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34화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듣기만 했다. 듣는 내내 사월린으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했다. 담담하게 말을 늘어놓으며 어느 정도 심경의 정리를 했을까. 몰아치던 폭풍은 어느새 잠잠해졌다.
대신 사월린은 세상에서 가장 경이로운 것을 보듯, 나를 보고 있었다. 내 근간을 쥐고 흔드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어쩐지 속이 울렁거렸다.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나를 그리 보지 마라. 나는 네 정인이 아니다.
“네 혹, 나를 보고 무언가 떠오르는 것이 없느냐.”
“모르겠습니다.”
목젖까지 올라온 말을 삼키며 나는 태연을 가장했다.
“무언가 떠올라야 합니까.”
사월린은 이미 여율령에게서 모든 것을 들었다. 저렇게 묻는 것이 소용없다는 것도 이미 알았다. 그럼에도 그는 일말의 미련을 지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걸 알기에 나는 그저 모르쇠로 일관했다. 사월린은 말이 없었다. 서늘한 침묵이 탁자 위에 앉았다.
“뭘 그리 빤히 보십니까.”
그 침묵이 너무 무거워 쏘아붙이듯 물었다. 날 선 말에도 사월린은 담담했다.
“잊지 않으려고.”
“…….”
“이번엔, 잊지 않으려고.”
괜히 물었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었다. 부담스럽다 못해 체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왜 시선을 피하지?”
말이 가슴팍을 찌르고 들어왔다. 고개는 들고 있지만 내 시선은 사월린을 미묘하게 비켜났다.
“나를 봐라.”
더는 피할 수가 없어 그를 직시했다. 울렁거림이 심해졌다. 옆에서 누군가 어깨라도 쥐면 그대로 토할지도 몰랐다.
“다시 한번 묻겠다. 정말 아무것도 떠오르는 것이 없나?”
없었다. 하지만 없다는 것이 죄책감으로 느껴질 만큼, 나를 향한 사월린의 감정은 강렬했다. 거기에 붙들려 이도 저도 못 하고 매몰되어 가던 때, 돌연 시야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기절이라도 했나 싶었는데 아니었다. 눈꺼풀 위로 익숙한 온기가 느껴졌다. 관자놀이를 가볍게 누르는 손끝 또한 내가 아는 것이었다.
“너와 피 터지게 싸웠던 과거가 떠오르겠지.”
손으로 내 눈을 가린 무륜이 으르렁거렸다. 몸에서 힘이 탁 풀렸다. 흐물거리며 무너지는 나를 무륜이 지탱했다. 등 뒤로 닿는 단단한 감촉이 비단 보료보다 편하게 느껴졌다.
“시커먼 도적놈과 함께 사라져 내 심을 철렁하게 하더니, 이젠 허여멀건 날파리와 함께 있구나.”
손을 잡아 내리자 그가 눈을 가늘게 뜬 채 나를 내려다봤다. 분명한 책망의 시선이었다.
“네 하다 하다 사월린의 마음까지 훔쳤더냐?”
엄밀히 말해 사월린이 꼬인 건 내 잘못이 아니지만 변명은 할 수 없었다.
“어찌 사월린임을 바로 알아보셨습니까.”
“보면 알게 생겼잖느냐.”
그건 그랬다.
“게다가 감히 이 금국에서 널 이리 찾아올 사내는 그리 많지 않지.”
그것도 그랬다.
“그래서, 저 미친 신수는 네게 무슨 볼일이냐.”
묻기는 내게 물으면서 무륜은 사월린을 쏘아봤다. 시선만으로 상대를 찢어발길 듯했다. 사월린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그는 무표정했다. 나와 단둘이 있을 땐 희미하게나마 내보이던 감정들이 깨끗하게 사라졌다.
“질문을 바꾸지.”
또 뭘 물으려고. 불길함에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심지어 지금은 옆에 무륜도 함께였다. 제게서 뭔가 느껴지는 게 없느니 하는 소리라도 나왔다간 내일 걸어 다니지도 못할 게 틀림없다.
무륜의 정력은 백호의 체력을 상회했다. 살꽃 피던 무수한 날이 뇌리를 스쳤다. 등줄기가 저릿한 동시에 안색이 해쓱해진 찰나, 사월린이 작은 조약돌을 던지듯 물음을 던졌다.
“네 지금 행복하느냐?”
나는 안도했다. 그건 내가 망설임 없이 대답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질문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행복합니다.”
“……그래. 그거면 되었다.”
사월린은 놀랄 만큼 쉽게 물러났다. 그의 행복에 비하면 내 마음은 길가의 돌멩이보다 하찮은 것. 듣지 못한 그의 속내는 어느 날의 기억으로 내게 전해졌다. 사월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난간을 향해 걸었다. 무륜은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았다.
난간에 선 사월린이 나를 돌아봤다. 6층 누각의 꼭대기. 청아한 은백발의 미남자가 보름달을 머리에 이고 있었다. 마치 신화의 한 장면 같았고,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필요하다면 내 이름을 부르거라. 상선을 부를 때와 같은 방법이면 된다.”
사월린 희 견차처.
영 입에 붙지 않는 말을 혀로 굴려봤다. 역시 어색했다. 나는 앞으로도 이 말에 익숙해질 일이 없으리라 직감했다. 눈앞의 사월린도 그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부를 일이 없는 것이 가장 좋지.”
그의 눈이 반으로 접혔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미소였다. 사월린이 저렇게도 웃을 수 있다는 것과 절대 안 어울릴 것 같은 미소가 찰떡같이 어울린다는 것에 진심으로 놀랐다.
“고맙다.”
그게 사월린의 마지막 말이었다. 마지막 인사라고 하기엔 이상했다. 참으로 이상해서 내 가슴에 긴 여운을 남겼다. 무엇이 고맙다는 걸까. 어렴풋하게 생각하면 알 것 같다가도, 선명하게 보려 하면 순식간에 형체가 흐려졌다.
“잊어라.”
무륜이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일방적으로 내게 쥐여 있던 손을 꽉 맞잡아왔다. 짙은 소유욕과 일그러진 집착, 주체하지 못한 질투심이 화마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나는 순순히 대답했다. 무륜은 더 말하지 않았다. 사실은 흑월의 거취를 묻고 싶은데, 지하 뇌옥에서의 일 때문에 참고 있는 거였다. 그걸 알기에 그의 손에 깍지 끼며 입을 열었다.
“그는 떠났습니다. 아마 이번에야말로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듬직한 어깨가 움칠했다. 그의 기세가 순식간에 누그러들었다. 쓴웃음을 짓는 내게 그가 물었다.
“서운한가?”
“조금은요.”
무륜은 담담하게 ‘그렇군’ 했다. 하지만 눈빛은 전혀 담담하지 못했다.
“조금이라 다행이야.”
‘많이’라고 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감히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가끔 보면 당신이 저보다 연치 어린 것 같습니다.”
“젊게 보인다는 건 좋은 일이지.”
“저보다 뻔뻔한 건 확실하고요.”
“그래서. 싫으냐?”
입을 꾹 다물었다. 싫으냐 물으면 나는 좋다는 대답밖에 할 수가 없다. 무륜도 그를 알고 있다. 그게 어쩐지 얄미워 되물었다.
“항상 같은 답을 들으시면서, 항상 같은 질문을 하시는 연유가 뭡니까. 혹, 제 마음이 바뀌었을까 의심하시는 건 아닙니까.”
“너야말로 연치 어린 이들이나 할 법한 생각을 하는구나.”
무륜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의 입술이 내 입술을 삼켰다. 간지러운 곳, 내가 약한 곳만 골라 건드리는 통에 금세 다리에서 힘이 빠졌다. 덜 말린 해초처럼 흐물거리는 나를 무륜의 단단한 팔이 휘감아 지탱했다. 그가 배부른 짐승처럼 웃으며 말했다.
“내가 좋다는 말을, 네 입으로 듣기 위해서지.”
* * *
우린 위난제가 한창인 밤거리를 함께 거닐었다. 당과도 먹고 싸구려 동곳도 샀다. 위난제의 상징인 알 모양의 나무 장난감도 샀다. 색이 칠해진 나무 알은 열면 목각 인형이 나왔다. 내 것은 꽃가마였고, 무륜의 것은 창을 든 병사였다.
장사치가 둘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운이 좋구먼. 같은 목(目)을 단번에 뽑기는 쉽지 않은데.”
“같은 목이요?”
“꽃가마, 아가씨, 대장군, 가마꾼, 옥패. 이것들이 한 목일세. 그 외에도 동물 목, 신수 목, 도검 목…… 뭐 이것저것 있지. 같은 목을 모으는 것도 하나의 재미라네.”
“그렇군요.”
그러니까 한 범주 안에 든 것들을 ‘같은 목에 들었다’고 하는 모양이다.
“그럼 저희가 뽑은 건 위금지사의 목이겠군요.”
상인의 눈이 동그래졌다.
“바로 알아차리는 이가 많지 않은데. 어찌 알았나?”
나는 애매하게 웃었다. 옆에 있던 무륜은 손에 든 목각 인형을 이리저리 굴려댔다. 그의 눈썹 한쪽이 위로 솟아 있었다. ‘아무리 봐도 만들다 만 것 같은데. 이게 병사도 아니고 장수라니’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눈치 빠른 장사치는 그를 대번에 읽었다. 그가 손사래를 치며 바닥에서 뭔가를 꺼냈다. 끈으로 엮은 장부였는데 굉장히 낡은 것이었다.
“이 장난감의 재미는 그게 다가 아니야. 조합을 이용해서 간단한 운세나 점괘도 볼 수 있지.”
“호오.”
무륜이 처음으로 흥미를 보였다.
“그래. 뭘 보고 싶나.”
“연애운.”
상인의 눈가에 경련이 일었다. 그가 허둥거리며 장부를 뒤졌다.
“어, 어디 보자. 꽃가마와 대장군의 조합이라면…….”
그러다 원하는 걸 찾았는지 손이 멎었다. 이번엔 입가에서 경련이 일었다. 물건 파는 사람치곤 표정 관리가 안 되는 치였다.
“뭐든 상관없으니까 사실대로 말하게. 뭐라 나왔나.”
“허험험. 이런 점괘는 재미로 보는 거니까. 그…… 뭐냐. 두, 둘 사이에 자식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뭐 그런…….”
“…….”
“…….”
무륜의 시선이 내 배를 향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오한에 몸을 파득 떨었다. 나도 모르게 배에 손을 얹었다.
이번엔 상인의 낯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그제야 내가 무슨 행동을 했는지 알아차리고 얼른 손을 내렸다. 그러곤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등 뒤에서 무륜이 크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내 내자가 마음이 상한 모양이군.”
뒤이어 쩔렁거리는 소리와 ‘어이쿠, 감사합니다!’ 하는 상인의 읍이 들려왔다. 금전이라도 던져준 모양이었다.
“마음 상했느냐?”
가까이 다가온 무륜이 물었다.
“그런 미신에 마음 상할 일이 무에 있겠습니까. 그저 낯부끄러워 그럽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무엇이요?
“겉으로 보기엔 이래도 본신은 인간의 이치를 아득히 벗어난 신수이니, 정말로 생길지도 모르잖느냐.”
그럴 리 없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정확히는 가능한지 어떤지 몰랐다. 다급히 천태백호의 기억을 뒤적였다. 결론부터 말해…… 텄다. 그는 평생 홀몸이었고, 그쪽(?)에 대한 정보는 전무하다시피 했다.
“……앞으론 안에 싸지 마십시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속삭이자 무륜은 옆을 지나던 모든 사람이 한 번씩 쳐다볼 만큼 큰 소리로 웃어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