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33화
“형님. 어이 이러십니까.”
“흐어어.”
곰 같은 사내가 곰처럼 울었다. 나는 여전히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는데, 태화는 그새 이유를 알았는지 ‘아아’ 하곤 그의 등을 쓸어내렸다. 나는 태백을 보는 태화의 눈을 보고서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내가 태화를 용서할 것이라 믿으면서도, 또 마음 한구석에서 끊임없이 염려하고 걱정했던 것이다. 내가 태화를 용서하지 못할까 봐. 그러다 완전히 괜찮다는 판단이 서자, 이제 됐다고 마음이 놓인 것이겠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화도 말없이 태백의 등만 쓸어내렸다.
태백은 그 후 반각이 흘러서야 완전히 울음을 그쳤다. 거기서 문제가 생겼다. 심하다 못해 완전히 탱탱 부어버린 눈 때문에 태백은 눈을 떠도 뜬 것 같지가 않았다.
“뭐가 보이긴 하십니까.”
“괜찮다. 나 정도 경지면 굳이 보지 않아도 움직이는 데 지장은 없음이니.”
결국 안 보인단 소리였다. 어이가 없어 웃었다. 원급 무사에 지한국의 대장군이었던 사람이 너무 울어 눈을 못 뜬다니.
“아마 말해도 믿을 사람이 없을 겁니다.”
태백도 민망한지 검지로 뺨을 긁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어찌 지내오신 겁니까.”
태백에게 물었으나 대답은 태화가 했다. 두 사람은 그 이후 남방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수백에 있었다고. 강함을 숭상하는 풍조가 아직 만연한 수백인 만큼, 무력이라면 뒤지지 않는 태백은 어딜 가든 좋은 대접을 받았다.
처음엔 이곳저곳을 깐보듯 전전하다 곧 이름 있는 상단에 표두로 정착했다. 금국에 들어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럼 표두 일은 그만두신 겁니까.”
“그래. 그래서 마지막 임무로 금국 수도에 들어가는 상단의 호위를 맡았지. 지금은 이 객잔에 임시로 머무르는 중이다.”
“이제부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금국에 자리를 잡을 생각이다.”
“그럼, 두 사람 다 황궁에서 일해볼 생각은 없습니까.”
원급의 무사와 여율령에 비견되던 어린 책략가. 그들 각각이 국력을 수직 상승시킬 수 있는 인재였다.
“어렵지 않겠느냐.”
진지해진 태백이 현실적인 의견을 냈다. 두 사람이 한 일이 있는 만큼 그는 나도 동의하는 바였다.
호로록. 여유롭게 차를 마셨다.
기실 가장 큰 산은 바로 방금 넘었다. 나는 형님과 태화의 마음을 돌리는 게 가장 어려운 부분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저 말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 또한 금국에 눌러살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뜻 아니겠는가.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는 그렇게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형님과 태화가 궁에 드는 것은 사실 그렇게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뭘 어찌할 셈이냐.”
“소문을 낼 겁니다.”
사실에 중점을 두고 약간의 거짓을 섞어 소문을 낼 거다. 소문은 크게 두 가지. 하나는 두 사람이 본래 금국 출신의 ‘평민’이라는 것. 다른 하나는 둘이 지한국에 협력할 수밖에 없었던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는 것.
“얼핏 들어보니 서로를 인질로 붙들려 있었던 것 아닙니까?”
태백은 태화를 인질로 잡혔고, 태화는 제 형을 위한답시고 제 발목과 형의 발목에 족쇄를 주렁주렁 달았다. 그렇게 타낙한에게 묶여 있었다. 중간에 여러 가지가 생략됐지만 어쨌든 큰 골자는 그러했다.
“제가 전에도 말했지만, 이래서 소통이 중요한 겁니다. 그 좋은 무력과 머리를 가진 이들이 고작 대화가 부족해서 그 삽질을 하고 있었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
“…….”
갑자기 분위기가 훈계의 현장이 됐다. 하지만 그에 관해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둘이었다.
태백과 태화가 나란히 어깨를 늘어뜨렸다. 순간 두 사람 위로 어떤 형상이 겹쳤다. 큰 덩치의 위협적인 맹견과 영악하고 귀여운 고양이였다. 하마터면 터질 뻔한 웃음을 헛기침으로 무마했다.
“크흠. 흠. 아무튼 예 있고 싶다는 마음만 있다면 나머지는 제가 어떻게든 하겠습니다.”
“네가 뭔가 불이익을 얻는 것은 아니냐.”
태백이 물었다. 내가 대답하기 전에 태화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마 괜찮을 겁니다.”
설명을 요구하는 태백의 시선이 태화를 향했다.
“전쟁이 끝난 지도 벌써 3년이죠. 아직 상흔이 다 아물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잊어가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런 말씀을 드리기 염치없지만, 지금 금국에서 위상이 드높은 이화 형님께서 후견인이 되어주신다면 일은 예상보다 훨씬 쉽게 풀릴지도 모릅니다.”
섬기던 황제에 대한 충정을 잊지 못해, 죽어서도 백호가 되어 돌아온 위사장. 그것이 지금 나에 대한 세간의 풍문이었다. 나는 민망해하면서도 일이 잘 해결될 것 같은 예감에 활짝 웃었다.
“결정 난 것 같군요.”
그리고 짐짓 가벼운 몸짓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시다. 집에.”
집. 그 말에 두 사람의 표정이 일변했다.
언제까지고 머무를 수 있고, 떠날 곳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며, 설령 길을 떠나더라도 돌아올 수 있는 곳. 몸을 누이면 옆에 마음이 같이 눕는 곳.
태화가 다시 울먹울먹했다. 태백은 울진 않았으나 울음을 참는지 입매가 일자로 꾹 다물렸다.
“이제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 어찌 그리 눈물이 가벼우십니까, 두 분.”
나는 소리 내어 웃었다. 다 허물어져 가는 초가집은 더 이상 우리의 집이 아니었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가슴에 묻었다.
안내를 위해 난간에 발을 딛는데, 바깥쪽에서 검은 새가 날아들었다. 단숨에 검을 뽑는 태백을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새의 정체는 영춘이었다.
“예까지 어인 일이냐.”
“도련님, 지금 저택에 폐하께서 와 계십니다.”
영춘이 꽤나 순화해서 말했다. 단순히 온 게 다가 아니라 금군을 이끌고 점거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금군과 밀영군도 함께더냐?”
“예.”
그는 망설이며 답했지만 나는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일단 소개부터 했다.
“영춘아, 인사드려라. 내 형님과 동생이다.”
“……예?”
복면 위로 드러난 영춘의 눈이 홉뜨였다. 그는 내가 어쩌다 여율령과 얽혔는지 아는 사람이었다. 곧 모든 것을 이해한 그가 정말 잘되었다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래서 말인데. 일단 이 둘을 데리고 너 먼저 돌아가 있어라. 그리고 폐하께는 내가 예 있음을 전해다오.”
처음엔 같이 갈까 했는데 생각을 바꿨다.
흑월이나 암묵단과는 달랐다. 이쪽은 어쨌든 ‘이화’와 피가 섞인 진짜 형제들이다. 내겐 다 같은 가족이고 형제들이지만 무륜의 눈엔 다를 터. 그가 잘 대해줬으면 대해줬지, 핍박하진 않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괜찮은 것이냐?”
태백이 많은 것을 담아 물었다.
“예. 괜찮을 겁니다.”
그는 그 이상 묻지 않았다.
영춘과 두 사람이 떠나고 나는 홀로 남아 생각에 잠겼다. 흥분한 상태론 될 일도 아니 되고 대화도 어긋나는 법. 무륜은 영춘에게 내가 있는 곳과 간략한 상황을 전해 들을 것이다.
납치한 흑월은 없고 혼자 남아 있다는 것, 그리고 무륜을 기다린다는 것. 이 둘만으로도 다소 진정되리라. 또 오는 길에 흥분과 화도 어느 정도 식을 것이란 계산이었다.
“……이건 예상에 없던 일인데.”
한숨을 폭 쉬며 눈을 떴다.
하긴. 생각해 보면 오늘 일어난 일 중 내 예상 범위에 있던 것은 점심에 나온 당과 정도였다.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밖을 향해 트인 난간에 누군가 서 있었다.
달빛을 베틀에 넣고 짠 것 같은 묘한 백은발. 처음 봤을 땐 홑겹의 장포 차림이었는데, 지금은 무려 네 겹의 옷을 입고 허리에는 칼을 찼다. 진해의 옷이 그랬던 것처럼 금국의 것과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복식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예를 차린 정복임을 알 수 있었다.
그제야 몇 년 전 꿈에서 엿들었던 여율령과 사월린의 대화가 떠올랐다.
‘그가 북방에 없다면 그걸로 됐습니다.’
‘되었다면서 왜 굳이 만나려는 것이냐.’
‘보고 싶으니까요.’
……괜히 떠올렸다.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그는 섣불리 들어오지 못하고 난간 위에 머물렀다. 이대로는 진척이 없을 것 같아 결국 자리를 권했다. 사월린의 낯이 묘해졌다.
“경계하고 으르렁거릴 줄 알았는데. 예상 밖의 환대로군.”
그야 그런 대화를 들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매도하고 비난해 쫓아낼 순 없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사월린과 나는 닮은 점이 많았다. 그래서일까. 그의 상황에 나와 무륜을 이입해 버리곤 하는 것이다.
“길게 들어줄 생각 없습니다. 본론부터 말하시죠.”
짐짓 냉정한 척 말하며 속으로 달달 떨었다. 가장 꺼리는 주제가 바로 튀어나올까 봐서다.
“동물이 오래되면 영물이 되고, 물건이 오래되면 도깨비가 되지. 그럼 나 같은 자가 오래되면 무엇이 되는 줄 아느냐?”
하지만 사월린은 영 엉뚱한 소리를 했다.
“본론을 물었더니 갑자기 웬 딴소리십니까.”
“이게 내 본론이다. 그래서 무엇인 줄 알겠느냐?”
“제가 그걸 어찌 압니까.”
“상선의 밑에서 큰 것치곤 영민함이 덜하군.”
이 새끼가 지금 해보자는 건가.
황당함과 분노에 차 사월린을 봤다. 그는 변함없이 냉정한 낯으로 나를 마주 응시했다. 나도 모르게 움칠했다. 무덤덤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반대였다. 그는 휘몰아치는 폭풍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괴물이 된다.”
“…….”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너는 나와 비슷한 구석이 많지. 그 말은 지금 네 앞에 있는 내가, 네 미래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저는 당신과 다를 겁니다.”
악에 받친 대답이었다. 사월린은 웃었다. 보는 사람이 다 아픈 웃음이었다.
“그래야만 한다.”
그는 아무 말도 못 하는 내게 혼잣말 같은 충고를 늘어놓았다.
“북쪽으론 가지 마라. 내가 해방되었다곤 해도 한동안은 사기(死氣)가 남아 있을 게다. 아직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네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어.”
“…….”
“망설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니 속으로 생각만 하는 경우도 있는데, 가능하면 생각도 하지 마라. 망설에 대한 건 일종의 금제다. 낙숫물에 돌이 패듯 네 정신을 갉아먹을지 모른다.”
대게는 내가 하지 말아야 할 일이나 가지 말아야 할 곳이었고.
“인세에 섞여 살 요량이면 인간성에 물드는 걸 멀리해야 할 것이다. 그리되면 상처받는 건 결국 네 쪽일 테니.”
일부는 염려였으며-
“네 마음 준 자가 죽는다고 다 끝난 것이 아니다. 가능성은 희박해도 그다음이 있어. 그를 잊어선 안 될 것이다.”
나머지는 제 경험에서 반추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