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35화
위난제가 끝나고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됐다.
태백과 태화는 내내 손님 자격으로 여율령의 저택에 머물렀다. 두 사람에 대한 건 아직 기밀이었으나 그도 머지않았다. 철저한 계산으로 만들어진 소문은 사람의 입을 따라 금국 전역으로 퍼지는 중이었다.
그러다 이쯤이면 되었다 싶었을 때, 태백과 태화에 대한 것을 전부 가려줄 만한 거대한 소문이 수도를 강타했다.
“위씨 가문의 가주가 바뀐다고?”
“예.”
영춘이 밤을 까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때까지도 심드렁했다. 뜨끈한 아랫목에 누워 몸을 지지고 있으려니 눈이 가물가물한 것이, 예가 바로 천상이구나 싶었다.
“위혁강이 차기 가주로 위수혁을 지목했습니다.”
“음. 그래.”
크게 놀라지 않았다. 연 대륙 대부분의 국가는 장자 승계가 원칙이었으나, 그게 법률로 정해진 건 아니었다. 게다가 그런 일이 있었으니 보수적인 위혁강의 결정은 그럴듯했다.
“그리고 금군대장을 호적에서 파버리셨죠.”
아랫목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뭐?!”
“금군대장은 앞으로 위씨 가문 사람이 아니며, 초대가 없으면 그 집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완전 남이요, 공식적인 객이 됐다는 뜻이었다. 이건 강수 중에서도 초강수였다. 아니, 대체 왜. 나는 표정으로 물었다. 영춘은 다 깐 밤을 내 입에 넣어주며 답했다.
“아무래도 서감(書監)과 사귀는 걸 들킨 것 같습니다.”
서감은 몽휼의 관직이었다. 정 8품 무록관이라, 급으로 따지자면 말단의 말단이겠으나 황궁에서 그를 무시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있다면 지금쯤 배신감에 이를 득득 갈고 있을 위혁강 정도일까.
“위사장을 좋아한다고 선언한 아들 새끼가 근래 잠잠하길래 드디어 마음을 고쳐먹고 새사람이 됐나 했더니. 어이쿠, 이게 뭐람. 아예 다른 사내새끼와 사귀고 있었네?”
“…….”
“당연히 이 새끼는 완전히 글렀다고 여겼겠죠.”
영춘이 위혁강의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말했다. 순식간에 나온 새끼만 셋이었다.
“뭐, 우리로선 감사할 일이긴 한데.”
여기서 우리는 여씨 가문 삼 형제를 말함이다. 태백과 태화는 드디어 엊그제 관아에서 신분 패를 받고 정식으로 금국의 백성이 됐다.
듣기로 보통 사람이 신분 패를 받으려면 과정도 까다롭고 심사도 깐깐하다는데, 둘은 가서 지장 찍고 패를 받아 온 것이 다였다. 외려 사색이 된 관리들이 버선발로 뛰쳐나와 굽실거렸다고.
‘하긴 둘 다 보통 사람도 아니고, 보통 뒷배를 가진 것도 아니니까.’
두 사람의 뒤에는 백호이자 위사장이자 여씨 가문의 가주인 내가 있었다. 그리고 내 뒤에는 황제 폐하가 떡하니 뒷짐을 지고 서 계신다.
“역시 권력이 좋긴 좋습니다.”
과거, 권력의 단맛을 본 적이 있는 태화가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그는 자신이 앞으로 무슨 일을 하게 되고, 뭘 할 수 있을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단언컨대 그리 오래지 않아 제2의 상서령으로 불리게 될 터였다.
반면 태백은 그런 태화의 모습에 안절부절못했다. 벌집을 노리는 새끼 오소리와 그런 오소리가 걱정되어 죽는 불곰 같았다. 어쨌든 둘 다(?) 귀엽다. 나는 흐뭇하게 웃었다.
“이번 봄은 그 어떤 봄보다 활기차겠어.”
“……파란을 활기차다고 표현하시는 건 아마 도련님뿐일 겁니다.”
제 입에도 밤을 넣은 영춘이 투덜거렸다. 나는 또다시 웃고 말았다.
그렇게 평화로운 시간이 조금 지나니 밖이 소란스러웠다. 웅성거림이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 됐을 때, 문 앞에서 우당탕 소리가 났다. 누군가 급히 오다 넘어진 소리였고, 그게 한두 명이 아니었다.
드르륵! 여닫이문이 거칠게 열렸다. 문가에는 숨을 헐떡이는 동복이 있었다.
“아.”
“아?”
“아들!”
영춘과 내 표정이 동시에 썩어 들어갔다. 뭔 개소리야. 네 아들을 왜 여기서 찾아. 동복이 답답하다는 듯 재차 소리쳤다.
“도련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꼬마가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예?”
예상한 반응이 아니었던지 동복은 멍청하게 굳었다.
“상서령께서 살아 계셨을 땐 종종 있던 일이지 않나. 그 대상이 내가 됐다 해서 이상할 것은 없지.”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여율령이 나를 양자로 들인 후, 얼마간 자신이 여율령의 자식이라 주장하는 자들이 대문을 두드렸다. 그가 자식을 만들 수 없는 몸이라고 알려졌음에도, 제 위상을 깎아먹지 않기 위해 혼외자를 양자인 척 들였다 믿는 자들이었다.
나는 그때와 같은 경우가 아니겠느냐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으나 동복이 고개를 저었다.
“일가식솔의 과거와 사소한 버릇을 다 알고 있었는데, 그는 도련님이 말해준 것이라 했습니다. 심지어 암묵단분들의 과거까지 다 알고 있었습니다.”
동복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같이 온 이들의 시선이 영춘을 향했다.
“뭐, 뭐야. 나 왜.”
불길함을 감지한 영춘이 주춤했다. 하인들을 상대로 움츠러든 암묵단원이란 꽤 드문 그림이었다.
“영춘 님. 창고에 곶감 죄다 훔쳐 먹은 거, 영춘 님이었어요?”
“만들기만 하면 동이 나던 식혜랑 도련님 드리려고 만든 당과가 가끔 감쪽같이 사라졌었는데, 그것도 영춘 님이 한 거 맞죠?”
“육포를 말려두면 반은 없어져서 고양이가 물어 간 줄 알았더니.”
“…….”
영춘은 튀었다. 암묵단 최고의 은폐술을 이런 데 쓰다니. 재능 낭비가 따로 없었다. 하인들은 난리가 났다.
“영춘 님!”
“님은 무슨! 이 새끼 어디로 갔어?!”
대로한 하인들로 가득 찬 방을 슬쩍 빠져나와 잰걸음으로 보랑을 걸었다. 영춘이 뭘 훔쳐 먹었다는 건 나도 처음 알았다. 이런 것까지 안다면 찾아왔다는 그 아이를 만나는 봐야 했다.
지금까지의 정황으론 인간이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변신한 도깨비일까? 아, 쥐나 참새 쪽 영물일 수도 있겠다.
찾아오는 모든 이가 인간이었던 여율령은 대문조차 열어주지 않았다. 애가 타 담을 넘으려는 자들은 암묵단에게 뒷덜미가 잡혀 진창에 처박혔다. 어린애라고 예외는 없었다.
소개할 땐 먼 친척이라 했지만, 어떻게 봐도 아이 아비인 사내가 암묵단을 향해 삿대질을 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발악하는 그에게 암묵단은 ‘죽이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알라’ 했다. 그렇게 말하는 눈이 무감각했다. 그럼 사내는 얼음처럼 굳었다가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질했다.
몰래 훔쳐보던 나는 조용히 몸을 돌려 저택 안으로 돌아왔었다. 그들이 평소 어떤 모습으로 나를 대하든, 방금 본 것이 그들의 본모습임을 그때 절감했다. 암묵단은 어떤 사감도 없이 단순한 ‘이유’와 ‘명령’에 의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자들이었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생글거리는 아이. 허둥거리는 암묵단. 내가 본 건 그 두 마디로 설명할 수 있었다. 먼 옛날 쫓아냈던 사내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던 암묵단들이 이제 살았다는 듯 나를 불렀다.
“도련님!”
주인 기다리는 강아지가 따로 없었다. 나는 시커먼 인영들 틈바구니에 낀, 하얗고 작은 아이를 봤다. 약간 붉은 기가 도는 검은 머리칼에 눈동자도 불그스름했다. 어떻게 봐도 ‘인간 아이’는 아니라는 감이 왔다.
“도깨비냐, 영물이냐.”
“나 말이냐?”
아이가 대뜸 반말을 했다. 나는 움칠했다. 반말 때문은 아니었다. 저 한마디에서 느껴지는 묘한 기시감 때문이었다. 어조도, 억양도, 이상하리만치 귀에 익었다.
“굳이 말하자면 영물이겠구나.”
아이가 낄낄 웃었다. 귀여운 눈매가 휘어지며 아무것도 들리지 않은 손이 턱 주변을 배회했다. 곧 손에 아무것도 없음을 깨달은 아이가 ‘어이쿠’ 싶은 표정으로 손을 내렸다.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것만으로 나는 그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많이 늦으셨습니다.”
의심도 없이 그리 말하자 이번엔 아이가 놀랍다는 듯 한쪽 눈썹을 위로 올렸다 이내 껄껄 웃었다.
“졌다, 졌어. 너도 세월을 탄 게로구나.”
“세월이 아니라 당신의 가르침을 탄 게지요.”
“그러하냐. 누가 키웠는지 아주 잘 키웠다.”
시원하게 웃는 아이를 두고 좌중을 둘러봤다. 암묵단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대화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개중엔 드디어 무언가를 알아차린 자들도 적지 않았다. 그럴 것이다. 그들만큼 지금 같은 대화를 자주 들은 자들은 또 없었다.
“암묵단에겐 사실대로 말해도 됐을 텐데요.”
“나는 장난도 못 치느냐?”
“장난을 칠 사안이 있고 아닌 사안이 있는 겁니다.”
암묵단 중 하나가 홀린 듯 입을 열었다.
“……상서령?”
그 부름에 아이의 거죽을 입고 나타난 여율령이 고개를 돌렸다. 히죽 웃은 아이가 손을 들었다.
“오냐. 나 왔다.”
오직 본인만 태연한 귀가였다.
* * *
상서령이 입은 것은 이름마저 잊힌 새의 유체였다. 위난제의 기원이 된 그 새가 맞다. 태어나지 못한 채 품어주던 어미를 잃어, 자아도 혼도 없었던 빈껍데기의 알. 하지만 알은 사람들의 기원과 태양빛을 품고 긴 세월 살아 있었다. 그저 살아만 있었다.
“사당에서 너와 그리 헤어지고 나서 곧바로 달 뒤편에 있던 알에 들어갔다.”
“알이 달 뒤편에 있었습니까.”
“모든 붕새는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거기에 알을 낳는다. 태양빛이 항시 닿는 곳이고, 사람들이 두 손 모아 ‘기원’하는 대상이기도 하니까.”
역시 그는 잊힌 새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아이를, 정확히는 아이의 형상을 한 여율령을 봤다.
“왜.”
“아니, 새삼…… 정말 아버지가 맞구나 해서요.”
“싱겁기는.”
아이 손 크기에 맞춘 섭선을 살랑거리며 그가 히죽 웃었다. 그 웃음이 여율령 그 자체였다.
“그러고 보니 이제부턴 네가 내 아버지 역할을 해야 할 것 아니냐. 자, 아들이라고 불러보거라.”
“…….”
“뭘 그리 보느냐. 나는 네 아들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다.”
한숨을 쉬며 마차의 창문을 열었다. 우린 지금 네 마리 말이 이끄는 마차를 타고 황궁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혼자였으면 걸어가거나 말을 탔겠지만, 남의 눈에 띄어서 좋을 것이 없는 동행인이 하나 있는 탓이다.
“하고픈 일이라는 게 이거였습니까?”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쉽더구나.”
선계의 주인인 그가 굳이 격을 낮춰가며 하계에 머무르는 일을 말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