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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30화 (130/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30화

“하아.”

나오느니 한숨이었고.

“내가 왜 그랬을까.”

생각하느니 자괴감만 일었다.

멍하니 천장 바로 아래 작게 난, 손바닥만 한 창문에 시선을 줬다. 세 줄 창살 너머로 손톱만 한 초승달이 날 비웃고 있었다.

피우욱. 가늘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펑! 폭죽이 터졌다. 달이 색색의 불꽃 뒤로 사라졌다. 위난제는 삼 일간 이어졌고, 오늘은 축제의 마지막 날이었다.

재회했을 땐 국상으로 수련제도 위난제도 없었다. 재회한 후엔 전후 정리와 민생 안정을 위해 수련제만 한 번 열었다. 그리고 다시 몇 년이 지나 처음으로 함께한 위난제였는데 결국 이렇게 됐다. 누굴 탓하랴. 다 내 잘못인 것을.

재차 한숨만 폭 쉬는데, 입구 쪽에서 느껴지던 인기척이 가까워졌다.

“어이고, 귀한 분이 어쩌다 이런 무서운 곳에 갇히셨습니까.”

몽휼이 손에 무언가를 들고 들어오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깐족거림이 분명한 모양새라 눈을 사납게 치뜨고 목울음을 냈다.

“죽고 싶나?”

백수의 왕. 그것도 신수인 백호의 위협이었다. 마비된 듯 굳은 몽휼이 식은땀을 흘리며 눈만 데룩데룩 굴렸다. 눈만으로 잘못했다 비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하아, 그래. 네게 무슨 잘못이 있겠나.”

지하 뇌옥에서 이제 하루째. 그 하루 만에 만사에 시큰둥해진 참이다. 세상만사 다 부질없어라. 다시 벽 쪽을 향해 돌아누웠다. 무언의 축객령이었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곧 철창이 열리고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다 전해 들었습니다. 아주 거하게 사고를 치셨더군요.”

아니, 이 새끼가 그래도!

“네 그리 말하지 않아도 안다!”

으르렁거리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바로 코앞에 오색 함이 불쑥 들이밀어졌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멈칫하자 몽휼이 다른 손으로 의자를 끌어오며 말했다.

“사식입니다. 폐하께서 제가 주는 것이라며 전해 주라 하셨으니 좀 드세요.”

“……그리 말하셨으면 비밀로 하라는 뜻 아니셨냐.”

“맞습니다만, 제가 드리는 거라 하고 드리면 안 드실 거잖아요.”

그건 그랬다.

묘하게 설득력이 있는지라 어정쩡하게 오색 함을 받아 들었다. 안에는 당과와 약과를 비롯해 내가 좋아하는 주전부리가 다섯 칸에 나뉘어 담겨 있었다. 과할 만큼 정갈한 모습이었다.

그걸 들여다보고 있자니 어떤 상상이 뇌리를 스쳤다. 생과방에서 세상 진중한 얼굴로 다과를 오색 함에 옮겨 담는 무륜과 기함할 황상의 모습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시비들의 모습이었다.

홀린 듯 약과를 하나 집어 베어 물었다. 입에선 단내가 퍼지는데 이 쓴맛은 대체 어디서 나는 것일까. 그런 나를 보던 몽휼이 혀를 쯧쯧 찼다.

“솔직히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누가 들으면 언제는 가려 말한 줄 알겠구나. 어디 지껄여 봐라.”

“두 분 다 아주 꼴값을 떠십니다. 아랫것들 보기 부끄럽지도 않으십니까? 사랑싸움 한 번 할 때마다 아주 온 황궁이 들썩입니다.”

“네가 무얼 안다고 함부로 지껄이느냐.”

“뭐긴요. 한쪽은 욕먹을 짓을 했고, 다른 한쪽은 말이 과했지요.”

“…….”

위중혁은 대체 이 새끼의 어디가 좋아 마음을 준 걸까. 나를 좋아하던 녀석이 몽휼을 좋아한다니. 처음엔 놀랐고, 다음엔 기꺼워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영 기분이 묘했다. 굳이 말하자면 이런 깐족이 녀석 때문에 나에 대한 마음을 접었다고? 그쯤이 되겠다.

“별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뭘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구시나 모르겠습니다.”

깐족이가 깐족거렸다. 인내심의 밑바닥까지 모조리 끌어모아 참았다. 태도는 거슬리나, 그가 지금 나와 무륜 사이의 미묘한 틀어짐을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 탓이다.

예상대로 검지를 세운 그가 그럴듯한 말을 줄줄 늘어놨다.

“그 정도는 여느 연인들이 흔히 겪는 일입니다. 다만 두 분 모두 ‘평범’과는 거리가 먼 신분과 지위이고, 이제까지의 날들이 험난했던 탓도 있겠죠. 여러 거대한 위협으로부터 서로를 지키는 것도 급급한데 사소한 일로 싸울 여력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이해합니다.”

나는 여전히 뚱한 태도로 귀만 쫑긋 세웠다.

“하지만 이제부턴 다릅니다. 두 분이 이 나라에서 가장 높고 귀한 분들이신 건 변함없으나, 두 분을 둘러싼 환경은 변할 겁니다. 그럼 자연히 두 분이 신경 쓰는 것들도 바뀌게 되겠죠. 당장 이번 일만 해도 그런 변화의 일환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변화 자체가 나쁜 건 아니죠.”

몽휼은 내가 알지 못했던 무륜을 알게 될 것이라, 그리 말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무륜. 그 말만으로도 가슴이 설렜다. 하나 설렘과는 별개로 불안과 두려움은 여전했다.

“그러다 서로에게 질릴 정도의 단점을 발견하면?”

“제가 장담하건대 두 분이 서로 싫어질 날은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섣부른 장담은 하는 게 아니다.”

어느 날의 여율령처럼 내가 말했다.

“믿는 구석이 있어 그렇습니다.”

그때 내가 했던 대답이 몽휼의 입을 통해 되돌아왔다.

“두 분이 여느 연인들처럼 그리 쉽게 서로를 등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죠. 힘든 날이 끝났다고 그날을 함께한 게 사라지진 않잖습니까. 당신은 폐하의 구원이었고, 폐하는 당신의 신이었습니다.”

그가 그야말로 확신에 차 말했다.

“여느 연인들 같은 사랑을 하겠지만, 여느 연인들처럼은 헤어지지 않을 겁니다.”

따뜻한 물 같은 말이 귀에 스몄다. 사람을 휘어잡는 말이었다. 아무렇게나 주워섬긴 것 같은데 묘한 설득력이 있었다. 나는 홀린 듯 입을 열었다.

“일전에도 생각했던 건데. 몽휼, 어쩐지 상서령을 닮아가는 것 같아.”

“그렇습니까.”

몽휼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요 근래 몽휼을 본 적이 손에 꼽는다는 걸 알았다.

그는 무륜의 곁에 붙어서 문부 작업을 거들거나 잔심부름을 하는 등, 무륜과 관련해 온갖 자질구레한 일을 도맡았다. 하지만 모두가 잊고 있던 그의 본래 쓰임은 가장 오래된 그림자이자 오른팔이었다.

그리고 오른팔은 주인이 하고자 하는 일에 따라 검을 쥐기도 하고, 붓을 쥐기도 하는 법이다.

“무력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영원한 평화는 없고, 언젠가 다시 전란의 시대가 오겠지만 그게 그리 가까운 미래는 아닐 겁니다. 그럼 지금이야말로 피 묻은 날붙이를 내려놓고 붓과 서책을 들 때 아니겠습니까. 위사장과 폐하를 위해서도, 우리의 후세대를 위해서도.”

나는 위중혁이 몽휼을 좋아하게 된 이유를 조금쯤 알 것 같았다. 정말로 위중혁답다 해야 할지, 미련퉁이라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자, 그럼 가십시다.”

몽휼이 손뼉을 짝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결에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창살로 다가간 그가 문을 활짝 열며 안내하듯 손바닥을 펼쳤다.

깜짝 놀라 포진한 금군을 봤다. 그들은 미동조차 없었다. 앞만 보는 모습이 진짜 동상 같았다. 시선을 위로 들었다. 나 때문에 습하고 곰팡내 나는 지하 뇌옥의 천장까지 경험하게 된 밀영군 또한 여전히 어둠에 파묻혀 있었다.

“……이렇게 멋대로 빼내도 되는 건가?”

“아니요. 하지만 결과만 좋으면 있던 죄도 없어지는 게 이 바닥 아니겠습니까.”

그게 대체 어떤 바닥인데.

내가 망설이자 몽휼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손목을 잡아끌었다. 허무하리만치 쉽게 끌려갔다.

“나야 그렇다 치는데. 너희는 대체 뒷감당을 어찌하려고.”

진심으로 걱정이 되어 물었다. 몽휼은 여전히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누가 그러더군요. 주군의 마음을 헤아려 움직여야 진정한 충신인 법이라고.”

그 말을 누가 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 * *

몽휼이 향한 곳은 북궁이었다. 어째서 본궁의 침전이 아닌지 나는 묻지 않았다.

북궁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안내는 필요 없었다. 과거 무륜이 머물렀던 방을 지나쳤다. 거기서 더 구석으로 들어가 가장 안쪽의 방문 앞에 섰다. 이제 아주 먼 옛날처럼 느껴지는 재회 이후, 오직 그만 생각하며 머물렀던 곳이었다.

그때의 순수를 나는 아직 그대로 가지고 있을까.

쓸데없이 돌아가는 생각을 멈추려 애쓰며 문을 열었다. 지독한 술 냄새가 확 끼쳤다. 그 냄새는 나를 그날, 그 순간으로 되돌렸다. 아무 말도 못 하고 흐느적거리며 술병을 비우는 무륜을 응시했다.

그는 문을 등지고 있었다. 산발에 홑겹 장포 차림이다. 다행히 시비들이 신경을 썼는지 화로는 두 개였고 내부 공기는 여름날처럼 후끈했다.

“폐하.”

예상치 못한 순간에, 전혀 예상치 못한 형태로 몽휼이 무륜을 불렀다. 왜일까. 심장이 쿵 떨어졌다. 그가 이쪽을 돌아볼까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무륜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몽휼을 무시한 채 재차 술병을 손에 쥐었다.

“폐하께서 명하신 대로 다과를 전하였습니다. 조금 우울해 보이는 것 외에 딱히 상한 곳은 없었으며, 다과도 앉은 자리에서 반절은 드시더이다.”

“그러냐.”

“예. 달리 명하실 게 있으십니까.”

“아니. 이만 가서…….”

무륜이 말을 늘였다. 곧 긴 한숨을 내쉰 그가 말했다.

“이리 와서 술벗이나 하거라.”

몽휼이 기다렸다는 듯 내 등을 떠밀며 바깥쪽에서 문을 닫았다. 어이가 없어 입을 떡 벌렸다. 저 새끼가 미쳤나. 어디 지엄한 황명을-

“힘들구나.”

-까지 생각했을 때, 무륜이 넋두리를 시작했다. 나는 뻣뻣하게 굳어서 오도 가도 못했다.

“여태 힘들지 않은 날이 없었지. 하지만 그와 함께해서 힘든 날도 힘든 줄을 몰랐는데, 설마 그 사람 때문에 힘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정수리부터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 같았다. 무어라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안쪽에서 소용돌이쳤다. 지금 무륜이 괴로워하는 이유는 나 때문이었다. 오로지 나로 인한 힘듦. 그것의 의미가 멋대로 확장되고 변형되어 나를 들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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