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19화
외전1 호: 접지몽(虎: 接之夢)
*범 호, 사귈 접, 갈 지, 꿈 몽
눈을 떠보니 몽중이었다. 무릎까지 오는 풀이 바람을 따라 누웠다. 낮은 언덕 중간에는 거대한 벚나무가 우뚝 서 있었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은 하늘하늘 떨어져 내렸지만 결코 나무 아래를 벗어나지 않았다.
이미 와본 적이 있는 장소다. 나는 자연스레 나무를 향해 걸었다.
나무 아래에는 예상대로 선객이 있었다. 그런데 하나가 아닌 둘이라 반사적으로 몸을 바짝 낮추고 인기척을 감췄다.
스으윽. 풀 가장자리에 숨어 동향을 살폈다. 가장 먼저 보인 건 하얀 뒤통수였다. 폭포수처럼 길게 드리운 은백발 너머로 무표정한 여율령의 얼굴이 얼핏 보였다. 시선이 마주쳤다. 침묵하고 있으라는 무언의 뜻이 전해졌다.
“당신이 한 짓이지요.”
한풍이 서린 목소리가 낯설었다. 은백발이 냉기를 뿜어내며 여율령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어찌하여 그의 혼이 백호의 안에 들어가 있는 겁니까.”
“내가 넣었으니 들어가 있겠지.”
“하.”
은백발이 코웃음을 쳤다.
“네. 그래요. 그렇지 않을까 짐작은 했습니다. 인간이라면 껌뻑 죽고 편애도 심한 당신이, 아끼는 인간의 혼을 그 혹한의 땅에 던져둘 리 없는데.”
“착각을 하였구나. 내가 그를 아낀 것은 순전히 너 때문이다.”
은백발이 멈칫했다.
“네가 사랑한 아이라 내게도 특별하였던 게지. 네 말처럼 나는 편애가 심하거든.”
굳은 뒤통수만으로도 지금 은백발이 어떤 표정일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말을 잃은 그를 앞에 두고 여율령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너희를 자식처럼 아꼈다. 그런 내가 죽은 천태백호의 시신을 보듬어 산맥을 쌓고, 결계를 세우고, 그 안에 너를 가두었지. 그때의 내 심정을 너는 짐작할 수 있겠느냐?”
“……이제 와 사죄를 바라십니까.”
“아니. 네 진심 어린 사죄는 이미 오래전에 보았다. 그 아이의 혼을 가져와 네 앞에 내보였던 그때 말이다.”
숨을 죽인 채 귀를 기울였다. 저 은백발이 누군지 모를 수가 없었다. 여율령은 조각난 천을 잇듯 이야기를 기워갔다.
수백 년 전 연 대륙이 만들어진 직후, 미쳐 날뛰던 그의 앞에 여율령이 나타났다. 그는 사월린이 사랑한 인간의 혼을 내보였다. 소멸 외엔 멈출 방법이 없을 것 같던 기린이 그대로 무릎 꿇고 저가 잘못했다, 바닥에 이마를 찧어가며 빌었다.
딱히 알고 싶지 않았던 과거사가 귀를 파고들었다.
의식의 흐름이 나를 자연스레 사월린의 입장으로 이끌었다. 내가 어찌 대적할 수 없는 존재의 손에 무륜의 혼이 잡혀 있고, 나는 그 존재에게 잘못한 것이 있다면…….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이해하고 싶지 않은데 이해가 갔다. 자존심이고 뭐고 없었을 것이다. 뇌가 마비된 것처럼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으리라.
“예. 저도 기억이 납니다. 그는 죄가 없다. 모다 내가 벌인 일이니 제발 나를 벌하시라. 목에서 피가 나도록 빌었죠.”
사월린의 발치에서부터 풀들이 하얗게 얼어붙었다. 녹지가 빙판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얼음의 영역은 사방으로 뻗치다, 내 바로 앞에서 멎었다.
“그걸 깔끔히 무시하고 그의 혼을 북방에 던진 것 또한, 아주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제 보니 무형의 힘이 서리와 얼음이 번지는 걸 막고 있었다. 여율령의 힘이었다. 사월린이 으르렁거렸다. 공기가 진동하며 칼날 같은 살기가 살갗을 스쳤다.
“그게 거짓인 줄도 모르고. 수백 년을 허송세월하였군요.”
“허송세월이 아니라 네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받은 것이지.”
사월린은 더 말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몸을 옆으로 틀자 서늘한 옆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훔쳐보던 걸 멈추고 아예 수풀 밑으로 납작 엎드렸다. 꿈인데도 심장 소리가 크게 울렸다. 여율령이 말했다.
“만나러 갈 테냐.”
“당연한 것 아닙니까.”
“만나서 뭘 어찌할 것이냐.”
“과거의 기억을 되살릴 겁니다.”
“되살릴 기억이 어디 있다더냐.”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잠깐 침묵한 사월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너무 긴 시간이 흘렀어. 수백 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연약한 인간의 자아는 깎이고 마모되어 그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그는 이미 네가 알던 그 아이가 아니야.”
콰앙! 굉음과 함께 지축이 흔들렸다. 풀들이 성난 바다처럼 물결쳤다.
“그의 혼입니다.”
“그 혼으로 만든 전혀 다른 피조물이지. 네가 무슨 짓을 해도, 네가 기억하는 그 아이와는 다시 만날 수 없다.”
칼보다 잔인한 말이었다. 듣고 있던 내 몸이 굳을 만큼 끔찍한 말이기도 했다. 그를 직접 들은 사월린은 어떤 심경일까. 감히 가늠해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여율령이 한숨을 쉬었다. 그가 지치고 지친 사람처럼 말을 이었다.
“그의 혼은 널 북방에 가둔 이후 줄곧 내가 품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꺼내보니 이미 그 아이랄 것은 다 사라지고 없더구나. 고의는 아니었다. 그저 인간의 나약함을 잠시 잊은 내 불찰이었지.”
그걸 지금 말이라고.
생각한 바를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여율령의 어이없는 실책보단 새로이 알게 된 진실이 너무 의외고 무거워 당장 내 마음을 추스르기에 급급했다.
내가 바로…… 그 나무꾼이었다. 여율령의 말을 들어보면 동일시할 필요는 없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아예 관련 없다고도 할 수 없다. 복잡한 이야기였다.
“상관없습니다.”
흠칫했다. 틀림없는 사월린의 목소리인데, 그답지 않은 후련함을 담고 있었다.
“내 말을 믿지 않는 것이냐.”
“믿습니다.”
“그럼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굳이 찾아가 분탕질을 쳐야 속이 후련하겠더냐.”
“제 말을 이해 못 하셨군요. 제 마음은 그렇게 편협하고 하찮은 것이 아닙니다.”
이번엔 여율령이 입을 다물었다. 나는, 어째서일까. 사월린의 뜻을 어렴풋이 이해했다.
“매 순간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이런 시리고 아픈 땅에 연약한 인간의 혼을 던져뒀을 리 없다고.”
‘피를 얼어붙게 하는 칼바람. 피부부터 뼛속까지 스며드는 추위. 빙설기린인 나도 이리 한기가 드는데, 약하고 여린 너는 얼마나 추울 것이냐.’
“또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망설을 즐기지 않으니, 정말로 이 혹한의 땅 어딘가에 그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진실이야 어쨌든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었습니다.”
‘있어선 아니 된다. 예 있어선 아니 돼. 제발 없어라. 제발 예 없어라.’
“긴 세월 그를 찾아 헤맨 것이, 쓸모없는 일이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
‘내 이 헤맴이 다 헛짓이어라. 이리 간절히 너를 찾는 것이 어리석은 죄인의 무의미한 행동이어라.’
“그래서 지금은 다행이라는 안도뿐입니다.”
사월린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전장에서 부딪혔을 때만 해도 상종을 못 할 자라 여겼는데. 마음이 영 먹먹했다.
“그가 북방에 없다면 그걸로 됐습니다.”
“되었다면서 왜 굳이 만나려는 것이냐.”
“보고 싶으니까요.”
“내 분명-”
“오해 마십시오.”
사월린이 타박하려는 여율령의 말을 잘랐다.
“말 그대로 보고 싶을 뿐입니다. 되살릴 기억도 없고, 절 영원히 기억하지 못한대도 괜찮습니다. 분탕질 칠 생각도 없습니다. 그의 행복에 비하면 제 마음 같은 건 길가의 돌멩이보다 하찮습니다.”
아까부터 흔들리던 심장이 거칠게 요동쳤다. 마음이 아니라 혼이 요동치는 기분이었다. 눈을 질끈 감으며 손으로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꿈은 혼이 강해지는 곳이라 하였다. 그런 혼에 새겨진 기억이 내게 말을 거는 듯했다.
“미련한 것.”
여율령이 한탄처럼 말했다. 웃음소리가 들렸다. 믿을 수가 없어 눈을 크게 떴다. 여율령은 아니니 틀림없이 사월린인데. 그 사월린이 웃는다고?
“압니다. 제가 현명하였다면 애당초 인간을 사랑하진 않았겠지요.”
사부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리를 벗어난 사월린이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곳을 떠나려는 것이다. 묘한 초조함이 속을 갉았다. 이젠 그것이 내 것인지, 내 혼이 품은 나무꾼의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사월린.”
여율령의 부름에 사월린이 걸음을 멈췄다. 뭐, 들어는 주겠다는 기색이 여기까지 전해졌다.
“네가 미처 부수지 못한 남은 결계석의 수명이 방금 다하였다.”
“…….”
“형기는 끝났다.”
결계가 사라지고 사월린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것의 의미가 바로 와 닿지 않았다.
사월린은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사박사박 초원을 가로질러 사라졌다. 발소리가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됐을 때, 슬쩍 고개를 들었다. 하얀 장포가 바로 앞에 있었다.
“예서 무얼 하는 것이냐.”
“그를 몰라서 물으십니까.”
볼멘소리를 뱉자 여율령이 웃었다.
“당연히 알지. 농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것인데 그는 변한 것이 없었다. 외려 변한 건 내 쪽이었다. 너무 많은 것이 뒤섞여 이제 그를 어찌 봐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쓸데없는 고민을 하는구나. 섞여봤자 너인 것을.”
생각해 보니 진해 앞에서도 비슷한 고민을 했다가 비슷한 답을 들었다. 멋쩍음을 감추며 일어섰다.
그를 따라 당도한 나무 밑 탁자에는 두 개의 찻잔이 놓여 있었다.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찻잔이 누구의 것인지 물을 필요도 없다. 식은 찻물 위로 둥둥 뜬 벚꽃을 보는데 여율령이 불쑥 말을 꺼냈다.
“너밖에 줄 수 없지만, 내가 멋대로 가져갈 수도 없고, 네가 원한다 해서 줄 수 있는 것도 아닌 것.”
고개를 들었다. 여율령은 생전 처음 보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는 평화였다.”
가장 또렷한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여율령과 두려움. 이토록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합이 또 있을까.
“정확히는 네가 이끌어낼 바로 지금의 상황이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