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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36화 (136/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36화

본래 신선은 이례적인 상황이 아니면 하계에 올 수 없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없다. 여기서 ‘이례적인 상황’이란 사월린에 의한 멸망과 같은 일이다. 그래서 상선은 ‘여율령’이라는 인간의 육신을 입었다.

“내력도 선술도 전혀 쓸 수 없다. 말 그대로 평범한 인간이었지. 내가 신수들을 주시하고 관장하듯 내 상격인 신들의 눈은 내게 닿아 있으니.”

여율령은 쓸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었다 말하며 검지로 제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상선으로서 아는 것들. 사실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것이긴 했다.

“사실 너와 흑월을 되살리며 깨달은 바가 있었다. ‘신수’까지는 하계에 머무를 수 있는데, 굳이 연약한 인간을 택할 필요는 없지. 그런 의미에서 붕새의 알만큼이나 적합한 소재는 달리 없었다.”

여율령이 작은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내 본신의 힘도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고, 하계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도 길어질 것이며, 내 중한 아이들을 직접 지켜줄 수 있겠지.”

“그러다 신들이 눈치채면요?”

“못 챌 만큼 살짝살짝 쓸 것이니 걱정할 것 없다.”

“걱정이 되니까 하는 말 아닙니까. 그리고 지키긴 누가 누굴 지킨다는 겁니까. 쓸데없는 생각 말고 본인 몸이나 잘 챙기십시오. 또 어이없이 납치나 당해 쓰러지지 마시고.”

“독화살 맞은 놈에게 듣고 싶은 말은 아니구나.”

나와 여율령은 마주 웃었다. 이미 지난 일이고, 어쨌든 둘 다 산 채로 마주했기에 할 수 있는 말들이었다.

여율령이 길게 기지개를 켰다. 짧은 팔다리를 볼 때마다 기분이 묘했다. 어린 육신에 내가 알던 그의 모습은 전혀 없었다. 먼지 한 톨, 얼룩 한 점 없는 정복을 입은 채 섭선을 살랑이며 촌철살인을 날리던 모습은 이제 다시 볼 수 없다. 그리 생각하면 약간 우울해지다가도-

“꼬까옷 입고 폐하를 뵐 생각에 신이 나는구나.”

저런 말을 할 때마다 닮은 구석이라고는 없는 육신에서 틀림없는 여율령이 보여 괜찮아졌다.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랬다고. 무륜을 놀릴 생각에 신이 난 게 아닙니까.”

“알면 빨리 가자.”

“…….”

“어허. 어디서 금쪽같은 아비를 그리 보느냐.”

“언제는 아들이라면서요.”

“아들인 척하는 아버지지.”

그건 무슨 패륜이냐는 눈으로 보자 여율령이 킬킬 웃었다.

“왜. 좋지 않으냐. 후계에 대한 고민이 없던 것은 아닐 터인데.”

여율령의 눈이 진지해졌다. 나 또한 같은 것을 생각했기에 할 말이 없었다.

“이제는 고자가 되어버린 황제가 과거에 뿌려둔 씨앗. 명분으로 그만이지 않느냐. 꼬장꼬장한 노인네들도 할 말이 없겠지. 본인들 걸 떼어 줄 것이냐, 어쩔 것이냐.”

“못 본 새 말씨가 더 천박해지신 것 같습니다.”

“네가 그렇게 느낀다면 그런 것이겠지.”

대화는 거기서 끊겼다. 짧은 침묵 속에서 여율령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돌연 깊어진 눈을 했다.

“다시 만나면 대답을 듣기로 했었지.”

그 눈은 여율령이 지금 느끼는 것의 반의반도 담아내지 못했다.

“나를 원망하느냐?”

담담한 것처럼 보이나 실은 그런 척을 할 뿐이다. 여율령은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나는 픽 하고 웃었다.

“그럼 판을 이렇게 벌여 놓고 아니 원망한다 하실 줄 아셨습니까.”

“…….”

“예. 원망합니다. 아주 밉습니다.”

작은 눈이 요동쳤다. 그 여율령이 이토록 동요하는 모습이라니. 무륜에게 보여주고 싶을 정도였다. 내 입가의 웃음이 짙어졌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감사하고 있습니다. 당신께서 제게 주신 모든 것이 호의였고 애정이었음을 압니다. 그래서 당신을 원망하고 좋아합니다.”

여율령은 이제 혼란스러운 표정이 됐다. 세상만사를 손바닥 위에 둔 사람이 이런 쪽으로는 둔했다.

“세간에선 이리 복잡한 감정을 교류하는 자들을 일컬어 ‘가족’이라 하더군요.”

원망을 그리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는 무게에 따라 달라지는 감정이었다. 내 당과를 훔쳐 먹은 영춘을 내가 잠깐 ‘원망’할 수 있는 것처럼. 그리고 내가 당신에게 갖는 원망은 아주 가벼운 원망이라, 나는 그리 말했다.

“그래.”

여율령은 바로 이해했다.

“그렇구나.”

작은 주먹이 꼭 말아 쥐어졌다. 우리 사이에 다른 말은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

어느새 황궁이 점점 가까워졌다. 그런데 신분증도 필요 없이 여율령의 문양만으로 통과해야 할 정문에서 마차가 멈춰 섰다. 곧 마부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고했다.

“도, 도련님. 밀영군과 금군들이 마차를 둘러쌌…….”

우당탕 소리가 들리곤 금세 잠잠해졌다. 마부는 침묵했다. 대신 누군가 손등으로 마차의 창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위사장.”

몽휼이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은 아니다. 예전엔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 무륜은 투기가 심한 편이었다. 소유욕도 강하다.

황궁만큼은 아니지만 금성의 곳곳에도 귀와 눈이 있다. 내 양자라 주장하는 아이가 저택의 대문을 넘었고, 다시 나오지 않았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오히려 무륜이 모르는 게 이상했다.

“일단 내리십시오.”

“그러지.”

나는 차분히 문을 열었다. 여율령이 자연스럽게 팔을 벌렸다. 안고 내리라는 뜻이다. 나오려는 한숨을 삼키며 순순히 그를 한 팔로 안아 들었다.

밖으로 나오자 과연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금군과 밀영군이 마차를 중심으로 원진을 펼쳤다. 수를 보니 전원 소집이라도 한 것 같았다. 설명을 요구하듯 몽휼을 봤다. 몽휼은 유례없이 딱딱한 낯으로 내게 물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곧 알게 될 터였다.

“왔느냐.”

금군이 절도 있게 갈라지며 그 사이로 무륜이 등장했다. 드물게 정복을 차려 입었지만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일단 겉보기엔 그랬다.

하지만 그가 점점 가까워지며 혹시나는 역시나임을 알았다. 입술은 웃고 있는데 눈에선 검붉은 폭풍이 휘몰아쳤다.

“휴가는 잘 보냈느냐.”

“예. 폐하의 은혜로 부족함 없이 쉬었나이다.”

“그건 다행이군.”

인사치레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무륜이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네 아들이라 주장하는 어린애가 저택의 대문을 넘었다고 들었다.”

“다 맞는데 하나가 틀립니다. 이 아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무륜의 낯이 단숨에 풀렸다.

“그렇구나. 내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밀영군과 금군을 전부 동원하신 분이 말은 잘하십니다. 그런 의미를 담아 눈을 가늘게 뜨자 그가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근본적인 물음을 던졌다.

“그럼 그 아인 대체 누구 아들이냐.”

내가 기다렸던 질문이었다.

“이 아이는 폐하의 아들입니다.”

장내에 소리 없는 경악이 퍼졌다. 황금빛 투구 아래 금군의 표정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복면에 가려진 밀영군도 다르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가장 당황한 것은 갑자기 애 아빠가 된 무륜이었다.

“그럴 리 없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짐작 가는 게 없으십니까.”

무륜에게 바짝 붙어 서며 품에 안고 있던 여율령을 내밀었다. 내내 침묵하던 여율령이 히죽하고 웃었다. 무륜의 낯이 미묘하게 변했다. 나는 그의 심정을 정확히 이해했다. 생판 처음 보는 아이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비열한 웃음을 짓는 걸 보면, 누구라도 저런 반응일 것이다.

여율령이 무륜에게만 들릴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폐하.”

무륜의 몸이 덜걱했다. 불길하고 싫은 기분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내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팔에 송충이라도 앉은 사람처럼 어깨를 떤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여율령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아이의 크기에 맞춘 그것은 작고, 하얗고, 익숙한 모양새였으며, 잉어를 닮은 물고기까지 음각되어 있었다.

촤악. 섭선을 펼친 여율령이 눈을 휘었다.

“신수와 영물이 생동하는 시대 아닙니까. 무슨 일이 일어난들 이상할 게 있습니까.”

“……상서령?”

“오. 아직도 그리 불러주시는 겝니까. 이 노신, 감읍하기 한량없나이다.”

자개함이 열리며 그를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나는 무륜의 그런 표정은 처음 봤다. 여율령이 만족스럽다는 듯 낄낄거렸다.

“이리 격하게 반겨주시니 그 또한 감읍하군요.”

어린애답지 않게 간악한 웃음이었다.

무륜은 혼란스러워 보였으나 금방 상황을 받아들였다. 갑자기 나타난 아이가 죽은 상서령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지금 상황이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는 나와 여율령의 의도가 무엇인지까지 알아차렸다. 그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이건, 이걸 이렇게, 하.”

복잡한 표정이 된 무륜에게 여율령이 뭘 고민하냐는 듯 말했다.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세상일은 보기보다 단순한 법입니다. 복잡하게 꼬인 실도 풀어보면 한 가닥인 것처럼 말이죠.”

뒤끝 없고, 배신할 일도 없으며, 금국의 부흥을 보증할 수표나 다름없는 후계자. 조금쯤 짜증 나고 조금쯤 얄미울 것이나 ‘완벽한 후계자’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 자세히 보니 내 아들이 맞다.”

무륜이 모두에게 들릴 목소리로 공언했다.

* * *

건룡제 8년. 겨울.

무륜의 사생아는 궁에 들자마자 황태자의 지위를 얻게 됐다. 고관대작들이 펄쩍 뛰었으나 그들에겐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황제는 이미 후계를 생산할 수 없는 몸이고, 그런 몸이 되기 전에 얻었다는 아들을 반대했다간 꿍꿍이속이 있는 거 아니냐는 말을 듣기 딱 좋다. 비약하면 반역죄를 뒤집어쓰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결국 그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반면, 이미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가문들은 흔쾌히 새 황태자를 인정했다. 이제 막 가주가 된 이들은 아직 젊었고, 그들은 황태자의 나이에 주목했다. 즉, 빛 좋은 개살구일 이번 대 황제의 반려보단 차기 황제의 옆자리를 노리겠다는 뜻이었다.

황제는 아들에게 전대 상서령의 이름을 붙였다. 금국에 헌신한 그를 기린다곤 했지만, 상서령의 아들인 여이화의 영향이 있었음은 모두가 알았다. 그리고, 황태자의 알맹이가 진짜 여율령이라는 건 알아야 할 사람들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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