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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27화 (127/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27화

“이미 제게 새 짝이 생겼음을 아는 분께서 그러십니까.”

“그럼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았어야지.”

“……방금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앞으론 그럴 일 없을 겁니다.”

너무 놀라서 무륜의 손을 확 치웠다. 그때 본 위중혁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분해죽겠다는 듯, 어쩔 수 없다는 듯. 한편으론 그래, 이리되는 것이 차라리 낫다는 체념의 기색도 얼핏 읽혔다. 위중혁이 그대로 뒤를 돌아 멀어졌다.

나는 그의 등판을 보며 생각했다.

‘끝났구나.’

타낙한 때와 묘하게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기분이었다. 후련하기보다 잘되었다는 마음이 컸다. 그래. 정말 잘된 일이었다. 다음 순간, 물그림자처럼 흑월이 떠올랐다. 그저 안쓰럽고 애틋한 그를 일렁이는 마음 한구석으로 다시 밀어 넣었다.

반면, 무륜은 신이 났다. 그날 종일 상태가 좋더니 그게 밤까지 이어졌다. 그는 그 우람하고 장대한 용체를 마구 휘둘러 내 혼을 쏙 빼놨다. 덕분에 며칠은 허리를 붙잡고 끙끙거려야 했다.

거기서 시간이 조금 더 지나, 오늘이었다. 무륜과 함께 축제가 한창인 거리를 걷다 보니 문득 궁금해졌다. 목석같은 위중혁의 마음을 가져간 두 번째가 과연 누구일지.

“당신은 아시지요.”

“무얼?”

“몽휼과 위중혁이 사귀는 상대 말입니다.”

무륜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주 웃겨죽겠고 기꺼워죽겠다는 기색이었다.

“사람 마음이 가는 길은 상선도 모르신다 했지. 그래도 설마 그 둘이 연을 맺을 줄은 진정 꿈에도 몰랐느니.”

“……!”

상사병과 화병의 근원이 서로 사귄다는 뜻이었다. 나는 꽁, 하고 얼어붙었다. 아니 그, 뭐, 어렴풋이 의심은 했다. 하지만 사실이라 못 박는 말을 듣자 예상한 것보다 충격이 컸다.

“몽휼에게 정인이 있는 걸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게 당하였을 때 알았어야 했던 것을요.”

한탄하는 내 입에 무륜이 당과를 물려줬다. 손끝으로 한입에 다 먹지 못한 당과를 쥐었다. 무륜이 다른 손을 꼭 잡고 나를 이끌었다.

축제의 현장은 좋게 말해 시끌벅적했고, 나쁘게 말해 난장판이었다. 거리 곳곳에 악사와 기인들이 각자 사람을 모아 놓고 공연을 선보였다. 하얗고 노란 등이 서리 내린 밤을 밝히고, 그 빛이 닿지 못하는 곳은 도깨비불이 대신했다.

사람들은 추위도 잊은 채 초겨울 밤의 축제를 즐겼다. 하얗게 부서지는 무수한 입김마저 아름다운 밤이었다. 거리엔 사람과 영물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도깨비 씨름! 도깨비 씨름! 이기면 판돈이 열 배!”

“이런 미친. 도깨비를 씨름으로 어떻게 이겨?”

“도깨비가 한 다리 들고 하는 도깨비 씨름!”

“도전!”

물론 사건, 사고도 많았다.

“뭐야? 한 다리 들고 한다며?!”

“들었다.”

“들긴 뭘 들어?”

“다리 사이의 세 번째 다리를 들었다.”

……미친 건가? 너무 황당해서 고개가 팩 돌아갔다. 전혀 상관없는 나도 이렇게 황당할진대 상대는 얼마나 어이가 없을까.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이 미친놈이?!”

곧바로 옥신각신 드잡이질이 시작됐다. 그 옆으로 입에 전낭을 문 고양이가 도다닥 달려갔다. 멀어지는 고양이의 꼬리가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도둑이야! 저 고양이 잡아라!”

“어? 내 주머니가 어디 갔지?”

소매치기도 횡행했다.

힐긋, 옆의 잘나신 임을 봤다. 아무리 잠행복이라지만 특유의 귀티는 숨길 수 없는 법. 그저 걷기만 해도 사람들이 돌아보는 헌앙한 풍모의 무륜은 좀도둑 입장에선 침이 절로 흐르는 먹잇감이었다.

하지만 영물도 도깨비도 얼씬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가까이 오다, 옆에 있는 나를 보곤 딸꾹질을 하며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했다.

“평화롭군.”

“예. 정말입니다.”

넘어진 자의 등에 창을 꽂고 자신은 등 뒤의 칼에 목숨을 잃는, 피를 피로 덮는 생지옥은 다신 없었으면 했다.

‘그는 불가능한 바람이겠지.’

대륙이 금국으로 일통되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금국의 힘이 약해진 어느 날에 내전이 일어나, 다시 지한국과 남방 5국 같은 소국들이 떨어져 나갈 거라는 데 여율령의 저택을 걸 수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무륜의 치세에는 없었으면 한다. 아니, 없도록 할 것이다.

“음?”

그렇게 정처 없이 걷다 의외의 면면과 마주쳤다. 나란히 걷고 있던 몽휼과 위중혁이었다. 두 사람의 안색이 굳었다. 나도 덩달아 긴장했다. 왜 긴장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몸이 그랬다. 신이 난 건 무륜뿐이었다.

“둘이 예서 무얼 하나?”

다 알면서 묻는 모습이 얄밉기 짝이 없었다.

“걷다가 우연히 마주쳐서 그냥 같이 걷고 있었습니다.”

무륜이 다 안다는 걸 모르는 위중혁이 삐걱거리며 답했다. 반면 무륜이 다 알면서 저러는 걸 아는 몽휼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우연이라. 그래. 우연이란 말이지.”

실실거리는 웃음이 내가 보기에도 얄밉기 짝이 없었다. 위중혁의 낯이 거멓게 죽었다. 그가 뒤늦게 들켰음을 알았다. 보다 못한 몽휼이 나섰다.

“마침 잘됐군요. 휴가 중에 긴급한 연락을 받았습니다.”

무륜의 눈이 가늘어졌다. 정말 긴급한 연락을 받은 건지, 단순한 말 돌리기 용인지 일단 들어보겠다는 태도였다. 몽휼이 ‘아무리 급해도 긴급 연락으로 연막을 치겠습니까’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암묵단이 국경을 넘었다고 합니다. 무진에서 금국으로 들어왔다더군요.”

너무 놀라 눈을 홉떴다. 무륜의 안색도 일변했다. 그가 정색하고 되물었다.

“언제?”

“한 며칠 됐답니다.”

“그걸 왜 이제 보고하나.”

몽휼이 바로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당당히 대답했다.

“휴가였잖습니까.”

“…….”

“사실 지금도 휴가니까 시간 외 업무입니다만. 워낙 중요한 사안인지라 만난 김에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 새끼가? 당당히 엿을 먹은 무륜이 으르렁거리려던 찰나, 몽휼이 잽싸게 위중혁을 데리고 내뺐다.

“그럼 저흰 이만. 즐거운 축제 되십시오.”

두 사람의 모습이 군중 속으로 사라졌다. 어쩐지 묘한 기분이었다.

“저 모습을 보니 뭔가 확실하여 시원섭섭하네요. 당하께서 저리 힘없이 팔랑거릴 분이 아니신데.”

“잠깐. 시원은 그렇다 치는데 섭섭이라니.”

아뿔싸.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진짜 섭섭하진 않습니다.”

“그럼 그냥 시원하다 해야지. 굳이 시원섭섭이라는 말을 쓸 이유가 있느냐?”

왜 놀러 나온 연인들이 길바닥에서 눈 부릅뜨고 싸우는지 그 이유를 지금 알 것 같았다. 동시에 찬물을 끼얹은 양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음. 그 단어 자체가 한 단어 같아서 아무 생각 없이 쓴 겁니다. 폐하의 말씀을 들으니 제가 틀렸군요.”

무륜의 걸음이 멈췄다. 그의 목소리가 한층 가라앉았다.

“내게 폐하라고?”

구덩이를 피하려다 똥을 밟았다.

“아니, 그 또한 아무 생각 없이-”

“생각이 없던 것이 아니라 암묵단에 정신이 팔린 게 아니냐. 정확히는 흑월인지 뭔지 하는 놈에게.”

미간을 찌푸렸다.

“거기서 흑월이 왜 나옵니까.”

무륜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질투해 주는 건 기뻤지만 이런 식은 곤란했다. 흑월은 내게 있어 가장 아픈 손가락이었다. 타낙한처럼 묻으려면 묻을 수 있는 존재도 아니었다.

나는 슬쩍 무륜의 손을 놓았다.

“오늘은 이만 들어가죠.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내가 잘못했다.”

무륜이 곧바로 사과해 왔다.

“마음이 불안해져서 그랬다. 네 마음을 상하게 할 생각은 아니었다.”

“압니다. 괜찮습니다.”

대답한 직후, 숨이 턱 막히고 머리가 핑 돌았다. 비틀거리는 나를 무륜이 부축했다. 그가 안절부절못했다. 나는 쓰게 웃었다.

“아니. 괜찮지 않군요.”

“망설을 할 거면 차라리 그냥 입을 다물어라.”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 내 몸 상태를 걱정한 말이었다. 그걸 알기에 차마 ‘정말로 괜찮다’는 거짓말은 할 수 없었다.

“왜 하격인 영물과 상격인 신선은 거짓말을 할 수 있는데, 신수는 못 할까요.”

짜증에서 발로한 근원적 물음이었다. 무륜은 답을 알지 못했다. 그가 내 등을 가만가만 쓸어내리며 내 눈치를 봤다.

“우린 이런 사소한 일로 마음 틀어지거나 싸울 일이 없을 줄 알았습니다.”

해석하자면 엄청나다는 말로도 부족할 어마어마한 일들을 겪고 이어졌는데도 여타 연인들처럼 이리 마음 상하는 의견 차를 보이기도 한다는 뜻이다.

무륜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하도 넓어서 잘 접히지도 않는 어깨를 꾸깃꾸깃 접어가며 그가 내 눈치를 봤다. 그 옛날 뒷산 살던 떠돌이 개가 딱 이랬다. 귀하게 얻은 육포를 훔쳐 먹고 내가 울자 앞에 와선 안절부절못했더랬지.

그때의 기억과 지금의 무륜이 겹쳐 절로 웃음이 났다. 손을 들어 불안에 젖은 그의 뺨을 매만졌다.

“나무라거나 한탄하는 게 아닙니다. 외려 그 반대지요. 우리도 평범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파멸적이고 맹목적이지만은 않은, 서로의 사소한 부분과 단점까지도 볼 수 있는 사랑.

“전 지금 기분이 아주 좋습니다.”

“그런가.”

무륜이 내 손 위에 제 손을 겹쳤다.

“그럼 암묵단에 수배령을 내려도 되겠구나.”

아니, 잠깐만.

“이야기가 왜 그렇게 됩니까.”

“주인 없는 강력한 무력 집단이 멋대로 국경을 넘었다는데 그럼.”

“주인이 없긴 왜 없습니까. 여기 멀쩡히 살아 있는데.”

암묵단은 여율령의 사설 조직이었다. 그 소유권을 말하자면 당연히 아들인 내게 있지 않나. 그러나 무륜은 침묵했다. 그 침묵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하다.

“하. 그렇게 나오실 겁니까?”

그의 생각이 훤히 읽혔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내게서 암묵단을 떼어 놓을 셈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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