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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29화 (129/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29화

“어디 감히 대금제국 황제를 이름으로 부르느냐.”

“신수인데 아니 될 것 있습니까.”

“아니 된다. 그 이름에는 주인이 있으니까.”

내 소유권 주장에 흑월의 낯이 잠깐 어두워졌다. 하나 곧 언제 그랬냐는 듯 본래의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나는 가만히 그를 들여다봤다. 흑린 누에의 비단으로 만든 흑의 무복에 복면. 내가 기억하는 흑월 그 자체였다. 여율령의 저택 중에서도 그와의 추억이 가장 많은 곳. 그곳에서 한 점 변함없는 흑월을 마주하고 있노라니 돌아갈 수 없는 날로 돌아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울렁거리는 속을 꾹 누르며 그에게 잡혀 있던 손을 뺐다.

“아주 돌아온 것이냐?”

“돌아오면 안 됩니까.”

“그럴 리가 있느냐. 여긴 네 집이기도 하다.”

흑월이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머뭇거리며 뻗어진 손이 내 소맷자락을 쥐었다. 나는 그가 하는 대로 두었다. 슬그머니 위로 올라온 그의 손이 다시 내 손을 잡았다. 흑월의 검지가 움직거렸다. 마치 글자를 적는 듯했으나, 그렇다고 하기엔 애매한 움직임이었다.

“이상합니다.”

“무엇이?”

“제게 혀가 있는 것이요.”

그리 말한 흑월이 갉작거리던 손짓을 멈추고 내 손을 꽉 쥐었다. 이번엔 빼내지 못했다. 빼낼 수 없었다.

“혀가 있어 당신께 이리 말을 거는 것이 못내 이상합니다.”

“나도 그렇다.”

흑월이 나를 봤다. 심해와 같은 눈이었다. 너무 짙어서 고요한 것처럼 보이나 그 안을 들여다보면 온갖 기기묘묘한 것이 휘몰아치는.

“이상하고, 좋구나.”

“…….”

그렇게 요동치다 결국 수면에 해일을 만든 찰나.

“도련니이이임!!”

메아리 같은 부름이 빠르게 가까워졌다. 절로 입매가 말려 올라갔다. 흑의 무복을 입은 수십 명의 특급 무사가 비조처럼 하늘을 메우는 광경은 객관적으로 봐도 꽤나 두렵고 웅장했다.

“으허허헝.”

가까이 온 그들의 복면이 눈물로 푹 젖은 것을 보기 전까진 분명 그랬다.

“도련님! 도련님!”

“진정 이화 도련님이 맞는 게지요? 이게 꿈은 아닌 게지요?!”

“다행입니다. 진정 다행입니다.”

여율령의 저택으로 돌아왔던 날이 떠올랐다. 펼쳐진 광경도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 큰 사내들이 눈물을 쭉쭉 뽑아내며 엉겨들었다. 개중 영춘은 끅끅거리며 아주 대성통곡을 했다.

중간중간 ‘내가 도련님 살리려고 무진을 얼마나 헤맸는데, 그리하실 수는 없었다’든가 ‘또 그렇게 가면 진짜 나쁜 새끼’라고 했다. 순간 이 새끼가? 싶었지만 지금의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고, 잘못한 게 있는지라 참았다.

“흐억. 끄억. 이리 다시 만나서, 만나서 정말 꿈같습니다, 도련님.”

영춘이 내 옷자락을 붙들었다. 그 손이 떨리고 있었다. 거기서 느껴지는 진심을 내 어찌 모를까. 마음이 뻐근해졌다. 덩달아 코끝이 찡하여 얼른 웃음부터 지었다.

“우선 이 녀석들과 회포부터 푸십시오. 저와의 이야기는 상황이 진정되면 다시 하시죠.”

내가 뭐라 대답할 틈도 주지 않은 흑월이 그림자에 녹아 사라졌다. 그가 떠난 자리를 보며 손끝을 오므렸다. 하지만 복잡한 심경을 가질 틈이 없었다.

“흐엉엉.”

“흐꿁. 흐꿉.”

눈물을 그칠 줄 모르는 살인귀들이 울먹울먹한 채 나만 보고 있었다.

한숨을 쉬었다. 눈을 한 번 꾹 감았다 뜬 것으로 흑월은 잠시 잊었다. 대신 울며 안겨드는 암묵단을 달래는 데 집중했다. 치대는 걸 밀어내지 않고 하나하나 등을 도닥여 줬다.

그들이 진정되기까진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겨우 훌쩍임이 잦아든 후. 암묵단은 이제 그간 있었던 서러운 일, 억울한 일, 열받았던 일을 죄 토로했다. 닭에게 쪼인 것을 어미에게 일러바치는 흑묘 새끼들 같았다. 애옹, 웨옹, 울어대는 소리에 귀가 따가울 지경이다.

나는 그래도 웃었다. 다시 이런 날을 맞이했다는 것 자체가 꿈만 같았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눈엔 한없이 훈훈한 장면이지만 무륜에겐 그렇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등줄기가 오싹했다. 이 자리에 그가 없어 다행이었다. 그러나 그때, 저 멀리 내당과 외당을 가르는 하얀 담벼락 사이, 반원형으로 난 통로에 무륜이 서 있는 걸 발견했다. 지옥에서 올라온 야차 같은 표정의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밀영군은 들으라.”

어둡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흑흑거리던 암묵단의 고개가 일제히 뒤를 향했다.

“감히 겁도 없이 금국에 침입한 무도한 자들을 전원 추포하라.”

무륜의 주변에 숨어 있던 밀영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암묵단처럼 흑의 무복 일색인 그들이 이쪽을 향해 비산했다. 암묵단의 안색이 굳었다.

밀영군과 암묵단은 예전부터 마주치기만 하면 미묘한 신경전을 벌였다. 전체적인 색깔과 역할이 비슷했던 탓이다. 게다가 무력 자체는 근소하나 암묵단이 분명한 우위를 점했고, 금국 제일의 무력 집단이라는 이명 또한 암묵단이 가져갔다. 밀영군은 티 내지 않았으나 그를 자존심 상해했다.

일단 서로 우군이라 딱히 무력 충돌은 없었으되, 사이가 그리 썩 좋지만은 않은 두 집단. 그것이 밀영군과 암묵단이었다.

비산하는 검은 새들의 모습이 느리게 보였다. 입술을 질끈 물었다. 언제고 이런 일이 한 번쯤은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물론 했다. 하지만 그게 오늘일 줄은 몰랐다.

“암묵단. 들으라.”

이런 형태일 줄도 몰랐다.

“지금부터 전원 이 자리를 벗어나 몸을 숨겨라.”

무륜이 그랬던 것처럼 나 또한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그의 것과 정확히 대치되는 명령을 내렸다.

“단 한 명도 잡히지 마라.”

“존명.”

주인 없는 그림자가 된 지 벌써 수년째. 그들은 실력도 위명도 여전했다. 일단 명이 떨어지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제 주인을 두고 가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물론 이곳이 전장이고, 내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었다면 무언가 달랐을 수 있겠으나 여긴 금성이었다. 그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내가 안전함을 알았다.

무륜이 분노에 찬 일갈을 날렸다.

“잡아라! 절대 놓쳐선 안 된다. 다소간의 상해는 허하겠다. 무조건 잡아들여라.”

“폐하!”

“왜. 팔다리 한 짝씩은 잘라도 좋다 말해야겠느냐.”

양 주먹을 움켜쥐었다. 암묵단은 내게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그들의 팔다리를 논하시다니. 진심이 아님을 아는데도 순간 머리에 불꽃이 튀었다.

“폐하야말로 제가 저놈들을 따라 떠나야 속이 시원하시겠습니까.”

어디선가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무륜의 낯이 서서히 일그러지고, 나는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뒤늦게 깨달았으며, 돌이킬 수 없는 말은 칼날이 되어 그와 나 사이에 꽂혔다.

“네가.”

밀영군도 암묵단도 사라진 자리.

“네가 내게 그리 말할 수는 없다.”

무륜이 곧 죽을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나는 입술만 달싹이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물었다. 흥분하여 해선 안 될 말을 했다. 내가 한 말에 나 또한 놀라 뻣뻣하게 굳었다.

잘못 접힌 서책의 한 장과 같았다. 구겨진 부분을 아무리 다시 펼쳐 문질러도 자국이 남듯, 이미 내뱉은 말은 그대로 상처가 되어 남았다.

“마음에 없던 소리였습니다. 제가 경솔했습니다.”

한풀 꺾인 기세로 말했다. 고작 3장밖에 되지 않을 거리가 그 어느 때보다 멀게 느껴졌다.

무륜은 대답하지 않았다. 매서운 눈길로 나를 쏘아보던 그가 그대로 몸을 팩 돌려 멀어졌다. 잡을 수 없었다. 방금 떠난다며 정인을 겁박한 자가 무슨 염치가 있어 떠나는 임을 잡을까.

나는 그 자리에 붙박여 서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무슨 일인지 걱정이 된 일가식솔이 참다못해 담벼락 너머로 고개를 들이밀고, 밀영군이 되돌아와 나를 추포할 때까지 그저 후회만을 곱씹었다.

* * *

이게 몇 번째 지하 뇌옥행인지 모르겠다. 벽면의 이끼와 불쾌한 습도마저 익숙할 지경이었다.

연행된 나를 본 지하 뇌옥의 간수들이 ‘또 너님이십니까’ 싶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고문과 학대의 전문가들이었고, 뇌물이나 청탁이 일절 통하지 않았다.

극악무도한 범죄자, 혹은 정치범만 오는 곳이 이곳 지하 뇌옥이다. 다시 말해 이미 끈 떨어진 연 신세만 온다는 뜻이다. 그런 놈들에게 뒷돈을 받는 건 자살행위와 다를 바가 없다. 오늘 돈을 받으면 내일은 나란히 지하 뇌옥에 투옥될 테니까.

그래서 간수가 바뀌는 일은 잘 없었다. 한 번 갇힌 죄수도 마찬가지다. 시체가 되어 들려 나갔으면 모를까, 그 외의 이유로 다시 햇빛을 보는 자는 전무했다. 그러다 보니 그들로선 이렇게 지하 뇌옥을 제집 안방처럼 드나드는 내가 귀신보다 더 신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적응하는 생물이라고, 그들은 벌써 몇 번째인 이 기이한 상황을 한마디로 정리했다.

사랑싸움.

지존과 그 위사장쯤 되면 사랑싸움의 규모도 다른 모양이라며 쑥덕거리는 소리를 빼어난 신수의 귀는 놓치지 않았다.

한숨을 쉬며 침대에 모로 누웠다. 밖은 삼엄하다 못해 살벌했다. 금군과 밀영군의 반절은 내가 갇힌 뇌옥 앞에 깔린 듯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아 입이 썼다.

떠나겠다는 말이 홧김에 나온 빈말임을 나도 알고 그도 안다. 하지만 듣는 입장에선 지울 수 없는 불안이 이는 듯했다.

‘그래. 천년의 사랑도 식을 수 있지. 아무리 애틋하였어도 그것은 그때 그랬던 것이라, 그렇게 서로 깊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며 이젠 아니라 할 수도 있는 것이지.’

경악하여 아니라고 소리치려는 내 입을 무륜이 말로 막았다.

‘정말 그렇다 하여도 너는 못 떠난다.’

‘…….’

‘떠나려거든 나를 죽이고 가라. 전에 한 약속은 잊어주마.’

전의 약속이란 죽은 당신을 찾아가겠다는 약속이었다.

‘끌고 가라.’

그게 대화의 마지막이었다. 나는 이렇다 할 변명의 기회조차 잡지 못한 채 여기 갇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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