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20화
“제 태몽은 백호가 목련 가지를 물어 오는 것이었죠. 과거엔 그저 상서롭고 분에 넘치는 태몽이구나 하였는데, 지금은 그저 우연이라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맞다. 우연이 아니다. 내 친히 네 혼을 네 어미의 태에 넣었다.”
“왜 하필 그분이셨습니까.”
“백호는 중립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문가와 무가의 피가 같이 흐를 것. 위로 형이 둘, 아래로 동생이 둘 있을 것. 그것 말고도 여러 조건이 있는데 그걸 다 충족시키는 것이 너 하나였다.”
어머니가 글줄 읽는 가문의 딸인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무두장이였던 아버지가 무가의 후예였다니. 이건 또 의외였다.
‘하긴. 태백 형님의 자질을 보면 틀림없는 무가의 핏줄이니.’
속으로만 고개를 주억거렸다. 여율령은 가만히 내 말을 기다렸다. 찻잔을 쥔 손가락에 얼핏 힘이 들어가 있었다. 나는 지금이 ‘그 순간’임을 알았다. 여율령이 내내 두려워한 순간. 내가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순간.
팔짱을 낀 채 손가락으로 팔을 두드렸다. 여율령은 나를 백호로 만들고자 했다. 그건 결국 내 죽음이 그에게 필요했다는 뜻이다.
“혹, 독에 대한 것도 다 알면서 연기하셨던 겁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지만, 아니다. 나는 그때 진정으로 놀라고 안타까웠다. 나 자신도 놀랄 만큼.”
찻잔을 놓은 여율령이 양손을 맞잡았다. 닿은 곳이 하얗게 변할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 모습에서 천태백산 꼭대기에서 너는 내 아들이라며 섭선을 부서질 듯 움켜쥐었던 여율령이 겹쳐 보였다.
“나는 본래 네 삶이 다할 때까지 기다렸다 혼을 거두어 백호로 태어나게 하려 하였다. 인간이 천수를 누려봤자 뭐 얼마나 살겠느냐.”
그런데 중간에 내가 독을 맞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월린과 손잡은 타낙한이 분탕질을 치려 했다.
그는 분명 앞날을 읽는 혜안을 가지고 있으나 그는 만 갈래의 조팝나무 가지 중 하나를 움켜쥐는 것과 같은 것이다. 완벽한 통제는 불가능했으리라.
여율령은 어쩔 수 없이 내가 타낙한에게 가도록 종용했다. 그의 곁에서 죽어 침략까지의 시간을…… 아니, 특별한 혼을 가진 백호가 천태백산 정상에 잉태될 시간을 벌도록 했다.
사월린이 풀려나서도 감히 해를 끼칠 생각 따위 하지도 못할, 이 세상의 질서와 평화가 되길 바란 것이다.
“그럼 아버지의 죽음도 그 거대한 계획의 일부였습니까.”
여율령은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는 법칙이 있다. 만물을 태어나게 하고 얽히어서 결국 스러졌다가 다시 또 태어나게 하는 거대한 흐름. 나는 신들조차 함부로 거스르지 못할 그 법칙의 눈을 속인 채 많은 것을 준비했고, 있어선 안 되는 땅에 너무 오래 머물렀다.”
‘너무 오래 머물렀던 게지. 본래 이렇게까지 길게 있을 생각은 없었는데.’
죽여도 죽지 않을 것 같았던 그의 죽음이 비로소 이해가 갔다. 천하의 상선이라도 위대한 법칙까지 거스를 순 없었던 것이다.
여율령의 고해는 그렇게 끝이 났다. 나는 가만히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그가 말한 원망의 의미를 이제 조금 알 것 같았다.
“제가 사월린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라 하셨지요.”
“그랬지.”
“그는 제가 타락할 것이란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저보다 수명이 짧은 인간을 사랑하게 될 운명을 암시한 것이지요.”
그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다.”
그는 내가 자신을 미워하고 원망하게 될 것이라 계속 두려워하고 염려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염려할 만했다. 고난의 별 아래 태어난 사람이 있다면 바로 나였고, 운명에서부터 비극이 점지된 채 세상에 났다.
“저는…….”
일은 이미 벌어졌다. 남은 것은 내 대답뿐이었다.
쿠르릉. 그런데 말을 꺼내기 직전, 하늘에 먹구름이 끼더니 천둥 번개가 쳤다. 뒤이어 땅이 흔들리고 초원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여율령이 안도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말했다.
“누가 널 부르는구나.”
잠깐 머뭇거린 그가 덧붙여 말했다.
“사실 오수에 들었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이 상선이 진짜!
“지금 뭐라 하였습니까.”
황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불쑥 분노가 치솟았다.
“하고픈 일이 하나 있었는데, 네게 사실대로 말하기엔 겁이 났다.”
대체 무엇이? 의문이 생겼지만 차마 묻지 못했다. 아까보다 풀이 죽은 여율령의 표정이 내 말을 막았다. 우르릉. 좁은 세상이 가장자리부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조만간 다시 보자. 대답은 그때 들려주려무나.”
검게 변한 세상에서 눈을 떴다. 눈꺼풀이 들리고,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꿈에서 깬 뒤에도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곧 만나러 오겠다니. 상선이 직접 하계에 내려오는 건 아닐 테고. 분명 이번에도 꿈을 통해 올 것인데.
“……왜 직접 오겠다는 것처럼 말을 하였을까.”
“그게 무슨 소리냐.”
옆에서 자고 있던 무륜이 말했다. 졸음기 하나 없는 눈이 나를 향했다. 새벽 어스름이 그의 이마에 앉아 있었다.
“꿈에 상서령이 찾아왔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멈칫했다. 무륜은 아직 여율령의 정체를 몰랐다.
말하는 걸 잊었을 뿐, 딱히 숨길 까닭이 없어 사실대로 말했다. 자초지종을 들은 무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평소와 같은 무덤덤한 낯이었으나, 나는 그의 염려를 읽었다.
“아비 된 자가 자식에게 무슨 해를 끼치겠습니까. 너무 심려 마소서.”
무륜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길고 마디진 손가락이 내 목덜미를 지분거렸다. 간지러움에 눈을 가늘게 뜨자 그가 나른한 숨을 뱉었다.
“좋구나.”
지금 그가 느끼는 모든 것을 표현한 한마디였다. 절로 웃음이 났다. 나도 그와 꼭 같은 생각이었다.
“예. 참으로 좋습니다.”
* * *
금성에 당도한 후, 무륜은 곧장 황궁으로 향했다. 나는 그 직전에 갈라졌다. 여율령의 저택으로 가려 함이었다. 무륜은 내가 함께 황궁으로 가길 원했으나 고개를 저었다.
“금방 찾아뵐 테니 먼저 가서 제 자리를 마련해 주십시오. 논공행상과 함께 체계도 정비하셔야지 않겠습니까.”
위사장 자리에 있던 자가 갑자기 밀려나면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는바. 병부로 빼서 승진이라도 시켜주지 않으면 납득하지 못할 것이다.
“만들어 둘 것 없다. 네 자리는 그때부터 그대로니.”
“……설마 계속 위사장 자리가 공석이었던 겁니까.”
“내 치세에 두 위사장은 없다.”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위사라 함은 황제의 바로 지척을 지키는 자다. 황제가 후사를 생산할 때도 드리운 천개의 옆에 서는 자이니 더 말해 무엇 할까.
그런 위사들을 통솔하고, 황제의 가장 가까운 곳을 지키며, 유사시엔 몸을 던져 방패 역할을 수행하는 것. 그것이 황제의 위사장이다. 황제의 여벌 목숨이라는, 잔혹하면서도 영예로운 이명이 있는 자리이기도 했다.
한데 그걸 공석으로 두시다니…….
“무슨 생각인지 여쭙고 싶지만 이미 알 것 같으니 관두겠습니다.”
“현명하구나. 역시 내 정인이다.”
말이나 못 하면.
무륜을 배웅하고 여율령의 저택으로 향했다. 수도의 길거리가 익숙했다. 그 익숙함에 기분이 싱숭생숭해졌다. 걸으며 많은 생각을 했다. 저택은 과연 어떨까. 그곳에 있던 익숙한 이들은 어찌 됐을까. 만약 남아 있다면, 되돌아온 나를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까.
“…….”
첫마디가 욕일지도 모른다. 저들을 버리고 어딜 갔냐며, 원망의 말을 할 것도 염두에 두었다. 지한국 치세에 있었던 수년. 수도에 남은 자들이 어떤 고초를 겪었을지 충분히 가늠이 가는 까닭이다.
갈수록 늘어지는 걸음을 다잡아 여율령의 사저에 당도했다.
5년 만에 돌아온 대저택은 변한 것이 없었다. 저택 자체는 물론이거니와, 일가식솔에 마당을 쓰는 하인까지 그대로였다. 석상처럼 굳은 문지기들의 어깨를 한 번씩 두드린 후 대문을 넘자, 흰자위가 보일 만큼 휘둥그레 뜨인 눈들이 죄 나를 향했다.
“다들 오랜만이구나.”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하자 놀란 얼굴들이 이젠 숫제 귀신을 보는 것처럼 변했다. 순간 불길함을 느꼈다. 설마 정말 귀신인 줄 아는 것인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대낮인데 설마.
“……귀신입니까?”
설마는 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의 뒤통수를 쳤다. 신수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뜻하지 않은 대답에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하긴 죽었다는 사람이 멀쩡히 걸어 들어왔는데 저런 말이 나오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렇게 자위하며 질문한 하인을 봤다. 그는 동복이었다. 처음 여율령의 저택에 왔을 무렵 내가 머물던 별관의 바깥 청소를 담당했지만, 곧 내 성장에 맞춰 곁붙이 하인이 됐었다. 그런 녀석이 저리 물으니 확실히 섭섭하긴 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면구스러워진 건 외려 내 쪽이었다.
“귀신이라도 좋습니다. 정말 도련님이 맞습니까.”
귀신이라도 좋으니 제발 내가 맞다 해달라, 동복이는 그리 말하며 울먹였다. 섭섭함이 훌훌 날아갔다. 저택으로 오는 내내 했던 고민들이 모다 쓸모없었음을 깨달았다.
“귀신은 아니지만 내가 맞다.”
나는 머쓱하게 웃었다.
“오랜만이구나, 동복아.”
“도련님!”
그것이 시작이었다. 곧 온 저택에 ‘도련님’ 소리가 메아리쳤다.
“도련님? 도련님이라고?!”
“아이고, 도련님!”
“으허허엉.”
모여든 식솔이 나를 둘러쌌다. 그들을 보듬어 달래고 이야기를 듣는데 하루 반나절이 모자랐다.
“그리 아무 말씀도 없이 가시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떠날 때 저희 생각이나 하셨습니까?”
“늦은 소식으로 도련님의 죽음을 전해 들은 심정이 어떠했는지 도련님은 절대 모르십니다. 암요, 암요.”
정확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잔소리였다. 잔소리 뒤에는 하소연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