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28화
짐작이지만 흑월은 그렇게 떠난 이후, 필시 남방의 암묵단에 합류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내 생존 또한 알렸겠지. 모든 것을 알게 된 그들이 금국으로 돌아온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걸 무륜이라고 모를 리 없다.
그렇다. 그는 지금 생트집을 잡고 있었다.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어. 그림자 주제에 선도 없고 격도 없이 어울리다니. 너도 내 앞에서 외간 사내들과 같이 축제를 즐긴 걸 황홀하다는 듯 자랑했었지.”
어이가 없어 입을 벌렸다. 뭔 사내? 외간 사내? 게다가 황홀은 무슨 얼어 죽을!
“전 그때 약관도 못 된 어린애였습니다!”
“그들 중 네게 마음 있는 놈이 섞여 있던 것은 사실이 아니냐.”
그건…… 맞다. 거짓말 못 하는 신수의 혀가 원망스러웠다. 내가 멈칫하자 무륜이 이를 드러냈다. 사나워진 눈매에서 질투심이 타올랐다.
“그게 한 놈일지 여러 놈일지 내가 어찌 아느냐?”
요는 암묵단 전체가 나를 노리는 늑대로 보인다는 뜻이었다. 반면 그들을 친한 형, 혹은 삼촌쯤으로 밖에 보지 않았던 나는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빌어먹을 평범. 빌어먹을 단점. 빌어먹을 의견 차. 방금까지 평범한 사랑에 심취해 있던 마음이 반으로 접혔다.
한숨을 쉬었다. 불편한 화제는 피하는 게 상책이라 피곤하여 이만 돌아가고 싶다 했다. 어차피 여기서 더 돌아다녀 봐야 지금 같은 기분으론 전혀 즐겁지 않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머릿속에 숱하게 봐왔던, 놀러 나와 싸우고 헤어지던 연인들의 모습이 계속 떠올랐다. 그 난리를 치고 이런 의견 차로 헤어지면 그보다 웃긴 일이 어디 있을까.
“…….”
잠깐. 헤어져? 누가. 우리가?
홀로 공포와 혼란에 휩싸여 전전긍긍할 때, 무륜이 홱 몸을 돌렸다. 방향이 황궁을 향하고 있었다. 침묵과 함께 돌린 등. 그 등을 보는 순간 마음이 싸늘하게 식었다.
아무리 화가 났어도 내게 저리해선 안 되는 거다. 내가 어떤 길을 걸어 그에게 돌아왔는데. 게다가 내 말은 듣지도 않고. 세상에 형제와 삼촌을 질투하는 게 말이나 되냔 말이다.
“폐하.”
딱딱하게 무륜을 불렀다. 입에서 고운 소리가 나올 리 만무했다.
“전 사택으로 가보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무륜은 황궁으로, 나는 여율령의 집으로 향했다. 저택으로 향하는 걸음이 천 근 같았다. 마음은 만 근이었다. 유독 길게 느껴지는 길을 걸으며 고뇌하고 한탄했다.
무륜의 마음을 모르지 않는다. 그가 무엇을 걱정하는지도 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사랑을 속삭이고 그의 등을 다독여도 불안은 불식되지 못할 것이다. 그건 꺼지지 않는 불꽃이었다. 일단 생기면 평생을 함께하는 불치병과 같았다.
나는 그가 원하는 건 다 해줄 요량이었다. 평생 북궁에 머물라면 그리할 셈이었다. 거기서 자신만 기다려 달라면 그 또한 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흑월에 대한 건 예외였다. 은인. 형제. 동료. 한 가지 단어로 정의할 수 없는 사람이자 깨물지 않아도 아픈 손가락. 내게 흑월은 그런 의미였다.
“어렵구나, 어려워.”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그의 질투를 기껍다 여긴 스스로가 머저리 같았다.
* * *
아직 해도 다 뜨지 않은 꼭두새벽. 별관의 연무장에 대벌레가 한 마리 서 있었다. 대벌레의 밑에는 그가 흘린 땀방울이 벌써 웅덩이를 이루었다.
위중혁은 멀찍이서 수련을 하며 그런 몽휼을 힐긋거렸다. 몽휼은 기분이 매우 이상해졌다. 예전이었으면 한심하다는 듯 봤을 인간이 지금은 못내 마음이 쓰여 예정에도 없던 수련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리는 저가 있다.
‘술 한 모금 하지 않고 취한 기분이구나.’
몽휼의 낯이 오묘해진 때, 무륜이 등장했다. 위중혁이 더욱 안절부절못했다. 몽휼은 제발 그가 가만히 있길 바랐다. 쓸데없이 마음 써서 ‘폐하, 저놈 좀 봐줍시오’ 했다간 외려 역효과나 날 터이다.
게다가 몽휼은 저가 지금 벌 받는 이유를 잘 알았다. 위중혁은 그가 단순히 황제의 앞에서 깐족거려 그렇다 생각하지만, 아니었다. 저가 그렇게 암묵단 소식을 투척하고 유유히 떠난 후 황제는 위사장과 다툼했다.
정인들 간에 흔히 있는 말다툼이었으나 소식을 들은 모두가 기겁했다. 황제의 지근거리에 있는 자라면 다 알았다. 그 둘이 서로를 얼마나 끔찍하게 생각하는지.
그래서 어쩌면 당연한 일일진대, 마치 천지가 개벽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 원인 제공자인 몽휼은 입맛이 썼다.
황제와 위사장은 살얼음판 위를 걸으며 서로를 위해 살았다. 죽으면 상대방에게 스며들 것처럼 희생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다 둘 사이를 방해하는 것이 전부 없어진 평화로운 날이 오고서야 비로소, 서로에게서 보이지 않던 걸 보게 됐다. 꽤 잔인한 구석이 있는 역설이었다.
‘뭐, 그런다고 헤어질 것 같진 않지만.’
입맛은 썼지만, 또 한편으론 심드렁하기도 했다. 위사장은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어릴 적부터 봐온 황제는…… 설령 위사장이 이제 너랑 못 살겠다고 산으로 잠적한다 해도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 산을 홀랑 불태운 후 위사장을 포획해 올 사람이었다.
“이만 됐으니 내려와라, 몽휼.”
연무장에 와서도 한참을 팔짱 끼고 지켜보던 무륜이 말했다. 간신히 발을 땅에 디딘 몽휼이 휘청거렸다. 위중혁이 들썩했다. 당장 달려와 부축하고 싶은데 무륜의 눈치가 보인다고 얼굴에 써 붙여져 있었다.
하, 저 둔치를 대체 어쩌면 좋을꼬. 하지만 한편으론 그런 점이 귀여워 보이니 남 말할 것 없다. 저도 중증이었다.
무륜은 몽휼과 위중혁을 데리고 근처의 정자로 갔다. 정자엔 이미 세 개의 반상과 각각의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무륜을 모신 세월이 세월인지라 그의 속내가 훤히 읽혔다. 분명 위사장과의 일로 상담을 받고자 이리 판을 까는 거였다.
몽휼이 사악하게 웃었다. 무륜에겐 안 보이고 위중혁이 있는 각도에서만 보이는 웃음이었다. 흠칫한 위중혁이 고개를 붕붕 저었다. 몽휼은 본 척도 하지 않았다. 차를 호로록 마신 그가 입을 열었다.
“폐하. 아침나절에 소식이 하나 더 들어왔는데 말입니다.”
“소식?”
무륜이 곧바로 가시를 세우며 되물었다. 몽휼은 약과를 주워 먹으며 말도 같이 주워섬겼다.
“음. 제가 벌을 서느라 그만 보고하지 못했습니다.”
약과를 쥔 손이 달달 떨렸다. 벌의 후유증이었다. 괜찮다. 이쯤이야 참으려면 못 참을 것도 아니다. 하지만 투구벌레의 애간장을 태운 건 용서할 수 없었다. 몽휼은 저가 생각해 놓고 저가 오그라들어 몸을 떨었다.
“지금 저택에 와 있답니다.”
“누가?”
“암묵단이요.”
“뭣?!”
무륜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다 반상에 정강이를 찧은 것을 똑똑히 보았건만, 아프지도 않은지 정자 앞을 좌우로 오갔다. 초조함을 숨길 생각도 없으시다.
“……그 새끼는 있다더냐?”
“어느 새끼를 말씀하시는지.”
“흑월인지 백월인지 하는 그놈 말이다.”
“암묵단이 왜 돌아왔겠습니까.”
몽휼이 약과를 두 개째 집어 들며 말했다.
“정확히 말해, 그가 암묵단을 데리고 돌아온 겁니다.”
설명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인상을 구긴 무륜이 장포를 휘날리며 정자를 떠났다. 지존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여쭐 것도 없었다.
이화가 없는 사이 근무를 맡은 위사들은 공식적인 행차인지, 사적인 행차인지 물으려다 관뒀다. 태감 영감이 생불 같은 미소를 지으며 황제의 외출복과 비교적 평범한 잠행복을 동시에 챙겼다. 연륜이 묻어나는 신속한 움직임이었다. 서까래에 달려 있던 밀영군은 스르륵 주인의 뒤를 따랐다.
* * *
김이 나는 찻잔을 앞에 두고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이른 아침부터 어찌나 까치가 울던지. 도저히 잘 수가 없어 일어난 참이었다.
과거, 공부를 할 때 자주 찾았던 정자로 왔다. 8면에 격자창이 달려 있어, 위로 올리면 정자가 되고 아래로 내려 닫으면 작은 골방이 되는 정자였다.
격자창을 모두 올리라 하고 가운데 탁자에 찻잔과 주전부리를 놓았다. 아침에 밥 대신 단 걸 먹으면 아니 된다 엄하게 잔소리할 사람도, 식사를 준비해 주면서 여율령 몰래 당과를 쥐여줄 사람도 이제 없다.
이게 다 까치 탓이다. 안 그래도 무륜과 그리된 것이 사흘 전이었다. 한창이던 우울감이 더 짙어졌다. 고갤 들어 아침 햇살을 받은 못을 응시했다. 날이 자못 추웠다. 겨울이 머지않았다는 증거였다.
모든 것이 얼어붙는 계절. 그 계절을 그리 좋아하지 않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차가 다 식도록 멍하니 있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천신 같은 임의 얼굴이 눈꺼풀 밑에서 아른아른했다.
스륵. 천개처럼 드리운 누군가의 손이 내 이마를 쓸었다. 흐트러진 머리칼이 귀 뒤로 넘어갔다.
“그와는 끝내기로 하신 겁니까.”
“그럴 리가. 그저 사소한 의견 차가 있었을 뿐이다.”
불청객에도 놀라지 않았다. 청하진 않았으되, 그는 이 집에 드나들 자격이 있는 자였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아 내리며 물었다.
“그보다 그건 어찌 알았느냐. 신수씩이나 되어선 생쥐처럼 엿보았느냐.”
“엿본 것이 아니고 그냥 보았습니다. 세상 모든 그림자는 제 눈이고, 제 귀입니다.”
멈칫했다. 그는 흑월의 이능이 둘 이상임을 뜻했다. 사월린이 인간들의 생각을 읽고, 날씨를 부리고, 시선만으로 물건을 옮긴 것처럼 그 또한 그림자를 뒤집어쓰는 것 외의 무언가가 또 있었다.
“그리 대단한 재주는 아닙니다. 반절은 신수이고 나머지 반절은 인간인지라 잔재주는 많지만 진짜 신수에 비할 바는 못 됩니다. 무엇보다 저는 격을 높일 수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 수명이 다 되면 그걸로 끝입니다. 그대로 죽겠죠.”
흑월이 가볍게 쥐어졌던 손을 슬쩍 뒤집어 역으로 내 손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무륜보단 훨씬 오래 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