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32화
말이 족쇄가 되어 발목을 휘감았다.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너는…… 나를 너무 잘 알아.”
흑월을 향해 돌아섰다.
“그런 말을 하면 내가 가지 못할 거란 것도 알고 있지.”
“맞습니다. 도련님은 이런 말을 듣고 그냥 가실 분은 못 되시죠. 제가 당신께 그리 작지 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 영악한 녀석이 어찌 이래.”
“저라고 제가 택한 길이 가시밭길임을 몰라 이러겠습니까.”
흑월의 어조가 처음으로 격해졌다. 확 하고 뻗어진 손이 내 팔과 허리를 움켜쥐었다. 맞부딪혀 오는 입술을 피해 고개를 돌리자 그가 상처받은 짐승의 얼굴로 나를 봤다. 나는 필사적으로 그를 외면했다.
흔들리지 마. 줄 수 없는 걸 줄 것처럼 굴지 마. 단호하게 밀어내. 일말의 미련마저 거둘 수 있게. 입 안쪽의 살을 세게 물었다. 아릿한 통증과 흐릿한 피 냄새로 의지를 다잡았다.
“세상에 장담할 수 있는 건 없고, 영원한 것도 없지. 어느 날 나에 대한 네 마음이 다른 곳을 향하게 될 수도 있다.”
“무륜을 향한 도련님의 마음이 변할 수도 있죠.”
“그래. 어느 쪽이든 있을 수 있는 일이지.”
네 말도 맞고, 내 말도 맞다. 누구의 말이 더 맞을지는 시간만이 증명해 줄 것이다. 그런 의미를 담아 흑월을 봤다. 그는 더 말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은 흑월이 내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이 정도는 괜찮지요? 그런 기색이 역력했다. 한숨을 푹 쉬었다.
“예전엔 농지거리 좀 던졌다고 복면을 이마까지 쓴 채 도망했었는데.”
“그런 순진한 저를 이리 만든 것은 도련님이십니다.”
“하. 내가 말을 말지.”
아까와 달리 밀어내는 손길은 부드러웠다. 흑월 또한 순순히 물러났다.
“가보겠습니다.”
“그래.”
이별은 허무하리만치 싱거웠다. 그림자로 변한 흑월이 땅으로 쑥 꺼졌다. 그게 끝이었다. 헤어짐의 순간보다 보낸 후가 더 먹먹하여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자, 그럼 이제.”
분위기를 바꾸듯 짐짓 쾌활한 혼잣말을 하며 돌아섰다.
“……머리끝까지 화가 났을 내 임을 또 어찌 달래면 좋을꼬.”
쾌활함은 찰나에 끝났다. 불같이 노했을 무륜을 떠올리자 이대로 며칠 잠적할까 싶은 충동이 일 정도였다. 하나 아니 될 말이다. 무륜이라면 틀림없이 금군과 밀영군을 풀었을 것이다. 어쩌면 황군과 금성 전역의 병사들까지 동원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위난제 기간이다. 흥에 겨워 밤거리를 가득 메운 인파가 우르르 몰려다니는 병사들에 지레 놀라 도망치기라도 하면, 그 결에 부상자나 사망자가 나올 수도 있다. 수도가 뒤집히기 전에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륜이 불안해할 테니까.’
골목에서 그대로 벽을 타고 어느 가게의 지붕을 올랐다. 3층 전각의 기와를 밟고 서자 그럭저럭 시야가 트였다.
지금 있는 곳은 금성의 번화가 중에서도 가장 번화한 곳이었다. 온갖 가게와 좌판이 늘어섰고 당연히 사람도 제일 많이 몰렸다. 과거, 무륜과 함께 목련이 새겨진 동곳을 산 곳도 이곳이었다.
익숙한 곳인 만큼, 황궁으로 가는 길이야 훤했다. 몸을 모로 틀어 멀리 내다보자 과연 은은한 빛을 머금은 거대한 궁이 눈에 들어왔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는 게 모두를 위한 길이었다.
도약을 위해 다리에 힘을 주다 삐끗했다. 홱 소리가 날 만큼 거칠게 고개를 돌렸다. 개미 떼처럼 줄지어 거리를 메운 인파 사이로 정확히 나를 향한 시선이 있었다. 시선만이었다면 돌아보지 않았을 것이나,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익숙한 내력이 느껴졌다.
그는 죽립을 푹 눌러 쓰고 있었다. 흑의 무복 차림이었는데, 소매 끝에 하얀 얼룩 같은 것이 보였다. 목련 자수였다.
“……형님?”
큰형인 태백이다. 흑월에 이어 태백까지 나타나다니. 오늘 무슨 날인가?
예상치 못한 일에 당황했다. 곧바로 선택지가 주어졌다. 이대로 황궁으로 가 무륜을 달래고 태백을 찾아갈 것인가, 아니면 태백을 먼저 만나고 무륜에게 돌아갈 것인가.
이상적인 건 전자였지만 이 경우, 태백을 만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무륜이 나를 잡고 놓아주지 않아서든, 무언가 오해한 태백이 그대로 사라져서든.
차라리 얼굴이라도 마주한 채 이러저러하니 기다려 달라고 하면 좋으련만. 그는 내게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태백의 기척이 빠르게 멀어졌다.
“오랜만에 찾아와선 너무하시는군요, 형님.”
쓰게 웃으며 옆의 지붕을 향해 뛰었다. 황궁과는 정반대 방향이었다.
* * *
태백에게 이끌려 간 곳은 중심가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주택가였다. 조도가 낮은 찻집과 객잔이 드문드문 자리한 곳이기도 했다. 태백은 나도 이름 정돈 들어본 유명한 객잔의 지붕에서 멈췄다. 무려 6층의 누각 안쪽으로 검은 그림자가 사라졌다.
그 흔적을 고스란히 따라갔다. 지붕에서 6층 난간을 타고 내려가다 멈칫했다. 텅 빈 꼭대기 층엔 태백 이외에도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아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순수한 반가움을 담아 말했다.
“오랜만이구나.”
“…….”
내 인사에도 태화는 대답이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의 손끝이 초조하게 말렸다. 가볍게 깨무는 입술 안에 많은 말이 맴돌고 있는 듯했다.
“이 형은 보이지도 않더냐?”
태백이 분위기를 바꾸듯 불쑥 나섰다.
“인사도 없이 멋대로 끌고 오셔 놓곤 말은 잘하십니다.”
“끌고 왔다니. 친절히 안내한 게지.”
그가 양팔을 벌렸다. 나는 두말없이 다가가 안겼다. 너른 품에서 무륜과는 다른 안정감이 느껴졌다. 덩치 큰 사내들끼리 그리 오래 안고 있기도 민망한지라 그렇게 한 번 꽉 안고는 곧바로 떨어졌다.
나는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는 태화를 봤다.
“한 번 안아봐도 되겠느냐.”
태화는 이번에도 대답이 없었지만 거부하지도 않았다. 나는 가만히 다가가 나보다 작은 몸을 품에 안았다. 떠나는 순간도, 떠난 이후에도 줄곧 눈에 밟혔던 막냇동생. 이렇게 안고 있으니 만감이 교차했다.
“형님.”
떨리는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이화 형님.”
너는 내 형님이 아니라고 부정하던 몇 년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형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태화의 떨림이 단순히 몇 년 전의 그 일 때문이 아님을 알았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내게 태백이 자리를 권했다. 우리는 전망 좋은 객잔의 원형 탁자에 둘러앉았다. 점소이는 오지 않았고, 대신 태백이 아래로 내려가 가벼운 다과가 담긴 쟁반을 가져왔다.
“십삼 년 전. 그때 상인이 데려가려 했던 것은 사실 형님이 아니라 저였습니다.”
태화는 담담한 척 애쓰며 말을 이어갔다. 무거운 이야기였다.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한 태화의 고개가 점점 아래로 숙어졌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자초지종이 끝난 후,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세간에 이런 말이 있지. 결과가 좋으면 다 좋다.”
동그래지는 눈을 보자 어쩐지 심히 민망하였다. 손에 쥔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확실히 나는 자개함에서 죽을 뻔했고, 그 후로도 험한 일을 많이 겪었다. 하지만 좋은 날이 더 많았지. 나는 나를 팔아넘긴 아버지보다 진짜 아버지 같은 사내를 만났고, 나를 돌봐주고 챙겨주는 일가식솔에게 어여쁨 받았으며, 내 인생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정인을 만났다.”
일견 잔잔한 듯 보이지만 사실 얕게 떨리고 있는 찻물의 표면이 지금 내 마음과 같았다.
“지금의 너와 내가 선 곳이 반대였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솔직히 등골이 오싹해.”
탁자 한쪽과 맞은편. 그 사이엔 엄청난 간극이 있었다.
“너는 이런 나를 비난할 테냐?”
“그럴 리가 있습니까! 저는……. 저는-”
“그래. 저 살자고 형제를 판 것은 분명 용서받지 못할 일이다.”
굳은 어깨가 흠칫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듯 태화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화의 옆으로 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걸 아니까 너 또한 너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거겠지. 나는 널 용서하고 말 것도 없다. 그것이 용서받지 못할 일이라 생각하는 건 너와 세간의 잣대이지 내가 아니야.”
“…….”
“굳이 죄 있는 것을 찾으라면 나는 당시의 상황을 꼽겠다. 모두가 빈곤했고, 악의를 가진 자가 나타났으며, 우리의 아비는 어리석고 이기적인 사람이었지. 오히려 어린 너보다 조금이나마 컸던 내가 갔으니 둘 다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어깨에 있던 손을 뺨으로 옮겼다. 기어이 떨어지기 시작한 태화의 눈물을 거뒀다. 움켜쥔 동생의 양손이 무릎을 쥐어뜯었다.
“이리 우는 모습은 옛날 그대로구나.”
희미한 기억에도 하나는 선명했다. 태화는 잘 울지 않았다. 울어봐야 소용없다는 걸 이미 아는 까닭이다. 대신 아이는 일찍 성숙했다. 태생부터 가지고 있던 뛰어난 머리도 한몫했다.
그런 아이가 견디다 못해 눈물을 보일 때. 이리 우는 자신을 용납할 수 없다는 듯 양손을 으스러져라 움켜쥐곤 했다.
“형님은…… 어찌 그러실 수가 있습니까.”
“무어가.”
“어떻게 자신을 팔아먹은 동생을 그리 쉽게 용서할 수 있으시냔 말입니다.”
“용서할 것도 없다고 바로 방금 전에 말하였는데. 네 머리가 좋은 줄 알았더니 그도 아니구나.”
“놀리지 마십시오.”
훌쩍이며 울음을 그친 태화가 볼멘소리를 했다. 뾰로통한 볼을 꾹 찌르고픈 충동이 일었다. 다 큰 사내에게 이런 충동이 드는 것을 보니 네가 내 막냇동생이 맞구나. 피식 웃으며 태화의 머리칼을 손으로 흐트러뜨렸다.
“으허어!”
우두커니 앉아 있던 태백이 뒤늦게 울음을 터뜨렸다. 매우 당황했다. 태화도 마찬가지인지 입을 딱 벌린 채 보다가 허둥지둥 태백을 달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