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무사는 떠나야 하고 황제는 몰라야 한다 118화
콰득. 콰르륵!
무슨 짓을 해도 부서지지 않던 얼음이 단박에 깨졌다. 그 사이로 빛나는 배 한 척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체에선 오묘하고 은은한 빛이 흘렀다. 돛은 비단이었고, 밧줄은 전부 금이었으며, 본래 나무여야 할 곳은 전부 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보기 전엔 몰랐으되, 일단 보고 나자 바로 떠올랐다. 위금강이 아직 주문강이던 시절, ‘상선 희 견차처’란 말의 기원이 된 나무꾼의 일화. 하늘기둥의 일부로 만들었으며 나무꾼이 화살에 맞아 죽자 그대로 강에 가라앉았다던 바로 그 배였다.
전승에는 조각배라 했는데 실제는 아주 거대하고 휘황찬란했다.
“어찌…….”
사월린의 목소리가 속절없이 떨렸다.
“어찌 저것이.”
저렇게 동요하는 모습은 처음이라 저 배가 확실히 그 배구나, 하였다. 사월린이 사랑했고 그 때문에 상선마저 굽어보았던, 불쌍한 나무꾼의 배.
“쿨럭. 쿨럭, 헉.”
그 설화의 갑판에 무륜이 있었다.
“무륜!”
얼음을 박차고 뛰어오르며 다시 인간으로 돌아왔다. 온통 젖은 그의 몸에 내 기운을 불어넣었다. 얼마나 물을 많이 먹었는지 그는 한참을 기침하며 물을 토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의 등을 두드렸다.
“……산 것인가.”
“예, 사셨습니다.”
괜찮구나. 괜찮은 것이구나. 그의 무사를 확인하자 손끝에서부터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내가 방금 경험할 뻔한 게 무엇인지 비로소 실감이 났다.
“잘못했습니다.”
난데없는 내 사과에 무륜이 멈칫했다.
“방금 그건 불가항력이었잖느냐. 상대가 신수면 자연재해와 같-”
“어찌 견디셨습니까.”
입술을 짓씹었다. 오만 가지 감정이 흘러넘쳤다.
“제가 없는 시간을 어찌 사셨습니까. 저였으면 못했습니다.”
그제야 내가 하고자 한 말을 눈치챈 무륜이 입을 다물었다. 그가 젖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나를 보는 시선이 전에 없이 냉정했다. 그가 나를 이리 차게 본 적이 과연 있었을까 싶다.
“이제라도 알았으면 됐다. 다시는, 두 번 다신 그리 떠나지 마라.”
“그리하겠습니다. 그리할 것입니다.”
“그래. 나는 그 말 한마디면 족하다.”
부드럽게 웃은 무륜의 어깨로 물에 젖은 머리가 흘러내리며 동곳이 떨어졌다. 끝이 닳아 이제 뭉툭해져 버린 그것은 내가 선물했던 목련 동곳이었다.
무륜이 떨어지는 동곳을 잡아챘다. 그 손을 감싸 쥐고 손등에 입을 맞췄다. 완벽하게 정신을 차린 무륜이 내력을 운용했다. 젖은 몸이 빠르게 말랐다. 하얗게 올라오는 김 사이로 그가 내게 입을 맞췄다.
쿵! 동시에 아래쪽에서 큰 소리가 났다.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우리 둘만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아직도 턱을 떨어뜨린 채 갑자기 솟구친 신묘한 배를 보고 있었지만 흑월은 달랐다. 홀린 듯 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사월린에게 달려든 그가 이번에야말로 머리를 잘랐다.
얼음 위에 떨어진 머리는 여전히 나를 응시했다. 사월린의 낯이 일그러졌다. 그 일그러짐이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뜯으면 피를 볼 것이 분명한 거스러미 같았다.
‘너였구나.’
잘린 목이 입 모양만으로 말했다.
‘이토록 분명했던 것을 어찌 몰랐을까.’
회한에 가득한 머리가 녹아내렸다. 뒤이어 몇 조각 부족한 몸도 검게 녹아 사라졌다. 나와 무륜은 사월린이 들어 있던 타낙한의 시신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끝났다. 정말로 모든 것이 끝맺음 된 것을 뒤늦게 실감했다.
우와아아! 병사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몽휼은 다친 이들이 있는지 장수들과 함께 확인하러 돌아다녔고, 위중혁은 위수혁과 함께 군을 재정비했다.
흑월만이 사월린의 목을 베었던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나를 올려다봤다. 여전히 무표정했고 무감각했다. 그것이 겉으로만 그렇게 보일 뿐임을 이제는 안다. 사월린의 폭풍이 검붉은 색이었다면 흑월의 것은 청회색이었다. 시리고 어둡고 창백한 색.
옆에서 무륜이 내 손을 잡아왔다.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을 때, 머릿속으로 음울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사월린의 말이 옳습니다.
“……!”
-길어져 봤자 어차피 인간의 명(命). 신수의 입장에서 보면 찰나와 같지요. 그러니 그 정도는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 말에 다시 앞을 봤을 때, 흑월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멈칫하여 반사적으로 움직이는 나를 무륜이 붙들었다.
“약속한 것이 바로 방금 전이다.”
책망하는 목소리였다. 나는 더 움직이지 못했다. 움직일 수 없었다.
“압니다.”
눈을 꾹 감았다 떴다.
흑월이 좋다. 그러나 내 마음과 흑월의 마음은 그 결이 전혀 달랐다. 받아줄 수 없다면 애매하게 굴지 말아야지. 그리 생각하면서도 아릿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핏줄 외에 형제라고 부를 사람이 있다면 그는 흑월 하나였다.
무륜이 나를 뒤에서부터 껴안았다. 흐트러진 머리칼이 목덜미를 간질였다. 내 우울함을 달래려는 듯 그가 내 어깨에 입술을 문댔다. 그 머리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눈이 그치고 먹장구름이 가셨다. 우중충한 날씨도 사월린의 수작이었다. 새파란 하늘이 머리 위에 드리웠다.
“폐하.”
“그래.”
“이번엔 분명 폐하보다 제가 더 오래 살 겁니다.”
맞닿은 무륜의 몸이 움칠했다.
“폐하께선 다녀올 테니 저더러 기다리라 했지요.”
“그랬지.”
“생각해 보니 그는 싫습니다.”
“뭐?”
당황한 그가 큰 소리로 되물었다. 나는 놀람으로 벌어진 무륜의 입에 입술을 문댔다. 멈칫한 그는 놀란 와중에도 순순히 혀를 내어줬다.
짧은 접문 끝에 떨어진 무륜을 꽉 움켜쥐었다. 언제고 스러질 연약한 인간의 몸임을 절감하고 또 절감하면서도 결코 절망하진 않았다.
“폐하를 기다리는 한편, 찾아 나설 겁니다. 계절이 바뀌고 시간이 흐르면 맞아야 할 그날이 오겠지요. 그럼 저는 이곳을 떠나 다시 태어날 폐하께 갈 겁니다. 기억 없는 당신께서 다시 절 보아주실 때까지 곁을 지키며 귓가에 연정을 속삭일 겁니다.”
“염라대왕 바짓가랑이를 잡아서라도 한시바삐 돌아와야겠구나.”
무륜이 농을 했다. 나는 말갛게 웃었다.
정리가 끝났는지 아래쪽에서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몽휼이었다. 그냥 봐도 신묘한 배에 발 딛기가 어려웠는지 애탄 부름만 이어졌다.
무륜과 함께 아래로 내려섰다. 얼음은 배가 딱 솟구친 자리만 부서졌고 다른 곳은 여전히 단단했다. 사월린의 힘이 깃든 탓이다. 덕분에 많은 목숨을 살렸다. 모순적이고 역설적이었다.
묻고 싶은 말이 한가득인 몽휼을 모른 척하며 배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옥배는 연기가 되어 내 손목에 휘감겼다. 얇은 옥 팔찌엔 천석(天石)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배가 사라지자 부서진 틈새는 기다렸다는 듯 다시 메워졌다.
사상자는 전무했다. 강에 빠졌던 건 애당초 무륜 하나였다.
마저 강을 건넜다. 날은 이전에 비할 바 없이 화창했다. 군세가 금성에 당도하는 날까지 눈도 비도 오지 않았다.
돌아가는 길을 따라 하루하루 봄이 왔다. 지나는 산과 들과 길은 어느새 온갖 꽃으로 만발했다. 바람결에 소식을 접한 백성들이 황제의 귀로를 따라 하얀 천이 묶인 꽃가지를 흔들어 보였다.
중간부턴 마차를 탔다. 배였다가 팔찌가 됐던 하늘비석의 조각은, 마차를 타면 좋겠다 생각한 순간 마차가 되었다. 나는 무륜과 단둘이 마차에 올랐다.
무륜이 헛기침을 했다.
“봄이 와서 꽃이 핀 것이 아니라, 꽃이 피어 봄이라. 나와 봄이나 만들어볼 테냐?”
나는 장난기가 동했다.
“글쎄요. 영 동하지 않는군요.”
당황한 무륜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하여간 참으로 귀여운 지존이시다. 소리 내어 웃곤 손으로 내 옷자락을 벌려 보였다. 처음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그럭저럭 할 만했고, 세 번부턴 쉬웠다.
무륜의 시선이 옷 사이로 드러난 맨가슴에 꽂혔다. 그가 뭘 보고 있는지 시선으로 알 수 있었다. 기대감에 도톰하게 솟은 유실이다.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살살 농을 쳤다.
“전 선비 같은 말보다 적나라한 진심이 더 좋습니다. 저를 어찌하고 싶으신지 솔직하게 말씀하시면, 이 몸을 열어드리리다.”
“…….”
무륜과 단둘이 오른 마차 안에선 진한 살꽃이 피었다.
그렇게 봄. 목련이 피는 봄이었다.
* * *
그 해는 내가 네 살이 되던 해였다. 어떤 의미론 스물여섯 살이 되는 해이기도 했다.
나는 생각도 판단도 하지 않는 검이었고, 누군가의 화톳불이었으며, 세상에 둘도 없는 목련이기도 했다.
목련은 그토록 찬란한 날에 피어나 뒤돌아보지 않는 연심을 품었다. 당장 앞에 있는 그가 애틋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전부를 줘도 아깝지 않아, 그렇게 했다. 죽음에 후회는 없다. 그로 인해 그가 받은 상처와 상실이 안타까울 뿐.
“이화야.”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먹먹하고 먼 소리가 나를 불렀다.
“이화야.”
두 번째 부름은 조금 나았다. 수마를 떨쳐내며 눈을 끔벅였다. 혼몽한 와중에도 ‘예, 폐하’ 하고 웅얼웅얼 답했다. 낮은 웃음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내 이마와 입술에 연이어 입을 맞춘 그가 마차의 창을 열었다. 시야 가득 말 궁둥이가 들어찼다. 무륜이 혀를 찼다.
“너는 어째 말까지 눈치가 없누.”
위중혁이 묵묵히 말 머리를 옆으로 틀었다. 그제야 앞이 보였다. 옥으로 만들어진 마차는 말도 없이 길을 가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떴다. 저 멀리 익숙한 성벽의 끄트머리가 보였다. 집이었다.
“돌아왔군요.”
“그래.”
그와 함께 한 날들은 결코 편하지 않았다. 아프고, 힘들고, 한 걸음 내딛기가 두려운 가시밭길이었다. 하지만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내 생애 다시없을 만큼 찬란한 날들이었다. 그래서 우리의 마지막 역시 이토록 아름다울 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본편 완결>