 같았다.

“이야, 뭘 먹었길래 다리가 이렇게 실해?”

“흐읏.”

진해는 형님 소리가 들리자마자 순식간에 해산의 곁으로 돌아왔다. 해산의 앞에 무릎 꿇고 힘이 들어간 해산의 허벅지를 어루만졌다. 허벅지 사이에서 물이 흐르기 시작하는 물건은 본체만체했다. 좋은 고기를 고르는 것처럼 해산의 허벅지 이곳저곳을 누르고 쓰다듬을 뿐이었다.

“해산아.”

“네…….”

“우리 해산이는 뭘 좋아해? 형아는 다 잘하는데 그래도 이왕 할 거면 해산이가 좋아하는 걸 했으면 좋겠네. 형아는 요기, 이 맛있게 생긴 허벅지를 먹고 싶어. 해산이는 이 실한 허벅지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진해는 해산의 허벅지가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는지 말을 하며 꿀꺽 침을 삼켰다. 진해의 눈 속에 번들번들한 욕정이 잔뜩 고여 있었다.

“핥아 줄까? 깨물어? 때리는 건? 긁는 건 어때? 문질러도 되는데.”

말을 이으면서 진해는 꽤 흥분했다. 진해의 입술 사이로 더운 숨이 뿜어졌다. 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우유 향이 해산의 피부 위로 듬뿍 끼얹어졌다. 진해의 요리라는 게 입으로 들어가는 물건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그러나 무슨 요리법을 골라도 진해는 해산을 만족시켜 줄 터였다. 해산의 배를 그득 채우고, 줄줄 넘치게 만들어 줄 터였다.

“아, 맞아. 내가 깜박할 뻔했네. 우리 해산이 형아랑 같이 술 마시기로 했지?”

진해는 해산이 대답하지 못할 것을 간파한 듯했다. 해산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해산의 양 허벅지를 힘을 줘 빈틈없이 강하게 모아 붙였다.

“잘 익었는지 안 익었는지 이 형님이 먼저 맛을 볼게. 우리 해산이는 어리니까 아직 술맛을 잘 모르잖아. 맛있는지 없는지 형아가 먼저 먹어 보고 해산이를 줄게.”

그 후에는 여지주병을 기울여 모인 허벅지 사이에 들이부었다.

“으앗!”

분홍빛의 차가운 액체가 허벅지 사이에 고이기 시작하자 해산은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몸을 떨어 버렸다.

“어허!”

허벅지 사이가 떨어져 버리자 담겨 있던 액체가 해산의 허벅지 사이로 몽땅 쏟아졌다. 술 특유의 시원한 감각이 해산을 소름 돋게 했다. 진해는 술이 쏟아지자 미간을 찌푸리고 근엄하게 혼내기 시작했다.

“해산이 너 어떻게 음식 아까운 줄 몰라!”

시원한 감각이 가시자 약간 후끈거리는 감각이 뒤를 이었다. 진해는 해산의 허벅지를 모으고 다시 여지주병을 기울였다.

“앞으로 흘릴 때마다 혼내 줄 거야! 허벅지에 맴매를 때려 줄 거라고!”

“아…….”

진해는 허벅지 사이로 넘치지 않을 정도의 여지주를 들이부었다. 탄탄한 허벅지 사이에 분홍빛 연못이 생긴 광경은 기묘했다. 곧추선 물건의 하단이 여지주의 연못에 슬그머니 잠겨 있었다. 술을 이런 식으로 사용할 것이라곤 꿈에도 상상치 못한 해산은 무척 당황했다. 그러는 한편 손끝이 짜릿해질 정도로 흥분했다.

“음, 내가 본 것 중에 제일 좋은 술잔이야.”

왜냐면 진해가 자신을 어떻게 할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술잔이 어떤 식으로 쓰이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산은 허벅지에 힘을 주고 가쁜 숨을 내쉬면서 진해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흥분한 진해의 입술은 술에 취한 것처럼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옅게 가로지르는 흉이 도드라졌다. 군침을 흘리는 목울대가 크게 울렁이고 말랑한 혓바닥이 튀어나와 입술을 핥고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자 술을 마시지 않아도 얼큰하게 취기와 같은 것이 치고 올라왔다. 해산의 아랫배 깊숙한 곳에서 시작된 열기가 혈관을 타고 해산의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거죽 한 장 아래로 숯과 같은 불씨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하아, 하아…….”

심장이 두근거려 터질 것만 같았다. 사방이 고요하고 시간이 엿가락처럼 한없이 늘어지는 듯했다. 그리고 그 순간, 진해가 고개를 숙였다. 급하게 달려드는 것도 아니고 그저 나른한 눈매를 한 채로 무릎을 꿇고 천천히 고갤 숙였다.

“으응…….”

개가 물을 핥는 것처럼 할짝거리는 소리가 났다. 진해는 살 사이에 고인 술을 한 모금 쭉 들이마신 뒤, “후―” 숨을 내쉬었고 그다음에는 물을 마시듯이 꿀꺽꿀꺽 집어삼켰다.

“아……!”

연못의 수위가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해산의 손마디가 새하얘졌다. 따끈따끈한 진해의 얼굴이 점점 더 다리 사이로 파묻혔다. 고인 술을 다 마신 진해는 살 위에 묻은 여지주마저도 놓치지 않았다. 혓바닥을 너르게 펴 한 방울도 남김없이 핥아 마셨다.

“하윽!”

뾰족한 혀끝이 해산의 물건과 주머니 사이에 들이박혔다.

“크으, 술맛 좋다! 한 잔 더!”

살짝 긁어 올리듯이 핥고 난 뒤 진해는 미련 없이 고개를 들었다. 들어 올린 얼굴은 발긋하게 물들어 있었다. 말하는 숨에서 진한 술 냄새가 풍겼다. 얼큰하게 취한 진해와 대조적으로 해산은 이제 발끝이 잔뜩 오므라져 있었다.

술잔에 술이 비자 얼굴과 마찬가지로 붉어진 진해의 손이 다시 여지주병을 기울였다. 잘게 떨리는 술잔 위로 아까와 같은 양의 술이 부어졌다.

“아참, 우리 해산이도 한잔해야지?”

눈이 게게 풀리기 시작한 진해가 해산을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해산은 입술을 어찌나 질겅거렸는지 입술이 새빨갛게 부어 있었다. 진해는 잔뜩 오므라진 채 바닥을 긁는 발끝을 부드럽게 쓸어 올리며 가벼워진 여지주병을 들어 올렸다.

“자, 아―”

여지주로 만들어진 연못을 잘게 흔들면서 해산은 천천히 입을 벌렸다. 잔뜩 달아오른 눈가에 물기를 닮은 것이 잔뜩 고여 있었다. 입술이 말라붙었는지 해산은 땅 위에 내던져진 붕어처럼 힘겹게 입을 열었다. 꽃을 닮은 은은한 향이 진해의 코 속으로 밀려들어 왔다. 서늘하고 날카로운 겉과 어울리지 않는 향이었다. 처음에는 진해 역시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애원하는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고, 입술 사이에서 촉촉하게 젖어 있는 혀를 보기 전까지의 일이었다. 봉의 눈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우아하고 단정한 눈매는 진해를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뭔가를 갈구하고 있었다. 그 눈에 비친 진해의 입술은 비뚜름하게 휘어져 있었다.

아, 정말 최고야.

저 눈빛이야말로 진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었다. 진해의 욕구는 저 눈빛만이 해소해 줄 수 있었다. 오롯이 진해에게 매달리는 눈빛, 진해만을 원하는 눈빛. 진해에게 욕정 하는 눈빛. 불씨가 숨은 숯 더미와 같은 눈빛.

“으음―”

진해는 충동적으로 해산의 입에 입을 맞췄다. 입술과 입술을 포개고 제 혀를 해산의 혀에 휘어 감았다. 껍질 없는 달팽이처럼 매끈매끈한 것들이 얽혔다가 풀어졌다. 서로의 향이 나는 타액을 집어삼키고 서로가 서로의 몸을 끌어안았다.

“으응!”

진해의 혀가 입 안 어딘가를 긁자 해산의 목구멍 안쪽에서 높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철퍽,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입술을 뗀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며 거칠게 헐떡였다. 이 순간 보이는 것이라고는 서로에게 욕정 하는 두 사람의 모습뿐이었다.

해산이 충동적으로 진해의 허리에 다리를 감자 진해 역시 충동적으로 해산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진해의 격렬함을 이기지 못하고 의자가 삐그덕 소리를 내며 기울어졌다. 의자를 완전히 눕힌 진해가 제 허리에 감긴 다리를 어깨 위에 걸치듯 들어 올렸다. 해산의 아랫도리는 마르지 않은 여지주와 액이 섞여 번들번들하게 윤을 내고 있었다.

“아윽! 아!!”

진해가 허겁지겁 해산의 속으로 파고들자 해산이 목을 젖히며 손톱으로 바닥을 긁었다. 해산의 속이 진해의 것을 잘라 낼 듯 거세게 옥죄었다. 하지만 진해는 개의치 않고 제 아랫도리에 있는 힘껏 힘을 실었다. 이를 악물고 허리를 들이박자 접한 살 사이로 질금 액이 넘쳐흘렀다.

“아, 아아! 형님, 아, 싫, 거기, 아, 아!!”

진해의 물건이 거칠게 들쑤시자 해산이 견디지 못하겠는지 허리를 크게 뒤틀었다. 그 바람에 진해의 어깨 한쪽에 걸쳐져 있던 다리 하나가 탁자를 세게 치게 되었다. 탁자 위에 놓여 있던 것들이 기울고 아슬아슬 걸쳐 있던 여지주병이 진해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왈칵왈칵 쏟아지는 여지주에 젖은 채 진해가 다시 한번 해산의 입에 달려들었다.

완전히 포개진 채 받는 입맞춤은 알싸하면서도 새콤달콤했다. 달큼하고 얼큰한 기운이 해산의 머릿속을 잠식했다. 여지주라는 게 이런 맛이었나. 해산은 몽롱한 가운데 그런 생각을 했고 강건한 팔을 뻗어 진해의 등을 꽉 끌어안았다. 진해는 술이 마르기 전까지 멈추는 법이 없었다.

* * *

‘우와아아아악!’

진해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도련님과의 ‘실패한’ 놀이가 떠올라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입을 맞췄어! 입을 맞췄다고! 그것도 내가 먼저!’

놀이가 엉망이 된 것도 충격적이었지만 그것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해산 도련님과 자신이 입을 맞췄다는 점이었다. 사실 처음 만났을 때도 입 맞추긴 했지만 그것은 상대를 모르고 충동적으로 한 것이었고, 이번에는 상대가 저보다 훨씬 귀한 이인 걸 알면서도 그런 것이었다. 진해의 머리 한쪽에서 진해의 첫사랑과 함께 처음 한 입맞춤이 떠올랐다. 안 좋게 끝난 터라 진해는 살을 섞는 사이라도 잘 입을 맞추지 않으려 했다.

‘그래도 엄청 좋았지. 십여 년 만에 처음으로 한 접문이라 그런지 살살 녹는 것 같았어. 진짜 너무 좋아서 정신이 그냥―’

“이보거라.”

상념에 빠져 있던 진해를 현실로 끌어낸 건 바로 해산 도련님이었다. 해산은 목간에 몸을 담근 채 고개를 꺾어 진해를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그 미간에 옅게 주름이 져 있었다.

“앗, 죄송합니다! 어느 쪽이 뭉치신다고 하셨지요?”

“안마는 이제 되었다. 그것보다 넌 보면 볼수록 이상한 녀석이구나. 재주가 많은가 싶다가도 이렇게 멍한 모습을 자주 보이니.”

“하하, 사람이 완벽하면 재수 없지 않습니까. 이 정도 흠은 있어야 아 저놈도 사람이구나 싶지요!”

“흠이 있어야 사람이라고?”

아무렇게나 둘러댄 말이라 그런지 해산은 진해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사실 진해도 이해하길 바라서 한 말은 아니었다. 진해는 헤실헤실 웃으면서 따끈하게 달아오른 해산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야무진 손끝이 근육과 근육 사이를 파고들자 해산의 눈가가 나른하게 풀어졌다.

특급 안마라는 말이 빈말이 아니었는지 진해의 안마는 탁월하기 그지없었다. 정사가 끝이 나자 의자에 걸쳐 있느라 쥐가 난 해산의 다리를 부드럽게 풀어 주더니 해산의 몸 여기저기를 눌러 보았다. 해산은 어깨와 목이 이어지는 부분과 명치 부근이 가장 많이 뭉쳐 있었다.

그리고 해산을 가장 기가 막히게 한 건 바로 진해의 뒤처리 솜씨였는데 진해는 해산이 하인들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걸 눈치채자 해산에게 다시 옷을 입혔다. 그 후에는 눈물을 머금고 여지주병을 들어 올렸다. “어이쿠!”, 바깥까지 다 들리도록 큰 소리를 내지르며 해산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여지주를 적시듯 흩뿌렸다. 강렬한 술 냄새 탓에 해산에게 묻은 향이 순식간에 가려졌다. 진해는 여지주병을 저만치 던지더니 큰 소리를 내며 의자를 쓰러뜨리고 해산에게 쓰러지듯 안기었다.

큰 소리에 문을 열고 달려온 하인들이 본 것은 발이 꼬여 미끄러진 진해와 그런 진해를 받아 든 해산이었다. 강한 술향이 진해가 어째서 넘어졌는지 짐작게 했다. 해산의 머리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을 본 순간 문가에 가장 가까이 있던 하인 하나가 다른 하인에게 손짓해 목간을 준비하게 했다. 어디서 더운물을 가져왔는지 목간은 빠르게 준비되었고 진해는 해산과의 대화가 덜 끝났다는 핑계로 해산의 목간에 따라 들어갔다.

“그런데 도련님. 그, 낭중네 숙부는 어찌 되었습니까? 포교가 가까운 의원으로 데려갔잖아요.”

“……그랬지.”

“어찌 몸이 좀 나았다던가요? 범인은 누구랍니까?”

진해는 동십사에게 이걸 물어보는 걸 깜박했다며 안타까워했다. 낭중네 숙부는 일가붙이 하나 없는 이였으므로 낭중의 장례를 치르려면 꽤 곤욕을 치를 터였다. 빈말로라도 저를 양자로 삼아 준다고 하였으니 못 본 척 지나칠 수는 없었다. 진해는 도박판에서 딴 동전이 얼마나 남았는지 헤아려 보았다.

“죽었다.”

해산은 짧게 내뱉은 뒤 뜨거운 물로 연거푸 얼굴을 씻어 냈다. 진해는 잠깐 멍해 있다가 쓸쓸한 표정과 함께 어깨를 늘어뜨렸다.

“많이 아프진 않았으면 좋겠네요. 돌봐 줄 식구가 없으니 낭중이랑 같이 화장을 해야겠습니다. 숙부를 데리고 있던 개자식이 어찌나 악랄했던지 숙부는 낭중 양반을 만나기 전부터 반고자였어요. 그래서 나더러 아들하라고 틈만 나면 꼬드겼는데, 그래서 일부러 자주 안 찾아가고…….”

진해가 손을 멈추자 욕실 안이 조용해졌다. 해산의 머리칼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만이 고요히 울려 퍼졌다. 침울한 진해의 표정만큼 해산의 표정 역시 좋지 못했다. 해산의 일에 얽혀 목숨을 잃었으니 해산의 기분이 좋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걱정 말거라. 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원수를 갚아 줄 터이니. 억울하게 죽은 백성을 보고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느냐. 범인을 잡으면 내가 직접 명해 장례를 치러 주도록 하마. 명승을 불러 독경을 시키마.”

진해가 침울한 동안 해산은 정면을 응시하며 읊조렸다. 조용히 읊조리는 모양새가 진해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기 자신에게 다짐하는 듯했다. 진해는 그런 도련님의 정수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회와 슬픔이 진해의 얼굴에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그러나 해산의 다짐은 쉬이 이루어지지 못할 듯했다. 해산은 진해가 해산의 집에 처음 온 날 이후로는 공사가 다망하여 진해와 얼굴을 맞대지 못했는데, 그로부터 삼 일 정도가 지난 날 진해를 다시 집으로 불러들였다. 동십사의 집에서 빈둥거리고 있던 터라 이번에도 비밀 통로를 통해 해산의 집으로 이동했다. 저번에 진해를 안내했던 이가 진해를 다시 안내했는데 이보시오 부르기가 민망하여 성을 물어보니 성이 영씨로 동십사 집의 부집사를 맡고 있다 하였다.

두 번째로 보는 집이지만 여전히 감탄이 나오는 집이었다. 다행히 두 번째인지라 진해는 속으로만 감탄하였다. 우락부락한 하인들도 속으로만 무서워했다. 격식 있는 옷을 입은 해산 도련님도 속으로만―

“와…….”

“오 공자님, 오 공자님! 예를 갖추셔야지요!”

“앗, 아. 예? 뭔 예요?”

영 집사는 저번과 마찬가지로 내실에 들어오자마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진해는 그런 영 집사와 달리 입을 헤 벌리고 있었는데 왜냐면 감색을 바탕으로 붉은 깃을 단 장포를 입은 도련님이 너무나 멋있었기 때문이다. 미려방에서 갖은 미인을 보았고, 또 월나라 최고라고 자부하는 미인을 동생으로 두고 있었지만 도련님은 미려와는 전혀 다른 매력을 품고 있었다. 미려가 피어나는 난초의 봉오리처럼 여리고 부드러운 멋이 있다면 도련님은 한여름의 대나무처럼 단호하며 시원하고 댕댕한 멋이 있었다.

‘대나무에 꽃이 피면 나라가 바뀐다던데.’

진해는 고아한 자태의 도련님을 바라보다 마지못해 무릎을 꿇었다. 영 집사가 보다 못해 진해의 바지를 벗길 것처럼 세게 잡아당겼던 탓이다. 무릎 닿는 소리가 꽤 컸다.

“아야.”

해산은 진해의 꼴이 웃겼는지 희미하게 미소 지었는데 그에 따라 혈색 좋은 입술이 옅게 휘어졌다. 눈의 착각이 아닌가 싶을 정도의 미소였지만 진해는 어쩐지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고개를 숙이라는 영 집사의 손짓을 보지 못한 채 (어쩌면 무시한 채) 도련님에게 언제나처럼 멍청하게 웃음 지었다. 자신은 저 입술에 입을 맞췄었다.

“일어나라. 저 녀석에게 제대로 된 예를 받으려면 올해를 다 가도 부족할 테지.”

영 집사는 해산의 말에 강하게 긍정했다. 영 집사도 마냥 한가한 몸이 아니라 진해에게 예를 가르칠 수 없는 게 한이었다.

“도, 도련님! 이 옷 어디서 지으셨어요? 참말 잘 어울리십니다! 귀티가 줄줄 흐르는 게 꼭 황자님 같으셔요!”

“……뭐?”

영 집사가 물러가자 진해는 해산에게 허둥지둥 다가와 옷자락을 부여잡았다. 표면을 쓰다듬자 비단 위에 새겨진 무늬가 도드라졌다. 자수가 새겨진 건 봤어도 처음부터 무늬가 있는 비단은 처음이었다. 진해의 눈이 튀어나오지나 않을까 싶게 커다래졌다.

“흠, 흠!”

반면에 해산은 진해의 다른 말에 놀라 있었다. 해산은 헛기침을 하며 옷에 반쯤 고개를 박은 진해의 뒤통수를 내려다보았다. 이놈은 정말 똑똑한지 멍청한지 알 수 없는 놈이었다. 해산은 진해에게 용건을 꺼내기 위해 한참을 뜸을 들여야 했다.

“옷은 다음에 실컷 보여 줄 테니 진정하고 앉아 보거라.”

“다른 옷도 보게 해 주세요!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호강하네요!”

“그래, 그래, 알았으니까 자리에 앉으래두.”

초롱초롱 빛나는 눈을 겨우 자리에 앉히며 해산은 진중한 낯을 해 보였다. 동십사라면 해산이 저런 낯을 했을 때 진작 해산의 언동에 집중할 터였다. 아랫것이 저토록 방자하다면 혼을 내서 정신을 차리게 해야 할 텐데 몸정이 든 탓인지, 그도 아니면 저리 멍청한 얼굴을 해서 그런지 해산은 어쩐지 진해를 혼낼 마음이 들지 않았다. 진해를 혼내는 대신 초롱초롱 빛나는 눈을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차 한잔 드릴까요?”

손이나 느리면 한숨 쉬어 가련만. 진해는 해산의 한숨을 피곤함의 한숨으로 받아들였는지 재빠르게 움직여 차를 우려냈다. 해산은 잘 우러난 차를 음미하다가 순간 자신이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잊어버리고 말았다. 해산은 차 한 잔을 다 비우고 나서야 겨우 자신의 해야 할 일을 기억해 냈다. 동십사가 등청하면서 올린 서한 때문이었다. 내용은 해산에게 유쾌하지 않은 것이었다. 해산은 향과 맛이 적절한 차를 내려놓고 가만히 진해를 바라보았다.

“낭중의 남편이 네게 한씨 형제를 보호하라고 했었지.”

“보호라기보단 한씨 형제더러 도망가라고 전해 주랬습니다.”

“그랬나. 어쨌거나 일이 난감하게 되었어. 동십사가 한씨 형제를 찾고 있는데 낭중 부부가 죽은 이래 머리털 한 올도 보이지 않는다는구나.”

“앗, 정말요?”

해산의 말에 진해의 눈이 동그래졌다. 해산보다 다섯 살이나 많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천진한 눈매였다. 입술도 도톰한 것이 앙증맞아 보였다.

“정말 위험한가 보네. 그 양아치 놈들이 몸을 다 숨기고…….”

“동십사의 말을 들으니 그놈들이 굉장히 흉악한 악한이라는데 이때까지 몸을 숨긴 적이 한 번도 없었느냐?”

“네. 포교가 저놈들을 잡아넣으려고 몇 번이나 별렀는데 그때마다 번번이 실패했습지요. 간이 어찌나 거대한지 한때는 포교 옆집을 빌려 살기도 했다니까요. 사람을 죽였다는 소문이 돌았을 때도 태연하게 돌아다닌 놈들이에요. 오히려 사람이 많은 곳에 더욱 고개를 들이밀었지요. 꼭 저를 보라는 듯이.”

“그런데 이번에는 그런 놈들이 숨었다, 이거군.”

“소인의 짧은 생각으로는 아무래도 그놈들에게 일을 시킨 작자가 꼬리를 자르려나 봅니다. 전에 사람을 우물에 처넣었다는 소문이 돌았을 때도 누구한테 일을 받아 그리되었다 하더라구요.”

말을 마친 진해는 곧 자신의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무래도 꼬리를 자르려는 것이 아니라 확실히, 꼬리를 자르려는 것이 분명했다. 또한 낭중 부부를 죽인 것 역시 한씨 형제가 아닌 듯했다. 한씨 형제의 성품을 믿어서가 아니라 한씨 형제라면 몸을 숨기는 대신 자신들을 대신할 대역을 세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리 생각하는 참이다. 어지간히 대담한 놈이 아니라면 입막음으로 사람을 죽일 생각을 않지. 대월률이 지엄한 이 대월국에서 말이다.”

“문제는 그 간이 부은 작자를 알려면 한씨 형제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낭중 아저씨가 죽은 이상 미려방에서는 절대로 이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음, 그래서 도련님이 저를 찾으셨군요?”

진해는 턱을 긁으며 가만히 한씨 형제의 본거지에 대해 떠올렸다. 추피동. 가을 추수도 이 동네만은 피해 간다는 찢어지게 가난한 동네. 잠춘동은 잠깐이라도 봄이 왔지만 이 동네엔 아무것도 없었다. 너무나도 가난한 동네라 범법자가 아닌 주민이 수상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동전 몇 푼만 준다면 살인이든 뭐든 가리지 않고 하는 동네였던 것이다.

게다가 한씨 형제의 막내가 추피동 제일의 갑부였다. 추피동에서 일을 하려면 한씨 형제의 막내인 ‘삼’에게 세금을 내는 게 당연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양아치 놈들 주제에 우애가 좋은 형제였으니 만약 형들이 위험하다면 막내가 나서서 대신 자백할 놈, 대신 죽을 놈들을 구해 놓을 터였다.

‘으으, 싫다! 한씨 놈들이랑은 더 엮이기 싫었는데!’

하지만 낭중 아저씨와 남편이 죽은 이상 진해도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삼 년이 지나도 이 일은 해결되지 못할 것이다. 연고도 없는 이들이라 백골이 분토가 되어도 억울함은 풀리지 않으리. 진해는 한씨 형제들과의 악연을 곱씹으며 진저리 치다가 낭중네 숙부의 창백한 얼굴을 떠올렸다.

역시, 할 수밖에 없었다. 사나이 오진해가 용감하게 나설 수밖에 없었다! 진해는 해산의 찻잔을 들어 속에 든 것을 쭉 들이켰다. 해산은 진해가 자신의 찻잔을 비우자 살짝 당황했지만,

“제가 한씨 놈들을 만나 보고 오겠습니다!”

진해가 눈을 빛내며 용감무쌍한 어조로(해산의 눈에는 하룻강아지와 다름없었다) 한씨 형제를 찾겠다 말하자 머릿속에 가득했던 근심이 일제히 사라지는 듯하였다.

“네가 정말로 그들을 찾을 수 있겠느냐?”

“솔직히 말하면 하기 싫은데 그놈들을 못 찾으면 영영 묻힐 수도 있잖아요. 사건이 해결 안 되면 낭중 아저씨와 숙부의 장례도 치르지 못하구요. 그러면 구천을 떠도는 귀신이 되어 제 꿈에 나타나겠죠. 진해야~ 어째서 내 양자가 되지 않았느냐~ 네가 아들이 되어 주었다면 젯밥은 얻어먹었을 텐데~!”

“하하, 산만한 녀석 같으니. 정 싫으면 나서지 않아도 된다. 너 역시 보호받아야 할 증인 아니더냐.”

“아닙니다. 아무래도 제가 나서야 할 듯합니다. 동 형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한씨 놈들이 독종이라 그렇습니다. 추피동 사람들은 그놈들을 황제보다 더 무서워하니 주리를 틀어도 답하지 않을 테지요.”

“흠…….”

“하지만 불행히도 제가 그 한씨 놈들과 면식이 있습니다. 특히 셋째 놈이랑은 좀 친하기도 합니다. 셋째 놈을 꼬아 형 놈들을 만나 보겠습니다. 혹여 전하실 이야기가 있으신지요? 살짝 숨구멍을 트여 주시면 누가 시켰는지 술술 불 것 같기도 한데.”

빈손으로 갔다가는 곱게 못 돌아올 것 같아서 진해는 은근슬쩍 해산의 눈치를 봤다. 해산은 낭중의 ‘도망치라’라는 말을 ‘보호하라’로 왜곡할 만큼 한씨 형제들을 자신의 수중에 두고 싶은 듯했다. 날짐승 같은 놈들과 같이 있기도 싫고, 또 같이 올 자신도 없어서 진해는 자신이 그놈들의 증언을 가져오는 대신 그놈들을 멀리 도망치게 하고 싶었다. 멀리, 멀리~ 도망쳐서 다시는 마주칠 일이 없었으면 했다.

진해가 대놓고 눈치를 보자 해산도 진해의 뜻을 눈치챈 것 같았다. 미간을 찌푸린 채 천천히 두 눈을 깜박였다. 해산은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입을 열었다. 진해는 두 귀를 쫑긋 세우고 해산의 말에 주목했다. 해산이 아까 그렇게 간절히 원하던 집중력이었다.

“아니, 전할 말은 없다.”

해산의 깔끔한 말에 진해는 속으로 감탄했다. 자신 같았으면 개 같은 놈들아 한 번만 더 이딴 짓을 하면 네 좌부와 우부의 불알을 사이좋게 한 짝씩 으깨 놓겠다고 전해라 할 터였다.

“내가 그들을 직접 만나 보지.”

“……네?”

“못 들었느냐. 내가 그자들을 직접 만나 보겠다고 했다. 네가 백번 전해 봤자 내가 한 번 말하는 것만 못하지 않느냐. 내가 직접 이번 일의 흉수를 알아내겠다.”

아하, 해산 도련님은 욕을 전하는 게 성에 안 차서 직접 만나서 하시려나 보다~ 진해는 웃으며 미친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추피동이 어떤 곳인데 해산 도련님이 간단 말인가. 잠춘동 토박이인 진해도 가기가 꺼려지는 곳이거늘.

“도련님, 도련님! 그냥 제가 위치를 알려 드릴 테니 사람을 보내 그놈들을 추포하시지요! 까짓것 제가 밤길 좀 조심하겠습니다!”

“추포하면 내가 그놈들의 존재에 대해 안다는 걸 흉수가 알 것이 아니냐. 자결이라도 하면 일이 복잡해진다. 그놈들에게서 증언을 확보한 뒤 숨겨 놓든가 데려오든가 할 것이다.”

“아, 그럼 그냥 저 혼자 가도 충분하잖아요!”

처음에는 진해의 거절을 무심히 넘겼던 해산의 눈매가 점점 매서워졌다. 진해는 온갖 오두방정을 떨며 해산의 마음을 돌리려 노력하였다.

“너, 솔직히 말해라. 가만히 보니 내 안위를 위해 그러는 게 아니라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로구나?”

“아뇨! 저는 오로지 도련님의 안전이 걱정되어서 그런 겁니다, 그렇습니다!”

“호오, 그래? 이렇게 나를 생각해 주는 너를 의심하다니 내 속이 좁았구나. 나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려 하는 너를 나는 말리지도 않고 말이다. 그래, 아무래도 너를 바깥에 내보내는 건 위험하구나. 미려방의 네 동생을 너 대신 추피동에 보내야겠다. 네 동생도 잠춘동 출신이니 능히―”

“안 돼!!!!!!!!!!”

동생 이야기가 나오자 진해가 곧바로 반응했다. 해산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진해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구시렁댔다.

“제 동생은 그냥 놔두세요. 제가 도련님을 모시고 갈 테니 절대로 동생에게 제가 추피동에 간다고 전하지 말아 주세요.”

“추피동이 그렇게 위험한 곳이더냐.”

“눈 뜨고 코 베이는 곳이지요. 한씨 놈들이 활개 치고 사는 거 보면 말 다 한 거 아닌가요. 어휴, 그냥 저 혼자 후딱 다녀오면 될 걸 왜 같이 가신다는지.”

“내 걱정은 말거라. 이리 보여도 내 몸 하나 지킬 무예는 충분히 수련하였다.”

“무예가 문제가 아니라, 어휴. 정말. 해산 도련님, 그럼 이것 하나만 꼭 약조해 주십시오. 도련님의 눈앞에서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절대로 나서지 않겠다고 이것 하나만 약조해 주세요.”

“해괴한 약조로구나. 네가 날 걱정하듯 나 역시 너를 걱정하는데 내가 어찌 너를 모른 척할 수 있겠느냐.”

“목숨이 달아나는 문제는 아마― 안 생길 거니까 그냥 제게 약조를 해 주십시오. 절대로 나서지 않으시겠다고!”

진해가 눈동자 속에 걱정과 우려가 듬뿍 담겨 있어 해산은 석연치 않은 어조로 진해의 말에 따르기로 약조했다. 진해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모른 척하기로, 무슨 일이 있어도 나서지 않기로. 이왕이면 그 안에서 본 일에 대해 철저히 잊어버리겠다고.

* * *

귀하신 도련님이 혼자서 나가는 건 꽤 힘들었다. 방 밖으로 나서자마자 우락부락한 하인 놈들이 도련님의 거취를 물어 왔다. 이놈들이 따라붙으면 될 일도 안 될 터였다. 진해는 자신이 혼자 갔으면 훨씬 힘이 덜 들었을 거라 속으로 구시렁대면서 동 대인네 댁에 간다고 둘러댔다.

하인들은 진해를 동십사의 새 하인쯤으로 아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새로운 연락책쯤으로 알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진해는 도련님과 무사히 비밀 통로에 들어섰다. 두고 온 영 집사가 걸렸지만 자기가 알아서 돌아오든지 말든지 할 것이다. 지금 중요한 건 진해의 뒤에 선 해산 도련님이었다. 진해는 비밀 통로를 걸으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는데 그에 반해 해산 도련님은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아이고, 어리네 어려. 모험을 떠난다고 좋아하고 있잖아!’

곱상한 얼굴을 한 주제에 제법 개구쟁이였던 동생을 둔 덕에 진해는 해산의 저 표정이 어떤 것인지 훤히 꿰뚫고 있었다. 진해가 어릴 적에 역병이 돌아 나라에서 세금을 면제하고 식량을 배급한 적이 있었는데, 철없던 강아지는 진해가 그의 손을 잡고 배급소에 갈 때마다 진해를 따돌리고 모험을 떠날 궁리에 가득 차 있었다. 진해가 전능하지는 않은지라 결국 한 번은 놓쳤었다. 길을 잃고 엉엉 울던 걸 진해가 찾아내 엉덩이를 때려 준 뒤 업고 왔었다.

‘음, 해산 도련님 엉덩이는 참 잘생겼지.’

해산이 길을 잃는다고 해도 진해가 엉덩이를 때릴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진해는 해산의 엉덩이가 어떻게 생겼는지 회상하기 시작했다. 해산의 엉덩이는 정말 매혹적이었다. 살덩이 두 쪽이 탄탄하게 올라붙은 것이 자기도 모르게 손이 갈 정도였다. 내려치면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질 터였다. 찰싹찰싹 때려 주면 색이 변하면서 따끈하게 부어오를 터였다. 복숭아색으로 물들일지 적색으로 물들일지는 내리치는 진해의 마음이었다. 뜨끈하게 달아오른 사이에 제 물건을 집어넣으면―

“헤헤, 으헤헤헤.”

진해는 하마터면 침을 흘릴 뻔했다. 어두컴컴한 통로 안에서 해산이 진해를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동상이몽을 품은 두 사람은 길고 긴 비밀 통로에서 빠져나와 동십사의 집에 들어섰다. 동십사는 관청에서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해산과 진해는 짐짓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동십사의 대문으로 향했다.

동십사의 집 하인들은 해산의 모습에 놀랐으나 해산의 출입이 잦은지라 온 것을 못 보았겠거니 여겼다. 집주인인 동십사보다 해산의 신분이 높은지라 얼른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얼떨결에 진해도 같이 절을 받게 되었다. 하인들의 절을 듬뿍 받은 진해는 해산을 데리고 잠춘동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갔다. 미로 같은 길은 가면 갈수록 살풍경하고 피폐해졌다.

[출입을 삼가시오. 이곳은 법의 지배를 받지 않는 곳이외다.]

길의 끝에는 어느 집의 문짝을 뜯어 만든 간판이 걸려 있었다. 글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붉은 액체로 쓰여 있었는데 해산은 처음에 그 글자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왜냐면 그 글자는 학식 있는 선비가 사용하는 제대로 된 ‘문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 혹시 처음 보십니까? 이건 저희 같은 아랫것들이 사용하는 글자입니다. 뭐라고 쓰여 있냐면, 음. 목숨이 아까우면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고 쓰여 있네요.”

진해는 일부로 ‘법의 지배를 받지 않는’이라는 구절을 뺐다. 편법에도 탄식하는 해산이 그 구절을 들으면 불쾌해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해산은 진해의 말에 납득한 듯했다.

“이보거라.”

“네, 도련님.”

“이곳에 정녕 사람이 살긴 하는 게냐? 이곳은 마치…… 폐허 같구나.”

“너무 오래 보지 마세요, 도련님. 없는 것 같아도 다 지켜보고 있습니다. 누가 말을 걸어도 답하지 마시고 저만 따라오세요. 특히 약쟁이 같은 놈이 보이면 절대로 눈을 마주치지 마시고요. 그놈들은 약만 살 수 있으면 뭐든지 다 하는 놈들이니까요.”

추피동에 비하면 잠춘동은 꽤 살 만한 곳이었다. 잠춘동에는 낡더라도 제대로 된 지붕을 올려놓았는데 추피동에는 지붕이 있는 집이 희귀했다. 올려놓은 지붕도 나무가 아닌 풀잎이었다. 짚이 아닌 나뭇잎으로도 지붕을 올릴 수 있다는 걸 해산은 추피동에 와서야 알게 되었다.

“후, 하, 후, 하!”

그리고 추피동의 가운데쯤 위치한 어느 담벼락 앞에서 진해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기를 반복했다. 진해답지 않게 꽤 긴장한 모습이었다. 어깨를 털고 뿌드득 소리를 내며 손목을 푼 진해는 담쟁이덩굴로 덮인 담의 일부를 드러나게 했다.

[똑, 똑, 또독. 똑, 또독.]

그리고 박자를 맞춰 다섯 번을 두드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부분의 옆 벽돌이 사라지더니 안광이 형형한 눈 한 쌍이 나타났다.

“하하, 저, 그게…….”

진해는 답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딱 봐도 일이 잘되는 것 같지 않았다. 해산은 여차하면 자신이 나서기 위해 각오를 다잡았다. 아니나 다를까 형형한 안광은 진해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벽돌을 닫고 사라졌다. 해산은 일이 어그러졌다는 생각에 마음이 다급해졌으나, 이게 웬일인가. 진해가 디딘 곳의 옆자리로 칼이 쑥 솟아올랐다. 진해는 진작 알고 있었는지 칼이 솟아도 어깨만 움찔 떨 뿐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았다.

칼은 지면을 오려 내는 것처럼 사각형으로 움직이더니 곧 그 아래로 날카로운 인상의 얼굴 하나가 솟아났다. 흙이 우수수 떨어지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땅속에서 기어 나왔다.

“도, 도련님. 발을 조, 조심하시고.”

진해는 문지기인 듯한 사내를 보자마자 이를 딱딱 부딪치기 시작했는데 해산 역시 사내의 얼굴을 보자마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문지기 사내의 이마에 새까만 먹물이 스며 있었기 때문이다. 얼굴에 먹을 새기는 것은 유배 이상의 형을 받은 죄수들이었다. 해산은 진해가 왜 추피동에 자신을 데리고 오지 않으려 했는지 이해했다.

“이야~ 이게 누구야? 내 서방 아니야?”

그리고 마침내. 해산과 진해는 한씨 형제의 막내인 한삼랑(三郎)을 만나게 되었다. 한삼랑은 서역의 피가 섞였는지 피부가 희고 머리칼이 옅은 갈색을 띤 사내였다. 눈동자 역시 색소가 옅었다. 콧대가 높고 입술이 얇은 것이 미끈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추피동의 우두머리라는 것을 증명하듯 한삼랑은 지하 밀실에 자리한 누구보다도 독보적인 존재감을 뽐내었다. 월국에서는 양인 자식보다 음인 자식을 귀히 여겨 음인은 맨살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미덕이었는데 한삼랑은 마치 보라는 듯이 상의를 활짝 열어젖히고 있었다. 드러난 상의의 양 가슴팍에 덩굴인지 가시인지 모를 문양이 빈틈없이 자리하고 있었다.

문신은 한삼랑의 가슴에서 시작해 손목 위에서 끊어졌다. 어깨 위로 짧게 친 머리칼 덕에 문신이 목을 덮지 않은 걸 알 수 있었다. 양옆에 자리한 이들이 얼굴과 뺨에 먹이 새겨진 것과 달리 한삼랑의 문신은 몸만을 덮고 있을 뿐 얼굴에는 단 한 점의 먹 방울도 튀어 있지 아니하였다.

한삼랑은 진해를 보자마자 팔을 벌리고 걸어왔다. 가뜩이나 나태한 상의가 팔을 벌리자 더욱 느슨하게 벌어졌다.

“사, 삼랑, 삼랑이. 오, 오랜만이야?”

“그래, 이 무정한 작자야. 남편을 처박아 두고 어딜 쏘다니는 거야. 창놈같이.”

그리고 그대로 진해를 꽉 끌어안았다. 한삼랑은 진해보다 반 뼘 정도 큰 듯했다. 한삼랑에게 끌어안긴 진해의 얼굴이 꼭 뱀에게 휘감긴 개구리 같았다.

“켁, 잠깐, 숨, 숨 좀!”

한삼랑이 힘을 아끼지 않고 진해를 껴안아 진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진해는 한삼랑의 팔을 치며 목숨을 구걸했고 한삼랑은 킥킥대면서 진해를 놓아주었다. 그 후에는,

“으붑!”

진해의 턱을 움켜잡고 입을 겹쳤다. 진해가 입을 꾹 다물자 한삼랑은 이로 진해의 입술을 깨물었다.

“아얏, 아부붑!”

어찌나 야무지게 깨물었는지 진해의 입술에 피가 비쳤다. 한삼랑은 피가 비치는 입술 위를 혀로 쓸며 속으로 파고들었고, 진해는 한삼랑에게 붙잡힌 채로 꼼짝없이 입 속을 유린당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당할 뻔했다.

“뭐야, 이건?”

한삼랑은 해산을 보며 명백히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한삼랑의 입가에 진해의 피가 섞인 침이 묻어 있었다.

“도, 도련님. 나서지 말기로 약조하셨잖아요!”

“…….”

해산이 진해가 유린당하는 걸 참지 못하고 진해를 한삼랑에게서 빼낸 것이다. 진해는 해산의 뒤에서 갈라진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씨발, 음인이네? 어이, 오진해. 이 개새끼야. 내가 아랫도리 함부로 굴리지 말랬지? 알 자르고 작대기만 달고 살아 볼래? 정미려 병신 새끼는 봐줘도 난 안 봐줘. 네 좆 같은 놀이, 혼례 전에 다 끝내라고 했지? 내가 그랬어, 안 그랬어?”

한삼랑은 그제야 해산을 인지했는지 입가를 닦으며 무섭게 진해를 노려보았다. 진해는 덜덜 떨며 저도 모르게 해산의 옷깃을 움켜잡았다. 진해가 움켜잡은 제 옷을 바라보며 해산은 진해를 제 뒤에 숨겨 주었다. 해산의 새까만 눈동자와 한삼랑의 갈색 눈동자가 허공에서 거칠게 맞부딪쳤다.

“네가 한씨 형제의 막내냐?”

“어디서 다짜고짜 반말질이야. 싸가지 없는 새끼가.”

“부정하지 않으니 그렇다는 말이군. 길게 말해도 못 알아들을 것 같으니 짧게 말하지. 낭중의 피살 사건 때문에 왔다. 네 형들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날카롭게 이를 드러내던 한삼랑은 낭중의 피살 사건이라는 말을 듣자 눈썹 한쪽을 치켜들었다. 해산의 얼굴을 바라보다 쳇, 하고 혀를 찼다.

“드디어 정신 차리고 도장 찍으러 오나 싶었더니 음인 새끼를 끼고 오고, 음인 새끼를 끼고 오는가 싶었더니 골칫거리를 끌고 왔네? 오진해, 대체 얼마나 죽여주려고 그래? 응?”

“그, 나는, 그냥, 형들이랑, 이야기만, 이야기만 하려고…….”

“아하~ 형들이 널 보면 이번에야말로 도장을 찍게 할 것 같으니까 저 덩치를 데려왔어? 지랄하네. 넌 내 꺼야, 씨발 놈아. 형들 일만 잘 풀리면 이번에야말로 정미려 그놈을 치워 버리고 네 잘난 발모가지부터 또각또각 부숴 버릴 거라고. 넌 말로 해서는 안 듣잖아?”

말은 당장이라도 진해를 붙잡아 어떻게 할 것처럼 하면서도 제 형들이 걸린 문제라 그런지 한삼랑은 순순히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한삼랑의 부하들은 처음부터 쭉 이곳에 자리했는데 싱글싱글 웃는 자도 있었고, 무표정한 자도 있었다. 공통된 점은 하나같이 분위기가 삭막하다는 것.

“그래서. 형들이랑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데? 말하면 내가 전해 주지. 원래라면 가진 거 다 뺏고 몇 번 돌린 다음에 팔거나 회 치겠지만 내 서방 있는 곳에서 그런 짓을 할 순 없잖아. 그렇지?”

“그 서방 소리 좀…….”

“왜 부끄러워? 귀엽긴.”

진해는 마음 같아서는 해산의 뒤에 영원히 숨어 있고 싶었으나 자신이 주도하지 않으면 한삼랑이 형들에 대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아니었다면 소개인과 함께 문을 두드리고 암호를 말한 뒤 밀어로 된 대화를 주고받고 나서야 겨우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한삼랑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위의 과정을 다 통과해도 목숨 부지하기가 힘들었지만.

“네 형들이 미려방에 탈정고를 유통했다는 걸 알고 있다.”

진해가 운을 떼려는데 다짜고짜 해산이 말을 던졌다. 한삼랑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미려방이라. 그렇게 안 보이는데 미려방 기생이야? 참 나. 내가 손 안 써도 곧 망하겠구만. 저런 목석같은 놈을 기생으로 들여?”

“지금이라도 자수하고 심문에 응한다면 최대한으로 선처하겠다. 반대로 이 이상 수사를 방해한다면 가중 죄가 붙어 더욱 엄한 처벌이 기다릴 것이다.”

“지랄하네. 증거 있어? 탈정고인지 나발인지를 우리 형들이 유통했다는 증거가 있냐고.”

한삼랑의 말에 으르렁거림이 실리자 주변의 수하들의 기세도 험악해졌다. 싱글싱글 웃던 이가 어디선가 작은 주머니칼을 꺼내 빙글빙글 갖고 놀았다. 촛불을 날카롭게 반사하는 칼날이었다. 한 번만 베여도 피를 볼 법한 그런 칼이었다.

“증거는 없지만 증인이 있다.”

“뭐? 증인? 어떤 새끼야. 당장 데려와. 면상을 아주 가루로 만들어 버릴 테니까!”

“증인은 바로 이자의 동생 되는 사람이다.”

해산은 한삼랑에게 전혀 기죽지 않고 당당한 태도로 받아쳤다. 그런데 증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진해도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이었다.

“헉, 내 동생?!”

진해의 동생 미려라면 고집이 황소고집이라 미려방 식구가 아닌 다른 이들에게 절대로 미려방의 내부 문제에 대해 발설하지 않을 터였다. 형인 진해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 더욱 그랬다. 그래서 진해는 해산의 말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당황을 넘어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는 발언이라고 생각했다.

“……그 새끼가 증인이란 말이지.”

하지만 미려방 식구가 아닌, 미려방과 철천지원수인 한삼랑은 그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아니, 모르는 게 아니라 해산이 말하는 증인이 ‘진해의 동생’이라는 것을 듣자마자 판단력이 그만 흐려져 버린 것이다.

“그래, 그 새끼라면 그럴 만하지. 여우 같은 창놈 새끼! 난 어릴 적부터 그 새끼가 좆같이 싫었어.”

그러면서 한삼랑은 오진해를 뚫어 버릴 듯 날카롭게 응시했다. 색이 옅은 눈동자가 사납게 빛나자 진해는 덜컥 겁을 집어먹고 해산의 소매를 움켜잡았다. 해산은 그런 진해를 흘끗 바라보았다. 진해는 해산에게 한삼랑과 친분이 있다고 말했는데 과도하게 겁을 집어먹는 것을 보니 진해의 친분이라는 게 세간에서 말하는 친분과 상당히 거리가 있는 듯했다.

하긴 진해를 보자마자 서방이니 남편이니 칭하는 꼬락서니만 봐도 명료했다. 물론 진해는 혼인을 하고 자식을 봐도 이상치 않을 나이였으나 해산은 진해가 미혼이라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치 않았다. 이렇게 멍청한 얼굴로 웃으면서 우유 향 풀풀 풍기는 놈을 각인도 하지 않고 바깥에 돌아다니게 두는 남편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가뜩이나 아랫도리 가벼운 놈이거늘.

자신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각인시켜서 다른 놈들에게 눈도 돌리지 못하게 할 터였다. 파각(破刻)의 고통은 산고에 비견될 만한 것이었지만 그런 것 따윈 중요치 않았다. 무조건 각인시키고, 무조건 결을 시킬 것이다. 내실에 들여놓고 저 닮은 아이를 안겨 줘서 절대로 떠나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동생에게 극진한 것을 보아 제 자식에겐 분명히 사족을 못 쓸 것이 분명―

“내 동생은 창놈이 아니야! 여우라고도 하지 마! 그리고 걔도 너 싫어해!”

해산의 태도에 용기를 얻었는지 진해가 옆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높인다고 해도 개미 소리에서 쥐 소리 정도로 커진 것뿐이었다.

“야, 오진해. 내 앞에서 그 새끼 편드는 거냐? 어?”

“내 동생이니까 당연하지……. 그러는 삼랑이 너도 지금 형들 편들고 있잖아…….”

“참 나. 살다 보니 별꼴을 다 보겠네. 지금 누구랑 누구를 같이 보는 건지. 어지간히 지랄들이 나셨어요, 지랄들이.”

해산은 자신이 방금까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믿을 수가 없었다. 누구를 어떻게 해서 어떻게 한다고? 이놈은 그냥 자신의 일에 말려든 놈일 뿐인데, 출신도 불분명하고 제대로 된 직업 하나 없는 무지렁이일 뿐인데 뭐를 어째?

“삼랑아, 여기 이 도련님은 높으신 분이야. 그러니까 우리 좋게 대화로 풀자, 응? 난 탈정고 같은 건 신경도 안 쓰고 그냥 낭중 아저씨랑 숙부가 불쌍해서 그래. 너도 알지? 두 사람 죽은 거.”

“알 게 뭐야. 사람은 누구나 다 뒈져. 재수 없으면 일찍 가는 거고 명줄이 질기면 좀 길게 사는 거고.”

혼란에 빠질 뻔했던 해산은 진해가 본격적으로 삼랑과 말을 섞기 시작하자 겨우 제정신이 되었다. 심드렁해 보였던 한삼랑은 진해가 제 동생 이야기와 삼랑의 형들, 그리고 낭중의 살인 사건 이야기까지 들고나오자 명백히 불쾌해진 기색이었다.

“네 말이 틀린 건 아닌데 사람은 목 위에 머리란 걸 달고 다니잖아. 낭중 부부를 발견한 게 나라는 거 너도 들었겠지. 그리고 내가 낭중네 숙부의 유언을 들었다는 것도.”

“…….”

“숙부가 뭐랬는지 알아? 너희 형들더러 빨리 도망치라더라. 그 양반이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면서도 도망가라고, 꼭 전해 주라더라.”

“그래? 고작 그런 걸 유언으로 남겼다고? 그 양반 참 인생 실없이 살다 실없이 갔네. 오진해 너도 진짜 답 없는 놈이고. 겨우 그걸 전해 주러 이까지 기어들어 왔어? 내가 너한테 벼르고 있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할 수는 없잖아.”

“푸핫, 개 같은 새끼. 진짜 귀여워서 죽여 버리고 싶네. 응? 밑에 깔아 놓고 좆 나게 죽여 주고 싶단 말이야.”

한삼랑은 뭐가 웃긴지 한참을 낄낄 웃어 댔다. 그러다가 진해를 바라보며 혀를 내어 입술을 핥아 올렸다. 시선에서 진득진득한 욕정이 묻어났다. 상의와 마찬가지로 헐겁게 입은 하의의 형태가 좀 변한 듯도 했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헛수고를 했네~?”

순순히 넘어가는가 싶었던 삼랑은 진해와 해산에게 득의양양하게 웃어 보였다. 수하에게 한쪽 손을 내밀자 왼뺨에 문신이 있는 수하가 그의 손에 담뱃대를 들려 주고 공손히 불을 붙여 주었다.

“후―”

“헛수고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설마 형들한테 뭔 일 생긴 건 아니지?”

“돌았냐. 너랑 달라서 우리는 친형제거든. 내가 형들이 위험한데 한가하게 담뱃대나 빨고 있겠냐고.”

“그럼……?”

“뭐, 별건 아니고. 낭중 남편의 유언이 별 쓸모가 없게 되었다는 말이지. 형들은 여기 없어. 높~ 으신 도련님이 못 찾으실 만큼 먼 곳으로 가 버렸다, 이거야.”

“마, 말도 안 돼!”

참으로 청천벽력과도 다름없는 말이었다. 진해는 저도 모르게 반쯤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해산의 미간에 가는 주름이 잡혔다. 그들이 수도를 떠났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주 가능성이 없는 말도 아니었다. 동십사가 관병을 풀어 구석구석 뒤지는데도 못 찾고 있는 걸 보면 정말로 도성에 없을 수도 있었다. 해산은 낭패라는 생각을 했다.

“널 두고 떠났다고?! 차라리 그냥 죽었다고 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안 믿어! 너네 형들이 널 얼마나 물고 빠는데! 그것 때문에 내가 얼마나……!”

“얼마나, 뭐? 어? 얼마나 뭐가 어떤데.”

“끄응…….”

“오진해. 넌 우리 형들 볼 때마다 절하면서 기어 다녀야 해. 어느 형 놈들이 너한테 귀한 동생을 내주겠냐. 어떤 형들이 나같이 잘빠지고 능력 있는 음인 동생을 너한테 붙여 주겠냐고.”

“…….”

그러나 진해가 나서서 삼랑이 형들에 대해 거짓을 말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진해의 말을 듣자 하니 한씨 형제들은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는 것을 인생의 기본으로 삼고 있는 듯했다. 아무리 극악한 이들이라도 한 가지 예외쯤은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한삼랑의 거짓을 밝혀냄과 동시에 진해는 또다시 위기에 봉착했다. 해산은 한삼랑과 진해의 친분이라는 게 그 형이란 자들이 만들어 낸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한씨 형제는 진해를 귀여워하고 아끼는 막냇동생의 짝으로 낙점했던 것이었다.

“어, 어쨌거나! 형들 불러 줘! 상황이 다급하잖아!”

“다급은 무슨.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잦아들 텐데. 급한 건 우리 형들이 아니라 뒤에 얽혀 있는 누군가, 겠지.”

한삼랑은 잔뜩 움츠러든 채 대꾸하는 진해에게서 시선을 움직여 해산 쪽을 바라보았다. 옅은 색상의 눈동자는 해산이 이미 누군지 대충 알고 있는 듯했다. 아주 자세히 알진 못해도 해산이 음인이고, 또 낭중 부부의 피살 현장에 같이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한삼랑은 말 한마디 하지 않았지만 해산은 서늘하게 바라보는 시선에서 그 모든 걸 알 수 있었다.

“흠. 처음엔 목석같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꽤 반반한 것도 같고. 살짝 짜증 나려고 하네. 오진해 저 아랫도리 가벼운 놈은 눈도 싸서 아무랑이나 어울린단 말이지.”

한삼랑은 해산과 한참을 마주 보다 담배 연기를 짙게 내뿜었다. 가공을 덜 거친 담뱃잎인지 냄새가 여간 독한 것이 아니었다.

“야, 오진해.”

“으, 응?”

“너 아직도 주사위 좀 굴리냐? 너 그 주사위로 쏠쏠히 재미 좀 봤잖아?”

“요즘은 잘…….”

“내가 구라 치는 놈들을 어떻게 했드라?”

“요즘은 주사위보다 골패가 좋아! 주사위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한삼랑은 거짓을 고하는 자들을 꽤 혹독히 대하는 모양이었다. 진해가 한삼랑의 말에 냉큼 대답했다.

“그래? 그럼 완전히 녹슬지는 않았겠네. 어이, 거기 도련님.”

“뭐냐.”

“우리 서방 말 들으니까 급한 게 도련님 쪽 이야기인 거 같은데 솔직히 난 그냥 입 다물고 있어도 상관없거든. 그런데 내 서방이 아주 오랜만에 집엘 왔단 말이야, 응~? 맘 같아서는 발모가지를 부숴 가지고 방에다 착 던져 놓고 싶은데. 이놈이랑 바꾸지?”

“……바꾼다고?”

“그래. 우리 형들이랑 만나게 해 줄 테니까 이놈을 나한테 넘기라고.”

“도, 도, 도련님!”

해산은 한삼랑의 제안에 놀라고 말았다. 놀랍게도 한삼랑은 진해가 마치 자신의 사람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한삼랑은 진해가 자신의 수하가 된 줄 아는 모양이었다. 해산은 제 소매를 부여잡는 진해를 내려다보았고 무척이나 불쾌해지고 말았다. 진해는 해산을 올려다보며 마치 버리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는 것처럼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거절한다. 네 말대로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잦아들 일에 아까운 내 사람을 버릴 순 없지. 그것도 내 양인을 말이다.”

“도련님!”

자신을 도대체 어떤 이로 보았길래 저런 눈으로 보는 건지. 해산은 팔을 들어 매달린 진해의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진해는 감동 어린 목소리로 도련님을 연호하며 해산의 허리에 달라붙었다. 달라붙은 정수리에서 솔솔 우유 향이 피어올랐다. 해산은 얼떨결에 진해를 자신의 양인으로 삼았다.

“그럴 줄 알았어. 저놈처럼 살림 잘하고 좆 실하면서 멍청하기까지 한 놈을 세상 어디서 찾을 수 있겠어. 야, 저기 갖다 둔 거 가져와. 실수로 피 튀겼다가는 일이 복잡해지니까 대충 놀이로 해결하자고.”

한삼랑은 해산이 진해를 두고 갈 것이란 기대조차 하지 않은 듯했다. 옆의 수하에게 명해 탁자 구석에 놓아둔 것을 몽땅 가져오게 했다. 수하가 들고 온 건 보자기를 말아 둔 것과 환약 한 알, 작은 주사위 두 개와 관청에 제출할 문서 하나였다.

“나는 말을 못 해 주겠고, 도련님은 손해 보면서는 알기 싫고. 그럼 우리 추피동의 방식으로 해결하는 수밖에.”

수하가 해산과 진해, 한삼랑의 앞에 보자기를 펼쳤다. 보자기에는 보자기의 각을 따라 선과 동그라미들이 그려져 있었는데 어떤 것에는 검게 색이 입혀져 있었다.

“이건?”

“음? 도련님은 처음 보시나? 높으신 도련님은 책만 읽는다고 제대로 놀 줄도 모르시나 보네. 어이, 오진해. 제대로 놀 줄 아는 놈인 네가 설명해 드려. 이게 뭔지 말이야.”

어딘지 모르게 오만한 삼랑의 말에 해산은 울컥할 뻔했으나 쇠심줄보다 질긴 인내심이 해산의 속을 억눌렀다. 다행히 위험한 물건은 아닌지 진해가 보자기와 주사위를 가리키며 해산에게 뭐라 뭐라 설명하기 시작했다.

“도련님, 저건 주사위 놀입니다. 주사위의 던져 눈만큼 말을 이동시키는 놀이예요. 검게 칠해진 곳에 다다르면 대각선으로 이동할 수 있어요. 대각선은 보시다시피 지름길이지요.”

“간단한 놀이군.”

“그렇지? 그래서 내가 이 놀이를 꺼낸 거야. 고매하신 도련님도 단번에 알 수 있는 놀이. 와~ 나 너무 착한데?”

“그래서 목적이 뭐냐.”

“뭐긴 뭐겠어. 평화롭게 모두가 원하는 바를 이루는 거지. 저놈이랑 당신이 편을 먹고, 나는 나 혼자 편을 해서 놀이 한판 벌여 보자고. 귀하신 분의 뺨에 생채기라도 나면 좆 되는 건 나 하나뿐이니까 자웅을 겨뤄 이긴 사람한테 다 몰아주자고.”

“……도련님이랑 나는 그냥 가면 안 돼?”

“야, 오진해. 봐주니까 기어오르지? 도련님은 몰라도 너한테 손대는 건 엄청 쉽다?”

확실히 해산 본인에겐 손을 대진 못하더라도 옆에 붙은 진해에게 손을 대는 건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해산 혼자라면 무력으로라도 제압하겠지만 진해가 인질로 잡히면 해산은 무고한 진해를 도저히 외면할 수 없을 터. 게다가 수하들을 시켜 해산을 바깥으로 쫓아 버린다면 해산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진해에 대한 한삼랑의 집착을 보아 삼랑은 진해를 손에 넣게 되면 자신이 한 말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실행할 터였다. 진해의 발목을 부러뜨리고, 알을 자르면서 제 맘대로 진해를 농락할 터였다. 절대로 그 꼴은 볼 수 없었다. 진해는 이 나라의 백성이고 저를 구해 준 은인이었다. 또 저와 몸을 겹친 양인이기도 했다. 해산이 처음으로 몸을 연 양인이었다. 신분이 천한 게 걸렸으나 법도로만 따지자면 직첩을 받아도 이상치 않은 몸이었다. 그런 것보다 해산이 한삼랑에게 진해를 넘기기가 싫었다. 진해는 해산이 처음으로 가진 욕정이었고, 드러내진 않았지만 해산은 누구보다 뺏기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좋다. 받아들이지.”

해산은 눈을 빛내며 이를 악물었다. 진해가 소스라치며 해산을 올려다보았지만 해산은 진해를 꽉 끌어안아 줄 뿐 자신의 말을 번복하는 일이 없었다.

“도련님, 해산 도련님! 삼랑이 저놈이 평소에 어찌하시는지도 모르시잖아요! 여기 원래 도박장이에요. 삼랑이 저놈이 주인이고요!”

“그러냐.”

“꺄악! 도련님 저는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랑 혼인하고 싶어요! 삼랑이랑 혼인하기 싫어요!”

“뭐, 이 씨발 새끼야!”

“허어엉, 도련님, 살려 주세요, 제발 살려 주세요―”

진해는 해산이 놀이를 받아들이자마자 엉엉 울며 애걸복걸하기 시작했다. 어지간히 싫은지 코에서 콧물이 찍 흘러나왔다.

“시끄럽다! 널 넘기려면 저놈이 말했을 때 널 진작 넘겼을 것이 아니냐. 걱정하지 마라. 나도 다 방도가 있으니. 절대로 네게 싫은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마.”

“도련님…….”

해산이 끌어안은 손을 들어 머리를 쓰다듬자 진해는 그제야 좀 진정되는 모양이었다. 해산은 문득 진해가 자신보다 다섯 살이나 많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다섯 해나 더 살았으면서 울고불고 난리였다. 저랑 몸을 겹칠 때는 매섭게 말하는 주제에 바깥에서는 이렇게 무르고 약한 모습을 보였다. 자고로 무력한 백성은 힘 있는 자가 나서서 지켜 줘야 하는 법이었다.

[탁.]

한삼랑은 진해가 하는 꼴에 부아가 치밀었는지 수하가 가져온 서류를 탁자에 세게 올려놓았다. 평민들이 쓰는 글자가 아닌 관청에서 쓰이는 진짜 문자로 된 서류였다.

“내가 이기면 도련님 당신이 여기다가 오진해 이름이랑 내 이름을 여기 적어.”

그것은 바로 혼인 신고서였다.

“일단 데리고 있다가 반년 뒤에 바로 관청에 접수할 테니까. 그러면 저놈도 이젠 제멋대로 지랄하고 다니진 않겠지.”

진해는 저 서류를 본 게 처음이 아닌지 온몸을 벌벌 경련했다. 해산은 그런 것보다 왜 바로 접수하지 않고 반년 뒤에 접수하려는지 의문을 품었으나 해답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한삼랑이 아직 성년이 되지 않아 관청에 정식으로 혼인 신고서를 제출할 수 없어 그런 것이었다.

가장 바닥 동네인 추피동의 도박판 두목이 아직 성년이 되지 못했다니. 해산은 골이 띵했으나 진해를 보며 마음을 고쳐먹었다. 진해는 저보다 다섯 살이나 많으면서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리하마. 네가 이긴다면 손수 그것을 작성해 주지.”

“그리고 당신이 이기면 내가 형님들한테 당신을 데려다주고, 추피동 밖으로도 내보내 주고. 좋아, 계약 성립인가.”

“에구구…….”

“그 에구구는 좋은 의미의 에구구겠지?”

“으, 응…….”

“두려워할 것 없다. 내가 곁에 있으니.”

“아, 네…….”

담담해진 해산이나 삼랑과는 대조적으로 진해는 뭐 씹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내기의 제물이 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자, 그럼 판돈을 걸어 보실까.”

게다가 한삼랑이 판돈이랍시고 던진 물건이 문제였다. 한삼랑은 옆에 있던 환약 한 알을 집어 던졌는데 진해는 그 약을 받자마자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타, 탈정고!”

“이 대 일인데 이 정도 제약은 있어야 놀이가 할 만하겠지? 우리 형들 몸값도 높일 겸 말이야. 낭중한테 탈정고를 의뢰한 건 우리 형들이야. 탈정고를 받아 온 것도 형들이고. 선처해 준다고 했으니까 이 정도는 말해 드리지.”

해산은 저를 곤혹에 빠뜨렸던 미혼약을 보자 저도 모르게 미간이 꿈틀거렸다. 저 물건 때문에 얼렁뚱땅 처음을 줘 버렸던 걸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였다. 물론 진해에게 원한이 있다는 말은 아니었다. 다만 이왕 처음을 치를 거면 좀 더 좋은 곳에서 좋은 분위기로 치렀으면 좋았을 것이란 말이었다.

“어이, 서방. 삼켜.”

“내가?!”

“말했잖아. 제약이라고. 네가 멀쩡하게 주사위를 굴리면 내가 질 게 뻔한데 뭐 하러 둘을 편먹게 두겠어? 어차피 해독법도 알잖아. 그러니까 어서 삼켜.”

“으으…….”

“안 삼키면 그냥 판 엎어 버린다?”

아니나 다를까, 삼랑은 진해에게 탈정고를 삼킬 것을 요구했다. 갑자기 협조적으로 나온다 싶었는데 그에겐 다른 꿍꿍이가 있던 모양이었다. 해산으로서는 속이 왈칵왈칵 뒤집히는 일이었다. 사람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일인데 한삼랑은 이런 중요한 일을 가지고 자신의 사리사욕만을 채우려 했다.

“에라이, 젠장!”

해산은 진해에게 삼키지 말라고 말하려 했으나 진해는 욕설과 함께 탈정고를 덥석 삼켜 버렸다. 그 약의 고통이 얼마나 깊고 농밀한지를 아는 해산으로서는 두 눈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오, 좋다, 좋아. 역시 오진해! 내 서방이지!”

“서방 아니야!”

“곧 그렇게 될걸? 여기 서약하고 나서 바로 초야를 치르자고. 도련님도 구경하고 싶으면 구경해도 돼. 난 별로 신경 안 쓰거든.”

“난 싫어!”

“까탈스럽긴.”

얼굴이 굳은 해산과 대조적으로 삼랑은 크게 웃었다. 그의 손안에서 주사위 두 개가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냈다. 놀이는 세 판 중 두 판을 먼저 이기는 쪽이 승리하기로 했다. 벽에 기대 있던 수하가 한삼랑에게 다가와 뭐라 귓속말하였는데 한삼랑은 명백히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를 손짓으로 쫓아 버렸다.

보자기는 작았지만 점이 여러 개라 그런지 놀이는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첫판은 생각보다 금방 끝났는데 진해가 주사위를 던질 때마다 열 번 중 아홉 번의 확률로 육이 새겨진 면이 나왔기 때문이다. 한삼랑도 주사위를 제법 잘 던졌으나 진해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한삼랑은 열 번 중 일곱 번의 확률로 육을 보았다.

“하아, 하아.”

그러나 두 번째 판이 되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진해의 얼굴이 달아오르고 손끝이 떨리기 시작하자 해산이 주사위를 대신 던지게 되었는데 해산은 정확히 절반의 확률로 육을 보았다. 두 번째 판은 한삼랑의 차지가 되었다.

“으아, 아, 하으…….”

“정말 괜찮은 게냐? 해독법을 알고 있다면서 왜 그리 참고 있느냐.”

“으응, 그러면, 판이, 깨지니까, 그럼, 도련님이 원하시는 바가, 하아…….”

진해는 치밀어 오르는 열기가 참기 힘들어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한삼랑은 그 모습을 꼭 갓 지은 밥을 바라보는 것처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옅은 색 눈동자에 포만감과 비슷한 감각이 서려 있었다.

“그렇지. 자고로 양인은 저렇게 조신해야 제맛이지. 정미려처럼 싸가지 없는 놈은 끼고 살 가치가 없어. 집에 들여놓을 놈은 저래야지. 안 그러냐?”

한삼랑이 낄낄 웃으며 수하들에게 내뱉자 수하들이 걸걸한 목소리로 함께 웃었다. 진해가 참지 못하겠는지 몸을 움츠렸고 해산의 낯은 더할 나위 없이 싸늘해졌다.

“으응, 응…….”

그리고 잠시 후 허리를 숙인 진해에게서 뭔가 축축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진해의 목덜미는 땀으로 축축해져 있었는데 그곳에서부터 향이 진하게 풍기기 시작했다. 마치 희락기를 맞은 듯한 향이었다. 진해의 옆에 있던 해산은 어쩐지 입술이 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이보거라, 이보거라, 진해!”

“하아, 예쁜아…….”

“……이미 제정신이 아니군.”

해산은 제 팔뚝에 뺨을 비비며 정신없이 제 물건을 잡고 흔드는 진해를 바라보았다. 자신 역시 이런 모습이었을 거라 생각하니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동시에 진해를 얼른 이곳에서 데리고 나가고 싶어졌다. 자신 외에 다른 음인들이 진해의 향을 맡는다는 사실이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자신의 양인이라 생각하고, 지켜 주겠다고 맹세한 이상 진해는 자신의 사람이었다. 해산은 진해의 향을 깊게 들이마시며 주사위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흐으, 씨발, 개 꼴리네.”

두 번째 판을 수월하게 이긴 탓인지 삼랑은 해산을 상대로 무척이나 방심하는 듯했다. 그도 아니면 오랫동안 노려 왔던 진해의 향에 욕정이 샘솟은 걸지도 몰랐다. 한삼랑은 미혼약을 복용한 것도 아니면서 느슨한 하의 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진해의 향을 들이마시고, 진해를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위아래로 흔들었다. 익숙한 모습인지 수하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해산은 제 물건을 흔들던 손이 주사위를 던지는 꼬락서니를 보자 판이고 뭐고 다 접고 관군을 동원해 이곳을 쓸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진해가 제 발로 움직일 수 있다면 그렇게 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해산도 그리 좋은 상태는 아니었고.

“예쁜아, 엉덩이, 엉덩이 때리게, 해 줘…….”

“허억, 진해, 씨발 새끼……, 존나…….”

한 양인과 한 음인이 헐떡거리는 사이에서 멀쩡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살아 있는 부처고 성인임이 틀림없었다. 해산은 어젯밤에 받은 문건 중 가장 지루하고 재미없는 것을 떠올리며 침착하게 주사위를 던졌다. 동십사가 농이랍시고 던졌던 맥 빠지는 말을 떠올리자 어쩐지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 같았다.

삼랑이 욕정에 눈이 뒤집힌 탓인지, 그렇지 않으면 주사위의 신이 이 난잡한 판을 얼른 끝내 버리고 싶은 것인지 세 번째 판은 삼랑과 해산의 말이 비등한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바지춤이 젖어 들기 시작한 삼랑은 그제야 다시 진지하게 임할 생각인 듯했다. 둘 중 한 사람이 사(四) 이상의 눈금이 나오면 게임은 끝이었다. 해산의 손에 식은땀이 고이기 시작했다.

“진해, 정신 차려라. 마지막 판이다. 이번 판만 끝내면 해독을 해도 된다.”

“끄응, 판이 벌써…….”

해산의 옆에서 열심히 예쁜이 타령을 해 대며 비비고 흔들고 싸기도 한 탓인지 진해 역시 정신이 좀 돌아온 모양이었다. 진해는 판을 한 번, 그리고 주사위를 든 해산의 손을 한 번 바라보았다.

“운이 필요한 판이네요…….”

진해는 끈적끈적한 손을 옷에 문질러 닦더니 해산의 손을 오므려 주사위를 쥐게 했다. 통을 흔들듯 살짝 움직이다가 해산의 손가락 사이에 훅, 바람을 불어넣었다. 해산은 예상치 못한 행동 탓에 그만 몸을 부르르 떨고 말았다.

“제가, 이래 봬도, 주사위로, 흐, 제법, 벌었, 으으…….”

“그래서 네 운을 나눠 주겠다는 거구나. 그래, 잘 받았다. 만약 이번 판에서 지더라도 결코 네가 억지로 혼인하는 일은 없게 하겠다. 널 반드시 보호해 주도록 하마.”

“믿어요, 해산 도련, 님.”

한삼랑이 뚫어지게 바라보는 가운데 해산은 주사위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진해의 입김에 젖은 주사위가 보얗게 윤을 냈다. 이 자리의 모두가 숨을 죽이고 해산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하고 있었다. 해산은 문득 자신이 한씨 형제를 만나기보다 진해를 지키기 위해 놀이에 열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말로 신기한 기분이었다. 해산은 이때까지 진심으로 누군가를 위해 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해산에게 진심인 자가 없었다. 정략혼으로 혼인한 좌부와 우부 사이에서 해산은 그저 혼인의 결과물일 뿐이었다. 좌부는 해산을 대놓고 등한시했다. 해산에게 가까운 건 해산을 연민하는 우부와 동십사 둘뿐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그리고 마침내 주사위가 허공을 날았다.

주사위를 따라 모두의 시선이 올라갔다가 동시에 내려앉았다. 주사위가 구를 동안 모두가 숨을 죽였다. 구르던 주사위가 마침내 멈춰 섰다.

“육이군. 고의 승리다.”

육의 눈금이었다. 해산은 손을 들어 말을 움직였고 말은 뚜벅, 뚜벅, 걸어 당당히 결승선을 통과했다.

“아, 씨발.”

한삼랑은 제 물건을 만지던 손으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그리고 곁에 서 있던 수하들에게 사납게 소리쳤다.

“야, 저 새끼들 잡아!”

물론 모두 다 해산이 예상했던 일이었다. 해산은 수하들이 달려드는 순간 판이 차려진 탁자를 삼랑의 쪽으로 세게 걷어찼다. 동십사의 집에서 의자를 걷어차던 솜씨가 고스란히 발휘되었다.

“엎드리거라!”

그러는 동시에 진해의 머리를 바닥으로 눌렀다. 거의 던지듯 누른 탓에 진해는 악 소리와 함께 이마를 땅에 부딪치고 말았다.

그리고 그때, 어디선가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붉은 번개 같은 것이 방 안을 종횡무진 누비기 시작했다. 가느다란 번개는 한삼랑에게 던져진 탁자를 순식간에 세 조각으로 갈라놓았다. 해산을 잡으러 오던 수하들이 돌덩이처럼 굳어 버렸다. 삼랑의 눈도 상상치 못한 광경 탓에 커다랗게 홉떠졌다.

“한삼랑. 좋게 어를 때 약조를 지키거라. 소문을 들어 알겠지만 나는 성정이 그리 자비로운 편이 아니니라.”

붉은 번개의 정체는 해산의 손가락에 걸린 세 가닥의 구리 채찍이었다. 세간에 흔히 알려진 채찍과 달리 실처럼 가느다랗고 예리하기 짝이 없었다. 해산은 그 세 가닥의 구리 채찍을 검지와 중지, 약지에 고리처럼 걸고 있었다. 팽팽한 채찍의 끝은 신으로 꽉 밟고 있었다.

“내 인내의 한계를 시험해 보고 싶다면 누구든 앞으로 나와 보거라. 한 가지 일러 주자면 이 물건은 뼈를 자르진 못해도 살점은 아주 잘 발라낸단다.”

“빌어먹을, 간이 부은 게 아니라 믿는 구석이 있어서 저놈만 데리고 온 거였잖아!”

삼랑은 조각난 탁자를 보며 짜증을 냈다. 수하들은 악명 높은 흉악범이었지만 생전 처음 보는 해괴망측한 무기에 주눅이 들어 감히 해산과 진해에게 다가가지 못하였다. 두목인 삼랑도 보고만 있는 마당에 어느 용감한 놈이 다가갈까.

“시발, 길기도 존나 길어. 다 풀어 놓으면 방 넓이만 하겠네.”

“눈이 좋구나, 한삼랑.”

기세가 누그러진 삼랑을 바라보며 해산은 씩 웃음 지었다. 관례도 치르기 전에 비명횡사하고 싶지 않았던 한삼랑은 손짓을 해 수하들을 물렸고, 자신 역시 양손을 들어 보였다.

“항복. 도~ 련님이 그렇게 나오는데 우리같이 허약한 놈들이 뭘 더 어쩌겠어? 그냥 한번 떠본 거니까 너무 화내지 맙시다?”

“나 역시 떠본 것이니 개의치 말거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두 사람은 서로를 믿지 않았다. 삼랑은 기회를 엿봐 해산을 제압하려 했고, 해산은 그런 삼랑을 완전히 굴복시키려 했다.

“으허엉, 나 죽어…….”

그러나 찢겨 나갈 듯이 팽팽한 기류는 오래가지 못했다. 바닥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서글픈 흐느낌이 두 사람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해독, 해독해야 해, 아니면 터질지도 몰라, 어허엉, 장가도 못 갔는데 고자는 안 돼…….”

진해가 고자가 되면 심각해지는 두 사람이 이 자리의 요인(要人)이었다. 해산은 계면쩍은 표정으로 구리 채찍을 소매 속으로 말아 넣었고, 삼랑은 온 동네 사람이 다 들을 정도로 크게 혀를 차기 시작했다.

“일어설 수 있겠느냐.”

“아니요, 못 일어나겠어요. 온몸이 찌르르해요, 뜨거워서 죽을 것 같아요―”

“그래? 그럼 내가 가서 도와줄까? 내가 그냥 한 번에 해독시켜 줄게!”

“너 싫다니까!”

“비싸긴.”

해산은 삼랑과 수하들을 경계하며 진해를 부축해 토실(土室)의 구석진 곳으로 데려갔다. 해산이 아는 탈정고의 해독은 외간 음인들 앞에서 함부로 보일 만한 것이 아니었다.

“쉬, 쉬―”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진해는 해산의 몸에 몸을 기댄 채 하초를 풀어헤치고 정체불명의 입소리를 내고 있었다. 해산은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으나 진해는 멈추지 않고 쉬, 쉬― 라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마치 어른이 어린아이에게 소변을 보게 할 때 내는 소리 같았다.

“너, 지금 뭐 하는 거냐?”

해산은 순간 어이가 없어서 진해에게 물어보았다. 진해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절박하게 쉬, 쉬를 반복하고 있었다.

“어떡해요, 잘 안 나와요…….”

“뭐? 설마, 설마 탈정고의 해독법이라는 게, 그, 그것이냐!”

“아무래도 한 번 더 싸야 나오려나 봐요, 어허엉……!”

오늘 뒤통수 여러 번 맞는 것 같구나. 해산은 꿈에도 상상치 못했던 탈정고의 해독법에 땅이 뒤흔들리고 눈앞이 흐려지는 듯했다. 흔들리는 머릿속에서 문득 진해와 처음 몸을 겹쳤던 때가 떠올랐다. 진해는 그냥 흔들고 싸도 될 것을 해산의 몸을 자극해 억지로 소변을 지리게 했었다. 해산은 그것을 진해의 변태적인 행위의 일부로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정교가 아니라 소변이 탈정고의 진짜 해독법이었던 것이다!

“이, 이 괘씸한 놈!!”

해산은 화가 치솟아 체통을 잃고 꽥 소리 질렀다. 진해는 해산이 소리 지르거나 말거나 끙끙대며 해산의 가슴에 뒤통수를 비빌 뿐이었다.

“해산 도련님, 손 좀, 손 좀 빌려주세요…….”

한술 더 떠 진해는 이제 해산의 손을 빌려 달라 요구하고 있었다. 해산은 혈압이 솟아 당장이라도 거꾸러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도련니임…….”

이런 괘씸한 놈을 내 양인으로 천명하다니, 내 입으로 지켜 주겠다고 약조하다니, 이런 놈을 내가, 내가!

“그래, 후우―, 알겠다. 네 마음대로 갖다 쓰거라.”

해산은 구리 채찍을 들지 않은 오른손을 진해에게 빌려주었다. 머릿속으로 인내를 삼천 번 정도 그리면서 이번 일이 끝나면 이놈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 주겠다 되뇌기를 반복했다.

“하, 하아, 해산, 해산 도련님, 예쁜, 도련, 아, 해산, 앗, 아―!”

그러나 제 손에 진해의 물건이 닿자 인내는 물에 닿은 설탕처럼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진해의 물건은 묵직하면서도 뜨겁고, 부드럽고, 축축했다. 자신의 것이 아닌 타인의 것이 닿는 감촉은 해산의 감각을 모조리 해산의 손으로 집중시켰다.

“으응!”

잠깐 손을 꿈지럭거렸는데 진해의 입에서 새된 교성이 튀어나왔다. 헐떡거리는 입술 사이로 연신 단내가 풍겨 나왔다. 어쩐지 얼굴이 홧홧했다. 단지 손을 빌려주는 것뿐인데 가슴이 아릿하고 손끝이 저릿했다. 정작 진해는 자신의 손을 도구처럼 마구 흔들고 비비고 있을 뿐인데도 해산은 진해와 자신이 보이지 않는 실로 이어진 것만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진해가 헐떡일 때마다 해산의 숨이 함께 거칠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해산의 시선이 진해의 입술에 닿는 것이다. 진해가 손을 옥죌 때마다 가슴이 함께 옥죄는 것도, 진해의 손톱이 피부를 긁을 때마다 머리털이 곤두서는 것도, 거친 손가락들이 손 사이에 파고들자 음인의 부분이 젖는 것도, 모두 다 해산과 진해 사이에 보이지 않는 실이 이어져 버린 탓이다.

“진해…….”

해산은 진해의 이름을 읊조리며 진해의 입술을 제 입술로 덮어 버렸다. 진해에게 자신의 손을 물건처럼 줘 버리고는 부드럽고 애틋하게 진해의 입술 위를 문질렀다. 날카로운 이에 혀가 스칠 때마다 피부 위로 다닥다닥 소름이 돋았다. 한삼랑과 수하들을 경계해야 된다는 걸 알면서도 해산은 지금 이 순간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욕정에 눈이 멀어도 단단히 멀었다. 진해가 자신을 완전히 중독시켜 버렸다. 탈정고가 아닌, 욕정이라는 새로운 독약에, 진해라는 양인이 주는 쾌락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잠겨 버렸다.

이 순간, 해산은 진해의 음인이었다.

“잘 쌌냐?”

얼굴이 홧홧해진 해산이 돌아오자 삼랑이 진해에게 낄낄거리며 말을 걸었다. 진해는 해산의 앞에서 소변을 보게 되어 기분이 영 좋지 못했다. 좋지 못한 게 아니라 은근슬쩍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해산 도련님이 탈정고의 해독법을 알게 되었으니 저를 혼을 내면 어쩌나 싶어서였다.

“보면 모르냐, 이 새끼야!”

“어쭈, 제법 세게 나오는데? 남편한테 새끼까지 나오고. 교육 좀 다시 해야겠다?”

“윽, 허튼소리 하지 말고 약조나 지켜! 형님들 어딨어!”

“참 나,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옆에 자기편 하나 있다고 기세등등해 가지고.”

한삼랑은 답지 않게 꽤 뜸을 들였다. 진해는 저놈이 이 짓거릴 벌이고 입을 닦는 게 아닐까 싶어 두려워졌다.

“설마.”

“도련님, 왜 그러세요?”

그런데 해산 도련님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진해는 영문을 알 수 없어 해산 도련님을 그저 바라만 볼 뿐이었다.

“큭큭, 그래. 형들은 처음부터 우리랑 쭉~ 같이 있었어. 여기서 우리 하는 꼴을 다 보고, 다 듣고 있었단 말이지.”

아까부터 수하 놈 하나가 벽에 들러붙어 있다가 삼랑에게 와서 소곤소곤하던 게 다 저것 때문이었다. 사실 한일과 한이는 처음부터 이 토실의 벽 뒤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사실 우리가 좀 급해. 나도 자세히는 모르는데 의뢰한 새끼가 형들 뒤통수를 친 모양이더라고. 자, 도련님. 그럼 약조를 지켜 보실까. 탈정고를 유통한 죄를 선처한다면 우리 형들은 죄가 없는 거,”

[쾅!!!!!!!!!]

그러던 그때,

“우왁!”

“헉!!”

“악, 씨발!!”

토실의 벽이, 정확히 말하자면 한삼랑의 수하가 서 있던 벽 옆이 굉음과 함께 부서졌다. 자욱한 흙먼지가 피어올라 온 토실을 가득 메우자 토실 안의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얼굴을 감싸 쥐고 기침을 했다.

“우, 우리가 이대로 끝날 것 같아!!!”

먼지 사이로 뛰쳐나온 건 한일과 한이 형제였다. 장남인 한일은 저만큼이나 커다란 망치를 들고 달려 나왔고, 차남인 한이는 가까이 있던 촛불을 하나씩 엎어 꺼뜨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삼랑이 형들의 안전을 두고 놀이를 벌일 동안 두 형제는 안에서 일이 틀어질 경우를 대비한 듯했다.

한일은 해산에게로 달려와 망치를 치켜들었고, 해산은 재빨리 소매 속의 구리 채찍을 꺼내 들어 망치를 휘어 감았다. 나무로 된 손잡이가 두부 잘리듯 동강 났다. 한일은 망치가 부서지자 미련 없이 그것을 놓았고 재빨리 몸을 굽힌 뒤,

“으어억!”

해산의 옆에 서 있던 진해를 낚아채 토실 밖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입구에 서 있던 한이가 마지막 촛불을 끄자 토실 안은 어둠과 먼지, 기침 소리로 아비규환이 되었다.

“도련님!! 악!!”

어디가 어딘지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해산을 연호하는 진해의 비명이 울리다 끊어졌다.

“아, 형!!”

추피동의 두목이라는 감투가 허울로 얻어진 게 아닌지 한삼랑이 제일 먼저 평정을 되찾았다. 물론 삼랑의 입은 평정을 찾지 못하고 제 계획을 망친 형들을 향해 폭포수 같은 욕설을 쏟아 냈다. 탁탁 소리와 함께 토실 구석이 환하게 밝아졌다. 한삼랑이 부싯돌로 불을 붙인 것이다.

“……한삼랑. 감히 고를 이런 식으로 기만해?”

불이 켜지자마자 해산이 채찍으로 휘어 감은 망치의 머리 부분을 집어 던졌다. 쇠로 이루어진 머리는 둔중한 소리와 함께 토실 구석에 처박혔다. 삼랑은 거한 한숨과 함께 제 머리를 거칠게 휘저었다. 옅은 갈색의 머리칼이 순식간에 까치집이 되어 버렸다.

* * *

진해가 눈을 떴을 땐 사방이 이미 캄캄하게 변한 후였다. 진해의 마지막 기억은 한삼랑의 토굴에서 한일에게 뒤통수를 가격당한 것이었다.

‘망할 자식 같으니. 틈만 나면 손을 올리네! 내가 이러니까 이 집구석에 장가오기가 싫지!’

한씨 형제는 진해를 때린 것도 모자라서 꽁꽁 묶어 놓은 듯했다. 진해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않은 척하면서 슬그머니 몸을 움직여 보았다. 납치가 아니라 놀이였다면 진해가 한 수 가르침을 청할 정도로 단호하면서 정교한 구속이었다.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묶은 탓에 손끝이 다 저릿할 정도였다.

‘이런 식으로 묶으면 시간을 잘 봐야 해. 자국 남는 걸 좋아하는 이라면 시간을 늘려 주고, 그게 싫으면 옷 위로 짧게 묶어야겠는걸?’

대담하게도 진해는 목숨의 위기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야한 놀이에 대해 생각하였다. 실은 한씨 형제가 자신을 죽이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어 그런 거였다. 한씨 형제는 진해를 정말로 막냇동생의 짝으로 만들려 했던 것이다. 물론 진해에게는 좋지 않은 일이었다. 진해와 미려가 친형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다 한씨 형제들 때문이었다.

‘얼굴에 멍은 안 들어야 할 텐데. 미려 그 녀석 그때부터 내 상처에 예민해져서…….’

정미려가 열네 살이 되던 해, 진해가 열아홉이 되던 해, 그리고 진해가 한삼랑과 알게 된 지 칠 년인가 팔 년인가가 되던 해. 한씨 형제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다짜고짜 진해의 집으로 쳐들어왔었다. 한삼랑은 근육이 새겨진 지금과 달리 어릴 때는 가늘고 하늘하늘한 아이였는데 진해는 삼랑이 그대로만 컸더라면 못 이긴 척 약혼 정도는 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쳐들어온 한씨 형제는 비굴하게 자리를 권하는 진해에게 한마디를 했다. 너 말고 다른 집에 우리 막내를 맡겨 봤는데 살이 찌기는커녕 도리어 마르기만 하더라. 막내도 네 밥이 아니면 맛이 없다고 한다. 그러니 네가 우리 막내를 책임지고 양육해라. 요약해서 말하면 결혼해라. 집구석에 처박혀서 우리 막내 밥을 해 줘라.

정말 난데없는 횡액이었다. 한씨 깡패 놈들이 마구잡이로 맡긴 걸 내쫓을 수가 없어서 밥도 먹이고 씻기고 하면서 길러 줬더니 이젠 아예 결혼을 해서 먹여 살리란다. 진해는 어이가 없어 말을 잇지 못했고, 미려는 칼같이 반대했었다.

“……발, 씨발! 어째서 일이 이렇게 된 거야! 시키는 대로만 하면 포교가 되게 해 준다고 했잖아! 그런데 일이 왜 이렇게 된 거냐고!”

진해의 회상 사이로 날카로운 목소리가 섞여 들었다. 실눈을 뜨자 두 형제 중 마른 편인 한이가 신경질적으로 방을 맴도는 게 보였다. 한일은 구석에 앉아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 커다란 덩치가 작아 보이는 게 참 신기했다.

“으으, 여기가 어디야~?”

진해는 슬슬 그들과 대화를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앞서 말했다시피 진해는 묶이는 것보다 묶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일 형? 이 형?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인지……?”

능청스러운 연기 덕에 자연스럽게 깨어날 수 있었다. 진해는 어지러운 척 고개를 휘휘 가로저었다.

“휴, 삼랑이랑 이야기 중인 거 같았는데.”

“…….”

“형님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오? 이게 다 어찌 된 일이냐구. 탈정고도 그렇고, 낭중 아저씨도 그렇고.”

한이는 신경이 날카로워졌는지 진해를 노려보며 벅벅 이를 갈았다. 가뜩이나 흉악한 면상이 이를 가니 나찰도를 현실로 옮겨 놓은 듯한 형상이 되었다. 토실에서 오줌을 싸지 않았으면 지렸을지도 모른다. 진해는 갑자기 삼랑이가 그리워졌다.

“망할, 그놈이 우릴 속였다! 일이 성사만 되면 단번에 포교를 시켜 주겠다고 했어! 우리가 주먹을 잘 쓰니까 하장군까지 오르는 건 식은 죽 먹기라고 했다고!”

“엥, 포교요?! 관리를 시켜 준다고 했다고요?!”

“그래, 젠장…….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하는데 잘못 생각했어. 주제에 무슨 포교를 하겠다고! 포교가 되면 이번에야말로 손 씻고, 막내 녀석도 깨끗하게 손을 씻겨서 제대로 된 신랑을 사 주려 했어, 싫다고 도망치는 새끼말고 좋아 죽겠다는 놈으로 말이야!”

한이는 울부짖듯 쏟아 내고는 한일과 좀 떨어진 곳에 주저앉았다. 조금 우는 것 같기도 했다.

“형님, 그거 딱 봐도 사긴데?”

“뭐, 임마!”

“아니, 형님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놈이 형님한테 너무 했다구! 어떻게 새사람이 되려는 형님들의 마음을 그렇게 짓밟을 수가 있어! 나쁜 새끼!”

포교 자리를 꿰차서 뇌물을 받으려 했다면 몰라도 새사람이 되려고 했다니. 진해는 허튼소리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한삼랑 이야기가 나오자 마음이 약해졌다. 진해도 미려라는 동생을 좋은 곳에 장가보내고 싶었기 때문에 누구보다 그들의 마음을 잘 이해했던 것이다. 결코 그들이 삼랑이를 진해에게서 떼 내려 했다는 점에 혹한 것이 아니었다.

“……원공에게도 나쁜 일이 아니라고 했단 말이다. 오히려 그를 돕는 일이니까 잘될 거라고 했어. 어쩌면 정말 까마득한 곳까지 연줄이 닿을 줄 모른다고.”

“뭔 공에게 나쁜 일이 아니야? 형님, 한이 형님! 정신 좀 차리고 말 좀 해 봐. 말을 들어야 나도 어떻게 수를 써 보지!”

한이는 완전히 기력을 잃었는지 웅크린 채 크게 흐느꼈다. 다 큰 어른이 흐느끼는 모습은 추하고, 초라하고, 가여웠다.

“해원공(海元公). 우리 목표는 해원공이었다.”

머리를 감싸 쥐고 있던 한일이 한이를 대신하듯 말을 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심한 고뿔에 걸린 것처럼 팍 쉬어 있었다.

“허억.”

그리고 그들의 목표가 누구였는지 들은 순간 진해는 숨이 턱 막혀 오는 것을 느꼈다. 사기도 저 정도면 엄청난 규모였다. 해원공이라니. 저 해원공이 정말 진해가 아는 그 해원공이란 말인가.

“미, 미쳤어?! 형들 정말 돌았냐고! 포교 좋아하시네, 장군을 시켜 줘도 안 해야지!”

“그때는 잘 풀릴 것 같았다! 애초에 해원공의 혼인을 성사시키는 게 우리의 임무였다! 선금으로 금을 줬어, 평생 쳐다보지도 못한 금을 아무렇지도 않게 던져 줬다고, 고작 차에 약을 타는 대가로 말이다!”

비통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으나 진해는 해원공이라는 말을 들은 후부터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의자 묶인 채로 질질 걸어와 핏대를 올려 가며 꽥꽥 소리를 질러 댔다.

“야 이 멍청한 작자들아, 금이 목숨보다 중요해! 한순간의 금이 평생의 목숨보다 중요하냐고! 해원공이 어떤 사람인데 금에 혹해?! 역모로 잡히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 저기 사거리 형장에 올라가서 목이 잘린다고! 재수 없으면 산 채로 살점이 뜯길 수도 있는 일이야!!”

나름 온화한 편이었던 진해치고 과격한 반응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해원공이라 불리는 이는 이 월나라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지극히 귀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월국 황제 회순과 건평황후 사마계의 장자. 월국과 해국의 화친의 상징.

해원공은 괴멸 직전이던 월국이 해국과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 행한 정략혼의 산물이었다. 번국(藩國) 중 가장 강성한 해국 출신인 황후 소생의 황자였다. 더욱 중요한 건 회순 황제에게 해원공 외에 다른 자식이 존재치 않다는 점이었다. 적자에다가 독자이며 장자인 해원공은 현재까지 황위에 가장 가까이 자리한 존재였다.

“게다가 지금 일이 잘 풀려도, 나중에 해원공이 옥좌에 오르면 댁들을 가만히 둘 것 같아?! 높으신 분들이 자존심이 얼마나 고고한데! 일이 잘 풀려서 깨가 쏟아지게 살아도 저한테 약을 먹인 놈들을 곱게 살려 주다니.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지면 내가 내 손에 장을 지진다, 장을 지져! 으이구, 멍청한 작자들아! 대체 어쩌자고 그런 일을 했어? 그냥 평소처럼 소소하게 양아치 짓이나 하지, 왜 그런 위험한 일을 벌였느냐 말이야!”

분했지만 진해의 말은 구구절절 옳기만 했다. 그 당시엔 다 될 것 같았다. 감히 올려다보지도 못할 양반이 친히 한씨 형제를 불러들였기 때문이다. 유명하기로는 해원공만큼이나 유명한 자였다. 한씨 형제 같은 깡패들에게는 해원공보다 더 말이 잘 통할 사람이었다. 반쯤은 기세에 눌리기도 했다. 한일은 저를 저버린 이를 떠올리며 입술을 짓씹었다.

“진해……! 오 서방!”

진해가 씩씩거리다 주저앉자 한일이 얼른 진해의 앞으로 다가왔다. 미간을 찌푸리는 진해에게 다짜고짜 이마를 조아렸다. 진해에게 가차 없이 폭력을 휘두르던 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더러운 흙먼지가 그의 이마에 달라붙었다.

“오 서방! 제발 우리 좀 구해 줘! 자네가 말했지? 탈정고를 먹인 죄를 선처해 준다고!”

“그거야…….”

―응? 잠깐 뭔가 이상한데?

“목숨만, 목숨만 살려 주면 돼! 얼굴에 먹을 새기든 유배를 가든, 목숨만 살려 줘! 우리가 죽으면 막내는 앞으로 이 험한 세상을 혼자서 어떻게 살아야 해!”

“아니, 지금도 혼자서 잘 살고 있는데…….”

“다른 건 안 바래! 그냥 목숨만, 목숨만 건지면 돼!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자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할 테니까!”

한일이 쿵쿵 이마를 찧으며 연거푸 절을 하자 구석에 처박혀 있던 한이가 한일에게 다가와 등을 안았다. 절망과 좌절로 얼룩진 얼굴은 바닥 인생의 표본을 만들어 둔 것 같았다. 진해는 흐느끼는 두 사람을 바라보다 크게 한숨지었다. 과연 이 일이 자신의 (정확히는 제 뒤에 있는 도련님의) 손안에서 해결이 될 일인지 가늠조차 하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놔두자니 정말로 목숨이 위험할 테고.

“휴. 내가 가만 생각해 보니까 우리끼리 이러쿵저러쿵해도 아무것도 해결이 안 나. 차라리 이왕 이렇게 된 거 있는 돈 없는 돈 다 긁어모아서 어디 벽지로 도망쳐 있는 건 어때요? 도련님이 하시는 거 보면 둘의 죄를 완전히 없애는 건 무리라도 쫓지 말라고 명하시거나, 최소한 추격을 방해하는 것 정도는 무리 없이 해 주실 것 같으니까.”

“그, 그래? 정말 그래 줄까?”

“물론 공짜로는 안 되지, 이 형님아. 댁들이 판을 엎어서 지금쯤 화가 머리끝까지 나셨을 텐데.”

“그럼……?”

한일이 한 줄기 희망이 깃든 눈으로 진해를 올려다보았다. 진해는 엉망진창으로 얽힌 상황에 한숨이 멈추지 않아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쉬다 다소 진지한 눈빛으로 한일과 눈을 마주쳤다.

“당신들한테 일 시킨 사람. 그 사람이 누군지 말하고 가. 그걸 나한테 말하면 내가 도련님한테 내 엉덩이를 바쳐서라도, 반드시 당신들을 도와줄 테니까.”

양인 엉덩이의 순결. 한일은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모를 담보에 희망이 담긴 눈빛이 조금 흐릿해졌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한씨 형제를 도울 수 있는 건 눈앞의 오진해 한 사람뿐이었다.

“그 사람은, 해원공에게 탈정고를 먹이라고 시킨 사람은―”

그러던 그때,

“아얏!”

의자에 묶여 있던 진해가 새된 소리를 질렀다. 깜짝 놀란 한씨 형제가 고개를 들었을 땐 진해의 눈동자는 총기를 잃고 급격히 흐릿해지는 중이었다. 진해는 한일이 완전히 몸을 일으키기 전에 고개를 떨구었다.

“오 서방! 이봐, 오진해!”

한씨 형제는 진해가 축 늘어지자 겁에 질려 그의 몸에 달려들었다. 다행스럽게도,

“커어―”

진해는 죽은 게 아니라 그냥 잠이 든 듯했다. 그러나 다행이라는 건 진해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한씨 형제는 진해가 잠이 든 걸 확인하자마자, 진해의 목덜미에 박힌 작은 침을 발견하자마자 누가 뭐라 할 새도 없이 황급히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한씨 형제는 추피동에서도 인적이 드물고 황폐한 거리를 달려 나갔다. 예전에 역병이 크게 돌았을 때 이곳에 역병 걸린 사체를 처리하는 화장터가 자리했었다. 도성이 텅 비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큰 역병이었던 터라 무연고인 시신을 아무렇게나 태워 없앴었다.

그 탓에 이 거리에는 젯밥을 먹지 못해 굶주린 원귀들이 떠돈다는 소문이 돌았다. 추피동처럼 자본과 지식의 혜택을 받지 못한 동네에서 미신은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는지라 한씨 형제도 다름 아닌 이곳으로 도망쳐 온 것이다. 평소의 한씨 형제라면 원귀든 도깨비든 별로 겁을 내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귀신을 팔아 돈을 벌겠다며 낄낄거렸을 것이다. 귀기가 서린 것처럼 창백한 달빛도 쓸데없이 밝기만 하다며 시부렁거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한씨 형제에게는 사방의 모든 것이 그들을 물어뜯으려 쫓아오는 것만 같았다. 예를 들면 어디선가 들려오는 저 비파 소리라던가.

“으악!”

“둘째야, 일어나, 어서 일어나!”

“혀, 형! 저, 저, 저기!”

추피동에서 날 일 없는 아름다운 소리였다. 창백한 달빛에 녹아들며 매끄럽게 곡이 이어졌다. 형제가 달리면 응당 멀어져야 할 소리이거늘 형제가 달릴 때마다 비파 소리가 둘의 뒤에 바싹 달라붙었다. 처음에는 부드럽게 이어지던 곡이 나중에는 형제의 심장을 조이듯 빠르고 날카롭게 이어졌다.

“누구야, 시발, 누구냐고! 나와, 개자식아! 어떤 새끼가 이딴 장난질을 치고 지랄이야!”

도망이 소용없음을 알게 된 한일이 벌벌 떠는 한이의 팔뚝을 붙잡은 채 크게 소리쳤다. 그러는 그의 등도 식은땀으로 잔뜩 젖어 있었다.

“오랜만이네.”

고맙게도 비파 소리의 주인은 형제를 더는 갖고 놀 생각이 없는 듯했다. 얼룩 한 점 없는 희고 하늘하늘한 옷을 입고, 먹물처럼 새까만 머리칼을 가진 이가 어느 지붕 위에서 한가롭게 비파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저, 정미려!!”

섬세하고 요염한 눈매와 달리 입술엔 한 치의 웃음도 걸려 있지 않았다. 미려방에서는 꽃처럼 화사하게 피어나던 것이 이곳에서는 서늘하게 얼어 있었다.

“네, 네가 왜 여기 있는 거냐! 설마 너도 그자와 한패냐!”

“설마. 난 해원공이고 나발이고 다 관심 없어.”

“그, 그럼 탈정고, 그것 때문이냐! 그것 때문이라며 내가 정말 잘못했다! 다시는 미려방에 얼씬도 하지 않을 테니까, 제발, 지금은 제발, 보내 줘!”

“탈정고? 아. 그런 게 있었었지.”

마침표를 찍듯이 강하게 줄을 퉁기자 미려가 앉아 있는 지붕 아래로 새카만 그림자들이 날카롭게 안광을 번뜩였다. 거리를 두고 띄엄띄엄 한씨 형제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것도 짜증 나기는 하는데 정답은 아니야. 내가 너희들을 보러 온 건 정말로 개인적인 용무 때문이야. 내가 너희를 마지막으로 봤을 때, 너희에게 뭐라고 했는지 기억하고 있어?”

“마지막……?”

“그래, 내가 너희들과 마지막으로 얼굴을 마주했을 때 말이야.”

한씨 형제는 날카로운 시선 속에 놓인 채로 정미려와 언제 마지막으로 만났는지 떠올리려 했다. 미려방의 앞을 지나가거나 시비를 걸러 간 적은 있어도 정미려와 직접 얼굴을 마주한 적은 없었다. 정미려와 얼굴을 마주했던 건 꽤 오래전의 일이었다. 정미려가 이끄는 미려방의 문지기 패거리와 한씨 형제가 부리는 조잡한 깡패들이 맞붙었을 때였다.

“내가 그때 경고했었지. 한 번만 더 오진해에게 손을 대면 그땐 정말 가만 안 두겠다고 말이야.”

정미려는 패배한 한씨 형제를 꿇려 두고 그들에게서 다짐을 받았었다. 정미려는 구역 다툼에서 단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고, 그때에도 여럿에게서 튄 피로 엉망진창인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일에 우리 형이 끼어 있더라? 그것도 아주 깊숙이 말이야.”

오진해와 살 적엔 마르고 곱상하기만 했던 사내아이였는데 미려방의 일패가 되자마자 정미려는 한씨 형제들이 감히 손을 쓰기도 어려운 상대가 되었다. 진해에게서 억지로 떼 갖다 팔려고 했던 때와는 생판 다른 인물이었다.

“시발!! 오진해 그 새끼가 맘대로 끼어든 걸 우리더러 어떡하라고!!”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말이 바로 지금이었다. 정미려는 한씨 형제가 그를 오진해에게서 떨어뜨리려 한 일에 굉장한 원한을 품고 있었고, 한씨 형제는 그런 정미려가 짜증 나고 껄끄러웠었다. 궁지에 몰린 지금은 두려워 죽을 것 같았고.

“어떡하긴 뭘 어떡해? 잘못을 했으면 책임을 져야지. 염전이 좋아, 광산이 좋아? 하나 골라. 죽고 못 사는 형제니까 떨어지기는 싫을 거 아냐.”

염전과 광산 두 군데는 월국에서 유일하게 노예 매입이 허용되는 구역이었다. 노역 중 가장 고되고 기피되는 곳이기도 했다. 정미려는 다과를 고르는 것처럼 우아하고 여유로운 태도로 말했다. 사면초가가 바로 이런 말이라, 한씨 형제는 점점 좁혀 오는 포위망을 보며 침을 삼켰다. 살인 누명을 쓴 것만으로도 충분히 궁지에 몰려 있었다.

그러던 그때, 한씨 형제와 포위망 사이로 새까만 인영 하나가 끼어들었다. 흰옷을 입은 미려와 대조적으로 폭이 좁고 새카만 옷과 마찬가지로 검은 복면을 갖추고 있었다. 복면 위로 보이는 나이는 마흔이나 쉰쯤 되었을까. 군데군데 흰머리가 보였다. 그러나 옷 위로 드러난 몸은 젊은이들 못지않게 다부지고 탄탄했다.

“이자들을 양보해 주시게.”

그와 대조적으로 복면 아래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팔순 노인과 다름없었다. 일부러 그리한 것인지 원래 그러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참으로 예의 없는 분이시군요. 대뜸 찾아와 양보하라니. 미안하지만 그리할 수는 없겠는데요. 제 구역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꼭 제 손으로 저놈들을 처리해야겠거든요. 보아하니 이번 일을 계획한 분과 아는 사이신 거 같은데. 말 한마디 전해 주시겠어요? 이곳은 우리 미려방이 접수한 곳이니 분탕 치지 말고 알아서 손 떼시라고. 양지에 사는 사람이면 양지에 사는 사람답게 양지바른 곳에서나 놀라고.”

말을 마친 미려는 싱긋 미소 지으며 비파의 줄을 퉁겼다. 한씨 형제는 눈앞의 인영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소스라치며 뒤로 물러났다. 정미려의 말대로 그들에게 일을 맡긴 자는 아니었지만 일을 하며 몇 번을 마주친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우연인 줄 알았지만 그들을 미행하며 시시콜콜한 일들을 방해하곤 했다.

한씨 형제가 탈정고를 미려방에 밀어 넣은 원인이 바로 저 인영이었다. 저 인영이 자신들을 쫓아다닌다는 걸 알고 한씨 형제는 그들에게 고리대 빚이 있는 놈을 족쳐 미려방에 탈정고를 반입하게 했다. 찢어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운 미려방이었지만 보안만큼은 철두철미했기 때문이다.

“시, 싫어!! 난 죽기 싫어!!!!”

그들에게 일을 의뢰한 이가 감시 겸 처리를 위해 보낸 게 분명했다. 정미려는 그들을 딱 죽기 직전까지만 손을 볼 테지만 저 인영은 반드시 그들을 입을 막을 터였다. 저자가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낭중 살인 사건만 봐도 답이 나왔다. 이 근방에서 그렇게 깔끔하고 조용하게 사람을 죽이는 이는 없었다. 추피동의 살수를 모두 끌어모아도 저자의 발끝에도 오지 못할 터였다.

죽는다, 확실히 죽는다. 한이는 절망과 공포에 사로잡힌 채 달려 나갔다. 그러다 미려방의 문지기 하나와 눈이 마주치고 발작적으로 소리를 질러 댔다. 반면 한일은 달랐다. 한일은 한이의 비명을 듣고 오히려 정신이 든 것 같았다.

“정미려! 광산이든 염전이든 다 따라가마! 다 따라갈 테니 우리를 데려가!!”

그는 죽는 것보단 죽기 직전까지 고생하는 게 낫다고 결정했다. 정미려를 향해 있는 힘껏 큰 소리로 외쳤다.

“닥쳐. 너희에게 선택권이 있을 거 같아?”

돌아온 건 싸늘한 목소리뿐이었다. 정미려는 이미 한씨 형제를 안중에 두지 않고 있었다. 그가 눈을 마주치고 있는 건 복면의 인영 단 한 사람뿐. 한일이 입을 다물자 싸늘한 정적이 두 사람 사이에 흩날렸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지요.”

인영과 미려는 서로의 의견을 합치했다. 두 사람의 기세가 날카롭게 맞부딪쳤다.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이 예리하고 팽팽한 기세들이었다. 한일인지 한이인지 모를 이가 잠깐 숨을 내쉬는 순간 인영이 먼저 땅을 박찼다.

인영이 있던 자리에 눈이 시릴 정도로 하얗게 빛나는 것이 박혀 있었다. 길게 이어진 것은 정미려의 검지 끝에 고리를 걸고 있었다. 안고 있던 비파의 현이 사라져 있었다. 정미려는 비파를 인영에게로 걷어찼고, 다섯 발짝은 넘게 물러선 인영은 몸을 날려 일격에 비파를 박살 냈다.

“하앗――!”

미려 하나만으로도 벅찬 노릇인데 포위를 하고 있던 미려방의 문지기들도 인영을 향해 달려들었다. 문지기 형제 중 첫째인 일도와 인영의 손이 엇갈렸다. 사내는 손으로 원을 그리며 일도의 권을 되돌렸고, 일도는 조금 타격을 입었다.

둘째인 이단이 단도를 들고 달려들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인영은 그림자처럼 빠르게 이단의 검을 피하더니 이단의 손을 비틀었고, 이단은 희미한 신음과 함께 물러났다. 삼략과 사생은 주변을 맴돌며 인영의 빈틈을 노리려 했다.

“물러서라!”

문지기들에게 인영을 맡겨 놓았던 미려가 어느새 바닥에 내려와 있었다. 삼략과 사생은 인영이 미려에게 집중한 틈을 타 얼른 한씨 형제를 끌어내 바닥에 짓눌렀다. 그와 동시에 달빛에 윤이 나는 은사들이 인영을 향해 빗발쳤다. 인영이 제비를 돌며 피하는 동안 은사는 쉬지 않고 인영이 서 있던 자리를 공격했다. 은사가 스친 폐가의 벽이 두부처럼 매끄럽게 동강 났다.

“금강사군. 서해 옥가에 후사가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이게 무엇인지 아신다면 목숨을 보장해 드리기 힘들겠군요.”

은사가 날카로운 소리로 울며 미려에게로 돌아갔다. 미려의 손에는 어느새 네 가닥의 은사가 걸려 있었다.

“그렇겠지. 그게 이 나라에 있는 걸 알면 심기가 불편할 이들이 한둘이 아닐 테니까. 그러니 지금이라도 저자들을 내게 넘기게. 나는 옥 장군을 높이 사고 있는 사람일세.”

“그럼 그 옥 장군한테나 가서 부탁해 보시지요. 저는 정미려. 미려방의 일패인 정미려입니다. 내 집인 잠춘동을 지키는 사냥개지요!!”

미려가 외치며 달리자 은사가 미려와 함께 날았다. 은사가 종횡무진 대기를 가를 때마다 은사에 닿은 것들이 사정없이 갈려 나갔다.

“으악, 으아악!!”

짓눌린 한씨 형제가 정신없이 비명을 질렀다. 추피동의 두목이라는 거창한 이름도 두 무인의 대결 앞에서는 바람 앞의 나뭇잎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금강사의 군무는 언제나 아름다운 것이었지. 하나 아직 한 가닥의 자리가 비어 있어, 그 한 가닥의 자리야말로 서해 옥가의 비기고 필살이지!”

인영은 피하지 않고 오히려 은사의 가운데를 향해, 미려를 향해 달려들었다. 사내가 뛸 때마다 땅이 움푹움푹 패였다. 어느새 사내의 손에는 종잇장처럼 얇고 날카로운 암기가 들려 있었는데 사내가 팔을 휘두르자 놀랍게도 빈틈없이 쳐져 있던 은사의 숲에 크게 빈틈이 생기는 게 아니겠는가.

“저건―”

사내가 미려의 은사를 알아본 것처럼 미려 역시 사내의 무기를 알아본 듯했다. 미려는 은사를 거둬들이려 했으나 사내의 암기는 종잇장처럼 미려의 은사를 휘감아 뭉쳐 놓고 있었다. 근력 역시 만만치 않아 은사를 놓치지 않는 게 미려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딱 팔 하나가 겨우 들어갈 수 있는 틈, 그 틈 사이로 사내의 암기가 날카롭게 쏘아졌다.

“읏!”

“도련님!!”

사내가 봐준 건지, 그렇지 않으면 운이 좋았는지. 미려는 은사들을 모두 거둬들임과 동시에 몸을 피했다. 사방을 빼곡하게 채우던 은사들이 순식간에 미려의 손끝으로 모여들었다. 고개를 든 미려의 뺨에 길게 상처가 나 있었다. 예리하게 베인 상처는 미려가 고개를 들고 나서야 겨우 피를 흘렸다.

“살려, 살려 줘, 살려, 아악!!!”

“둘째야!!!”

문지기들이 미려의 상처에 당황한 사이 사내는 재빨리 뒤로 물러나 삼략과 사생을 쳐 내고 한씨 형제를 손에 넣었다. 둘을 동시에 데려갈 수 없었는지 사내는 손에 든 암기를 휘둘러 그대로 한이의 목을 그어 버렸다.

“안 돼!! 안 돼!!!! 둘째야, 둘째야!!!!!! 커억!!”

한이가 짧은 비명과 함께 절명하자 한일이 그 모습을 보며 발광했다. 그러나 사내는 무인도 무엇도 아닌 한일을 너무나도 가볍게 제압했고, 명치를 쳐 기절시킨 뒤 어깨에 짊어지고 훌쩍 지붕 위로 올라섰다.

정말로 가공할 만한 무공이었다. 근력은 물론이요 경공도 상당한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암기뿐만이 아니라 다른 무기에도 상당히 정통해 있을 터였다. 사내는 한일을 손에 넣자마자 바람처럼 달려 순식간에 멀어졌다. 미려는 이를 악물며 은사를 소매 속으로 거둬들였고,

“쫓지 마라. 어차피 쫓아가지도 못해. 저 정도의 고수라면 오히려 역으로 당할 수도 있어.”

그를 쫓아가려는 문지기들을 만류했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일도가 다가와 미려의 상처를 살폈다. 천만다행으로 흉이 남을 정도의 상처는 아닌 듯했다.

“그나저나 깜짝 놀랐습니다. 고산국(鼓山國)의 무인이 월국에 남아 있을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습니다.”

“나도 그래.”

“하필 산곡도(散曲刀)를 쓰는 자였을 줄이야. 크게 다치지 않아 다행입니다, 소가주.”

문지기들 역시 사내의 무공과 무기를 아는 듯했다. 조금 심각한 표정으로 의견을 나눴다. 미려의 무기인 금강사와 정체불명의 무인이 쓴 산곡도는 서로의 친척이면서 천적이나 마찬가지인 무기인지라 더욱 심각했다.

“됐어. 계획은 틀어졌지만 목적은 달성한 거나 마찬가지니까. 이젠 다시는 우리 형한테 접근하지 못하겠지.”

문지기 형제가 수군거리던 걸 보던 미려는 달이 구름에 가리자 팔을 뻗어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터벅터벅 걸어가서 박살 난 비파의 머리와 몸 부분을 주워 들었다. 가차 없이 집어 던졌지만 한때는 미려가 아끼던 악기였다. 미려는 한숨을 쉬며 비슷한 물건을 수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저건 어쩔까요?”

주변을 정리하던 삼략이 가리킨 건 아직 온기가 채 가시지 않은 한이의 시체였다. 정미려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덤덤히 뒤로 돌아섰다.

“가까운 개천에 갖다 버려. 누가 보고 신고하겠지.”

미려의 뺨에서 떨어진 피가 흰옷 위에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일도와 사생이 미려를 호위했고 이단과 삼략이 한이의 시체를 처리했다. 이단과 삼략은 한이의 시체를 죽은 낭중의 집 근처에 버려두었다. 새도 잠이든 캄캄한 새벽에 한이의 시체가 물건처럼 널브러졌다.

한이의 시체는 검시를 거쳐 낭중 살인 사건과 같은 범인, 혹은 같은 수법의 범행으로 분류되었다.

* * *

진해가 눈을 뜬 건 그로부터 꼬박 하루가 지난 후였다. 진해는 동십사의 집에서 눈을 떴다. 눈을 뜬 진해를 간호한 건 진해와 제법 낯이 익은 영 집사였다. 영 집사는 의원과 이야기하다 깨어난 진해를 발견하고 반색을 하며 다가왔다.

“어디, 불편하신 곳은 없으십니까?”

“응? 딱히 없는 것 같은데. 아니, 잠깐. 내가 왜 여기 있지? 해산 도련님은? 헉, 설마 모든 게 다 꿈이었던 건가!”

“진정하십시오, 오 공자님. 꿈이 아니라 모두 현실입니다. 듣자 하니 오 공자님께서 무척 험한 일을 당하셨다면서요.”

“딱히 그리 험한 일은 당하진 않았는데.”

“음, 역시 의원의 말대로 기억이 희미하신 모양이군요. 오 공자님, 놀라지 말고 잘 들으십시오. 오 공자님은 무려 납치를 당하셨습니다. 정신을 잃으셨다가 지금 막 깨어나신 참이에요.”

“아~”

험한 일이라기에 뭔가 싶었더니 한씨 형제들에게 납치당한 이야기였다. 잠춘동이나 추피동에서는 빈번히 일어나는 일이라(물론 경사는 아니다) 진해는 영 집사만큼 이 일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있었다. 무엇보다 납치범이었던 한씨 형제가 진해를 해칠 의사가 전혀 없었잖은가.

“휴,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목에는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지, 의식은 돌아오지 않지. 결국 의원을 불러 각성제까지 써야 했습니다.”

“앗, 의원은 비싼데.”

“집 앞에서 강도를 당한 줄 알고 신고하려 했는데 때마침 나리께서 돌아오셨더군요. 오 공자님을 찾으려고 관군을 동원하려던 참에 공자께서 집에 와 있다는 전갈을 받고 급히 오셨답니다.”

“집? 어? 내가 이 집 앞에 와 있었어요?”

진해의 마지막 기억은 추피동에서 본 한씨 형제의 절박한 얼굴이었다. 동십사의 집에 올 생각이라고는 추호도 하지 않고 있었다. 도련님을 추피동에 남겨 두고 어떻게 혼자 돌아오겠는가. 진해가 혼란스러운 표정을 하자 영 집사는 진해를 더 자극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인자한 미소를 입에 걸며 진해를 억지로 자리에 눕혔다. 자리에 눕히고는 보드라운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 주었다.

“이 집에서는 안심하셔도 됩니다. 저희 나리 휘하의 병졸들은 도성 내에서 알아주는 정예들입니다. 그러니 이제 안심하시고 편히 계십시오. 제가 주방에 가 요기할 것을 가져올 테니 그때까지 가만히 누워 계셔야 합니다?”

“음……, 네!”

토닥토닥 가슴 위를 두드려 주는 영 집사의 손길에 진해는 푹 빠져들었다. 영 집사는 진해보다 열 살 정도가 많은 음인이었고 타고난 성품이 다감한 이라 진해로 하여 어릴 적에 헤어진 우부를 떠올리게 했다. 진해가 어릴 적에 겪은 여러 가지 사건과 오랜 세월 탓으로 우부의 얼굴은 희미해진 지 오래였다. 그러나 진해는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음인들을 바라보며 때때로 우부의 얼굴을 떠올리려 노력하였다.

아마 진해가 작고 귀여웠던 시절에 진해의 우부 역시 진해를 이렇게 포근하게 토닥여 주었을 것이다. 진해가 철없이 군다고 혼을 내거나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사정이 생겨서, 그래서 돌아오지 않고 있을 뿐일 것이다 . 몸이 불편해서 그런지 자꾸 우부 생각이 나려 했다. 진해는 영 집사가 가져오는 음식이 제발 잠춘동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희한한 음식이길 바랐다. 그래야 서글픈 마음이 조금이라도 가실 것 같으니까.

“깨어났느냐?”

“앗, 해산 도련님!”

상념에 깊이 잠긴 탓인지 진해는 해산이 들어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해산은 손짓해 진해가 일어나는 걸 만류했다. 진해 역시 포근한 손길의 여운에서 벗어나기 싫어 그대로 등을 대고 누워 있었다. 해산은 진해의 가까이 의자를 끌어와 앉았고 진해를 바라보다 손을 뻗어 대야에 잠겨 있던 수건을 꺼내 들었다.

“미안하구나. 내가 괜히 너 혼자 간다는 걸 고집을 부려 횡액을 겪게 했어.”

해산을 물수건으로 진해의 이마를 훔쳐 주었다. 진해 자신은 몰랐지만 하는 양을 보아하니 지금 진해의 꼴이 말이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흙먼지를 다 뒤집어쓴 채 뛰고 구르고 묶이고 했으니 제대로 된 사람 꼴일 리가 없다.

“아니요, 도련님이 아니셨으면 이번에야말로 도장을 찍을 뻔했지요. 휴, 저 혼자 탈정고를 먹었을 거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합니다. 삼랑이 그놈이 벌써 몇 년을 벼르고 있던 터라 도련님이 안 계셨더라면 제 거근을 묶어 놓고 신고서 에 지장을 찍으라 을러댔을지도 몰라요.”

“거근…….”

“삼랑이가 남편이 되면 정말 곤란해져요. 제 동생이 가뜩이나 질투가 심해서 다른 사람이 제 옆에 오는 꼴을 못 보는데 삼랑이랑은 거의 원수나 다름없거든요. 아유, 삼랑이가 어릴 때처럼 보얗고 여리게만 컸으면 얼마나 좋아! 그럼 나도 거절 안 하고 ‘감사합니다’ 하면서 당장 살림을 차리면 되는데. 대체 어쩌다 저런 양아치로 자라났는지.”

영 집사 앞에서는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는데 해산 도련님 앞에서는 입을 잘도 나불거렸다. 해산 도련님은 그런 진해를 그저 묵묵히 바라볼 뿐이었다.

“저래 봬도 삼랑이가 어렸을 적엔 참 귀여웠답니다. 희멀건 게 성격은 어찌나 톡 쏘는지 아주 앙칼진 맛이 있었다니까요. 곱상하기는 제 동생이 더 곱상한데 삼랑이는 보면 볼수록 빠져드는 얼굴이랄까. 눈매가 얄팍한 게 웃을 때 보면 참!”

“…….”

그러나 진해가 말을 이으면 이을수록 도련님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돌아온 영 집사가 진해에게 죽 한 사발을 갖다 줬는데 진해는 그것을 후루룩 들이켜곤 신이 나 자신의 말을 이어 나갔다. 영 집사는 진해가 뭔 이야기를 신나게 하고 있나 듣다가 질겁한 표정을 지었다.

영 집사는 진해가 해산을 만날 때마다 그를 데려다주었고, 결과적으로 동십사보다 먼저 진해와 해산의 관계를 알게 된 터였다. 그런데 지금 진해가 해산의 앞에서 다른 음인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가만히 들어 보니 진해와 무려 (일방적인) 혼담이 있었던 음인의 이야기인 것 같았다!

화들짝 놀라 해산을 바라보니 해산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안정을 가장하고 있지만 해산 본인도 모르게 입가가 살짝 경련하는 중이었다. 영 집사는 이제 진해를 다른 의미로 걱정했다. 저 높으신 분의 은혜를 입고 다른 이를 입에 담다니 얼마나 간이 부었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오, 오 공자님!”

“응? 왜요?”

“그, 그래서 그 뭣이냐. 그 납치범들에게서 뭔가 들은 이야기는 없습니까? 그들이 왜 공자님을 나리 댁에 버려두었는지 라든가.”

“아, 맞아! 형님들이 나한테 뭔 이야기를 했는데?”

“혹여 배후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느냐?”

진해가 한씨 형제 이야기를 하자 해산이 반색했다. 안타깝게도 삼랑은 그의 형들이 맡은 일의 배후까지는 모르는 듯했다. 왜 그런지는 당사자인 삼랑도 모르는 듯했다. 이 일이 생각보다 위험하거나, 그도 아니면 일이 틀어졌을 경우를 대비한 것이라고만 추측했다.

“으으, 이상하네. 왜 기억이 안 나지? 분명히 일을 맡긴 사람까지는 들은 것 같은데?”

그리고 한씨 형제들과 이야기를 나눈 진해 역시 별 소득이 없는 듯했다. 해산은 진해를 재촉하려다가 진해의 목에 시퍼렇게 든 멍을 바라보았다. 수면침을 맞은 흔적이라고 했다. 의원은 진해가 잠이 든 시간이나 멍의 크기 등을 봐서 독한 약을 극소량으로 빠르게 투여한 것 같다고 했다. 건강에 큰 이상은 없지만 기억에 혼란이 올 수도 있다고 했다. 심하면 약간의 상실까지 있을 수도 있다고.

“그럼 누가 네게 수면침을 놓았는지는 기억하느냐?”

“수면침이요? 아아, 내가 수면침을 맞아서 정신을 잃은 거였구나?”

천진하게 말하는 모습이 어쩐지 불쌍했다. 저를 도와서 그 험한 곳에서 그 험한 놈에게 협박을 받으며 주사위를 던지고 납치를 당한 데다가 수면침까지 맞고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해산은 진해의 이마에 얹은 물수건을 뒤집어 주며 진해에게 책임을 져야 할 필요를 느꼈다.

“됐다. 억지로 기억하지 말거라. 그러다 몸이 더 상하면 어쩌려고.”

“전 멀쩡한데요? 딱히 잃어버린 것도 없는 것 같고. 으으,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배후에 관해서는 기억이 나지 않아요. 배후라는 단어를 들은 후부터 앞이 깜깜한 것이.”

“아마 네가 배후를 듣기 전에 손을 쓴 것이겠지. 한씨 형제들이 널 데리고 갈 때 뒤를 살피지 않은 모양이로구나. 필시 미행을 당해 공격받았을 것이다. 너를 죽이지 않고 동십사의 집에 옮겨 둔 것이 천만다행이야.”

“헉, 설마 저 죽을 뻔했던 거!?”

진해가 깜짝 놀라 이불을 움켜쥐자 해산은 답하는 대신 진해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해산의 눈동자에 그래, 라고 두 글자가 쓰여 있는 듯했다. 진해는 오소소 소름이 돋는 듯해 이불을 턱 끝까지 올려 덮었다. 착각이 아니라 정말로 오한이 들었다.

“도련님, 밖에 사람이 와 있습니다.”

해산이 말없이 진해의 머리칼을 쓰다듬길 몇 번, 진해의 눈동자는 나른함에 잠겨 반쯤 감겨 있었다. 꼭 앓는 강아지를 보는 것 같았다. 좀 더 곁에 있어 주고 싶었지만 이젠 가 봐야 할 시간이었다. 한삼랑과 그 일당을 괘씸죄를 비롯한 불법 도박 및 여러 가지 죄목으로 잡아 둔 터였다. 한씨 형제가 감쪽같이 사라졌으므로 한삼랑을 취조해 조금이라도 단서를 얻어야 했다. 그의 신변을 보호하기도 해야 했고.

“진해.”

“응? 도련님, 제 이름을 아시네요?”

“너도 내 이름을 알잖느냐.”

“것도 그래요. 하지만 기억해 주실 줄은 몰랐어요.”

“고를 생각보다 무정한 이로 보는구나.”

“솔직히 겉만 보면 그리 보이세요.”

“……맹랑한 녀석.”

이마를 아프지 않게 두드리자 진해가 킥킥 웃음 지었다. 이런 놈이 자신보다 연상이라니 참으로 우습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잠시 다녀올 테니 푹 자고 있거라. 몸이 낫고 일이 잘 해결되면 네게 큰 상을 내리도록 할 테니.”

해산은 허리를 굽히다 뒤의 영 집사를 의식하고 잠깐 몸을 경직했다. 영 집사는 이미 알고 있는 듯한 눈치였지만 그래도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쪽.

그런데 진해가 몸을 일으켜 해산의 입에 먼저 입을 맞췄다. 진해와 나눴던 입맞춤 중 가장 산뜻하고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상은 이걸로 됐습니다. 제가 뭘 한 게 있다구요.”

진해는 나른하게 미소 지으면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각성제 기운이 빠졌는지 그도 아니면 그새 피곤해진 건지 곧 고른 숨을 내쉬며 잠이 들었다.

<『환태자사건』2권에 계속>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