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26화
외전2 위난제(衛卵祭)
위난제의 기원은 한 영물로부터 시작된다. 불꽃처럼 붉은 깃을 두른 채 뜨고 지는 해를 지키던 거대한 새. 격은 영물이나, 힘은 신수에 필적했던 그 새는 상선이 하늘비석 경주를 열기 전에 죽고 말았다.
어쩌다 죽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이름도 남지 않았다. 다만 어느 계절에 죽었는지는 안다. 가을과 겨울이 맞물린 계절이었다. 거대하고 자비롭지만 다소 멍청한 구석이 있는 해는 그때부터 겨울에만 늦게 뜨고 일찍 지게 됐다.
사람들은 하계를 위해 해를 이끌던 새를 기리며 겨울에 제를 지냈고, 그 제사가 오늘날에 와서 축제가 되었다.
“그런데 왜 이름이 위난제(衛卵祭)입니까.”
“그 영물에겐 알이 하나 있었다. 영물의 알이니 그리 쉽게 죽진 않았을 테지만, 반대로 어쨌든 가장 약한 상태에 어미도 없으니 그 알이 어찌 됐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은 다만 제사로 기원했지. 부디 살아 있어 달라고. 어미 없이도 잘 태어나 달라고.”
약과를 오물거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정말로 살아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무륜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나를 돌아봤다. 그의 머리엔 불새의 반가면이 비스듬히 씌워져 있었다.
“영물과 신수는 사람들의 기원을 먹기도 하니까요. 아직 태어나지 못했고 긴 시간이 흐른 탓에 ‘자아’는 어찌 됐을지 모르지만, 숨이라면 아직 붙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다.”
무륜은 이해하지 못했다. 꼭 알아야 하는 이야기도 아닌지라 나는 그의 손을 잡아끌며 말을 돌렸다.
“그냥 그렇다는 겁니다. 그보다 저쪽으로 가보죠. 기인이 입에서 불을 뿜는다고 합니다.”
그는 순순히 나를 따라왔다. 둥글게 자리를 잡은 사람들 가운데, 민머리의 사내가 횃불을 들고 있었다. 입에 든 독한 술이 뿜어지고, 술은 그대로 불길이 됐다. 제법 먼 거리임에도 열기가 느껴졌다.
깜깜한 밤을 밝히는 불. 그 불을 닮은 새의 알은 지금도 대륙 어딘가에 잠들어 있을 것이다.
‘여율령에게 물어보면 알려줄 텐데.’
아예 알 수 없다면 모를까. 알 것 같은 사람을 알아서 그런지 묘한 궁금증이 가시질 않았다. 곧 다시 만날 것처럼 굴었던 그는 3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느냐.”
“별것 아닙니다.”
“지한국의 일 때문이냐.”
무륜이 오해를 했다. 하나 충분히 할 법한 오해였다. 전쟁 이후 지한국은 내전 상태에 돌입했다. 본격적으로 치고받는 것은 아니고 물밑 작업 위주였다. 하나, 피비린내 나는 암투가 있었다는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 3년이 걸렸다. 금국으로선 나쁠 것이 없었다. 경쟁하는 국가, 그것도 직전까지 창칼을 들이밀던 나라가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우방국이어도 내심 기뻐할 일인데 그것이 적국인 이상 더 말해 무엇 할까.
하지만 지한국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묘하게 껄끄러웠다. 무륜과 같은 눈으로 나를 보던, 지금은 죽고 없는 사내 때문이었다.
“그는 아닙니다.”
신수는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인간의 마음을 가진 지금도 그 영향은 남아 있다.
“아니었는데 당신의 말로 인해 방금 생각이 났군요.”
잠행에서 폐하라고 부를 순 없었다. 혹시 몰라 이름도 삼갔다. 대신 ‘당신’이라는 말을 많이 썼다. 거리감이 있는 상대를 부를 때 쓰는 느낌보단 이제 막 혼인한 자가 제 짝을 부르는 느낌에 가까웠다.
무륜도 그것을 알기에 이름을 안 부른다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살을 섞을 때 실수로라도 ‘폐하’라 부르면 이틀을 토라지는 사람이 말이다.
“아직도 타낙한, 그 새끼를 종종 떠올리나?”
“음. 아니라곤 못 하겠군요.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새로 지한국의 왕이 된 자가 신경이 쓰입니다.”
새 왕은 미구르였다. 그는 즉위하며 새 이름을 얻었다. 지한국의 유지를 이어받는다는 뜻으로 위지한(衛之韓)이라. 이름 또한 ‘한’으로 끝나는 한 왕조 특유의 형식을 취했다.
나는 그제야 무감정하게 왔다 무감정하게 돌아갔던 그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얼음 같은 겉면을 한 채 속에는 불같은 야망을 품고 있던 자. 그런 자가 왕이 됐으니 쇠락하던 지한국이 다시 옛 광명을 찾는 것도 그리 먼 일은 아니리라.
“그래 봤자 일개 왕이지.”
일견 오만한 황제의 깔봄처럼 느껴지는 말의 속뜻을 나는 바로 알아들었다.
금국의 황실에 백호가 사는 것은 이제 온 대륙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그 백호와 친분이 있는 흑룡 또한 황궁을 제집처럼 들락거리고, 전쟁 이후엔 보이지 않으나 현무가 백호의 편에 섰던 것은 지금도 사람들 입에 회자된다.
“그렇죠.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당신을 염려하고 지키는 게 제 일이니까.”
살짝 찌푸려졌던 무륜의 미간이 단번에 펴졌다.
그가 군중 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입을 맞췄다.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는 입맞춤 정도엔 누구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래도 사람 많은 곳에서 이리하는 게 영 익숙하지 않아 낯이 미미하게 붉어졌다.
“이리 순진하니 내가 마음을 놓지 못하는 것이다.”
“거짓부렁 마십시오. 제가 순진하지 않고 잘 벼린 칼 같았어도 지금과 똑같았을 것이면서.”
지금과 똑같다는 건 어차피 들킬 밀영군을 붙이고, 내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보고를 받고, 위사들을 교육하며 몸이라도 맞댔다간 그날 밤새도록 나를 괴롭힘을 말함이었다.
“감시까진 그렇다 치는데, 위사들의 교육까지 으르렁대심은 좀 과한 게 아니십니까.”
몽휼이 들었다면 ‘감시를 그렇다 치는 점에서 이미 글렀습니다’라고 하겠지만 이 자리에 그는 없었다. 황제의 가장 오래된 그림자는 드물게도 휴가를 받았다. 정확히 말해, 요 근래 생긴 연인과 시간을 보낸다며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했다.
몽휼이 연애 중이라는 게 알려진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간 어찌나 잘 숨겼는지 눈치도 만인지상인 무륜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가장 먼저 안 것은 놀랍게도 위중혁이었다.
대략 한 달 전. 어느 명망 있는 가문의 고명딸이 몽휼에게 반하는 일이 있었다. 대체 어쩌다 그리된 건지는 아무도 모른다. 무륜과 머리를 맞대고 추측하길, 황실 행사에 참석했다 홀로 마음을 품은 것은 아닌가 할 뿐이었다.
무륜이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대체 어쩌다 저런 놈을.”
“폐하의 곁을 소리 없이 지키는 진중한 그림자…… 같은 두루뭉술한 느낌 자체에 반한 것일지도 모르죠.”
아무 말이었는데 뱉고 보니 그럴듯했다. 수군거리다 몽휼을 봤다. 기둥에 기대서 쩌억 하품을 한 몽휼이 목덜미를 긁적였다.
“음? 뭡니까?”
무게감이라곤 요만큼도 없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가문의 금지옥엽 막내딸인데 몸도 약하다 했다. 그런 그녀가 상사병으로 드러눕자 가문에선 난리가 났다. 곧바로 수도에서 이름 높은 매파가 몽휼을 찾았다. 몽휼은 질색을 하며 피했다. 홀몸인데 질색을 하는 것이 이상하긴 했지만 그냥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고명딸이 매일 밤 눈물로 지샌 탓일까. 가문은 상상 이상으로 끈질겼다. 나중엔 몽휼이 제 장기를 십분 발휘해 숨어버리자 이번엔 매파가 아니라 전문 살수를 고용했다. 칼이 아닌 연모의 편지를 전할 용도로.
돈을 얼마나 처먹였는지 특급의 살수는 세상 시름을 다 짊어진 낯으로 나타나 슬그머니 연서를 내밀었다. 그때는 마침 나와 무륜이 잠행을 나온 참이었고, 몽휼은 그런 우리의 옆에 있었으며, 살수의 등장으로 인해 숨어 있던 밀영군까지 죄 튀어나와 살기를 뿜어댔다.
그렇다. 아주 난장이었다.
연서를 받은 몽휼은 대뜸 살수의 면상을 후려갈겼다. 너무 예상 밖의 행동이라 누구도 반응하지 못했다. 살수도 마찬가지였다.
얼결에 뺨을 얻어맞은 그는 곧 정신을 차리고 몽휼을 찢어 죽일 것처럼 노려봤다. 하지만 끝내 암기를 꺼내진 않았다. 그 엄청난 직업의식에 박수를 보내주고 싶었다.
누굴 죽일 목적으로 온 것도 아니고, 배후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잡아서 고문할 이유도 없었다. 결국 어영부영 살수를 보내줬다. 몽휼은 구겨진 연서를 펴지도 못하고 접지도 못했다. 그 꼴을 보던 위중혁이 말했다.
“가서 직접 말하게.”
흠칫한 몽휼이 위중혁을 봤다. 그렇게 동요하는 모습은 처음이라 제법 놀랐다. 하지만 그것도 이어진 위중혁의 말에 비할 건 아니었다.
“나는 이미 마음을 나눈 자가 곁에 있다고.”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누가? 몽휼이? 그런 의미를 담은 수십 쌍의 눈이 몽휼을 향했다. 뻘뻘 땀을 흘리던 몽휼이 미간을 찌푸렸다.
“잠깐. 뭡니까, 그 눈들은.”
나와 무륜이 얼른 다른 곳을 봤다. 밀영군은 잔상만 남긴 채 각자 자리로 흩어졌다. 몽휼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허’ 하고는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아니, 대체 사람을 뭘로 보는 겁니까.”
뭘로 보긴. 몽휼로 보지. 위중혁을 놀리는 걸 삶의 낙으로 알고, 행동에 진중함이 없으며, 충심은 높게 쳐줄 만하나 기본적인 촐싹임을 내재하고 있는.
생각해 보면 위중혁의 비유가 딱 맞았다. 몽휼의 평소 모습은 물 위를 부산스레 가로지르는 소금쟁이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위중혁에게도 짝이 생겼다는 걸 알게 됐다. 위씨 가문의 가주 위혁강이 화병으로 드러누웠다는 소문이 퍼지고, 그 이유가 위중혁의 연애 때문이라는 말이 돈 것이다.
위중혁에게 이번엔 또 무슨 일이냐 묻자 그가 잠깐 나를 응시했다. 평소와 달리 깊이 들여다보는 시선이었다. 만 년이 지나도 변함없는 꽃 한 송이를 보는 눈이라 심이 철렁하여 말을 잃었을 때, 뒤에서 불쑥 나온 손이 내 얼굴을 가렸다.
“보지 마. 닳는다.”
시야가 가려져서 다행이었다. 그때 내 얼굴은 아마 잘 익은 사과보다 붉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