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31화
묻고 싶었다. 길을 잡은 후 술을 멀리하시던 분이 이리 취하신 게 나 때문이냐고. 내가 그리도 당신을 힘들게 하였냐고.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신 걸음을 옮겨 그에게 다가갔다. 무륜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평소였다면 알았겠지만 고주망태가 된 지금은 내가 이화인지 몽휼인지조차 구분해 낼 수 없었다.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무륜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중얼거림에 가까운 한탄이 술 냄새와 함께 전해졌다.
“그렇게 힘들면 그만두면 되잖습니까.”
몽휼의 목소리를 따라 했다. 전혀 비슷하지 않았다. 그래도 무륜은 몰랐다.
“그건 안 돼.”
“어째서요.”
“이 사람이 없으면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해본 적 있느냐?”
“…….”
“나는 있다.”
나 또한 있다.
“이화의 죽음을 확신한 날부터 줄곧 그랬었지. 그래서 ‘지금’이 얼마나 기적 같은 순간인지 누구보다 잘 알아. 같은 게 아니라 이거야말로 기적이지.”
잠깐 말을 멈춘 무륜이 술병을 기울였다. 목울대가 몇 번이나 들썩이고 그는 단숨에 병에 든 술의 반을 비워냈다.
“다정하게 대하고 싶다. 원하는 건 다 이루어주고 싶다. 그저 살아서 곁에 있는 거면 더 바랄 게 없다. 분명 처음엔 그런 마음이었지. 그런데…….”
머뭇거리던 것도 잠시, 이어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잔뜩 가라앉았다.
“그에게 마음 주는 이들이 나 말고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 사람 중 누군가에게 가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외려 파멸적인 생각밖에 들지 않아. 순수와 순애는 빌어먹을,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도 않아. 내 어디에 이렇게 음험한 구석이 있었을까.”
“…….”
“초조하니 졸렬해지고, 졸렬함은 비겁함을 불러왔지. 이대로 영영 지하 뇌옥에 가두고 싶다는 충동이 매 순간 들어.”
무륜의 말은 자학과 다를 바 없었다. 더 듣지 못하고 손을 뻗어 그의 손목을 쥐었다. 막 새 술병을 쥐던 그가 멈칫했다. 그제야 이상함을 느낀 그가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치고, 그가 헛숨을 삼켰다.
“절 지하 뇌옥에 가두고 싶으십니까?”
“……이, 이화야. 그게 아니다. 나는-”
“죄송하지만 그건 싫습니다.”
무륜의 낯이 하얗게 질렸다. 단숨에 술이 깬 것 같았다. 총명함을 되찾은 눈이 망연자실해졌다. 나는 그의 손에 쥐어져 있던 술병을 가만히 빼앗아 탁자 위에 놓았다.
“하지만 북궁은 괜찮습니다.”
죄인처럼 숙어지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산발인 긴 머리칼이 정말로 8년 전의 그날을 떠올리게 했다.
“여긴 생각보다 부지가 넓지요. 여름엔 습하고 겨울엔 말도 못 하게 춥지만 그도 상관없습니다. 당신이 여기서 나오지 말라 하시면, 저는 그리할 겁니다.”
무륜의 눈동자가 찢길 듯이 흔들렸다.
“예서 당신만 기다리는 삶을 살라 하셔도 그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 가족이나 다름없는 이들을 저버리라는 명은 따를 수 없습니다.”
“…….”
“당신은 영민한 분이시니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실 겁니다. 아니, 말하기 전에 이미 알고 계셨겠지요. 그러니 유폐됐던 날 이후로는 만취한 적 없으신 분이 이리 몸 가누기 힘들 만큼 마신 것 아니겠습니까.”
무륜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술기운을 몰아내는지 그의 안에서 움직이는 내력이 느껴졌다. 방 안의 술 냄새가 짙어져 창을 열었다. 초겨울의 냉랭한 바람이 방 안을 휘돌고 나갔다.
“네 말이 다 옳다.”
취기가 다 가셨는지 또렷한 목소리를 뱉은 무륜이 탁자 위로 제 양손을 모아 쥐었다.
“어찌 이리 꼴사나울까. 네 보기 부끄러워 들 낯이 없다.”
“그건 곤란합니다.”
조용히 다가가 그의 뺨을 쥐었다. 천천히 들어 올리자 상처 입고 움츠러든 검은 눈이 보였다. 언제 보아도, 어떻게 보아도 사랑스러운 내 임의 눈이었다.
“전 당신 얼굴이 정말 좋거든요.”
“……!”
“아무렴 제가 사랑하는 분의 얼굴인데 어디가 싫겠습니까만, 객관적으로 봐도 참으로 잘난 얼굴 아닙니까.”
그 순간, 무륜이 내게 달려들었다. 우당탕. 와장창. 큰 소리가 나며 탁상이 밀리고 술병이 몇 개나 바닥으로 떨어졌다.
잡아먹힌다. 절로 그런 생각이 드는 접문이었다. 허겁지겁 달려든 무륜은 기갈이 든 사람처럼 나를 탐했다. 단단한 팔이 허리를 휘감고, 곧 등이 탁자에 닿았다. 겨울에 더욱 시린 지하 뇌옥에 있는답시고 겹겹이 껴입게 한 옷들이 순식간에 훌렁훌렁 벗겨졌다.
“흐윽.”
속곳을 제외하고 얇은 내의만이 남았을 때, 무륜이 벌어진 옷깃 사이로 내 목덜미를 깨물었다. 꽤 매서운 입질이었다. 살짝 피가 비친 자리를 핥으며 그가 곁눈으로 나를 봤다.
지독한 독점욕이 서린 눈빛을 마주하자 뒷구멍이 저려왔다. 배 안쪽이 알싸해지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합금으로 만든 철창도, 두께가 일 장이 넘는 벽도 필요 없었다. 나를 주저앉히는 덴 무륜의 시선이면 충분했다.
“왜. 도망칠 테냐?”
무륜이 그런 내 기색을 읽고 떠보듯 말했다. 나는 픽 하고 웃었다.
“이리 잘난 임을 두고 가긴 어딜 갑니까. 그래도 정히 불안하시다면-”
탁자에 완전히 늘어지며 다리를 벌렸다. 그리고 그를 도발하듯 자극적인 말을 꺼냈다.
“제가 일어나 걷지도 못할 만큼 박아주세요.”
“네가 미쳤구나.”
어쩌자고. 어쩌자고 그런 말을 해.
안 그래도 흥분해 있던 무륜의 아랫도리가 당장 터질 것처럼 부풀었다. 한 손으론 다 쥐어지지도 않는 물건이 꽤나 위협적이었다. 그걸 보면서도 빠듯함에서 올 고통보단 쾌감을 먼저 떠올리게 됐다.
선단이 아직 다 풀리지 않은 구멍의 입구를 밀어 올리기 시작했다. 이를 악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긴 머리가 탁자 아래로 떨어지며 시야가 거꾸로 뒤집혔다.
무륜이 웃었다.
“그리 좋은 나를 두고 가겠다는 말이 입에서 나오더냐?”
입은 웃는데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이건 잘 대답해야 한다. 문제는 내가 망설을 못 한다는 거였다. 이를 어쩌나. 고민하며 입술을 잘근거렸다.
“왜 대답이 없느냐.”
재촉하는 말과 함께 무륜이 안을 치댔다. 저릿한 감각에 잡아먹혀 가면서도 꾸역꾸역 입을 열었다.
“그땐 진심이었습니다. 제가 그리 말할 만한 짓을 하지 않았습니까.”
“진심이었다고?”
무륜의 기세가 일변했다. 나는 급하게 말을 이었다.
“결국 후회할 진심이었죠.”
“…….”
“가긴 어딜 갑니까. 전 천년만년 당신이랑 같이 살 겁니다.”
팔을 들어 그의 목을 휘감았다.
“절 놔주지 않는다고요? 그건 제가 할 말입니다. 당신은 제 것입니다.”
무륜이 짐승처럼 목을 울리더니 거칠게 달려들어 내 안을 때려 박았다. 몸이 덜걱덜걱할 때마다 뇌도 같이 흔들렸다. 표피부터 내피까지 한데 스며들어 얽히는 연리지처럼 서로 팔다리를 얽었다. 이대로 피부와 피부가 녹아 서로에게 붙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내장이 그가 토해낸 탁액으로 들어찼다. 긴 한숨을 뱉으며 여운에 젖었다. 무륜이 쉴 틈 없이 내 목덜미며 어깨에 순흔을 남겼다. 간지러움에 작게 웃었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뒤로 젖히며 뻐근한 고개도 한껏 젖혔을 때, 시야에 무언가 들어왔다. 거기 있어선 안 될 무언가였다.
“……!”
온통 시커먼 그림자가 머리맡에 서 있었다.
“흐, 흑월?”
“뭐라?”
내 중얼거림에 뭘 오해했는지 무륜이 으르렁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곧 그 또한 흑월을 발견했다. 경악한 무륜의 움직임이 멎었다.
촤아악! 흑월의 발치에서부터 마치 장막 같은 그림자가 솟구쳤다. 그림자는 나와 흑월만을 삼켰다. 무륜이 ‘이화!’ 하고 부르는 소리는 반으로 쪼개져, 앞의 일부밖에 들리지 않았다.
사아아. 반구 형태로 자리를 잡은 그림자가 다시 걷혔을 땐 어느 어둑한 골목이었다. 바짝 붙어 있던 흑월의 가슴팍을 거세게 밀쳤다. 흑월이 말없이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어느새 챙겼는지 모를 내 옷이었다. 그를 팩 빼앗아 입으며 사납게 을렀다.
“이게 무슨 짓이냐.”
“글쎄요. 이게 무슨 짓일까요.”
“네 지금 나와 농을 하자는 게냐?”
“아닙니다. 북궁에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이럴 생각은 없었습니다. 없었는데, 도련님과 그 자식이 흘레붙은 걸 보자 몸이 먼저 움직였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흑월의 주먹은 꽉 쥐어진 채였다. 저 정도면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생기다 못해 피가 배어날 것 같았다.
“일전엔 폐하를 이름으로 부르더니. 이젠 그 자식이냐?”
흑월의 눈이 가늘어졌다.
“흘레붙었다는 천박한 말보다 그게 더 화나십니까.”
“그래. 황족 모욕죄로 당장 능지처참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일이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그렇겠죠.”
까맣게 빛나는 눈동자 가운데가 노란색으로 쭉 찢어졌다. 현무의 눈이었다.
나는 더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고 그대로 몸을 돌렸다. 골목 바깥은 위난제로 들썩였다. 어디쯤인지 몰라도 수도인 금성인 것은 확실했다. 내가 그리 사라졌으니 무륜이 많이 놀랐으리라. 빨리 돌아가서 달래줄 생각밖에 없었다.
“가지 마세요.”
흑월이 나를 불렀다. 소맷자락을 붙드는 듯한 목소리에 그만 발이 멈출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여지를 주고 미련을 남기는 건 흑월을 위해서도 좋지 않았다.
“잠깐만 이야기를 들어주십시오.”
“그럼 여율령의 저택에서 기다리거라. 날이 밝거든 찾아가마.”
“날이 밝으면 전 이곳에 없습니다.”
발이 우뚝 섰다.
“이번에 떠나면, 무륜이 죽기 전엔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