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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23화 (123/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23화

상대를 확인한 위중혁이 움칠하곤 한 자나 뺀 검을 도로 넣었다. 오. 그래도 아군이라고 검을 뽑진 않는구나. 신기하게 보는데 위중혁이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뭐 하는 짓이냐. 미쳤느냐?”

몽휼은 들은 척도 않고 무륜을 봤다. 감히 황제의 면전에서 다툼을 벌인 것에 대한 처분을 기다리는 것이다.

“잘했다.”

무륜의 치하에 몽휼이 어깨를 폈다. 그는 여태 몽휼이 받고 있던 ‘대벌레 형’도 없던 것으로 해주었다. 공치사를 마친 그가 이번엔 위중혁을 봤다.

“감히 황제의 집무실에서 웬 소란이더냐.”

“…….”

위중혁이 간신배와 우군(愚君)을 보는 눈으로 둘을 봤다. 손으로 얼굴을 짚었다. 나서지 않으려 했다. 정말로 어지간하면 나서지 않으려 하였는데…….

“농이 지나치십니다. 어떻게 봐도 몽휼이 잘못하지 않았습니까.”

무륜의 눈이 위험한 빛을 띠며 휘어졌다. 분명 웃고 있는데, 웃는 게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고 입을 다물었다. 몽휼이 슬금슬금 탈출을 시도했다. 위중혁이 눈치 없이 말했다.

“그럴 것 없다. 모시는 주군에게 부족함이 있다면, 그를 메우는 건 신하의 역할이니.”

결국 무륜이 부족하다는 뜻이었다. 진해를 제외하고, 이 자리에 있는 모두의 목을 칠 수 있는 분의 살기가 짙어졌다.

문제는 위중혁이었다. 그는 제가 망언을 하였다 부복하지도 않았고, 섬기는 주군의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다. 외려 특유의 담담한 시선으로 살기등등한 무륜을 올곧게 마주했다.

“네가 제정신이 아니구나.”

“저는 언제나 제정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섬겨야 할 주군을 연적으로 보느냐?”

“그것이 그렇게나 이상한 일입니까.”

예상치 못한 반문에 무륜의 입이 다물렸다. 위중혁이 진지하게 말했다.

“폐하께선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제 목숨을 다해 보필할 유일한 주군이십니다. 그는 결코 변치 않을 겁니다.”

대나무보다 올곧은 진심이었다.

“또 저는 위사장 여이화를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리 됐느냐곤 묻지 마십시오. 사람 마음이 불이나 칼처럼 선명하고 뚜렷한 것이었다면, 애당초 이 길에 들어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위중혁이 딱 그답게 말했다. 왼눈에는 여전히 시퍼런 멍이 달려 있었다.

“저는 앞으로 온 힘을 다해 폐하를 섬길 것이며, 위사장의 마음을 제게 돌리려 애쓸 것입니다.”

이때까지 그래 왔듯 무륜을 주군으로 성심을 다해 섬기되, 그 정인인 나에 대한 마음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어이가 없다고 해야 할지. 그야말로 위중혁답다고 해야 할지.

이번에도 그저 지켜보기만 하던 진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개판이군.”

솔직히…… 동감이다.

“하하.”

살기 어린 웃음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등 뒤로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여봐라. 밀영군 게 있느냐.”

무륜이 위사들도 아니고, 금군도 아니고, 밀영군을 찾았다. 그 저의를 알게 되는 것이 두려워 당장 무륜의 손에 깍지부터 꼈다. 비로소 사태의 심각함을 알아차린 몽휼이 재빨리 위중혁을 끌어냈다.

“놔라.”

“놓긴 개뿔. 냉큼 따라 나와라, 이 무식한 투구벌레야.”

옥신각신하며 두 사람이 집무실을 나섰다. 무륜은 제 손을 내어줬을 뿐, 여느 때처럼 마주 잡아오지 않았다. 머뭇거리다 손가락을 얽었다. 움찔하긴 했으나 여전히 반응은 없었다.

“폐하.”

“어이 부르냐.”

아주 냉기가 풀풀했다. 나는 결국 비장의 수를 꺼내 들었다.

“무륜.”

움찔의 크기가 달랐다. 그래. 이런 점이 사랑스럽다. 고작 내 말 한마디에 일희일비하는 것도, 무륜이라 이름을 불러주면 좋아하는 소박한 점도.

“계속 그리 토라져 계실 겁니까.”

“토라지지 않았다.”

“그럼 삐졌다고 하지요.”

“……삐지지 않았다.”

“지금 폐하의 상태를 세간에선 ‘토라졌다’ 혹은 ‘삐졌다’고 합니다.”

잘난 눈썹이 재차 꿈틀했다.

“그러지 마세요. 서로 사랑만 해도 짧은 삶이 아닙니까.”

별생각 없이 한 말이었으나 말하고 보니 정말이었다. 내가 백호이고 그가 인간임에, 더욱 깊은 의미를 가진 말이기도 했다. 나와 같은 것을 생각한 것이 분명한 무륜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다 옳다.”

그가 비로소 손가락을 마주 얽어왔다.

“전 당신밖에 없습니다.”

“더 말해다오.”

무륜이 어리광을 부리듯 제 머리를 내 어깨에 기대왔다. 낮게 웃으며 그의 원대로 해주었다. 내가 아는 온갖 예쁜 말을 다 쏟아냈다. 중간에 질린 표정의 진해와 눈이 마주쳤지만 모른 척했다. 손을 들어 무륜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어쩐지 체온이 평상시보다 높다.

“더우십니까?”

“조금.”

“업무과 과중하여 머리에 열이 오르신 모양입니다. 잠시 산책이라도 가시지요. 뜰에 철쭉이 참 예쁘게도 피었더이다.”

진해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가 세상의 시름은 다 짊어진 낯으로 말했다.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바다가 절 부르는군요.”

누가 들으면 어부의 운명을 타고난 뱃사람인 줄 알겠다. 터덜터덜 진해가 창가로 걸어갔다. 그때까지도 아무 생각 없다가 그가 돌아가던 방식이 뇌리를 스쳤다.

위금성에선 날이 흐려 본 사람이 적었고, 귀향길은 산이나 들이라 군사들 외엔 보지 못했다. 그리고 여긴 백만 명이 밀집한 대금제국의 수도였다.

“잠깐……!”

쿠르릉. 창문을 넘어가며 거대한 흑룡으로 변한 진해가 그대로 승천했다. 그의 몸이 구름 사이로 들어갈 때마다 비늘에 스친 구름이 천둥을 토했다.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무륜이 내 어깨를 도닥였다.

“어차피 이리될 일이었다. 외려 잘되었지 않으냐. 이제 백호만이 아니라 흑룡 또한 금국에 깃들었다, 그리 소문이 나면 감히 금국에 이를 드러낼 놈들은 없을 것이다.”

“예. 그렇겠지요.”

나는 백호였지만 ‘이화’의 자아를 가지고 있다. 그 ‘이화’의 흔적은 궁 안 곳곳에 남아 있었고, 기억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래서 신료는 이렇게 생각했다. 위사장 여이화가 백호의 힘을 얻어 돌아왔노라고. 그가 떠난 것도 애당초 그 힘으로 황제를 보필하기 위함이라고.

판단을 마친 귀족들은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이전에 비할 수 없이 열렬한 구애가 시작됐다. 이유를 몰랐는데 몽휼이 슬쩍 귀띔해 줬다. 이미 알게 모르게 파벌 싸움이 시작되었다고. 내가 보기엔 제정신이 아니었다.

전쟁이 끝난 직후다. 남은 귀족 가문은 전쟁 전의 반수밖에 되지 않았다. 그 소수의 가문들이 무륜의 손에 작살날까 가능한 내 선에서 무마했지만, 진해는 다르다. 사고방식 자체가 신수인 그가 귀찮은 날파리들을 어떤 식으로 처리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팠다.

“폐하.”

“음. 그래.”

“서둘러 인력을 보충하시죠.”

틀림없이 사상자가 나온다는 데 여율령의 저택을 걸 수 있었다. 심지어 한둘이 아닐 것이다. 골 빈 귀족들은 상상 이상으로 많았다.

“네가 그러자니, 그리하마.”

골 빈 귀족 하니까 또 생각났다.

“아. 그리고 깜박했는데, 요즘 여율령의 저택으로 저에 대한 맞선 요청이 빗발칩니다.”

“이런 육시를 할……!”

여태 들어본 것 중 가장 험한 말이 나왔다. 깜짝 놀라 눈을 땡그랗게 떴다. 멈칫한 무륜이 잠깐 숨을 가다듬었다. 씩씩거리는 숨소리만으로도 그의 분노를 짐작할 수 있었다.

“대체 어느 간덩이 부은 잡것들이 그런 짓을 한단 말이냐.”

“말씀드렸잖습니까. 빗발친다고.”

이미 엎질러진 물. 나는 가감 없이 말을 꺼냈다.

“한두 가문이 아닙니다.”

무륜의 입이 다물렸다. 재차 화를 삭인 그가 ‘역시 정식으로 공표를 해야 하나’ 같은, 의외로 순진한 소리를 했다.

“그들이 제가 폐하와 어떤 사이인지 몰라 그러겠습니까.”

그런 점도 귀엽긴 했지만 지금은 티 내지 않았다. 대신 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마 조만간 폐하께도 비슷한 상소문이 올라올 겁니다.”

무륜의 안색이 일변했다.

황제의 후와 비는 반드시 외국 출신 왕족이나 귀족 중에서 간택한다. 이는 금국의 국법으로 정해져 있다. 압도적인 힘은 두려움의 대상임과 동시에 시기의 대상이기도 한 바, 대륙의 공적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때문에 금국 귀족들은 아무리 높으신 분들이라도 후궁에 줄을 대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이젠 상황이 바뀌었다.

“지한국이 쳐들어왔을 때, 남방 5국은 침묵했죠. 그건 실상 중립이라기보다 지한국의 편을 든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모친의 출신으로 나누었을 때 온조의 황태자, 수백의 2황자, 무진의 3황자가 이미 죽은 상황. 남방의 소국들은 황위 쟁탈전 때 금국을 옹호할 이유를 상실했다. 그보단 지한국의 패도에 숟가락 얹어보겠다는 계산이었을 것이다. 시야가 좁다 못해 없는 수준이다.

“외려 지한국에서 화평의 증거라며 귀족 가문의 여식을 보낼 가능성이 높습니다만…….”

“내겐 너뿐이다.”

“예. 그런 이유로 거절하시겠죠. 그럼 귀족들이 무슨 생각을 하리라 보십니까?”

“…….”

헛된 희망을 품겠지.

무륜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때, 한 무리가 보랑을 가로질러 집무실로 다가왔다. 무예를 익히지 못한 얄팍한 걸음걸이에선 감추지 못한 초조함이 묻어났다.

“폐하.”

밖에서 태감 영감이 방문자들의 신분을 고했다. 대소를 막론한 신료가 열 명은 됐다. 공통점은 다들 나이가 찬 딸이 있다는 거다. 아주 속이 뻔했다.

“들라 해라.”

의외인 건 무륜의 반응이었다. 그가 흔쾌히 알현을 허했다.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무륜을 봤다. 픽 하고 웃은 그가 내 머리칼을 지분거렸다.

“내 다 생각해 둔 바가 있다.”

속삭이는 목소리에 들썩거리던 심내가 단번에 잠잠해졌다. ……그다음에 벌어질 일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말렸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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