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22화 (122/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22화

덤덤한 미구르를 보다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타낙한을 죽인 우리가 밉지 않습니까.”

곧바로 후회했다. 그는 절대 해선 안 될 말이었다. 사과를 위해 입을 여는데 미구르가 한발 빨랐다.

“‘미구르’는 제 이름이기도 하지만, 제가 속한 가문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이 가문은 지한국의 왕을 섬기는 가문이죠.”

저가 섬긴 것은 타낙한이 아니라 지한국의 왕이었노라. 나는 숨겨진 뜻을 바로 이해했다. 동시에 미구르가 진정 아무것도 느낀 바가 없다는 것도 알았다. 나로선 그 냉정함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협상을 끝낸 미구르가 돌아간 후, 무륜은 금성을 정비하고 민심부터 다독였다. 사실 다독일 것도 없었다. 패전이 확실시된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백호와 함께 귀환했다. 그에 대한 지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게다가 막대한 전쟁배상금까지 받아냈으니 더 말해 무엇 할까.

그다음은 인력 충원이었다. 전쟁이 앗아간 것 중 가장 뼈아픈 것이라 무륜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함께한 대소신료를 챙기는 한편, 그들이 과한 권력을 독점하지 못하도록 견제하고,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애썼다. 덕분에 몽휼은 한층 더 바빠졌다.

무륜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붓으로도 쓸 수 있는 검’이었다. 다른 말론 만능 도구라고 하겠다. 명실상부 무륜의 오른팔이며, 무륜이 아직 일개 황자였을 때부터 만인지상이 된 지금까지 내내 그림자로 남아 있었다. 보다 효율적인 운신과 일 처리를 위해서다.

“뭐든 좋으니 자리 하나 주시죠.”

그러니 몽휼이 이런 말을 꺼낸 건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왜.”

몽휼이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웃었다. 희미한 악기가 비쳤다. 무륜이 흠칫했다. 모르긴 몰라도 뭔가 일이 있었음이라.

“이번에 금군이 새로 충원되지 않았습니까.”

“음. 그랬지.”

“그 새파랗게 어린 것들이 제가 부관인 줄 알더군요.”

무륜이 의문을 표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머리가 딱딱하게 굳은 놈도 아니고 몽휼이 고작 그런 일에 화를 낸다고? 몽휼이 이를 갈며 덧붙였다.

“위중혁의.”

아하. 모든 상황을 이해한 무륜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꼭 필요한 관리직이 하나 빈 참이었다.

무륜이 앉은키보다 높이 쌓인 문부를 한 번, 오늘따라 반들거리는 낯짝인 몽휼을 한 번 보았다. 불길함을 느낀 몽휼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무륜이 한발 빨랐다.

“마침 서감(書監) 자리가 하나 비었는데. 잘되었다. 태감 영감, 게 있나.”

“예, 폐하.”

“가서 상이랑 방석 하나 가져와라.”

“예. 분부 받잡겠나이다.”

몽휼은 그 자리에서 무록관의 서감 자리를 받고, 작은 상에 방석까지 하사받았다. 무륜은 싱글거리며 ‘황제와 같은 집무실을 쓰는 것을 영광으로 알라’ 하였다.

나는 보았다. 몽휼이 쥔 붓대에 금이 가는 것을. 내가 미쳤지. 내가 돌았지. 얼굴에 그리 써 붙이고 산처럼 쌓인 문부를 나눠 받은 몽휼에게, 내내 집무실에 함께 있었지만 말 한마디 꺼내지 않던 진해가 처음으로 말을 걸었다.

“일 벗이 하나 늘었군.”

나와 몽휼의 시선이 동시에 진해를 향했다. 그는 구석 자리에 이미 상과 방석을 두고 문부를 처리하는 중이었다. 몽휼은 입을 몇 번 달싹이다 결국 못 참겠는지 흑룡을 불렀다.

“진해 님.”

“오냐.”

“폐하께 뭐 약점 잡힌 거라도 있으십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고대의 흑룡이 집무실에 틀어박혀 문부 따까리나 하고 있을 리가 있나. 나 역시 궁금했으나 묻지 못했던 것이었다. 아닌 척 귀를 기울였다.

진해는 막 처리한 문부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옮기며 담담히 답했다.

“밥값이다.”

“……예?”

“인간들은 남의 집에 머물려면 밥값을 해야 하지 않나. 그래서 일을 달라 했더니 이걸 주었다.”

이번엔 나와 몽휼의 시선이 동시에 무륜에게 향했다. 시선의 강도는 다르지만, 뜻은 같았다. 이분이 정녕 미치셨나. 어디 빌릴 손이 없어서 고양이 손도 아니고 용 손을 빌려. 하지만 무륜은 뻔뻔하고 떳떳했다.

“할 일 달래서 드렸다. 뭐 문제라도 있느냐.”

그야…… 음?

“생각해 보니 딱히 없…… 네요?”

황제가 먼저 말을 꺼냈으면 모를까. 흑룡이 일감을 달래서 줬을 뿐이다. 아무 문제 없었다. 무륜이 와락 구겨진 낯의 몽휼에게 그의 앉은키만큼 쌓인 문부를 턱짓했다.

“알았으면 닥치고 네 몫이나 하거라.”

“…….”

집무실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세 개의 탁상에 앉은 세 사람은 조용히 붓만 놀려 일을 처리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위를 서고 있는 나뿐이었다. 아니, 할 일을 하고 있는 건 맞는데, 뭔가 아무것도 안 하는 기분이랄까.

결국 안절부절못하다 나도 같이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묻자, 무륜이 봄바람 머금은 목소리로 말했다.

“심심해서 그런 것이냐.”

설마 심심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혼자 아무것도 안 하는 것 같아 면구스러워 그렇습니다.”

“넌 그냥 내 옆에 있는 것이면 된다.”

붓을 쥔 몽휼의 손에 재차 힘이 들어간 게 보였다. 두 번째 충동을 간신히 이겨낸 듯했다. 반면 진해는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라면 옆에서 떡을 썰든, 떡을 치든, 그냥 제 할 일을 할 것 같았다.

“정 그러하면 목소리나 들려다오. 네가 말할 때마다 목련 향이 나는 듯하구나.”

무륜이 팔불출 같은 소리를 했다.

속에서 열불이 났는지 주전자째로 물을 들이켜던 몽휼이 마시던 걸 그대로 뿜었다. 무륜이 경악했다. 더러움에 놀란 것이 아니라, 그 앞에 있는 문부 더미 때문이었다. 아차, 한 몽휼이 허우적거리며 손을 뻗었다. 물론 그런다고 엎질러진 물을 어찌할 순 없었다.

하지만 물은 문부에 닿지 않았다. 허공에서 몽글거리며 뭉친 물이 열린 창밖으로 나가더니 화단에 찰박 떨어졌다. 검지를 휘익 움직인 진해가 처음으로 으르렁거렸다.

“감히 내 노동의 결실을 짓밟으려 하다니. 죽고 싶으냐.”

몽휼은 억울했다. 그런 것이 아니라 항명하려는 그의 입을 무륜이 막았다.

“몽휼. 검.”

그는 더 말하지 못하고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아마 집무실 밖에는 대벌레가 한 마리 서게 될 터였다.

집무실 안에는 다시 문부를 넘기는 소리와 침묵만이 남았다. 나는 무륜의 얼굴을 훔쳐보며 시간을 보냈다. 살랑거리는 봄바람이 창을 타고 들어왔다. 바람은 문부의 덜 마른 먹 위에 앉았다가, 방을 한 번 휘돌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날이 좋군요.”

요즘 거의 매일 하는 말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리 말했다. 그래도 좋은 것은 어쩔 수 없음이니.

“나도 좋다.”

무륜이 나를 보며 말했다. 날이 좋다는 건지, 내가 좋다는 건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내가 이 꼴을 보려 그리 힘들게 남은 것이 아니었는데.”

진해가 혀를 찼다. 그러면서도 눈과 손은 문부를 처리했다. 어떤 의미론 존경스러울 정도다.

“그러고 보니 대체 왜 남겠다 하신 겁니까.”

나는 그가 무륜을 구했을 때를 떠올리며 물었다. 그때 진해는 바다를 잠재우기 위해 돌아가야 한다고 했었다. 지금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위금성에서 금성까지 오는 여정 동안 그는 몇 번이고 동해를 왕복했다. 날뛰는 바다를 잠재우기 위함이었다.

그런 귀찮을 짓을 할 바엔 그냥 여태 그래 왔던 것처럼 동해에 있으면 될 텐데. 그런 뜻을 담아 보자 진해가 붓을 탁 내려놨다.

“다 당신 때문 아닙니까.”

“예?”

“제 몸은 아끼지 않고 불안하기 짝이 없는 짓이나 하니, 어디 안심을 할 수 있어야죠. 멀리서 보다 복장 터져 죽는 것보단 귀찮아도 가까이서 지켜보는 것이 나을 것 같았습니다.”

무륜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몸 귀한 줄 모르긴 하지.”

이상한 곳에서 둘의 뜻이 통했다.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은 한 사람과 한 신수는 곧 내 앞에서 나에 대한 말을 했다. 그러면서 문부는 틈 없이 처리하는 점이 무서웠다.

화제는 어쩌다 보니 진해가 다스리는 바다로 넘어갔다. 나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진해는 말이 없던 게 아니었다. 이제까지 원하던 화두가 없었을 뿐이다.

“세상에 찐득거리는 걸 세 개 꼽자면 첫째가 꿀이요, 둘째가 송진이요, 셋째가 바다입니다. 한 번 밖에 나갈라치면 발목 손목 할 것 없이 매달리는데, 제 무게가 얼만 줄은 알고 그리 엉기나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까.”

“울기는 또 어찌 그리 자주 울고, 울음소리는 또 얼마나 큰지. 바다가 우는 소리 들어보셨습니까? 천둥은 댈 것도 못 됩니다!”

“음, 알겠으니까 조금 차분하게-”

“제가 자리를 오래 비우면 생떼를 부리기 시작합니다. 하늘을 향해 펄쩍펄쩍 뛰어오르고 위아래를 뒤집어대면 안에 살던 것들은 어지러워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그 수족(水族)들과 영물들이 누굴 찾아 읍소하겠습니까.”

“…….”

“접니다. 저.”

별생각 없이 듣던 푸념이 끝도 없었다. 게다가 가만히 듣고 있자니 진해가 말하는 대상이 광활하고 위대한 바다인지, 다섯 살짜리 어린애인지 헷갈렸다.

“폐하.”

진해의 하소연은 위중혁의 등장으로 잠시 멈췄다. 무륜이 영 마뜩잖은 어조로 들라 했다. 들어온 위중혁의 왼쪽 눈에는 푸르뎅뎅한 멍이 들어 있었다.

“또 가주 자리를 넘겨 달라 하셨습니까.”

위중혁이 고개를 저었다.

“선 자리를 들고 오셨길래 생각 없다 했습니다.”

불신의 시선을 보냈다. 금국 무관들의 선봉인 여씨 가문의 가주이나, 의외로 비폭력주의자인 위혁강이 고작 그런 이유로 주먹을 날렸을 리 없었다.

“마음을 준 사람이 있다 했습니다.”

잠깐. 설마.

“그 사람이 누군지까지 말씀하셨습니까.”

위중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그때 위중혁의 뒤에서부터 나타난 그림자가 날아 차기를 날렸다. 옆구리를 직격당한 위중혁이 벽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썩어도 준치. 방심했어도 특급 무사. 그는 곧바로 중심을 잡고 바로 서 의문의 습격자를 견제했다. 몽휼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