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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21화 (121/140)

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21화

큰 주인도 작은 주인도 사라지고, 유일한 믿을 구석이었던 암묵단조차 어느 날 홀연히 모습을 감췄다 했다.

일가식솔과 하인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그간 뿌린 것이 많은 여율령이었다. 그를 향한 복수의 칼날이 갈 길을 잃고 남은 자들에게 괜한 화풀이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당연했다.

나는 재차 저택과 사람들을 훑었다.

“그런 것치곤 저택이 멀쩡하구나. 딱히 해를 입은 사람도 없어 보이고.”

“그것은…….”

내가 사라진 후, 저택에 황실의 사람들이 파견되었다고 했다. 그들은 황제의 명이라며 저택을 살뜰히 보살피고 재산도 따로 관리했다. 혹, 관리를 명목으로 꿀꺽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는데 외려 불려 나가더란다. 마치 누군가 돌아올 것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나는 새삼 메는 목을 가다듬으며 그 후의 일을 물었다. 가솔이 일제히 한숨을 쉬었다.

“지한국군이 쳐들어왔습죠.”

“전쟁이 벌어지고 금성이 함락된 후. 그때야말로 진정 끝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상서령의 저택이 아닙니까.”

적의 성을 점령하면 가장 먼저 하는 건 높으신 분들을 성벽에 매달고 그들의 가산을 몰수하는 일이다. 상서령은 전쟁 전에 죽었지만 위명만은 여전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저희는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물론 병사들이 저택 주변에 쫙 깔리고 안까지 들어오긴 했습니다만.”

“뭔가 조심스러웠달까. 뭐 하나 잘못 건드리지 않도록 숨도 못 쉬고 살금살금 움직이는 게 저희 눈에도 보였습니다.”

“…….”

이유를 알 것 같아 뭐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타낙한은. 직접 찾아오지 않았나?”

“그를 어찌 아셨습니까?”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분명 내 방에 묵었겠군.”

동복이 다시 울먹울먹한 눈을 했다.

“왜 그런 표정이냐.”

“귀신 아니라더니. 맞잖습니까.”

“헛소리 치우고 대답이나 하거라.”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긴가민가하면서도 일단 대답은 했다.

“예. 도련님 방에 며칠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돌아갈 때 물건들을 몇 개 가져갔는데, 그게 다였습니다.”

무륜과 같이 오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속으로만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 위씨 가문은 어찌 됐는지 아느냐.”

술술 답하던 동복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가장 거세게 저항한 가문인 만큼 가장 피해가 컸습니다. 많은 사상자가 나왔고, 지한국이 성문을 넘은 후엔 가산이 몰수당했으며, 저택이 전소되었습니다. 그때 안에 남은 자가 없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죠.”

“남은 자가 없었다고?”

“예. 싸울 수 없는 자들은 지한국군이 당도하기 전, 전부 금성을 떠났습니다. 북동 끝자락에 있는 가문의 별장인데, 본래 수련을 위해 쓰던 곳인지라 정확한 위치를 아는 건 위씨 가문 사람들뿐이라 했습니다. 이제 전쟁도 끝났겠다, 게 있던 이들이 되돌아오면 위씨 가문도 다시 부흥하겠죠.”

“무위만 뛰어난 줄 알았더니 앞을 보는 혜안도 못지않군.”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먼 거리를 와서 피곤하다며 방으로 가겠다 하자 식솔과 하인들이 눈치껏 흩어졌다. 동복만이 남아 안내하겠다며 앞장섰다.

“내가 내 방 가는 길도 잊었을까 봐 그러느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저 이리 오랜만에 도련님을 뵈니 옛날 생각도 나고 해서 그렇습니다.”

그가 말한 ‘옛날’이 언제인지 알았다. 이제 막 저택에 와서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던 때. 모든 것이 크고 무서워 보였던, 깡마른 강아지 같았던 때를 말함이었다. 그땐 하루 종일 흑월의 뒤꽁무니만 쫓아다닌 적도 있었다.

‘흑월.’

나는 형제 같다 여겼는데 정작 그는 나를 결코 형제로 보지 않았다. 그가 소중한 만큼 엇갈린 마음이 안타까웠다.

감상에 젖어 있는데 멀리서부터 하인 한 명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금군대장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마음 엇갈린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한숨을 삼키며 가던 걸음을 돌렸다.

“동복아, 너는 가서 내 방 정리 좀 해놓아라. 나는 손님맞이하러 가야겠다.”

“예, 도련님.”

잰걸음으로 하인을 따라가자 익숙한 옆통수가 보였다. 그는 대문 바로 안쪽에 서 있었다. 하인이 객을 밖에 세워 둘 순 없다며 하도 권해 안에 들긴 하였는데, 주인의 허락 없인 한 발도 딛지 않겠다는 의지가 전해졌다.

대체 내 어디에 저 목석이 반할 구석이 있었을까. 새삼 불가사의했다.

“예는 어쩐 일이십니까, 당하.”

내 부름에 위중혁의 고개가 스르륵 나를 향했다. 그는 잠깐 말없이 나를 보기만 했다. 묵직해 보이는 입술이 느리게 열렸다.

“돌아와 보니 집이 사라지고 없더군요.”

그렇다. 위씨 가문의 장원은 전소되었다.

“며칠만 신세 좀 질 수 있겠습니까.”

“……수도에 객잔이 모자라진 않을 터인데. 어찌 이리 걸음 하셨습니까.”

“가솔은 모두 객잔에 들었습니다. 한데 방이 딱 하나 모자라더군요.”

길 가던 어린애도 못 속일 거짓말이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위중혁을 빤히 봤다. 내 시선을 피하면서도 물러나진 않는다.

“안 됩니까?”

절로 ‘허’ 소리가 나왔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속은 모른다더니. 위중혁에게 이리 뻔뻔한 구석이 있을 줄이야.

“안 되는 건 아니지만, 폐하가 무섭지도 않으십니까.”

“충심으로 모셔야 할 주군을 두려워하는 검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어이고, 말이나 못 하면.

“며칠 만입니다.”

어차피 며칠이 되기 전 무륜의 불호령에 쫓겨날 것이라, 속으로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바람보다 빠른 말이 반나절도 되지 않아 황궁에 소식을 전했다. 무륜이 대번에 장포를 휘날리며 쫓아왔다. 여기까진 예상 범위였다. 다만 정말로 듣자마자 달려왔는지 외출복도 아니고, 호위 하나 딸리지 않은 단신이었다.

목젖까지 올라온 잔소리를 누르고 일단 예를 갖췄다.

“오셨습니까, 폐-”

“위중혁! 이 새끼 어디 있어?!”

……무륜은 예법 따위 개나 줬다. 한쪽 눈썹이 위로 치솟았다. 위중혁이야 어찌 되든 알 바 아니었으나, 채신머리없는 무륜을 보자 넘겨줄 생각이 싹 사라졌다.

‘그래도 금국의 지엄한 황제이신데 위엄을 보이진 못하실망정!’

정확히는 앉혀놓고 잔소리를 한바탕 늘어놓은 후에나 내놓을 셈이었다. 그런데 눈앞에 벽이 생긴다 싶더니, 어느새 무륜의 너른 품 안이었다.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위로 들었다. 무륜이 나른하게 웃었다. 아주 나를 녹이려 작정하고 짓는 웃음이었다. 보는 눈이 얼마인데 체통을 지키시란 말이 쏙 들어갔다. 내가 어벙해지자 그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무륜이 고개를 숙여 내 귓가에 입술을 댔다. 그러곤 유혹하듯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랑스러운 내 이화야, 빌어먹을 대벌레는 어디 있느냐?”

* * *

위중혁은 연행되었다. 오랏줄의 끝을 쥔 몽휼이 혀를 쯧쯧 찼다. 위중혁이 진중하게 항의하였으나 무륜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워이. 어서 가자. 워이. 몽휼이 소몰이하듯 위중혁을 끌고 갔다.

위중혁의 훤칠한 이마에 혈관이 도드라졌다. 분노한 그는 오랏줄을 끊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특급 무사인 그의 입장에서 쇠사슬도 아닌 일반 밧줄은 종잇장이나 다름없었다. 몽휼은 때는 이때다 싶었는지 옆에서 낄낄거리며 온갖 말로 성질을 돋웠다.

무륜은 그를 일별하며 나를 부둥켜안고 은근한 손장난을 했다. 그때, 제 갈 길을 가던 몽휼이 멈춰 섰다.

“뭘 자연스럽게 남을 생각을 하십니까. 폐하도 가셔야 합니다.”

무륜은 당황했다.

“나는 예 좀 있다 가마.”

“밀린 일이 얼마며 처리해야 할 문부가 또 얼마인데 그런 안일한 말을 하십니까.”

파리한 낯빛. 시커먼 눈 밑. 흑의 무복. 마치 과중한 업무에 시달린 저승차사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오늘 귀환하였다. 하루 정도는 쉬는 것이 당연하지 않나.”

“전혀 당연하지 않습니다. 전쟁으로 파탄 난 국정을 우습게 보지 마십시오.”

“…….”

무륜은 찍소리도 못하고 그대로 끌려갔다. 나는 안쓰럽게 웃으며 떠나는 그를 배웅했다.

“먼저 가 계시면 집안을 얼른 살핀 후 가겠습니다.”

그리 말한 후에야 비 맞은 강아지 같던 모습이 조금이나마 걷혔다.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후, 나는 저택 구석구석을 거닐었다. 눈이 닿는 곳마다 머물지 않은 기억이 없었다. 안온하고 평온한, 이제 다시 돌아오지 못할 날들. 하나 딱히 우울해지지 않았다. 앞으로의 날들 또한 그보다 아름다울 것을 이미 아는 까닭이었다.

저택 부지에도 봄꽃이 만발했다. 매화는 이미 피었다 지고 하얀 벚꽃이 만개했다. 벚꽃이 지고 나면 그 옆의 배꽃과 사과꽃이 피겠지. 또 그 뒤에는 아카시아가 제 차례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오래 기다린 만큼, 온 저택을 그윽한 향기로 채울 터였다.

“아.”

그러고 보니 저택에 피는 꽃은 모두 흰색이었다. 나는 상서령을 떠올리며 입는 옷도 그렇더니 꽃 취향도 한결같다며 웃었다. 그리움이 꽃처럼 피는 오후였다.

* * *

전후 처리는 꽤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지레 겁먹은 지한국에서 간 보는 것 없이 협조하고 협력한 덕이다.

벚꽃이 지고 사과꽃이 피기 전, 구체적인 휴전 협상안의 논의를 위한 지한국 사절이 금국에 당도했다. 한데 선두에 선 자의 얼굴이 익숙했다. 이름은 잊었으나 타낙한의 최측근이었던 자였다. 미구? 마구? 대충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미구르입니다.”

마치 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그가 말했다. 무감각한 어조였다. 기이할 만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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